< -- 27 회: 미쏠로지 계획. -- >
하얗게 칠해진 벽이 깔끔하다는 느낌을 주는 방, 창에달린 얇은 커튼은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대낮이라 불꺼진 형광등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왠지 익숙한 느낌을 주는 방이었다.
'병원이군.'
이세계에 처음 실려왔을때를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격통이 전신을 내달렸다.
"끄응."
참지 못하고 입술 사이로 신음이 베어나왔다. 그 순간 환상현은 쓰러지기 직전의 상황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다크 블레이드.
밤의 여신인 어머니의 힘을 물려받은 상현은 반신이던 시절 어둠 속에서 정수를 뽑아내 검으로 만드는 기술을 터득했다. 어둠 그 자체가 검이자 방패였다.
덕분에 그는 무기에 구애받지 않았고 전쟁에 나서서는 어둠으로 신조차 베어냈다.
'무리였나보네.'
이제 한 번쯤은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었다. 전신에 알맞게 분배되던 마력의 흐름이 교통체증이라도 걸린듯 불규칙하게 변해 있었다.
내상을 입었다는 증거였다.
그래도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쓰러졌을지언정 다크 블레이드라면 이 세계의 디멘션 홀에서 튀어나오는 괴수에게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리라. 일격필살의 의지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팔뚝에 꽂혀져 있는 주사바늘을 보며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고 있을때 노크소리가 울리며 두 사람이 들어왔다. 둘 다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한사람은 방금 전까지 공격을 주고 받던 백종현이었고 다른 한사람은 자신들의 던전 막공 담당검사관(본래 검사관은 던전마다 다르기에 담당검사관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인 정석영이었다.
"안녕하세요."
쾌활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자 백종현은 골때리겠단 표정을 지었고 정석영은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종일 편히 주무셨습니까?"
"아, 설마 날짜가 바뀌었다는...?"
"꼬박 2일을 내리 누워있었지."
백종현의 말에 상현은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 연락도 없이 2일이나 사라져 있었다면 자신들의 팀원, 특히나 재후가 무척 걱정을 하고 있을 터였다.
"상현님의 막공팀에는 따로 연락을 넣어뒀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라고 하셨나요?"
"국가에서 주최하는 신인상 유망주 후보에 뽑혀서 특별 행사에 단독 참가하게 됐다고 둘러댔더니 다들 축하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가 말하는 신인상이란 것은 매년 국가에서 뽑는 그 해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신참 능력자에게 상장과 상금을 수여하는 행사를 말했다.
하지만 행사는 12월 달에 열리는데 지금은 한창 더울 때인 8월이 아닌가, 변명거리로는 적절치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는 어딘가요."
"궁금하신게 많겠죠. 여기는 국군소속 특수능력자 병원입니다. D.SWAT처럼 국가 소속의 능력자분들은 대수술이 필요하시게 되면 이곳에 입원도 하시고 그런 곳입니다."
"아하."
정석영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상현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물었다. 자신이 굳이 수술이 필요할 정도로 이곳에 와야되는 인물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제가 왜 여기에...?"
"일단 내가 이야기해 주지."
백종현이 나서서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았다. 그는 2일 전의 시간을 떠올리며 상현에게 그날 자신의 눈에 비친 상황을 최대한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상현의 검 끝에 모인 어둠이 폭발하며 천지를 뒤흔들었다. 뒤흔들었다는 표현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작은 지진이 일어났으며 검끝이 향한 자리로는 새로운 절벽이 만들어졌을 정도.
일부러 상현이 검끝을 자신에게서 돌렸으니 망정이지 직격했다면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무서운 공격이었으며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공격이었다.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리고 있을 때 상현의 몸이 스르륵 넘어지며 쓰러졌다. 정신을 차린 백종현은 그에게 달려갔다.
몸이 불덩이였다. 이런 큰 기술을 인간의 몸으로 펼친다는 것도 말이 안됐지만 끝까지 헤헤 웃고 있었다면 백종현은 상현을 인간 취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종현은 상현을 등에 업고 내달릴 준비를 했다. 체온이 너무 높아지면 뇌에 손상을 줄 수 있었다. 능력자라 다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위험한건 마찬가지였다.
차까지 전속력으로 달리려는 찰나 이곳에서는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3대의 군용헬기가 바로 위까지 오더니 밧줄을 내렸고 검은 전투복을 입은 능력자들이 레펠을 타며 수직 낙하했다. 지상에 내려선 인원은 열 명 이상, 곧바로 총을 들어 상현을 업고 있는 백종현을 포위했다.
"뭐야 이거, 이러면 완전 나가린데."
손들라는 군인들의 명령에 백종현은 조심스럽게 상현을 내려놓고 손을 들었다. 이유를 짐작할 순 없지만 싸우는 것은 곤란했다. 총을 든 일반 군인이라면 제압할 수 있겠지만 총을 든 능력자라면 힘들었다.
지금은 상현과의 전투를 하느라 힘도 많이 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대항하는 것은 진즉 포기한 그는 거친 헬기소리를 뚫기 위해 목청을 높여 그들에게 상현이 다쳤다고 이야기를 전달했다.
지상에 내려와 참상을 확인한 정석영은 혀를 내둘렀다. 방금전까지 없던 거대한 상처가 산을 할퀴고 있었다. 헬기에서 전체 모습을 직접 본 충격은 백종현이 받은 것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6급 괴수가 나타나서 지랄을 떨어도 이런 상처가 날지 의문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일대의 마력을 측정한 정석영은 몸을 움찔했다. 디멘션 홀에서 나타난 괴수가 일대의 마력을 높이는 것처럼 고레벨 능력자들끼리 전투를 벌여도 상당한 양의 마력 흔적이 남았다.
그러나 측정된 마력 흔적은 상당하다고 표현하기엔 너무 강했다.
'100만...이라고?'
5급 괴수의 잔해 흔적이 2~3만대, 6급 괴수가 10만 이상 대의 흔적을 남기는 것을 생각하면 상식 이상의 수치였다.
비공식 최고 기록은 미국의 10레벨 진공능력자 에딕손이 기록했다는 30만K. 무려 그 세 배를 넘긴 수치였다.
침을 꿀꺽 삼키며 정석영은 정중한 태도로 백종현에게 함께 가줄 것을 부탁했다. 어차피 그들은 이제 국가와 교섭을 하게 될 신분, 괜히 악감정을 남겨봐야 서로 좋을게 없었다.
백종현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빨리 상현을 병원으로 데려가야 했으니 헬기를 이용할 수 있다면 더 좋을 순 없었다.
그렇게 서로 의견을 합의한 그들은 헬기에 몸을 싣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진동에 깜짝놀란 산 아래쪽 주민들이 난리를 피우며 기자와 능력자들이 산중턱에 오른 것은 그로부터 반나절이 지난 뒤였다.
"덕분에 매스컴이 조금 시끄러워졌습니다. 처음에는 미리 알아채지 못한 디멘션홀의 출현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능력자들이 그 상처가 싸움의 흔적이라는 사실을 눈치챘으니까요. 그곳에 사람이 살게끔 만들어진 오두막도 있었으니 빼도 박도 못하죠."
"그게 문제가...되나요?"
"됩니다. 반나절이 지나고 그 자리에서 측정된 마력잔재는 10만. 10만이라고 해도 8레벨 능력자는 뿜기 힘든 수치입니다. 결국 누군가 모르는 9레벨이 한국에 나타났다는 이야긴데, 아시겠지만 9레벨 능력자조차 한국에 세 명 밖에 없죠. 당연히 시끄러울 수 밖에요."
9레벨이란 것은 현재 팽팽하게 당겨져 균형을 이루고 있는 대기업 정규팀간의 힘의 판도를 완전히 무너트릴 수 있는 존재, 얼마전에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8레벨 염력 능력자가 화제에 올랐으니 상현의 존재가 알려진다면 그에 비할 수 없는 파도가 일어날 터였다.
정석영의 말을 듣고 침묵하던 상현이 말문을 연 것은 시간이 조금 흐른 뒤였다.
"근데 저 왜 여기에 와있는거죠?"
굳이 치료를 목적으로 했다면 일반 병원에 가도 됐을 것이다.
"그게 바로 본론입니다."
상현의 질문이 나오자 정석영이 줄을 잡아 당겼고 침대 맞은편의 하얀 벽에 프레젠테이션이 나타났다.
"그동안 한국 정부는 능력자와의 교섭에서 많은 실패를 거듭해 왔습니다. 초기 괴수진압 시장은 정부가 갑, 능력자가 을의 관계였습니다. 물론 한국 뿐만이 아니라 10년 전에는 어디든지 그랬죠."
그의 말에 백종현도 과거 일이 떠오른듯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지금이야 시민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존재로서 능력자를 많이 우대하지만 과거엔 그렇지 않았죠. 현대식 병기로 무리없이 잡을 수 있는 하급 몬스터들이 주를 이뤘고 사체와 마석은 돈이 됐으니 정부는 능력자들을 강하게 억압했습니다. 능력자들은 소위 한국 정부에 대해 정나미가 떨어졌죠. 당시 돈 있는 능력자들은 좋은 대우를 한 미국으로 많이들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능력자들이 대거 정부에 등을 돌리고 난 후 벌어졌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강력한 괴수들, 쉽사리 처치하지 못하는 등급의 디멘션홀이 나타나기 시작했죠. 도심 한복판에 거대한 괴수가 나타났다고 해서 무한정 폭약을 투하할 수는 없습니다. 시민들의 생명이 달려있으니까요."
정부는 부랴부랴 능력자들에 대한 대우를 하려 했지만 이미 실력있는 사람들은 이민을 갔거나 자금력이 풍부한 기업밑으로 들어가 실력을 펼치고 있었다.
"초반에 잠깐 반짝했던 것이 큰 손해로 돌아왔죠. 기업이 그들을 감싸안으면서 정부는 신뢰도 잃었고 이윤도 잃었습니다. 현재 한국 정부는 한국을 세계 1위의 마석생산지, 괴수 산업의 메카로 육성하기 위해 여러가지 장기적인 플랜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 선결 과제중의 하나가 바로 정부 직속의 공격대를 갖추는 일입니다."
"그냥 정부 직속의 공격대만 던전 세금을 감면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기업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야 하거든요. 한국 경제에 대기업이 얼마나 많은 부분을 지탱하고 있는지 알면 놀라실지도 모릅니다. 기업이 정부에 반감을 살만한 일은 최대한 자제해야죠."
"그럼 원하시는게 저보고 직속 공격대에 가입을 해달라는 이야기 같은데...."
"그렇습니다. 일명 미쏠로지 계획. 정부 주도하의 최강의 공격대를 육성하는 계획입니다."
정석영은 지난 시간동안 던전 검사관의 자격으로 그들을 지켜봤다. 제법 사이가 좋은 막공이었다. 정부에서는 아직 기업의 눈에 들지 않는 재능있는 신참들로만 올스타팀을 꾸려나가고 싶어했지만 동료들과 떨어져야 한다면 상현은 그 제의를 거절할 것이 뻔했다.
'어차피 정부 직속 공대는 하나만 만들게 아니니까 상관없겠지.'
자세한 계약 담당은 자신의 윗선에서 맡게 되겠지만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환상현이 현재 데리고 있는 팀원들과 같이 행동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어느 정도 언질을 받은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럼 일반 정규 공격팀이랑 직속이랑 다른 점이 정확히 뭐죠?"
"긴밀한 협조체계입니다. 이윤이 덜하다던지, 목숨이 위험할 것 같은 임무에서 발을 빼는 능력자들만 남아서는 괴수 산업 1위국이 될 수 없습니다. 직속팀에게는 모든 자원이 최고한도로 베풀어질 것입니다. 연봉은 기업 그 이상, 대신 위험부담이 조금 더 높다고만 생각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언제든 긴밀한 협조체계가 이루어지는 시스템을 정부는 원하니까요."
"흐음-."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기색으로 상현은 종현을 쳐다봤다. 그 역시 고민이 많은 모양이었다. 상현이 잠들어있는 사이 더 자세한 내용을 정석영에게 들은 그 역시 섣불리 어느 쪽이 좋다 말할 수가 없었다.
최고 금액의 대우, 최고의 장비, 어느 것 하나 부족함 없이 국가적인 서포트가 팀에게 전달 된다. 단점은 오직 하나, 어떠한 위험을 마주쳤을 때 그것을 쉽게 회피하지 못한다는 것.
"계약기간 같은건 없나요?"
"3년입니다. 다른 사회 정규 공격대원들과 똑같은 계약기간이죠. 단, 이 경우엔 1년 옵트아웃 조항이 없으며 다른 기업인원들과 섞여서 레이드나 던전을 공략하는 건 아마 안될겁니다. 계약기간 중에 새로운 동료를 모집하는 것은 가능하며 계약기간은 공격대장의 남은 기간에 맞춰집니다."
"할만하지 않나요?"
상현이 묻자 백종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다른 사람이 공격대장이었다면 종현은 반대를 했을 것이다. 국가에 매이게 된다는 것은 보통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최악의 경우 감당할 수 없는 괴수앞에 총알받이로 세워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저 침대 위에 앉아있는 젊은 청년의 가능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직접 부딪치지 않았는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힘을 넘어선다는게 어떤 것인지를.
3년간 최고 조건에서 팀을 키우고 마음에 안들면 연장계약을 안하면 그만이다.
"연장계약을 안하는 것에 대해 불이익은 없는거겠지?"
이미 확인한 내용이지만 백종현은 다시 한 번 물었고 정석영은 그럴 일 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멍청한 정부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제 능력자들을 중심으로 시스템이 개편될 겁니다."
============================ 작품 후기 ============================
악감정을 남기긴 싫지만 총부리는 어쩔 수 없이 겨눠야죠. 안그럼 말도 붙이기전에 도망갈텐데.
옵트아웃 조항은 남은 계약기간에 해당하는 연봉을 미리 지불하고 계약을 앞당겨 해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야구 즐겨보시는 분들은 들어보셨을 법한 단어죠.
나중에 작중에서 다시 한 번 기회가 되면 자세히 풀 예정이지만 현재 정규팀의 대부분 능력자들은 기업의 돈과 맞물려 계약을 맺고 있으며 트레이드가 되기도 합니다. FA나 보상선수 개념은 없습니다.
자유 계약인 점은 오히려 축구와 비슷하다고 할까요. 둘다 짬뽕입니다만...
뒤늦게 정신 차린 정부가 환상현을 얼마나 대접하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