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 회: 전진! -- >
일행들의 중앙에서 발생한 차원틈, 모든 일행은 간절한 소망을 담아 빌었다.
'물렙!'
'물렙!'
"물렙!"
마음으로 외치는 자들, 입밖으로 외치는 자들, 온몸으로 외치는 자들, 방법은 여러가지지만 마음은 하나였다. 그들은 모두 약하고 보상이 두둑한놈이 틈에서 기어나오길 바라고 있었다.
바닥에서 열린 차원틈에서 두 팔이 먼저 솟아났다. 팔이 보인다는 것은 신체적으로 인간과 비슷한 놈이라는 뜻, 일행은 바싹 긴장했다.
인간형 치고 쉬운 놈이 없기 때문이었다.
"올라온다아!"
쿠르르르-
거친 숨소리, 거대한 몸, 어기적 몸통을 들어올리며 구멍을 빠져나온 것은 머리가 둘달린 사이클롭스였다.
"젠장!"
주최자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사이클롭스라면 지금까지 보고된 4등급 디멘션 홀 괴수중에서도 불렙중의 불렙, 다시 말해 최상급 난이도를 자랑하는 놈이었다.
나올 때 빠트린 탓인지 놈은 좁아져 가는 차원틈에 손을 집어넣어 몽둥이를 꺼냈다. 그렇게 꺼낸 몽둥이를 양손에 쥐자 사이클롭스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차원틈이 완전히 닫혔다.
"그래도 쫄들은 안나왔습니다."
쫄이란 보스급 몬스터와 함께 출현하는 병졸들로 호위몬스터라고 할 수 있었다. 보스만 해도 까다로운데 고블린 같은 호위라도 덕지덕지 붙어있으면 당연히 짜증날 것이다.
"후읍."
숨을 크게 들이쉰 사이클롭스가 그 공기를 한방에 뿜어내며 일행들에게 포효했다.
"우워어어어───────!"
전신을 휘감아 올라오는 오싹한 냉기, 엄청난 압박감에 일행들이 굳으려는 찰나 쏜살같이 환상현이 치고 나갔다.
"딜 부탁드립니다!"
레이드원들의 정신을 깨운 환상현은 방패에 마력을 불어넣어 방어를 견고히 했다. 이윽고 날아드는 흑색의 몽둥이, 사이클롭스의 신체는 무려 10미터에 달했고 그 손에 잡힌 몽둥이는 전신주와 맞먹을 정도로 두꺼웠다.
쾅!
후두두둑-
방패가 순간 크게 흔들리며 상현의 몸이 지면에서 떨어졌다.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는 듯한 사이클롭스의 풀스윙에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왓!"
상현이 포물선을 그리며 공터 뒤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본 일행들은 기가 질렸다. 큰 상처를 입은 것 같진 않았지만 상현은 탱커고 자신들은 딜러, 저 무식한 공격에 천당구경 하는 수가 있었다.
"휠윈드 패턴을 조심해요. 회전하기 시작하면 도망쳐야 합니다!"
널리 알려진 사이클롭스의 회전베기 패턴을 경고한 주최자는 지면을 스치듯 달리며 활을 발사했다. 검을 들지 않는 딜러중엔 유독 활을 쓰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거리로 인한 안전성이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물론 단점도 있었다. 능력이 어지간하지 않은 이상 근접딜러들보다는 딜이 좋지 않았다.
검을 잡고 있는 근력강화형 능력자가 있는 힘껏 적을 후려치면 그 파워가 괴수의 피부에 전달된다. 하지만 활을 들고 있는 경우는 힘을 무식하게 줘봐야 활대가 뿌러질 뿐이다.
다시 말하면 같은 등급의 아이템으로 고데미지를 내기 힘들다는 이야기, 그것을 커버하기 위해서 원거리딜러들은 아이템에 큰 신경을 썼다.
콰콰쾅!
화살에 마법이 걸려있는 것인지 사이클롭스의 몸에 닿은 화살끝에서 환한 불길이 치솟았다.
"태, 탱커!"
살인적인 기세로 몽둥이를 휘두르는 사이클롭스에게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는 근접딜러들은 애타게 상현을 불렀다. 먹이를 찾는 아기새가 부모를 부르는 것 만큼이나 간절한 목소리였다.
"갑니다!"
냉큼 몸을 일으켜서 다시 일행의 선두에 선 상현은 있는 힘껏 자세를 잡고 방패를 들이밀었다. 다시 한 번 강렬한 충격, 그러나 이번엔 쉽게 밀리지 않았다.
자세를 최대한 낮추고 방패를 기울이며 힘을 분산시킨 것이다. 그 결과 두 발자국 밀리긴 했지만 전처럼 꼴사납게 하늘을 나는 경험을 피할 수 있었다.
"바람의 칼날!"
그에 멈추지 않고 상현은 오른손을 뻗어 검을 치켜올렸다. 검끝이 향한 곳은 사이클롭스의 목덜미, 검에서 뿜어진 검기가 사이클롭스의 목에 생채기를 냈다.
그리고 그것은 상현이 원하던 효과를 냈다.
"크르륵."
목은 인간형(레이드에서는 두 팔과 다리를 가지고 직립보행하는 괴수들을 뜻함) 생명체의 중요 급소중 하나다. 상현의 방어력이 성가신 탓에 자신 주변을 폴짝 폴짝 뛰어다니며 스킬을 난사하는 법사와 궁수부터 처리하려던 사이클롭스는 생각을 바꿨다.
발치 아래의 단단한 놈을 무시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환상현이 괴수의 시선까지 제대로 끌어주자 딜러들의 몸이 차츰 풀리기 시작했다. 경직돼있던 몸이 풀리며 딜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 무자비한 연계 공격이 괴수의 전신을 할퀴었다.
펑!
"크억."
코끼리 다리보다도 굵은 괴물의 발차기가 정면에서 날아들자 상현은 내장이 뒤틀리는 듯한 충격을 받으며 뒤로 굴렀다.
정면에서 덤프트럭과 충돌한 것 같은 기분, 이런것은 흘리고 자시고 할 수가 없는 공격이었다.
"힐, 힐!"
힐러들이 부리나케 상현의 몸에 힐을 퍼붓자 은은한 초록빛이 그의 몸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끄응."
"탱커 조심해요!"
딜러들의 깜짝놀란 경고에 상현은 본능적으로 일어서기를 멈추고 옆으로 굴렀다. 그리고 그 판단은 정확했다. 냉장고만한 발바닥이 쿵 소리를 내며 상현이 있던 자리를 짓밟았다.
"크와우와!"
상현이 계속 피하는 것이 짜증나서였을까. 사이클롭스의 머리 중 하나가 주변 전장을 살피며 새로운 먹잇감을 탐색했다. 아무래도 발아래 있는 놈은 쉽사리 죽이지 못한다고 판단을 내렸으리라.
"히익."
상현을 치료하던 힐러들과 눈이 마주친 사이클롭스는 이를 환하게 드러내며 기괴한 미소가 지었다. 힐러들이 소름돋은 표정으로 신음을 발하는 순간 흑색의 몽둥이가 부메랑처럼 날았다.
콰앙!
지면을 강타한 몽둥이에 힐러 한 명이 직격당하고 말았다. 애석하게도 그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예상치 않았던 일행의 죽음, 힐러는 방어력이 약하다. 당연히 직격당하면 죽을 수밖에 없기에 탱커를 옆에 대동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환상현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는 애초에 힐러팀 전담탱커가 아니라 근접딜러들이 치고 들어갈 수 있도록 사이클롭스 근처에 달라붙는 역할을 지원했다.
힐러를 지켜야 할 여성 탱커는 바들바들 떨며 죽은 힐러의 시신을 보더니 구토를 하고 말았다. 자신을 괴롭히던 인간 한 명을 죽여서일까, 사이클롭스는 괴상한 웃음소리로 밤공기를 진동시켰다.
상현은 화가 났다. 눈앞의 덩치큰 괴물놈이 자신에게 집중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공격했고 그 결과로 힐러가 죽었기에 화가 났다.
'날 봐!'
말 대신 마력으로 응수한 상현의 검에 바람이 휘감겼다. 날카로운 바람의 마력을 담은 검이 사이클롭스의 굵은 발목을 후려치자 살점이 엉기고 피가 소용돌이 치며 사방을 어지럽혔다.
사이클롭스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민첩하게 후퇴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발목이 너덜너덜해져 제대로 걷지도 못할 뻔 했던 것이다.
"어딜 도망가!"
벼락같은 기세로 떨어지는 몽둥이 세례를 방패 하나만 믿고 돌진한 상현은 그대로 발목을 노렸다.
"크르르워워!"
사이클롭스로는 미칠 노릇이었다. 방어에 치중하던 작은 녀석이 무서운 기세로 자신의 발목만 노리고 드는 것이 아닌가. 놈은 본능적으로 상현이 이 근방에서 가장 무서운 적임을 깨닫고서 생각을 바꿨다.
등을 돌리고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한 걸음 뻗을 때마다 몇 미터씩 쭉쭉 뻗어나가는 사이클롭스를 잡는 건 보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정해진 구역에서 레이드를 마치지 못하면 실패로 처리, 보상도 없었다.
다급해진 원거리 딜러들은 사이클롭스의 다리를 노렸다. 상현이 상처를 낸 발목에 몇 번 공격을 더하면 도망갈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발목에 닿기도 전에 흑색의 몽둥이들이 화살을 모조리 쳐냈다.
"놓칠쏘냐!"
눈에서 불을 뿜은 상현의 손에서 검이 튀어나갔다. 전신의 마력을 담아 폭발하듯 쏘아보낸 검이 바람의 벽을 뚫고 목표에 정확히 명중했다.
푸확-
대량의 출혈, 결국 사이클롭스는 고꾸라질 수밖에 없었다. 전력을 담아 펼친 필살의 공격이었기에 상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쪽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이걸 드세요!"
주최자 이성주는 기력이 다해 주저앉은 상현에게 포션을 던졌다. 푸른빛이 도는 약병은 마력의 운용을 원활하게 해주며 지친 힘을 되찾아주는 것이었다.
사양하지 않고 포션을 받은 상현은 마개를 따고 주저없이 약을 들이켰다.
놈은 쓰러졌다. 이제 조금 전과 같은 위력을 보이진 못할테니 조심스레 접근한다면 더 이상의 사상자 없이 끝장을 낼 수 있었다.
동료의 죽음에 대해 원한을 풀듯 딜러들은 악랄하게 사이클롭스를 공격했다. 땅에 엉덩이를 붙이고 주저앉은 괴수는 더 이상 자신들의 적이 아니었다.
최후의 발악으로 놈은 몽둥이를 집어던졌는데 다리가 다쳐서 다시 집으러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리고 환상현이 다시 일어서서 레이드에 참가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놈은 최후를 맞이했다.
"흑, 철수씨. 어떡해...흑흑."
죽은 동료의 시신을 붙들고 다른 힐러가 울고 있었다. 힐러들은 유달리 지인들끼리 레이드를 다니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들은 연인사이인 것처럼 보였다.
"하필 이런 새끼가 튀어나오다니."
주최자는 애꿎은 땅만 밟았다. 사이클롭스는 4등급중 최고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놈이었다. 정규 공격대가 아닌 막공에서 참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가 4등급이었으니 오늘 일행은 그들이 잡을 수 있는 최고난도의 몬스터를 잡은 셈이었다.
하지만 사상자가 나왔으니 기뻐하는 사람은 없었다.
"삐빅- 8900K 중급 마석이 감지되었습니다."
가까운 곳의 매매상을 불러 감정한 결과 2억의 감정가가 나왔다. 사망자에게 돌아가야 할 돈은 정부에게 돌아갔다. 정부는 그 돈으로 피해자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비용 및 남은 가족들에게 금액을 전달할 터였다.
2천만원을 손에 쥔 상현에게 주최자가 다가와서 인사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상현씨라고 했나요. 상현씨 아니었으면 오늘 레이드는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별말씀을요."
"아닙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그 정도 실력이라면 솔직히 어딘가 정규레이드를 다니시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만."
"아직 실력이 부족해서 정규는 따로 뜻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밤사냥에 종종 들리실 참이신가요."
"네. 돈이 필요한 일이 있어서요."
상현은 왠지 모르게 이 남자가 자신을 끌어들이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것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또 연락드려도 될까요. 상현님같은 든든한 탱커가 있다면 야간 레이드도 할만하죠."
"알겠습니다. 하지만 못 뛰는 날도 있을겁니다."
"물론이죠."
어느새 '씨'에서 '님' 으로 호칭이 바꾼 주최자는 집으로 돌아가는 상현을 짧게나마 배웅했다.
레이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상현은 생각했다. 오늘 열 명이서 뛰었던 야간 레이드 대원들 자리에 자신이 이끄는 던전 막공팀을 대입해본 것이다.
'쉽지 않아.'
주변은 어두웠다. 공터에 켜둔 모닥불은 조금 도움이 될 뿐 큰 도움이 되진 않았다. 만약 구름마저 가려 달빛이 없는 밤이라면 흑색의 몽둥이를 가진 사이클롭스를 상대하기가 더 까다로웠을 것이다.
욱신-
힐을 그렇게 많이 받았는데도 속으로 상처가 난 것 같았다. 대원들은 전혀 몰랐지만 상현은 사이클롭스와 전투를 하며 서서히 마력을 줄여나갔었다.
재생 능력을 늘리는 가장 빠른 방법이 강한 타격을 받는 것이기에 벌인 일이었다.
주최자 앞에서는 멀쩡한 척 했지만 실은 피를 한움큼 토할 뻔 하기도 했다.
'이대로는 안 돼. 내가 더 강해지고 대원들도 더 실력을 쌓아야 돼.'
상현은 밤사냥에 홀로 나서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박현도가 이끌던 진압부대와 맞붙었던 카르키노스 역시 4급이었다. 솔직히 그들과 비교해서 지금 막공 인원들이 그리 꿀린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기에 상현은 근시일 내로 4급 레이드를 뛸 생각이었다.
그러나 오늘 야간레이드를 뛴 상현은 생각을 고치기로 했다.
4급의 디멘션 홀에서 어떤 놈이 튀어나올지 예측할 수 없는 이상 실력을 쌓아야만 했다. 만약 오늘 죽은 힐러가 처음 본 사람이 아니라 지금껏 같이 사냥을 나선 신채은이나 성하나였다면?
그랬다면 깊은 후회를 했을 것이다. 상현에게 중요한 것은 주변의 사람들이지 돈이 아니었다.
'천천히, 확실하게.'
급할수록 돌아가라.
긴 수명과 태연한 성격으로 누구보다 능력자들의 격언을 잘 지킬수 있는 상현은 레이드로 인해 흥분한 육체를 차갑게 가라앉히며 다음 장소로 향했다.
그의 밤사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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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고 맞고 또 맞고.
댓글 감사합니다. 재밌게 봐주신다니 기분이 좋네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