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 회: 일어서다 -- >
신재후가 정신을 차린 곳은 전에도 자주 온 적 있는 상현의 월세방이었다. 그리 추운 날씨도 아니었지만 보일러가 팽팽 돌아가고 있던 탓에 땀까지 났다.
'이 형은 왜이렇게 보일러를 세게 틀었어.'
샤워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재후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옆에 누워서 자고 있던 상현이 연신 끙끙대며 표정을 찡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 아픈가?'
이마에 손을 살짝 대보자 열이 느껴졌다.
"이런."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야 겠다고 생각한 순간 옆에 남겨진 쪽지의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병원 갈 필요 없음?'
마치 자신이 일어나면 병원부터 찾을 것이라고 예상이라도 한듯한 메모였다. 재후는 크게 고민했다. 아픈 환자를 병원으로 데려가야 하는가 아니면 형의 말을 믿고 들어줘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결국 한참을 고민하던 재후는 물수건을 짜서 상현의 이마에 올려주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더 심해지면 데려가야겠다.'
시계를 보니 평소와 같은 출근시간이었다. 공사현장 근처에서 발생한 디멘션 홀 사고, 밥줄이 끊기지는 않았으려나 걱정하며 재후는 방을 나섰다. 물론 상현에게 알아보고 온다고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재후 안죽었구나?"
"제가 먼저 죽으면 섭하죠."
평상시에 같이 일하는 인부들과 잡담을 나누며 재후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살폈다. 공사현장엔 피해가 없어서 일은 그대로 진행된다고 했다.
잘됐다고 생각한 재후는 작업반장에게 찾아가서 상현이 몸이 심하게 아파서 3일 정도만 쉴 수 없겠냐고 부탁을 드렸다.
평소에도 성실하게 일해서 좋은 이미지를 안겨주었던지라 작업반장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다른 사람 같았으면 땜빵을 쓰지 않고 다른 인부를 뽑았을 것이다.
상현의 몫까지 열심히 일해야 겠다고 생각을 하며 하루를 마친 재후는 다시 그의 월세방으로 돌아갔다. 상현의 상태는 아침보다 많이 호전되어 있었다.
"형, 정신 좀 들어요?"
"그래."
말은 했지만 몰골이 영 아니었다.
"형같이 튼튼한 사람도 이렇게 아프긴 아프구나."
상현이 아프다며 엄살떠는 것조차 본 적 없는 재후는 신기하다는듯 말했다.
"반장님이 뭐라셔?"
"형 나을때 까지만 땜빵 쓰시겠다고 하셔."
"재후야 형이 자면서 생각한건데."
상체를 엉거주춤 일으켜 앉은 상현은 뒷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반장님께는 일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려."
"왜, 왜? 이제 노가다 그만두려고?"
상현의 말이 의외였는지 재후는 깜짝 놀랐다.
"그래. 다른 일 할 거야."
"무슨 일 할건데?"
재후는 기왕이면 상현이 시작하는 새로운 일이 자신도 같이 할 수 있는 일이었으면 싶었다. 외동아들인 재후는 반 년 정도 일을 같이 하면서 상현을 친형처럼 믿고 따르게 된 것이다.
"재후 너 모아둔 돈 좀 있어?"
"노가다꾼이 모아둔 돈이 있긴 개뿔...집에 좀 부쳐주고 한 200정도는 있는데?"
"내가 300정도 가지고 있거든."
상현의 말에 재후는 그런데?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괴수 사냥 한 번 안해볼래?"
"뭐?"
갑자기 뜬금없는 이야기가 나오자 재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형, 괴수를 잡으려면 능력자여야...."
"미안, 내가 말은 안했는데 나 능력자야."
"정말?"
작은 미니 커터칼로 자신의 신체재생능력을 보여줬다. 팔목을 긋자 얇게 벌어진 피부는 시간이 조금 지나자 순식간에 아물었고 커터칼이 지나간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눈앞에서 상현의 능력을 확인한 재후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 숨기려던 건 아니야."
"형이 미안해할건 아니지. 그나저나 놀랐어. 형이 능력자였다니."
하지만 이야기를 하는 재후의 얼굴은 점점 침울해져 갔다. 상현은 능력자로서의 재능을 발휘해 괴수사냥꾼의 길에 뛰어들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은 무능력자가 아니던가. 상현의 레이드를 하자는 제안은 고마웠지만 비능력자는 아예 참여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레이드였다.
"걱정하지마. 내가 널 능력자로 만들어 줄 수 있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해볼래?"
"능력자만 될 수 있다면 뭐든지 할게!"
재후는 바닥에 엎드려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그 익살스러움에 상현은 아픈 몸도 잊고 피식 웃었다.
"내일 작업반장님한테는 같이 가서 이야기하자."
재후가 아는 상현은 이런 말을 허투루 할 인간이 아니었다.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재후는 상현에게 강한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즉, 자신이 정말로 능력자가 될 방법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도 바라던 능력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재후는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공사현장에 찾아가 사정을 말하고 일을 그만둔 그들은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협소하지만 일단 돈을 많이 벌면 숙소도 새로 구할거야. 당분간만 같이 생활하자. 네가 불편하면 너희 집으로 돌아가도 좋고."
"아니야. 같이 일을 하면 같이 지내는게 편하지."
재후는 설령 이보다 더 후진 곳에서 지내게 된다해도 아무런 불만을 가지지 않을 터였다. 능력자로 만들어 준다는데 무슨 일이든 못하랴.
"능력자가 마력사용능력 덕분에 만들어지는 건 알고 있어?"
"대충 알고 있어."
이세계에 마력이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한건 11년전, 러시아 북부에서 열린 거대한 디멘션홀에서 몬스터와 함께 엄청난 양의 마력이 이 세계에 녹아들었다.
현재 능력자들의 수치는 전세계 인구의 0.1퍼센트 였는데 그 수치는 바로 마력의 사용방법을 자연스레 터득하게 된 인류의 비율이었다.
그말인즉 재후가 마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만의 능력을 각성하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이제부터 네가 마력을 느낄 수 있도록 작업을 시작할거야. 그전에 주의사항이 있어. 내가 능력을 각성시켜주는 일은 함부로 할 수 있는게 아니야. 그러니까 어디가서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줬으면 해."
"절대 말 안할게. 형 나 알잖아, 입 자물쇠야 자물쇠."
본래 지구의 인간들은 마력회로라는 것이 몸에 없었다. 지금 마력을 다루는 0.1퍼센트의 인간들은 한마디로 돌연변이 같은 존재들, 마력이 대기중에 유입되자마자 스스로 회로를 만들어낸 자들이었다.
신재후를 능력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현이 직접 신성을 이용해 회로를 터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시작하자."
굳은 표정으로 결의를 다진 두 남자가 일렬로 앉아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작업에 들어갔다. 원룸의 창 바깥으로는 금빛이 번쩍이며 새어나오기를 반복했다.
환상현이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능력자 판에 뛰어든 이유는 달리 큰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본래 그는 노가다, 아르바이트 같은 잡일을 하며 자신의 무예를 갈고닦는데만 치중하려고 했다.
이런 월세방에서 살 거 같으면 큰 돈도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수명은 길었다. 100년 이상 알바만 하는 청년, 신성에 의해 노화도 느리게 진행될테니 언젠가 인간들은 자신을 보며 의구심을 가지게 될 터였다.
상현은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 능력자로서 큰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인적 드문 곳에 앞으로의 삶을 대비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어 둔다면 지내는데 아무 문제도 없으리라.
다른 이유로는 박현도 같은 녀석들 때문이기도 했다. 상현이 일년간 인간들 사회에 녹아든 결과 인간은 여러가지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착한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약자에게는 서슴없이 악의를 드러내는 자들도 있었다. 상현이 싫어하는 후자같은 부류를 상대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의 사회적 지위를 올리는 것이었고 최선의 수단이 돈이었다.
물론 큰 돈을 벌기 위해서는 능력자로서의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상현이 재후를 영입한 것은 그를 아끼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에게서 어떤 재능이 개화할지 모른다는 느낌을 받아서였다.
상현은 일찍이 이 세상에 와서 특별한 축복을 부여한 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수연이었으며 지금 그녀는 현재 한국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레벨8의 능력자가 되어 있었다.
물론 누구에게나 신성 축복을 부여한다고 해서 이런 결과가 나오진 않았다. 그것은 오로지 이수연의 잠재능력이 좋았다는 이야기였으며 평범한 사람에게 축복을 부여한들 그의 최대 능력치까지 성장을 마치고 나면 더 이상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새로 태어난 마력회로를 갈무리하느라 곤히 잠든 재후의 얼굴을 보며 상현은 생각했다.
'네가 어느 정도의 능력자가 되는지는 이제 순전히 너에게 달렸어.'
그가 이수연에 준하는 능력자가 되어준다면 앞으로 큰 힘이 될 것은 분명했다. 신재후의 성격상 자신을 키워준 상현을 실력 차이가 난다고 버리진 않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자신의 과거를 생각지 못하고 실력이 급상승하여 안하무인격 행동을 보이는 능력자들은 한국만 해도 차고 넘쳤다.
'그럼 나도 이제 능력을 개발해야할 차례인가.'
지난 일년은 인간의 육체에 깃든 불안정한 신성을 안정화시키는 기간이었다. 이제 어느정도 신성을 완벽하게 컨트롤 하게 되었으니 남은 것은 환상현의 육체능력, 신체를 개발하는 일이었다.
상현은 앞으로 즐거운 일이 생길것만 같은 기분을 받았다. 재후와 같이 성장해가는 자신의 모습이 몹시 기대가 됐다.
환상현과 신재후, 두 명이 공사현장을 그만뒀지만 여전히 인부들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노가다판에서 인력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은 언제나 볼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군복을 입고 나타난 D.SWAT의 인원조차 쉽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잘 벼린 검같은 날카로운 기도, 인부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숨을 죽이며 작업반장과 군인의 대화를 귀를 쫑긋 세우고 엿듣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얼마전에 발생한 인근 디멘션홀 사건때문에 조사할게 있어서 말입니다."
"예. 뭐든 물어보시죠."
D.SWAT은 강력한 권한을 가진 특수부대, 그들의 신경을 거스르기 싫었던 작업반장은 최대한 친화적인 태도로 말했다.
"지난 사고 당시에 공사장 인부들 중 다친 사람은 없었나요?"
"예, 작업수칙을 철저하게 준수해서 다들 정해진 대피로로 몸을 피한덕에 다친 사람은 전혀 없었습니다."
요즘은 워낙 흉흉한 시대라 초등학생들도 디멘션 홀이 발생했을 때 취해야할 행동요령을 달달 외우고 있었다.
"그럼 한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사고 직후에 평소와 다른 사람은 혹시 없습니까? 몸이 아프다거나 성격이 좀 이상해졌다던지 뭐라도 좋습니다."
"없는것...같은데요."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군인의 표정은 예상했다는 듯한 평온한 표정이었다. 이런 조사를 하루이틀 한것도 아니고 이런식으로 중요사건의 실마리를 찾는다는게 쉽지 않은 일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담배를 한까치 입에 물고 숨을 돌리던 그의 옆에서는 관심을 끈 인부들이 다시 삽을 놀리기 시작했다.
"근데 재후랑 상현이는 왜 갑자기 그만뒀대?"
"몰라. 장사 할거라나봐."
"노가다 하면서 돈 모으기가 여간 쉽지 않은데 젊은게 좋구만."
의도치 않게 인부들의 이야기를 엿들은 군인은 아직 다 피지도 않은 담배를 꺼트리고는 인부들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괜찮으시다면 방금 전에 했던 이야기, 조금만 자세하게 들을 수 있을까요?"
============================ 작품 후기 ============================
본격적인 몸이 만들어지는 150년동안 알바만 하면서 연명하겠다니.
이 얼마나 무서운 생각입니까.
환상현이 세상으로 나가는데 1퍼센트라도 기여한 박현도가 여기서 도움이 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