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 회: 일어서다 -- >
"형 오늘도 수고 했어요."
후줄근한 패딩, 목에 걸치고 있는 낡은 수건, 흙먼지가 잔뜩 묻은 작업화. 영락없는 노가다꾼의 차림을 한 훤칠한? 청년 둘이 길을 걷고 있었다.
가을로 접어드는 9월 초입, 돌아가는 길에 물고 있는 쭈쭈바가 청년들의 피로를 덜어주고 있었다.
"형이 술만 좋아했어도 한 잔 걸치러 가는건데."
아까부터 쫑알쫑알 거리고 있는 청년은 올해로 스물둘, 이름은 신재후. 노가다판에 얼마 되지 않는 새파란 젊은피였다.
옆에서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는 청년은 올해로 스물셋, 반신의 위치에까지 올랐던 환상현이었다.
수원에서의 사고를 수습하고 조용히 지낸지 어언 일년,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적당한 음주는 몸에 좋지만 과도한 술은 몸을 헤치잖아. 개인 주량으로 한 병만 되도 벌써 적정량을 초과한거라니까."
"그렇게 몸 아껴서 몇 살까지 살려고 그래요?"
신성을 가진 몸이니 잘만 관리하면 환상현의 육체로도 사, 오백년은 족히 살아갈 수 있을테지만 그걸 굳이 입밖으로 내진 않았다.
그러고보면 이 세상에 갓 넘어왔을 당시의 자신은 얼마나 멍청했던지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처음 보는 간호사에게 저는 어둠의 기사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밝혔으니 정신병자 취급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형 저거 봐요."
과거를 회상하고 있을때 신재후가 상현의 어깨를 치며 교차로 너머의 전광판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한 능력자가 기자의 마이크를 앞에 두고 쑥스러운 표정으로 인터뷰를 나누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최단기간 8레벨 능력자가 되셨어요. 소감 한말씀 부탁드릴게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겸손하시네요. 이번에 5레벨의 상위괴수, 저주받은 신목을 단독으로 막아내신 덕분에 인명피해도 거의 없었구요. 아마 높은 확률로 신인상을 수상하시게 될 것 같은데 앞으로의 계획 여쭤봐도 될까요?"
"저한테는 과분한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또...앞으로도 노력해서 최고의 능력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요."
수줍게 인터뷰하는 여성을 보던 신재후의 눈빛은 첫사랑에 빠진 것처럼 하트가 뿅뿅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쩜 저렇게 이쁠까."
돌풍을 일으키며 한국 능력자 사회에 자신의 이름을 크게 떨친 여자는 상현도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처음 봤을때보다 얼굴이 한층 더 아름다워진 것 같기도 했다. 이제 막 능력자로서의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상현에게 큰 호의를 베풀었던 여자, 인터뷰를 나누고 있는 화제의 인물은 바로 이수연이었다.
'한 번 찾아가긴 해야하는데.'
이수연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건 이미 어제 오늘일이 아니었다. 한국 최강의 염력 능력자로 이름을 떨치는 그녀에게 환상현은 빚이 있었다.
아직 그 때 빌렸던 검 값 100만원을 갚지 못한 것이다. 물론 지난 일년간 먹고 살돈도 마련하면서 틈틈히 저축을 한 결과 그 정도 돈은 충분히 갚을 능력이 됐지만 이제 와서 자신이 그녀를 만나러 가는 것이 어쩌면 그녀에게 방해가 되는 일은 아닐까 하여 저어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한달 수입이 수십억이 넘는 걸어다니는 기업 능력자였다. 어찌나 실력 상승세가 가파른지 국가가 발벗고 나서서 그녀를 전폭적으로 지원할 정도였다.
"형 우리도 능력자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럼 이런 노가다 그만두고 당장 던전으로 달려갔을텐데."
노가다 하루 일당은 9만원이다. 하급 던전을 도는 능력자만 해도 얼추 15만원 이상 버는데다가 일도 훨씬 쉬운 편이었다.
"던전은 위험한 곳이야. 함부로 하지 않는게 좋아."
"에이 형이 뭘 모르시네. 하급 던전은 별로 위험하지 않아요. 기껏해야 고블린 정도가 나올 뿐이라구요. 사람이 죽은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정말 드문 케이스래요. 정말 재수 없을 땐 하급던전이 중급던전으로 진화하는 경우라곤 하지만...."
신재후의 말에 상현의 어깨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움찔했다.
수원에서 있었던 사고, 300명의 목숨을 앗아간 하급던전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규모가 커지고 위험해져 중급던전으로 변형했다고 했다.
세계에서도 보고된 바가 거의 없는 특이 케이스라고 했다.
"뭐 까짓거 던전이 위험하면 지상 레이드라도 뛰면 되죠."
디멘션홀 발생 11년 째, 디멘션홀은 언제나 위험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출몰 빈도는 점점 더 높아져만 갔다.
이제는 국가의 힘만으로는 거의 자력 해결이 불가능한 지경, 단순한 예로 당장 이들이 길을 걷고 있는 거리만 해도 하루에 한 번 정도는 소규모 마물들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인류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는 방법을 강구했고 그 결과가 바로 오라클이라는 예지 부서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한국의 오라클 부서는 디멘션홀이 나타날 지점을 1분전에 탐지하여 주변에 가장 가까운 능력자들에게 연락해 협조를 부탁했다.
위험등급에 따라 보수가 달랐지만 일반인들의 월급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쥘 수 있었기에 능력자들은 그 위험성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국에 존재하는 8만명의 능력자가 협조를 하지 않는다면 하루아침에 국가 기반 자체가 흔들릴 위험도 있었다.
"능력만 있었다면 저도 괴물 녀석을 한방에 슈숙!"
입으로 바람가르는 소리를 하며 신재후는 쉐도우 복싱을 펼쳐보였다. 그야말로 엉성하기 짝이 없는 움직임이었다. 애초에 그는 운동을 배워본 적도 없었다.
"레이드라던지 던전에 나서는건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서 힘을 길러두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운동같은거요? 우리 매일 운동 열심히 하잖아요. 노가다. 히히히."
재후는 해맑게 웃었다. 사실 권투나 태권도, 종합격투기 훈련 같은건 열심히 해봐야 결국 몬스터를 상대할 수 없었다. 격투기는 인간을 상대로는 효과가 좋을지 몰라도 성인만한 몬스터들에게는 그리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벌써 다 왔네. 형 그럼 내일 봐요."
"그래. 들어가서 푹 쉬어."
서로 손을 가볍게 흔들어주며 헤어진 상현은 집으로 들어왔다. 전에 살던 임대주택이 아닌 새로 얻은 낡은 월세방, 한달에 20만원을 내고 지내는 단칸방이지만 상현은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집에온 그는 라면을 끓여 간단히 저녁을 해결하고 TV를 틀어 뉴스를 시청,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국은 지금 어떤 상황인지를 간단하게 파악했다.
요즘은 발행률이 떨어진 종이신문들도 하루에 한부씩 차곡차곡 쌓여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모이면 파지로 내다팔아 라면을 살 수 있었다.
수원 사고 이후 상현의 삶의 방침은 명확해졌다. 첫째, 힘을 기른다. 제어할 수만 있다면, 그 힘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만 있다면 약한 것보다는 강한 것이 백배 천배 좋았다.
둘째, 함부로 나서지 않는다.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 반신이다. 비록 육체는 인간의 것이 되었지만 신성은 오롯이 남아있다. 그 차이가 인간에게 무슨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다. 던전이 발광을 일으킨처럼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상현은 어머니인 여신에게서 인간을 아끼고 돌보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자신의 영향으로 인간이 죽는 것은 결코 두고 볼 수 없었다. 최소한 그것이 안된다면 간섭은 하지 말아야했다.
셋째, 혼탁해진 세상을 바로잡는다. 물론 이것은 지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패배한 다른 차원의 세계를 이야기 함이었다. 천신과 마신의 대결에서 마신측이 승리를 거두었으니 그곳의 인간들과 지적 생명체들은 힘의 논리에 휩쓸리고 파괴와 살육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고통받을 터, 무릇 성신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운 자로서 그들의 고통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물론 이 세번째는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반신의 몸을 가지고 천년동안 수련을 해서도 이기지 못한 존재들이었다. 당장 환상현이 그 일을 언제쯤 해결할 수 있을지는 그야말로 까마득한 일이었다.
식사도 마치고 신문까지 전부 읽은 상현은 다시 눈을 감고 명상에 빠져들었다. 하루를 거르지 않고 마력을 수련하며 신성을 갈무리 하는 작업을 계속해온 상현은 이제 신성을 완전히 감출 수 있었다.
설령 신성체가 자신의 옆을 지나가더라도 조심만 하면 그가 반신의 영혼을 지녔음을 눈치채지 못하리라.
'이대로 힘을 쌓아 다시 차원을 넘어서면 되겠지.'
어차피 지구라는 차원은 잠시 들러가는 세상,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는 환상현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이 무너지게 되는 것은 겨우 하루 뒤의 일이었다.
"아 오늘은 꽤나 쌀쌀한데요."
아침 일찍 공사현장에 출근한 상현은 일을 시작했다. 그 옆에는 재후가 찰싹 달라붙어 상현이 삽질을 하는 것을 거들고 있었다.
공사현장의 아침은 굉장히 일찍 시작한다. 일용직 노동자들의 아침이 새벽부터 열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시간 여를 삽질만 하니 재후는 허리가 빠질듯이 아팠다. 아무리 일을 해도 도저히 삽질만큼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물론 초기와 비교하면 굉장한 숙련도를 자랑했지만 골병이라도 난 건지 허리는 항상 이모양이었다.
"에고고."
약한 소리를 하며 허리를 펴는 재후와 달리 상현은 땀한방울 흘리지 않고 삽질을 계속했다.
"쉬어가면서 해!"
고참급 중년 노동자가 상현을 향해 소리쳤다.
"예."
어찌나 일을 잘하는지 공사판에서 붙은 상현의 별명은 터미네이터였다. 처음에 그 별명을 들은 상현은 재후에게 터미네이터가 뭐냐고 물었던 적도 있었다.
"반장님 졸라서 밥좀 일찍 먹자고 할까요. 오늘따라 허기가 지네."
"우리 때문에 밥시간을 당길순 없지. 그러지 말고 요앞에 슈퍼 가서 빵이라도 사먹지 그래."
"어차피 쉬라고 했으니까 잠깐 갔다오죠 뭐. 형껏도 사다드릴게요."
"음. 너랑 같은 걸로."
"오케이!"
바지에 묻은 흙을 털며 재후는 잰걸음으로 슈퍼를 향했다. 다른 노동자들이었으면 담배라도 한 대 물었겠지만 상현은 담배를 피는 취미가 없었다.
멍하니 하늘을 떠가는 구름을 구경하고 있는데 그의 기감에 이상한 것이 걸렸다.
'1시 방향.'
재후가 간식거리를 사기 위해 향한 방향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만약 디멘션홀과 같은 괴수 관련 현상이라면 정부가 마련한 오라클에서 완벽하게 대응을 할 터였다. 1분전에 디멘션 홀의 입구를 예측 주변의 능력자들이 완벽한 대처를 하여 시민들을 구한다.
능력자들을 더욱 시민들의 우상으로 만들어준 고마운 시스템이다. 별 걱정을 다한다며 상현이 고개를 터는 순간 300미터 전방에서 거대한 폭음이 일었다.
그리고 솟구치는 거대한 불기둥, 상현은 직감적으로 일이 잘못됐음을 느꼈다.
어느새 그의 발걸음은 재후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뛰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환상현은 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이 세상을 구제하거나 계몽시킬 요량으로 온 것이 아니기에 현실에 무관심합니다.
해당 차원엔 각기 다른 신들만의 구역이 있기 때문에 굳이 상현이 오지랖 넓게 참여할 권한이 없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마 바뀔 것 같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