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인 매력-29화 (29/32)

00029 관계의 재정립 =========================

28화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어젯밤의 일들이 생각났다. 결국 도건이는 끝까지 하지 않았다. 나는 술과 열락에 취해 헐떡이며 도건이에게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들이 생각났다. 좋아한다고, 평생 볼 거라고 안 놔준다고 투정부리는 것처럼 했던 말들이 생각났다.

도대체 왜 내게는 알코올성 기억상실이 없는 걸까. 지난밤의 일들이 모조리 기억나 버려서 수치스러워 죽을 것 같았다. 이불 속에서 과거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몸부림 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몸부림을 멈추고 침대에 앉아 문 쪽을 뚫어져라 보았다. 문을 열고 도건이가 들어왔다.

“깼어? 배 안고파? 씻고 아침먹자.”

도건이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말과 행동에 가슴이 일그러지는 느낌이었다.

넌 왜 아무렇지도 않아?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눈물에 앞이 흐려져서 고개를 숙였다. 이불로 가렸지만, 훤히 드러난 허벅지에 울긋불긋한 것들이 올라있었다. 입술 안쪽 살을 깨물었다. 어젯밤의 일들이 새겨진 붉은 것들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문 앞에 서있던 도건이가 다가와 침대에 앉았다. 고개 숙인 내 시선을 따라 도건이의 눈이 내 허벅지에 머물렀다.

“아, 미안. 최대한 흔적 안남기려고 했는데…”

“왜? 왜 흔적을 안남기려고 했는데? 내가 기억 못했으면 없었던 일로하려고? 끝까지 안했으니까 전부 없던 일로 하려고 했어?”

“뭐? 아니.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네 몸인데 허락도 안 받고 마음대로 자국 같은 거 남겼으니까. 넌 피부가 연해서 벌레 물려도 흉터 오래 남았었잖아. 그래서 네가 싫어할까봐. 너 몸에 흉 지는 거 싫어하잖아.”

나는 허벅지에 남아있는 도건이의 흔적을 매만졌다. 끝까지 다정한 척은 혼자 다한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젯밤에 했던 말들 전부 사실이라고 널 좋아한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술 취해서 헛소리했다고 해야 하는 걸까.

“회사에는 내가 전화했어. 아파서 못 간다고 둘러댔어.”

회사? 도건의 말에 나는 시계를 보았다.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어? 넌? 너 출장 간다고 했었잖아.”

“이따가 출발해도 돼.”

나는 빨개졌을 눈으로 힐끔 도건이를 봤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도저히 도건이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내가 고개를 더 숙이자 도건이가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말했다.

“이두미. 늦었지만, 말할게. 난 네가 예민해 보이는 얼굴을 가지고 예쁘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란 걸 봤을 때부터였어.”

“…?”

“자각하게 된 건 네가 우리 과 쓰레기한테 고백 받았다고, 그 새끼 괜찮은 놈이냐고 물었을 때. 처음엔 내 소중한 친구가 그딴 쓰레기한테 상처받는 게 싫어서 그런 줄 알았어. 근데 어느 날 네가 그 새끼랑 웃고 있으니까…저 웃음은 나한테만 보여주던 건데 그 새끼랑 그러고 있으니까 화가 나더라. 그래서 알았어. 그때 깨닫고 나니까 난 처음부터였더라고. 처음 널 시골에서 우연히 봤을 때 부터였어.”

처음엔 도건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몰랐다. 그러다 도건이의 말을 듣다보니까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차려버려서 나는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도건이는 어젯밤 내가 했던 고백에 대한 답을 해준 것이다.

“이두미. 먼저 용기 내줘서 고마워. 네가 언제부터 어떻게, 도대체 왜 나를 좋아하게 된 건진 모르지만 나는 너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네게 고백할 수가 없었어. 내가 고백했다면 우린 멀어졌을 테니까. 넌 미친 듯이 날 피해 다녔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내가 도건이를 친구라고만 생각했다면, 난 그랬을 것이다.

“너도 결혼생각이 없다 길래. 네가 연애보단 네 꿈을 이루는데 더 열중해 있길래. 네 옆에 다른 남자가 없다는 사실에 나 혼자 안심하고, 네 곁에 남자라곤 나밖에 없다는 사실에 기고만장해서, 그래서 그냥 나는 이렇게라도 네 옆에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해왔어.”

어느새 도건의 눈가가 빨개져 있었다.

“내가 다치면 걱정해주고, 내가 슬퍼하면 위로해주길래 혹시 설마 너도 날 좋아하는 걸까 혼자 고민하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혼자 상상한 적도 있어. 난 분명 동성애잔데 왜 동성도 아닌 네게 빠졌는지 혼란스럽기도 했어.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난 그냥 이두미라는 사람한테 빠진 거였더라고. 그냥 이두미라는 사람을 좋아하고 보니까 여자였던 거지. 처음엔 이게 진정한 우정인 거구나 했어. 근데 친구랑 끌어안고 입 맞추고,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하지는 안잖아. 그래서 알았어. 그래서 깨달았어. 우정은 개뿔 이라고.”

도건이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해왔다는 걸 알았다. 나는 감정을 자각한지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도건이는 꽤 오랫동안 그런 고민을 해왔을 거라 생각하니 미안해졌다.

“무서웠어. 너와 관련된 일이면 자꾸 세상에 둘 도 없는 겁쟁이가 돼버려서 차마 고백할 수 없었어. 너에게 들을 거절의 말이 너무 무서워서 피했어. 네가 날 피하기라도 한다면 나는 쓰러질 것만 같아서. 심장의 통증을 내가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나는 항상 내 마음을 숨기고, 숨기고, 숨겨서 간신히 네 옆에 서 있었어.”

그는 마치 서약을 하듯 경건한 표정으로 내 손가락에 입 맞췄다.

“좋아해줘서 고마워 이두미. 내가 잘 할게. 많이 사랑하고 있어.”

도건이의 말에 도건이가 얼마나 오랫동안 날 마음에 담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왜 그 긴 시간동안 나는 눈치 채지 못했을까…생각해보면, 도건이는 항상 온 몸으로 내게 사랑 한다 외치고 있었다. 도건이가 게이라는 생각에 갇혀서 그가 날 좋아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나는 여전히 눈물을 떨구며 기쁘게 웃었다. 울면서, 웃으면서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도건이의 목에 팔을 둘렀다.

“이번에도 유혹하면 넘어와 줄래?”

내 말에 도건이가 웃었다.

“기꺼이.”

도건이가 날 침대로 눕히며 입을 맞췄다. 이불을 들추고 맨살을 만져오는 도건의 손에 놀라 잠깐 입을 땠다.

“자자자잠깐만. 불 끄면 안 돼?”

“왜? 내 얼굴 보기 싫어?”

“아니…부끄러워서.”

“난 네 얼굴 보면서 하고 싶은데. 부끄러워하는 얼굴도. 느끼는 얼굴도. 가는 얼굴도 보고 싶은데.”

두미의 얼굴이 순식간에 토마토처럼 빨개졌다.

“으, 그런 소리 하지 마.”

“하하. 귀여워.”

도건이 웃으며 빨갛게 오른 두미의 광대에 입술을 대었다. 뜨겁게 오른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꿈꾸는 것 같다. 이렇게 선명하니 꿈 일리 없지만.”

“히. 나도.”

나는 도건이의 귀를 깨물며 작게 속삭였다.

“사랑해. 임도건.”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며 환하게 웃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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