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5 상실의 두려움 =========================
24화
도건이에게 회식을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정말 오랜만에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 숨길 것 하나 없던 우리의 관계가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물론, 순전히 나 혼자만 틀어진 관계지만 말이다.
난 자주 가는 회사 앞 포장마차에서 홀로 술을 마시며 내 신세를 한탄했다. 나는 왜 도건이를 좋아해서 집에서 조차 맘 놓고 못 있는 걸까…?
짜증나게 왜 자꾸 김호신씨 동생이 생각이 나는 건지 모르겠다. 파티 이후로 김호신씨 동생과 도건이의 관계가 신경쓰여 그날 이후로 도건이만 보면 괜히 톡톡거렸다. 정말 못난 짓이었다.
도건이는 그 사람과 사귀는 관계가 아니라고 했지만, 지금은 그렇다는 거지 전엔 무슨 관계였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우리가 애인도 아닌데 말해줄 리가 있나…아니 그래도 우리 친군데 말해줄 수도 있지 않나? 아, 그러고 보니 내가 물어본 적도 없다.
후…. 게다가 난 남자도 아니고, 귀엽지도 않다…. 도건이가 날 좋아할 만한 요소가 단 하나도 없었다.
소주를 한 모금 넘겼다. 으악, 쓰다. 어묵국물을 한 숟갈 떠먹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내가 도건이한테 청혼한 그 포장마차였다. 허, 당시의 나에게 가서 어마어마한 칭찬을 해줘야겠다. 어딨지? 과거의 나? 내가 저쪽에 앉았었나?
살짝 비틀거리며 나는 그 날 도건이와 내가 앉았던 그 자리로 갔다. 내가 앉았던 그 자리에 나는 다시 앉아보았다. 스스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과거의 나를 칭찬해줬다. 그러다 도건이가 앉아 있던 자리에 누군가가 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건인가? 도건이가 날 찾아왔어?
팍, 하고 격하게 고개를 들었다. 눈앞엔 도건이가 아닌 신 팀장님이 계셨다. 실망스러운 마음에 끔벅끔벅 신 팀장님을 쳐다보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어…. 죄송합니다. 신 팀장님 제가 잠깐 정신이 어디론가….”
“혼자 술 마시는 거예요?”
“아, 네…. 신 팀장님도요?”
“네. 그럼 우리 오랜만에 같이 한 잔 할까요?”
“아, 네. 좋아요! 잠시만요. 제 잔 좀 챙겨오겠습니다!”
나는 괜스레 민망해서 과장스럽게 후다닥 내 자리로 돌아와 내 술잔과 접시, 안주를 다 챙겨들고는 신 팀장님 테이블로 갔다.
“집에 안가고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아직 신혼이잖아요.”
“아, 그게….”
말을 못하고 있자 신 팀장님이 소주를 한잔 입에 털어 놓고는 물었다.
“싸웠어요?”
“아니요! 싸운 게 아니라….”
음…음…하며 말을 못하고 있는데 신 팀장님이 내 접시에 잘 구워진 파전을 잘라서 놔주었다.
“말하기 그러면 말 안 해도 돼요. 근데 다음번엔 꼭 이름 불러 준다면서요.”
“아 맞다. 그랬죠. 태완씨.”
팀장님을 이름으로 부르니 어색했다. 내가 어색해 하는 걸 팀장님도 아는 것 같아 나는 멋쩍어하며 히히 하고 웃어버렸다.
“같이 술 마실 땐 내가 같은 회사 팀장이라는 건 그냥 잊어요.”
“네. 당연하죠! 그럼 한잔 따라주실래요?”
“그래요.”
한잔씩 주고받은 팀…아니 태완씨와 나는 전처럼 말없이 술을 마셨다. 태완씨랑 술을 마실 땐 항상 그랬다. 인사를 하고, 몇 마디 나눈 후엔 각자 각자의 생각에 빠져 술을 마셨다. 그렇게 아무 말 안 해도 편했다. 이렇게 있으니 도건이 생각이 좀 덜 나서 좋았다.
그러다 갑자기 태완씨가 말을 꺼냈다.
“근데, 저 여기서 두미씨 결혼하기 전에 본적 있었어요.”
“네? 결혼하기 전에 저희 여기서 가끔 같이 술 마셨잖아요.”
“아니요. 결혼한 분이랑 같이 있던 거요.”
“아…. 인사라도 하시지 그러셨어요.”
“그게, 두 분이 좀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네? 무슨 얘기요?”
“결혼하잔 얘기요.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새빨간 자태로 날 유혹하는 닭발을 하나 집어 먹으려다 신 팀장님의 말에 닭발 놓치고 말았다.
“남편분이 게이라는 것도 들었어요.”
나는 경악했다. 닭발과 함께 놓쳐버린 젓가락 한 짝이 접시에 닿아 튕겨져 테이블 위를 굴렀다. 테이블에 빨간 양념을 묻히며 떨어진 젓가락이 내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당황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팀장님의 표정은 변함없이 온화했다.
“그….”
“걱정 말아요. 나만 알고 있을 테니까.”
“감사 합니다….”
“그럼 두미씨한테 임도건씨는 그냥 친구일 뿐인 거죠?”
“네. 뭐. 그렇죠.”
“그럼 나랑 연애할래요?”
난 도대체 이 대화의 방향이 왜 이렇게 흘러가는 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네?!”
“설마 평생 연애도 안하기로 약속한 결혼이에요?”
“그런 건 아닌데요. 제가 좀 지금 많이 당황스러워서요. 혹시, 술 많이 취하셨어요?”
신 팀장님은 자신의 소주잔에 소주를 채우며 쓰게 웃었다.
“지금까지 꽤 많이 제 마음을 표현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두미씨가 너무 몰라줘서 그냥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신 팀장님은 그저 내게 회사에 있는 좋은 상사일뿐이었지 남자로 생각 해본적도 없었다. 그가 날 좋아할 거라고도 당연히 생각해본 적 없었다. 저번에 봤던 파티에서 혹시나 하긴 했었지만 말이다.
“매일 사주면 부담될 까봐 날짜도 새어가면서 커피 사다주고, 아플 땐 약도 사다주고, 영양제도 챙겨주고, 힘들게 줄서가며 케이크도 사다주고 보고 싶어서 일부러 연구2팀 홍보하는 기획을 하고, 술친구하면서 상사 욕 들어주고. 회사 말고 다른 곳에서도 보고 싶어서 일부러 임산그룹 파티도 간 거고요. 이정도면 제 마음 모른 두미씨가 정말 대단하네요.”
“아….”
“두미씨는 보면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닌데, 사람사이의 관계에서만 유난히 눈치가 없는 거 같아요.”
“제가 좀 그렇죠…. 죄송해요. 몰라서.”
“두미씨가 죄송할 건 아니죠. 사람마음 모를 수 도 있지. 그게 뭐 큰 죄라고…. 근데 좀 답답하긴 했어요.”
신 팀장님 말을 듣고서야 나는 그동안 신 팀장님이 내게 팀장님의 감정을 정말 많이 표현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게 유독 친절했던 지난날의 신 팀장님의 행동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정말로, 그 당시에는 몰랐다. 전혀 알아채지 못했었다.
“정말 죄송해요. 근데요 팀장님. 제가 계약결혼 한 것도 다 알고계시니까 말씀드리는 건데요. 제가 사실…제가 도건이를, 그러니까 제 남편을…”
“좋아한다고요?”
!! 몇 잔 들어간 술로 인해 반쯤 감겼던 눈이 크게 뜨였다. 팀장님은 왜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거지?
“어떻게 아셨어요?”
“최근에 남편분이 계속 두미씨 데리러오는 거 봤었어요. 두미씨가 그 친구 대하는 행동이나, 그 친구 바라보는 눈을 보니까 그냥 보이더라고요. 두미씨가 임도건씨 좋아하는 거. 짝사랑하는 중이라 제가 더 빨리 알아챈 걸 수도 있고요.”
“제가 도건이를 좋아하는걸 알면서도 고백하시는 거예요?”
“네. 어차피 두미씨도 짝사랑이니까요.”
맞는 말이었다. 팀장님 말에 가슴이 쓰러왔다. 나는 짝사랑 중이었고, 연구자로서 100%의 확률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내 사랑은 100%실현 불가능한 사랑이었다. 혼자 시작해서 이제는 접어야 할 사랑이었다. 도건이와 친구로라도 남으려면 접어야 하는 게 맞았다.
“두미씨 괜찮으면 저랑 가끔 데이트 해줄래요? 저랑 있는 순간만큼은 그 친구 생각 안 들게 해줄게요. 이루어 질 수 없는 건 빨리 포기하는 게 좋아요. 두미씨도 그 친구에 대한 마음 정리하고 싶은 거 아닌가요?”
“맞아요. 맞는데요….”
“나 이용해요. 이용하다 나한테 빠지면 더 좋고요.”
“…”
“천천히 생각해줘요. 기다릴게요.”
차마 팀장님을 마주볼 수 없어서 고개를 숙이고 술잔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징- 울리는 짧은 핸드폰 진동에 약한 플라스틱 테이블이 떨렸다.
<회식 끝나면 전화해.>
도건이의 문자였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기쁘지 않은 고백은 처음이었다. 도건이가 보낸 문자를 계속 바라보았다. 도건이의 친절함이, 그가 날 걱정하는 것이 내 마음을 더 짓무르게 했다.
눈앞의 사람에게 고백을 받아놓고서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예의까지 사라져 버린 내 마음이 싫었다.
머리가 어수선했다. 고작 돌멩이였던 마음이 몸집을 불려 어느새 바위가 되어버렸다. 좋아하다보니까 더 좋아졌다. 이루지 못할 걸 알면서 커져만 가는 마음에 탈이 날 것만 같았다.
============================ 작품 후기 ============================
선추코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