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4 상실의 두려움 =========================
23화
도건이의 품에선 도건이의 익숙한 향이 났는데, 어깨에 걸쳐진 도건이의 슈트 재킷엔 담배냄새가 배어있었다.
그의 옷에서 나는 담배냄새에 옛날 생각이 났다. 예전에 우리가 대학생일 때 방학을 맞아 시골에서 함께 있었을 때였다. 우리가 친해진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도건이의 동생이 하룻밤 자고 가기 위해 시골에 왔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날 동생과 함께 지내라고 도건이와 만나지 않았었다.
우리 할머니 집과 도건이네 할아버지 집. 그리고 집 다섯 채와 작은 밭과 논이 모여 있는 작은 우리 마을을 지나 아래쪽으로 더 내려가면 또 몇 몇 채의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작은 마을이 있다. 그런 식으로 이어진 많은 작은 마을이 있는데, 그 각각의 마을에서도 전부 볼 수 있는 커다란 산이 하나 있다. 그 산 중반쯤에는 계곡물이 흐르고 있고, 그 계곡 옆에는 몇 개의 산소가 자리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우리 할아버지의 산소였다.
나는 그 날 오랜만에 할아버지 산소를 방문했었다. 할아버지 산소에 앉아 있으면 그 밑으로 계곡이 바로 보이는데 마침 계곡에 도건이와 도건이의 동생으로 보이는 사람이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발을 담그고 있었다.
끝없이 흐르는 시원한 계곡물 소리에 새가 울고, 벌레가 우는 작은 소리가 어우러져 마음까지 나른해지는 날이었다. 따사로운 햇빛은 당연, 그 날 최고의 손님이었다. 선크림을 바르지 않아 내일이면 햇빛에 익었을 내 피부가 상상됐지만, 어차피 방학이 끝나고 다시 학교에 돌아가면 다시 원래 피부로 돌아올 것이었다.
나는 할아버지 산소에 듬성듬성 자리 잡고 있는 잡초를 뽑으며 쌍둥이도 아닌데 많이 닮은 것이 신기한 도건이와 도건이의 동생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잡초 뽑는 것에 집중하자 물 흐르는 소리 사이로 그들의 대화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숲에서 담배를 왜 펴?!”
목소리는 굉장히 낮았으나 목소리의 주인이 당황한 것인지 음량은 높았다.
“뭐? 너도 줘?”
“개소리 말고 빨리 꺼.”
잡초를 뽑다 고개를 돌려 계곡 쪽을 보자 임도건 저 골초가 장소분간도 못하고 산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동생에게 한 소리를 들으면서도 도건이는 담배를 끌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도통 담배를 끌 것 같지 않아서 담배 끄라고 소리치려는 순간 갑자기 임도건이 동생의 얼굴에 대고 담배연기를 길게 뱉었다. 헐, 소리가 절로 나는 광경이었다.
도건이 동생의 얼굴이 마구잡이로 구겨져 있었다. 와, 완전 짜증나겠다 싶었다. 진짜로 어마어마하게 짜증이 난 것 같아 보이는, 도건이 보다 체격이 큰 도건이의 동생은 순식간에 도건이를 들어 물어 처박아 버렸다. 그러고선 이미 물에 젖어 꺼져버린 담배를 도건이의 손에서 뺏은 뒤에 가져와서 먹었던 것 같은 음료 캔 안에 넣어버렸다. 나는 순식간에 벌어진 그 광경을 보며 작게 웃었다.
“야. 미쳤냐?”
도건이는 동생의 발목을 발로 팍 밀쳤다. 넘어져서 물어 빠지길 바랐던 것 같았으나 도건이의 동생은 한 번 휘청거리기만 하고 넘어지진 않았다. 넘어지지 않는 동생의 발목을 계속 발로 차는 도건이에게 도건이의 동생은 하지 말라고!!! 소리치며 몇 번이나 도건이를 물에 담금질 해버렸다. 다 큰 남자 둘이 물에 빠지고 첨벙대자 물길이 크게 튀었다. 물 밑에 고요히 있던 흙들이 갑작스런 침입에 흩어지며 물을 뿌옇게 만들기 시작했다.
점점 흙탕물이 되어가는 계곡에 있는 도건이와 도건이의 동생을 보며 나는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도건이는 나와 함께 있을 때 보다 많이 고약하고, 행동이 거칠어 보였다. 그동안 내가 보아왔던 임도건이란 사람과는 완전히 딴 판이었다. 그래서 이제 보니 웃기고 신기한 애라고 생각했었다.
나한텐 내숭떠는 거였나 싶다가도, 나와는 아직 저 정도로 안 친한가 싶기도 했다. 가까운 사람한테 저렇게 담배연기를 막 뱉어내는 사람과는 더 가까워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다가도, 이상하게 못돼먹은 행동을 보면서도 더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쩌면 내가 했던 그 이상한 생각은 늙어서도 장난꾸러기였던 우리할아버지가 내게 친 작은 장난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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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도건입니다.”
“반갑습니다. 신태완입니다.”
두 사람은 악수를 했다. 팀장님은 언제나 그렇듯 단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 옆에 서있는 도건이의 얼굴은 도건이 쪽을 비추는 조명 덕에 어두워져 보이지 않았다.
빛에 따라 살짝 살짝 보이는 도건이의 표정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가식적인 영업용 얼굴이었다. 처음엔 어쩐지 초조해 보이는 느낌이어서 의아했으나, 아무래도 내가 잘 못 봤던 것 같았다.
두 남자는 명함을 주고받았다. 명함을 주고받더니 도건이는 가봐야 한다며 급히 날 이끌고 어디 론가로 걸었다. 어디 가는 건지도 알지 못한 채 나는 서둘러 팀장님께 인사를 했다. 어느 정도 팀장님과 멀어지자 도건이의 발걸음이 늦어졌다.
“어디 가는 거야?”
“집 안에.”
“엥? 들어가도 돼?”
“내가 살던 집인데 안 될 게 뭐야. 너 지금 추워서 떨고 있잖아.”
도건이가 재킷을 덮어준 덕에 어깨는 이제 별로 춥지 않았지만, 무릎 위까지 찢어진 드레스라 다리가 많이 시리긴 했다.
“근데, 다시 담배 펴?”
내 물음에 도건이가 내 걸음에 맞춰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재킷 소매를 들어 냄새를 맡았다.
“같이 있던 사람이 담배 펴서 그래.”
“난 또. 다시 담배 피는 줄 알았어.”
“다신 담배 안 펴.”
도건이가 금연을 한지 한, 4년 정도 된 것 같다. 4년 전 어느 날 도건이는 갑작스레 금연선언을 해왔다. 담배를 오래 펴 왔다고 들어서 쉽게 못 끊을 줄 알았으나 도건이는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담배를 끊었다. 대신 도건이는 미친 것처럼 차를 마셨다. 그는 담배를 폈던 것만큼 온갖 차를 질리도록 마셔댔다.
우엉차, 도라지차, 국화차, 연잎차 등등등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차가 도건이의 집에 영역을 넓혀갔다. 지금도 우리가 함께 사는 도건이의 집엔 다양한 종류의 차가 구비되어 있었다. 그래서 도건이한텐 가끔 그가 마시는 차향이 났다.
어느 날은 씁쓸한 향이 나기도 했고, 어느 날은 꽃 향이 났다. 보리차에서 나는 것 같은 구수한 향이 나는 날도 있었다. 금세 사라져 버리는 향이었지만 담배냄새보단 훨씬 좋았다. 도건이에게선 늘 그가 마시는 차에서 비롯된 편안하고 은은한 향이 났다.
“저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방 하나뿐인데 거기에 들어가 있어. 마실 것 좀 챙겨갈게.”
“응.”
도건이의 말을 따라 도건이가 말한 방에 들어섰다. 커다란 침대와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은 휑한 책상이 있었다. 침대 옆에는 두개의 푹신해 보이는 의자와 테이블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 가서 앉았다.
의자에 앉아 앞을 보니 책장에 여러 책이 꽂혀있었다. 많은 책들 사이에서 고등학교 교과서가 눈에 들어왔다. 교과서를 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어서 신기한 마음에 수학책을 뽑아들었다. 표지에 임도건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이곳은 도건이 방이었나 보다.
오랜만에 고등학교 수학책과 과학책을 뒤적이며 보고 있자 노크소리 뒤에 도건이가 들어왔다. 도건이의 한손엔 쟁반이 들려있었는데 쟁반 위에 있는 찻잔 두개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오, 무슨 차야?”
“생강차.”
“엑. 생강차 맛없는데.”
도건이가 차가 담긴 쟁반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전에 먹었던 생강차의 맛이 떠올라 얼굴을 찡그리자 도건이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너 감기 안 걸리려면 마셔야 돼.”
결국 난 보던 교과서를 제자리에 꽂아놓고 테이블 가까이에 갔다. 테이블 가까이에 가자 생강차 향이 코를 확 찔러왔다. 진하게 우린 것 같았다.
먹기 싫었지만, 끝까지 어떻게든 먹일 도건이를 알기에 일찌감치 반항은 포기하고 의자에 앉아 차를 들었다. 생강차는 이렇게 뜨거울 때 마셔야 했다. 식었을 때 먹으면 혀가 더 아리다.
생강 특유의 맛과 알싸함이 입안을 맴돌았다. 그래도 따뜻해서 인지 몸이 녹아가는 것 같았다. 생강차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을 때 도건이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김호신 동생 만났다며.”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다. 도건이한텐 말 안할 생각이었는데….
“어떻게 알았어?”
“김호신이 말해줬어. 미안해 다음부터 그런 일 없을 거야.”
“난 괜찮아. 근데 김호신씨 동생이 널 많이 좋아하는 것 같더라. 우리 서로 좋아해서 한 결혼 아니라고 말해줘.”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는 혹시나 들킬까 싶어 눈을 깔고 생강차를 마셨다. 어쩐지 노려보는 것 같은 도건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런 걸 말해줄 사이 아니야.”
“애인을 불안에 떨게 하면 어떡해.”
“애인? 무슨 소리하는 거야?”
“김호신씨 동생이랑 만나는 거 아니야?”
“아니야. 그런 거. 사귄 적 없어.”
그럼 예전에 둘이 키스했던 건 뭐냐고, 더한 것도 했다고 하던데 그건 또 뭐냐고 묻고 싶었다. 어쩐지 어두워진 도건이의 표정이 김호신씨 동생을 잊지 못해 그러는 것 같아서 더 물을 수가 없었다.
나와 결혼하느라 억지로 헤어졌나? 아니, 아닐 거다. 결혼은 도건이가 독촉한 것이었다. 그럼 도건이는 세상의 질타에 대항하기 보다는 안정된 삶을 원했던 걸까? 그래서 김호신씨 동생과 헤어지고 나를 선택한 걸까?
8년이나 도건이와 친구로 있었는데, 그에 대해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8년 동안 내게 만나는 사람이라고 누굴 소개해준 적이 없었다. 그는 내 연애내력을 다 알고 있는데 말이다.
우리는 한 동안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도건이도 나도 말없이 차만 들이켰다.
쓰디 쓴 생강차의 냄새만 우리 사이를 맴돌았다.
============================ 작품 후기 ============================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