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3 상실의 두려움 =========================
22화
도건이와 나는 다시 파티장으로 들어섰다.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놓여 진 음식과 와인을 마시며 대화 중이었다. 우리가 파티장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이 도건이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도 적당히 도건이 옆에서 웃으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도건이와 내가 잠시 목을 축이고 있을 때 한 식품회사 사장님이 우리에게 다가와 인사를 하셨다. 사장님은 긴밀한 이야기라는 뉘앙스를 띄며 도건이와 둘이서만 대화하길 바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눈치껏 빠져 주려고 했는데, 내가 빠져주려고 하니 도건이는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앞에 계신 사장님 몰래 내게만 그런 표정을 짓는 도건이가 웃겨서 그 표정의 의미를 알면서 모르는 척 나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도건이가 그 사장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나는 음식이 차려진 곳에서 맛있어 보이는 음식 몇 가지를 주워 먹었다. 전부 핑거푸드뿐이라 맛있긴 했지만 배가 안차 속으로 배가 차는 양 많고 맛있는 음식들을 나열하고 있는데,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세상에. 우리 회사 홍보팀 신 팀장님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만나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자 신 팀장님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여기서 보니까 더 반갑네요. 두미씨.”
“저도요! 회사에서 마주칠 때보다 더 반가워요.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송화제약 운영하시는 부모님 대신해서 왔어요.”
송화제약…. 송화제약은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침략행위에 동조하며 부를 축적해 친일기업이라고 불리는 기업이었다. 게다가 희귀병 치료약을 개발한 뒤에 약을 독점해서 어마어마한 가격에 팔아 사람들의 지탄을 받았던 곳이기도 했다. 나쁜 이미지인 기업이지만, 독점하고 있는 약도 많고, 특허권도 많아 악명이 자자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기업 수익은 같은 계열의 다른 회사들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아…송화제약이요.”
“저도 부모님 경영하시는 거 부끄러워서 부모님 회사 안 들어가고 지금 회사에 있는 거예요. 낙하산 소리 듣기 싫기도 했고요. 이런 파티에 끌려 다니는 것도 싫어했고요.”
“그럼 여기도 억지로 오신 거예요?”
“아니요. 사실 여긴 제가 가겠다고 통보하고 와버렸어요. 왠지 두미씨 만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임산그룹 장손이름이 임도건이란 걸 기억하고 있었어요. 두미씨 결혼할 때 두미씨한테 청첩장 받고 신랑이름 보고 혹시나 했는데, 집으로도 같은 청첩장이 와서 확실히 알았죠.”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팀장님이 꼭 오직 나를 보기 위해 왔다고 말하는 것 같아 갑자기 싸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아닐 거다. 신 팀장님이 왜 날?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기 위해 급히 고개를 돌려 맛있었던 와인 하나를 팀장님께 따라드렸다. 작은 바람이 불어왔다. 늦여름이라 저녁이 되니 쌀쌀했다.
“이거 맛있더라고요. 마셔보세요.”
내가 와인 잔을 건네자 팀장님 감사하다며 와인 잔을 받고는 한 모금 마셨다. 팀장님은 와인의 맛을 보고 괜찮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이제 두미씨 임산그룹 안주인 되는 거예요?”
“네? 아니요…가 아니라 그렇네요. 제 남편이 임산그룹 후계자란 게 그런 의미이기도 했네요.”
“별론가 봐요?”
“별로라기보다는 많이 와 닿지가 않아요. 남편이 임산그룹 물려받는다 해도 저는 뭐 딱히 달라질게 없으니까요.”
사실 도건이가 임산그룹을 물려받게 되면 우리 사이는 달라진다. 도건이는 임산그룹이 갖고 싶다고 했다. 도건이가 임산그룹을 갖게 된다면 우린 이혼한다. 그게 우리가 결혼하는 조건이기도 했다. 내가 임산그룹 안주인 노릇을 할 기회는 아마 없을 것이다. 평생,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혼을 해도 내가 도건이를 제대로 볼 수 있을까? …나는 더 이상 도건이나 임산그룹에 관한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바꿔 팀장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참 팀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내 뒤에서 불쑥 누군가가 다가와 내 옆에 섰다. 도건이였다.
도건이는 내 어깨에 정장 재킷을 얹어주었다. 귀신같이 추워 하는 건 어떻게 알고…. 민소매 드레스라 점차 저녁이 되어가니 쌀쌀했는데, 꼴사납게 추위에 떨고 있는 모습을 보이면 괜히 도건이만 욕먹을까 싶어 내색 하나 안했는데 도건이는 내가 추워하는 것이 보였나보다.
도건이는 내 어깨에 옷을 얹어주며 그대로 팔까지 둘러 자신의 품으로 날 살짝 끌어당겼다. 도건이 품에서 나는 편안한 향이 내 코끝을 맴돌았다. 도건이는 나를 안고 팀장님께 자신의 소개를 하며 손을 내밀었다.
“임도건입니다.”
“반갑습니다. 신태완입니다.”
두 사람은 악수를 했다. 팀장님은 언제나 그렇듯 단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 옆에 서있는 도건이의 얼굴은 도건이 쪽을 비추는 조명 덕에 어두워져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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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건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먼저 담배를 피고 있던 호신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웬일? 벌써 몇 년 전에 끊었잖아.”
“피는 거 아냐.”
도건은 자신의 회사에 투자해 달라는 이름도 기억 안나는 식품회사 사장에게 한 동안 붙잡혀 있느라 두미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막을 수 없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두미는 남자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 남자는 분명 두미네 회사 홍보팀 팀장인 신태완이었다. 두미는 가끔 저 남자와 술을 마셨다고 했었다. 두미가 회사에 좋은 술친구가 생겼다며 기뻐했던 안 좋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까까지만 해도 표정이 좋지 않아 걱정시키더니, 저기선 또 저렇게 웃어서 사람 속을 뒤집어 놨다. 확신하건데, 두미는 몰라도 저 남자는 두미에게 관심이 있었다. 도건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호신은 도건의 시선을 따라 어떤 남자와 함께 있는 두미를 보며 도건에게 물었다.
“빡쳐?”
“그냥…이번엔 연애하는 걸 지켜보기만 할 자신이 없어서.”
도건은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두미는 감정을 잘 숨기는 편이 아니어서 이렇게 멀리서 지켜보다보면 저 남자한테 관심이 있는지, 그저 친한 회사 상사로서 생각하는 건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도건은 두미와 결혼했으니 이젠 두미가 자신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안심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울타리 안에 갇힌 건 자신이었다. 혹여나 외로워져서 연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까봐 그런 생각이 안들만큼 함께 있어줬다고 생각했는데…. 혹시나, 두미가 저 남자한테 관심이 생기진 않을까 하는 음울한 생각이 머리를 잠식했다.
두미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도건의 팔을 담배를 태우던 호신이 갑자기 주물러댔다.
“올. 요새도 운동 열심히 하나보다. 팔 근육 장난 아닌데?”
“더 만들고 싶은데 이제 근육이 잘 안 붙어.”
대답하면서도 도건의 시선은 여전히 두미에게 향해있었다.
“여기서 더? 안돼. 지금이 딱 좋아.”
“두미가…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진 남자를 좋아하더라고.”
“아, 미친…. 대단한 사랑꾼 납셨네. 여태 열심히 운동한 이유가 그거였냐? 나는 또 성욕 오를 때마다 운동한 줄. 너 두미씨 좋아한 뒤로 안했지? 한 번도.”
“대신 운동을 했지. 나름 좋은 해소 방법이더라고.”
“하, 그 운동 몇 년 만 일찍 하지 그랬냐. 그럼 고딩 때 그 양아치 놈들이 우리한테 시비 걸 일 없었을 거 아냐. 너나 나나 키만 커서 삐쩍 꼴아 가지고 있는 집 자식들인 거 몰랐으면 우린 백 번 넘게 줘터졌겠지.”
“아직도 그때 돈 뺐긴 게 분하냐?”
“어! 내가 오토바이사려고 엄마 몰래 얼마나 열심히 모은 돈이었는데!”
학창시절의 일들을 떠올린 호신은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나고 억울했는지 씩씩 대며 아직 덜 태운 담배를 바닥에 내팽개쳐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담배를 발로 막 비벼 남은 불씨를 제거하다 분이 조금 풀렸는지 호신은 벽에 기대며 다시 담배하나를 꺼냈다. 불을 붙이고 담배를 한 번 빨아들이는 호신의 눈에 두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자꾸 밟혔다.
“근데 저 남자 누구? 처음 보는 데 완전 내 스타일. 두미씬 좋겠다 저런 사람도 알고.”
“송화제약 막내. 두미네 회사 홍보팀장이기도 하고.”
“둘이 막 그런 사이 일까봐 겁나지? 내가 저 팀장님 꼬셔볼게 걱정 마. 완전 내 스타일이니까.”
“딱 봐도 우리 쪽 아니니까 괜한 짓 하지 마.”
“나도 보이거든 스트레이튼 거. 근데 겁나 내 스타일이라고. 저 단정한 웃음이 침대에선…막, 막…. 허으. 흐흐흐.”
몸을 배배꼬는 호신을 보며 도건은 눈을 찌푸렸다.
“머리에 그 생각밖에 없지?”
“이런 생각이라도 생각하는 게 어디냐. 생각 없이 사는 것보다 낫겠지.”
호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도건은 두미의 몸이 살짝 떨리는 것을 보았다. 저렇게 어깨가 휑한 드레스를 고를 때 말렸어야 했다.
“나 간다.”
“엉~”
이층 발코니에 있던 도건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며 슈트의 재킷을 벗었다. 저 미련한 게 추우면 집 안으로라도 들어올 것이지 추운 걸 참으며 꿋꿋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미는 유난히 감기에 잘 걸렸다. 저렇게 제 몸 아낄 줄도 모르니까 계절 마다 빼먹지 않고 감기에 걸리는 거다.
도건은 한숨을 쉬며 두미에게 다가가 어깨에 자신의 재킷을 걸쳐주었다. 그리곤 제 품으로 살짝 끌어안았다.
사실 끌어안을 생각은 없었으나, 막상 가까이서 신태완과 함께 있는 두미를 보니 유치한 질투심이 솟았다. 그래서 알려줘야 했다. 눈앞의 남자에게. 이두미가 지금 누구의 품에 있는 것인지를 말이다.
============================ 작품 후기 ============================
선추코 감사합니다!
아스모엘님, 인시온님, 설탕맛소금님, 새윰님, 0seul0님, Felice님, 아주특별한행복님, 이아라님 코멘트 감사해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