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2 상실의 두려움 =========================
21화
“뭐야, 안 온다며.”
“난 안 오려고 했지…근데 그럴 수가 있어야지. 알잖아?”
남자와 도건이는 굉장히 친해보였다. 도건이가 나 이외의 누군가에게 저렇게 친근하게 구는 것은 처음이었다. 저 밑바닥으로 떨어진 심장이 자꾸만 불안을 속삭여 왔다.
점점 다가와 나와 도건이의 바로 앞에 서게 된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내게 작게 목례를 했다.
“그럴 줄 알았다. 여긴”
알~아! 남자는 내 소개를 하려는 도건이의 말을 자르며 활짝 웃었다. 남자는 드디어 날 만났다며 기뻐했다. 남자는 거리낌 없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도건이를 좋아하는 걸까? 나 같은 건 연적조차 되지 않아서 저렇게 거리낌 없이 웃으며 반가워하는 건가?
“반갑습니다. 김호신이에요.”
“네. 반갑습니다. 이두미입니다.”
“결혼식 때도 뵀었는데 인사 못 나눠서 아쉬웠어요. 오늘도 예쁘시네요. 저 도건이랑 중학생 때부터 친구였어요. 저희 완전 친해요! 학생 때 찌질 했던 임도건을 알고 싶으면 저한테 다 물어보세요.”
김호신씨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싱글싱글 웃어댔다.
“아…네.”
도건이와 자신이 친하다고 자랑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우린 이만큼이나 친한데 넌? 넌 네가 도건이를 다 안다고 생각해? 하고 날 비웃는 것 같았다.
한 번 비틀린 생각은 좀처럼 제자리를 찾기가 힘들었다. 김호신씨의 말과 행동은 내게 진심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김호신씨의 말에 도건이가 찌질 했던 건 너였지 라며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응수했다. 가까운 사람을 대하는 도건이의 표정에, 둘이 웃으며 하는 대화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도건이의 옆에서 나는 가까스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서있었다. 내 마음이 불편했다. 도건이를 좋아하는 내 감정이, 이 상황에서 태연스럽게 미소를 지을 만큼의 가면 하나조차도 만들지 못하게 했다.
내 어색한 얼굴을 눈치 챘는지 김호신씨와 대화를 나누던 도건이가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힘에 상념에서 벗어나 그를 보았다.
“왜 그래? 갑자기 안색이 안 좋은데?”
도건이가 작게 속삭였다. 걱정스런 도건이의 표정에 나는 간신히 변명을 찾았다.
“아, 그 발이 좀 아파서. 힐이 너무 높네.”
“그럼 저쪽에 앉자.”
“일단 할아버님께 인사먼저 드리자.”
“괜찮겠어?”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건이는 내가 그냥 의자에 앉아있길 바란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알았다고 했다.
“우리 할아버지께 가봐야겠다.”
“어. 나중에 얘기하자. 또 봐요 형수님!”
김호신씨의 인사에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김호신씨와 헤어지고 우리는 할아버님께 가서 인사를 드렸다. 할아버님 주변에는 많은 분들이 계셨다. 그 분들께도 인사를 드렸더니 도건이는 할아버님 주변에 계셨던 분들한테 잡혀버리고 말았다.
나는 도건이의 옆에서 어르신들께 인사를 드리고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도건이를 버리고 뒷마당으로 가는 길목에 놓인 벤치에 잠시 앉아 숨을 돌렸다.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나는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하는 게 처음이어서, 짝사랑은 처음이어서 상대의 연인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것이 불편했고, 슬펐고, 아팠다. 게다가 표정관리도 안돼서 괜히 날 더 못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가슴도 아팠고, 이젠 발까지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아까는 단순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변명이 이었지만, 걷다보니 정말로 높은 힐에 발이 아팠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나는 안심하고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발밑에 두었다. 오랜만에 혹사당한 종아리가 뻐근했다.
종아리를 주무르고 있는데 검은 그림자가 내 앞에서 다가왔다. 고개를 들었더. 김호신씨 였다.
“야. 너 나 알지?”
아까와는 판이하게 다른 태도와 말투에다가, 표정마저도 달랐다. 인상자체가 달라보였다. 사람이 한 순간에 어떻게 저렇게 바뀌지?
“도건이랑 결혼하니까 좋냐?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 내가 뺐을 거야. 이혼 한 번쯤은 흠도 아니니까.”
그는 발밑에 벗어놓은 내 구두를 발로 차 쓰러트려버렸다. 황당함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발길질에 옆으로 간단하게 쓰러져 버린 구두를 허망하게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김호신씨를 봤다.
자신이 뺐을 거라고 당당하게 한 말과는 달리 분한 듯 입술을 짓이긴 김호신씨는 무언가에 쫓기는 듯 급박해 보였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 빠르게 말했다.
“너도 봤겠지만 우린 키스도 했고, 더한 것도 했어. 그러니까 괜히 도건이 붙잡고 있지 말고 놔줘.”
말을 마친 김호신씨는 표독스런 표정을 유지하며 급하게 뒤뜰로 가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이 상황이 황당했다. 저렇게 말하고 싶은 걸 어떻게 참았을까? 아까 나를 만나서 기쁘다는 듯이 행동했던 김호신씨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가면을 쓴 게 아니라 이중인격인 것처럼 보일 정도로 처음 봤던 김호신씨와 지금 내게 다녀간 김호신씨는 너무나도 달랐다.
어이없는 마음이 가라앉고 나니 그제야 김호신씨가 급히 내던지고 간 말이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더한 것도 했다니…. 의심은 했었지만, 그 의심이 실제라는 말을 확인받으니 속이 아리다 못해 쓰렸다. 혹여 그것이 한 번이었다 해도, 나는 한 번도 갖지 못할 경험이었다.
기둥 사이 틈새로 파티장 안의 도건이가 보였다. 괜히 도건이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우울한 기분으로 도건이를 빤히 보고 있자 파티가 열리는 그 곳에서 김호신씨가 내 쪽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 김호신씨가 뒤뜰로 사라진지 1분도 채 안된 것 같은데…?
“두미씨.”
어느새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 나를 부르는 김호신씨의 부름에 대답도 못하고 아까 그가 사라졌던, 파티장과는 반대편에 있는 뒤뜰로 가는 길목을 바라보았다.
“두미씨?”
내가 대답도 없이 딴 곳을 바라보자 김호신씨는 왜 그러냐는 듯이 다시 한 번 나를 불렀다.
“어, 그게…제가 방금 김호신씨를 만났거든요. 근데 방금 저쪽으로 가셨으면서 어떻게….”
“아…설마. 제 동생 보셨구나. 걔가 저보단 키가 좀 더 크고 호리호리해요. 요샌 서로 인상이 많이 달라져서 닮았단 얘기 잘 못 들었었는데, 또 이렇게 들으니까 나름 재밌네요.”
“네? 그러면 혹시 쌍둥이?”
“맞아요. 근데…. 혹시 제 동생이 이상한 말을 하고 갔나요? 어…. 예를 들면 도건이 옆에서 떨어지라던가…. 도건이가 자기 것이라던가, 아니면 이혼하라던가 뭐, 그런 말들이요.”
“아…. 네. 뭐 비슷한 말을 듣긴 했는데. 너무 당황스러워서 대꾸도 못 했어요. 김호신씬 줄 알아서 너무 충격이어서.”
“죄송해요. 제가 한 번 잘 팰게요. 그리고 걱정 마세요. 도건이는 제 동생한테 눈곱만큼도 관심 없으니까.”
눈곱만큼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키스를 나눈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관심도 없는 사람이랑 관계를 나눈 다는 것도 이상했다. 김호신씨는 몰랐겠지만, 도건이는 분명 김호신씨의 동생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너무 미안해 보이는 김호신씨의 표정에 내 생각을 말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아까 처음 만났을 때 괜히 날이 선채로 김호신씨의 호의를 왜곡한 것이 죄송하기도 했다. 그래서 별 신경 안 쓰인 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참, 도건이가 저 할배들 무리에서 빠져나오면 5분만 빌릴게요. 얘기 끝나면 여기로 보낼 테니까 여기 있으세요.”
“네.”
김호신씨가 가고 나는 김호신씨의 동생과 도건이는 도대체 무슨 관계인 걸까 생각하다 하늘을 봤다. 어느새 어두워진 밤하늘에 별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이는 별은 몇 개 없었다. 별자리를 찾아 볼 수도 없을 만큼 하늘은 흐렸다. 환하게 파티장을 밝혀주는 조명이 없었다면 달마저 안 보이는 흐린 하늘에 이 정원은 암흑이었을 것이다.
어두운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어느새 도건이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내 앞에 꿇어앉고는 내 발을 살폈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도건이의 손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 마. 발 괜찮아.”
내 만류에도 도건이는 내 발을 잡고 천천히 마사지를 해 주었다. 나는 혹시라도 도건이가 맞을까 봐 그의 손에서 거세게 발을 빼지 못한 채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발에서 느껴지는 그의 따뜻한 손길에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의 체온이 마음까지 간질이는 것만 같았다.
내 발을 천천히 주무르는 도건이를 보며 나는 일전에 카페에서 웃으며 대화를 나눈 상대가 김호신 씨였는지, 그의 동생이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도건이에게 그 질문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안다.
문득 도건이의 정수리가 눈에 들어왔다. 쌍가마는 아니네…. 쓱쓱- 도건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발등을 꾹꾹 누르던 손의 잠시 멈췄다. 그러나 멈춘 것은 잠시였고 발을 주무르는 것은 계속되었다. 내 발목을 이리저리 돌리다 갑작스레 고개를 들어 날 본 도건이 내게 물었다.
“근데 별도 안 보이는 하늘은 왜 보고 있었어?”
“그냥. 너무 흐려서….”
“외할아버지 댁에 가고 싶다. 거긴 네가 좋아하는 별 엄청 많이 보일 텐데.”
“응. 뒷동산에 올라가서 봐야하는데.”
“맞아. 바위에 앉아서.”
“안가본지 오래됐다.”
“다음에 휴가 맞춰서 내려갈까?”
“응! 꼭!”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발길을 끊었던 내 고향마을은 이렇게 지칠 때면 늘 생각이 났다. 오랜만에 도건이와 고향에 내려가면 이 불안정하고 불안한 마음도 진정될지도 모른다.
한참이나 도건이의 마사지를 받다가 엉덩이를 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건이는 이 파티의 주인이기도 했기에 이렇게 나와 농땡이 부려서는 안 된다. 임산그룹을 가지고 싶다고 했으면서 도건이는 참 여유로웠다.
마냥 이곳에 앉아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은 도건이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임산그룹이 탐나면 가서 얼굴도 많이 비추고 그래야 한다고 말하며 도건이의 팔짱을 끼고 우리는 다시 함께 파티장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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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