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1 상실의 두려움 =========================
20화
“오늘 안 좋은 일 있었어?”
뜬금없는 도건이의 말에 오늘 하루의 일들이 스쳐지나갔다. 물론, 도건이가 전 애인을 만난 덕에 괜한 잡스러운 생각이 들어 연구가 잘 되진 않았지만, 그것 말고는 안 좋은 일은 딱히 없었다. 오히려 오랜만에 편하게 신 팀장님이랑 인터뷰를 빙자한 사담을 나누느라 즐겁기도 했다. 그 덕에 그 때 만큼은 도건이에 대한 생각을 멀리할 수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왜?”
“혼자 가고 싶어 하는 것 같길래. 당분간은 혼자 가고 싶어도 참아. 그 일 있었던 게 한 달도 안됐어.”
도건이가 말하는 그 일이란, 내가 성범죄자한테 걸려 납치될뻔해 다리까지 다쳤던 그 일이었다. 물론, 나도 당시의 일이 여전히 무서웠다. 그럼에도 도건이한테 혼자 가겠다고 한 건, 그가 끝까지 내게 기다리라고, 절대 혼자가지 말라고 붙잡고 늘어질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같이 갈 거면서 괜히 심술이 나서 한 번 투덜대 보았던 것이다.
“그건 그냥. 잠깐…. 미안해. 그냥 심술 좀 부려 본거야.”
“갑자기 왜? 나한테 뭐 화났어?”
아니. 네가 잘못한 게 뭐가 있냐. 내가 문제다. 내가 문제야…. 속으로 말 못할 한숨을 쉬고 있자 어느새 집에 도착해있었다. 시동을 끄고 도건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눈이 마주치자 급히 고개를 돌려 차문을 열고 나가려했다.
낮은 음성으로 도건이가 내 이름을 부르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이두미. 진짜 아무 일도 없고, 나한테 뭐 화난 것도 없어?”
“없어. 없다고. 집에나 가자.”
“근데 왜 자꾸 마주보는 걸 피해?”
네 얼굴 보기가 부끄러워서 그런다! 요새 도건이는 뭘 먹는지 점점 멋있어져서 곤란했다. 안 그래도 잘 생겼던 얼굴이 날이 갈수록 더 빛이 나서 심장이 시도 때도 없이 흥분해 날뛰고 있었다.
“내가 언제 피했다고 그래. 배고프다. 빨리 가서 밥 먹자. 아줌마가 오늘 샤부샤부 해놓는다고 하셨어.”
도건이를 피해 황급히 차에서 내린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지만, 어차피 엘리베이터를 도건이와 같이 타고가야 한다는 걸 깨달아버렸다. 갈수록 멍청이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천천히 걸어와 내 옆에 선 도건이 팔짱을 끼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내려다 봤다.
“진짜 이상한데.”
“뭐가?”
나는 끝까지 도건이를 쳐다보지 않았다. 나는 빨리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좀처럼 오지 않는 엘리베이터에 괜히 어색해서 눈알만 요리조리 굴리고 있는데 갑작스레 도건이가 물었다.
“옷은 골랐어?”
“옷? 아! 아니…이따가 가서 봐야겠다.”
이번 주말에 임산그룹 창립 50주년 기념행사가 열린다. 가족들과 중요한 거래처 분들, VIP고객들만 초청해서 하는 조촐한 파티라고 하는데 나는 그 파티가 절대 조촐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도건이는 임산그룹의 장손이었고, 나는 그의 부인이기에 우리는 그 파티에 참석해야만 했다.
문제는 내가 그런 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가 없었다는 것이다. 옷을 진작 사러갔어야 하는데 바빠서 쇼핑하러 가는 게 계속 미뤄지다가 결국 나중엔 다리를 다쳐 옷을 사러갈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벌써 이번 주말이 파티 날이었고 평일엔 갈 시간이 없으니 결국 인터넷으로 보고 고르기로 한 것이다.
체면 문제가 있으니 명품숍에서 드레스를 고르는데 가격이 어마어마했다. 사실 그래서 못 고르고 있었다. 도건이가 드레스에, 신발에, 맞는 가방에 어울리는 주얼리까지 고르라고 했는데…그걸 다 사면 진짜 엄청난 금액이 되어버려서 결제도 못하고 질질 끌다가 오늘까지 와버린 것이다. 도건이 돈이라 더 주저하고 있었다.
집에 와 저녁으로 차려진 샤부샤부를 맛있게 다 먹고는 거실에 도건이와 함께 앉아서 내 드레스를 찾아봤다.
“나 이런 옷 입어본 적 없어서 뭐가 어울릴지 모르겠어.”
“세 벌? 네 벌 정도 사자 그럼. 입어보고 맘에 드는 걸로 입고가면 되니까.”
“아니, 아냐! 괜찮아! 심사숙고해서 한 벌만 고를게. 그게 나을 것 같아.”
도건이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래도 여러 벌 사는 게 좋지 않겠냐고 했지만, 옷을 네 벌 사면 그 네 벌에 맞는 신발과 액세서리 등등을 또 따로 사라고 할 그를 알기에 나는 질색하며 아니라고 무조건 한 벌만 고를 거라고 못을 박았다.
“와, 진짜 못 고르겠어.”
“그러면 그냥 당일 날 매장 가서 입어보고 결정해도 돼.”
“내가 일찍 일어날 자신이 없어…. 머리하고 메이크업 하는 시간만 해도 긴데, 옷까지 당일 날 고르는 거면 몇 시에 일어나야 하는 거야.”
우으으, 나는 말끝을 흐리며 울먹이는 척을 했다. 나는 의미 없이 마우스 휠을 마구잡이로 굴리다가 결국 노트북을 도건이 쪽으로 밀어버렸다.
“네가 한 번 봐봐 뭐가 어울릴 것 같아?”
“음…. 넌, 키가 좀 작은 대신 허리가 얇고 골반이 예쁘니까 장점인 허리랑 골반을 부각 시키고 키도 커 보일 수 있는 시스라인드레스가 좋을지도.”
“시스라인?”
“H라인 드레스.”
“아하! 좋아 찾아볼게. 오, 이거 예쁘다.”
나는 다시 노트북을 내 앞 가까이에 가져다 놓고 이리저리 훑어보다 발목까지 오는 h라인 드레스를 골랐다. 허벅지 아래부터 찢어져 맨다리를 들어내야 하는 진보라 빛 드레스는 확실히 다리가 길어 보이는 효과가 있는 듯했다.
무려 3시간만의 결정이었다. 드레스를 고르고 나니 액세서리나 가방을 고르는 건 일사천리였다. 왜냐면 드레스를 입고 있던 모델이 한 비슷한 액세서리와 가방, 신발을 골랐기 때문이다. 더 이상 생각할 만한 기운이 내겐 없었다.
“끝났다!”
옆에서 차를 마시던 도건이 날 보며 풋, 하고 웃었다.
---
힐끔 힐끔 자꾸만 훔쳐보듯 보는 도건이의 눈길이 거슬렸다. 이상한가? 거울 보니까 괜찮던데. 운전을 하는 건지 날 보는 건지 모르겠는 도건이가 신경 쓰여서 이상하냐고 물었다. 이상하면 그냥 말해주지 그렇게 눈치 줄 건 뭔가.
“나 이상해?”
“어?”
도건이가 화들짝 놀랐다.
“왜 아까부터 그렇게 힐끔 힐끔 봐 안 어울리면 안 어울린다고 말해줘.”
“아니야. 예뻐. 너무 잘 어울려.”
내가 입는 옷에 항상 불만투성이였던 우리 엄마도 도건이 보단 진정성 있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창가에 머리를 기댔다.
“영혼이 없어. 영혼이”
“진짜 예뻐. 진짜로 잘 어울리는데…그, 가슴 부분이 그렇게 파인 옷인 줄 몰랐어. 모델이 입고 있을 땐 그렇게 안파여 보였는데.”
“그래? 오, 내가 그 모델언니보다 가슴이 큰가 봐.”
이히히. 기분 좋게 웃자 도건이 떨떠름한 눈으로 날 힐끗 쳐다봤다.
“좋아?”
“나쁠 건 없지.”
내가 기뻐하는 게 웃겼는지 바람 빠진 헛웃음을 내뱉은 도건이 파티장에 거의 다 도착해 왔음을 알렸다. 파티가 열리는 곳은 도건이네 본가 앞마당이었다.
도건이와 결혼하기 위해 인사차 들렸을 때 마당이 쓸데없이 어마어마하게 크다고 생각했는데, 다 이렇게 쓰임이 있던 것이다.
파티장엔 사람이 꽤 많았다. 다들 멋지고, 예쁘게 차려 입고 와인 잔을 하나씩 들고 교양 있어 보이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야 내가 재벌이랑 결혼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눈으로만 이곳저곳을 훑어보고 있는 내 손을 잡은 도건이 나를 어딘가로 이끌었다.
“할아버지한테 인사먼저 드리고 오자.”
“아, 응.”
할아버님은 좀 먼 곳에서 다른 분들과 대화를 나누고 계셨다. 잘 심어진 잔디를 밟으며, 할아버님과 많이 가까워진 찰나에 누군가가 도건이를 불렀다.
“임도건!”
며칠 전에 카페에 도건이와 함께 있던 남자였다. 도건이네 집 앞에서 도건이와 키스를 나누던 그 강아지 말이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도건이 남자를 보았다. 강아지가 도건이를 향해 귀엽게 웃어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뭐야, 안 온다며.”
도건이가 남자를 마주보며 웃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혹시나 했던 불안한 상상이,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불안하게 울렁거렸다.
============================ 작품 후기 ============================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