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0 상실의 두려움 =========================
19화
회사 점심시간에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니 달달한 후식이 먹고 싶었다. 소연씨도 먹고 싶다기에 소연씨와 나는 꽤 유명한 빵집에 가서 팀원들과 나눠 먹을 간식을 사고 다시 회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곳은 회사가 밀집되어 있는 구역이었고 도건이네 회사와 우리 회사는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소연씨와 내가 간 빵집은 도건이네 회사에서 좀 더 가까운 빵집이었고, 나는 빵집에서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한 카페에서 어떤 남자와 함께 있는 도건이를 봤다.
나는 딱 두 번, 도건이가 사귀었던 남자들을 본 적이 있다. 우리는 시골에서 만난 뒤에 친해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처음에 통성명을 할 때 나는 도건이의 이름을 듣고 설마 했다.
한국대학교에서 ‘임도건’은 유명인이었다. ‘임도건’은 성별에 관계없이 자연스럽게 눈길을 끄는 수려한 외모와 깐깐한 교수님들한테도 A+을 받아오는 명석함도 물론 유명했지만, 가장 그를 유명하게 했던 건 그가 게이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임도건’이라는 학교의 유명인에게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나와 같이 다니던 내 대학 동기는 그런 소문을 재미있어했고,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나는 동기로 인해서 그와 관련된 많은 소문들을 들어왔었다. 그때 들었던 소문으론 도건이가 만났던 남자는 수도 없이 많다고 했지만, 내가 그와 친구가 된 후에 그가 사귀는 남자를 본건 단 두 명뿐이었다.
둘 다 도건이가 소개를 해준 것은 아니었다. 사귀었던 사람 중 한 명은 우리가 아직 대학생일 때 방학을 맞아 시골에서 만났을 때 보았다. 남자는 도건이가 횡성으로 내려왔을 때 기어코 도건이를 쫓아서 횡성까지 왔었다. 도건이는 자신을 뒤쫓아 온 상대를 무시했다. 싸늘하게 꺼지라고 하며 성가시게 굴지 말라고 했다. 남자는 이렇게 우리사이를 끝낼 수 없다며 도건이 다리에 매달려 울부짖었다.
예쁜 얼굴의 남자가 울며 매달리는 것이 보호본능을 자극해와 지켜보던 나는 그가 안쓰러웠지만, 도건이는 아니었는지 온갖 독설을 내뱉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에 비해 도건이도 성격이 참 많이 유해졌다.
도건이가 사귀었던 또 다른 한 명은 내가 취직에 성공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도건이네 집에 갔다가 보게 되었다. 나는 도건이네 집에서 도건이와 함께 술을 마시고 도건이네 집에서 잠을 잤었다. 술을 마신 그 다음날엔 옷도 못 갈아입고 어제와 같은 옷으로 도건이네서 바로 회사로 출근했던 나는 점심시간 때쯤 중요한 연구 발표대본이 담긴 노트북을 도건이네 놓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이 발표 날은 아니었지만, 손볼 곳도 있고 해서 점심시간에 맞춰 도건이의 집에 갔다가 나는 도건이와 어떤 남자가 키스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말았다. 집 문 앞에서 하고 있었는데, 도건이는 날 보곤 당황했는지 남자를 떼어냈고, 떼어진 남자는 나를 한 번 째려보고는 가버렸었다.
그때 도건이에게 혹시 애인이 우리 사이를 오해한 거면 어떡하냐고 걱정 어린 말을 했었으나 도건이는 걱정 말라며 내 손에 노트북을 쥐어주고는 회사까지 데려다 줬었다.
그러니까 지금 도건이와 마주앉아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저 남자는 두 번째 남자였다. 도건이의 집 앞에서 도건이와 키스를 하던 남자 말이다.
내 시선을 따라 카페를 본 소연씨가 어? 하고 놀라며 물었다.
“혹시 대리님 남편 분 아니세요?”
“맞아요.”
설마 다시 만나는 건가? 가슴이 이상하게 울렁거렸다. 왠지 모르게 초조해졌다. 기분이 나빴다. 결혼하고 나면 후계자 수업으로 바쁠 거라더니…. 거짓말쟁이.
도건이와 함께 있는 남자는 웃을 때 보조개가 들어가는 게 귀여웠다. 강아지 같은 큰 눈이 반짝거리는 게 깜찍했다. 저런 사람이 도건이의 타입인가? 생각해보면 도건이가 사귀었던 두 명 모두 강아지를 닮은 예쁘고 귀여운 타입이었다.
나와는 완전히 반대의 생김새였다. 나는 쌍꺼풀 없는 위로 올라간 날카로운 눈에다가 눈 밑엔 애교 살도 없다. 턱도 얇고 날카로워서 귀엽다기보단 쎄보이는 인상이었다. 나는 전혀, 전혀, 하나도 귀여워 보이지가 않는다. 밀려오는 패배감에 입이 썼다.
“남편 분한테 인사 안하고 가세요?”
“누굴 만나고 있어서 아는 척 하기가 그러네…. 점심시간도 다 끝나가고. 집에서 맨날 보는데 뭐. 얼른 회사나 가자.”
“넵! 근데 진짜로 대리님 남편 분 너무 잘생기셨어요.”
나는 소연씨의 말에 웃어보였지만, 속으론 웃지 못했다. 샘이 났다. 남자인데다가 귀여운 저 남자가 부러웠다. 내가 남자 때문에 남자를 부러워하다니…. 도건이는 어쨌든 나와 결혼했으니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신감이 점점 힘을 잃어가 침체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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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전만 해도 술술 풀려가던 연구의 진도가 내가 도건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은 뒤로 거짓말처럼 진척되질 않았다. 이 감정은 진짜 여러모로 내게 불행했다. 곧 접어야 하는 쓸모없는 감정인데다가 자존심만 일그러트리는 너무나 소모가 큰 감정이었다.
<오늘 10분 정도 늦을지도 몰라.>
도건이의 문자였다. 왜 늦는데? 그 남자랑 만나느라?!
<혼자 갈 거야. 10분이면 집까지 걸어갈 수 있어.>
괜히 화가 나서 액정 속 키보드를 꽉꽉 누르며 혼자 가겠다고 문자를 했다. 걸어가긴 무슨 택시타고 갈 거다.
<왜? 같이 가ㅠㅠ 기다려줘>
큽. 같이 보낸 귀여운 토끼 이모티콘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도건이의 귀여운 답장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짜증난다 진짜. 아까 까지만 해도 온갖 불행은 내가 다 가진 것 같았는데, 이젠 또 세상 행복하다. 고작 문자하나에.
이자식이 다른 사람들한테도 저렇게 귀엽게 굴었다면 괜한 기대는 하지도 않았을 텐데 나한테만 이러니까 도건이도 날 좋아하는 것만 같은 착각이 자꾸만 든다.
친구라는 이름아래에서 보여주는 다정함이 도리어 내겐 독이었다. 왜 옛날엔 몰랐을까.
<꼭 기다려. 혼자 가지 말고.>
귀찮게 왜 굳이 나랑 같이 가려는지 모르겠지만 기분은 좋으니 이번엔 괜히 거부하지 않고 알았다고 답장을 했다.
도건이한테 답장을 보내고 시간을 보니 홍보팀과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필요 한 것들을 챙기고 홍보팀으로 서둘러 갔다.
회사를 홍보하는 책자에 내가 이번에 투자받은 얘기를 실고 싶다는 홍보팀 신 팀장님의 요청에 나는 책자에 실을 인터뷰를 하기 위해 홍보팀으로 온 것이다. 홍보팀 회의실에 가니 신 팀장님이 먼저 와계셨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네. 두미씨 반가워요. 너무 오랜만인거 아니에요?”
“그런가요? 제가 요새 연구실에만 너무 박혀있었죠?”
“네. 항상 점심도 매일 대충 먹고 휙 가버려서 말도 못 붙였네요.”
“안 그래도 이제 쉬엄쉬엄하려고요.”
“발은 다 나은 거죠?”
“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아! 보내주신 홍삼도 잘 먹었어요. 정말 감사해요. 제가 다친 다음에는 신 팀장님이 너무 바쁘셔서 감사인사 드리려고 해도 매번 자리에 없으시더라고요.”
“핸드폰 두고 뭐해요. 전화라도 하지. 참 우리 이거 먹으면서 인터뷰해요.”
“설마 회사 밑 카페 거예요?”
“네.”
“와 진짜 짱 이세요. 점심되기도 전에 항상 이 딸기케이크만 매진이잖아요. 그래서 한 번도 못 먹어봤었는데.”
“아침에 줄까지 서서 사왔어요.”
“근데 저랑 먹어도 되는 거예요?”
“두미씨랑 먹으려고 사온 거예요.”
눈 앞에 있는 케이크에 기분이 조금 상승했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신 팀장님은 정말 좋은 분이다. 인터뷰한다고 구하기 힘든 케이크도 사다주시고 말이다. 케이크는 소문처럼 정말 맛있게 생겼다. 중간 중간 박혀있는 딸기가 싱싱해보였다.
“근데 회사 밖이나 둘이 있을 땐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잖아요. 명색에 술친군데 신 팀장님이 뭐에요. 딱딱하게.”
“아, 그게 처음부터 신 팀장님이라 불러서 신 팀장님이 입에 붙어버려서요. 다음엔 꼭 이름으로 불러드릴게요!”
“꼭. 잊지 말고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두미씨가 이름으로 불러주면 기쁠 것 같아요. 제 이름 몰라서 안 부르는 거 아니죠?”
“그럼요. 신태완씨. 근데 좀 건방져 보이는데… .”
“괜찮아요. 태완씨라고 불러주세요.”
“네, 뭐. 그렇게 원하시는데 불러드려야죠. 술도 많이 사주셨는데.”
나는 딸기케이크를 포크로 잘라 입어 넣었다. 와, 세상에. 왜 이 케이크가 잘 팔리는지 알겠다. 이 달콤함과 상큼함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내 어휘력이 슬펐다. 분명 같은 카페인데 다른 케이크들은 별로더니 이 딸기케이크 만은 진짜 맛있었다. 내가 먹어본 케이크 중에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맛이었다.
내가 신 팀장님이었으면, 이거 절대 나 안 준다. 이걸 왜 줘 이렇게 맛있는데. 도건이라면 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신 팀장님은 정말 좋은 분이시다.
“맛있어요?”
“네. 완전요! 다음에 사는 거 성공하시면 누구주지 말고 혼자 드세요.”
“다음에도 같이 먹어요. 먹으면서 천천히 인터뷰 시작 할게요.”
신 팀장님이 멋들어지게 웃으셨다.
“네!”
맛있는 딸기케이크와 함께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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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모엘님, 새윰님, 설탕맛소금님, 인시온님, 0seul0님 코멘트 감사합니다!ㅎㅎㅎ
선추코감사합니다.^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