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9 상실의 두려움 =========================
18화
도건이가 조심스레 날 침대 위에 내려주었다. 침대 귀퉁이에 앉아 앞을 보니 침실 거울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내 눈은 빨개져 있어 누가봐도 운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날 침대에 내려주고 날 보게 된 도건이 내 모습을 보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 발 많이 아파?”
작게 고개를 저었다. 도건이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자꾸만 눈물이 났다.
“구해줘서 고마워.”
눈물을 보이기 싫어 고개 숙이면서 하는 말에 도건이가 작게 웃었다.
“고맙다는 말을 그렇게 하는 게 어딨어. 얼굴은 보고 얘기해줘라.”
얼굴을 들지 못했다.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눈물은 기어코 흘러서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슬프고 참담했다. 도건이를 좋아하는 내 마음이 불쌍했다. 사랑을 깨달았다는 감상에 젖어 아직까지 두근거리는 눈치 없는 심장에 비참한 기분까지 들었다.
떨어지는 눈물방울에 젖어가는 바닥을 보았는지 도건이가 내 앞에 쭈그리고 앉아 내 얼굴을 보려고 했다.
“아직도 무서워서 그래?”
“아니야. 그냥, 그냥…집에 오니까 안심이 됐나봐. 그래서 그래. 너한테 너무 고마워서 그래.”
“그럼 고맙다는 말은 기쁘게 해줘야지.”
그가 조심스럽게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의 손길이 좋았다. 멈출 줄도 모르는지 계속 쿵쾅거리는 심장에 숨이 막혔다. 정말 웃기는 심장이다. 예전엔 다정하게 대해줘도 묵묵부답이더니.
깨닫고 나니 절제할 줄도 모른다는 듯이 뛰는 심장에 괴로웠다. 미친심장이 도건이를 마주할 때 마다 이렇게 뛰어댄다면 나는 정말 숨이 차 죽어버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사실 제일 괴로운건 이 감정이 혼자만의 감정이라는 것이었다.
“…넌 왜 이렇게 다정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난 빤히 도건이의 얼굴을 봤다.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더운 걸 싫어해서 짧게 친 숱 많은 머리는 안 그래도 차가워 보이는 도건이를 더 싸늘한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쌍꺼풀이 있지만 살짝 올라간 눈과 아랫입술이 더 도톰한 입술은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와 맞물려 성적인 무언가를 자극하는 외향을 만들어냈다. 그는 차가워보였지만, 한편으론 관능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몸은 또 언제 저렇게 단단해 졌는지, 분명 처음 봤을 때 도건이는 모델들처럼 살짝 마른 몸에 잔 근육정도만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보니 어깨와 등이 넓어져 있었고, 허벅지가 딴딴해져 있었다. 특히 정장을 입었을 때 정장이 몸에 딱 붙어 들어나는 몸의 라인이 좋았다. 키도 커서 어떤 옷을 입어도 맞춘 옷처럼 딱 떨어지는 핏이 멋있었다.
도건이는 전체적으로 차갑고 섹시해 보이는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외모로 저렇게 다정하니 내가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정함이라곤 한 톨도 없을 것 같은 사람이 다정하게 구는데 어떻게 안 빠질 수가 있을까. 이건 불가항력이었던 거다.
나쁜 자식. 게이면서 아무나 막 유혹하고…. 아주 존재자체가 유혹덩어리였다.
고맙다며 울다가 이상한 소리나 하고, 갑작스레 노려보는 내가 이상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린 도건은 내가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 건지 욕실 문을 열고 내 다리에 비닐을 씌워주었다.
“그만 노려보고 이제 그만 씻고 쉬자. 욕실까지 옮겨 줄게.”
날 안아드는 도건이의 목에 자연스럽게 팔을 둘렀다.
짝사랑은 처음이었다. 그나마 있는 3번의 연예경험은 모두 고백 받았기에 사귀었던 게 다였다. 사귀다 보면 좋아하게 될 거라고 당당하게 말하던 그 남자들 때문에 그저 호감만으로 사귀었었다. 그러다보면 진짜로 사귀다가 좋아지기도 했다. 분명 그들을 좋아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때의 그 감정들과 지금의 감정은 깊이부터가 너무나도 달랐다.
지금 내가 도건이를 좋아하는 이 감정은 아무래도 8년 동안 조금씩 차올랐던 것 같다. 조금씩, 조금씩 마음속에 흘러들어오다가 더 이상 담기지 않아 넘쳐버려서 결국 내가 알아채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동성을 좋아한다. 나는 그가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기초적인 조건에서 조차 탈락이었다. 그러니까 고백 같은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나는 도건이를 잃고 싫지 않았다. 친구로서 받는 사랑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쨌든 우린 결혼했으니 일단 도건이는 내 곁에 있을 게 확실했다.
그러니까 난 내 마음이 여기서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다. 하지만 사실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모른다. 도저히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된 적이 없어서 말이다.
마음을 접어야 하는데, 그러는 게 맞는데 매일 이렇게 같은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다보면 괜히 마음만 더 깊어져 혼자 상처받을 것 같았다.
아, 같이 살기 싫다. 심장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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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건은 오늘도 다리가 불편한 두미의 운전기사를 해주고 있었다. 그는 이 기회를 빌미로 두미의 다리가 낫더라도 매일 이렇게 같이 출퇴근할 수 있도록 두미를 살살 구슬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두미네 회사 주차장에 도착하자 도건은 두미에게 뭐라 말을 하려고 했으나 그 전에 두미가 먼저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려버렸다.
“고마워. 조심히 가!”
탁-
순식간에 차 문이 닫히고 한쪽 다리를 절뚝이며 빠르게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두미가 차 창 밖으로 보였다. 잘가라는 인사조차 듣지 않고 사라진 두미의 빈자리를 보며 도건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 확실히 그날부터 두미가 좀 이상했다. 미친 범죄자 새끼한테 재수 없게 걸려 다리를 다친 다음 날부터 두미는 이상하게 자신과 말을 잘 안하려고 했다. 말을 해도 빤히 쳐다 보기만하고, 혼자 의미모를 말을 하다가 연구를 하겠다며 집에 마련된 연구실로 들어가는 일의 반복이었다.
게다가 다리가 불편해 이동하는 것이 힘들어 보여서 도와주려 하면 이제 됐다면서 얼굴을 붉히면서 화를 내기도 했다. 그래서 혹시 그 범죄자 때문에 남자한테 트라우마가 생긴 것이 아닐까 걱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퇴근하는 두미를 데리러왔을 때 팀원들로 보이는 남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고 트라우마가 생긴 것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남자팀원들과 쓸데없이 친해 보이는 게 짜증났지만, 트라우마가 아니라는 것에 안심하는 마음이 더 컸다.
그럼 도대체 두미는 왜 그러는 걸까? 두미를 내려주고도 도건은 그렇게 한참이나 주차장에 머물러있었다.
============================ 작품 후기 ============================
네. 아마 앞으로 둘이서 삽질을 좀 할 것 같습니다. 답답해도 이해해주세요^&^
인시온님 오타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쳤어요ㅎㅎㅎ
다음에도 오타 있으면 알려주세용♥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