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7 상실의 두려움 =========================
16회
지이이잉-
책상에 올려놨던 핸드폰이 고요하던 연구실의 적막을 일순간 확 깨버렸다. 나는 연구에 집중하다 진동소리에 깜짝 놀라 급히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핸드폰 화면을 봤다. 도건이었다. 장갑을 벗고 연구실을 벗어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나 너희 회사 일층로비에 있어.”
회사에 왔다는 도건이의 말에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지 싶어 급히 일층에 내려간 나는 도건이의 손길에 의해 테이블에 앉아야 했다. 도건이는 내가 테이블에 앉자 가지고온 종이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도시락 통이었다.
“어? 도시락?”
“밥 대충 먹었다며. 너 그거 안 먹었단 소리잖아.”
“아니야. 진짜 먹긴 먹었어.”
“과자나 초콜릿 몇 개 주어먹고 말았겠지.”
확신하는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도건이 날 한심하게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는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내가 좋아하는 볶음밥이었다. 음식 냄새를 맡으니 참아왔던 허기가 한꺼번에 불쑥 고개를 들었다.
아직 따뜻한 볶음밥을 한 숟갈 떠서 먹었다. 세상에, 어깨춤이 절로 날 정도로 맛있었다. 소시지도 하나 입에 넣었다. 쫄깃한 소시지의 껍질을 파고들자 육즙이 나오면서 고기의 맛이 입안에 확 퍼졌다. 역시 소시지는 언제나 날 실망시키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느끼함을 잡아줄 총각김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와, 김치 없었으면 정말 울 뻔했다. 역시 배고플 때 먹는 음식이 최고였다. 단출한 도시락이었지만 나의 취향을 고려한, 나를 위한 완벽한 도시락이었다.
나는 음식을 씹으며 말없이 도건이에게 엄지를 들어줬다. 내 엄지를 보고 도건이가 흐뭇하게 웃었다. 먹이를 잘 받아먹는 아기 새를 보는 어미 새의 표정이었다.
“많이 먹어.”
응응.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도건이가 싸 온 꽤 많은 양의 도시락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점심을 대충 먹고 저녁도 제대로 먹지도 않아서 그럴 만도 했다. 후식으로 가져온 달콤한 딸기를 하나 집어먹었다.
“고마워. 완전 맛있었어.”
“연구 좀 적당히, 쉬면서 해.”
“안 돼. 지금 연구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어. 그럴 때 있잖아 갑자기 팍! 잘 되는 때. 밥 먹는 시간도 좀 아깝더라고.”
내 말에 도건이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웃겼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도건이는 표정의 변화가 많지 않은 편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둘이 있으면 여러 표정을 보여주고는 했다. 잘생긴 얼굴이라 한 명의 영화배우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도건이의 표정이 풀리지 않아 농담을 했다.
“내가 없어서 혼자 집에 있기 무서웠구나. 우쭈쭈 우리 건이~”
굳은 표정을 풀고 어이없다는 듯이 바람 빠진 웃음을 내뱉은 도건은 갑자기 내게 가까이 다가와 테이블 위로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내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응. 외로워.”
순간 말문이 막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깊게 내려앉은 눈이 마주해 오자 당황스러워 마주 하지 않기 위해 나는 눈알을 천천히 다른 곳으로 굴렸다. 그러나 도건이는 집요하게 내 눈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나는 올가미에 걸린 짐승처럼 마주쳐 오는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포획당한 짐승이 발버둥을 멈추자 만족한 듯이 짙은 검은 색의 눈이 아래로 깔렸다.
“외롭다고. 일찍 일찍 집에 좀 와라.”
그는 정말 외로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리 깐 눈에 달린 긴 속눈썹이 흔들거려 가여워 보였다. 일 하느라 잘 돌봐주지 못한 개가 애처롭게 낑낑대는 것 같았다.
“으, 응”
어렵사리 대답하자 도건이 눈을 빛내며 만족스러운 듯이 입 꼬리를 올려 웃었다. 왠지 모르게 농락당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도시락 통을 정리하고 다시 종이가방에 넣은 도건은 일어서며 미소를 지우고는 엄하게 말했다.
“올 때 혼자 걸어오지 마. 절대. 꼭 나한테 전화해.”
“…응.”
나는 여전히 농락당한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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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1시였다. 도건이가 도시락을 싸다 줘서 먹은 지 벌써 4시간이나 지난 시간이었다. 와, 오늘 너무 열심히 했다. 외롭다고 했던 도건이가 자꾸 생각나서, 애처로워 보이던 그를 머릿속에서 떨쳐내려고 괜히 더 열심히 했다. 그 자식은 가끔씩 그렇게 끼를 부리곤 했다. 내가 남자도 아닌데 말이다. 그가 게이가 아니었다면, 진작 넘어가고 말았을 정도로 훅훅 들어오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어쨌든 마음에 없는 말이나 거짓말은 잘 안하는 도건이 외롭다고 한 것은 진짜일 것이다. 외롭다기 본단 아무래도 심심해하는 것 같다. 일주일 동안 야근하며 연구하느라 도건이와 대화도 제대로 못했던 것이 이제야 좀 미안해 졌다.
야근을 하는 지난 일주일동안 도건이는 매일 밤 회사에 데리러 와줬었다. 귀찮을 텐데 참 열심히도 데리러 와줬었다. 그래서 오늘은 혼자 빨리 뛰어가기로 결심했다. 집과 회사의 거리는 걸음으로도 고작 10분에서 15분 정도의 거리였다. 몰래 가서 짠! 하고 놀라게 해줘야겠다. 내일은 주말이니까 오늘 밤이든 내일이든 도건이와 놀아줘야겠다.
나는 하던 연구를 대충 정리하고는 회사를 나섰다. 회사를 나와서 별 생각 없이 집 쪽으로 걸어가다가 갑자기 오늘 아침에 봤던 인터넷 뉴스가 떠올랐다. 30대 남성이 퇴근하는 여성을 골목으로 데리고 가 성폭행을 했다는 범죄에 대한 기사였다.
그 기사가 갑자기 떠오른 것은 누군가가 따라오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번화가라 아직도 지나다니는 사람은 많았다. 온갖 색의 간판들과 가게에서 나오는 불빛들, 수많은 가로등의 등불로 인해 거리는 낮만큼이나 밝았다. 내가 가는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내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머리를 한 번 턴 나는 이 꺼림칙함이 기우이길 바랬다. 그래, 설마 이런 번화가에서 무슨 일이 있겠는가. 누군가 날 공격한다면 말려줄 사람들이 이 길거리에 많았다.
어느새 나는 아파트 입구까지 다다랐다. 별다른 일 없이 아파트에 입구에 들어선 나는 아까 들었던 불안함이 정말 쓸데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심하며 홀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도건이한테 전화가 왔다. 아, 아무래도 혼자 집까지 와서 화낼 것 같았다. 그래도 안전하게 집에 왔으니 괜찮을 거다.
“응. 도건… 윽!”
핸드폰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 작품 후기 ============================
선추코 감사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