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4 과유불급 =========================
13화
도건의 할아버지, 임산그룹의 총수인 임 회장은 장자가 회사를 물려받아야 한다는 확고한 고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장자에게 회사를 이끌어 갈 만한 능력이 없다면 그 고집은 진작에 버려졌겠지만 도건은 똑똑했다. 그는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잘 잡아내 무엇이 돈이 될지 잘 파악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힘만으로 회사를 세워 잘 이끌어나가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가 게이라서 결혼이나 손주는 기대하지도 말라고 했던 것만 빼면 도건이가 자신의 장손으로서 아주 완벽하다고 생각해온 임 회장은 늘 도건이 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임산을 물려받길 바랐다.
그래서 도건이가 진심으로 하는 결혼이라고 했을 때 임 회장은 기뻤다. 드디어 장손에게 회사를 물려줄 준비를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임 회장은 결국 고집을 전부 버릴 수밖에 없었다.
웬일로 점심을 같이 하자고 찾아온 도건은 점심을 다 먹고 나서는 회사 물려받을 생각 없다고 단단히 못을 박고 떠나버렸다. 예전에 썼던 재산포기 각서까지 들고 온 도건에 의해 임 회장은 도건이 커밍아웃을 했을 때 직접 재산포기각서를 쓰게 했던 일이 떠올라 자신의 뜻을 강하게 밀어붙일 수가 없었다.
도건이 떠난 후 임 회장은 책 하나를 펼쳐들었다. 돋보기를 쓰고 임 회장은 동성애에 대해 설명하는 책을 읽었다. 책의 내용은 이해를 하면서도 도저히 자신의 손자가 양성애자라는 것을 받아드릴 수 없는 자신의 여전히 좁아터진 마음에 임 회장은 한탄하고 말았다.
도건은 점심때 할아버지와 한바탕 한 것에 계속 마음이 불편해서 그것을 잊어보고자 저녁식사를 직접 하기위해 일찍 퇴근을 했다. 회사를 물려받지 않겠다고 한 말에 화를 내시던 할아버지는 재산포기각서를 내밀자 아무 말 못하시더니 결국 알았다고 하셨다.
처음부터, 늘. 자신에게 기대를 보이시던 초등학생 때부터 도건은 임산을 물려받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대학생 때 커밍아웃을 하고 재산 포기각서를 쓸 때도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도건이 내민 재산포기각서를 보고 왠지 모르게 기가 죽으신 것 같은 할아버지의 모습에 마음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뒤숭숭한 마음으로 두미를 기다리던 도건은 집에 오자마자 울어버리는 두미에 의해 할아버지에 대한 생각은 싹 잊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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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건은 어제 저녁 두미가 울면서 한 말에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려고 애썼다. 때리려고 했다니, 감히 어디서 미친 자식이…. 두미가 박 팀장이라는 사람 얘기를 할 때마다 박 팀장이란 사람에게 입을 함부로 놀리면 어떻게 되는지 제대로 알려주고 싶은 마음을 도건은 항상 참고 참아야 했다. 그런데 그 박 팀장이라는 인간이 이젠 언어폭력에 성차별발언도 모자라 두미를 때리려고 했다니!
도건은 늘 두미의 회사생활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왔었다. 자신은 두미의 가족도 애인도 아닌 고작 친구였기에, 그럴 권한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고 참아왔다. 게다가 두미는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회사생활은 오로지 두미의 영역인데다 두미가 나름 잘 대처해왔다는 것을 들었기에 항상 두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두미를 위로해주는 것만으로 참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박 팀장이라는 사람은 선을 넘었다. 도건은 어떻게 박 팀장이란 사람에게 본인의 행동에 대한 대가를 아주 잘, 처절하게 알려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같은 회사가 아니라 박 팀장에게 제재를 가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박 팀장의 뒷조사를 해볼까 고민하던 도건은 문득 두미와 본가에 처음 인사를 갔을 때 동생이 두미가 다니는 회사에 투자를 하고 있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도건은 즉시 임산그룹 본사로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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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왔어?”
도진은 여유롭게 자신의 빈사무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형 도건을 보며 뚱하게 말했다.
“왜 왔냐니. 동생도 못 보러 오냐?”
“내가 없었으면 나가야지 왜 빈사무실에 주인허락도 없이 앉아 있어?”
도진의 말에 도건은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는 화사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네가 없어서 너 인척하고 서류도 하나 부탁했어.”
도진은 도건이 한 어이없는 말에 한 마디 하려다가 똑똑 하고 들려오는 노크소리에 참아야 했다.
“들어오세요.”
중년의 남성이 도진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젠타연구소 계약서 가져왔습니다.”
“계약서는 갑자기 왜….”
아, 하고 깨달은 도진은 여전히 한가롭게 차나 홀짝이고 있는 자신의 형을 째려봤다.
“감사합니다. 이본부장님. 가보셔도 됩니다.”
아, 장난하나. 도진은 자신이 서류를 가져오라고 했다면서 신경도 쓰지 않는 형의 모습에 서류를 받고 이본부장님을 내보냈다. 형은 결혼을 해도 뭐 하나 바뀐 것이 없었다. 여전히 자기 멋 대로다.
“이 계약서는 왜 가져오라고 한 거야?”
“원본 맞지? 계약서 줘봐.”
말만 달라고 했지 이미 계약서를 도진의 손에서 채간 도건은 계약서를 훑어보고 있었다.
“남의 회사 서류를 왜 봐. 회사 사람도 아니면서.”
“젠타연구소. 여기 두미네 회사 맞지?”
“…맞아. 왜, 가져오라고 한 거냐고.”
“친환경 연구1팀 박 대선 팀장….”
다시 한 번 도진의 질문을 깨끗이 무시한 도건은 조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뒤졌어. 박 팀장.”
도건은 갑자기 계약서를 쭉쭉 찢어버렸다.
“…미쳤어? 왜 그러는 거야 도대체!”
“이 계약 하지 마. 절대로.”
연락도 없이 남의 사무실에 무작정 쳐 들어오더니, 질문은 계속 씹어 쳐 드시는데다가 갑자기 계약서를 찢어버리면서 계약하지 말라고 하는 형의 모습에 결국 도진은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형이 뭔데, 남의 회사에 와서 감 놔라 배 놔라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좀 꺼져라!”
“남의 회사라니? 내가 이 회사 지분을 얼마나 가지고 있더라? 다 팔아버려야 그 계약 안 할 거냐? 아니면 한 이사한테 양도할까?”
한 이사는 할아버지 동생의 남편으로 임산그룹 경영권을 탐내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꽤나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 현재 도진은 그 사람과 경영권을 두고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이유로 한숨을 쉰 도진은 결국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하…. 뭐라고 하고 계약을 파기해?”
“연구윤리도 모르는 사람한테 투자하고 싶지 않다고 해. 그럼 찔리는 게 많아서 알았다고 할 테니까.”
“혹시, 이 연구소 연구1팀 중 누가 형수님 괴롭혔어?”
“상관 말고 계약이나 파기해. 난 간다.”
사무실에 쳐들어 올 때도 연락 없이 쳐들어오더니 나갈 때도 제멋대로였다. 어쨌든 임산그룹을 빼앗기기 싫은 도진은 도건의 말을 들어줘야만 했다.
============================ 작품 후기 ============================
선추감사합니다!!!
대인 매력은 일주일에 3번은 연재할 수 있도록 노력 중입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