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8 과유불급 =========================
7화
연참(1/2)
친구가 된 도건과 두미는 방학 때 항상 시골에서 만났다. 친해지면서 같은 대학교에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어 둘은 학교에서도 종종 만났으면서도 방학 때 만나 꼭 붙어 다녔다. 도건은 외할아버지 댁에, 두미는 할머니 댁에 머물며 둘은 작은 시골마을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도건은 시골에서 두미 덕에 새로운 많은 것들을 경험했다. 얕은 개울가에서 발을 담그고 노는 것도, 언덕에 가득한 들꽃을 구경한 것도, 그 언덕에 앉아서 수많은 별들을 감상한 것도, 겨울이면 그 언덕에서 비료푸대로 눈썰매를 타는 것도 전부 처음이었다. 도건은 그녀와 함께 하면서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동심을 새롭게 느끼곤 했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자주 갔던 두미할머니네 집 뒤에 있는 언덕에는 숲으로 이어지는 경계선 쪽에 산벚나무가 네 그루가 자리 잡고 있다. 4월이나 5월쯤에 그 나무들에 피는 하얀색의 벚꽃은 항상 금방 피고 금방 져버리곤 했다.
어느 5월에 산벚나무에서 꽃잎들이 떨어질 쯤, 두미와 도건은 그 언덕에서 해가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미는 산벚나무 가까이에 서있었고, 도건은 좀 떨어진 곳에서 해질녘 노을을 배경으로 두미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두미가 포즈를 잡고 있을 때, 거센 바람이 일었다. 아슬아슬 나무에 달려있던 벚꽃무리들이 바람에 맥없이 휩쓸려 갔다. 나무 가까이에 서있던 두미가 바람에 날아온 벚꽃 잎을 죄다 맞았다.
핸드폰 화면에 하얀 벚꽃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비쳤다. 화면에서 눈을 땐 도건은 하얀 벚꽃을 두른 그녀를 보았다. 두미는 마치 나풀거리는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것처럼 어여뻤다.
꽃이 아닌 새 하얀 천으로 만들어진 웨딩드레스를 입은 두미는 아마, 지금 저 모습보다 더 아름다울 터였다. 도건은 괜스레 바람이 미워졌다. 실제로 그녀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환한 미소를 걸치고 서있을 때, 그녀의 옆이 아닌 뒤에 서 있을 자신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져서, 그래서 바람이 너무나도 미웠다.
그녀와 함께 하고 싶었다. 자신의 곁에 그녀가 서있길 바랐다. 아름다운 두미를 바라보며 그때 처음으로 도건은 결혼식이라는 것이 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그녀만이 이뤄줄 수 있는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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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미가 결혼을 허락한 다음날부터 도건은 바빠졌다. 우선 결혼소식을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집안 어른들께도 말씀드렸는데 예상 외로 친할아버지가 반대하셨다. 친할아버지의 결혼 반대로 본가로 불려 들어간 도건은 예상치 못한 할아버지의 말에 안도감이 들었다. 할아버지가 결혼을 반대하는 이유는 도건에겐 장애물조차 되지 않았다.
할아버지 방에 노크를 하고 들어서자마자 할아버지는 도건에게 말했다.
“너랑 결혼 하다는 아이가 네가 게이인건 알고 있는 게냐? 귀한 집 자식 속여 결혼하지 마라. 그런 결혼 바라지 않는다.”
도건이 할아버지 맞은편에 앉으며 대꾸했다.
“왜요. 그냥 여자랑 결혼만 하라고 하실 땐 언제고?”
딱-
옆에 놓여있던 바둑알을 도건의 머리에 정확히 맞춘 할아버지는 화난 음성으로 도건을 꾸짖었다.
“예끼! 이놈아!”
“아!”
“내가 아무리 말을 그렇게 했다 해도 그러면 안 되는 거다. 살다보면 너랑 같이 사는 그 아이가 더 잘 알게다 네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다는 걸. 사람은 마땅히 사랑 받고 살아야 하는 법인데, 너는 엄한 처자 데려다가 말려죽일 셈이냐!”
도건에게 한껏 화를 낸 할아버지는 화살을 함께 들어 온 도건의 부모님에게 돌렸다.
“애비, 애미.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저놈이 결혼한다는 걸 말리지도 않고 허락한다는 게야?!”
도건의 부모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 없는 부모님 대신 도건이 말했다.
“할아버지. 저 두미 좋아해요. 좋아해서 결혼 한다고 하는 거예요.”
“설마…. 결혼 한다는 사람이 남잔데 지금 여자라고 날 속이는 게냐?”
“아니에요. 여자 맞아요. 저 두미 안 말려죽여요. 사랑 속에 파묻혀서 살게 해줄 거예요. 사랑으로 살 뒤룩뒤룩 찌워서 저만 보게 할 거예요. 두미가 말라비틀어질 일 절대 없으니까. 믿어주세요.”
“그게…고쳐 진거냐?”
“늘 말씀드리지만 할아버지. 성적취향은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제가 앞으로 사랑할 사람은 두미 밖에 없어요. 고쳐진 게 아니라 그저 저한테 인식하지 못했던 취향이 하나 더 있었던 거죠.”
“그럼. 네놈은 그, 뭐냐 바이냐?”
“네. 뭐. 어쨌든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여자니까요.”
도건의 말을 듣고 아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할아버지는 다들 나가라며 손짓 하셨다. 할아버지 방에서 나온 도건은 할아버지가 결국 결혼을 승낙할 것임을 예상했다. 그리고 이틀 뒤 예상대로 외할아버지가 도건에게 전화를 해 집안사람들 모두 결혼을 축하하고 승낙했다고 전했다.
“네가 두미한테 진심인건 내가 사돈양반한테 잘 말했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두미를 손주며느리로 보고 싶어서 해준 거니까 두미한테 잘해라.”
“당연한 말씀마시고 밭일이나 적당히 하세요. 이제.”
“오냐. 알았다. 수고해라.”
“네. 쉬세요. 할아버지.”
집에 허락도 받았겠다 도건은 거침없이 결혼식 준비를 해나갔다. 결혼식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어느새 결혼식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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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색과 예쁜 꽃들은 정말 두미에게 잘 어울리는 것들이었다. 무덥지 않은 화창한 5월의 어느 날 도건은 사뿐사뿐 장인어른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걸어오는 두미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결혼식장 곳곳에 다양하게 배치된 꽃들은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와 잘 어울렸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완벽한 배경이었다. 야외결혼식을 고집한 스스로에게 도건은 엄지를 치켜세워줬다. 자꾸 실없이 웃음이 나와 도건은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진심으로 이뤄지는 진짜 결혼. 도건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다.
드디어 옆에 선 두미를 바라보며 도건은 희열을 느꼈다. 욕심이 났다. 옆에 붙잡아 두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했으나, 옆에 두는 것을 성공했으니, 마음까지 얻으라고 마음 속 한구석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손을 잡고 수줍게 웃는 그녀가 예뻤다. 결혼식이라는 것을 잊고 거칠게 키스하고 싶을 만큼 두미는 너무 예뻤다. 두미는 이 결혼식의 완벽한 주인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