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5 첫인상과 성격적 특징 =========================
4화
도건이 처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알게 된 건 중학생 때 친구들과 함께 봤던 야동에 의해서다. 풍만한 여자의 가슴에 환호하는 친구들과는 달리 도건은 야동을 보면서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여자와 남자가 하는 행위 그 자체가 무의미했고 인상만 찌푸려졌을 뿐이었다. 그래서 도건은 그때 자신의 성향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
의문이 확신으로 바뀐 것은 그가 처음 몽정을 했을 때였다. 꿈속의 상대는 얼굴은 불분명했지만 분명 남자였다. 그 일 이후에 도건은 자신이 게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인정했다.
그 후, 살면서 도건은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숨기지 않았다.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남자들을 만났다. 그래서 그는 그의 대학생활 내내, 대학교를 넘어서 그 일대의 유명한 게이였다.
숨기지 않았기에 은근히 남자들의 유혹을 받아왔고 여자들은, 그럼에도 자신으로 인해 바뀌길 고대하며 치근덕거렸다. 여자들은 전부 쳐냈고, 남자들은 다가오는 족족 전부 만났다. 남자를 만나다 의도치 않게 집에도 커밍아웃을 했다. 아웃팅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어차피 집안 어른들 중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집안사람들이 쉬쉬한 덕에 도건이 커밍아웃을 한 이후에야 도건이 게이라는 것을 알게 된 친할아버지만이 노발대발하시며 정신병원에 보내겠다고 난리를 치셨다. 그렇게 살 것이라면 한 푼의 재산도 물려주지 않겠다며 자신의 집에서 나가라며 소리치셨다. 그래서 도건은 정말로 집을 나왔다.
도건은 집을 나와 군대에 갔다. 그는 군대에서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방책을 강구했다. 군대에서 차근차근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운 도건은 외할아버지의 지원을 받아 그 돈으로 작은 투자회사를 차렸다. 도건의 회사는 승승장구했다. 회사가 잘 된 덕에 도건은 외할아버지께 받은 투자자금을 6개월 만에 다 갚을 수 있었다.
도건은 어릴 적부터 바쁜 가족들을 대신해 자신을 도맡아 키워준 외할아버지를 가족 누구보다 좋아했다. 그래서 도건은 항상 외할아버지에 대한 감사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외할아버지께 더 감사했던 건 외할아버지 덕에 값진 것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건은 외할아버지 덕에 두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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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춘분을 지나 마지막 봄비가 내리고 들어선 여름의 초입에서 도건은 두미를 만났다. 그녀를 처음 봤던 날은 해가 유난히 쨍쨍한 날이었다. 그 날 도건은 할아버지의 밭일을 돕고 있었다.
제대 후 복학을 했던 도건은 외할아버지가 투자해 주신 돈을 완전히 갚지 못했던 때라 귀농한 외할아버지의 재촉에 못 이겨 결국 밭일을 도우러 갔었다. 가족들이 먹는 거라며 유기농을 고집하시는 할아버지 덕에 제초제를 뿌리지 못한 밭에는 잡초가 가득했다.
열심히 잡초를 뽑다가 목이 마르면 방울토마토를 따먹어도 된다고 했던 할아버지의 말이 생각나 잘 익은 방울토마토를 하나 따 대충 옷에 닦아 먹은 도건은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햇빛에 익은 방울토마토는 냉장고에 있던 것과는 너무 달랐다. 미지근해서 오히려 더 갈증만 더 불러왔다.
결국 갈증을 참지 못한 도건은 밭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도건은 캐리어를 끌고, 한 손으로는 강렬한 햇빛을 가리며 오는 한 여자를 봤다. 작은 얼굴에 담긴 작고 긴 눈은 날카로워 보였다. 날이 더워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건지 얼굴을 찌푸리고 있어서 날카로운 인상이 한층 더 무서워 보였다. 햇빛을 막다 손부채질을 하는 여자를 보고 도건은 한 성질 하겠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집에 도착해서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꺼내 먹은 도건은 주방에서 뭔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계신 외할아버지를 봤다.
“할아버지 뭐하세요?”
“점심 먹어야지. 가서 된장 좀 퍼 와라.”
작은 그릇과 숟가락을 주신 할아버지는 뒷마당에 가장 작은 항아리에 담긴 것이 된장이라며 알려주셨다. 시계를 보니 벌써 12시가 지나고 있었다. 더위에 질려 입맛도 없었는지 배고픈 것도 모르고 여태 잡초를 뽑아댔다.
밥상은 온통 풀들의 향연이었다. 상추, 머위, 고추, 달래, 냉이, 미나리, 돈나물 등등의 봄나물과 총각김치에 배추김치, 그리고 된장. 아, 물김치도 있었다.
“할아버지. 고기 없어요?”
“없다 이 녀석아. 상추에 밥 올리고 이 나물들 다 싸먹어 봐라. 얼마나 맛난데.”
열심히 노동한 대가가 고작 이 풀들이라니 도건은 하루빨리 저 영감탱이의 돈을 갚아야겠다고 결심하면서 할아버지 말대로 온갖 봄나물에 밥을 싸먹었다.
나물 쌈은 생각보다 맛있었다. 달래나 미나리의 향이 꽤 좋았다. 민들레 잎은 너무 썼지만 다른 나물과 함께 싸먹으니 적절한 쓴맛이 쌈의 맛을 조화롭게 만들었다. 입맛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도건은 할아버지가 가득 담아주신 고봉밥 한 공기를 다 먹어치웠다.
점심을 다 먹고 거실에서 에어컨을 틀어놓고 드러누워 있던 도건은 밖에서 할아버지가 부르는 소리에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으로 나온 도건에게 할아버지는 소쿠리 하나를 안겨주며 놀지 말고 오디나 따오라고 하셨다.
“어디서요?”
“우리 밭 지나서 가다보면 나오는 포도나무 키우는 집에 가서 이층집 할아버지 손자라고 하면 줄게다.”
도대체 쉴 틈을 안주는 할아버지 덕분에 한숨 쉰 도건은 터덜터덜 오디를 얻으러 집을 나섰다. 오전에 열심히 잡초를 뽑던 외할버지의 밭을 지나서 걷고 있던 도건은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는 밭 세 개를 발견 했다. 그런데 문제는 포도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한 밭의 나무는 잎만 무성할 뿐 열매라곤 아무것도 달려 있지 않았다. 그리고 남은 두 밭은 열매가 흰 봉지로 쌓여 있어 저게 포돈지 뭔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아, 진짜 더워 죽겠는데…도건은 짜증이 났다. 핸드폰도 집에 두고 와서 검색을 해볼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열매를 싼 하얀 봉지를 열어 볼 수도 없었다.
큰 소나무 아래에 서있던 도건은 결국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조금만 쉬다가 그냥 집에 가자고 생각한 도건은 쓰고 있던 밀짚모자를 바닥에 놓고 그 위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나뭇가지 사이로 들어온 햇빛에 눈이 부셨다. 간간히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좋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느낄 수 있었다. 강렬한 햇빛은 감은 눈꺼풀을 통과하면서까지 자신의 존재를 끝없이 알려왔다.
온 세상이 조용했다. 이곳은 사람소리나 자동차소리, 기계의 소음이 아닌 자연의 소리만으로 가득했다. 바람에 나뭇잎끼리 부딪히는 소리, 저 먼 하늘에서 들리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 오히려 서울보다 작은 간간히 들려오는 매미소리…. 이곳은 너무 평화로웠다.
평화로움에 취해있던 도건이 더 이상의 더위를 참지 못해 이제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멀리서 소란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줌마~! 오디 얻으러 왔어요!!! 계세요?!!!”
오디? 도건은 벌떡 일어나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