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4 과잉보상 =========================
3화
해장국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나니 머리가 전보다 잘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계약 결혼을 하기엔 걸리는 것들이, 신경 써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각자 부모님들 앞에서 좋은 부부인 척 연기할 수는 있으나, 나중엔 손주를 바라실 텐데 우리가 아이를 낳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연애도 제대로 못할 것이다. 몰래 연애하다가 도건이네 가족들이라도 만난다면…으, 생각도 하기 싫다. 아이문제, 재산문제, 집안문제, 서로의 사생활 문제…걸리는 문제가 너무 많았다.
“임도건. 다 먹었으면 이제 가. 집에 가서 잠이나 자.”
“왜? 뭐가 문젠데?”
“문제야 많지!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하나씩 읊어봐. 대안을 내줄게.”
“음, 일단 결혼을 했어. 양쪽 집안을 잘 속이면서 부부생활을 하다보면 손주는 언제 보여줄 거냐며 물으실 거야. 그럼 어떻게 할 거야?”
“내가 무정자증이라고 할게.”
“뭐?!”
담담하게 말해서 더 황당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스스로 하자있는 남자가 되겠다고 하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그래 그건 그럼 됐고, 나중에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연애도 못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우리 뭐 평생 독수공방 하냐?”
“그거 알아?”
“뭐?”
“나 여자랑도 할 수 있는데, 네가 원한다면…”
“닥쳐! 미쳤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큭큭큭. 임도건 이 미친 자식이 웃었다.
“난, 사랑하는 사람이랑만 하고 싶어.”
“아, 그래서 네가 아직도 처녀구나…”
난 조용히 주먹을 들었다.
“주둥아리 닥쳐라. 그리고 결혼하면 결혼식하고 그러느라 회사 사람들도, 친구들도 결혼 한 거 다 알 텐데 누가 날 만나려고 하겠냐? 그런 상황에서 내가 누굴 어떻게 만나? 내 행동반경 안의 사람들은 전부 내가 결혼 한 거 알 텐데! 누가 유부녀를 건드려.”
“유부녀 아닌 지금도 아무도 들이대는 사람 없잖아.”
신랄한 팩트폭격에 나는 짜증날 수밖에 없었다.
“너는? 넌? 남자들 어떻게 만나려고? 너 만날 만나는 사람 바뀌잖아. 바람둥이 자식아.”
“난 신경 쓰지 마. 결혼하면 후계자 수업 받고, 일하느라 정신없을 테니까. 그리고 나중에 정말 임산그룹 내 것이라고 확정되면 이혼하자.”
“근데 너희 할아버지도 아직 정정하시고, 아버지도 완전 건강하시잖아. 너 한 60대 되서야 물려받는 거 아냐?”
“우리 아버지는 만날 우리엄마랑 놀 생각만 해서 빨리 때려치우고 싶어 할 걸? 그래서 아마 나한테 빨리 오게 될 거야.”
“으, 진짜 모르겠다. 넌 왜 갑자기 임산그룹을 갖고 싶어 하는 건데? 싫다 그랬잖아.”
“말했잖아. 도진이한테 뺏기기 싫다고.”
“너희 형제 사이좋으면서 왜 그래?”
“계륵. 나 갖기 싫고 남 주긴 아깝고. 누구 주긴 죽어도 싫으니까. 내 자존심이 용납 못하니까. 갖기 싫어도 내가 가지려고. 어차피 난 자식 없을 거라서 나중에 도진이의 자식이 물려받을 텐데 뭐.”
“아, 진짜 난 널 모르겠다. 이 자식아.”
“나보다 좋은 기회 없을 걸? 잘 생각해. 평생 어머니한테 핍박받다가 결국 나중에 마지 못해서 억지로 선본 남자랑 결혼하게 되는 게 좋은지, 지금 나랑 결혼해서 결혼 후에도 자유롭게 살 건지.”
“물론, 너랑 결혼 하는 게 좋겠지. 좋은데…그런데 나 돈 없는데…모아 놓은 돈도 얼마 안 돼. 결혼하는데 돈 많이 들잖아.”
“왜 이래? 나 돈 많은 거 알면서?”
“그건 네 돈이고, 그래도 나도 혼수 같은 거 해가야 하잖아.”
“장담하는데 네 돈은 물론이고 내 돈도 다 필요 없어.”
“왜?”
“아마 우리 할아버지한테 너 소개시켜주면 할아버지가 잘 됐다고 우리 결혼식비용 다 대주실거야. 너 놓칠까봐 빨리 결혼부터 시키고 싶으실 거다. 나 고쳤다고 너 아주 예뻐하실 거야.”
“아…근데 할아버지가 아직도 너 안 보시려고 해?”
“그렇지 뭐. 남자 좋아하는 거 고치기 전에 본가에 발 들일 생각도 하지 말라 그러셨지.”
“고치다니…무슨 병도 아니고…”
“나 사실 저번에 할아버지 몰래 엄마 뵈러 갔다가 들켜서 엄청 맞았어.”
“진짜? 어디? 얼마나? 왜 맞고만 있어 도망쳤어야지!”
임도건은 차갑게 생긴 겉모습과는 달리 정이 많았다. 자신의 가족들을 너무 아껴서 억지로 자신의 성향을 가족들한테 밝혀야 했을 때도 많이 힘들었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너무 화내셔서 무섭고, 슬펐다고 말했을 땐 정말 안쓰러워 죽는 줄 알았다. 소파에 앉아 있는 도건이를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다음엔 그냥 도망쳐.”
“우리가 결혼하면 도망칠 일도 없는데?”
결혼. 내가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비혼주의자가 된 것은 독박육아와 독박살림, 대리효도 같은 것들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명절에 남의 집 제사를 지내야 하는 것도 싫었다. 우리 집 제사도 귀찮은데, 내 부모 보러 가는 것도 힘든데 결혼하면 남자 쪽 집을 가서 그 집 제사를 지내야 하는 것이 싫었다. 또, 나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 죽어도 말이다.
도건이와 결혼하면 내가 걱정한 모든 것들이 없을 것이다. 육아는 당연히 없고, 집안일은 도건이가 나보다 잘 하는 편이다. 임도건은 굉장히 깔끔해서 집안일을 해주시는 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말에는 스스로 대청소까지 한다. 그리고 도건이네 집은 제사를 안 지낸다. 명절 땐 집에서 다 같이 한 끼 먹고 헤어진다고 한다. 확실히 이상적인 시댁이긴 하다.
“왜 멈춰. 계속 쓰다듬어 줘.”
잠시 결혼에 대해 생각하느라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멈췄더니 임도건이 어린애처럼 칭얼거렸다. 자취방을 구하지 못해 도건이의 집에서 함께 지냈던 한 달이 생각났다. 집안일 해주시는 분이 있어서 아침도 매일 얻어먹고 좋았었다. 주말에 함께 하던 청소도 즐거웠다. 편하게 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었던 그 날들은 정말 좋았다. 우리가 결혼해서 함께 산다면 그때와 같을 것 같았다.
“우리 하자. 결혼.”
다시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 말에 도건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내 품에서 빠져나온 그는 믿기지 않는 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
“진짜로?”
“응, 뭐. 결혼생활 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으면 이혼하면 되지 뭐. 그래도 우리 사이 안틀어지는 거지?”
“우리가 결혼을 하든 이혼을 하든 변하는 건 없어. 난 그래도 변함없이 널 좋아 할 거니까.”
“나도!”
내가 웃자 도건이도 따라 웃었다. 결과가 불분명한 선택이지만 도건이라면 결혼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얼마 되진 않지만 내가 먼저 죽어서 내 재산이 전부 도건이한테 간다고 해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결국 나는 스스로, 무엇이 있을지도 모르는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 발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