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3 과잉보상 =========================
2화
띵동- 띵동-
계속되는 벨소리에 혼란스러운 정신을 수습하고 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문 앞에 서있는 도건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왜?! 왜 그런 표정이야?”
“왜 누군지도 안 물어보고 문을 열어 주냐? 요즘 이상한 사람 많으니까 조심 좀 해라.”
“알았어.”
기죽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도건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만날 잔소리만 한다고 혼자 구시렁대며 문을 닫고 도건을 따라 소파에 앉았다.
“아침 아직 이지? 해장국 시켰어. 곧 올 거야.”
“응. 이거.”
도건이가 주머니 안에서 꺼낸 흰 종이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계약서.”
“뭔 계약서?”
A4용지 두 장의 상단에 혼전계약서라는 단어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하단엔 '계약자: (인)'이 두 번 쓰여 있었고, 중앙은 비어있었다
“이게 뭐야? 혼전계약서?”
나는 어리둥절해서 도건이를 바라봤다. 날 보던 도건은 싱긋 웃었다.
“우리 결혼하기로 했잖아. 네가 먼저 하자고 했어.”
인자한 부처님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 도건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또 뭘 꺼내더니 손에 끼고는 내게 보였다.
“어…?”
“반지. 네가 청혼한 증거.”
내가 술 취해서 반지모양으로 만든 소주병 뚜껑이었다. 도건이의 손에 끼여진 소주병 뚜껑을 바라보다가 도건이를 한 번 보고, 다시 소주병 뚜껑을 바라보다가 도건이를 봤다. 도건은 아직도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왜 그래…? 그냥 소주병 뚜껑이잖아.”
“반지야.”
그의 미소는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쓸데없는 장난치는 애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더 황당하고, 불안했다. 설마…. 진짜?
“미안, 내가 어제 술 취해서 별 이상한 소릴 다했다. 그치? 아, 밥은 언제 오지?”
어색하게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주문한 가게에 재촉하는 전화라도 하려고 했다.
“어제, 네 말 듣고 나도 생각 많이 했어. 네 말대로 우리 둘 다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것 같더라고.”
도건에 말에 나는 소파에 앉아 있는 도건이의 앞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네가 손해 보는 장사야. 너 어차피 네 성적취향 집안에서도 다 알고, 집안 재산 안 물려받아도 너 혼자 지금 하는 사업으로 잘 살 수 있잖아. 재산 안 물려받아도 괜찮다며.”
갑자기 도건이가 눈을 빛냈다. 인자했던 미소가 어딘가 사기꾼 같은 미소로 변했다. 그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아니. 나 사실 탐나.”
“뭐가?”
“임산그룹”
“너희 할아버지 회사?”
“응. 이변이 없다면 우리 아버지가 물려받을 회사. 그리고 내가 여자랑 결혼 한다고 하면 나한테 물려질 회사. 생각해 보니까 나중에 내 동생한테 물려주기 아깝더라고. 내가 그자식보다 뭐가 못나서 회사를 뺏겨?”
“그, 그렇지만. 너네집이랑 우리 집이랑 집안 차이가 좀…급이 안 맞잖아. 너희 집에서 날 허락할리가 없어.”
“그건 걱정 마. 그냥 여자라면 무조건 오케이 하실 테니까. 진짜로. 할아버지가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여자이기만 하면 된다고, 제발 한 여자한테 정착해서만 살라고 하셨거든. 남자만 아니면 돼. 우리 할아버지는. 뭐 부모님은 사람만 괜찮으면 그런 거 신경 안 쓰시고.”
“그…”
띵동-
그래도 결혼은 좀 아닌 것 같다고 말하려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주문한 해장국인 것 같았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분명 그러면 안 되는 건데 그러고 싶기도 했다. 도건이의 태도가 너무 평온하고 당당해서 그래도 될 것만 같았다.
“내가 받을게.”
현관에서 주문한 해장국을 받고 있는 도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도건이는 청바지에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을 계속 보고 있자 갑자기 도건이를 처음 봤던 날이 떠올랐다. 검은색 꽃무늬 몸빼바지에 초록색 반팔티를 입고 밀짚모자를 쓰고 걷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냥 평범한 또래인줄 알았던 첫 모습이 생각났다.
“일단 먹고 얘기하자.”
주문한 음식을 받은 도건이 음식을 식탁위에 올렸다. 음식을 식탁에 다 세팅한 후에 포장을 뜯고 있는 그를 도와 나도 해장국을 싼 랩을 뜯었다. 얼큰한 해장국의 향을 맡으니 갑작스레 허기가 몰려왔다.
“어? 그러고 보니 계산 네가 했어? 내가 사주려고 했는데. 어제도 네가 나 집까지 업어다 줬을 거 아냐.”
“나 돈 많아. 걱정 마.”
“그게 아니라. 그냥 사주고 싶었다고.”
내말에 도건이 피식 웃었다. 도건이가 돈 많은 거야 아주,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술 마실 때마다 집에 잘 데려다주는 게 고마워서, 술도 항상 도건이가 사기 때문에 해장국은 내가 사고 싶었다.
“알았어. 다음에 사줘. 오늘 보고 안 볼 거 아니잖아 우리.”
“알겠어. 잘 먹겠습니다!”
기도하는 것처럼 두 손을 모아 도건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는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먹었다. 역시 해장국은 이집이 최고다. 깍두기도 많이 달라고 했더니 두 접시나 주셨다. 역시, 단골!
도건이와 나는 말없이 해장국을 먹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