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2 과잉보상 =========================
1화
날씨마저 날 비꼬는 걸지도 모른다. 이렇게나 맑은 날씨라니, 구름 한 점 없는 이런 청량함이라니! 분명하다. 날씨마저도 내 어리석음을 우스워하고 있는 것이다. 에라이. 비나 왔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아무도 밖으로 못나가게 천둥번개에 우박까지 덤으로 얹어서.
비 내리라는 내 저주 꼴이 우습게 그 후 한 달 내내 날씨는 맑음, 그 차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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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말했다. 나는 회사에 들어가면 자기 일만 빨리 다 끝내고 놀고 있을 좀 얄미운 캐릭터가 될 것 같다고. 일한 것에 딱히 흠잡을 건 없지만 그렇다고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잘하진 않은 그냥 그런 so, so 일거라고. 아무래도 그때의 친구들의 말이 저주였던 듯하다.
나는 현재, 지금, 그런, 아주, 너무, 그저 그런, so, so 한 실력으로 회사생활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일상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회사생활이 그렇다보니 내 인생마저 그저 그런 단조로운 재미없는 인생이 되어가고 있었다. 분명 예전에는 미래에 대한 장대한 계획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게다가 엄마의 결혼독촉은 내 삶을 더 재미없게 만들고 있었다. 난 비혼주의자라고 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수 없이 말해도 엄마는 개 짖는 소리로만 생각하는지 매일, 끝도 없이 남자를 만나라고 하신다. 혼자서 남자를 만날 재주가 없다면 선 자리를 알아봐 주겠다고 하신다. 난 정말 엄마가 왜 저렇게 결혼에 집착하는지 이해 할 수가 없다.
어제 아침에도 반찬을 가져다주겠다는 핑계로 내 자취방에 와서 기어코 하루 묵은 엄마는 회사에 가는 내게 이름 모를 남자들의 스펙을 읊으며 누가 좋은지 생각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이미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서 어떤 사람이 내 선 자리 후보인지 한 사람도 기억나지 않았다.
한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긴 했지만, 이미 정신의 한 귀퉁이는 너덜너덜 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인지 기운도 없고 축 처지는 하루였다.
축축 처진 채로 간 회사에서는 점심도 김밥으로 대충 때우면서 일했다. 한 달 내내 퇴근시간에 맞춰서 퇴근한 적이 없었다. 어제도 여전히 퇴근시간이 지나서도 일했다. 그래도 주말만큼은 꼭 쉬도록 해주는 회사라 다행이었다. 다음 날이 주말이었고, 그 희망 하나로 지쳐가는 몸을 이끌고 열심히 서류처리를 하고 있었다.
일이 끝나갈 무렵 문자가 왔다.
<술? 오늘도 야근?>
도건이었다. 도건은 대학생 때 고향집에서 만난 친구였다. 몇 번의 만남 만에 소중한 친구가 된 도건은 평생 잃고 싶지 않은 소중한 친구였다. 도건과 함께 있으면 항상 즐거웠고, 편했다. 유일하게 그나마 자신의 속내를 터놓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곧 끝나! 1시간 만>
답장을 보낸 후 자세를 고쳐 앉고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 한 달 동안 바쁘고 힘들어서 도건이와 만나지 못했는데, 오늘은 꼭 만나고 싶었다. 결혼독촉에 대한 스트레스와 회사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가 생각보다 심해서 털어놓을 사람이 필요했다. 술도 마시고 싶었다. 술 마시면서 간만에 잘 통하는 친구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빨리 끝내고 약속한 포장마차로 달려갔다. 오랜만에 보는 도건이 반가워서 격하게 껴안아 주고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어제는 여태껏 쓰다고만 생각했던 술이 너무 달았었다. 이상하게 술이 싱겁기도 했다. 물을 탄 것처럼 말이다. 평소에도 좋아하던 불닭발은 평소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그래서 술이 더 잘 넘어갔다. 술을 잘 하는 편은 아니다. 소주는 3잔이 적정량인데 만난 지 한 시간도 안돼서 벌써 소주 5잔을 마시고 있었다.
“오늘 왜 이렇게 막 마셔?”
“엄마 때문에. 회사 때문에! 그놈의 결혼 때문에!! 스트레스 최고야. 어? 나 잔 비었어.”
“안돼. 너 또 마시면 벌써 6잔째야. 내일 속 아파 죽으려고?”
“몰라. 내일은 내일이고 지금은 한 잔 더 마셔야겠어. 아니, 세잔 더!”
도건이 한숨을 쉬며 가만히 있자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소주병을 들어 병째 마시려고 했다. 도건은 기겁해서 소주병을 뺏었다. 소주병을 뺏긴 나는 소주병 대신 도건의 잔을 노렸고 순식간에 도건의 잔에 담겨있던 술은 내 입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사실 그 이후부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현재 도건이가 보낸 문자가 무슨 의미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이 말이다.
<부모님께 말씀 드렸어? 상견례부터 하자. 부모님 시간 언제 괜찮으신지 알려줘.>
What?! 이게 무슨 해괴한 문자란 말인가!
<뭔 솔?>
<상견례. 날짜. 빨리>
<무슨 소리냐고!!!>
<집이지? 나 지금 간다.>
집으로 온다는 도건의 답장을 받고 어리둥절한 채로 세수를 하고 해장도 할 겸 해장국도 주문했다.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해장국을 시키고 밀린 설거지를 하려다 문득, 소주병 뚜껑을 주물럭거리고 있던 자신이 기억났다.
당시에 나는 소주병 뚜껑을 만지며 생각했다. 반지, 도건이 줘야지~ 하고 말이다.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왜 내가 도건이에게 반지를 만들어 주려고 했더라?
‘결혼하자. 임도건!’
허? 어렴풋이 단편적인 기억이 났다. 제대로 기억은 안 나도 중요한 부분은 기억이 났다. 내가 도건이에게 청혼을 했고…. 그 미친 자식은, 술주정뱅이가 하는 개소리를 수락했다. 그리고 그 미친놈이 그 개소리를 실행에 옮기려고 하고 있었다!
아니야, 장난이겠지. 장난이겠지? 으으. 난 괴로움에 신음했다. 놀리려고 그러는 거겠지? 아직 술기운이 남아있는 머리는 흐렸다.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판단이 확실하지 않았다.
띵동-
중간 중간 끊어진 기억의 조각을 맞추려고 애쓰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