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윽?!"
이번엔 정말로 무지막지 하다.
저기 중앙국 소속의 기사들은 루드빌에게 깔리거나 부딫혀 다친 자들도 속출하는
모양이다. 비명소리와 둔중한 울림에 바닥에 쓰러진 유헌은 머리를 저으며 자리에
서 일어난다.
갑자기 용으로 변신하나 했더니 그 덩치로 달려든다. 덕분에 주변은 완전 초토화.
이렇게 되면 다른 곳으로 그녀를 유인해야 하는데 그것도 곤란하다.
일부러 근처를 배회하며 애꿋은 기사들과 병사들의 사이로 들어 갈뿐 자신에게 가
까이 접근하지 않는 것이다. 힘을 써볼테면, 써봐라 그렇게 되면 이 인간들은 무사
하지 못할 거다-라는 식의 행동에 이를 간 유헌은 근처에 놓여진 검을 집어든다.
그런 자신의 행동에 가소롭다는 듯이 이를 들어낸 적룡이 기분 나쁘게 눈을 가늘게
휜다.
[한번 내힘을 사용해 보려무나- 그렇게 못할껄?]
".........쳇."
몸속에서 들끊는 기운에 이를 악문 유헌은 그것을 어떻게든 사용해 보려 했지만 생
각처럼 쉽게 되지 않는다.
낭패한 기색의 모습에 루드빌은 점점 기분이 고양됨을 느낀다.
[힘이 있으면 뭐하지. 사용할 방법을 모르는데-
넌 몸속에 있는 마력을 운용하는 법따위 모르는 것 같구나]
적룡의 말이 옳지만 그것을 내색할 수는 없다.
단지 가소롭다는 듯이 입가를 올려보인 유헌이나 이미 등은 축축히 젖어있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들어오는 힘을 반대로 이용한 적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의도한 것보다 모르는 사이 무의식 적으로 벌어진 일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몸속에 있는 마력을 끌어들어 사용하는 방법따위 알리가 없다.
배우지를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힘을 사용하란 건가.
화살은 없지만, 대가 없어 날리지 못하는 꼴이다.
"그것은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내가 두려워서 힘을 사용하지 못하는 거겠지.
겁쟁이 도마뱀."
악의섞인 조롱에 적룡의 안색이 굳는다.
붉은 눈동자가 타오르는 듯이 붉어진다 했을 때 입을 벌린 용이 갑자기 중앙성의
탑쪽으로 마력을 난사한다.
쿠궁-
요란한 굉음과 탑이 반으로 갈라져 무너져 내리는 광경에 놀란 유헌은 입을 벌릴
뿐이다. 그것은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로 중앙의 수호자라는 적룡이 오히려 건물을
무너뜨리자 굉장한 동요를 보인다.
[나를 화나게 하지 말아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거든]
"........미친건가? 지켜야 할 곳을 그렇게 망가뜨리다니..!!"
[어차피 맘에 들지 않았어. 새롭게 내 마음에 드는 모양으로 다시 축조할 것이다]
그녀의 말에 안색을 굳힌 유헌은 들고있던 검을 강하게 쥔다.
수호자라는 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지켜야 할 것들을 부수고 상처를 입히고, 오히려
이쪽에서 그것을 보고 전전긍긍하다니- 뭔가 뒤바뀌지 않았는가.
이를 간 유헌은 루드빌을 죽일 듯이 노려본다.
그와 반대로 안정을 찾은 적룡은 여유로운 폼으로 둔중한 육체를 움직인다.
"루드빌님! 이렇게 되면 중앙성의 건물들이 파괴됩니다!
부디 진정하시고, 저 인간만 처치하심이-"
[시끄럽다. 저리로 안 꺼지겠느냐?]
말을 거는 기사에게 으르렁 거린 루드빌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젖는다.
그것을 간신히 피해낸 기사는 그러나 용에게 공격을 당했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아 일어날 생각은 안한다.
용에 대한 두려움이 어찌 없겠느냔 만은 그러나 중앙국을 수호하는 용이라는 것에
용기를 얻고 말을 걸었건만 저런 태도라니.
벌벌떠는 기사의 모습이 귀찮아 혀를 찬 루드빌은 근처에 널려있는 인간들에게 꺼
지라는 말을 건내려 목을 아래로 숙인다. 그리고 그 순간 눈앞을 가르는 살기에 서
둘러 얼굴을 들었지만, 이미 눈에 가느다란 검상이 생긴 후다.
[크아아아-ㄱ!!!!]
"....큭!!"
너무나 아팠다.
루드빌의 눈에 검을 휘두른 후 땅 바닥에 착지한 유헌은 한쪽 눈을 감싸쥐며 자리
에 주저 앉는다. 화끈한 통증이 머리속으로 직격한 느낌이다.
한동안 그렇게 있던 유헌은 이곳에 있으면 발광하는 용에게 밟히거라는 생각에 자
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인간의 몸보다 좀더 강한 적응력과 체력을 지닌 루드빌은 한쪽눈을 가리고 자신을
올려다 보는 유헌을 노려보며 이를 간다.
자신에게 같은 고통이 올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공격을 감행하다니!!
가볍다고 생각한 것과 달리 꽤나 깊숙히 베였는지 피가 얼굴을 타고 흐른다.
적룡이 피를 흘리며 살기를 내뿜는 것은 상당히 두려운 광경인지라 안색을 굳힌 기
사들은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한다.
"....잘 안 보이는 군."
손에서 눈을 뗀 유헌은 한쪽눈을 감은채 정면을 바라 보았지만, 뿌옇게 흐려져 보
인다. 한동안 눈을 깜박이던 그는 그러나 자신을 향해 꼬리를 휘두르는 루드빌의
모습에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난다.
하지만 다리를 걸려 바닥을 구른 유헌은 간신히 적룡의 공격을 피해낸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아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운 유헌은 끝끝내 검을 놓치지 않고 기
다시피 해서 신전쪽을 향해 달려간다.
왠지 모르지만 아까부터 저곳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실제로 장소를 바꾼다고 해서 그녀의 공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네 이놈!! 없애 버리겠다!! !]
쿠궁-
아까의 여유로운 움직임을 버리고 엄청난 속도로 달려드는 용의 피해 몸을 날린 유
헌은 옆길로 뛰어 들었지만 그곳은 경사가 진 곳이라 그대로 구르게 된다.
한참을 굴러 중심을 잡은 유헌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들다 자신쪽으로 지는 거대한
그림자에 숨을 죽인다.
굉장한 속도로 떨어지는 용의 발에 어떻게든 몸을 날린 유헌은 엄청난 진동이 느껴
지고 바로 1센치앞에 놓여진 적룡의 발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낀다.
이런것에 밟히면 그대로 쥐포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 보던 유헌은 납작해진 시체의 모습을 떠올리곤 울렁거
리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쥐새끼 같은 놈.. 다시는 눈앞에 알짱거리지 못하게 해주마-]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다.
저번에 샤한이 눈에 검을 날릴때도 저러더니 꽤나 눈에 상처에 대해 예민한 모양이
다.
그도 그럴 것이 용의 피부는 워낙에 단단한 대신 눈은 다른 인간들과 별 다를 것이
없으니, 그런 존재가 인간에게 공격을 받아 통증을 느끼는 부분은 눈밖에 없다는
가정하에 적룡이 느끼는 것은 통증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당했다는 굴욕감도 상당
수 포함되어 있을 거다.
한발을 바닥에 내디딘 그녀가 언덕위에 올라간 자신의 발을 내리는 순간을 이용해
자리에서 일어난 유헌은 서둘러 달리기 시작한다.
한쪽눈의 통증은 시간이 지나자 점점 엷어지는 것을 느낀다.
통증만을 공유할뿐 상처는 입지 않으니 다행이다.
이렇게 되면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인내하고 저 용의 목을 잘라볼까도 생각해 본다.
그전에 쇼크로 자신이 먼저 죽는 것은 아닐까.
헐떡이며 달려간 유헌은 멀리 신전에 들어서는 게단을 발견하곤 화색을 짓다 머리
뒤에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에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콰앙!!
".....무식한..!"
그대로 머리를 들고 있었다면 앞에 박힌 동상에 박살이 났을 것이다.
반쯤 땅바닥에 묻힌 동상을 바라보던 유헌은 몸위를 덮는 거대한 그림자에 부들거
리는 몸을 억누르며 천천히 얼굴을 든다.
[죽여 버릴테다-]
붉은 색의 날개를 펼친 루드빌이 이쪽을 바라보며 이를 들어내며 웃는다.
함께 죽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그녀의 결심이 머리속을 지배하는 순간 거대한 적룡
이 자신을 향해 떨어진다.
마력을 사용할수는 없으니 몸으로 깔려 죽이겠다는 의도인가.
왠지 웃음이 나오는 상황에 이를 들어내며 웃어보인 유헌은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붉은 덩치에 눈을 감았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칸의 도움이 되고 싶어서 단신으로 이곳에 왔더니, 이렇게 죽는 거다.
다행히 저 루드빌도 자신과 함께 죽게 되었지만, 돔이나 이자크도 함께 죽겠지.
만들어낸 결과는 고작 모두가 함께 죽는 길인가- 이렇게 될거라면 차라리 좀더 기
다리는 건데. 좀더 생각을 해보고 좀더 나은 상황이 될때까지 기다려 보는 건데.
조금 더....
................칸과 함께 있는 건데.
너무나 억울한 마음이 든다.
갑자기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오기에 몸을 굴려서라도 피하자고 눈을 부릎뜨고
몸을 일으킨 유헌은 자신에게 떨어지는 루드빌을 향해 검이라도 휘두를 생각이었
지만, '딱-!'하고 들리는 소리와 이마에 느껴지는 통증에 다시 자리에 누을수 밖에
없었다. 이마를 감싸쥐고 몸을 웅크린 유헌은 떨어지는 저 용과 머리부터 부딫한
건가 싶었다.
그러면 그 다음은 온몸에 느껴질 통증뿐이다-
좀더 결심을 빨리 했으면 좋았을 것을, 미적대니 이런 상황이 되어 버렸다.
억울한 느낌에 이를 갈던 유헌은 그러나 연속으로 이어지지 않는 통증에 슬그머니
눈을 떠본다.
그러고 보니 왠지 이상항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크으으.. 돌머리야 저거. 아파 죽겠다고."
"괜찮은 거야? 파오??"
"너라면 괜찮겠냐? 아주 죽겠다!!"
".......괜찮은 모양이네."
요란한 분위기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들.
게다가 숲근처의 바닥에 누워 있었는데 지금 자신이 누워있는 곳은 하얀 대리석이
다. 너무 놀라 말을 하는 사람들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있던 유헌은 바닥에서 올
라오는 검은 손에 숨을 들이킨다.
"...아..녀..ㅇ.."
"..........."
"굳어 버렸잖아. 너무 놀라게 하면 안된다고 그림자."
바닥에서 나온 팔은 유헌에게 손을 흔들지만, 굳어버린 유헌이 눈을 크게 뜨고, 옆
에 여성이 타박을 하자 기가 꺽인듯 다시 바닥으로 들어가 다른 곳에소 얼굴을 삐
죽히 내민다.
기둥에 상체만을 들어내 자신을 바라보는 저 어눌한 사내는 알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이 여성도 알고있다.
멍한 표정을 짓는 유헌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던 여성은 손을 들어 그의 볼을 꼬
집어 본다.
"너무 귀여운거 아냐? 그 얼굴은-"
"...........미할라?"
"아아- 오랜만이네. 유헌."
".......................................................
........................말도 안돼."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한마디 뱉어낸 유헌은 안색을 굳히며 자신의 볼을 꼬집은 여
성의 손을 쳐내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저 요정의 숲의 그림자라는 사내나, 쪼그린 채인 미할라나
그녀의 뒤에서 이마를 잡고 웅크리고 있는 더벅머리의 사내의 모습을 바라보던 유
헌은 그가, 전에 발챠에서 신세졌던 율시아의 저택에서 만난 사내라는 것을 떠올린
다. 분명 이름이 파오였다.
분명 노웬과 친한듯이 보였던 자이지만, 처음 저택에 도착한 이후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지.
"말도 안돼. 당신들이 이곳에 있을리가 없잖아."
연관성이라곤 조금도 없던 자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이렇듯 당연하게 이곳에 있을리가 없다. 미간을 찌뿌린 유헌은 이건
루드빌이 자신을 죽이기 전에 벌이는 쇼가 아닐까하고 판단해 본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주변을 둘러보는 유헌의 모습에 미할라와 파오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내가 뭐랬어. 네가 있으면 될일도 안된다니깐."
"여전히 재수없게 말하는 남자네. 그러니 아직까지 혼자인거야."
"그러는 너도 죽을때까지 노처녀 였잖아."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에겐 사랑스런 정현이라는 아들이 있다고!"
투닥대는 두사람을 무시한 유헌은 뚫려진 창가에 그리로 달려가 밖을 바라본다.
보이는 각도나 풍경에 이곳에 그토록이나 가려고 했던 신전이라는 것을 깨닭는다.
이런 곳에서 저 용의 농간에 게속해서 넘어갈수 없다고 생각한 유헌은 몸을 돌려
여전히 쪼그리고 앉아있는 두사람에게 검을 들이민다.
그것을 바라보는 미할라의 표정이 정말로 그녀인 것 같아 작은 통증이 느껴진다.
이런 최저의 짓을 벌이다니 역시나 적룡답다는 생각이 든다.
"장난 할 기분이 아니니 어서 이곳을 벗어날 방법을 말해."
"나가려면 문으로 가면 된다고.
아무리 이런 상황이라지만 그런걸 물으면 챙피하지 않아?"
"......정말로 미할라 같아."
얼굴을 옆으로 기울며 말하는 투에 유헌은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낀다.
헛웃음을 터트리는 유헌을 보며 '우린 정말인데...'라고 중얼거린 미할라는 유헌의
뒤로 나타난 거구의 사내에 눈을 크게 뜨며 입을 연다.
"조심..."
"네놈은 여기서 뭐하는 거야?!!!"
퍽
"윽?! !"
챙캉-
엄청난 괴성과 뒷통수에 느껴지는 통증에 유헌은 잡고 있던 검을 떨어 뜨린다.
머리를 붙잡고 비틀거리는 유헌의 모습에 도끼눈을 뜬 미할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식하게 힘자랑을 하는 칸에게 이를 들어낸다.
"네힘이 얼마나 쎈 줄 알아?! 어떻게 유헌에게 이런 무식한 짓을 하는 거야?!!"
"뭐야?!! 요정의 숲에서 잘 놀던 우리들을 꾀내어 이런곳에 오게한게 누군데 이제
와서 태도가 변해?!! 열 받으면 약속이고 뭐고 그냥 돌아가는 수가 있어!!!"
"돌아가 봐라! 이 무식한 덩치야!!"
"덩치라니-! 이몸에겐 칸이라는 훌륭한 이름이 있단 말이다!!"
미할라의 품에 안겨 뒷머리를 주무르던 유헌은 목청을 높히는 구릿빛 피부의 사내
에게 시선을 주었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유헌의 모습에 다시금 주먹을 든 칸은 '왜 그런 눈빛으로
날 보는 거냐-'며 윽박을 지른다. 그런 나무의 정령의 주먹을 피해 몸을 돌린 미할
라는 눈꼬리를 위로 치켜 올린다.
마치 남의 아이는 왜 건드려요 같은 포즈에 기운이 빠진 칸은 어이없다는 듯이 헛
웃음 지으며 손을 내린다.
"내 나무들이 저 적룡을 버티는 것은 무리야. 나무랑 불은 원래 상극이라고-
어서 녀석에게 저년 좀 어떻게 좀 해보라고 그래."
"나도 알고 있으니깐, 닥달하지마- 너는 그 성미 때문에 꼭 일을 그르친다니깐!"
"너..너너너 너한테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어디에 있어!! 이 내가!!"
앙칼진 그녀의 말에 얼굴을 붉힌 칸은 손가락을 내밀며 부들부들 떤다.
성미 같아선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리고 싶지만, 여자라서 참는 다는 듯한 뉘양스가
진하게 풍긴다. 그런 둘의 모습과 사이에 낀 유헌을 바라보던 파오는 아직도 얼얼
한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쉰다.
"..두..둘..다 ..똑같아..."
"그렇지."
그림자의 말에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 파오는 점점 강해지는 적룡의 기운에
미간을 찌뿌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유헌이라는 저 소년이 정신이 없는 상태라
는 것을 알지만, 더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걸어가 미할라와 칸의 몸을 떼낸 파오는 아직 멍한 상태인 유헌의 얼굴에 양손을
올려 보인다. 자신의 그런 행동에 미할라가 기겁을 하며 등에 매달리는 것이 느껴
졌지만, 그런 것에 신경을 쓸때가 아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겠나?"
"..파오..라는 분이라고. 저번에 율시아님의 저택에서 뵌 분..아닌가요?"
"맞았다. 머리가 좋은 아이로군."
눈을 가늘게 접은 그는 등에 매달려 머리를 두들이는 미할라의 몸을 떨궈 내 그녀
를 앞으로 내민다. 이번엔 반응이 있어 몸을 움찔하며 뒤로 물러나는 유헌의 팔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곤 다시 입을 연다.
"그런 이 여자는 알고 있나?"
"...미할라... 하..하지만, 그녀는 이미!!"
"여왕의 기둥이 무너졌다고 해서 그녀가 사라지지 않아.
우리들이 사라지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강하게 적용될 때 뿐이다."
"....우리들?"
미묘한 말에 미간을 찌뿌리던 유헌은 강한 진동이 발밑을 달리자 안색을 굳힌다.
그것은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로 사색이 된 칸은 서둘러 밖으로 달려 나간다.
"무슨 일이죠?"
"너가 깔리기 전에 그림자가 널 이곳으로 옮겨 왔거든.
그것은 눈치챈 적룡이 널 내놓으라고 시위하는 거지."
파오의 말에 얼굴을 돌린 유헌은 기둥에 얼굴을 내밀며 자신의 눈치를 보는 그림자
에 시선을 준다. 눈을 피하지 않고 자신을 계속해서 바라봐 주는 유헌에게 용기를
얻은건지 그림자는 머뭇거리며 손을 들어준다.
그런 그의 모습에 아까 자신이 상당히 실례되는 행동을 했다는 것을 깨닭은 유헌은
안색을 굳히며 고개를 숙여 보인다. 유헌의 마음을 아는지 사과를 받은 그림자는
조금 머뭇거리며 괜찮다는 듯 고개를 숙여 보인다.
그 모습에 안도의 숨의 내쉰 유헌은 그러나 머리속을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안색을
굳히며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온 미할라에게 시선을 준다.
"....정말로 미할라 인가요?"
"미할라는 하나밖에 없으니 정말로라는 말은 이상하다고."
"...하지만 분명 여왕의 기둥이-"
저쪽 세계에서의 그녀는 분명 죽었다.
그리고 이쪽에서의 그녀도 기둥이 무너지면서 완전히 소멸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
데.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그 속에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내심을 읽은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몸은 죽었지만, 정신은 살아있어. 아직 죽을수가 없어서 말야.
다른건 몰라도 현정이가 장가가고 행복해지는 것을 봐야지."
눈을 가늘게 접으며 미소 짓는 모습에 그녀가 정말로 미할라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묘한 표정을 짓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유헌의 볼을 쓰다듬은 미할라
는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연다.
"그동안 힘들어 하는 것 같았지만, 유령의 몸으로 여기저기 다닐수는 없잖아.
이번엔 파오의 덕으로 이곳까지 온가라고."
"아아- 그런가요. ..........그런데 모두 여기서 뭐하는 거죠?"
"네놈이 위험하다고 저 망할 여자가 난리를 펴대는데 어떻게 안 올수가 있어!!"
"...마...만나..고..시...어..다.."
윽박지르는 칸과 더듬거리며 말하는 그림자에 모습에 가만히 고개를 젖던 유헌은
다시금 울리는 진동에 안색을 달리한다.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던 파오는 얼굴을 돌려 유헌을 바라본다.
더벅머리가 눈을 가리고 있어 그 표정을 알수가 없지만, 현제 그가 얼마나 심각해
하는지 알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딱딱하게 굳은 유헌은 그의 말을 기다린다.
"시간이 없다. 원래 이렇게 우리들이 나서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칸의 말대로 미할라가 너무 난리를 부리니 어쩔수가 없었다."
"파오. 이럴때는 그냥 기분좋게 도와주러 왔다-라고 하는 편이 인덕을 쌓을 때 더
도움이 된다고."
".....시끄러운 여자는 절로 치우고, 내가 너에게 할말은 저 적룡을 해치우지 않으면
네가 죽는다는 거지."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와 전 용에 기사의 맹약을 맺고 있어서-"
루드빌이 다치면 통증을 공유하고 적룡이 죽으면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다
른 자들이 죽게된다. 어둡게 가라앉는 유헌의 얼구을 바라보던 파오는 한숨을 쉬며
유헌의 턱을 집어 올린다.
"네 능력에 대해 잘 생각해 보는게 좋아."
"......네?"
"그리고 그녀를 꼭 죽이지 않아도 일을 해결하는 방법이 있지."
"........그런 방법이 있나요?"
"있지만, 내가 알려 줄 것은 여기까지. 나머지는 알아서 해라."
매달리는 눈빛의 유헌을 외면한 파오는 그의 손목을 잡아 창쪽으로 끌고간다.
"뭐야?! 파오 치사하게!! 방법이 있으면 확실하게 알려 달라고!!"
"남이 알려줘서 각성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적어도 우리들하고 어울리려면 저런 용따위 알아서 처리해야지."
"...우리들?"
방방뛰는 미할라의 얼굴을 밀어내는 파오의 모습을 바라보던 유헌은 아까부터 운
운되던 '우리'라는 단어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같은 곳에서 왔으니 우리라고 하는거다. 이상한가?"
짜증스럽다는 듯이 말한 파오는 밀어내는 자신의 팔에 이를 들이미는 미할라의 모
습에 질색하며 손을 뗀다. 그리고 창에 다가가 몸을 앞으로 내민 그는 칸이 펼쳐둔
나무의 진을 갈아먹는 적룡의 모습에 미간을 찌뿌린다.
자신의 결계로 마력을 쓸수없게 되니 저런 원시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거다.
정말이지 적룡의 무식함은 도저히 용서할수가 없다.
팔을 잡은 채 그닥 좋지않은 기운을 뿜어내며 밖을 바라보는 파오의 모습에 유헌은
눈이 마주친 미할라에게 얼굴을 댄다.
"........파오도.. 같은 곳에서 온건가요?"
"아아- 물론. 그는 나보다 더 일찍 온 사람이야.
게다가 너처럼 육체도 함께 넘어온 케이스. 아직도 살아있는 괴물이야."
"남의 험담은 뒤에서 하라고 그 입을 달린거다. 미할라."
"흥. 난 앞에서 하는게 좋은데 어쩌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는 게 좋겠군."
한숨을 쉬며 손을 내미는 파오의 행동에 안색을 굳힌 미할라는 잽싸게 몸을 돌려
유헌의 뒤로 숨는다.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 뒤로 숨는 미할라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못 만지게 하는 유헌의 행동에 파오는 팔장을 끼며 한숨을 쉰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어지간히 무른 놈이다.
"룰이 있는 거다."
".........네?"
"이 세계에 머무르는 자들의 하나의 규칙. 그것은 다른 자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다는 것. 어찌보면 드래곤들과 같은 원리지만, 우리들은 좀더 신경쓴다고. 용들처
럼 변신을 한게 아니라 원래의 모습대로 자신의 자리에서 잘 살아가고 있으니.
그런데 저 미할라가 내 인생에 태클은 건거라고. 덕분에 기분이 아주 저조하다."
"그런거...알고 있지 못하는 데요.."
"당연하지 이걸 아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너를 포함 단 6명뿐이다."
"..........여섯명..?"
융텐이 말한 게 생각난다.
첫번째 아이에서 다섯번째 아이들까지 이 대륙에서 업적을 쌓은 인간들.
그리고 분명 내가 여섯번째 아이가 아닐가하고 말했지.
.................그렇다는 것은-
딱딱하게 굳은 유헌의 얼굴에 긴장하지 말라는 듯이 입가를 조금 올려보인 파오는
부드럽게 입을 연다.
"그렇다는 거니. 다음부터 저 극성맞은 아줌마처럼 남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아라."
"..아..아줌마라니!!"
"아들이 20이 넘었다면서- 아줌마지. 그럼."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주제에!! 이 호색 늙은이가!!"
"나중에 말하돌고 하지.
너하고 만나면 중요한 말을 못하고 맨날 싸우기만 한단 말이다."
유헌의 등뒤에서 얼굴을 내미는 미할라의 얼굴을 누른 파오는 유헌의 코앞에 다가
가 입을 연다.
"일단 우리들끼리의 말은 여기까지 하고, 저 용은 말이지 지금 처리하지 않으면 상
당히 피곤해 질꺼야. 너 덕분에 우리들까지 도매로 넘어가는 것은 사양이다.
나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는 놈이 있는가 하면 숨쉬는 것 자체가 피곤한 녀석들도 있
거든. 그런 놈들은 되도록이면 안 건드리는 게 신상에 좋다지."
"..아아.. 예."
"좋아 착한 아이군. 그럼 가서 저 멍청한 적룡을 처리하도록 해라."
무작정 등을 떠미는 그의 행동에 당황한 유헌은 얼굴을 돌리며 어떻게 처리하라는
건지 물으려 했지만, 머리카락에 가려진 눈이 보이질 않아 그 의중을 알아 볼수가
없다.
"잠깐, 유헌만 보내는 거야?! 넌 저 용들은 전부 지하로 넣어버린 장본인이잖아!!
나서서 좀 도와 주라고!"
"이 일은 놈에게 맡겨진 거야. 그건 그가 알아서 해결하게 냅두는 편이 좋아."
"그..그런 그렇지만.."
울상인 미할라의 모습에 파오는 피곤한 표정을 짓는다.
전에는 안 그랬는데, 자유로운 몸이 되자 너무 감정의 표현이 가벼워져 이런 약한
모습을 보인다. 그런거 반칙이라고, 남의 마음을 흔드는 모습을 보이는 건 나쁘다
고 생각하기에 파오는 고개를 돌리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는다.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는 유헌의 모습에 '왜 아직도 안가는 거냐-'라고 낮게 말하자
안색이 변한 놈이 지금 갈거라며 몸을 돌린다.
똑 부러지다가도 멍한 모습을 하는게 귀엽다.
"이봐."
"네?"
"칸이나 다른 놈들에게 나에 대해 말하지마. 앞으로 너 다시 보게 된다면 난 모르는
사람이니, 적당히 반응해 주길 바란다."
지금 자신에게 주여진 다른 인생이 있으니 그것에 발각되게 행동하지 말라는 말이
다. 파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유헌은 앞쪽에 있는 계단으로 달려 가려다 한층 더
강하게 느껴지는 진동에 중심을 못잡고 창쪽으로 엎어졌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슨 행동을 한건가해서 얼굴을 붉히던 유헌은 신전쪽
으로 들어오기 위해 나무와 덩굴로 뒤덮인 곳에 있던 루드빌이 몸을 돌리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적룡이 이번에 무슨 계략을 꾸미려 저러는 건가 싶었던 유헌은 그녀가 향하는
방향쪽에서 달려오는 인물에 숨을 삼켰다.
"........칸!! !"
분명 발로 밟았다고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자신도 같은 통증을 느끼고 정신을 잃는 건 아닐까하고 잠시 후회를
하던 루드빌은 자신의 몸에 아무런 이상이 생기지 않자 쾌재를 불렀다.
혹시나 녀석에게 몸에 이상이 생겨 맹약이 사라진게 아닐까? 한번 맺은 맹약이 영
원까지 간다고 하지만, 녀석은 이계인이니 예외가 있을지도 모른다.
입가를 올리며 크르렁 거리던 루드빌은 한발을 들어보고 처참하게 죽어 널부러질
인간의 시체를 찾았지만, 있는것은 발모양으로 푹 파여진 땅뿐-
유헌이라는 인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황당하고 분하기도 한 감각에 포효를 하던 그녀는 맞은 편에 있던 신전에서 이질적
은 기를 느끼고 이렇게 달려 온 것이다.
역시나 접근하는 동시에 뻗어나온 덩쿨이나 나무줄기가 자신의 앞을 막는다.
이런 신전따위 브레스 한방이면 끝날 일이건만 왜 이리도 귀찮게 구는건지.
바득바득 이를 갈며 포효하던 그녀는 잘라도, 잘라도 게속해서 뻗어 나오는 줄기에
점점 인내심이 바닥나던 참이었다.
"루드빌!! !"
[..........칸크빌레]
씨근대며 줄기를 입으로 물어 뜯던 적룡은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눈을 빛내며 얼굴
을 돌렸다.
도대체 무슨 배짱인건지 모르겠지만, 단신으로 이쪽으로 달려오는 아이가 보인다.
게다가 무기도 무엇도 없는 상태. 그 모습을 확인한 루드빌의 눈에 광기가 스친다.
유헌이라는 놈대신 녀석을 죽여 이 분한 마음을 풀어야 겠다.
몸을 돌린 적룡이 포효하며 자신에게 달려오는 모습에 칸은 움찔하며 걸음을 멈춘
다.
"..뭐..뭐야?"
주변을 살펴보던 칸은 유헌이 보이지 않다는 것에 안도했지만, 엄청난 속도로 자신
에게 오는 용의 모습에 완전히 사색을 띈다.
지금 이곳에 나 혼자이니 저 용을 혼자서 상대해야 한다는 건가.
숨을 들이킨 칸은 이내 이를 악물며 자신에게 달려오는 적룡에게 달려든다.
칸의 돌발 행동에 잠시 움찔하던 용은 그러나 이게 왠 횡재라는 듯한 표정으로 다
가온 칸을 향해 크게 손을 휘두른다. 하지만 간신히 피한 칸이 용의 다리 사이를 빠
져 나가자 용의 얼굴에 황당함이 스친다.
"덩치가 크니 행동도 느린거다!"
[....................이놈들...]
"잡아보지 그런가- 루드빌!!"
주먹을 쥐고 흔들어 보인 칸은 신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저 적룡이 전부터 신전이라는 곳과 상성이 잘 맞지 않다는 것을 떠올린 것이다.
저만치 떨어지는 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루드빌은 숨을 들이키며 나직히 으르렁
거린다. 엄청난 화를 참는 듯한 그 소리는 소름이 돋을 정도다.
[..이놈들....]
유헌이라는 놈도 칸이라는 놈도 하나같이 자신을 화나게 하는 존재다.
어차피 적룡을 위해 줄 사람은, 그녀를 위해 살아갈 사람도 많고, 앞으로 만들수도
있다. 저런 잡벌레들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한 루드빌은 목을 길게
내빼며 칸의 뒤를 따라 잡는다.
"제..길!!"
먼저 달려 갔다고는 하나 다리 차이가 틀리다.
금새 뒤로 다가온 루드빌의 모습에 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막 뒤로 다가온 적룡의 기척을 느끼고 숨을 들이킨 칸은 '칸-!'하고 머리위에서 들
려오는 익히 알고 있는 음성에 화색을 떠올리며 얼굴을 든다.
"유헌!!"
"칸, 기다려요!!"
창에서 몸을 내민 유헌은 덩굴과 줄기를 발판삼아 솜씨좋게 밑으로 내려온다.
그 모습에 미할라가 위험하다며 손을 내뻗는 것이 느껴졌지만, 몸이 위함한 것보다
칸의 안위가 더 우선이다. 미친듯이 달려 내려간 유헌은 어느새 4층 높이를 다 내
려와 루드빌에게 쫒기는 칸에게 달려간다.
다가오는 자신의 모습에 눈을 빛낸 루드빌이 이를 들어내며 앞에 있는 칸에게 입을
벌리자 유헌은 사색을 하며 순간이나마 숨이 멈추는 감각을 느낀다.
반사적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유헌은 그러나 땅바닥에서 올라온 그림자의 손
이 칸의 다리를 잡아 넘어 뜨리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문다.
칸은 바닥을 굴렀지만, 덕분에 루드빌의 공격을 피한다.
"제..길- 뭐냐 이건..."
신음을 흘린 칸은 강하게 넘어진 충격에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곧 머리위로
박히는 루드빌의 단단한 입에 사색을 한다.
맨 바닥에 공격을 하게된 루드빌은 눈을 빛내며 쓰러진 칸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칸은 그대로 굳어 버렸지만, 바닥에서 나온 그림자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나 저만치 뒤로 물러난다.
입안에 묻은 흙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루드빌과 손을 잡고 상체만을 들어난 그
림자를 돌아 보던 칸은 입매를 이그러 뜨린다.
"너 후빌 하샤발의 그림자잖아. 왜 이런 곳에 있는 거냐."
"....보..보고..시...어...서.."
"................그것 참. 고맙군."
적룡을 피해 슬슬 뒷 걸음을 질는 치는 칸의 모습을 바라보던 파오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가리던 더벅머리를 쓸어 넘긴다.
"녀석, 얌전히 있으랬더니 어딜 나타나는 거야."
"뭐 어때. 유헌 한번- 칸 한번씩 구해주는 것도 좋잖아."
"미할라- 다른 놈들도 너처럼 천하태평이면 얼마나 좋을까."
창가에 얼굴을 대고 싱글거리는 미할라를 바라보며 헛 웃음을 터트린 파오는 한창
대치중인 적룡과 유헌을 바라본다.
다른 자들이 보면 용과 대치중인 그에게 미쳤다고 할테지만 약간이나마 승산이 보
인다. 유헌이라는 소년이 살아남을 수 있는 하나의 승패.
하지만 그 방법을 과연 저 소년이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인가.
요리조리 잘도 빠져 나가는 유헌의 모습은 실소를 자아낸다.
보는 쪽도 용하다고 느끼는데 저 용은 얼마나 분하겠는가.
"차라리 브레스를 쓰지 말야. 그럼 끝이잖나."
"역으로 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저러는 거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 하나는 인지하고 있으니- 뭐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서늘하게 답하는 파오의 모습에 나무의 정령인 칸은 질린 표정을 지으며 살레살레
얼굴을 젖는다. 그림자의 손을 잡고 요리조리 잘 빠져 나가던 칸과 유헌이 한참을
뛰어 다니다 서로 만나는 모습이 그는 묘한 표정을 짓는다.
과연 할수 있을 것인가.
파오나 미할라가 좀 괴물같은 놈들이긴 했지만, 저 유헌이라는 소년도 그러한 것일
까. 그의 기억 속의 유헌이라는 소년은 얌전하고 주관이 있는 것 같은 소년의 모습
이다. 서로의 손을 잡고 다른 곳으로 달려가는 둘에게 시선을 주던 칸은 그저 무사
하라는 무운을 빌어 줄 따름이다.
"유헌, 이리로 와!!"
"칸.. 그래봤자. 용의 속도보라 느리다고요."
자신의 손을 잡고 숲으로 들어 가려는 칸에게 고개를 저어 보이던 유헌은 얼마 떨
어지지 않은 곳에 루드빌의 꼬리가 떨어지고 먼지 바람이 몸에 닥치자 안색을 굳힌
다. 얼굴을 가리며 몸을 숙이는 유헌의 모습에 안색을 굳힌 칸은 그림자의 손을 놓
으며 작은 몸을 끌어 안는다.
괜찮다며 그의 몸을 밀어 낸 유헌은 자신들을 바라보는 루드빌에게 시선을 준다.
마치 구석에 몰아둔 쥐를 보는 것 같은 그 눈동자에 절로 기분이 나빠진다.
"유헌- 그녀와 마력을 공유하지 않나? 사용하지 못하는 거야?"
"..그..그게.."
응용하는 법을 몰라서... 작게 웅얼거리는 유헌의 음성에 칸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
를 끄덕인다.
자신에게 날라오는 것들은 생존 능력에 힘입어 저도 모르게 발동되는 것이나 속에
내재 된 마력은 그것을 끌어 들이는 방법을 모르니 사용할수 없는 거다.
결과적으로 검을 지니고 있어도 무게 때문에 휘두르지 못하는 상황인거다.
유헌에게도 자신에게도 무기가 없다.
하다못해 검이라도 있으면 용에게 공격을 할수 있을테지만, 그러나 이내 머리속에
떠오르는 생각에 칸은 입술을 깨문다.
"유헌 루드빌과 통증도 공유하지 않나?"
"아아- 그..그렇긴 하지만, 그때 뿐이고 금방 나아 졌어요."
"...제길."
유헌의 말을 들은 칸은 암담해 짐을 느낀다. 용에게 공격을 할수 없어진 거다.
그런 칸을 보며 괜찮다고 말하려던 유헌은 갑자기 달려드는 용에 당황해 붙어있는
칸의 몸을 뒤로 밀고 자신도 다른 곳으로 몸을 날린다.
"크윽!!"
[칠칠맞게 다치지 말란 말이다!]
넘어지면서 팔이 까진 모양이다.
쓰린 감각에 팔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유헌은 마찬가지로 자신의 팔을 잡고 으
르렁거리는 루드빌의 모습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상황에서 넘어져 다친 것 같고 칠칠맞게를 운운하는 것인가.
붉은 눈동자로 내려다 보는 루드빌을 바라보던 유헌은 왠지 모르게 좋은 생각이 떠
오른 것을 느낀다.
이대로 자해란걸 해보면 어떨까?
위험하게 빛나는 유헌의 눈빛을 읽은 적룡은 당황하며 입을 연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어디에 있다는 말이냐!]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마찬가지라면 차라리 자해가 낫다."
[.....그..그런, 어이없는..!]
루드빌뿐만 아니라 칸도 놀란 모양인지 눈을 크게 뜨고 이쪽을 바라본다.
그 눈초리를 피한 유헌은 주변에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아본다.
죽지 않을 한도 내에 저 용을 쇼크로 넘어가게 하는 방법이 있을까?
덩치가 크니 왠만한 것으로 먹히질 않을테니, 확실히 끝장을 내는 것이 필요하다.
정말로 할 생각인지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유헌의 모습에 당황한 적룡은 근처에 있
던 검을 발로 밀어내며 손을 흔든다.
[그만 두지 못하겠느냐!!]
자해를 하려는 유헌을 말리는 루드빌의 모습은 참으로 웃겼다.
하지만 맘편히 웃을수도 없는 칸은 한걸음 앞으로 내밀며 루드빌에게 움직이지 말
라고 한다.
"그는 한다면 정말로 하는 사람이니, 건드리기 싫으면 얌전히 있어라!"
[이..이런 빌어먹을 인간놈들이...]
"그쪽이야 말로 빌어먹을 도마뱀이라고-"
애써 중재시킨 칸은 분한 듯 이를 가는 루드빌과 유헌의 모습에 묘한 표정을 지었
다.
이런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이지만, 왠지 모르게 두 사람의 이미지가 같아 보인다.
죽일 듯이 서로를 노려보는 그들의 모습에 한숨을 쉰 칸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유
헌에게 다가간다.
움직임에 따라 움직이는 용의 거대한 붉은 눈동자는 정말로 기분 나쁘다.
그녀를 견제하며 걸음을 옮긴 칸은 자신을 바라보는 유헌에게 손을 내민다. 한동안
칸의 내밀어진 손바닥을 바라보던 유헌은 어쩔수 없다는 듯이 그의 손을 잡는다.
유헌의 모습에 안도의 숨을 내쉰 칸은 루드빌에게 얼굴을 돌린다.
"얌전히 있는게 좋아. 무식해서 앞뒤 안가리는게 적룡의 습성이라지만, 정말로 유
헌을 죽일 생각을 하는건 아니겠지. 뭐, 지금까지의 행동을 보면 그럴 것 같지만-"
[네..이놈..!]
"못말릴 용이네. 여전히 무분별하고 무식하잖아. 그래서 내가 널 싫어하는 거다."
애써 진정시킨 것 같더니 왜 또 그녀를 도발하는 것인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유헌의 손을 강하게 잡은 칸은 다시 입을 연다.
급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여유있게 의도한 대답을 들어야 한다.
"하지만 의외로 머리를 썼더군, 나와 이자키엘......
...................두사람의 사이를 방해한 것은 너이지?"
[................]
"덕분에 이런 꼴이 되었으니- 너같은 것도 꽤나 머리를 굴릴줄 알잖아."
묘하게 굳은 용의 얼굴을 바라보며 칸은 이를 들어 내며 숨겨진 악의를 유감없이
표출한다.
"십년전에 내가 이자크를 죽이러 널 보냈다니- 그건 장난삼아 할말도 안된다고."
칸의 말에 놀란 유헌이 얼굴을 돌리지만, 팔에 느껴지는 강한 압력에 돌린 얼굴을
되돌린다.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가 하는대로 두는
것이 좋을 것같다.
자신의 의중을 알아차렸는지 가만히 있는 유헌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쉰 칸은 자신
들을 바라보는 적룡을 노려본다.
흔들리지 않는 칸의 금빛 눈동자를 바라보던 루드빌은 얼굴을 들며 콧웃음을 친다.
[흐-음. 누구한테 그런 말을 들은건지 모르겠지만, 이미 지난 일이니 상관없지 않
은가]
"..역시나 네가 혼자서 벌일 일이었군."
[혼자라니? 난 그저 운을 띄었을 뿐이고, 믿은건 이자크다]
설마하니 용의 피를 원하게 될지는 몰랐지만, 말이지.
눈을 가늘게 잡은 적룡은 고개를 숙여 붙어있는 유헌과 칸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접는다.
[말을 듣지 않는 아이는 필요없다]
으르렁 거리는 루드빌을 바라보는 칸의 옆 얼굴이 너무도 굳어있어 유헌은 차마 그
에게 말을 붙일수가 없었다.
한동안 적룡을 바라보던 칸은 입술을 떼며 더없이 서늘하게 내뱉는다.
"우리도 너같은 것은 더이상 필요없다."
" ? "
우리라는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유헌은 갑자기 몸을 굳히며 얼굴을 돌리는 적룡
의 행동에 그리로 시선을 돌린다.
저렇게 방심한 모습을 보이다니.. 자신과 연결되지만 않았다면 당장에 공격을 할수
도 있는 모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칸과 얼굴을 돌리고 있는 루드빌에게 시선을 주
던 유헌은 멀리 반대편에 서있는 두사람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이자크.. 언제부터?"
설마하니 칸은 이것을 노린건가-
유헌의 묻는 듯한 시선을 외면한 칸은 눈동자를 굴려 딱딱하게 굳은 이자크의 얼굴
을 확인하고 입술을 깨문다.
이런 방식은 가장 싫어하는 것이지만, 어쩔수가 없다.
자신을 오해하고 있는 이자크의 마음을 풀어주긴 위해서는.
딱딱하게 굳은 칸의 얼굴을 바라보던 유헌은 그러나 갑자기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강렬한 느낌에 숨을 들이키며 몸을 반으로 접는다.
유헌의 그런 모습에 당황한 칸은 서둘러 손을 뻗어 부축했지만, 물에 젖은 솜인 양
팔에 느껴지는 무게가 상당하다.
유헌의 원래 무게를 알고 있는 칸은 바닥에 무릎을 굳힌채, 가슴을 잡고 숨을 헐떡
이는 유헌의 모습에 당황해 버린다.
"유헌?!! 왜 그러는 거지?!!"
"....크..ㄱ..."
"유헌!!"
어찌할 줄을 모르고 그의 이름만을 부르던 칸은 그러나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서늘
한 기에 숨을 죽인다. 부들거리는 유헌의 몸을 안고 천천히 고개를 돌린 칸은 바로
눈앞에 다가온 용의 얼굴에 안색이 파랗게 질린다.
그녀답지 않게 아무 감정이 담기지 않는 눈동자는 그것만으로도 큰 위협이다.
침을 삼키며 유헌을 안고 뒤로 물러 나려던 칸은 그러나, 다리의 힘이 풀려 그 자리
에 주저앉고 만다.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인다는 것보다 어서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한다는 강박관념
에 앉은채로 뒤로 물러나는 칸을 바라보던 루드빌은 그의 품에 안겨 반쯤 실신한
채의 유헌에 시선을 준다.
갑작스런 용의 감정의 변화에 꽤나 타격에 큰모양이다.
그도 그럴것이 루드빌은 지금 피를 한뭉큼 토해 내고픈 심정인 것이다.
[.............예쁘게 봐준게 실수란 말인가...]
카르키엘부터 이 아이들은 자신의 말을 거역하기 시작했다.
단지 예쁘게만 기르던 애완 동물들이 손톱을 들어내기 시작한게 언제부터란 말인
가. 그때부터 확실히 기를 꺽어내야 했었다.
그래야지만, 이런 놈이 생겨나지 않았고, 자신의 왕국은 좀더 평화로웠을 것인데.
전부 그 녀석이, 칸크빌레가 태어나고 유헌이 나타나고서 자신의 왕국이 맥없이 스
러지고 있다. 아니, 벌써 무너진 것인가.
자신을 바라보던 이자크의 창백하게 굳은 얼굴을 떠올리던 루드빌은 붉은 눈동자
를 가늘게 접었다.
이미 망해버린 거면, 아주 다같이 사라지자.
"..그런..!"
거대한 입을 벌린채 이자크를 향해는 루드빌의 모습에 칸은 기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유헌의 몸이 뒤로 넘어가자 안색을 달리한 그는
유헌의 몸을 들쳐 없으며 적룡의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반쯤 실신한 유헌은 칸의 어깨에 매달린 채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했지만, 생
각처럼 쉽지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기사의 맹약에 대해 조금씩이지만,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서열에 우위가 없다는 말은 좀더 정신력이 강한쪽이 지배하는 쪽이 된다는 것이 아
닐까. 그러니 지금까지 용과 기사의 사이에선 일방적으로 인간이 용보다 아래였던
것이다.
용이라는 강대한 생물체보다 정신력이 강한 인간이란 존재할수 없었던 것이니깐.
하지만, 유헌은 자신은 그런것은 초월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끈이 끊어져 버렸다.
칸의 말과 그것을 이자크에게 들켰다는 것을 알게 된 용이 극도로 분노해 순간적인
힘으로 유헌을 밀어내 버린 것이다. 안 그래도 밀리고 있었는데, 푹포가 쏫아지 듯
이 몸안으로 들어오는 감각을 버텨낼 재간이 없다.
아마도 요크발이 느꼈던 것은 이런 종류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도 잘도 견디고 있었구나 싶다.
"....제길..."
미친 듯이 달려 나가던 칸은 어깨에 매달린 유헌의 몸이 꼼지락대자 얌전히 있으라
고 말을 하려다 그 자리에 넘어진다.
"..큭.. 뭐야. 이건-"
무언가에 걸려서 넘어진 건가 하고 얼굴을 들던 칸은 그러나 숲을 지배하는 정적에
숨을 들이킨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엄청난 고요함.
바람조차도 사라져 버린 듯한 이 느낌을 익히 알고있던 유헌은 칸의 어깨에서 내려
와 브레스의 구체를 완벽히 구성한 루드빌을 바라 보았다.
저것을 쏫아내는 일만 남았다.
그렇게 되면 이자크도 이 중앙성도 끝장나는 것이다.
칸도, 이자키엘도, 돔도, 중앙성도, 자신조차도-
모든것이 사라진다.
탁
칸의 어깨에 반쯤 매달려 있던 유헌은 그의 몸을 밀며 루드빌을 향해 달려갔다.
"유헌-! !"
적룡에게 달려가는 유헌의 모습에 당황한 칸은 손을 뻗어 제지했지만, 그 순간 사
야를 멀게 하는 강렬한 빛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린다.
그리고 귀를 멀게 하는 엄청난 굉음에 바닥에 몸을 바싹 붙인다.
그 순간 몸을 스쳐지나가는 화끈한 열기에 이를 악문 칸은 밀려나지 않기 위해 부
단한 노력을 해야한 했다.
팔로 얼굴을 감싼 채 그렇게 있던 칸은 미치기 직전이었다.
이러고 있는 동안 루드빌에게 달려나간 유헌은 어떻게 되었을 것이고, 이자크와 돔
은 도대체 어찌 될것인가-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켜 달려 나가고 싶었지만, 몸을 누르는 강한 압력과 굉음을
도저히 얼굴을 들수 없게 한다.
약하다.
너무나 약하다.
그는 아직도 약하기만 존재인 것이다.
..............소중한 존재들을 지키지도 못하는-
속으로 엄청난 욕설을 내뱉는 칸의 얼굴에 투명한 물줄기 한개가 흘러 내린다.
크고 투명한 빛이 중앙성을 덮는 것을 마지막으로 멈춰졌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