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그런거군."
툴가는 손안에 쥐여진 종이에 그려져 있는 얼굴을 보낸 탄성을 질렀다.
루드빌이 신왕을 공표한지 거진 나흘이 다 되가고 있건만, 중앙에 확답을 주는 나
라의 수는 지극히 적었다.
축하의 전언을 건내는 것도 세력이 미비한 곳의 가주들 일뿐, 왠만한 지위와 권력
을 지닌 자들은 단지 방관을 하고 있는 거다.
그것은 툴가도 마찬가지로 중앙에 대답을 재촉하는 문구를 무시하고 나름대로 여
러방면의 전문가를 불러 정보를 케고 다녔다. 도대체 무슨 일이 그 중앙에 벌어지
고 적룡이라는 대단한 존재가 무슨 꿍궁이 속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
중앙의 보호아래 상권을 유지했던 발챠에 자리한 툴가의 가문의 중앙에 대한 지금
의 태도는 상당히 무례한 것이지만, 그는 게의치 않았다.
그의 신하인 사내들만 애가 타 발만 동동구르고 있을 뿐.
"정말로 존재하고 있어서.."
"저..툴가님..."
탄성을 올리는 툴가에에 말을 걸었지만, 그는 돌아볼 생각조차 안한다.
연신 그림의 인물에게 시선을 빼앗겨 황홀한 듯한 그 표정에 엄청난 불안을 느낀
사내는 자신의 주인의 신경을 돌릴만한 주제가 없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평소에 워낙 주변의 신경을 안쓰고 벌이는 일들이 많아 그 수습은 전부 자신이 했
지만, 지금은 지금까지 한 일들과 스케일 자체가 다르다.
자신같은 일개 하급귀족이 중앙의 분노에 대해 해결할수가 있으리가 없다.
대답을 촉구하는 중앙의 전언을 자꾸 무시하는 툴가의 태도에 그는 가슴이 바싹 타
오르는 것을 느낀다.
침을 삼킨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툴가님. 슬슬 중앙국에 연락을 취하심이 좋습니다."
"........흐-음."
"지금까지 바로챙 가문은 중앙국의 우호적인 보호아래 상업을 번창할수 있었으니
그들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음이- 물론 툴가님께 꼭 그들의 보호가 필요하지 않아
도 가문을 잘 이끌어 가시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워낙에 그들의 세력이 강하
고.. 또. 그 전설의 용의 뜻이지 않습니까.
되도록이면 일을 치지 말고 원만하게-"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툴가의 모습에 용기를 얻은 사내는 열변을
토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자신의 말들은 전부 귓등으로 넘겨 듣더니만 이번엔 제
대로 들어주고 있다.
이렇게만 한다면 그가 쓸데없는 일을 하기 전에 일을 수습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각국의 나라에 돌려."
"......에?"
툴가가 내민 또다른 종이를 받아든 그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무..무슨?"
"잘생긴 얼굴이지 않나. 그런 것을 나만 볼수가 없으니-
다른 나라의 왕들이나 신전에 뿌리란 거야."
"..............하아?"
입을 벌리고 차마 툴가에게 뭐라고 할말을 찾지 못한 사내는 받아든 종이에 그려진
인물에 시선을 주었다.
당장에 알아 보라고 사람을 찾아 이것들을 받아 왔을뿐 안에 무엇이 있는지, 또 누
가 그려져 있는지 알수 없었던 사내는 종이 위에 그려진 아름다운 얼굴에 숨을 삼
켰다.
자신과 같은 하급 귀족들은 만날수도 없는 높은 분이다.
황금빛 눈동자와 검청의 머리카락, 화려한 옷으로 치장된 그 사이로 두들어지는 멋
들어진 오관. 중앙국의 황제 이자키엘인가하고 생각해 보던 그는 그러나, 지금까지
의 상황을 떠올리고 멍하니 입을 열었다.
".......칸크빌레..황제입니까?"
"역시나- 살아 계셨단 말이지. 그분이."
입가를 비튼 툴가는 눈을 가늘게 뜬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사내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이런것을 다른 나라에 뿌리라는 그의 의중을 알아 챌수가 없다.
"이런 것을 뿌리게 되면 혼란을 야기 시키는 의도나 장난으로 치부될수 있습니다.
중앙의 신왕이 세워진 지금 이런 행동을 하신다면 오해로 비춰 질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는 겁니까."
"대륙에 그의 생존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졌다.
대륙인들의 심증을 확증으로 굳혀 주겠다는 데 뭐가 문제야."
"그..그게 문제 입니다!! 사라진 황제의 생환을 알리는 것에 불쾌함을 느낀 적룡이
공격을 할수도 있단 말입니다!! ! 발챠나 이 바로챙가가 누구의 덕으로 지금껏 유지
하고 안전하게 불법을 일삼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동안 옆에서 배운 것이 있다보니 구구절절 옳을 말만 내뱉는다.
사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툴가는 그러나 안경을 올리며 입끝을 올렸다.
자신의 행동이 가문은 물론이고 발챵의 존속 자체를 위협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가
장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포기할수 없어 시도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 거지.
그것을 해야만 비로소 뭔가를 해냈다는 느낌을 받고 살아있다고 여길수 있는 것이
다.
"내꿈이 뭔지 아는가."
또 무슨 말을 하는건가하고 미간을 찌뿌리는 모습에 툴가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는다.
"지금까지 단 한명, 단 하나의 존재에게 모든것을 빼앗긴 적이 있지.
물론 그는 날 모르겟지만 말야. 게다가 그는 이 대륙에서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말이지."
"....툴가님."
"그런 것 인정할 것 같은가. 이 툴가가 유일하게 진심으로 모시고 싶었던 그 사람이
잊혀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것 같아. 지금으로부터 수백년동안 대륙인들의
뇌리에 잊혀지지 않도록 할거야. 난 말이다.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 온갖 더러운 짓을 하고 있는 거라고."
'그가 반드시 다시 나타날 거라고 믿고 있었으니깐-'라며 중얼거리는 모습에 사내
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별 생각없이 일에만 매달리는 차가운 남자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뜨거운 부분이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가문을 위험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을 지적하기 위해 입을 열려던 사내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툴가의 말에 숨
을 들이켰다.
"그를 다시 황제로 올릴테다."
"....그..그..그런..무시무시한 말을 하지 말아 주십시오!!"
"왜? 진심이라고. 난-"
눈을 가늘게 뜬 툴가는 손안에 들린 그림에 얼굴을 댔다.
바로 코앞까지 댄 그는 자신을 바라보진 않지만, 이쪽에 시선을 주는 황금빛의 눈
동자에 묘한 표정을 지었다.
단 십년동안 자신을 비롯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한순간에 사로잡은 존재다.
그만큼 돌아선 자들도 많지만, 어떤가.
칸크빌레. 다시 한번 이 대륙을 혼란으로 뒤덮어 보이는게.
............얼마나 즐거울까.
"두번은 말하지 않아. 그의 얼굴을 각지에 뿌려.
그리고 돌아왔다-라는 전언을 첨부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입가를 올리며 바라보는 툴가의 모습에 이을 다문 사내는 알았다는 대답을 할수밖
에 없었다. 자신의 주인이 이런 표정을 짓을때 말릴수 있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
으니 수가 없다.
한숨을 쉰 그는 앞으로 닥치게 될 수많은 귀찮고 어려운 일들에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옴을 느낀다.
".....힘들어."
"힘들어도 입밖으로 내뱉지 마십시오.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그 한마디에 좌절하는 법입니다."
"노웬은 정말- 인간인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간미가 없어.
용의 헤츨링같은게 아닐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시고 계실거라면 이것을 마저 읽어 주십시오."
던지 듯이 건내는 서류를 받아든 칸은 바쁜듯 표정을 굳힌채 여러가지 종이들을 뒤
적이는 그의 옆얼굴을 바라 보았다.
요즘 세상에 힘만 있다고 일을 치는 것이 아닌, 여러가지 인간관계와 뒷거래가 중
요하다는 듯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저런식으로 '삭삭-'하며 해치우는 노웬을 곁에
두다보면 누구나 그런 관계에 무감해 질것이다.
일일이 신경을 쓰지 않아도 워낙에 유능하게 일을 처리하니..
하지만 가만히 있다간 노웬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다.
으차하며 자리에서 바로 앉은 칸은 앞에 놓여진 수많은 종이들을 넘기기 시작했다.
일단 내부에서 지금의 상황에 대해 타계책을 받고있다.
이것들은 그 중의 하나인 모양이지만 탁하고 눈에 들어오는게 없다.
"칸님."
"아? 왜 그러지."
우물쭈물하는 아마빛의 머리카락을 지닌 소년이 말을 건자 칸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에게 접근하는 타인 모두들에게 눈을 부라리는 동료들에게 됐으니 자기 일 하
라는 듯이 손을 저어보인 칸은 옆자리를 비키며 앉으라고 권한다.
그런 칸에게 황송하다는 표정을 지은 론은 가지런히 앉아 양손을 무릎에 올린다.
그 모습에 칸은 여전히 미소를 지을 뿐이다.
오브의 말로는 이 소년이 전에 뱔차에 있었을 당시 유헌은 도와주었다고 한다.
자신의 유헌은 도와 주었을 뿐만 아니라, 왠지 모르게 닮은 용모에 친근감이 드는
것이다.
부드러운 칸의 태도에 한참을 망설이던 론은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저..요..요크발님의 상태는 어떠신지요..? 언제나 묻고 싶었지만, 오브님이 조용히
있으라고 했지만..도저히.. 너무나 걱정이 되어서.."
"아아-"
"게다가 돔님에게도 일이 생기셨잖아요? 그 무서운 분이 돔님에게 해를 가하면 어
쩔까요? 그렇다면.. 그렇게 된다면. 도대체 어떻하면 될지."
"이봐-"
말을 하는 동안 점점 패닉에 빠지는 듯한 론의 모습에 그의 어깨를 두들인 칸은 미
소를 지었다.
"두 사람다 무사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런가요?"
"정말이야. 난- 거짓말 같은 거 안해."
상황에 따라 하기도 하지만.
긍정적인 대답에 눈에 띄게 안도의 표정을 짓은 론은 너무 감정이 격해져 무례한
말을 했다는 생각에 얼굴을 붉히며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이렇게 대단한 집단의 중심에 선 사람에게 함부로 말을 걸고 말도 많이 말했다.
무척이나 건방진 행동을 한 것이다.
"아니, 걱정되서 하는 말인걸 뭐. 좋은 시종이잖아."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정말로 감사하겠습니다.
아, 전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바쁘신데 방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허거지겁 자리에서 멀어지는 론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던 칸은 그의 모습
이 보이지 않게 되자 단번에 미소를 지으며 엄청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저런 어린 아이에게 거짓말을 한것에 대해 새삼스레 피곤함을 느낀 것은 아니다.
그와의 대화 때문에 애써 잊으려 했던, 아니 일부러 떠오르지 않은 척 하려했던 것
이 생각나 머리속을 어지럽힌다.
"...제길.."
아주 작은 음성으로 욕설을 내뱉은 칸은 벌린 무릎에 손을 올린 상태로 몸을 숙였
다. 이자크와 유헌에 관한 일로 칸의 머리속은 너무도 복잡했다.
노웬이나 다른 일행들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실은 이틀전 이자크가 일어났다.
게다가 유헌과 싸우던 그가 중앙으로 돌아간다 하자 안색을 굳힌 자신은 그에게 안
된다는 말을 하며 다른 독방에 가둬둔 것이다.
그런 자신의 행동에 약간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자신의 성격이 변하 듯 달라
진 이자크가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모르기에 그런 강경한 태도를 취한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보자마자 굳어진 이자크의 손목을 잡아 저택의 구석에 올려둔 칸은
그런 그의 신병에 대해 유헌에게 부탁을 한 것이다.
그에게 이자크를 부탁한 것이 말도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쩔수가 없다.
다른 이들에게 부탁을 하자니 도저히 마음이 놓일 것 같지가 않았다.
"....믿고 있으니까..그런거야."
중얼거림에 노웬이 의아한 시선을 던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쪽에 시선을 주지 않
았다.
유헌을 믿기 때문에 그런거다.
이자크에 대해서 정말로 잘못된 행동들을 많이했다.
남들이 보면 지나칠 정도로 그에게 신경을 쏫고 있다고 보일 것이나 유헌은 자신의
진짜 마음을 알고 이해해 줄거라고 믿으니깐 그에게 맡긴 것이다.
이런 행동을 너무하다고 생각치 않고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그런, 사람이기에 그
렇기에 믿는다.입술을 깨문 칸은 이 자리에 없는 유헌의 모습을 떠올리고 나직히
목울대를 울렸다.
갑자기 그가 너무나 보고 싶어진다.
탁.
마지막 계단을 오른 유헌은 앞을 가로막는 문을 바라 보았다.
들고 있던 쟁반을 한손으로 들며 문을 연 유헌은 육중한 소리와 함께 들어나는 방
안에 있는 사내의 모습에 살짝 인상을 굳힌다.
유헌의 등장을 알텐데도 뒤덜아 보지 않는 이자크는 커다란 창에 걸터앉아 밖의 모
습을 바라 볼 뿐이다.
".....식사 가져왔어요."
대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말을 걸게된다.
지금의 그가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한 상태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어제 칸에게 끌려 강제적으로 이곳에 오게 될때부터 그는 창백한 안색으로 반항다
운 반창조차 하지 못했다. 단지 가만히 칸이 이곳으로 와 문을 닫을 때도, 자신이
식사를 가져올 때도 저렇게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이다.
하루뿐이지만, 이곳에 있는 그의 얼굴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인형처럼 감정이 느
껴지지 않은 무감한 얼굴에 놀랐었다.
끼익.
거대한 저택이긴 했지만, 이런 작은 탑방에게 까진 신경을 쓰지 않은 듯 걸음을 옮
길때마다 낡은 바닥이 비명을 지른다.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 놓으려던 유헌은 손도
대지 않은 듯 가만히 놓여져 있는 또다른 쟁반에 미간을 찌뿌렸다.
들고있던 것을 내려놓고, 전에 있던 쟁반을 든 그는 여전히 창에 앉아 밖을 바라보
는 이자크의 모습을 바라 보았다. 어제부터 한끼도 먹지 않는다.
어제도 정신을 막 차린 상태였으니 따지고 보면 그는 삼일동안 물 한모금도 마시지
않은 거다.
자신보다 덩치가 큰 사내이건만 저렇게 작아 보이니 이상하다.
지기 시작하는 노을에 물이 든 듯 붉은 색에 쌓인 이자크의 모습은 뭔가 현실성이
결여된 듯이 보인다.
"..........조금 더 높은 곳이엇지."
" ? "
갑작스런 말에 유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들려 줄말은 아니였는지 '아니.. 조금이 아니라.. 아주 많이 높
은 곳이었나..'라고 웅얼거린 이자크는 한숨을 쉬며 얼굴을 뒤로 기댔다.
알수없는 행동에 가만히 서있던 유헌은 그저 이자크를 바라 볼뿐이었다.
지기 시작하는 미약한 햇빛 몇줄기가 뻣어 방안을 비추고 그 안에서 흔들리는 작은
먼지에 시선을 돌리던 유헌은 이자크가 다시 입을 열자 그리로 시선을 돌렸다.
"슬픔, 분노, 절망, 좌절, 허무함, 안타까움 그리고 ..
......................................배신감."
".................."
"마지막에 남은 것은 증오 뿐이야."
기운없이 나른하게만 들리는 음성인데 왜 절규처럼 들리는 것인가.
"왜 이런곳에 날 가두는 걸까.
왜 아무도 나를 찾아주지 않는 걸까.
왜 그 누구도 날 위해 진정으로 울어주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걸까.
왜 그만이 진심으로 나에게 화만 내는 걸까.
뭐가 그렇게 나쁜걸까. 그렇게 나쁠가...단지..단지. 보여주고 싶었어..
보게하고 싶었어. 나와 같은 그 금빛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렇게나 나쁠까?"
".......이자크.."
"이곳은 답답하고, 춥고, 차가워. 그리고 외로워..........그런곳에 날 가두고, 그는 기
억조차 못한거야- 그러니 십년동안 가둬 둔거겠지. 그러니 지금도 가둔거지.
.......그렇지?"
자신에게 향해지는 시선에 유헌은 숨을 들이켰다.
경직되어 쟁반을 든채인 유헌의 모습에 코웃음을 친 이자크는 시선을 돌려 멀리 지
기 시작하는 붉은 저녁 노을을 바라 보았다.
이런 각도로 저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은 오랜만이다.
근 십년동안 맨 아래층에서만 지내다 보니 저 아름다운 것을 보지 못했다.
"답답해.. 그것을 풀기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는데 이렇게 멈춰서 있으니 답답해서
숨을 쉴수가 없어. 편해지고 싶어. 아무거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아무것도 모른채 그냥 나도.... 행복이란 걸 하고 싶은건데...
뭐야. 이건. 그 무엇도 사라지지 않았어."
"........이자크."
"네가 미워. 칸도 미워. 날 속인 루드빌도 미워.. 전부 미워..그데..
.........................사라지게 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중얼거린 이자크는 얼굴을 돌리지 않은 채 여전히 멍하니 붉은 노을에 시선
을 주었다.
"난..............미친건가."
그의 갑작스런 말에 유헌은 숨을 들이켰다.
"그래. 그런건가-"
한동 안의 침묵 후 다시금 내뱉는 그의 말에 새파랗게 질린 유헌은 가만히 서있었
다.
강하기만 하고, 한없이 차갑기만 한 눈앞의 사내가 서서히 무너지는 공포스런 광경
을 바라보던 유헌은 가늘게 떨리기 시작하는 손을 누르며 쟁반을 바로 잡아 몸을
돌렸다.
끽.
끼-익.
탕.
"하-아."
호흡을 고르고 계단을 내려가던 유헌은 밑에 팔장을 낀채로 이쪽을 바라보는 카일
의 모습에 잠시 걸음을 멈췄지만, 다시 한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둔탁한 울림이 좁은 나선형의 계단을 울리고 자신을 지니쳐 내려가는 유헌의 모습
을 한동안 바라보던 카일은 고개를 들어 이자크가 있는 방에 시선을 던졌다.
한동안 그렇게 그곳을 바라보던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점점 멀어지는 카일의 걸음소리를 듣던 유헌은 멈춰있던 발을 떼고 그곳에서 벗어
났다.
꽤나 구석진 곳에 있기에 한참을 돌아서야 융텐의 방문앞에 다다르게 된 유헌은 마
침 문을 열고 나오는 그에에 인사를 했다.
"저녁을 먹으러 나오는 건가요?"
"아니.....저기, 안에 있던 요크발이라는 녀석이 없어져서 말야. 아는거 있어?"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허참. 정신이 없던 놈이 깨서 제발로 걸어 나갔나- 알수가 없네."
잠시 자리를 비웠더니 얌전히 누워있어야 할 요크발이라는 녀석이 흔적도 없어 사
라져 버린 것이다. 난감함에 머리를 긁적이던 융텐은 쟁반을 들고 서있는 유헌에게
다가가 안이 내용물을 확인하곤 미간을 찌뿌린다.
"이거.. 안 먹은 거지?"
"..그렇죠."
"인간 주제에 무슨 배짱을 부리는지는 몰라도 줄때 먹는게 좋은 데 말야."
"뭐, 유크렌처럼 단순하지 않아서 그렇겠죠. 생각하는게 많잖아요."
".....뭔가 그냥 지나칠수 없는 말을 하는군."
예리하게 눈을 빛내는 융텐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던 유헌은 이내 고개를 내렸다.
좀 덤비나 싶더니 우울한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 보는 유헌의 행동에 융텐은 의아
한 표정을 짓는다. 한동안 그렇게 바닥을 내려다 보던 유헌은 '잘 모르겠어-'라는
중얼거리며 융텐을 지나쳐 걸어간다.
갑자기 알수없는 소리를 하고는 가버리는 유헌의 모습에 당황한 흑룡은 저 인간이
왜 저러나 하는 표정을 지을 뿐이다.
그러나 유크렌에게 줄 종이꽃을 접기위해 다시 방안으로 들어간다.
칸은 지금부터 어느쪽에 가는 것이 좋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자신들의 주 거주지는 이곳 '동'이지만, 요충지인 폴유간이 함락당하고, 쓸만한 인
재들은 거의 잃었다.
이자키엘이 이쪽에 있고, 루드빌은 돔과 함께 중앙으로 갔으니 어떻게 보면 상대했
던 상대가 둘러 니눠진 사항으로 판단할수 있다.
그중에 이자크는 힘이 없이 포박을 당했있으니 문제는 중앙국의 적룡 뿐.
하지만 자신들이 가진 병력으로 중앙의 용을 칠수 있을까. 무엇보다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남다른 중앙국의 기사들이 순순히 당해줄지 문제이다.
밖에 있던 녀석들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상당히 얼이 빠진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다른 놈들도 그러하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머리를 긁적인 칸은 얼굴을 들어 목을 주무른다.
이 병력을 이용해 중앙으로 쳐들어 갈 경우 그 길목마다 중앙에 소속되어 있는 다
른 자들이 순순히 보내줄지도 문제다.
"하-아."
너무나 복잡한 문제에 한숨밖에 나오질 않는다.
아침부터 붙잡고 늘어 졌지만, 마땅한 방법이 나오질 않아 연신 한숨과 함께 미간
을 찌뿌리는 칸의 모습에 주변에 앉아있던 샤한은 얼굴을 찡그린다.
하다못해 자신이 도와 주어 그의 일을 덜어지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자신은 검사
로 머리쪽을 쓰는 일은 영 서툴다.
"샤한님!!"
"무슨 일이야? 함부로 들어오면 안된다고 여긴."
문을 반쯤 열고 손을 젖는 사내의 모습에 샤한은 눈살을 찌뿌렸다.
방안에 앉아 연신 서류들을 뒤적이고 연계된 다른 자들에게 연락을 돌리던 사람들
에 시선을 주며 자리에서 일어난 샤한은 자신을 부르는 사내에게 걸어갔다.
무척이나 다급한 일이 생겼는지, 들어오기는 커녕 문을 열수도 없는 곳에 목을 죽
빼놓은 남자는 샤한이 다가오자 그의 손목을 자고 밖으로 끌어 당긴다.
얼굴에 검상이 길게 나있고, 성격도 그닥 살갑지 않은 자신에게 사람들은 접근하기
를 꺼려한다. 그것은 눈앞의 사내도 마찬가지 였는데, 오늘은 왠일인지 적극적으로
스퀸쉽을 한다.
그것을 구실로 장난을 치려던 샤한은 사내가 나직히 내뱉는 말에 안색을 굳힌다.
"중앙국의 기사들이 물러났다고 합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놈들은 칸님의 모습을 한번더 확인하려 지금까지 주변을
둘러싸고 있잖아.
칸님이 이곳에 있는데 그놈들이 투시라도 써서 안의 모습을 봤다는 거냐?"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적을 알아보러 간 자의 말에 의하면 주변에 있던 기사
들은 커녕, 이 왕성안에 머물고 있던 자들도 사그리 사라졌다 합니다."
"........잠깐만 기다려."
사내의 말에 그제서야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닭은 샤한은 안색을 굳히며 다시
방안으로 들어가 노웬에게 걸어갔다.
"무슨 일입니까. 달리 할말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저택을 둘러쌓던 기사들과 뮤트롱에 집결해 있던 중앙국 소속의 인간들이 모두 사
라졌다고 한다."
".........뭐?"
"사라졌다고- 이상하잖아. 그들은 칸님의 모습을 보기전에 꼼짝도 할 생각을 안했
는데, 갑자기 사라져 버리다니-"
의아하다는 듯이 말하는 샤한의 모습을 바라보던 노웬은 갑자기 드는 의문에 안색
을 굳히며 칸에게 다가간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노웬의 모습에 또 뭔가 시킬일이 있는건가하고 미간을 찌뿌리
려던 칸은 그러나 긴장된 그 얼굴에 미적거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똑바로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칸의 앞에 앉은 노웬은 근처의 사람들에 들리지 않게
조용하게 말을 내뱉는다.
"이자키엘님은 지금 융텐님과 함께 계십니까?"
"...아..뭐.. 그..그렇겠지?"
이자크가 어제 깨어나 그를 저택의 꼭대기 방에 두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궁금해 하지도 않았고, 이자크에 대해 일일히 말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칸의 얼굴에 얼굴을 굳힌 노웬은 올라가서 확인해 보자는 말을 한다.
"올라가? 뭘 그렇게 번거로운 일을 하는 거야? 그냥 냅두면, 알아서 잘 있을.."
"뮤트롱에 주둔하던 기사들의 모습을 사라졌다고 합니다."
"............."
"당신의 모습을 보려 저렇게 남아있던 그들이 갑자기 사라지다니 이상합니다.
조금 억지스럽긴 하지만, 이자크님께서 깨어나 그들과 함께.."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일어나는 칸의 모습에 노웬은 얼굴을 딱딱히 굳혔다.
그의 행동이나 태도를 보아 이자크에 대해 자신이 모르는 일을 벌인 모양이다.
근래에 너무 바쁜 일이 있어 칸이나 이자크에 대해 신경을 너무 안썼다는 것에 자
신을 탓한 노웬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칸의 뒤를 따랐다.
"노웬? 칸 무슨 일이지요?"
"나중에 말해줄께."
"실례 하겠습니다."
계단에서 내려오던 유헌은 서둘러 위로 올라가는 두사람에게 말을 걸었지만, 상당
히 바쁜 일이 있었는지 건성으로 답한다.
저만치 올라가 코너로 사라지는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던 유헌은 그들이 왜 그렇게
나 다급한 모습을 보이는지 알것도 같아 표정을 어둡게 굳히며 둘의 뒤를 따른다.
"융텐!!"
"난 잘 들린다. 소리 지르지 않아도 돼."
"융텐, 요크발은 안에 있는 건가요?"
융텐의 방으로 달려가던 칸은 마침 복도를 지나가고 있는 그를 붙잡고 말했지만,
고개를 젖는 모습에 입을 다문다.
"갑자기 사라져서, 너나 다른 놈이 장소를 옮긴 줄 알았는데.. 아니였나?"
".....사라졌습니까. 언제쯤인지는 아십니까?"
"글쎄.. 유헌이 위에서 내려오던 쯤이니. 한 저녁쯤 이겠지? 볼일이 있어 잠시 밖에
나갔다 돌아오니 침대에 누워있어야 할 놈이 사라져 있더군."
융텐의 말에 입술을 깨문 노웬은 딱딱하게 굳어진 칸에게 시선을 주며 이자크는 다
른 곳으로 옮긴거냐고 묻는다.
딱히 그 말에 답할게 없어 입술을 깨물던 칸은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나 이자크를
두었던 위층의 방으로 달려갔다.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노웬의 음성이 들렸지만 따라오지 말라고 윽박지른 칸은 이를 막물며 달리는 두 다
리에 힘을 주었다.
코너를 돌고 계단을 올려 나선형으로 되어있는 좁은 계단을 두칸씩 오른 칸은 닫혀
진 문에 몸을 부딫혓지만, 둔탁한 소리만 들릴뿐 문을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를 갈며 주먹을 들던 칸은 그러나 그와 동시에 '끼-익' 소리와 함께 열리는 문에
안색을 굳혔다.
끽.
덜컹.
".............이자크?"
문을 밀어 방안으로 들어간 칸은 아무도 없는 그곳에 대고 있어야 할 사람의 이름
을 부른다.
아무도 없이 어둠이 가라앉은 방안에 들어선 칸은 망연히 주변을 둘러보며 다시금
이자크의 이름을 부르지만, 없는 사람이 대답을 할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간을 찌뿌리며 흔들리는 눈동자로 창가에 걸어가 멀리 구름이 가린 달을 올려다
보던 칸은 갑자기 드는 피로감에 창턱에 걸터 앉는다.
어느새 뒤를 따라온 유헌은 그런 칸의 모습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방안으로 걸어 들
어온다.
끼-익.
".....어디로 간걸까.."
멍하니 중얼거리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는 칸의 그림자 진 얼굴을 내려다 보던 유
헌은 그앞에 무릎을 꿇었다.
숙여진 얼굴의 칸을 가만히 올려다 보던 유헌은 손을 들어 그의 볼을 만져 보았다.
따뜻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향기가 코끝에 감돈다.
"아마도 중앙으로 갔을 거예요."
"어째서.. 분명 그 루드빌에 해를 가할텐데.. 그런 뻔한 일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어
째서 돌아가는 거야."
"하지만...............갈데가 없잖아요."
조용히 유헌의 말을 듣던 칸은 그 내용에 미간을 찌뿌리며 얼굴을 든다.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알수없다는 듯한 칸의 얼굴을 바라보며 유헌은 조금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이자크는 10년동안 탑에 유폐되어 있었는데, 또 다시 이런 곳에 가두면 안되는 거
였어요."
".......유헌."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이번 일은 칸이 잘못한 거니."
벌려진 무릎에 손을 올려놓고 있던 칸은 바닥에 앉아 자신을 올려다 보는 유헌의
모습에 묘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뭐라고 해도, 이자크에겐 루드빌밖에 없는 거예요. 그는 당신같이 냉정하
게 굴지는 않아요.
적어도 신경을 써주니 그녀에게 가는 것을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잖아요."
"......무슨 말은 하는 거야. 난..!!"
"알고 있어요. 지금의 칸은 과거의 그와 다르지. 하지만, 저도 모르게 무의식 적으
로 한 행동을 봐요. 이자키엘이 이런 방에 다시금 갇히게 된 것에 얼마나 많은 좌절
감을 느꼈을지 이해해 보란 말입니다.
정말로 미안한 마음을 느끼면, 조금이라도 그에게 신경을 써봐요."
"난.. 내 나름의 방법대로 그를 지키려 한거야."
루드빌이나 다른 자의 눈에 띄이면 분명 해를 입게 될 이자크를 지켜주기 위해 이
런 사람이 없는 곳에 둔 것이다.
조금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그의 거처를 옮겨 줄 생각이었는데.
필사적인 표정을 짓는 칸의 얼굴을 바라보던 유헌은 차갑게 내뱉었다.
"말해주지 않으면 몰라요, 그 증거로 그는 이곳에 없잖아요."
갑작스런 유헌의 태도에 칸은 혼란스러웠다.
안 그래도 이자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불안한데 이런 모습이라니.
유헌의 말을 듣고나서 뭔가 알것 같기도 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 이전에 왠지 모르
게 화가 난 듯한 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입을 열던 칸은 이어지는 그의 말에 움
직임을 멈췄다.
"난, 그가 빠져 나가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유헌.... 너.."
"칸님!!!"
앉아있는 유헌의 어깨에 양손을 올리고 말을 하려던 칸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노웬
의 모습에 엉거주춤한 폼으로 굳었다. 그런 두 사람의 묘한 모습에 미간을 찌뿌리
던 노웬은 갑자기 보고받은 내용에 표정을 굳히며 거침없이 방안으로 들어온다.
"노웬,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말을 하..."
"대륙에 칸크빌레님이 살아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소문이야 언제나 돌지 않았어?"
게다가 자신이 칸크빌레다라며 나타난 이들도 있었다.
지금와서 새삼스런 말을 하는 노웬의 얼굴을 바라보며 유헌에게 시선을 돌리던 칸
은 노웬이 얼굴로 집어던진 종이를 받고 황당해 하는 표정을 짓는다.
종이를 집이 던지다니.
지금까지 노웬이 자신에게 이런 무례한 행동을 한적이 없었다.
벙한 표정으로 노웬을 바라보는 칸의 얼굴에 시선을 주던 유헌은 꿇어앉은 자세에
서 바닥으로 떨어진 종이를 줍는다. 그리고 그 안에 그려진 인물을 발견하곤 안색
이 대번에 변해 노웬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런 그림이 각지로 통보되었다고 합니다. 하다못해 지금 어디에 계시는 지도-
당장에 이곳에서 빠져 나가야 합니다. 그러니 미적거리지 말고 사사로운 일은 나중
에 해결하시란 말입니다."
".........노웬."
"나머지 일행들에겐 준비되는 즉시 이곳을 벗어나 제 2의 집결지로 모이도록 했습
니다."
딱딱한 안색으로 입을 연 노웬은 몸을 돌려 방에서 나선다.
그리고 그 전에 잠시 말을 흘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모든것이 이자키엘 황제의 짓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노웬의 말에 안색을 굳힌 유헌은 한걸음 앞으로 내딫었다.
"확실치 않은 말을 해서 두사람 사이를 이간질 시키 시려는 생각이라면 관두십시
오."
"이간질? 무엇에 대한 이간질이란 말입니다. 그들과 이쪽은 원래부터 적이었는데
이제와서 새삼스레 무슨 이간질이란 말이죠? 이자키엘 황제는 저희들이 그동안 싸
워온 적이라는 것을 유헌군에게 다시 알려 드려야 합니까."
"노웬..!!"
"됐어."
자신이 아닌 칸에게 말하는 듯 도한 그 말에 안색을 굳힌 유헌은 노웬을 책하는 눈
빛을 던졌다.
그의 말이 옳고, 지금의 상황에서 이자크의 행동으로도 생각할수 있는 수상한 요인
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은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는 말보다 좀더 이해할수 있도
로 하는 쪽이 훨씬 좋은 것이다.
미간을 찌뿌리며 뭔가를 더 말하려던 유헌은 그러나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고
개를 젖는 칸의 모습에 입술을 깨물며 뒤로 물러날수 밖에 없었다.
분한 듯이 이를 갈며 얼굴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유헌의 모습을 바라보던 노웬은
자신에게 시선을 주는 금빛의 눈동자를 바라본다.
"믿지 마십시오. 또다시 그런 일을 당하실 거라면-"
".......됐으깐, 나가서 일행들을 챙겨라. 그 일-부탁하지."
"물론입니다."
이런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무리들을 다독하고 서두르게 재촉하는 것은 칸이 할
일이나 그것을 노웬에게 부탁한다. 그것에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
나는 노웬의 태도에 유헌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은 느낀다.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저렇 목석이란 말인가.
이런 상황에서 부드럽게 말하지는 못할 망정..!!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 힘들어 서로의 신경이 예민해 진것을 알고 있지만, 분한 것
은 분한 것이다.
"유헌."
"우리들도 내려가 봐야 해요."
아까는 자신을 비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더니 노웬이 뭐라하자 대신 화를 내준다.
그제서야 유헌에게 들은 말을 정리할수 있게된 칸은 주변을 둘러보며 이자크가 있
었던 방을 바라본다.
낡은 가구와 침대, 어두운 조명. 그리고 멀리까지 보이는 하늘.
개인적인 취향에 맞는 곳일지는 모르나 유헌의 십년동안 이곳에 갖힌 이자크에게
악몽의 장소일수도 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자신은 이자크에게 비난만을 했지,
따뜻한 말을 건낸적이 있었던가.
부친을 이해 못하고 그를 괴롭히는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이유로 엄청나게 굴어댔
지. 괴롭힘을 수준이다. 그것은-
"자신의 일에만 신경을 써서 배려를 못해준 거야."
중얼거린 칸은 자신을 올려다 보는 유헌에게 조금 웃어 주었다.
그의 말이 옳다.
이런 곳에 십여년 동안 있던 아이에게 이런 장소가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를 지켜준다는 이유로 자신은 엄청난 행동을 해버린 것이다. 미간을 찌뿌리는 칸
의 모습에 유헌은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난 지금의 당신밖에 모르니 무척이나 익숙하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당신의 과
거도 알고 있고, 그것에 연연해요. 지금이 아닌 과거를 보는 사람도 과거를 아닌 지
금의 모습을 보는 사람도 있지만, 전자의 경우가 더 많고 흔해요."
".........유헌."
"그 시각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전에는 괜찮다가도 이런 일들이 벌어지면 자신도
모르게 과거의 당신을 찾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확실히 말해야 해요.
지금의 당신은 어떻고, 어떤 생각을 할수있고, 어떤 모습을 띄우고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이자크에게도 자신의 말을 확실히 전달해야 합니다."
"너무 힘든 일이야 그건.. 이제와서 쉽게 변하지는 않잖아."
"노력해서 해봐요. 우선은 지금의 상황을 처리하고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죠.
그런 거라면 도와줄 수 있지만.."
말을 끊은 유헌은 손을 들어 자신의 어깨에 올려진 칸의 손을 잡는다.
강하게 그의 단단한 손을 잡은 유헌은 눈을 감고 뜨며 호흡을 고른다.
"도망가는 거는 절대로 도와주지 않아요."
".........."
그의 말에 눈을 치켜뜬 칸은 이내 알았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휘며 얼굴을 끄덕인
다.
"가죠.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아아-"
유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칸은 그의 손을 잡고 앞서 걸어가는 뒤를 따른다.
자신보다 한뼘은 작고 어린 사람이다. 하지만 어떨때는 자신보다 더 어른스럽게 변
해 자신에게 충고를 해주고, 따뜻하게 안아준다.
가슴 한켠을 간지르는 는낌에 칸은 얼굴을 조금 찡그리며 유헌의 뒷머리를 바라 보
았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유헌이 이 자리에 없었으면 자신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
이 든다. 아니, 생각만이 아니라 진실일거다.
이런 사람과 만나, 이런 마음이 생길거라는 것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혼자서 고민하던 것을 다른 사람과 의논하는 법따위 정말로 자신의 감정을 내보일
수 있는 사람이 또다시 존재할거라는 것따위 조금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고마워."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네?'라는 표정을 지으며 돌아오는 유헌에게 미소를 지으
며 고개를 흔든 칸은 그보다 앞서 걸어가기 시작한다.
반대로 자신에게 끌려오는 유헌의 손에 잡은 무게를 느끼며 칸은 자신디 지금보다
더 강해질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보다 더 강해질수 있다.
조금 더, 조금 더 힘을 내면 이런 상황따위 금방 해결하고 모두가 술을 마시며 '그
때는 그런 일이 있었지-'하며 미소를 짓는 날이 올것이다.
반드시 그런 날이 올 것이다.
챙캉!! !
"라헨!!"
"뒤돌아 보지 말고 먼저 달려가!!"
라헨의 말에 이를 악문 에스는 자신에게 검을 휘두르는 사내의 가슴에 단검을 집어
던지며 미끌어 지려던 몸을 추스른다.
대륙 각지에 칸의 생황소문이 돈다는 정보를 얻음과 동시에 뮤트롱을 빠져 나왔지
만, 갑자기 쏫아지는 소나기와 뒤를 추적하는 수많은 사람들 덕에 움직임이 둔해지
고 있다.
자신들의 집결지가 있는 것 이상으로 과거 칸크빌레의 치세에 반발하던 자들이 모
인 동이기에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이렇게나 빨리 반응이 오다니!!
이를 악물며 나무 위에 앉아 자신들에게 활를 겨누는 궁수들에게 단검을 날리지만,
폭우에 휩싸여 진로가 꺽여진다. 나무나 바닥으로 떨어지는 단검의 모습에 에스는
욕설을 내뱉으며 주변을 둘러 보았다.
악천후의 기우에 몰려드는 적들의 의도대로 휩쓸린 그들은 좁은 산맥길로 달려가
고 있었다. 바닥이 미끌거려 말에서 떨어지는 자들도 몇몇 눈에 들어왔고, 넓다가
도 갑자기 좁혀지는 길에 당황해 자신도 몇번이나 말의 고삐를 잡아 당겼던가.
그나마 말을 다루는 자신이 이 정도인 라프헨의 상태는 어떨까.
이를 악문 그는 갑자기 이런 상황이 정말로 카일의 짓일까 하고 생각해 본다.
오늘 점심부터 사라진 그의 뒤로 황제와 요크발이 사라지고, 대륙에 칸의 생환이
돌고, 적들이 들이 닥쳤다.
그가 아니라고 해도 이런 수상한 일들의 연속은 그나마 남아있던 신뢰를 서서히 갉
아 먹고 있는 것이다.
"..제..길!!"
입안으로 들어온 빗물을 내뱉으며 옆구리로 쳐들어 오는 상대를 향해 검을 휘두른
동시에 앞서 가는 일행들의 방향에 시선을 준다.
이쪽에 칸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자들이 점점 위로 올라가 공격을 가하는 것이 걱
정이다.
"에스님, 안으로 들어가시고 밖은 저희들에게 맡겨 주십시오!!"
"그런 말을 할꺼면 차라리 한 사람이라도 더 상대하십시오!"
자신들이 이들의 방패막이 될테니 안으로 들어와 안전을 지키라는 사내의 말에 그
를 노려본 에스는 좀 더 밖쪽으로 말을 달린다.
그런 자신의 행동에 당황하는 일행들이 느껴졌지만, 이런 중요한 일이 한 몸따져
안위를 지키는 것따윈 절대 사양이다.
물에 젖어 눈을 찌르는 머리카락을 털어내며 검을 강하게 잡은 에스는 갑작스런 접
근에 놀란 표정을 짓는 적의 목으로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챙캉!!
"이 몸에게 검을 휘두르다니- 제 정신인가!!"
"칸님. 너무 적들과 가까이 있지 마십시오!!"
"괜찮아- 이정도 쯤은-!"
샤한의 걱정스런 어주에 이를 들어보인 칸은 다시금 자신에게 검을 휘두르는 녀석
의 말쪽에 검을 휘드른다.
그것을 피해 말머리를 옮기던 사내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젖은 바닥에 미끌어져 뒤
에 따라오던 몇몇의 사내들과 함께 바닥을 구르는 모습을 확인하며 다른 쪽을 확인
하던 칸은 머리에서 내려오는 너무 가지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검을 휘두른다.
"제길, 길이 너무 안 좋잖아!!"
"나왔을 때부터 확실한 길목을 지정했어야 하는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렇게 하지 못했군요."
"탓하는게 아니다! 라프헨 말을 잘 몰아라!!"
멀리 이쪽으로 달려오는 자에게 날카로운 침을 날린 칸은 일행들에게 둘러 쌓여 말
을 모는 라프헨에게 시선을 준다. 이런 급박한 상황이다 보니 말을 타지 못하는 라
프헨을 배려하지 못해 마차를 준비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선 마차를 탔어도 중간에 버려야 했겠지만- 공격에 직접적으로 가담하
지 못하는 라프헨이 맡은 일은 오로지 자신이 가야하는 방향을 살펴보고 일행들을
안내하는 것이다.
적들에 갑자기 나타났을 때 당황하며 그들이 모는 대로 말머리를 돌렸지만, 많이
안정이 된 그는 입술을 깨물며 최대한 안전한 길목으로 말을 몰고 있었다.
자신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연신 앞을 바라보며 말을 모는 라프헨에 혀를 찬 칸은
어딘가에 있을 유헌을 찾다 자신에게 날라오는 화살에 기겁을 한다.
"이런 상황에 무슨 딴짓을 하는 겁니까!! 제대로 못하시는 겁니까!!"
"알고 있으니, 너무 그러지 말라고!!"
날카로운 노웬의 질책에 답한 칸이지만,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눈을 돌린
그는 나무 위에 서서 다시금 활을 장전하는 사내의 모습에 이를 간다.
원하는 대로 궁지로 몰아, 저렇듯 사냥하는 기분을 즐기니 얼마나 좋겠느냔 만은
당하는 이쪽은 아주 죽을 판이다.
오로지 검을 휘두르는 칸의 안정된 듯한 모습에 안도의 표정을 띄운 노웬은 도대체
얼마쯤이면 적들이 준비해둔 이 길을 벗어날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워낙에 많은 준비를 한 모양인지 한참을 지난 것 같은데 끝이 보이질 않는다.
콰앙!!
젤이 또 한번 마력을 사용한 모양인지 요란한 충격음이 귀에 들리고 말의 걸음이
비틀어 진다.
비가 와서 바닥이 미끄러운 상황에선 지면에 가해지는 작은 충격도 치명적이다.
잘 달리던 말이 고꾸라져 낙마라도 하면 큰일인 것이다. 그것은 유헌의 경우도 마
찬가지라서 몸이 앞으로 뜰 뻔한 그는 겨우 중심을 잡으며 식은땀을 흘린다.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88열차나 바이킹에 비할바 없는 스릴이다.
이를 악물며 말의 옆구를 발로차며 또다시 이쪽으로 접근하는 사내들에게 위협적
으로 검을 휘두른 유헌은 쉴새 없이 숲속에 시선을 돌린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이런 쥐잡기 식의 공격만을 할리가 없는데 아까부터 계속 같은
패턴이다.
뭔가 더 있을거라는 생각이 머리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이봐!"
갑자기 말을 거는 샤한에게 눈길을 준 유헌은 다시금 주변을 살펴보려 고개를 돌린
다.
"루드빌과 맹역을 맺었잖나, 뭔가 대단한게 없는 거냐?!!"
"그녀가 거절하고 있으니 쓸수 있을리가 없잖아!"
샤한에게 신경질 적으로 외친 유헌은 입술을 깨물며 한쪽 구석 답답하게 자리하고
있는 기운에 미간을 찌뿌린다. 맹약을 맺고 있어 그녀와 공유된 마력을 쓸수있을
거라고도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공유 되었기에 더 사용할수가 없다.
공유라는 것은 서로의 합의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자신이 아무리 힘을 사용하기 원
하더라도 루드빌이 거절을 하면 말짱 도로묵이다.
공유는 커녕 이런 엄청난 악의를 내뿜는 용에게 무엇을 바라 겠는가.
하지만 이런 상황에선 그녀의 힘을 사용할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챙!!
"저리가서 칸이나 지켜요!"
"말 안해도 내가 더 잘안다, 애송아!"
유헌에게 이를 들어내 보인 샤한은 말머리를 돌려 앞으로 달려가는 칸에게 접근한
다.
다시금 날라오는 활을 검으로 쳐내며 멀리 나무에 앉아 활을 장전하는 사내의 모습
을 발견한 유헌은 이를 악물며 품에서 검을 빼들어 그들에게 있는 힘껏 내 던졌다.
굉장한 소리를 내며 날라간 단검은 정확히 궁수들의 가슴에 박힌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자들을 확인하고 다시 앞으로 얼굴을 돌리던 유헌은 맨 앞줄이
소란스럽자 눈을 크게 뜨며 그리고 말머리를 돌린다.
"...엑?!!"
계속해서 일행들의 길잡이가 되어주던 라프헨은 발밑이 사라지는 감각에 눈을 크
게 뜨며 고삐를 강하게 쥐었다.
그와 동시에 몸을 붕뜨는 느낌과 주변의 모습이 순식간에 변한다.
"라프헨!!!"
"멈춰라! 바닥에 없어!! 함정이다!! !"
"멈추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 어쩌라는 거야!! !"
앞에서의 소란은 단숨에 뒤로 퍼져 일행들은 주춤하며 말을 세우기에 급급한다.
그리고 그들의 그런 반응을 기다린 적들은 이 순간을 노렸다는 듯이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두르는 것이다.
뒤에 서서 적들을 대치하며 한창 잘 싸우고 있던 라헨은 앞에서의 소란에 안색을
굳히며 오브에게 이곳을 맡긴다는 말을 전하고 단숨에 앞줄로 이동한다.
"에-ㅅ?! 맡기라고 해도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당황한 오브는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사내들에게 얼굴을 돌리며 화를 날렸다.
원래 검을 다루던 자가 아니니 확실한 공격을 하려면 이런 활을 날리는게 좀더 효
율적이다.
가슴에 활을 맞고 분분히 쓰러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라헨에게 시선을 주던 오브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자들에게 용서없이 검을 휘두르는 그 모습에 질린 표정을 짓
는다. 그것은 상대하는 자들도 마찬가지여서 안 그래도 험악한 얼굴을 더 찡그리며
검을 휘두르는 라헨의 모습에 공포를 느끼며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난다.
그것을 놓칠 라헨이 아니여서 물러난 적들에게 용서없이 검을 휘두르며 맨앞으로
달려나간 그는 멈춰서 당황하고 있는 일행들에게 다가간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갑자기 멈추면 뒤의 사람들은 어쩌라고!"
"그...그게 말이지."
"그리고 라프헨은 어찌 된거야!"
당장에 주먹 다짐이라도 할듯한 라헨의 태도에 안색을 굳힌 샤한은 눈을 돌리며 노
웬들에게 시선을 던진다.
잘 달리던 맨 앞의 말들이 푹 파여진 구덩이에 떨어진 장면을 본 사람들의 저도 모
르게 숨을 들이켰다. 저만한 구덩이가 있다는 것을 모를리가 없으니 자신들을 잡으
려 파놓은 함정인 듯 했다.
저런 구덩이에 일반적으로 바닥에 날카로운 창이나 기구들이 세워져 있는 게 많다.
그래서 바닥에 사라지는 말들과 사람들을 보며 죽을 거라고, 그 중에 섞여있는 라
프헨의 모습에 라헨에게 무슨 말을 해야하나 하고 안색을 굳힌 노웬들은 망설임 없
이 구덩이로 말과 함께 달려드는 칸의 모습에 기겁을 했다.
자신도 노웬들과 같이 구덩이로 달려 들려는 찰나 라헨이 달려들어 라프헨의 안부
를 묻는 것이다.
당황한 샤한은 그저 노웬들이 적들의 공격을 받지 않도록 주변의 경비를 하라는 지
시를 내린 후 자신을 바라보는 라헨의 얼굴에 시선은 준다.
"저..그. 그게.."
"라헨!! 이리와서 칸님과 라프헨을 끌어내!!"
칸과 라프헨의 안부는 자신도 걱정되고 또 알고 싶기에 당장에라도 구덩이로 달려
가고픈 마음을 억누르며 최대한 라헨의 진정시킬수 있을 말을 고르던 샤한은 들려
오는 노웬의 음성에 얼굴을 치켜든다.
라헨은 벌써 노엔에게 달려들어 구덩이속에 시선을 준다.
"..라프헨..! 칸!!"
"......끌어 올려줘..."
마차 서너대는 들어 갈듯한 깊이와 너비로 파여진 구덩이의 속은 날카로운 창들이
빽빽히 꽂혀있고, 이곳으로 떨어진 다른 사내들은 그것에 박혀 보기에도 끔찍한 형
상을 띄우고 있었다.
팔을 내밀어야 겨우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위치에 한팔로 튀어 나온 돌을 잡고 다른
손으로 라프헨의 손목을 잡은 채 매달린 칸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슬해 보인다.
안색을 달리한 라헨은 뒤에 있는 사내들에게 자신의 손이나 다리를 잡으라고 소리
친후 망설임 없이 안으로 손을 내 뻗는다.
"라헨!! 잡아!!"
팔을 뻗는 수준이 아닌 완전 몸통을 밀어넣는 그 모습에 기겁한 샤한은 그의 단단
하 허벅지를 잡아 뒤로 끈다.
뒤에서 적들의 모습을 예리하게 감시하던 일행들은 당황하며 샤한과 마찬가지로
라헨의 몸에 매달린다.
"칸! 조금만 버텨라!"
"제길.. 라프헨이 없었으면 스스로 올라 오라고 할 주제에.."
"당연한 말이다! 자... 조금만 버텨라."
라헨의 말에 악의 없이 웃어보인 칸은 자신의 손목을 잡는 라헨의 손길에 잡고있던
돌은 놓고 재빠르게 라헨의 단단한 손목을 잡는다. 한팔에 불어난 두사람의 무게에
몸이 앞으로 미끌어지고 그를 잡고있던 사내들이 기겁을 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노웬도 반사적으로 라헨의 팔을 잡아 뒤로 끈다.
비와 진흙에 옷이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그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조..조금 더 끌어봐!!"
하다못해 바닥에 비에 젖어 미끌 거리지만 않았다면 이 두사람 쯤은 쉽게 끌어 올
릴수 있었다. 점점 몸이 앞으로 미끌어지는 느낌에 이를 악물던 라헨은 자신을 바
라보는 칸과 라프헨의 눈동자에 숨을 죽인다.
한치의 불안도 없는 신뢰에 가득 찬 눈빛에 한동안 멍하니 있던 그는 이를 악물며
두사람을 잡고있던 팔에 힘을 준다.
무시무시할 정도의 핏줄이 도드라 지고 점점 칸과 라프헨의 몸에 위로 올라가기 시
작한다. 이제 조금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때 갑자기 옆에서 가느다란 손이
내려 와, 잡고 있던 칸의 팔 중간을 잡는다.
그리고 순간 엄청난 힘으로 위로 들려지는 느낌에 놀란 라헨은 자신에게 매달린 사
내들을 깔아 뭉개며 몸을 뒤로 물린다.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도운 사람인 유헌은 바라보지만, 그는 위로 끌어 올려져 정
신없어 하는 칸과 라프헨에게 시선을 줄뿐이다.
"괜찮나요?"
"아아- 덕분에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
"쿨럭. 칸님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작스런 일이 어지간히 놀랐는지 기침을 하는 라프헨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은 칸
은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구해주지 못했어..'라며 웅얼 거린다.
그의 말에 입을 막고 녹색의 눈을 치뜬 라프헨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린다.
하다못해 자신이 미리 알아차리고 경고를 했다면 죽는 사람들의 수가 줄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당황한 칸이 아니라는 듯이 손을 저었지만, 라
프헨의 뒤로 나타난 라헨이 그의 작은 몸을 끌어 안는다.
"괜찮은 거냐."
"나..나.. 라헨.."
"칸은 널 책하는게 아니라,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거다."
라헨의 말에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라프헨은 얼굴을 찡그리며 그의 목에 손을 두른
다.
그런 둘의 모습을 바라보던 칸은 한숨을 쉬며 자신을 도운 유헌에게 시선을 준다.
내리는 비가 많이 씻어주긴 했지만, 옷 여기저기에 묻어있는 진흙이나 얼굴의 흙에
절로 미소가 흐른다.
"고마워. 도와줬군."
"당연한 일이죠. 밑에 떨어지지 않아서 다치진 않은게 천만 다행이네요."
"아아- .........그나저나 완전히 둘러 쌓였군."
멍하니 유헌의 말에 대답하던 칸은 자신들의 주변으로 몰려드는 적들의 모습에 한
숨을 쉬었다. 저들의 우두머리나 싸움을 지휘한 자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
정도까지 자신들을 내몰다니 꽤나 대단한 실력자이다.
완전히 자신들을 궁지에 몰았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아까처럼 질기게 공격을 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려 일정 간격을 유지한채 둘러 싼다.
나무 위에 올라간 사내들이 하나 같이 이쪽으로 활을 내밀고 둘러싼 자들의 수가
서서히 불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상당히 두려운 일이다.
주춤거리는 일행들의 모습에 표정을 굳힌 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하는 거냐!! ! 이런 곳에서 부끄럽게 굳어버린 건가!!!"
".........칸."
일어서서 큰 소리를 치는 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유헌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의 곁에서 떨어졌다.
"저런 놈들에게 당해 발목을 잡힌다면 얼마나 꼴 사나운 모습이냐! !
당장에 검을 들고 싸우란 말이다!!"
호통을 친 칸은 멍하니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밀쳐내며 말의 안장에 손을
올렸다. 당장에 말을 타고 달려 나갈 것 같은 칸의 모습을 정신을 차린 사내들은 분
분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단숨에 변한 분위기에 유헌은 묘한 감동마저 든다.
그런 그의 곁에 다가온 노웬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죠."
".....노웬.."
"알게 모르게 그에게 의지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유헌 당신이 그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준다면.. 감사하겠습니다."
표현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 누구보다 칸에게 신경을 가장 많이 쓰는 사람이다.
노웬에게 작게 미소를 지어보인 유헌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을 돌
려 칸에게 다가갔다.
주변을 둘러쌓고 있던 자들이 언제 들이 닥칠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칸에게 조심하
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카........."
자신에게 다가오는 유헌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으며 말에 반쯤 오른 칸은 마저 몸을
앉히며 그에게 손을 내민다.
유헌이 다가오며 그의 얼굴을 만지고 싶다-라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다가오는 유헌의 모습을 바라보던 칸은 등 한가운데 느껴지
는 통증에 눈을 크게 떴다.
".......칸?"
갑자기 움직임을 경직시키며 등에 손을 뻗는 칸의 모습에 유헌은 의아한 표정을 짓
는다. 등을 더듬던 칸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지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일행들 사이로 비명과 함께 요란한 소란이 뒤덮인다.
"..칸! !"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진건지 알수가 없는 유헌은 말위에 올라가 있던 칸이 한손을
등에 댄채 몸이 서서히 옆으로 기울어지자 안색을 달리하며 그에로 달려갔다.
그것은 라헨이나 노웬도 마찬가지 였지만, 갑자기 떨어진 그의 몸을 받아 든 것은
칸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유헌이었다.
갑자기 쓰러져 품안에 늘어진 칸을 받치고 몸을 휘청이던 유헌은 등뒤로 다가운 라
헨의 가슴에 몸을 받친 채 칸의 등에 뻗어나온 화살대를 확인하곤 숨을 들이켰다.
"...칸..! !"
갈라져 나오는 음성을 들으며 떨리는 손으로 화살대를 잡으려던 유헌의 손을 막은
라헨은 함부로 건드려선 안된다고 한다.
"하지만..!! 하지만...!!"
"움직이면 안돼!! 독이 든 것일수도 있단 말이다!!"
라헨의 외침에 단번에 안색이 굳은 유헌은 요란한 함성을 울리며 자신들에게 다시
금 공격을 가하는 적들을 바라 보았다.
갑작스런 칸의 부상과 적들의 공격에 우왕좌왕하는 사내들의 모습에 당황한 노웬
은 급하게 말위에 오르며 진정하라고 목을 높이지만, 말로써 사람들을 진정시킬 단
계는 아니다. 굳어진 안색의 노웬을 확인한 젤은 묵묵히 팔을 뻗어 다가오는 적들
에 마력탄을 난사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하면 금새 체력이 떨어지겠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이런 공격이 가장 효율적
이다. 그녀의 공격에 이쪽으로 달려들던 적들이 움찔하는 것을 확인한 젤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든 길을 뚫어 부상을 당한 칸을 옮겨야 한다.
"제길-! ! 무슨 일이란 말야!! !"
멀리 쓰러지는 칸의 모습에 경악을 하며 달려가려던 에스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자
들에게 이를 갈며 검을 놀린다.
이렇게 정신없이 검을 휘두른다고 공격을 줄어드는 것은 아니지만, 갑작스런 일들
에 그 역시 당황한지라 냉정한 판단을 할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열심히 검을 휘두르던 에스는 뒤쪽에서 다시금 달려드는 무리에 안색을 굳힌다.
지금의 사람들도 상대하기에 어려움이 있는데, 지금보다 더 늘어나면 수가 없어진
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당황하는 사내들에게 줄을 똑바로 서라고 윽박지른 그는 말
머리를 돌리고 단신으로 그쪽으로 달려든다.
그 모습에 당황한 일행들이 경솔한 짓을 말라는 소리가 들려 왔지만, 수가 없지 않
은가.
"죽어도 너희들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테다!! !"
발악하듯 외친 에스는 자신에게 검을 내미는 사내를 바라보며 품안에 단검을 꺼내
든다. 그리고 던지려는 찰나 그보다 먼저 말에서 떨어지는 상대의 모습에 눈을 크
게 떴다.
우와와아아아---
"..뭐..뭐냐?!"
이번에 또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건가.
무모하게 앞으로 달려가는 에스의 뒤를 따르던 오브는 귀청을 두들이는 엄청난 함
성에 안색을 굳힌다. 그것은 에스도 마찬가지로 달리던 말을 멈추고 사방에서 들려
오는 함성에 멍한 표정을 짓는다.
적들도 몸을 굳히는 것을 보아 그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다.
그렇가면 뭔가, 이 요란한 함성은-
"무슨 일이지..?"
딱딱하게 안색을 굳히며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던지 노웬은 서서히 모습
을 들어내는 무장을 한 무리들의 모습에 안색을 굳힌다.
붉은 문장에 금빛으로 수 놓아진 매의 형상.
분명 저 문양은...
"그라센......가..."
카일의 가문의 문양이자 그라센 왕국의 국기이다.
저것에 왜 이런 곳에 있는 것인가.
"....도대체가.."
그리고 붉은 복장을 한채 적들을 도륙하는 기사들의 모습에 에스는 어깨에 힘을 빼
며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갑작스런 사람들의 등장에 당황한 것인지 아까와 다르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적들
의 모습에 일행들이 몸을 추스리며 진영으로 돌아가 무기의 정비를 다시한다.
아직 저들에 대해 밝혀진 바가 없으니 방심은 금물인 것이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 하고 주변의 수장을 찾으려던 에스는 멀리 한
무리의 기사들에게 둘러 쌓여 이쪽으로 접근하는 청색의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
린 사내의 모습에 입술을 벌린다.
"갑자기 사라져서 한참을 찾았다고."
"...........카일."
산책을 하다 잊어버린 아이를 찾았다는 듯이 가볍게 입을 열며 손을 드는 그의 모
습에 애스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밀어 닥치는 안도감에 묘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들어 얼굴을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