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악!! 정말 귀찮네, 아니라는 데 도대체 말을 알아먹는 거야. 뭐야! !"
"아닙니다. 당신은 분명히 칸양입니다.
주변분들도 그렇게 말했는데, 왜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까."
비센의 말에 다시금 아니라고 말하려던 칸은 그러나 씨도 안먹히는 소리 하지 말라
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그 얼굴에 입을 다물었다.
미간을 찌뿌리며 비센을 가만히 바라보던 칸은 그러나 시선을 피하지 않고 한결같
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 모습에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돌리고 빠른 걸음으
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칸의 모습에 비센또한 빠른 걸음으로 뒤를 쫒는다.
사내 둘이 걷지도 뛰지도 않는 어영부영한 모습으로 이동하는 것은 상당히 웃긴 모
습인지라 시선이 모일만도 하지만 주변에 아무도 없어 좋은 구경을 하는 이는 없었
다.
"아니라면 이렇게 피하지 말고 말을 하는 게 옮습니다!"
"시끄러- 난 네놈하고 할말은 조금도 없다. 유헌은 찾아야 한단 말이지!"
"그 유헌이라는 분이 그토록이나 소중하십니까?"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은 칸의 모습에 비센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그런 그의 물음에 몸을 돌린 칸은 그를 바라보며 단호히 입을 뗀다.
"말로 다 표현할수 없을 만큼 소중해. 너무나 소중한 존재라고-
내 인생에서 그런 사람이 있을줄은 꿈조차 꾸지 않은 사람이란 말이다."
"제가 그 사람보다 못하다는 겁니까?"
"...끈질기군..."
그렇게나 말했는데 되묻는 모습에 이쪽에서 질려 버리겠다.
이를 앙문 칸은 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려다 저쪽에서 달려오는 기사들의 모습
에 안색을 굳히고 허리까지 올라온 풀숲으로 잽싸게 들어가 앉았다.
그런 칸의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비센은 멀리 가다오던 기사들이 자신을 감싸
자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 뮤트롱에 와서 이런 대접을 받아 본적이 없거늘, 자신을 둘러싸다니 도대체 무
슨 일이란 말인가. 아니, 그보다 이자들의 복장은 뮤트롱과 미묘하게 다르다.
중앙에 있는 카일에게 놀러 갔을때 본적이 있는 중앙국 기사들의 복장같다.
"죄송하지만, 어디를 가시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안된다. 일개 기사인 주제에 나에게 말을 걸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저..하..하지만."
자신의 강경한 태도에 안색을 굳힌 기사들은 그러나 말을 듣기전에 비키지 않을 심
산인 모양이다.
"내 혈연중 한 사람이 중앙국에서 카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지.
그를 안다면 길을 비켜라."
"아, 카일경과 아시는 분이셨습니까. 실례했습니다."
중앙에서의 카일의 지위는 과연 대단한 듯 비센을 둘러싸던 기사들이 다급히 자세
를 달리하며 그의 주변에서 물러난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비센은 궁금증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어째서 뮤트롱 왕가에 중앙국의 기사들이 와 있는 것인가.
게다가 이런 무례한 행동이라니-"
"죄송합니다. 실은 뮤트롱가의 왕에 음모를 꾀해 성안이 상당히 위험한 상태인지라
안에 계신 귀족분들의 안위를 우선시하다 보니 이런 무례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음모?"
"식전 돌린 잔안에 독이 들어있어, 그것을 마신 다수의 귀족들이 독살 당했습니다."
"뭐?"
기사의 말에 비센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는다.
그것은 옆의 풀에 숨은 칸도 마찬가지로 숨을 죽인 그는 기사들의 말에 귀를 기울
였다.
"혼란이 가중된 가운데 중앙국의 황제이신 이자키엘 폐하의 무사한 귀족분들은 다
른 곳에 모시고 지켜드리라는 분부입니다.
자- 비센경 저희들을 따라 오셔서 모쪼록 곤란한 상황을 겪지 않으시도록-"
"..........아니, 됐다.
근처에 동료가 있으니 그를 찾으며 그대들이 알려준 장소로 가도록 하지."
"그렇시다면 그 친구분을 찾는 즉시 중앙성의 오른편에 나있는 작은 모조건물로 오
십시오. 그곳에 오셔서 자신의 신분을 한번더 알려주시면 기사들의 귀하의 안전을
지켜드릴 겁니다."
말을 마친 기사들은 비센에게 예우를 차리며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을 살펴보던 비센은 이내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되자 풀숲에
숨어있는 칸을 찾아 그를 끄집어내 주었다.
뭔가 충격을 받은듯 멍하니 금빛의 눈동자를 뜬 그 모습이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자
신은 이상한 걸까.
입가를 누그러 뜨린 비센은 칸에게 얼굴을 내밀며 이곳에서 피하자고 말했다.
전보다 커진 그는 얼핏봐도 사내라는 것을 알수 있을 정도였지만, 가슴에 붙여진
불은 꺼지지 않는다.
아름다운 칸의 얼굴을 보면 볼수록 더 가지고 싶어 안달이 나는 것이다.
"이곳에 있으면 위험합니다. 방금 기사들에게 들었죠?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아요."
".......미친 녀석..."
"다른 일행들에겐 제가 말을 할테.........예?"
부드럽게 말을 하던 비센은 칸의 욕설에 얼굴을 굳혔다.
그런 비센을 신경쓰지 않고 팔을 뿌리친 칸은 몸을 돌려 뮤트롱의 중앙성, 귀족들
의 만찬이 있었던 곳으로 달려갔다.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냐-! !"
연회에 참석한 수많은 귀족들.
그리고 돌려진 잔에 쓰러져 죽는 자들.
전부, 전부 자신이 예전에 써먹었던 것들이다.
웃으면서 넘어가려 해도 모를리가 없는 것들이다.
그런 것들을 다시 재생해서 자신에게 보여주는 의도가 뭐냐- 이자크! !
이를 부득 간 칸은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는 자신의 뒤를 따르는 비센을 느꼈지만,
걸음을 늦추지는 않았다.
그에게 돌아가라는 말을 할수없을 정도로 칸은 극도로 복잡한 심정이었다.
정문보단 뒷문으로 가는 것이 낮다고 판단하고 몸을 돌린 칸은 가운데 성을 지키는
기사들이 보이지 않음을 의아하게 여겨, 주변을 둘러보다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이내 뛰는 것을 중지하고 성의 뒷문에 선 그는 일을 벌인 곳 치곤 지나치게 조용하
다는 것을 느낀다.
이렇게나 조용하다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다.
"이제서야 눈치를 채봤자 늦었다. 칸크빌레-"
"............."
"오랜만이구나. 예쁜아이야-"
조롱조의 저 음성은 잊을래야 잊을수가 없는 것이다.
저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몸을 감싸는 적기를 느끼다니, 자신도 이젠 한물간 모양이
다.
"..........루드빌."
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거치는 계단의 중간에 모습을 들어낸 루드빌은 칸을 바라보
며 진한 미소를 띄었다.
내심 어찌하면 좋을까 눈앞의 이 존재를-라고도 말하는 것 같은 그녀의 붉은 눈동
자에 이를 악문 칸은 한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가 용으로 변하면 승산이 없지만, 인간의 모습인 지금은 왠만큼 승률이 있다.
빠르게 치고 들어간다면 용이라 할지라도 무사치는 않을 것이다.
그런 칸의 마음을 읽은 건지 뒤로 몇걸음 물러난 루드빌은 자신의 앞에 거대한 붉
은색의 방어막을 만들었다.
"...쳇."
"너처럼 용을 상대로 이겨보려는 놈이 이상한 거다.
.............어쩜 저렇게 말을 안듣는 아이로 자랐을까-"
"난 당신에게 키워진 기억은 조금도 없다. 빌어먹을 도마뱀이-"
"........넌 조금 예의를 배우는게 좋겠다. 칸크빌레."
" ! ! "
루드빌의 성미를 건드려 조금 날뛰게 만들려 했지만, 오히려 이쪽으로 마력탄이 몇
개나 날라와 칸은 바닥을 굴러야 했다.
저 적룡은 묘한게 어떨때는 엄청 멍청하게 굴다가도 갑자기 영리하게 변해서 사람
을 놀리는 거다. 노웬은 그게 그녀가 미친 광룡이라는 증거라고는 하지만- 이럴때
조금 제정신이 아닌 쪽이 훨씬 상대하기 좋으니 조금 멍청하게 굴어도 좋으려만.
혀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난 칸은 돌맹이를 주워들어 그녀에게 날렸다.
그러나 앞에 가리워진 붉은 장막을 통과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소멸한다.
그냥 물리적인 충격을 흡수하는 장막인줄 알았는데 그보다 훨씬 대단한 것이다.
저런 것이면 이곳에서 아무리 뭘 던져도 그녀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 칸의 금빛
눈동자가 쉴새없이 흔들리자 루드빌은 한숨을 쉬었다.
확실히 그닥 정을 주지 않은 아이이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피를 아인데 왜 저리
반항을 하는 건지- 왜 굳이 이런 복잡한 상황을 꾸미는 건지 알수가 없다.
그냥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면 세상의 부귀영화를 그 한몸에 줄수도 있었는데.
"칸크빌레 조금은 영리하게 생각해라. 지금이라도 잘못을 빈다면 용서해 주겠어."
" 흥- "
루드빌의 말에 그의 성미를 건드린 모양인지 요리조리 마력탄을 피하던 칸이 주머
니 속에 들어있던 단검을 있는 힘껏 내 던진다.
장막에 막혀 역시나 사라지긴 했지만, 부딫힌 면이 조금이나마 이지러지자 루드빌
의 안색이 급변한다. 미약하긴 했지만, 자신의 장막에 상처를 입혔다.
그렇다는 것은 근거리 공격일 경우 좀더 잘 먹힌다는 뜻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적룡은 눈앞으로 날라오는 은빛 호선에 안색을 달리했다.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니 무슨 행동을 하는지 잘 알수 있지만, 녀석은 자신과
의 연결을 끊어버려 기척을 알아채기 힘들다.
워낙에 뛰어난 구조를 가진 인간이니, 자신과의 연결을 모두 끊더라도 칸은 용에
게 꽤나 위험인물이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 손을 내뻗는 루드빌을 노려보던 칸은 이를 갈았다.
"네가 처음부터 없었으면 좋았다."
".......뭐?"
"용 주제에 인간들에 끼어 무슨 짓거리를 해대는 거야-!!
유희였다면 그대로 끝내고 네 자리로 돌아갈 것이니, 이렇게 진득하니 붙어서 계속
헤서 자손을 늘리고, 괴롭히고, 엉망으로 망쳐놓고, 왜 이렇게..! !
왜 이렇게 형제들끼리 피를 보게 하느냔 말이다!! !"
" ? ! "
콰-앙! ! !
칸의 검의 루드빌읠 장막을 반으로 갈랐다.
그와 동시에 순간적으로 이그러진 파장이 주위에 커다란 폭발음을 내며 공기중에
사라진다. 자신의 장막을 가른 검이 은은한 은빛으로 빛나자 루드빌의 얼굴이 급속
도로 변한다.
마력을 한정없이 날리면 눈앞의 존재를 죽일수 있지만, 그럴수는 없다.
자신의 아이를 이 손으로 죽이는 일따위는 할수가 없다.
흔들리는 적룡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는 칸의 금빛 눈동자는 차갑기 그지없다.
"용인 너는 이곳에 있어선 안돼. 더 이상 인간들의 삶에 끼어들지마.
나와 이자키엘 사이에서 사라져. 넌 네가 아이들을 지킨다고, 위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과는 정 반대잖아! 이 미친용-! !"
이를 악문 그는 다시금 검을 들어 있는 힘껏 휘둘렀다.
칸의 말과 그가 벌인 행동에 다서 충격을 먹은 건지 루드빌을 반격을 할 생각을 안
하고 몸을 요리조리 피할 뿐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혀를 찬 칸은 품안에 손을 넣어 발광탄을 하늘높이 쏫아 올렸
다. 그것에 루드빌의 안색이 급속도로 변한다.
"다른 자들은 모르지만, 너만은 꼭 내손으로 죽어야 겠다."
단지 유희로 남아있어 수많은 인간들의 인생을 망치고 삶을 엉망으로 흩틀어 놓은
빌어먹을 광룡- 중앙의 신들의 인식처라는 성지를 인간들의 온갖 더러운 감정으로
채워넣고 자신의 그 같잖은 대리만족을 충족시켰지.
자신들의 선조 몇대가 저 용의 농간에 넘어갔던가- 하
다못해 자신의 부친인 카르키엘마저도.
그리고 지금은 동생인 이자키엘마저 저 용의 수중에 있다.
다른것은 몰라도, 자신의 모든 행동이 이해를 받지못해 손가락 질을 받아도, 여전
히 이자크에게 미움을 받아도 할수는 없는거다.
눈앞에 이 용을 죽이는 것만이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최선의 일이다.
이를 악무는 칸의 결의찬 얼굴에 적룡은 입술을 깨물었다.
진심으로 자신을 죽일 생각이다.
인간인 주제에 용에게 검을 들이미는 행동이 어이없기 그지 없었지만, 웃음으로 넘
어갈수 없는 것은 그 검에 담긴 엄청난 살기 때문이다.
"........건방진-! !"
자신도 말 않듣는 아이는 이젠 필요없다.
죽이려고 몇번이나 생각해도 정을 생각해 가만히 두었는데 되려 이런 행동을 벌여
자신을 위협한다.
역시나 그때 그 카르키엘과 함께 사라지게 했어야 햇다고- 그렇게 생각하던 루드
빌을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대로 죽어서 자신의 마음에서 아주 사라져 버려라.
그것이 자신에게도 다른 아이들에게도 훨씬 좋은 일이다.
눈앞에 이 아름다운 인간의 존재는 수많은 아이들을 울려왔으니- 그에 합당한 댓
가를 치뤄야 한다.
"칸크빌레, 이제 그만 사라져라-"
콰-앙-! ! !
입가를 비죽히 올리며 조롱조로 중얼거리던 루드빌은 자신들이 서있던 계단 오른
편에서 요란한 폭발음이 들리자 안색을 굳히며 그리로 얼굴을 돌렸다.
그것은 검을 휘두르던 칸도 마찬가지로, 요란한 폭발음과 여기저기 금이 가고 무너
지는 벽들에 그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 진다.
설마하니, 그가 이곳에 와있는 건가.
저 폭발음이 유헌으로 인한 것이 아닐까, 그가 다친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하던 칸은
벽이 부숴지면서 튕겨져 나온 인간에게 뛰어갔다.
건물 안에서 강한 힘으로 밀어졌는지 벽들과 먼지사이에 가려 그 모습이 자세히 보
이지 않은 그 인물에게 빠르게 다가가 몸을 안아 들었다.
안고나서 무게가 틀려 유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얼굴을 확인한 칸의 얼
굴이 급속도로 변한다.
"이자키엘....."
탁-
품안에 늘어진 이자크의 모습에 안색을 달리하던 칸은 또다른 소리에 그쪽으로 시
선을 던졌다.
그리고 벽에 기댄채 온통 피범벅인 유헌의 발견하곤 숨을 들이켰다.
반쯤 풀려진 눈동자라던가 거칠게 숨을 들이키는, 다리에 힘이 없어 비틀거리는 그
모습이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다.
그런 그에게 다가가야 하지만, 품안의 이자크를 놓을수가 없다.
뭐라고 해도 자신의 동생이고 십여년만에 품안에 안아봤다. 그동안 그렇게나 싸워
왔지만, 형제의 정이라는 것은 어쩔수 없는 것이다.
이자크를 안고있는 손을 차마 풀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폼으로 일어난 칸은 자신에
게 다가오는 유헌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 닿기 직전 유헌은 걸음을 멈추었다.
"왜그래? 이리로와 유헌."
"........칸."
"응? 많이 다친것 같아. 어서 이리로 와."
칸크빌레.
이자키일.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형제다.
이렇게나 닮으면서도 다른 형제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비슷한 점도 있지.
아까까지 이자크를 죽이려는 마음만이 가득이었지만, 그를 안고 손을 떼지 못하는
칸의 모습을 확인하니 몸의 기운이 좍 빠지는 느낌이다.
자신의 상태를 살피는 그 흔들리는 눈동자라던가 갈라진 음성에 그가 얼마나 자신
의 상태를 염려하고 있는 지 알수있게 한다.
하지만, 이자크를 안고 있는 그를 보자니 뭐라 표현 할수없는 감각이 느껴진다.
괴로운 듯이 흔들리는 유헌의 눈동자에 칸의 눈동자도 불안하게 흔들린다.
"유헌..이리로-"
다시금 손을 뻗은 칸은 그런 유헌의 뒤로 다가온 루드빌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늦었다-라고 머리속에 스치는 순간 칸은 이자크를 안은 손을 놓고 유헌을 향해 손
을 내뻗고 있었다.
"젤! !"
뮤트롱의 중심에 위치한 성에서 밝은 빛이 쏫아지자 노웬은 안색을 굳히며 젤의 이
름을 불렀다.
그런 그의 부름에 방문을 열고 들어온 젤의 안색은 창백하게 굳어져 있다.
노웬이 뭐라고 하기 전에 그녀 또한 느끼고 있는 것이다.
노웬의 지시에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한다.
저택에 머무르고 있던 칸크빌레 일파가 검을 들고 분분히 일어날 때 쯤 요란한 검
명과 수십명의 기사들이 그런 그들이 있는 건물의 주위를 둘러싼다.
그 모습을 창가에서 확인한 노웬은 이를 갈았다.
과연-이라고 해야하나 사람이 안심하고 있을때 치는 것은 정말 즐겨하는 족속들이
다.
"칸님은 어디에 있는 거지?"
"나가서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유헌군은. 이 외에서 자리에 없는 사람들이 있나?"
"유헌군, 에스. 그리고 라헨과 라프헨이 자리에 없습니다."
".......제길."
젤의 말에 나지막히 욕설을 내뱉은 노웬은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렸다.
칸이 없고 몇몇의 인간이 빠져나간 지금의 상황에서 자신이 무너지면 이 집단은 끝
이다.
"전에 알려준 대로 자리를 잡고, 적들의 움직임을 확인해 유동적으로 대처하라-! !"
아무리 이쪽에서 난리를 핀다고 해도 저쪽은 수도 많은 뿐더러 훈련이 잘된 자들이
다. 그런 자들에게 무턱대고 덤빌수는 없으니 만약의 상황에 도망을 가도 좋다는
의미가 담긴 노웬의 말에 사내들의 안색이 어두워 진다.
하지만 어쩔수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이쪽도 왠만큼 훈련이 된 자들이지만, 그 정예들은 폴유간과 함께 묻혀 버렸다.
혀를 차며 근처에 놓아둔 검을 허리에 차던 노웬은 방입구가 소란스럽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인가-"
"아니, 이 사내가 노웬님에게 할말이 있다고 해서."
".....당신은?"
남자들에게 팔 한쪽씩 잡히고 씩씩대고 있는 사내는 익히 알고있는 사람이다.
카일의 사촌이며 여장했던 칸크빌레를 따라다니는 이상한 취향의 남자.
비센이라고 했던가. 숨을 헐떡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그 모습에 손을 놓아주라고 한
노웬은 비센에게 다가갔다.
그와 동시에 노웬에게 다가온 비센이 입을 연다.
"지금 뮤트롱에서 벌어진 만찬에서 돌려진 잔에 독이 들어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잔안의 액체를 마신 대다수의 귀족들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뮤트롱의
왕은 폭력을 당해 숨이 끊어질 지경이라고 합니다."
"........뭐?"
엄청난 의외에 말에 노웬의 얼굴이 이그러진다.
그런 노웬의 표정을 읽은 비센은 역시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음 말을 해야지
현 상황이 돌아가는 것에 이해를 할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중앙국의 황제는 이 건물에 있는 자들이 뮤트롱의 왕과 한
패라고 했습니다."
"............."
"게다가 칸양- 아니 칸은 그 말을 듣고 중앙건물로 달려가다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그를 찾으려 했지만, 주변을 감싸는 붉은 기운 때문에 접근할수가 없었어요-"
'칸도 문제이지만, 일단 당신들의 상황이 어떤지 알려주러 온겁니다-'라고 말을 마
친 비센은 딱딱하게 굳은 노웬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한동안 입술을 잘근 깨물던 노웬은 서있는 사람들에게 어서 자기 자리로 들어가라
고 지시한다.
"위가 혼란하면 아래는 더 하는 법이지.
일단 라헨에게 연락을 해서 칸님을 찾아보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유헌군은 어쩔까요?"
"....일단 그의 힘을 믿어 봅시다. 그리고 그가 있는 곳에 칸님이 계실 가능성이 높
으니 거기에 운을 걸수밖에요."
노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젤은 아직도 서있는 사내들과 방에서 나섰다.
비센을 뒤로 하고 창에 다가간 건물을 둘러싼 기사들을 발견하곤 미간을 찌뿌렸다.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 저 복장을 입었던 적이 있었다.
복면을 하고 다른 옷을 입고 있었을 때엔 차라리 공격하기에 부담이 없었지만, 저
런 모습으로 나타나니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의외로 자신은 속물 근성이 있었던 건가-
"저들이 바로 이쪽을 공격해 올까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일을 진행하려면 이 건물안의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입을 막
으려 할겁니다. 하지만, 당장은 공격을 하진 않겟죠-"
"그렇다면 당신들은 지그무터 어쩌할 생각입니까?"
"일단 칸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사태의 추의를 살피도록 하죠.
..........당신은 이곳에 있으실 겁니까?"
이곳에 있다가 괜히 피해를 입을수도 있다.
노웬의 염려를 읽은 비센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칸이라는 분을 만나기 전에 한발 자욱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제가 이곳에
있다면 금방 공격을 해와도 얼만큼의 시선을 벌수가 있겠지요."
그의 말이 옳기에 고개를 끄덕인 노웬은 멀리 보이는 화려한 건물을 바라 보았다.
이 자리에 없는 모든 사람들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랄뿐이다.
캉! !
"..큭! !"
손아귀에 느껴지는 강한 통증에 이를 악문 이자크는 검을 휘두르는 유헌을 바라 보
았다. 아까까지 자신에게 당해 손하나 까닥할수 없었던 자가 갑자기 살아 펄펄 날
뛰고 있는 거다.
분명, 자신은 마력을 사용하지 않았을 터이니 그의 몸이 전처럼 회복됬다고 볼수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의 그의 모습은 어떻게 설명하면 좋다는 말인가.
다시금 검을 휘두르는 유헌의 모습에 얼굴을 찡그린 황제는 반사적으로 검을 들이
밀었다. 그 덕에 유헌의 몸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뒤로 물러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의 독기는 더 강해졌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래 저렇게 움직일수 있는 건가.
분명 가슴의 뼈가 부러져 서있는 것도 고작일텐데... 실제로 유헌은 검을 휘두르는
간간히 피를 쏫아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이 자리에 쓰러져 쉬고싶은 마음뿐이었지만, 그랬다간 눈앞의 남자에
게 죽임을 당할 판이라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느낌이다.
"...유헌! !"
멀리 이자크와 대치중인 유헌의 모습에 에스를 가슴을 감싸쥐며 누워있던 자리에
서 일어나려 했다.
황제의 검에 베였을때 일시적으로 정신을 잃은 듯, 눈을 떴을때 보이는 광경에 그
는 기겁을 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유헌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그가 보기
에도 상당히 위태로웠고, 황제의 검이 그런 그를 언제 어디서 벨지도 모를 일이다.
황제의 실력은 저 칸과 막상막하일 거라고 막연하게나마 생각하고 있지만, 저 몸놀
림을 보니 확신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크..윽.. 끔찍하군."
가슴 왼편에서 배까지 베어진 상처에서 쏫아져 나오는 피도 피이지만, 벌어진 사이
로 보이는 내장에 이대로 있으면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런 곳에서 죽을수는 없을 노릇이지만,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안의 내장에 다
흘러 그 자리에서 즉사할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피를 많이 흘려 마찬가지로 죽게 되겠지.
그런 꼴사나운 일이 정말로 자신에게 벌어졌구나- 헛웃음을 지으려던 에스는 목구
멍으로 넘어오는 비릿한 혈향에 기침을 하며 뱉어냈다.
턱으로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낼 생각도 못하고 가만히 누워있던 에스는 고개를 돌
려 무서운 기세로 검을 휘두르는 유헌을 바라 보았다.
말려야 한다.
계속해서 저렇게 검을 휘두르면 쓰러지는 것은 결국 유헌인 것이다.
노웬에게서 그의 성질에 대해 들었다.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검을 휘두르는 황제의
모습에 그역시 유헌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수있다.
그렇다면 이 싸움은 유헌, 그에게 정말로 불리하다.
"....쿨럭.. 켁."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양팔에 힘을 준 에스는 그러나 진득히 터져나오는 기침에 그
대로 몸을 눕혔다.
이렇게나 중요한 일에 또다시 아무것도 못하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 건가- 자신은.
멍하니 몸을 힘을 빼고 누워만 있으려니 끔찍하게도 몸의 피가 흘러나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 위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한데..
"에스-!"
"......환청이 아니군."
형편없이 쉰 목소리가 나오자 에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굳어서 움직이지 않은 목을 돌려 자신에게 달려오는 라프헨과 라헨, 그리고 카일의
모습을 확인한 에스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떴다.
죽을 때가 다되니 환영이 보이는 건가.
그런 그의 생각과 달리 엄청난 기세로 달려온 카일은 안색이 창백해져선 에스의 곁
에 앉는다. 자신에게 치료마력이 없는 이상, 함부로 건드리면 오히려 에스에게 폐
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카일은 어떻게 해보라는 시선으로 라프헨을 올려다 본
다. 그런 카일의 시선에 잠시 몸을 움찔하던 라프헨은 입술을 깨물며 무릎을 굳혀
에스의 곁에 앉는다.
자신의 어깨를 집는 라헨의 큰손이 느껴졌지만, 여기서 자신의 힘을 사용하지 않으
면 에스는 죽는다.
딱 보기에도 금방 숨이 넘어갈 것같은 그의 모습에 입술을 깨문 라프헨은 양손을
모아 깍지낀 다음 에스의 상처부위에 올려 둔다.
"..........라프헨."
"잠깐-"
다시금 라프헨의 어깨에 손을 집으려는 라헨의 손을 잡은 카일은 입술을 깨물며 얼
굴을 젖는다.
그 얼굴에 서린 절박함에 잠시 몸을 움찔한 라헨이지만, 이 힘을 사용함으로써 라
프헨의 몸에 얼마나 많은 피해가 오는 지를 잘 알기에 입술을 깨물며 잡힌 손목에
힘을 준다.
"힘을 사용하면 그에게 어떤 현상이 되돌아 오는지 잘 알고있다-
하지만, 하지만 이번만 도와준다면- 있는 힘을 다해 너희들을 도와주겠어."
"............"
"에스는 너희들의 동료이기도 하니, 부디 그의 치료를 중간에 말리진 말아라."
치료는 일반적으로 같은 사람에게 받는 것이 좋다.
그래야만 처음에 흡수된 마력이 나중에 흡수되는 마력을 거부하지 않고 잘 융해되
는 것이다. 만약에 서로 다른 마력으로 상처를 치료를 받아도 상처는 다 낳지만, 시
술을 받은 자의 몸의 기는 비틀어져 나중에 시간이 흐르면 여러가지 합병증을 앓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라헨의 손을 잡은 것이다.
이 남자의 성격으론 분명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며 이 라프헨의 몸을 잡아 끌어 더
이상 힘을 사용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라프헨에게 돌아오는 것과 에스의 미래에 올 병은 비교할수 없는 차이가 있기는 했
지만, 지금은 그의 상처의 쾌유가 우선이다.
단단하지만, 그 이면에 흔들리는 카일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라헨은 입술을 깨물며
한창 치료를 하고 있는 라프헨을 내려다 보았다.
저 기세론 자신이 말려도 끝까지 치유를 할 거다.
그 모습에 어둡게 안색을 굳힌 라헨은 한걸음 물러나 멀리 유헌을 향해 걸어갔다.
"일단 이곳은 너에게 맡길테니- 라프헨을 부탁한다."
"...................고맙다."
"천만에, 나중에 톡톡히 댓가를 받을 테다."
저 카일이라는 자가 없었다면 눈앞에 펼쳐진 붉은 장막을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갑자기 생겨난 막에 당황하고 있던 찰나 저 카일이라는 사내가 나타난 이 안에 칸
이나 유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했다.
자신들을 끌여 들이려는 속셈으로 볼수도 있었지만, 바라보는 그 단단한 눈동자를
믿어 보기로 했다.
이런저런 시술을 펼치던 그가 사람이 지나갈 만한 구멍을 붉은 장막에 그었고, 그
사이로 들어온 자신은 귓가를 두들이는 검명에 놀라 이렇듯 달려왔다.
그리고 큰상처를 입고 쓰러진 에스와 황제와 검을 겨루는 유헌을 발견했을 때의 그
놀라움이란- 일단 에스는 라프헨에게 맡겼으니, 유헌은 자신이 맡으면 된다.
유헌의 입가와 옷 전체에 묻어있는 액체에 미간을 찌뿌린 라헨은 가슴깊이 숨을 몰
아 쉬었다.
"유헌- 방해다! ! ! 저리 비켜-ㅅ! ! ! ! !"
" ? ! "
귓청일 떨어질 것같은 노성에 놀란 유헌이 반사적으로 얼굴을 돌린다.
그런 유헌의 사이로 품안의 단검을 날린 라헨은 몸을 피하는 황제에게 달려 들었
다.
창-! !
"이 몸이 상대해 드리지- 중앙의 황제여!!"
"......큿-!"
소문만 들었지, 정말로 이자키엘 황제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던 라헨은 그의 얼굴이
칸과 똑같다는 것에 내심 놀란다. 쌍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듣는 것과 실제
로 보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중간에 끼어든 자신이 불쾌한 듯 미간을 찌뿌리는 것이라던지, 휘두르는 검을 막는
각도와 힘까지도 완전 칸과 판박이다.
그렇다면 얼마간 버틸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쉬는 시간 틈틈이 칸의 대련상대가 되어 주기도 했으니.
입가를 비틀며 흉악하게 웃는 라헨의 얼굴에 이자크의 얼굴이 찌그러 진다. 이렇게
험상궃게 생긴 사내는 처음인데다, 중간에 대결에 끼어드는 녀석도 처음이다.
이를 악문 황제는 검은 들지 않은 다른손안에 마력을 모았다.
저 유헌이라는 소년에게 이 힘을 써서는 안되지만, 이 곰같은 사내는 괜찮다.
"사라져라- 무례한 녀석! !"
"헹-"
그것을 노렸다.
코앞으로 날라오는 하얀 빛무리를 피해 허리를 뒤로 넘긴 라헨은 이자크가 생각만
한다면 그대로 검을 내리쳐 죽일수 있을만큼 헛점 투성이었다.
허리를 뒤로 숙인 라헨의 모습에 이자크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런 황제의 반응에 이미 늦엇다면 입가를 비틀어 올린 라헨은 자신의 뒤에 어정쩡
한 폼으로 서있는 곧 죽을 것 같은 유헌을 향해 소리쳤다.
"당장에 이용해 먹어라-!"
"라헨..!"
노웬에게 들어 유헌의 힘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확실한건지 어떤지 모른다.
하지만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거면 차라리 뭔가 모험을 하고 죽는 편이 훨씬 났
다. 분노의 비명을 지르며 자신에게 검을 날리는 황제의 모습에 뒤로 꺽은 몸으로
바닥에 손을 디딘 라헨은 손목에 강한 힘을 주어 자신의 몸을 위로 튕겨 올렸다.
성인 어른의 키만큼 튀어오른 라헨의 사이로 황제의 검이 맥없이 지나친다.
유헌에게 날라가는 자신의 마력에 당황해 잠시 움찔하고, 라헨의 그동안 몸으로 쌓
인 실력 덕에 그라헨는 이자크의 검에 베이지 않을수 있었던 거다.
하지만 당장은 안심할수 없는 라헨은 다시 자세를 바로해 검을 수직으로 세웠다.
그와 동시에 둔중하게 울리는 통증에 자신이 상대하는 이 황제라는 자가 정말로 강
하다는 것을 느낀다.
"네놈따위가 내 일을 방해하는 것이냐-!! 천한 놈이!!
"칸과 닮은 얼굴로 그런 정떨어지는 소리는 하지 마라- 황제!"
이를 가는 황제의 서슬퍼런 얼굴이 정말로 칸같아 라헨은 진심으로 검을 휘두를수
가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렇지 않은 모양인지 자신을 향해 있는 험껏 검을 휘드
르니 상대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한동안 검을 휘두르며 이자크의 검을 막던 라헨은 유헌이 어찌되었는 지가 슬슬 걱
정되기 시작했다.
남의 마력을 이용해 자신이 것으로 하는 사람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다.
그 융텐이라는 용의 농간에 넘어가 애꿋은 사람을 죽인것은 아닌가.
안색을 달리한 라헨은 잠시 틈을 보이게 된다.
"죽어라-!"
험한 말을 내뱉으며 검을 휘두르는 그 모습에 그가 정말로 화났군-라는 한가한 생
각을 하던 그도 바로 눈앞에 휘둘러 지는 예기에 숨을 들이킬수 밖에 없었다.
여러번의 싸움을 해봤지만, 이렇게 명확하게 죽음에 대한 예감이 들기는 처음.
설마하니 라프헨을 두고 자신이 먼저 죽는 것인가. 그 울보는 내가 없으면 안되는
데- 이러저런 생각을 하던 라헨은 검이 머리를 스치기 직전 앞을 가로막는 검은 잔
상에 눈을 부릎떴다.
"유헌! !"
".........! !!"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는 금빛의 눈동자에 유헌은 눈을 가늘게 떴다.
칸과 닮은 얼굴이 자신에게 살기를 비추는 것은 상당히 보기싫은 것이다. 계속해서
그의 얼굴을 보다보니 정말로 칸이 자신을 죽이려고 검을 휘두르는 것 같다.
더이상 이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
"괜찮은 거냐- 너!"
"뒤로 물러나 있어요."
그답지 않은 서늘한 음성에 라헨은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났다.
등뒤에서 멀어지는 라헨의 기에 시야를 좁힌 유헌은 이자크를 노려 보았다.
저자의 마력 덕분에 내상은 나름대로 치유된 것 같았지만, 아직 여기저기가 아프
다. 이런 몸상태로 오랜 시간동안 검을 겨룰수는 없으니 단숨에 끝내야 한다.
손안에 들린 검을 강하게 잡은 유헌은 이자크에게 한걸음 다가선다.
그런 유헌의 모습에 입술을 깨문 이자크는 몸의 힘을 빼고 무척이나 편안한 자세를
취해 보였다. 루드빌이 자신에게 맞추어 짜놓은 결계안인데도 저 인간들을 별 불편
함없이 움직이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인간의 몸에 맞춰 놓았으니 당연한 건가-
유헌의 능력에 맞추어 마력이 아닌 주술로 대충 묶어둔 이 공간에 차라리 메테오를
걸어 둘것을 그랬다.
멀리서 끌어 들인 운석이 녀석의 머리위로 떨어진다면 아무리 날고 기는 자라 할지
라도 순순히 피하지 못했을 것인데.
"마지막이다."
"..........이쪽이야 말로."
끊어버리겠다.
칸크빌레를 잡아끄는 눈앞의 존재를 완전히 치워버릴 거다.
유헌은 다시금 이자크에게 달려 들었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엄청난 양의 빛무리가 황제와 유헌의 몸을 감싼다.
콰-앙!!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카일!!"
난대없이 대치중인 유헌과 이자크에게 폭탄을 던진 카일의 모습에 에스는 기겁하
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런 그의 몸을 위에서 누른 카일은 안정을 취하라고 하지
만, 눈앞에서 그런 일을 목격했는데, 어떻게 안정을 취하란 말인가-
"이곳에서 싸움을 했다간 네가 위험하다고. 아까의 그것은 약간의 폭발을 일으키는
것이니 두 사람은 무사할 거다. 사람에게 피해를 입힐만한 것이 아니야."
"아닌 것이 저렇게 건물을 날라가게 한다는 거냐-?!!"
"그건...어쩔수 없잖아. 저들이 싸우다 너에게 뭔가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렇다고, 이런 짓을 하다니, 너는 나만 무사하면 뭘해도 괜찮은 거냐!"
"그래."
에스의 호통에 유헌들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던 카일은 단호하게 대답한다.
두 사람이 있던 곳은 형편없이 부숴져 사람은 형체는 커녕 건물의 모습마저도 확인
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게다가 둘은 이쪽이 아닌 반대편으로 넘어간 모양이니, 그런 그들의 발견한 자들이
무엇을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더 불안하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누워있던 에스는 자
신에게 되 돌아오는 푸른빛의 눈동자에 숨을 들이켰다.
저토록 냉정한 눈동자는 익히 본적이 없다.
"네가 무사하다면 무슨 짓을 해도 좋아. 그래, 그럴거다."
"............미친...."
"처음부터 난 미친놈이였어. 너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나-"
라프헨의 치료로 많이 좋아진 듯한 에스의 상태에 카일은 기분좋은 미소를 짓는다.
그 얼굴에 질린 표정을 지은 에스는 뭐라도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 뿐이다.
그것은 두사람에 낀 라프헨도 마찬가지로- 단지 치료에 열중할 뿐이다.
"에스 너도 엄청나게 질긴 놈에게 물렸구나."
한가한 소리를 내뱉은 라헨은 자신의 검을 들어 목을 몇번 두들였다.
방금의 일은 확실히 카일이 한 행동중에서 가장 어이없는 것이기는 했다.
유헌은 그렇다 치고라도 중앙국과 우호관계에 있어야 하는 주제에 황제에게 폭탄
을 던지더니- 그 두사람을 어찌할까하고 생각하던 라헨은 한동안 고민 후 그쪽으
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만히 둬도 알아서 싸울만큼 괴물 같은 사람들이지만, 한쪽은 칸이 무척이나 아끼
는 존재인데다 다른 한쪽은 그의 동생이다.
둘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검을 휘두르던 둘이지만, 둘다 죽어서도 상처를 입어서도
안된다. 그랬다간 칸이 슬퍼할테니 말이다.
느긋한 걸음으로 뻥 뚫은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기던 라헨은 생각보다 큰 구멍이 생
긴 것에 카일이 던지 폭탄이 예상외로 강한 것이라고 알게된다.
그런 것을 인간에게 던진 것인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은 라헨은 처음의 느긋함을
버리고 있는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이 주변을 둘러싸던 붉은 장막은 분명 그 적룡의 짓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안에 있다는 말과 같다.
쓰러진 자들중 그녀가 이자크만 발견하면 상관없지만, 그 미친용이 유헌을 발견하
곤 잡아 죽이려 덤벼들면 상당히 피곤해진다.
덜컹! !
"윽!"
쿠당탕탕!! !
급하게 가느라 부숴진 돌맹이에 발이 걸려 넘어진 라헨은 부딫힌 허리를 문지르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저 앞이 나가는 길인데 이런데서 넘어지다니- 보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 천
만다행이다. 얼굴을 붉히며 걸음을 빨리한 라헨은 출구인 듯한 곳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다 유헌의 뒷모습을 발견하곤 저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있는 칸과 그의 품에 안긴 이자크의 모습에 걸음을 멈춘다.
"....유-"
하지만 반사적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라헨은 유헌의 뒤로 나타나는 적발을 지
닌 여성의 모습에 안색을 달리했다.
"유헌! ! !"
칸은 그의 뒤로 나타난 루드빌을 막을수가 없었다.
이대로 그녀의 검에 쓰러질 유헌의 모습에 머리속에 그려지고 하얀 얼굴이 자신의
비명과 더불어 안색을 달리하며 고개를 돌린다.
안돼, 보지마.
나에게서 얼굴을 돌리지마-
당황한 칸이 이자크의 몸에 손을 놓고 유헌에게 손을 뻗지만, 닿기도 전에 루들빌
의 검이 그의 몸을 벨것이다.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절망감에 칸은 손끝에서 저
릿하게 올라오는 통증에 짐승같은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