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헌은 어디에 있는 거야."
"글쎄요. 에스님과 함께 나가시는 것 같던데."
에스와 함께라면 그다지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유헌의 모습에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불안하다.
턱에 손을 집고 거실에서 초조하게 걸음을 옮기던 칸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화색을 띄며 그리로 시선을 던졌다.
에스와 유헌이 산책을 마치고 들어오는 건가-하고 생각하던 칸은 그러나 자신이
기다리던 사람들이 아닌 비센이라는 남자의 얼굴이 들어나자 미간을 찌뿌렸다.
그런 칸의 얼굴을 알아챈 비센의 안색이 약간 어두워 지나 싶더니, 입술을 깨물고
칸에게 접근한다.
"잠시 시간을 주실수 있을까요."
"없어."
"............에?"
"지금 난 유헌은 찾으러 가야 한단 말이다.
나중에 한가할때 부를테니깐, 이만 실례하지."
중요하게 꼭 집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었기에 어렵사리 칸을 찾은 거지만, 이렇게
축객령을 당하자 할말이 없어진다. 두눈을 꿈뻑뜨며 자신을 바라보는 비센에게 이
를 들어내며 웃어보인 칸은 잽싸게 그를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한동안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옮기던 칸은 뒤에서 아무도 쫓아올 기색이 보이질 않
자 그제서야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분명 전에 무희단의 칸이 자신인가 아닌가에 대해 물으려는 거겠지.
녀석이 카일과 왔을때, 놈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유헌과 실컷 떠들어 댔으니- 카
일이 놈을 데리고 금방 사라지긴 했지만, 분명 들었을 거다.
그러니 저 놈이 이렇게 와있는 거지.
"만나선 안되겠는 걸.."
놈하고 만나서 이것저것 추궁을 당하면 할말이 없다.
이 곳을 벗어날때 까진 비센과 얼굴을 마주하지 말자고 생각한 칸은 한숨을 쉬며
걸음을 옮겼다.
일단 에스를 본 사람이 있는지에 대해 물어봐야 겠다.
유헌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적으니 에스에 대해 물으면 어드로 갔는지 단서라도 잡을
수 있겠지.
칸이 궁시렁대며서 사라진 찰나 혼자 남겨진 비센은 눈을 깜박이며 칸이 사라진 방
향을 바라 보았다. 모습을 다르지만, 저 행동들을 보면 확신이 간다.
저 자가 그 무희단의 소녀였다고- 어찌해서 몸이 저렇게 커진건지 알수는 없지만,
분명 그가 그이다.
그렇다는 것은...
"더이상 망설이고 있을수가 없다."
일단 눈에 들어온 이상 잡아야 한다.
두번다시 자신의 손에서 빠져 나갈수 없도록.
입술을 깨문 비센은 테이블에 앉아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노웬에게 인사를 건
내며 서둘러 방에서 나왔다.
벌써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습이 보이질 않다.
한시라도 빨리 칸과 만나 할말이 있었던 비센은 서둘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조용히 지나가는 날이 없군요."
사라지는 칸과 비센의 모습을 모두 보고 있었던 젤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그런 젤의 말에 쓴웃음을 지은 노웬은 바닥에 내려진 서류에 시선을 주었다.
한동안 이것저것 뒤적거리던 노웬은 미간을 찌뿌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상하게도 무엇을 해도 손에 잡히질 않는다. 알수는 없지만, 뭔가가 일어 날지도
모른다고 속에서 경보가 울린다.
얼굴을 구기며 가만히 앉아있는 노웬의 모습에 젤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젤, 사람들에게 하던 일을 멈추고 진영을 옮기라고 하십시오."
"네?"
"뭔가 느낌이 이상해- 분명 오늘 일일 벌어질것 같습니다."
"오늘은 각국의 귀빈들이 모여있는 날입니다.
그런 날에 아무리 황제라 한들 일을 벌일리가."
애써 부정하고 싶어하는 듯한 젤의 말에 노웬은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히 말한다.
"그런 상식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죠."
노웬의 말에 그제서야 젤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의 모습에 노웬은 테이블에 널려진 서류들을 챙기
기 시작했다.
일단 행동에 옮기자-라고 생각하니 더 초조한 느낌이 든다.
입술을 깨문 그는 근처에 서있던 사내에게 칸과 에스를 찾아오라고 지시했다.
탁.
"아, 융텐."
"뭐냐- 뭐가 그렇게 바빠."
"유헌 못 봤어?"
창가에 앉아 다리를 까닥이는 융텐에게 다가간 칸은 그의 안색이 영 안좋자 입을
다물었다.
요즘들어 이 건방진 용의 기가 많이 죽은 것 같으니 이상한 노릇이다.
전 같으면 은근히 반말을 하는 자신에게 뭐라고 할만도 하건만, 요새는 그냥 당하
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게 편하고 재미있긴 하지만,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계속
해서 이런 모습이니 조금 걱정이라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유헌이라.. 그러는 너는 유크렌을 봤냐?"
"그용을 내가 알게 뭐야."
".......그럼 나도 알게 뭐냐다. 인간아."
유헌이외의 사람을 내가 알아서 뭐하는 듯한 칸의 태도에 융텐은 기가막힌 듯 헛웃
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들려진 작은 생물에 시선을 주었다.
털로 뒤덥인 아이의 손바닥만한 이 존재는 이래뵈도 꽤나 좋은 촉감고 향기로 일부
귀족들에게 사랑을 받는 짐승이었다. 하지만 사는 곳이 한정적이고 그 수도 열손가
락에 꼽을 정도여서 구하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게다가 감도 좋아서 적이 나타나면 지하로 들어가 한발자욱도 움지기이지 않으니-
이것을 잡으려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잡은 것을 유크렌에게 보여주기위해 신나라 달려왔던 융텐은 그러나 자신
을 기다리고 있을 유크렌의 모습이 보이질 않자 사람이 없는 곳으로 와 푸념을 하
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봐도 놀리려는 의도라고 밖엔...."
"뭐? 무슨 말이야."
"매번 시키고 나선 모습을 숨기니.. 도대체 뭐냐 말여~ 유크렌-"
전에 과일을 먹고 싶다고 해서 이곳과 정 반대인 곳으로 달려가 붉은 과일을 따오
고, 손수만든 음식이 먹고 싶다해서 그렇게 했는데 모두 유크렌의 입엔 들어가지도
못했다.
의기양양해선 짠하고 가져오면 유크렌은 이미 잠을 자고 있거나 다른 곳에 가 있었
던 거다. 기를 알아채고 그리고 가면, 좋은 시간을 방해한다고 윽박지르고- 그렇게
해서 버린 음식들은 한 바구니는 될거다.
게다가 드워프를 시켜 세공한 보석들은 모두 방구석에 쳐박혀 있고- 하고 싶다고
해서 가져왔는데 그렇게 내팽게 치다니.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서러움에 코를 훌쩍
이는 융텐의 모습에 칸이 묘한 표정을 짓는다.
겉은 아직 아이의 모습이니 조금 귀엽긴 하지만, 이 녀석이 그 변태흑룡이라 생각
하니 좀 징그럽다.
이런 놈을 잡고 유헌에 대해 물어봤자 나오는게 없을 거라고 판단하고 걸음을 옮기
려던 칸은 그러나 저 멀리 자신을 발견하고 빠르게 달려오는 사내의 모습에 기겁했
다.
"칸양! ! 드리고 싶은게 있습니다."
"누...누가 칸양이라는 거야! 난 칸크라고! !"
두눈에 불을 켜고 자신에게 달려오는 비센의 모습은 공포였다.
치를 떤 칸은 비센이 빠른 속도로 자신에게 달려들자 몸을 돌려 융텐이 앉아있던
창에서 그대로 뛰어 내렸다.
칸에게 밀쳐진 융텐은 바닥을 굴렀지만, 그런것에 신경을 안쓰고 연신 '유크렌- 왜
그러는 거야-'라며 징징거릴 뿐이다.
칸이 창을 통해 뛰어내리는 모습에 안색을 달리하고 창으로 달려든 비센은 저 아래
숲으로 들어가는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내말에 저토록 부정하거나 도망가는 것은... 분명 그가 그녀라는 뜻이지."
주먹을 쥔 비센의 눈이 음산하게 빛난다.
이자크는 자신을 보며 수근거리는 사람들을 느꼈지만,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자신은 중앙국의 황제, 어디를 가나 화제의 중심이고 시선을 한몸에 받는 자인 것
이다. 저런 것들에 일일이 반응하단 몸이 베겨나지 못한다.
한모금 머금은 물잔을 내려놓고 옆에 앉은 루드빌을 살펴본 이자크는 눈을 감고 가
만히 있는 그녀의 모습에 미간을 찌뿌렸다.
몸은 이곳에 두고 정신은 따로 나간 상태다.
도대체 누구에게 가 있는건지는 모르겠지만, 한마디도 없이 사라지다니. 곤란하다.
미간을 찌뿌리는 황제의 모습을 살피던 요크발은 한숨을 쉬며 얼굴을 돌렸다.
모두가 앉고나니 이번 행사의 주역들이 하나 둘씩 나타난다.
원래는 저들이 나타나고 나서야 착석해야 하는데, 이번엔 황제가 직접 모습을 들어
내서 주객이 전도되어 버린 격이다. 주빈보다 손님인 황제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더
몰리는 것을 눈치챈 뮤트롱 왕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중앙국의 황제를 상대로 무엇을 할수는 없는 바 헛기침을
하고, 잔을 들어보이며 내객들에게 이곳에 참석해 준것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바쁜 와중에도 국의 경사스런 날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더군다나 오늘은 무척이나 귀하신 분까지 와 계시니 더할나위 없는 기쁨입니다."
왕의 말에 순식간에 몰리는 시선은 이자크는 잔을 들어 보이는 것으로 답례를 한
다.
그런 황제의 모습에 황송해 하며 마찬가지로 잔을 들어보이던 귀족들은 무척이나
우호적인 미소를 지었다.
중앙국이라 하면 인간들의 성역이나 마찬가지인 곳이다.
천년의 세월동안 단 한번도 왕명이 바뀐적이 없는 유일한 나라에 여타의 귀족들은
약간의 환상을 지니고 있었다. 더군다나 대륙을 소란스럽게 하는 주역은 대부분 중
앙이기에- 어느 나리에 살던지, 중앙은 한번쯤 생각해 보고 격어보는 없어서는 안
될 하나의 관문처럼 인식되어 있다.
더군다가 지금의 황제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다.
중앙게 대한 호감이 좀더 올라가는 것을 느끼며 내객들은 얼굴을 붉혔다.
실제적으로 중앙의 황제와 같은 자리에 참석한 것만으로도 여타의 사람들에게 자
랑할 만한 일인 것이다.
"오늘 저의 장녀인 이스티나와 본국 후작의 둘째인 바사노가 부부의 연을 맺게 되
었습니다. 식은 있다 해가 질무렵에 할 예정이지만, 여기에 게신 분들께서 먼저 축
하를 해주시면 감사하겠군요."
우호적인 분위기에 왕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손짓을 하자 도열해 있던 시종들이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투명한 액체
가 들어있는 잔을 내려 놓았다.
식사를 하기전에 입가심의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지만, 이번엔 저녁에 부부가 될 두
사람을 축하하는 의미로 마시는 약간의 알콜이 가미된 음료였다.
자신의 옆자리에 놓인 잔을 드는 귀족들을 눈으로 확인한 왕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
도 잔을 들어 보인다.
"그럼, 만찬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왕의 음성이 마치기가 무섭게 귀족들이 축하의 말은 건내며 잔에 입을 대기 시작한
다. 마찬가지로 잔의 액체를 넘기려던 요크발은 옆에 앉은 황제가 자신의 앞에 놓
은 잔을 가만히 바라볼 뿐 손을 대려하지 않자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맞은 편의 귀족을 바라보는 황제의 시선은 서늘하기 그지없다.
귀족의 입에 잔이 대어지고 목울대가 움직이자 그 금빛의 눈동자가 가늘게 휘어진
다. 그리고 그것을 목격한 요크발은 온몸에 돋는 소름에 안색을 굳히며, 옆에 왼편
에 앉은 사이키의 손을 잡는다.
막 잔을 들려던 사이키는 요크발의 행동에 가만히 시선을 던진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잠깐...뭔가가..."
사이키의 말에 여전히 굳은 안색으로 입을 열려던 요크발은 맞은편 자리에서 튀어
나오는 비명에 그리로 시선을 던졌다.
의자와 음식들이 올라간 테이블이 요란하게 뒤집어 지고 영문을 모르던 사람들도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사람들의 모습에 비명을 지른다.
안색을 달리한 요크발은 반사적으로 이자크를 바라보았고, 자신을 비웃듯 눈을 가
늘게 뜬채인 황제의 모습에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자신이 모르는 무슨 일을 벌이는 건가.
"요크발님..! !"
사이키답지 않은 다급한 음성에 요크발은 정신이 없었다.
요크발이 저도 모르게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려하자 사이크는 그의 팔을 잡
으며 안전한 곳으로 끈다.
정신없이 눈동자를 굴리던 요크발이 한 지점에서 정지한다.
그 가운데에 입가에 피를 흘린채 쓰러진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그것은 하나에서
점점 여러명으로 늘어난다.
자객의 침입이라고 하기엔, 사태가 너무 급하게 발생되고 파장또한 조용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변고인가하고 생각해 보던 그는 문득 앞에 놓여진 잔을 바라 보
았다. 그리고 다른 자들의 위치를 살펴 보았다.
지금 이 난리통에 비명을 지르지만, 무사한 것같은 모습의 사람들의 앞의 잔은 비
워지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혼란을 야기시키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지."
"..... 당신은..."
"그렇지 않은가. 요크발."
무척이나 유쾌한 듯이 목울대를 울리며 소리내어 웃던 황제는 그제서야 앞에 놓여
진 잔을 들었다.
멍하니 서있는 요크발에게 잔을 든채로 손을 들어보인 이자크는 그가 만류하기도
전에 단숨에 잔안의 액체를 들이킨다.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요크발이 손을 뻗었지만, 입안의 액체를 음미하듯이 혀로 굴
려보인 이자크는 목울대를 울리며 입안에 머금은 것들을 단번에 삼켰다.
"우리들은 이런것을 마셔도 그닥 영향을 받지 않아."
"..........황제.. 이게 당신이 바란 겁니까."
"필요하잖아. 소란을 덮어줄 다른 일이-"
완전히 감정이 죽은 붉은 눈동자가 허망의 빛을 띄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요크발을 바라보던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익.
그가 일어나자 소란스러웠던 내부가 단숨에 조용해 진다.
간간히 들려오는 비명소리나 울음소리, 그리고 의사를 찾는 소리를 들으며 주위를
둘러보던 이자크는 이런 소동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바라보는 뮤트롱의 왕에
게 시선을 주었다.
미안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그대가 책임져줘야 겠다.
"뮤트롱의 왕."
"..화..황제.."
영문을 모른다는 그 얼굴에 동정심이 인다.
그도 그럴것이 그는 정말로 이번일에 대해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지.
이 일들은 모두 자신이 벌인 것이지만 그 책임을 바로 네가 물어야 한다.
그래야만 지금부터 자신이 하는 모든 일들이 정당화되기 때문에-
"결혼식따위- 명분에 불과한 것이지 않은가."
"에..? 무슨.."
"주위를 둘러보는게 어떻겠나.
이 모든것들을 과연 그대가 모른다고 말할수 있는 건가."
이자크가 무슨말을 하는지 그제서야 알아챈 듯 뮤트롱의 왕에 얼굴이 단번에 굳는
다. 그런 왕의 얼굴에 바라보던 황제는 요크발 앞에 놓은 잔을 들어 보였다.
자신의 잔은 이미 마셔 버렸으니 비워지지 않은 새잔이 필요하다.
"이 잔안에 든 액체를 먹은 자들이 모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왕이여- 이에 대한 해명을 어찌할 생각이지."
"그런.. 저는 정말로 모르는...! !"
"모른다고 이 자리에서 벌어진 일이 백지화 되는 것은 아니다."
서늘한 이자크의 음성에 홀에 모인 모든이들이 그에게로 시선을 던진다.
엉망으로 망쳐진 모습으로 멍하니 앉아있던 자들은 황제의 말이 진행됨에 따라 자
리에서 일어나 이를 갈며 뮤트롱의 왕을 올려다 보았다.
더러는 검에 손을 올리는 자들도 있고, 신경질 적으로 뮤트롱의 왕기를 찟는 자들
도 보인다. 갑작스럽게 돌변한 분위기에 뮤트롱의 기사들과 왕족들이 안색을 달리
하며 뒷걸음을 질을 친다.
"일에 대한 해명을 해라. 여기있는 모든 이들을 납득시키지 않으면 뮤트롱은 지금
부터 대륙의 공적이 되어 중앙의 검을 받을 것이니라."
잔을 든 손을 펼치자 떨어진 잔이 바삭에 부숴져 산산히 조각난다.
그것이 시작으로 홀이나 정원에 숨어있던 중앙국의 기사들이 검을 빼들며 홀으로
들어서며 황제의 주위를 둘러쌌다.
일련로 벌어진 일에 뮤트롱의 왕은 그제서야 일이 어찌된 것인지 알수 있었지만,
자신을 죽일듯이 노려보는 저 수많은 자들을 납득시키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이 모든 일들이 뮤트롱 내부의 짓이라는 듯이 이를 갈며 자신을 바라보는 저 수많
은 귀족들의 시선은 귀국후 당장이라도 보복조치를 가할 기세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나라는 물론이거니와 백성들은 살아 남을수가 없다.
홀안에 있는 사람들 중 잔에 담긴 액체를 마신 모든 자들이 죽은 것이다.
그중엔 어느 나라의 왕자가 있을수도, 후작이나 고위 관직의 인물들이 있었겠지.
한 나라의 결혼식에 허술한 자를 보낼 나라는 없다.
엄청난 피로를 느낀 뮤트롱의 왕은 뒷목을 손으로 잡으며 뒷걸음 질을 쳤다.
자신을 받쳐주는, 곧 공주의 부마가 될 자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있다. 오늘이 일생
중 가장 최고의 날이 되어야 할터인데, 단숨에 지옥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죽을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뮤트롱의 왕은 기사들에게 둘러쌓여 가
만히 서있는 이자크에게 손가락 질을 했다.
"이 모든것은 저 자의 음모다-! !
이런 날에 독을 든 잔을 돌려, 귀족들에게 주는 멍청이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 !
자신에게 죄가 뒤집어 쓀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런 일을 저지르는 멍청이가 이 세상
천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
"바로 너같이 멍청이가 있기에 대륙은 수백년동안 평안을 찾지 못하고 있는 거다."
필사의 외침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려던 왕은 이자크의 냉소에 안면이 굳는 것
을 느낀다. 그의 말에 잠시 이성을 찾고 이상함을 느끼던 귀족들은 이자크가 입을
열자 숨을 죽이고 다시금 그를 주시한다.
그 눈동자에 서려있는 일방적인 믿음과 신뢰에 황제의 미소가 좀더 짙어진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중앙국에 대해 새겨진 환상은 저 정도인 것이다.
그것은 어리석을 정도로 달콤한 것이지.
"내가 왜 기사들을 이끌고 이곳에 왔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짓을 꾸밀것이라는 알고 온 것이다. 행사를 빌미로 수많은 귀족들을 모이게
해 한자리에 잡아둔 다음 각국에 문서를 보내 투항을 요구하려던 것이 아니였나.
본보기로 기사들을 배치에 경고를 주었건만 그것을 무시하고 일을 벌린 네놈-"
완전히 정적만은 감싼 공기중에 이자크의 서늘한 음성이 울린다.
"지금 이 자리에서 중앙국의 황제 이자키엘의 이름으로 처단하겠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자들의 입에서 터져나온 벼락같은 환호성에 요크발은 뒷걸음
질을 쳤다.
그런 요크발의 모습에 가만히 다가온 사이키가 그의 어깨에 손을 두른다.
너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냐-라고 묻는 듯한 요크발의 붉은 눈동자에 안타까
움을 느낀 사이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숨에 파랗게 안색이 죽은 요크발은
입술을 깨물며 사람들의 가운데 당당히 서있는 이자크에게 시선을 던졌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꾸 자신을 배제하고 일을 진행하는 건가.
황제는 진심으로 자신을 버릴 생각인 것이가.
그렇다면 자신의 누이와 돔은 어찌되는 건가.
황제의 해명을 바라는 요크발은 그에게 접근하려 손을 뻗었지만, 여기저기서 치고
달려오는 사람들에 휩쓸려 사이키와 함께 홀의 벽에 몸을 기댔다.
"죽어라-ㅅ! ! !"
"히-엑! !"
단숨에 역적으로 몰려 사색이 된 뮤트롱의 왕은 자신에게로 던져진 음식들과 그릇
을 뒤집어 써 금새 엉망으로 변한다.
그런 왕을 호위하려던 기사들은 이자크의 얼굴과 자신의 주군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민이 역력한 얼굴로 머뭇거린다. 그도 그럴것이 동은 중앙국의 분가인 곳, 모시
는 자는 뮤트롱의 왕이지만, 마음속에 모시는 자는 중앙국의 황제인 것이다.
그런 뮤트롱 소속의 기사들의 고민을 알아챈 것인지 중앙국 소속의 기사가 검을 들
어 올리며 입을 연다.
"중앙의 황제께선 마음이 넓으시다.
검을 돌리고 그분을 따르는 자에겐 처벌을 내리시진 않을 것이다."
가정법의 말에 어두운 꿍궁이 속이 느껴졌지만, 그 말을 들은 뮤트롱의 기사들은
하나 둘씩 검을 내렸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당황한 뮤트롱의 왕은 안색을 달리하며 반사적으로 자신의 사
위가 될 자에게 손을 뻗었지만, 냉정하게 내쳐진다.
"나..난.. 아무것도 모르는 일입니다! ! 모든 것은 당신이 저지른 죄입니다! !"
"네..네놈, 지금 날 배신하려는 거냐!!"
"....이-잇!"
안색을 달리하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왕을 세게 밀쳐낸 바사노는 손을 뻗는 사람들
의 손을 치워내며 연신 자신을 모르는 일이라고, 모든 것이 저 왕의 단독 행동이었
다고 변명하며 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분노와 선동에 휩싸인 자들은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않고 손에 잡히는 자
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한다. 수십의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폭행을 당하는 자들
을 바라보던 이자크는 미간을 찌뿌리며 곁에 서있는 기사에게 얼굴을 돌렸다.
"이일을 전해들은 쥐새끼들이 쳐들어 올것이다.
이안의 귀족들은 지정해 둔 곳으로 감금해 두고, 나머지는 지정된 자리로 돌아가
라."
"예. 황제께선 어디에 계실런지요."
"마음이 내키는 대로- 나에게 루드빌이 있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자크의 말에 잠시 걱정을 빛을 띄운 기사는 루드빌의 이름이 거론되자 그제서야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그의 앞에서 물러난다.
중앙의 수호자인 적룡이 저 황제 한몸을 지키지 못할리가 없다. 게다가 용뿐이 아
닌 중앙 최고의 기사인 요크발 대공과 참모인 사이키 경도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주시하는 기사들에게 수신호로 위치를 지정한 기사는 서둘러 걸음
을 옮겼다.
곁에서 떨어진 기사들의 모습에 그제서야 걸음을 옮긴 이자크는 이런 소동속에서
도 여전히 눈을 감고 앉아있는 루드빌에게로 다가 그 어깨에 손을 올려 두었다.
처음에 반응이 없던 그녀는 몇번 어깨를 두들이자 그제서야 눈을 뜬다.
하지만 뜨여진 그 눈동자에 참으로 많은 감정이 섞여있다.
지금껏 그런 복잡함이 담긴 눈을 본적이 없었던 황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
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걱정스런 이자크의 얼굴과 계획대로 일이 진행된 듯 여기저기 난장판인 홀을 바라
보던 루드빌은 붉은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
"이자키엘- 실은 돔이...."
"황제폐하-"
입을 열려던 적룡은 중간에 끼어드는 음성에 이을 다물수 밖에 없었다.
적룡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던 황제는 안색을 딱딱하게 굳힌채의 요크발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왜 그러냐는 듯이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런 그의 얼굴에 분한 표정을 지은 요크발은 그동안 가슴속에만 묻어 두었던 말들
을 하나씩 뱉어낸다.
"폐하 모든것을 알려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당신이 저에게 말을 하지않고 일을 벌이시는 것이 무척이나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조금이라도 저에게 언질을 주셨으면 좋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그
대의 일이 그 무엇에 상관하지 않고 또 그럴 자격도 없었다는 것은 아닙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약간이라도, 알려주셨으면 좀더 그대의 힘이 될
것입니다. 제가 못 미더우시다면, 당장 중앙국으로 돌아가라고 하시면 됩니다.
이런 이도저도 아닌 취급은 정말 버틸수가 없습니다! !"
붉어진 얼굴로 외치는 요크발의 얼굴을 이자크는 가만히 바라 보았다.
소리를 지르며 날뛰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을 둘러싼 공기만 정지한 듯 고요하기
그지없다.
너무나 억울해서 견딜수가 없어 금방이라도 이 자리에서 등을 돌리고 사라질 것 같
은 요크발의 모습에 이자크는 자조의 미소를 지었다.
결코 그를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를 제외하고 일을 꾸미는 짓따위 하지 않는다.
그는 이 세계에서 자신이 칸크빌레 다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니, 그래서 이번 일에
그가 끼어 들어선 안된다.
"들어가서 쉬는게 어떻겠나. 요크발."
느닺없는 황제의 말에 요크발은 얼굴을 이그려 뜨렸다.
이런식으로 대답을 회피하는 것인가라는 시선을 던지는 요크발의 앞에서 서서히
미소를 지운 이자크는 서늘하게 그지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혼란한 시대에 그것을 해결해줄 사람이 필요하지."
"그리고 당신이 그 역을 해주셔야 합니다."
".......윽?!"
이자크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요크발은 귓가에 나직히 울리는 사이키의
음성과 더불어 느껴지는 통증에 미간을 찌뿌렸다.
결코 흘려 들어선 안되는 말을 들었다.
그것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어야 하는데 정신이 점점 혼미해 진다.
뒤로 넘어가는 요크발의 몸을 안아든 사이키는 음울한 눈동자를 들어 황제를 올려
다 보았다. 이미 다른곳을 바라보고 있는 그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금빛의 눈
동자가 쉴새없이 흔들린다.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적룡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사이키는 한
숨을 쉬며 요크발의 몸을 안아들어 혼잡한 홀을 벗어났다.
"폐하- 다른 곳으로 가심이..."
"조만간 사이키가 돌아 올것이다. 그때까지 너희들은 저 귀족들을 치우면 된다."
"따로 방을 준비해 둘까요?"
"아니. 산책을 하고 싶군."
고개를 숙인 이자크는 자조의 미소를 띄었다.
바스락.
"왜 그런가요? 유헌."
"아, 에스 먼저 돌아가 보세요. 잠시 들려야 할 곳에 생각이 나서요."
주머니에 걸리는 귀걸이에 유헌은 불현듯 이것의 주인을 찾아 주어야 한다고 느꼈
다. 손을 뻗으며 가지말라는 에스의 손을 뿌리친 유헌은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 가
기 시작했다.
주머니에서 귀걸이를 꺼내보인 유헌은 반짝이는 그것이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느
꼈다.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잊어버린 사람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는가-
찾아주면 분명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절로 기분이 좋아진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홀 근처에서 달리던 걸음을 멈추었다.
안에서 수를 헤아릴수 없는 고위 귀족들이 있어 삼엄한 경비가 서있을 것이다.
그런 곳에서 함부로 뛰어다녀 괜히 눈에 띄일 필요는 없다.
에스에게 끌려오긴 했지만, 지나가면서 근처의 방에 대해 물어본 유헌은 귀족부인
들이 쉰다는 방쪽으로 다가가 주변을 살펴 보았다.
다행이도 아무도 없는 것 같다.
행사는 홀에서 이루어 지니 그쪽으로 많은 사람이 편중된 것인가-
잠시 든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던 유헌은 그러나 좋은 일이 좋은 거겠지라고 낙천
적으로 생각하며 창에 손을 대었다.
끼-익.
잠겨지지 않은 듯 쉽게 열리는 문에 유헌은 입가를 올렸다.
왠지 모르게 일이 잘 풀리는 것 같다.
열려진 창에 손을 대고 방안의 기척을 살펴보니 아무도 없는 듯 별다른 소리가 들
려오지 않는다.
"으-차."
작게 소리내며 창턱에 손을 대고 안으로 뛰어든 유헌은 몸에 묻은 나뭇잎을 털었
다. 무턱대고 들어오긴 했지만, 다른 사람이 있으면 어쩌나하고 생각하던 그는 막
상 아무도 없는 방안에 힘을 풀며 한숨을 쉬었다.
긴장해서 생각을 안하고 있었는데, 꽤나 빨리 달려와 숨이 찬다.
가슴을 두들이며 숨을 고르던 그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방안에 시선을 주었다.
동쪽은 돌아가는 상업들의 종이 많아 이만큼 성장한 나라의 왕국은 그만큼 돈이 많
다고 하던데, 과연 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려한 방이었다. 하지만 꾸민 사람의
허영이 들어 나듯이 무턱대고 꾸민 방엔 격조는 느껴지지 않는다.
한동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유헌은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를 깨닭고 손에 들린
귀걸이를 내려다 보았다.
다른 한짝이 더 있었다면 일행 중 여성에게 주었을 만도 하지만, 한짝만 있으니-
탁.
"...........으.."
" ? ! "
잘 보이는 곳에 귀걸이를 올려둔 유헌은 그와 동시에 들리는 신음소리에 안색을 굳
혔다.
이런 성안에 이런 장소라면 머리비고 허영이 가득찬 귀족들이 먼저 들어와 한창 일
을 벌이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남의 에스의 저택에서 그런 일이 있지 않은가-
뮤트롱은 여성들만이 쉬는 장소에 남자도 들어 올수 있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며 몸
을 돌리려던 유헌은 다시금 들려오는 신음성이 쾌락에 의한 것이 아닌, 뭔가 억누
른 듯한 소리처럼 들리자 걸음을 멈추었다.
쉬러 왔는데 너무 아파서 저러고 있는거면 큰일이다.
그러나 괜한 일이 끼어들어 일행들에게 폐가 되면 어쩌나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어
유헌은 한참고민 했다.
하지만 역시 아픈 사람은 가만히 둘수 없다는 생각에 그리고 걸음을 옮긴 그는 신
음성이 지속적으로 들리는 방으로 다가가 문을 반쯤 열어 보았다.
끼-익.
밖보다 어두운 내부는 잘 보이질 않는다.
미간을 찌뿌린 유헌은 완전히 방으로 들어서서 침대에 불록이 튀어나와 있는 사람
에게 접근했다. 어디 아픈 건가요하고 물으려 그에게 고개를 숙인 유헌은 상대방의
붉은 머리카락에 숨을 죽였다.
마침 다시금 신음성을 흘린 자가 몸을 뒤틀며 유헌에게 얼굴을 보이는 자세가 되자
유헌은 숨을 들이키며 얼굴을 들었다.
침대위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사내는 분명 돔이다.
어째서 이런 곳에 이 녀석이 있는건가하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그의 몸을 둘러싸고
있는 익숙한 기운에 미간을 찌뿌린 유헌은 손을 들어 돔의 이마에 올렸다.
파-직.
"읏?! ! ......따가워.."
이마에 손을 대자마자 파직하고 울리는 붉은 빛의 전정기에 손을 떼낸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파장은 분명 그 루드빌이라는 용의 것으로, 이 돔이라는
녀석의 몸에 뭔가 술수를 벌인 모양이다.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풀어 버린듯 하니 눈치채고 오는 건 아닐까 한
다.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유헌은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뜨는 돔의 모
습에 그리로 허리를 숙인다.
마력에 눌려진 정신이 깨어나는 것에 통증을 느끼는지 미간을 찌뿌리며 이를 악무
는 모습에 걱정이 된 유헌은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손을 올려 두었다.
조금 편안하게 하고 싶었기에 그의 이마를 가볍게 두들이는 유헌의 행동에 돔은 점
점 의식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괜찮은 거야?"
".............너는."
먼저 눈에 들어오는 유헌의 모습에 돔은 숨을 삼켰다.
자신의 몸을 억누르던 루드빌의 기가 사라졌다 싶었는데, 설마하니 눈앞의 이 녀석
이 도와준 건가. 그런 정도의 마력을 느껴지지 않은 녀석이었는데..
도와주긴 했지만,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는 돔의 모습에 유헌은 기분이 상했다.
입술을 비죽히 내밀며 손을 치운 그는 침대가에서 두걸음 물러나 팔장을 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완전히 쾌유되지 않은 돔의 곁을 떠나지 않고 옆에 있어주는
것이 그 다웠다.
한동안 그렇게 누워있던 돔은 얼굴을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도대체 이런 곳에서 뭐하는 거야. 여긴 여성들의 휴게소같은 곳이라고 들었다고."
".......기사의 안내로 들어와 있었던 것 뿐이다.
그런 곳이라면 오지도 않고, 네 녀석도 와서는 안되는 것은 아닌가."
"말을 가려서 하는게 어떨까. 괜히 도와줬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들고 있거든."
유헌의 말에 돔은 코웃음을 쳤다.
누가 도와달라고 했냐고 묻는 듯한 그 모습에 유헌은 정말로 이 녀석을 깨운 것이
후회스러웠다.
걱정하는 다른 일행들을 위해서라도 귀걸이를 내려놓고 그냥 나오는 것인데-
"........머리가 아파."
이마에 손을 올린 돔은 끌어올린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칸크빌레가 아닌 이자키엘의 아들이었냐고 묻자 그 오만의 대명사인 용의 얼굴이
단숨에 굳었다. 그것은 돔에게 묘한 쾌감을 느끼게 해서 한걸음 적룡에게 다가선
그는 미소를 지으며 어서 대답하라고 재촉했다.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던 그는 그러나, 흔들리던 붉은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던 적
룡이 어떻게 알았냐고 되물었을 때 바닥에 내려앉는 감각을 느끼며 돔은 얼굴을 이
그러 뜨렸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정리하고, 묻는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빈정거리던 자신을
한동안 바라보던 루드빌은 입술을 앙다물더니 손바닥을 뻗어 자신을 이렇게 만들
었다.
그 자리에서 쓰러 졌다면 분명 바닥이었을 텐데, 침대위에 누워 있다니.
나름대로 신경써준다는 건가.
쓴웃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돔의 모습에 유헌은 찡그린 얼굴을 폈다.
쓰러진 몸인데 금방 일어나는 것은 몸에 좋지 않다.
"좀더 누워있어. 몸 상태가 별로 안 좋은것 같은데 말야."
"상관없어.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으니-"
"..........도와주지."
뻗는 손을 쳐내기 전에 돔의 어깨를 지지한 유헌은 다리에 힘을 주며 그의 몸을 일
으켰다. 그런 유헌의 행동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던 돔은 이내 얼굴을 풀며 그의
몸에 체중을 기댔다.
갑자기 느껴지는 무게에 잠시 다리를 꺽인 유헌은 귓가에 울리는 '거봐라- 너에겐
무리다.'라는 의미가 담긴 비웃음에 입술을 깨물며 중심을 잡았다.
오기로 버티는 유헌이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 돔은 반은 자포자기인 심정으로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댄채 있었던 방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돌아다녀도 괜찮은 거야?"
"이래뵈도 얼굴은 꽤나 알려져서 괜찮을 거다."
"........흐-음."
뭔가 대단하다는 느낌이 든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유헌은 귓가에 울리는 묘한 술렁거림에 미간을 찌뿌리며 걸
음을 멈춘다. 그런 유헌의 행동에 기대던 몸을 빼낸 돔이 왜 그러냐는 듯한 시선으
로 그를 내려다 보았다.
"뭔가.. 묘한 기분이 드는데...."
"무슨 소리는 하는거냐.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지 않는다면 위험한 것은 그쪽이라고."
"하지만 경비도 없고......아니, 괜찮은가."
묘한 두근거림이 온몸에 퍼진다.
하지만 돔의 말대로 이곳에 오래있는 것은 위험하다.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유헌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무시하려 해도 등을 축축히 젖어가는 식은땀에
유헌에게 좀더 강한 불안을 느끼게 한다.
뭔지 모르지만, 공기가 술렁거린다.
지금까지 이런 기분을 느끼고도 좋은 일이 있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지지한 유헌의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가는 것을 느끼며 돔은 자신이 그렇게나 무거
운 걸까하고 생각하 보았지만, 이내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체중도 이기지 못하면 그런 남자의 곁에 있지도 못한다.
".........너.. 칸크빌레와 사이 좋은 거지."
"엥?"
"나 들었어. 내 부친이 칸크빌레가 아닌 현 중앙국의 황제라는 거."
"아아-.......
...................................뭐?"
눈을 크게 뜬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올려다 보자 말로 다 할수없는 묘한 느낌이 든
다. 슬픔인것 같기도, 뭔지 모를 증오과 불쾌함 같은 느낌을 누르며 아무렇지도 않
은 미소를 지어 보이려던 돔은 그러나 올려지지 않은 입가에 바보같은 짓은 관두기
로 했다.
걸음이 멈춘채 복도 가운데에 서있던 유헌은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돔의 체
온에 '핫-'하며 정신을 차린다.
그런 유헌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돔은 자조의 미소를 지었다.
"아직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하나 확실한게 있지.
바로 너와 칸크빌레는 나에겐 남이라는 거야."
"........."
"칸크빌레 그는 한동안 부친이라고 믿기도 했고, 또한 엄청 미워하기도 했으니 갑
자기 남이라고 해도 그렇게 받아 들이기는 힘들지만....
.............................일단은 사과하지."
멍한 표정을 짓는 유헌의 앞에 돔은 허리를 숙였다.
"남인 당신들에게 피해를 끼쳐서 미안하다. 이건 칸크빌레에게도 전해줘."
"자....잠깐..! !"
허리를 들고 다른 곳으로 가려는 돔의 모습에 당환한 유헌은 그의 옷자락을 잡았
다. 그런 유헌의 손을 마주잡은 돔은 뭐라 말할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만을 담은 그 눈동자에 자신에 대한 연민은 느껴지지 않는
다. 만약 그가 그런 감정을 보였다면 참지못한 돔은 그대로 검을 휘둘렀을 지도 모
른다.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것에 이를 악문 돔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은 흔한 거야. 자신의 부친이 알고보니 모친의 불륜에 다른 자가 되는 일따
윈, 이 바닥에서 흔한일이야. 난 그 웃기지도 않은 극을 주도하는 인물들이 조금 유
명인들이라는 것을 빼면 다른 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지. 그런거지?"
".......너..."
"그렇다고 말해. 그렇다고 말하란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견딜수가 없다.
너와 그 칸크빌레라는 사람을 타인이라고 일단 정리라도 해두지 않으면 머리가 터
져서 죽어 버릴것만 같단 말이야-! !"
돔이 낮게 울부짖는 소리에 유헌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일이 아니기에 칸의 말만을 듣고 자세한 내막에 대해 묻지 않았다.
단지 칸의 결백함만에 기분이 좋아져 다른 이들에 대한 것따위 물어 보지도, 그 이
전에 알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 돔의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흔들린다.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 아이기 실제론 아직 15세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라
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도 모르게 숙이고 있는 돔의 얼굴을 안은 유헌은 그러나 온몸에 느껴지는 소름에
눈을 크게 떴다.
낮게 흐느끼는 돔의 떨림인가 싶었지만, 아니였다.
안은 팔을 뺀 유헌은 부들부들 떨리는 자신의 손을 이질적인 것을 보는 듯한 느낌
으로 바라 보았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자신의 손이 이렇게나 떨리는 것인가-
등뒤를 축축히 젖어가는 식은땀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인 유헌은 복도 끝
자신을 무끄러미 바라보는 존재에 침을 삼켰다.
"................무슨 일인가."
"..........."
"여러모로- 네놈은 내 신경을 거슬리는 존재로군-"
불쾌한 것을 목격한 듯이 이그러진 미형의 얼굴을 자신을 바라본다.
그 금빛 눈동자에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인 유헌은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내뱉었
다.
"이자크.."
중앙의 황제 이자키엘은 유헌의 품속에 안긴 돔을 바라 보았다.
저 녀석을 신병을 지키기로 한 기사들은 어디에 있고, 저런 놈이 곁에 붙어있는 것
인가. 더군다가 저런 꼴사나운 모습으로-
점점 치달아오는 불쾌함에 눈살을 찌뿌린 이자크는 검을 빼들었다.
그동안 충분한 피를 빨아들인 검은 무척이나 훌륭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검면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이자크는 유헌에게
로 손을 뻗었다.
"돔을 이리로-"
"......웃기지마."
이자크의 음성이 울릴때마다 굳은 돔의 어깨가 서서히 들려지려는 것은 느낀 유헌
은 얼굴을 들지 말라고 말하며 그의 얼굴을 좀더 강하게 안았다.
칸크빌레는 몰라도 저 녀석에 대해서 자신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 녀석에게 돔을 넘길수는 없다.
돔이 저 황제의 곁에 있으므로서 행복을 느낀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어쩌란 말인가. 전체는 아닌 일부나마 칸의 얼굴과 피를 이어받은 돔의 괴로워 한
다면 유헌은 스스로를 용서할수 없을 것 같았다.
적의의 눈빛을 빛내며 돔을 더욱 강하게 안는 유헌의 모습에 이자크는 얼굴을 찡그
렸다.
언제나 무표정에서 작은 움직임으로 감정을 표현하던 이자크에게 그 표현의 최대
의 볼쾌함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천한놈이... 언제나."
내일을 방해하고 있다.
파-직.
이자크가 한발을 앞으로 내미는 순간 엄청난 압력이 유헌들에게 쏫아진다.
돔과 함께 뒤로 몇걸음 물러난 유헌은 온몸에 느껴지는 압력과 무시못할 살기에 두
눈을 부릎떴다.
서의 여왕의 기둥에서 느끼지 못한 엄청난 기였다.
칸크빌레와 비슷하긴 하지만, 그와 약간 다른- 적룡의 기마저도 느껴지는 이자크
의 무시못할 기세에 입술을 악문 유헌은 황제의 망토가 뒤로 넘어간다고 보인 순간
바로 눈앞에 나타난 미형의 얼굴에 두눈을 부릎떴다.
이그러진 금빛의 눈동자에 살기가 스친다 싶었을때 복부에 느껴지는 통증에 유헌
은 숨을 들이켰다.
쾅! ! !
배의 통증에 비명을 지를새도 없이 등에 느껴지는 충격에 유헌은 속에서 올라오는
비릿한 것을 뱉어냈다.
"유헌! !"
황제에게 나가 떨어져 벽에 부딫힌 그가 피를 토해내며 바닥에 쓰러지자 안색을 굳
힌 돔이 비명을 질렀다. 반사적으로 그리고 달려가려던 돔은 그러나 자신의 어깨를
강하게 잡는 손길에 걸음을 멈출수 밖에 없었다.
서늘한,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자크의 모습에 돔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가 차가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런 눈빛을 정면으로 받기는 처음이
다. 물론 지금까지 몇번이나 자신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긴 했지만-
흔들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돔의 모습에서 요크발을 투명해 본 이자크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듯, 사람이란 자신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 녀석만은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아이가 되기를 바랬건만-
"여기서 나가라."
"하지만.. 황제폐하. 그는...! !"
유헌을 바라보며 절박한 표정을 짓는 돔의 모습에 이자크의 얼굴이 굳는다.
설마하니 이 녀석조차 저 이계인 녀석에게 마음을 빼앗긴 건가-
"네가 상관한 바가 아니다. 당장에 돌아가."
"폐하, 그는 저의 친구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부디 목숨만은... 저러다 정말 죽습니다! !"
"돌아가라고 했다."
"하....."
"황제의 명을 듣지 않겠다는 것은 반역으로 판단될수도 있음을 잊지마라. 돔."
".............."
이자크의 차가운 말에 돔은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피가 이어져 있다고 해도 자신과 황제의 관계는 결국 이것인 거다.
자신의 아들임을 알면서도 이렇게나 차갑게 대한 남자이다. 그런 자에게 새삼 부자
의 정을 내세워 저 유헌이라는 소년의 목숨을 구할수 있을리가 없다.
아니, 애초부터 황제가 부친이라 해서 그에게 뭔가 기대한 마음을 품은 것 자체가
잘못이다.
".......돔."
"이만. 물러 가겠습니다."
뭔가 부숴진 듯한 표정의 돔에 그의 이름을 부르던 이자크는 고개를 숙이고 사라지
는 그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그가 복도를 지나쳐 모습을 보이지 않자 한숨을 쉰
황제는 고개를 돌려 유헌이 쓰러져 있던 장소에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그 장소에 아무도 없다는 것과 동시에 옆구리로 쳐들어오는 공기의 갈라짐
에 안색을 굳힌 황제는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그것을 막아냈다.
"쳇! !"
갈비뼈가 나갔는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부숴질 것처럼 아프다.
그런 통증을 감내하고 벌인 최후의 수가 어이없게 막히자 혀를 찬 유헌은 검을 들
지않은 왼손으로 황제의 얼굴로 날렸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가공할 힘을 실은
것으로 여겨지는 주먹은 그러나 황제에게 손쉽게 잡힌다.
잡힌 주먹에서 강한 압력이 느껴지자 반사적으로 손을 빼낸 유헌은 이자크에게 발
길질을 했지만, 역시나 쉽게 피하는 모습에 이를 갈았다.
욱씬거리는 왼손은 빼는 것이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그대로 부숴졌을 거다.
몇걸음 뒤로 물러 나려던 유헌은 가슴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또다시 한뭉큼의 피를
내뱉으며 소매로 턱으로 흘러내린 것을 닦아냈다.
보는 사람이 아플 정도의 피를 뱉어 내면서도 표정하나 바뀌지 않는다.
그 모습에 의외라는 듯이 한쪽 눈썹을 올려보인 이자크는 이내 비웃음을 짓는다.
그렇게 허세를 부리다 죽어라.
"이것 아는가."
"..........또 무슨 소릴 지껄이려는 거냐."
지금까지 저 녀석의 말을 들어 제대로 된 일이 없었다.
불신의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헌에게 어깨를 으쓱여 보인 황제는 조용히 입
을 열었다.
"지금까지 너같이 이곳에 넘어온 자들은 여럿 있었지.
그대로 묻혀버린 자들도 있지만, 게중에 훌륭한 능력을 보인 자들도 있다.
일일이 열거해 볼까? 개중에 서의 기둥의 주인인 미할라도 있지."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모르지만, 그 사람들을 모욕하려는 심산이라면 그
입 닥쳐."
"흠. 기세가 대단하군."
연신 쿨럭거리며 피를 뱉어내는 모습이 속을 다쳐도 단단히 다친 모양이다.
그런 부상을 입은 주제에 살아서 입을 놀리는 모습이 친창해 주고 싶었지만, 간신
히 서있는 유헌에게 검을 날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대신 표현한 황제는 바닥을
구르는 유헌에게 서늘한 시선을 던졌다.
비틀거리면서도 다시 자세를 잡아 일어난 유헌은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피를 소매
로 닦으며 뒷걸음 질을 쳤다.
처음 만났을 때도 엄청난 실력을 지녔다고 생각했지만, 이정도 일줄은 몰랐다.
하다못해 저 녀석에게 배를 걷어채이지 않아 원래 상태였다면 조금이라도 승산이
있었을 텐데, 지금은 붙어봤자 더 얻어 터질 뿐이다.
분함에 입술을 깨무는 유헌의 모습을 바라보던 이자크는 검을 바로 잡고 다시 다리
를 구부렸다.
몇번의 학습으로 그것이 저자가 공격하기 전에 취하는 자세라는 것을 알아차린 유
헌은 안색을 달리하며 검을 들었지만, 그 순간 귀를 찌르는 날카로운 검명과 팔에
느껴지는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뒤로 물러 나려던 유헌은 그러나 배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통증에 재차 날라오는 이
자크의 검을 피하지 못하고 급하게 몸을 틀었다.
"잘도 빠져 나가는 군."
"....제길.."
"상처만 나았다면 나에게 이길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다 뿐인가, 그랬다면 조잘대는 네 입부터 막아 줄테다."
뱉어낸 피로 옷앞을 흥건히 젖신 주제에 아직도 팔팔이 살아서 날뛰는 모습이 재미
있다. 헛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앞에 다가온 이자크는 무척이나 유감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검을 들어 자신의 어깨를 두들였다.
"하지만 그것은 알아야지. 내가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검으로만 널 상대하면 넌 이
자리에서 죽는 다는 것을."
".............뭐?"
유헌도 융텐의 말을 듣고나서 자신의 힘에대해 알게 되었다.
그런것을 어떻게 이자가 알고 있는건가.
이그러진 표정을 짓는 유헌의 얼굴을 바라보던 이자크는 미소를 지었다.
"모를 거라고 생각한건가. 네놈의 비밀에 대해-"
서늘하게 웃은 이자크는 검을 들어 그래도 내리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옆에서 날라오는 날카로운 단검에 안색을 달리하며 재빠르게 뒤로
물러난다.
"유헌! ! 피해요! !"
".....에스.."
익히 알고있는 음성이 들리자 이를 악문 유헌은 자리에서 일어나 등뒤에 있던 창으
로 몸을 날렸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1층이지만 바닥에 구르게 된 유헌은 몸
을 굽히며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부러진대다 이렇게나 굴러다니니 부러진 뼈들이 쉽게 붙지는 않을 것이다.
바닥을 기며 어떻게든 일어나려 하지만, 몸에 힘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자신의 팔을 부축하는 존재에 소스라치게 놀라 팔을 뿌리치려던 유헌은 그러
나 얌전히 있으라는 말에 그가 에스라는 것을 깨닭곤 몸에 힘을 뺐다.
얌전히 돌아가자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이곳에 왔다가 당한 일이니 에스의 얼굴을
볼 낯이없다.
"도대체 이게 무슨 꼴입니까!!"
"미안해요.. 쿨럭. 켁."
말을 하려 입을 여는 순간 엄청난 양의 피가 토해진다.
그 모습에 안색을 달리한 에스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한발 앞으로 디뎠지만,
그 순간 창에서 나온 이자크가 두사람의 앞을 막는다.
"......이자키엘..황제."
"오랜만이라고 해야 하나. 에스."
"쿨럭.. 큭-"
기침을 하는 유헌은 반사적으로 자신을 지지한 에스의 몸을 밀어 냈다.
저 이자크라는 녀석을 자신을 죽일 심산인 거다.
자신이나 되니 이 정도까지 버텼지만, 에스라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런 유헌의 마음을 아는지 잠시 흔들리던 눈으로 그를 내려다 보던 에스는 이내
입술을 깨물며 황제를 노려 보았다.
그 에스의 푸른 눈동자에 황제는 혀를 찼다.
"그런 녀석을 도와봤자 개죽음을 당할 뿐이다.
에스, 넌 형의 전철을 밟은 생각인 건가-"
".....아무리 당신이라지만, 그에대해 그런식으로 말하는 것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과연, 칸크빌레의 일당들은 버릇이 없군."
나른하게 중얼거린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가늘게 뜬 눈을 부릎떴다.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전율에 유헌은 비명을 지르며 에스의 몸을 밀쳐냈다.
그와 동시에 팔에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가슴이 베여 뒤로 쓰러지는 에스에
비하면 자신의 상처따위 아무것도 아니다.
"에스! ! !"
엄청난 양의 피를 뿌리며 뒤로 쓰러진 에스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급하게 몸을 튼 유헌은 통증에 다리가 꼬여 그자리에 쓰러졌다.
덕분에 가슴에 충격을 받아 다시금 토혈을 했지만, 정신없이 바닥을 기어 에스의
상처를 확인해 보았다.
속의 내장에 비칠 정도로 깊이 베었다.
쇼크로 정신을 잃은 듯 고개를 돌린 에스의 창백한 얼굴에 덜덜 떨리는 손을 든 유
헌은 그의 볼에 손을 대 보았다. 분명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지만 손끝에 서리는 서
늘함에 저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을 고인다.
자신이 좀더 빨리 밀었다면 그가 이런 상처를 입을 일은 없었을 것인데-
"멍청한- 그런 이계에서 온 녀석때문에 몸을 던지다니.
칸의 일행들은 이젠 바보들의 집합이 되었는가."
".........에스..에스, 정신 좀 차려봐요."
이자크가 뭐라고 말을 하는 듯 했지만, 유헌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반쯤 풀린 눈으로 연신 에스의 얼굴을 두들인 유헌은 이어지는 이자크의 말에 몸을
굳혔다.
"네가 있으면 그들이 더 상처를 받아. 그만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
그가 검을 들어 올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유헌은 몸을 움직일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단지 멍하니 이자크의 말을 되내일 뿐이다.
자신이 있으면 정말로 이들이 상처를 받는 것인가, 이곳이 아닌 원래 있던 곳에 있
는 것이 이들을 위해서나 자신을 위해서 더 좋은 일일까.
하지만, 그렇다면 자신으로 인해 미소를 짓던 자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자신 때문에 안도의 표정을 짓던, 자신으로 인해 더할나위 없이 멋진 미소를 지어
주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하란 말인가.
정말로 자신이 없었다면 이들이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까.
이들은 전에도 중앙의 쫒김을 당하고 있었다.
문제는 시간의 앞당겨짐이지 내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이 잘못이 아니다.
이것은 저 이자크라는 녀석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저 녀석이 나에게 상처를 입히고, 에스에게 상처를 입히고, 칸에게 상처를 입하고,
노웬에게 젤에게 라헨에게 라프헨에게 샤한에게 에즈에게 샤르비나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거다.
그래, 그런거야.
"...............내가 잘못한게 아니야."
"뭐?"
나지막한 유헌의 말에 이자크는 미간을 찌뿌렸다.
이렇게나 해댔는데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더이상 말을 할 필요성을 못느낀 이자크는 검을 들었다.
이대로 베어버릴 거다.
"네가 있기 때문이야."
" ? "
"네가- 있기 때문이야."
자리에서 일어난 유헌은 고개를 숙인채 중얼거렸다.
"........."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에 서려있는 원망의 빛을 읽은 이자크의
얼굴이 묘하게 이그러 진다.
그런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유헌은 이를 갈며 나직히 중얼거렸다.
"네가 있기 때문이야. 이곳에- 나의 세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