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도대체 얼마나, 얼만큼의 빠르기로 달려왔는지 알수가 없다.
숨이 턱까지 치받혀 더이상 참을수 없을 것 같은 지경에 이르자 돔은 달라던 걸음
을 멈추었다. 근처의 기둥에 손을 대고 숨을 몰아쉬던 그는 자신에게 이상하다는
눈빛을 보내는 시녀들을 노려 보았다.
그 서슬퍼럼에 놀란 시녀들은 재빨리 그 자리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무리를 지어 그녀들이 사라지자 그제서야 정적이 내린 복도에 주저앉은 돔은 앞으
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자신이 무엇을 들은건지 알수가 없다.
"분명.. 거짓말을 하는 걸꺼야..."
언제나 그래왔다.
자신과 모친에게 거짓말만을 하고 한번도, 단 한번도 애정을 보여주지 않았어.
그런 감정이 메마른 남자가 자신의 애인에게 하는 말따위- 이 내가 믿을 것 같은
가. 자신을 아무리 냉대해도 모친이 그런 부정을 저지른 사람이었다고도 생각할수
가 없다.
하지만... 하지만 그 시선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
이제는 기억도 나지않은 어린시절 그를 부를때마다 보여주었던 그 서늘한 시선.
이곳에 있어서는 안될, 그렇지만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는 듯한 자신과 모친에게 모
멸의 시선을 던졌던 그는- 그가 아무런 이유없이 그토록이나 모친과 자신을 미워
해야 할 이유가 있었던가.
"..............하."
만약에 자신이 그의 아들이 아니면 가능하다.
자신의 아내가 형제와 불륜을 저질러서 아이를 낳았는데, 기분좋게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터져 나오는 헛웃음에 얼굴을 기둥에 기댄 돔은 계속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지금까지 칸에게 보여주었던, 그를 향했던 이 감정은 쓸모없는 것이었던가-
열이 오르는 눈두덩이를 누른 돔은 나직히 이를 갈았다.
머리속이 뒤죽박죽인게 뭐가 뭔지 모르겠다.
"괜찮으세요?"
"..........."
"돔님."
익숙한 음성과 코끝을 스치는 향이 마음을 안정시킨다.
기둥에 등을 기대고 멍하니 앉아있던 돔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 보
는 론을 바라 보았다.
칸과 그리고 자신을 닮은 그 얼굴을 보자니 뭔가 속에서 울컥하고 올라온다.
그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가만히 있기에는 도저히 참을수
가 없다. 자신의 멍청함과 주변에서 속여왔던 것에 바닥이 무너지는 감각마저 느껴
지는 것이다.
"처음부터 사살대로 말하면 좋았잖아."
" ? "
"그런 시선으로 볼바엔- 차라리 처음부터 사실을 말해주면 좋았잖아.
그렇다면 당신도 나도 쓸데없는 감정소모따위 하지 않았을 텐데 말야."
"...........돔님."
"바보같아.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거야. .............모두가 날 속이고 있었어."
칸에게 가까이 다가갈려고 할때마다 말리던 요크발, 그의 아들인 자신에게 칸크빌
레의 흉 보기를 서슴치 않았던 그. 그리고 평소엔 한없이 다정하다가도 그가 나타
나면 무척이나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 보던 모친.
언제나 자신을 불쌍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파오.
묘한 동물을 바라보는 듯이 자신을 보던 황제. 그리고 몇몇의 사람들.
모두들 알고 있었으면서 당사자인 나에게만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따위- 뭐냐고.
"..........제길.. 제기랄... 한심해서 참을수가 없어..! !"
얼굴을 양손에 묻고 고개를 숙인 돔은 머리위로 느껴지는 체온을 뿌리치려고 했지
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돔의 몸을 앉은 론은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들여 주었다.
미미하게 떨던 몸이 차차 진정이 되가는지 평정을 찾기 시작하지만, 그에 맞추며
낮은 흐느낌 소리가 들려온다. 옆에 놓은 물건들을 구석으로 밀어넣고 돔의 옆에
앉은 론은 계속헤서 그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생긴것은 어른이지만, 사실은 어린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슨일이 있기에 이렇게나 슬퍼하는 것인지 알수는 없지만 가만히 둘수도 없을 노
릇이다.
돔의 등을 쓰다듬은 론은 거듭해서 ' 괜챃아요- 괜찮아.'를 연발한다.
왜 이 사람이 이렇게나 흔들리는지, 약한 모습을 보이는지 알수는 없지만, 사람은
위로를 받으며 기분이 풀어지는 법이니, 이 아이도 그렇게 되기를 바랄뿐이다.
돔의 낮은 흐느낌 소리와 론의 토닥거림 소리가 조용한 복도를 울린다.
"동을 지키주시는 여신들의 가호를 빌어 오늘 하루 경사가 있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십시오."
"식이 끌날때까지 더없이 평안한 날을 내려주시길-"
신관이 모으고 있는 손을 펼치며 허공에 들어보이자 그것에서 희뿌연 무리가 생겨
나 이내 허공으로 사라진다.
그것을 시작으로 성주변에 수많은 축포와 폭죽이 쉴새없이 쏫아졌다.
동은 결혼식이나 기타 행사같은 것을 낮에하지 않고 밤에 하는 경향이 있었다.
낮의 사막에 열기를 피하기 위함도 있지만, 과거부터 전해져 내려온 풍습이 아직까
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폭죽과 신관의 축사가 끝나자마자 환호성을 지른 사람들은 앞으로 몇일동안 이어
질 공주의 결혼식이라는 대사를 만끽하기 시작했다.
이 기간동안만은 금주령이 사라지고, 수많은 술과 음식들이 제공되는 것이다.
수전노 왕도 자신의 딸에 결혼식엔 손을 크게 쓰는 것이다.
"신나는 군요."
저택의 창틀에 엎드려 있던 에스는 밖의 풍경을 감상하며 눈을 가늘게 휘었다.
비록 저 축제에 참석하지는 못하지만, 사람들의 열기가 몸에 전해져 절로 기분이
둥둥뜨는 느낌이다.
귀가에 들려오는 요란한 함성소리와 음악소리에 맞추어 박자를 맞춰보던 유헌은
테이블에 앉아있는 칸의 옆얼굴을 몰래 훔쳐보았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면 일행
들은 틀림없이 보고 싶으면 옆에서 봐도 좋잖아-라고 놀려댈 것이 분명하다.
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낸 유헌은 창으로 걸어가 쉴새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의 궤
적을 눈으로 좇았다.
나라의 일대 경사이다 보니 어지간히 바쁜 모양인지 걸어다니는 자들은 하나도 없
다.
"유헌 한번 밑에 내려가 볼래요?"
"아뇨, 둘이서 다녀와요."
"그럼 있다가 봐요."
아래에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라프헨에게 마찬가지로 손을 흔들어 보인 유
헌은 라헨과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 보았다.
오늘같은 날은 아마도 저 황제라도 얌전히 있을 거라고 해서 모처럼 일행들은 긴장
을 풀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일이 터지면 자신들의 무기를 들고 당장에 튀어나갈
준비는 되어 있을 거다.
허술해 보이지만 이들이 만만찮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있다.
아직도 폭죽이나 화려한 빛에 둘러쌓인 뮤트롱 왕가의 중앙 건물을 바라보던 유헌
은 저곳에 황제가 있는건가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는 것은 루드빌이나 요크발, 그외의 인간들도 모두 저곳에 있다는 거겠지.
팔장을 끼고있던 유헌은 팔을 풀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
칸의 아이가 아니고 이자크의 아이인가- 그 돔이라는 녀석은....
칸은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꺼려했다.
단지, 율시아가 싫어서 그런거라고. 어느새 그녀는 아이를 임신했고 그 아이의 부
친이 이자크라고만 말햇을 뿐이었다. 좀더 자세한 내막이 있을거라고 생각했지만,
말하기를 꺼려하는 그의 모습에서 뭔가를 더 묻기란 힘든 것이다.
저택으로 들어온 유헌은 단지 쉬라며 칸의 방에서 나올수 밖에 없었다.
노웬일행들은 모르지만, 중간에 합루한 100여명의 사람들에게 자신들은 관계를 숨
겨주라는 노웬의 지시에 둘은 각방을 쓰고 있었다.
그래도 잠잘때가 되면 슬그머니 기어 들어오는 칸 덕분에 각방을 쓰는 느낌은 없지
만.
"흐-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가끔가다 고개를 끄덕이나 칸이나 그런 그에게 서류를 넘
겨주는 노웬의 모습은 뭔가 이질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도 그럴것이 얼마전에 칸이 아직 13세의 아이의 모습일 땐 노웬은 그에게 의논
를 한다거나 일을 같이 한다거나 하는 것은 언제나 에스와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자 처음부터 그랬다는 양 모든 일을 그와 함께
해결해 나간다. 그래서 칸은 요새들어 조금 피곤해 보이기도 한다.
도와줄까하고 몇번이나 물어 보았지만, 칸은 그때마다 됐다며 미소를 지어 보일 뿐
이다. 그 미소에 물러나기는 하지만, 좋은 기분은 아니다.
그에게 도움이 못되는 느낌이니깐.
"유헌."
이름을 부르는 에스에게 고개를 돌려 보이자 귀여운 얼굴에 미소를 띈 그가 있다가
산책을 나가자고 한다.
"점심때는 넓은 홀에서 이곳에 온 모든 인사들이 식사를 한다고, 그렇게 되면 건물
에 있던 경비들이나 사람들이 그리로 몰리니 우리들이 조금 나다닌다고 해도 크게
잘못될 일은 없을 거예요."
"에...하지만."
"괜찮아요. 칸님은 바쁘시니깐, 조금만 나갔다 오자고요."
어제도 그런 마음으로 돌아다니다가 칸에게 함부로 나갔다고 혼났지.
하지만 그건 남에게 할말도 아니고, 모처럼 권해주는 에스에게 거절을 할수도 없
다. 고개를 끄덕이는 유헌의 모습에 자리에서 일어난 에스는 차를 타준다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한다.
그다지 차를 마시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에스의 차타는 솜씨는 대단하니 별말없이
그의 뒤를 따른다.
"왠지 모르지만, 막바지-라는 느낌이군요."
"그런가요."
"대치하고 있는 자들이 한곳에 모이기란 여간 어려운게 아니라고요.
게다가 어느쪽이든 중요인물이 다 모여있으니, 잘못되는 쪽이 지는 거죠."
이쪽엔 칸크빌레가 있고, 저쪽은 이자키엘이 있다.
누구든지 각 무리에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대단한 사람이니 에스의 말이 옮다.
어느쪽이든 중심을 지지하던 자에게 이상이 생기면 그때부터 집단은 맥없이 무너
지는 것이다.
하지만 칸에겐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지켜줄 테니깐-
"돔은 어디에 있지."
"아침에 요앞 정원을 산책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아침부터 인사를 하러오지 않고 식사도 하지 않은 돔의 모습에 걱정스러웠던 요크
발은 기사의 말에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오늘 분명 황제가 일을 치를것이 분명한
데 아무런 지시도 없자 신경이 예민해져 돔에게 소홀한 것 같았다.
비단, 오늘뿐만 아니라 요 몇칠동안 그에게 너무 무심했던 것은 아닌지.
자신들을 따라와서 그 아이가 의지할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요크발
은 자신의 무신경함에 혀를 찼다.
기사들에게 돔의 안전을 맡긴다는 말은 건낸 그는 입은 옷을 살펴보며 옷 매뭄새를
바로했다. 갑자기 참석하게 되었지만, 중앙국의 대표되는 대 귀족으로서 이곳의 귀
족들이나 황족들에게 얍잖아 보일 모습으로 나타날수 없다.
자신의 차림새를 세밀히 살펴보던 요크발은 한참이 지나서야 만족의 표정을 지으
며 걸음을 옮겼다.
얼굴 살이 빠져 좀 보기가 안좋은 것 같았지만, 지금 당장 어쩔수 있는 것이 아니
니... 자신의 볼을 쓰다듬으며 걸음을 옮기던 요크발은 저 앞에서 걸어오는 사내의
모습에 손을 들어 보았다.
"사이키."
"아, 요크발님. 마침 나오셨군요."
평소엔 머리를 풀고있던 그는 보라색의 머리를 밑으로 묶어 흰색과 검은빛에 보라
색이 섞인 성장을 차려입은 사이키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급한대로 꾸민것치곤 그나 자신이나 차림새가 꽤나 멋졌던 것이다.
요크발의 모습을 살피던 사이키는 그의 주변을 살피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돔님은 아직 준비전이십니까."
"오늘 아침부터 모습이 보이질 않더군. 그리고 그 아이는 벌써 밖으로 내놓을 생각
은 없어. 날파리들이 꼬이는 것은 딱 질색이다."
"그렇습니까. 그럼, 가실까요. 폐하께서도 준비를 마치신 모양입니다."
사이키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요크발은 그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이런저런 말을 나누며 걸음을 옮기던 요크발은 멀리 자리하고 있는 화려한 저택에
시선을 주었다. 하나의 성으로 복잡한 내부를 지닌 중앙성과 달리 뮤트롱의 내부는
가운데 중심 건물과 그 주변에 화려한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시선을 준 곳에 카일과 칸크빌레 일당들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나 가까이 있는데도 가만히 있어야 하는 상황이 우습다.
"카일은."
"아직 나오시진 않았지만, 비센님은 이미 얼굴을 들어내고 사라졌더군요."
"그렇다면 녀석도 나오겠군."
만찬자리에 만나게 되면 그 반반한 얼굴에 주먹을 날려줄 생각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부러 칸크빌레의 인질의 되어주고 궁지
에 몰린 녀석들을 이리로 데리고 와 구명을 해주다니.
어떻게 보면 황제에 대한 반역의 기미를 읽을수도 있기에 되도록이면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싶었지만, 지닌 성미가 과연 말을 좋게 이끌어 나갈수 있을지 모르겠다.
말을 하는 도중 화를 못이겨 주먹을 내뻗을 수도 있는거다.
그런 상황이 오면 사이키에게 말려달라고 언질을 해두어야 겠다.
"그나저나 루드빌은."
"글쎄요. 모습이 보이지 않으시지만.. 어제 저녁에 수가지의 드레스를 챙기시는 것
을 봐서 이번 자리에 참가하실 생각인 모양입니다."
"하여간 얌전히 있지를 못하는군."
황제의 곁에 있는 붉은 머리의 여성이라면 중앙국의 적룡이라는 것이 알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성안에 그녀에 대한 말들이 심상찮게 오르고 있으니 이번 만찬때는 식을 올
리는 공주나 그 부군보다 자신들에게 더 많은 시선을 몰릴지도 모르겠다.
복잡한 표정을 띄며 한숨을 쉬는 요크발의 모습에 비죽히 미소를 지어보인 사이키
는 이내 표정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도대체 황제는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시는 걸까요."
"....나도 실은 그것을 물어보고 싶었지."
"예상이긴 하지만, 오늘 황제가 일을 벌이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왠지 모르게 그런 기분이 드는 군요."
"기분뿐만이 아니다. 실제로 일을 벌이실 거야."
요크발의 담담한 말에 사이키의 안색이 대번에 변한다.
"오늘같은 날에 일을 벌이셔서 참석한 자들의 신상에 일이라도 생긴다면 중앙국은
대륙에서 고립될 겁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사이키의 다급한 말에 걸음을 멈춘 요크발은 머리를 흩고 지나가는 바람에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오로지 공주의 결혼준비를 위해서 급하게 돌아다니는 시녀들과 사
람들의 모습에 두들어지게 눈에 들어온다.
저자들 중에 운이 없어 죽는 자들도 생기겠지.
"황제가 원하면 따르는 수밖에."
"돔님, 일어나세요."
"........"
"도..."
엎드려 있는 돔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흔들어 보이던 론은 자신의 팔을 잡
고 품으로 잡아끄는 행동에 입을 다물고 가만히 돔의 품에 안겼다.
순순히 안겨오는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어 볼을 비빈 돔은 감겨진 눈을 가늘게 뜨며
방안을 살펴 보았다.
온통 보석들과 화려한 것들이 걸려있는 깔끔한 자신의 방이 아닌, 하급 기사들이나
시종들에게 배정되는 낡은 방안의 모습에 그는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몽롱한 정신이 점점 뚜렷해지고, 자신이 지금 어디에서 무슨짓을 했는지가 완전히
떠오르자 돔은 론을 안은 채로 몸을 굳혔다.
그런 돔의 품안에 안겨있던 론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품에서 빠져 나온다.
"요크발님께서 찾으시는 것 같습니다. 옷을 차려입으시고, 위로 올라가셔야 해요."
".............."
"점심엔 온성의 귀족들이 커다란 홀에 모여 식사를 한다고 하니, 돔님께서 빠지실
수 없잖아요."
눈을 가늘게 휘며 웃는 론의 모습에 돔은 입술을 깨물었다.
감정이 격해져 있었다고는 하나 시종을 게다가 남자를 이렇듯 안아 버린다니.
더군다나 이런것은 처음이다.
결코 능숙하지는 못한 자신의 행동에 상처를 입은 것을 분명할텐데, 내색을 하지않
는 론의 모습에 괜히 초조해 진다. 어느새 자신이 입을 옷을 준비해 둔것인지 하나
씩 꺼내드는 론의 모습에 돔은 누워있던 침실에서 일어났다.
방 주인의 성격을 알려주는 듯 몇일 묵지않은 방은 무척이나 깔끔했다.
"테이블에 올려둔 물로 세면을 하세요. 이를 닦을 약초는 금방 구해오겠습니다."
"이봐-"
"네? 뭔가 더 필요하신게 있나요?"
"......괜찮은 거냐.."
말을 한 돔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진다.
처음에 돔의 말을 알아 들을수 없었던 론은 이내, 그가 무슨말을 하는건지 알아채
곤 들고 있던 옷을 내려놓고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런 것을 신경쓰고 있었던 것인가.
과연 저 요크발님과 혈연이 있는 분답게, 무척이나 상냥한 사람이다.
"익숙하니 괜찮습니다."
자신의 말에 바로 굳는 돔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을 지은 론은 그러나 다시 미소를
지으며 근처의 옷가지를 정리하며 몸을 숙여 선반 밑을 살펴본다. 구석에 넣어 두
었던 입안의 냄새를 가시게 하는 약초를 조금 얻어 둔것이 기억난 것이다.
몸을 돌려 약초를 찾던 론은 저도 모르게 미소가 나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몇번의 관계를 가진적이 있었지만, 저렇게나 상냥하게 물어봐 준 사람은
처음이다. 생긴것이 남성보다 여성에 가까워 지금까지 수명의 남자들에게 억지로
관계를 가진 자신이다.
처음인 듯 어색한 돔이었지만, 그래도 자신을 상처주지 않기위해 부단히 노력했기
때문에 약간 쓰린 것 빼고는 그다지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 찾았다."
손끝에 걸리는 약초 주머니를 빼낸 론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인상으로 자신의 뒤에 버티고 서있는 돔의 모습에 의아한 표
정을 지었다.
과연 달련된 사람답게 언제 접근했는지 기척을 느낄수가 없었다.
들고있던 약초 주머니를 그에게 내밀고 이것을 사용하라고 말하려던 론은 그러나
팔을 강하게 잡히는 바람에 들고있던 주머니를 떨어 뜨렸다.
"처음이 아니였던 거냐-"
"..........에..."
"처음이 아니였던 거야.. 처음이.."
강하게 잡힌 팔이 통증을 호소하고 있다.
미간을 찌뿌리는 론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 보던 돔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였
다. 처음이 아닌 주제에 자신을 속이고 이런 짓을 한건가.
자신의 위치와 재력을 알고 이런 짓을 한 건가.
그렇다면 자신의 나약함을 파고들어 이런 관계를 가진것에 대해 친창을 하고 싶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결코 이런 행동따위 하지 않았을 것이니-
입술을 깨문 돔은 잡힌 팔이 아픈듯 입을 벌리는 론의 입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그런 자신의 행동에 놀란 듯 론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지만, 게의치 않았다.
그가 원한것이 이런 것이라면 얼마든지 해줄수가 있다.
이내 입을 때낸 돔은 론의 바로 앞에서 이를 간다.
"속였어.. 날...날 속여왔던 거야..!"
자신을 이해하는 양, 자신의 보호자라는 명분으로 자신을 속이고 자신들끼리 알고
있었던 거다. 부친이 아닌자를 부친으로 알고 지금까지 그에게 분노와 적의를 보인
자신을 그들은 비웃었을까.
만약에 그렇다면 정말로 악취미라고 생각한 돔은 품안의 론이 발버둥 치자 이를 악
물며 근처 책상으로 끌고가 위에 올려진 물건들을 한팔로 쓸어 버렸다.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바닥에 부숴진 파편이 튀었지만, 상관하지 않고 론의 작은
몸을 들어올린 그는 책상위에 던지듯이 눕혔다.
"돔.....!"
양손을 가슴위에 올리고 놀란 듯 입을 벌리던 론은 자신을 내려다 보는 무감한 붉
은 눈동자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보는 것이 자신이 아니고, 분노를 들어내는 것
도 자신이 아니 이상 뭐라고 말해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거칠게 몸을 쓰다듬는 돔의 목에 팔을 감은 론은 입술을 앙 다물었다.
거칠게 행동하지만, 원래는 상냥한 사람이니 자신에게 큰 상처를 주진 않을것이다.
두려움에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론은 몸에 힘을 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날.. 계속해서.. 난 믿고 있었는데.."
".............."
"바보같아.. 멍청이.. 이러니 아직 애라는 말을 듣지..."
중얼거리며 옷을 벗기는 돔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론은 손을 들어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자신쪽으로 펼쳐진 손바닥안의 물기에 자신이 바라본 것이 틀림없는
돔의 눈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자신의 몸을 쓰다듬는 돔의
모습에 론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복도의 기둥에서도 그는 울었다.
왜 우는 걸까.
이렇게나 아름답고 상냥한 사람이 무엇때문에 우는지 론은 모르겠다.
단지, 자신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에도 그가 화를 냈다는 것을 알뿐이다.
두 손을 들어올린 론은 돔의 얼굴을 감쌌다.
"속이진 않았어요."
론의 말에 돔의 움직임이 멈춘다.
눈물에 젖은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은 론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
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하고 몸을 섞은 것은 여러번 있었지만, 어제처럼 자의로 안
긴적은 처음인걸요.
만약에 돔님이 처음이 아닌자를 싫어했다면 분명, 말했을 거예요."
"............."
"다른건 몰라도 전 거짓말은 안하거든요."
고개를 옆으로 숙이며 웃는 론의 모습에 돔은 옷을 벗기던 손동작을 멈추었다.
"무엇때문에 돔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유중 하나가 저라
면, 정말로 죄송해요. 두번다시 그런 짓을 하지 않을께요.
돔의 눈에서 눈물을 나오게 하다니-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아요."
".......론.."
"전 돔같이 아름다운 분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싶지 않아요."
론의 말에 돔은 가슴 한편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동안 자신을 바라보는 론의 눈동자를 내려다 보던 그는 현제 자신의 꼴사나운 모
습을 인식하곤 얼굴을 붉히며 몸을 일으켰다.
아직 책상위에 누워서 엉망진창으로 옷이 벗겨진 론을 단정히 해준 돔은 주변에 널
려진 것들을 바고 눈쌀을 찌뿌렸다.
워낙에 함부로 행동을 했더니 주변이 엉망이다.
이것을 깨끗이 치우려면 적어도 한시간을 족히 걸릴것 같았다. 곤란한 듯 미간을
찌뿌린 돔은 자신을 바라보는 론의 모습에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충격이 컸다고는 하나 관계없는 사람에게 쓸데없이 화풀이를 했으니 정말 최악이
다.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얼굴을 붉히는 돔의 모습에 그가 안정을 찾
았다고 생각한 론은 앉아있던 책상에서 내려왔다.
그 행동에 당황한 듯 손을 뻗는 돔의 모습이 보였지만, 상관않고 침대 근처에 놓여
진 대야에서 물수건을 꺼낸 론은 그것을 돔에게 건냈다.
"이렇게 미적거리시면, 정말로 늦을 거예요."
"..........."
"얼굴을 닦고 이것을 사용하시면 세면을 대충 해결될 겁니다. 그리고 옷은 저곳에
놓아두었으니 입으시면 되고요. 정 몸이 불편하시면 물을 받아 둘까요?"
목욕을 하겠냐는 론의 질문에 고개를 저은 돔은 손에 들린 물수건과 작은 주머리를
내려다 보았다.
깨끗하긴 하지만, 자신의 기준으로 볼때는 턱없이 미약한 물건들이다.
그런데 자신은 왜 이런 것에서 따뜻함을 느끼게 되는 걸까.
뭔가 더 필요한게 있으면 뭐든지 말하는 듯이 미소를 짓고있는 녀석은 처음엔 칸크
빌레이나 자신과 닮은 보기싫은 녀석인줄만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였던 모양이다.
들고있던 손에 힘을 주워 주먹을 쥐어보인 돔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마워..."
돔의 말에 눈을 크게 뜬 론은 이내 정말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그는 굉장히 상냥한 사람이다.
"이렇게까지 나와도 되는 건가요. 분명 전 근처 산책이라고 들었는데 말이죠."
"어쩌다보니 이곳까지 온것이니 사소한 것은 신경쓰지 말자고요."
"..........사소한 것입니까."
답답하게 가슴을 죄는 정장에 유헌은 껄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눈앞에 지나가는 귀
족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할일이 없어 에스가 함께 산책을 나가자는 말을 하기도 해서 그를 따라온 유헌은
처음에 옷을 갈아입을 라고 할때 알아채고 따라 나오지 말아야 했다고 속으로 궁시
렁거렸다.
설마하니 이렇게 옷을 갈아입고 뮤트롱의 중앙건물로 와 돌아다니는 수많은 귀족
들의 구경을 하게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나마 칸이 모르고 있다는 것이 천만 다행이다.
그가 알았다면 당장에 달려와 이곳에서 자신을 빼내갔을 것이다.
"유헌, 머리카락 들키면 안되니깐 잘 써요."
"그러게 피곤하게 왜 이런곳에 온겁니까-"
"다 필요한 거라고요, 그리고 유헌은 일행중 가장 한가해 보였으니 어쩔수 없었답
니다."
장난스럽게 윙크를 하는 에스의 모습에 한숨을 쉰 유헌은 쓰고있는 모자가 제대로
되어있는지 손으로 확인해 보았다.
만약에 모자가 벗겨져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들어내면 엄청난 시선이 몰릴지도
모른다. 안그래도 죽어 지내야 할판에 그런일이 벌어진다면 정말 큰일이 아닌가.
이런 사람이 많은 곳에 자신을 데리고 온 에스에 대해 투덜거리던 유헌은 멀리 들
어오는 입구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 사람은..."
유헌은 저도 모르게 옆에 서있는 에스를 바라 보았다.
사람들 사이에 들어난 카일은 평소와 달리 좀더 화려한 옷과 모습으로 나타났다.
얼굴 반쪽을 가린 철가면이 묘하게 그의 모습을 좀더 부곽시켜주고 있었다.
그의 동에서의 위치를 알려주는 듯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서로 귓속말을 한다던가,
얼굴을 붉히는 여자들의 모습이 심상치 않게 눈에 들어온다.
한참동안 카일의 모습을 바라보던 유헌은 그러나 자신들이 이렇게 있다 저 남자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에스의 손목을 잡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나가려던 또 다른 입구에서 술렁거림이 일자 걸음을 멈출수 밖에 없었다.
이번에 뭐냐-라는 느낌으로 심드렁한 표정을 짓던 유헌은 그러나 사람들을 헤치고
나타난 일단의 무리에 숨을 죽였다.
"..에스."
"일단 이쪽으로 오십시오."
유헌과 마찬가지로 안색을 굳힌 에스는 그의 손목을 잡아 뒤의 테라스로 빠져 나왔
다.
그들의 모습을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홀로 들어선 이자크, 요크발, 사이키 그리고
적룡 루드빌은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가벼운 시선을 던지며 지정된 자리로 걸
음을 옮긴다.
나타난 네사람들에게 선망을 시선을 던지던 귀족들은 아까까지 여기저기 방황한
게 언제였냐는 듯이 이자크들을 따라 지정된 자리에 앉는다. 그것을 시작으로 음악
이 바뀌며 수백가지의 음식들이 나오는 것을 유헌은 질린 눈으로 바라 보았다.
어디를 가나 귀족들의 사치는 변하지 않는 것인가 보다.
이렇게 되면 자신들도 슬슬 이곳을 벗어나야 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든 유헌은 에
스가 어느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그리로 시선을 돌렸다.
움직이는 요크발들에게 시선을 떼지않고 미적거리며 자신의 자리로 옮기는 카일
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런 에스의 눈에서 일말의 걱정을 읽은 유헌은 한숨을 쉬었다.
"에스, 일단 몸을 피하죠."
"....아아."
마냥 이러고만 있으면 저들에게 들킬수도 있다.
에스의 팔목을 잡은 유헌은 순순히 따라오는 그와 함께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살펴
보았다. 지금 막 만찬이 시작하는 터라 그쪽으로 시선을 몰린 것인지 주위는 다소
널널한 경비를 보여 주었다.
뒤에 에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유헌언 테라스의 난간을 손으로 집고 아래로 뛰
어 내려갔다.
그런 유헌의 뒤를 따라 뛰어내린 에스는 숲으로 가자는 듯이 손가락을 내민다.
그런 에스의 모습에 순순히 걸음을 옮긴 유헌은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스락-
"............"
사라지는 두사람의 모습을 아까부터 보고있던 돔은 한숨을 쉬며 기대고 있던 난간
에서 몸을 떼었다.
론이 준비한 옷대신 전부터 입고있던 옷을 입은 그는 아래에 만찬이 시작되는 자리
를 가만히 바라 보았다. 여기까지 왔다면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좋지만, 중간에 들
어가 시선을 한몸에 받는 것이 싫다.
게다가 요크발과 이자크 황제의 얼굴을 바라볼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들과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을때 자신이 무슨 소리를 내뱉을지 모르는 것이 두려
운 거다. 입술을 깨물던 돔은 그러나 가슴에 있는 작은 주머니에 손을 올리고 천천
히 마음을 가라 앉혔다. 단지 입안을 헹구는 잎들이 들어있던 주머니 였지만, 론에
게 얻은 그것은 돔의 가슴 주머니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이층의 난간에 서서 안의 만찬을 바라보던 돔은 뮤트롱가의 왕과 함께 들어오는 공
주의 모습에 시선을 떼고 걸음을 옮겼다.
아까부터 난간에 있던 돔에게 수상한 시선을 던지던 기사들은 그의 옷차림새와 외
모, 그리고 순순히 내려오는 모습에 그제서야 시선을 돌렸다.
"이봐."
"네."
"머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근처에 쉴만한 장소가 있나."
"물론입니다. 따라 오십시오."
완전히 미심쩍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돔이 말을 걸자 견제하려던 기사는 그러나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직접 안내를 했다.
이런 일은 중간에 서있는 시녀들의 일이었지만, 돔의 외모가 저 중앙국의 황제가
꼭 닮았다는 것과 그것을 제외하고라도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품이 가벼히 대해서
는 안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기사의 뒤를 따르며 주변을 살펴보던 돔은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만찬이 끝날때까지 기다린 후에 요크발과 긴히 할말이
있다. 이런 자신의 행동에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집
고 넘어가야 하는 일이니 더이상 모른척하고 넘어갈수만은 없다.
걸음을 옮기던 돔은 마지막으로 칸이 있는 성에 시선을 던졌다.
"..........."
묘한 복잡함이 마음을 흔든다.
입술을 깨문 돔은 기사가 안내하는 방으로 들어섰다.
뒤에서 문이 닫히고 시원한 음료라도 마실려던 돔은 그러나 자신보다 먼저 와있던
듯 자리에 앉아있는 인물을 발견하곤 눈살을 찌뿌렸다.
분명 황제와 함께 앉아있었던 그녀가 이곳에 와 있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돔의 의문을 알아차리 것인지 소파에 편하게 앉은 루드빌이 붉은 입술을 올린
다.
"이쪽은 환영이다.
본체 쪽에 황제를 제하고 나에게 말을 걸 배짱좋은 녀석들은 없을테니."
일반적으로 환영술을 쓰면 본체 쪽은 허술해 지기 마련이다.
인간들은 환영을 실행하면 본체쪽이 무방해져 주변의 반응에 대처를 못한다 하지
만 루드빌은 용이니 그닥 큰 상관은 없을 듯 하다.
루드빌을 슬쩍 본 돔은 선반에서 잔을 두개 꺼내 음료를 탄다.
몇번 얼굴을 보긴 했지만, 막역하게 대화를 할만한 사이는 아니다. 오히려 중앙의
수호자인 용에게 자신은 경의를 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돔은 그 누구에게도 경의을 표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기분이 안좋은 모양이구나."
".........그다지."
"어제는 어디에 있었던 거지."
루드빌의 말에 돔의 미간이 찌뿌려 진다.
그런 돔의 반응은 상관치 않다는 태도로 근처에 놓여진 포도주에 입은 댄 적룡은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른같은 외관을 지니고 있지만, 아직은 턱없이 어린 아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억압을 하면 오히려 반항을 한다는 것은 여러 아이들을 보면서 학
습한 바가 있다.
최대한 부드럽게 상냥하게, 스스로 입을 열게끔 해야 하 것이다.
"기가 많이 흩틀어 지더구나. 첫 관계를 가질때는 그만큼 주의가 필요한 법이다."
"..........."
"근본이 천한 것들하고 어울려서는 안돼. 넌 고귀한 피를 이어 받았으니깐."
"당신의- 말입니까."
돔의 말에 얼굴을 경직시킨 루드빌은 그러나 '바로 그거란다-'라며 부드러운 미소
를 짓는다.
그런 루드빌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돔은 이내 냉소를 지었다.
"용인 주제에 다른 사람이 관계를 가지던 말던 일일이 신경을 쓰다니-
명성에 비해 지나치게 한가하신 모양입니다."
"..........뭐?"
"쓸데없는 참견입니다. 제일은 알아서 할터이니깐요."
서늘한 돔의 음성에 적룡의 얼굴이 구겨진다.
적의를 들어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저 얼굴과 눈동자는 익히 보아온 것이다.
설마하니 그 아이들의 일이 또다시 되풀이 되는건가하는 불안한 마음에 루드빌은
입술을 깨물었다. 루드빌의 얼굴을 바라보던 돔은 역시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에게 말을 듣긴 했었다.
자신들과 중앙의 황제들에겐 용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하지만 그런 것을 믿기엔
돔은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저 적룡을 만날때마다 몸에 느껴지는 묘한 감각과 동시에 자신의 일을 감응
하는 저 여자의 모습이 역시나-라는 결론이 나오게 한다.
그것은 무척이나 불쾌한 것이었다.
"돔-"
"제 부친이 이자키엘 황제라죠."
".............."
"칸크빌레가 아닌-"
뭔가 말하려뎐 루드빌의 얼굴이 완전히 굳는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무척이나 서늘한 붉은 눈동자가 주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