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도 카일경께서 자구 뮤크롱에 들러 주었으면 하네-"
"전하의 환대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라센가와 우리 뮤트롱이 좋은 관계를 가지게 된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자기 집처럼 편하게 지내게나."
사람좋은 미소를 짓는 뮤트롱가의 왕의 모습에 카일은 마찬가지로 꾸민듯한 미소
를 지어준다.
사람 좋은 척, 깔끔한 척하는 눈앞의 국왕이 사실은 여자를 엄청 밝히는 호색인데
다 눈에 들기만하면 그게 유부녀인든 나이가 적든 많든 상관않고 잡여들여 성관계
를 지닌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새벽부터 사람을 깨워 아침을 하자는 그렇듯한 초대를 했지만, 용건은 이건가 싶게
국왕의 옆에 앉은 여성의 모습이 무척이나 거슬린다. 나름대로 미모에 자신이 있는
듯 은근히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며 도도하게 구는 꼴이 역겹다.
서서히 바닥나는 신경을 느끼며 몸을 뒤로 눕힌 카일은 반도 채 비우지 않은 접시
를 내려다 보았다.
입맛이 까다로운 그는 깔끔한 맛을 즐기지, 이런 막무내기 식의 화려한 맛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한참이나 지났지만 끝날 생각을 안하는 식사에 한숨을 쉬던 카일
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에게 접근하는 황제의 모습에 미간을 찌뿌렸다.
저 늙은 너구리가 또 무슨 흉계를 꾸미러 이리로 오는 것인가.
"이런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건가?"
".....오랜 여행으로 그다지 입맛이 없군요."
"그럴 수록 많이 먹어야 하지 않나. 자- 내가 잘라줄테니 한번 먹어보게."
"............."
어깨에 손을 집고 은근히 쓰다듬는 왕의 모습에 카일은 나직히 이를 갈았다.
요새는 남색이라는 고상한 취미에 맛을 들였다더니 감히 자신에게 작업을 들어오
는 것인가.
테이블 밑에 내려져 있던 손을 들어 늙은 영감의 손목을 비틀어 꺽으려던 카일은
그러나, 멀리 열려진 문사이로 들어아는 금발을 지닌 사내의 모습에 움직임을 멈췄
다.
그것은 곁에 서있는 뮤트론의 왕도 마찬가지로, 저 비센이라는 조카가 이리 오는
것은 그의 초대가 아님을 알게 한다.
"식사중에 갑자기 찾아와 죄송합니다."
"아아- 이런 비센경. 오히려 환영한다네. 그래 무슨 일인가."
어깨에 집어졌던 늙은 손이 떨어져 나가자 카일은 표정을 그대로 유지한채 직접 어
깨를 털었다.
바로 곁에 있던 황제는 그런 그의 행동에 히껍한 표정을 지으며 내려다 본다.
싫은 일에 대해 참고만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카일은.
뮤트롱의 최고 권력자에게 코웃음을 쳐보인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만 실례한
다는 말을 남겼다.
동석하고 있었던 여성은 마지막까지 말을 걸어주지 않은 카일에게 날카로운 눈빛
을 보냈지만, 되돌아오는 서늘한 푸른색의 눈동자에 시선을 돌린다.
보석과 드레스에 둘러쌓인 인생을 살아온 여성에게 카일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는
것은 쉬운일이 아닐 것이다.
"좋은 시간이었지만, 두번의 초대는 사양하겠습니다. 일행들과 여행차 들린 것이니
매번 저만 빠져 나갈수는 없는 것이죠. 안 그렇습니까?"
"아아- 뭐, 그..그렇지."
긍정을 대답을 안하면 바로 검을 날리것 같은 그의 기세에 눌린 왕은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며 대답했다. 그런 왕의 나약함에 입가를 비틀어 올린 카일은 자신을
바라보는 또 한사람인 비센에게 시선을 주었다.
전처럼 고개를 숙이지도, 반가운 표정을 짓지도 않은 조카의 모습에 이채의 빛을
뛰우던 그는 이내 스치는 생각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칸크빌레의 일에대해 아직도 앙금이 풀리지 않았던 건가.
그 답지않게 숙이고 들어와서 카일의 본 성격을 망각했던 왕은, 그의 만만찮지 않
은 성격과 높은 악명을 떠올리고 자신이 했던 행동을 탓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곁에 서있던 비센에게 고개를 돌린 그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지만, 그보다 비센의 입이 먼저 열린다.
"카일경께서 이곳에 계신다는 말을 듣고 왔습니다.
그와 긴히 할말이 있어 데려가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아아- 물론이다네. 어려워 하지말고 자네도 식사를 다했으면 이만 나가봐도
되네."
분명 실례 하겠다는 말을 남겼지만, 체면을 살리기 위해 '나가봐도 되네-'라고 말
하는 왕의 모습에 비웃음을 뛴 카일은 비센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그대로 그를 지나쳐 왕과의 마찬이 있었던 장소를 벗어나던 카일은 자신의 뒤를 따
르는 구두소리에 쓴웃음을 지었다.
저 행동이나 표정을 보아 자신은 어지간히 미운털을 박힌 모양이다.
하지만 칸크빌레를 여자로 오해한 녀석을 가만히 둘수는 없을 노릇이었다.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녀석의 아름다운 첫사랑에 대한 추억이 더럽
혀 질까 차마 말을 못하겠다.
이렇듯. 귀여워 하는 녀석을 다루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나지막히 한숨을 쉰 카일은 근처의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스락.
"오랜만에 보는구나-라는 입에 발린 말은 집어치우고, 뭔가 용건이라도 있는 거냐.
비센-"
"..여전하시군요."
"뭐, 나야 언제나 멋지지."
거드름을 피우던 카일은 그러나 아무런 동요없이 자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비
센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했다.
이 녀석, 너무 고지식해서 농담이 통하질 않으니 꽤나 피곤하다.
그것은 비센도 마찬가지여서 느물거리며 화제를 비껴가는 그 모습이 그닥 달갑지
않았다.
전에는 그냥 이해하고 말았는데, 앙금이 남자 전처럼 좋게만 볼수가 없는 것이다.
근처에 세공된 조각들과 아름다운 정경에 시선을 주던 비센은 살짝 입술을 깨물고
입을 열었다.
".....그.. 소녀는.. 아직도 찾지 못했습니다."
"? ..........아아- 그 무희단 소녀를 말하는 건가?"
여장 한 칸크빌레를-
어떻게 하면 이런 목석에 딱딱하다 못해 바늘 한뼘 들어가지 않을 비센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정말로 궁금했다. 게다가 그는 남성의 몸이 아닌가.
나중에 그에게 살짝 언질을 해볼까하고 생각하던 카일은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 색
의 눈동자에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푸른빛의 눈동자가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더이상 장난을 치면 이 귀여운 조카는 삐져서 두번다시 자신을 보려하지 않을 것이
분명함으로 카일은 조금은 사실을 말해주기로 한다.
"실은 나도 널 위해 꽤나 찾아다녔지만, 그녀의 모습을 찾을수는 없었어."
"그런-"
정보력에 있어서 타의 추측을 불허한다는 카일이 그녀에 대해서 알지 못하다니.
그렇게 되면 정말로 두번 다시 만날수 있는 일이 없어진 것이다.
암울함에 안색을 어둡게 만드는 비센의 얼굴에 웃어보인 카일은 조금 장난을 쳐볼
까 한다. 저들 무리도 요새 꽤나 신경이 예민해 졌는데, 조금은 즐겁게 하는 것도
좋을 테지-
카일은 자신이 호의를 베푼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의 행동은 흔히 민폐라고도 불
리기도 한다.
"실은 그녀의 오빠를 만나서 말야-"
자신의 말에 얼굴을 드는 비센이 마치 강아지 같다고 생각하며 이를 들어내 웃는
카일은 마치 육식동물을 연상케 한다.
'그녀의 오빠라니-'라며 성급하게 입을 여는 비센의 어깨를 두들인 카일은 호인인
척하며 입을 열었다.
"칸양의 그 오라버니를 만나는 길이니 함깨 가도록 하지-"
만약 칸이 근처에 있었다면 바로 검을 날렸을 것이다.
".............엥?"
어째서 이놈이 여기에 있는 거지.
얼굴을 붉히며 자신이 비센이며 그라센 국의 장자라고 소개하는 청년을 바라보던
칸은 저도 모르게 뒤에 서있는 에스를 바라 보았다. 하지만 그는 저 사내에게 자신
의 모습을 보일수가 없기에 다른 곳으로 숨었는지 보이질 않는다.
분명, 발챠로 납치된 유헌을 구하기 위해 무희단의 소녀로 가장했을 때 자신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자이다.
평범하진 않을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하나 그라센 가의 적자일줄은 몰랐다.
그렇다는 것은 현 여왕의 아들이니 다음대 왕이지 않은가.
게다가 저 카일의 조카. 정말이지 믿을수가 없다. 이런 악연일 있다니-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올려놓던 칸은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비센의 푸른 눈동
자가 반짝반짝 빛나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칸양의 오라버니 되신다고요-
다시한번 소개합니다만, 전 그라센의 비센 폰 그라센 나듀로스라고 합니다."
그런 긴 이름 알려줘 봤자 외우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칸은 손을 잡고 흔드는 비센의 뒤에 서서 딴청를 피우는 카일을 죽일듯한 시선으로
노려 보았다.
유헌이 자신의 꺼림직한 과거를 알게되면 어쩌려고 이런 놈을 데리고 왔는지-
여장을 했을 당시엔 꽤나 즐거운 유희거리였지만, 지금 자신의 몸은 성장해 있었
다.
이런 모습으로 돌아와서 여장을 해서 만난 사람이라니- 웃음거리 밖에 안된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 지요."
"..아아- 카..........칸크-라고 불리우죠."
어색한 미소를 지은 칸은 자신의 옆에 서있던 유헌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등뒤가
축축해 짐을 느꼈다. 에스놈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눈앞의 이놈은 자신보다 여장을 했던 당시 함께 있었던 에스를 더 잘 기억하고 있
을터이니, 녀석이 나타나면 비센이라는 자의 시선이 그리로 돌아갈 텐데! !
하지만 피곤한 일은 사양이었던 에스는 벌써 다른 곳으로 피신해 있었다.
"칸크-. 좋은 이름이군요."
".......아아."
웃기지도 않은 이름을-
띠꺼운 표정을 짓고있는 칸이었지만, 비센은 더할나위 없이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 칸양과 너무나 닮아 놀랐고, 자신이 알고있는 그 누군가와 판
박이라 심장이 내려앉을 정도로 놀랐다.
황금빛의 눈동자와 검청의 머리카락에 쌓인 아름다운 얼굴.
지금은 죽고 없지만, 한때 대륙을 잡아 흔들었고, 어린 아이들의 공포의 대상이었
던 자. 빤히 칸의 얼굴을 바라보던 비센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사심없이 말했다.
"중앙국의 전 황제 칸크빌레 폐하와 아주 판박이군요."
".....! ! !"
여유롭게 서있던 라헨이 물고 있던 과일의 씨를 뱉어내고 라프헨이 넘어져 들고 있
던 그릇을 떨어 뜨릴뻔 했다. 뭔가를 작성하고 있던 노웬은 삐져나간 글씨에 혀를
차며 뻣뻣하게 굳은 칸과 유헌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와 닮았으니 많은 고생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아하하- 뭐, 그다지- 그...그렇지 유헌?"
"그렇죠. 저희같은 무리들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과 알리도 없고."
"맞아, 맞아. 내말이 그거라니깐."
버벅거리며 식은땀을 흘리며 허둥지둥 말을 늘여놓은 칸과 유헌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그렇지-'라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런 두사람의 모습에 전혀 사심없는 미소를 지은 비센에 고개를 끄덕인다.
"죽은 자가 살아나지 않은 이상 당신이 그분일리가 없죠- 하지만 다음번 가장 무도
회때 함께 참석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많은 인기를 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전에 루드빌의 브레스에 몽땅 날라가게 될거다.
절대로 그런 일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사양이다-라고 거듭해서 강조하던 칸은 옆
에 서있는 유헌의 손을 잡았다.
전혀 몰랐지만, 자신의 얼굴을 꽤나 알려진 모양이다.
앞으로 행동에 조심을 해야한다는 압박감에 절로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런 칸의 얼
굴을 바라보던 유헌은 비센의 뒤에서 여유자적하게 서있는 카일을 노려 보았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친한 듯 손을 흔드는 모습이 더 얇미웠다.
"그런데.. 칸양은 어디에ㅡ 있는 지."
"와-악! ! !"
비센의 물음에 엄청 당황한 칸이 손을 뻗으며 소리를 질렀지만, 유헌은 고개를 갸
웃하며 '칸양?'이란다.
그런 그의 모습에 식은땀을 흘리던 칸은 이내 알았다는 듯이 손바닥에 주먹을 내리
치며 밝게 말하는 유헌의 음성에 절망의 신음소리를 질렀다.
"분명, 칸이 여장했을 때가 있었죠?
그래서 배운 춤과 노래를 불러주다 다른 사람들한테 엄청 구박 당했잖아요-"
"...........크-윽."
"뭐야- 설마하니 그런것 때문에 그렇게 굳어 있었던 거예요.
다 알고 있는건데 새삼스럽게."
눈을 가늘게 휘며 웃어보이는 유헌의 얼굴은 확실히 예뻤지만, 원망스러운 기분이
든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아직 아이의 모습일때 배운거라며 유헌이나 다른 자들 앞에서
오만가지 쇼를 벌였었지- 몸이 커져서 수치스러운 기억을 애써 잊고 있었는데, 유
헌에게 그런 추한 과거의 일은 떠올리게 하기 싫었는데, 이 비센인가 뭔가하는 놈
때문에 다 소용이 없게 되었다.
분함에 이를 갈며 그를 쳐다보던 칸은 그러나 눈앞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 것을
발견하곤 입을 다물었다.
아뿔사-라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만다.
"칸이...여장을 한 모습?"
"......아..저 그게..;;;"
".......무슨 소리인지 자세히 들려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저 바보같은 도령인줄 알았는데, 그것만이 아닌 듯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날카
롭기 그지없다. 그런 그의 얼굴을 확인하며 입술을 깨문 뒤에 서있는 카일에게 어
떻게 좀 해보라는 시선을 던졌다.
네놈이 데려왔으니 일을 수습하고 당장에 사라지는 듯한 그 눈동자에 한숨을 쉰 카
일은 자신의 조카에게로 걸어갔다. 환상을 깨주기 위해 왔다지만, 자신의 의도는
전혀 먹히지 않은 듯, 비센의 어깨를 딱딱하게 굳어있다.
다른 때는 그냥 가만히 있는 녀석이지만,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은 일에 관한한 정
말 불같이 화를 내는 녀석인지라 그게 걱정이다.
그 무희단의 칸양이라는 그녀가 지금 눈앞에 서있는 칸크빌레였다-라고 한다면 그
의 표정을 어떻게 변할 것인가.
"자- 비센, 이들은 오랜 여정으로 지쳤으니-"
"칸님! !"
덜컹! ! !
비센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던 카일은 익숙한 음성이 들리자 표정을 바꾸며 몸을 돌
렸다.
방안에 들어선 에스는 칸들분만 아니라 카일과 알수없는 사내가 있자 잠시 몸을 주
춤했지만, 일의 심각성에 입술을 깨물고 칸에게로 걸어가 그의 몸을 뒤로 끌었다.
유헌의 손을 잡고있던 칸은 그런 그의 행동에 요상한 표정을 지으며 질질 끌려갔
다. 노웬이 앉아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곳에 칸과 유헌은 세워놓은 에스는 침을 삼
키며 입을 열었다.
"방금, 중앙국의 황제가 입성했다고 합니다."
"............."
"........칸."
급속도로 굳는 칸의 얼굴에 유헌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칸의 어깨에 손을 집고 에스를 바라본 유헌은 다음말을 재촉한다.
유헌의 시선을 받은 그는 작게 얼굴을 끄덕이며 노웬을 바라 보았다.
"황제를 위시한 기사단의 수는 백여명. 게다 성밖에 일백의 기사들이 도열해 있다
고 합니다. 이례적인 일이라 뮤트롱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왕조차 당황해 어쩔줄을
몰라하고 있답니다."
"........축제가 있는 상황에 기사들을 끌고 왔다는 건가-"
바로 내일이 뮤트롱가의 공주가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다.
규모가 규모이니만큼 각지의 요직 인물들이 모여있는 이곳에 기사들을 끌고온 중
앙국 황제의 모습은 아무리 좋게 평가해도 침략의 의도이상으로 비취지진 않을 것
이다.
왜 이런 무모한 짓을 하는건가-하고 생각하던 노웬은 딱딱하게 굳은 칸의 얼굴에
시선을 주었다. 그런 노웬의 시선을 받은 칸은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전면전을 할 생각인거다. 녀석들은-"
"..........무모하군요."
그렇게나 몸이 달아있는 건가-
헛웃음을 흘린 노웬은 들고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무모하다. 너무나 무모했다.
이런 일을 벌이고도 대륙에서 중앙의 위신이 세워지리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중앙국의 황제 이자키엘은, 이곳에서 칸크빌레 일행과의 결전을 벌일 생각인 거다.
입술을 깨무는 칸의 얼굴을 바라보던 유헌은 얼굴을 굳히며 시선을 돌렸다.
분명, 이곳에서 큰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온몸에서 울리는 경보를 느끼며 손을 펴보인 유헌은 전에 융텐이 일러주던
주문을 되뇌어 보았다. 이자크가 왔다면 그 적룡도 와있을 것이다.
융텐이 알려준 것이 먹힐지는 의문이지만, 안하는 것보다 낳을 것이다.
이번엔 반드시- 그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는다.
결의를 다지는 유헌은 펼쳐진 손을 주먹 쥐었다.
"뭔가 할말이 있는 건가-"
"아..아닙니다. 부디 편하게 쉬십시오. 만약에 팔요하신 것이 있다..."
"내가 필요한 물건들은 없다. 그러니 물러 가도록."
같은 왕이지만, 그 사이에 존재하는 악력이란 무시할수 없는 것이다.
동에 존재하는 나라들은 엄연히 따지자면 중앙에서 이민온 자들이 세운 나라이기
에, 동의 어느 지역에 가든 중앙의 황제는 존중된다.
그것에 대해 불만을 터트리며, 어째서 중앙의 황제가 기사들을 끌고 이곳에 온것인
가- 나라에 대한 예우는 없는 것인가-하고 호통을 치려던 뮤트롱의 왕은 막상 이자
크와 대면하게 되자 꼬리를 내릴수 밖에 없었다.
그런 왕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 보던 이자크는 되었으니 어서 물러가라는 듯이 몸
을 돌리고 망토를 벗기 시작한다.
그런 그의 모습에 허리를 숙여 보인 뮤트롱의 왕은 서둘러 문을 나선다.
덜컹.
서둘러 나서려던 그는 문앞에 서있는 인물에 부딫혀 방안으로 몇걸음 물러 날수밖
에 없다.
감히 누가 왕의 앞길을 막는가 하고 미간을 찌뿌리며 얼굴을 들던 그는 그러나 불
쾌한 듯 미간을 찌뿌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적발의 미녀의 모습에 멍하니 입을 벌렸
다.
"뭐냐- 인간."
엄청난 미모와 온몸에 묻어나는 오만함과 당당함.
뮤트롱의 왕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뒤로 물렸다.
다른 이들의 수만가지의 소리와 소문을 듣는 것보다 보는 순간 바로 알수가 있었
다. 이 여성의 모습을 빌린 자가 바로 중앙국의 수호자인 적룡 루드빌라겔이라는
것을-
안면히 딱딱하게 굳어 자신을 망연히 올려다 보는 인간을 가만히 내려다 보던 루드
빌은 입술을 비죽히 내밀며 왕을 옆으로 내치며 방으로 들어갔다.
강하게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자크를 향해 환한 미소
를 지어 보인다.
"인간의 왕이 아니라면 저런 녀석따위 단숨에 죽였을 텐데-"
"자신의 미관에 맞지 않는다 해서 아무나 죽이는 일은 삼가 주십시오."
'뒷처리를 언제나 제 몫이지 않습니까.'라며 이맛살을 찌뿌리는 이자크의 모습에
뾰로통한 모습을 보인 루드빌은 가볍게 걸어가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벗는 옷을 받아던 그녀는 장난스럽게 윙크를 하며 황제의 구겨진 이마를 꾹꾹 눌러
준다.
"너무 그러지마- 사랑하는 칸크빌레가 이곳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루드빌. 아무리 당신이라도 그런 말을 한다면 용서치 않아."
"................미안."
그녀답지 않게 금세 풀이 죽어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이자크는 한숨을 쉬었지만 위
로해 주지 않았다. 용들은 변덕쟁이라 언제나 당당한 모습으로 있다가도 간간히 아
이같은 모습을 보여줘 사람들을 당황케 하는 것이다.
의도하지 않은 것이지만, 그런 점을 이용해 위로를 받는다거나 하는 것은 옮지 않
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은 이 적룡에게 너무 얽매이는 것은 좋지 않다고 느낀다.
진정으로 하나의 인간으로 거듭나고 싶다면, 불가능 하지만 루드빌과의 연결을 끝
어야 하는 것이다.
칸크빌레 앞에 당당히 맞설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선 말이다.
".........이곳에.."
이곳에 칸크빌레가 있다.
이미 사람을 풀어두어 카일이 있는 숙소에 칸크빌레와 그 일행들 그리고 그 유헌이
라는 소년이 함께 있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지금 당장 달려가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며 눈을 감은 그는 호흡을 바로했다.
지나친 흥분은 일을 그리치게 한다. 냉정한 가슴과 상황을 정확히 집어내는 눈이야
말로 이번에 자신에게 확신을 줄 것이다.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은 결코 틀린 것은 아
니라고, 나쁜 것은 바로 칸크빌레인 거라고.
나직히 그의 이름을 되내인 이자크는 흔들리는 눈가에 힘을 주며 주먹을 쥐었다.
초조해 할필요는 없다.
조금만 기다리면, 바로 내일이 다가오면 두사람 중 누가 옮은 건지 확실히 알게 될
터이니-
"........이자키엘.."
밖을 내다보는 이자크의 모습에 입술을 깨문 그녀는 눈살을 찌뿌렸다.
왜 저 아이가 이토록이나 괴로워 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된 것은 칸크빌레 이전
에 그 다른세계에서 왔다는 유헌이라는 소년의 잘못이 컸다.
그런 아무것도 아닌 녀석이 이자크와 칸크빌레 사이에 끼어들면서 이런 일이 벌어
진 것이다. 그가 나타나기 이전에 자신들은 아무 문제없이 잘 흘러가고 있었는데,
모든 평행줄을 끊어버린 이계의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던 루드빌은 이번에야 말로
반드시 처리할 것이라고 결심한다.
그래야만 이자키엘도 칸크빌레도 평안을 찾게 될 것이다.
분명, 그렇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게 해야 한다.
"뭔가 묘한 기분이 드는 군요."
".....뭐가?"
자신을 바라보는 요크발의 시선을 느끼며 돔은 가슴에 손을 올렸다.
알수없는 긴장과 초조, 그리고 기대감.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닌 이질적은 감정에 가슴속에 파고 든다.
요크발이 걱정할까봐 내색하지 않은 돔이지만, 이런 자신의 감정이 아닌 것이 몸속
을 파고드는 것은 그닥 반갑지 않은 것이다.
계속 앉아 있으면 자신의 이상을 알아차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날 것이 분명하기에
안색이 파리한 요크발에게 인사를 한 돔은 서둘러 방에서 나왔다.
그런 그의 모습을 이상한 듯 바라보던 요크발은 그러나 나른한 몸에 한숨을 쉬며
몸을 뉘었다. 이자키엘의 갑작스런 냉대와 루드빌에 대한 스트레스로 요즘 너무 많
은 일을 처리하다보니 몸이 조금 축난 것 같았다.
피곤한 미간을 찌뿌리던 요크발은 서류를 들고 오라던 사이키가 오면 좀 쉬겠다고
다시 돌아가라는 말을 전하고 침대로 들어갈 생각을 했다.
몸이 힘들면 싫은 생각을 안하는 점은 좋았지만, 이러다 정말 쓰러질 것 같다.
똑똑-
".......사이키 인가."
"....요크발님."
생각보다 그가 빨리 왔군-이라는 생각을 하던 요크발은 주저하는 미성의 음성이
들려오자 고개를 들었다. 무척이나 피곤한 안색으로 의자에 앉아있는 요크발의 모
습을 발견한 론은 머뭇거리며 문을 반쯤 연채로 서있었다.
그런 자신의 뒤로 도열한 시녀들이나 기사들이 큰일 났구나-라는 시선으로 바라보
고 있는 것따윈 조금도 알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저런 무례한 폼으로 요크발의 방에 들어간 자는 없을 뿐더러 저보다 양호
하게 들어간 자들도 목이 베이던 때도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귀엽게 생긴 시종이 요크발의 검에 두동강이 날꺼라고
생각하던 기사들과 시녀들은 그러나 그가 아무 이상이 생기지 않고 방안으로 들어
가자 눈을 크게 떴다.
탁.
"요크발님."
"무슨 일이냐? 사이키의 곁에 있으라고 했을 터인데."
"저..그게. 요새 좀 피곤하신 것 같아서.."
머뭇거리며 테이블에 향초를 놓는 행동에 요크발은 한쪽 눈썹을 살며시 올렸다.
그런 그의 모습을 눈치채지 못한 론은 테이블에 올려둔 향초에 불을 붙이고 연기가
요크발 쪽으로 날라가게 부채질을 했다.
사이키라는 사람에게 부탁해 어렵게 얻은 피로회복의 초다.
이것이 있으면 내내 피곤한 안색인 자신의 주인이 조금이나마 건강해 질수 있을 것
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환한 미소를 짓는 론에게 요크발은 어이없다는 표정
을 지었다.
사람을 암살하는 법에는 무기나 독을 타는 것 외에도 저런 초를 타 공기중에 독을
스며들게 해 그것을 마시게 함으로써 죽이는 방법도 있다.
신분이 신분이고 성격이 만만찮은 요크발은 지금까지 수만은 암살시도를 받아왔
다. 만약에 저 어리버리한 론이라는 녀석이 아닌 다른 놈이 초를 피우려 했다면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을 것이다.
이내 미소를 지은 요크발은 몸을 편하게 뉘우며 몸의 힘을 뺐다.
이곳에서 믿을 수 있는 녀석을 뽑자면 저 론이라는 녀석도 분명 한손안에 꼽힐 것
이다.
"어디서 난거냐. 꽤나 향이 좋군."
"사이키님에게서 얻은 겁니다. 효과가 있다면 무척이나 기쁠 거예요."
과연 사이키 녀석인가.
론이 아닌 다른 녀석이 이런 짓을 했다면 호통을 치며 물러나게 했을 것이다.
머리좋은 짓을 하는 사내의 얼굴을 떠올려 보던 요크발은 론에게 차를 부탁하며 감
은 눈을 떠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론이 차를 타기위해 다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을 들으며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
던 그는 주먹에 힘을 주었다. 어찌 되엇든 거사는 내일 벌어질거다.
공주의 결혼식을 축하하러 수만의 사람들이 모이니 복잡하긴 하지만, 그만큼 습격
하기 좋은 타이밍은 없지. 하지만 그 방법으로 칸크빌레를 쓸어 버린다 해도 싸움
에 희생된 자들의 처우는 어찌할 것인가.
이자크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답지 않은 이런 방법으로 그 황제는 무엇을 얻으려 하는 거란 말인가.
분명 이 일은...
"루드빌의 생각은 아닐테지.."
".........네?"
"아무것도 아니다."
적룡은 중앙국에 해가 가해지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일은 이자크가 그 깐깐한 적룡을 설득해 벌이는 일이라고 할수 있는
것이다. 알수없는 노릇이다.
지금까지 루드빌의 말을 제일 잘듣던 자는 바로 그 황제였다.
용과 동등한 위치에 있던 자이지만, 그와 동시에 적룡의 가장 좋은 심복이기도 한
그 자가 나중에 그녀의 분노를 사게 될 일을 벌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리고 그 적룡이 냉정한 사고를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
던 요크발은 유헌의 모습을 떠올리곤 쓴웃음을 지었다.
루드빌과 그와 감응하는 자신에게 커다란 통증을 준 이계의 소년-
돔이 알려 주었다. 아마도 그 소년때문에 루드빌에 다친 것 같다고, 그렇다면 루드
빌이 황제의 행동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인가.
드래곤의 몸으로 인간에게 그런 수모를 격인 것은 처음일 테니, 아마도 다른 것은
생각할 여유조차 없겠지. 그녀는.
헛웃음을 지은 요크발은 점점 다가오는 내일이라는 시간이 기대 되었다.
바스락.
"............"
카일이나 다른 일행들이 머무른 숙소에서 나온 유헌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모두들 황제가 뮤트롱에 입성했다는 것에 굉장히 놀란 모양인지 갑자기 급하게 움
직이기 시작했다.
전에는 분명 자신들을 쫒아 올거라고 여유있게 웃어보이던 사내들이 안색을 달리
하며 이런 저런 준비를 하는 모습은 유헌에게 묘한 느낌이 들게 했다.
노웬과 사라진 칸과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비센이라는 남자의 어깨를 잡고 방에
서 나가는 카일의 뒷모습에 시선을 주던 그는 자신이 이곳에 있어봤자 할일이 없음
을 깨닭고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자신에게 적의 움직임을 저들보다 빠르게 느낄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여기저기에
돌아다니며 적들의 위치를 알아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바삭.
눈앞을 가리는 풀들을 치워내며 한참을 걷던 유헌은 자신이 이 넓은 성의 숲에서
길을 잃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아무것도 생각치 않고 무작정 길을 걸은 것에 대한 폐해인가-
뭔가 한심한 생각에 한숨을 쉬며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숨을 고르던 유헌은
머리에 떨어지는 꽃잎에 묘한 시선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머리위로 꽃잎이 떨어지는 경험을 두번했다.
한번은 황제를 만났을때, 그리고 나머지는 미할라를 만났을 때이다. 두근거리는 심
장에 손을 올려놓고 고개를 든 유헌은 그러나 자신에게 꽃잎을 뿌린 사람이 다름아
닌 유크렌이라는 것을 깨닭곤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이 용과 이렇게 마주한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몸이 자라버린 유크렌을 일부러 피하다 보니 성인의 몸은
그와는 그닥 대화를 해본적이 없다.
"여기서 뭐하는 거냐."
"그러는 유크렌은 융텐을 어디에 두고 여기에 있는 거야."
"흥- 그따위 용따위, 난 모른다고."
심드렁히 대답한 유크렌은 엎드려 있는 나무에 손을 뻗고 눈을 감았다.
잘도 저런 나무 가지위에 저렇게 편한 자세로 누워있구나 싶어서 앉아있던 자리에
서 일어난 유헌은 그에게 손을 뻗었다.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유크렌은 아이를 베고있는 자이다.
아이를 벨때의 대우는 물론 인간과 다르겠지만, 저렇게 배를 깔고 위험한 곳에 누
워있는 것은 안좋아 보인다.
"그런 곳에 있지말고, 밑으로 내려오는게 어때."
"숲의 용인 녹룡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일은 없다고- 걱정하지마."
물론 그렇겠지만, 상대가 저 유크렌이다 보니 괜히 걱정이 된다.
들어올린 손가락을 꼼지락 대보이던 유헌은 그러나 유크렌이 내려올 기미를 보이
지 않자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려 놓았다.
정말이지 몸은 자랐지만, 말을 안 드는 것은 여전하다. 얄미운 감정이 잠시 들었지
만, 모습이 변했어도 그렇게나 아끼던 존재인데다 아이까지 있는 유크렌이다.
나무에서 멀찍히 떨어진 유헌은 혹여라도 유크렌이 떨어지면 잽싸게 달려가 받아
줄 생각을 하며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이렇게 되면 적의 전력을 알아보기는 커녕, 용보기를 할판이다.
"칸녀석은 어쩌고 너만 이곳에 와 있는 거야?"
"그는 따로 할일이 있으니.. 난 그냥 산책 나온거야."
"관둬.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이 걸어다니다 괜히 일을 치면 민폐라고, 쓸데없는 일
은 삼가고 얌전히 있는게 제일 좋아."
"............헤-에."
나른하게 말하지만 그 말투에 들어있는 걱정과 예리함에 유헌은 다소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몸만 자란줄 알았는데 생각하는 것도 달라진 것 같다.
놀랍다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유헌의 시선에 고개를 돌린 유크렌은 얼굴에 부딫
히는 바람의 감각에 만족의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조금 있으면 융텐이 먹고
싶어하던 열매를 잔뜩 가져올 터이니, 그것을 먹으면서 좀더 바람을 쐬어야 할 것
같다.
저번의 흥분으로 배속의 기가 많이 흩틀어 졌지만, 휴식을 취하는 동안 많이 안정
된 것 같아 다행이다.
유크렌의 지금 소망은 오로지 정상적인 헤츨링의 알을 낳는 것이었다.
다른 녀석들이 코앞에 싸움이 다가와 우왕좌왕 한데도 그는 이번에는 아무것도 안
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융텐도 마찬가지로 아이의 부친인 녀석이 괜히 날뛰면 영향
을 받는 것은 이쪽이니, 이번만은 그 변태흑룡도 얌전히 있으라고 할 예정이다.
"유크렌."
"왜-"
"..........이번에 도와주지 않을 거지."
아이를 위해서라곤 하지만, 내내 마음에 걸리던 것을 끄집어 내는 유헌의 질문에
유크렌이 얼굴을 돌려 검은 눈동자를 지닌 인간을 내려다 보았다.
이곳 대륙에 존재하는 인간들과는 확연히 다른 존재.
자신의 종족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인간이 불안한 눈빛으로 매달리 듯 바라보는 것
은 묘한 기분이 들게한다.
아이가 없고, 자신이 전에 그 어린 마음을 품고 있을 때였다면 약간의 망설임 후에
도와줄지도 몰라-라는 애매한 답을 했을 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인간들과의 싸움과 헤츨링의 출산은 비교조차 될수없는 것이다.
유헌의 얼굴을 바라보던 유크렌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너희일에 끼어든 것 자체가 이상한 거였다.
슬슬 균형을 맞추는 것이 좋겠지."
"..........유크렌."
"너희들의 무운을 빌겠어."
번복의 여지를 주지않는 유크렌의 모습에 유헌은 쓴 웃음을 지었다.
이번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잘 자다가 깨어나 자신들에게 잡히고, 질질 끌
려다니다 저 융텐의 아이를 밴 유크렌일지도 모른다.
씁쓸함을 느끼며 다소 부드러워진 유크렌의 얼굴을 바라보던 유헌은 고개를 숙이
며 입을 열었다.
"그동안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
처음으로 유헌에게 존댓말을 들었다.
그 이전에 느껴지는 가슴을 파고드는 충만한 감각에 유크렌은 무척이나 부드러운
표정으로 유헌을 내려다 보았다.
원하지 않은 인간들 과의 유희였지만, 나름대로 즐거운 여행이었다고 느낀다.
한동안 유헌의 얼굴을 바라보던 유크렌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익숙한 기가 감지되
자 안색을 굳히며 근처에 뻗어져 있는 나무가지에 손을 뻗었다.
"유크렌?"
"융텐의 기가 느껴져.....그리고 또 다른 기분나쁜 기가 감지되는 군."
나무잎에 둘러 쌓이는 유크렌의 모습에 당황해 그의 이름을 부르던 유헌은 용의 입
에서 나오는 말에 안색을 굳히며 뒤를 돌아 보았다.
융텐의 기와 다른 기분나쁜 기가 느껴진다는 것은 요크발가의 사람인가.
아니면 황제 본인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익숙한 얼굴에 떠오르자 유헌은 미간을 찌
뿌리며 자신에게도 느껴지는 기운에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삭.
바스락.
성인의 키만큼 자라있던 나무가 흔들리더니 이내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청년이 모
습을 들어낸다.
"뭐야, 이곳은....... 이렇게나 엉성하게 길이 나있다니."
'주인의 감각을 알수있게 하는군-'라며 중얼거리던 돔은 자신외에 다른이가 이곳
에 있다는 것을 감지하곤 안색을 굳히며 고개를 들어 보았다.
어느 쥐새끼같은 녀석이 숨어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인가.
미간을 찌뿌리며 그곳에 시선을 돌린 돔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채인 유헌을 발
견하고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그건 이쪽에서 묻고 싶은 말이군."
떨떠름한 기분에 저도모르게 입을 연 유헌은 이내, 실따라 가는 곳에 바늘따라 간
다고 황제가 가는 길에 이자가 오지 않았을리가 없다는 생각에 얼굴을 구겼다.
그것은 돔도 마찬가지 인지라 여전히 자신에게 하대를 하는 유헌의 모습이 꽤나 탐
탁치 않은 듯 미간을 찌뿌린다. 게다가 예상이긴 하지만 이 소년 덕분에 루드빌이
나 요크발이 큰 부상을 입지 않았는가.
특히 요크발의 상처는 심해서 몇일동안 침대에 누워있어야 할 정도였다.
워낙에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라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네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그 사람도 와있다는 건가."
".........잘도 그렇게 말하는 군.
그쪽이야 말로 황젠가 뭔가하는 자가 와있는 거 아냐."
유헌의 말에 돔의 얼굴을 굳는다.
현 황제인 이자키엘에 대해 그닥 애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중앙국의 황제
이니 그만한 예우를 해중어야 한다. 이렇게나 무례한 투로 그에 대해 입에 올리는
자를 본적이 없었던 돔은 얼굴이 묘하게 변한다.
그런 돔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유헌은 여기에 가만히 있다간 저쪽 인간들을 줄
줄이로 만날것 같아 발을 돌렸다. 적의 진영을 알기위해 왔다지만, 이렇게 그 적에
소속되는 인간과 만났으니 모두 소용없는 짓이 되어 버렸다.
순순히 일행들에게 돌아가 얌전히 있는 것이 낳을 것이다.
"이봐- 어디 가는 거냐."
"당연한 걸 왜 묻는거야. 당연히 일행들이 있는 곳이지."
".....일행들?"
이렇듯 당당하게 자신들이 있는 곳을 밝히는 건가.
변하는 돔의 얼굴에 그가 저들과 같이 다니기는 했지만, 그닥 중요한 정보에 접근
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닭고 말을 덧붙였다.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으니 말하는 거다. 눈가리고 아웅하는 짓을 별로라서 말야."
더불어 아무것도 모르는 돔을 살짝 비꼬은 유헌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
겼다.
자신의 말에 이내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깨묻는 돔에게 심술궃은 표정을 지어보인
유헌은 가벼운 걸음걸이로 일행이 있을 저택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턱대고 걸어가면 잃어버린 길 입구조차 찾을 수 없게되는 것은 아닌가 했지만,
멀리서 보이는 저택에 저것을 보고 걷기만 하면 무사히 도착할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유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돔은 주먹을 쥐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런 자신의 행동에 돌아보지만, 제지하지 않는다.
단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걸어가는 유헌의 모습에 돔은 한숨을 쉬었다.
전에 유적에서 만나 녀석에게 이런저런 말들을 들었다.
전혀 이해할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말에 그딴 말 집어치우라고 말하지 못한 것
을 전하기 위해 저녀석의 뒤를 따르는 것이다. 그의 말에 감흥을 받아, 결코 칸이나
다른 사람들을 통해 그를 이해하고자 하는 게 절대 아닌 것이다.
"요크발에 걱정하는거 아냐."
"그는 쉬고 있으니 당분간은 찾지 않을 거다."
돔의 말에 유헌은 얼굴을 찌뿌렸다.
저만한 덩치쯤 되면 자신의 일은 스스로 행동하고 해결해야 하는데 요크발의 보호
를 부끄러워 하기는 커녕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율시아의 아들이니 그의 동생이라던 요크발의 보호를 받고 있지 않을까하고 대충
찍어넘긴 것이 맞아 떨어지고 돔의 의외로 어린 것같은 모습에 유헌은 입술을 깨물
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자신의 뒤를 따르는 녀석은 얼핏보면 10대 말이나 20대 초반으로 보인다.
그런 녀석이 설마하니-
.........설마하니 훨씬 어린 것은....
"너.....올해 몇살이지."
"알아서 뭐하려고 그러지?"
"그냥 궁금해서 말야. 나보다 어른이면 말을 높혀야 하지 않을까하고 말야."
유헌의 말에 돔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나이를 알려주기는 커녕 자신에 대한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 하나라도 알려주긴 싫
지만, 그것을 알려주고 녀석의 존대를 듣는 것은 그다지 나쁜 일은 아닌 것 같다.
"올해도 15세가 되는 군."
"..............."
"왜 그러나?"
"........외국인들이 나이보다 많이 먹어 보인다고 하지만..... 어이없네."
생각보다 너무 어린 돔의 나이에 걸음을 멈춘 유헌은 뒤에 따라오는 소년을 바라
보았다. 모습은 자신보다 어른이면서 나이는 자신보다 어리다.
16세라고 하지만, 저쪽 세계에서 자신의 생일은 이미 지났을 것이니 17세는 되었
다. 그렇다면 이 녀석과 자신은 2살차인 나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연상인 쪽으로 말이다.
유헌의 독기어린 눈에 의아한 표정을 지은 돔은 '알았으면 이제부터 나에게 존대를
할건가-'하고 묻는다.
그런 그의 말에 코웃음을 쳐보인 유헌은 손가락을 들어 그에게 내민다.
"난 올해로 17세다. 너보다 2살이나 연상이라는 거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얼핏봐도 나하고 동갑으로 보이는데."
돔도 자신이 여타의 나이 또래보다 더 어른처럼 보인 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앞에서 씩씩대고 있는 이 소년이 자신과 동갑이겠거니, 그렇게 생각
하고 있었는데 2살이나 연상이라니.
자신의 나이를 먼저 알아채곤 속일 생각이었던 건가.
미간을 찌뿌린 돔은 다시 입을 열려고 했지만 그보다 빨리 유헌이 몸을 돌리고선
빠른 걸음으로 사라진다.
"평-생 나한테 존대들을 생각은 하지도 마라. 나이도 어린 것이!"
"...........어이없는.."
뭘 그렇게 열을 내고 가버리는 걸까.
벌써 저만큼 사라진 유헌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돔의 얼굴이 이내 불쾌함으로
찌뿌려 진다.
이런 대우 저 유헌이라는 녀석덕분에 벌써 몇번째 경험하는 건지 모르겠다.
손가락으로 가만히 꼽아보던 돔은 한숨을 쉬며 얼굴을 들었다. 빠르게 사라진 잔상
인지 몇개의 나무가지들이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저 소년의 이름이 가흔인줄 알았다.
하지만 요크발이 그의 이름이 유헌이었다고 정정해 주었기에, 돔은 최근에서 저 소
년의 진짜 이름을 알게 되었다.
가흔이든 유헌이든 자신과 상관은 없지만, 둘다 이상하긴 했지만 유헌쪽이 좀더 괜
찮아서 만약에 다음에 만나면 이름이라도 불러주려고 했거늘..
혀를 찬 돔은 몸을 돌려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되집어 갔다.
" ? "
바닥에서 반짝이는 물체를 발견한 돔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세심한 세공으로 되어있는 한짝뿐의 귀걸이 였다.
누군가 흘린건가하고 생각하던 돔은 이 귀걸이가 저 유헌의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
해 본다.
".......설마.. 어울리지 않아.."
검은 머리카락에 이런 화려하기만 한 귀걸이 보다는 좀더 간단한 것이 더 어울린
다. 그 녀석의 것이라고 확정 할수는 없지만, 아까까지 자신과 그가 있었던 자리다.
자신의 것이 아니니 그럼 그 소년의 것이다-라고 결정을 내린 돔은 한손에 귀걸을
들고 유헌이 사라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몸이 정말로 빠르다. 어느새 사라진건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은 유헌의 모
습에 한숨을 쉰 돔은 주변을 살펴보다 살짝 파여진 땅을 발견하고 살짝 몸을 숙여
보았다.
크기나 파여진 것을 보아 분명 녀석의 것이다.
그런 무례한 녀석이지만, 잃어버린 물건을 가져다 주는 자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라
고 생각하며 돔은 걸음을 옮겼다.
파삭.
"휴- 힘들었다."
다시 길을 잃어버리면 곤란하기에 저택쪽으로 무작정 걸음을 옮긴 유헌은 옷에 묻
은 잎들을 털어 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귀가하기 위해 앞을 가로막는 나무들을 치워내고 억지로 파고 들
어간 곳이 꽤나 되어서 인지 옷에 묻은 잎사귀들의 양이 장난이 아니다.
다른 이들이 봤다면 숲에서 굴렀냐고 할 판이다.
그렇게 되면 정말 챙피한 노릇이기에 손에 힘을 줘서 옷에 묻은 잎들을 마구 털어
내던 유헌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얼굴을 들었다.
"유-헌! 그런곳에 있었던 거야-!"
"............칸."
"정말이지... 걱정하게 하지 말란 말야."
유헌의 모습이 보이질 않자 온 저택을 뒤지고 다닌 칸은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창에서 유헌의 모습을 발견하고 다리에 힘을 풀리는 것을 느꼈다.
잠시 보이지 않는 것뿐인데도 이렇게나 불안하다니- 피곤한 듯 창에 엎드린 칸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무슨일이 있었냐고 묻는 유헌의 모습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본인을 찾기위해 이렇게나 고생한 사람 앞에서 무슨일이 있었냐니.
갑자기 치미는 괘씸함에 창을 딫고 밖으로 뛰어내린 칸은 잽싸게 자세를 바로하고
놀란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유헌의 앞으로 걸어갔다.
"도대체가 말야. 어딜 다녀온 거야- 한참을 찾아 다녔다고-"
"칸, 다음부터 창같은 대로 다니지 말아요, 중심을 못잡아서 다치기라도 하면 어쩔
려고 그러는 겁니까."
"............에?"
"다음부터 절대로 문으로만 다니란 거예요.
나중에 다쳐서 걱정하는 사람들 얼굴보기 싫다면 말이죠."
유헌에게 뭔가 말을 하려던 칸은 그러나 자신이 창을 넘어 온 것이 꽤나 불만인 듯
몰아 붙이는 유헌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뒷걸음 질을 친다.
그런 칸의 모습에 유헌은 한숨을 쉰다.
저런 이층은 괜찮지만 삼층이나 사층의 경우, 넘어오다 넘어지면 어쩌라는 건가.
전부터 말하고 싶었지만, 번번히 말할 타이밍을 놓쳤던 유헌은 이번 기회로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게 되어 시원한 느낌을 받으며 미소를 지었다.
"....들어가지."
뭔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저런 얼굴로 웃는 유헌을 보면 아무것
도 생각나지 않는다. 단지 마찬가지로 미소를 지으며 유헌의 어깨에 손을 집으려던
칸은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린다.
만약에 이곳에 자신들 일행들만 있는 곳이었다면 이쯤에서 끝나도 괜찮을 문제이
지만, 현재 이 뮤트롱엔 이자크, 루드빌을 비롯 수많은 적들이 있는 것이다.
나가서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긴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어쩔 뻔 했나.
유헌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다. 등을 타고 올라오는 소름에 표정을 굳힌 칸은 유헌
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위험한 곳이니 다음부터 혼자서 나가지 마.
나가고 싶으면 나랑 같이가면 되잖아."
".........괜찮았어요. 뭐, 적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지만.."
"뭐? 누구를 만났길래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말을 흘리는 유헌의 모습에 놀란 칸은 걸음을 멈추고 그의 어깨에 양손을 올렸다.
더없이 진지하게 자신을 내려다 보는 칸의 얼굴에서 돔의 얼굴이 자연히 떠오른다.
이렇게나 닮은 부자가 또 있을까- 뭔가 찹착함을 느낀 유헌은 대충 둘러대려고 했
으나, 이내 사실대로 말하기로 한다.
마을도 아닌 성안이다.
어차피 만나게 될 사람이니 미리 언질을 해줘서 놀라게 되는 것은 줄여주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돔을 만났어요."
"...........에?"
"같이 왔나 보더군요- 그리고 저보다 어려서 놀랐어요."
놀라 눈을 크게 뜨는 칸의 모습에 작은 가슴의 통증을 느낀 유헌은 애써 아무렇지
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어깨에 올려진 손을 치운다.
역시나 아들의 이야기가 나오니 놀란 모양이다.
쓴웃음을 지은 유헌은 기분이 점점 어두워 지는 것을 느끼며 건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렸지만, 칸이 그런 그의 팔을 잡는다.
"그 녀석이 왜 네가 만나?"
"........칸."
"여기가지 온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아까는 그냥 안좋은 기분이었지만, 지금의 칸의 모습을 확인하니 뭔가 속에서 확하
고 치미는 것이 있다.
자신의 앞이라고는 하나 본인의 아들을 그렇게 말하는 것을 좋지않다.
굳은 유헌의 얼굴을 미쳐 눈치채지 못한 칸은 연신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
의 턱을 쓰다 듬는다.
돔의 말이나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부친인 칸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렇게 건방진 말을 해대고 행동하는 것이고, 그러면서도 내심 칸
의 관심을 끌고싶어 하는 돔의 마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유헌 자신이 잘 알고있다.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형에게만 쏠리는 부친의 관심을 끌고싶어 얼마나 노력을 했
던가.
끝끝내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곳으로 오게 되었지만, 부친의 애정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유헌의 가슴 한편 깊숙한 곳에 앙금으로 남아있다.
그런 자신의 경우를 보면 칸의 모습은 틀리다.
분명 잘못된 점이다.
"칸, 자신의 아들을 그런식으로 말하는 것은 좋지 않아요."
"........에?"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아니라고 해도, 일단 자신의 아들인데
그런 태도는 좋지않아요. 돔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리는 것을 좋다고요-!"
".....알고..있었나. 돔에 대해..."
"모를리가 없잔하요, 당사자인 칸은 입을 다물고 있지만 주변에서 만나는 모든 사
람들이 당신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 것을-"
자신의 말에 난감한 표정을 짓는 칸의 모습에 유헌은 입술을 깨물고 몸을 돌렸다.
다른 것은 다 좋았다.
물론 자신에게 말을 하고 싶지않은 부분이 있을수도 있고, 숨겨도 뭐라고 하지 않
을 거다. 하지만 이런식인 모습은 정말 싫었다.
이미 알고있는 데도 이런 모습이라니, 이런것은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전개다.
아직도 자신의 팔을 잡고있는 칸의 손을 치워내려던 유헌은 그러나 칸이 손을 치우
지 않자 미간을 찌뿌리며 놓으라고 말했다.
"유헌...."
찡그린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 보는 유헌의 이런 얼굴을 처음이다.
그 얼굴에 입술을 깨문 칸은 자신의 손을 치우려도 저항을 하는 유헌의 다른 팔도
잡아 자신을 똑바로 보게 만든다.
"내 아이가 아니야."
또 무슨 말을 하는 건가하고 얼굴을 들어보인 유헌은 이어지는 칸의 말에 얼굴을
굳혔다.
"돔은 율시아와 이자크의 아이다-"
"............에?"
"그래서... 용서할수 없는 거야. 그런 여자."
언제나 자신과 이자키엘을 가름하며 어느쪽이 좀더 자신에게 이익이 갈까하고 교
활하게 눈빛을 빛내던 뱀같은 여자.
안아주지 않는 자신에게 독설을 내뱉고 한동안 모습을 보이질 않더니 어느새 눈앞
에 나타나 당당하게 아이를 가졌다고, 자신과 닮은 아이를 낳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던- 그 빌어먹을 여자.
자신과 이자크의 사이를 이간질을 한, 몇번을 죽여도 성치않은 여자.
그렇게나 자신들을 건드려 놓고선 상황이 불리해 지니 가자기 청순한 여자로 돌변
해 연기를 하고 있지.
자신을 사랑한다고, 바라봐 주지않은 자신이 너무도 원망스러워 그런 짓을 한거라
고- 아무리 눈물을 흘리며 말해도 이제는 믿지 않는다.
입술을 깨문 칸은 망연한 표정을 짓는 유헌의 몸을 끌어 안았다.
자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집안의 이런 모습을 보이긴 싫었다.
유헌이 얼마나 비웃고 서류상의 부부인 율시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자신을 경
멸하겠는가.
".......돔이 당신의 아이 아니라고..요..?"
"아니야. 율시아는 한번도 안지 않았어. 아이가 생길리가 없다고-"
"하지만 그 얼굴은...."
"이자크도 나랑 같은 얼굴이라는 것이 잊지마."
"...........이런, 말도 안되는..."
헛웃음을 터트리는 유헌의 모습에 칸의 어깨가 경직된다.
그런 그의 오해를 풀어주든지 욕을 해서 기분을 풀던지, 무슨 행동을 해서라도 유
헌의 기분을 풀어 전같은 미소를 보고싶은 칸은 절박한 표정을 띄며 유헌의 몸을
떨어 뜨렸다.
그리고 뭔가 말하려 입을 열던 칸은 눈빛을 빛내며 숲을 향해 검을 휘두른다.
"누구냐-! ! !"
유헌에게 정신이 팔려 누가 접근한 건지도 모르고 있었다.
유헌을 등뒤로 돌리고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던 곳을 향해 검을 몇번 더 휘두른 칸
은 아무 반응이 없자 조심스럽게 접근해 베어진 나무들과 풀들을 치워냈다.
얼굴을 돌려 그 주변을 살펴본 칸은 그러나 아무도 없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검
을 집어 넣었다. 분명 사람의 기척이었는데, 동물이었나.
하지만 동물의 기척을 인간으로 착각할리도 없고, 동물이라면 자신이 놓칠리가 없
다. 의아함에 주변을 살피던 칸은 바닥에 엎드려 뭔가를 집어드는 유헌의 모습에
그리로 걸음을 옮긴다.
"뭐지. ..........귀걸이?"
"한짝뿐이네요. 이곳에 있던 사람이 흘린 걸까요?"
손안에서 반짝이는 화려하게 세공된 귀걸이는 주인의 위치를 가늠하게 한다.
이만한 세공이라면 아마도 백작이상의 귀족이 소유주일 것이다.
한동안 손안의 귀걸이를 바라보던 두사람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돌렸다.
싸움이라면 싸움이랄수 있는 일을 한데다 엄청난 것을 말하고, 들었으니 뭔가 머
쓱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던 두사람은 저택의 입구
에서 자신들을 향해 손짓하는 일행의 모습에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말없이 걸음을 옮기던 칸은 유헌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
다.
"모를거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숨기려고 한적은 없었어.
그저 기회가 되면 말하려고 했지."
"............."
"게다가 집안의 부끄러운 일이잖아. 그런거........
................유헌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라고."
점점 작아지는 칸의 음성에 유헌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칸도 칸이지만, 칸크빌레가 자신의 부친이라고 믿고 자란 돔은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부친이 아닌 자를 그동안 그렇게 원망하며 살아왔는데 다짜고짜 네 부친은
실은 다른 사람이었다-라니.
그건 삼류 코미디에서도 써먹을수 없는 레파토리다.
"만약에 돔을 만나면.... 조금은 상냥하게 대해줘요."
"............."
"아들이 아니라도 그냥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그렇게만도 대해줘요."
자신보다 어린 아이가 고민하거나 진실을 알고 괴로워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사양
이다. 유헌의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칸의 모습에 미소를 지은 유헌은 어쩌면 처음으로 했을지도 모르는 칸과의 싸
움의 여운을 느끼며 그의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