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걸까요."
"글쎄."
창을 들어올리고 이동하는 마차의 무리를 바라보던 라프헨은 나지막하게 들려오
는 음성에 얼굴을 들었다. 라프헨의 맞은 편에 앉아있는 칸과 유헌은 서로 반대쪽
에 붙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정말로 딴생각을 하는지 멍해보이는 유헌과 달리 칸은 그런 그의 눈치를 연
신 살피고 있다.
어떻게 봐도 유헌이 칸을 무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광겨에 라프헨은 초조한 표
정으로 옷자락을 잡았다. 갑자기 그가 그런 모습을 취하는 이유가 뭘까하고 열심히
생각해도 도저히 모르겠다.
집이는 게 샤르비나와 칸님이 사이좋게 지내서 감정이 상한건가하고 생각해 봤지
만, 마차에 오르기전에 두사람은 무척이나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애 유헌의 심기가 저렇게나 틀어진 것일까.
"....어디로 가는 건가요?"
"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라프헨은 자신에게 묻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두손을 무릎위에 올려놓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있는 라프헨을 바라보던 유헌은 무
심하게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라고 물었다.
그제서야 당황한 그가 입을 연다.
"일반은 샤르비나님의 성으로 돌아간다지만, 그 중간에 우리들은 내릴거예요."
"성까지 들어가면 위험한 건가요? 중간에 내려도 괜찮아요?"
"중간에 내려서 직접 일행들이 있는 곳까지 가려고요. 그리고 성은.. 샤르비나님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가지 않는 것이 좋을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렇군...."
라프헨의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유헌은 창에 쳐진 커튼을 들고 밖을 내
다 보았다.
샤르비나를 데리러 온 자들은 설핏 보기에도 상당한 시력을 지닌 자들로, 그녀에
대한 왕의 총애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수 있게 한다.
솔직히 세심한 신경을 쓰지 않는 한 그녀에게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나
빠른 대처를 하는것은 힘든 일인 것이다. 평소에는 왕에대해 험담을 늘여놓던 그녀
도 이자들이 데리러 오자 굉장한 감동한 모습을 보이며 왕의 은혜니 뭐니하고 떠들
어 대서 유헌을 질린 표정을 짓게 말들었다.
정말이지 여자들의 변신은 두려울 정도이다.
덜컹
옆에 앉은 칸의 초조함에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진다.
아까부터 영문을 모른채 일방적으로 무시아닌 무시를 당하고 있으니 당황스럽겠
지. 그렇다고 그런 자신에게 다른 일행들에게 대하는 것처럼 대뜸 성을 내는 것도
아니라서 조금은 대견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자 마침 자신을 보고 있었던지 눈이 마주친 그가 뜨끔한 표정
을 지으며 고개를 돌린다. 그 모습에 이유없이 웃음이 난다.
아무것도 모른채 무시를 당하는 자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한지 익히아는 유헌은 이
쯤에서 마음을 풀기로 해본다.
그래서 입을 열기로 하는 찰나 마차가 크게 기울며 몸이 호되게 문에 부딫혔다.
쿵! !
"...읏!"
"유헌! !"
당황한 칸이 손을 뻗지만, 중심을 못잡아 오히려 유헌의 몸위로 세게 부딫힌다.
그 충경에 숨을 들이키며 사색이 된 하얀 얼굴에 당황한 칸은 말을 더듬으며 밑에
깔린 유헌의 몸을 일으켰다.
"괘..괜찮아? 미..미안.. 내가.."
"...좀 일어나 봐요."
덜컹! !
일어나라는 말에 허겁지겁 몸을 세우려던 칸은 그에따라 좀더 기우는 내부에 안색
을 달리하고 원래의 자세로 되돌아 왔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칸의 모습에 입술을 악문 유헌은 불편한
몸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며 손을 꼼지락 거린다.
"안에 괜찮은 건가요?!"
반쯤 기운 마차안에 구겨진 세사람이 모두 당황하고 있을때 위의 문이 열리고 앳띈
얼굴이 들어난다.
샤르비나를 데리고 온 자들중에 가장 어려보이는 자로 꽤나 자신들을 잘 챙겨주었던
소년의 등장에 유헌은 칸에게 깔린 모습으로 괜찮다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런 유헌의 모습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칸의 마음을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유헌은 지켜주어야 하는데 되려 폐를 끼치고 있다.
안절부절 못하는 칸의 모습에 안쓰러워 몸을 일으키려던 유헌은 그러나 그에 따라
마차가 더 기울자 안색을 달리하며 그에게 깔린채로 몸을 힘을 풀었다.
아무래도 밖에서 도와주기 전까진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윗분부터 꺼내드릴께요."
몇일전에 이근처에 큰비가 내렸다더니 물을 잔뜩먹은 흙이 그만 무너진 것이다.
덕분에 3명의 신관 후보생들이 타고있는 마차가 반쯤 기울게 되어 당황한 파요는
문을 열고 안의 사람들을 꺼내기 위해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단단해 보이는 다른 손
이 자신의 어깨를 잡아 뒤로 민다.
졸지에 마차에서 멀리 떨어지게 된 파요는 자기대신 마차에 매달린 단단한 체구를
지닌 사내의 모습에 입을 벌렸다. 그런 그에게 뭐라고 할수도 없는게 그는 딱 보기
에도 정말이지 험악하게 생겼던 것이다.
단지 입을 비죽히 내밀고 뒤로 물러날수 밖에 없었다.
"손을 내밀어라. 라프헨."
"..라헨..! !"
"우선 라프헨을 꺼낼테니깐, 두사람 중심을 잘 잡고 있으라고."
"네놈 라프헨이 있다고 녀석 먼저..! "
이를 가는 칸의 모습에 라헨은 코웃음 쳤다.
"너라도 나처럼 했을 거다."
그말에 차마 반박을 할수 없었던 칸은 라프헨의 몸을 들려짐에 따라 기우는 마차의
중심을 잡기위해 다리에 힘을 주었다.
일단 라프헨을 꺼내 땅위로 안전하게 꺼낸 라헨은 다시금 손을 내밀었다.
불안정하게 반쯤 기운 마차를 완전히 눕히고 사람들을 뺄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안
에 있는 사람들이 부상을 입을수도 있고, 다시 세우려면 꽤나 많은 힘이 들기에 불
편해도 이런식으로 한사람씩 꺼내고 있는 것이다.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며 밑의 유헌을 먼저 꺼내려던 칸은 그러나 자신의 몸이 완전
히 비키기 전에 움직일수가 없는 그의 모습에 입술을 깨물고 라헨의 손을 잡았다.
"......아아- 무거웠다."
라헨의 손에 의해 칸이 빠져 나가자 한숨을 내뱉으며 입을 뗀 유헌은 저릿저릿한
몸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때아닌 재난이라더니 갑자기 이런 당할줄은 몰라서 정말로 놀랐다.
아직도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을 올려놓고 있던 유헌은 자신 차례라는 듯이 내밀어
진 손을 잡으려 팔을 들다 그가 라헨이 아닌 칸이라는 것에 잠시 움찔했다.
그러나 진지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라던가 이대로 손을 내밀지 않으면 정말
로 그가 상처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술을 깨물고 손을 뻤었다.
자신도 그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은 상황에서 그만이 말하기 싫은 일에 대해선
숨기고 있다고 일방적으로 매도를 하는 것은 상당히 이상한 것이다. 게다가 샤르비
나에게 들은 말이기에 그로썬 무시를 당하는 이유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괜찮아? 유헌?"
"...그럭저럭."
얼버부리 듯이 대답하고 마차에서 나오기 위해 발을 마차 턱에 디딘 유헌은 욱씬하
고 올라오는 통증에 안색을 달리했다.
그러나 금세 칸에게 들어 올려져 통증이 사라지자 잘못 느낀건가 했는데 땅에 발을
딫는 순간 엄청난 통증이 무릎에서 상체로 올라온다.
자신을 부축하는 칸이 손을 잡고 있기에 애써 이를 악물로 참고있지만, 그가 손을
치우면 이대로 쓰러질것 같다.
".......유헌?"
하지만 참고 있는것도 능사가 아니다.
게다가 이런 말하지 않고 혼자서 인내하기엔 꽤나 심각한 부상인 것 같다.
이를 악물던 유헌은 칸을 올려다 보며 그가 절로 미간을 찌뿌릴 만큼 지극히 어색
한 표정을 지었다.
"다..."
"응? 다..가 뭐?"
"다리가 이상한것 같아요...."
다리가 이상한 것 같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허리를 굽힌 칸이 유헌의 몸을
안아든다. 안그래도 전복 된 마차가 한대뿐이라 몰리는 시선이 많은데 그런 눈에띄
는 행동을 하는 두사람에 노웬은 이마에 손을 집었다.
일단 음유시인 역을 맡은 그가 나서서 일행들을 통제할수 없는 노릇인지라 입술을
깨문 노웬은 옆에 앉아있던 젤에게 가보라는 표시를 보냈다.
음유시인을 돌봐주는 역이자 약사역은 맡은 젤은 자리에서 일어나 근처 돌위에 유
헌은 앉히는 칸의 뒤로 걸어갔다. 신발을 벗기고 그의 다리를 주무르는 칸의 모습
에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쉰 젤은 그의 어깨를 두들였다.
정말이지 눈에 띄는 행동을 삼가라고 그렇게나 말했는데..
"제가 볼테니, 물러나 계시죠."
"아니. 내가.."
"아직 견습 신관이시잖아요? 제가 봐드리도록 하죠."
젤의 말에 안색을 달리한 칸은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곤 유헌의 다리에서
손을 뗐다. 자신과 유헌은 일단 견습신관으로 이들과 함께 길을 가는 중이다.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않게 하기 위해서 말도 안하고 유헌의 태도도 그냥 꾹 참고
있었는데, 여기서 이런 요란한 일을 벌이다니.
라프헨에게로 가있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겠지만, 젤에게 다리를 내준 유헌이 미간
을 찌뿌리고 있자 도저히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길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불상처럼
옆에 딱하니 붙어 서있는 칸의 기척에 한숨을 쉰 젤은 유헌의 다리를 쓰다 듬었다.
눈앞의 이 소년이 무슨 매력이 있길래 저분은 이토록이나 집착하시는 걸까.
여자도 아닌 남자아이인데 말이다. 입술을 깨물고 유헌의 다리를 문지른 젤은 그의
다리가 생각보다 심각하자 미간을 찌뿌렸다.
이 소년은 도대체 왜 이리도 손이 가는 일을 많이 만드는 걸까.
"금이 간것 같군요."
".....엣?"
젤의 말에 숨을 삼킨 칸이 몸을 숙여 유헌의 다리를 걱정스러운 듯이 바라본다.
자신이 그의 몸위에 쓰러졌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거라고 생각하는 그는 죄책
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칸의 표정을 확인한 유헌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지
만, 자신의 다리를 강하게 쓰다듬는 손길에 시선을 내렸다.
"저의 힘으로 뼈를 아물게 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나중에 기회를 봐서 융텐님께 치료를 부탁드려야 겠군요."
".......그 정도 인가요?"
"스스로 일어설수 없다면 심각한 부상이죠. 일단 급한대로 응급조치를 하죠."
자리에서 일어난 젤은 샤르비나가 타고 있는 마차로 걸아갔다.
창의 커튼을 걷고 이쪽을 바라보던 그녀는 대충 일을 파악한 것인지 안의 유모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유헌의 다리는 어느 정도인가요?"
"금이 갔을 뿐입니다. 크게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라프헨을 안심시켜 주기위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인
젤은 마차의 문을 열고 나오는 노파의 모습에 그리로 얼굴을 돌렸다.
샤르비나님이 드리는 거라며 건낸 것에는 붕대나 막대기 약등, 급한대로 치료용으
로 쓸수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젤은 감사의 의미로 살짝 고개를 숙이고 유헌에
게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 칸만이 아닌 에스나 라프헨, 라헨들이 모여있는 것을 발견한
젤은 미간을 찌뿌렸다. 변장을 위해서라지만 급한대로 위장한 자신들은 각계각층
의 인물들이 잡다하게 모여있는 집단이었다.
그런 자들이 이렇게나 사이가 좋아서 어쩌자는 것인지.
분명 주위에 사람들은 자신들을 수상하게 여기고 있을 거다.
"잠시 비켜 주세요."
"아, 젤."
자신이 들고있는 것을 보고 유헌의 자리에서 일어난 자들이 그의 치료를 지켜보고
있다. 유헌은 이런일로 부상을 당하고 많은 사람들의 걱정을 하게 만들어서 상당히
챙피한 느낌이 들었다.
만약에 다른 사람들이 다치거나 했다면 자신도 물론 이들처럼 걱정했겠지만, 그게
본인이 되다보니 왜 다치고 난릴까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안 그래도 바쁜 와중에 짐이 되어버렸다는 느낌에 얼굴을 붉힌 그는 다리에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 보았다.
젤이라는 이 여성은 안그래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데 지금은 얼마나 밉게 보일지.
이런저런 생각에 한숨을 쉬는 모습에 곁에 있던 라프헨에 그의 어깨를 두들인다.
"걱정하지 말아요. 저와 칸님이 부축하고 도와줄테니, 당장의 거동에 불편은 없을
겁니다."
"물론 저도 도와드릴께요."
에스와 라프헨, 그리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칸의 모습에 고마움을 느끼는 한편
미안한 감정이 생긴다.
그렇게 다리의 붕대를 다 감을 때쯤 파요라는 소년기사가 자신들을 빤히 바라바고
있음을 눈치챈 유헌은 손을 들어 그에게 살짝 흔들어 주었다.
그것을 어떤 의미로 받아 들였는지 주위의 눈치를 보던 그가 유헌에게 다가온다.
"..많이 다친건가요?"
"그다지. 주위에서 도와준다고 하니 괜찮을 것 같아요."
파요는 유헌의 부드럽게 웃는 얼굴을 넋이 빠진 듯 바라 보았다.
평소 반반한 외모에 기도나 외면서 편하게 살아가는 신관들을 미덥지 않게만 생각
하던 그에게 눈앞의 이 소년은 특별한 존재였다.
신관에 용병에 약사, 음유시인 등등 가지각각의 사람들이 있는 집단은 상당히 의심
스러운 것이라 경계심을 풀지않던 그는 유헌은 발견한 순간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
는 것을 느꼈다.
신관이란 이래야 한다고 모범답안을 보여주는 것처럼 온몸에서 내뿜는 청렴한 분
위기와 아름다운 얼굴과 미소, 게다가 우아한 움직임은 평소 지니고 있던 신관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뀌게 하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양손을 모은채 두눈에서 반짝
임을 뿌리는 소년의 부담스런 모습에 유헌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 녀석은 곤란해지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마차가 일어났나 보군요. 앞으로 잘 몰도록 할테니, 일어나시죠."
쓰러진 마차가 제자리를 찾은 것을 확인한 파요는 유헌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유헌이 그의 손을 잡기도 전에 옆에 서있던 칸이 그의 몸을 가볍게 들어 올
린다. 갑작스런 일에 칸의 품에 안긴 유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릎을 꿇은채로
손을 내밀던 소년기사는 망연히 칸을 올려다 보았다.
그런 그를 서늘한 금빛의 눈동자로 가만히 내려다 보던 칸은 주변의 일행들에게 가
자는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려 마차로 걸어갔다.
"..........뭔가 여러가지 의미로 굉장."
"아무리 봐도 저건 영역표시라는 거지."
"라프헨, 라헨, 두사람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얼굴을 맞대고 고개를 끄덕이는 두사람을 어이없다는 표정을 바라보던 에스는 자
신에게 손짓하는 샤한의 모습에 그리로 달려갔다.
유헌의 상태를 좀더 살펴보고 싶지만, 저쪽도 바쁜 상황인가 보다.
샤한의 마차에는 이미 오브와 유크렌이 타고 있어서 자신은 라헨과 같은 마차에 타
고 있었다. 어서 타라는 뜻이 아닌이상 샤한이 자신에게 저렇게 손짓을 하고 있는
것은 뭔가 할말이 있는 것이 아니면, 일이 생겼다는 건데...
"무슨 일입니까?"
"일단 안으로 들어와봐."
" ? "
다급한 그의 목소리에 미간을 찌뿌린 에스는 마차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다 오
브의 품에 안긴 유크렌의 모습을 발견하곤 안색을 굳혔다.
얼굴 부분부분에 붉은 반점이 돋아나 있는데다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할 정도로 유
크렌은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건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모르겠어. 사막의 영역을 건넌 다음부터 이러는데.. 우리들도 당황스러워서 널 부
른 거라고-"
주변의 시선이 있기에 마차의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간 에스는 샤한의 옆에 앉아
유크렌의 이마에 손을 대보았다. 그러나 인간의 몸에서 날수없을 만큼의 고열을 발
산하는 온기에 당혹한 안색을 지으며 금새 손을 땔수밖에 없었다.
"...녹룡이기에 이곳의 고열을 견디지 못하는 걸까요?"
"모르겠다. 하지만 열만나면 되지 얼굴이나 몸에 나는 이 붉은 점은 뭐냐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유크렌의 몸을 떼지않은 오브는 이를 갈았다.
"그 융텐인지 변태지 뭔지하는 놈때문에 이러는 거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테니
깐 말야."
물론 그 융텐이라는 용이 유크렌을 혹사시키긴 했지만, 꽤나 아끼는 것같으니 이런
짓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말하려던 에스는 그러나 오브의 살벌한 시선에 입을 다물
었다.
혹시나 저 사내 이 녹룡에게 마음이 있는 건가. 그렇다면 절대 곤란하다.
자신들을 인간을 상대라면 몰라도 한사람의 연정을 위해 드래곤과 싸울 맘은 전혀
없는 것이다.
"용이나 인간의 지식으로 뭐라고 단정을 내릴수가 없군요.
일단 유헌군에게 유크렌의 상태를 알려주어야 할것 같군요."
"그 녀석도 다친것 같은데 이 용도 다쳐서 말야... 민폐다. 정말이지."
"그게 다친 사람앞에서 할말이냐? 이 싸가지 없는 녀석아-"
아무 생각없이 내뱉은 샤한은 난대없는 오브의 폭언에 눈을 동그렇게 떴다.
이 상인 나부랭이놈이 집잃고 떠돌아 다니는 것을 불쌍히 여겨 거둬주었더니 이게
왠 건방진 태도란 말인가. 울컥하며 입을 열려는 샤한의 입을 막은 에스는 문을 열
며 그의 몸을 밖으로 밀어 넣었다.
무슨 짓이냐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에게 참으라는 의미의 동작을 취
해보안 에스는 이내 유헌이 타고있는 마차를 가르키며 입을 열었다.
"일단 유헌군에게 가서 융텐이라는 용을 부르라고 해봐요.
유크렌의 상태가 안좋다고."
"왜 내가.."
"어서요. 당신밖에 없잖아요. 빨리빨리-"
손을 내젖는 에스의 모습에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인 그는 어쩔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유헌이 타고있을 마차로 달려갔다.
" ? "
막 출발하려던 샤르비나의 호의단은 갑자기 이리저리 급하게 뛰어다니는 자들에
게 시선을 주었다. 자신들은 한시라도 빨리 샤르비나님을 왕에게로 모셔다 드려야
하는데 덤으로 얻어탄 녀석들이 더 미적대고 있다.
이뻐 보일수 없는 그 모습들에 미간을 찌뿌린 기사는 그러나 커튼을 걷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샤르비나가 조용히 하라는 듯이 손가락을 들어 입앞에 세우자 멎쩍
은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중간에 합류하게 된 자들인데도 저렇게
세심한 배려를 해주는 모습을 보면 과연 왕의 총비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첩들의 잔악하고 포악한 성미를 익히 봐왔던 그는 샤르비나의 밑으로 배정된
자신의 행운에 새삼 감사하고픈 기분이 들었다.
"... 역시 남자라는 것들은 단순하다니깐."
"샤르비나님..! !"
"알았어. '말의 두려움을 알라-' 이거지?"
장난스럽게 눈썹을 올려 보이는 그 모습에 유모는 손을 들어 이마를 집어 보았다.
그런 유모에게 시선을 주던 샤르비나는 천을 걷어 바쁘게 돌아다니는 샤한과 다시
마차에서 내리는 유헌의 모습에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들이 가는 마차는 평범한 인상의 사내와 초록빛 머리카락을 지닌 미모의 청년이
탄 마차이다. 설마하니 둘중 하나가 아픈건가?
그렇다면 그중에서 예쁜 청년이 아프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하는 샤르비나 였다.
달칵.
"무슨 일이죠?"
"몸상태도 안좋은데 미안. 유크렌의 상태가 영 안좋아서 말야."
다급하게 자신을 맞이하는 오브를 바라보다 유크렌의 얼굴에 시선을 준 유헌은 안
색을 달리하며 칸의 부축을 받아 마차안으로 들어갔다.
샤한의 말을 들었을 때는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먹을 수가 없었는데, 막상
유크렌의 모습을 보게 되니 생각보다 일이 심각하다고 느꼈다.
손을 들어 이마를 집어본 유헌은 그 엄청난 열에 숨을 들이켰다.
얼굴에 난 붉은 반점이나 고열을 보았을땐 홍역인가 했지만, 원래 드래곤인 유크렌
에게 그런 증세가 일어날지가 의문이고, 무엇보다 반점을 생소하게 바라보는 일행
들의 반응을 봐서라도 유크렌의 증세가 무척이나 특이하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렇다는 것은 이 증세는 그다지 흔한것이 아니라는...
아리송한 느낌에 다시금 손을 들어 유크렌의 이마를 집어 본 유헌은 미묘하게 다른
기의 비틀어짐에 안색을 달리했다.
"뭔가 이상한 힘이.."
"응? 뭔가 느껴지는 거야?"
다급한 표정으로 유헌의 몸에 손을 뻗으려는 오브의 팔을 잡은 칸은 그를 건드리지
말라는 뜻으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유
헌을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느끼고 있는 것이다.
칸의 배려에 미소를 베어 문 유헌은 유크렌의 이마에 손을 집고 정신을 집중해 보
았다.
다른, 뭔가 미묘하고 기분 나쁜 감각이 손끝에 걸릴듯 말듯이 감지된다.
평소의 유크렌의 기는 온화하고 상당히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는데, 그런 흐름
을 방해하는 이질적이고 거친 기운이.. 마치 마도력의 흐름을 중간에 막아놓으려는
듯한 감각이 느껴진다.
좀더 자세히 느끼고 싶어 가까이 접근하려던 유헌은 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밀어내
는 엄청난 힘에 눈을 뜨고 다급하게 손을 뗏다.
파-직! !
"뭐야?!"
유크렌의 이마와 유헌의 손 사이로 순간적이나마 번쩍인 붉은 빛에 오브가 멍한 표
정을 짓는다.
"유헌 괜찮은 거야?"
"..아아."
유크렌의 이마를 집었던 손을 펼쳐보인 유헌은 손끝에 베어져 나온 핏방울에 미간
을 찌뿌렸다.
뭘까. 유크렌의 몸속에 흐르는 그 기분나쁜 기운과 자신을 밀쳐낸 이 감각은.
주먹을 쥐고 입가에 댄 유헌은 뜨거운 숨을 뱉어내는 유크렌의 얼굴을 바라 보았
다. 무척이나 괴로워 보이는 그 얼굴이 지켜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안타까운
기분이 들게한다.
다친 손을 쥐고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유헌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칸은 유크렌
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까의 붉은 빛. 그리고 사막.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중앙의 드래곤 적룡 루드빌라겔이 가장 좋아하는 조건들이다.
"...........제법이네."
새하얀 침대위에 누워있던 루드빌은 붉은 입술을 우그러뜨리며 손바닥을 펴 보였
다. 십자가로 그어진 붉은 문양 가운데에서 아주 작은 핏방울이 베어나오고 있다.
그 소년이 조금만더 녹룡과 접하고 있었다면 모처럼 걸어둔 주술이 깨질뻔 했다.
한동안 손바닥의 상처를 빤히 바라보던 그녀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손바닥에
베어나온 핏자욱을 하얀 시트에 문질러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더 어이없는 인간일지도."
장난으로 친거라지만 자신의 결계를 이렇게나 접근하던 녀석이 있었던가.
게다가 완전히 사라질 뻔도 했다.
침대가에 걸터앉아 근처의 시트를 끌어 나신의 몸을 둘러싼 루드빌은 창가로 다가
문을 열고 밖의 정경을 바라 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과 더없이 뜨거운 열기. 딱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다.
이렇게나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들이 갖춰졌는데 물러난다면 말도 안된다.
모처럼 그 흑룡이 칸크빌레에게 접근을 못하도록 철저히 막아 놨는데 말이지.
"차려논 밥상이니 먹을 일만 남은 건가."
따스한 햇볕을 향해 두손을 내민 루드빌은 기분좋은 미소를 지으며 나른하니 기지
개를 폈다.
".....흠."
근처의 테라스에서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이자크는 눈가를 비비며 읽던 책을
덮었다.
덥고, 끈끈한 날씨다.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최악의 환경에 입가에 댄 손가락을 살짝 깨문 그는 한동안
책의 표면을 바라보다 이것이 어디서 난걸까하고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바닥에 굴러 다니는 책이었는데 무심코 흩어보니 자신의 기호에 맞아 지금까지 읽
고 있었던 것이다.
"................"
살랑이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그는 이내 알았다는 듯이 눈을 조금
크게 떠 보았다. 그렇다.
이 책은....
"사이키에게 빌렸던 것이로군."
무심하게 중얼거리던 그는 다시 책을 펴 들었다.
딱히 할일이 없는 이상 책을 읽으며 무료한 시간을 떼워야 겠다.
그리고 사이키라는 녀석은 빌린 것을 일정시간 내에 돌려주지 않으면 굉장히 싫은
표정을 짓는 녀석이다.
아무래도 기한이 상당히 지난 것 같으니 빨리읽고 돌려줘야 할것 같다.
유크렌의 상태에 대해 딱히 짐작할수 있는 부분도 없고 더이상 지체를 할수없는 노
릇이기에 일단 이동을 시작하긴 했지만, 일행들의 안색이 다들 좋지않다.
시작은 안 좋았지만 오랜시간 여행을 하게되어 그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진 유크렌
에 대해 미안한 감정과 걱정스런 감정이 복합되는 것이리라.
다시 한번 그의 이마에 손을 집으려 했던 유헌은 그러나 곁의 칸이 불안한 얼굴로
그만하라고 말리자 손을 뗄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의 불안한
얼굴에 유헌은 차마 행동을 지속할수 없었다.
"....왠지 모르지만, 불안한데."
창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리는 오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유헌은 살짝 베인 상처
가 남아있는 손가락을 바라 보았다.
이 힘의 존재도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동에 오면 모든 것이 잘될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일이 점점 꼬이는 것 같다. 사이키라는 사람도 그렇고, 그 마도사의 일도 갑자
기 쳐들어온 농민들도 그렇고, 왠지 모르게 누군가에 의해 몰아져 가는 기분이다.
실제로 그럴만한 사람이 있기에 더 불안한 기분이 드는 걸지도.
손가락을 들어 입술을 쓰담은 유헌은 융텐의 부재가 이런 불안감을 줄지 몰랐다.
그가 곁에 있으므로써 약간이나마 기대는 부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계속해서 그를 불러도 대답이 없자 아까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 묘하게 뭔가
가 벌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유헌."
"........칸."
"괜찮아."
무엇에 대해 괜찮다고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유헌의 그의 말에 작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나쁘게 생각하면 그 생각대로 된다는 말이 있으니 지금부터는 좋은
생각만 해야 겠다.
팔짱을 끼고 고심하는 듯한 유헌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칸은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감싸주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왠지 모르지만 그가 자신을 피하는 것 같기도 하고 부목을 댄 다리가 부러진 것도
마차가 전복되면서 자신이 그의 몸을 덮쳤기 때문이다.
미안함과 약간의 초조함.
칸은 가슴을 술렁이는 감정에 미간을 찌뿌리다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이런 생각보
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좀더 나을 것이다.
이럴줄 알았다면 노웬들이 타고있는 마차로 옮겨 탈것을 그랬다 보다.
유크렌이 아프다는 말에 유헌과 함께 이동하다 보니 이 마차엔 그와 유헌, 오브와
유크렌이 타고 있었다. 오브는 유크렌을 돌보기에 바쁘고 유헌과 유크렌을 말을 걸
수가 없는 상태이니 대화 상대가 없는 칸은 굉장한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왜 열이 내리지 않는 거지. 답답하네.."
걱정스러운 듯이 유크렌을 내려다 보는 오브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칸은 무심
코 입을 열었다.
"설마하나 너 이 용에게 맘이 있는 거냐?"
"......무슨 뜻이냐?"
유크렌의 얼굴은 지극히 자상하게 내려다 보던 오브가 자신을 향한 시선을 사늘하
기 그지없다. 그 기세에 눌린 칸은 그러나 유헌의 옆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가슴을
피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그 도마뱀에게 잘해줘서 말야.. 수상하잖아."
"잘대해 주는 걸로 마음이 있다니- 다들 너같은 줄 아냐?"
"무....무슨 뜻이야? 그거-! !"
얼굴을 붉힌 칸이 말을 더듬자 그 모습을 한심하단 표정을 지은 오브가 유헌을 바
라보며 어떻게 좀 해보라는 시선을 보낸다.
그러나 유헌은 어깨를 으쓱해 보일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그 모습에서 유헌 또한 칸과 비슷한 생각을 품고, 언젠가 물어보고 싶었음을 감지
한 오브는 늘어지게 한숨을 쉬었다. 잘해주기만 하면 마음이 있다는 저연령적인 생
각을 하는 것은 둘이 똑같으니 걱정이다.
"그저 동생같은 마음이야. 난 형제가 있어도 좋은 감정으로 지낸 적이 없으니, 유크
렌을 동생으로 생각하고 정말 잘해주자고 마음먹은 것뿐이라고, 평범한 거야."
형이라는 놈들이 있기는 했지만, 지위를 물려받는 것을 문제로 꽤나 부딫힘이 많았
다. 자신을 죽이기 위해 살수를 푸는 그런 최악인 놈들은 형제로 받아달라고 매달
려도 사양이다.
그에 비해 유크렌은 어떤가.
가끔 건방지고 얌체같은 짓을 해대서 두들겨 패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대게 단순하고 솔직해서 굉장히 귀엽게 굴었다.
그가 처음의 모습에 어린아이였기에 이런 마음이 생겼는지도 몰라도 큰 모습으로
변해도 챙겨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다.
이미 성인의 연애란 걸 해본 오브는 자신의 마음이 애정인지 친애의 정인지 잘 알
고 있어서 유크렌을 대함에 있어 거리낌이 없었는데 주변의 불순한 놈들은 자신의
행동을 이상하게 받아들인 모양이다.
다시한번 그런 말을 하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듯이 바라보는 오브의 얼굴을 바라
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칸은 그러니 이내 정말 알수없다는 듯이 내뱉었다.
"....드래곤을 동생으로 생각하는 게 평범한 건가?"
"..............."
유크렌을 안은체 아무말도 못하는 오브의 한숨을 쉰 유헌은 웅얼거렸다.
"사소한 건 넘어가자고요."
과연 유헌의 말을 잘듣는 칸답게 '그럼, 그렇게 할까나-'하고 중얼거린 칸이 팔장
을 끼고 뒤로 물러난다. 그 모습에 칸이 앞으로 살아갈 모습이 빤히 보인 오브가 뭔
가 한마디 하려는 찰나 마차가 멈추고 창으로 에스의 얼굴이 나타난다.
"잠시 쉬었다 간다는 군요."
"...........에?"
"샤르비나님의 명이라는 군요. 쉬었다 가는 것은 명분이고, 유헌군의 다리와 유크
렌의 상태가 염려스러운 겁니다."
'좋은 여자예요.'라고 말하며 웃는 에스의 얼굴에 고개를 끄덕여 보인 유헌은 열려
진 문 사이로 보이는 일행들의 모습에 몸의 긴장을 풀었다.
너무 안좋은 일들이 많이 생겨서 조금 초조해 진것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내려서 바람이나 쐬면서 복잡한 머리를 식혀야 할 필요성을 느낀 유헌은 옆에
앉은 칸에게 팔을 내밀었다. 부축해달라는 그 의미에 화색을 한 칸이 정말 기쁜 듯
이 웃으며 그의 팔을 잡아준다.
그 얼굴을 본 유헌은 자신에 그에게 조금 심한 짓은 한걸까하고 생각하며 작게 혀
를 내밀었다. 뭐, 결혼한데다 애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으니 그동안의 맘고
생은 당연한 거다.
"칸님 혼자서 부축할수 있겠어요?"
"충분해. 걱정하지 말고 가서 먹을거나 준비해줘."
유헌과 화해를 한 모양인지 그에게 달라붙은 칸이 연신 미소를 짓자 라프헨을 입을
가리고 작게 웃어 보였다. 예전의 그라면 상상도 못했을 지금의 모습이지만, 라프
헨은 지금의 칸이 전의 칸크빌레보다 훨씬 더, 굉장히 맘에 들었다.
귀엽게 웃으며 두사람에게 기다리라고 말한 라프헨은 멀리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라헨에게로 뛰어갔다. 그런 라프헨을 바라보던 유헌은 칸의 부축을 받아 근처의 바
위에 앉아 다리의 상태를 살펴 보았다.
이렇게 있으면 아프지 않지만, 체중을 실리거나 부딫히면 눈물을 나올 정도로 아프
다. 다리란건 넘어지거나 부딫혀서 부러지는게 아니라 눌려져서 부러지기도 하는
거구나-라고 뭔가 핀트가 어긋한 생각을 하던 유헌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고
개를 돌렸다.
"...........왜요?"
"그냥, 좋아서."
".......부탁이나 남들 앞에서 그런 짓좀 하지 말아요."
"무슨 짓?"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이 바라보는 얼굴에 대놓고 '팔푼이 짓이요-'라고 말할수 없
었던 유헌은 조금 어설픈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런 바보같은 모습에도 마냥 기뻐하는 칸의 모습에 유헌은 뭔가 알수없는 감정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다른 사람에게, 아니 애초에 이런 감정이 생기리라는 것을 알수조차 없었던 유헌은
눈앞의 존재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자신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참기로 했다.
"아, 여기에 계셨군요."
"......아."
"파요라고 합니다. 올해로 19세. 곧 성인이 되고 테라크 왕국의 기사입니다."
가슴에 손을 올리고 정중하게 말하는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던 유헌은 마주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샤르비나나 다들 왕이라는 알수없는 호칭을 사용해서 몰랐는데 이
들은 테라크라는 왕국에 속하는 자들인가 보다.
눈앞의 소년이 자신보다 연상이란 것에 조금 히껍한 기분이 든 유헌은 조심스럽게
눈앞의 소년을 바라 보았다. 물빠진 청바지색의 머리카락과 노란색의 눈동자를 지
닌 소년은 잘봐도 중학생이상으로 보이진 않았던 것이다.
설마하니 20세가 되면서 애벌레가 변태해서 나비가 되듯이 이 소년도 근육이 우람
한 사나이로 변모하게 되는 것인가.
그러면 정말 싫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얼굴을 찌뿌린 유헌은 그를 이렇게 세워두
는 것은 실례라는 생각에 옆자리를 가르키며 앉으라고 권유했다.
"아, 그래도 괜찮을 까요?"
"서 계시면 피곤하니깐.."
정 내키지 않으면 그냥 돌아가도 되는데..하고 생각하던 유헌은 그러나 권유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옆자리에 앉는 소년의 모습에 식은땀을 흘렸다.
정말이지 이 세계엔 행동이 빠른 자들이 많구나 싶다.
"신관이시라고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여러군데를 다니셨겠군요."
"뭐.. 아직 견습이니 그리 많게는..."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게 잔뜩이라는 그 태도에 유헌은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어
떻게 좀 해보라는 시선으로 칸을 올려다 보았다. 유헌의 눈동자에서 불편함을 읽은
칸은 파요라는 어린 기사를 노려보며 한마디하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저멀리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입을 열다말고 고개를 돌릴수 밖에 없었다.
"칸님! !"
"무슨 일이야?"
앞으로 뛰어와 숨을 헐떡이는 샤한의 모습에 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칸의 어깨에 손을 집은 유헌은 가슴의 기복을 크게하며 숨을 몰아쉬는 샤한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서두르는 사람은 아닌데, 지금의 모습은 상당히 새롭다.
"저기..밖에.. 헥헥헥;;;"
"말 좀 똑바로 하지."
"씨끄럽다. 꼬맹아-! ! 칸님, 에즈가 와있습니다! !"
투덜대는 유헌에게 한마디 한 샤한은 칸에게 얼굴을 돌리고 기쁜투로 입을 열었다.
샤한의 말을 들은 칸의 얼굴이 잠시 굳어지다 믿을수 없다는 표정으로 변하며 유헌
의 얼굴을 바라본다.
"큰일이다. 마녀가 돌아왔어!"
"............그게 할말입니까."
칸의 처절한 외침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유헌은 그의 손을 쳐내곤 '끄응.'하며
혼자서 일어났다. 그런 자신의 행동에 놀란 칸이 손을 뻗었지만, 이렇게 서있는 것
만은 혼자의 힘으로도 할수가 있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헌은 엉거주춤한 폼으로 자신을 올려다 보는 칸을 내려다 보며
입을 열었다.
"가서 에즈나 만나고 와요."
"에-엣. 가서 절대로 좋은 소리 듣지 못한다고."
"그래도 동료잖아요. 모처럼 변한 모습도 보여주고 격려도 해줘야 하는 겁니다."
"하..하지만.."
정말로 싫다는듯이 미간을 찌뿌리는 그 모습에 유헌은 좀더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에 쳇하고 투덜댄 칸은 어쩔수 없이 간다는 폼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샤한이
가르키는 방향으로 걸어간다.
가면서도 뒤돌아 보는 그 모습이 귀엽기는 했지만, 어쩔수 없는 노릇이기에 유헌은
표정을 굳히며 그 자리에 계속 서있었다.
이내 칸을 끌고 샤한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실눈을 뜨고 마지막으로
확인한 유헌이 한숨을 쉬며 자신을 올려다 보고 있는 파요라는 소년에게 손을 내민
다.
"미안하지만 부축을 받을수 있을까요?"
이대로 혼자 앉다간 엉덩방아를 찧을것이 분명하다.
그런 자신의 의도를 알았는지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난 소년이 부축해 옆자리에
앉혀준다. 그런 그에게 고맙다고 웃어보인 유헌은 발그레해지는 상대의 볼에 안면
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전부터 자신을 대하는 태도나 은근히 치근덕 거리는 폼이 설마했는데, 정말이었
나? 정말로 이 소년은 자신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인가?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살짝 옆으로 자리를 옮기려던 유헌은 헛기침을 하는 상대의
행동에 움직임을 멈출수 밖에 없었다.
"다들 사이가 좋으시군요. 제각각 다른 분야에 계신 분들이라 이동만 같이 하시는
분들인줄 알았는데 말이죠."
"아, 뭐..여러가지 일들이 같이 겪어서 말입니다."
"아까 그분은 다들 호칭에 님자를 붙이던데...
나이를 그렇게 많아 보이진 않고, 뭔가 대단한 분이신가 보죠?"
사심없는 물어보는 질문에 유헌은 아차싶었다.
나름대로 정신이 없고 갑작스럽게 진행되는 일때문에 칸의 호칭이나 대우에 있어
확실한 행동을 취하지 못한 거다.
하지만 아무리 교육을 시켜도 일행들의 몇몇은 실수를 하시 마련일거다.
워낙에 칸에대한 마음이 강한 사람들이니. 뭔가 씁쓸한 기분에 다시 입을 열려던
유헌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여성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얀색을 망토를 입고 갈색머리를 하나로 묶은 미인형의 여자는 바로 에즈였다.
뒤에서 따라오는 샤한이나 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에즈는 유헌을 발견하곤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리로 곧장 걸어온다.
"오랜만이네? 그런데 다쳤다면서? 괜찮은 건가-"
다가오자 마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상처를 살펴보는 여성의 모습에 유헌은 멍한 표
정을 지으며 바라 보았다.
아까 샤한의 입에서 그녀가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별다른 기분이 생기지 않았지
만 막상 이렇게 대면하고 보니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든다. 그러고 보니 이곳의 사람
들 중에서 그녀와 제일 오래 떨어져 있었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다.
감개무량한 느낌에 숨을 죽이고 정신없이 에즈를 내려다 보고 있던 유헌은 자신의
볼을 누르는 느낌에 '핫-'하고 정신을 차렸다.
그런 유헌의 모습에 악의없는 미소를 지은 에즈는 그의 볼을 손가락을 집어 길게
늘렸다.
"울 것 같은 얼굴이네요. 기분 좋은데? 유헌이 이렇게나 날 걱정해 줘서 말야."
".....아아..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거네요."
"그렇지. 덕분에 모두가 보고 싶어서 혼났다고, 나만 쏙 빼놓고 이렇게 동으로 오다
니 말야."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하는 에즈의 뒤로 입술을 내밀고 있는 칸의 얼굴이 보인
다.
뭔가 그녀에게 한소리 들은 듯 굉장한 그 얼굴에 유헌은 입을 가리며 웃어 보였다.
그런 자신의 행동에 칸의 얼굴에 붉어 졌지만, 그에게로 시선을 주는 에즈의 얼굴
에 애써 아무렇지도 않다는 모습을 취한다.
"가서 먹을 것 좀 가져와봐요. 칸님. 전 배고프다고요."
"어째서 내가 갖다 줘야 하는 거야? 직접가서 먹으란 말이다-!"
"어머? 연약한 여자에게 이래도 되요? 정 그러면 유헌에게 갖다 주라고 하죠, 뭐."
에즈의 말에 뜨끔한 표정을 지은 칸은 다리를 두들이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는 유
헌의 모습에 입술을 일자로 만들었다.
에즈라는 여자는 정말이지 사람 부려 먹는데는 도가 튼 사람이다.
소리내어 콧김을 내뱉은 칸은 몸을 돌려 음식을 준비하는 자들에게로 걸어갔다.
그 걸음 걸이메 어쩔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인 유헌은 옆에 앉은 파요의 존재를
의식하며 에즈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예요? 발챠에 오기전의 어느 저택이 있었다 면서요?"
"응 있었지. 몇일전에 노웬님이 같이 합류한다는 전갈을 보냈는데, 이상한 사람들
이 잔뜩이라 나에게 들리지 못한거야. 덕분에 좀더 머무르고 있다가 더 이상 기다
리면 다들 안오겠다 싶어서 혼자서 온거야."
이상한 사람들이라면 에스를 찾기위해 카일에 보낸 자객들을 뜻하는 것이리라.
옆에 파요가 있기에 말을 돌려서 말하는 그녀의 태도에 뭔가 굉장히 유쾌한 기분이
든 유헌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혼자 올 생각을 했어요.
혼자서 오기 힘들었을 텐데 말이죠."
"실은 운하근처의 지름길로 왔어. 거기라면 안전하니깐."
"아아- 그렇군요."
이곳의 지리를 모르는 유헌의 에즈의 말에 막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유헌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에즈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나저나 유헌 뭔가 분위기가 변한 것 같네. 키가 커서 그런가?"
"글쎄요. 요즘들이 다들 그러더라고요-"
웃으며 말하던 유헌은 그러나 머리속을 스쳐 지나가는 의문에 입가가 굳는 것을 느
꼈다. 그런 유헌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한 건지 연신 그의 몸을 만지작거리는 에즈
의 뒤로 다급하게 뛰어오는 에스의 모습이 보인다.
그의 다급한 그러나 굉장히 반가워 하는 그 얼굴을 확인한 유헌은 천천히 고개를
내려 에즈를 바라 보았다.
"에즈... 에스를 만나지 않았나요?"
"에? 아아- 일단 칸님과 유헌을 만나고 싶어서 말야."
조용히 묻는 말에 대단한 에즈는 왜 그러냐는 듯이 고개를 옆으로 숙인다.
그 모습뒤로 노웬이나 젤, 그리고 라프헨과 라헨들이 뛰어오는 얼굴들이 보인다.
다들 도착한 에즈를 만나기 전인건가.
유헌의 옆에 앉아있던 파요는 고개를 옆으로 숙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다.. 운하쪽은 요 몇일간 출입금지 지역이었는데...."
파요의 중얼거림을 들은 유헌은 점점 확실히 굳어지는 심증에 에즈의 이름을 나즈
막히 불렀다.
"에즈"
"왜?"
부드럽게 웃는 그 얼굴의 주근깨를 바라보던 유헌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눈
동자를 마주 보았다.
"난, 당신에게 내 이름이 유헌이라고 알려준 적이 없는데 말이죠."
게다가 당신이 칸과 나를 만났으면서 에스나 노웬을 보지 않은건 말이 안돼.
서늘하게 식어있는 유헌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에즈의 갈색의 눈동자가 굳어져 커
다랗게 벌려진다.
한동안 그렇게 눈앞의 유헌을 바라보던 에즈의 얼굴이 미묘하게 이그러 진다.
붉은 입술이 우그러지며 이내 싸늘한 음성이 튀어 나온다.
"눈치가 빠르네. 귀엽지않은 아이-"
"위험해요! ! !"
유헌이라는 신관과 부드러운 태도로 대화하던 여자의 안색이 변하고 급속도로 발
산되는 살기에 안색을 달리한 파요가 검을 빼들며 앞으로 크게 휘들렀다.
그 순간 팔이 타는 듯한 통증에 요란한 비명을 지른 그는 자신의 몸이 붕뜨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요란한 폭발음이 귀를 강타한다.
콰-앙! ! !
"..........유헌군! ! !"
에즈가 돌아왔다는 믿을수 없는 일에 에스등과 함께있던 노웬은 서둘러 그녀가 갔
다는 곳으로 뛰어갔다.
멀리서 쪼그리고 앉아 유헌과 이야기를 하고있는 여성은 분명 에즈였다.
어떻게 그녀가 이곳에 와 있는지 그리고 왜 자신들이 아닌 유헌을 먼저 만나는 건
지 수가지의 의문이 떠오르는 순간 엄청난 살기와 동시에 폭발음이 귀를 강타한다.
그 충격은 근처에 있던 말들이 날라가고 나무가 몇개나 뽑힐만한 위력이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린채 망연히 그 자리에 서있던 노웬은 칸의 날카로운 음성에 정신
을 차렸다.
"유헌! ! !"
들고있던 접시들을 바닥에 떨어뜨린 칸은 음식물들을 밝으며 정신없이 유헌이 있
었던 자리로 달려갔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건지 알수가 없었다.
미친듯이 달려가 유헌이 있던 자리를 살펴보던 칸은 커다랗게 파여선 폭발의 여파
로 타다남은 불꽃들이 간간히 살아있는 구덩이와 유헌이 앉았던 바위가 근처에 들
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곤 저도 모르게 그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지금 도대체 무슨일이 벌이진 건지 이해할수가 없다.
유헌과 에즈가 있었던 곳에서 그런 커다란 폭발음이 들리고 왜 말들이 날라가고 나
무들이 파여 있는지.
이 엄청난 소란에 사람들이 모이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칸님."
떨리는 손이 자신의 어깨에 올려지는 것을 느끼고 그 위에 자신의 손을 댄 칸은 입
술을 달싹였다.
"라프헨... .유헌은.. 유헌은 어디에 있는 거지?"
"도대체.. 이 무슨..."
"유헌과 에즈는.. 어디에 있는 거야?"
황금빛의 눈동자를 크게 뜬 칸은 유헌이 없는 자리를 망연히 바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