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투둑.
"..........?"
얼굴을 두들이는 감각에 유헌은 인상을 찌뿌렸다.
차가운 것들이 자꾸 얼굴로 떨어지는 것이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보니 매끌매글하
다. 어딘가에 물이라도 새는 건가하고 뻐근한 몸을 일으켜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던
그는 자신의 다리를 덮고있는 이불의 문양을 하나씩 세며 머리속을 정리하다 갑자
기 드는 생각에 얼굴을 들었다.
"..칸! !"
자리에서 일어난 유헌은 누워있던 곳에 시선을 두었지만 그곳에 칸은 없었다.
가슴을 치는 불안감을 느끼며 문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힘껏 밀어제낀 유헌은 그러
나 둔탁하게 부딫히는 소리와 요란하게 울리는 비명소리에 움직임을 멈추고 눈을
동그랐게 떴다.
문을 열면서 부딫힌 모양인지 얼굴을 가리며 바닥에 쓰러진 사람의 모습에 당황한
유헌은 경직되있다 '학?'하며 소리를 내며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저..저기 죄송합니다. 갑자기 문을 여느라고..저 괜찮으신지..."
"아? 괘..괜찮아요."
절대 괜찮을 리가 없다.
그런 속도와 힘으로 안면을 부딫힌 것 같은데 괜찮을리가 없잖은가.
안절부절 못하며 앞의 상대를 바라보던 유헌은 팔을 치우고 들어아는 얼굴에 멍하
니 입을 벌렸다. 주황색의 머리카락에 갈색의 눈동자를 지닌 그는 그 색에 언발란
스한 분위기를 풍길수 있을텐데도 무척이나 잘 소화해 내고 있는 미형이었다.
그 외모보단 그 얼굴에 나있는 동그랗게 오른 부딫힌 자욱에 미간을 찌뿌리며 다시
금 손을 들어올린 유헌은 그와 동시에 그의 코에서 주륵하고 쏫아져 나오는 엄청난
피의 양에 내민 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자신의 코를 소매로 쓰윽하고 문질러 보인 그는 옷에 묻어나는 것에 멍하니 바라보
다 싱긋하고 웃어 보였다.
"피가 나네요."
"저..저..저기.."
이런 경우는 처음인 유헌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식은땀을 흘리다가 방으로 들어가
하얀 시트를 통채로 끌고 들어와 그의 얼굴에 댔다.
단숨에 붉게 물들어 가는 시트의 모습에 미간을 찌뿌린 그가 괜찮다면 손을 물리려
했지만 유헌은 피를 멈춰야 한다며 그의 얼굴을 잡은채 강하게 눌렀다.
그런 유헌의 손을 잡고 어쩌할 줄을 모르던 그는 점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유헌의 손을 잡는다. 그런 그의 모습에 왜 그러는지 의아한 표정을 짓고있던 유헌
은 그러나 뒷통수를 가격하는 힘에 그대로 앞으로 넘어졌다.
"그렇게 막으면 상대가 어떻게 숨을 쉬나."
"파하! !..헥헥헥."
냉정하게 울리는 목소리와 뒤를 따르는 숨이 막혔다가 단숨에 터지며 헥헥대는 소
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유헌은 아직도 얼얼한 뒷통수를 문질렀다.
"왜 융텐이 데려오는 것들은 하나같이 괴상한건지....쯧."
도대체 누가 자신을 이렇게 때린 건지 얼굴이나 보자며 고개를 든 유헌은 시야에
들어오는 단단한 체구의 사내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건강한 구릿빛의 피부에 진갈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닌 그 사내는 왠만한 자
들이라면 단숨에 기를 질리게 할만큰 덩치가 좋은 사람이었다.
저 엄청난 주먹에 자신의 머리가 맞은 건가하고 멍하니 뒷머리를 부비던 유헌은 그
가 올라온 계단에서 익숙한 머리카락이 보이자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칸! !"
"아, 일어났어? 안 그래도 지금 깨우려던 참이었는데 말야."
반가운 듯이 손을 들어보이는 칸이지만 그를 바라보는 유헌의 얼굴은 묘하기 짝이
없다.
그 눈빛에 어색한 웃음을 지은 그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며 이를 들어내 보였다.
"좀 엄망인가?"
"엉망진창..."
"윽?!! 넌도 왜 여기서 나오는 거야?!!"
유헌에게 웃어보인 칸은 갑자기 튀어나온 음산한 사내의 모습에 치를 떨었다.
".......지정석."
"그런데 왜 화병에서 나오는 거야? 우왓- 기분나빠!!
그 작은 구멍에서 얼굴만 내밀지마!!"
"그럼..이렇게..이렇게?"
"으아아아~ 징그러워!!!"
화병에서 입구는 넓어서 칸의 말처럼 음산한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해도 그렇게
징그럽지는 않았다.
단지 공만한 곳에서 얼굴만 내밀고 있는 것이 조금 보기가 안좋다 뿐이랄까?
식은땀을 흘리며 멍하니 앉아있던 유헌은 칸을 바라보다 이곳저것 붕대를 감고 빨
간 물이 든 옷을 아무렇지도 않고있는 그 모습에 숨을 삼켰다.
금방이라도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다.
그런 모습으로 잘도 저 남자와 서로 꽥꽥대며 싸울수 있구나-라고 멍하니 앉아있
던 유헌은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사내를 올려다 보았다.
"괜찮나요?"
얼굴과 옷이 피범벅인 상태로 웃어 봤자 공포감을 줄뿐이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아는지 모르는지 싱-긋하고 웃어보이는 사내의 모습을 바라보
던 유헌은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괘..괘..괘..찬...을...지...도.."
엄청나게 버벅거리는 말이 튀어 나왔지만, 굳은 채로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이는
유헌은 그것을 깨닭지 모했다.
그런 유헌의 모습을 바라보던 구릿빛 사내는 코웃음을 쳤다.
"굳었잖아. 나약한 녀석."
"요정의 숲이야 여긴."
"..........여기가 말입니까?"
"그래, 이 집이 바로 요정의 숲이지."
"............그.."
융텐이 팔을 펼치고 보라는 듯이 '자-자-'하는 소리를 내자 유헌은 입안이 바싹 타
오르는 것을 느끼며 눈을 돌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폐가를 둘러 보았다.
이층은 자는 곳이라서 그나마 깨끗하다고 하지만, 이곳은 정말이지 유령이 금방 빠
져나와도 이상치 않을 만큼 엉망진창이었다.
지금 이 의자도 한참을 털어서야 겨우 앉을 기분이 들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움직일때마다 끼익거리는 의자에 유헌의 안색이 점점 굳어간다.
"...동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가 동이다. 동쪽에 있는 요정의 숲."
"...숲이란건.. 일반적로 나무가 있는.. 곳이지 않습니까?"
"나무는 저기 있잖아."
융텐이 가르키는 창밖에 서있는 사내의 모습에 유헌의 안색이 푸르죽죽하게 변한
다. 그의 손의 끝에는 그 구릿빛의 사내가 검을 들고 달려드는 칸의 어깨를 잡아 바
닥으로 사정없이 내동댕이 치고 있었다.
요란하게 퍼지는 흙먼지에 미간을 지뿌린 유헌은 눈앞의 흑룡에게 장난을 차지 말
하는 시선을 보냈지만, 그는 여전히 웃고있을 뿐이다.
그런 유헌과 융텐의 사이에 차를 올려놓은 주황빛의 머리카락을 지닌 사내는 적어
도 먼지가 3센치는 쌓였을 듯한 의자에 거리김없이 앉아 차를 마시지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자니 절로 미간을 찌뿌려 진다.
"그는 정말로 나무야. 바로 나무의 요정장이다."
"...저 남자가 요정이란 말입니까?"
칸을 내팽겨치고 승리의 도취해 짐승같은 포효를 하며 포즈를 잡으며 근육을 보이
는 사내의 모습에 유헌은 입을 막았다.
남쪽 에스들과 시장을 구경할때 어떤 정령사가 보여주었던 작고 하늘하늘한 아름
다운 존재만을 기억하고 있는 유헌에게 구릿빛 사내의 모습은 독이었다.
"어쩔수가 없답니다. 마도력이 대륙을 지배한 후, 저희들은 갈곳이 없어 졌거든요."
".........네?"
"일단은 맘이 맞는 자들끼리 이런식으로 작은 요정의 숲을 만들고 그곳에서 지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다면 이 폐허같은 건물이 정말로 요정의 숲이라는 건가.
자신의 말은 껌처럼 씹다가 주황의 말에는 금방 수긍하는 유헌의 모습에 이마에 혈
압마크를 만들어 보이는 융텐이지만, 이런 녀석에게 진심으로 화를 낼순 없다고 애
써 속을 진정시켰다.
정말이지 저 칸이나, 유헌이나. 히자스나 자신을 너무 물로 보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당신도...음."
"제 이름은 이루스랍니다."
가슴에 손을 대고 웃어보이는 사내의 모습에 마주 웃어보인 유헌은 그의 이름을 기
억하려고 애쓰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루스님도.. 요정이신가요?"
"아뇨, 전 유령이랍니다."
".............엣?"
저 구릿빛 피부를 지닌 자보다 이루스가 요정이라면 더 믿음이 갈수도..라는 마음
으로 물었던 유헌은 상대방의 입에서 나온 말에 안색을 퍼렇게 질렀다.
유령이라니?
멍하니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는 유헌의 행동에 입모양으로만 '유령'이라고 만들
어 보인 이루스는 사심없이 웃어 보이다. 그 모습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데 문이
요란하게 열리며 여전히 엉망인 모습의 칸이 씩씩대며 들어온다.
"도대체가 말야! !"
"한번도 못이겼지?"
"....윽?! !"
빈정거리는 융텐을 노려보던 칸은 그러나 그의 말에 사실이기에 고개를 돌리고 벽
에서 나오는 팔이 건내주는 물잔을 받아 마셨다. 분명, 화병에서 나온 그 사내의 팔
일텐데, 그 괴이한 등장에 이번엔 그다지 화를 내지 않는다.
융텐의 말대로 구릿빛 요정에게 이기지 못한게 어지간히 분한 모양이다.
씩씩대던 칸은 자신을 바라보는 유헌의 시선을 인식하고 부드럽게 웃어보이며 그
의 옆자리에 가 앉았다.
"...상처를 치료해야 하지 않을까."
"괜찮아요. 이곳에서 상처를 입는 즉시 치료가 되니깐."
"..아아."
전처럼 '엣?'라던가 '설마...'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유헌도 슬슬 이 저
택에 적응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멍하니 물잔을 들고 앉아있는 칸의 모습을 바라보던 유헌은 그의 몸에 난 상처가
하루이틀 정도로 생기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곤 묘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이 사람 밤을 새서 저 구릿빛을 이기기 위해 덤벼들었던 건가?
"칸... 혹시 밤을 세서 저 사람과 대련한 건가요?"
"아니? 한 일주일정도..대련했는데?"
".....하지만 그동안 한번도 이기지 못했다죠."
"으악-! ! 기분나뻐! ! 왜또 그런곳에서 나오는 거야. 네놈은!!"
바닥에서 주욱하고 상체만을 나타내 테이블에 엎드린 그림자 사내의 모습에 칸은
학을 띠며 뒤로 물러난다.
그 모습에 웃어보이는데 그 얼굴이 기분나쁘기 그지 없었다.
혀를 차며 자신에게 붙는 칸의 체온을 느끼며 유헌은 자신이 일주일동안 잠들어 있
다는 것을 깨닭곤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일주일..인건가? 도대체 뭣 때문에.
융텐은 그렇다 치지만, 이 저택에 살고있는 세사람과 많이 친해진 듯한 칸의 모습
은 무척이나 이질적인 것이었다.
살짝 굳은 얼굴로 앉아있는 유헌의 얼굴을 바라보던 이루스는 입을 열었다.
"당신에겐 이곳은 파장이 상당이 안 맞을 수도 있을 겁니다.
칸이 이상한 주문을 걸어 두었거든요?"
"칸...이라고요?"
이루스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유헌은 눈을 동그랗게 떳다.
칸은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인데 그가 이 저택에 이상한 주술을 걸어둔 건가?
그런 유헌의 오해를 알아차린 건지 칸은 양손을 휘저었다.
"내가 아니라 저 갈색피부의 덩치를 말하는 거야!!"
"...그 사람이름이 칸인가요?"
"그래, 그래서 일주일 동안 저 멍청한 놈이 그에게 대련을 하는 거지.
이기는 쪽이 이름을 갖는다. 아아- 바보같아~"
".......네..이 도마뱀같은게.."
"뭐..? 도마뱀??"
도끼눈을 뜨는 융텐을 마주 노려보는 칸의 모습에 한숨을 쉰 유헌은 지끈거리는 이
마를 집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깐 왜 자신이 일주일동안 잠들어 있는지를 묻는게 이 대화의 요점일텐데 뭐
냐? 이 어수선한 분위기는.
허탈한 시선으로 이런저런 말을 해대서 금방 소란스러워진 자들을 바라보던 유헌
은 입을 열려다 자신의 어깨에 집어지는 단단한 손에 얼굴을 들었다.
"미할라같이 이상한 녀석들이 와서 안 그래도 높은 혈압 건드리지 말라고 내가 주
술을 걸어뒀다."
".......... 미할라...요?"
"그래, 너처럼 검은 눈동자에 머리카락을 지닌 그 당돌한 인간말이야."
미할라를 알고 있어?
멍하니 올려다 보는 유헌의 등에 어느새 나타난 그림자 사내는 음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주일동안 잠든 사이 멀리-멀리 던져버릴 생각인거지, 칸은."
"하지만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어요.
그때마다 일어난 미할라에게 머리카락이 쥐어 뜯겼으니깐."
"...그림자, 이루스 둘다 조용히 해라."
음침하게 말하는 구릿빛의 칸이 입을 열자 멍하니 유헌의 등에 달려있던 그림자 사
내가 꿈틀대며 이루스의 등에 달려 붙는다.
그런 그의 머리를 쓰다듬은 이루스는 웃는 얼굴로 '협박하지 말아요.'라고 말한다.
그런 둘에게 눈썹을 올린 칸이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유헌이 다급히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미할라가 이곳에 온건가요?"
유헌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던 구릿빛 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턱이 닿을 정도로 지긋지긋하게 왔어요.
그 이유가 대부분 칸을 화나게 하려는 의도였지만."
이루스는 입을 가리고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검은빛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자신
들에게 달려오던 여성의 모습을 떠올렸다.
무척이나 강하고 좋은 여자였다.
때로는 억지를 부려서 다른이들을 곤혹스럽게 하긴했지만, 그것도 결코 나쁜 의도
가 있어 그런것은 아니였다. 인간주제에 건방지다며 그녀가 올때마나 치를 떨어대
던 칸도 그때만은 단단한 입꼬리가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풀어 졌는데 말이다.
그런 그녀가 인간들의 이기심으로 여왕의 무덤이라는 그러싸한 곳에서 죽은 몸으
로도 혹사를 당한다는 것을 알았을때, 미친듯이 화를 내던 것도 그이다.
아마도 칸은 자신들보다 좀더 특별한 감정으로 그녀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미할라를 알고 있군요."
"........아마도."
이루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유헌은 다시금 건물을 바라 보았다.
여전히 낡고 금방이라도 부숴질것 같은 내부인데 갑자기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묘한 이질감에 눈을 가늘게 뜨고있던 유헌은 자신의 무릎을 두들이는 느낌에 고개
를 돌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일렁이는 황금빛 눈동자에 유헌은 걱정말라는 듯한 미
소를 지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을 해주지 않아 모르고 있겠지만, 미할라라는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자신이 슬픈 기분에 빠진다는 것을 그도 느끼고 있는거다.
그래서 못 마땅할텐데도 가만히 바라봐주는게 고마웠다.
"자-그럼 너도 깨어났고 하니 슬슬 일어나 볼까."
"...네?"
"네가 일어나면 바로 여기서 떠날 생각이었지. 빨리 채비를 해라.
그리고 칸크빌레, 너도 좀 씻어라, 꼴이 그게 뭐냐. 난민같군."
'별말씀을-'이라며 이를 간 칸도 지금 상태로는 어디를 갈수없다는 것을 알고있었
기에 투덜대면서도 몸을 씻으러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유헌은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은 불과 방금 일어난 대다 아직 이들과 재대로 된 말도 채 하지 않았는데...
그런 유헌의 등뒤로 다가온 이루스는 등을 두들였다.
"제가 밖까지 안내를 해드릴 꺼예요."
"...그..그렇지만."
"하실 일이 있잖아요? 대화는 돌아온 다음에 해도 괜찮아요."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동자에 자게 고개를 끄덕인 유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덜커덩.
"......후빌 하샤발이군요."
동에서 남으로 넘어갈때 지났던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던 아름다운 계곡이다.
그리고 유치하지만 나름대로 멋있는 전설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마차위에 앉아 점점 멀어지는 동굴을 바라보던 유헌은 그 사이에서 손을 흔드는 손
을 존재에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보았다. 그리고 유헌은 그림자의 손이 보이지
않게 되서야 커다란 물방울을 만들며 떨어지는 계곡에 시선을 주었다.
"이 곳의 전설을 아시나요?"
"아.. 공주와 음유시인의..로맨스였던가요?"
"맞아요."
자신을 유령이라 한 이루스는 검은 재질의 망토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래야만 자신들을 좀더 멀리까지 배웅할수 있다는 말에 그가 무리하고 있음을 깨
달은 유헌은 그를 말리려 했지만, 그는 단지 미소를 짓을 뿐이었다.
"하지만 말이죠. 계곡에 빠진건 음유시인뿐이란건...모르고 있겠죠?"
".....네?"
"공주는 기사와 함께 가버렸거든요. 나만을 이곳에 두고...."
".............."
유헌은 슬픈듯한 눈동자로 계곡을 내려다 보는 이루스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 보
았다. 한동안 계곡을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들어 유헌에게 미소지었다.
"처음에는 너무나 슬펐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슬퍼하는 것도, 그 두사람의 이야기
를 듣고 난 다음에 해도 충분하다고 미할라가 그랬거든요."
".....그녀가.."
"전에 칸이 저택을 부수려한 인간들의 행동에 미친듯이 분노할때가 있었죠.
그때 미할라가 그의 뺨을 대리면서 이랬어요. '상대방의 말도 채 듣지않고 미친놈
처럼 날뛰는 너같은 녀석들이 되려 그쪽에 민폐다. 차라리 네놈이 사라져 버려! !'
라고.. 얼마나 살벌하던지 전 벌벌 떨었다고요."
"..그런 말을 했나요?"
"나중에 이곳에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 어린애들이 나서서 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을때 모두들 한심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죠.
정말로 칸이 그들을 건드렸다면 어이없던 일이 엄청난 결말을 만들었겠죠."
덜커덩.
잔잔한 눈으로 계곡을 바라보다 손을 뻗은 이루스는 피부에 느껴지는 물보라의 파
편에 미소를 지었다.
"그들에게도 물어 볼거예요. 왜 나를 두고 저들만 갔는지..
그리고 나서 화를 낼건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을건지 결정할래요."
주먹을 쥐고 야무지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시선을 주던 유헌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때처럼 푸른 하늘이었지만, 그때는 가흔이라는 이름을 지녔고,
지금의 자신은 유헌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가만히 앉아있던 두사람은 유헌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정적이 깨졌다.
"유헌이예요. 내 이름은."
"..........."
"처음으로 당신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부드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 보는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던 이루스는 눈가를
부드럽게 휘었다.
"좋은 이름이군요."
덜커덩.
마차가 계곡을 완전히 지남에 따라 점점 엷어지던 이루스의 몸에 투명하게 변한다.
그 와중에도 손을 흔드는 그 모습에 미소를 지은 유헌은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완전히 그가 사라지고 마차를 몰던 칸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때 자리에서 일어난
유헌은 그에게 다가갔다.
두번째로 그에게 유헌이라는 이름을 알려주어야 한다.
덜커덩! !
"..윽?! !"
"라프헨 얼굴을 집어 넣어! !"
마차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밖의 모습을 확인하려던 라프헨은 마차가 크게 뜨면서
앞으로 굴러떨어 질뻔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안색을 달리한 라헨이 이를 악물며 소리친다.
그 기세에 잠시 몸을 경직한 라프헨이지만, 그가 걱정해서 그러는 것을 알기에 입
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앉아있는 것은 자신뿐, 다른 이들은 전부 밖으로 나가 싸우고 있다.
평소 가만히 구경만 하던 오브조차 밖에 나가 잘 맞추지도 못하는 화살을 들고있는
데 자신은 도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자신의 모습이 무척이나 한심스러워 입술을 깨물던 라프헨이지만 다시금 요란한
소리를 내며 뜨는 마차에 안색을 굳히며 의자를 잡았다.
"라프헨, 절댈로 얼굴을 내밀지 마라! ! ..제길..! !"
라헨의 다급한 음성에 라프헨의 안색이 파랗게 질린다.
동쪽으로 거의 다 다다라 후빌 하샤발 계곡도 지났건만 갑자기 저 복면을 한 무리
들이 나타나 자신들을 쫒는 것이다. 황제군은 중간에 돌아갔으니 그들은 분명 카일
이 에스를 잡기위해 보낸 자들일 것이다.
처음에 나타난 일단의 무리들은 어럽지 않게 처리할수 있었으나 그러기가 무겁게
다시 나타나는 복면인들의 모습에 일행들의 사이로 긴장감이 돌았다.
저렇게 나타난다는 것은 자신들이 완전히 지칠때까지 제2의 제3의 무리들이 나타
날수도 있는 것이다.
동쪽이 바로 코앞이거늘 이런 곳에서 이런 일을 당하다니...! !
"에스 정신 차려라! !"
"..샤한..!!"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에스의 모습에 샤한은 혀를 찼다.
저들에게 이렇게 쫓기는 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그런 죄책감을 담은 눈빛을 바라보
던 샤한은 엄청나게 빠르게 달리는 말에서 한쪽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 충격에 말에서 떨어 질뻔한 에스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에 표정을 굳혔다.
"우리들이 동료를 버릴것 같은가! ! 놈들이 노리는 것은 네가 아니라 우리들 전부
야-!! 명심해라, 바보녀석! !"
거칠게 내뱉은 그는 얼굴 옆으로 날라오는 화살에 욕설을 내뱉으며 말에 달린 주머
니에서 단검을 뽑아 뒤로 던지며 말머리를 돌렸다.
우선적으로 앞을 보내고 나중에 따를거라는 그 움직임에 안색을 굳힌 노웬이 손을
내밀고 앞으로 향해 휘두른다. 뒤는 샤한에게 맡기고 우선 빠져나가자는 그 움직임
에 안색을 달리한 에스지만, 자신을 바라보던 샤한이 이를 들어내며 웃어보이자 입
술을 깨물며 얼굴을 앞으로 돌렸다.
그의 말에 맞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자신을 버릴 일행들이 아니다.
어찌 되었던 이런 일은 한번쯤 있어야 할일이니, 자신이 죄책감을 갖으면 안된다.
덕분에 몸의 움직임이 둔해져 일행의 짐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를 악문 에스는 말에서 몸을 눕혀 시야에 들어오는 복면인을 향해 화를 날렸다.
노웬같은 명궁은 아니였지만, 기세좋게 날라간 활은 복면인의 목을 정확히 꽤 뚫었
다.
"휘-익! ! 멋진데, 에스! !"
몸을 앞으로 세우고 다시 말을 모는 자신에헤 휘파람을 불어 보이는 오브에게 장난
스럽게 윙크를 해보인 에스는 다시금 활을 장전했다.
일단은 저들을 물리치고 도망가는 것만 생각하자. 안그래도 긴 여정에 지친 일행들
이다, 쫓기는 것이 길어지면 결국 자신들의 손해인것 이다.
에스의 되살아난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던 노웬은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자신이 길을 잘 선택해야 뒤따라 오는 일행들의 도주가 수월해 지기 때문이다.
엄청난 기세로 말을 몰고 있어 장애물들이 다가오는 속도도 장난이 아니다.
바로 눈앞으로 튀어 나오는 나무가지를 피해내며 다시 자세를 바로하던 노웬은 멀
리 앞, 말위에 앉아있는 자의 모습에 안색을 굳혔다.
"...앞에서도 기다리고 있엇던 것인가..."
말의 종도 그렇지만, 망토를 뒤집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은 상대는 무척이나 강한듯
했다. 강한 자는 강한자를 알아보듯이 일순 긴장한 노웬은 옆구리에 달린 검을 빼
들었다. 활을 주로 사용하던 근래에 들어 검을 뽑는 것은 근 몇달만의 일이기에 그
의 뒤를 따르던 에스의 안색이 변한다.
그리고 앞에 가만히 서있던 망토를 두른 사내가 말을 박차며 자신들 쪽으로 육박해
들어오자 에스는 안색을 달리했다. 엄청난 기세였다.
마치 10여녀전의 그를 보는 것 같은....! !
"노웬님, 조심하십시오! !"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노웬에게 시선을 주던 에스는 그의 멍한 표정에 안색을 굳
혔다. 상대방 남자는 검은 반쯤 빼들어 무서운 기세로 그에게로 달려오고 있는데
노웬은 검을 빼든채로 방어나 공격을 할 기미가 없다.
혹여나 어딘가에 숨어있는 마도사의 주술에 걸려 그가 몸을 못 움직이는 것은 아닌
가하고 이를 악문 에스지만, 점점 다가오는 망토의 남자와 여전히 굳은채인 노웬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이렇게 어이없게 노웬을 잃는 것인가! !
"노웬님! ! !"
비명을 지르며 말의 허리를 차 방향을 바꾼 에스는 막 노웬에게 다가가려는 사내에
게 검집을 휘둘렀다. 검을 빼들 시간이 없을만큼 다급했던 것이다.
그런 에스의 필사의 공격을 어이없을 정도로 피한 상대는 그 찰나의 순간 에스를
바라보며 눈꼬리를 가늘게 휘었다. 그 웃는 얼굴을 확인한 에스는 숨을 죽이며 저
도 모르게 말의 고삐를 강하게 잡았다.
"윽?! !"
달려나간 그대로 앞다리를 앞으로 드는 말의 기세에 당황한 에스는 이를 악물었다.
에스와 노웬을 지나쳐 엄청난 기세로 앞으로 달려나간 사내는 당황한 표정의 유크
렌과 마차에 오라탄 오브, 그리고 라헨과 샤한을 지나쳐 뒤를 따라오는 복면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단
한번의 휘두름에 엄청난 피분수가 쏫아져 나오는 것을 바라보며 말의 속도를 세우
려던 에스는 그러나 중간에 나온 돌에 말이 채여 낙마하고 말았다.
직전에 착지를 잘해서 몇번 바닥을 굴러 금새 일어난 그는 저만큼 뒤에서 검을 휘
두르는 사내와 복면인을 얼빠진 표정으로 주시했다.
히힝-
"..뭐..뭐야."
갑작스런 일에 말을 멈춘 유크렌은 마찬가지로 멈춰서 갑자기 나타난 사내를 바라
보는 샤한에게도 다가갔다.
처음에 육탄전을 벌였던 유크렌의 옷은 이미 여기저기에 피가 튀어 있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옆에 있는 샤한을 바라보던 유크렌은 얼빠진 표정을 짓
고있는 그의 얼굴을 확인하곤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인간이기는 했지만,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본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크악?! !"
"뭐..뭐냐?! !"
갑자기 나타나 자신들을 도륙하는 정체불명의 망토를 뒤집어 쓴 사내의 출현에 괴
인들은 당황했다. 게다가 실력이 엄청나서 이쪽은 사망자가 속출하는데 상대방은
멀쩡하기 그지없다.
입술을 깨문 괴인들의 우두머리는 뒤에 남아있는 일행들을 부르려 손목을 들었지
만, 그 순간 화끈한 통증이 지나가는 느껴야 했다.
"뒤에 남아있던 놈들이라면, 이미 처리했어."
낮지만, 한번 들으면 잊을수 없는 목소리로 은근히 말한 사내는 한팔이 없어진 채
로 부들거리는 괴인의 머리를 망설임 없이 내리쳤다.
순식간에 두목을 잃은 복면인들은 우왕자왕하다 뒤에서 날려오는 마력탄에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런 자들에게 몇번의 마력탄을 더 날린 젤은 땀이 흐
르는 이마를 훔쳐내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내를 바라 보았다.
급하게 멈추느라 마차와 말들이 삐뚤어지게 늘어선 가운에 다들 자신들에게 다가
오는 그를 바라 보았다.
그 가운에 여전히 검을 빼든채 굳어있던 노웬은 망토 사이로 보이는 검청의 머리카
락과 귓가에 와닿는 그리운 음성에 눈을 크게 떴다.
"영웅은 가장 멋지게 등장하는 법이지."
챙그랑.
"라고 네가 말해 주었잖아. 노웬-"
한번도 손에서 놓지않은 애검이 바닥에 놔동그라져 있는데도 노웬은 그쪽에 시선
을 주지 않았다. 믿을수 없다는 듯이 눈을 깜박이던 그는 말에서 내려와 자신의 지
척에 서있는 자를 올려다 보았다.
한동안 멍하니 그러고 있던 노웬은 바람이 날라와 망토안의 사내의 황금빛 눈동자
를 보여주자 부들거리는 입술을 깨물며 서서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희비가 엇갈리는 표정으로 한동안 그리 있던 그는 양손에 땅을 집으며 탄식하 듯
한숨을 쉬며 입안에 맴돌던 언어를 내뱉었다.
"................폐하."
근처에 앉아있던 에스는 노웬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미친듯이 망토
의 사내에게로 뛰어갔다. 다가온 라헨이 뭐라 하기도 전에 사내의 망토를 잡아 끈
에스는 그 속에서 들어나는 얼굴에 완전히 숨을 죽였다.
에스의 옆에 있던 라헨과 그 뒤에 샤한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앞의 사내를 바라 보았다.
"...저 녀석..설마..."
유크렌은 들어난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내 익숙한 기를 감지하곤 미간을 찌뿌
렸다.
"설마하니....칸, 너 드래곤이었냐?"
그래서 자신처럼 다시 폴리모프를 해서 성인의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이냐는 의미가
담긴 유크렌의 물음에 입가를 비틀어 보인 칸은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에스의 뺨
을 두들여 주었다.
찰진 소리와 함께 정신이 차린듯 눈을 크게 뜨는 에스를 바라보며 아직도 엎드린
채의 노웬 앞에 무릎을 꿇은 칸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의 등에 손을 둘렀다.
묘한 감흥이 가슴속을 채운다.
"돌아왔다."
자신의 팔안에 몸이 작게 떠는 것이 느껴졌지만, 칸크빌레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런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검은 머리의 소년의 모습을 바라보던 칸은 입가를 길게
올렸다.
"...유헌도 함께야-"
칸의 말에 한때 가흔이라고 불리웠던 유헌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마차에서 반쯤 빠져나와 있던 라프헨은 얼굴을 타고 흐르는 물기에 당황하며 손을
뻗었지만, 그에 맞추워 물 새듯이 나오는 눈물에 '어라?'하고 눈을 눌렀지만, 멈추
지는 않고 입에서 흐느낌이 흘러 나온다.
그런 라프헨의 어깨에 손을 두른 젤은 입술을 깨물며 벅차오르는 가슴을 진정시켰
다.
"제기랄-! ! 기뻐서 미칠것 같아! ! !"
갑자기 소리를 지른 샤한은 달려나가 칸의 어깨를 잡았다.
홀린 듯이 칸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 코, 입등을 여기저기 만져보던 곧 울것같은 얼
굴로 입술을 우그려 뜨렸다.
"나보다 크잖아, 크잖습니까-! ! 언제 어른이 된겁니까, 칸! !"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도 알수없는 듯 연신 같은 말을 반복하는 샤한의 얼굴을
바라보던 칸은 품안에 있는 노웬의 어깨를 두들이며 낮게 중얼거렸다.
"일단은 동으로 가자."
그의 말에 노웬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대견스럽다는 듯이 자신의 머리를 치는 라헨에게 웃어보인 칸은 숨을 들이켰다.
겨우 이런 것 때문에 자신들에게 승세가 기운듯이 기뻐하는 일행들을 보자니, 자신
이 마치 뭐라도 되는 것 같다.
그것이 사실이어서 전에는 무척이나 불안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를 올려다 보던 칸은 눈을 감았다 떴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믿고 따르고, 바라보고 있다. 결코 그들을 버릴수
가 없기에 칸은 어떤식으로 든지 이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칸을 바라보던 유헌은 조금 쓸쓸한 기분에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
다.
"으갹-! ! ! 왜 네가 여기있는 거야?! !"
"........?"
자신을 가르키며 요란한 비명을 올리는 유크렌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유헌은 그러나 자신의 등에 기대지는 묵직한 느낌에 아뿔사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치와 유크렌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관가하고 있었다.
그런 유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융텐은 그의 등에 달라붙어 손을 들어 올리며
빙글빙글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오랜만이야, 유크렌시아."
"저...저..저..저..."
"이런이런 부군을 만난것이 무척이나 기쁜것 같군, 그렇게 말을 더듬다니 말야."
능글맞게 말하며 유헌의 등에서 니온 융텐은 의아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일행들의
시선을 받으며 여유자적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 융텐의 걸음에 멈추어 뒤걸음 질을 치던 유크렌은 등에 마차가 있어 더이상
뒤로 갈수가 없자 안색을 퍼렇게 죽이며 턱을 경직 시켰다.
저런 변태용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건지 알수는 없지만, 당장에 이곳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절대로 위험하다.
"헤- 좀 자랐군. 작은 몸이 안기 좋았는데 말야."
빠져나갈 구석을 찾던 유크렌은 그러나 자신의 엉덩이를 잡아 비틀어 올리는 손길
을 느끼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품안에 딱딱하게 굳으진 유크렌을 온몸으로 감싸안으며 여기저기 입술을 대고 부
비적 대며 별에별 짓을 다하던 융텐은 유크렌의 몸이 부들거리자 의아한 듯이 얼굴
을 때내었다.
"이..."
"뭐? 만나서 좋다고, 다 알고 있어. 나에 대한 너의 마음쯤은."
"죽어라-ㅅ! ! 변태 용아! !"
유크렌의 원한에 찬 비명이 숲에 울렸다.
돔은 고개를 들어 한쪽 벽을 채우고 있는 초상화를 주시했다.
세월의 흐름탓인지 약간 색이 바란 것 같았지만, 대각선으로 그어진 칼자욱에 비하
면 그정도는 티도 안 나는 것이었다.
칸크빌레라는 이름을 지녔던 자를 한동안 바라보던 그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천
천히 몸을 돌렸다. 안채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듣지않고 이곳저것 돌아다닌 자신을
찾기 위해서인지 달려오는 시종의 안색은 시뻘겋게 익어 있었다.
"..도..돔님."
목까지 찬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든 시종은 전황제 칸크빌레 앞에 서있는 돔의 모습
에 숨을 죽였다. 머리색깔을 빼고 전부 황제의 외양과 흡사한 그 모습은 마치 칸크
빌레가 그림에서 막 빠져 나온 듯이 보였던 것이다.
그런 시종의 태도에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눈치 챈 돔의 좋기좋은 미간이
찌뿌려진다.
"성안에서 뛰는 것은 금지일텐데, 왜그리 방정인거냐."
"아.. 죄..죄송입니다! ! 요크발님께서 부르셔서..."
"....안내해라."
서늘한 음성에 고개를 조아린 시종은 조심스레 몸을 돌려 그를 안내했다.
아버지의 정을 받지못해 언제나 외로워 했던 자신을 후원해 주고 깊은 애정을 준게
바로 요크발이였다. 어머니와 그는 사이가 좋지않아 그와 있는 것을 싫어했지만,
돔에겐 요크발은 유일하게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었다.
고민이 있다해도 여성인 어머니에게 털어놓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며 걸음을 옮기던 돔은 멀리서 걸어오는 일단의 무리에 안색
을 굳혔다.그쪽에서 자신을 발견한 듯 걸음을 빨리해 자신을 지나쳐 걸어간다.
그런 그들의 무례한 행동에 미간을 찌부린 그였지만,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을수
밖에 없었다.
수가 없지 않은가, 그들에게 자신은 단지 전 폐왕의 아들일 뿐 그 무엇도 아니다.
칸크빌레가 사라져 버린 이상 아직도 살아있고, 게다가 성출입도 하는 자신이 눈에
가시겠지. 쓸씁한 표정을 짓는 돔의 얼굴에 눈치를 보던 시종은 화려한 방문앞에
서서 안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안에서 기다리십니다."
똑똑.
끼-익.
의례적으로 문을 두들이고 문을 연 돔은 방안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있는 젊은이를
발견하곤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모친인 율시아와 삼촌인 요크발에게만 지어주는 미소인 것이다.
그런 돔의 모습을 발견한 요크발은 반색을 지으며 일고있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
어났다.
"많이 컸구나, 정말 보고 싶었다."
"오랜만입니다."
요크발은 돔을 안아 그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마찬가지로 요크발의 볼에 입을 맞춘 그는 근처의 쇼파에 앚았다.
돔의 모습을 여전히 미소지은 채로 바라보는 요크발을 다른 이들이 봤다면 자신의
눈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가 이처럼 사심없는 미소를 짓는 것은 지극히 한정된 사람에 한정된 것이니깐.
한창 성장기에 들어섰다고 알고있엇지만, 어느새 사내 냄새가 나는 조카의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요크발은 근처에 있던 포두주를 잔에 채운 다음 돔에게 건내
주었다.
보수적인 모친의 교육에 알콜에 입에 댄 적이 무척이나 적었던 그이지만 요크발이
건내는 잔은 순순히 받아 들였다.
"성에 오는 것은 오랜만이지만.. 뭐랄까 조금 술렁거리는 느낌이군요."
"아아- 여러가지 일들이 있어서 말이다."
어두운 안색으로 답한 요크발이지만, 돔의 얼굴이 묘하게 변하자 금새 화제를 바꿨
다.
"누님께서는 요즘 어떻게 지내시냐."
"평소 같습니다. 요새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셔서 좀 활기를 찾으신것 같더군요."
"......새로운 친구? 어느 집안의 사람이지?"
미심쩍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요크발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은 돔은 어머니의 새로
운 친구가 근처에 꽃을 파는 아가씨로 무척이나 평판이 좋다고 말했다.
참고로 자신들의 지위라던가 요크발이 공작이라는 것을 모르는 순박한 시골처녀라
는 것까지도.
"..처녀라고? 널 노리는 건가?"
"설마요. 그녀는 좋은 여자긴 하지만, 든든한 약혼자가 있죠."
그제서야 안색을 풀고 알았다라는 대답을 하는 요크발이나, 돔은 그가 사람을 풀어
그 아가씨와 주위사람들에 대해 조사하고 다닐거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자신들
의 지위와 재력을 보고 인위적으로 접근하려던 사람들이 잔뜩이었던 것이다.
그 자들로 인해 돔 자신도 어릴적에 여러번의 위기를 겪은 적이 있기에 요크발은
자연히 자신들에게 접근하는 자들을 경계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만큼의 권력을 지닌 자라면 혼자서 지내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경험의 탓인지 모친은 친구들을 사귀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고, 그
때마다 요크발은 촌각을 세워 그들의 정체를 케냈던 것이다.
그것으로 무고한 자들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지만, 또한 흑심을 품은 자들도
있었다는 것도 밝혀졌다.
잔안에 들어있는 포도주를 한모금 넘긴 돔은 알싸하게 스치는 향에 눈을 감았다.
과연 그가 지니고 있는 물건답게 최상의 맛이었다.
"요새는 뭐하면서 지내고 있지?"
"그냥.. 이것저것. 요새는 시간 죽이기로 검을 배우고 있답니다."
"그래, 네 실력이 좋다는 평판이 있더군, 앞으로도 열심히 해라."
"네"
덜컹.
미소지은 채로 말하던 요크발은 노크 소리도 없이 열리는 문에 순간적으로 안색을
굳혔다가 그 사이로 나타난 사내의 모습에 미간을 찌뿌렸다.
저번 노웬일행들을 녹룡이 데리고 갔을때 브레스를 정면으로 맞아 큰 부상을 입었
다고 하나 왕성 최고의 치유술사들의 도움으로 상처는 다 아물었건만 저 가면은 무
엇인지.
전과는 다르게 한쪽 얼굴오 철로된 마스크를 쓰고있는 모습의 카일은 방안에 앉아
있는 두사람에게 손을 들어보이며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런 미인들이 둘이나 있으니 보기 좋은걸? 뭐하고 있었나?"
"..카일경."
갑작스런 등장에 몸을 경직시키던 돔이지만, 상대가 안면이 있고 또 요크발과 절친
한 친우라는 카일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런 그에게 손을 들어보인 카일은 다소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돔의 어깨를 두들
였다.
"많이 큰 것 같군, 남자다운 걸?"
"그도 그런 말을 하더군요."
요크발을 가르키며 미소를 짓는 얼굴에 카일도 웃고 있었지만, 역시나 돔은 무섭도
록 칸크빌레와 닮았다.
율시아가 임신했을 때, 부친에 대한 소문이 흉흉하게 돌았지만, 돔의 이런 모습을
보면 역시나 칸크빌레의 아이라고 생각할수 밖에 없는 것이다.
손안에 잡히는 단단한 근육에 미소를 지으며 요크발에게 시선을 준 카일은 황제가
부른다고 전했다.
"뭔가 또 계획을 세워두신 모양이더군, 정말이지 부지런한 분이라니깐."
카일의 말에 약간의 빈정거림을 읽은 요크발의 얼굴이 살짝 굳었지만, 곁에 서있는
돔의 존재가 차마 화를 낼수가 없다. 다른 이들이 뭐라고 하던 돔과 그의 모친인 율
시아에게 만은 잘 보이고 싶은 것이다.
둘중 한사람은 이미 자신을 지독히도 싫어하지만 말이다.
씁쓸한 웃음을 짓던 요크발은 들고있던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주일전 정신이 막 들었을땐 잠시나마 어릴적의 그로 돌아간 황제지만, 이내 원래
대로 돌아 왔었다.
그때의 기억이 있어 황제를 배알하는 것에 약간 지체했던 요크발이지만, 오랜만에
만난 황제가 덩치만 커졌지 속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야했다.
자신을 내려다 보던 그 서늘한 눈길에 저도 모르게 등이 식은땀이 흘렀던 것이다.
황제도 모르는 그를 아는 마음이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여기는 여전하군요."
황제의 방으로 가는 도중 지나치는 정원을 보며 돔이 회상에 잠긴 투로 중얼거린
다. 굳이 대답을 바란 말이 아니였음을 알고 묵묵히 정면을 향해 걸어가는 요크발
의 속은 쓰렸다.
원래대로라면 저 아이는 이곳에서 살았어야 하는 건데, 누님과 같이 죄인처럼 발챠
의 저택에서 묻고 있다. 찹찹함에 한숨을 쉬는 요크발의 모습에 어쩔수 없다는 표
정을 지은 카일은 그의 어깨를 두들였다. 걱정해 주는 마음이 담긴 손길에 고맙기
는 했지만, 요크발은 솔직히 자신보다 카일의 상태가 더 걱정되었다.
드래곤에게 당해 엄청난 부상을 입었음에도 미친듯이 날뛰었다는 소리를 들은 것
이다. 지금은 일시적으로 진정된 상태이지만, 또 언제 미쳐 날뛸지도 모른다.
머리속에 떠오르는 칸이 옆에 있던 금발의 에스라는 사내를 기억해낸 그가 카일이
이토록 빠진만한 인물인가에 대해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입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카일의 집착에 대해 조롱하던 한 기사의 몸이 두동강이 났다는 것을 직접 목격했던
것이다.
자신이 카일에게 순순히 당할거라곤 생각하진 않지만, 좋은 동료이니 그와 사이가
틀어지고 싶지는 않다.
"황제께서 기다리셨습니다."
문앞에 서있던 시녀장은 나타난 세사람에게 몸을 숙인후 거대한 문에 손을 댔다.
그와 동시에 육중한 소리를 매며 열리는 문을 돔은 다소 경직된 얼굴로 바라 보았
다. 이곳에 온 것은 아주 어릴적 아버지라고 불렀던 칸크빌레를 배알하기 위해서였
지만, 그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언제나 자신을 서늘한 눈동자로 바라보던 부친의 얼굴을 기억해낸 돔은 이내 몇일
전에 자신의 저택이 머물렀던 작은 몸의 칸의 떠올리고 이를 악물었다.
그런 꼴사나운 모습으로 아직 잘도 살아있구나 싶다.
완전히 열린 문을 감회가 깊다는 듯이 바라보는 돔의 등을 밀어 안으로 들어가기를
재촉한 요크발은 맨앞에 왕좌에 앉아있는 황제를 바라 보았다.
갑자기 커진 모습으로 등장한 황제의 모습에 관리들은 경악한 모양이지만, 그런것
에 아랑곳 할 황제가 아니다. 여지없이 할말만을 마치고 돌아가는 황제의 모습에
대신들을 그가 황제라고 인정했다니, 우스운 일이다.
일정한 걸음으로 왕좌에 오르는 계단 바로 앞까지 다다른 세사람은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던 이자크는 돔의 모습에 입가를 조금 올렸다.
"많이 자랐군, 돔. 그대의 부친이 보면 아주 기뻐하겠어."
".......송구하옵니다."
"오랜만에 보니 아주 좋군, 당분간 왕성에 머무르며 좋은 시간을 갖도록."
황제의 말에 고개를 좀더 숙여보이는 돔이지만, 그 얼굴을 굴욕으로 굳어져 있었
다. 인정하진 않지만, 그의 부친은 전 황제였던 칸크빌레였고 지금의 황제는 그의
동생이다.
저 황제에게 부친이 당하지만 않았다면 자신은 이곳의 황태자인것을.
입술을 깨무는 돔의 모습을 눈을 돌려 바라보던 요크발은 한숨을 쉬었다.
모든 것을 알고있는 황제가 이렇게나 돔을 대하는 것은 악취미라고 밖에 생각할수
가 없다.
"칸크빌레 일행에 동으로 간다."
".......?"
"왜 그런 얼굴로 나를 보는 건가?"
칸크빌레가 동으로 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가 왜 이 자리에서 그 말을 하는지 영문을 알수없는 요크발을 얼굴을
들어 황제를 올려다 보았다. 황제의 앞으로 무척이나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황제는
단지 왜 보는거냐라는 투로 웃어 보일 뿐이다.
".....저희들에게 그들의 뒤를 쫓으라는 명이십니까?"
"틀려. ............같이 간다."
'같이 간다.' 말에 '누구와?'라고 물을 만큼 요크발은 어리석지 않았다.
다만 지금 중앙국은 그동안의 황제의 병환과 동시에 찾아온 성장에 혼란스러운 상
황이다.
그런 상태에서 또다시 자리를 비우게 된다면 그다지 좋다고 생각할수 없다.
만류하려던 요크발은 황제의 변함없이 차가운 얼굴에 입을 다물었다.
저 모습은 무슨 말을 해도 듣지않을 기세다.
그런 그의 등뒤로 나타나는 적발미인의 모습에 요크발은 눈을 크게 떴다.
"......루드..빌?"
중얼거리는 카일의 목소리에 눈을 가늘게 휘어보인 루드빌은 황제의 앉아있는 왕
좌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가늘게 휘었다.
여유롭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그 모습에 눈살을 찌뿌린 요크발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수없는 황제대신 자신의 옆에 있는 돔을 바라 보았다.
이런 아이가 있는 앞에서 공공연히 칸크빌레에 대해 운운하다니... 혀를 차고 싶은
마음이지만, 차마 내색할수 없었던 요크발은 머리를 깊게 숙일 뿐이었다.
저렇게 그녀가 나타난 이상 황제는 루드빌과 함께 칸크빌레와 결판을 내고 싶은 것
이겠지.
뭔가 복잡한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