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하얗고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바라보던 소년은 한숨을 쉬었다.
이걸 어쩌란 말이지. 나한테 모든걸 하라는 거야?
그냥 히스테릭한 소리를 지르고픈 마음에 소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툭툭 떨어지
는 눈물을 바라 보았다. 그에 대해 녹아 내리는 차가운 눈에 시선을 주던 그는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포기하면 모두가 실망할거야.
자신을 믿어주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킬수는 없는 것이다.
입술을 깨문 소년은 주먹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수밖에 없는 거지. 그렇다면 질릴 정도로 기합을 넣고 해버릴 테니깐.
나중에 딴말하는 인간들이 있다면 이 눈속에 파묻으면 그만이다.
아까의 절망은 던져두고 어느새 희망에 눈빛을 보내던 소년은 주먹을 쥐며 허공을
갈랐다.
- 화이팅! ! !
이 소년의 작은 외침이 북쪽 역사의 시작인 것이다.
그때의 소년은 무척이나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아직도 기억하는 자신에 사내는 피
식하고 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발밑에 매달려 징징거리는 소년을 내려다 보았다.
분명 그때의 그놈과 닮은 외모는 녀석과 피를 이어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지
만, 이렇게나 성격이 딴판이다.
놈은 울고나면 그래도 다시 일어나는 근성을 보였는데 말이지.
이놈은.. 매버 징징대기만 하니.. 귀여워 보이는 것도 한두번이다.
"너..너무 하자..잖아.. 흑흑. 그렇게 날..괴..."
"괴롭혀서 왕자리를 빼을려고 설마하니 스프에 벌레를 넣겠나."
"날 굶여 죽일 생각인 거야~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치그치그치??~~"
급기야 무릎 위로 올라와 멱살을 잡고 흔드는 녀석을 바라보던 사내는 입을 꾹 다
물었다.
이 애물단지 인간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성격대로라면 그냥 확.하고.....하고 싶지만 그 녀석을 생각하자니 할짓이 못된다.
피로한 인상으로 미간을 꾹꾹 누르던 사내는 뭔가 신경에 걸리는 느낌에 손을 떧어
허공에 달려있는 구슬을 잡아 끌었다.
구슬에 약간의 마력을 넣고 무언가를 찾으려던 사내는 그러나 아주 머리위로 올라
가 엎드려 징징대는 녀석에 굉장히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년의 목뒤를 잡아 바
닥으로 내팽겨 졌다.
요란하게 계단을 굴러 떨어진 소년은 이곳저곳 쑤시는 통증에 눈가에 눈물을 매달
고 '냉혈한이야~'라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그는 그런것에 신경쓸 위인이 아니다.
"호-오. 이것..봐라?"
구슬안에 약간의 마력을 주입시키자 안에서 떠오르는 영상에 사내는 재밌다는 표
정을 지었다. 꽤나 귀여운 생쥐들이 걸리지 않았는가.
자리에서 일어난 사내는 바닥까지 끌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단 밑에서 여기저기 쑤시는 몸을 안고 훌쩍거리던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려
는 사내의 모습에 안색을 달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달려 들었다.
"어딜 가는 거야? 날 두고 다른 곳으로 갈셈?"
"....버려진 여자같은 말을 관둬줬으면 하는데?"
서늘하게 내려다 보는 검은 눈동자에 울음을 그치고 콧물을 들이 삼켰다.
"이렇게나 쌀쌀맞게 구니 그러는거 아냐?!
좀만 다정했어봐 유크렌시아가 도망 갔겠어?!!"
".........................히.자.스."
"......힉!"
생각없이 일단 뱉어놓고 봤지만, 단숨에 검은 오로라를 뿌리는 사내의 모습에 숨을
쉴수가 없다. 숨쉬는 것도 잊고 두려움에 찬 표정을 자신을 올려다 보는 한참이나
시선 밑에 있는 소년의 얼굴로 허리를 굽힌 사내는 작게 속삭였다.
열린 입술 사이로 보이는 날카로운 송곳니에 소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난 네가 이럴때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근잘근 씹어먹고 싶더군."
".........흐..흑..;;;;"
"조용히.. ....얌전히 살아라. ...응?"
나지막한 말에 엄청난 속도로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의 모습에 팔장을 낀채로 허리
를 핀 사내의 주위로 서서히 검은 기운이 몰린다.
피부를 따끔거리게 할 정도의 엄청난 마력량에 그에게서 멀어져 사내가 앉았던 의
자뒤로 몸을 숨긴 소년은 얼굴만 빼곰히 내밀어 그가 공기중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바라 보았다.
한참에 지나후에야 가슴을 쓸어내고 의자에서 나온 소년은 사내가 앉은 의자에 발
길질을 하는 것으로 화풀이를 한 뒤 그 의자에 걸터 앉았다.
그자가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면 또 엄청 싫은 표정을 짓을테지만..
이번만은 그냥 돌아갈수가 없다.
반드시- 반드시- 내 용이 되라고 말할테니깐! !
초대 왕 이후로 아무도 그와 계약을 해보이지 못했지만 이 내가 해보일테다.
"저 드아글라 산맥의 융텐과 반드시 피를 나누는 사이가 될테니 말야! !"
주먹을 쥐고 눈을 빛내는 그 모습을 봤다면 검은 머리의 사내, 아니 북쪽 드아글라
산맥의 흑륭 융텐은 '과연 피는 못 속이는가, 선조와 꼭 닮았군.'이라는 말을 했을
것이다.
하여간 그런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뒤로 넘기고, 구슬안에 있던 것들을 확인
하기 위해 공간이동으로 추운 눈밭 가운데에 서게된 융텐은 볼을 두들이는 작은 눈
발에 미간을 찌뿌렸다.
다른 것은 다 좋은 이곳의 눈뿐인 이 삭막함과 추위는 그다지 맘에 들지 않는다.
팔장을 끼며 아저씨처럼 등을 구부정하게 구부린 융텐은 종종 걸음으로 그들의 기
운이 느껴지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왠지 모르지만, 재미있을 것 같단 말이지."
히죽하고 웃어보인 것은 좋지만, 조각같은 그 외모완 상당히 어울리지 않은 것이
다. 바람에 날리는 흑발의 머리카락이 엉키는 것이 신경쓰여 손을 뒤로 넘겨 머리
카락을 쓸어 넘기려던 융텐은 물컹하고 밟히는 느낌에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아래
로 내렸다.
"........찾았군."
찰싹 붙어서 반쯤 눈에 파묻힌 두 소년을 발견한 융텐은 검청의 머리색을 지닌 소
년의 등을 밟고있는 다리를 떼지 않은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자-자- 어디보자.'라며 그제서야 다리를 떼고 구부리고 앉은 융텐은 콧노래를 부
르며 검청의 소년의 얼굴을 발로 밀어내며 다른 소년의 앞으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
카락을 뒤로 넘겼다.
멀리서 기운만을 잡았을 땐 검은 머리카락만을 보고 일족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그냥 인간이다.
뭐, 그닥 평범한 것 같지는 않지만.....
"역시. 데려가 볼까나?"
그동안 적적했던 생활에 조금이나마 재미를 줄수있을지도 모르다.
게다가... 융텐은 검은 머리 소년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해 그의 체취를 맞
아 보았다.
이것은 분명 그이다.
소년의 몸에서 나는 유크렌시아의 체취에 융텐은 눈을 가늘게 떠 보았다.
뭔가 달콤한 향기가 콧끝을 간지르는 느낌이다.
그 포근함을 느끼던 유헌은 간질간질 느낌에 손등으로 코를 비비며 몸을 돌렸다.
뭔가에 뒤덮인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을 덮은 이 천은 무척이나 부드럽고 포
근하다. 그것에 달라붙어 얼굴을 비비던 유헌은 귓가를 간지르는 느낌에 미간을 찡
그리며 손등으로 치워냈다.
하지만 계속해서 간질거리는 느낌에 싫은 소리를 낸 유헌은 어쩔수 없이 눈을 가늘
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을 올려다 보았다.
"안녕?"
손에 깃털같은 것을 들고 밝게 웃어 보이는 소녀의 얼굴에 유헌은 입가를 조금 올
리고 웃어 보이며 '안녕.'이라는 말을 건내곤 다시 눈을 감았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굉장히 아름다운 소녀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정도로 굉장한
미모의 소유자다. 하늘거리는 은빛의 머리카락과 튜명한 호수같은 눈동자를 보자
니 책에서 읽은 그대의 호수같은 눈동자..어쩌구 하는 시구가 거짓만은 아니구나라
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런데 자신의 일행중에 저런 미모를 지닌자가 있었던가?
분명 없을텐데.....
" ? ! "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유헌은 여전히 침대에 턱을 받
치고 바닥에 앉아있는 미모의 소녀를 바라 보았다. 놀란 표정으로 일어나 앉은 유
헌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소녀는 이를 들어내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을 경직된 얼굴로 바라보기만 하는 그의 행동에 입술을 삐죽히
내밀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보이고 뛰어간다.
엄청나게 화려한 옷을 저렇게나 치렁치렁하게 걸치고도 잘 뛰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던 유헌은 그 소녀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에 안색을 달리했다.
"융텐-! ! 깨어났다고~! ! !"
용모와 어울리지 않은 엄청나게 걸걸한 목소리.
허스키한 소녀의 것이라고 할수없는 그것은 분명 변성기를 거치는 소년의 것이었
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유헌은 옆에서 느껴지는 꼼지락 거리는 감각에 안색
을 달리하고 고개를 내려 아직 잠들어 있는 칸을 발견했다.
눈을 비비고 자세를 바꾸려는 칸의 어깨를 저도 모르게 잡은 유헌은 굳은 안색으로
그의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이런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자신이 뭔가를 할수 있을리가 없다.
천장이 보이지 않는 높은 벽과 밝은 빛에 부숴지는 엄청난 샹드리에, 엄청넓은 공
간과 여기저기 걸려있는 장식, 그리고 그림들. 게다가 저 구석에 산같이 쌓여있는
것은 분명 보석이라 불리는 것일거다.
그렇게나 많은 것들이 있으면서도 내부의 이미지가 하얀 색이라는 게 의아하다.
당황한 유헌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칸의 볼을 가볍게 두들여 보였다.
"칸..! ! 일어나 봐요! !"
"...뭐야....도대체..."
몸이 흔들리는 감각에 실눈을 뜬 칸은 자신을 내려다 보는 가흔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손을 올리려 했으나 갑자기 느껴지는 울렁거림에 손으로 입을 막고 침대밖
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런 칸의 모습에 당황한 유헌의 그에게 다가가려 손을 내미는 순간 칸은 '욱'소리
와 함께 토사물을 새햐안 바닥에 뱉어냈다. 그런 칸을 아연하게 바라보던 유헌은
그가 계속해서 괴로운 듯이 토해대자 정신을 수습하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잘 자다가 일어나서 왜 그러는 걸까?
의아함에 계속 손을 쓰다듬던 유헌은 등뒤에서 느껴지는 오싹한 감각에 저도 모르
게 칸의 등에 손톱을 세웠다.
"..윽? ! 가흔?"
따끔한 통증에 입가를 손등으로 닦은 칸이 올려다 보자 안색이 굳은 유헌이 경직된
턱을 미세하게 떨고 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엎드린 상태에서 일어난 칸은 안색을
달리하며 그의 이마에 손을 올려 보았다.
열이나 아픈 것 같지는 않은데 이 표정은 뭐란 말인가.
"아직 공간 이동때 뒤틀린 내장들이 제자리를 찾은게 아니니깐, 너무 무리해서 몸
을 움직이지 않은 편이 좋아."
"?! 넌 누구야?! !"
가흔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려고 생각한 순간 불쑥 쏫아나온 새하얀 얼굴에 기
겁한 칸은 가흔을 자신의 뒤로 돌린 다음 소리를 질렀다.
그런 칸과 유헌을 바라보던 아까의 미인은 고개를 그들에게서 떼곤 여전히 걸걸한
음성으로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내에게 말했다.
"이 녀석들 생각보다 팔팔한데? 그냥 놔줘도 되겠어."
"이런대서 놔주면 얼어죽을 거다."
"....칫."
히자스는 융텐의 말에 입술을 삐죽이며 얼굴을 돌렸다.
아까는 녀석들이 깨어났다는 것을 알려주러 간 자신을 '감시하라고 했지. 보고하라
고 했나?'라는 말도 안되는 걸로 쫒아 내더니 이제는 무슨말을 해도 차가운 반응을
보인다.
물론 그의 의자에 너무 화풀이를 하다보니 팔턱이 부러진 것은 미안한 일이지만,
겨우 그것 가지고 아직도 꽁해있는 저 사내는 정말로 꽁생원이다.
입술을 비죽 내밀며 연신 투덜대는 히자스의 모습에 미소를 지은 융텐은 자신을 바
라보는 두 소년에게 다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몸 상태는 어떤가?"
"........칸."
손을 내밀며 말하는 사내의 모습에 유헌은 안색을 굳혔다.
이 세상에선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것을 지니고 있
는 자신은 노예상인들의 표적이 될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을 들어 왔는데, 눈앞
의 사내는 자신과 같은 흑발에 검은색의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자신의 등뒤에서 이불을 잡고 쉰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가흔을 바라보던 칸은 그
에게서 시선을 돌려 눈앞의 사내를 예리한 시선으로 바라 보았다.
가흔과 같은 자가 둘이라곤 생각할수 없다.
현재 자신들이 있는 곳과 침대에 걸터 앉은 소년의 모습에 하나의 가정을 축출해낸
칸은 혀를 차며 등뒤의 가흔의 손을 강하게 잡았다.
재수없으면 이대로 세상하직 할지도 모를 일이다.
"칸.. 저사람 나와 같은.."
"틀려."
가흔의 말을 잘른 칸은 자신들을 깔보듯 눈을 내리깔고 있는 사내와 시선을 마주하
며 입술을 달싹였다.
"북의 지배자. 드아글라 산맥의 흑룡 융텐인가.....?"
"호-오."
그다지 기를 가리지 않아 신경이 예민한 자들이라면 자신의 정체를 알수도 있겠지
만, 저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정체를 알수있다는 것은, 기도 예민하나
그만큼 정보를 해석하는 능력도 뛰어나다는 건가?
특이한 느낌이 나는 인간인줄만 알았더니 그런 능력이 있었군.
융텐은 비스듬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칸과 유헌을 바라 보았다.
여기로 보나 저기로 보나 여전히 특이한 느낌이 들게 하는 녀석들이다. 저런 타입
의 인간은 드문게 아니지.
입가를 비죽히 올리는 그의 모습에 히자스는 안색을 굳혔다.
저 변태용이 이 두사람이 맘에 든 모양이다.
"....융텐?"
들어 본적이 있는 이름이다. 게다가 눈앞의 사내는 드래곤.
".....유크렌이 말한 그 융텐이라는 자인가."
"유크렌을 알고 있는 거로군."
" ? ! "
혼자서 중얼거리던 유헌은 칸을 밀쳐내고 자신의 앞으로 육박해온 사내의 모습에
숨을 죽였다. 이렇게나 가까이 오는데 눈치채지도 못했다. 아니, 그보단 엄청나게
빠른 움직임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유헌의 얼굴을 감상하던 융텐은 자신의 발밑에 깔려 버둥
거리는 칸의 모습에 한쪽 눈썹을 올렸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뒤로 물러나는 사내를 굉장한 기색으로 노려보던 칸은 이를
갈며 욱씬거리는 팔을 주물렀다.
정말이지, 용이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재수없다.
"역시나- 유크렌시아와 아는 사이였던 거야."
"에? 이 사람들 유크렌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야??
.....하지만, 그는 동면중이라 알고 있는데..."
'깨어나면 이리로 올것이지.. 한번쯤 만나고 싶었는데..'라고 중얼거리는 히사스에
게 시선을 던진 융텐은 침대에서 일어나 구겨진 옷가지를 바로했다.
"몇달전에 깨어난 모양이다. 그러다 갑자기 기가 사라져서 꽤나 걱정이었는데...
이 자들이 그의 행적에 대해 알려줄것 같군."
유헌은 입가를 올리며 미소짓는 사내의 모습에 오싹하고 오르는 피부의 닭살을 쓰
다 듬었다.
도대체 뭐냐. 이 기분나쁜 기운은-
그동안 유크렌의 목에 구속구가 걸려있어 용인데도 그에겐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
았던 건가? 미간을 가늘게 모은 유헌은 융텐이라는 자를 자세히 살펴 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흙빛의 눈동자를 보고 있으려니 묘한 느낌이 든다.
지금까지 자신을 저렇게 바라본 자들이 극히 드물다는 것에 즐거운 감정을 느끼는
걸지도 모르지만, 그보다 저 눈빛에 뭔가 가슴속 밑에 가라앉는 것이 깨어나는 느
낌이랄까?
좀더 머무르게 하는 것도 좋겠다 싶은 생각에 융텐은 조금 웃어보이며 여전히 침대
에 앉아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히자스를 바라 보았다.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예쁜 녀석을 눈을 가늘게 하고 바라본다.
"히자스, 내 손님들이니 네가 잘 대우해 주도록-"
"에..에?! 내가 왜 그런 짓을 해야해?! !"
정무도 봐야하고 하루에 몇시간씩은 나라도 돌아 다녀봐야 하는데다, 매번 자신을
괴롭히는 형들을 피해 다녀야 한다. 그런 엄청나게 바쁜 자신에게 저런, 이쁘게 생
겨서 맘에 들기는 하지만 짐을 두개나 맡기려 하다니.
서로가 나눠서 대접하자는 말을 하려고 큰눈을 동그랗게 뜬 히자스는 그러나 자신
을 직시하는 검은 눈동자에 결국 울먹거리며 꼬리를 내릴수 밖에 없었다.
"그럼, 부탁한다."
"...칫칫칫."
입술을 삐죽이며 침대위로 손가락을 배회하는 모습에 자신의 말을 승낙하는 것으
로 판단한 융텐은 여전히 붙어있는 두사람을 바라 보았다.
"필요한게 있으면 뭐도 말하도록, 저런 쓸모없는 녀석이지만 그래뵈도 왕이니깐."
"엥? ! 쓸모없다니- 너무해에에에~~! ! !"
징징대는 히자스에 한쪽귀를 손으로 막은 융텐은 남아있는 세사람에게 몸을 돌리
고 휴식을 취하기 위한 장소로 걸어갔다.
조만간 유크렌시아를 찾을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을 대비해 기운을 높여두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자신의 여자는 무척이나 까다롭고 앙탈이 심하니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북은 원래부터 왕치국이라고.
나라를 다스릴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남자라는 말이다."
"에? 하지만 전에 칸이 불의 초대왕은 여왕이고, 지금의 왕도 여왕이라고 했었는
데...."
"북은 이런 환경이다 보니 별로 다른 나라와의 왕래가 적어서 오해가 있기도 하다
고 들었지만.. 곤란하다고, 그런식으로 초대왕이 여왕으로 인식되어 있는 건."
투덜거린 히자스는 벽에 손을 쓰윽하고 문질렀다.
그런 그의 손짓에 따라 투명하게 변한 벽은 엄청난 눈보라가 치는 하얀 설원의 모
습을 유감없이 보여줘서 칸과 유헌을 질리게 만들었다.
유헌은 겨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 이런 남극을 알고 있는게 아닌데다, 칸은 원
래 일년동안 대체적으로 맑은 날씨를 지니고 있는 중앙국에서 자라왔다.
물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갖가지 날씨들을 보긴 했지만, 저런 두려운 광경은 일
찍이 없었다. 딱딱하게 굳은 두 사람을 보던 히자스는 한쪽 눈썹을 오리며 장난스
럽게 입을 열었다.
"굉장하지? 덕분에 다른 나라에서 오는 사신들은 손에 꼽을 정도라고.
어떻게 보면 북은 완전히 그네들만이 있는 세계라고도 할수 있는 거야."
"그만큼 폐쇄적이라는 거군요."
"그렇지. 알고있어? 당신들처럼 허락도 없이 토지에 나타난 인간들은 그 자리에서
사살을 당해도 억울해 할 수가 없어."
'에-ㅅ'라며 경악의 표정을 짓는 유헌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은 히자스는
'그만큼 폐쇄적이라니깐.'이라는 말을 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런 히자스의 모습에 칸과 유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전에 유헌에게 여왕이라고 잘못 가르쳐 준것에 대해 잠시 얼굴을 붉힌 칸이지만,
그래도 히자스라는 현 왕이 저런 치렁치렁한 옷에 엄청난 미모를 지녔으니 여자로
오인을 받아도 할말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왕이라고 믿었던 북쪽의 초대왕이 남자라니- 꽤나 충격이다.
북쪽은 모계사회이기에 그런 험한 환경에 여자가 왕이 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
다고, 그렇다면 꽤나 힘들겠구나-라고 걱정해 주던 어린 나의 유년기를 돌려달라
고 하고 싶었지만 유헌의 앞이라 차마 내색을 못하겠다.
딱딱하게 굳은 칸의 얼굴을 바라보던 유헌은 의아한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한 나라의 초대왕에 대한 기록인데. 남자가 여자로 오인받아 기록되어 수백
년동안 고쳐지지 않은 것은 이상하다.
"음... 왕의 역활 때문에 그런 말이 있는지도 모르지."
"네?"
"북의 왕은 백성들이 좀더 나은 환경에서 살수 있도록, 일정한 범위의 한기를 모아
몸속에 가두고 있거든. 난 여기에 모으고 있는데, 한번 만져 볼래?"
목을 덮은 머리카락을 뒤로 잡고 자신쪽으로 목덜미를 내놓는 히자스의 모습에 움
찔하던 유헌은 그러나 목 중앙 이상하리만치 투명하게 빛나는 곳을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을 들어 그곳의 표면을 만져본 유헌은 그 부드러움과 동시에 얼어버릴 것같은 한
기에 반사적으로 손을 떼내다 손가락 하나를 세워 그곳을 조심스럽게 찔러 보았다.
".....앙.."
"헉?!"
찌르자 마자 묘한 음성을 내며 얼굴을 붉히는 히자스의 모습에 놀란 유헌은 손을
떼내며 칸의 어깨뒤로 몸을 숨겼다.
그런 유헌을 자신의 뒤로 돌린 칸은 손가락을 들어 히자스를 가르키며 입을 열었지
만, 유헌과 마찬가지로 당황해서인지 목소리가 갈라져 나온다.
"이 변태! ! 무슨 짓을 하는 거야?! !"
"변태라니. 실례라고."
경계하는 눈빛의 두사람의 모습에 입술을 비죽히 내밀어 보인 히자스는 들어올린
머리카락을 내리고 자신의 목덜미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성감대니깐 어쩔수 없잖아."
"..그..그런 곳에 가흔을 만지게 하다니 무슨 속셈이냐고-! !"
"이몸은 친절하게 알려주려 한거라니깐, 왕의 역활에 대해- 그것때문에 우리들이
여왕으로 불리는 지도 모르니깐 말야."
칸의 말에 무척이나 맘에 상한 그는 아미를 찌뿌리며 투덜댔다.
저렇게나 무례한 녀석은 처음인데다, 변태라는 소리는 또 처음들어 본다.
문화의 차이라는 것도 있지만, 상대를 배려해서 말을 조심하는게 좋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는 히자스 자신도 실은 생각없이 말해 상대방의 가슴에 비수를 꼽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커다란 문에 다다른 히자스는 양손을 올려 문을 밀었다.
바닥을 끄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에 시선을 주던 칸은 가흔의 손을 잡으
며 자신의 뒤로 돌렸다.
"어지간히 좀 떨어져 있으라고 꼴 사나워-"
"시끄러- 변태짓을 하면서도 알려주려한 왕의 역활이나 말해 보시지?"
히자스의 빈정거림에 울컥한 칸은 이를 들어내며 악의 섞인 말을 했다.
그런 칸의 얼굴을 노려보던 히자스는 흥분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숨을 골랐다.
이 놈들이 내부인인데다 융텐이 부탁하지만 않았다면 당장에 눈보라가 치는 저 밖
으로 집어 던졌을 것이다.
"북은 원래 인간이 살수없는 곳이야. 하지만 지금으로 부터 1000여년전에 이곳에
수만의 사람들이 이주해 왔지. 중앙국의 이종족에 대한 차별정책을 피해 이리로 온
거야."
".....칸."
중앙국을 운운하는데다 그것이 그다지 좋은 내용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아 칸
의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숙인 유헌은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
을 지었다.
유헌의 시선을 미쳐 눈치채지 못하고 히자스가 하는 말에 대한 중앙국의 역사를 떠
오려 보던 칸은 살짝 고개를 옆으로 숙여 보았다.
놈이 뭘 말하는건지 하나도 모르겠으니, 아무래도 저 녀석의 입에서 직접 들어야
겠다.
칸은 그렇게 역사공부를 많이한 왕은 아니였던 것이다.
"당장에 사람들이 살 곳을 마련해야 했던 위대하신 초대왕은 일정한 공간의 한기를
자신의 몸으로 끌어 당기는 방법으로 일단 거주지를 만들었어."
"한기를 끌어 당기다니... 그러다가 죽는거 아냐?"
"죽는 거지만, 죽지 않았으니 괜찮은거 아닐까?"
"...이..이봐."
한기를 몸으로 끌어 당기면 당연히 얼어죽는 것이다.
그런 죽을수도 있을 짓을 살았으니 괜찮은 거야-라니.
이놈도 자신 못지않은 엄한 놈인 모양이다.
한심하다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볼을 부풀린 히자스는 방안으로 들어가
마법등을 켰다. 어두운 내부가 단번에 밝아져 눈을 가리고 적응을 해야 했던 유헌
은 이내 시야에 들어오는 화려한 방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온통 얼음으로 만들어진 테이블, 의자, 침대, 하다못해 화병까지도 얼음이다.
밝은 빛에 투명하게 비치는 의자에 손을 올려보인 유헌은 차갑지 않은 감촉에 히자
스를 바라 보았다.
"마법을 걸어서 그래. 비어있는 방이라 이렇지만, 나중에 시녀들에 잘 꾸며 줄꺼야.
침대의 시트도 그때 깔아 줄테니, 피곤해도 참으라고."
선심쓰듯이 말하는 동안 히자스는 자신의 너그러움에 감탄했다.
이방인이 묶을 장소를 집적 준비하고 안내 해준데다 앞으로의 일들도 세세하기 설
명해 주는 자신은 정말이지 자애로운 왕이지 않은가.
그런 히자스의 뻐기는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을 비죽히 내밀어 보인 칸은 근처의 의
자에 앉았다.
딱딱하기는 하지만 차갑지 않으니 그걸로 만족하기로 한다.
"우리들 여기서 몇일이나 있어야 하는 거야?"
칸의 물음에 한쪽 눈썹을 올려보인 히자스는 글쎄라는 말을 하며 턱에 손을 집었
다.
"일단 융텐의 맘에 든것 같으니 이곳에서 쫒겨 나거나, 죽임을 당하지 않는 것은 분
명하지만 말이지... 얼마동안 있어야 할까."
"............"
"구체적으로 말할수가 없군. 이방인의 처리는 이곳의 주인인 융텐의 몫.
나중에 그가 오면 물어 보도록 하는게 좋아."
민감한 문제였다.
일단 융텐의 손에 들어가 그가 이들의 신병을 손에 넣은 것과 같다.
만약에 자신이나 다른 자들의 손에 들어갔다면 심판후 그 처리가 결정된다.
팔짱을 낀채인 히자스의 모습을 바라보던 칸은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대로 어설픈
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간간히 보여주는 저 서늘한 눈빛은 그가 결고 만만치 않은 자라는 것을 알려준다.
"너희들이 있는건 나와 융텐만이 알고있는 것이니 함부로 돌아 다니지마.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다가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아니라고 믿어."
생긋 웃어보이는 히자스의 얼굴을 바라보던 유헌은 입을 다물며 만지고 있던 화병
에서 손을 뗐다.
다른 자들의 눈에 띠면 자신들을 숨긴 왕의 그에게 상당한 폐가 될테니 알아서 죽
어 지내라는 뜻이다. 자신의 말을 제대로 알아 먹은 것인지 딱딱하게 굳은 두사람
의 모습을 바라보던 히자스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았다.
"두사람의 정체가 뭔지 어디서 왔는지 궁금하지만 묻지는 않아. 하지만 묻어야만
할 상황에 온다면 어쩔수 없다는 걸 알아줘.
왕은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쳐 일을 그르치게 하면 안되거든."
"....알아서 자중하도록 하지."
"좋아. 건방지기만 한게 아니라 똑똑한 꼬마라 다행이다. 자- 그럼."
마지막 말에 칸이 발작하기 전에 손을 흔들고 방에서 나간 히자스는 밖에서서 문에
약간의 마력을 걸어 두었다.
안쪽에 두사람이 나올때 자신에게 알리도록 하는 것이다.
저 융텐이 맞긴 인간들이다. 귀찮기는 하지만 신경을 써줘야 그 용이 자신의 말을
잘 들어 주겠지. 좀더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조금 있으면 회의시간이다.
늦었다고 그 악마같은 형들에게 괴롭힐 건수를 줄수는 없다.
절로 미간이 찌뿌려진 히지스는 걸치적 거리는 옷자락을 잡고 지나온 복도를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탁.
구석에 놓여있던 재떨이를 잡아 손바닥안에서 굴려보던 칸은 그것을 테이블 위로
던지며 의자에 길게 누웠다. 팔을 베고 눕는 칸의 모습을 바라보던 유헌은 맞은 편
자리에 앉아 두다리를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자신의 그런 행동에 눈을 조금 떠보이던 칸이지만, 뭐 어떠냐는 시선을 보내자 헛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돌린다.
"나머지 일행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알아서 잘 탈출했을 거야. 실력있는 놈들이니."
'믿고 있다고..'라고 씁쓸이 말하는 칸의 모습에 눈을 가늘게 뜬 유헌은 멍하니 천
장을 올려다 보았다.
융텐이라는 저 드래곤이 찾는 유크렌과 그를 데리고 다닐 오브, 라프헨과 라헨, 노
웬, 샤한. 마지막으로 자신들을 공간이동 시킨 젤의 안부가 제일 걱정된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그녀의 경우 그 힘을 쓰고 나면 몇일을 누워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 어떻하면 좋지."
이 세계의 인간은 칸조차도 모르는 곳이다.
일행도 없고 아는 사람들도 없는 이런곳에서 자신들이 무엇을 할수 있을까.
입술을 깨문 유헌은 칸과 마찬가지로 의자에 길게 누웠다.
"제법이군."
수정구 안의 나란히 누워있는 두사람의 모습을 확인한 융텐은 입가를 조금 올려 보
였다. 자신들의 처지를 알고 감시인이 사라져도 도망갈 궁리를 하지 않는 모습이
꽤나 영리해 보인 것이다.
유크렌을 찾고 나면 녀석들을 애완용으로 키우면 어떨까하고 생각하던 그는 손에
들려있는 수정구를 다시 허공으로 띄우고 의자뒤로 몸을 눕혔다.
히지스가 박살낸 손걸이가 하나 없어 엉성하게 붕대로 감아둔 의자에 앉아있는 미
형의 남자는 좀 발란스가 어긋나는 모습이지만, 본인이 신경쓰지 않으니 그렇게나
이상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여튼 유크렌을 다시 만날지도 모르겠군..이라고 생각하던 융텐은 오른쪽에 떠있는
구슬안에서 한 사람이 달려나가는 모습을 발견하곤 손을 들어 올렸다.
"이런.. 히자스.. 호랑이굴로 들어가는 군."
치렁치렁한 옷들과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뛰어나가는 그 앞에는 금발과 은발의 사
내 둘이 보인다. 그것을 확인한 융텐은 어쩔수 없다는 듯이 말했지만, 그 음성은 무
척이나 유쾌했다.
구슬을 놓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는 휴식준비가 다 되었다는 듯 화려한 빛을 발
하는 바닥의 문양을 확인하곤 눈을 감았다.
서서히 본체로 현신하는 것을 느끼며, 지금쯤 유크렌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하고 생
각하는 한편, 그를 만나기 전에 피부미용이라도 받아볼까 하는 그이다.
"으으윽~ 늦을 거야~;;;"
있는 힘껏 달려온다곤 했지만, 원체 다리를 짧으니 속도가 느리기만 하다.
평균적으로 봤을때 긴편인 그의 다리지만, 형들의 쭉쭉뻗은 몸매를 보고 자란 그로
썬 자신의 몸에 상당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이번에도 늦으면 그 악마같은 인간들이 잠도 못잘 정도로 괴롭힐 것이 분명하다.
치를 떨며 자신의 머리를 양손으로 부여 잡은채 달려 나가던 히자스는 돌아가는 코
너에서 뭔가에 부딫혀 호되게 놔뒹굴었다.
"아야야;;"
세게 부딫힌 엉덩이가 얼얼하다.
왠놈이 이런곳에 있어서 이 귀한 몸을 바닥에 구르게 한거냐하고 분노에 활활 타오
르는 눈으로 위를 올려다본 히자스는,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두 인물의 발견하곤
안색을 창백하게 질렸다.
입을 벌리고 어버버하며 손가락질을 하는 자신들의 동생 히자스는 내려다 보는 두
남자들. 오른쪽 금발 키사스, 왼쪽 은발 유제스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두 사람의 미소에 온몸에 돋는 닭살을 문지르며 엉덩이로 뒷걸음을 치는 히자
스이지만, 길게 뻗은 네개의 팔에 붙잡혀 너무도 간단히 허공에 매달렸다.
"지금이 몇신데 이제서야 오는 거야? 왕."
"왕으로서의 작가이 없는 것 같네. 왕."
말끝마다 왕왕거리지만, 그게 자신의 있는 위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 단순히 놀리
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아는 히자스는 눈을 부릎뜨며 두사람을 노려 보았다.
매번 내가 약한 모습으로 빌빌 거리니깐 이 두존재가 왕인 나를 무시하는 거다.
아무리 형이라지만 이제부턴 무례하게 굴면 용서하지 않을 테니깐..! !이라는 결심
을 굳히고 두 사람을 노려보던 히자스는 그러나, 싸늘한 두쌍의 은빛 눈동자와 시
선이 마주치자 눈알을 굴릴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기가 약한게 아니라 이 두사람이 너무 살벌한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만, 시선을 피하며 딴데를 보는 히자스는 상당히 비굴했고, 꽤나 귀여웠다.
그런 히자스의 모습에 키사스, 유제스는 이를 들어내며 웃었다.
역시나 놀리는 재미가 있는 사랑스러운 녀석인다.
"그래, 지금 어디 가는 길?"
"..저..정무를..보..보려...."
"어라? 모르고 있었어? 그거 저녁시간으로 미뤄 졌는데."
"엥? 그..그럴리가..! ! 분명, 아까 시녀가..! !"
"아-하. 시간을 미룬다는 걸 전해 달라고 했는데 내가 깜박했군."
턱을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전혀 미안하지 않다는 태도로 '미안.'이라
는 유제스의 모습에 히자스는 입을 벌린채 또다시 어버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동생의 모습에 '바보같군.'이라고 호되게 평가하는 키사스다.
금발을 지닌 첫째 형의 말에 도끼눈을 뜬 히자스지만, 둘에게 들어올려져 허공에서
발을 구르는 모습으로 노려봐봤자 귀여울 뿐이다.
그런 히지스의 모습에 자신의 입술을 혀로 핣은 유제스는 손가락을 들어 그의 하얀
목을 쓰다듬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눈을 크게 뜨고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쳐보는 히자스지만, 이
미 목덜미에 나있는 성점이 유제스의 손가락에 걸린다.
"...응.....아..앗."
색스러운 신음에 입술을 깨물고 참아보려 했지만, 계속해서 지분거리는 손길에 어
쩔수 없이 끈적거리는 신음을 뱉어 낼수 밖에 없었다.
그런 히자스를 끌어 자신의 품에 앉은 키사스는 근처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쾌감에 몸을 비틀는 히자스의 귓볼을 깨문 그는 허리가 떨릴 만큼 농밀한 음성으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안한지 꽤 되잖아? ..편하게 해줄께."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은 히자스였지만, 침대 위에 눕혀져 반쯤 벗겨진 모습으로
그런 말을 해봤자 둘을 더 건드리는 꼴이다. 분함에 눈가에 눈물을 단 히자스는 손
을 뻗어 자신의 가슴을 핣고 있는 유제스의 머리를 껴안았다.
어차피 도망가기도 그른것 같으니 맘편히 즐기는 게 좋을 것 같다.
게다가 이건 그냥 즐기는 것 뿐만이 아니라, 백성들이 편히 살기위해 하는 신성한
행위니깐.
얼굴을 붉히고 눈을 가늘게 뜨고있는 히지스의 모습에 눈을 마주친 유제스와 키사
스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그의 동생이자 왕인 존재에게로 몸을 숙였다.
"그나저나.. 이곳은 북쪽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안 보이는 군요."
".....지하에 살고 있을 거야. 아마도-"
"지하요?"
"1년동안 저런 눈보라가 친다고 들었다. 실제로 보는 거하고, 배운거하곤 상당히
차이가 나지만.. 뭐 저걸 보니 과연 사람이 살수 없을것 같기는 하네."
누워서 다리를 까닥이는 칸을 바라보던 유헌은 한숨을 쉬며 얼굴을 뒤로 눕혔다.
지하에 산단 말인가.
한두명도 아니고, 적어도 한 나라를 구성하는 사람들이니 그 수는 만을 헤아릴 텐
데.. 그럼 도대체 얼마나 큰 지하도시가 있다는 거지?
고대 역사에 보면 지하에 거대한 동굴을 파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의 사람들도 그렇게 살고 있는 거라면 한번쯤 구경하고도 싶은데...
"저 히지스라는 사람 상당히 재미있는 왕이네요."
"아아- 엄청 널널하던데.
저런 인간 뒤엔 무시무시한 뒷세력들이 버티고 있기 마련이지."
"................"
"저렇게 발발거리는데도 왕자리 차지하고 있으니깐 말야. 하긴 흑룡 융텐과 사이가
좋은 것 같은데, 그자가 두려워서라도 왕에게 덤비는 자들은 없겠지. 그리고...."
"네?"
".........아무것도 아니야."
뭔가를 말하려다 웅얼거리는 칸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떠보이는 유헌이지만, 칸은 얼
버 부리며 등을 돌린다. 그런 칸의 모습을 바라보던 유헌은 자리에서 일어나 챙겨
운 가방의 짐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살며시 가흔의 훔쳐본 칸은 나지막히 한숨을 쉬었다.
전에 그 히지스라는 놈이 말한 한기를 모아 목에 봉인한 것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
라 저도 모르게 입밖으로 내뱉을 뻔 했다.
유헌에게 들려주기엔 내용의 문제가 있었기에 얼버부리긴 했지만....
"남자인 건가..."
일정한 기운을 자신의 몸속에 묻어두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은 목숨을 잃을수도
있는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팔팔하게 돌아 다닌다는 것은 몸에
한기를 심어둔 만큼 외부로 흘러 보낸다는 뜻이다.
하지만 넣어둔 것을 그대로 내보낸다면 다시금 한기가 차게 될테니, 그것은 결과적
으로 봐도 해봤자인 쓸모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내부의 기운을 다른 것을 바꿔줘야 한다는 건데, 그것이 가능한 것은 마
력으로 구성을 바꾼다거나 다른이의 몸에 조금씩 나눠 가지는 것.
히지스라는 놈은 목에 기운을 밀집하고 있는 것 같으니 후자는 제외하고 전자도 꽤
나 기운이 딸리는 일. 일국의 왕이라는 자가 매번 마력으로 몸의 기운을 바꾼다는
것은 건강의 훼손이 심한일이니 주위에서 가만히 둘리가 없으니, 역시 제외.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로 성관계뿐이다.
녀석은 남자의 몸으로 한기를 심어 둔것이니 그것을 풀기 위해선 마찬가지인 남성
의 기운이 필요할테지.
몸에 모아둔 만큼의 한기를 성관계를 통해 푸는 것이다.
왕의 역활때문에 여왕취급을 받는 다는 것은 그런 의미로 볼때 뜻이 통한다.
"힘들겠구만."
"네?"
"아무것도- 아니야."
짐을 정리하다 자신을 바라보는 가흔의 모습에 미소를 지어보인 칸은 기지개를 피
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앉아있는 것 보단 가흔을 도와 짐을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뭘 하는 거야?"
"그냥... 이것저것 아무거나 집어 넣어서. 정리를 하는 거예요."
"흐-음."
옆에 쪼그리고 앉아 이것저것 짐들을 들어 올리는 칸의 모습에 미소를 지어 보이던
유헌은 무거운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옆에 앉은 칸이 자신의 그런 태도에 눈을 동그렇게 떴지만, 어두운 표정을 어찌할
수가 없다. 나머지 일행들의 안부가 걱정되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젤은?"
"괜찮아요. 그나저나.. 라헨 팔이...."
"괜찮아. 젤의 상태를 더 봐주도록 해."
팔에서 베어나오는 핏물을 눈물이 맺힌채로 바라보는 라프헨의 머리를 쓰다듬은
라헨은 차가운 바닥에 누워있는 젤을 내려다 보았다.
원래 능력을 보이지 않은 라프헨이 신관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그에 맞는 구속구를
젤에게는 마도사에겐 극약인 봉인의 구슬을 걸어 두었다. 심한 마력의 소모로 기절
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녀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봉인의 구슬의 영향을 받
는 것인지 미간을 찌뿌리고 있다.
이마에 베어 나오는 땀을 닦아내는 라프헨의 안색은 창백하기 그지 없었다.
자신들과 노웬은 제외한 다른 일행들은 대게가 죽었고, 그나마 부상을 입은 자들도
어딘가로 끌려갔던 것이다.
말해주진 않았지만 그들의 죽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라프헨은 두려움과 슬픔에
흘러 내리려는 눈물을 참기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
"오브들은.. 괜찮겠죠?"
"마지막에 샤한이 둘을 빼돌렸으니.. 용과 오브는 무사할 거다."
"그럼.. 다행이지만.."
기어이 눈물을 떨어뜨리는 라프헨의 머리를 쓰다듬은 라헨은 그몰래 한숨을 쉬었
다.
노웬은 적진의 중앙으로 끌려갔고, 자신들은 무기나 능력이 봉인되어 감금되고, 나
머지 일행들은 죽거나 앞으로 죽을거다.
무사히 빠져 나간 사람들은 샤한과 오브, 그리고 유크렌사이라는 드래곤뿐이다.
마지막에 젤이 칸과 가흔을 공간이동을 시겼지만 어디로 날아 갔는지 모르는 상태
이니 그들을 제외하고 나면 현재 자신들의 병력은 완전히 바닥난 상태나 다름이 없
는 것이다.
에즈가 있기는 하지만, 그녀는 발챠를 지나기 전인 마을에 머물러 있고, 그곳의 장
은 노웬이 아니면 말을 듣지 않는 자이다. 서쪽에 동맹을 맺은 자가 있기는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자신들을 선뜻 도와주려 할리가 없다.
자칫 잘못하단 여기에 있는 중앙국의 기사들에게 죽음을 당할 판이다.
"....어렵군."
짧게 잘라진 머리를 쓰다듬은 라헨은 밖에 감시로 서있는 사내들에 시선을 주다 어
딘가에 있을 노웬을 생각했다.
이대로 중앙국에 끌려 갈것인가.
아니면 어딘가에 있는 황제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인가.
안색을 굳힌 라헨은 이내 노웬의 안위가 걱정되어 표정을 어둡게 가라 앉혔다.
그런 라헨의 걱정과는 달린 노웬은 상당히 편안한 상태로 구금되어 있었다.
황제의 명인지는 몰라도 손을 구속한 것만 빼면 그럭저럭 포로답지 않은 상태인 것
이다.
가만히 앉아 천막 내부를 살펴보던 그는 눈앞의 사내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노웬을 바라보던 카일은 굉장히 반갑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라고 해야 하는 거겠지? 노웬 하르스."
".......그렇군, 카일 폰 그라센."
노웬은 눈앞에 앉아있는 청색의 머리카락을 지닌 사내를 바라 보았다.
은빛의 눈동자에 여전히 아름다운 노웬의 그 외모에 입가를 조금 올려보이던 카일
은 이내 그의 입술에 찟어진 듯한 상처에 미간을 좁혔다.
"어느 못쓸 놈이 그대의 입술을 그 모양으로 만들었지?"
카일의 물음에 노웬은 입가를 조금 올리다 따끔하게 느껴지는 통증에 미간을 찌뿌
리고 손을 들어 입가를 매만졌다.
손목에 구속이 달려있어 손을 움직이가 불편했기에 다시 손을 내린 그는 흥미진진
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어깨에 화살을 날
려 상처를 입힌 자신의 목을 바로 베고 싶을텐데 용케도 참는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검을 빼들지 않고 얼굴 한번으로 물러난 요크발의 모습도 꽤나 의외였
지.. 황제가 날 살려두라고 한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끝 맞쳤는지 몸을 뒤로 뺀 노웬이 여유로운 눈빛을 보내자 카일은
입가를 올려 보였다.
전이나 지금이나 재수없을 정도로 침착한 놈이다.
"어째서 그대같은 인재가 이런곳에 있는지 모르겠군.
그대로 성에 남았으면 기사단장쯤은 문제도 아니였을텐데 말이지."
"............."
"굳이 칸크빌레의 뒤를 따라 이 고생을 하다..."
"상황에 따라 마차를 바꿔타는 자들은 흔히 소인배라고들... 하지."
여유로운 태도로 말을 하던 카일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는다.
그런 남자의 모습을 예리한 은빛의 눈동자에 담은 노웬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런짓을 이 내가 할것 같은가."
"......네..놈."
"한번 군주는 영원한 군주다."
은빛의 눈동자가 칼날이 되어 카일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고 지나간다.
뚜둑.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카일의 주먹에 힘줄이 오른다.
비단 자신뿐만이 아닌 십여년 전에 칸크빌레를 배신하고 현 황제에 붙은 자들 모두
를 조롱하는 듯한 그 말에 카일은 얼굴을 찌뿌렸다.
싸늘한 정적이 감싸는 천막안에 노웬의 감시겸 함께 들어와 있던 자는 저도 모르게
갈증을 느끼고 침을 삼켰다.
카일이라는 자는 동쪽의 강대한 국력을 지는 나라의 황족이라는 걸로 꽤나 유명하
지만, 전에는 중앙국의 기사였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앉아있는 사내의 이름은 노웬 하르스.
그렇다는 것은 10여년 폭군 칸크빌레 황제때 그의 곁을 지키던 은빛 늑대라는 별칭
으로 불린 당대 최대의 기사로 명성을 날린자. 그런 전설적인 인물을 만난것은 무
척이나 가슴떨린 일이다.
아직 기사가 된지 3여년이 되었을 뿐인, 남자로 넘어가는 시기를 지나고 있는 소년
은 그가 카일의 성미를 건드려서 상처를 입는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했다.
카일이 누군가.
잔인하기론 전 미친공작이라 불리는 요크발과 쌍벽을 이루는 자다.
"......이봐."
"네! !"
갑자기 호명하는 소리에 등을 피고 턱을 경직시킨 그는 노웬을 다시 구금하라는 말
에 안색을 굳혔지만, 나중에 오는 신병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고 가혹 조치는 말
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표정을 조금 풀었다.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색의 눈동자에 다시 얼굴을 경직시키고, 자리에서 일
어서려는 노웬의 몸을 부축했다.
지금은 적이기는 하나 그는 중앙국 최대의 기사로 이름을 날렸던 자이다.
노웬의 부축한 어린 기사는 얼굴을 조금 붉혔다.
"하-아."
노웬이 기사와 함께 나가는 것을 확인한 카일은 피곤한 듯이 얼굴을 뒤로 눕혔다.
그래 그런 날도 있었다.
저 노웬이 있고, 아직은 어린 자신과 요크발이. 그들보다 훨씬 어린 어린왕을 위해
싸우던 때가.
"........하지만 모두 미쳐가는 거야."
어디서 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칸크빌레를 도와 성을 점령할 때부터인가, 아니면 전황제를 시해할 때부터 인가.
아니면 저 독사같은 황제를 탑에 가두었을 때부터 인가.
요크발의 누이가 칸크빌레의 신부로 갈때부터 인가.
그것도 아니면 전대 황제를 죽인것을 후회하며 몸부린 치던 칸크빌레가 서서히 미
쳐가던 그때부터 인가.
탁.
따지고 보면 그런 것 모두가 맞물려 지금의 상황이 된걸지도 모른다.
자리에서 일어난 카일은 천막 뒤로 연결되어 있는 다른 천막으로 들어섰다.
작고 아담한 천막 구석에 위치한 침대 위에 누워있는 에스의 모습에 표정을 푼 그
는 지친 걸음으로 그리로 걸어갔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침대는 낡고 딱딱한데도 지친듯 골아 떨어져 있다.
앞으로 흘러내린 금발을 뒤로 넘기던 그는 에스를 안으로 살짝 밀어내며 옆에 누웠
다. 좁은 침대는 두사람의 무게에 비명을 질렀지만 카일은 무척이나 편안한 표정으
로 눈을 감았다.
앞으로 좀더 바빠질 것 같았다.
"재미없게 됐군."
모처럼 에스를 손안에 넣었는데 그를 제대로 안아보지도 못했다.
전에 기회가 있었을 때에 황제가 보든말든 그냥 끝까지 밀고 나가는 건데.
지금이라도 그를 안을수 있었지만, 시간이 없기에 촉박하게 실행하다가 그가 상처
라도 입으면 곤란하기에 애써 참고있다.
입맛을 다시고 몸을 돌리려던 카일은 천막을 반쯤 걷고 서있는 마도사의 모습에 안
색을 굳혔다.
"누가 너보고 여기까지 와도 좋다고 했나."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난 카일은 얼굴에 반쯤 붕대를 감고 서있는 자를 노려 보았
다. 따지고 보면 저자가 젤이라는 여마도사에게 당한 덕분에 칸크빌레와 가흔이라
는 소년이 공간이동으로 도망간 것이 아닌가.
그 보고를 듣고 화내지는 않았지만, 음울한 눈동자를 빛내던 황제의 모습을 떠올린
카일은 불쾌한 얼굴로 미간을 찌뿌렸다.
"기회를 달라는 말에 요크발의 밑으로 보내 줬더니 제몫도 제대로 못했다지."
".............."
"네덕에 죽은 바단이 지하에서 원통해 할거다. 당장 여기서 나가라."
카일의 서늘한 일갈에 붕대에 가려진 얼굴이 경직된다.
노웬 일행을 일망타진 할수있다고 그들에게 수면의 약초를 써서 침입해 들었갔으
나 오히려 이쪽 편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카일은 부상을 입었다.
게다가 어제의 습격에선 여마도사에 당해 칸크빌레와 가흔이라는 소년을 놓쳤다.
그 일 전부를 자신이 맞은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카일 그를 실망시킨 것이다.
단 한점의 온기조차 찾을수 없는 눈동자를 바라보던 마도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한번만 더 기회를..! !"
필사의 얼굴로 매달리려는 마도사를 바라보던 카일은 싸늘히 웃었다.
"지금까지 내가 두번의 기회를 준 자가 있었는가?"
".......그..."
"물러가라. 네가 이곳에 있다니. 불쾌하다."
단번에 내치는 그말에 마도사의 턱이 경직된채 부들부들 떨린다.
그는 자신을 노려보는 카일의 서늘한 눈동자에 신경이 너덜너덜해 지는 것같은 통
증을 느끼며 몸을 돌렸다.
그런 그의 시야에 카일의 옆에 누워 편안히 잠들어 있는 에스의 모습이 들어왔다.
에스를 바라보며 서늘하게 빛나는 그 눈동자를 카일은 미쳐 눈치채지 못했다.
투둑.
" ? "
"이봐, 왜 그래?"
도망간 적잔당을 찾기위해 돌아다니다 이제 겨우 부대에 복귀하는 중인 기사는 갑
자기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는 동료의 움직임에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런 동료의 물음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그이지만, 왠지 부대를 둘러싼 절벽에
미세하게 진동했다고 느끼고 있다. 해안가이기는 하나 여왕의 가호를 받는 서쪽대
지가 지금껏 지진이 일어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물론 어제 여왕의 기둥이 무너져 상당한 혼란이 덮치기는 했지만 말이다.
"빨리 오라고, 곧 교대 시간이야."
"아아, 알았어."
발밑에 구르는 돌덩이에 시선을 주던 그는 재촉하는 동료기사의 말에 어깨를 으쓱
하며 걸음을 옮겼다.
잔챙이들 몰이인줄 알았는데, 어제 상대한 녀석들은 상당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쪽의 부상도 만만찮지 않고, 자신들도 어제부터 잠을 자지못해 상당히 지친상태,
어서 쉬고 싶은 마음에 재촉하는 상대의 마음이 아주 모르는 것도 아니다.
" ? "
이번에 헛것이 아니다.
분명 바닥의 진동을 느낀 그는 안색을 굳히며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동료 기사의
얼굴을 올려다 보다 새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을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저 친구가 왜 저러나 해서 그에게로 다가가려던 그는 온몸에 느껴지는 엄청난 풍압
에 놀라 반사적으로 얼굴을 들었다.
휘이이이이이-----ㅇ.
"....아...아아.."
그는 시야에 들어오는 거대한 존재에 망연히 입을 열었다.
실제로 저런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보는 것은 처음이다.
부들거리는 두다리에 절벽에 몸을 기댄 그는 머리 위를 나는 거대한 드래곤의 위용
에 입을 벌리며 의미를 알수없는 말들을 중얼거렸다.
녹색의 용이 그들의 하늘을 완전히 가리우고 있었다.
".........유크렌시아."
눈을 감고있던 이자크는 신경에 걸리는 녹룡의 기에 미간을 찌뿌렸다.
그런 그의 얼굴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백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고있던 적발의 미
녀는 보기만 해도 아찔해지는 붉은 입술을 비틀었다.
"걱정마세요. 그런 어린 용따위 제가 처리해 드릴수 있답니다."
"그는 융텐의 반려라고 하던데... 그대는 두마리의 드래곤을 상대하겠다는 건가."
무릎에서 얼굴을 들고 나른하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서 공간이동시 피로를 읽은 적
발의 미녀는 고개를 젖히고 요란하게 웃어 보였다.
머리를 두들이는 높은 고음에 이자크의 얼굴에 더더욱 창백해 진다.
그런 황제의 안색을 살펴본 그녀는 눈가에 묻은 눈물을 닦아내며 그의 얼굴에 자신
의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런 애송이 용들따위 이 적룡 루드빌이 나서면 아무것도 아니죠."
중앙국의 드래곤 루드빌라겔의 자신의 찬 얼굴에 심드렁한 표정을 지은 이자크는
다시 얼굴을 내려 그녀의 무릎에 누웠다. 허벅에 퍼진 백발을 단정히 모으며 유크
렌에게 가야 되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황제의 대답이 없다.
그가 이토록이나 진이 빠져하는 이유를 아는 루드빌은 어쩔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
며 그의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코끝에 닿는 체향이 무척이나 좋다.
루드빌은 이 작고 어린 황제가 무척이나 맘에 들었기에 문득 드는 사랑스러움에 그
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