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함없네, 여기는. 여전히 기분나쁜 곳이야."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 데요?"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연스러운 맛이 있어야 하는 거라고. 자, 여기에 앉아."
이 저택에 이런 장소가 있을줄은 미쳐 몰랐다.
아직 이른 새벽인지라 부지런한 시녀들 밖에 돌아 다니는 이가 없는 가운데 그들의
시선을 피해 저택 뒤쪽으로 빠져 나온 둘은 언덕 밑으로 새파란 호수가 보이는 곳
에 도착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서있던 가흔은 앉으라는 듯이 옆자리를 가르키는 칸의 움직
임에 다소 경사가 커서 미끌어 질 것 같아 중심을 잡으며 자리에 앉았다.
지리적인 것과 아래쪽에 호수가 있기에 쉴새없이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을 휘날린
다.
두손으로 머리를 정리하는 가흔의 모습을 바라보던 칸은 사심없이 웃었다.
"좋은 곳이지? 이곳에서 유일하게 맘에 들어하는 장소라고."
"그렇군요. 용이 이곳에 오면 무척이나 좋아할것 같은데요?"
"용? 그 도마뱀이 이곳에 있었어?"
놀랐다는 듯이 되묻는 칸의 말에 그가 용과 같이 여행하던 길에 그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닭곤 고개를 끄덕였다.
"노예상가 지하에 있더라고요. 탈출하던 길에 찾아서 같이 나오길 망정이지. 안 그
랬으면 그대로 팔릴뻔 했다고요."
"헤-에. 녀석 그쪽 놈들에게 걸린간가. 과연."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나른하게 기지개를 펴며 뒤로 누웠다.
그 반동에 주르륵하고 밑으로 흘러가는 칸의 모습에 기겁하는 가흔이었지만, 10여
센티를 미끄러지곤 나선 움직임이 없다.
안도의 표정을 짓는 가흔의 얼굴을 바라보던 칸은 장난스럽게 윙크를 한다.
"그 도마뱀을 데려간 놈들이 안목이 없었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겠군."
"네?"
"용의 목에 걸려진 구속구의 가치를 알아채고선 그것을 떼내었다면 놈들은 물론이
거니와 우리도 끝장이었거라고. 드레곤으로 헌신할수 있었을 테니."
".........그렇군요."
하지만 툴가라는 자는 구속구의 용도를 알고 섣불리 그것을 떼내려 하지 않았을 것
이나, 또한 그런 허술한 장소에 용을 두었을 리도 없다.
아마도 하수인들이 용을 납치한 다음 멋대로 그런곳에 둔 것일지도..
턱을 잡고 생각에 빠진 가흔의 얼굴을 바라보던 칸은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막 잠에서 일어났을 땐 그가 꿈을 꾸고있는 것인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렇게 계속 있다보니 정말로 자신의 곁에 가흔이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오면서의 대화로 가흔이 노예상인에게 납치되어 오브라는 여장취미의 변태놈을 만
나 우연히 탈출을 했다는 것은 알았지만, 자신이 어째서 이곳에 와있는 지는 모르
겠다.
분명 창에서 떨어졌을때 엄청난 충격에 정신을 잃었는데...
"나. 누가 구해준거야?"
"에? 샤한이잖아요. 모르고 있었나요?"
"..샤한?"
가흔의 말에 동그랗게 눈을 뜬 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녀석보러 도마뱀이나 찾아 오라고 했는데 어떻게 녀석이 날 구해?"
"....용을 찾을수가 없어서 칸들의 뒤를 따르다 당신의 위험을 보고는 구해줬다고
하던데요?"
칸의 명을 어기고 처음부터 뒤를 따랐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감히 내 명을 어겼다
는 거야~'라면서 방방 뛸것이 분명하기에 가흔은 약간 내용을 달리해서 그에게 말
해 주었다.
가흔의 말에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 단순함에 안도의 한숨을 쉰 가흔은
주위에 아무도 없고, 그가 자신의 질물에 무엇이든지 말해 주겠다는 소리도 들었고
하니 슬슬 궁금했던 점에 대해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저 잡혀갔던 곳에서 칸과 닮은 사람을 만났어요."
생각과 달리 다른 말에 튀어나가 놀란 표정을 지어야 했다.
자신의 말에 '닮은 사람?'이라는 반문을 하고 쳐다보는 칸의 황금빛 눈동자에 당황
한 가흔은 손을 내저었다.
"요크발의 시종인것 같은 소년이었는데, 칸과 좀 닮았더라고요. 칸쪽의 이미지가
더 강하긴 했지만... 아 그러고 보니 이 저택에도 당신과 닮은 사람이 있었어요. 좀
더 성장한 이미지의 저.. 그러니깐."
자신도 모르게 횡설수설하는 가흔은 다물어지지 않는 입에 당황했다.
자신의 말을 무척이나 흥미있다는 듯이 주시하는 반짝이는 황금빛 눈동자에 더 당
황한 가흔은 적당히 말을 끊을 타이밍을 잡으려 했으나 쉽지는 않았다.
그러다 칸 뒤로 나타난 붉은 머리 사내의 모습에 입을 다물고 손가락을 내밀었다.
"저기...저 사람이 칸과 닮은 이 저택의 사람."
"에?"
자신의 뒤를 가르키는 가흔의 손가락을 따라 등뒤를 돌아보던 칸은 시야에 들어오
는 사내의 모습에 표정을 굳혔다.
그것은 사내쪽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인지 싸늘한 시선으로 가흔과 칸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몸을 돌려 걸어왔던 길을 뒤집혀 올라갔다. 점점 멀어지는 등을 계속 바
라보는 칸의 옆얼굴을 바라보는 가흔의 심정은 복잡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저 돔이라는 사내를 바라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겉으로
들어나는 그 표정은 무척이나 복잡했던 것이다.
칸에게서 시선을 때낸 가흔은 앞에 펼쳐진 호수에 시선을 주었다.
무척이나 파랗고 아름다운 곳이다.
"내 사촌이야."
".........에?"
난대없는 칸의 말에 가흔은 얼빠진 소리를 내며 얼굴을 돌렸다.
그런 가흔에게 싱글싱글 웃어보인 칸은 얼굴옆에 손가락을 세우곤 장난스럽게 윙
크를 했다.
"나이도 어린 내가 여기저기 돌아다는 게 못마땅한 형이지. 이래뵈도 난 중요한 사
람이라서 안전한 곳에 있기를 바라는데, 한곳에 정착안하고 위험한 데만 돌아다니
는게 싫어서 날 볼때마다 인상을 이렇게 쓰고 다니는 거야."
자신의 눈썹을 일자로 만들어 보이는 칸의 얼굴을 바라보던 가흔은 고개를 갸웃했
다.
"그런 율시아님은 칸님의 이모가 되시는 건가요?"
"그렇지. 이모가 되는 거야."
"........하지만 율시아님께선 남동생 한분만 계시다고.."
"아, 그렇다면 고모가 되시는 건가?"
장난스러운 칸의 말에 가흔은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은 사람들이 해주는 말이 진실이건 아니건 믿을수 밖에 없다.
애초에 무엇이 진실이고 아닌가에 대해 판별할 만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아
니니깐.
장난을 한 칸에 대한 서운함에 얼굴에 들어났는지 당황한 표정을 지은 칸이 손을
저으며 얼버 부렸다.
"사..사실은 삼촌이야..! ! 내 어머니의 동생이라고..!! 할아버지께서 주책스럽게도
너무 늦게 낳아서 말야. 그게 말하는게 챙피해서 대충 말한거였어."
".....정말인가요?"
"정말이고 말고..! !"
"그럼 율시아님은 할머님이 되시는 건가요? 저 돔이라는 사람의 어머니니깐."
".........하..하하...그..그렇지?"
"..............."
".......................아......마도"
불신이 섞인 가흔의 눈동자에 칸은 자신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세계는 자신이 있던 곳이 아니니 저 율시아가 칸의 할머니가 된다는게 거짓이
아닐지도 모른다. 귀족들에게 정실 하나에 여럿의 첩이란 흔것이닌깐.
그렇게 한다면 율시아에 대한 칸의 태도는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칸을 무척이나
미워하는 듯한 돔의 모습은 어찌 설명할 것인가.
조카에게 막대한 재산이 있어 그것을 시기하는 삼촌에 대한 말은 들어봤지만, 검하
나 차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조카에 대해 저렇게 강한 감정을 들어내는 사람에 대
한 말은 들어 본적이 없다.
아니면 그것은 이 세계의 특별한 관계인 것인가.
"칸이 진실을 말하고 계신다고 믿을수가 없어요."
"............."
".....먼저 일어 날께요."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는 칸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 보던 가흔은 자리에서 일어나
저택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런 가흔의 손을 잡는 손길에 걸음을 멈출수 밖에 없었다.
"난 말야. 지금이 좋아."
"........."
"아무것도 모르는 가흔이 제일 좋아. 그게 편해서 좋아. ............안되는 건가?"
궁금한게 있어도 묻지 말아달라는 무언의 의미에 가흔의 안색이 굳었다.
그 표정을 확인한 칸이 낙담하며 자조적으로 웅얼거렸다. 자신없이 고개를 숙이는
칸의 모습 따위 본적도 없고, 보고 싶지도 않았다.
알수없는 지끈거림에 한손으로 가슴을 쓴 가흔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칸의 머리
를 감싸 않았다.
그럴 의도는 아니였지만 저절로 몸이 움직이는 것은 어쩔수가 없다.
자신보다 분명 작은 사람인데 어째서 크게만 느껴지는 것인지 알수는 없었지만, 가
흔은 다만 안고있는 머리에 입술을 묻고 나지막하고 물을 수 밖에 없었다.
"언젠가 다 말해 줄거라고 생각해요."
"............."
"난 이곳에선 아무것도 모르니깐 남들이 하는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어. 하지만...."
멀리서 자신들을 향해 손가락 질을 하며 달려오는 일행들의 모습에 눈에 들어왔다.
아침에 칸의 모습을 확인하러 갔는데 둘다 사라졌으니 어지간히 애가 탔겠지.
곧 울기 직전인 라프헨의 얼굴을 확인한 가흔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칸이 말하는 건 우선적으로 믿겠어.
그러니깐 속이는 말은 하지마. 거짓말은 하지마."
품에 안긴 칸은 가만히 가흔의 말을 듣고있다 손을 뻗어 가느다란 허리를 강하게
끌어 안았다.
저도 모르게 드는 안도감에 눈을 감은 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감상에 젖을 자격이 없는 자신이지만, 지금만은 이러고 싶었다.
"...........응."
한없이 부드러운 이 감각속에 좀 더 있고 싶었다.
"짜~잔! ! 칸님의 부활이다~~! !"
펑! !
팔을 걷어 붙이고 음식들이 놓인 커다란 테이블 위로 올라가 소리를 지르는 칸의
괴성에 맞추워 라헨이 100여년 묶은 포도주의 병을 땄다.
흘릴까봐 요란을 떠는 샤한의 머리를 뒤로 민 그는 여기저기 뛰어 다니는 모습을
가만히 보며 미소짓는 라프헨에게 흔들어 보였다.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잔을 대 따라주는 포도주를 받은 그는 다른 테이블로 뛰어가
는 칸의 옷자락을 잡아 건내 주었다.
"아, 고마워. 자- 라프헨도 마시고 즐기라고. 내일부터 힘든 여정의 시작이니깐~"
"걱정마세요. 하지만 칸님 너무 많이 드시면 안돼요."
걱정스러운 라프헨의 말투에 걱정도 팔자라는 식으로 어느새 잔을 준비해 대고 있
는 샤한과 잔을 마주한 칸은 농도가 짙은 포도주를 단번에 들이 마셨다.
아직 빈속인지라 뜨거운 기운이 온몸에 도는 것이 느껴지긴 했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다. 일행들이 노웬, 젤, 샤한과 라프헨 형제. 그리고 가흔만이 있는 적은 수였
지만 즐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였다.
음식을 나누며서 자신을 바라보는 가흔에게 이를 들어내며 웃어보인 칸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노웬에게로 뛰어갔다. 한손엔 포도주 병을 든채로 말이다.
언제나 전시중이라는 이유로 술을 마다한 그이지만, 자신의 쾌유를 위한 자리이도
했고, 장소도 장소이니만큼 자신의 잔을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 마셔."
혼자 술을 따라서 내미는 칸의 잔에 쓴웃음을 지은 노웬은 어쩔수 없이 잔을 받아
들였다.
그를 위한 일이었지만, 꺼려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억지로 묵게하고 병자라는 이유
로 상당한 제재를 가해왔기에 이만한 벌칙 쯤은 그의 화풀이로도 당해줘야 하는 것
이다. 하지만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그가 아니기에 마찬가지로 술을 따른 잔을 칸
에게 넘기며 한번에 마시자는 뜻으로 잔을 머리위로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한쪽눈썹을 올린 칸이지만 이내 질수없다는 듯이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
였다.
"...괜찮을 까요?"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셔대는 칸과 노웬의 모습에 가흔은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젤은 입에 넣으려던 치즈 조각을 내려 놓으며 둘에게 시선을 던졌다.
확실히 페이스가 빠른 것이 많이 마시는 것 같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둘다 적당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니.
"괜찮을 겁니다. 설마 취하더라고 깨게하는 약이 있지요."
비록 엄청난 두통을 따르는 약이긴 했지만.
의미심장한 젤의 미소에 잠시 닭살을 돋던 가흔은 멀리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어
대는 라프헨의 모습에 젤에게 고개를 까닥인 다음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굉장히 넓은 홀에서 10명도 안되는 사람들이 즐기기 위해 한 가운데에 테이블들을
차렸더니 주위가 상당히 휑하다.
넓은 운동장 한가운데 서서 벌을 받는 기분조차 드는 것이다.
자신에게 걸어온 가흔에게 술이 든 잔을 건낸 라프헨은 홍조띤 얼굴로 웃어 보였
다. 발그레한 얼굴이 술을 몇잔 마신것 같다.
평소라면 못마시게 말릴 라헨이건만 지금은 라프헨의 곁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을
뿐 별다른 제재를 하고 있지 않다.
그게 걱정스러워 라헨에게 다가가 괜찮은 거냐고 물었다.
"상황은 위험하지만, 칸님의 쾌유를 축하하는 자리이니 한두잔 정도는 괜찮다."
"그런가요?"
칸이 나은 것은 물론 좋은 일이지만, 아직 에스가 카일이라는 자의 손에 있다고 들
었는데.. 이런 자리를 가져도 되는 건가하는 생각이 든다.
에스에 대한 미안함에 그의 얼굴색이 굳어진다.
가흔의 걱정을 눈치챈 것인지 술잔을 내려놓은 라헨이 팔장을 끼고 상채를 그쪽으
로 숙인다.
"에스라면 다른 자가 맡기로 했으니 걱정할 필요없다."
"다른 자라면?"
"더벅머리의 사내. 기억하고 있겠지."
"..아아."
이 저택에 온후로 얼굴을 보지 못했던 더벅머리의 인상좋은 사내의 얼굴을 떠올린
가흔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솜씨를 지닌 남자다.'라는 덧붙은 말
에 가흔은 사내가 라헨에게서 꽤나 신임을 얻고 있다고 생각했다.
잘은 모르지만, 이 남자가 칭찬에 인색하다는 것은 이미 감으로 알게 된 사실이다.
그외에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라헨에게 물으려던 가흔은 술잔을 든채로 자신에게
로 뛰어오는 칸의 모습에 어쩔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여기에 있는 모든 이들을 취하게 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이대로 가다간 그
가 제일 먼저 술에 절여 쓰러질 거다.
"즐거워 보이는데 끼지 않을 거야?"
묻는 말에 노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하는 돔의 모습에 무섭다는 듯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난 파오는 휘파람을 불었다. 조롱기가 다분한 그 행동에 돔의 미간이 살
며시 접혀 졌지만 이내 무표정한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 갔다.
애써 평정을 가장하는 수면에 또다시 파문을 일으키는 취미는 지니지 않은 파오는
아래를 내려다 보다 미소를 지었다.
작은 아이를 안고 들어오는 오브라는 사내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그런 자리에 필요없어! !라며 방으로 돌아 갔는데, 안고 있는 꼬마의 눈
가가 붉은 것을 보아 때쓰는 것에 못이기고 데리고 나온 모양이다.
자신은 완고한 성격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파오가 볼때는 어지간히 무른 사내
다. 막 쉬려다가 나온 것인지 평소처럼 화장기 없는 얼굴의 무개성을 바라보던 파
오는 이내 몸을 일으키고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묵묵히 아래를 바라보는 돔의 모습에 그는 저들의 파티가 끝나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것을 확인하고 먼저 내려가기로 했다.
-관둬 젤! 그건 노웬이 마셔야 한단 말야! !
-아무나 마시면 어때요? 술은 넘치도록 있는데.
-아하하하...하하.
간간히 들려오는 웃음소리와 칸의 밝은 목소리에 미소를 짓던 그는 홀을 완전히 빠
져 나가고 저택으로 들어서는 코너에 서있는 율시아의 모습을 발견하곤 한쪽 눈썹
을 올렸다.
"율시아-"
"...........파오."
몰래 숨어 있을 생각이었는지 자신의 부름에 어깨를 경직시키던 미녀가 천천히 얼
굴을 돌린다. 눈물 젖은 얼굴이 상당히 애처로웠지만, 파오는 그다지 감흥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걸어갔다.
"아침에 요크발에 찾아 오는 것을 봤는데. 그냥 돌려 보냈나?"
"............"
"처음 어떻게 보냈겠지만, 두번째는 어려울 걸? 발챠를 다 뒤지고 남은 곳은 여기
뿐이니 설령 칸들이 없다해도 형식적으론 한번 쯤은 확인차 둘러 볼거야."
"........저택내에 둘어오지 못하게 할겁니다."
단호한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파오는 헛웃음을 지으며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
었다.
"너무 냉정하잖아. 하나뿐인 동생인데 조금은 부드럽게 대해 줘야지. 여린 아이라
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잖아."
"그런 식으로 절 조롱하시지 마세요! !"
눈물어린 눈동자로 노려보는 율시아의 모습에 웃음을 지은 파오는 귀찮다는 표정
을 지으며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빼내 머리를 긁적였다.
머리카락을 만질때마다 가려진 차가운 눈빛에 조금씩 들어난다.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말라고."
"............"
"그럴 자격도 없잖아. 넌."
이번엔 완전히 백지장처럼 굳은 율시아의 얼굴을 내려다 본 그는 혀를 차며 등을
돌렸다.
"제일 불쌍한건 돔이라니깐-"
잘 있으라는 듯이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파오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율시아
는 지긋이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하-아"
입김을 불었을 뿐인데 확하니 몰리는 알콜향과 취기에 가흔은 잠시 벽에 기댔다.
다른 이들은 대부분에 그 자리에서 골아 떨어져 있었는데, 저택의 시녀들에 준비한
건지 하나씩 담요를 덮고 있다.
개중 서로를 안고 누워있는 라프헨과 라헨은 둘째치더라고 유크렌과 오브의 모습
을 보았을땐 절로 웃음이 났다.
서로에게 그렇게나 이를 들어내더니 어느새 친해졌는지 모르겠다.
카메라라도 있었다면 찍어서 정신이 들때쯤에 보여주는 건데... 분명 두사람다 이
건 자기가 아니라며 펄쩍 뛰게 분명하다.
입안에 껄끄러운 감각에 물로 몇번 헹구면서 베란다 쪽으로 나갔다.
취기가 좀 사라진 상태에서 잠을 자야지 안 그랬다간 다음날 숙취로 고생을 할것이
분명하다.
"...예쁘네.."
어두운 밤하늘에 떠있는 보름달을 바라보는 가흔의 얼굴은 무척이나 평온해 보였
다. 턱을 받친채로 몽롱을 시선을 주던 가흔은 바람결에 들려오는 사람 목소리에
눈을 깜박였다.
이런 새벽에 자신말고 다른 사람이 깨어 있었던 모양이다.
최악-
나뭇잎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반사적으로 그리로 얼굴을 돌린 가흔은 칸과 그
의 팔을 잡고있는 율시아 부인의 모습에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노웬 등과 율시아가 서로 연고가 있는 것을 보면 칸과도 아는 사이라는 것을 쉬이
짐작할수 있고 칸 그가 농담이지만, 율시아에 대해 말할때 전혀 어색함이 없는 것
을 봐서라고 보통 이상의 관계라는 것을 눈치 챌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둘의 모습은 뭔가 묘했다.
"......이것 놓으란 말야! !"
"..칸크...빌..레..! 제발.. !"
13세의 소년을 잡고 늘어지는 여성미가 물씬 풍기는 미망인의 모습은 실로 부자연
스럽다. 표정은 볼수 없지만, 칸의 말투에서 지긋지긋하다는 듯한 뉘양스를 느낀
가흔은 두사람의 사이가 상당히 오랜된 것이라고 느꼈다.
마치 남녀간의 치정 싸움같기도 한 그 모습들에 가흔은 조용히 잡고있던 돌에서 손
을 떼고 베란다에서 벗어 났다.
홀로 들어서는 자신의 발걸음이 무척이나 무겁다고 느끼며 고개를 든 그는 2층 홀
에서 자신을 내려다 보는 사내를 발견하곤 걸음을 멈췄다.
돔.
가흔을 싸늘하게 바라보던 그는 몸을 돌려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있던 가흔은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렸다.
세상에 바보라 한다면 그것은 분명 자신일 것이다.
자신이 살던 세상도 아닌 곳에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고, 진실을 알 방법이 없는
자신은 정말 바보다. 그럼에도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진실을 알고 난 다음에
어떠한 반응을 할지가 두려워서이다.
분명 숨기려 한 의도가 있기 때문에 말하지 않고있는 그들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게 두려워서 묻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거다.
............아니면 그 반대의 결과가 두려운 걸지도.
점점 이 곳에 머무르는 것에 지쳐만 가는 가흔이었다.
"율시아님의 저택에 있을거야. 칸크빌레도. 그 소년도. 모두가."
"............."
"뭐, 자네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알아서 잘 해낼거라고 생각하니 더 이상
말은 안하겠어."
어두운 방안 촛불을 가운데 두고 마주한 두사람은 한동안 대화가 없었다.
턱을 받친채 뭔가를 생각하는 요크발의 아름다운 얼굴에 시선을 주던 카일은 고개
를 저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과거애 얽메여서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는 꼴이 상
당히 맘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런걸로 친다면 자신또한 만만찮지만...
별다른 말 없이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을 주시하는 요크발을 한동안 바라보던 카일
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익.
"카일."
의자 끄는 소리와 동시에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카일은 일어선 채로 움직임을 멈추
었다.
"에스를 손에 넣어서 행복한가?"
"뭐? ....아아.."
난대없는 질문에 벙찐 표저을 짓던 그이지만, 자신의 침대위에 누워있을 에스라한
을 떠올리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부드러운 웃음을 입가에 달고 고개를 끄덕이는 카일의 모습에 시선을 주던 요크발
은 알았다는 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요크발을 바라보던 카일은 좀더 에
스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알리고 싶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얼마나 기다렸던 사람인데 옆에 있어서 좋은게 당연하잖은가? 사랑이란 곁에만
있어도 향기가 나는 것이라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거라지."
사랑 예찬론자가 되어 줄줄줄 말하는 카일의 소리를 한귀로 들으며 요크발은 턱에
받친 손으로 주먹을 쥐며 서서히 힘을 주었다.
오늘 아침 저택안으로 들어서려던 자신과 사병들은 단신으로 막아서던 누이의 모
습이 떠올랐다. 전에도 별로 웃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던 사람이지만 그때는 얼음이
날라온다고 한들 전혀 뒤지지 않을 표정으로 자신들을 쏘아 보았다.
안으로 들어 갈려면 자신을 밟고 지나가라는 말을 하는 그 얼굴에 떠오른 경멸과
단호함에 요크발은 발을 되돌릴수 밖에 없었다.
가엾은 나의 누이.
그대는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기에 그런 표정을 지었던가.
단 한조각의 마음의 배려도 없는 그런 남자를 위해 동생의 길을 막은 거야.
툭.
주먹을 쥔 손에서 한줄기 선혈이 떨어져 내렸지만, 요크발의 표정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대답없는 사랑도 사랑이라고 치부하며 평생을 그렇게 살아 가겠지.
율시아의 모습을 그리며 그는 나즉히 중얼 거렸다.
"칸크빌레...."
너만은 절대로 용서 못한다.
덜커덩--
"들어 올때는 몰랐는데 상당히 큰 도시군요. 게다가 벌써 관문을 몇개나 지났는
데..."
마차 안에 안아 있기도 질리는지 창에 쳐진 커튼을 들어올리고 밖을 쳐다보며 중얼
거리는 가흔의 모습에 칸은 그답지 않게 완전히 빠져 나갈때까지 얼굴을 내밀면 안
된다고 충고한다.
"안되는 건가요?"
"안돼. 요크발 녀석이랑 그 시퍼런 놈이 어디서 있다 우리들을 발견하곤 공격을 해
올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헤-에."
"완전히 떠나기 전엔 들키면 완되니깐 어서. 어서 커튼을 내려."
제일 말썽을 부리는 주제에 남에게 설교하는 칸의 모습에 헛웃음을 흘리는 노웬이
지만, 말할 사람이 틀려진 것뿐 내용은 맞는 말이기에 별다른 태클을 걸지 않았다.
율시아의 가문의 낙인이 찍혀있기에 함부로 수색을 하지는 못할 것지만, 만약의 사
태라는 게 있다.
자신들이 타고있는 마차의 겉모양이 귀중한 물품을 태우고 있다라는 표식을 찍혀
있지만 서도 이 바닥의 생리를 모르는 초보나 고지식한 놈들은 한번씩 뒤져보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그런 일들이 생기지 않으려는 모양인지 마차는 멈추는
일 없이 순순히 이동하고 있었다.
"서쪽에 가면 당분간은 편히 지낼수 있을 겁니다."
"네? 어째서요?"
노웬의 말에 율시아의 저택에서 들고온 책을 읽고 있던 가흔이 고개를 들었다.
대륙에선 어린아이조차 다 알고있는 당연한 법칙이지만 다른 세계에서 온 가흔은
모를 것이기에 노웬은 즐거운 마음으로 설명을 해주었다.
지루한 여행길에 이야기를 하면서 가는 것만큼 시간 때우기에 유용한 것은 없는 것
이다.
"서쪽은 '불혈지'지요. 말 그대로 피를 흘려선 안되는 땅입니다."
"피를 흘리면 안되는 땅?"
이해할수 없다는 가흔의 얼굴에 노웬의 옆에 앉아있던 젤이 답해 주었다.
"실은 서쪽이 생긴지는 불과 500여년 전입니다. 당시 대륙을 하나로 통일했던 전에
도 앞으로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름으로 남을 히뮬켄 여왕 사후 새워진 나라죠.
그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고 후세에 남길 의도로 지워진 곳인데 지금은 신전과 학
교가 가득 세워진 학문의 도시가 되어 버렸지만요."
"단순히 학문의 도시였다면 매년 그것을 찾는 사람들은 없었을 겁니다. 그곳이 유
명해진 이유는 서쪽 땅에 들어선 후 누구라도 그곳에 피를 묻히면 무시무시한 재앙
이 닥친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죠.
"...전설?"
땅에 피를 묻히기면 하면 재앙이 닥친다니 그런 무시무시한 곳에 어느 누가 와서
살수 있겠는가. 미간을 찌뿌리는 가흔의 얼굴을 보며 노웬과 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미소를 지었다.
"전설이죠, 일단은. 실제로 사람들이 살고있는 지역에선 피를 흘려도 무관하지만
중심부. 여왕이 잠든 곳에선 절대로 피를 묻혀선 안된답니다."
"중심부?"
"도착하면 바로 눈에 띌겁니다. 엄청 화려한 곳이니깐요. 그래서 그곳에 출입이 가
능한 것은 오로지 남성들뿐, 몸에 일정한 주기가 있는 여성들은 받아 들여지지 않
아요. 받아 들여진다 해도 제일 안전한 날을 기해서만 들여보내지죠."
특정한 것을 의미하는 젤의 말을 알아들은 가흔의 얼굴이 붉어졌다.
마냥 순진한 줄만 알았던 가흔이 자신의 말을 이해하고 얼굴을 붉히자 젤의 눈동자
가 흥미로움이 반짝인다.
의외로 놀릴만한 것을 잡은 건가.
어색한 분위기를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한 가흔은 재자 물었다.
"중앙에 피를 흘리면 무슨 일이 생긴다고 출입을 제재하는 거죠?"
"도시가 물에 잠기지."
" ? "
옆에 다리를 꼬고 있던 칸이 심드렁 하게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 도시전체가 물에 잠겨. 그렇게 되면 여왕이 잠든 중심을 거점으로 사방
1헤리 정도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익사하게 되는 거야. 물론 물에 잠기기만 한다면
그렇게나 위험한 곳이랄수 없겠지만 말야.."
1헤리가 어느 정도인 줄은 모르겠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는 다는데 별
일이 아니라니. 이상한 말이다.
의아하다는 시선을 칸에게 보내는 가흔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노웬은 나지막한 목
소리로 입을 열었다.
"최고의 명성을 얻은 곳답게 매년 귀족과 왕족들이 성인식이나 여러 행사를 이유로
수천의 사람들이 그곳을 들리죠. 그런데 그들이 누군가의 부주의로 죽는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
"혈족에 대해 집착이 강한 그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습니까? 만약에라도 원인을 제
공한 자가 어느 나라의 인간이라는 것에 밝혀지면 그자는 물론이거니와 그자의 속
한 나라도 위험을 면치 못합니다. 귀족들은 자신의 후계자에 대한 복수를 왕족들은
후계자나 혈족에 대한 복수를 외치며 달려들죠.
아무리 강대국이라 해도 다수의 힘을 이겨낼수는 없는 법입니다."
"실제로 남쪽이 자치국이 된 이유는 그런식으로 만들어 진겁니다. 그리고 동쪽에
수많은 왕가가 존재하는 이유도 서쪽의 그 참사후 이뤄진 것이죠.
커다란 지붕을 잃은 아이들은 서로의 살길을 찾기 마련이랍니다."
노웬의 말에 이어 답하는 젤의 이야기에 가흔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알것 같지만 서도 이해할수 없는 말들이다.
곰곰히 생각을 정리하려던 가흔이지만 자신의 어깨를 치는 칸의 행동에 얼굴을 들
어 그를 바라 보았다.
"복잡하게 생각할거 없어. 그런 살벌한 곳에서 누가 감히 검을 빼들수나 있겠어. 애
초에 무기반입이 금지된 곳이니 아무리 놈들이라도 우리들에게 해를 가하지 못할
거야. 그래 저 요크발 조차도 말야."
"....그렇군요."
"그런거지."
입가를 올리며 유쾌하게 웃는 칸의 얼굴을 바라보던 가흔도 약간 웃어 보였다.
뭔가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안심해도 되는 분위기이니 다소 긴장을 풀어도 무관하
겠지.
그러나 너무 풀어져도 안좋다는 노웬의 말에 발끈해서 목청을 높이는 칸의 옆모습
을 바라보던 가흔은 오늘 새벽 율시아와 함께 있을때 그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
각을 했다.
하지만 그에게 그런 일 자체를 꺼내 서먹해지고 싶지는 안았기에 그냥 마음속으로
묻어 두기로 했다.
언젠가 그가 자신에게 사실을 말해 주리라는 것은 믿기로 해본다.
보라색 머리카락을 언제나 길게 늘어뜨린 사이크는 한간에서 마도사로 통하는 모
양이지만, 실은 그는 머리를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흔히 모사라고들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칸크발레의 일만을 제외하면 다른 일들은 언제나 승리를 거둔 그가 마도사
도 아니고, 모사도 아닌 중간의 이름으로 명성을 날리는 것에 대해 그 누구도 이상
하게 생각치 않는다는 것은 묘한 일이기도 했다.
실은 칸크빌레의 일은 상위의 몇몇을 제외하곤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그는 연승이
라는 말도 안되는 타이틀을 지니고 있는 사람인데도 말이다.
덜커덩.
"다녀 오셨습니까."
"음. 그동안 별일 없었겠지. 스완은..."
근 몇달만에 저택으로 돌아온 사이키는 19살 아래인 누이의 안부를 먼저 물었지만,
그의 나이 많은 집사는 말하기를 꺼려한다.
그 모습에 스완에게 무슨일이 생긴줄 알고 미간을 찡그리던 그는 얼굴을 가까이해
서 귓속말을 하는 집사의 말에 안색을 달리했다.
어째서 이런곳에 그 사람이 있는 것인가.
어쩐지 저택내가 부산하고 언제나 침착한 집사의 표정이 경직되어 있다 했다.
이마를 손으로 집은 사이키는 그렇다면 그 사람과 스완이 만났을 지도 모른다는 것
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안색을 달리하며 건물안으로 뛰어 들어겄다.
스완 부디 엄한 짓은 삼가라.
"이거.. 이렇게 하면 안돼?"
"...가지고 노는건 안되는 것 같은데..."
"그런 이렇게~는?"
"먹으면 배탈날거다."
"아하하~ 안되는게 너무 많지만 스완은 이렇게도 하고 싶어."
"흐-음. 나쁘진 않군.... .....잘라줄까?"
방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사이키는 미간을 찡그리며 뻐근해지는 뒷목을 주물렀
다. 이미 만나버린 두사람 이제와서 떼어 놓을수도 없는 노릇이다.
만약에 일부러 떼어 놓는다면 저 스완에게 엄청난 미움을 받을지도...
다른 것들은 모르지만 동생에게만은 잘 보이고픈게 나이차 많이 나는 오라버니들
의 심리이리라.
덜컹.
"....여. 사이키."
소파에 누워 배위에 6살짜리 자신의 어린 동생을 올려놓고 나른하게 누워있는. 백
발을 길게 늘어뜨린 소년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사이키는 급격한 피로가 몰려오
는 것을 느꼈다.
저런 모습을 황성의 귀족들에게 보이니 로리타 취향이라는 소문이 나도는 것이다.
그러나 계속 멀쩡히 서있을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헛기침을 한 그는 우아하게 허리
를 숙이며 단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누추한 저의 저택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황제폐하-"
사이키의 말에 누워있는 채로 손을 올려보인 황제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당겨 온몸
에 감싸는 스완의 모습에 눈을 가늘게 휘었다.
처음에는 줄넘기를 하려고 하나 제지를 당하니 입에 물려고 했다.
그래서도 안된다고 했더니 이제는 온몸에 감싸는데 그래도 게중 나은 모습인지라
황제는 그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와 다르게 표정 변화가 풍부하고 잘 웃는 스완은 무척이나 귀여운 아이인지라
황제가 꽤나 총애하는 사람중 하나였다.
스완의 말로 황제의 신부가 되겠다 하니 그녀가 잘 자라면 황후의 자리에 오를지도
모른다는 소리가 들 정도로 그녀에게 있어 상당히 관대한 황제였다.
물론, 스완의 오빠인 사이키는 그 소문을 듣고 엄청나게 표정을 경직시키는 분노를
보였지만 말이다.
고지식한 그는 아직 어린아이에게 무슨 평가를 내리는 건가 싶었을 거다.
".........그대는 겸손한 것 같군, 이런 훌륭한 저택이 누추하다니."
"스완의 집은 누추하지 않아요. 오라버니."
"그렇지. 누추한 저택이라는 것은 스완에게 실례라고. 그렇지?"
누워있는 황제의 가슴에 양손을 오리고 고개를 옆으로 뉘이며 '네~에'하며 웃는 두
사람의 모습에 사이키는 뒤에 서서 안절부절 못하는 집사에게 손짓을 했다.
스완이 있으면 날이 늦도록 본론은 커녕 대화도 시작할수 없을 것이다.
"폐하. 스완의 공부가 시작되는 시간이니 잠시 그 아이를 놓아 주시겠습니까?"
"에-엣. 오라버니. 전 더 놀고 싶어요."
사이키의 말에 투정을 부리던 스완이지만, 엄한 보라빛 눈동자를 날리며 말하는 오
라버니에겐 당할수가 없었다.
볼을 뾰로통하게 내민채로 몸을 일으킨 스완은 황제가 오라버니의 횡포를 막아주
기를 바랬지만, 그는 조금 웃으며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볼을 쓰다듬을 뿐이었
다.
"지금부터 열심히 배워둬야 나중에 훌륭한 숙녀가 되는 법이지."
".........나중에 대시 올테니 그때까지 계셔야 해요. 폐하."
황제의 말에 뭔가를 생각한건지 두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비켜선 스완은 옷 매뭄새
를 가지런히 정리하더니 사이키와 황제에게 우아하게 허리를 숙이며 집사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나가기 전에 자신에게 혀를 내밀어 보이는 스완의 모습엔 적어도 한달 동안만 저택
에 머무르며 그녀에게 오라버니의 위신을 세워둬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사랑스럽지만 성격이 만만찮은 그녀는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머리끝까지 기어오
르려는 아이이니 걱정이 크다.
"여전히 사랑스러운 아이더군. 스완은."
"..........하지만 아직 6살밖에 되지 않았답니다."
사이키의 피로감에 찬 목소리에 황제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이로군. 스완을 여동생처럼 생각하는 나에게 상당히 무례된
말을 하는게 아닌가. 사이키."
".......죄송합니다."
싸늘한 일갈에 안색을 달리한 사이키는 안색을 굳히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심기가 비틀어지면 아무리 총애하던 자일지라도 단번에 목을 베는 잔인한 황제의
성격을 관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것은 황제뿐만 아니라 중앙국을 통치하던 모든 황제들의 공통점.
안색이 창백한 채로 무릎을 꿇은 사이키의 모습을 내려다 보던 황제는 누워있는 소
파에서 몸을 일으키고 일어서라는 손짓을 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사이키에게 시선을 주다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는 근처 책장
으로 걸어가 책목록을 흩어 보았다.
수만의 책을 읽어 보았지만,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사이키의 서재엔 그조차도 생소
한 서적들이 종종 있었던 것이다.
"어쩐..일이 십니까?"
"휴가 나왔다."
"...........네?"
황제가 중앙을 비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던 사이크는 약간 곤란함을 느끼며 물
었다 되돌아오는 대답에 눈을 크게 떴다.
그런 그의 표정이 어지간히 웃기는 모양인지 입가를 비죽히 올려보인 그는 이내
'인생의 삶과 그 질에 대한'이라는 제목만 읽어도 머리가 지끈거릴 것 같은 책을 꺼
내 들었다.
삐딱하게 자세를 잡은채 눈으로 책의 내용들을 확인하고 있는 황제의 옆모습을 바
라보던 사이키는 방금 자신이 들은 것이 환청이었던 가에 대해 진자하게 생각해 보
기도 했으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자주 폭탄 선언들을 날렸던 황제이기에 자
신이 잘못 들은 거라곤 할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이라는 것이 있으니 다시 한번 물어 보기로 했다.
"..휴가... 입니까?"
"안되나 ?"
읽고 있는 와중 말을 걸어 짜증이 난건지 한쪽 눈썹을 위로 올리고 투명스럽게 묻
는 황제의 얼굴에 당황한 사이키는 손을 저으며 아니라고 서둘러 답했다.
그런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황제는 피식 웃으며 펴져있던 책을 덮었다.
"서쪽으로 일주일 정도 관광이나 하려던 참이다. 중간에 네 저택이 있길래 잠시 들
린거고."
"그렇습니까...?"
"괜찮다면 같이 가도 좋아. 스완도 함께."
황제가 뭔가를 같이 하자고 권하는 일은 극히 드믈었다.
하지만 자신의 여동생과 같이 가자는 말에 망설일 수밖에 없다.
그런 사이키의 모습에 입가를 올려보인 황제는 몸을 돌렸다.
"걱정마라. 네 귀한 동생 손가락 하나도 안 건드린다."
"그..그런게 아니라..! !"
"먼저 출발 할테니, 생각이 있으면 따라 오는게 좋아. 그리고 이 책 잠시 빌리겠다."
손에 든 책을 흔들며 방에서 빠져 나가는 황제의 등을 망연자실 하게 바라보던 사
이키는 뒤에 있는 소파 위로 몸을 쓰러 뜨렸다.
언제나 나른하기만 한 황제이건만 이렇게 마주치기라도 하면 기운이 쫙 빠지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지끈 거리는 미간을 꾹꾹 누르던 사이키는 문을 열고 자신을 걱
정스럽게 바라보는 시녀의 모습에 한숨을 쉬었다.
저택에 일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착해 빠진 바보들 뿐으로 그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는 없는 노릇이니, 황제의 명대로 스완과 함게 여행 채비를 해야 할 듯 싶었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몸을 굳히며 물러 나려는 시녀에게 여행준비를 시킨 그는 자
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뒷편으로 마차를 댄 모양인지 황제의 문장이 찍힌 마차가 보이질 않는다.
"서쪽인가...."
그쪽이라면 칸크빌레 일행이 가는 길목이다.
황제는 혹여나 엄청나게 어처구니 없는 일을 꾸미려 할지도 모른다.
그런곳에 스완을 데리고 가도 좋은건가하고 생각하던 사이크는 쓴웃음을 지었다.
황제의 명이 있는 이상 자신이 싫든 좋든 그것에 의미는 없다.
창가에서 떨어진 사이키는 이내 황제가 뽑아든 책의 제목을 떠올리곤 인상을 찡그
렸다. 황제가 무엇을 빌려가서 제때에 준적은 없었을 뿐더러 그책은 자신도 미쳐
읽지 못한 것이었다.
..여러모로 신경 쓰이게 하는 사람이다. 황제란 인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