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벙. 청벙.
"...크..윽."
코와 입으로 들어간 물 덕택에 엄청 싫은 표정을 지은 에스는 켁켁대며 입안에 남
아있던 물을 뱉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에스의 모습을 이미 물에서 나와 옷자락을 짜며 바라본 유크렌은 눈을 흘기며
한숨을 쉬었다. 이런 덩치큰 사내를 어린아이인 자신이 끌고 물에서 빠져 나왔다고
하면 누구나 한심해 할것이다.
머리좋고 상황판단이 빠르고, 침착한 성품이 꽤나 돋보였던 그가 설마하니 수영을
못하는 자였을건 뭐란 말인가. 나중에 뭔가 수틀리는 일이 생기면 그대로 물에 빠
뜨릴거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유크렌은 아직도 물속에 반쯤 몸을 넣은채
로 켁켁대는 에스의 목덜미를 잡아 끌었다.
위에 놈들이 쫒아오지 못하게 상류쪽으로 꽤나 멀리 헤엄을 쳤지만 아직 안심하긴
이른 것이다.
"어서 일어나. 일부로 위로 헤엄쳐서 놈들의 시야에 벗어나긴 했지만, 만약은 모르
는 거라고."
"쿨럭... 애..초에 남자를 두들겨 패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 아닙
니까?.. .............켁."
"그 놈이 먼저 나에게 시비를 걸었던 말이다!! 난 네놈들이 이런 목걸이를 채워나서
힘도 제대로 못쓰는데, 그럼 얌전히 앉아서 당하고 있으란 말이야?!!"
"그런 말이 아니라.. 이상한 남자가 접근했으면 저에게 오면 되지 않습니까? 게다
가 애초에 저와 떨어지지 않았으면 이런일이 벌어지진 않았을 겁니다."
비난하는 듯한 에스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받은 유크렌은 얼굴을 붉으락 푸르락 했
다.
도대체 뭔가.
얌전히 있던 자신을 억지로 가둬 놓고선 힘도 못쓰게 하는 놈들이 하는 말이 이렇
게나 싸가지가 없다. 애초에 자신을 구속하지 않고 얌전히 두었으면 잠에서 깨어나
는 일도 없고, 고작 인간따위에게 그런 비참한 일을 당하지도 않았으며, 동시에 가
흔을 찾는데 이런 고생을 하지도 않는다.
자신을 믿고 이 구속구를 풀어 주었으면 진즉에 녀석을 찾아내 여행을 할수도 있었
을 텐데, 이놈들은 그냥 자신을 달랑 데리고 가고 있지 않은가?
순간 터져 나오는 설움과 억울함에 눈가에 눈물을 맺힌 유크렌은 자신을 멍한 표정
으로 바라보는 에스의 얼굴에 발을 대고 그대로 뒤로 밀어 버렸다.
"어?? 어어-ㅅ?!!"
풍덩!!
미는 기세에 상당히 뒤로 밀려 빠진 에스는 발이 땅에 닫지않자 사색을 하며 허우
적 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에스의 모습을 속이 시원하다는 듯이 바라본 유크렌
은 혀를 내밀며 몸을 뒤로 뺐다.
"그대로 물귀신이나 되서 후빌 하샤발에 있는 시인 나부랭이 놈이랑 친구나 되라
고!!"
"켁!!;; 유..유크레...ㄴ..읍..!!"
뛰어가는 유크렌의 모습에 당황하며 손을 내뻗으려던 에스는 순간 코와 입속으로
들어오는 물에 사색을 하며 청벙댈수 밖에 없었다.
이대로 가흔도 구하지 못하고, 용은 분실하고, 칸과는 헤어진 채로 물귀신이 되는
건가?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느끼며 에스는 그대로 물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자- 체크."
"...한수만 물릴수 없을 까요?"
"안돼. 아까부터 연승할 사람이 할말이야 그게?"
도끼눈을 뜬채로 노려보는 눈초리에 억지웃음을 지어보인 가흔은 손가락으로 턱을
기대며 판위에 말들을 내려다 보았다.
전에 있던 세계의 체스라는 것과 상당히 비슷한 게임이긴 했지만, 그 룰과 방식이
조금 복잡하다. 한동안 오브에게 승패를 넘겨주는 것으로 게임방식을 익힌 가흔은
한동안 승승장구를 했지만, 이런식으로 난관에 부딫히는 일도 종종 있었던 것이다.
손등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천의 감촉을 만끽하던 그는 도저히 길이 없다고 판단하
고 말을 내려 놓으며 졌다는 표시를 취해 보였다.
그런 가흔의 모습에 오브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여기저기 놓여있던 말들의
위치를 정리했다.
"또 할 건가요?"
"안하면 어쩔건데? 달리 할만한 것들은 거진 다 해봤잖아."
왕성한 호기심의 소유자인 오브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시 위해서 가흔은 툴가의 말
대로 방문을 기점으로 왼편에 방에 있는 게임판들과 여러가지 기재들을 가지고 놀
아봤다.
그가 볼때는 전혀 알수없는 것이지만, 오브는 하나같이 사용방법을 알고있어 저택
에 있는 4일간 그렇게 무료하지 않게 보낼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슬슬 그것도 한개에 다다른 것 같다.
오브가 신나하며 정리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뻐근한 어깨를 두들이는 가흔은 이제
좀 밖에 나가 공기좀 쐬었으면 했다.
무척이나 자유롭게 저택에 있어도 된다는 툴가라는 남자의 말과는 다르게 가흔과
오브가 어디를 갈때마다 느껴지는 감시의 눈동자는 무척이나 불편한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이다.
사람으로 보지않고 물건을 보는 듯한 시선은 도저히 익숙해 질수 없는 것이다.
"잠시만 나갔다 올께요."
"응? 그래. 하지만 금방 와야해. 혼자있음 무서우니깐."
오브의 말에 어색하게 웃어보인 가흔은 손을 흔들고 방에서 나왔다.
여전히 여장차림을 하고 있는 오브지만, 그 실체를 아는 가흔으로썬 그 갭이 느껴
져 더 거리감이 드는 것은 어쩔수 없는 노릇이리라.
한숨을 쉬며 뻐근한 어깨를 주무른 가흔은 자신의 방으로 걸어가는 동안 주시하던
시선이 느껴지지 않자 의아함에 고개를 들었다. 전엔 방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기만
해도 따갑게 느껴졌는데, 아주 방밖으로 나왔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다니...
장난끼가 슬그머니 고개를 내미는 가흔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오브와 머무는 방 바
로 옆에 달려있던 오른편의 방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이틀전에 오브가 장난으로 들어갔다 고용인인 듯한 사내들에게 엄청 눈치를 받았
던 곳이다.
그의 말로는 책들이 잔뜩있는 서재라는 데, 평소 이 세계의 글과 말을 배우는데 관
심이 있었던 그로썬 이런 기회에 책 한권이라도 들고 나왔으면 한 것이다.
그 툴가라는 사람이 알게되면 분명 뭐라고 하겠지만, 일단은 한권이라도 들고 나와
보자.
끼-익.
귀에 거슬리는 소리에 미간을 접은 가흔은 이번엔 문을 들어 소리가 나지 않게 닫
았다.
살며시 닫은 문에 귀를 기울이고 별다른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가흔은
여유롭게 걸음을 옮겨 오브의 말대로 도서관식으로 세워져 있는 칸막이의 책들쪽
으로 다가갔다.
언어는 알지만, 문장이나 글을 읽는데에 서투르기 그지 없는 그로썬 책의 표지에
무엇이 적혀있는지 자세히 알길이 없다. 게다가 현재 사용하는 문자와는 틀린 흐르
는 듯한 문제에 읽을 시도조차 할수가 없었다.
안에 그림이라도 있으면 대충이나마 내용을 짐작할수 있으려만 그런것도 없이 온
통 빽빽한 문장투성이다. 한숨을 쉬며 책의 표지를 손가락을 쓰다듬던 가흔은 고개
를 들어 방안의 정경을 바라 보았다.
서재인 듯한 그 안엔 소파와 테이블 등이 있는 것을 보아 책을 뽑아 그 자리에서 읽
을수도 있게끔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런 곳이라면 한번쯤 가져보고 싶은 장소이다.
"....좋군."
책에서 나는 낡은 향과 정적의 분위기가 무척이나 맘에 들어 책이 꼽혀있는 곳을
피해 구석의 벽에 기대고 있던 가흔은 그러나 기대자 마자 돌아가는 벽에 작은 소
리를 지르며 몸의 중심을 잡았다.
끼-이이이익.
"..........뭐야?"
사람 둘은 통과 할만한 면적의 벽이 움직여 자신이 들어갈만한 문이 만들어 졌다.
이 알수없는 장치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가흔은 아래로 이어져 있는 계단에 표정을
굳히며 벽에 손을 댄채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 보였다.
밑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내려가서 안을 살펴본 다음에 밖으로 나
가는 통로라면 돌아와 오브와 함께 나가야 겠다.
하지만 아니라면 어쩌지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
그럴때는 자신만이 잡히는 게 낫다는 것과 이대로 앉아있다 팔려가는 것보단 낫다
는 생각에 내려가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저벅저벅저벅.
".........."
밑으로 내려 갈수록 뒤에 있던 빛과의 간격이 멀어져 자연히 어두워져 보이는 앞의
면적이 줄어든다. 불안한 마음이 들어 뒤에 빛이 새어나오는 곳에 시선을 주던 가
흔이지만, 이를 악물고 멈춰섰던 다리를 들어 다시 한걸음 밑으로 내려갔다.
한동안 보이지 않은 시야 덕분에 손에 걸리는 벽의 촉감에 의지해서 밑으로 내려가
던 가흔은 아래쪽에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빛에 안색을 굳히며 옮기는 다리에 힘을
주어 소리를 죽였다.
끼--익.
역시나 문이 있어 살짝 틈을 열어보인 가흔은 울리는 문소리에 안색을 굳혔다가 안
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손에 힘을 주어 완전히 열어 보았다.
끼기기긱.
걸슬리는 소리가 자꾸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지만, 아무도 없는 듯 조용하기
만한 주위의 정적에 한숨을 쉰 그는 열린 문사이로 한발을 옮겼다.
"...이건?"
밖으로 통하는 비밀문이거나, 영화나 책에서나 읽었던 비밀문을 열어보니 정체를
알수없는 것들 또는 노예시장의 중심지이니 종이 다른 종족들이 가둬있었던 것은
아닌걸까하고 생각하던 가흔은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초상
화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복도식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 곳의 벽면은 하나같이 사람들의 초상화가 일렬로 늘
어져 있었는데, 자신이 서있던 곳이 시작점인지 앞에 그림을 거접으로 오른편으로
갈수록 연도가 점점 높어진다.
전에 에스에게 현재가 약 1500여년의 연도가 진행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처
음 그려진 사내의 연도는 분명 239년도. 이런식으로 계산을 해보면 이들은 과거의
인물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생생한 화법과 다르게 미묘하게 다른 얼굴 윤곽과 입고있는 복장은 확실히 과거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하지만, 한참이나 예전에도 이 세계의 문화는 별다름이 없는지 크게 위화감이 들지
않는 모습들이다.
"중간에.. 빠진건가?"
한참을 이어져 있던 그림중 874여년 부터 1088여년까지 비어진 자리가 있다.
단 한자리 비워져 있는 자리를 한동안 올려다 보던 가흔은 고개를 저으며 옆으로
한걸음 물러나 초상화의 인물을 보기위해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초상화의 인물들은 어느 나라의 왕족의 계보인 모양인지 하나같이 화려
하기 그지없는 복장과 왕관을 쓴채이지만, 비슷비슷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
다.
미묘하게 변하는 외모를 살피는 것도 꽤나 재미있는 일인지라 자신의 입장도 잊고
그림보기에 열중이던 가흔은 턱에 손가락을 받친채 빈 공간뒤에 걸어진 그림에 시
선을 주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앞서 인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외모건만 뭔가 미묘하게 틀리게 느껴진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기에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옆으로 걸음을 옮기는 가흔이었
다. 그러나 그는 몇걸음 옮기다 말고 다시 멈출수 밖에 없었다.
초상화의 인물들이 점점 누군가와 닮았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다 점점 근래의 연도로 다가가는 두개의 그림을 보곤 완전히 굳은채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칸?"
끝에서 두번째의 그림은 검청의 머리카락에 황금빛 눈동자를 지닌 20대 중반의 날
카로운 인상의 사내였다.
감정이 죽어있는 듯한 그 눈동자의 사내에게서 익히 아는 누군가를 발견한 가흔은
고개를 돌려 맨 마지막에 걸려져 있던 그림에 시선을 주었다.
마찬가지로 검청에 황금빛 눈동자를 지녔지만, 옆의 남자와는 다른 완고하지만 뭔
가 변화를 줄수있는 분위기를 풍기는 자였다.
꾹 다물어진 입술과 노려보는 눈동자는 그 고집스러움을 알게 해준다.
그림의 인물은 적어도 19세는 되어 보일듯한 모습이다. 그런 그가 13세 정도인 칸
일리가 없지만, 그가 칸과 똑같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던 가흔은 고개를 내려
남자의 이름 옆에 쓰여진 연도에 시선을 주었다.
"1502에서 1512년...인가?"
에스가 알려준 이 나라의 연도도 이 정도쯤 이었던것 같다.
이 사내가 원래대로 라면 분명 30세는 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머리속에 드는
생각을 지우려는 듯이 고개를 저어보이던 가흔이지만 연도 옆에 휘갈겨진 이름에
미간을 접었다.
앞에 글자는 확실히 알수 있다.
에스가 자신에게 글을 가르켜 주었을때 일행들의 이름을 쓰는 법과 읽는 법을 알려
주었는데, 저 맨앞자의 글씨는 '칸'이라고 읽는 것이다.
몇자 배우지 못한 글자이지만, 맨앞의 읽을수 없었던 구조가 틀린 문자와 다르게
최근에 작성된 것인지 그도 읽을수 있을 것 같았다.
"칸...칸크빌레.. 두르 판 라..헬..지그라.. 유헬시스?"
칸크빌레 두르 판 라켈화넬 유헬시스 36세.
".............."
칸크빌레라는 이름은 분명 들어본 것이다.
전에 요크발이라는 남자가 칸에게 칸크빌레라는 이름으로 불렀지.
하지만 이 초상화의 남자와 칸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알수없는, 그러나 알아서 안되는 사실을 알아버린 느낌에 가흔은 뒷걸음 질을 치며
초상화에게서 멀어지려 했지만, 등에 부딫히는 느낌에 안색을 달리하며 불에 데인
듯이 떨어졌다.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는 군."
".....툴가..."
그런 가흔의 모습을 미소지은 채로 바라보던 툴가는 맨 마지막에 걸려있던 초상화
를 눈부신 듯 바라 보았다.
"중앙국 바로 전대 왕인 칼크빌레 황제다. 상당히 뛰어난 외모이지 않나?"
"............"
"뭐 그렇게 놀란 얼굴을 하는 거지? 여긴 내 저택이니 제가 어디에 있든, 별로 놀라
울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여유롭게 말하는 툴가완 다르게 가흔은 그렇게 편한 상태가 아니였다.
애초에 오른편의 방에 들어오면 안된다는 그의 말을 어기고 들어온데다 이런 비밀
방에 몰래 들어선 모습을 정면으로 들키고 말았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들어오지 말고 문을 닫고 오브에게 돌아가는 것을..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가흔의 얼굴을 감상하던 툴가는 얼굴을 들어 칸크빌에 황제
의 초상화에 시선을 두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중앙국 역사상 최초로 전대 왕의 목을 베고 왕위에 오른 자라 찬탈왕이라는 칭호
를 받고 있지만, 그 본인도 동생과 신하들에게 실각을 당했으니 파면왕이라는 칭호
도 있어.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과 같이 비슷한 종말을 얻은데다 제위기간 동안 수
만의 피를 흘려, 세간에선 조롱조로 살해왕이라는 칭호로도 불리고 있지."
"..........살해왕?"
순진한 모습으로 되묻는 가흔의 모습에 미소를 점점 짙게 뛴 그는 허리를 숙여 가
흔의 귓가에 속삭였다.
"알고있나? 이 영민해 보이는 청년의 손에 죽어간 자들은 제 저택에 구덩을 파서
묻는다 해도 다 묻을수 조차 없어. 그가 아직도 황제자리에 있다면 대륙인의 절반
이 죽어있을 거다."
고개를 숙인채 은밀하게 말하는 툴가의 모습에 섬찟함을 느낌 가흔은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그런 거흔의 모습을 여전히 미소 지은채로 바라보던 툴가는 팔장을 끼고있던 손을
풀어 가흔의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일부러 유도한 감이 있었지만, 이렇게
훌륭하게 걸려주니 오히려 김이 빠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지하까지 내려와 초상화를 본 것은 의외의 일이 었기에 그는 눈앞의 미인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단지 가흔이 오른편의 아무 방에 들어가 있기를 기다린 다음에 자신이 나타나
골려주려는 의도가 있었을 뿐이었지만, 중앙국 왕들의 초상화를 발견하고 저 칸크
빌레의 그림까지 보았으니. 만약에 이 사실에 밖으로 유포된다면 자신의 취미중 하
나인 작품이 몰수당할 판이다.
약간의 난감함을 느끼던 그이지만, 가흔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을 확인
하곤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단은 그대로 둬보자.
이상한 말을 꺼낸다면 그때는 나중에 알아서 할 문제이지만 말이다.
"이만 올라가는 것이 좋겠어. 오브라는 사내가 당신을 애타게 찾고 있더군."
"...저..."
"네? 무슨 일이라도?"
들어오지 말라는 곳에 일부러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툴가
의 모습에 입을 열려던 가흔은 그의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에 열던 입을 다물었
다. 이런식으로 눈감아 줄 요량이라면 굳이 들춰낼 필요는 없다.
입을 열려다 다시 다물고 자신을 얌전히 따르는 가흔의 모습에 툴가는 안경을 올렸
다.
의외로 만만찮은 성격은 아닌것 같다.
계단에서 올라온 가흔은 방으로 돌아오는 동안 자신이 지하에서 꽤나 걸었다는 것
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림을 보느라 얼마 걸은 것 같지도 않았는데 실제로 건물 밖에서 나와 한참은 떨
어진 조그마한 저택에서 걸어오는 내내 지하에 이토록 긴 통로가 있다는 것에 놀라
워 하는 그였다.
"가흔! ! 도대체 어딜 다녀온 거야?"
문을 열자마자 달려오는 오브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려던 가흔은 그러나 그의 얼굴
에 나있는 멍에 입을 다물수 밖에 없었다.
어찌된 일인지를 묻는 듯한 가흔의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어보인 툴가는 별거 아니
라는 듯이 말했다.
"어디로 빼돌린 거냐고 하도 시끄럽게 굴길래 경비가 손좀 본 것 같더군."
"그런..! !"
"나도 상품에 하자가 생기는 건 바라지 않아. 특별히 경비들에게 보이는 곳은 때리
지 말라고 말해 두었으니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야."
상품.
툴가의 말에 숨을 죽인 가흔은 가만히 그를 노려 보았다.
서늘한 검은 눈빛을 받은 툴가는 휘파람을 불며 잘 쉬라는 말을 남기고 문을 닫았
다. 닫힌 문사이로 보이는 한층 경비된 남자들을 확인한 가흔은 입술을 깨물며 자
신을 안고 있는 오브의 몸을 떼내 얼굴을 확인해 보였다.
입가에 나있는 찟어진 상처에 절로 눈살을 찌뿌리자 별거 아니라는 듯이 웃어 보인
다.
"어딜 간거야? 정말 놀랐다고."
"....잠시 좀.. 다른 곳좀 가봤어요."
솔직하게 본것을 말하면 저 툴가는 사내는 자신뿐만 아니라 오브까지 해하려 할 것
이다. 동료들을 만나기 전에 본것에 대해 하구하자고 생각하며 가흔은 오브의 팔을
끌었다.
제대로 차료도 하지 않은 얼굴에 연고라도 발라야 할 것 같다.
"불편한 곳은 없으신 가요?"
마차의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칸은 입꼬리를 올리
며 괜찮다는 듯이 조금 웃어 보였다.
미소를 지은 칸의 모습에 얼굴을 붉힌 금발의 청년은 좀더 있고 싶어하는 눈치였지
만, 슬슬 출발해야 한다는 말에 무척이나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불편한 점이 있다
면 주저하지 말고 말하라는 말을 남기고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미소를 지운 칸은 다소곳이 앉아있던 다리를 들어 꼬아 보았다.
아까까지의 청순해 보이던 소녀가 단숨에 소년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모습에 에스
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칸님이 대단히 맘에 드는 모양입니다. 일견 무희단으로 보이는 우리들에게 이토록
잘해 주다니."
"미인은 어딜가나 환영받는 존재인 거야."
"..........그렇습니까?"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칸의 모습에 에스는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움직
이는 밖의 광경을 보기위해 창에 달린 작은 커튼을 들어 올렸다.
강에 빠져 죽을 뻔한 자신을 구해준 것은 이미 빠져 나갔던 칸과 샤한으로, 거의 익
사 할뻔한 에스지만 정신을 차리자 마자 용의 찾기위해 나섰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이미 마을 어디에서도 찾을수 없었고, 자신들의 찾기위해 혈안
인 용병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마을에서 빨리 빠져 나가야 했으므로 용의 신병은
그들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은 샤한이 찾기로 하고 자신과 칸은 무작정 그곳을 벗어
나 산으로 올라갔다.
배는 고프고 말은 지쳐 쓰러지기 일보직전 이었지만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다가 녀석들에게 걸리고, 일이 커져 요크발의 감시에 걸리기라도 하면 큰
낭패인 것이다.
하지만 용을 잃어버린 것은 크나큰 실수였다.
부디 샤한이 유크렌을 찾아 오기를 기대하며 에스는 한숨을 쉬고 열어둔 천막을 내
렸다.
"............."
그런 에스의 모습을 마차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늙은 시종은 자신의 주인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왜 그러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인지 고개를 숙여보이는 젊은 주인의 모습에
고개를 저은 시종은 입가의 주름을 우그러 뜨리며 칸과 에스가 있는 마차에 시선을
주다 등을 돌렸다.
3일전 숲속 냇가에 앉아 쉬고있던 주인이 저 어린무희를 안고, 한명의 젊은이를 대
동하고 나타났을 땐 경황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여자 무희를 대하는 주인의
태도가 마냥 불안하기만 한 그였다.
확실히 데리고온 소녀는 굉장한 미모를 지니고 있어 좀 지나면 대단한 미인이 될것
이긴 했지만, 아무에게나 몸을 허락하고 춤과 노래를 불러 생을 연명하는 천한 무
희일뿐이다.
부디 자신의 주인이 조금이라도 빨리 저들에게 마음을 접고 떠나라고 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나서서 저들을 쫒아낼수도 없는 노릇이다.
평소엔 한없이 부드러운 주인이 한번 틀어지면 거친 폭풍처럼 당할수가 없다는 것
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걱정이군."
"왜 그래요? 벤."
"아무것도 아니다. 이번엔 전처럼 울퉁불한 곳으로만 가서 이 늙은이를 몸살나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그러니깐 마차안에 들어가라니깐요. 나도 예쁜 여자가 아닌 늙은이와 함께 타고
있는건 싫다고요."
투덜대는 사내의 머리를 들고있던 지팡이로 내려친 벤은 마차 앞으로 올라가 자리
를 잡았다. 무척이나 아픈 머리를 감싸쥐고 늙은이 집사를 노려보는 그이지만, 도
련님의 심복이기도 한 그에게 차마 뭐라고 할수는 없다.
단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최대한 거칠게 마차를 모는 수밖에는.
덜커덩.
움직이는 마차메 몸을 편히 누인 에스는 다음날이면 도착하는 발챠에서 있을 일들
에 대해 생각을 정리했다. 무턱대고 노예시장을 뒤질수는 없으니 도착하고 나서 가
흔의 모습을 본자들과 그를 납치한 자들의 꼬리를 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그 지역의 정보를 빠르게 얻을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그것이 누군
인지도 알아둬야 하고 설령 알아둔다 해도 같혀 있을 가흔을 어떻게 빼내야 하는지
도 걱정이다.
최악의 상황의 경우 시장에 나온 가흔을 사들일 자금을 마련해야 할지도 모른다.
여러가지로 골치가 아픈 에스는 눈동자를 내려 다리를 꼰채로 까닥이고 있는 칸에
게 시선을 주었다.
"칸님."
".........왜 부르는 거야."
"전에 여관에서 샤한과 그대로 둘만 빠져 나가려는 심산이셨죠?"
난데없는 에스의 말에 칸은 감고있던 눈을 떴다.
그런 칸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던 에스는 미간을 접으로 인상을 썼다.
에스의 얼굴을 보며 뭐라 말하려던 칸이지만, 그답지 않게 노려보는 눈동자에 입을
다물수 밖에 없었다. 사실 그의 말에 틀리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샤한과 간다고 말해도 에스의 성미로 분명 거절할 것이 분명하기에 그 몰래 빠져 나
갈 생각이었는데, 그놈의 도마뱀이 일을 벌려 타이밍을 놓쳐 버린 것이다.
당시 다급한 사황에 맞물려 알아채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입을 꾹 다물고 말하지 않겠다는 태도에 에스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
다.
"다시는 그런 일 하지 마십시오. 걱정하는 걸 뻔히 알면서 그러십니까?"
".....알게 뭐야."
"칸님."
평소엔 한없이 상냥한 에스지만 이럴땐 에즈보다 더하다.
자꾸 캐묻는 그의 모습에 한숨을 쉰 칸은 어쩔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까닥였다.
그 반응도 불안하기만 한 에스지만 억누르면 터지는 그의 성미를 잘 알기에 더 이상
뭐라 할수가 없다.
일단은 져주는 수밖에.
"그나저나 도마뱀 녀석... 어디로 가버린 거야?"
"........죄송합니다."
도마뱀을 잃어버린 것이 완전히 자신의 잘못으로 알고있는 에스의 풀죽은 모습에
칸은 미간을 찌뿌렸다. 사사껀껀 심기를 건드리던 도마뱀 녀석보다 그동안 알고 지
낸 시간이 긴 에스가 예쁘건 어쩔수 없는 노릇.
그런 녀석때문에 자책하는 에스의 모습을 보는 것은 그렇게 기분좋은 일은 아니다.
한숨을 쉰 칸은 흔들리는 마차에 몸을 맡기며 샤한이 녀석을 찾아 데리고 오기만을
바랬다.
기껏해서 가흔을 찾았더니 이번엔 용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은 사양이다.
"검은 머리의 소년?"
"예, 요새 시장에 도는 소문입니다. 툴가가 꽤나 훌륭한 상품을 손에 넣은 모양입니
다."
"흐-음. 검은 머리의 검은 눈동자 인가."
턱을 받친 채 생각에 잠기던 요크발은 들고 있던 펜을 책상위에 내려 놓았다.
왠지 모르지만, 칸과 가흔이라는 소년은 찾아 동부서주하는 사이키보다 자신이 뭔
저 둘중 하나를 손안에 넣을 것 같은 좋은 기분이 든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요크발은 발치에 엎드려 있는 사내를 일으켜 세웠다.
"좀 더 녀석에 대해 알아봐라. 만약에 녀석이 내가 찾고 있던 놈이라면 너에게 포상
을 내리도록 하지."
"네, 이만 물러 가보겠습니다."
방에서 나간 사내의 모습을 눈으로 좇던 요크발은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차를 들
어 한모금 입안에 머금었다.
우릿한 차향이 둔한 머리를 조금 깨게 해주는 것 같다.
툴가라는 자의 얼굴을 떠올려보던 요크발은 이를 들어내며 웃었다. 자신이 상대하
기에 결코 만만찮지 않은 존재. 만약 놈이 데리고 있는 인물이 가흔이라는 소년이
맞다면 쉽게 넘겨 주진 않을 것이다.
녀석과의 취향은 상당히 비슷해서 여러모로 부딫힌 경험이 많으니깐.
"기다리는 것보다 한번 직접 움직여 볼까?"
이미 나간 사내에게 알아 보라고 시켰지만, 답답한 방에서 나가 공기도 마시고 녀석
의 얼굴을 보면서 속도 좀 긁어주는 것도 괜찮은 일이지 않은가.
회심의 미소를 지은 요크발은 들고 있던 종을 들어 몇번 흔들었다.
툴가 바로챙이라는 사내를 단번에 끓어 오르게 하는 아주 좋은 물건이 자신에게 있
으니 모처럼의 즐거운 여흥거리를 즐겨 보도록 하자.
"요크발님이요?"
세탁 할 빨래 거리를 잔뜩 안아들고 있던 론은 자신에게 말을 건낸 병사의 얼굴을
빤히 바라 보았다.
밝은 푸른색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내린 얼굴은 꽤나 아름다워서 그 시선을 받
은 병사는 잠시 얼굴을 붉혔지만, 자신의 임무를 깨닭곤 얼굴을 끄덕였다.
"그래. 나갈테니 외출 준비를 하고 오라는 분부시다."
말을 마치고 바로 몸을 돌려 걸어가는 병사의 단단한 등언저리에 시선을 주던 론은
자신의 복장을 내려다 보았다. 외출 준비를 하라곤 하지만, 노예인 자신에게 요크발
의 눈에 찰만한 옷이 있을리가 없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늦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기에 짐을 들고 자신의 방
으로 뛰어 들어간 론은 그가 지니고 있는 옷중 가장 깔끔한 복장을 뒤져보기 시작했
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다 그게 그거 같다.
"어쩌지."
한숨을 내쉬던 론은 저번 옆방의 아이가 두고갔던 옷에 생각이 미쳤다.
비록 자신의 옷은 아니지만, 한번쯤 빌려입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자신없어 하며 그 옷이 있는 벽장을 열어본 론은 눈에 보이는 연한 녹색의 깔끔한
옷에 침을 삼키며 손을 뻗어 들어 올렸다.
빨리 입고 가야지 안 그러면 요크발님께서 크게 노하실 거다.
"미안. 반드시 깨끗하게 빨아 둘테니깐."
옷의 주인인 아이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양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여보인 론은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어 던졌다.
론이 옷을 갈아입고 머리 손질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동안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친
요크발은 느긋하게 자신의 구두를 닦는 여시종의 모습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저번에 길을 가다 구한 건데 의외로 착용감이 괜찮다.
앞으로 자신이 신을 신발 몇개는 더 주문할 생각을 하며 앉아있는 동안 불러드린 론
의 모습의 눈에 띈다.
허겁지겁 달려 왔는지 단정하게 빗은 머리카락 몇올이 흘러 내린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허리를 숙이며 황송해 하는 모습에 요크발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랐다.
깔끔하긴 하지만, 싸구려 티가 나는 옷이 영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갈아 입힐수도 있지만, 그랬다간 머리모양에서 피부, 손톱 손질까지 맞춰야 성이 찰
것 같아 애써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와 함께 갈데가 있어서 부른다. 따라와라."
시녀가 걸쳐주는 망토를 어깨에 걸친 요크발은 한발 먼저 걸어 나섰다.
그런 그의 뒤를 종종 걸음으로 따른 론은 어디에 갈것인지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감
히 물어 볼수가 없어 입을 꾹 다문채로 걸음을 옮겼다.
다리 길이의 차이가 있어 쫒는데 다소 힘이 들었지만, 그것 가지고 감히 그에게 뭐
라 할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요크발 대공?"
"네, 막 저택의 문을 통과했다고 합니다. 어찌할까요?"
어찌 할까하고 묻기는 하지만, 그런 신분의 남자를 무시할순 없는 노릇이니 툴가가
해야 할 행동은 이미 정해져 있다.
앞으로 해결해야 할, 산만큼 쌓인 서류들을 바라보던 툴가는 한숨을 쉬며 입에 물고
있던 담배대를 재떨이에 내려 놓았다.
속에 구렁이 100마리는 키우고 있는 그리 만만치 않은 성격을 지닌 사내다.
결코 소홀이 대해서 화근을 남겨둘수 없는 남자이기도 한 요크발이 도대체 왜 자신
에게 온 것일까를 생각하던 툴가는 턱을 두들이던 손가락을 정지시켰다.
과연, 그가 원하는 것은 그것인가.
"정보 한번 빨리 도는군."
그곳에 일조했을 것이 분명한 자신의 심복인 사내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 보던 툴
가는 눈빛을 예리하게 빛냈다.
툴가의 시선을 받은 사내는 고개를 더욱 깊이 숙이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검은 머리의 가흔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고 밝혀진 소년의 상품가치를 좀더 높
이기 위해 살짝 소문을 흘려둔 것인데 설마하니 저 요크발에 직접 나타날 줄은 몰랐
던 것이다.
이미 여러번 정보를 얻어 최상의 상품을 얻은 전적이 있는 그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
인지 안봐도 뻔했지만, 이번엔 그 가흔이라는 소년에게 주는 주인의 집착이 남달라
어찌 될지 모르겠다.
설마하니 이번일로 안 그래도 좋지 않는 두사람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는 건 아닌
가 하고 걱정하는 그였다.
"네놈의 그 가벼운 입이 언제나 일을 망치곤 했다."
"죄...죄송합니다! !"
"죄송하다고 끝날 일이면 세상에 힘든 일이 어디에 있겠나."
더없이 서늘한 그 말투에 사내는 이마에 바닥에 비볐다.
아무래도 자신의 주인의 심기가 그 어느때 보다도 최악인 듯 하다.
슬쩍 고개를 들어보인 그는 마주친 싸늘한 갈색의 눈동자에 숨을 죽이며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원상태로 돌렸다.
그런 심복의 모습에 이마에 손가락을 대고 고개를 젖던 툴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접대할 준비는 끝났겠지? 먼저 가서 기다리는 게 예의니 이만 내려가 보자."
"아... 네..네!!"
이대로 주인이 용서한 것인가하고 화색의 빛을 띄우던 사내는 그러나 이어지는 툴
가의 말에 얼굴을 이그려 뜨렸다.
"이번일로 손해가 생기면 그 보상금은 전부 네 일당에서 빼 내겠다."
"뭔가 소란스러운 것 같아."
".....그만둬요. 그런 모습."
벽에 바짝 붙어 밖의 소리를 듣고있는 오브의 모습에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인
가흔은 기대고 있던 창가에 몸을 누이고 아래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
을 구경했다. 확실히 오브의 말대로 사람들의 움직임이 빠르고 그 수가 많아 보이는
게 뭔가 일이 있는 것 같긴 하다.
한 동안의 밑의 인물들에 시선을 주던 가흔은 저택의 정문쪽으로 거침없이 들어가
는 마차에 시선을 주었다.
지금까지 꽤나 많은 마차들을 봐왔지만, 저렇게 화려하고 큰 마차는 처음이었던 가
흔은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내밀며 그 모습을 자세히 보기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마차 사이로 붉은 머리를 본것도 같았다.
"....붉은 변태..?"
왜 갑자기 요크발이라는 남자가 생각나는 것일까?
괜히 드는 오한에 기분이 나빠진 가흔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서 물러났다.
"도대체가 말야. 가흔이 여기저기 쏘다니지만 않았어도 방안에 갇혀 있는 일은 없었
을 거라고."
".........미안해요."
전에 툴가의 말을 어기고, 오른편의 방에 들어가 봐서는 안될 것 같은 그림을 본 후
로 툴가, 그는 가흔과 오브에게 외출금지령을 내렸다.
전에 자유롭게 나다니던 경험이 있어 그 말을 무시하고 밖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드
는 것은 어쩔수 없는 노릇이지만, 밖에 서있는 경비들 덕택에 그럴수도 없다.
한숨이 나오는 자신의 상태를 한탄하던 가흔은 갑자기 문이 열리고 사이로 보이는
얼굴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어나라."
"....에?"
자신들을 감시하던 표정없는 검사였다.
경비들 중에서 유난히 두들어진 이유는 그의 범상치 않은 기때문으로, 오브는 그가
무시 못할 실력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했다.
침대에 앉아있는 오브와 자신의 말에 멍한 표정을 짓는 가흔의 모습에 눈살을 찌뿌
린 남자는 들고있던 검집을 들어 밖을 가르켜 보였다.
"잠시 동안 장소를 이동해 있어라."
"............"
무슨 일이 있는지 알수는 없지만, 일단 사내의 말을 듣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오브에게 눈치를 주며 가흔은 풀어 두었던 반다나를 들어 자신
의 머리를 감쌌다.
별말없이 자신의 말대로 나오는 두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던 사내는 먼저 앞장을 섰
다. 남자가 지나가는 길을 비켜주는 경비들의 모습에 시선을 주며 가흔은 저택 중앙
과 반대쪽으로 가는 이유가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앞서 가는 목석같은 남자가 말해
줄리도 없으니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자신들에게 무슨일이 생기려고 하는 것일까.
"오래간만 입니다."
"아아- 그동안 격조했다."
"별 말씀을. 일단 이리로 앉으시죠."
겉모습은 더없이 예의바른 툴가의 모습에 비죽히 비웃음을 지어보인 요크발은 망
토를 걷으며 그가 가르킨 상석에 앉았다. 표면에 닿는 감촉이 무척이나 부드러운 것
을 보아 최상급의 재질로 만든 소파같았다.
갑작스럽게 찾아 온것에 비해 대우가 좋다며, 약간의 호의섞인 시선을 보내는 요크
발의 모습에 툴가는 역시나 의미를 알수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을 뿐이다.
마치 용과 호랑이가 조우한 듯한 모습에 툴가의 심복인 사내는 심장을 부여 잡았다.
저런 모습을 매일 봐야만 했다면 자신은 분명 심장마비로 젊은 나이에 절명했을 지
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옆에 서있던 시녀에게 준비한 차를 내오라고 했다.
"그나저나 갑자기 무슨 용무이신지?"
"얼굴을 보자마자 용건부터 꺼내는 군. 그대는 내가 불편한 모양이야."
"그렇지 않습니다."
불편하기로 말을 하자면 끝이 없지만, 함부로 입을 열어 장사에 지장을 주는 일을
벌일수는 없다.
꽤나 빈틈없이 대꾸하는 툴가의 모습에 요크발은 만족의 웃음을 지었다.
불쾌한 기분이 적은 대화를 유지하며 즐길수 있는 상대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자신은 눈앞의 사내보다 월등히 신분이 높아 함부로 대할수 없는 사람이니,
이번은 자신이 실컷 즐기다 사라져도 무방하다.
눈웃음을 치는 요크발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마찬가지로 웃어 보이는 툴가지만,
녀석이 떠나면 반드시 굵은 소금을 뿌려 줄테다라고 결심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딜까요."
'나가서 놀라'는 요크발의 난대없는 말에 중간에 버려진 론은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
이 있는 곳을 둘러 보았다.
그래봤자 눈에 보이는 것은 숲과 나무, 꽃과 풀들 뿐이다.
한동안 주위의 풍경을 눈으로 담던 론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사실 발챠 중심에 위치한 툴가의 저택은 론이 전혀 모르는 곳은 아니였다.
어릴적에 부모의 빛에 팔려 이곳에서 근 2년동안 일한 경험이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은 아직도 남아 있을까?"
어려서 아무도 없던 이곳에 와 두려움에 떨고있을 때 무척이나 상냥하게 대해주던
남자가 있었다. 저녁을 못먹을 땐 음식을 주기도 했을때, 아팠을 땐 어떻게 한건지
몰라도 쉬게 해주었던 적도 있었다.
거기에 자신이 무척이나 낡고 좁은 방에 기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엄청 좋은 방
으로 옮겨 주었다. 자신은 그것에 보담하고자 이것저것 잡일을 했었고...
론은 갑자기 그 사내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양손을 가슴으로 모은 채 그 사내의 모습과 이름을 떠올려 보던 론은 머리속을 스치
는 부드러웠던 갈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의 이름이 생각났던 것이다.
분명...
"툴가라는 이름이었지."
바삭.
" ? "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자신의 기억력에 만족하며 미소를 짓고있던 론은 뒤에서 들
려오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설마하니 이런 곳에 야생동물이 있는 것인 아니겠지?
바삭.
불안함에 떨며 눈동자를 돌린 론은 그러나 맹수가 아닌 나무 사이로 나타난 아름다
운 소년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밀하지만 섬세한 외모의 몇가닥 얼굴위로 흘러내린 본적없는 검은 머리카락과
대낮에도 밝은 빛을 발하는 검은 눈동자. 그리고 가늘지만 굉장히 보기좋은 몸.
저렇게 조각같은 사람도 있구나 싶어서 정신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론의 모습을 마
찬가지로 멍하니 바라보던 가흔은 입술을 달싹였다.
".........칸?"
"에?"
"칸! ! 도대체 여긴 어떻게 온거예요?"
당분간 있으라며 자신과 오브를 이런 숲속에 던져놓고 간 사내에게 분통을 터트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진 그에게 어이없어 하던 가흔은 가만히 있는 것보단 여기
저기 돌아 다니는게 나을 거라는 생각에 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빠져 나가는 문을 발견한다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자신
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만으로 만족할 셈이었던 그는 걸어가던 숲 사이
로 보이는 익숙한 머리카락과 용모에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밟은 나무가지 소리에 조심스럽게 돌린 머리카락 사이의 얼굴은 분명 칸이
었다.
넘치는 반가움에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애써 참으며, 달려든 가흔은 칸의 어깨를
잡고 앞뒤로 흔들었다.
어떻게 그가 이런 곳에 와 있는 것일까?
설마하니 다른 일행도 함께 있는 것은 아닐까?
"저...저기.. 전 론인데요?"
"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칸. 어디 아픈 건가요??"
그답지 않게 떠는 목소리로 말을 하는 모습에 가흔은 이를 들어내며 웃으며 이마에
손을 집어 보았다.
하지만 불안하게 떨리고 있는 눈동자와 손등을 덮는 칸의 진한 검청의 머리카락과
미묘하게 다른 물빠진 푸른색의 머리카락에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잡고있는 어깨도 딱딱하지 않고 무척이나 부드럽다.
칸의 몸이 갑자기 연체동물이 되지 않은한 이런 일이 벌어질리가 없기에 가흔은 안
색을 굳히며 잡고있던 손을 떼내었다.
"가흔 도대체 어딜 가는 거야?"
사내가 자신들을 숲 중간에 떨궈 낸것도 문제인데, 가흔이 갑자기 혼자서 걸어 나가
니 걱정이 된 오브는 그의 뒤를 따라오다 가흔이 어떤 소년을 잡고있는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오브에게 벙한 표정을 지은 가흔은 손가락으로 잡고있는 소년을 가르켰다.
"칸...이 아닌가요?"
"칸? 그 싸가지없는 애새끼? 개가 그 소년이라고? 전혀 틀린데."
".................그렇군요. 아, 죄송해요."
오브의 어이없다는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애꿎은 사람을 잡고 난리를 쳤다는 것을
알게된 가흔은 얼굴을 붉히며 잡고있던 소년에게 고개를 숙여 보았다.
하지만 요즘들어 칸과 닮은 사람을 많이 보게되는 구나 싶다.
어제는 초상화의 인물이 그리고 지금은 눈앞의 소년이.
"..........."
자신이 누군가와 닮은 모양인지, 아니라 해도 미심쩍은 듯이 계속 바라보는 검은 눈
동자의 소년의 모습에 론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딱 보기엔 귀족집 자제분인 것 같으신데 왜 이런곳에 와 있는 곳일까?
그러고 보니 여긴 노예시장도 겸하는 곳이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자신
에게 필요한 노예를 사러 온 것일거다.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론은 노예 신분인 자신이 귀족집 아들들에게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다는 것이 대단한 무례라는 것을 인식하고 서둘러 머리를 숙여 보였다.
"대단한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에? 무... 무슨??"
갑자기 눈을 질끈감고 고개를 숙이는 소년의 모습에 당황한 가흔은 오브를 바라 보
았다.
소년의 몸을 급하게 일으키려는 가흔의 옷자락을 끈 오브는 귓속말로 자신들이 귀
족인줄 알고 있다고 귀뜸했다.
"귀족? 우리들이 아니 잖아요."
"일단 입고 있는 옷이 고급인데다 이런곳을 버젓이 돌아 다니니깐 착각해도 어쩔수
없는 거야."
"그럼, 사실대로 말해 주어야 하는게 아닌가요?"
"어째서?"
칸과 닮은 아이가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는 것이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였던
가흔은 당황하며 다시금 소년의 얼굴을 들게 하였지만, 오브는 서둘러 그의 옷자락
을 잡는 것으로 행동을 제지했다.
왜 그러는 거냐는 뜻으로 바라보는 가흔에게 혀를 차보인 오브는 아직고 얼굴을 숙
이고 자신들의 눈치를 보는 소년을 바라 보았다.
"이곳에서 일하는 녀석이라면 출구를 알고있을 거 아냐?"
"....귀족 행세를 해 안내를 시킬 생각이로군요."
"그렇지. 지금은 자신을 감시하는 녀석도 없는 것 같고 말야."
내내 달라 붙어있던 시선이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을 알아챈 오브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때 마력으로 된 칩이 목근처로 빨려 들어가 자신은 붙잡히기 쉽상
이지만, 칩이 설치되지 않은 가흔을 일단 밖으로 빼돌려 나중일을 도모하자.
망설이는 가흔을 대신해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론의 얼굴을 들게한 오브는 양
손을 허리에 올리고 당당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되도록이면 거만한 자세를 취하는 편이 더 믿음이 가는 법.
"우리들이 경치를 좀 즐기다 보니 길을 잃어버려서 말인데, 네가 안내를 해주지 않
겠어?"
"화 내시지 않는군요. 감사합니다."
"화내지 않으테니 우선 길부터 안내해 줘."
양손을 숲쪽으로 뻗으며 안내하라는 듯이 행동하는 오브의 모습을 본 론은 감격한
듯 양손을 가슴으로 모았다.
평민들이란 귀족들이 조금만 선처를 베풀어도 엄청난 은혜를 입은 것 같이 여기곤
하는데, 이 칸을 닮은 소년은 그 무리 중 하나인 모양인지 두눈에 반짝이는 것이 보
일 지경이다.
그 모습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일이 잘 풀어진다고 생각하던 오브는 그러나 이어
지는 소년의 말에 미소를 경직 시켰다.
"저도 주인님께서 이곳에 두고 가셔서 길을 잘 모르는 데요."
"............같이 찾아봐야 할 것 같군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있는 오브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가흔은 한숨을 쉬었
다.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한 소년이 사실은 자신의 주인을 따라온, 거기에
중간에 냅두고 간 녀석이라는 것이다.
오브의 화려한 계획이 틀어진 점은 가흔도 무척이나 아쉬웠지만, 자신들의 눈치를
보고 불안에 떨고있는 소년의 앞에선 내색할 수 없는 법이다.
자신이 뭔가 잘못 한건가하고 입가를 굳히고 가만히 서있던 론은 자신을 향해 부드
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검은 눈동자의 소년의 모습에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귀족이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의 잘못에 호통을 치거나 아픈 행동을 하지 않는
다.
이렇게 상냥한 귀족은 요크발님 이후 두번째라며 론은 굉장히 감격했다.
"..저기.."
"응? 왜 그러는 데?"
이분들에겐 주인님을 따라 온것이라곤 했지만, 자신은 약 1년전에 이곳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과거의 기억을 되 돌려보던 론은 자신을 바라보는 가흔에게 다가섰다.
"왜? 할말이라도?"
칸은 이 소년이 무척이나 맘에 들었다.
칸과 닮은 용모일지도 모르지만, 왠지 모르게 호감이 가고 그와 닮은 모습인데도 순
진하게 행동하는 것도 꽤나 즐거운 기분이 들게해 왠지 모르지만, 상냥한 느낌을 불
러 일으켰다.
"전에 잠시 여기서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어느 곳이든 길을 잃어 버리면 저택 앞의
중앙탑쪽으로 걸어가면 나가는 길이 나온다고 했었어요."
"중앙탑?"
소년의 손가락이 가르킨 방향은 확실히 육안으로 식별되는 가느다란 탑이 세워져
있었다.
무턱대고 아무대나 갈수는 없는 노릇이니 일단 가보긴 하겠지만, 저택쪽으로 가는
게 영 껄끄럽다. 재수업게 경비나 툴가라는 사내와 만나는 것은 아닐까?
한참을 고민하던 두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 일단 갈수밖에 없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