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과 칸만 둬도 괜찮을 까요?"
"괜찮을 걸요? 노려움을 내시는 주 목적인 가흔님도 없고, 그렇다고 시비만 걸어 용
과의 사이를 완전히 틀어 둘 만큼 칸님은 어리석지 않아요."
칸이 짜증을 내는 것은 가흔과 용이 붙어있을 때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에스는 가볍
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가흔만 데리고 식당으로 내려간 이유는 칸과 용 둘만이 남아있게 해 나름대로 사이
가 좋아지게 하려는 그의 의도가 숨겨진 행동이기도 했지만, 과연 그들이 그것을 알
아차리고 잘해줄지는... 오히려 비슷한 성격이라 말리는 사람이 없어 아주 난리도 아
니게 싸우는 것은 아닐지.
미소가 점점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에스는 창가 자리로 가흔을 안내했다.
미리 예약을 해두었기에 자리를 잡을수 있는 곳답게 상당히 멋진 경치를 선사했다.
전체 6층까지 있는 이 건물은 맨위층인 옥상위에 투명한 유리벽을 만들어 식당으로
활용하고 있었는데, 세간에 7층의 홀이라 불리우며 이곳을 숙박한 사람들이 한번쯤
은 와서 식사를 하고 갈만큼의 유명세가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드는 돈도 만만찮아서 이용객의 대부분은 1층에 위치한 식당을 이용
하고 있었고, 3층이상에 숙박하는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이 주고객인지라 내부는
한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주요리는 어류가 좋겠군요. 타스타로와 해샤켈을 갈아서 주십시오. 그리고.."
요리를 잘 모르기에 에스에게 주문을 맡긴 가흔은 맑은 하늘아래 비춰지는 마을의
정경을 감상했다.
동화나 영화속에서나 봤었던 것을 실제로 보는 느낌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라 그는
시선을 떼지 않고 아래를 바라 보았다.
"신기한가요? 이곳이."
"아, 그렇죠 뭐. 제가 볼때는 이곳의 모든것이 새로우니...."
멎쩍어하며 긁적이는 가흔의 모습이 보기좋아 에스는 웃어 보였다.
"저도 가흔군의 나라에 가면 당신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에스의 말에 잠시 입을 다문 가흔은 앞에 놓여진 물잔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쓰다 듬
었다.
"글쎄요. 제가 있던 곳은 이곳만큼 여유로운 분위기가 아닌지라... 당신이 와서 본다
면 그 팍팍한 분위기에 금방 지릴지도 몰라요."
"흐-음. 그런가요?"
에스의 말에 가흔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살던 곳이 어땠는지 한동안 잊고 있었다.
칸 일행들이 결코 쉽지않은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서도 이곳의 분위기가
원체 자유롭고 즐거운지라 일부러 자신의 세계를 잊고있었는 지도 모른다.
만약 이곳의 사람들이 자신의 세계에 있었다면 노웬이나 에스, 그리고 라헨은 그 특
유의 묵직함과 분위기로 자신의 일을 멋지게 해결할지도 모르지만, 숫기없는 라프
헨과 NO의 의사가 강한 칸은 아마도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을 거다.
자신과 다르거나 약하다 하는 것에 용서가 없는 곳이니 말이다.
어두운 표정을 짓고있는 가흔의 얼굴을 보며 에스는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쓰다
듬었다.
"잘 모르겠지만, 가흔이 있던 곳이니 약간의 흥미가 있는게 사실이죠, 하지만 가흔의
표정이 전보다 많이 나아진 것을 보아 이곳의 생활이 더 잘 맞는 것 같네요."
"............"
"사람은 편한곳에 있어야죠. 자, 음식이 왔네요."
'먹자고요.'라며 포크와 칼을 들어 장난스럽게 윙크하는 에스의 모습에 가흔은 작게
웃으며 앞에 놓여지는 음식에 시선을 주었다.
전에 살고있던 곳이라.... 부모님, 유헌이, 그리고 그녀.
가슴을 싸하게 만드는 그리운 얼굴들에 가흔은 눈을 감았다 떴다.
하지만, 아직은 그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여기에 있어봐요. 맛있는 걸 기지고 올테니."
음식을 반도 채 먹지도 않고 자리에 일어난 에스는 가흔을 두고 식당밖으로 나갔다.
투명한 유리문을 통해 뛰어가는 에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가흔은 입에 물고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포도주를 들어 한모금 마셨다.
원래 알콜이란건 그 무엇도 섭취한 적이 없었는데 칸들과 어울리며 자신도 모르게
주량이 는 모양이다. 전에 한잔만 마시고 얼굴이 붉어진 기억을 떠올리며 가흔은 테
이블에 팔을 받치며 하늘에 떠있는 구름들에 시선을 주었다.
좋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아는 사람들이라곤 칸 일행이 전부인 불안하기 짝이없는 상황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이렇게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눈을 감은채로 햇볕을 쐬고있던 가흔은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눈을 떴다.
한 자리에 나무벽이나 꽃벽으로 나누워 있기는 했지만,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높으
면 자연히 상대방의 말소리가 다 들리기에 가흔은 어쩔수없이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일수 밖에 없었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흥미를 불러 일으키기 마련이니깐.
"중앙에서 뭔가 일을 시작하려는 모양이야. 움직임이 심상치 않더라고."
"그래봤자. 우리들하고는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 신경끄는게 자네에게 좋을거야."
"근데 그게 그렇지만도 않은게 마치... 10여년전의 패위찬탈하고 비슷한 분위기가
감돌아서...."
남자의 자신 없어하는 말에 갑자기 대화가 끊긴다.
잠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오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말을 한 남자에게 뭐라
신경질을 내는 듯한 음성이 들린다.
말을 한 남자도 자신이 해서는 알될 말을 한것을 알아차린 건지 연신 사과를 하고,
그렇게 한바탕 요란하던 분위기는 어느 침착하게 울리는 음성에 다시 잔잔해 졌다.
"중앙에서 무엇을 하든 패왕이 있던 시절보단 덜 하겠지. 우리들은 얌전히 있다가 위
에서 물려주는 위만 무사히 받으면 그만인거야."
"...그건 그렇지만.... "
"자-자- 뭐하러 그런 꿈에 볼까 두려운 사람을 입에 올리는 건가. 모처럼 좋은 자리
에 왔으니 먹자고."
분위기를 정리하는 듯한 목소리에 다시금 화기애애해 졌는지 들어도 영양가 없는
말들이 떠듬떠들 들려온다.
중앙국의 패왕인가.
불과 10여년 전에 쫒겨난 왕이 중앙국에 있었던 건가?
어치피 깊게 알아도 자신과 관련없는 일들이니 가흔은 내려놓은 포크를 집어 빵부
스러기를 스프에 찍어 입에 넣었다.
구수하고 입안에 착 달라붙는 맛이 과연 특급 호텔감 이었다.
"늦었죠?"
"아, 어딜 다녀온 거예요?"
"짜~잔. 좋은 걸 얻어 왔죠."
기대하라는 듯이 뜸을 들인 에스는 자리에 앉아 들고왔던 봉지안에서 무언가를 꺼
내 들었다.
모습을 들어낸 그것에 숨을 죽인 가흔은 고개를 들어 에스를 바라 보았다.
"남쪽보다 더 얻기 힘든 거라고요. 그러니깐 식사를 다 마치면 이것도 깨끗하게 먹기
입니다."
"에스...."
남쪽에 있을 당시 에스가 사주었던 얼음을 간 아이스크림 맛이 나는 음식이었다.
내색은 안하지만 볼에 홍조가 떠오른 가흔의 모습에 역시나 힘들게 얻어 오기를 잘
했다고 생각하는 에스였다.
"뭘 노려보는 거냐? 망할 도마뱀이."
"내 알을 까고 나와서 너처럼 무례한 놈은 또 처음본다."
별다른 행동을 하진 않지만, 아까부터 사람속을 긁는 칸의 말에 유크렌은 나지막하
게 이를 갈았다.
외관은 13세정도 되어보이지만, 알수없는 분위기와 외부적인 힘의 작용으로 성장이
억눌러져 있는 듯한 그에게 진심으로 원한관계를 맺다가 나중에 뒷통수를 맞는 일
은 사양이기에 유크렌은 최대한 침착해지려 노력했다.
선대를 돌아보면 이런 비슷한 패턴으로 약을 올리는 놈을 호되게 혼내주었더니 그
놈이 인간들 중 꽤나 높은 자리에 있어 피의 맹새니 뭐니, 보상을 바란다니 뭐라니
해서 발목을 잡는 일이 허다했던 것이다.
콧김을 내뿜으며 많이 참는 그 모습에 칸은 입꼬리를 올렸다.
용이란 것들은 원체 오만한 종족이나 예상외로 신중함이 있어서 놀리는 데에 꽤나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진짜 용의 모습이었다면 이런 행동을 할 생각은 하지도 않았
겠지만, 지금은 어린아이의 모습이니 상관은 없겠지.
자고로 눈에 보이는게 장땡이니깐.
"이봐. 용. 이거 먹을래?"
"..........."
"엄~청 맛있다고."
에스 등이 두고간 과일을 들어보이며 염장을 지르는 칸에게 애써 시선을 주지 않으
며 벽에 걸어진 그림을 감상하는 유크렌이었다.
한 200여년 동안 잠들어 있는 사이 인간들의 예술엔 미묘한 변화가 있어, 그것을 살
피는 것은 꽤나 즐거움을 주었던 것이다.
몸이 구속되어 있으니 눈이라도 움직여 이 무료함을 줄어야 겠다.
하지만 구속구가 달려있는데다 자신을 그것을 직접 떼어낼수도 없는데 꼭 이렇게
밧줄로 묶어 두어야 겠는가?
정말이지 인정머리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놈들이다.
"헤엥. 재미없으."
네놈을 재밌게 할 이유가 이 몸에게 있다는 거냐?
울컥하고 치밀어 오는 것이 있었지만, 입을 꾹 다물어 애써 참았다.
저번에 둘만 남아있던 적이 있었는데 이놈은 나중에 거슬리는 소리를 해 자신을 화
나게 했다며 들고있던 검집으로 자신의 머리를 냅다 후려쳤던 것이다.
그때의 통증이 두려워 녀석과의 말싸움을 회피하는 것은 절대 아니라며 자신의 자
위하는 용이지만, 비참한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수 없는 것이다.
그런 용의 모습이 정말로 재미없다는 듯이 한동안 주시하더니 콧김을 내뱉으며 몸
을 돌리고 방에서 나가 버렸다.
탕!
째각. 째각. 째각.
"............"
몇분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는 낌새에 유크렌은 고개를 돌려 방문을 바라 보았다.
그리곤 조심스레 소파에서 한발을 내려 뒷걸음질을 쳤다.
이따위 밧줄 풀어버리고 이곳에서 빠져나가고 말테다.
에즈와의 상담이 있어 먼저 들어가라는 에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인 가흔이지
만, 그런 충고의 말보단 호기심 충족이 더 강했기에 건물의 여지저기를 둘러보고 있
었다.
원래 층과 층, 그리고 방사이에 철저한 감시가 있어 잡상인이나 허름한 차림의 인간
들을 막는 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차림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재질이 고급인데다 묘
한 미색을 띄우고 있는 외모의 가흔에게 별다른 제지를 가하지 않아 그는 쉽게 다른
곳으로 들어갈수 있었다.
원래 이런곳은 귀족들이나 돈많고 질 안좋은 자들도 심심찮게 있는 법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는 가흔은 두려울게 없었다.
"어마어마 하네..."
복도에 즐비해 있는 테이블 위의 화병과 떠듬떠듬 걸려져 있는 그림들은 슬쩍 보이
에도 상당한 고가의 것으로 보였다.
있던 세계에서완 확연히 다른 화풍의 그림을 주시하며 만약 자신이 미술을 하고있
는 중이었다면, 이 화풍을 훔쳐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돌아간다면 꽤나 화제가 될 것
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은 생각으로 그치는 것이 좋겠지.
다시 걸음을 옮겨 코너를 돌던 가흔은 멀리서 누군가 티격대는 모습에 걸음을 멈추
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기름기가 좔좔인 배불뚝이 중년 사내와 그런 사내에게 팔이 붙잡
혀 빠져 나가려는 하는 초록색 머리의 꼬마는.....
"용?"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것일까?
당혹감을 감추지 않으며 가흔은 재빠른 걸음으로 용과 중년의 사내에게로 다가갔
다.
"이것 놓으란 말이다!! 이 변태에게 돼지같은 놈아!!"
"말버릇도 귀엽구나. 이리 오라니깐. 내가 아주 좋은 놀이를 알려 줄테니.."
"끄아악~ 어디다 그 썩어 빠질 면상을 들이대는 거냐?!! 눈이 썩을것 같아!! 우웩!!"
요란하게 몸을 비틀어 보지만 보기완 달리 완력이 강해서 쉽게 빠져 나갈수가 없다.
칸이라는 건방진 놈이 나간 다음에 화병을 깨뜨린 파편으로 밧줄을 끊은 다음 힘들
게 출구를 찾아다녔거늘 이런 돼지중에 상 변태와 만나게 되다니..
자고 일어난 다음에 억세게 운이 나빠졌다고 생각하며 점점 다가오는 주름 투성의
얼굴에 용은 이를 갈았다.
이런 돌바닥에 100번은 부딫힐 놈같으니라고..! !
"이..것... 놓으란 말야!!!"
잡혀있는 손목은 이미 줄을 끊다가 생긴 상처가 벌어져 피가 맺힌게 꽤나 아프다.
명색이 용인데 이런 하찮은 놈에게 붙잡혀 그 융켄놈에게 지키고 있던 순결을 잃게
되는 건가하고 생각하니 머리속이 캄캄해 지는 것 같다.
자신이 너무너무 한심해서 땅파고 그대로 묻어있고만 싶은 심정이다.
"용!! 무슨 일입니까?"
타-ㄱ! !
억지로 잡혀있는 것이 확연한 모습에 가흔은 용을 잡고있는 중년인의 팔을 뿌리치
며 작은 몸을 자신쪽으로 끌었다. 남자는 갑자기 나타난 가흔의 모습에 금방 침이라
도 떨어질 것같은 얼굴로 둘에게 팔을 뻗었다.
"그쪽도 좋구만, 자-자- 두려워 말고 이리로 오라니깐. 내가 천국을....."
빠--악.
중년인의 지저분한 말에 망설임없이 주먹을 내지른 가흔은 코피를 쏫으며 쓰러지는
덩치를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 보았다.
"그런 지저분한 말을 이런 어린아이가 있는데서 하는게 아닙니다."
품속에 안겨 몸을 가늘게 떨고 있는 용의 모습에 미간을 찡그린 가흔은 한방에 뻗었
있는 남자의 배를 밟고 지나친 다음 용의 몸을 안아 들었다. 괜찮다는 듯이 초록색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 작은 팔에 나있는 상처에 가흔은 눈쌀을 찌뿌렸다.
어째서 용이 이런 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경위로 오게 된것인지 대충 짐작
이 간다.
맡겨 두었던 칸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이런 상처가 생길만큼 무리하게 줄을 끊고 나오
다 저런 변태 중년인을 만난 거겠지.
쓰러져 있던 덩치를 몇번 더 두들길 걸하고 아쉬워 하는 그였지만, 우선은 용의 팔을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다.
"............뭐야. 이제서야 나타나고."
"...용."
"빌어먹을. 빌어먹을..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야."
".............."
"...두고 보란 말야.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전부 용서하지 않을 거니깐."
울음소리가 섞인 그 목소리에 가흔은 안고있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원래 강한 자일수록 사소한 일에 크게 상처를 입는 법이다. 뭔가 시린 바람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 것 같은 느낌에 가흔은 눈썹 사이에 골을 만들었다.
"내일 하루동안 금식하십시오."
"어째서?! !"
"이런 일을 벌여 놓으시고도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군요. 하루더 연장입니다."
"....! ! ! !"
삿대질 하는 채로 입을 벌리고 있는 칸이지만, 더 말했다간 굶는 기간만 더 연장된
다는 것을 알기에 내뱉던 말들을 속으로 삼켰다.
잠시 화장실에 가서 속을 비워 놓는 동안 도마뱀이 멋대로 나가 사고를 친 것 가지
고, 왜 나한테 뒤집어 쒸우려는 건지. 억울했지만, 용을 안은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가흔의 눈동자를 바라보니 할말이 없어진다.
그 눈동자는 '이런 어린아이에게 그런 일을 당하게 하다니... 나빠요.'라는 의미가 강
하게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그럼 난 저 녀석을 맡고 있는 동안 화장실도 뭣도 가지말고 계-속 놈과 함께 있었어
야 한다는 거야? 가슴을 움켜 잡으며 엄청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 칸이지만, 아무도
그에게 동조하지 않았다. 만약에라도 저 어린 꼬마용에게 일이 생겼다고 생각하기
만 하면 소름이 돋는 것이다.
구속구를 달았다고는 하나, 그것이 용의 내재적인 힘을 완전히는 억누르는 것은 무
리기에 갑작스런 용의 분노가 그것이 깨지고 성체로 변해 이 마을을 초토화하는 최
악의 상황도 상상믄으로 그칠일은 아닌 거다.
"정말이지.. 무책임 하긴.."
노려보는 에즈의 눈동자를 마주 노려본 칸은 도마뱀의 팔을 잡고 붕대를 감고있는
가흔에게 시선을 주었다. 몇번을 봐도 맘에 들지 않은 그 모습에 침대위에서 일어난
칸은 둘 사이에 뛰어들어 가흔과 유크렌 사이에 딱하니 앉아 버렸다.
그 모습에 기가 막힌 것은 당사자 둘보다 주위 사람들로 모두 뭐하는 짓이냐고 묻는
듯한 시선으로 칸을 바라 보았다. 하지만 그런 시선들을 특유의 뻔뻔함으로 물리친
칸은 엉덩이를 비집어 공간을 넓혔다.
"..........칸, 용의 상처를 치료해야 해요."
"됐어. 명색이 용인데 상처하나 스스로 못 치유하겠어?"
"하지만 인간으로 폴리모프를 했으니, 마법사의 재능을 인식해두지 않은 한 그에게
자체 치유력을 바라는 것은 억지랍니다. 칸님."
나지막한 젤의 음성에 칸은 그녀를 노려 보았다.
용이 짧은 인간들의 유희를 즐기기 위해 인간으로 폴리모프를 할 때 자신들이 즐길
상황에 대한 인간의 자료를 미리 설정해 두는데, 검사가 마법사의 재능을 밝휘하지
않듯이 그들 또한 그런식으로 일정한 제재를 가해두는 것이다.
뭐, 처음에 유희를 즐기는 어린 성체들은 최강의 인간으로 설정해 두기도 했지만, 일
단 외관이 어린아이인 용이 검을 잡은 것은 애초에 무리고, 구속구가 있는 한 마력이
있다해도 발휘할수 없으니 그에게 별다른 힘이 있을리가 없다.
만약 그때 가흔이 지나치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당했을 거라는 거다.
"이번엔 동조의 여지가 없답니다. 칸님. 부디 노웬님의 말에 따르세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
-여기있는 이 존재가 보이는 그대로라고만 생각치 마십시오. 조만간 에어션트급 드
레곤이 되지도 모르는 존재. 중앙의 레이나와 맞설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모르시는
겁니까?-
머리속에 울리는 음성에 칸은 얼굴을 굳힌채로 젤을 바라 보았다.
입은 다물고 있지만, 음성은 분명 그녀의 것.
쓰잘데기 없는 곳에 힘을 사용한다며 입가를 우그러 뜨른 칸은 자리에서 일어나 용
을 노려보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쾅! !
"칸님! !"
"놔두세요. 라프헨. 칸님도 머리를 식히실 필요가 있답니다."
냉정한 젤의 말에 순간 울컥하려던 라프헨이지만, 그녀의 말이 틀린 것만도 아니기
에 입술을 깨물고 물러날수 밖에 없었다.
그런 인간들의 모습은 유크렌은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 보았다.
"너희는 아주 나쁜 놈들이야."
웅얼거리는 용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가흔은 붕대에 감겨진 그의 팔을 안쓰러
운 듯이 내려다 보며 들고있던 푸딩을 떠서 다시 입근처에 대주었다.
표정은 영 아니지만, 주는 것은 제대로 받아먹는 것을 보면 그다지 걱정하지 않아도
될것 같지만, 그의 주변에 떠돌아 다니는 으습한 오로라가 눈을 뗄수 없게 만든다.
칸은 금식중이라 신경이 날카롭고, 노웬등은 앞으로 갈 방향과 주변에 수상한 자들
이 없나해서 원래부터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처음에 그 스릴에 약간은 기분이 고조되어 있던 가흔이지만, 그 기간이 길어지자 그
역시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용에게 찝접대서 때려눕힌 남자가 이 마을에서 꽤나 알아주는 세력가라는
말에 이제는 칸의 방에서 잘 나가지도 않게 되어 이만저만 답답한게 아니다.
"이봐."
"네?"
"이리와서 여기좀 주물러봐."
난대없이 어깨를 주무르라며 엎드리는 용의 모습에 가흔은 눈을 동그렇게 떴다.
안 좋은 일을 당하기도 하고해서 하강곡선을 그리는 그의 비위를 맞춰 주기위해서
몸을 구속하던 밧줄을 푼 뒤로 그는 가끔 이런 알수없는 요구를 해서 가흔을 당혹스
럽게 하곤 했다.
용도 그 나름대로 자신을 위험에서 구해준 가흔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말을 하려고 할때마다 엉뚱한 말이 튀어나간다.
자연히 불편해 지는 것은 말한대로 행동해야 하는 자신의 몸이다.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가흔에게 몸을 맡긴 유크렌은 자신의 처지에 한숨이 나왔다.
일단 몸이 자유롭게 되었으니 도망갈 궁리를 해야 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어제의 그
변태놈을 만난뒤로 혼자서 움직이는 것에 극도의 불안함이 생겨 버렸다.
고작 이런 일에 움츠려 드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했지만, 어쩔수 없다. 다른 놈들도
나같은 일을 당하면 누구나 이런 행동을 할거라고.
"좀더 아래도 주물러줘."
"여기?"
"아니.. 좀더 아래로..... 에고.. 살겠다."
헛나간 말에 받는 안마지만 예상외로 가흔의 손길은 기분이 좋아서 유크렌은 진지
하게 그 느낌을 받아 들이고 있었다.
그런 둘의 모습을 소파에 늘어진 채로 지켜보고 있던 칸의 눈꼬리가 점점 위로 올라
갔지만, 어제부터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더니 화낼 기운도 없다.
끙-하며 앏는 소리를 낸 칸은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몸을 돌리며 소파위에 누웠
다.
굶었을 때는 그저 아무것도 안하고 누워서 열량을 축적하는게 제일 좋은 법이다.
용의 어깨를 주무르면서도 등을 돌린채로 칸을 살피던 가흔은 그의 기운없어 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어제는 너무 굶어서 골골대는 그에게 주먹밥을 갖다 주었지만, 그만 에즈에게 걸려
빼앗기고 말았다. 거기다 칸님을 위한다면 이런 행동은 좋지않다는 따끔한 충고를
듣기도 해서 다시한번 도전할 생각을 접었다.
일단은 대세를 따르는 것이 여러모로 좋은 일이겠지.
"가흔, 칸. 안에 있었군요."
"라프헨?"
갈색바지에 평범한 티위에 조끼를 받쳐입는 라프헨은 연초록의 머리를 땋아내린 모
습이었다. 평소의 나풀대는 신관차림이 아닌 모습에 놀라워 하는 가흔의 앞에 다가
간 라프헨은 그의 팔을 잡아 끌었다.
"안에만 있으면 답답하지요? 일어나요. 같이 나가자 고요."
"나가요?"
난대없는 말에 되묻는 가흔의 밑에서 안마를 받고있던 용은 두눈을 빼곰히 내민채
라프헨을 올려다 보았다.
그 모습이 귀여워 저도 모르게 볼을 찌르뻔한 라프헨이지만, 앞으로 대우에 조심하
라는 노웬의 말도 있고해서 저절로 움직이는 팔을 다른손으로 잡았다.
"라헨과 에스가 앞으로 필요한 물건들을 사들이다고 하네요. 모처럼의 외출이니 함
께 나가요. 가흔에게 이것저것을 알려주고 보여주고 싶은게 잔뜩이거든요."
어린아이처럼 신나하는 모습에 그에대한 배려를 느낄수 있어 가흔은 무척이나 고마
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용도 같이 갈수있는 건가요?"
"음.. 그건 모르겠지만, 가흔이 잘 돌봐준다고 하면 그다지 문제는 되지 않을것 같은
데요."
내심 같이 가고 싶었던 유크렌은 가흔의 말에 반가운 표정을 짓다가 라프헨의 답에
모처럼의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온몸의 포박을 당한채로 한구석에 쳐박혀 있긴 했지만, 팔이 자유로운데도
방안에 있어야 하는 느낌은 천지차이라 그동안 좀이 쑤셔 죽을뻔 했던 것이다.
라프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용은 잽싸게 문쪽으로 달
려 나갔다.
"이봐. 늦장 부리지 말고, 얼렁얼렁 오라고!!"
"........빠르군요."
라프헨의 말에 가흔은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이봐... 나도 가면 안돼?"
들떠있는 세사람의 말소리를 다 듣고 있던 칸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라프헨
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노웬들보다 칸과의 정이 더 깊게 든 라프헨으로썬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역시
나 들은 말이 있기에 무척이나 미안한 표정을 짓을수 밖에 없었다.
표정에서 거절을 당한것을 알아챈 칸은 어두운 낮빛을 만들며 조용히 자신의 지정
석이 되어버린 소파위로 올라가 누웠다. 자신이 뜻대로 되지 않은 노부가 자리에 누
워 '늙으면 죽어야지.'라는 분위기를 흘리는 칸을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두사람
이지만, 수가 없기에 한숨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오옷!! 이건 뭐야?!!"
"..글쎄."
뭐라고 물어봐도 이곳 사람이 아닌이상 뭐라고 해야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근처의 물건들을 흩어보는 그이지만, 설령 물건에 대해 설명
이 적혀 있다한들 가흔이 그것을 읽을수 있을리가 없었다.
단지 웃어보이는 수밖에 없는 가흔을 바라보며 용은 입술을 비죽히 내밀었다.
가흔 그가 이곳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잠시 잊고 질문을 던져 무안해 하고 있는 유
크렌이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터무니 없이 높은 자존심이라는 것이 그에게 사과 할
타이밍을 놓치게 하고 있었다.
무안함을 감추기 위해 유크렌이 선택한 방법은 다른 곳으로 가서 구경을 하는 것이
었다.
그런 그의 뒤를 따르는 가흔의 모습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어린 동생을 데리고 온
형의 모습인지라 장에 와있는 사람들에게 쏠쏠한 구경거리는 제공하고 있었다.
어찌되었건 간에 둘다 꽤나 화려한 외모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런 그들을 멀리서 바라보던 에스와 라헨은 되도록이면 눈에 띄지 않고 장을 본다
는 계획을 대폭 수정할수 밖에 없었다.
저렇게 가는 곳마다 시선이 쏠리니, 지금은 그들에게 시선을 받게 한다음 자신들은
잽싸게 물건을 사고 장소를 이동하는 식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이렇게 밖에 두고나면 더 이뻐보이는 군요."
"저 용이라는 존재가 아니면 가흔군이?"
"뭐, 라헨 눈엔 누구보다 라프헨이 예뻐 보여서 물어보나 마나겠지만, 둘다 저렇게
두고 보니 형제처럼 꼭 닮은게 모습이 이쁘지 않습니까?"
"글쎄, 누구말대로 난 라프헨만 눈에 들어와서 말야."
험악한 얼굴을 찡그리며 미소를 짓는 모습은 다른이들에게 공포를 불어 일으키겠지
만, 면역이 되어있는 에스는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장난스럽게 라헨의 옆구리를
질러 넣었다.
그런 그들의 대화를 미쳐 듣지못한 라프헨이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둘은 아무 말없
이 멀리 가있는 가흔과 용을 불렀다. 시선을 모으는 것도 여기저기 다니는 것도 다
좋지만, 너무 떨어져 있으면 위험하다.
먹는 것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용의 팔을 잡아끌며 가흔은 자신들을 부르는 일행
들에게 걸어갔다.
"어라. 이런 곳에 이런 미인이 있었나?"
"꼬맹이도 귀엽구만."
" ? "
갑자기 건들거리며 나타난 사내들의 모습에 가흔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대없이 나타나 미인이라는 둥 차한잔 어떠냐는 둥 건들거리며 자신과 용의 눈앞
에 자신들의 얼굴을 내미는 폼이 영락없이 깡패다.
옷는 분명 이세계의 것인데 하는 행동은 자신이 있던 세계와 그닥 다르지 않다.
그 기묘한 이질감이 우스워서 입가를 우그러 뜨리는 가흔이었지만, 3명의 사내들은
그것이 자신을 비웃는 거라고 생각하고 울컥하며 목청을 높힌다.
"네놈!! 감히 우릴 비웃는 거냐?!!"
"예쁘게 생겨서 부드럽게 해줄려고 했더니..... 윽!!"
가흔에게 소리를 지르며 한대 칠 기세로 주먹을 올리던 남자는 가랑이 사이에 느껴
지는 화끈한 통증에 이를 앙물며 그자리에 무너졌다.
갑자기 쓰러진 동료의 모습에 다황한 자들은 무슨일인가하고 고개를 돌리다 시선이
한참 아래에 있는 용이 주먹을 내뻗고 있는 모습에 얼굴을 기괴하게 이그러 뜨렸다.
가흔과 자신에게 감히 상스러운 짓거리를 하려던 인간들 중 하나의 급소를 주먹으
로 내질러 응징을 한 유크렌은 양손을 허리에 올리며 당당하게 외쳤다.
"호되게 당하기 전에 당장에 눈앞에서 꺼져라!!"
그 기세에 물러날 자들이 아니다.
유크렌의 호통은 오히려 그들의 화를 더 부축이는 것이어서 남자들은 쓰러진 사내
를 부축하고 주먹을 뼈마디를 주물렀다. 위협을 주려는 음향에 가흔은 난감한 표정
을 지으며 당장에라도 달려나갈 기세인 용의 몸을 잡아 뒤로 끌었다.
되도록이면 조용히 지내라는 들은지 겨우 이틀만에 이런 상황이라니...
가흔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누르며 뒤에서 남자들에게 접근하는 라헨들에게 미안하
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까부터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고 있지만, 표정에 두려움이 떠오르지 않는 소년
이나 자신을 뭐같이 노려보는 꼬맹이 때문에 심기가 상당히 불편했던 사내들은 자
신들의 뒤에 누군가 접근하는지도 모르고, 가흔들에게 달려들 준비를 했다.
남자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라헨이 천천히 주먹을 올리는 것을 보곤 가흔은 조용히
남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자신들을 건드리지 말고 그냥 조용히 지나치는게 좋았을 텐데.
"다녀왔습니다."
한가득 들고있던 짐을 내려놓은 가흔은 아무 반응이 없는 것에 숙이고 있던 얼굴을
들어 보았지만, 방안에 있을거라고 예상했던 칸의 모습은 없었다.
귀엽다며 용을 놓아주지 않은 라프헨 덕택에 현재 방안에 있는 것이 자신뿐인 것에
안도하며 가흔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칸의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금식과 더불어 방안에만 있으라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 도대체 어디로 간건지.
미간을 찌뿌린 가흔은 땀이 베어 나오는 목덜미를 손바닥을 흔들어 바람을 만들며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았지만 칸의 머리털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욕실
문을 열어보인 가흔은 물을 받아 놓고 누워있는 칸의 모습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사람 놀래키는데 뭔가 있는 사람이다.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칸."
"............"
"칸?"
대답없는 모습에 칸에게 다가간 가흔은 수면위에 떠올라 있는 장미잎과 미미하게
베어나오는 향에 눈을 감았다 떴다.
일견 건방지고 함부로 행동하는 칸이지만, 이런 소소한 부분에서 놀랄 정도로 고상
한 취미를 보여 가흔을 놀라게 만드는 재주를 지닌 그는 이번에도 무척이나 화려한
목욕을 즐기고 있다 잠이 든 듯 욕조안의 물은 상당히 차가워진 상태였다.
물속에 오래 있는 것은 안좋다는 것을 알기에 칸의 어깨를 잡고 몇번 흔든 가흔은
그래도 그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근처에 놓아져 있던 커다란 타월을 들어
칸의 몸을 잡아 일으켰다.
13세 정도의 몸은 작지만 뼈 마디가 튼튼하기에 들어올리는데 약간 고전을 했지만,
어떠게 들어올리는데는 성공했다.
비록 온몸이 물에 젖기는 했지만 말이다.
"잠은 침실에서 자란 말입니다."
전에 자고있던 칸에게 접근해서 갈비뼈가 나갔던 경험이 있었지만, 이렇게 잠든 그
를 또다시 건드리는 데에 그다지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그때 일이 어쩔수 없는 그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그때부터 그가 자신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꽤나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에스를 통해 들어왔기 때문이리
라. 내심 긴장했던 가흔은 침대위에 올려 놓을때까지 얌전히 잠들어 있는 모습에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이불을 들어 목까지 덮어 주었다.
아까 옮기면서 몸의 물기는 대충 닦아 졌지만, 머리카락은 아직 축축해서 머리를
배게위에 올려놓은 그는 검청의 머리카락을 수건에 대고 살살 비비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추운 날씬데 머리가 물기있는 채로 잠들다 감기 걸리가 쉽상이다.
달칵.
"어머? 칸은 자고있는 거야?"
"에즈."
문큼으로 얼굴을 내밀고 방안의 모습을 살피던 에즈는 문꼬리를 잡고 밖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살피고 나서야 방안으로 들어왔다.
빠른 걸음으로 가흔과 칸에게 다가온 그녀는 들고있던 쟁반에서 김이 나는 스프를
근처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그것을 의문이 떠오른 채로 바라보는 가흔에게 손
가락을 들어 입을 가린 에즈는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내일이면 금식이 끝나는데 속이 상해서 많이 못 먹으면 꽤나 히스테릭해 질껄?"
"그렇군요."
이틀을 굶은 상태에서 바로 폭식을 하는 것은 몸에 좋지 않다.
저번 빈속에 아무 음식이나 먹고 나서 한동안 배탈에 시달렸던 자신의 경험을 떠올
리고 웃어보인 가흔은 에즈에게 나중에 칸이 일어나면 먹게 한다고 말하며 스프위
에 천을 덮어 사람이 안보이는 곳에 두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즈는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 보았
다.
이렇게 잠든 얼굴을 보면 영락없이 천사인데 말이다...
"이런 편안한 얼굴로 자는건 정말 오랜만에 보는 걸?"
"..........."
"역시 가흔이 있으니깐 좋구나."
전에는 누군가 곁에 있으면 잠은 커녕 눈도 감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알수없는 소리를 하며 웃어보이는 에즈의 얼굴을 멀뚱히 바라보던 가흔은 잡고있
던 칸의 머리카락이 팽팽해 지자 고개를 내리고 다른 머리쪽으로 손을 뻗었다.
누워있는 상태라 말리기가 힘들었지만, 가만히 둘수만도 없다.
칸의 머리 말리기에 열중인 가흔의 모습을 보고있던 에즈는 앞으로 여행중 필요한
준비를 하려면 꽤나 많은 시간이 걸리기에 금방 인사를 하고 방에서 나갔다.
탁.
"..웅..ㅇ.."
"일어났나요?"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트는 칸의 모습에 머리에서 손을 뗀 가흔은 그쪽으로 몸을
숙였다. 서늘한 한기에 덥고있던 이불을 좀더 위로 올린 칸은 열려진 시야 사이로
보이는 가흔의 얼굴에 한쪽 눈썹을 올리고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반다나로 가려졌다고는 하지만 몇가닥 흘러 내린 머리카락이 묘한 상상을 불러 일
으킨다.
하지만 내색 할수는 없기에 나른 팔을 들어 길게 기지개를 폈다.
"뭐야. 벌써 장보는 걸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야?"
"약간 소란이 있어서 말이죠."
"누가 시비라도 건거야?"
대충 예상할수 있는 일을 입에 담자 말하기 곤란하다는 식으로 찡그려진 가흔의 얼
굴이 무슨일이 있었는지 일목요연하게 한다. 눈에 띄는 가흔에 인정하기 싫지만 귀
엽게 생긴 도마뱀이 붙어 있으니 눈에 띄지 않을리가 없지.
게다가 이쪽은 질나쁜 무리들이나 노예상인들이 많이 모이기로 유명한 곳.
애초에 일이 없기를 바란게 잘못이었는 지로 모른다.
예상보다 이 곳에서 빨리 떠날것을 예상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칸은 가흔이 건내주
는 수프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금식은 오늘 저녁까진데?
묻는 눈길에 가흔은 웃어보이며 숟가락으로 수프를 저어 보였다.
"에즈가 가지고 왔어요. 내일을 위한 것이라고나 할까요?"
".....쓸데없는 짓을. 평소에 잘할 것이지."
투덜대면서도 수프를 받아들고 허겁지겁 먹는 모습에 가흔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한그릇을 금방 비운 칸은 더해지는 공복감에 배를 움켜잡고 처량한 눈빛을 보냈다.
칸의 그 눈빛에 잠시 몸을 경직스킨 가흔은 빈 그릇을 내려보다 자리에서 일어났
다. 에즈에게 가서 한그릇 더 얻어 올 생각이었던 거다.
아직 정리되어 있지 않은 짐에 시선을 가자 저것은 치워둬야 나중에 탈이 없을텐
데..하고 생각하는 것을 알았는지 칸이 그답지 않게 먼저 치우겠다고 나선다.
"그럼 부탁드릴께요."
"그래그래, 그러니깐 빨릭 같다와."
손을 내저으며 팔을 걷어 붙이는 모습에서 믿음직함을 느껴야 하거늘 왠지 불안하
기만 하다.
역시나 여기저기 빈곳에 짐을 쌓아두기만 하는 모습에 차라리 자신이 하겠다고 말
하고 싶었지만, 몇일만에 의욕적으로 변한 그의 사기를 꺽고 싶지 않았기에 결국
물러날수 밖에 없었다. 빨리 한그릇 얻어 온 다음에 다시 치워둬야 겠다.
걸음을 빨리 하며 오늘 시장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 가흔은 갑자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들에게 위협을 주려했던 사내들은 뒤에서 나타나 검집을 쓰다듬는 라헨의 모
습만으로 기가 죽어 '두고보자~'라는 상투적인 말을 내뱉고 도망갔던 것이다.
가끔 가흔 그도 라헨의 얼굴을 보곤 놀랄때가 있으니, 처음보는 자들은 어떻겠는가.
라헨과 라프헨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라헨 그의 얼굴은 정말 무섭게 생겼다.
"이봐. 소년."
"에?"
자신을 부르는 듯한 소리에 계단위에서 몸을 돌린 가흔은 한단계 아래에 있는 할머
니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김새는 분명 노인인데, 머리카락이 진한 주황색이라 놀라 버린 것이다.
들고있던 그릇을 옆으로 돌리고 용무가 무엇인가해서 허리를 숙인 가흔은 노인에
게 미소를 보였다.
"무슨 일이라도?"
"그게 말야. 이걸 몰라서......."
"네? 이건.. 읏?!"
칙.
뭔가를 주머니에서 내미는 듯한 행동에 허리를 더 숙인 가흔은 갑자기 눈앞에 뿌려
지는 뿌연 가루에 눈살을 찌뿌리며 반사적으로 눈을 가렸다.
손에서 떨어진 그릇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지만, 눈에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
이 그런것을 신경쓸수 없게 만들었다.
계단에 엎드린채로 눈을 가리고 고통스러워 하는 가흔의 모습을 바라보던 노인은
기둥뒤에 서있던 사내들에게 손짓을 했다. 노인의 손짓에 기둥 뒤에서 나온 사내
둘은 가흔을 일으키고 목덜미를 내리쳐 기절시킨 다음 어깨에 짊어졌다.
다시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그들은 자신들끼리 고개를 끄덕이고
빠르게 그 장소에서 벗어났다.
떨어진 그릇이 이 소년의 신상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겠지만, 그것을 깨닭기
도 전에 자신들은 멀리 가있을 테니, 크게 상관은 없다.
멀어지는 정신을 끈을 잡으려던 가흔은 이내 흔들리는 몸에 맞춰서 깊은 수마에 몸
을 맡겼다.
-빨리 의식을 되찾도록 하란 말입니다.
-말이 쉽지 어떻게 하라는 건가.. 우리들도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열심히라네.
-변명따위 필요없습니다. 당장에 하지 못하면 당신들 밥벌이도 그걸로 끝일 겁니다.
-이보게.. ....군!!
말한번 차갑게 하는 구나 싶었다.
눈을 감고 있어서 누구와의 대화인지는 알수 없었지만, 그 음성이 자신과 무척이나
같다며, 그 말투또한 원래 세계에 있던 자신의 것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무언인가 수면위로 떠오르려 하는 것을 억지로 눌러두며 떠듬떠듬 들려오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려 했지만, 그들의 대화는 이미 끝난 것인지 더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아직.. 인거지?
음울한 울림이 있는 예쁜 목소리가 들렸다.
끝에 묻어나 있는 애교섞인 말투가 꽤나 미인일 거라고 짐작할수 있게 해주는 사람
이었는데, 그런 그녀의 질문에 답하는 소리가 없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걸음소리
가 드믄드믄 들리다 어느순간 길게 울리는 한숨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미안..이라고 말한 여자는 나가는 듯 문소리가 들리고 잠시동안
정적이 감싸였다.
눈을 감고있으니 들리는 것이 예민해 지는 모양이었다.
앉아있는 의자가 끼익거리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 그리고....
-도대체 언제 깨어나는 거야.
무척이나 그리운 목소리.
덜컹.
가흔은 몸을 흔드는 느낌에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렸다.
꿈을 꾸다 커튼을 들어내며 그곳에 바로 잠이 깬 현실 상태가 되는 것처럼 너무도 쉽
게 기절 상태에서 일어난 그는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분명 칸에게 스프를 더 주기위해 에즈에게 가려는 도중이었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
이 잠이 들었던 걸까?
아니, 굳이 잠이 들었다 해도 이렇게 흔들리는 장소가 있었던 건가?
눈을 떴지만, 눈빛이 죽어있어 그가 온전한 사고를 할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려준
다. 몇번 눈을 깜박이는 가흔의 모습을 확인한 남자는 마차의 커튼을 올리고 밖에서
말을 모는 사람의 어깨를 두들였다.
"이봐, 정신이 깨어난 모양인데. 약초를 한번더 쓸까?"
"관둬, 하루걸려선 모르겠지만, 너무 자주쓰면 부작용이 생긴다고."
덜컹.
마차가 크게 한번 흔들리자, 고개를 돌리고 말을 하던 남자는 안색을 굳히며 정면을
보고 길이 다소 고르게 나있는 곳으로 말들을 유도했다.
"모처럼에 얻은 상품이니 귀중하게 다뤄야 겠지."
"그도 그렇군."
들고있던 천을 내린 남자는 가흔의 몸위로 올라서다 시피한 자신의 몸을 뒤로 무르
고 맞은 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가흔의 얼굴을 바라보던 남자는 입가
를 비틀어 올리며 손을 들어 가흔의 눈을 가렸다. 검은 빛의 눈동자는 처음보는 그로
썬 비록 뚜렷한 자위는 아니나 눈을 마주하기가 상당히 껄끄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손을 대는 바람에 손가닥에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과 부드러운 감촉.
거기다 검은 머리카락에 손에 닿자 그는 뭔가에 데인 듯이 손을 땔수 밖에 없었다.
"............그냥 자라."
손을 대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 허공에 손을 든채는 그는 민망함을 가리기 위해 헛
기침을 하며 최대한 싸늘하게 말했다.
그런 남자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가흔은 눈을 깜박이다 그대로 감았다.
잠시후 고른 숨소리가 마차안에 울리자 남자는 그제서야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묻
어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용병 짓만 하다 인신매매로 빠진 자신이 처음부터 이런 힘들 의뢰를 받을건 뭔가.
이 특이한 외모의 소년이 속해있던 그룹의 모습을 떠올려보던 남자는 아무래도 그
일행이 심상치 않다는 것과, 벌집을 건드린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주머니를 차지하고 있는 묵직한 금화 뭉치가 그런 고민을 점점 엷게 만들었다.
어찌 되었던 이런 속도로 움직이는 자신을 그들이 찾아 낼리 만무하고 어차피 자신
들은 중간 운반책에 불과하니...
양심의 가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진 좋게 생각하도록 했다.
"납치군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접시를 가만히 바라보던 노웬은 익히 알수있는 일을 입에 올렸
다. 그런 그의 말에 따라 다 알고있는 사실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듯 라프헨들의
얼굴이 미묘하게 찡그려졌지만, 어두운 낯빛을 한채로 테이블 위에 접시를 바라보
기만 하는 칸의 모습에 입을 열지는 못했다.
잘못 건드리면 그대로 폭발할 듯한 그의 모습은 사람들을 초조하게 만들기에 충분
했다.
그런 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노웬은 한숨을 쉬며 젤을 바라 보았다.
노웬의 시선을 받은 젤은 자신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양손
을 접시의 옆에 두고 테이블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런 젤의 모습을 라프헨의 옆에서 주시하고 있던 유크렌은 의외라는 듯이 한쪽 눈
썹을 위로 올렸다.
"어린 계집인줄 알았는데 기억 재생술도 할수 있는 건가?"
"유크렌시아님. 용께서 잠드신 200여년 동안 마력의 판도가 바뀌어 그 발전은 입에
올리기 두려울 정도랍니다."
나지막하는 말하는 목소리와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말하는 젤의 모습에 유크렌은
몸을 뒤로 뺐다.
저렇게 영리한 인간이라면 익히 자신의 정체를 충분히 알수 있는 거겠지만, 막상 호
명을 당하고 나니 그렇게 좋은 기분은 아니다. 게다가 자신이 잠들어 있다고는 하나
무언가를 가르치려는 듯한 모습도 달갑지 않고.
자신을 고깝다는 듯이 바라보는 용의 모습에 실소를 흘린 젤은 마주하고 있는 양손
에 천천히 마력을 집중시키며 눈을 감아 접시주변에 묻어있는 상념들을 보기위해
노력했다.
원래 생각이나 지능이 있는 생물일수록 그 기억이 표면에 남아있어 알아 보기가 수
월하지만, 이런 물체들에게 의지라는 개념자체가 없으므로 고도의 집중력과 기술을
요하는 작업인 것이다.
그런 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에스는 몸을 옮겨 소파에 앉아 깍지를 끼고 그것
을 무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는 칸에게로 다가갔다.
"칸님, 뭔가 드시지 않겠습니까?"
".............."
"피곤하실 텐데, 에즈가 구운 파이라도 한쪽 드시죠."
날카로운 그의 기를 조금이나마 줄여 보려는 그의 노력도 대답없는 칸의 앞에선 무
용지물 이었다.
한가지 생각에 골몰하는 그 모습에 고개를 든 에스는 자신과 눈이 마주친 라헨이 고
개를 가로젖자 낙심의 표정을 지으며 뒤에 서있는 누이를 바라 보았다.
어떻게 좀 해보라는 듯이 올려다 보는 에스의 눈동자를 피하며 에즈는 표정을 굳혔
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칸에게 수프를 주었기에 생겨난 일이 아닌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가흔은 칸과 함께 짐을 정리하거나 나중에 올 사람들을 기다
리다 식사를 하러 갔을거다. 혼자 있게할 기회를 주고 만 자신을 잘못을 탓하며 그녀
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칸을 바라 보았다.
사람은 소중한 것이 잘못되었을 때, 자신의 잘못을 자책하기에 앞서 다른 것엔 관심
을 돌리지 않는 법이라지만, 그녀로썬 이럴 때일수록 칸이 다른 때처럼 뻔뻔하게 자
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바라게 된다.
"찾았습니다."
점점 어두워 지는 분위기를 쇄신하듯 젤은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누구지?"
냉냉한 얼굴로 물어오는 노웬과 자신을 쏘아보는 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우선은 3일 전에 유크렌시아 님과 가흔님 사이에 일을 벌린 상인남자를 찾아야 겠
습니다."
3일 전이라면 탈출을 감행한 유크렌에게 욕을 보이려던 남자다.
가흔에게 얻어 맞은 앙심을 품고 저녁에 쳐들어온 사내를 혀바닥 하나로 물리친 저
력이 있던 노웬은 눈썹을 휘었다.
과연, 그렇게 된 것인가.
그런 타입의 인간일수록 자신이 입은 상처는 잊지 못하고 앙심을 품는 법.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손잡이를 돌리는 칸의 모습을 확인하며 노웬은 꼬고있던 다
리를 풀었다.
"오랜만에 몸 좀 풀어봅시다."
그 의미심장한 말에 안에 있는 자들은 저마다 미소로 답하며 눈빛을 교환했다.
최대한 빠르고 요란하게. 그리고 증거는 남기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이 지금까지 일을 벌임에 있어 하나의 조건이었다.
"자..잘못 했어요..."
"흐흐흐.."
남자는 입가에 흘려 내리는 침을 닦으며 침대 위에서 벌벌떠는 남매를 바라 보았다.
가끔가다 길을 나가곤 할때마다 이렇게 생각치 않은 부수입을 얻기도 하는데, 오늘
은 그 운이 빛을 발한 듯 무척이나 근사한 물건을 주었던 것이다.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고 목욕을 시키고 나니 더 근사해 보인다고 생각하며 그는 벌
벌떠는 그들에게 접근하기 위해 무릎을 침대위로 올렸다.
끼-익
그가 한발을 올렸을 뿐인데도 침대는 크게 기울여져 남매는 자신들의 몸을 더욱 강
하게 껴앉으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침대 턱에 등이 부딫혀 더이상 물러 날 곳이
없었다.
딱 침대 크기에 맞추어 만들어둔 벽은 사내가 기어 들어오는 아래부분을 제외하고
는 3면이 딱딱한 벽으로 둘러 쌓여져 있었다. 그의 악취미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그
침대의 모습에 방안으로 잠입해 들어와 있던 에스는 눈쌀을 찌뿌렸다.
이미 밖은 라헨들이 진압을 했는지 별다른 소란이 없다.
'문제란 말야...'
계획을 짜고 할사이도 없이 라헨에게 상인의 저택을 알아보라고 시킨 칸은 주소를
받자마다 바로 정문을 돌파했던 것이다.
그 무식한 방법에 놀란 자들은 상대방들이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입을 막기에 급급
했다. 지금이 다른이 사람들이 다 자는 밤이니 이 정도지, 만약에 대낮이나 늦은 밤
이었다면 손쓸 사이도 없이 일이 커져 그들에게 당당하게 쫒을수 있는 명분을 줄뻔
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무작정 달려 들어가는 칸을 엄호하고 있을꺼고, 그가 이 남자를 발
견하자마자 바로 베어 버릴것인 분면하기에 에스는 싫지만 상인의 신병을 보호하기
위해 먼저 방안에 침투해 있었다.
"자-자- 이리 오라니깐. 이뻐해 준다잖아."
"자..자..잘못했어요.. 누나..."
"저리가란 말야!!"
"거참, 앙칼진 것들일세. 잘보이면 호의호식하게 만들어 준다니깐."
눈가에 눈물자욱이 가득인 어린 남매의 모습에 눈살을 찌뿌린 에스는 슬슬 움직일
준비를 하려 뒤에 메고있던 검의 손잡이로 손을 돌렸다.
"누---나!!!"
쾅! ! !
발목을 잡아 끄는 행위에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누이의 손을 잡던 소년은 귓청이 떨
어질 만큼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자신또래 소년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검청색의 머리카락과 황금빛의 눈동자.
그리고 유려한 선을 그리는 외모에 자신의 처지도 잊고 정신없이 바라보던 소년은
몸에 가해지는 물컹한 살에 안색을 굳히며 발버둥을 쳤다.
"오오... 이건 왠 또..."
갑작스럽게 등장한 칸의 모습에 침을 삼킨 중년사내는 아래에 깔려있던 소년을 뒤
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따라 입고있던 가운이 벌어져 흉물스런 양물이 들어났지만, 거기에 신경쓸 여
력도 없이 양손을 칸을 향해 벌린채 그는 계속해서 감탄사를 올렸다.
그런 사내의 모습에 입꼬리를 가만히 올리던 칸은 이미 피에 젖어있는 칼을 들어 단
숨에 돌진했다.
카--앙! ! ! !
"히에에엑----! !"
자신을 향해 달려오기에 안을 준비를 하던 사내는 눈앞에 호선을 그리는 은빛의 선
과 귀청이 떨어질 것같은 소리에 꼴사나운 모습으로 뒤로 자빠졌다.
그런 사내에게서 빠져나온 소년은 다짜고짜 검을 들고 달려드는 칸의 모습에 어디
서 나타난건지 날라 들어온 검을 막는 금발의 남자의 모습에 안색을 굳히며 얼굴을
가리고 비명을 올리는 자신의 누니의 벌거벋은 몸을 감싸 안았다.
숨이 막힐것 같은 칸의 살기에 색색거리는 숨을 쉬며 소년은 눈동자를 굴려 도망칠
곳을 살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칸님. 제발 좀 진정하십시오. 아직 그에게서 가흔에 대해 듣지도 못했고, 이런 적진
에서의 살인은 좋지 않아요."
"............그래?"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에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칸은 눈썹을
휘며 그와 마주한 검을 내렸다.
그런 칸의 움직임에 안도의 숨을 쉬던 에스는 그러나, 옆 얼굴을 치고 들어가는 검의
궤적에 눈을 크게 떴다.
"으아아아아아---ㄱ! ! ! ! !"
사라진 자신의 팔이 붙어있던 자리를 붙잡으며 요란한 비명을 올리던 사내는 바닥
에 떨어져 굴러다는 살집이 두둑한 고깃 덩어리에 눈의 뒤집으며 뒤로 넘어졌다.
침대에 부딫혀 다시 바닥에 굴러 떨어지는 덩치의 모습을 바라보던 에스는 눈가에
흘러 내리는 땀을 의식하며 칸에게도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에스의 얼굴을 보며 입가를 조금 올려보인 칸은 검에 묻어있는 피
를 자신의 옷에 닦으며 이를 들어내며 웃었다.
"팔 하나 없다고 사는데 불편하진 않지."
이 자리에 이 순간 자신이 없다면, 다른 팔과 두 다리도 자를 것 같은 그 기세에 에스
는 뽑고 있던 검을 다 잡았다.
바로 눈 앞에서 벌어진 유혈사태와 숨조차 쉴수없는 살기에 벌벌떨고 있던 두 남매
는 묵묵히 검을 닦고 있던 칸이 자신들에게 시선을 주자 몸을 굳히며 뒤로 기어갔다.
그러나 벽에 막혀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던 그들이 구석으로 들어가 공포에 가득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확인한 칸은 입술을 깨물며 빼어든 검을 검집안
으로 집어 넣었다.
살벌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던 칸이 갑자기 검을 거둬 들이자 에스는 당황하며 검을
집어 넣었다.
그런 에스에게 시선을 준 칸은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려 방에서 나갔다.
"그 돼지는 그대로 둬. 집사놈이 이미 다 불었으니깐. 그리고 그 침대위에 두마리는
알아서 해결하고."
"......알았습니다."
이미 집사에게서 정보을 얻었다면 자신의 뒤에 있는 돼지는 분명 죽을 목숨이었다.
그런데도 살려둔 것은 침대위에서 떨고있는 저 가여운 남매 덕분인가.
뻣뻣하게 굳은 뒷목을 주무르며 여전히 떨고있는 두 남매에게 고맙다는 듯이 웃어
보인 에스였지만, 그 미소를 어찌 받아 들였는지 '히엑'이라는 소리를 지르며 더욱
뒤로 물러난다.
"발챠인가. 꽤나 먼 곳이군요."
상인의 저택은 꽤나 호화로웠다.
단지 여기저기에 남아있는 혈흔이나 시체들의 무리가 꽤나 눈에 거슬리긴 했지만
말이다. 굳이 장소를 이동하지 않고 상인의 저택 거실에 모인 무리들은 집사에게서
얻은 정보에 맞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런 저런 계획과 생각들을 들으며 가장 좋은 방법을 고르고 있던 노웬은 보통 이런
일이 생겼을 경우, 그냥 그 인물을 버리고 떠났던 자신들의 떠올리곤 쓴웃음을 지었
다.
확실히 가흔 그가 특별하고 다른 이들의 맘에 들었다고 하나 자신마저 이렇게 행동
하다니.. 묘한 느낌이 든다.
"앞으로 10일후에 발챠 노예시장이 섭니다. 가흔은 아마 그것 때문에 납치를 당한것
같군요."
"고작 그런 이유로 녀석은 납치한 거야? 저놈의 자식들, 다 잡아 족쳐야 겠구만."
"샤한."
검에 묻은 피를 털며 말하는 붉은 머리 샤한의 옆구리를 친 라프헨은 여전히 저기압
인 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런 라프헨의 모습에 입을 내민 샤한이지만, 라헨과 눈이
마주치자 식은땀을 흘리며 시선을 피했다.
정말이지. 피곤한 놈들.
분명 칸이 난리를 펴댈것이라고 확신한 노웬은 샤한을 데리고 와서 남은 떨거지를
치우도록 했다. 원채 검을 다루는데 능숙하고 살인에 대한 죄책감이란게 아예 없는
인간이라 일을 처리할 때는 상당히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럼 날이 밝는데로 나와 몇몇이 먼저 발챠에 가도록 한다."
"그게 좋겠군요. 저도 가겠습니다."
지금 당장 떠나자고 말할 줄 알았던 칸이 그답지 않게 침착하게 말하자 에스는 화색
을 띠며 입을 열었다. 그런 에스와 맞춰서 라프헨과 라헨도 함께 간다고 했지만, 노
웬의 만류로 라프헨은 남아 있기로 했다.
갔다가 오히려 또다시 납치를 당해 가흔과 나란히 시장에 상품으로 내놓아질 가능
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한번의 전적이 있기도 했고..
"칸님. 에스, 그리고 샤한이 가도록 하죠. 라헨은 라프헨의 곁에 있도록 하십시오. 전
력이 다 그 쪽으로 가는건 바람직한 일이 아니죠."
"어쩔수 없군, 에스 칸을 부탁한다. 샤한, 너무 날뛰지 말아라."
노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라헨은 에스와 샤한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전혀 어감이 다른 말에 샤한의 미간이 꿈틀했지만, 애초에 상대가 되지않는 상대이
기도 하니 그는 그냥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그의 말을 무시했다.
"그러면 칸님이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움직이죠. 방향은 차후 젤
을 통해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봐."
" ? "
마무리를 하려던 노웬은 자신을 부르는 어린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시야에 들어
오는 얼굴에 미간을 접었다.
일이 너무 급박하게 진행되어서 유크렌시아 그에대해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낭패한 기색이 역력한 노웬의 얼굴을 즐거운 듯이 바라보던 유크렌은 이를 들어내
며 입을 열었다.
"나도 가흔이라는 녀석을 구하러 간다."
당당하게 주먹을 들어 가슴을 대고 말하는 유크렌이지만, 7살의 꼬마가 그런 폼을
잡아 봤자 귀엽기만 할뿐이다. 용의 정체를 모르는 샤한은 그런 용의 모습이 기가 막
혀 주먹을 들어 머리를 내리쳤다.
따-악.
경쾌한 소리가 거실에 울리고 용은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꼬마놈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샤한."
" ? 왜 그래? 왜 그런 표정을 짓는거야? 누구 애라도 되는 거냐?"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칸을 제외한 사람들은 다양한 표정을 지
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로써 저 용은 확실히 칸 일행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