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별채쪽에 있는 정원에서 엄청나게 강한 빛이 터졌다가 사라졌다.
그에 따라 느껴지는 수많은 기척에 안색을 달리한 칸은 파티를 숨기위해 자리하고
있던 난간을 잡고 아래로 뛰어 내렸다.
벼락같이 뛰어가는 뒤로 라헨과 에스가 뭔가를 눈치를 채고 밖으로 뛰어 나왔다.
그럴리가 없겠지만, 그쪽 방향은 가흔의 방이 있는 곳이다 보니 뭔가 불길한 생각이
든다. 다른 세계에서 온 그에게 적이 있을거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자신들을 위협하
기 위해 납치를 당했다 하면 할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파삭-
탁!!
제일 먼저 빛이 났던 곳에 도착한 칸은 적어도 수명의 될법한 사람들의 발자욱에 안
색을 굳혔다. 중간까진 없지만, 역시나 빛이 터질때 기가 흩틀어 졌던 모양인지 부
분부분 자욱이 눈에 띈다.
아직 애송이 같은 점에 안심을 하던 그이지만 창가 아래에 떨어져 있던 가운을 발견
하고는 나오려는 소리를 죽으며 그쪽으로 뛰어갔다.
펄럭.
".....이건..."
바람에 날리는 가운의 분명 오늘 자신이 그에게 가져다 주라고 시킨 것이었다.
최상의 재질로 짜여진 것이라 에즈도 관상용으로 두었던 것을 어거지로 빼앗아 그
에게 보낸 것이었는데... 그런 그게 이곳에 있다니.
상상하기 싫은 최악의 방향으로 굴러가는 머리를 진정시킬수도 없어 칸은 막 다가
온 라헨과 에스를 망연자실하게 바라 보았다.
어제 저녁엔 바쁜 노웬을 에즈가 억지로 데리고와 오랜만에 가흔이 아는 모두가 모
여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폭탄인 칸도 그다지 불만을 표하지 않고 에즈가 자랑하던
집안의 요리사가 막 구운 비스켓을 무척이나 즐거운 듯이 먹었던 것이다.
그때 젤이 노웬의 앞에 달콤한 향이 나는 동그란 떡같은 것들이 가져다 주었고, 노
웬만 맛있는 걸 먹는다며 하나 뺏어먹던 칸은 그것을 한개 입안에 넣고선 그대로 뒤
로 넘어졌다.
왜 그러나하고 칸을 바라보는 가흔에게 먹어보라는 듯이 접시를 내미는 노웬의 호
의를 무시 할수 없어 하나 집어먹은 가흔은 순간 입안에 들어있는 것을 뱉어 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왜 그러냐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집어 먹는 노웬의
모습을 보며 억지로 목구멍 속으로 넘길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남쪽에서만 나는 특이 열매로 성인의 주먹마디 하나만한 그것엔
엄청난 신맛이 들어있어, 그것 하나로도 100개의 음식의 간을 맞출수 있다고 한다.
그런것을 위에 2미리정도의 꿀을 덮어다고 하나 그 맛이 사라지겠는가?
그런 괴상한 것을 무척이나 즐거운 듯이 먹는 노웬과 달리 칸과 가흔은 느글거리는
속을 달래기 위해 엄청난 양의 물을 마셔야 했다.
괴로워 하는 자신을 보고 즐거워 하는 주위 사람들의 모습에 또다시 난동을 부리려
는 칸에게 술을 제안한 에스 덕에 그날밤은 칸의 발작을 보지 않고, 모두가 즐겁게
지낼수 있었다.
그리고 미성년자인 가흔이 두번째로 술을 경험한 의미깊은 날이기도 했다.
툭.
"............"
얼굴에 떨어지는 차가운 감각에 가흔은 눈을 떴다.
온통 캄캄한 광경에 눈을 감았다 다시 뜬 그는 최근 이런 식으로 일어나는 일이 자
주있군이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평안한 상태였다.
분명 이상한 남자들에게 둘러 쌓이고 기절한 것까지 뚜력하게 기억하기에 눈을 뜨
면 묶여있거나 어디 구석 골방에 쓰러져 있는 건 아닌가하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몸을 뒤척이며 아직 몽롱한 기운에서 벗어나려던 그는 무심결에 건드린 목에서 아
무것도 느껴지지 않자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찰캉.
없었다.
인어의 목걸이가.
게다가 다리에 있는 이 투명하고 얇은 줄은 무엇이란 말인가?
편안한 상태에 아무런 제재가 없는 줄 알았더니, 다리는 묶여있고 목걸이는 사라져
버린 상태. 아까까지의 여유로움이 단번에 사라지는 느낌에 가흔은 안색을 굳혔다.
목걸이가 없으니 어떻게 의사소통을 할것인가.
검술 연습을 하면서 라프헨에게 말을 배우기는 했지만, 거의 기본적인 것들 뿐으로
목걸이의 도움으로 단어 수용이 아무리 빠르게 되다지만 당장의 의사소통은 무리
다.
목을 감싸쥐고 있던 손을 풀어 다리를 구속하고 있는 줄에 손을 댄 가흔은 파직하고
오르는 전정기에 반사적으로 손을 떼었다.
"뭐야.. 이건.."
손바닥을 펴보니 줄자욱이 붉게 남아있다.
건드리기만 하면 전기가 오르는 건가 보다. 이런 악질적인 것으로 사람을 묶다니..
당장에 어찌할 방도가 없어 가만히 앉아있던 그는 줄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중 자신
이 넓지만 창살안에 같혀있다는 것과 줄은 창살 가운데에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
아냈다.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난 그는 줄과 창살이 이어진 부분을 살펴 보았다.
"이건 뭐지?"
줄과 이어진 창살 주위에 보이는 검은 빛의 원에 궁금증이 일어난 가흔은 아까 전기
가 오른것도 잊고 손가락으로 그것을 건드려 보았다.
가흔의 손과 부딫히 순간 검고 작은 원인 '피식'소리를 내며 사라졌고, 그에 맞추어
그의 다리를 묶고 있던 투명한 줄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차캉.
"......어라?"
덤으로 창살까지 벌어지는 광경에 그 답지 않게 어벙한 소리를 낸 가흔은 과연 이것
이 나가도 괜찮은 건지 아니면 함정인건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누구냐?"
"나야. 아까 데려온 녀석이 정신을 차렸는가 확인하고 오라고 하셔서 말야."
"흐음. 아까 볼때는 잘 자고 있던것 같은데 말야."
철컹.
"들어가 보게. 허튼 짓은 하지말고 말야."
"걱정 말라고."
동료의 충고에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은 웃음을 지은 남자는 손을 흔들어 보이며 계
단을 내려갔다.
어젯밤에 사냥꾼들이 데리고 온 소년의 모습을 떠올리자 절로 흐믓한 미소가 지어
진다. 흐르는 침을 손등으로 닦은 사내는 마지막 계단을 밟고 열쇠를 꺼내 쇠문을
열었다.
끼--익
음산하게 울리는 소리가 오늘따라 정겹게 느껴진다.
지금까지 봐왔던 그 어느 것보다도 아름다웠던 모습을 떠올리며 조그만 만져주자고
생각하던 사내는 순간 눈앞을 차지하는 별의 무리에 여기가 지하가 아니였던가하는
생각을 한다.
털썩.
"윽..!!"
소리가 나지 않게 한다고 밑에서 받치기는 했지만, 엄청 무거운 체중과 끈덕진 피부
덤으로 지독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자 가흔은 이대로 남자를 집어 던지고 싶었다.
겨우 참으며 구석에 남자를 앉힌 가흔은 만지기가 싫어지는 옷에 손을 넣어 다양한
열쇠와 칼을 입수햇다.
털이 덕지덕지 나있는 지저분한 외모와 걸맞게 남자의 검은 다듬어 지지 않아 이대
로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낳을 거라는 결론을 내린 가흔은 아직 열려져 있던 문 사이로
몸을 집어 넣고 위로 이어진 계단을 바라보았다.
".........."
위에서 아래의 일을 눈치챈 것 같지는 않지만, 아까 들린 말소리로 보아 밖에 한사
람이 더 서있는 것 같다.
최대한 소리를 죽여 계단 끝까지 오른 가흔은 문에 기대 손으로 표면을 두들였다.
퉁퉁.
끼-익.
"뭐야? 잊고 간게 있는 건가?"
방금 남자가 들어갔기에 별 의심없이 문을 열었던 사내는 열려진 사이로 검은 눈동
자가 떠오르자 숨을 삼켰다.
뭐라고 입을 열려는 사내의 턱을 냅다 후려친 가흔은 그대로 문을 밀어 남자가 붙딫
혀 뒤로 물러나게 했다.
퍽!!!!
뒷통수를 검집으로 내려치고 천천히 사내의 몸이 쓰러지자 들고 있던 검은 옆에 둔
다음 쓰러진 몸을 들어 열려진 문 사이로 집어 넣었다.
내리막길 계단에 기이한 자세로 누워있는 사내를 힐끔 쳐다보고 문을 닫은 가흔은
아까 입수했던 열쇠로 문을 잠갔다. 밖에 누군가가 쓰러져 있어 바로 소리를 지르게
하는 것보단 몸을 숨겨 찾게 하는 것이 시간적 여유가 더 있다.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사람을 그렇게 대접하는 곳 치곤 좋은 데란 없다.
목걸이가 없으니 말도 안 통하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단 혼자만 있다.
최악중에 최악의 상황이지만, 애써 기합을 넣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분명, 칸이나 에스가 자신을 찾아 줄 것이다.
바삭.
아직 어둡긴 하지만, 조만간 해가 뜬다.
산 넘어로 비치는 희미한 빛무리를 바라보며 시간을 재던 칸은 뒤에 있던 무리들에
게 수신호를 하며 장소를 이동했다.
노웬이 건내준 팔찌는 분명 눈앞의 건물을 가르키고 있었다.
만약에 상대가 발을 잡히는 상황에 와서 가흔에게 해를 입히고 발뺌을 한다면 그 어
떠한 이유를 불문하고 다 쓸어 버리겠다는 생각을 하며 칸은 조용히 이를 갈았다.
파삭.
맞은 편에 있던 라헨이 천천히 손을 들어 두개를 가르키고 앞으로 하나를 세운다.
선방으로 먼저 가겠다는 신호에 망설이던 칸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뒤에서 신호
만을 기다리는 녀석들에게 조금만 기다리라는 뜻으로 손바닥을 안쪽을 내 보였다.
라헨과 에스를 선두로 앞서가는 녀석들을 바라보며 칸은 눈앞에 서있는 거대한 건
물을 노려 보았다.
언젠가는 만날일이지만, 이런식으로 갑작스럽게 조우하게 될 줄은 몰랐다.
상인 비잔힐 가와는.
"겁없는 것들."
가주도 아닌 반 세력들이 공공연하게 자신들을 비방하는 것에 모잘라 인질까지 잡
아가는 행태가 괘씸하기만 한 그였다.
퍽!!
어둠속으로만 다닌다곤 하지만 아주 사람을 만나지 않을수는 없다.
어두운 건물까지는 다들 칙칙한 사내들만 기절시켰던 칸은 자신의 팔안에 무너져
있는 어린 소녀의 얼굴에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처음있던 곳은 버려진 저택같은 음습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에 걸맞게 인상
더러운 남자들 밖에 없었건만, 아까 높은 곳에서 확인한 결과 이곳을 지나쳐야 했기
에 들어왔는데 다들 나이 어린 시녀들이나 여자들 밖에 없다.
건물을 경계로 마치 다른 곳에 들어온 것같은 느낌에 잘못 온건가하고 생각해 보기
도 했지만, 방향은 확실했기에 안고있던 소녀는 빈방에 눕히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런 곳에 있는 곳보단 차라리 밖에 나가는 것이 더 나을거라는 생각에 무작정 가고
는 있지만, 나가서 도대체 누구에게 뭐라고 물어 볼것인가?
특이하다고 동물원에 팔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
복잡하기만 한 머리속은 정리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1층의 창가로 다가간 가흔은 창문을 열고 잽싸게 밖으로 나갔다.
소리없이 바닥에 착지한후 재빠르게 닫을수 있는 자신도 모르는 재능에 감탄하고
싶지만, 그리 맘편하게 있을수만도 없는 노릇. 주위를 살피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가흔은 나무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려 했다.
허공에서 꽃잎이 떨어지기 전까진...
" ........? "
난대없이 머리위에서 떨어지는 빨간 꽃잎에 움직임을 멈춘 그는 저도 모르게 어깨
위에 올려진 꽃잎을 집고 머리 위를 올려다 보았다.
"[뭐지...?]"
새하얀 팔이 여러송이 장미꽃을 들고 천천히 뭉겐다.
그에 따라 더 많은 꽃잎들이 가흔에게 떨어졌지만, 그는 그것을 피할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창가에 앉아있는 모습을 올려다 보았다.
노웬보다는 못하지만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은발을 늘어뜨린 소년은 그런 가흔의 모
습을 바라보곤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칸?
그 웃는 얼굴에서 익히 알고있는 자의 모습을 발견한 가흔은 아연실색했다.
이런 곳에 저런 모습의 칸이 있을리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 모습은...
"움직이지 마라."
" ?! "
어느새 나타난 건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남자들의 모습에 가흔은 입술을 깨물며
뒤로 물러 났다. 다 잡은 생쥐라고 생각했는지 여유롭기만 남자들 사이로 이미 쓰러
뜨리고 온 남자 몇몇몇도 눈에 들어온다.
차라리 그때 죽기 직전의 강도로 후려 갈길것을..!!
이미 해도 늦을 후회를 하며, 다시 위를 올려다 보았지만 아까 칸을 닮았던 자는 이
미 사라지고 몇개의 꽃잎만이 허공을 천천히 부유하고 있었다.
난처한 안색을 보이고 있는 가흔의 몸을 사내들은 핣듯이 바라 보았다.
칸에게 날벼락 아닌 날벼락을 맞아 뼈가 부러져 하의는 제대로 입고 있지만, 위는
붕대를 감은 것이 전부인 가흔은 자신의 차림이 남자들에게 어떤 느낌을 불러 일으
키는 지 알지 못했다.
희귀한 정도가 아닌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검은 머리에 드러난 투명한 피부가 어두운
밤에 더 매력적으로 비춰진다.
목이 칼칼 해지을 느끼며 사내들은 애써 턱을 올리며 허세를 부렸다.
"당장에 이리로 와라!! 건장진 행동을 한 댓가를 받아야지!!"
웃기고 있네.
말은 못 알아듣겠지만, 그 의미만은 알수 있겠다.
보나마나 얌전히 있어라, 아니면 이리로 오라는 말이겠지.
실제로 손을 들어 오라는 듯이 까닥거리는 사내의 손을 바라보던 가흔은 까슬한 흙
이 느껴지는 바닥을 맨발로 문대며 타이밍을 쟀다.
휘-잉.
마침 바람이 불어 들고 있던 햇불이 흔들리자 사내들의 시선이 곧장 그리로 향한다.
그 순간 숲을 등뒤로 두고 서있는 사내에게 달려 들어간 가흔은 그의 얼굴을 들고있
던 검으로 후려 갈겼다. 소리 한번 제대로 내지 못하고 쓰러지는 남자와 그 뒤에 서
서 눈만 크게 뜨고 있는 남자의 급소를 발로 찬다음 구부러진 등을 팔꿈치로 찍은
가흔은 단숨에 뚤린 길로 냅다 뛰었다.
거리가 좁았기에 금방 숲으로 들어가게 된 가흔은 뒤에서 소리를 지르며 쫒아오는
남자들에게 혀를 내밀어 보이며 뛰어가는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제--길!!! 잡아!!!!"
갑자기 기습을 당해 어이없이 두명이 쓰러진 남자들 쪽은 열을 올리며 가흔의 뒤를
쫒았다. 예쁘다하고 봐줬더니 안되겠다.
잡으면 온몸을 밧줄로 묶은 다음 실컷 두들겨 줄테다..!!
금방 잡을 거라는 사내들의 바램과는 다르게 가흔은 여기저기 잘도 빠져 나갔다.
헉헉대며 쫒아오는 남자들이 지치기는 했지만, 수가 줄어들지 않는 것을 보고 가흔
을 그들이 꽤나 근성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금방 떼내고 문쪽으로 가서 이곳을 빠져 나간다는 계획을 다시 짜야할지도 모르겠
다.
"[..이런!!]"
도는 코너인줄 알고 들어섰던 가흔은 그러나 그곳이 막다른 곳이라는 것을 알고는
낭패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런 가흔의 모습에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은 남자들은 저마다의 무기를 자랑하며
가흔에게로 한걸음씩 접근했다. 점점 좁혀지는 거리에 위기감을 느껴면서도 저것들
에 한대씩만 맞아도 병원신세는 거뜬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외로 자신은 위기의 순간에 침착해지는 타입인 모양이다.
"자--아. 지금까지 건방지게 군 댓가를 모두 치르게 해주지."
"[한 사람을 여럿이서 괴롭히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저녀석?"
가흔의 말을 전혀 알아 듣지 못하는 남자들 사이로 작은 동요가 일어났다.
남쪽은 원래 미신이 많이 존재하기에 알수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가흔이 혹 요괴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예쁘장하긴 하지만, 묘하게 생긴 외모도 그렇고 작은 체구에 비해 강한
힘같은 것도 수상하기 이를대가 없다. 점점 미심쩍은 표정을 지은 남자들은 저마다
의 얼굴을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검집에서 칼을 빼앗아 들었다.
아닐수도 있지만 저 소년이 정말로 요괴라면 큰일이 아닌가?
일단 화근은 처리하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도 좋다.
"...[뭐야?]"
저마다 칼을 뽑아들고 살기를 흘리는 남자들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가흔은 식은땀을
흘렸다. 아까와는 확연히 달라진 공기가 피부를 따갑게 자극하고 있다.
턱옆으로 흐르는 땀을 닦아낸 가흔은 한발씩 앞으로 다가오는 남자들을 피해 뒷걸
음질을 쳤지만, 이내 벽에 부딫혀 더이상 뒤로 물러 날수가 없었다.
"피하는게 더 수상하군. 주인님의 말씀이 있긴하지만... 역시 지금 처리해야 겠어."
"....[농담이지?]"
숫제 칼을 들고 금방이라도 휘두를것 같은 기세에 헛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아침부터 얻어 맞더니, 납치에 지금은 죽을지도 모른다.
농담이면 도가 지나치다.
부-웅!!
가흔의 바램을 비웃듯이 크게 휘둘려지는 검을 보곤 반사적으로 들고있던 검을 빼
앗아 들었다.
"피냄새가 나는군."
"네?"
사내의 위에 나른하게 누워있던 소년은 남자의 난대없는 말에 가슴에 기대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오목조목한 얼굴에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콧잔등의 주근깨가 밤
눈에도 꽤나 매력적이었다.
소년을 옆으로 밀쳐낸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수건으로 몸을 닦기 시작했다.
그런 남자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소년은 장난치듯 침대위를 몇번 구르다가 이
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가 옷입는 것을 도왔다.
벨트를 들어 채워지는 몸짓을 가만히 바라보던 사내는 다시 안겨오는 몸을 가만히
밀쳐내며 침대가에 세워두었던 검을 집어 들었다.
"갑자기 검은 왜요? 아직 새벽이란 말예요."
"너보고 일어나라고 한적은 없다."
"헤-에 너무하네. 갑자기 불러서 스케줄 다~ 취소하고 달려온 나인데."
투정 부리는 듯한 목소리에 순간 미간을 찌뿌리던 사내지만, 계속해서 붙어오는 몸
을 밀쳐내고 미련없이 침실에서 나왔다.
전에 시녀를 물러 두어서 넓은 복도는 적막하기 그지 없었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것
은 검명이었다.
작지만 분명히 들려오는 다수끼리 붙딫히는 검소리에 귀가 멍멍할 지경이다.
"....역시나 온거겠지. 에스라한."
중얼거리는 음성은 무척이나 아련하게 복도를 울렸다.
"제--길!!"
후문으로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덤벼드는 용병들의 모습에 에스
는 미간을 찌뿌렸다.
검을 마주한 자를 발로 밀어 떨어뜨리고 그대로 베어버린 그는 멀리 다른 자와 검을
마주하고 있는 라헨에게 시선을 주다 그대로 몸을 돌려 건물안으로 들어섰다.
노웬이 건낸 팔찌의 이명은 분명 건물안에서 울리고 있었다.
워낙의 고가인 인어의 인물은 도난물 1호이기에 그에 따른 방어장치도 철저히 해두
었다. 적들이 그것을 알고 가흔과 목걸이를 따로 두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우선적으
로 확률이 높은 곳부터 쳐들어온 것이다.
그 장소가 비잔힐였다는 것을 알곤 꽤나 망설였지만, 어차피 이런식으로 한번은 부
딫혀야 할 상대이기도 했기에 시일을 앞당긴다는 마음으로 일을 추진했다.
"서라!!"
"그말하기 전에 검부터 휘둘려야지!!!"
퍼억!!!
검을 올리고 달려오는 상대의 목을 그대로 뚫은 에스는 시체를 옆으로 치워내며 두
계단씩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올라가도 끝이없는 계단은 그랄 질리게 하
기에 충분했지만,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겼다.
지역끼리 명사였던 에스가와 비잔힐가는 어릴적으로 친분이 있기에 몇번 온적이 있
다. 어릴적의 기억을 살려 목걸이의 반응이 오는 곳으로 뛰어가던 에스는 그러나 올
라가는 장소가 그녀석과의 안좋은 기억이 있던 곳임을 깨닭곤 걸음을 멈추었다.
"....이런.."
처음 노웬의 일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고 했을 때부터 그 녀석의 얼굴을 떠올랐
다. 이 집안에서 만난 녀석이기는 하지만 관계자가 아닌데도 갑자기 떠오른 것은 놈
의 비열함과 집요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기 때문이리라.
처음에 그것을 잘 알고 있지 못했다가 호된 일을 당한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쓰린 기억이 떠오르자 에스 그 답지 않게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검을 바로 잡았다.
만약에 이번 일도 네 녀석이 뒤에서 손을 쓴거면 반드시 가만 안두겠다.
검을 든 채로 목걸이의 반응이 나타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에스는 복도 가운데
검은 실루엣을 그리먀 서있는 남자를 발견하곤 걸음을 멈추었다.
긴 청발과 장신의 세련된 분위를 온몸으로 풍기는 남자는 모습을 나타낸 에스의 모
습을 발견하고 외모답지 않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에스라한."
"............역시나. 인가?"
허탈한 듯한 표정을 짓는 에스의 모습에 사내는 입가를 들어 보였다.
더할나위 없이 다정한 그 얼굴은 아까 침대위의 소년을 향하던 것과 천지차이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아도 에스의 냉담한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을거다.
"도대체가 끈질기가 소심줄보다 더 하군요."
"내 장점이라고 전에도 말했을 텐데?"
"장점인 겁니까?"
예상하고 있었지만, 너무나도 의외의 장소의 만남에 에스는 그에게 덤빌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때는 가흔에대한 것도 잊을 정도였다.
머리속에 남아있는 기억보다 좀더 길어진 청색의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남자는 보라
색의 눈동자를 들어 무장하고 있는채의 에스의 몸을 핣아 보았다.
말 그대로 핣아 본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 같은 시선에 에스는 뒤로 걸음을 옮
겼다.
"오랜만에 만난 사인데 차나 마실까?"
"죄송하지만 정중히 사양합니다. 저로썬...."
팔장을 끼고 있지만 옆구리에 달린 검은 분명 그가 자랑하는 애검.
과시용으로 검을 들고올 남자가 아니니 분명 검을 뽑아 덤비겠지.
그 전에 선수를 치는 것이 좋을거라는 판단에 에스는 청발의 남자 카인을 경계하며
검을 들었다.
"지금 당장 가흔군을 돌려 주셨으면 합니다."
"아- 흑발의 소년을 말하는 건가? 정말 희귀한 종이었다."
사람을 사람취급하지 않는 말투에 울컥하고 화가 치밀었지만, 여기선 흥분하는 쪽
이 진다는 것을 알기에 에스는 애써 화를 참았다. 얼굴을 붉히지만 쓸데없는 감정소
모를 하지 않는 점이 역시 그답다며 카인은 만족의 미소를 띄었다.
자신의 보는 눈을 틀림없었다.
예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는 에스라한의 모습을 보며 입술을 혀로 핣은 그는 옆구리
매달려 있던 검집에서 검을 빼들었다.
어두운 가운데서 빛나는 검날이 그가 얼마나 검을 잘 갈아 두었나를 알게 해 주었다.
"눈앞에 있는 고기를 놓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지.
전심전력으로 갈테니 조심하길."
"고양이 쥐생각 하는군요. 눈물이 나려 합니다."
"그전에 투항을 해 주신다면 쓸데없는 체력소모 없이 양쪽다 좋을텐데 말이지."
"헛소리...! !"
탁! !
길게 말하지 않고 대화를 끊은 에스는 카일을 향해 달려 들었다.
찌르기가 특기인 남자이니 검을 휘둘러서 틈을 줘서는 안된다!!
보랏빛의 눈동자를 빛내며 덤벼드는 자신을 향해 육박해 오는 남자를 바라보니 새
삼 옛날 일들이 떠오른다.
대단한 가문의 차남이다 보니 어릴적부터 별에 별 사람들을 다 만나고 다녔다.
이 비잔힐도 그런 이유로 억지로 끌려 왔는데, 이곳에서 에딘카일이라는 눈앞의 사
내를 만나게 되었다. 이렇게 능글맞는 녀석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어울리지 않
았을 것이나, 넓은 저택에서 연상이라고는 하지만 어린아이를 찾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였으므로 급속도로 친하져 같이 지내는 일들이 잦았다.
어릴적에 나쁜길로 빠지지 않았던 것으로 이 남자의 도움이 컸지만, 끝이 안 좋았기
에 옛날의 친우는 현재의 악우로 변한 케이스로 남아 버렸다.
집요하게 좇아 다니는 것으로 모잘라 만나는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다 결국 가장 비
겁한 방법으로 자신을 욕보였다.
말썽을 부리지만 꾸중을 들어도 웃기만 할뿐 화를 잘 내지 않기로 유명한 자신이 그
때만큼은 집안이 뒤집어 질 정도로 크게 화를 냈다.
오죽하면 엄하기로 유명한 조부가 와서 온갖 선물을 주며 새파랗게 어린 손자의 비
위를 맞춰 주었겠는가.
챙! !
"검을 겨루고 있는 와중에 딴 생각을 할 정도로 내 실력이 형편 없던가?"
"흥!!"
마주하고 있던 검을 뒤로 물리고 순간 방향의 바꿔 카일의 옆구리를 노렸지만 너무
나 쉽게 막힌다.
재력가의 가문에서 검술보다 책을 더 가가이 했던 에스가 카일을 이길 가능성은 희
박했지만, 가만히 지고 있을수는 없는 노릇. 눈앞의 남자가 순순히 가흔의 신병을
넘겨줄리가 없으니 자신이 붙잡고 있는 동안에 다른 이가 찾아 주기를 바라는 수밖
에 없다.
그런 에스의 생각을 눈치 챈 것인지 카일의 눈이 가늘게 접힌다.
안 그래도 감옥에서 빠져나와 꽤나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모양인 가흔이라는 소
년은 만약의 경우 그대로 죽이라는 명령이 내렸으니 에스가 이대로 돌아가더라도
그 소년을 만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
카일은 에스가 다른 자에게 시선을 주는 것만은 절대로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런 면을 에스가 싫어하는 것이지만, 아는지 모르는지 카일은 그런 자신의 마음을
변함없이 유지하며 살아가 에스를 귀찮게 했다.
챙!!!
얼굴위로 내려온 검을 여유롭게 비켜낸 카일은 문득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다가오
는 에스의 검을 받아 그대로 회전 했다.
"읔?!!"
카일의 검과 그의 왼팔에 달려있는 보호대에 막혀 빠지지 않는 검날에 에스는 낭패
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만 먹으면 자신쯤은 쉽게 쓰러뜨릴수 있는 남자가 한동안 잘 상대해 주더니 마
음이 바꾸었는지 단숨에 자신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왜 그러는지 이유는 알수없지
만, 지금으로썬 당분간 자신과 검을 겨루게 만들어야 한다.
"그립군. 이 곳은 우리가 처음 사랑을 나눈 장소이지 않나?"
" ? ! ! "
"아름다웠지. 그때의 너는. 그후로 난 네 모습을 떠올리지 않으면 절정에 이를수가
없었어."
"이런.... 질나쁜 녀석...!!"
카일의 말의 더 들었다간 귀가 썩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런말을 얼굴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히 지껄일수가 있는 것인지.
얼굴을 붉힌 에스는 이를 갈며 있는 힘을 다해 카일에게 잡혀있는 검을 빼내었다.
순순히 검을 내어준 카일은 뒤로 몇걸음 물러나며 들고있던 검을 검집에 집어 넣었
다.
그 행동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에스를 바라보며 카일은 입을 열었다.
"비잔힐과 거래를 이어가고 싶은 모양이지만, 이미 늦었다는 걸 알려 주겠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겁니까?"
경계의 눈빛을 지우지 않고 이를 가는 에스의 모습에 잠시 침통한 표정을 짓던 그이
지만 금새 원래 얼굴로 돌아와 태연하게 폭탄을 던졌다.
"이미 비잔힐 가는 황제 직속 무역거래상으로 소속되었으니까."
"뭐...? 그런 말도 안되는...!! 하야신그렐가는 어쩌고..!!"
"알게 뭐야. 그런 가문따위, 어차피 처리해야 할 곳이었다. 너무 커버렸거든."
태연하게 말하는 카일에 비해 에스의 얼굴을 죽은자의 그것처럼 창백하게 변했다.
황제 직속이 된다고 지금까지의 무역노선이 변하지는 않겠지만, 황제의 명이 있다
면 언제든지 거래자를 바꾸거나 새로 만들수도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반 황제파인 자신들과 거래를 할리가 없잖은가.
게다가 전에 황제 직속 상인가문인 하야신그렐은 이미 몇명의 여왕을 배출해낸. 그
뿌리가 상인이라지만 명실상부한 대 권력을 지닌 가문. 그런 곳과의 거래를 끊어 화
근을 만들게 되는 일을 자초해서까지 비잔힐을 선택한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인 것
인가.
흔들리는 에스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카일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며 냉담하게 말했
다.
"그대들의 오만은 지나치게 길었다. 슬슬 끝낼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하시는 거겠
지."
"오만은 당신들이 부리는 것이 아닙니까? 천하의 배덕자들이..! !"
"흐음. 아직도 과거의 일에 그토록 집착하니 될일도 안되는 거야."
이를 갈며 에스는 이번엔 반드시 눈앞의 저 사내를 벨거라는 결심을 하며 검을 다잡
았다.
흥분하는 에스를 느낀 것인지 카일의 얼굴에 즐거운 듯한 기색이 점점 진해진다.
화를 내지 않기로 유명한 저 에스를 좀더 흥분시키고 페이스를 깨뜨릴만한 것이 어
디 없을까?
문득 스치듯 지나가는 얼굴에 카일은 이를 들어 내며 웃었다.
그래, 이것이라면 에스 말고도 이곳에 있는 모든 놈들을 놀라게 할만하지.
"황제폐하가 이곳에 납시어 계신다."
챙강.
".............뭐?"
"이런, 너무 효과가 좋아 즐거운데?"
눈을 가늘게 접어 소리내 웃을 것 같은 기세인 카일을 망연지실하게 바라보던 에스
는 방금 들은 말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런 그의 바램을 완전히 부숴뜨리고 싶다는 듯이 남자는 지체하지 않고 그
가 절대 듣고 싶어하지 않던 말을 내뱉었다.
"황제가 납시어 계신다. 바로 이곳에."
"..........."
"아- 그렇군. 이곳엔 지금 칸크빌레도 와 있었군.
둘이 조우하게 된다면 필시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길거야."
카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돌린 에스는 자신이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 가기 시
작했다. 이성을 잃고 뛰쳐나가는 에스의 뒷모습을 잡지않고 바라보기만 하던 카일
은 안쪽에 손을 넣어 금화가 잔뜩 든 주머니를 뒤로 던졌다.
묵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카일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즐거웠다."
짧은 그 말에 이별을 예감했지만 기둥 뒤에 숨어있던 소년은 구걸을 하며 매달리거
나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안을 때마다 자신을 아닌 다른이의 이름과 모습을 찾던 저 사내의 진짜 마음은 지긋
지긋할 정도로 잘 알고 있으니..... 하지만 외모도 귀엽고 실력도 좋은 자신을 대타
를 사용하고 이렇게 비참한 방법으로 떼어 내다니.
언젠가 후회할 거라고, 나중에 매달려도 절대 받아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소
년은 어두운 기둥에서 나와 떨어진 돈 주머니를 들었다.
"...쳇, 어딘가에 피해 있어야 겠군."
에스의 외모와 많이 똑같은 얼굴을 찡그린 소년은 붉어지려는 코를 문지르며 몸을
돌렸다. 밖에서 들리는 검소리는 점점 커지고 가깝게 들리고 있었다.
이런 곳에 같잖은 의리만으로 남아있기엔 목숨이란 너무 소중한 것이다.
달려가는 두 다리에 힘을 주며 익히 알고있는 비밀문 쪽으로 뛰어갔다.
챙!!!
"어딘에 있는 거냐?!!"
몇명을 베었는지 알수가 없다.
얼굴에 흥건히 묻어있는 핏물을 손등으로 닦으려 하지만 이미 수번의 피를 흡수한
천은 칸의 얼굴에 새로운 피자욱을 그릴뿐이었다.
야차같이 베어대는 칸에게 쉽게 덤비는 자들은 없었지만, 뒤로 물러나거나 도망가
는 자들은 없었다. 어차피 여기서 죽으나 도망가 죽으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입안에 들어간 핏물을 뱉으며 검을 휘둘러 묻어있는 피와 살점을 흩어내려 했지만,
쉽지가 않다.
요새들어 가장 사람을 많이 죽이는 날으로 기록해야 겠다며, 칸은 자신을 둘러싼 놈
들의 노려 보았다. 어둠속에서 반짝이는 황금빛 눈동자는 그 모습에 소년일지라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오히려 어린 소년이 어른을 몇이나 죽여대는 모습이 더 귀기스러워 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비키지 않는다면 혼자서라도 뚫고 가겠다...!!"
이를 갈며 검을 잡은 칸은 튕겨 나가듯이 앞으로 달려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있는
사내의 목을 단번에 내리쳤다.
촤아악--
비릿한 혈향과 몸을 뒤덮는 반갑지 않는 끈기와 뜨거움에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흔, 정말이지 넌 사람을 고생시키는 놈이다.
공포에 몸을 굳히고 있던 자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서있는 칸의 모습에 요란하게 소
리를 울리며 검을 들고 덤벼든다. 그런 사내들의 무모함을 비웃듯이 내리고 있던 검
을 들어 남자들의 몸을 베어낸 가흔은 이를 들어내며 웃었다.
어차피 나중에 다른 곳에서 죽으나 이곳에 죽으나 마찬가지인 인생.
차라리 이 몸이 죽여 영관된 죽음을 맞게 해주마.
퍼--엉! !
" ? !! "
"이봐!! 이쪽이다!!!!"
뿌연 가루가 순간 시야를 가렸지만, 날카롭게 울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든 칸은 나무
가 모여있는 곳에 보이는 검은 망토의 사내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 품속에 안겨있는 그리운 검은머리를 발견한 칸은 순간 환호하고 싶은 마
음이 치밀어 올랐지만, 검을 휘두르며 덤벼오는 남자의 발로 쳐내며 흥분을 가라 앉
혔다. 꼴불견인 모습을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할필요는 없겠지.
나중에 사람에 없는 곳에 가 지금 이 마음을 떠올리며 환호를 해야겠다고 결심하며
가흔을 안고있는 남자에게 달려 갔다.
"가흔을 내놔!!!"
온몸에 핏칠을 하고 손을 내미는 꼬맹이의 모습에 잠시 몸을 움찔한 사내는 이내 표
정을 굳히며 품속에서 동그란 물체를 꺼내 칸에게 외쳤다.
"눈 감아!!"
펑---!!!
시야를 멀게하는 빛이 터지고, 남자들이 자신을 검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두눈을 손
으로 감싼채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무슨 요상한 짓거리를 하는거냐?! 가흔을 이리 내놓으래도!!"
"뭐 이런 괴물같은 꼬맹이가..."
자신은 눈에 특수한 약을 발랐더치더라도 발광탄을 던졌는 데도 눈을 뜨고서도 멀
쩡하다. 게다가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있으니.. 스스로가 대담하다고 생각했던 남자
는 칸의 기세에 밀려 안고있던 가흔은 넘겨 주었다.
"가흔!! 괜찮은 건가?!! 제길?? 이건 왠 피야?!!"
"상대방의 피니깐 괜찮아."
".......뭐?"
남자의 말에 칸은 안색을 굳히며 얼굴을 들었다.
그런 칸의 반응에 의아해 하면서도 주위를 살핀 남자는 칸을 잡아 숲안쪽으로 들어
갔다.
"내가 왔을 때 한놈을 쓰러뜨린 것 같던데, 거기서 묻은 피같다."
"..........죽은 건가?"
"뭐?"
"쓰러진 놈이 죽었냐고 물었다! !"
잘 걷고있던 사람을 뒷덜미를 잡고 노성을 지르는 칸의 모습에 남자는 안연실색했
다. 이래뵈도 가흔이라는 소년의 은인이고 따지고 보면 이 건방진 꼬맹이의 은인이
기도 했는데, 이건 뭔가??
주객의 전도해도 유분수지 정말 너무한다. 구해주자 돈 내놓으라는 식이 아닌가?
울컥한 사내는 칸의 손을 쳐내며 거칠게 말했다.
"그럼 죽었지!! 이만한 피를 쏫았는데 무사하리라고 생각 한거냐?!!!"
"....그런..... 말도 안되는...."
가흔의 몸을 덥고있는 피를 바라보며 칸은 입술을 깨물었다.
첫 살인.
그것의 무게가 얼마나 거대한지 익히 알고있는 칸은 눈을 감은 가흔의 얼굴을 안타
깝게 내려다 보았다.
벌건 대낮에 봐도 민망할 모습을 피칠을 한 두놈이 엉겨 묘한 기운을 뿌리니 완전
호러 엽기다. 미묘한 표정을 지은 남자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않고 가만히 서서 가흔
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는 칸의 어깨를 잡아 끌었다.
"어서 가자고. 여기 있으면 위험해!"
"그런 네놈이 더 수상하다. 이 손 치워!!"
팔을 쳐내며 앙칼지게 소리치는 칸의 모습에 사내는 뭔가 속에서 툭하니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역시나 가흔이라는 소년만 데리고 빠져 나가는 거였는데 말이다.
"이... 구해줬더니 어서 큰 소리야!! 주먹만한게!!"
"어서 삿대질이냐?!! 이런 무....!!"
손가락 질을 하며 목청을 높이는 이런 시건방진 놈은 노웬 이후로 두번째라며 흥분
한 칸은 막 소리를 치려는 찰나 등 언저리를 스치고 지나기는 오한에 반사적으로 고
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시야에 보이는 것은 발광탄의 효력이 점점 떨어지는 모양인지 엎
드려 고개를 내젖는 사내들 뿐이다.
하지만 아까의 그 느낌은 분명.... 미간을 찌뿌리며 안력을 돋우려던 칸은 다시금 어
깨에 느껴지는 무게에 인상을 썼다.
"여기서 미적거리면 또 둘러 쌓인다고!! 곧 날이 밝을텐데 그때까지 난동을 부려 무
슨짓을 하고 있는지 광고라도 할 셈이냐?!!"
".........가자."
남자의 말이 맞다.
뭔가 일을 보고 난후에 뒤를 닦지않은 찝찝함을 느꼈지만, 우선은 피해 주는 것이
순서일 거다. 눈앞의 남자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아니여도 상관없는게 그때는 베어
버리고 가흔과 도망치면 되기 때문이다.
여전히 고자세인 칸의 모습이 영 못 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차며 몸을 돌려 숲으로
걸아나가는 남자의 뒤를 따르며 칸은 입술을 오무리고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길고 날카롭게 울린 소리는 라헨과 에스의 귀에 들릴테고, 나머지는 알아서 퇴각할
것이다.
".........제길."
가흔의 손에 피가 묻기전에 구해야 했다.
왜 좀더 빨리 오지 못한건가하고 자신을 자책하며 칸은 걸음을 빨리했다.
젤이나 라프헨에게 가서 이 일을 상담하면 뭔가 수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버렸다."
낮게 웅엉거린 소년은 들고있던 장미를 테이블위에 올려 놓았다.
멀리 동이 트는 것을 느끼며 나른하게 풀린 눈을 든 소년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자
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름대로 예우를 차린다고 허리를 숙여보이지만, 그 행동에서
단 1%의 경외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한없이 가볍고 능글맞은 움직임에 고소를 짓던 소년은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창가에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모처럼 만날수 있는 기회였는데 왜 가만히 있으신 겁니까?"
"글쎄. 왜 그럴까?"
대답하기가 싫은 거군.
말하기 싫을때엔 아무리 물어도 저 나른하게 풀린 혀로 알수없는 소리만 지껄이는
황제다. 애써 입 아프게 굴 필요가 없기에 고개를 살레살레 저은 카일은 책장으로
다가가 분명 어딘가에 둔 안마개를 찾았다.
한탕일을 치루고 첫사랑의 상대이자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사람과 뜨거운 칼부림을
했더니 온몸이 쑤시는 것 같다.
"좋아보였지. 칸크빌레...."
" ? "
"그런거...."
파삭.
황제의 손안에서 우그러진 인어의 목걸이를 발견한 카일의 얼굴이 순간 금이갔다.
저 귀한 것을......! !
찌그러진 파편이 살을 찔러 피가 베어나왔지만 쥐고 있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그런거 따위... 절대 용납안해."
한없이 나른한 목소리가 넓은 서재를 울렸다.
다가오는 남자들을 피해나갈 곳은 없었다.
사방에 막힌 벽에 기댄 가흔은 점점 다가오는 남자들을 바라보고만 있었지만, 이대
로 손도 써보지 못하고 그대로 죽는 것은 절대 사양이었다.
들고있던 낡은 검을 고쳐쥐자 그 엉성한 모습에 남자들이 비웃음을 짓는다.
아까까진 괜찮았지만, 갑자기 오한이 들고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느낌이 든다.
비오듯이 흘러내리는 땀이 눈안에 스며들자 저도 모르게 한쪽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을 놓치지 않은 남자가 검을 들고 달려들자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며 몸을 앞으로
내던졌다.
스각.
서늘하고 차가운 느낌.
뭔가 말캉한 것을 벤것 같은 느낌이 손안을 지배했지만, 이내 그것은 단단한 무언가
에 걸려 움직임을 멈추었다.
잠시동안 시간이 정지한것 같은 그 느낌이 너무도 묘해 그대로 정신의 끈을 놓고싶
었던 가흔은 그러나 요란하게 울리는 남자들의 아우성에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입가에 피를 흘리며 두 눈을 부릅뜬채 굳어버린 남자의 얼굴
을 바라 보았다. 들고 있던 사내의 검은 그대로 허공에 정지한 상태였다.
공기마저 멎어버린 것같은 기류에 휩싸여 가흔은 그 자신의 심장도 이대로 정지하
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초의 살인.
그것의 무게는 너무도 엄청났다.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던 가흔은 부들거리며 떨리고 있는 손을 내려다 보았다.
정신을 든 후부턴 도저히 떨림이 가라앉지 않는다.
"제발.. 멈춰라."
다른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일은 사양이건만 몸의 상태는 생각대로 되지 않는
다. 먼저 죽이지 앉았다면 자신이 죽었을 거라는 걸 그 현장에 있었던 본인이 누구
보다 잘 알고 있지만, 원래 무엇인가를 죽인다는 것 자체가 금기시 되어온 사회에서
자란온 그이다.
익숙해지려 해도 그리할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다.
"제길.. 제길..!!"
몸을 구부리고 엎드려 있는 가흔의 모습을 바라보던 에스는 들고있던 약사발을 옆
에 있던 탁자에 내려놓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위로를 건낸다면 겉으로는 괜찮겠지만, 속은 더 곪아 가는 법.
스스로가 일어날수 있게 도와주는 게 최선이다.
한숨을 내쉰 에스는 멀리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노웬과 칸에게 시선을 주었다.
손을 들어보이는 노웬에게 고개를 숙여보인 에스는 가흔의 상태를 묻는 듯한 시선
에 고개를 가만히 저었다.
"아무래도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충격이었겟죠."
"그렇게 본다면 이곳에 제장신인 사람은 없습니다."
"노웬! !"
냉정한 말에 울컥한 칸이 목소리를 높이자 칸의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지만, 이내
표정을 가라 앉히고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칸, 그대가 가흔의 밑까지 닦아줄 생각이 아니라면 적당히 냉정해 지는 법도 필요
할 겁니다."
"......더 이상 말하면 용서하지 않아."
"만약 가흔이 우리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더 일찍 이런 일을 경험했을 겁니다.
앞으로 그는 더 험한일을 경험할 텐데, 벌써부터 저렇다면 차라리 남의 첩으로 들어
가는 편이 낫지요."
퍼억 ! !
칸의 주먹에 돌아간 얼굴을 원상태로 돌린 노웬은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
냈다.
갑작스런 돌발상황에 사색이 된 에스는 노웬의 팔에 매달렸다.
"참으세요!! 노웬님!!!"
"...........이번만은 참겠습니다. 하지만 다음은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참지말지 그래?"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덤비려 드는 칸의 모습에 에스는 초조해 졌다.
"칸님, 제발...!!"
그런 에스를 내려다 보며 잡힌 팔을 빼낸 노웬은 아직도 얼얼한 입을 몇번 오무려
보았다.
가흔에게 찾아가 상태를 살펴 보려고 했지만, 칸 덕분에 그런 마음이 사라졌다.
아직도 자신의 처지를 모르고 날뛰기만 하는 이 건방진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건지. 원래 성격대로라면 그래도 베어버릴 테지만, 상대가 너무 나쁘다.
다 늙어서 이런 사람을 만나 고생하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불쌍하게 느껴지는 칸이
었다. 두눈을 똑바로 뜨고 노려보는 칸쪽으로 고개를 숙여보인 노웬은 물러 나는 작
은 몸에 팔을 두르고 나즉하게 속삭였다.
"칸크빌레. 그렇게 무르게 행동하니 결국 동생에게까지 호된 꼴을 당한 겁니다."
"..........."
"잘 새겨들으시고 다음번에 좀더 예우를 차려 주시길 바랍니다."
부들부들 떠는 어깨를 몇번 두들인 노웬이 무슨 말을 한지 모르지만, 에스는 탈색된
칸의 얼굴을 보곤 안절부절 못했다.
"어차피 같은 배를 탄 동료. 기분좋게 지냅시다."
웃어보인 그는 자신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에스의 팔을 가볍게 치곤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 갔다.
기분도 안 좋은데 젤에게 예의 그 신디 신 열매를 준비해 두라고 해야겠다.
"칸님.. 그만 돌아가서 쉬실래요?"
"...........아니, 넌 그만 돌아가봐."
입술을 깨물고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칸을 안타까운 눈초리로 바라본 에스는 고개
를 숙여보이며 멀리 걸어가는 노웬에게로 뛰어 갔다.
가흔과 칸만을 두는 것은 걱정스러운 일이었지만, 지금은 화가난 상태인 노웬의 기
분을 풀어주어 칸에게 나쁜 감정을 갖지않게 하는 게 더 중요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