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놓으라니깐 난 녀석과 할말이 많다고!!"
"그 할말은 다음에 하시라니깐요. 지금은 노웬님의 심기가 그다지 좋은 것 같지 않
으니깐요."
"그놈 심기가 불편한 것만 챙기냐?!! 왜 이래~ 나도 중요한 사람이라고!!"
"언제 칸님이 중요하지 않다고 했나요? 제발 진정하세요."
원체 화를 내지 않는 성격의 에스지만, 간뜩이나 피곤한데 칸과 노웬 두 사람 사이
에 있자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모처럼 일찍 들어와 별이 잘 보이는 테라스로 나가 사람들과 다과를 즐기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던 계획이 아주 틀어 졌기에, 에스 그도 약간이지만 히스테리를 부리
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급기야 정체가 어찌 되었건 덩치는 자신보다 작은 칸을 때려 눕히고 '들어가서 쉴
까?'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는지 모르는지 말리는 에스가 얄미워 더 난동을 부리는 칸이다.
"들어 오셨군요. 칸, 에스. 가흔."
"라프헨. 도대체 노웬님은 언제 들어오신 겁니까?"
"글쎄요. 라헨과 밖에 나왔을 땐 이미 들어와 계셨는 걸요? 시각은 한 6시 쯤?"
고개를 갸웃하며 말하는 라프헨의 움직임이 무척이나 나른하다.
그것을 눈치챈 것인지 에스는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 밖
에 없었다.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기에 나오고 나니 6시가 되있던 거냐고 눈치없이 물을수 는
없지만, 분위기 만으로 그 무엇에 관한 궁금증이 해결되는 것이다.
"짐들은 거의 다 처분하신 것 같은데 일부 품목은 가져오셨더군요.
제일 고가의 물품뿐이었죠."
"그 말은? "
"물건을 처리하기로 한 상단에 가서 그 주인을 만나지 못했으니 그냥 돌아올수 밖에
요. 노웬님의 명성을 아는 자들이 상당히 미안해 하며 최고의 대우를 했다지만, 일
은 한번에 신속하게 끝내기를 원칙으로 하는 그분껜 상당히 불쾌한 일이었겠지요."
"아-하. 그래서 그렇게 저조하신 거군요."
"그런 거지요."
물품을 처리하고 나서 바로 다음 목적지를 옮겨 아군에게 보급할 무기들과 음식들
을 사들 일 생각이었다.
이런 것들은 하루라도 빨리 이루는 것이 좋기에, 철저하게 일정을 분배하여 진행해
왔는데 이런 식으로 틀어지게 되었으니 기분이 좋을리가 없다.
노웬이 방문한 비잔힐 가문을 떠올려 보던 에스는 의아하여 고개를 갸웃했다.
비잔힐 가문의 주인인 자는 무척이나 신의가 있고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남자다.
그런 그가 한두번의 거래를 한것도 아닌 노웬과의 일정을 몰랐을리가 없는 노릇.
뭔가 내부에 사정이 있는 건가?
"비잔힐의 새로운 가주는 몇달전에 물러나 그의 아들이 자리를 이었다는 군요."
라프헨의 말에 뭔가를 눈치챈 에스는 가흔의 몸에 매달린 칸에게 눈짓을 주었다.
그것을 눈치챈 건지 아까부터 조용히 있던 칸은 그 작은 몸을 이용해 가흔의 몸에
냅다 달라 붙었다.
비록 13세 정도 아이의 몸이긴 하지만 이것저것 매달고 있는 것들이 많아 상당한 무
게를 자랑하는 칸이 달라붙자 순간 비틀거린 가흔은 이내 중심을 잡고 벽에 기대 섰
다.
"먼저 들어 쉴테니 둘은 있다 오라고. 자 가자!! 가흔호!!"
"가라고 해도 어떻게. 게다가 전 배가 아닙니다;;"
"가라면 가는 거다!! 자- 어서 가라고!!"
"....끄-응."
어이없어 하는 가흔에게 어거지를 부린 칸은 어쩔수없이 조금씩 움직이는 몸에 매
달리며 신나했다.
가흔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웃음이 나오려던 두 사람이지만, 그들의 모습이 사라
지자 표정을 굳히며 근처의 문을 열고 아무 방에나 들어갔다.
마침 들어간 장소가 한적한 서재여서 다시 나가는 일없이 둘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가주에게 뭔가 이상이 있는 겁니까?"
"굳이 문제라면 어리고 첩의 아들이라는 점이라는 걸까요."
"하-아?"
상단이라는 것은 원체 그 어떤 무리들보다 이기적이며, 내부 결속력이 강한 집단이
다. 그리고 그 가주가 되는 인물은 가문의 신임을 받고 선대의 위임을 받는 존재로,
그 중 하나라도 틀어지면 결코 가문의 인을 받을수 없는 자인 거다.
그런데, 이미 가주가 된 인물에게 문제를 제기하다니...
어이없어 하는 에스의 얼굴을 바라보던 라프헨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실은 이번에 상단 내에서 전쟁에 대해 파가 나뉘었다고 하더군요."
"...........그런거군."
"네, 전쟁을 기피하는 파와 지지하는 파. 이렇게 둘로 말이죠. 현 가주란 사람은 전쟁
지지파로 우리들의 막강한 뒷배가 되어 줄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전 가주에
겐 첩의 아들이었던 현 가주말고도 수많은 자식들이 있었고, 그중 정실의 아들은 무
려 셋이나 된다는 군요."
"그 정실의 아들들은 전쟁 기피자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중에서 첫째아들은 그 의사가 무척이나 강경하여 현 가주의 결정에
일일이 토를 단다고 하더군요. 그래서인지 현재 비잔힐릐 가주는 전 가주에게서 위
를 받은지 한달이 채 지나지도 않아 처리할 일들만 하고나선 집보단 밖에 더 나가있
는 실정이라는 군요."
"...복잡하군."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이는 에스의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라프헨도 역시
염려가 섞인 숨을 내쉬었다.
남쪽에 오면 뭔가가 될 줄 알았는데 이건 산넘어 산이 아닌가.
현재 모인 자금만으로 어떻게든 당장의 구멍을 매울수는 있겠지만, 앞으로의 일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노웬 그가 왜 그렇게 날카로와 졌는지 십분 이해하는 둘이었다.
하지만............
"비잔힐이란 말이지..."
어릴적에 안좋은 기억이 떠오르려 한다.
에스는 고개를 저으며 칸과 가흔이 사라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힘들 일인데 같이 나오자고 해서."
"아니요. 저택안에만 있는 것보단 훨씬 마음에 드는 걸요."
점심전 이른 시간부터 시가지로 나와 어제 젤과 에즈가 사들인 것들을 하나씩 환불
하고나서 좀 쉬고있던 에스는 옆에 앉아 있는 가흔에게 무척이나 미안한 듯한 표정
을 지었다.
꼭 필요한 것들과 다른 곳에 팔면 가격이 좀더 오르는 보석류를 빼고서도 짐의 양이
원체 거대했기에 둘은 점심때가 다 지나서야 짐들을 모두 처분할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에즈가 충동구매를 해오면 에스가 다시 환불하건 했으니, 그들을 아는
사람들은 기분 나빠하지 않고 흔쾌히 돈을 지불해 주었다.
이럴땐 이래도 뭔가 일이 있을 땐 물건들은 크게 사들이는 에스가이니 물건에 하자
가 없는 이상 문제가 될것이 없는 것이다.
"몸은 힘들어도 밖에 나오니 기분은 좋군요."
"그렇죠? 날도 뜨거워 지니 어딘가 들어가 차라도 마실까요?"
"그러죠."
여전히 늦잠을 자는 칸에게서 검을 배울수는 없고, 어떤 사이인지 아는 라프헨과 라
헨의 단란한 시간을 방해할수도 없는 데다, 연신 이야기 꽃을 피우며 재미있게 지내
는 젤과 에즈를 부를수도 없었던 가흔은 같이 나가자는 에스의 말에 반갑기 그지 없
었다.
혼자였다면 공부라도 해볼까하던 참이었는데 그것도 아는 것이 없어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였던 것이다. 가는 길 내내 이것저것 설명해 주고 안내해 주는 에스가 그
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친절하네요. 에스는."
"아? 그런 말 많이 듣죠. 원래 사람들을 잘 챙기는 타입이라서 그런가 봐요."
다른 사람이 했다면 아니꼬왔을 말이지만, 그가 하니 그다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이런게 인망의 차이라는 거겠지.
말뚝 풀린 망아지처럼 구는 칸도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 본받으면 좋을 텐데 말이
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던 에스는 길목에서 팔고있는 어떤 음식에 시선
을 주더니 움직일 생각을 하지않는 가흔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그 시선에 가흔이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왜요?'라는 듯이 묻자, 씨-익 웃으며 입
을 연다.
"우리 칸님처럼 군것질이라도 할까요?"
그런 그가 끌고 간곳은 차가운 얼음을 갈아서 파는 듯한 곳으로 손바닥만한 종기에
얼음과 색소를 타서 떠먹는 것 같은 모양의 음식이었다.
한입 베어문 가흔은 마치 빙수를 먹는 것같은 느낌에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에스는 '맛있죠?'라고 물으며 값을 지불했다.
두번이기는 했지만 그동안 장을 보는 데 따라다녀선지 가흔도 왠만한 경제관념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볼수있는 물건들의 가격쯤은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배운 것이다.
그런 그가 볼때 이 음식의 값은 상당히 비싼것 같았다.
"남쪽이 춥기는 하지만 북쪽만큼은 아니라서, 이런 얼음을 구하기가 좀 어렵죠.
그래서 다른 음식들 보단 단가가 쎄요."
"......흐음."
"음, 음식을 들고 식당에 들어갈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디 산책이라도 할까요? 좋은
곳을 알고 있거든요."
에스의 말에 가흔은 묵묵히 얼음을 퍼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같은 모습에 에스가 웃음을 터트린 것은 당연한 일이 었을 지도 모른다. 에
스는 그가 생긴 것 답지 않게 정말 유쾌한 행동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째서 웃음을 터트리는지 알지 못하는 가흔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손을 저으며 미
안하다고 말한 에스는 그를 데리고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대로완 틀리게 어두침침하게 습한 공기가 맡아지는 장소에 가흔은 고개를 들어 주
위를 둘러 보았다.
"전엔 시간이 늦을때마다 많이 이용하던 곳이예요. 어른들은 위험할지도 모르니 지
나가지 말라고 했지만, 지금까지 그닥 위험한 일은 생기기 않아서요. 아직까지 애용
하고 있답니다."
"분위기는 어둡지만 그다지 나쁘진 않군요."
"그렇죠? 어릴적엔 이길은 제 고해성사 장소였답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며 에스는 과거를 회상했다.
전통과 역사가 깊은 곳이다보니 어린 에스에게 거는 어른들의 기대는 남달랐다.
위에 형님이 있었지만, 굳이 어른들이 손을 대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해냈던 사람으
로 그야말로 전형적인 가문의 차기 가주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런 형에게 에스는 컴플렉스를 느낄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비뚤어지게 감정을 표출해 꽤나 어이없는 행동들을 많이 해 주위 사람들을
어지간히 괴롭혔던 것이다.
그런 건 주위에서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수 있었기에 가끔 아무도 없는 이곳에 와
차분한 마음이 되면 속 마음을 털어놓곤 했던 것이다.
좁고 길게 나있는 길이라 뱉어낸 말이 울리는게 마치 다른 이가 자신을 위로해 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추억의 장소죠."
즐거운 듯한 에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가흔은 얼음을 퍼서 입안에 넣었다.
차가운 그 느낌을 즐기고 있던 가흔은 누군가 주시하는 듯한 시선에 조용히 눈동자
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탓인지 가흔의 손목을 잡는 에스의 손에 남다른 힘이 느껴진
다. 눈이 마주치자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에스의 모습에 가흔은 들고 있던 것을 맡
은 편 손에 조용히 옮겨 들었다.
이런 일로 포기하긴 꽤나 맘에 들었던 탓이다.
탁!!!
"제길!! 잡아!!"
"놓치면 안됀다!!!"
핑!!!
피융!!
동시에 뛰기 시작하는 가흔과 에스 뒤로 남자들의 목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그에 맞추어 뒤에서 쏫아지는 길고 뭉툭한 물체에 가흔은 시선을 주었지만 다급하
게 잡아끄는 에스의 힘에 정신을 그쪽으로 돌릴수 밖에 없었다.
"뭉퉁하긴 하지만 그 끝에 마비약이 발라있어 약간만 닿아도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
다. 주의하세요!!"
다급한 에스의 어조에 표정을 굳힌 가흔은 급기야 들고있던 얼음을 바닥에 던지고
두 다리에 힘을 주어 앞으로 죽죽 나가기 시작했다.
의외로 빠른 가흔의 달리기에 한순간 이채의 빛을 띄던 에스는 멀리 앞에 보이는 남
자들의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 적어도 4은 되어 보이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쫒아오는
이상 저렇게 많은 무리들을 한번에 처리할 자신이 없다.
그런 에스의 뒤로 가흔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이를 악물었다.
"에스가 오른쪽 두명을 맡아요. 나머진 제가 하죠."
".....!!!"
탁탁탁.
"잡아!! 상처는 입혀선 안돼!!!"
"검은 머리는 냅두고라도 저 금발은 반드시 잡아라!!!"
멈추지 않고, 육박하는 가흔과 에스의 모습에 잠시 동요의 빛을 띄우던 남자들은 위
에서 명령하는 소리에 이를 악물었다.
자신들의 주인의 성격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기 때문에라도 저 녀석만은 반드시 상
처없이 생포해야 하는 것이다. 두손을 들고 앞을 막는 남자들의 모습에 혀를 찬 에
스는 땅을 박차며 허공으로 뛰어올라 오른쪽에 서서 이쪽을 멍하게 보고있는 남자
의 얼굴을 내려 쳤다.
남자의 몸을 차는 반동으로 몸을 돌려 맡은 편의 남자의 턱을 갈기고 바닥에 착지한
후 몸을 비틀거리는 상대의 팔을 잡아끌어 얼굴에 팔꿈치를 먹인 그는 가흔의 모습
을 확인했다.
가흔는 이미 두사람을 처지하고 난후 주먹을 에스에게 올려 보였다.
그 믿음직스러운 모습에 다시금 미소가 피어 나오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여유롭
지가 않다.
대신 윙크를 날린 에스는 손가락을 들어 오른쪽에 나있는 세번째 골목을 가르켰다.
"따라와요. 최단거리로 산책로를 안내하죠!!"
좁은 골목을 옆으로 서서 이동하거나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가 뒷문으로 나오기도
하도 쓰레기가 쌓여있는 곳을 지나기도 하며 뛰어가는 동안 쫒아오던 발소리가 많
이 줄었다.
이내 넓은 광장으로 나와 가흔이 뒤를 돌아 보았을 땐 아무도 그들을 쫒아 오진 않
았다. 숨을 고르며 서서 해명을 바라는 눈빛을 보내는 가흔에게 멎적게 웃어보인 에
스는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잡아 떼려고 해도 아까 어떤 남자가 금발머리는 꼭 잡으라는 말을 했었던 것이
다.
둘중 금발머리는 에스밖에 없으니......
"뭔가. 조금 난처한 상황. 인데요?"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지만... 상당히 익숙해 보이는 데요?"
"뭐, 그렇죠. 집안이 워낙에 대단해서 어릴적부터 저런 사람들은 꽤나 많이 봐왔는
걸요."
장난 스럽게 대꾸하는 모습에서 해명을 할 마음이 없다는 간파한 가흔은 더 이상 묻
지 않았다.
또 다시 이런 일이 있을수도 있어 걱정스럽긴 하지만, 에스같은 사람이 호락호락 당
할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안타까움 점을 굳이 들자면......
"다 못 먹었는데..."
아까 뛸때 바닥으로 던져지면서 사방으로 흩어지던 얼음조각들을 떠올리며 가흔은
입맛을 다셨다. 그답지 않게 집착하는 모습이 꽤나 맘에 들어했던 모양이다.
주머니에 돈은 있지만 근처에 파는 곳이 없다.
난처한 표정을 짓던 에스는 머리를 긁적이던 손을 내리고 가흔을 향해 내밀었다.
"자- 그럼 산책하러 갈까요?"
방금 이상한 남자들에게 쫒기고 숨도 채 고르지도 않은 상황에서 산책하러 가자는
그말에 잠시 침묵하던 가흔은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다 어서 가자는 듯이 앞장 섰다.
그런 가흔의 뒷 모습을 바라보던 에스는 난처한 듯이 손가락을 들어 어느 한 지점을
가르켰다.
"저기.. 산책로는 저기인데 말이죠..?"
" 하 ? "
좁은 골목을 지나 나온 것은 커다란 길이 나있던 곳으로 바로 에스의 저택 앞 부근
이었다. 산책로를 가자는 말에 당연히 저택과 반대 방향일거라고 생각하고 몸을 돌
렸건만, 에스가 가르키는 방향은 다름아니 저택쪽이었다.
의심스런 가흔의 눈초리를 받으며 에스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어색한 웃음을 짓
어 보였다.
"저희 집안 정원은 꽤나 아름답기로 소문이 났는데 말이죠...
혹 이미 산책 하셨나요?"
".................."
할말 없어지는 가흔이었다.
"벌써 돌아오는 거냐?"
에스의 손길에 이끌려 어거지로 정원에 들어선 가흔은 넓은 장소에서 검연습을 하
고 있었던 듯한 칸과 만났다.
잠시 하늘을 바라보던 가흔은 그가 깨어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을 시간이면 분명 3시
쯤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일과는 무척이나 단순해서 밥먹기 아니면, 검연습
이었던 것이다.
거기에도 잠은 꼭 점심때 일어난다고 가정하면 그의 생각은 거진 맞을 듯.
"밥은 먹고 왔냐? 가흔."
"먹었습니다."
"잘 됐군. 자- 들어라."
탁.
칸이 던져준 묵직한 검을 들어올린 가흔은 그것을 고쳐잡고 몇번 휘둘러 보았다.
이 검은 분명 전에 칸이 검을 가르쳐 주었을 때 쓴것이자 젤을 도울때 도적에게 던
진 검이기도 했다.
타이밍도 불안했고, 검날도 무뎌져 있어서 공격해온 산적에게 그다지 치명상을 주
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날카롭게 날아져 있다.
손가락을 대면 그대로 베일 것같은 날카로움에 그는 검날을 세워 얼굴에 내비치는
면을 바라 보았다.
"그렇게 검을 자세히 보면 안 좋아요. 검에 빠져 광검사가 된 예도 있으니깐."
"아, 그렇군요."
한 순간이기는 하지만, 검의 묘한 느낌에 뭔가가 사로잡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
기에 가흔은 라헨의 말에 깊이 동감하며 칸을 바라 보았다.
자신의 키와 비슷해 보이는 대검을 어깨에 지고 그런 두사람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
던 칸은 잠시 입꼬리를 올려 보이더니 짊어지고 있던 검을 그 자리에 꼽았다.
단숨에 반쯤 들어가 땅에 박히는 검의 모습에 가흔은 질려 버렸다.
가흔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무 그늘밑에 세워둔 장검 중 하나를 집어든 칸은
강도를 시험하듯 자신이 팔에 몇번 두들여 보였다.
"좋-아. 그럼 한번 놀아 보자고."
"................."
"괜찮은 눈이라고요. 자, 그럼 가볼까!"
대답없이 노려보는 가흔의 눈동자에 휘파람을 불던 칸은 순간 자세를 잡고 가흔에
게로 육박해 들어갔다.
그 기세에 안색을 달리한 에스가 한발 앞으로 나섰지만, 뒤에서 나타나는 커다란 손
에 어깨가 잡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라헨!!"
어깨를 잡고 고개를 젖는 것으로 칸과 가흔을 방해하지 말라는 의사를 밝힌 라헨은
자신을 바라보며 설명을 요구하는 에스를 내려다 보았다.
"일정이 변했다."
" ? "
"몇몇 정예들을 대동하고 비잔힐 상단으로 쳐들어 간다. 그 중에 가흔도 한몫을 하
게 될테니 지금이라도 몸을 풀어두게 하려는 거다. 실전에 연습은 필요 없겠지."
"비잔힐에 왜 가는 겁니까? 설마하니 어제 도착한 전보를 곧이 곧대로 믿는 것은 아
니겠죠?"
저녁 늦게까지 남아 앞으로의 계획을 짜고 있던 에스와 노웬은 누군가의 패밀리어
를 맞이하게 되었다. 창가에서 한동안 빙빙돌던 새는 종이가 들어있는 통을 들고 그
대로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는데, 문제는 그 통안의 서신이었다.
도대체가 이해할수 없는 내용의 글은 쉽게 신용할수 없는 무게를 지니고 있었던 것
이다.
아니겠지라는 뜻이 담겨있는 에스의 눈동자를 내려다 보던 라헨은 한숨을 쉬며 그
의 머리를 휘저었다.
"비잔힐을 이등분하는 반세력을 진압하고, 그 가주를 확고하게 옹립하는 것으로 승
부를 봤지.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들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말야."
"무모합니다."
"지금와서 반대한다고 해도 이미 늦었어. 노웬은 이미 결심이 선 상태이니 말야."
챙!!!
"으-ㄱ!"
크게 울리는 검명에 에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날라간 검은 뒷쪽 나무에 박혀있었고 검의 주인은 한손을 움켜쥐고 그 자리에 한쪽
다리를 꿇고 있었다.
그런 가흔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서도 별만없이 자신의 검날을 확인하는 칸의 모습
에 에스는 한쪽 눈썹을 올렸지만 아직도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있는 라헨 덕분에 그
에게 갈수가 없었다.
".........."
가흔은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엄지사이 골에 나있는 상처를 확인했다.
검이 날라가면서 찟어진 건지 출혈이 꽤나 크다.
인상을 쓰고 있는 가흔의 모습을 내려다 보던 칸은 한숨을 쉬며 그리로 걸어갔다.
"손 줘봐. 많이 다친거냐?"
"....그다지...."
"많이 다쳤잖아. 이런거 가지고 속여봤자 아무도 잘했다고 안그래!!"
"............."
투덜대며 손수건을 꺼낸 칸은 가흔의 손의 상처를 감싸 주었다.
역시나 진검을 잡아본 건 아니란 말이지.
검을 휘둘를 때마다 움찔거리며 경직되던 몸을 떠올리며 칸은 한숨을 내뱉었다.
자세는 좋지만 검을 휘두르는 것은 초보다. 움직임을 보고 상대를 판단하는 이곳에
서 살아남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게 생긴 가흔을 동정하고 싶은 마음이다.
진검을 휘두르지도 못하면서 자세만 좋으면 어쩌자는 건지...
실제 경험을 하면 비약적으로 실력이 늘거라곤 생각하지만, 자신들은 가흔의 시력
이 쌓을만큼 평탄한 길만을 선택해서 가는 것만도 아니니 더 걱정이다.
"이봐, 에스."
"가흔!"
칸이 부르고 나서야 손을 놓는 라헨을 잠시 노려본 에스는 뛰어가 바닥에 앉아있는
가흔에게 다가갔다.
상처는 크지만 금방 낳을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검을 제대로 휘두른 적이 없던 자로써 칸의 검을 마주하고 난 쇼크는 대단
한 것이어서 그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실전보단 못하지만, 칸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은 격이니... 혀를 찬 에스는 가흔을 일
으켜 근처의 의자에 앉혔다.
외관을 중요시하는 점에서 정원에 의자같은 인공물은 잘 들여놓지 않았지만, 잘 살
펴보면 나무나 풀 사이로 두사람이 앉을만한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검을 가르칠거면, 처음부터 절차를 밟아야죠. 시간이 없다고 무턱대로 그렇게 하
면 그 누가 따라올수 있겠습니까?"
"어쩔수 없다고, 난 남한테 검을 가르틴 경험이 전무한걸."
"그럼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되잖습니까?"
"싫--어."
"칸님!!"
"흥! !"
아웅다웅하는 칸과 에스를 바라보던 라헨은 팔장을 풀며 입을 열었다.
"실전에 사용하는 검술을 빠른 시일내에 익히게 하고 싶다면 칸님보단 샤한이 더 도
움이 될고야. 평가는 안 좋지만, 살수로써의 명성은 높으니깐."
"평가는 높지만 위험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보단 차라리 칸님이 낮죠."
"...됐어. 들어가서 쉴테다."
샤한같은 놈과 비교하는 두 사람 덕택에 화낼 기운도 사라진 칸은 어깨를 늘어 뜨리
며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름대로 잘 가르칠려고 했지만,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그도 그럴것이 칸은 누군가에게 검을 배우고 난후 자신에게 맞는 검으로 받아들이
기만 했지, 그것을 누군가에게 알려준 적이 전혀 없었던 거다.
그에게 검술은 소유해서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니깐.
남에게 가르친 경험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처으부터 잘할수 있겠냐만은 가흔의 손
에 난 상처와 라헨의 말에 완전히 맘이 상한 칸은 주섬주섬 짐을 들고 자리를 떠났
다.
샤한 이라니.
남을 베는 것밖에 할줄 아는게 없는 인간 백정인 녀석이 나보다 낫다고?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게 있지만 다시 되돌아 가기 싫다.
"제길."
가흔의 손에 난 상처가 자꾸 걸리는게 나중에 사람을 보내 약이라도 전해야 겠다.
"괘찮나요?"
"그다지 심한건 아니것 같지만..."
웅얼거리며 손안의 상처를 바라본 가흔은 눈살을 찌뿌렸다.
통증때문에 그런건 아니고 아까 검을 휘두르던 칸의 기세가 떠올라 저도 모르게 오
싹한 기운이 느껴졌던 탓이다.
순간이긴 하지만 정말로 베어지는 줄 알고 있는 힘껏 맊았지만, 검은 날라가고 손을
이 모양이다. 진짜로 싸움을 하면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닐거다.
집안에서 팝콘을 먹으로 보는 영화같은 팔자 좋은게 아니란 거다.
정말로 살벌한 곳에 떨어졌구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알수없는 불안이 느껴지는 가흔
이었다.
"파티요?"
"그래. 오랜만에 돌아왔으니 신고식겸 우리가 견제하다는 걸 다른 이들에게 알려주
는 거지."
분주하게 돌아다는 시녀들에게 지시하며 솜씨좋게 대답하는 에즈의 모습을 바라보
던 가흔은 아침부터 저택에 씨끄러웠던 궁금증이 해결되었기에 이제부터 무엇을 할
까나하고 생각했다.
여기저기 다녔다가 사람들이 찾기라도 하면 안되니깐 그냥 가만히 있기로 한 그는
난간쪽에 발을 늘여뜨려놓고 머리를 기댄다음 아랫층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저택으로 들어오는 문에 서면 바로 보이는 계단에 올라가는 길목에 앉아 두 다리를
내린채 흔들거리고 있는 가흔의 모습은 상당히 눈에 띄지만 사람들은 애써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아침부터 일이 많아 피곤했는데, 저런 눈요기라도 없으면 못버틸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가흔이라는 주인이 데려온 소년은 무척이나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
이었으니 말이다.
자신이 얼마나 눈에 띄는지 알지 못하는 건 어디까지나 본인뿐이다.
"거기는 붉은 천을 늘어뜨리라고. 화려하게 우리 가문의 건제함을 알려야 하니 될수
있는대로 화려하게 하는거야."
"거긴 좀 촌스러운 느낌이 드는군. 차라리 천을 거두고 꽃병을 두도록 해."
여기저기 다니녀 집안꾸미기에 바쁜 에스와 에즈 두사람이 곁에 없으니 너무 한가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뭐라해도 자신을 제일 잘 챙겨주던 사람들이니...
다른 사람은 바쁜데 자신은 한가하게 앉아있기만 하는 것도 미안해서 슬그머니 자
리에서 일어난 가흔은 맨발로 복도를 내달렸다.
저택이 워낙에 깨끗해서 굳이 슬리퍼를 신지 않아도 되었기에 그는 편하게 맨발로
다녔다. 사실 맨발로 다니는 것이 얼마나 실례인지, 맨발로 다니는 그가 귀엽기에
에즈와 에스가 묵인하고 있다는 것뿐이라는 걸 알게되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지
알수없는 일이다.
똑똑
칸의 방문앞에 선 가흔은 문을 두들었다.
어제 저녁에 너무 늦게 일어난다고 지적한 노웬의 말에 반발한 댓가로 오늘부터 일
찍 일어나도록 지시받은 그였지만, 칸 그가 스스로 아침일찍 일어날수 있을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얼마전 부터 그에게 검을 배우고 있었는데 날이 더운 한낮보다는 아침일찍
배워 오후시간엔 라프헨과 공부를 하고 싶었다.
"칸, 일어났나요?"
끼익.
계속해도 두들여 보았지만 반응이 없는 안에 가흔은 문을 열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해서 밖에서 시중드는 시녀도 없는 칸이
다. 그런 그의 방에 들어가는 것은 상당한 결심을 요하는 일으로 침을 삼킨 가흔은
방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칸의 방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차를 마시러 간 에스의 방이나 에즈의 방보다 수배는 더 화려한 할것같은 내부에 눈
이 멀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가흔은 가구 여기저기에 붙어있거나 화려하
게 세공되어진 보석들에 애써 시선을 떼었다.
오른편 벽쪽에 붙은 장정 3은 너끈하게 잘수 있을 것 같은 화려한 침대에 다가가 위
에서부터 늘어뜨려진 투명한 천을 걷은 가흔은 역시나 잠들어 있는 칸의 모습에 한
숨을 쉬었다.
털썩.
소리내어 옆에 앉은 가흔은 가만히 그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바닥에 흩틀어진 검청의 머리카락에 대비되는 새하얀 얼굴이 더 앳되어 보인다.
아무렇게나 놓여진 가느다란 팔과 다리에서 얼마나 강인한 힘이 내재되어 있는지
그의 외관만을 본 사람들은 알수없을 거다.
실제로 13세 정도의 미소년으로 보이는 칸이지만, 가끔가다 그 황금빛 눈동자를 빛
내는 모습을 보노라면 그가 어린애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 아니, 그가 보이는
것만큼 어린아이일지 가흔은 알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는것 같지만 그 사실을 가흔에게까진 알려
주지 않는다.
쉬쉬하는 분위기에서 청방지축같이 구는 칸의 자유분방함과 다른이들이 가끔 보여
주는 예우와 존대는 가흔을 더 복잡하게 만들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냥 신경을 끄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나보다 더 정체를 알수가 없으니....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잠들어 있는 칸의 볼을 손가락으로 누른 가흔은 그 부드러운 감촉이 놀라 뜨거운 것
에 데인 듯이 손을 떼내었다.
주먹을 쥐고 한동안 칸의 잠들어 있는 얼굴을 확인한 가흔은 다시한번 용기를 내어
칸의 얼굴에 손가락을 내렸다. 볼을 배회하던 손이 칸의 눈썹을 건드린다 싶었을때
감겨있던 눈을 떠지고 황금빛 눈동자가 들어났다.
그 신비로운 광경에 넋을 빼놓고 있던 가흔은 순간 몸이 허공을 난다고 느꼈다.
콰-당!!!
"! ! !"
커다란 소리와 함께 벽에 부딫혀 바닥을 구른 가흔은 엄청난 통증에 소리조차 낼수
가 없었다.
가흔을 집어던진 여파로 흔들리는 투명한 천들의 움직임을 멍하니 바라보던 칸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가에 가만히 앉았다. 한동안 그러고 있던 그는 어딘선가 들리
는 신음성에 점차 정신을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끌어 올렸다.
"..........?"
문옆 벽쪽에 쓰러져 신음을 흘리는 사람이 보이자 멍하니 자객인가하고 생각하던
그는 쓰러진 자의 머리카락이 검은색이라는 것과 사이사이로 보이는 얼굴이 자신이
아는 그 누군가와 꽤나 닮았다고 생각했다.
쓰러진 자가 바닥에 꿈틀대며 손을 집고 얼굴의 반이 보이자 칸은 순간 뭔가 단단한
것이 머리를 강타하는 듯한 느낌을 느꼈다.
"...........가흔?"
칸이 완전히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배를 잡고 웅크리고 있는 가흔을 안아든채 라프헨
의 방문을 발로 차고 있었다.
라헨과 아침의 여운을 느끼고 있던 라프헨은 낭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렷지
만, 창백한 얼굴의 칸과 그에게 안겨있는 가흔의 발견하고 나서는 얼굴을 굳혔다.
순간 머리속으로 칸이 일을 쳤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갈비뼈 2대가 나갔군요. 등뼈도 약간 상한것 같지만. 포션을 마셨으니 숙면을 취하
고 나면 금방 일어날수 있을 거예요. 포션이 아무리 명약이라지만 부러진 뼈는 쉽게
붙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시죠?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
"칸님의 잘못만도 아니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젤의 말을 듣고 침울해 하는 칸을 보다못해 라프헨이 위로의 말을 건냈지만 어두운
얼굴은 펴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그러 칸의 모습에 한숨을 쉰 라프헨은 얼굴에
한손을 올리며 옆에 서있는 형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마찬가지로 걱정의 기색을 뛰우고 있는 라헨은 천처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어떤 말을 해도 칸 그에게 먹히지는 않을 거다.
"가흔이 그를 깨우러 갈줄은 몰랐어요. 미리 말해두었어야 하는데..."
"아뇨.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몰라요."
"젤,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안 그래도 날카로운데 넘겨 들을수 없는 젤의 말에 에스는 눈썹을 치켜 세웠다.
평소에 얌전하기만했던 에스의 흥분한 모습에 잠시 이채의 빛을 띄웠던 젤은 미소
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죠. 무의식 중에 타인의 기척을 느끼고 공격을 가하는 건 싸움일때나 암
습을 당할 때에만 발휘해도 충분해요. 자는 사람을 깨우로 간 사람을 이 모양을 만
들때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칸님도 적당히 산경을 풀어주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아니면 스스로 적인지 아군인지 걸러낼수 있는 능력을 좀더 기르시던가요. 한두번
도 아닌 일엔 이제 지치기까지 하는 군요."
얼굴을 숙이고 있는 칸의 모습을 바라보던 젤은 한숨을 쉬며 물수건을 들어 의식이
없는 가흔의 이마 위에 올려 놓았다.
"이번일이 칸님에게 약으로 작용했으면 하는 군요."
왠지 모르지만 배와 등, 그리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다.
그중에서도 배의 통증을 강하게 느끼던 가흔은 꿈인지 현실인지 알수 없는 모호한
경계에 서있는 자신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뿌연 안개가 낀 사방을 둘러보던 그는 멀리서 대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말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무작정 달려가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않았던 전에 비해 이번 꿈은 몸이 확실하게 움직인다.
달리면서 신기하게 양손을 들어보인 가헌은 뭔가에 부딫혀 크게 뒤로 넘어졌다.
"....크-윽."
안 그래도 몸 여기저기가 쑤셨는데 넘어지기까지 했으니 그 통증은 참으로 지독했
다. 인상을 찌뿌리며 일어나지 않는 가헌의 앞에 서있던 존재는 그런 그를 가만히
내려다 보다 손을 내밀었다.
내밀어진 손을 발견한 가흔은 잡기전에 그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
그 사람이었다.
자신과 꼭 닮은 알수없는 기분이 들게 하는 사람.
웃는 얼굴로 손을 내미는 모습에 잠시 망설이던 가흔은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손위
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에 펴져있던 손을 오무려 잡으려는 순
간 뭔가 차가운 바람이 머리를 쓰다 듬었다.
털썩.
"................."
침대가에 엎드려 있던 가흔은 밖으로 내밀어진 팔과 그 밑에 떨어져 있는 배게에
시선을 주었다.
한동안 그러고 있던 가흔은 자신의 몸에 땀으로 흥건히 젖어있다는 것과 열려진 창
문에서 들어오는 바람이 그 땀을 식혀줘 무척이나 시원한 기분이 들게 한다는 것을
느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알수없지만 다시금 꿈을 꿔서 그 다음을 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동안 몸을 뒤척여도 잠이 오지 않자 자리에 일어나 침대가에 걸터 앉았다.
욱씬.
가슴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이마를 찌뿌린 가흔은 아침에 있었던 일을 깨닭곤 기분
이 점점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음을 느꼈다.
잠을 깨우러 간것뿐인데, 설마하니 얻어 맞을지는 몰랐다.
게다가 그동안 한번도 느껴본적 없던 지독한 통증은 저번 검을 겨루다 찟어진 손과
비교할 바가 못됐다. 칸도 칸이지만 그것하나 피하지 못한 자신에 혀를 차며 자리에
서 일어난 가흔은 열려진 창가로 다가가 그위에 걸터 앉았다.
아침부터 파티준비가 한창이더니 이미 시작한 모양이다.
멀리 본채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와 웃음소리를 들으며 커다란 창에서 비추는 빛과
그림자들을 내려다 보았다.
화려한 본채의 파티장과는 다르게 주위에 위치한 건물들은 불이 꺼진채라 뭔가 쓸
쓸한 기분이 들게 한다.
꼬르륵.
한동안 그 느낌을 음미하던 가흔은 뱃속에서 울리는 소리에 얼굴을 붉혔다.
그러고 보니 일어나 저택이 씨끄러운 이유를 묻고 칸에게 가 맞은 것이 아침에 있었
던 일의 전부로 밥은 커녕 물한잔도 마시지 못했다.
침대가 근처의 테이블 위에서 물병을 들어 그대로 입을 대고 마신 가흔은 입가를 닦
으며 뭔가 배를 채울거라도 찾기위해 가운을 한손에 들고 방밖으로 나섰다.
끼익--
".......;;;;;"
문을 닫고 아래 계단으로 내려가려던 가흔은 그러나 밑에 보이는 엉켜있는 두 남녀
를 발견하곤 급하게 몸을 숨켰다.
여자의 다 올라간 드레스와 남자의 손의 위치를 보아 절대 하는 중인거다.
책에서 중세 파티때에 사라지는 남녀가 허다하다고 했는데, 알고보면 파티장에서
준비된 방으로 들어가 각자 즐기기 때문이라고 읽었는데 설마하니 사실이었다니.
아니 그보단 어째서 들어가서 하지않고 이렇게 밖에서 하고 있는 건가?!!
화끈거리는 볼을 한손으로 쓰다듬던 가흔은 계단으로 내려가는 것은 도저히 무리라
고 판단. 몸을 돌려 반대편에 있는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꼬르륵.
알았으니 좀 조용히 있어라.
배는 고프고 아까 본 영상은 쉽게 머리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두손으로 얼굴을 탁탁치며 본채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가흔은 자신이 나온 건물 1층
의 창에서 막 빠져나오는 사람의 발견하곤 움직임을 멈췄다.
하긴 이런때에 도둑이 찾아오지 않으며 언제 영업을 하겠느냔 만은 왜 하필이 자신
이 있을때 저렇게 당당하니 모습을 들어내는 건지.
이번엔 별다른 부상을 입지 않기를 바라며 걸음을 죽인 그는 창에서 완전히 빠져나
와 몸에 묻은 먼지를 털고있는 팔자좋은 도둑의 뒤로 다가가 다리를 차서 넘어 뜨렸
다.
"움직이지마."
쓰러진 몸 위에 올라가 꺽은 나무를 칼처럼 위장해 도둑의 목뒤에 댄 가흔은 나지막
하게 말했다.
굳이 소리를 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할 필요도 없고 도둑이 들어왔다는 것으로 에스
의 집안에 누가 되게 할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웃?!! 뭐.. 뭐야?!!"
"조용히 하라니깐, 이대로 찔러 줄까?"
요란하게 몸을 뒤척이는 도둑의 목을 누르며 나뭇가지로 어깨를 두들이자 그제서야
조용해 진다.
얌전해 졌다고 생각한 가흔은 뒤로 꺽은 양팔을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나게 했다.
팔이 꺽여 너무 아픈덴 소리를 지르면 뒤에 있는 나뿐놈이 칼로 찌를것 같아 입술을
앙문 타칭 도둑씨는 일으켜지는 데로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간크게 저택에 도둑질을 하러온 자의 얼굴을 보기위해 가흔은 몸을 돌리라고 다시
어깨를 두들였다.
"미적거리지마. 지금이라도 당장 사람을 부를수도 있으니."
"......제길."
뭔가 굉장히 분한 듯한 목소리가 왠지 귀에 익다고 생각하던 가흔은 훤한 달빛아래
들어난 상대의 얼굴에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바닥에 떨어 뜨렸다.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 였던지 그닥 크지않던 눈을 왕방울로 만들며 가흔을 내려
다 보았다.
"점쟁이."
"축제날의 손님."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하던 가흔과 저번 마을에 나가 억지로 음식을 강탈하고 그의
점을 본 타칭 점쟁이자 도둑씨는 서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중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가흔은 그가 자신보다 눈높이가 높은 것에 놀라와 하며
안타까움이 베어든 음성으로 말했다.
"역시나 점은 장사가 안 되었나 보군. 도둑질을 하다니..."
"이봐!! 웃기지마! 누가 도둑질을 한다는 거야?!! 난 하루번돈으로 일주일 먹고 사는
능력있는 사람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곳에서 그런 수상한 모습으로 창에서 나온거야?"
"그야 문을 못 찾겠으니깐...!!"
열심히 자신을 변호하려던 타칭 점쟁이겸 도둑은 가흔이 가르키는 방향을 바라보곤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나온 바로 옆에는 작은 쪽문이 나있었던 것이다.
휘이이잉~
오늘따라 부는 바람이 유난히 서늘하다고 느끼며 점쟁이는 양손을 허리에 올려 놓
았다.
그런 모습을 굉장히 의심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던 가흔은 나지막히 말했다.
"네가 어째서 여기에 온건진 모르지만, 충분히 수상한 모습을 보였으니 이대로 보낼
수는 없어. 얌전히 따라오는게 좋을거야."
"정말 답답하네...!! 난 어디까지나 거래를 위해서 온 거라...위험!!"
불신 가득한 가흔의 검은 빛 눈동자를 정면으로 받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어떡해서든 자신의 무고를 밝히고자 했던 점쟁이는 가흔의 뒤로 날라오는
빛나는 물체에 얼굴을 굳히며 그의 몸을 잡아 끌었다.
" ?! "
갑자기 끌어안는 몸에 경직한 가흔은 그 몸이 의외로 크고 단단하다는 것과 가슴이
없다는 것에 놀라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얼굴은 분명 또래 여자아이의 그것인데 몸은 남자인 것이다!!
말로만 듣던 변태구나!!라고 충격에 헤어나지 못해 허우적 거리던 가흔은 그런 그의
얼굴이 너무나 굳어 있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순간 '핑' 소리를 내며 뭔가가 자신들을 향해 날라왔다.
점쟁이의 손에 끌어 당겨져 그것을 피해낸 가흔은 땅에 박히는 물체를 보곤 안색을
굳혔다.
삼일전 물건을 환불하러 갔을때 쫒아오던 남자들이 날리던 것과 똑같은 거다.
에스은 이것이 상처는 없지만 몸에 닿으면 순간에 마비증세가 온다고 말했다.
설마 그때와 똑같은 녀석들인가.
"제길. 여기까지 쫒아온 건가...."
"뭐?"
"아무것도 아냐."
저 남자들과 알고 있는 것같은 점쟁이의 말에 가흔은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품속의 가흔을 내려다 보던 점쟁이는 적어도 이 사람에게만은 피해가 오지 않도록
피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디서 나타난건지 어느새 수명의 남자들의 두명
을 애워싸고 있었다.
이렇게 된다면 혼자서 피하기도 힘들 것 같다.
저마다의 손에 길다란 봉같은 걸 들고있는 모습에 가흔은 이들이 자신들을 해칠 의
도가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가만히 두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새 땀이 베어나오는 이마를 훔치며 남자의 품에서 벗어난 가흔은 그의 등을 마
주했다.
"지금은 상황이 안좋으니 이 일이 정되면 왜 이곳에 있는지 다시 물겠어."
"역시나 쉬운 성격이 아니였어."
한탄조로 말하고 있지만, 그 음성엔 즐거운 기색이 역력하다.
들고 있는게 아무리 위력이 없어 보이다 해도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않은 가흔과 남
자에 비하면 무장했다고도 할수있다.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남자들의 걸음에 맞춰서 점쟁이와 마주한 등의 면적이 점점
넓어졌지만, 어쩔수 없는 노릇이었다.
점쟁이는 등을 마주하고 있는 가흔을 떠올리며 긴 망토에 가려져 상대에겐 보이지
않는 손안의 물건을 강하게 잡았다.
나중에 반드시 구해 줄테니깐...
화-악
등뒤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순간 고개를 돌린 가흔은 시야를 멀게 할만큼 강한빛에
눈을 감았지만, 이미 빛에 노출되어서 인지 감은 눈 안쪽이 따끔하다.
이런 상황에 앞이 보이지 않은 것만큼 치명상인건 없다.
상대편의 사정이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기를 기도하며 무작정 달려 나가려던 가흔
은 뒷통수에 느껴지는 충격에 움직임을 멈출수 밖에 없었다.
또 한번의 충격이 다리에 느껴지고 가흔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점점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 자신을 두고 혼자만 도망간 것이 분명한 그 점쟁이를 만
나면 가만히 안 두겠다고 생각하는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