쏴아아아아아---
계곡을 올라가는 동안 마차 앞머리에 라프헨과 함께 앉은 가흔은 위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물줄기를 감상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크고 굉장한 폭포는 본적이 없다.
수면이 부딫히면서 생기는 포말이 여기까지 올라오는 느낌이 상쾌하고 가슴이 탁
트이게 하는 기분이 들게 하였다.
이것저것 말해주는 라프헨의 말에 적당히 응수해 주며 계속해서 시선을 옆으로 돌
리던 가흔은 바로 옆에서 걸어가던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피하지 않고 계속 바라 보
았다.
그런 가흔의 행동에 고개를 돌린것은 남자쪽으로 실질적으로 눈이 마주치자마자 벼
락에 맞은 듯 얼굴을 돌렸으니 피했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거다.
"저 남자들 갑자기 공격해 오면 어쩌죠?"
"두목이 노웬님과 함께 있으니 그러진 않을 거예요. 생각보다 두목에 대한 의리가 대
단한 것 같으니 말이죠. 덤으로 칸님의 협박도 있고 하니."
"아-아-"
산적들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을 수 없었던 노웬은 자신의 시중을 들던 여마도사 젤
의 패밀리어로 하여금 계곡 주변을 살피기로 했다.
패밀리어라는 것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젤의 손안에서 나타난 커다란
독수리를 보곤 그런 종류의 것이려니 생각했다.
여러 조사를 통해 적들은 이미 후빌 하샤발에서 물러 나갔다고 판단 대열을 제정비
하고 바로 계곡에 오르기로 했다. 한시라도 빨리 목적지에 다달아야 했기에 감행하
는 일이었지만, 부상자가 많은 상태에선 상당히 위험한 도박이었다.
그것을 염두해서 노웬은 산적들의 두목을 인질로 삼고, 칸은 그들의 앞에서 집채만
한 바위를 자르는 것으로 훌륭하게 협박, 회유를 했다.
자신들을 호위하라고 말이다.
"그런 무식한 방법을 사용하다니..."
"아하하. 전 여러번 봐서 익숙해요."
눈앞에서 잘리는 바위는 가흔조차 질리게 했으니 그것을 보는 산적들은 어쩌겠는
가. 개중엔 오줌을 지리는 인간들도 몇몇 보였다.
흔들리는 마차에 맞춰 발을 아래위로 흔들던 가흔은 머리위로 펼쳐진 하늘을 올려
다 보았다.
슬픈 전설이 있는 곳이라서 그런지 어두운 구름이 낮게 깔려져 있다.
"..............."
앞으로 자신은 어떻게 될것인가.
목걸이를 믿고 이곳의 언어를 익히지 않는다면 나중에 크게 당황할 일이 생길수도,
이곳의 사람들이 지금은 다정하게 대해 준다만 나중일은 알수 없는지라 잃어버린
기억은 하루라도 빨리 찾아 둘 필요성이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흔들리는 가흔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라프헨은 작게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에겐 저마다의 고민이 있는 법으로 그것에 일일이 간섭하다간 감당을 못하는
법이다.
위로를 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라프헨은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머리가 무거운 느낌이다.
뿌연 연기에 가려 바로 앞조차 잘 보이질 않건만, 저 두 남녀만은 뚜렷하게 보인다.
뭔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모습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두 다리가 결박 당한 것처럼
움직이질 않는다.
이를 악물며 한 발자욱이라도 움직이려던 가흔은 여자와 대화를 나누던 남자가 고
개를 들자 움직임을 멈췄다.
............
.......
자신과 똑같은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그리움에 가흔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흐르는 눈물은 막을 수 없는 지라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에 그는 안타까운 느
낌이 되었다.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은데.
저 얼굴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데..
저 얼굴을 가까이서 만지고 싶은 데..! ! !
"................"
눈을 뜨자 보이는 천장에 가흔은 조금 눈을 감았다 떴다.
그에 따라 얼굴을 따라 흐르는 무엇에 그는 손을 들어 얼굴을 쓰다듬었다.
묻어 나오는 눈물을 멍하니 바라보던 가흔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물기가 묻
어있던 손을 접어 주먹을 쥐었다.
짹짹.
날이 밝기 시작하는 모양으로 커텐 사이로 흐릿하게 빛이 새어 들어온다.
멍멍한 머리를 어떡게 해서든 맑게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한 가흔은 비틀거리는 걸
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선반위에 올려져 있던 화병을 들어 올렸다.
움직일 때마다 눈물이 떨어져 내린다.
화병안의 꽃을 빼낸 그는 병을 들어 그대로 자신의 머리위로 부어 내렸다.
툭.
차갑고 비릿한 냄새를 후각을 자극하건만 정신은 아직도 멍멍한 상태.
한손에 병을 들고 한손엔 꽃을 들고 한참을 서있던 가흔은 문을 두들이는 기척에 얼
굴을 돌렸다.
달칵.
"실례합니다. 깨어 나셨다면 세면을.... 꺄악~!!"
고개를 숙이고 들어온 여자가 자신을 바라보자 마자 비명을 올리는 것을 기흔은 멍
하니 바라 보았다.
"정말이지. 손이 많은 가는 사람이네요. 뭐 그게 더 맘에 들긴하지만 말이죠."
"화병에 물이길 다행이지 욕조안에 다이빙이라도 했으면 옷입고 목욕하는 걸 즐기
는 이상한 인간으로 시녀들의 입방아에 올랐을 걸?"
칸의 이죽거림에 가흔은 고개를 털었다.
이미 자다 일어나 화병 안의 물을 뒤집어 쓴 남자로 소문을 났을 텐데 뭐가 걱정인
가.
자꾸 얼굴을 움직여 대는 가흔의 머리를 잡은 라프헨은 수건을 비비는 두손에 힘을
주어 박박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픈지 눈썹 사이를 찌뿌리던 가흔은 이내 고개를 움직이는 것을 관뒀다.
그러자 라프헨의 손길이 부드럽게 변한다. 비비는 대로 얼굴을 까닥이던 가흔은 자
신이 앉아있는 거실의 화려함에 눈만 때굴때굴 굴렀다.
꼬박 하룻동안 쉬지않고 후빌 하샤발 계곡을 넘은 일행은 산적들을 나두고 남쪽 변
방에 드디어 입성하게 되었다.
마치 영화 세트장이나 로마의 휴일에서나 본듯한 건물들의 모습에 놀랐던 가흔은
일행이 당당하게 들어가는 저택의 모습에 두번 놀라고, 그곳이 에스의 집이라는 것
에 세번 놀랐다.
그리고 에스와 에즈가 사실은 남매사이였다는 것은 더 이상 놀랄 기운이 없어 관두
기로 했다.
'어째서 이런 집에 사는 내가 용병생활을 하는지 묻고 싶어하는 눈이네요.'
저녁을 먹은 후 베란다에 기대어 있는 에스는 가흔을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
한동안 하늘에 떠있는 달을 바라보던 그는 자신을 머리카락을 꼬며 서있다 작게 중
얼 거렸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에즈와 나는 떠돌아 다니는 겁니다.'
그만이 들리도록 작게 중얼거린 에스는 일행들이 기다린다며 가흔의 팔을 잡고 안
으로 들어갔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자 사라졌다 나타났다며 괘씸죄로 몇잔의 술을 언거푸 들이킨
가흔은 그대로 필름이 끊어졌고, 아침에 일어나 그 난리를 피웠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는 가흔의 머리를 수건으로 몇번 닦는 라프헨은 그의 머리카
락이 뽀송뽀송해 지자 손을 놓았다.
평소엔 얌전히 가라앉은 모습만을 봐왔는데 이렇게 붕떠 있는 모양을 보자니 어려
보여 귀여운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하니깐 귀여운 데요? 반다나 같은거 하고 다니면 어떨까요? 양쪽을 이렇게
삐치게 하는 거예요."
"..........사양할께요."
시선을 딴데 돌리고 맘 상할까봐 딱 부러지게 거절 못하는 모습에 라프헨은 미소를
지었다.
맞은 편 소파위에 앉아 과자를 집어 먹고 있던 칸은 나른하게 기지개를 펴며 하품을
했다.
일찍 들어가서 제일 늦게 일어났건만 엄청 졸리다.
"전부 지루하기 때문이야. 노웬 녀석은 어디에 있는 거냔 말야!!"
"그는 일 때문에 바빠요. 칸님처럼 놀기만 하면 되는게 아니거든요."
"에스.. 저택으로 들어왔다고 묘하게 뻔뻔해 졌구나. 네놈."
"그런가요?"
"그래!! 어제도 한창 흥이 나는데 중간에 다들 들어가게 만들고, 오늘도 아침에 깨웠
잖아!! 모처럼 반나절까지 늘어지게 잘려고 했는데 말이지!!!"
입을 연 칸은 말을 할수록 뻣치는 열에 흥분을 멈출수가 없었다.
숫제 바닥을 두들이며 삿대질까지 하는 모습에 눈쌀이 찌뿌려 져, 고개를 돌린 가흔
은 벽장 안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길에 시선을 주다 아무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
다.
흥분한 칸과 그것을 즐기는 에스의 모습을 즐겁다는 듯이 바라보던 라프헨은 어느
새 일어나 문밖으로 나가는 가흔의 뒷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따라갈까하고 해봤지만, 그도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게 좋을 거라는 생각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에스의 저택이니 뭔가 위험한 일이 생길리도 없고 말이다.
"예쁘네."
색색깔의 꽃이 조화롭게 펴져있는 정원을 거닐던 가흔은 기묘한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는 석상 앞으로 걸어가 그 매끄러운 표면에 손을 대어 보았다.
멀리서 봤을 땐 돌인 줄 알았더니 만져보니 옥의 그것이다.
이런게 지나가면서 몇개나 있었다는 것을 떠올린 그는 질린 표정을 지으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도대체 입구에서 저택까지 얼마나 걸어야 하는지 모른다.
4층 짜리인 데다 탑으로 된 곳은 6층까지 있다고 하고, 방은 100을 넘는다 하니... 일
행들에게 독방을 주고도 남는 숫자이다.
이 세계에선 이런 어마어마한 부자가 많은 건가?
이만한 부자가 용병같은 곳에 따라다니니 말이다.
이상을 위해 떠돌아 다닌다곤 하지만, 저렇게 알수없는 사람들을 따라다니면서 무
엇을 얻을 수 있다는 걸까?
매번 싸움에 위험한 일 투성이니, 오히려 스트레스에 머리카락만 빠질거다.
한참을 걸어도 끝이 보이질 않는 꽃밭 한가운데 서있던 가흔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켁."
털썩 소리가 날만큼 주저 앉은 탓인지 일시에 꽃가루가 콧속으로 스며 든다.
손으로 코를 막으며 다른 손으로 얼굴을 앞을 휘저은 그는 고개를 들어 파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저 위에 하늘은 생각하던 원래 세계의 그것과 같다.
"....기억이 안나네."
뭔가 꿈을 꾼것 같은데 그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다.
애써 기억해 내려 했지만 갑자기 머리속이 멍해지는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미간을 접으며 한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동안 앉아있던 가흔은 발치에 드리워 지
는 그림자에 얼굴을 들었다.
"라헨."
라프헨의 형님이지만 전혀 닮지 않는 사람.
솔직히 라프헨같은 여리여리한 미소년과 저 곰같은 사내가 형제. 그것도 쌍둥이라
고 하면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저 칸도 그 사실을 안순간 거짓말치지 말라며 팔짝 뛰었다고
하니...
"가흔. 지금 시간있나?"
".....있습니다."
"그럼 나랑 말 좀 할까?"
자신한테 무슨 할말이 있는건지 알수는 없지만, 딱히 할일도 없고 자신을 찾아 주었
는데 무시할수도 없는 노릇.
자리를 털고 일어난 가흔은 앞서 걸어가는 라헨의 뒤를 따랐다.
여러번 와서 익숙한 듯 망설임 없이 걸어간 라헨이 멈춘 곳은 외부에 테이블과 의자
가 놓여있고 그 주위는 꽃들로 허리보다 낮게 벽처럼 둘러 싸여져 있는 곳이었다.
멋진 광경인지라 쉽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가흔은 먼저 안에 서서
차를 따르는 라헨의 모습에 멈칫거리며 안으로 들어서 라헨이 내민 의자에 앉았다.
세팅이 잘되어 있는 차나 과자들을 보니 우연히 만난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 같다.
"이곳 주방장의 솜씨는 훌륭하지. 맛있을 거다."
"아, 예."
쪼르르륵.
자신의 차잔에도 차를 따른 라헨은 조용히 가흔의 맞은편에 앉아 차를 한모금 들이
켰다.
그런 라헨의 모습을 살펴볼 뿐 과자나 차에 손을 대지않는 가흔의 모습에 남자는 한
숨을 내쉬었다. 의도하지 않은 것이겠지만, 저렇게 가만히 있으니 빨리 용건을 마치
고 보내 주어야 할 것 같다.
"저번에 마차안에 나와 라프헨이 있는 모습을 봤을거다."
라헨의 말에 가흔은 바로 긍정을 할수가 없었다.
본것은 사실이나, 그안의 적나라한 모습이 갑자기 떠올라 불편한 기분이 든다.
애써 내비치지 않고 있었는데 당사자인 라헨이 물으니 뭐라 대다할지 알수가 없어
진다.
미미하게 붉어진 가흔의 얼굴을 바라보며 라헨은 말을 이었다.
"물론 말로 하기 꺼려지는 모습을 봤다는 것도 안다. 내가 너에게 할말은 그건 라프
헨과 나 사이에선 다른 의미로 통한다는 것을 알아 주었으면 한다는 거다."
".......다른 의미요?"
"너도 라프헨이 능력을 쓰는 모습을 봤다고 들었다."
"아."
저번 숲속에서 흰자위가 보이지 않았던 라프헨의 눈을 떠올린 가흔은 입을 손으로
가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호러틱한 광경이었지...
"라프헨이 쓰는 힘은 마법도, 마술도 아닌 내부적인 능력을 끌어 올리는 것에 불과하
지. 그래서 힘을 쓰고난 후에 지친 심신을 치유하는 것도 다른이들과 다른 방법으로
해야해."
"...그게 그거..인가요?"
"그와 나는 쌍둥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기가 높아지지만, 너가 말하는 그거를 한
다면 좀더 큰 효과를 볼수있어."
자신이 사용한 단어를 이용해 말을 하는 라헨의 모습에 가흔을 좀더 얼굴을 붉혔다.
그 행위에 대해 딱히 뭐라 말할수 없었던 가흔이지만, 그걸 듣는 라헨의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흔의 마음을 아는지 라헨은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내려 놓았다.
"물론 치료의 의미로만 그런 행위를 하는 건 상당히 이상한 일이지."
"네?"
"서로에게 마음이 있거든. 나와 라프헨은."
그럼.. 그 말은..
차마 뭐라고 말하지 못하고 두눈만 동그렇게 뜨고있는 가흔을 보며 그 얼굴이 꽤나
귀엽다고 생각하는 라헨이었다.
굳어서 뭐라 하지 못하는 가흔을 앞에 두고 과자 한개와 차를 완전히 비운 라헨은 그
제서야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것에 대해 내색하지 않고, 라프헨에게 상처를 주지 않아서 고맙다. 앞으로도 그렇
게 해주었음 하는군. 그럼 할말은 다했으니 먼저 들어가 보겠다."
".........."
"너무 오래있지 않는게 좋다. 모두가 걱정할 테니."
망토를 휘날리며 사라지는 라헨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가흔은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서야 크게 숨을 내쉬며 몸을 뒤로 기댔다.
도대체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굳이 정리를 하자면, 라프헨의 치료를 위해서도 서로의 마음을 나누기 위해서도 그
런 행위를 한다는 거다.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리에 받아들이기 힘든 것만을 던져주고 사라진 라헨을 원망하
며 가흔은 테이블 위로 쓰러졌다.
"안 그래도 찾으려던 참이었어.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니?"
"에즈... 굉장히 예쁘네요."
터덜 거리며 저택 안으로 들어온 가흔은 제일 먼저 자신을 맞는 에즈의 모습에 걸
음을 멈추어야만 했다.
바지랑 셔츠를 입고 국자나 식칼 등을 들고 있는 모습만 봐 왔는데 지금은 옥색과
하얀색이 멋들어지게 어울려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중세때 미망인들이 입는 상
복과 비슷한 디자인이었지만 색이 틀려서인지 상당히 멋지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겨 그녀와 아주 잘 어울렸다.
언제나 묶고 있던 갈색의 머리카락을 반묶음해서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에즈는 가
흔의 칭찬에 양손을 허리에 대보이며 한바퀴 돌아 보았다.
"이래뵈도 10대적엔 따라다니는 남자들이 줄을 섰지."
"지금도 미인이예요."
"어머~ 가흔은 의외로 여자를 기쁘게 하는 말을 잘 알고 있구나. 누군가완 틀리군."
그 누군가는 분명히 칸일거라고 생각하며 가흔은 어설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에스와 남매지간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인지 그와 약간 비슷해 보인다.
저 푸른 눈동자와 웃을때 들어가는 보조개도 비슷했고, 에스와 마찬가지로 에즈에
게도 얼굴에서 몇개의 주근깨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에즈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터라 그녀의 뒤에 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미쳐
눈치채지 못했다.
에즈와 비슷한 디자인으로 된 파란색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노웬의 비서격이자
마도사이기도 한 젤이라는 여자였다. 머리를 묶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풀고
나니 그녀가 금발의 고수머리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노웬을 따라 같이 간게 아니였던가?
"안녕하세요. 가흔씨. 저번엔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뇨. 별것도 아니였는데 뭘..."
산적들이 습격했을 때 그녀를 공격하려던 남자를 날린 검으로 쓰러뜨린 때의 일을
말하는 것 같다.
그때는 당황해서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던져진 검의 범위가 조금이라도 어긋났다면 이 젤이라는 여자
를 맞출수도 있던 각도였는지라 가흔은 그때의 일을 애써 언급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선 마도사를 구한 이국인이라는 걸로 꽤나 소문이 무성한 모
양. 그리고 의외로 검실력이 좋다는 것 같아 결투를 준비하는 자들도 몇있다는 에
스의 말엔 마시던 물을 뱉어 낼뻔도 했었다.
"당신의 도움이 아니였다면 전 여기에 없었을 겁니다. 당시엔 정신이 없어서 제대
로 인사를 드리지 못했는데. 어떠신가요? 같이 나가서 식사라도 같이 하시겠어요?"
"데이트 신청인가? 과연 생긴 값을 하는 구나. 가흔."
"아..아니. 전 안에서 먹어...! !"
젤과 에즈의 말에 당황하며 거절하려던 가흔은 갑자기 뒤에서 잡아 당기는 힘에 입
을 다물었다.
어느새 나타난 건지 칸과 에스가 뒤에 서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밖에 꽤나 음식솜씨가 좋은 식당이 있습니다. 오늘 점심은 그리로 가는 게 어떨까
요?"
"괜찮은 생각이야. 어이, 가흔. 너도 좋지?"
싫다고 말하면 그대로 목을 분지를 것 같은 악력에 가흔은 어쩔수 없이 고개를 끄
덕일 수 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사람 다루는 법에 능숙한 인간들이라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다.
가흔의 결정이 무척이나 맘에 들었던지 환호성을 울린 사람들은 어느새 밖에 준비
되어 있는 마차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봐, 나랑 같이 밖에 타자고. 이 기회에 마차 모는 법을 알려주지."
"..뜻대로."
어차피 몸은 이미 끌고가면서 의사를 묻는 건 어느 나라 법이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독설로 칸의 입을 다물게 할수있는 노웬도, 특유의 강직함으로 그가
대들수 없게 만드는 라헨도 아니였다.
단지 그의 말에 따를 뿐.
상당히 비참한 처지가 되어가고 있는 그였다.
무리지어 마차를 타고 밖으로 나가려는 일행을 창밖으로 내려다 보던 라프헨은 뒤
에서 어깨를 끌어안는 손길에 몸을 돌렸다.
라프헨의 뒤에 서서 칸 일행을 바라보던 라헨은 고개를 내려 그의 동생을 바라 보
았다.
"함께 가고 싶으면 가지 그래?"
"으응. 아니요."
어깨에 올려진 라헨의 손을 잡은 라프헨은 마지막으로 마차에 오르는 가흔의 모습
이 사라지고 나서야 시선을 떼고 몸을 돌렸다.
저번 산적들이 출몰했을 때 가흔은 뭔가가 보인다는 묘한 말을 했었다.
지금까지 마도사의 마력을 그 본인말고 다른이가 봤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 라프
헨으로서는 가흔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기에 불안감을 지울수가 없었다.
마력을 본다는 것은 역으로 말하자면 그 힘의 영향을 받지 않는 다는 것을 뜻한다.
불안해 보이는 라프헨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내려다 보던 라헨은 왜 그러냐는 듯이
그의 턱을 올려 보였다.
"걱정이 있는거야? 얼굴색이 안좋아."
"그다지... 약간 걸리는게 있지만.."
"뭔데 그래?"
믿음직스러운 라헨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 보던 라프헨은 이내 미소를 지으며 그
의 목에 매달렸다. 안겨오는 작은 몸을 끌어안은 라헨은 대답하지 않는 라프헨의
태도가 걱정스러웠지만 굳이 케묻지는 않았다.
그 배려가 고마워 라프헨은 작게 웃었다.
"이 저택엔 이제 우리뿐이군요. 오랜만에 단란한 시간을 보내겠는 걸요?"
지저귀는 듯한 라프헨의 목소리에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보인 라헨은 날씨가 좋은
밖을 내다 보았다.
구름 한점없는 좋은 날씨다.
"아아- 정말 오랜만은 즐거운 시간을 갖겠는 걸."
"사과 좀 드셔 보세요. 아주 달답니다~"
"총각 이리와서 이것좀 먹어보지. 아주 기가 막혀!"
"이거랑 저거. 그리고 이것도 주세요."
"좋은 날씨 사랑하는 연인에게 꽃 한다발 어떠세요?"
마을이 커서인지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점심때고 장이 서는 날이라 축제를 겸하고 있기에 사람이 많은거라고 에스에게 듣
긴 했지만, 생소한 얼굴과 옷차림의 사람들 사이에 있던 가흔은 역시나 그 규모에
질려 버렸다.
마치 외국에 자신 혼자만이 던져진 것 같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군것질을 해대는 칸의 옆에 서서 잡다한 것들을 받아 들고 입
에 대지 않는 가흔의 눈동자는 자신을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시선을 주었다.
일부 소녀들은 이국적인 생김새에 잘 차려입은 가흔의 모습에 호의섞인 시선을 던
지기도 했지만, 칸에게 붙어 있기에도 벅찬 그로써는 미쳐 그 시선들을 신경쓰지
못하고 있었다.
"흐음- 가흔군은 여자를 사귄적이 없는 것 같네요."
"그렇지? 꽤나 놀았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그런 면이 쑥맥인게 귀엽다니깐."
"그렇군요. 아, 에즈. 이 옷 정말 이쁘지 않나요?"
"어머? 정말?! 어디이 있던 거야??"
연신 뭔가를 입에 넣고 있는 칸과, 그런 그의 곁에서 불안하게 서있는 가흔의 모습
을 바라보던 젤과 에즈는 이내 자신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물건에 매달렸다.
장을 보는 것이 오랜만이기는 하지만, 이것저것 사들여서 이미 타고온 마차안을 꽉
채운 여자들의 구매욕을 바라보던 에스는 한숨을 내쉬며 눈동자를 굴렸다.
여자들의 뒷바라지 하는 것이 즐거운 것은 아니였지만, 마차안에 물건이 다 들어가
지 않으면 자신을 부려 먹으려 에즈가 부를테니 어딘가에 있을수도 없다.
자신의 누님은 조금이라도 늦으면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이니깐.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구석에 서있는 마차 앞에 앉아 넘쳐나는 인간들을 바라보던
그는 그 평화로워 보이는 모습에 미소를 띄었다.
남쪽 대륙은 중앙의 왕권 국가완 다르게 자치적으로 정치를 꾸려가는 곳이다.
시작은 험난했지만, 현재로썬 꽤나 안정을 찾아 다른 대륙에서도 그 이념을 도입하
려 하고 있었다. 초창기 자치국을 세우는데 일조했던 에스 일가는 현제 남방계에선
가장 유명한 가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했다.
와삭.
"..달군."
칸이 던져준 사과를 베어물며 에스는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자신이 이루어 낸 업적이 아닌 조상들의 덕을 등을 업고 살아가고는 있지만, 이렇
게 까지 나라가 번성하는데 그들의 조상이 일조했다는 것은 그에게 상당한 긍지를
주는 일이다.
그래서 에스도 조상님들 처럼 뭔가를 이루고 싶어했다.
물론 그 생각만으로 이런 험난한 일에 뛰어든 것은 아니지만...
시선을 돌려 멀리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검청과 검은색의 머리카락을 발견한 에스
는 입을 가리며 쿡쿡거렸다.
"꽤나 힘들어 보이네요. 가흔."
칸이 얼마나 빨빨거리고 돌아다니기를 즐겨하는지 익히 아는 그로썬 가흔의 입장
이 자신만큼 처량하다고 느껴졌다.
"이봐. 이거 먹을래??"
"....아직 이만큼이나 남았는 걸요."
"쯧쯧. 먹을 걸 안 먹으니깐 그렇게 비리비리한거 아냐? 어서 먹어!!
내가 사는 거니깐 ! "
에스의 돈으로 사는 거겠지.
양팔안에 가득 들고있는 음식들을 처지곤란해 하며 걸음을 옮기던 가흔은 다시금
뭔가를 먹으려 뛰어가는 칸의 모습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먹은 것만 합해도 자신의 하루끼니는 때웠을 거다.
"카....!"
꽈-악.
칸의 이름을 부르려 입을 열던 가흔은 자신의 옷을 잡는 손길에 안색을 달리했다.
말이 통하기는 하지만, 칸 일행의 제외한 사람들 과의 접촉이 전무한 그로썬 뒤를
돌아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상당한 고민에 빠지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냥 어딘가에 걸린게 아닐까하는 희망적인 생각을 잠시 해보기도 했지만, 그 존재
가 말까지 하니 그냥 물건은 아닐 터였다.
"젊은이 점이나 보고 가지?"
"..........."
점쟁이 인가?
일견 음침해 보이는 노인의 모습을 상상하며 뚝뚝 소리가 날것같은 움직임으로 목
을 돌린 가흔은 시야에 보이는 얼굴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과 동갑이라고 여겨지는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가 자신의 옷을 잡으며 미소를
짓고 있었던 것이다. 검은 천을 멋지게 둘러싸고 입가를 투명한 천으로 가린 여자
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가흔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지금 들고있는 음식을 전-부 주면 복채는 무료로 해주지."
"...복채?"
내밀어진 손바닥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는 가흔의 태도에 소녀는 양손을 들어 짝
소리가 나도록 마주쳤다.
되려 놀라 뒤로 물러나려는 움직임에 두눈을 번뜩인 소녀는 가흔의 옷자락을 잡아
억지로 탁자 맞은편에 앉힌 다음 그의 뒤에 있던 끈중 하나를 잡아 당겼다.
막대에 엉성하게 달려있던 천들이 일시에 내려오면서 가흔뒤에 처지게 된것으로도
영업장소가 마련된 것인지 탁자를 소리나게 내려친 그녀는 위풍당당하게 다시금
손을 내밀었다.
"우선 거기에 있는 감자조림부터 먹을 볼까?"
"하-아??"
품속의 음식들을 하나씩 빼먹는 모습이 상당히 억지스러웠지만, 어차피 처지 곤란
한 것들이었기에 가흔은 그녀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는 모습을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인 소녀는 가흔이 들고있던 음식이 바닥
을 보이고 나서야 입을 닦고 자세를 바로했다.
"자-아. 그럼 손님 손님께서 무엇을 알고 싶으신가요?! "
"........"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었던 적이 전혀 없었다는 듯이 자세를 당정히 하고 점술가처
럼 구는 그녀의 모습에 기가막힌 가흔은 상당히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의 얼굴을 무척이나 재미있던지 눈썹한쪽을 올린 그녀는 웃음을 참듯이 입
술을 깨물었다.
"이봐요. 아까는 배가 고파서 어쩔수 없었던 거라고요. 이래뵈도 꽤나 잘 알려진 점
쟁이니깐."
".....그다지 알고 싶은건 없으니 이만 실례."
"어-허!!"
그냥 가겠다는 데도 잡고 놓아주지 않는 모습에 가흔은 어떻게 하면 이 여자에게서
벗어날수 있을까하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런 그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금 억지로 자리에 앉힌 소녀는 실랑이를 해서
인지 베어 나오는 땀을 소매로 닦았다.
"안 그래도 옷을 두껍게 입어서 더운데, 자꾸 움직이게 하지 말란말야.
화장 지워지잖아!!"
"..........."
"지금까지 복채를 받고 손님을 그냥 돌려 보낸 적은 한번도.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
었어!!"
그럼, 내가 처음이 되면 되잖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는 시
선에 불편한 표정만 만들어 보일 뿐이다.
탁.
"원하는 게 없으니 그냥 무난하게 아무거나 불러 줄테니, 믿거나 말거나 댁 마음대
로 하셔."
"장사하는 사람이 손님한테 그런식으로 말해도 되는 거야?"
"그럼, 안될건 뭐야??"
"..........."
또다시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는 눈초리에 절로 입이 다물어 진다.
입을 다물고 가만히 앉아있는 가흔의 모습에 그제서야 소녀는 헛기침을 하며 테이
블에 올려놓은 자잘한 돌맹이 몇개를 들어올리더니 양손으로 잡고 흔들었다.
티비나 신문에서 점보는데 재산을 탕진한 사람들을 볼때마다 혀를 차며 안좋게 생
각하던 그로썬 갑자기라고는 하지만, 점을 보게 되니 그리 맘에 편하진 않았다.
"그렇게 안좋은 표정 짓지마. 인생은 얼굴이라잖아? 찡그리고 잇으면 달아나던 악
운도 달려와 덮치는 법이라고."
"...그럴까?"
"그럼."
상당히 액션이 많은 사람이다.
말을 할때마다 들어 올리는 손이나 리얼하게 변하는 얼굴에 절로 기분이 가벼워 지
는 것 같다. 조금씩 풀어지는 가흔의 얼굴이 맘에 들었던지 생긋하고 웃어보인 그
녀는 이내 들고 있던 돌맹이를 테이블 위로 던졌다.
꽤나 많은 수의 돌들이 던져졌지만,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은 점만은 신기했다.
그외엔 심드렁한 표정으로 관심없어 하는 가흔의 모습에 소녀는 오기가 생겼다.
지금까지 자신의 점을 보러 오는 자들중에 저렇게 무관심한 반응은 처음일 뿐더러,
이렇게까지 그녀를 설레이게 한 사람도 가흔 그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 그를 억지로 붙잡은 것 일수도 그리고, 분하게 느껴지는 지도 몰랐다.
가흔의 얼굴에서 시선을 내린 그녀는 천천히 점괘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처음과 끝이 다르네. ....이런 건 처음 보는데...??"
생소한 점괘에 가흔의 얼굴을 변하게 할만한 멋진 점괘를 나타내겠다고 내심 결심
하던 소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던 가흔은 역시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만 둬도 괜찮다고 말
하려 했지만, 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행동을 제지하는 움직임을 취했다.
한동안 떨어진 돌들에 시선을 주던 그녀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가흔을 바라 보았
다.
"당신... 인간맞아?"
".........."
소녀의 말에 가흔은 약간이지만 표정이 흔들렸다.
인간은 맞지만, 이곳 세계의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기억이 없으니 그녀에게 시원하게 답할수도 없고...
가흔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던 소녀는 두 손을 올리며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
였다. 점쟁이로서 손님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 만큼 최악인 것은 없다.
그게 어떤 점괘가 나오더라도 말이다.
"농담. 댁이 너무 잘 생겨서 그런거야."
"......"
"운은 대체적으로.. 좋다고 해야하나?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최후까지 목숨줄을 연
명하게 되겠어. 사람마다 그 의미는 다르겠지만, 난 당신이 그것을 긍정적으로 생
각했으면 좋겠네. 돈도 조금 만질 것 같고, 어라? 연예운도 따르잖아??"
갑자기 말의 핀트를 바꾸려는 듯이 조잘대는 소녀의 얼굴을 가흔은 조용히 바라 보
았다. 뭔가를 눈치챈 것같은데 일부러 말을 안하는 것 같다.
그것을 묻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냥 모르고 지나치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가만히 앉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었다.
처음 의표를 찌른 말에 그녀를 신용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주위에 운명의 상대가 있어. 하지만 둘다 평탄치만은 않은데? 지금으로썬 만났다
고도 안 만났다고도 할수 없는 상태. 상당히 어려운데~"
"무슨 말이야?"
"그렇다는 거야. 굳이 그런 어려운 연애를 찾지 않아도 근처를 둘러보면 나같이 매
력적인 여자가..."
"일행이 찾는 것 같네. 이만 일어나겠어."
헛소리를 늘어 놓을 것 같은 태도에 가흔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런 그와 맞추어 자리에서 일어난 소녀은 음율을 맞추듯이 말을 이었다.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상당히 불
안하고 어려워. 마치 외줄다리를 타고 있는 것같아."
" ? "
"적당히 즐기는 게 좋아. 인생도 사랑도, 말이지. 그런 것이 상처받는 것만큼 치명
적인 건 없다고요. 잘생긴 오빠."
"....충고 새겨 들을게."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도움이 되는 이야기인것 같아 가흔은 작게 고개
를 숙이며 멀리 뒷통수가 보이기 시작하는 칸의 모습을 좇았다.
"하루라도 빨리 자기 자신을 찾도록- 미인씨."
" ? "
흘러 들을수 없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 뛰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보려했던
가흔은 그러나 갑자기 늘어나 인파에 쓸려 소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사람에 채여 흔들리는 가흔의 모습을 발견한 칸은 한참을 찾던 그가 이런 곳에 있
어 약간은 어이없어 하며 팔을 잡아 끌었다.
"이봐. 어디에 있었어?"
"그냥... 저기에..."
"빨리와. 재미있는거 한단 말야! !"
어린아이처럼 흥분하며 손을 잡아끄는 칸의 행동에 따르며 가흔은 연신을 뒤를 돌
아 보았다. 자기 자신을 찾으라니.. 기억을 찾으라는 소릴까?
..................의외로 대단한 점쟁이었을 지도.
와-아! ! !
갑자기 들리는 함성에 가흔은 고개를 들어 사람들이 바라보는 쪽으로 시선을 주었
다. 그런 가흔의 옆에 매달린 칸은 흥분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름답지? 정령이라는 거야. 역시나 남쪽은 좋아. 저런걸 볼수 있다고!!"
".........아름답다."
높은 장대위에 하얀 천을 두르고 서있는 자의 주위로 색색깔의 작은 인형들이 돌고
있었다. 황금색의 실위로 뛰어 노는 날개달린 작은 것들의 움직임에 따라 빛나는
무엇인가가 허공을 수 놓았다.
느리게 또는 빠르게 낙하는 그것에 손을 내민 가흔은 닿자마자 사라지는 빛에 안타
까운 느낌이 들어, 들어올린 손을 가만히 쥐었다.
허공을 수높은 그것들은 인형치곤 정교한 생김새다.라고 멍하니 생각하는 가흔의
주위로 어느새 에스와 에즈. 그리고 젤이 다가와 섰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군요. 아직도 저런 것들이 남아있었네요."
"아마도.. 희귀한 종의 마지막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죠. 우리들은."
젤의 감탄에 조용히 대답하는 에스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가흔의 옆모습에 시
선을 주었다.
100여년 전만해도 저런 정령들은 만나려고 한다면 만날수 있는 존재였지만, 갑자
기 마도력이 강세를 올리기 시작하자 그 존재가 하나둘씩 사라졌다.
순수한 자연친화력이 그들이 존재하기 위한 필수조건인데 반해 그것을 제공해 주
던 재능있는 인간들이 출세를 위해 마도쪽으로 대거 이동해 버렸기 때문이다. 게다
가 그들이 살던 숲까지도 점점 마도 특유의 물이 들어 터전까지도 사라지게 만들었
던 것이다.
아마 가흔이 직접 보지 못했다면, 설명하는 데에 꽤나 애를 먹었을 텐데 이런 식으
로 운이좋게 보여줄수 있게 되었다.
아직 순수한 기운이 많이 내재되어 있는 남부.
에스 자신의 고향쪽이니 좋은 것이 있다면 가흔 그에게 모두 보여주고 싶었다.
희미한 미소를 지은 에스는 신기해 하는 가흔에게 설명을 하기위해 조용히 입을 열
었다.
"근사했어."
"멋진 경험이 되었네요. 우리들에게도 가흔이게도. 그쵸?"
웃는 얼굴로 물어오는 젤에게 미소로 화답하며 가흔은 마차뒤로 몸을 기댔다.
아직 흥분의 기색이 사라지지 않아 얼굴에 홍조가 남아 있는 것도 같다.
좋은 구경을 했다며 흥분해 떠들고 있는 젤과 에즈의 모습을 바라보던 가흔은 어깨
에 느껴지는 무게에 고개를 돌렸다.
완전히 골아 떨어져 자신의 어깨를 베고 자는 칸의 모습을 본 가흔은 잠시 몸을 굳
었지만, 칸의 입가에 흐르는 침 한줄기를 발견하곤 웃음을 참기위해 잠시 헛기침을
했다.
앞의 두 여자들이 칸의 이런 모습을 봤다간 또 한바탕 놀리기가 시작될 것이 분명
했으므로 가흔은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 그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문득 흐트러진 검청색의 머리카락을 만지게 된 가흔은 그 신비로운 색과 감촉이 이
채로와 한동안 그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다 고개를 돌려 어두워 지기 시작하는 밖을
내다 보았다.
"빨리 들어가서 산 옷들을 입어봤으면 좋겠네요."
"그렇군. 가흔도 입어 봐."
에즈의 말에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발치에 채이는 상자들을 내려다 보았다.
칸과 에즈의 등살에 밀려 산 옷가지들도 꽤되는 데다 별에별 이상한 장신구도 사들
여 그 수는 꽤나 많았다.
게다가 가장 그를 걱정스럽게 하는 것은 한쪽 팔에 채어져 있는 가느다란 은색 링.
보호구라 해서 몸속에 차고 있으면 외부의 충격에도 쉽게 다치지 않는 거라곤 하지
만, 금화 몇개가 거래로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고나선 부담스러워 거절을 했음에도
우격다짐으로 안겨주는데 수가 없었다.
노웬이라는 사람 꽤나 깐깐하고 재정에 대해선 아주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는 것 같
던데... 자리밑에 쌓여있는 자신의 짐을 제외하고라도 마차 위에 산같이 쌓여있던
젤과 에즈의 짐들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부디 오늘 밤은 조용하게 지나갔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호-오. 꽤나 요란한 짐들이군요."
유쾌한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에즈와 젤들이 엄청나게 사들인 짐들을 힘들게 옮기
던 세남자. 가흔, 칸, 에스는 머리위에서 울리는 낮은 음성에 움직임을 멈췄다.
새벽에 나가 그동안 후송해 오던 마차안의 짐들을 유용하게 바꾸고 온 노웬은 앞뜰
에 늘어진 짐들을 손으로 두들이며 무척이나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스는 그런 그의 등장에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칸은 뭔가를 기대하는 표정을
가흔은 아무것도 모르니 예의 무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서있다 들고있던 짐의 무게
가 느껴지자 노웬의 곁에 쌓여있던 짐위에 하나 더 추가했다.
"가흔군도 같이 나갔나요?"
"어쩌다 보니..."
원해서 간것은 아니였지만 꽤나 즐겼기에 뭐라고 할말이 없다.
분위기를 보자니 물건을 많이 사들인 것에 대한 추궁일것 같은데 원치 않으나 에즈
의 등살로 자신에게도 할당된 짐들도 꽤나 있으니..
가흔은 등뒤로 흐르는 식음땀을 느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칸님도 나가셨나요? 맛있는건 많이 드셨습니까?"
"뭐, 그다지 별로 먹은건 없는데?"
그런 칸의 대답에 거짓말이라고 외치고 싶은 가흔이었지만, 애써 참으며 입을 꾸욱
다물었다.
먼저 저택 안에 들어가 짐들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에즈와 젤은 그 시간이 길어지자
무엇을 하기에 뭐가 이렇게 늦나하고 밖을 내다 보았다.
"뭐하는 거야? 에스. 어서 들어오지... 헉?! 노웬님!!"
"흐음- 꽤나 즐거워 보이시는 군요, 에즈양."
에스와 칸을 닥달하여 나름대로 좋은 느낌을 맛보려던 에즈는 내일이나 돌아올줄
알았던 노웬의 모습이 눈에 띄자 안색을 굳히며 뒤로 물러났다.
그런 에즈와 그녀의 옆에 서서 가만히 웃고만 있는 젤의 모습을 확인한 그는, 침착
을 유지하며 나즈막하게 말했다.
"이 물건들 당장에 환불하고 오십시오."
불쾌감이 뚝뚝 떨어지는 노웬의 청천벽력같은 말에 에즈와 젤의 얼굴은 순간 변했
지만, 극도로 기분이 안좋아 보이는 그에게 덤빌수 있는자는 이 자리엔 아무도 없
었다.
아깝지만 차마 뭐라 반대를 못하는 두 여자를 눈으로 확인한 노웬은 가만히 서있는
세 사람에게 다시 짐을 마차에 실으라고 명했다.
말 그대로 토를 달지 말라는 기운이 팍팍 느껴졌으니 들은 사람에겐 명령조가 다분
한 어조에 기분이 좋을리가 없지만, 마찬가지로 토를 달만한 사람은 없었기에 가만
히.....
"누구한테 명령이야?!! 난 안들어 힘들다고!! 산 사람이 가서 바꾸고 오란 말이다!!"
과연 칸.
낮에 먹으랴 놀랴 꽤나 바쁘게 여기저기 다닌 그는 피곤해 죽겠는데, 짐을 들라고
시키는 에즈나 다시 갔다오라고 시킬 것 같은 노웬이나 둘다 똑같게 보였다.
고급스럽게 포장되어 있던 상자는 내던져진 여파에 그대로 구겨졌지만, 그것에 신
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노웬과 칸 사이에 느껴지는 팽배한 신경전에 그들은 침을 삼켰다.
눈을 치켜뜨고 자신을 올려다 보는 칸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던 노웬은 실소를 흘
렸다.
그 웃음에 잠시 움찔하던 칸이었지만, 주위에 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깨닭곤 움츠
려드는 몸을 애써 펴기위해 노력했다.
그래봤자 삐질하고 흐르는 땀을 어찌할수 없는 건데 말이다.
"그렇게 싫으시다면 다른 사람을 시키겠습니다. 본인이 가기 싫다고 이렇게 짐을
던지다니.... 제가 잘못 가르켰나 봅니다."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노웬의 모습은 흡사 귀기에 휩싸인것 같았다.
자신을 심부름하기 싫어하는 아이로 치부하는 그의 말에 뭔가 반박을 하고 싶어하
던 칸의 뒤로 잽싸게 돌아간 에스는 그의 입을 틀어 막았다.
그런 에스의 팔을 풀기위해 '읍읍.'거리던 칸이지만, 지금 노웬이 저기압이라른 것
을 알고 있기에 그렇게 적극적으로 반항하지는 않았다.
이쯤에서 물러가는 게 서로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짐은 내일 제가 환불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너무 늦었고, 한창 축제기간인데
이런 일로 얼굴을 붉히기는 그렇잖습니까?"
"그럼 에스군에게 맡기고 전 이만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아침부터 이곳저것 힘들
게 다녔더니 상당히 피곤하군요."
"너만 피곤하냐... 나도...!! 읍읍읍~~!!!"
놀다 피곤한거랑 일하면서 피곤한거랑의 차이는 엄청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모르는 단 한사람. 칸이 또다시 파장 분위기를 만들
것 같아 이번엔 가흔까지 합세해 몸부림치는 그를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런 세 사람을 바라보던 노웬은 한숨을 쉬며 아까부터 나와 안절부절 못하는 에스
가의 집사에게 짐을 안으로 옮기라 지시했다.
하나 씩 옮기지던 짐들을 무척이나 아쉽게 바라보던 에즈와 젤은 노웬의 칼날같은
눈동자와 마주하자 피눈물을 흐리며 저택안으로 들어 갈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