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다이아몬드와 춤을
유리는 다리를 꼰 채로 바깥을 구경했다. 올리브 나무와 포도나무가 도로를 경계로 양옆에 펼쳐졌다. 어릴 때 한 번 오고 올 일이 없던 곳이었다. 그때는 아버지도 계셨는데, 오늘은 혼자다. 이곳은 언제 와도 여름이구나. 창문을 내리자 선선한 바람이 들어왔다. 바람에서 풀 냄새가 났다. 그는 하늘을 응시했다. 해가 저물어가는 자리는 와인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러시아에서 돌아온 이후 베이징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새 지사장을 보내는 듯했다.―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동안 요양한다며 만남을 피했기에 유리도 아나스타샤를 직접 보는 건 한 달 만이었다.
한 달간의 잠적을 끝내고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이탈리아로 부른 것은 축하연 때문이었다. 아들이 멀쩡히 돌아온 것을 축하하며, 시모나로티가 파티를 연 것이다. 아나스타샤를 경호해준 오시프와 다른 라포포르트들에게도 초대장이 갔지만 다들 바쁘다는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결국, 라포포르트 대표로 유리가 참석하게 됐다. 대표로 가지 말라고 해도 왔을 테지만, 어쨌든.
차를 타고 조금 더 달리자 호텔이 보였다. 3층짜리 저택에 정원을 잘 꾸며놓은 용의 둥지였다. 차가 현관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해가 다 져버리고 말았다. 차에서 내리자 현관에 서 있던 라이엇이 아는 체를 했다. 다비드를 마주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유리는 가볍게 묵례했다.
“아냐는 회장에 있을 거예요.”
“예.”
“인지오 씨랑 메즈 씨는 로비에 계시고요.”
그는 친절하게 주최자 위치도 알려줬다. 친절로 치부하기에는 어딘가 껄끄러웠다. 특히, 눈빛이 그랬다. 유리는 인상을 쓰고 라이엇을 훑었다. 라이엇은 볼을 붉히며 수줍어했다. 왜 저래. 꼭 뭔가 기대하는 눈친데…….
“메즈 씨는 처음 보시죠? 다비드 씨 아버지예요. 생긴 건 아나스타샤를 더 닮기는 했지만요.”
어쩌면 축하연은 환영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포포르트의 대표로 왔는데 시모나로티가 돼서 돌아가면 ‘라포포르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유리는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려 웃었다.
“그렇군요.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네……! 축하해요, 유리 씨.”
라이엇이 웃었다.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유리는 라이엇을 지나쳐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 중앙에는 대리석 조각이 있었다. 장식에 공을 들였나 싶어 구경하는데 그 얼굴과 몸매가 눈에 익었다. 유리는 석상을 노려봤다. 긴 머리칼과 하프를 든 자태가 아나스타샤가 자신을 모델로 두고 그린 그림과 비슷했다.
드레스와 연미복을 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안부를 묻는 사교의 장이었기에, 유리는 석상에 주먹질을 내지르는 짓을 가까스로 참았다. 연락은 하나도 안 받으면서 이런 걸 만들어? 유리는 인지오와 인사를 나눈 뒤 얼른 아나스타샤를 찾으러 가고 싶었다.
“유리. 와줬군요.”
시선을 이끄는 목소리가 유리를 부른다. 유리는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봤다. 보타이에 파란 행커치프를 낀 인지오가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었다. 메즈 시모나로티가 따라왔는데 아나스타샤와 비슷하게 생겼다. 서로 아들이 바뀐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서로의 자식을 쏙 빼닮았다.
“먼 길 왔어요.”
인지오가 유리를 끌어안고 양 볼에 입을 맞췄다. 격한 환영에 유리는 거절할 틈도 없이 메즈에게도 볼 키스를 받았다.
“오시프 씨는 안 보이는군요.”
“예. 아프거든요.”
“아파요? 하하, 레오파드도 사람이군요.”
레어 열쇠를 가졌으니 입 닦은 줄 알았지. 메즈가 웃었다. 인지오는 미간을 찡그리며 유리에게 사과했다. 유리도 오시프가 아프다는 말을 믿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고민했다. 자신도 오시프의 상태를 보기 전에는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서 뭘 맞았는지 여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죠.”
“이런…….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요.”
인지오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유리의 어깨를 감쌌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스타샤는 부모에게 있는 대로 말했으리라. 하나뿐인 아들이 임신이 어려운 알파를 인생의 동반자로 맞이하겠다는데 따뜻한 안부라니. 유리는 인지오의 어깨 너머를 힐끔거렸다. 회장 입구가 보였다. 얼른 아나스타샤를 보러 가고 싶은데. 잘 지내고 있을 테지만, 여태 먼저 연락도 안 하고 자신을 본뜬 석상이나 조각하고 있었던 괘씸죄를 물 생각이었다.
행운의 여신은 유리의 손을 들어줬다. 회장 입구에서 아나스타샤가 나왔다. 재킷 단추를 닫으며 여유롭게 걸어오는 모습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심기가 뒤틀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유리의 시선이 어깨 뒤에 머물자, 인지오가 뒤를 돌아봤다. 파티의 주인공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냐, 여기다. 유리가 왔는데 왜 이제 나와.”
인지오를 먼저 확인한 아나스타샤는 아버지를 본 뒤에 유리를 바라봤다. 팔랑팔랑, 가볍던 걸음이 뚝 멈췄다.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유리는 가만히 그를 기다렸다. 당장 꼬리를 흔들며 달려오면 봐줄 수도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뒤를 돌더니 도로 회장 쪽으로 도망쳤다. 종종걸음으로 어찌나 빨리 걷는지 눈썹을 치켜뜨는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 뭐 하자는 거야? 유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하하, 메즈가 웃었다. 인지오도 눈을 크게 뜬 채로 유리에게 눈짓했다.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잘…… 부탁해요.”
인지오가 길을 터줬다. 유리는 곧장 회장으로 들어섰다. 회장은 화려한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열 개는 더 달려있었다. 문을 다 열어둬서 풀 냄새가 짙게 났다. 흩어진 사람들 사이로 아나스타샤의 동그란 머리통이 보였다.
체면을 생각해야지. 화는 귀에 속삭여도 늦지 않으니 말이다. 유리는 빠르고 정확한 걸음으로 아나스타샤를 쫓았다. 어머, 아나스타샤 씨. 어떤 중년 여성이 아나스타샤를 붙잡았다. 아나스타샤는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빠져나가려 했으나 손이 잡혀 그러지 못했다. 유리가 쫓아오는 걸 알면서도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코앞이었다. 유리는 여성이 잡은 공주의 손목을 낚아챘다.
“아냐. 나랑 할 얘기가…….”
여자 손은 뿌리치지 않았던 공주가 유리의 손은 너무나 쉽게 내던졌다. 그러곤 도망갔다. 유리는 심호흡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는 생각으로 조용히 그를 쫓았다. 성난 발걸음은 잽싸게 아나스타샤를 따라잡았다.
유리가 아나스타샤를 붙잡았다. 손을 잡아채자 아나스타샤가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설렘으로 가득한 파란 눈동자. 물까지 차 있는 두 눈은 샹들리에의 조명이 반사되어 물비늘처럼 반짝였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눈을 마주치자마자 까맣게 잊고 말았다. 아나스타샤도 도망치던 이유를 잊었는지, 유리를 향해 환히 웃었다. 너 왜 도망가냐고 겨우 한 마디 꺼내려던 때였다. 아나스타샤가 입을 맞춰왔다.
양손으로 얼굴을 아프게 감싸고 입술을 빨았다. 갈 곳을 잃은 유리의 손은 그의 허리에 감겼다. 어머……. 하고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끼리끼리 유흥을 즐기던 회장이 웅성거렸다.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이다. 떼어내면 그만인데, 유리는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아나스타샤의 온기와 촉감과 향이 마음에 들었다.
무려 한 달만의 재회면서 키스였다. 포옹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마주친 것도 말이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아나스타샤가 입술을 떼더니 하얀 치아를 보이며 기뻐했다.
“유리! 너무 보고 싶었어. 이럴까 봐 도망간 거야. 사람 많은 곳에서 키스하면 안 좋아할 것 같아서…….”
구구절절 변명을 둘러대면서도 손은 그간 참았던 그리움을 달래려는 듯 유리의 머리카락과 볼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유리는 침묵으로 수긍했다. 한번 시작하니까 못 멈추겠다며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끌어안았다. 어깨에 이마가 닿았다. 커다란 덩치가 품에 가득 찼다.
시선이 느껴졌다. 라포포르트의 누구라고 숙덕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유리는 다 무시하고 아나스타샤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 아나스타샤가 웃음을 흘렸다. 듣기 좋은 흔들림이다.
“아, 이러고 있으니까 너무 좋다. 널 처음 본 곳도 여기잖아.”
“기억도 못 하면서.”
“기억해. 어떻게 널 잊겠어? 사랑스러운 러시아의 다이아몬드를.”
“…….”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들고 얘기했다. 눈이 마주치면 또 키스할 것 같아서, 유리는 눈을 피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풀어주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건 또 무슨 장난인가? 유리가 눈썹을 삐뚜름하게 치켜올리고 손을 노려보자, 손을 더 가까이 내밀었다.
“그때 못 춘 춤을 추는 건 어때.”
열정적으로 도망가더니 잡히자마자 키스하고 그것도 모자라 춤까지 추자니. 아나스타샤의 얘기를 들었는지, 회장 가운데가 텅 비었다. 왈츠가 흘렀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손을 잡았다. 두 몸이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한 손을 잡고, 다른 손은 허리와 어깨에. 발걸음을 맞춰 가며 하나가 된다.
가슴이 닿았다. 숨도 가까이서 느껴졌다. 아나스타샤는 능숙하게 유리를 회장 중앙으로 리드했다. 유리는 춤을 잘 추는 편이 아닌지라 아나스타샤의 발을 피하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 리듬을 타던 아나스타샤가 얼굴을 가까이했다. 유리는 그의 이마에 이마를 기댔다. 콧대가 닿을 듯 말 듯 했다.
“오시프 씨는 안 왔네.”
“아프거든. 섬에서 뭔 주사를 맞았는지 베네치아에서 돌아오고 나서는 눈도 못 떠.”
“이런, 아쉬워라.”
아나스타샤는 그다지 아쉬워하지 않는 목소리로 아쉬워했다. 유리는 웃음을 참았다.
“아쉽게 됐어. 형이 방금 그 꼴을 봤으면 곧장 러시아로 돌아갔을 테니까.”
“그런 뜻은 아니었어.”
당황한 아나스타샤가 변명이라도 할 것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유리는 실수인 척, 그의 발을 밟았다. 아나스타샤는 인상을 찡그렸다. 한 달 만에 봤는데 다른 남자 얘기를 하면 쓰는가. 아나스타샤는 얌전히 유리에게 집중했다.
그들은 곡이 끝날 때까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음률에 몸을 맡겼다.
* * *
시선을 피해 정원으로 나왔다. 아나스타샤는 빠져나오는 순간에도 샴페인 두 잔을 챙겼다. 별이 잔잔하게 빛나는 하늘을 보며 유리와 아나스타샤는 정원을 거닐었다. 중간중간 키가 큰 나무 사이로 히히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밀회를 즐기려는 사람이 더 있는 듯했다.
둘은 정원 가장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는 풀벌레 소리만 들렸다. 아나스타샤가 기다렸다는 듯이 샴페인 잔을 내밀었다. 유리가 잔을 부딪쳤다.
“우리의 영원한 사랑을 위해.”
유치한 건배사에 유리는 실소를 터트렸다. 아나스타샤도 따라 웃었다. 식상하고 촌스러운 멘트가 생소하고 재미있게 들렸다. 미친 게 분명하지.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눈을 보며 생각했다. 한참 전부터 미쳐있었다.
“그나저나, 그건 다 했어?”
“아, 밀랍 인형?”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다 만들었다고 하면 얼마나 잘 만들었냐며 보여달라 할 기세다. 유리는 샴페인을 마시며 능청을 떨었다.
“설마 그거 때문에 날 조각해서 로비에 세워둔 건 아니겠지.”
“아니야……. 그냥, 네가 보고 싶어서.”
아나스타샤는 귀를 붉히며 중얼거렸다. 보고 싶다던 사람이 연락은 왜 안 받아? 유리의 이마에 힘줄이 섰다. 아나스타샤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을 기다렸다. 아아, 그래. ‘밀랍 인형’이 완성됐는지 알려줘야 했다.
“다 만들었지.”
“정말? 어디에 뒀어? 나도 보여줘.”
“지하 감옥에 갖다 놨는데. 들어가 볼래?”
아나스타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덫인가? 정말, 보여주고 싶은 걸까? 고민이 눈에 보였다. 당황하는 걸 보니 한 달간 꾹꾹 담아놨던 감정이 사르르 풀리는 기분이었다. 골려줄 생각으로 한마디 했다.
“당신이 연락 안 할 때 재미 좀 봤어.”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떠졌다. 아나스타샤는 할 말도 잃어버렸는지 입만 벙긋거렸다. 유리는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나보다 좋진 않았지?”
그는 잔뜩 긴장한 채로 물었다. 유리는 고개를 들어 입을 맞췄다. 대답을 알아들었는지 아나스타샤가 허리에 팔을 감았다. 아나스타샤의 달콤한 향기와 풀 내음이 어우러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