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추격
새벽 3시. 창밖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로비에 모인 그들은 간단히 배를 채웠다. 아나스타샤는 에스프레소를 두 잔이나 더 마셨고 오시프도 따라서 커피를 마셨다. 유리는 빵 두 조각을 먹은 뒤, 권총과 탄창을 챙기고 라이플을 어깨에 멨다. 오시프는 무기 앞에 서서 유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오시프의 취향에 맞는 칼과 권총을 내밀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벨트에 홀스터를 찬 뒤, 왼쪽 손목을 보여줬다. 손가락 두 마디가량 되는 가죽 벨트가 채워져 있었고, 그 사이로 얇은 칼날이 보였다. 유리는 며느리발톱 같은 칼을 보고서도 형의 주머니에 군용 나이프를 쑤셔 박았다.
아나스타샤는 라포포르트를 지켜봤다. 오시프가 아나스타샤에게 권총을 내밀었다. 안전핀이 걸렸고 탄이 장전된 총이었다. 아나스타샤도 오시프를 따라 벨트에 홀스터를 걸었다. 소지품까지 오시프와 완벽히 대칭을 이뤘다.
“유리 곁에 있으면 네가 아나스타샤로 오해받을 거야.”
오시프가 얘기했다.
“조준도 제대로 못 하는 인간을 혼자 보낼 순 없어.”
“아, 유리. 그런 건 걱정 마. 눈의 요정들이 다 알아서 해줄 테니까. 너는 나. 나는 너. 알겠어? 아나스타샤.”
오시프가 아나스타샤의 턱을 쓸었다. 거울을 앞에 두고 선 기분이었다. 오시프가 따라 한 자신의 모습은 당당하고 거만했다. 아나스타샤는 그와 비슷한 표정을 했다. 피로에 찌들어도 여유를 잃지 않고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거만한 아나스타샤를 본 유리는 침을 삼켰다. 오시프가 했을 때는 역겨웠는데……. 아나스타샤가 하니 군침이 돌았다.
“그래. 좋아.”
아나스타샤의 결의를 확인한 오시프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는 유리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글씨를 썼다.
「길목마다 스나이퍼를 배치했다. 꼬리가 붙었어.」
이번에는 유리가 손바닥에 적었다.
「누가 아나스타샤를 쫓고 있지?」
「덴마크 공주. 리브.」
유리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덴마크 공주. 아나스타샤를 매년 왕실 연회와 자기 생일 파티에 초청했던 자였다. 아나스타샤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것으로 안다. 포기를 모르는 공주다. 오시프는 아나스타샤를 쳐다봤다. 우리의 공주님은 탄창 두 개를 더 챙겨 주머니에 넣는 중이었다.
「아나스타샤를 얻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지.」
아나스타샤가 유리 라포포르트와 교제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 아나스타샤를 노리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알파끼리도 각인시킨다는 약을 찾아 아나스타샤가 사용해서 라포포르트에 귀속되기라도 하면 큰일일 테지. 자연의 뜻을 거스르기 전에 구하겠다는 건가?
“이제 갈까?”
알차게 무기를 챙긴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유리가 먼저 그들을 제치고 나갔다. 어림없는 소리. 아나스타샤는 내 거야. 세먀를 써야 한다면 내게 쓰도록 만들 것이다. 리브 공주가 상대해야 할 사람은 질투와 사랑의 화신이었다.
오시프의 심복이 준비된 차를 타고 먼저 떠나고 유리와 두 라포포르트는 주차장에 주차된 아무 차를 골라 타 이동했다. 해무가 짙게 낀 새벽 도시는 도로 양옆에 선 가로등 불빛만 뿌옇게 번져 보였다. 설상가상 신호등도 꺼져있었다. 기차역으로 향하는 낡은 승용차만 후미등을 번쩍이며 달렸다.
역까지는 20분이면 간다. 20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아나스타샤는 손잡이를 꽉 붙들었다. 아나스타샤를 따라 손잡이를 붙잡은 오시프가 밖을 주시했다. 칠흑을 덮은 희뿌연 안개를 뚫고 미지의 존재가 고개를 들이밀 것만 같았다.
“만약에, 잡히면 어떡해?”
아나스타샤는 승냥이에게 잡힐 걱정을 했다. 유리에게 물은 거였으나 대답은 오시프가 했다.
“내가 왜 네 모습을 하고 돌아다니겠어. 이런 일을 위해서지.”
“오시프 씨와 저 중에서 고르는 거잖아요. 절 고르면…….”
“그러니 연기를 잘해야지.”
오시프는 아나스타샤를 바라봤다. 근심이 가득한 아나스타샤가 덤덤한 아나스타샤를 쳐다본다. 거울을 앞에 두고 얘기하는 기분이었으나, 껍데기 속에 든 과실은 전혀 달랐다. 사과와 독사과였다.
“그들이 속을 것 같나요?”
“충분하지. 내가 섞였잖아. 오시프가 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텐데. 지뢰가 꼈으니 최대한 골라내야지.”
스스럼없이 자신을 지뢰라고 가리킨다. 하기야, 공주와 헷갈려 레오파드를 납치하면 골치 아프리라. 아나스타샤는 백미러를 바라봤다. 유리와 눈이 마주쳤다. 회색 동공은 사활이 걸린 때에도 다이아몬드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자신감이 넘치는 광채였다. 해무에 젖은 오시프의 푸른 눈도 마찬가지였다. 닥칠 혼돈에 겁먹고 꼬리를 만 것은 아나스타샤 자신뿐이었다.
“…둘이 자신 있다니까. 나도 노력할게.”
자신 없었다. 처음 해안 절벽에서 뛰어내리던 때처럼 심장이 들썩였다. 쿵덕거리는 박동이 귓가에 울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유리의 격려는 없었다. 침묵만이 아나스타샤를 달래줄 뿐이다. 별일 없으리란 바람 같은 위로였다.
“차 세워.”
오시프가 말했다. 뭐? 유리는 되물으면서도 속도를 줄였다.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 빛이었다. 시야 확보가 안 된다. 유리는 본능적으로 핸들을 꺾었다.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정면에서 차가 달려왔다. 헤드라이트가 번쩍였다. 눈에 새카만 빛무리가 따라다녀서 피하기가 어려웠다.
마주 오는 차와 충돌하고 말았다.
“큭……!”
차체가 충격에 들썩였다. 아나스타샤는 운전석 시트를 꽉 붙잡았다. 유리의 어깨가 손등에 닿았다 떨어진다. 차가 멈췄다. 보닛에서 연기가 올라와 안개 속을 유영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아나스타샤는 시트에 머리를 기댔다. 교통사고가 났다. 새벽 3시에!
“내리면 곧장 기차역으로 뛰어.”
오시프가 속삭였다. 그도 시트에 머리를 기댄 채였다. 유리는 고통을 호소하는 척 몸을 웅크리며 허리에 찬 홀스터에 손을 올렸다. 운전석 문을 열었다. 아나스타샤가 다급히 속삭였다.
“유리. 안 돼.”
“요정이 있잖아.”
괜찮아. 유리는 뒷말을 흘리며 차에서 내렸다. 요정이 있다 해도, 안개가 꼈는데 무슨 수로 돕는단 말이야! 걱정도 잠시, 유리가 앞차 운전석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리려 했다. 운전석의 문이 벌컥 열리며 유리를 밀어트렸다. 유리가 휘청인다. 안 돼! 아나스타샤는 시트 뒤에 숨어 유리를 지켜봤다.
“왕자님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오시프는 가련한 공주를 측은하게 바라봤다. 사내 둘이 공주가 탄 뒷좌석 문을 하나씩 맡았다. 아나스타샤가 오시프를 힐끔거렸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거죠?”
“죽여야지.”
그러니까 어떻게 죽이냐고요. 아나스타샤는 숨을 골랐다. 사람이 아니야. 여우다. 공주는 자기 암시를 걸었다. 그들의 목적은 오시프를 건들지 않고 아나스타샤를 빼가는 것이었기에 꽤나 정중하게 뒷좌석 문을 열었다.
“누가 아나스타샤 씨죠?”
오시프 앞에 선 사내가 물었다. 아나스타샤와 아나스타샤는 침묵했다. 겉으로는 알 수 없다. 행동거지를 보고 확인해야 하는데 움직이지 않으니 유추도 안 됐다. 그들은 아나스타샤들을 밖으로 인도했다. 지켜봐야 했다.
“어딜 데려가!”
아나스타샤가 차에서 내리자 유리가 소리쳤다. 그는 축 늘어진 상대의 멱살을 붙잡은 채였다. 아나스타샤를 안내하던 남자가 유리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손짓했다. 사내의 뒤로 사복을 입은 군인이 유리에게 소총을 겨누며 다가왔다. 족히 여덟은 되는 듯했다.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겁니다. 라포포르트.”
“리브가 그렇게 얘기하던가? 둘 다 라포포르트의 소유야.”
유리가 으르렁거렸다. 사내는 못 들은 척 아나스타샤를 빛 쪽으로 인도했다.
“거기 서!”
유리는 멱살을 잡았던 남자를 팽개치고 아나스타샤 쪽으로 걸어 나오려 했다. 레이저 포인트가 유리의 흉부에 집중됐다. 다가오면 벌집이 된다는 경고였다. 두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상황을 목격했다. 사랑스러운 막냇동생이, 내 사랑이 옴짝달싹도 못 한다.
아나스타샤가 남자를 바라보며 얘기했다.
“유라를 건들면 평생이 피곤해질 거다.”
그들은 아나스타샤와 오시프를 구분할 만큼 여유롭지 않다. 아나스타샤의 저주에 사내의 표정이 미미하게 펴졌다.
“얌전히 있으면 사상자는 없을 겁니다. 오시프 씨. 권총 한 자루로 뭘 어쩌겠다는 겁니까?”
“내겐 요정이 있거든.”
아나스타샤는 오시프처럼 웃었다. 거만하고 교활한 짐승의 미소였다.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오시프를 맡았던 사내가 갑자기 픽, 쓰러졌다. 유리의 흉부를 노리던 빛무리가 흩어졌다. 이번에는 군인 중 한 명이 쓰러졌다.
“저격수다!”
그들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아나스타샤는 꼿꼿하게 서서 자신과 대화하던 사내를 쳐다봤다. 스나이퍼는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아나스타샤가 느린 웃음을 흘렸다. 안개로 시야가 확보가 안 되니, 저격수를 못 찾은 군인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너희만 준비한 줄 알았어? 이런, 리브 공주님께서 많이 급하셨나 봐.”
너는 살려주지. 아나스타샤가 사내의 턱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가 권총을 꺼내 들었다. 유리의 급습이 조금 더 빨랐다. 유리는 새처럼 날아와 사내의 턱주가리를 주먹으로 올려 쳤다. 사람 얼굴도 한 방에 으깨는 주먹이니 저 사내는 리브에게 제대로 메시지조차 남기지 못하리라.
“뭐해, 공주! 도망가!”
“아, 알겠어.”
아나스타샤가 명령하고 오시프가 벌벌 떨며 안개 속으로 도망쳤다. 도망쳐야 해. 리브 공주가 끌고 온 다른 부대가 근처에 대기 중일 것이다. 아나스타샤와 유리는 서로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유리가 눈을 천천히 꿈뻑이며 눈인사했다. 걱정하지 마. 눈빛으로 아나스타샤를 위로했다.
걱정하지 마. 할 수 있어. 늘 그랬듯이 위험에 처하면 유리가 구하러 올 거야.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기차역 쪽으로 달렸다. 유리는 그의 모습이 안개 속에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 오시프를 찾으러 나섰다.
위급한 상황에, 흠이라도 날까 애지중지하는 사랑을 보호하고 지키고 싶은 건 본능이었다. 유리는 본능을 거스르고 사랑을 믿었다. 내가 사랑하는 아나스타샤는 그리 쉬이 죽는 사내가 아니라고.
오시프는 아주 잘 도망쳤다. 유리와 합류한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안도했다.
“오, 유리. 여기서 보다니 참 다행이야. 날 구하러 왔구나.”
“제대로 문 것 같은데, 이제 그만해.”
“마무리가 중요한 거야. 그리고 재미있다고. 쫓겨본 지가 언제인지…….”
술래잡기하는 줄 아나.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가죽을 뒤집어쓴 형을 언짢은 눈으로 바라봤다. 그를 찾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유리에게는 권총 한 자루와 군용 나이프 하나가 전부였다. 그는 탄창을 빼내 총알 개수를 살폈다.
“주변에 숨겨둔 거 없어?”
“없어. 요정들 배치하는 데도 시간이 빠듯했거든.”
오시프는 자신 몫의 탄창을 빼 유리에게 건네더니 양팔을 걷어 올렸다. 왼쪽 손목에 찬 가죽 벨트가 눈에 띄었다. 오른쪽 팔을 빙글빙글 돌리며 어깨를 풀었다. 광기가 흐르는 눈빛에 유리까지 덩달아 흥분했다.
“뭐 하려고.”
“둘이니까 재미가 없어서.”
“뭐?”
물음과 오시프가 유리의 명치에 주먹을 찔러 넣었다. 유리는 기침도 못 하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기절하지는 않았어도 정신 차리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렸다.
“미안, 유라. 아무래도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하거든.”
오시프는 들뜬 목소리로 사과하며 골목을 나섰다. “저기 있다!” 아나스타샤를 찾는 무리가 오시프를 발견한 소리가 들렸다. 한참 소란스럽던 길거리가 다시 잠잠해졌다. 빌어먹을. 유리는 배를 감싸고 끙끙거렸다. 빌어먹을! 오시프에게 한 방 먹었다.
타앙……. 먼 곳에서 총성이 울렸다. 부들거리던 유리는 곧장 일어나 총성이 울린 쪽으로 뛰었다. 아나스타샤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연기는 완벽했다. 아나스타샤는 자부했다. 누가 봐도 오시프인 아나스타샤를 쫓을 것이 아니라, 아나스타샤 같은 아나스타샤를 쫓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나스타샤는 자신을 쫓는 들개들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으나, 마땅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오시프라면, 오시프라면 전부 죽였으리라.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오시프가 아니었다. 살인을 기침처럼 자연스럽게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큰 결심을 하고 총을 쏜다고 한들, 맞출 확률도 낮았다. 아나스타샤는 권총을 빼 들어 허공을 가리켰다. 손가락을 방아쇠에 올렸으나 차마 당기지 못했다.
“젠장! 맞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겁주려는 거라고! 이것도 못 해서야……!”
본인 천성을 알면서도 아나스타샤는 자신을 탓했다. 자책도 오래는 못 갔다. 바짝 쫓아온 추격자가 대담하게 아나스타샤의 등을 붙잡으려 했다. 아나스타샤는 가까스로 아귀를 피했다. 기차역에서 만나기로 했단 말이야! 아나스타샤의 머릿속에는 온통 유리와 한 약속뿐이었다.
이대로라면 잡히겠다. 아나스타샤는 뒤돌아보지 않아도 바로 뒤까지 쫓아온 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대로를 벗어나 골목으로 숨었다. 가로등 빛이 희미하게 닿는 곳이라 사물 구분이 어려웠다.
어디 갔지? 아나스타샤를 찾는 목소리가 고요한 안개 속에서 들렸다. 아나스타샤는 몸을 벽에 최대한 붙여 조심스레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저기! 저기다! 아나스타샤!”
……빠져나가려고 했다. 어리숙한 여우는 사냥꾼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에라이, 모르겠다. 아나스타샤는 달렸다. 골목을 빠져나가 어떻게든 기차역까지 가면 유리가 나타나 처리해줄 것만 같았다. 숨겨뒀다는 요정들은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아나스타샤는 묵묵부답인 요정 탓을 했다.
“거기 서!”
누군가가 아나스타샤의 어깨를 밀쳤다. 아나스타샤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급박한 상황에도 아나스타샤는 총을 붙들고 그대로 몸을 굴려 상대와 거리를 벌렸다. 쏠까? 아나스타샤는 흐릿하게 보이는 상대를 주시했다.
이 정도 거리라면 맞을지도 몰라. 유리와 열심히 훈련하지 않았던가. 아나스타샤는 다가오는 인영을 조준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총성이 울렸다. 인영은 곧장 뒤로 쓰러졌다. 쓰러지길 바라며 쏜 1발이었으나 정말 쓰러질 줄은 몰랐던 아나스타샤는 곧장 시체로 달려가 숨이 붙어있는지 확인했다. 쓰러진 남자는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부르르 떨다 축 늘어졌다.
“……이런.”
사람을 죽였다. 죄책감보다는 살았다는 안도감이 컸다. 주님께 고할 죄가 하나 더 늘었지만, 살아야 고해성사도 하지 않겠는가?
총성을 들은 들개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나스타샤는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긴장했다. 바보 같은 아나스타샤! 총성을 듣고 모일 거란 생각은 왜 못했을까! 아나스타샤는 뒷걸음질 쳤다. 뒤라고 안전한 건 아니었다.
“아나스타샤……!”
뒤에서 누군가 아나스타샤를 불렀다. 기다리던 목소리는 아니다. 아나스타샤는 뒤를 힐끔거렸다. 세 명이나 됐다. 셋을 어떻게 혼자 처치해! 유리, 유리! 어디 있어. 나 좀 도와줘. 젠장. 오시프 쪽은 벌써 들킨 거야?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거 참…… 귀찮게 하네.”
아나스타샤는 마지막까지 오시프를 연기했다. 그들은 아나스타샤에게 테이저건을 겨눴다. 공주의 뒤를 막아선 사내가 말했다.
“당신이 오시프라면 별수 없지만, 아나스타샤라면 놓칠 수 없거든.”
보복이 두렵지 않은가……. 아나스타샤는 뱉으려던 말을 곱씹었다. 그제야 유리가 외쳤던 이름이 생각났다. 리브! 아나스타샤가 아는 ‘리브’ 중에서 오시프의 광기를 피할 사람은 한 명뿐이다. 덴마크 왕실의 공주님. 호감을 숨기지 않던 발랄한 오메가! 좋은 친구로 남을 줄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러시아에 들어와 날 노린단 말인가!
“일국 공주라 한들, 네놈들까지 온전하지는 않을 텐데.”
아나스타샤는 여유를 부렸다. 오시프라면 그랬으리라. 믿을 구석이 하나 없는 아나스타샤는 간을 배밖에 내놓고 춤을 추는 것밖에 안 됐다. 남자들은 쉽사리 아나스타샤를 덮치지 못했다. 상황은 아나스타샤의 손을 떠났다. 훈련된 남자 셋을, 이제 겨우 조준만 제대로 하는 아나스타샤가 당해낼 리 없었다.
유리! 아나스타샤는 속으로 외쳤다. 구세주는 오지 않았다.
아나스타샤가 가만히 있자, 상황을 살피던 사내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얌전히 따라오면 다칠 일은 없을 거다.”
“물러서.”
독 안에 든 쥐다. 총을 겨눠도 그들과의 거리는 여전했다. 어떻게 해야 도망칠 수 있을까. 요정들은 뭘 하는 거야? 여기엔 요정이 없어? 젠장, 유리. 유리! 어디서 뭐 해. 나 큰일 났다고. 잡히게 생겼어! 아나스타샤도, 오시프도 전부 잡히는구나! 아나스타샤는 개탄했다.
피잉. 쇳덩이가 바람을 가르는 가느다란 소리와 함께 아나스타샤의 앞을 막아선 사내 하나가 쓰러졌다. 저격수다! 사내들이 소리치며 엄폐물을 찾아 피했다. 총알이 어디서 날아오는지 파악하지 못한 그들은 머리와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아나스타샤는 건물 지붕을 올려다봤다. 무언가가 벽을 타고 내려왔다. 와이어를 편안하게 타고 내려온 것은 다름 아닌 유리였다. 어깨에는 저격 소총을 메고 있었다.
“유리!”
이렇게 반가울 수가. 아나스타샤는 단숨에 달려가 유리를 끌어안았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어깨에 매단 채로 와이어를 풀어 정리했다.
“너 아니었으면 나도 잡혀갔을 거야.”
“기차역으로 가랬잖아.”
괜찮냐는 말 대신 짜증 섞인 대꾸가 돌아왔다. 아나스타샤는 눈물을 꾹 참았다. 나도 기차역으로 가고 싶었는데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고. 잡힐 바에는 어디에 숨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아나스타샤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유리가 와이어를 가방에 넣고 공주의 손목을 붙잡았다.
“가자.”
“아, 아나스타샤는?”
아나스타샤는 오시프를 찾았다. 유리는 뚱한 얼굴로 아나스타샤를 응시했다. 그 ‘아나스타샤’라면 마저 술래잡기 하러 가버렸다. 가짜가 잡혔으니 진짜 아나스타샤가 무르만스크의 다음 목적지를 떠올릴 때까지는 시간을 벌겠지. 그래도 촉박하다. 첫 열차를 타고 출발해야 했다. 유리는 기차역으로 향했다.
잡은 아나스타샤는 꿈적도 안 했다. 유리가 뒤를 돌아봤다. 굳은 얼굴의 아나스타샤가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걱정 안 해도 돼. 우리는 가자.”
“아, 아니지. 나 때문에 아나스타샤가 잘못되면 널 어떻게 보겠어?”
“공주.”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아나스타샤가 수긍할까? 오시프 걱정은 쓸데없는 짓이다. 물고기가 물에 빠졌다고, 새가 나뭇가지에 올라갔다고 걱정하는 꼴이었다.
“너만 생각해.”
“잡혔으면 어떡해?”
“시간을 번 거지. 젠장! 아나스타샤. 시간이 없어. 어서 가야 해!”
유리가 재촉해도 아나스타샤는 요지부동이었다. 유리는 잡은 손목을 놓고 어깨를 끌어당겼다. 아나스타샤의 상체가 유리 쪽으로 기울었다.
“오시프를 걱정하는 거면 쓸데없는 짓이니까 그만둬. 무르만스크로 가는 열차를 타야 해. 그 인간이 이만큼이나 양보까지 해줬는데 세먀를 못 찾으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저었다. 유리는 그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 공주가 숨을 고르더니 얘기했다.
“이렇게 될 거라고는 얘기 안 했잖아.”
“오시프가 왜 네 흉내를 냈겠어.”
“아니, 유리. 이건 사고야.”
여기서 왜 사고가 나와? 답답함을 못 이긴 유리는 이를 갈았다. 쫓기고 있으니 어디서든 잡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고’라니? 사고는 길을 걷다가 차에 치이거나 등산 중에 실족하는 것이 사고지, 이건 예상 범위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사고로 오시프를 잃어버렸으니 찾아야 한다는 건가? 유리의 표정이 험상궂어졌다.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손을 부드럽게 맞잡았다.
“구해야 해.”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응시했다. 잔잔한 푸른 눈에 우선순위가 비쳤다. 오시프와 세먀 위에 있는 것. 사고와 구조. 그제야 의도가 읽힌다. 이건 사고다. 생각도 못 한 사고. 매정하게 가족을 두고 갈 수 없으니 찾아야 했다.
레오파드는 빚은 꼭 갚는다. 우그러졌던 유리의 얼굴이 미세하게 펴졌다. 은행장 아들이어서 그런가? 이탈리아인이라서 그런가. 뻔뻔한 셈을 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오시프가 알면 어처구니없어하겠지만, 말했다시피 오시프는 사고로 납치됐다.
“……그래. 일단 기차역으로 가. 공주의 행방은 가서 찾아도 늦지 않아.”
가는 길은 같았다. 기차를 타고, 무르만스크로.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손을 맞잡고 뛰었다. 둘은 금세 안개 사이로 사라졌다.
* * *
아나스타샤는 뻣뻣한 청바지에 낡은 털부츠, 두툼한 파카를 입고는 일용직 노동자 행세를 했다. 등에는 몸체만 한 배낭을 멨는데, 뭐가 들었는지는 열어보지 않아도 짐작 갔다. 다행히 아나스타샤 말고도 열차를 타려고 미적거리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레닌 동상이 열차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였다. 첫차가 들어올 시간도 아닌데 승강장에 열차가 한 대 정차해 있었다.
유리가 말한 열차다. 머리 칸 바로 뒤에 화물칸이 한 칸, 그 뒤로 승차 칸이 네 칸, 그 뒤로 화물칸이 하나 달려있었는데 안개에 가려 열차 끝은 보이지 않았다. 무르만스크로 향하는 열차였다. 아나스타샤는 마지막 승차 칸에 올라탔다. 안은 침대가 닭장처럼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그는 빈 침대에 앉은 뒤, 짐을 침대 밑에 넣었다.
열차 안도, 밖도 고요했다. 해가 떠오르려는 건지 역 뒤로 하늘이 밝은 남색으로 빛났다. 유리는 열차가 출발하기 직전에 올 것이다. 오시프는 머리칸 뒤에 달린 화물칸에 있었다. 라포포르트를 수호하는 요정들은 벨로모르스크의 일을 모두 알고 있었다.
요정의 전언을 듣던 아나스타샤는 감탄하며 유리에게 무르만스크에도 요정들이 있냐고 우스갯소리로 물었으나, 유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딘 줄 알고 요정을 보냈냐고는 물을 수가 없었다. 무르만스크 어딜 가든 요정의 가호를 받을 것만 같았기에…….
“자리 비나?”
말과 함께 술 냄새가 풍겼다. 그 사이로 아나스타샤가 익히 맡아왔던 페로몬이 흘렀다. 아나스타샤는 침대 기둥에 몸을 기대고 선 취객을 올려다봤다. 봇짐을 진 그는 거지꼴이었는데, 회색 눈동자는 술에 꼴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아, 당연하죠.”
아나스타샤는 러시아어로 대답하며 자신의 앞쪽을 손짓했다. 취객이 앉았다. 그는 술이 바닥난 병을 들고 있었다. 설마, 다 마신 거야? 아나스타샤는 병과 남자를 번갈아 훑었다. 그는 빈 병을 바닥에 내려놓고 봇짐에서 새 보드카를 꺼냈다. 그는 보드카를 물처럼 마셨다.
아무리 러시아인이라지만, 저렇게 마셔도 될까. 걱정됐다.
“어디까지 가?”
“무르만스크까지.”
둘은 서로를 처음 보는 사이처럼 대화를 주고받았다. 열차가 출발을 알렸다. 4시를 좀 지난 시각이었다. 표를 확인하는 승무원도 없었다. 그들이 탄 칸에는 두 명이 더 있었다. 여행객이나 일자리를 구하러 가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대각선으로 보이는 침대에 앉은 남자가 아나스타샤에게 다가왔다. 들키지 않으려고 컬러 렌즈까지 꼈는데 들킬까. 아나스타샤는 다가오는 상대를 향해 눈인사를 건넸다.
그는 좀 전의 유리처럼 침대 기둥에 팔을 기대고 섰다.
“무르만스크에 뭐하러 가십니까?”
“항구에 일하러 갑니다.”
무뚝뚝한 척, 사내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남자가 팔짱을 끼었다. 유리는 봇짐에서 땅콩을 한 줌 꺼내더니 테이블에 올려놓고 까먹기 시작했다.
“아나스타샤가 아니고?”
“예?”
“신분증 좀 줘 봐.”
“아, 아니 댁이 누군지 알고 내가 신분증을 보여줍니까?”
남자가 비릿하게 웃었다.
“아나스타샤군!”
그가 아나스타샤에게 손을 뻗었다. 으악! 아나스타샤는 침대로 물러섰다. 유리가 술병으로 남자의 머리를 내리쳤다. 퍽, 소리와 함께 병이 깨지면서 남자가 기절했다. 사내를 이불처럼 덮은 아나스타샤가 기겁하며 남자를 패대기쳤다.
“유, 유리! 저기.”
아나스타샤는 손으로 대각선에 앉은 다른 남자를 가리켰다. 그는 주머니에서 무전기를 꺼내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유리가 성큼성큼 남자에게 다가가 목덜미에 깨진 병을 들이밀었다.
“아무 이상 없다고 해.”
유리가 낮게 읊조렸다. “뭐야?” 덴마크어로 된 무전이 돌아왔다. 협박받은 사내는 유리의 눈을 보며 무전에 답했다.
“아무 일도 아니다. 이상 없음. 출발해도 좋다.”
[알았다. 통신 종료.]
고비를 넘겼다. 유리는 미련 없이 남자의 머리채를 잡고 철제로 된 침대 모서리에 냅다 머리를 처박았다. 무전기를 든 남자는 그대로 기절했다. 주변을 단숨에 정리한 유리가 아나스타샤 앞에 앉았다. 아나스타샤는 시체처럼 축 늘어진 남자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변장은 왜 한 거야?”
유리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땅콩이 가루가 되었다. 그는 껍데기 사이에서 알맹이를 골라내 입에 털었다.
* * *
얼굴에 덮였던 두건이 걷혔다. 오시프는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조명이 자신을 향하고 있어서 분간이 어려웠다. 시야는 죽었어도 청각은 살아있었다. 땅이 덜컹거렸다. 기차를 탄 모양이다. 자신의 앞에 선 가벼운 발걸음. 틀림없이 리브 공주다.
상대는 아나스타샤의 앞을 가로막아 그늘을 만들어줬다. 덕에 오시프는 눈을 떠 그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작은 체구의 여자였다. 웨이브 진 머리카락을 말꼬리처럼 단단하게 묶어 올린 한 왕국의 공주.
“아아, 리브. 내가 잡혔나?”
“그래. 아나스타샤. 네가 잡혔어.”
오시프는 웃었다. 리브는 아리따운 아나스타샤의 볼에 입을 맞췄다. 오시프는 공주의 애정 공세를 피해 몸을 뒤로 피하다 그대로 넘어가고 말았다. 리브가 그의 위에 올라탔다. 눈빛이 붉었다. 입에서 단내가 났다.
“넌 내 소유야, 아나스타샤. 세먀를 찾아서 널 내 알파로 만들겠어.”
“미안한데 나는 오메가한테 안 서거든.”
“꼭 알파한테만 서진 않을 테지. 그래도 네가 알파만 원한다면 세먀 따윈 없애버리고 널 가둘 거야. 넌 내 알파가 되는 거지.”
하하. 오시프는 웃었다. 이미 잡힌 마당에 아나스타샤 연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무르만스크로 가는 열차에서 세먀가 있을 다음 장소를 기억해냈으리라. 중간에 헬기를 타고 이동하면 꼬리를 따돌리고 무르만스크에 도착할 것이다. 그러면 세먀는 러시아가 갖게 된다.
“……아나스타샤가 아니군.”
“이제 알다니.”
리브 공주가 중얼거렸다. 오시프는 오른쪽 귀를 어깨에 붙이며 샐쭉, 미소 지었다. 공주의 눈이 커졌다. 커다란 눈망울에 분노가 일렁였다.
“아나스타샤를 사랑한다더니, 아니었군. 가짜인지 진짜인지 구분도 못 하고…….”
리브 공주가 따귀를 때리려 들었다. 뒤에서 대기하던 그의 호위가 황급히 말렸다. 오시프는 호위에게 붙잡혀 버둥거리는 공주를 구경했다.
“오, 공주님. 상대를 보고 대들어야지.”
장자도 아니고 독녀도 아니니, 봐줄 이유가 없으니까. 오시프가 충고했다. 리브는 호위를 뿌리치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웃기지 마! 내가 아나스타샤를 못 알아볼 리 없어! 연기하는 거야. 그렇지? 아나스타샤. 당신이잖아!”
리브 공주가 아나스타샤의 얼굴 가죽을 잡아당겼다. 아나스타샤인 척하는 오시프라면 벗겨질 것이다. 아, 아아. 아나스타샤가 아파했다. 살가죽은 벗겨지지 않았다. 이거 봐. 아나스타샤잖아. 오시프 흉내를 내는 거지! 공주는 호언장담했다.
특수 폼으로 제작된 피부였다. 고작 손톱에 벗겨질 정도로 허술하지 않았다. 오시프는 입을 벌리며 통증을 달랬다. 얼굴 가죽이 뜯겨 나갈 것 같았다. 빌어먹을, 아나스타샤는 이런 사이코패스를 꼬리에 달고 다니다니. 그놈도 제정신이 아니야.
문득, 제정신이 아닌 놈을 좋다고 쫓아다니는 동생이 떠올랐다. ……유라는 사이코패스 무리에서 빼자. 걔는 예외다.
“세먀는 어디에 숨겼어? 말해! 아냐. 공주……. 내 사랑.”
“아니라니까. 비켜. 또 내 얼굴을 뜯어냈다가는 네 코를 뜯어 먹을 거야.”
“아나스타샤!”
공주가 절규했다. 이 자가 아나스타샤가 아님을, 리브 공주는 페로몬으로 알아차렸다. 흥분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호위에게 손을 뻗었다. 그는 공주에게 전기 충격기를 건넸다.
“특수 분장이 일반적인 충격으로 안 벗겨진다면, 이건 어떨까?”
이거로는 벗겨지겠지. 그녀가 전기 충격기를 들이밀었다. 파지직, 섬광이 튀겼다. 오시프는 눈에 힘을 빼고 천장을 쳐다봤다. 리브는 전기 충격기를 오시프의 목덜미에 갖다 댔다. 오시프는 맘껏 괴성을 질렀다. 아나스타샤를 만나면 뒤통수를 갈겨주겠다고 생각하며, 기절했다.
그를 감싸고 있던 아나스타샤의 껍데기가 물거품처럼 녹아내렸다. 아나스타샤보다 골격이 작은 오시프가 드러났다. 기절한 사내는 라포포르트의 차남이었다. 리브가 일어나 자신의 호위를 돌아봤다.
“아나스타샤는 지금 어디 있어?”
* * *
아나스타샤는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밖을 구경했다. 나무와 나무, 산, 강뿐이었다. 그런데도 아나스타샤의 눈에는 새로운 나무와 처음 보는 강, 신비로운 산이었다. 렌즈를 껴 초록색으로 빛나는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유리는 침대에 반쯤 누워 아나스타샤를 구경했다.
공주의 푸른 눈동자를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저 호기심이 가득한 눈동자를 사랑했던가. 새삼스럽게 아나스타샤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다시 한번 용솟음치는 순간이었다.
“놀이동산 좋아해?”
“……이번에는 놀이동산인가?”
유리가 물었다. 운하 크루즈에 기차 여행도 했으니 관람차까지 타면 나쁘지 않은 러시아 일주였다. 아나스타샤는 낮게 웃었다. 한참 말이 없던 그가 옛날이야기를 해줬다.
“미샤는 항구를 좋아했어.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걸 좋아하는데…… 거긴 바다 근처에 놀이동산이 있거든. 언제 가도 아름다운 항구를 볼 수 있댔어.”
“……그러니까, 관람차를 타야 한다?”
“아마도.”
상트페테르부르크 별장에서 벨로모르스크의 인형 가게까지. 아나스타샤는 미하일 이바노비치가 머릿속에 넣어준 지도를 따라 착실히 세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하다 하다 놀이동산까지 들려야 한다니. 유리는 봇짐에서 소총을 꺼냈다. 자사인 라포트에서 만든 돌격 소총이었다. 그는 탄창을 허리띠에 차고 전투 조끼를 꺼내 입었다.
“유리, 전쟁 나가는 거야?”
“이미 전쟁이야.”
유리는 리브 공주가 오시프를 가만히 내버려 두길 바랐다. 화를 주체 못 하고 오시프를 막 대하기라도 한다면 왕족 살해로 BBC 뉴스 1면을 차지할 것이다. 그건, 안 되지……. 골 아픈 일은 피하고 싶었다. 오시프를 구하는 목적이 빼앗긴 5년이란 기간을 줄이는 것에서 리브 공주가 죽임당하지 않게 하려는 것으로 변질됐다.
“그곳이 어디인지 기억만 해. 가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그래……. 참 이상하지. 미샤는 왜 내게 이런 걸 남겼을까.”
아나스타샤가 한탄했다. 일이야 어찌 됐든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세먀를 찾은 뒤에 이바노비치나 리브 공주에게 앙갚음해도 늦지 않았다.
유리는 탄을 장전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드카를 두 병 넘게 마신 사람이 멀쩡하게 걸어 나갔다. 아나스타샤도 가방을 챙겨 그 뒤를 쫓았다. 아나스타샤도 방탄조끼를 입었다. 유리는 앞칸으로 넘어가는 문을 열기 전, 아나스타샤를 쳐다봤다.
“내가 움직이라고 할 때 움직여.”
“응.”
“곧 터널이 나와. 그 전에 오시프를 데리고 나가야 따돌리기 쉬울 거야.”
“알겠어.”
“잘 숨어있어.”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몇 번이나 당부해도 믿음이 안 간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켜. 유리는 짧게 한숨을 쉬곤 문을 열었다. 칸을 넘어가자 네다섯 명의 승객이 보였다. 그중 둘은 무장한 유리를 보더니 서둘러 총을 꺼냈다.
유리는 망설임 없이 그들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꺅! 승객이 놀라며 침대 안으로 몸을 웅크렸다. 유리는 그들이 군인인지, 민간인인지 확인하고는 아나스타샤에게 손짓했다. 숨어있던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뒤에 찰싹 붙었다.
전투는 길지 않았다. 화물칸으로 넘어가는 마지막 열차 칸에 도달한 유리는 작게 뚫린 유리창으로 동태를 살폈다. 머리통이 문 앞에 알짱거리는 걸 봤는지, 총알이 날아왔다. 으악! 아나스타샤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유리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벽 뒤로 숨었다. 총알이 빗발쳤다. 유리가 연막탄을 앞칸에 던졌다. 퍽! 터지는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넘어왔다.
“여기서 기다려!”
유리의 고함에 엉덩이를 들썩이던 아나스타샤는 다시 바닥에 몸을 붙였다. 유리는 곧장 맨 앞칸으로 들이닥쳐 무장 군인을 저격했다. 총알은 정확히 명치를 뚫고 지나갔다. 연기가 걷히기 전에 전원을 처치한 유리는 소총을 가슴에 멘 채 숨을 돌렸다. 그가 선 열차 칸에서 산 사람은 유리뿐이었다.
“공주! 이제 와도 돼.”
신호가 떨어지자 아나스타샤가 조심스럽게 열차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눈을 꿈뻑이는 게 먼 거리에서도 잘 보였다. 유리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반사 작용이었다. 그는 까치발을 들고 널브러진 시체를 요리조리 피해 유리에게 왔다.
유리는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물가에 내둔 아이 같아서 영 믿음이 안 갔다. 본인도 아는지 유리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머리를 기댔다.
“유리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을 거야.”
“벌써 죽으면 곤란하지.”
유리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는 하얀 이를 보이며 웃었다. 아나스타샤는 눈썹을 찌푸렸다. “지금 웃음이 나와?”로 시작하는 칭얼거림이 시작됐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제, 오시프를 구해 빠져나가기만 하면 됐다. 빠져나갈 방법을 들으면 아나스타샤는 기겁하겠지만 말이다.
유리는 화물칸과 이어진 문을 열었다. 칸과 칸이 연결된 고리만 보였다. 아나스타샤가 난간을 붙잡았다.
“여길 건너?”
“그래야지.”
유리가 연결 고리 위로 발을 올렸다. 순간 열차가 덜컹이더니 고리까지 들썩였다. 유리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으아아. 아나스타샤가 기함하며 유리의 허리를 붙잡았다. 두 걸음만 떼면 반대쪽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문을 열고 오시프를 빼내면 된다. 유리는 다른 발을 들었다.
“유리, 너무 위험해.”
“안 죽어.”
“방금 죽을뻔했잖아!”
“젠장! 거슬리니까 들어가 있어!”
쫑알쫑알 시끄러워! 유리가 소리쳤다. 아나스타샤도 지지 않았다.
“너 없으면 나는 어떡하라고!”
진심에서 튀어나온 외침이었다. 진심인지라, 유리는 맥이 풀렸다. 그런 얘기를 지금 해야겠냐는 생각이 들면서도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죽어. 오시프를 구해야 너랑 떡칠 시간을 벌 거 아냐.”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달래주기엔 촉박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손을 풀어내고 앞으로 손을 뻗었다. 화물칸 문이 열렸다. 상대가 총을 겨눴다. 권총인가? 아니, 총구가 투박하다. 테이저건이다. 유리는 생각했다. 아나스타샤도 상대가 든 총을 발견했다. 죽는다! 공주는 있는 힘을 다해 유리를 잡아당겼다.
몸이 뒤로 젖혀졌다. 상대는 총을 쏘지 않고 칸을 연결하는 걸쇠만 풀었다. 칸과 칸이 떨어졌다. 오시프가 갇힌 열차 칸은 점점 멀어졌다. 헬기가 아나스타샤와 유리를 앞질렀다. 헬기 바닥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군용 헬기였다. 헬기는 열차 칸을 밑에 달고 계곡 사이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아나스타샤와 유리는 열차 끝에 나란히 앉아 하늘을 대롱대롱 나는 화물칸을 구경했다.
“하…….”
한숨에서 피곤이 묻어났다. 아나스타샤가 코를 훌쩍였다. 유리를 구하긴 했는데, 오시프를 놓치고 말았다. 속력을 잃은 열차는 철로 한가운데에 섰다. 유리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간신히 불을 붙였다.
“어떻게 가지?”
“어떡하긴. 요정을 불러야지.”
“여기도 요정이 있어?”
유리는 연기를 길게 뿜었다. 용이 김을 뱉는 것 같았다. 요정은 어디에나 있지. 유리는 엉뚱한 소리를 하며 아나스타샤를 응시했다. 추위에 빨개진 얼굴이 부끄러워하는 소녀처럼 보여서 피식 웃어버렸다. 아나스타샤도 그를 따라 웃었다.
러시아 북부의 겨울바람은 가만히 앉아있어도 살이 아렸으나, 타오르는 마음까지 얼리지 못했다.
눈이 내린 무르만스크에 햇빛이 비치자 온 도시가 광물처럼 빛났다. 눈의 여왕이 궁전을 지을 땅을 골라야 한다면 무르만스크를 골랐으리라. 아나스타샤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눈의 도시가 있으면 이렇겠지.”
“러시아는 어딜 가든 눈의 도시야.”
유리가 심드렁하게 받아쳤다. 눈이라면 신물이 났다. 눈보다 비가 나았다. 하늘이 내린 축복은 땅에 앉으면 저주가 된다. 본격적인 겨울을 알리는 지표이기도 했다. 겨울은 사양이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빈정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백색 도시를 구경했다.
그들은 헬기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무르만스크 지역 방송사에서 쓰는 낡은 헬기를 빌렸는데 조종사는 반갑게도 아나스타샤가 뉴욕에서 몇 번 봤던 유리의 직원인 마야였다. 그의 옆에는 조종대를 꽉 쥔 레이즈빗이 앉아있었다.
“형은 어디 있어?”
“리노코프 호텔이요. 7층에 묶여있을 겁니다.”
마야가 고도를 낮추며 대답했다. 잔뜩 얼어있던 레이즈빗이 유리에게 열쇠를 건넸다.
“항구 주차장에 주차해놨어요.”
“알았어.”
유리는 열쇠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레이즈빗이 뒤를 돌아보고는 순진하게 눈을 깜빡였다. 뭐 더 시킬 일 없냐는 눈치였다. 유리는 가까워지는 바다를 응시했다. 무르만스크도 행선지 중 하나일 거란 예감이 들었다.
“배를 대기시켜. 군함이면 더 좋고.”
레이즈빗의 입꼬리가 뻣뻣해졌다. 괜히 물어봤다고 얼굴에 적혀있었다. 군함을 빌리라니. 항공 모함이라도 부두에 정박시켜야 할 판이었다. 유리가 인상 썼다.
“못 해?”
“아뇨. 못 하는 게 어디 있어요?”
레이즈빗이 턱을 빳빳하게 들었다. 이것도 못 하면 벤츠는 꿈도 못 꾸리라. 벤츠도 안 사주면서 너무한 거 아닌가 싶었지만, 어쩌겠는가. 레이즈빗은 월급쟁이였다.
헬기가 가뿐히 착륙했다. 아나스타샤가 헬기 문을 열고 먼저 내렸다. 바닥에 쌓인 눈발이 헬기가 일으킨 바람에 일어나며 땅에서 하늘로 내렸다. 얼음 알갱이가 된 눈 결정이 얼굴을 때렸다. 유리는 소총이 든 바이올린 케이스를 어깨에 메고 아나스타샤를 쫓았다. 둘 다 짧은 패딩에 청바지, 안감이 털로 된 청바지를 입고 추위와 프로펠러를 피해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린 채 걸었다. 보스와 그의 공주가 멀찍이 떨어지는 걸 보던 마야가 중얼거렸다.
“부부는 닮는다지.”
“무서운 소리 마요. 아나스타샤 씨가 보스 닮으려면 죽었다 깨어나야 한다고요.”
레이즈빗이 불평했다. 하학. 마야는 시끄럽게 웃으며 헬기를 이륙시켰다. 이제 눈의 요정에게 도련님과 공주를 맡기고 보스가 집에 갈 때 탈 군함을 찾아 나설 차례였다.
* * *
리노코프 호텔은 플라자 옆 건물이었다. 총 10층짜리 건물로 이 부근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로비를 가졌다. 아나스타샤는 호텔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제 꼴을 생각했다. 겨울바람을 맞아 새빨개진 볼과 엉망인 머리카락은 두말할 것도 없다. 누가 봐도 돈 내고 숙박할 행색으로는 안 보였다.
“유리, 어떻게 ‘그’를 데려올 건데? 이 꼴로 들어갔다가는 의심만 살 거야.”
‘그’라니. 앞장서서 걷던 유리가 아나스타샤를 돌아봤다. 눈썹끼리 미간에서 맞닿을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양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 꼴로 어떻게 7층을 뒤진단 말인가. 청소부로 변장하면 모를까. 잡부로 변장하기에는 내 외모가 튄다. 공주는 생각했다.
“너는 가서 영화라도 한 편 보고 있어. ‘그’는 내가 데려올 테니까.”
“나도 싸울 수 있어.”
하아……. 유리는 한숨을 쉬었다. 싸울 수야 있겠지. 여태 가르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오시프와 조우했을 때 머리가 목 위에 붙어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슬프게도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원한다면 핵탄두라도 구해줄 만큼 그에게 약했다.
“오시프도 얄팍한 수에 넘어가 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마.”
뻔뻔하기 짝이 없는 구출 작전이었다. 구출보다는 관객을 무대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에 가까웠다. 나도 모르겠다. 유리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고쳐매고 호텔 로비로 들어갔다. 아나스타샤가 바짝 따라왔다.
회전문을 지나자 따뜻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붉은 카펫과 화려한 샹들리에, 낡은 가죽 소파가 늘어진 휴게실도 보였다. 담배를 피우거나 잡지를 보는 사람들이 몇 앉아있었다. 유리는 곧장 프런트로 향했다.
“방 있나?”
“하나면 될까요?”
프런트 직원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유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오시프를 구하면 나갈 방인데 오래 머물 필요가 없다. 하나면 되지. 그의 신경은 온통 등 뒤에 서서 알짱대는 아나스타샤에게 쏠렸다. 방에 데려다 놓고 혼자 오시프를 찾으러 가면…… 아나스타샤가 붙잡히겠지. 거지를 구하려다가 공주를 잃게 생겼다. 달고 다녀야겠군……. 유리는 지폐를 꺼내며 생각했다.
직원은 벽면에 걸린 방 열쇠 중에서 하나를 골라줬다. 3층 방이었다.
“아. 적당히 높은 쪽으로 줘.”
유리는 테이블에 방값과 팁을 얹으며 눈짓했다. 직원이 6층 열쇠를 내줬다. 열쇠를 받으려고 손을 뻗던 유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직원의 시선이 유리의 어깨 너머에 닿는다. 유리는 뒤를 곁눈질했다. 두툼한 스웨터를 입은 사내가 양옆에 서 있었다. 유, 유리. 아나스타샤가 도움을 청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잡힌 거야?”
“어.”
원하던 아나스타샤가 아닌 오시프를 붙잡고 있으니 호텔 근처 경비를 강화했으리라. 오시프의 끄나풀이 기웃거려도 마찰을 피할 수 없을 텐데 공주와 그의 공범이 보란 듯이 앞마당을 헤집는 걸 그냥 둘 리 없었다.
일찍 아는 척했으면 돈 안 냈을 거 아냐. 유리는 들어가 보지도 못한 방값을 아까워하며 조심스레 테이블에서 손을 뗐다.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들어가서 얘기할까요?”
스웨터를 입은 남자가 말했다. 아나스타샤도 잡혔는지, 이탈리아어와 러시아어를 섞어 쓰며 주님을 찾았다. 아나스타샤와 유리는 사내들의 보호를 받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 * *
시가 연기는 식사를 끝낸 아나콘다처럼 느리게 허공을 유영했다. 호텔 방은 난방을 틀지 않았는지, 아니면 방 주인의 기분에 따라 온도가 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손끝이 시릴 정도로 추웠다.
아나스타샤는 소파에 앉아 시가를 문 채 스도쿠를 푸는 오시프의 눈치를 봤다. 유리와 아나스타샤가 방에 들어온 지 한참 됐는데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크흠……. 아나스타샤가 기침했다. 스도쿠책에 숫자를 적던 오시프의 시선이 아나스타샤에게 향했다.
새파란 눈이 아나스타샤를 나무랐다. 무어라 말하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었으나 변명이랍시고 입을 놀렸다가는 시가가 혓바닥에 꽂힐 것아 입을 다물었다.
“세먀는 찾았어?”
“아니.”
오시프가 물고 있던 시가를 재떨이에 올려놓고 유리와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봤다.
“못 찾았는데 왜 여기 있지? 편히 찾으라고 자리도 비켜줬는데.”
“그러게.”
유리는 대답하며 아나스타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포포르트의 이목을 받은 아나스타샤는 바다처럼 투명한 눈을 접어 웃었다.
“구하러 왔어요.”
순수하고 진실된 눈빛 아래로 보이는 앙큼한 계략을 오시프가 모를 리 없었다. 변명이 잘못됐다. 구하는 게 아니라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이겠지. 자연스레 시선이 문을 막고 있는 군인에게 쏠렸다. 벗어났으면 벌써 벗어났다. 오시프의 입꼬리가 삐뚤어졌다.
“날 구하러 왔다고?”
아나스타샤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시프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어이가 없는데도 기분이 좋았다. 카사노바에게 홀린 줄 알았는데 광대였잖아. 반반하게 생긴 것에 비해 백치처럼 굴었다. 오시프는 아주 조금 유리가 왜 빌어먹을 아나스타샤를 좋아하는지 알 듯했다.
“어떻게? 무기도 없잖아.”
“그건…….”
아나스타샤가 말을 흐리며 유리 눈치를 봤다. 유리의 뚱한 얼굴이 ‘내가 오자고 한 거 아니다.’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어지른 장난감을 유리가 치운다.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 같으니. 티끌 같던 호감이 곤두박질쳤다.
마음에 안 든다고 가만히 앉아있을 상황은 안 됐다. 그렇다고 오시프가 먼저 나서줄 것 같지도 않았다. 유리는 오시프가 들고 있던 연필을 뺏어 들었다.
“잘 나가 봐야지.”
그는 곧장 군인에게 다가갔다. 조금 멀리 선 군인이 무전으로 상황을 보고하고 가까운 군인이 손바닥을 보이며 유리를 저지했다. 아나스타샤는 몸에 힘을 주고 유리를 걱정스레 지켜봤다. 유리는 경고를 무시하고 문고리를 잡으려 들었다. 군인이 총구로 유리의 가슴을 눌렀다.
“경고했습니다.”
“덴마크군이 러시아 영토 침입도 모자라서 러시아인을 쏘면 문제가 될 텐데.”
유리는 총구를 잡아 자신의 머리를 겨누게 했다. 군인은 떫은 표정을 지었다. 뒤에 선 군인은 오시프를 겨냥했다. 상대는 라포포르트다. 명령이 있기 전에는 불필요한 마찰을 피해야 했다. 혹시 모를 사태에 군인은 안전핀을 건 채로 뒀다.
“아나스타샤만 넘기신다면 가도 좋습니다.”
유리의 이마에 힘줄이 섰다. 누굴 넘기란 말이야? 아나스타샤는 내 것이다. 속죄하기로 한 순간부터 아니, 생일 파티에서 처음 마주친 그 순간부터. 오시프는 팔짱을 끼고 연극을 보듯 상황을 구경했다.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건 아나스타샤뿐이었다.
군인들의 눈빛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교전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유리는 연필을 짧게 잡아 군인의 팔에 꽂았다.
“아악!”
군인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면서도 유리에게 달려들었다. 유리는 자세를 낮춰 군인을 흘려보내고 고꾸라진 얼굴을 무릎으로 부쉈다. 그리곤 뒤에 서 있던 군인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군인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연필 한 자루로 군인 둘을 제압하다니. 아나스타샤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얌전히 앉아 구경하던 오시프가 손뼉을 치며 다가왔다.
“두 개씩이니까, 사이 좋게 나누면 되겠어.”
유리는 말없이 기절한 군인의 무기를 뺏었다. 오시프가 소총의 탄창을 확인하고는 안전핀을 풀었다. 철컥, 하고 장전되는 소리가 났다. 문밖이 부산스러웠다. 유리는 총을 줍기 전에 남자의 전술 조끼를 벗겨 아나스타샤에게 던졌다. 그 위로 잔뜩 달린 주머니에는 로프와 구급약, 작은 칼이 들어있었다.
“자, 어디 구해져 보실까.”
오시프가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먼저 문을 열었다. 무장한 아나스타샤가 오시프를 따르고 유리가 뒤를 엄호했다.
복도에서 그들은 오시프의 바람대로―아나스타샤의 기대와 달리―경비와 맞닥뜨렸다. 총 대신 곤봉과 테이저건을 든 그들을 오시프가 비웃었다. 표적 놀이와 다를 것 없었다. 그들은 라포포르트를 쏠 수 없었으나 라포포르트는 쏠 수 있었다. 오시프가 좌측을, 유리가 우측을 맡았다.
복도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총성과 함께 쓰러졌다. 사격 연습실의 표적이 뒤로 넘어가는 광경과 비슷했다. 상황은 금방 종결됐다. 바닥에 쓰러진 군인들의 앓는 소리가 들렸다. 오시프가 한숨을 쉬었다.
“덤비는 짐승은 살려두는 게 아니야.”
“총도 못 쏘는데 죽여서 뭐 해? 착한 일을 해야 천국에 가는 거 몰라?”
“나처럼 국가와 가정에 충실한 남자가 또 어디 있다고.”
그는 태평하게 유리의 핀잔에 대꾸하며 시체들의 몸을 뒤졌다. 수류탄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라이터를 발견했다. 오시프가 아나스타샤에게 라이터를 던졌다. 라이터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지? 라이터를 받은 아나스타샤는 고민했다.
화재 경보를 울리면 인파 사이에 섞여 나가기 편하지 않을까? 공주는 머뭇거리다가 방 안으로 들어가 화재경보기를 불로 지졌다.
찌르릉. 경보가 울리며 물이 터졌다. 방문 앞에 서 있던 오시프가 환호했다.
“너희 정말 재미있게 노네.”
“시간 없어. 나가야 해.”
물이 쏟아졌다. 젖은 그들은 비상계단을 박차고 나왔다. 때아닌 화재 경보에 다른 층에 머물던 손님들도 비상계단으로 쏟아져 나왔다.
로비 현관문을 젖히고 나오자 찬 공기가 그들을 반겼다. 러시아의 한기가 이리도 반가울 줄이야! 아나스타샤는 숨을 헐떡이며 목구멍을 옥죄이는 냉기를 들이마셨다. 오시프는 주변을 둘러봤다. 승용차나 오토바이 한 대 보이지 않았다. 애용애용거리는 소방차 사이렌이 들렸다.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야?”
“걸어왔지.”
유리가 대답했다. 오시프가 유리를 돌아봤다. 거짓말은 아닌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입김이 담배 연기처럼 길게 뿜어졌다. 아나스타샤가 항구 쪽을―정확히는 유원지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야 하는데, 우버 부를까요?”
라고 말하며 아나스타샤는 어색하게 웃었다. 소총을 들고 있는 사내를 태울 우버가 과연 몇이나 될까?
“뛰는 게 더 빠르겠어.”
오시프가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먼저 항구 쪽으로 뛰어갔다. 유리가 아나스타샤의 등을 두들겼다. 정말 뛰어?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힐끔거리며 눈짓했지만, 그는 오시프를 따라 가버렸다. 잠깐! 아까는 안 뛰었잖아! 아나스타샤가 목소리를 줄여 고함쳤지만, 소방차 사이렌에 묻혔다.
* * *
아나스타샤로 불린 것은 열여섯 살 여름이었다. 어째서인지 알파로 발현하고서부터는 미샤가 자신을 만나주지 않았다. 왤까? 메일을 쓰면 몇 달 뒤에 답장이 왔고, 러시아에 놀러 가도 만나주지 않았다.
왤까? 이바노비치의 저택에 무작정 쳐들어가도 미샤는 없었다. 일이 바빠서 만날 수가 없단다. 올 때까지 방에서 기다린다고 고집을 부려도 그는 오지 않았다. 함께했던 서재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왜지? 어린 아나스타샤는 미샤의 행동에 불만을 품었다. 그와 나눴던 우정에 금이 생겼다. 나랑 놀기 싫은 거야? 더는 춤 추기도 싫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질린 거야? 어째서? 항상 생일을 챙겨줬으면서. 여름이고 겨울이고 안부를 물으며 러시아에 오길 바랐으면서.
낚시도 가자고 했으면서. 내가 최고의 보물이라고 했으면서…….
알파로 발현 후, 다비드에게도 큰 상처를 받았던 아나스타샤는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던 미샤의 부재에 끝없이 침울해졌다. 한창 예민한 시기였다. 아나스타샤는 그때부터 자신을 ……라고 부르는 면 난리를 쳤다. 후추 물을 마신 황소처럼 성을 냈다.
……가 아나스타샤가 되기는 쉬웠다. 호적에는 ……로 올라가 있을지 몰라도 입으로는 ‘아나스타샤’로 불렸다.
미샤가 아나스타샤랬어. 나는 아나스타샤야. 새로운 이름을 얻은 시모나로티의 소년은 활기를 되찾았다. 안 좋은 일은 ……로 묶어 던져버리고 앞으로는 아나스타샤로 즐겁게 살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스무 번째 생일 파티에 미샤를 초대했다. 당연하게도 그는 오지 않았다. 그해 겨울, 제약사 이사에서 물러나고 요양원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세르게이 씨에게 받았을 뿐이다.
바다 비린내도 한기에 얼어버렸는지 무르만스크의 항구는 쾌적했다. 미처 치우지 못한 눈은 밟고 지나가는 사람도 없어서 뽀얀 자태를 유지했다. 봄이 올 때까지 형태를 유지할 것만 같았던 눈더미 위로 무릎이 쏟아졌다. 흐아. 거친 숨과 함께 손 두 개가 눈을 짚었다.
“그거 뛰었다고 쓰러지면 어떡해?”
오시프는 눈 위에 엎드려 헥헥거리는 아나스타샤를 못마땅하게 내려다봤다. 호흡곤란으로 사경을 헤매던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팩, 들더니 오시프를 째려봤다. 승패가 정해진 신경전이 찰나 동안 이뤄졌다. 아나스타샤는 겨우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20분을 전력 질주하면 아무리 타조라고 해도 거품을 물 거예요.”
오시프는 아나스타샤의 투덜거림을 듣는 척도 안 하고 지나쳐 유원지 안으로 들어갔다. 가쁜 숨을 뱉던 유리가 아나스타샤를 부축했다. 괜찮아? 무심한 회색 눈이 다정하게 묻는다. 아나스타샤는 키스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가 없었으면 어쩔뻔했을까…….
“관람차를 타야 하나?”
작은 놀이동산은 눈도 제대로 치워지지 않았고, 관람객도 적었다. 그들이 소총을 메고 어슬렁거려도 놀라는 이는 없었다. 슬리퍼를 신은 오시프는 발이 빨갛게 얼었는데도 털신을 신은 사람처럼 똑바로 걸었다. 아나스타샤와 유리는 오시프의 안내를 받아 관람차 앞에 섰다.
아나스타샤는 심장이 귓가에 울리는 와중에도 난간을 붙잡고 관람차 승강장 위로 올랐다. 와 보니 알겠다. 처음 오는 곳이었다. 관람차도 마찬가지였다. 런던 아이라면 모를까. 무르만스크라는 도시도 생소했다. 기이한 기억을 가진 채로 아나스타샤는 정차된 관람차 문을 열어봤다.
빨간 사탕이 든 병이 좌석 위에 올려져 있었다. 미샤가 간식이라며 주던 그 사탕이었다. 아나스타샤는 홀린 듯이 병을 집었다. 아나스타샤가 관람차 앞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니, 걱정이 된 유리가 따라 올라왔다.
“아냐.”
아나스타샤가 흠칫, 놀랐다. 사탕을 뺏길세라 뚜껑을 열어 안에 든 사탕을 입에 털었다. 또 뭘 주워 먹고 있어! 고함보다 유리의 손이 먼저 나갔다. 병이 바닥에 떨어져 틈으로 빠졌다.
“야!”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돌려 잡았다. 그는 꾸역꾸역 사탕을 깨물어 먹고 있었다. 유리가 입에 손을 집어넣으려 했다. 아나스타샤는 입술에 힘을 주며 거부했다. 그러는 순간에도 아작대는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뭔 줄 알고 처먹는 거야!”
사탕에 미쳤나. 유리가 성을 내도 아나스타샤는 고집을 부렸다. 입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사탕을 다 씹어 삼킨 아나스타샤가 입맛을 다셨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대가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참았다. 잘못 때렸다가 기절이라도 하면 큰일이니 말이다.
사탕 절반은 버려졌지만, 절반은 먹었다. 아나스타샤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가 유리의 표정을 보고는 미소를 거뒀다.
“그 사탕에 뭐가 있는 거야?”
“나도 모르겠어. 미샤가 어릴 때 자주 줬던 건데…….”
“몇 년 전에 죽은 노친네가 주던 사탕이 무르만스크에 왜 나타나? 그것도 관람차 안에.”
유리가 따졌다. 아나스타샤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다. 난들 아나. 있어서 먹은 건데……. 씨알도 안 먹힐 변명이었기에 아나스타샤는 침묵을 선택했다.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오시프가 끼어들었다.
“미하일 이바노비치가 살아있나?”
“분명히 죽었어.”
실없는 소리에 유리가 대답했다. 흐음. 오시프가 숨을 고른다. 주위가 한층 더 싸늘해졌다. 아나스타샤는 몸을 떨었다.
“동업자가 있군.”
예상은 했지만,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지라, 찾지는 못했다. 낌새가 보였다면 요정들이 알려줬을 텐데, 보고도 없었다. 미하일의 동업자가 누구인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었다. 지상을 딛고 선 것들이면 뭐든지 찾아내는 라포포르트가 본국에서 그 흔적을 찾지 못하다니. 여간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다음은 어디야?”
유리가 물었다. 쥐새끼 같이 숨어다닌다 한들 언젠가는 꼬리가 잡힐 거다. 괘씸죄는 그때 물어도 늦지 않다. 지금은 아나스타샤의 목에 걸린 폭탄을 떼어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응시하며 말했다.
“바다낚시, 좋아해?”
아나스타샤의 한 마디가 목적지를 정했다. 그의 기억을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무르만스크까지 왔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바다는 바렌츠해였다. 아나스타샤는 기억을 더듬었다. 미샤가 해주던 달콤한 이야기. 빨간 시럽이 든 사탕을 먹으며 이야기 듣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미샤랑 낚시 얘기를 자주 했어. 미샤가 북극해에 섬이 있다고 했거든. 내가 혼자 배를 몰 나이가 되면 같이 그 섬에 가서 낚시하기로 했는데…… 날 안 만나줘서 못했지.”
씁쓸함에 아나스타샤는 입맛을 다셨다. 그가 죽기 전에도 몇 번 찾아갔었지만,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까지는 만남을 거부했다. 왤까? 아나스타샤는 아직도 미하일 이바노비치의 심중이 궁금했다. 둘도 없는 친구인 줄만 알았는데, 죽어서도 사람을 괴롭히는 노친네였다니.
“일단 북극으로 가야겠군.”
오시프가 말했다. 배가 필요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손목을 잡고 걸었다. 레이즈빗이 일을 잘 처리했다면 부두에 타고 갈 배가 있으리라. 걸음이 빨라졌다. 호텔에서도 마주치지 않은 리브 공주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걱정은 현실이 됐다. 그들이 유원지를 빠져나오기 직전, 리브 공주와 마주쳤다. 그녀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경량 패딩을 입고 있었으나 산탄총을 들고 무장한 사복 군인을 대동해 유원지 입구를 막을 여자는 흔치 않았기에 셋은 걸음을 멈췄다. 라포포르트는 메고 있던 소총을 들었다.
“리브.”
아나스타샤가 작게 중얼거렸다. 적막을 깬 아나스타샤의 부름에 리브 공주가 고개를 들었다. 사자 같은 매서운 눈빛이 아나스타샤를 쏘아붙였다. 아나스타샤가 양손을 위로 올리며 그녀를 회유했다.
“리브, 이러는 건 옳지 않아. 너는 왕족이잖아.”
“왜 내가 아닌 거야?”
통하지 않았다. 분노로 사리 분별이 안 되는 건지, 리브가 되려 따졌다. 아나스타샤는 억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넌 오메가잖아.”
“알파는 오메가와 짝이 되어야 해!”
“공주…… 나는 오메가는 안 돼.”
아나스타샤가 어찌해 줄 방도가 없었다. 리브의 눈이 빨갛게 충혈됐다. 알파가 오메가와 안 된다니. 알파가 알파와 약혼하다니! 리브는 산탄총을 들었다. 총구가 아나스타샤를 향했다. 흐악! 아나스타샤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더 높이 들었다.
리브 공주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숨을 골랐다. 매섭게 치켜뜬 눈매에 눈물이 고였다. 분노, 슬픔…… 질투가 물이 되어 떨어진다. 그마저도 아나스타샤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애도하고 한탄하는 눈물이었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가질 수 없어.”
리브가 방아쇠를 당기는 것보다 유리가 빨랐다. 아나스타샤의 바로 옆에서 총성이 울렸다. 아나스타샤가 비명을 지르며 오시프의 어깨를 붙잡았다. 리브 공주는 총을 놓치고 허벅지를 감쌌다. 그녀의 호위대가 총구를 위로 들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뒤늦게 사태 파악을 한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나무랐다.
“너, 너는 공주를 쏘면 어떡해! 아무리 그래도……! 왕족을!”
“저게 자꾸 내 걸 탐내잖아.”
아나스타샤가 펄쩍 뛰었다. 공주한테 ‘저게’가 뭐야! 하고 타일렀지만 듣는 척도 안 했다. 오시프는 짤막한 한숨을 쉬며 자신을 붙잡은 아나스타샤의 손을 떼어내고는 앞으로 걸었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가오는 오시프를 리브 공주는 지켜봤다.
“이쯤하고 돌아가면 없던 일로 해주지.”
“그렇게는 못 해.”
오시프는 뒤를 돌아봤다. 유리의 옷깃을 붙잡고 자신을 기다리는 머저리가 있었다. ‘저게’ 뭐가 좋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왕족을 쏜 유리도 유리였지만 이 공주님도 만만치 않았다.
“다 죽여.”
리브 공주가 명령했다. 예? 그녀를 부축하던 호위가 되물었다.
“못 들었어? 죽이라니까! 라포포르트라도 시체가 되면 입을 못 놀리겠지.”
“승복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나중에 또 놀지.”
이렇게 피곤하게 굴어서야. 오시프는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공주의 호위대는 별수 없이 안전핀을 풀고 그들을 조준했다. 타타타…….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유원지 위로 헬기 한 대가 나타났다. 기관총이 달린 헬기의 바닥에는 라포트의 약자가 적혀있었다.
리브 공주의 호위는 공주를 데리고 엄폐물을 찾아 흩어졌다. 오시프는 홍해처럼 갈라진 길을 따라 걸으며 유리에게 손짓했다. 헬기가 일으킨 바람에 눈발이 휘날렸다. 아나스타샤와 유리는 보석처럼 빛나는 얼음 결정 사이로 사라졌다.
* * *
그들은 작은 어선을 타고 바렌츠해로 나섰다. 헬기를 타고 갔으면 좋았겠지만, 행여 ‘배’를 타지 않아서 지도가 열리지 않을까 봐, 미리 조치한 것이다. 레이즈빗은 유리가 요구한 배를 준비하지 못했다. 화물선과 작은 어선 몇 대가 묶여있는 항구를 유리는 허망하게 쳐다봤다. 준비해놓으랬더니 안 해놔? 유리의 쥔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미국놈은 믿을 게 못 된다니까.”
오시프가 비웃었다. 내 말을 안 듣고 미국인을 식솔로 받은 최후다. 유리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중요한 배가 준비되지 않았기에 입을 다물었다. 아나스타샤를 연기할 필요가 없어진 오시프가 가까운 곳에 걸린 어선에 올라탔다.
오시프는 계획만 철두철미한 것이 아니라, 손재주와 임기응변도 좋았다. 오시프는 키도 없이 어선에 시동을 걸었고 아나스타샤와 유리는 무사히 콜라만을 따라 바렌츠해로 나올 수 있었다.
배라 한들 어선은 어선이었다. 바렌츠해로 나서자마자 배의 상태가 이상하더니 먼바다까지 나왔을 때는 엔진실에서 연기가 새어 나왔고 시동이 꺼져서 어쩔 수 없이 항해를 멈춰야 했다.
“이거 왜 이러는 거야?”
아나스타샤가 판자 조각으로 엔진실 연기를 밖으로 날리며 물었다. 유리와 오시프는 팔짱을 끼고 안을 쳐다봤다.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역시 작은 배를 타고 바다까지 무리하게 항해한 탓에 엔진에 부담이 간 듯했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육지가 작은 파도처럼 보일 정도로 멀리 나왔기 때문이다.
“섬은 어느 쪽에 있어?”
유리가 물었다. 아나스타샤는 판자를 든 채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아아, 설마…… 섬 위치를 모르나? 유리와 오시프의 표정이 비슷하게 일그러졌다. 이렇게 보니 유리와 닮은 오시프 씨도 귀여운 얼굴이잖아. 아나스타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히죽 웃었다. 그 얼굴에 심기가 거슬린 유리가 으르렁거렸다.
“웃음이 나와? 지금 고래 밥이 되게 생겼는데.”
“한 번도 가본 적 없는걸.”
“네가 모르면 누가 아냔 말이야.”
북극해에 섬이 한두 개도 아니고. 못해도 시칠리아섬보다 큰 섬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유리는 자세한 위치를 알고 싶었다. 아나스타샤는 눈동자만 굴릴 뿐이다. ……됐다. 화내서 뭐 해. 아나스타샤가 위치를 알았으면 진작 내게 말했겠지. 유리는 답답함에 들끓는 화를 차분히 식혔다.
“일단…… 북극해에 있는 섬이랬으니까. 북극점으로 가면 되지 않을까?”
아나스타샤가 의견을 냈다.
“그 뒤에는? 고장 난 배를 타고 얼마나 갈 수 있을 것 같아?”
아나스타샤에게 화풀이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 걸 아는데도 말에 가시가 돋쳤다. 아나스타샤는 추위에 빨갛게 언 얼굴을 하고 유리를 빤히 쳐다봤다. 파란 눈동자가 유리의 마음을 비치는 것 같았다.
유리는 그의 눈을 피했다. 죄가 있는데 어찌 천사의 눈을 똑바로 보겠는가. 가장 심란한 건 아나스타샤 본인일 텐데……. 유리는 망망대해를 응시했다. 아나스타샤가 언 볼을 손으로 문지르며 얘기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거의 다 왔잖아.”
“네 부하들이 우릴 찾으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말이야. 걱정 마, 유라. 요정이 길을 열어주겠지.”
죽지는 않을 거야. 오시프가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유리는 한숨을 푹 쉬었다. 팔뚝을 걷어 올리고는 엔진을 살폈다. 오시프와 아나스타샤가 반색했다.
“엔진도 고칠 줄 알아? 유리, 못 하는 게 없구나.”
“쓸모가 있어서 다행이야.”
아나스타샤가 칭찬하면, 오시프가 초를 쳤다. 뭉게뭉게 올라오던 연기가 잦아들었다. 오시프가 시동을 걸자 다시 배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유리는 손에 묻은 기름때를 바지에 대충 닦아냈다.
“얼마 못 갈 테니까 얼른 찾길 기도해.”
“금방 찾을 거야.”
공주는 홍채가 안 보이게 웃으며 기운을 돋궜다. 흥……. 유리는 백치처럼 웃는 아나스타샤를 노려보다 홱 고개를 돌렸다. 배가 다시 북극해로 나아갔다.
수평선은 바다가 얼어붙어 흰색 선으로 보였고 유빙이 먼지처럼 둥둥 떠다녔다. 그들의 앞에 파도가 부딪치는 섬이 보였다. 부두로 보이는 곳에는 두 동강 난 나무배의 선수만 남아있었다. 나무 몇 그루와 작은 언덕이 전부인 아주 작은 섬이었다. 아나스타샤가 그 섬을 가리키며 저기가 분명하다고 외쳤다.
오시프는 선수에 서서 섬을 바라봤다.
“저런 섬이 있던가?”
“이 앞이 군도잖아.”
유리가 무신경하게 대꾸했다. 섬이라기엔 암초에 가깝지 않은가. 앞에 배가 묶여있다지만……. 오시프는 아나스타샤가 부담감에 아무 섬이나 찍었다고 생각했다. 파도가 거세면 바다에 잠길 것 같았다.
“미샤가 작은 섬이라고 했죠. 봐요! 작은 섬이잖아요.”
오시프를 설득하려는 듯 아나스타샤가 배와 섬을 번갈아 가리키며 얘기했다.
“저 배는 미샤 소유가 분명해요. 보면 이름이 적혀있을 거예요.”
아나스타샤는 확신에 찼다. 오시프는 나무배 옆에 어선을 정박했다. 그들은 사다리를 타고 섬에 내려왔다. 아나스타샤가 나무배로 달려가 바깥을 살폈다. 나무배에 이름을 붙여주는 사람이 얼마나 있으려나 싶었으나, 그 배에는 ‘미하일’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미하일이야!”
“여기가 맞다고?”
유리와 오시프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키 작은 나무 몇 그루가 자란 언덕이 전부였다. 여정의 끝이 다가온다. 신이 난 아나스타샤가 언덕 위로 뛰어갔다. 아나스타샤와 오시프도 그의 뒤를 따랐다.
언덕 위에 오르니 작은 섬이 한눈에 보였다. 북쪽에는 하얗게 언 바다가, 남쪽으로는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바다’뿐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땅을 발로 두들기며 뭔가를 찾았다. 보물 위치를 모르는 라포포르트는 아나스타샤의 묘기를 구경했다.
흙바닥을 두드린다고 소리가 날 리 만무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가 장소를 옮겨 발을 딛자 철판 튕기는 소리가 났다. 아나스타샤가 다시 발을 굴렀다. 안이 텅 비었는지 댕댕, 소리가 울렸다.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바라봤다. 이 아래에 세먀가 있다. 유리가 성큼성큼 다가가 흙을 파냈다. 아나스타샤도 무릎을 꿇고 앉아 흙을 치웠다. 곧 녹슨 철문이 나타났다. 유리가 손잡이 부분을 찾아내 문을 열었다. 위에 덮인 흙이 우수수 떨어졌고,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드러났다.
지하의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아나스타샤는 뒷걸음질 쳤다. 들어가기 싫었다. 오래 방치된 것 같은데 들어갔다가 물에 잠기기라도 한다면 꼼짝없이 수장될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오시프 뒤로 물러났다.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도망가는 걸 봤음에도 먼저 지하로 들어갔다. 오시프가 유리 대신 공주를 나무랐다.
“뭐해? 네가 앞장서야지.”
“그, 그렇지만 위험하잖아요.”
“……이런 머저리가 대체 어디가 좋다고.”
오시프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계단을 내려갔다. 섬에 홀로 남은 아나스타샤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겁을 먹고 라포포르트를 쫓았다. 뭍에 혼자 있는 것보다, 유리와 그의 형과 있는 것이 훨씬 안전하게 느껴졌다.
* * *
지하실은 작은 섬 지하에 있는 것 치고는 규모가 컸다. 기껏해야 방 하나가 전부일 줄 알았는데 문이 다섯 개나 되는 복도가 보였다. 좌우로 녹슨 철문이 두 개씩 달려있었고 정면에는 방수문이 있었다.
유리는 가장 수상한 방수문으로 다가갔다. 지하실에 방수문이라니. 뭘 걱정해서 방수문을 달았을까? 유리가 문고리를 돌렸다. 오래된 손잡이가 삐거덕거리며 돌아갔고 문이 열렸다.
내부에 뭉쳐있던 온기가 문틈으로 튀어나왔다. 따뜻한 공기는 꽃향기를 품었다. 유리가 손전등으로 안을 비추며 천천히 진입했다. 아나스타샤가 뒤따라 들어왔다. 오시프는 둘을 따라가려다 뒤를 돌아봤다.
인기척이 느껴진다. 오시프는 소리에 집중했다. 좌측, 입구에서 가까운 방에 뭔가 있다.
아나스타샤가 전등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켰다. 못해도 10년은 방치된 지하실에 불이 켜졌다. 방 가운데에 비디오 플레이어와 TV가 있고, 벽면에는 수많은 파일이 꽂혀있었다.
“형, 안 들어와?”
유리가 문에 붙으며 오시프를 찾았다. 오시프는 유리의 부름에도 좌측 문에서 들리는 소음을 경계했다.
“너희 둘이 확인해.”
“괜찮겠어?”
세먀가 안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보물 상자를 열어보지 않아도 되냐는 뜻이다. 오시프는 방수문을 닫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세먀를 찾는 순간을 못 보는 건 아쉽지만, 누구에게 빼앗기는 것보다 나으니까. 덜컹……. 이제는 기척을 숨길 생각도 없는지 철문 안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쥐새끼인가?”
오시프는 여유롭게 문 앞으로 걸어갔다. 안에서 달그락거리던 소리가 그쳤다. 아주 큰 쥐가 숨은 것이 분명하다. 문을 열었다. 부드럽게 밀렸다. 오시프가 안으로 한 발 내디뎠다. 방금까지 부산스럽게 굴던 쥐가 어디에 숨었는지 적막하기만 했다. 착각일 리가 없는데. 오시프는 문이 열린 방향을 둘러본 뒤 문 뒤쪽을 확인했다.
어두운 밀실에서도 하얗게 빛나는 피부와 푸른 눈을 가진 짐승이 오시프를 덮쳤다. 있는 힘을 다해 밀어붙이는 탓에 오시프는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큭!”
자빠진 오시프는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손바닥 아래에 전선이 뭉텅이로 잡혔다. 전선? 시선을 들었다. 눈앞에 전자시계가 보였다. 빨간 불빛이 번쩍이는 디지털시계에 ‘04:00’이라고 시간이 저장되어있었다. ……4시간인가?
살기가 가까워진다. 오시프는 몸을 굴려 자신을 노리는 짐승을 피했다. 손전등으로 짐승을 비췄다. 햇빛이라고는 한평생 보지 못한 것 같은 하얀 피부에 눈썹과 머리카락도 없어서 푸른 눈을 가진 백골처럼 보였다.
갑작스러운 빛에 짐승이 눈을 찡그렸다. 오시프는 그대로 주먹을 날렸다. 백골 짐승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오시프는 묻은 먼지를 털고 일어났다.
“네가 미하일 이바노비치의 동업자구나.”
“그분의 계획에 너도 있다.”
오시프는 ‘그분’과 ‘계획’이 뭔지 묻지 않고 냅다 짐승의 배를 짓밟았다. 백골이 기침을 토하며 몸을 웅크렸다. 계획이 뭐든, 이 쥐는 그분의 뜻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오시프가 가만둘 리 없었다. 짐승이 입을 우물거렸다. 자결이라도 할 생각이야? 오시프는 간단히 턱을 걷어차 행동을 저지했다.
“죽으면 안 되지. 넌 살아서 이바노비치의 계획을 자백해야 해.”
그래야 이 소란을 이바노비치에게 뒤집어씌우지. 오시프의 들뜬 말소리에 바닥에 늘어진 백골이 비웃기 시작했다. 오시프는 핏빛으로 변한 입가를 지켜봤다. 짐승이 오시프를 올려다봤다. 푸른 눈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짐승이다……. 알파보다 지독한 알파의 체향이 좁은 방에 퍼졌다.
오시프는 소매로 입과 코를 가리고 뒤로 물러나 문을 사수했다. 그 틈을 타 백골이 일어났다.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눈빛은 형형하게 빛났다.
“오시프 라포포르트. 너도 계획의 일부분이다.”
짐승은 차분한 목소리로 오시프에게 말했다. 내가 올 줄 알았다니. 미하일 이바노비치는 아나스타샤와 유리가 뉴욕에서 만나기 전에 죽었다. 라포포르트가 관여할 거라고는 꿈에도 못 꿨으리라.
“살고 싶으면 빌어.”
같잖은 혀 놀림으로 날 회유하고 싶으면 더 그럴싸한 이야기를 했어야지. 지금은 그냥 죽이고 싶어지잖아. 오시프는 숨겨둔 칼을 꺼냈다. 목에 칼을 쑤셔 박으면 끝날 일인데, 오시프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짐승이 달려들었다. 오시프는 고작, 짐승의 팔을 막아서는 게 전부였다. 불행히도 오시프는 양손으로 백골의 한쪽 팔뚝을 붙잡았고, 백골의 다른 손이 무방비한 오시프의 목덜미를 노렸다. 죽는다! 오시프는 직감했다.
“윽……?”
목덜미가 따끔하다. 칼날인가? 쇠붙이? ……주삿바늘이다. 백골이 이죽거리며 약물을 주입했다.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오시프는 왼쪽 손목에 찬 칼날을 휘둘렀다.
“흐아악!”
짐승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짙은 혈향이 페로몬을 덮었다. 오시프는 비틀거리며 얼굴을 붙잡고 웅크린 괴물의 목을 노렸다. 분명 팔을 휘둘렀는데 짐승 근처도 닿지 않았다. 푸른 눈이 자신을 지켜본다. 시야가 울렁였다.
코가 잘린 그는 피를 뒤집어쓴 해골이 됐다. 그것은 오시프가 휘청거리다 무릎을 꿇는 걸 지켜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그분의 계획에 너도 있다.”
무슨 계획? 감히 날 시험용 쥐로 쓰려고 들어? 오시프는 소리치고 싶었다. 웃는 면상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싶었다. 마음과 달리 몸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하얀 얼굴 대신 코가 깨끗한 부츠가 눈에 들어왔다. 오시프는 목에 꽂힌 주사기를 감싸 쥐며 눈을 감았다.
혼돈이 그를 집어삼켰다.
* * *
아나스타샤는 문 뒤에 설치한 침대에 앉아 심호흡했다. 달달한 꽃향기도 그렇고 ‘아나스타샤’라고 적힌 파일들이 가득한 책장을 보니 심란해졌다. 유리가 어슬렁거리며 책장을 꼼꼼히 확인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꼿꼿한 등과 힘줄이 튀어나온 손등이 아나스타샤를 안심시켰다.
공황에 빠진 아나스타샤를 대신해 유리가 추리를 끝냈다. ‘아나스타샤’가 적힌 파일과 비디오 플레이어와 TV. 마치 넣어서 보라는 듯이 침대 위에 놓인 비디오테이프까지. 미하일 이바노비치가 아나스타샤 머릿속에 숨겨둔 지도를 따라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다.
“세먀는 어디 있는 거야?”
보물 지도의 ‘X’표에 도착한 게 분명한데, 세먀는커녕 아나스타샤의 이름을 딴 파일만 가득했다. 그중 하나를 빼서 봐도 알아보기 힘든 필기체로 적혀있어서 러시아인인 유리도 읽을 수가 없었다. 읽을 수 있는 단어만 본다면 공주, 계획, 실험, 성공…… 이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 옆에 놓인 비디오테이프를 힐끔거렸다. 저 안에 세먀의 정확한 위치가 있으리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유리의 생각을 읽은 아나스타샤가 테이프를 집었다. 테이프 모서리에는 「사랑하는 아나스타샤에게」라는 글귀가 미하일의 필체로 적혀있었다. 아나스타샤는 한숨을 쉬었다. 어깨가 축 꺼졌다. 작은 테이프 안에 미하일이 남기고 떠난 비밀이 담겨있으리라.
“안 볼 거야?”
“……봐야지.”
아나스타샤가 힘겹게 대답했다. 사실 보기 싫었다. 미샤가 뭘 숨기고 죽었는지, 내게 뭘 원하는지 모르고 살고 싶었다.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었잖아. 세먀를 찾든, 못 찾든 미샤의 유산을 노리는 파리떼는 날 쫓아다닐 것이다.
유리가 손을 내밀었다. 아나스타샤는 그의 손을 한참 바라봤다. 유리에게 테이프를 건네주면 돌이킬 수 없다. 손끝이 약간 구부러졌다. 얼른 달라는 뜻이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것처럼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테이프를 유리에게 건넸다.
비디오를 틀었다. 오래된 기계가 돌아가고 까만 화면이었던 TV가 무지개 띠를 브라운관에 비췄다. 띠……. 스피커에서 소리가 나왔다. 화면에 미하일이 나타났다. 그는 요양원에서 봤던 소파에 앉아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뒤로 익숙한 벽지와 책장이 보인다.
“네가 이 영상을 본다면 세먀를 찾은 거겠지.”
미하일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나스타샤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먼 길을 왔구나. 고생했다. 공주. 지금 네 옆에 어떤 알파가 앉아있는지는 몰라도. 널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애비는 생각한단다. 나는…… 이왕이면 라포포르트의 막내 도련님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어떠냐. 내가 맞았니?”
미하일이 인자하게 웃었다. 혈색도 눈빛도 아나스타샤가 알던 그 남자였다. 미샤, 내 첫 번째 러시아 친구. 미하일은 뜸을 들였다. 그러나 곧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가 있는 곳은 세먀 연구 기록 보관실이다.”
눈이 자연스럽게 주변을 둘러봤다. 화면 속 남자는 아주 느리게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한평생을 세먀에 매달렸어. 성질에 상관없이 서로를 각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바람 하나를 보고 달렸단다. 그리고 나는…… 셀 수 없는 실패를 걸쳐…… 세먀를 완성했다.”
미하일이 아나스타샤를 말없이 응시했다. 그는 죽었고 그저 카메라 렌즈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뿐이겠지만, 미샤가 자신을 보고 얘기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세먀를 만들기 위해 안 해본 짓이 없단다. 비인도적인 실험은 물론이고…… 사람을 상대로도 임상실험을 진행했지. 결과는 전부 실패였어. 너 빼고 말이다.”
거듭되는 실패와 단 한 번의 성공. 사실 미하일도 그 성공이 바람대로 완성됐는지는 죽었기 때문에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죽기 몇 년 전부터 아나스타샤가 세먀를 찾으리라 확신했다. 왜 하필 아나스타샤인가? 유리는 하얗게 질린 아나스타샤를 바라봤다.
왜 아나스타샤인가?
방을 가득 채운 ‘아나스타샤’라는 라벨이 붙은 파일.
미하일이 남긴 비디오.
‘너 빼고 말이다.’
유리는 서둘러 비디오를 끄려 했다.
“그, 그냥 둬.”
아나스타샤가 말렸다. 미하일이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세먀는 성질이 발현되기 전에 주기적으로 섭취해야 안정성이 높아진다. 나는 발현 직전인 아이에게도 실험했었어. 거의 성공할뻔했다. 나는 완전한 성공을 거두고 싶었어. 부작용 없이 알파에게 각인된 알파가 보고 싶었다.”
미하일이 주의 사항을 빼먹었다는 듯 작게 손뼉을 쳤다.
“물론 세먀가 완벽하지는 않아. 각성하자마자 처음 마주친 알파에게 각인되는 정도에 그친단다. 아나스타샤, 내 공주. 네 가족과 날 아비로 둔 내 가족에게는 미안하지만…… 너는 내 마지막 실험체였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숙였다. 유리가 손을 아프게 붙잡았지만, 아나스타샤는 손을 빼내고 얼굴을 쓸었다. 미하일이 흥분된 목소리가 들렸다.
“네 무의식에 최면을 걸어 세먀를 숨겼어. 발현한 뒤 널 만나면 세먀의 효능을 확인하고 싶어질까 봐, 만나지 않았단다. 미안하다, 공주. 아니…… 나다니엘.”
“나는 당신이 내 진정한 친구인 줄 알았는데.”
공주는 울고 있었다.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배신감에 사무쳐 갈대처럼 떨렸다. 망자는 염원에 눈이 멀어, 하고 싶은 말만 해댔다.
“너도 알겠지만, 세먀는 촉진제가 있어야 해. 네가 있는 방에는 세먀의 촉진제인 기체가 가득해. 꽃향기와 비슷하지. 세먀가 완성되려면 때와 운이 따라줘야 한단다. 확률은 복용 기간에 비례해. ……나는 네가 어릴 때부터 너에게 약물을 먹여왔어. 그리고 너는 운 좋게 알파로 발현했고, 또 알파를 좋아하게 컸지. ……너도 알파와 평생을 각인된 채로 살 수 있단다. 다른 알파들처럼 말이야!”
이 끝이 어떻게 될지, 아나스타샤는 짐작할 수 있었다. 흐릿했던 기억들이 또렷해지면서 퍼즐 조각을 맞추기 시작했다. 세먀는 감기약처럼 먹으면 콧물이 멎는 약이 아니었다. 그것은 형질을 변형시키는 암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형성된 형질을 바꾸는 것보다 형질이 생기기 전에 투여되어 입맛대로 형질을 변형시키는 것이 부작용이 적으리라.
“아나스타샤,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네게 나의 세먀를 넘긴다.”
애초부터 세먀를 ‘찾는’ 건 불가능했다. 이미 갖고 있었으니까. 반쪽짜리 유산을 완성시키는 여정이었다. 세먀의 각인은 스스로 조절할 수 없다. 처음 본 상대를 운명으로 느끼게 된다……. 아나스타샤는 손으로 눈을 짓눌렀다. 옆에 있는 유리의 존재가 평소보다 더 크고 달콤하게 느껴졌다. 미하일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나다니엘, 아나스타샤. 내 공주. 생일을 축하한다. 영원히 행복하기를.”
행운을 비는 저주였다. 미하일이 마지막으로 아나스타샤에게 남긴 자물쇠를 여는 열쇠이기도 했다. 방을 채우던 향기가 한층 강해졌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코가 화끈거리고 목 뒤가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당겼다.
“아나스타샤.”
위험을 감지한 유리가 아나스타샤를 부축하려고 했으나, 아나스타샤가 손길을 쳐냈다.
“안돼, 유리! 미샤는 내 안에 세먀를 남겼어. 빌어먹을, 내가 널 보면 나는 네 것이 될 거라고.”
“이미 내 거잖아.”
“유리. 바보 같은 소리 마. 지금이야 내가 좋아서 쫓아다니지만, 나중에 질리면? 미샤가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네가 내게 질려도 나는 널 원할 거야! 그때가 오면 날 죽일 거야?”
아나스타샤는 얼굴을 들지 못했다. 언제 버려질까 두려워하는 공주의 모습은 유리를 옥죄였다. 심장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뜨거운 피가 속에서 펄펄 끓었다. 여태 내가 한 말은 뭐로 들은 건지, 미련한 공주님은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그래서 평생 아무것도 안 보고 살겠다고? 내가 아니면 변덕스러운 널 누가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 널 이용해서 시모나로티의 가보라도 훔칠 것 같나? 아나스타샤…… 봐. 너와 네 가문은 라포포르트에 비하면 별거 아니야.”
유리가 아나스타샤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얼굴을 들게 했다. 아나스타샤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눈물로 젖은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귀여웠다. 유리는 가볍게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힘이 잔뜩 들어간 입가가 부드럽게 풀렸다.
“내가 질려도 널 놔주지 않아. 내 건 영원히 내 거야.”
“유리…….”
“그러니 눈을 떠. 아나스타샤. 순순히 내 것이 돼.”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천천히 열렸다. 그 안에 숨은 푸른 눈동자가 유리를 바라본다. 새끼 오리가 처음 본 동물을 어미로 삼는 것처럼, 세먀는 처음 본 알파에게 각인 된다. 그의 페로몬과 얼굴, 목소리…… 모든 것을 기억하고 사랑한다.
아나스타샤가 웃었다. 바람을 타고 여행하던 깃털은 이제야 비로소 물가에 떨어져 깃 사이사이로 물이 스며들었다.
세먀가 거짓일지도 몰라. 각인이 풀릴 수도, 알파와 아이를 갖는 일이 여전히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확신했다. 각인이 사라지고 열정이 식어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리라고.
맞닿은 시선이 서로의 입술을 훑었다. 주저할 것 없이 입술이 부딪쳤다.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입술을 게걸스럽게 빨아댔다. 손은 목덜미를 붙잡았다가, 허리를 쓸기도 하며 바삐 움직였다. 숨소리도 빠져나가지 않는 집요한 키스를 이어갔다. 유리는 흥분한 아나스타샤가 실어 오는 체중을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으나, 끝내는 침대에 등을 대고 말았다.
방치된 침대는 어제까지 관리된 호텔 매트리스처럼 푹신했다. 곰팡이 슨 냄새도 나지 않았다.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유리를 눕힌 아나스타샤는 기다렸다는 듯이 유리의 상의 속으로 손을 넣었다. 들린 허벅지 안쪽에 아나스타샤의 사타구니가 닿았다. 유리가 손을 저지했다.
“우리, 이럴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지금이 할 때지.”
북극해를 목전에 두고 언제 생겼는지 모를 지하실에서 하는 섹스가 어떻게 좋은 때란 말인가. 당연하게도 유리는 반박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가 맑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그래…….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손에서 힘이 빠졌다. 아나스타샤가 그대로 가슴을 짚었다.
얼굴이 가까워지고 입술이 겹쳐졌다. 유리가 무릎을 굽혀 사이를 벌리면 아나스타샤가 비집고 들어와 아래에 사타구니를 문댔다. 구둣발을 아나스타샤의 다리에 감았다.
바람이 불면 풀잎이 흔들리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유리는 턱을 들어 아나스타샤의 윗입술과 코에 입술을 비볐다. 아나스타샤가 웃었다. 눈을 감고 있어서 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피부가 당겨지며 흘러나온 숨을 느낄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두통이 올 정도로 또렷한 향기가 유리를 유혹했다. 유리는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눈을 떴다. 눈앞에 아나스타샤가 있다. 지중해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 아나스타샤의 눈은 푸른 별처럼 빛났다.
원래 색이 저랬던가? 더 밝아진 것 같은데. 누가 눈동자 안에 불을 켜놓은 것 같아. 유리는 페로몬에 몽롱해지면서도 감탄하기 바빴다. 아나스타샤가 바지를 벗겼다. 유리는 그에게 아래를 맡기고 목과 귀를 깨물어댔다.
“당신이 정말 내게 각인됐다면, 이 뒤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는 흥분해서 불룩해진 알파선을 손으로 누르며 물었다. 서둘러 아래에 성기를 문대던 아나스타샤가 어깨를 떨며 신음했다.
“읏…… 거기까지 각인하면 돼.”
“흔적은 얼마 안 갈 거야.”
알파의 몸에 영원한 각인을 남길 수 있는 건 오메가뿐이다. 알파가 알파선을 깨문다 해도 몇 년 못 가거나 염증이 생긴다. 유리가 대답하자 아나스타샤가 웃었다. 그는 목을 만지던 유리의 손을 가져와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사라지면 또 남겨. 그럼 되지. 나는 영원히 네 것이니까.”
“영원은 죽어서도 내 거라는 거야.”
“그래, 죽어서도 네가 가져.”
운명을 받아들인 아나스타샤는 대답과 함께 속옷 안에서 성기를 꺼냈다. 언제부터 고개를 세우고 있었는지 붉은 살덩이가 꼿꼿하게 서 있었다. 흘러내린 상의에 가려질 때까지 유리는 숨을 참았다. 저건 볼 때마다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렇게…… 해댔는데도.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다리를 벌려 엉덩이를 치켜들게 했다. 엉덩이만 깐 우스운 자세였으나 필요한 부분을 최소한으로 내민 것뿐이었다. 유리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회음부에 살덩이가 닿았다. 축축하고 단단하고 뜨거운, 기분 나쁜 감촉이었다. 유리는 거북함 속에서 쾌감을 찾을 수 있게 됐다. 알파의 페로몬에 흥분하고 같은 사내의 성기를 가랑이 사이에 비비며 어서 들어오길 고대했다.
곧 들어오겠지. 유리는 아랫배에 힘을 빼고 심호흡했다. 속이 근질거리는 기분이었다. 아나스타샤는 한참 성기를 구멍 주름 위에 문대기만 했다. 유리의 손이 아래로 뻗었다. 성기가 손에 걸렸다. 유리는 힘을 줘 성기를 앞으로 당겼다.
“……얼른.”
차마 뒷말까지는 할 수가 없었다. 넣어줘, 얼른 해줘, 같은 소리를 맨정신에 할 리가 없잖아! 얼굴이 뜨거웠다. 정신이 반쯤 나간 게 분명했다. 유리의 재촉에도 아나스타샤는 말을 알아먹지 못한 건지 회음부 부분을 귀두로 꾹꾹 눌러대기만 했다.
두툼한 살덩이가 눌리자 고환이 싸하게 아렸다. 성기를 다시 쥐려고 해도 아나스타샤가 피하는 바람에 손은 허공을 휘저었다.
“제길…… 빨리 안 넣어? 죽고 싶어?”
“그냥 넣으면 아플 텐데.”
유리가 성질을 부리고 나서야 꼬리를 말며 이유를 설명했다. 유리는 눈앞이 까맣게 암전되는 것 같았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날 애타게 해? 수치심이 분노로 뒤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행운아인 아나스타샤는 파들파들 떠는 유리의 모습을 ‘괜찮으니 넣어라’ 정도로 해석했는지, 그의 눈이 돌아가기 직전에 입을 맞추며 아양을 떨었다.
“넣고 싶어.”
“해.”
“찢어졌다고, 날 찢으면 안 돼.”
인내심의 한계다. 유리가 입을 맞췄다. 게걸스럽게 입술과 혀를 빨아먹은 뒤에 낮게 그르렁거렸다.
“너는 말이 너무 많아.”
아나스타샤는 멍하니 유리를 응시했다. 숨을 쉬었다. 유리의 묵직한 향기만 느껴졌다. 이제 조용히 할 차례였다. 날 찢는 게 유리라면 그것도 짜릿하겠지, 같은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급히 아래를 맞췄다.
오랜 접촉이 없었던 입구는 귀두를 넣기도 빠듯했다. 풀어줄 여유가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얼른 좁고 뜨거운 안에 성기를 채워 넣고 싶었다. 억지로 밀어붙였다. 어찌어찌 앞부분이 들어갔다. 허억……. 유리가 숨을 삼켰다. 아래가 벌어지는 기분은 여러 번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어깨와 등을 움켜쥐었다. 손등과 팔뚝에 핏줄이 섰다. 아프다. 밑이 찢어지는 것 같다. 다 들어오면 정말 찢어질 것이다. 아나스타샤도 마찬가지였다. 성기가 잘릴 것 같았다. 나중은 없다고 생각한 아나스타샤는 성기 밑동을 잡아 억지로 맞춰 넣었다.
“헉……! 윽, 아아……!”
“거의 다 됐어.”
다 되긴 뭐가 다 돼. 유리는 위로를 곧이곧대로 듣지 못하고 호흡에 집중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아프다. 아픈데 좋았다. 이상한 일이다. 성기를 얼추 넣은 아나스타샤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유리는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축축한 혀가 입 안으로 들어온다. 짙게 풍기는 아나스타샤의 페로몬. 아래를 뻑뻑하게 채운 성기가 드디어 둘만의 시간을 갖는다고 알렸다. 방해받지 않고 감시도 없이, 온전히 우리 둘만. 등을 움켜잡았던 손에 힘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아나스타샤가 움직일 틈이 생겼다. 그는 때를 놓치지 않았다. 입을 맞춘 채로 허리를 움직였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유리가 놀랐는지 혀를 씹었다. 아나스타샤는 혀를 씹혔는데도 물러서지 않았다. 더 높이 엉덩이를 들어 유리의 엉덩이에 골반을 처박았다.
“으앗. 자, 잠깐.”
항복은 유리의 입에서 나왔다. 장기가 모조리 횡격막을 뚫고 올라올 것만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집요하게 고개를 쫓아다니며 입을 맞췄다. 혈향과 페로몬이 조화롭게 섞였다. 등에 둘렀던 손이 침대로 떨어졌다. 아나스타샤가 손목을 쥐었다.
살끼리 치댈 때마다 풀어진 벨트가 절그럭거리며 신경을 긁었다. 짤랑짤랑대는 것이 꼭 방울 소리 같았다. 유리는 고개를 젖혔다. 아나스타샤가 거침없이 안을 헤집었다. 젠장, 구멍 낼 생각이야? 천공이 생겨 생을 마감하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차라리 거기서 끝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나스타샤가 성기를 박은 채로 꾸물거리며 몸을 겹쳤다. 불편하게 무릎을 굽힌 채로 아나스타샤까지 끌어안은 유리는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구멍에 아나스타샤의 고환이 닿을 정도로 아주 꽉 달라붙었다.
침을 삼킬 때마다 배 속을 채운 성기가 가늠됐다. 이 상태로 움직이면…… 지릴 텐데. 유리는 몰아닥칠 쾌감에 대비해 아나스타샤의 손에 깍지를 꼈다. 그때, 뱃속에 뭔가가 솟는 느낌이 들었다. 유리는 금방 알아차렸다. 알파인 본인이 모를 리 없다!
“아냐, 아냐! 아나스타샤…… 젠장, 이건 너무하잖아!”
“유리, 난 영원히 네 거야.”
“내가 떡 치다 뒈지면 너도 죽어.”
같이 묻어달라고 해야지. 산채로 화장해달라고 유언을 남기겠어. 유리는 분노에 부들부들 떨었다. 눈이 마주친 아나스타샤는 아이처럼 히죽 웃기만 했다. 그가 유리의 콧방울에 가볍게 입을 맞추더니 속삭였다.
“그럼 한날한시에 죽는 거네?”
그는 황홀하다는 듯 눈동자 너머를 응시했다. 눈이 맛 갔잖아. 사람이 단숨에 바뀔 수가 있던가. 몸 안에서 몸집을 키우는 성기만큼이나 당혹스러운 변화였다.
“아냐…… 공주, 있어 봐. 이건 안돼.”
“알잖아, 너도…… 한 번 부풀면 끝날 때까지 뺄 수 없는 거.”
젠장, 그건 나도 잘 알아! 유리는 소리치고 싶었다. 아나스타샤를 밀치고 노팅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고 싶었다. 이 인간은 어떻게…… 익숙해질 만하면 새로운 면모를 보인단 말인가. 변화무쌍한 모습이 바다 그 자체였다.
“죽여버릴 거야!”
유리는 끙끙 앓다가 말을 토했다. 그래, 울었다. 아나스타샤가 성기 밑동을 부풀린 채 개처럼 허리를 들썩거릴 때, 유리는 좋아서 울었다. 부푼 살덩이가 전립선을 눌러대서 안 좋을 수가 없었다. 유리가 다시 아나스타샤의 등과 목을 끌어안았다. 아나스타샤는 침대에 손바닥을 대고 유리를 몰아붙였다.
“아파, 아파. 아냐, 나 아파!”
“최고야, 유리. 네가 날 꽉 물고 있어…….”
말이 안 통해. 유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온통 아나스타샤로 가득했다. 냄새도 촉각도 신음도……. 허리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헉헉거리던 숨도 짧아졌다. 아나스타샤에게 맞춰, 유리의 신음도 짧아지고 몸이 경직됐다.
“읏…….”
아나스타샤가 직장을 뚫을 것처럼 골반을 붙이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유리는 그에게 매달린 채, 사정하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눈을 살포시 감고, 어금니를 앙다문 티가 났다. 아름답다. 유리의 눈에 힘이 풀렸다.
성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쪼그라들었다. 아나스타샤가 성기를 빼내자 깊숙이 싸질러놓은 정액이 흘렀다. 아나스타샤는 그 모습을 지켜봤다. 피와 정액이 섞였다.
유리는 발을 침대에 붙이고 사지를 늘어뜨렸다. 무릎이 사정없이 벌어졌지만, 바지에 걸려 시트에 닿지 못했다. 부푼 좆을 몸에 담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물론 상대도 나도 알파기는 하지만, 염려하지 않았다. 피곤하다. 유리는 눈을 감았다. 수치심이고 뭐고 피로에 적수가 될 순 없었다.
“좋은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아냐.”
끝난 줄 알았던 비디오테이프가 돌아갔다. 미하일이 좋은 시간을 방해했다. 유리와 아나스타샤가 TV를 쳐다봤다.
“곧…… 여긴 무너질 거다. 4시간을 맞춰두라고는 했지만, 그 애가 내 말을 들을지는 모르겠구나. 변수가 많으니까. 그러니…… 얼른 섬을 나가는 것이 좋겠다.”
“무슨 말이야. ‘그 애’?”
유리가 물었으나 죽은 이는 말이 없었다. 그건 그저 녹화된 영상일 뿐이었다. 그는 아나스타샤에게 고맙고 미안하다며 자신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재차 얘기했다. 방안에 적색경보가 울기 시작했다. 맑던 조명이 빨갛게 빛났다. 유리가 바지를 입고 일어나 테이프를 꺼냈다.
망자까지 아나스타샤를 사랑할 필요는 없다. 테이프를 아나스타샤에게 흔들었다. 아나스타샤도 옷을 정리하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증거로 가져가야지. 우리가 세먀를 꿀꺽했다는 소문이 나면 귀찮으니까.”
“응.”
그는 조용히 유리를 따라 나왔다. 숨겨진 유산을 품고서.
* * *
오시프는 사이렌 소리에 눈을 떴다. 붉은 조명이 보였다. 얼마나 잔 거지……? 그는 벌떡 일어나 백골의 떨어진 코와 주사기를 명부라도 되는 것처럼 꽉 쥐었다. 쥐새끼는 도망갔지만, 꼬리는 여기 있으니까 언젠가는 꼭 갚아주리라.
복도에는 아나스타샤와 유리가 있었다. 둘의 풀어진 옷깃과 엉망이 된 머리카락이 무척 심기에 거슬렸지만, 상황 파악이 먼저였다.
“어떻게 된 거야?”
“곧 폭발할 거야. 나가야 해. 형은…… 혼자 뭘 했길래 꼴이 그래?”
“쥐 잡다가.”
성의 없는 대답에 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오시프가 앞장서서 지하실을 나섰다. 그는 계단을 올라가는 내내 자신에게 주사기를 꽂은 쥐새끼가 튀어나오길 고대했으나, 그런 행운은 찾아오지 않았다.
지하실 입구를 빠져나와 언덕에 섰다. 섬은 아주 작았고 사방이 바다였다. 그들이 타고 온 어선이 파도에 맞춰 흔들렸다. 오시프가 유리에게 멀쩡한 배는 아직이냐고 물을 찰나였다. 지하실에서 굉음이 들리더니 섬이 진동했다.
곧 폭발한다고 했던가.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손목을 잡고 어선을 향해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오시프는 다리가 가는 사슴처럼 가볍게 뛰어왔다.
땅이 울리고 벌어진 틈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꽈앙……. 첫 번째와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폭발음이었다. 좀 전까지 서 있던 언덕이 폭삭 꺼지며 붉은 화염이 일렁였다.
“아냐, 얼른 올라가!”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먼저 사다리에 올리고 그 뒤를 따랐다. 오시프가 마지막에 올라오며 바스라지는 섬을 응시했다. 그들은 어선에 간신히 올라탔다. 아나스타샤는 갑판에 드러누워 탈출의 기쁨을 만끽했다.
유리와 오시프는 분주하게 배를 뒤져가며 구명조끼와 조명탄 등을 찾았다. 탈출했다는 기쁨도 잠시였다. 섬에 자란 나무가 정신없이 요동치더니 이내 뿌리가 드러나 바다에 곤두박질쳤고, 바다는 허리케인이라도 만들 것처럼 진동했다.
심상치 않은 조짐에 유리는 몸을 일으켜 섬을 바라봤다. 그그그……. 마그마라도 뿜을 듯이 섬이 으르렁거렸다.
“아냐! 엎드려!”
상황의 심각성은 라포포르트가 더 잘 알았다. 오시프는 이미 조타실에 몸을 숨긴지 오래였다. 유리가 공주에게 날아와 그를 끌어안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섬이 폭발했다.
아나스타샤는 섬이 터진 지도 몰랐다. 이명 때문에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 유리가 두 명으로 보였다. 유리, 유리, 하고 불러봐도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폭발과 동시에 파도가 일어나 배를 멀리 밀어냈다. 배가 뒤집히지 않고 불이 옮겨붙지 않았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정신을 차린 유리가 난간을 붙잡고 바다를 내다봤다. 검은 연기가 올라오는 섬이 보였다. 이제는 정말 암초가 되어버린 섬이다. 끝났나. 유리는 그대로 바닥에 누웠다. 아나스타샤가 기어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죽는 줄 알았어.”
“살았잖아.”
“응…….”
따뜻하고 향기로웠다. 둘은 서로를 느끼며 살아있음을 확인했다.
조타실에서 나온 오시프가 배 밖을 살피더니 러시아어로 욕을 해댔다.
“배에 구멍이 생겼잖아! 가라앉고 있다고! 네 빌어먹을 수하들은 어디서 뭐 하는 거야?”
“헤엄쳐서 가면 되잖아.”
유리가 대꾸했다. 오시프가 콧방귀를 뀌었다.
“아나스타샤가 죽으면 무슨 소용이야?”
“일단…… 조금 쉬자.”
가라앉을 때까지 시간이 좀 있겠지. 5분이라도 말이다. 유리는 숨을 돌리고 싶었다. 셋 중에서 자신이 제일 피곤하다고 단정했다. 오시프는 갑판을 빙글빙글 돌며 씩씩거리더니 이내 유리 옆에 누웠다. 약이 완전히 깨지 않아 어지러웠다.
어떻게 해안가까지 간담? 군도가 더 가까울 것 같은데. 유빙 위는 못 걷겠지……? 유리는 탈출 방법을 모색하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오시프의 말대로 배가 가라앉는지 몸이 앞으로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보스!”
멀리서 메아리가 들렸다. 너무 살고 싶은 나머지 레이즈빗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나 싶었다.
“보스! 유리! 보스!”
레이즈빗이다. 유리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나스타샤와 오시프도 난간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나스타샤 씨! 오시프 씨! 거기 계시죠!” 하고 외치는 레이즈빗의 목소리. 분명 레이즈빗이다.
유리는 일어나 고함이 들리는 쪽을 바라봤다. 수면 위로 솟은 검은 형체. 잠수함이었다. 그 안에서 빼꼼히 나온 레이즈빗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유리를 발견한 그가 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제가 많이 늦었죠!”
늦어도 오늘처럼 반가울 수가 없다. 그들은 기울어져 가는 선상에 서서 섬처럼 버티고 선 잠수함을 쳐다봤다. 어둑해진 하늘에 별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