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숨겨진 유산
분수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맑은 가을 하늘에 작은 무지개가 생겼다. 베네치아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놀러 온 소년은 계단에 앉아 여름 궁전을 구경했다. 분수대 앞은 운하처럼 길이 닦여있었고 양옆으로 갈라선 높은 나무들 때문에 세상이 반으로 갈라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소년의 눈은 별처럼 반짝였다. 화구를 챙겨오지 않아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기에 풍경을 눈에 익힐 생각이었다. 미하일의 집에 돌아가면 그림부터 그릴 작정이었다.
‘아나스타샤!’
아버지보다 나이 든 목소리가 소년을 불렀다. 소년은 계단에서 일어나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돌아봤다. 머리가 하얗게 센 미하일이 손을 작게 흔들고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 수염을 단정하게 정리한 남자들이 모여 있었다.
소년이 그에게 달려갔다. 미하일이 아나스타샤를 품에 안아 들었다. 어른들과 눈높이가 같아진 소년은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환한 미소를 선물했다.
‘안녕하세요, 나는 ……이에요.’
‘아니, 아나스타샤지.’
미하일이 소년의 이름을 정정했다. 어른들이 허허……. 하고 웃었다. 공주님이네. 덧붙이는 어른도 있었다. 아닌데. 소년이 웅얼거리자 미하일이 사탕을 손에 쥐여줬다. 빨간 시럽이 든 투명한 사탕이었다. 소년은 사탕을 꼭 쥐고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얼굴에 밝은 미소가 번졌다. 그래! 나는 공주. 러시아에서, 미하일에게서 만큼은 공주였다.
……아, 아나스타샤를 아니? 미하일의 무릎에 앉아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녀 얘기를 들었다. 수많은 의혹을 만든 황녀. 소년은 그 이름이 왜인지 마음에 들었다. 소년은 그들에게 다시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아나스타샤예요!’
사람들이 웃었다. 미하일이 즐거워했다. 아나스타샤도 웃었다. 여름 궁전에서 소년은 아나스타샤로 불리기 시작했다.
* * *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유리와 약혼식을 올린 아나스타샤는 해가 바뀌자마자 베이징으로 떠났다. 떨어져 있는 사이 유리가 자신을 잊을까 걱정됐지만, 하루라도 빨리 중국에 자리 잡는 것이 유리를 오래 보는 길이라고 생각했기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다행히 유리는 상상 이상으로 집요하고 음침한 도련님이라 아나스타샤의 공백을 견디지 못하고 사람을 붙여 감시했다. 유리가 붙인 수호천사의 존재를 눈치챈 아나스타샤는 최선을 다해 중국 생활에 집중했다. 덕분에 외국 기업인으로 당 연회에 초대도 받고 춘절도 무사히 보냈으니, 무사히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겠다.
불과 한 달 반 만에 이뤄낸 성과는 훌륭했다. 계좌 개설이 3억 건을 넘기면 유리에게 연락할 생각이었다. 목표치도 이번 주 안에 달성할 예정이었다. 그랬는데, 복병이 생겼다. 유리가 보낸 수호천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나스타샤는 납치됐다.
공주는 납치되면서도 납치됐다는 생각을 못 했다. 그가 납치된 곳은 베이징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다. 평범한 회사에 인사차 들려 차 한 잔 마신 게 전부였다. 얘기를 나누다가 어떻게 됐는지 기억은 나지 않았는데, 눈을 뜨고 보니 양손이 테이프로 묶여있었고 주변은 무장한 장정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아, 공주. 드디어 눈을 뜨셨군요?”
좀 전까지 아나스타샤와 이야기를 나누던 사장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아나스타샤는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그래봤자 금방 장정에게 붙잡혔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뭐지? 라포포르트와 약혼했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아무리 중국이 거대해졌다 한들 러시아와 척질 일은 하지 않았다.
“하, 하하. 왕 종.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아, 걱정 마십시오. 설마 손님을 다치게 하겠습니까? 그냥, 소문이 돌더군요.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뭐……? 무, 무슨 소문? 내가 라포포르트와 약혼했다는 얘기는 진짜야!”
“그건 알 바 아니야. 쫑즈(种子)! 그걸 어디에 뒀지?”
왕 종이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갑자기 씨앗을 왜 찾는단 말인가? 아나스타샤는 뒷걸음질 쳤다. 장정이 그를 붙잡았다. 도망칠 곳이 없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은행장이지 농부가 아니야!”
유리가 보낸 천사들이 어서 낌새를 눈치채고 얼른 유리에게 알려야 할 텐데! 아나스타샤는 간절히 유리를 찾았다. 찾는다고 바다 건너에 있는 사람이 나타나 구해줄 일은 없었지만, 아나스타샤에게는 유리뿐이었다.
“이바노비치가 네게 줬을 텐데!”
“이바노비치? 미하일 이바노비치라고?”
재작년에 돌아가신 미하일의 이름이 거론되자 아나스타샤는 이들이 찾는 씨앗이 무엇인지 더 알 수가 없었다. 왕 종이 미하일의 이름을 듣고는 이를 보이며 웃었다. 흡사 사람을 먹는 짐승처럼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 나는 모르는 일이야. 받은 것도 없어! 미샤가 죽은 뒤에는 한 번도 이바노비치와 만나지 않았어! 뭘, 뭘 찾는지 전혀 모른다고!”
“말이 안 통하는군.”
왕 종이 혀를 찼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아나스타샤는 속으로 고함쳤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질 않는다. 쫑즈가 뭔지 알았으면 벌써 얘기했지! 나는 목숨이 금은보화보다 귀한 사람이라고! 아나스타샤는 원통했다. 왕 종이 손짓했다. 장정들이 아나스타샤를 바닥에 꿇어 앉혔다.
“생각나게 해주지.”
장정 둘이 주먹을 쥐고 아나스타샤의 앞을 막았다. 물리적인 방법으로 미하일이 숨긴 무언가를 불게 하겠다는 심산이다. 아나스타샤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젠장할! 다칠 일 없다면서! 원하는 걸 주기 전에는 구타를 멈추지 않으리라! 아나스타샤는 절규했다.
“자, 잠깐……! 내가 누군지 잊었어? 난 아나스타샤야! 라포포르트의 약혼자라고!”
“상관없어. 쫑즈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라포포르트의 고양이도 한 손으로 길들일 테지!”
왕 종이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더니 달려와 아나스타샤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무릎 꿇은 아나스타샤는 그대로 나뒹굴었다. 유리와 헤어지고 베이징으로 떠났을 때처럼 가슴이 아팠다. 유리! 유리, 널 떠나서 이런 일을 겪나 봐. 유리……! 눈물이 찔끔, 흘렀다.
“쫑즈가 어디 있는지 말해!”
“그게 뭔지 모른다니까!”
서로가 처절했다. 왕 종은 아나스타샤가 정말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기양양하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그때였다. 사장실을 망보던 장정 하나가 통창을 보며 뭐야? 하는 소리를 냈다.
“저거, 사람 아닌가?”
누군가 중얼거렸다. 아나스타샤도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까만 무언가가 떠 있었다. 장정들 말대로 사람 같았다. 지상 88층에 사람이라니. 새가 아닐까 싶었지만, 사람이 맞았다. 곧은 자세로 뭔가를 품에 안고 있었다.
“……RPG이다!”
장정이 외쳤다. 로켓포! 아나스타샤는 본능에 따랐다.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왕 종도 그의 옆에 엎드렸다. 우레가 치는가 싶더니 베이징 전경이 내다보이는 통창을 뚫고 미사일이 쳐들어왔다.
미사일이 벽에 박히며 터졌다. 화염과 파편으로 아수라장이 된 사무실에서, 아나스타샤는 구멍 난 유리창을 응시했다.
“뭐 하고 있어? 쏴! 죽여!”
왕 종이 명령했다. 장정들이 소총을 들어 불청객을 조준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군화가 너덜거리는 창문을 깨부쉈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장정들은 총질을 멈추지 않았다. 전투모까지 쓴 불청객이 기관 소총을 연사했다. 쓰러지는 장정의 비명과 어지럽게 섞이는 총성에 아나스타샤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일방적인 총격전이 끝나고 주변이 잠잠해졌다. 침입자는 수류탄 하나를 문밖으로 던졌다. 건물이 무너질 듯한 폭파음이 들리며 밖에서 대기하던 장정들이 우왕좌왕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은 벌었고. 이제 아나스타샤를 챙겨서 나가면 되겠군. 그는 바닥을 훑었다. 아나스타샤라면 안전한 곳에 머리를 넣고 있으리라.
잘그락. 누군가 유리 파편을 밟았다. 그는 소리가 난 곳을 쳐다봤다. 사장실의 주인과 총격이 끝났는데도 여전히 고개를 바닥에 처박은 아나스타샤가 있었다. 왕 종은 침입자를 올려다봤다. 그의 용병들을 홀로 처리한 사람이었다.
“넌, 넌 뭐야……!”
왕 종이 물었다. 침입자는 방아쇠를 당겼다. 타탕! 총알이 연속으로 발사됐다. 왕 종은 가슴에 여러 발을 맞고 쓰러졌다. 그는 아나스타샤 앞에 섰다. 머리를 감싼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아나스타샤.”
그가 입을 열었다.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들었다. 밀 빛 머리칼은 죄다 전투모 안에 들어가서 보이지 않았으나, 투명 고글 뒤로 보이는 회색의 투명한 눈동자가 그의 신원을 말해줬다.
“유…… 유, 유리이.”
“가자.”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일으켜 세웠다. 다리 한쪽과 허벅지에 벨트를 채운 뒤, 남은 고리를 자신의 허리에 걸었다.
“어, 어떻게…….”
“네가 날 불렀잖아.”
발가벗은 사람처럼 오들오들 떠는 아나스타샤에게 유리가 농담을 던졌다. 아나스타샤가 하하, 하고 작게 웃었다. 웃음도 힘이 없었다. 문밖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허리를 붙잡으며 다른 손으로 남은 수류탄을 던졌다. 중국어 고함이 들렸고 곧 수류탄이 폭발했다.
“꽉 잡아.”
“응?”
유리는 연막탄 두 개를 방에 뿌리고 들어왔던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몸이 88층 밖으로 던져지는 순간,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사지로 포박했다. 베이징 전경이 발밑에 펼쳐졌다. 공포심이 공주를 집어삼켰다. 떨어져 죽는다! 숨이 턱 막혔다.
그러나 몸은 더 추락하지 않고 허공에 매달렸다. 머리 위로 프로펠러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RPT라고 적힌 헬기가 보였다. 헬기에서 떨어진 와이어는 유리에게 붙어있었다. 공포심이 걷히자 감탄이 나왔다. 유리는 회전목마를 타는 어른처럼 피곤한 얼굴로 도시를 구경했다. 구경…….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꼭 끌어안았다. 목숨을 건진 순간에도 심장은 제멋대로 쿵쾅거렸다.
“미안, 올려줄게.”
유리가 귀에 대고 얘기했다. 엉덩이를 받치던 손이 떨어졌다.
“아, 아니야. 아니야! 나 떨어져! 유리!”
“안 떨어져. 가만히 있어! 진짜 떨어진다!”
안 떨어진다면서! 지지대가 사라진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젖 먹던 힘을 다해 안았다. 눈을 꽉 감고 버틴 사이 그가 헬기 위로 배달됐다. 유리가 먼저 발을 디디고 매미처럼 달라붙은 아나스타샤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영원히 하나일 것 같던 둘이 떨어졌다.
아나스타샤는 그대로 헬기 바닥에 주저앉았다. 유리는 문을 닫고 숨을 골랐다. 헬멧을 벗자 푹 젖은 금발이 드러났다. 유리가 헤드셋을 가져와 아나스타샤에게 씌워줬다. 헬기 굉음이 차단되고 유리의 가쁜 숨이 들렸다. 공주는 차가운 헬기 바닥에 머리를 기댄 채 유리를 응시했다.
공주를 되찾아온 유리는 삐딱하게 서서 물었다.
“지렸어?”
“그래……. 조금.”
그런 것 같아.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놀림에 솔직히 대답했다. 유리가 킬킬 웃었다. 목숨을 부지하자 궁금증이 꽃을 피웠다. 아나스타샤가 조종석을 힐끔거렸다.
“오시프야. 비행기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갈 거다.”
오시프가 헬기를 조종해? 생뚱맞게 상트페테르부르크라니. 아나스타샤의 눈빛이 혼란스러웠다. 오시프가 비웃듯이 말했다.
“네 인생 계획이 다 틀어졌군, 아나스타샤.”
“무, 무슨 소리야?”
왕 종도 그렇고 유리와 오시프까지 뜻을 알 수 없는 말만 했다. 유리가 좌석에 앉으며 궁금증을 잘라냈다.
“그건 러시아로 가면서 얘기해.”
“그래, 긴 얘기니까. 아나스타샤 얼굴을 보고 해야 재미있지.”
오시프는 구경거리를 놓칠 수 없다는 듯이 유리의 말에 맞장구쳤다. 무슨 이야기? 아나스타샤는 궁금한 것 투성이었으나, 입을 다물었다. 목이 말랐고 피곤했다. 바닥은 차가웠지만 일어날 기운이 없었다.
* * *
오시프의 제트기가 베이징을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 전용기는 좌석이 네 개뿐이었다. 오시프 맞은편에 유리가, 유리 옆에 아나스타샤가 앉게 됐다. 아나스타샤는 비행기가 이륙했는데도 정신이 없었다. 샤샤가 보드카를 가져왔다.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긴장이 적당히 풀어졌다. 열이 오른 손바닥을 비비며 두 라포포르트를 힐끔거렸다.
“그래서, 할 얘기가 뭐야? 대체…… 무슨 일이야. 중국에 와서도 납치라니!”
“세먀 때문이지. 널 납치한 동양인이 그런 말은 안 해줬나?”
오시프가 다리를 꼬며 대꾸했다. 아나스타샤는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씨앗이 뭔데 나한테서 찾아? 미리 말해두는데 레어에는 종자는 숨기지 않아.”
“흐음.”
“네가 갖고 있댔어.”
이번에는 유리까지 거들었다. 아나스타샤는 답답함에 가슴을 두드렸다. 살면서 씨를 숨긴 적은 없었다. 혹시, 씨라는 게 정자를 말하는 건가? 아나스타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다들 같은 생각을 했는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샤샤가 이번에는 위스키를 병째로 가져왔다. 오시프가 잔에 술을 채웠다.
“미하일이 연구한 그거 말이야.”
“미샤의 연구는 실패했어. 내가 성인이 되기도 전에 그만뒀다고.”
아나스타샤가 미하일을 변호했다. 유리는 말없이 위스키를 들이켰다. 미하일은 각성제를 연구했다. 알파와 오메가끼리만 가능한 각인을 성질 상관없이 이루고 싶어 했다. 자연을 향해 반기를 드는 발명은 주목받지 못했다. 부정하는 사람이 더 많았고, 미하일의 연구도 난항을 겪었다.
결론만 얘기하자면, 미하일은 알파를 성질 관계없이 각인시키는 각성제는 만들지 못했다. 대신 그 연구를 바탕으로 정력보조제를 만들었고 큰돈을 벌었다.
“설마, 그걸 만들었어?”
“그래. 시연할 샘플을 남겨뒀다던데.”
유리가 대답했다. 아나스타샤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미샤는 재작년에 죽었어. 유산 상속도 마무리됐을 텐데 지금 와서 날 부를 이유가 있어?”
위스키를 음료수처럼 마시던 오시프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나스타샤와 유리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그는 위스키 잔을 든 손의 검지를 펴 아나스타샤를 가리켰다.
“그거야. 너는 시모나로티의 장자인데 이바노비치의 유산을 물려받으면 이바노비치 꼴이 우습잖아? 네게 ‘세먀’를 맡긴 대가로 막대한 자산까지 남겼어. 친자식들의 몫을 합한 것보다 많지. 그러니 이바노비치가 비밀리에 세먀를 찾은 거야. 세먀를 회수하면 유산을 돌려받을 생각이었으니까.”
“나는 아무것도 받지 않았어. 아니, 받았다 한들 씨앗이랑 상관없는 것들이야!”
전부 미하일이 살아있을 때 받은 거라고. 아나스타샤가 자신을 변호했다. 아나스타샤가 결백을 주장해도 ‘세먀’는 그에게 있다. 그간 조용히 세먀를 찾았던 이바노비치가 아나스타샤를 부른 순간부터, 세먀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나스타샤뿐이라고 인정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떤 건지 궁금했는데, 이렇게 확인하는군.”
오시프가 중얼거리며 잔을 채웠다. 유리는 인상을 찡그렸다. 저 능구렁이 같은 인간은 모르는 정보가 없었다. 미하일의 유서가 변호사의 손에서 나온 순간부터 세먀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세먀는 실패했어.”
“바그노프는 성공했지. 정력보조제의 시초가 되는 약물이니 기대하고 있을걸?”
오시프의 말에 아나스타샤의 낯이 어두워졌다. 유리는 별생각이 없었다. 뉴욕에서 그랬듯, 러시아에서도 아나스타샤를 지켜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고 싶었다. 보물찾기할 생각에 들뜬 오시프는 술을 삼키며 노래를 부르듯 흥얼거렸다.
“성질, 성별 관계없이 알파를 각인시킬 수 있다니. 매력적이잖아.”
아나스타샤는 한숨을 쉬었다. 없다, 싫다고 말한들 들어주는 이가 없으니 지쳤다. 유리마저도 세먀를 찾아내고 싶은 눈치였다. 아나스타샤는 억지로 맡게 된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를 약물 때문에 또 목숨을 내놓기 싫었다.
“나는 모르는 일이야! 젠장, 세먀라니. 그런 이름은 처음 들어본다고!”
절규였다. 유리가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다독였다. 무심한 얼굴에 측은지심이 가득했다. 유리가 말했다.
“아무리 찾아봐도 결론이 하나뿐이었어. 너야, 아나스타샤. 당신이 가지고 있어.”
강요였다. 평생 도망칠 것인가, 할 수 있을 때 찾아 나설 것인가.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바라봤다. 그는 아나스타샤를 안타까워했다. 방법이 이뿐이라면…….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유리가 양팔로 공주를 꽉 끌어안았다.
“무섭다고. 나는…….”
“걱정하지 마.”
오시프는 제트기 입구를 힐끔거렸다. 낙하산 하나에 매달아서 둘 다 던져버리고 싶었다. 유리.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애처롭게 불렀다. 오시프가 잔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놨다. 둘만의 세상에 빠졌던 공주와 악당이 오시프를 돌아봤다. 침묵은 압박이었다. 오시프의 무언의 경고를 받은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손끝만 만지작거렸다.
“……인지오 씨도 올 거야.”
주위를 환기할 겸, 유리가 소식을 전했다. 아나스타샤의 눈이 커졌다.
“아버지는 왜? 아버지까지 와야 할 상황이야?”
애도 아니고. 공주가 의아해했다. 유리는 뜸 들였다. 베이징에서 납치당하지만 않았어도 유리도 함께 세먀를 찾아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공주를 구하기 위해 오시프와 거래한 뒤였다.
오시프가 대신 대답했다.
“라포포르트를 고용하려면 레어라도 열어야 할 테니까.”
“……같이 안 가?”
원망과 아쉬움이 뒤엉킨 시선이 유리에게 향했다. 유리는 사랑하는 공주의 눈을 볼 수 없었다. 지켜준다던 말이 민망할 지경이었다.
“오늘 아나스타샤 당신을 구하는 걸 도와주는 대가로 밑에서 5년 일하기로 했어.”
“5년이나? 만날 수는 있는 거야?”
“……아니.”
“아니.”? 5년간 못 만다는 건가? 약혼까지 했는데. 못 만난다니. 군인도 근무하며 연애하는데, 가족을 도우면서 약혼자도 못 만난단 말인가? 아나스타샤의 얼굴이 굳어갔다. 유리가 다급하게 변명했다.
“5년 후면 서른이야. 그때 다시 만나도 늦지 않아.”
“유리, 나는 서른다섯이야. 알파 몸에 제대로 된 씨가 붙기에는 나이가 많다고! 날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5년이나 안 볼 생각을 해?”
“당신 목숨을 구하는데 5년이 대수야?”
울분을 토하던 아나스타샤가 주춤했다. 서로를 응시하는 시선에는 티끌의 거짓도 없었다. 오시프는 위스키병을 던져 아나스타샤의 대가리를 깨버리고 싶은 욕구를 다스렸다. 어찌 됐든 유리의 5년을 가졌다. 5년 사이에 저 둘 사이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거기다 시모나로티가 레어를 보수로 내건다면 레어에 들어가는 최초의 외부인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리…….”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끌어안았다. 유리는 그를 끌어안으며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내가 오래 살기는 했어. 오시프는 시가를 꺼내 입에 물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둘을 비행기 밖으로 던져버릴 것 같았다.
* * *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미하일 이바노비치가 죽기 직전까지 지내던 별장이 있었다. 그의 사망 후 미하일의 유언에 따라 본관을 요양원으로 사용하고 이름을 미하일 요양원으로 지었다. 미하일은 커다란 별장의 본관을 두고 별관에서 생활했다. 덕분에 맘껏 조사할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눈이 소복이 쌓인 정원을 가로질러 별채로 향했다. 붉은 벽돌집이 보였다. 겉면엔 담쟁이넝쿨 줄기가 잔뜩 매달려있었다. 여름이 되면 붉은 벽에 푸른 이파리가 구름처럼 펴지리라. 처음 오는 곳이었으나 고향 집처럼 느껴졌다. 아련하고 그리운 기분. 근원을 알 수 없는 향수에 아나스타샤는 말이 적어졌다.
두 라포포르트도 말이 없었다. 그들은 외부인이었기 때문이다.
벽돌집에 가까워졌다. 현관 앞에는 담배를 피우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서 있었다. 무척 피곤한 얼굴로 허공을 쳐다보던 그녀가 아나스타샤와 라포포르트를 발견했다.
“아, 아나스타샤 씨!”
그녀는 담배를 비벼끄고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악수를 청했다. 아나스타샤는 가슴 치에도 오지 않는 여자를 내려보기만 했다. 여자는 금방 손을 내리며 벽돌집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녀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자 담배 냄새가 났다. 그곳에는 이바노비치의 장남과 차남, 장녀와 장손까지 모여 있었다. 장남인 세르게이는 인지오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불이 붙은 담배를 물고 있던 그들은 아나스타샤를 보자마자 환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나스타샤, 다시 봐서 좋구나.”
세르게이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끄고는 다가와 아나스타샤를 안으려고 했다. 아나스타샤가 두 발자국 물러섰다.
“생각처럼 좋지는 않아요. 날 구렁텅이에 밀어 넣은 미샤는 죽었고 그 아들이란 사람도 제대로 해결을 못 했으니까. 베이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미안하다, 아냐. 위험에 빠트릴 생각은 없었어.”
“제가 필요했다면 미샤가 죽자마자 불렀어야죠! 제길! 중국인도 ‘세먀’의 존재를 알던데, 이대로 세먀를 찾으러 나가는 건 머리에 깃발을 꽂고 쫓아오라는 소리밖에 안 되잖아!”
“아나스타샤, 일단 진정해라.”
세르게이가 손바닥을 펴 보이며 아나스타샤를 말렸다. 그는 동행한 라포포르트에게도 도와달라고 시선을 보냈지만 둘은 모르는 척했다. 아나스타샤가 화내는 모습은 진귀한 구경거리였다.
“진정하게 생겼어? 친구인 줄 알았는데! 미샤, 댁의 아버지는 배신자야. 지금이라도 무덤을 파내서 유골을 백해에 던져버리겠어!”
“나도 같은 심정이야. 아나스타샤, 나도 내 아비가 이런 짓을 꾸몄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다. 네 도움 없이 세먀를 찾으려 했어.”
“그런데 왜! 날 찾은 거야!”
분노에 찬 아나스타샤는 성난 황소였다. 오시프는 팔짱을 끼었다. 자신들은 외부인이고 대가 없이는 세먀도 찾지 않을 거지만, 누구나 그렇듯 숨겨진 유산이나 잃어버린 도시 같은 이야기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웠다. 세르게이가 숨을 고른 뒤에 얘기했다.
“미샤가 남기고 간 모든 걸 조사했어. 연구소, 논문 할 것 없이. 모스크바 본가부터 블라디보스토크 별장까지! 러시아, 미국, 유럽…… 전 세계를 조사했지. 그 끝이 바로 이곳이야. 이…… 요양원 말이다.”
아나스타샤는 곧장 세르게이의 멱살을 쥘 것처럼 바들바들 떨었다. 그가 유리와 마이애미에서 겨울을 보내며 배운 것이라면 화를 참지 않는 방법 정도였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합니까? 2년 동안 찾은 게, 겨우 요양병원이 단서라는 거야?”
“아냐, 진정하고…….”
세르게이가 다시 아나스타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나스타샤가 그 손을 쳐냈다. 결국 대신 찾으란 소리였다. 대신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어쩌면 유리 없이 떠나야 할지도 몰랐다. 유리와 생이별을 하게 됐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를 약까지 찾으러 나가야 한다니. 분했다.
“세르게이 씨, 시모나로티 씨가 오셨습니다.”
아나스타샤와 라포포르트를 데려온 여자가 이번에는 인지오를 안내해왔다. 아나스타샤의 아버지인 인지오는 어쩐지 공주보다는 다비드를 더 많이 닮았다. 그는 차분한 눈으로 이바노비치를 훑었다. 아나스타샤와 대치하던 세르게이가 인지오에게 목례했다.
“오랜만이군요, 세르게이. 이런 식으로 재회할 줄은 몰랐는데…….”
인지오가 한숨을 내쉬며 세르게이에게 다가왔다. 푸른 눈이 세르게이를 추궁했다. 그는 식은땀을 흘렸다. 폭풍전야였다. 유리와 오시프는 나란히 서서 흥미진진한 사태를 구경했다.
“아나스타샤가 유산에 관여됐다는 소문이 전부터 돌았는데도 왜 조용한가 했더니, 이런 꿍꿍이가 있었군요.”
“아버지. 먼 길 오셨어요.”
인지오가 말과 함께 세르게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나스타샤가 끼어들어 인지오의 팔을 붙들었다. 세르게이만 노려보던 인지오가 아들을 보더니, 울상이 됐다. 인지오는 이탈리아어로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다 큰 아들의 볼을 쓰다듬었다.
“아냐, 다친 데는 없고? 네가 위험하다고 들었어. 베이징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아버지도 유서 내용을 알고 계셨나요?”
아나스타샤가 묻자 인지오는 고개를 저었다.
“자세히는 몰랐지. 미샤가 널 예뻐했으니 작은 성당이라도 주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세먀’라니. 늙은이 노망에 다치기라도 할까 걱정이다.”
“하하, 당연히 노망난 늙은이 장난이죠. 그렇지만…… 무시하기에는 일이 커졌어요.”
전까지 꼬리에 불붙은 소처럼 길길이 날뛰던 아나스타샤가 차분한 목소리로 인지오를 설득했다. 아들을 측은하게 바라보던 인지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세르게이를 응시했다.
“그렇구나. 괜히 들쑤시고 다녀서 쓸데없는 곳까지 바람을 불어넣었어.”
비밀리에 움직일수록 더 큰 관심을 받기 마련이었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었다. 대대적으로 조사를 펼친 덕에 기억 속에 잊히던 세먀를 향한 관심이 되살아난 것이다. 세르게이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았다. 그로서는 심사숙고한 선택이었다.
“……인지오, 이런 말은 미안하지만, 아나스타샤만이 세먀를 찾을 수 있어요.”
“그렇겠죠. 이바노비치나 되는 집안에서 2년을 들쑤셔도 못 찾은 걸 보니. 아니면 유서가 거짓말이든가.”
인지오가 대꾸했다. 성질 관계없이 각인할 수 있는 약물이라니. 허풍에 불과했다. 그러나 세먀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고 싶은 사람이나, 진실 여부를 떠나 미궁으로 남겨두고 싶은 사람까지 다양한 세력의 관심을 받는 형편이었다.
“유서 내용을 알려줘요.”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세르게이가 유서를 간략히 말했다. 아나스타샤에게 내 일생을 쏟은 세먀를 맡기는 대가로 내 앞으로 되어있는 주식 전부와 별장 여섯 채, LA에 사둔 인비노 빌딩을 물려준다. LA 인비노 빌딩은 미하일이 소유한 부동산 중 가장 높고 큰 빌딩이었다. 값어치도 두말할 것 없었다.
가족 누구에게 물려줘도 배가 아팠을 텐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의 집 자식이 받아먹었으니 유서 내용을 되도록 알리고 싶지 않았으리라. 인지오는 고작 부동산과 주식 때문에 아들이 위험에 빠졌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세먀를 받는 조건을 미리 알았더라면 일찍이 아나스타샤를 보내 일을 해결했을 것이다.
아나스타샤도 같은 생각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유산을 남겼나 했더니, 겨우 건물과 별장이었다.
“세먀를 찾게 되면 주식 20%를 제한 나머지는 제가 갖겠어요. 상속 포기한 주식은 꼭 사회에 환원해야 할 겁니다.”
아나스타샤는 목숨값을 포기할 마음은 한 톨도 없었다. 악착같이 지켜내고, 남은 돈도 이바노비치가 쓸 수 없게 만들고 싶었다. 이바노비치의 장녀인 올가가 고개를 저으며 아나스타샤의 요구에 반기를 들었다.
“유서에는 세먀를 맡기는 대가로 유산을 물려준다고 했어요. 세먀를 포기하면 유산은 받을 수 없어요.”
“물론이죠, 올가. 고인의 부탁인데 당연히 돌려줘야죠.”
인지오가 느른하게 웃었다. 세르게이는 체념한 듯 인지오를 올려다봤다. 아나스타샤를 불러야겠다고 마음이 선 순간부터, 미하일이 남긴 유산은 이바노비치가 가질 수 없던 것이다.
“그렇다면 세먀를 찾을 수 없어요. 아무런 대가 없이 목숨을 내놓으란 겁니까?”
아나스타샤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올가는 말을 잃었다. 욕심이다. 결국은 아버지가 일군 부를 미하일 마음대로 뿌려댄 것뿐이다. 그녀는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망자의 염원대로 유산은 돌아가리라.
침묵은 수긍이었다. 세르게이는 한시라도 빨리 아나스타샤가 세먀를 찾아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세상에 널린 것이 빌딩 아닌가! 미련한 아버지가 꿈을 포기 못 하고 죽어서도 이승에 남겨둔 약을 거짓이라 공표하고 싶었다. 세르게이는 자연을 거스르기 싫었다.
장식품처럼 서 있던 오시프가 기척을 냈다.
“일이 마무리된 것 같으니 저희는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선약이 있으시군요.”
인지오가 되물으며 그를 훑었다. 군화 비슷한 부츠와 카고바지를 입은 오시프는 급한 약속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약속이라 하면 유리를 5년 동안 골려 먹을 궁리 정도였다. 묘한 신경전이 둘 사이에 흘렀다.
아나스타샤를 무사히 집으로 데려올 경호가 필요했다. 특수부대 출신으로 꾸려진 용병을 부를 것이냐. 눈앞의 러시아를 붙잡을 것이냐……. 라포포르트와 함께한다면 불필요한 접전은 피할지도 모른다. 최고의 팀을 부르든, 라포포르트를 붙잡든 앞으로 벌어질 일은 신만 알고 있으리라.
인지오는 유리와 오시프를 번갈아 쳐다봤다. 저 둘이라면 라포포르트 전체를 끌어들이기 충분했다.
“얼만큼의 대가를 치르면 내 부탁을 들어주겠습니까.”
오시프가 기대하던 물음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나스타샤는 주먹을 쥐었다. 정말 레어의 열쇠를 받아낼 것만 같았다.
“글쎄요. 인지오 씨께서 흥미로운 제안을 한다면야, 거절하기 어렵겠죠.”
흥미? 인지오는 웃었다. 작고 거만한 라포포르트의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보였다. 라포포르트가 레어의 존재를 모를 리 없다. 인지오가 셔츠 목깃 안으로 손을 넣어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얇은 은줄에 걸린 직육면체 펜던트를 손에 쥐고 그대로 뜯어냈다. 줄이 힘없이 끊겼다.
인지오는 끊어진 줄을 붙잡았다. 펜던트가 허공에서 흔들렸다. 지켜보던 이바노비치도 감탄했다. 아나스타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레어의 열쇠였다.
“거절 못 할 제안일 겁니다.”
오시프의 눈이 번쩍였다. 그는 인지오의 부탁을 듣지도 않고 펜던트로 손을 뻗었다. 인지오가 손을 거뒀다.
“아나스타샤의 경호를 맡아준다면 레어의 열쇠를 주겠어요. 다만…… 오시프 라포포르트의 신용이 너무 낮아서…….”
인지오는 목걸이를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신용’이라. 오시프는 입을 다문 채 웃었다. 아나스타샤의 아버지도 뉴욕에서 벌어진 비극의 시작이 어디인지 아는 눈치였다.
“보답은 베네치아로 아나스타샤를 무사히 데려온 뒤에 치르도록 하죠.”
“좋아. 어려울 것 없죠.”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쳐다봤다. 아나스타샤도 그를 바라봤다. 레어 안에 무엇이 들었길래 오시프가 대금을 후불로 받는단 말인가. 저렇게 라포포르트의 자존심을 긁어댔는데도 정말 나중에 지불해도 된단 말이야?
오시프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인지오가 그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열쇠를 넘겨줘도 되나요?”
아나스타샤가 인지오 뒤에 붙어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탈리아어여서 알아듣는 이는 없었다. 라포포르트를 붙잡은 인지오가 홀가분한 얼굴로, 오시프를 보며 이탈리아어로 대답했다.
“걱정할 거 없다. 너는 네 목숨만 생각해. 집안의 보물을 지키는 건 내 몫이니.”
오시프는 레어의 열쇠가 탐났다. 열쇠 안에는 바이러스가 심어져 있다고 들었다. 소문을 확인할 수 있다니. 열쇠를 양도받은 후 시모나로티가 레어의 잠금장치를 갈아치워도 오시프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어차피 레어의 위치를 모르는데 어찌 열쇠를 꽂으러 가겠는가. 열쇠를 얻는 자체로 충분했다.
“유라, 네가 아나스타샤 옆에 있도록 해.”
특별한 부탁을 받은 오시프가 들뜬 목소리로 유리에게 명령했다.
“어디 가려고?”
“보물찾기하려면 장비가 있어야지.”
가벼운 언사에 모든 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목숨과 가문의 존재가 걸린 일이 보물찾기가 되었다. 유리는 오시프가 일에 흥미를 붙인 게 어디냐고 스스로를 달랬다.
“30분 안에 돌아와.”
“충분하지.”
오시프는 아나스타샤와 인지오에게 눈인사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인지오도 생각지 못한 지출에 대비하려는 건지 아들의 손을 한참 붙잡은 뒤, 가버렸다. 아나스타샤는 인지오가 잡아준 손을 든 채로 문을 바라봤다. 정말 세먀를 찾아야 했다.
“그럼, 갈까?”
세르게이가 손수건에 땀을 닦으며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그의 뒤를 아주 느린 걸음으로 쫓았다.
* * *
미하일이 생을 마감한 방에 들어온 아나스타샤는 어딘가 익숙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한 번도 미하일이 요양한 저택에 와본 적이 없었다. 노년의 모습은 장례식 때 관에 누운 모습을 본 것이 전부였다.
그가 지내던 방은 꼭 본가 거실 같았다. 가구 배치며 인테리어가 본가와 비슷했다. 아나스타샤의 기억으로 안락의자가 있던 곳에는 부드러운 토끼털 담요가 깔린 안락의자가 있었고, 책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책장이, 가짜이긴 하지만 본가처럼 화로도 있었다.
“꼭 집에 돌아온 기분이네.”
아나스타샤는 화로에 쌓인 먼지를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처음 오는 곳인데도 집처럼 안락했다. 그래서 불쾌했다. 왜 생소한 곳에서 향수를 느껴야 하지? 아나스타샤는 항의라도 하듯 천장을 노려봤다. 다행히 본가에 달려있던 샹들리에 대신 동그란 등이 하나 달려있었다. 침대가 있는 쪽은 천장을 거울로 마감했는지 꽃무늬 이불이 비쳤다.
“본가랑 비슷하네요.”
“아버지는 집을 좋아하셨으니까. 비슷하게 꾸민 거겠지.”
세르게이는 아버지가 별장을 본가와 비슷하게 꾸미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집에 돌아가고 싶어서 인테리어를 비슷하게 했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했다. 그러나 미하일은 세르게이의 예상과 달리 어지러운 본가를 피해 스스로 별장에 머물렀다.
“거실에 침대를 뒀어요. 웃긴 꽃무늬 이불도 그렇고.”
아나스타샤가 침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얘기했다. 그런가. 세르게이는 아나스타샤의 지적을 흘려들었다. 공주는 책장을 훑어봤다. 미샤가 쓴 논문과 연구일지가 꽂혀있었다.
“여긴 조사를 안 했나요?”
“했지. 그런데 도저히 실마리를 풀 수가 없어서 원상 복구해둔 거란다. 네가…… 봐야 하니까.”
세르게이가 말을 흐렸다. 비서인지 한 남성이 아나스타샤에게 다가가 사진을 내밀었다. 아나스타샤는 쳐다보지 않았다. 앞에서 알짱거리는 남자가 거슬린 유리가 대신 사진을 받았다. 사진과 현장을 비교해 보니 비슷했다. 뭐, 단서가 온전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미샤는 나를 특별하게 대해줬어. 앞니가 빠지기 전부터 우린 친구였지. 이렇게, 봐…… 사탕을 하나 입에 물고 안락의자에 앉아 논문을 읽어주거나 과학 수업을 했지.”
아나스타샤는 오래전 미하일 이바노비치와 보낸 유년 시절을 회상하며 꽂힌 책들 뒤에서 유리병을 끄집어냈다. 안에는 빨간 시럽이 든 투명한 사탕이 두어 개 들어있었다. 그는 사탕을 꺼내먹었다. 아작, 하고 사탕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는 비위가 상해 인상을 찌푸렸다.
“언제 만들었는지 알고 그걸 먹어?”
적어도 1년은 방치된 사탕이었다. 유리는 사진 더미에서 책장 사진을 골라 비교했다. 사진 속에서는 사탕이 든 병을 찾을 수 없었다. 책 뒤에 숨겨뒀으니 보이지 않은 건가. 복구하면서 아무 곳에나 쑤셔 박은 걸 수도 있겠다.
“괜찮아. 나 먹으라고 갖다둔 거겠지.”
아나스타샤는 나머지 사탕을 꺼내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안락의자에 앉았다. 등을 편히 기대고 눈을 감은 그는 지루한 옛날이야기를 했다.
“미샤가 해주는 얘기는 재미없었어. 그가 중간중간 주는 사탕을 먹고 싶어서 얌전히 듣는 척했지. 이 사탕에 마약이라도 든 게 아닐까? 지금도 구미를 당기네.”
금방 주머니에 넣은 사탕을 도로 꺼내 입에 넣었다. 보다 못한 유리가 손을 내밀었다.
“죽고 싶어? 뭔지 알고 막 먹어. 뱉어.”
“미샤가 날 죽일 생각이겠어?”
그는 날 사랑해. 아나스타샤가 노망난 늙은이를 대변했다. 발끝을 까딱이며 향수에 젖었던 아나스타샤가 불현듯 일어나 침대에 앉았다. 오래된 매트리스가 삐거덕거렸다.
“유리, 이리 와서 앉아.”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유리는 별걸 다 시킨다고 생각하면서 아나스타샤의 옆에 앉았다. 아나스타샤만이 세먀의 행방을 알고 있다. 모든 행동에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유리까지 앉자 오래된 침대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긴장이 풀린 것처럼 보였다. 아니면, 옛 생각에 들떴는지도 모르겠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상태를 진단했다.
“근데 정말 이상해. 왜 거실에 침대를 뒀을까? 침실로 쓰고 싶었으면 침실로 꾸몄어야지. 여긴 거실이잖아. 이 자리에 소파가 있어야 하는데.”
“주인이 죽었으니, 물어볼 수가 없네.”
“하하, 미샤가 살았을 때 와봤으면 참 좋았을 텐데.”
유리의 매정한 대꾸에 아나스타샤가 소녀처럼 웃으며 뒤로 넘어갔다. 침대가 출렁였다. 수명이 다한 스프링이 비명을 질렀다. 유리는 그를 내려다봤다. 공주는 천장에 붙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 저것 봐.”
유리는 고개를 들어 거울을 응시했다. 아나스타샤와 유리, 못생긴 꽃무늬 이불이 비쳤다. 뭘 보라는 건지 모르겠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처럼 침대에 누웠다. 여전히 아나스타샤와 자신, 꽃무늬뿐이었다.
“미샤랑 처음 러시아를 여행했을 때 거기서 본 옷가게가 정말 웃겼는데. 쇼윈도 배경을 모조리 거울로 해둔 거야. 거기에 입기 난해한 패턴의 드레스를 걸어 놨었어. 그게 너무 웃겨서 길 가다 말고 멈춰서 한참 구경했었는데.”
갑자기 옛날에 본 웃긴 드레스와 옷가게 얘기가 왜 나온단 말인가. 그게 세먀와 관련 있나? 아나스타샤의 중얼거림을 듣고 단서를 찾으려고 난리던 이바노비치도 당황했는지 숙덕거렸다. 아나스타샤는 태평하게 누운 채로 그때 살 걸 그랬어, 하고 유리에게 속삭였다.
“지금이라도 사지 그래.”
유리가 거들었다. 아나스타샤가 방긋 웃으며 유리를 쳐다봤다.
“하하, 유리. 그때가 언젠데. 그 옷가게도 사라졌을걸. 아…… 그래도 한번 가보고 싶네.”
시선이 집중됐다. 세먀가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
“어딜?”
“벨로모르스크말이야. 운하 구경이 정말 재미있었는데.”
유리가 묻자, 아나스타샤가 다음 행선지를 얘기했다. 세르게이가 달려들었다.
“벨로모르스크란 말이지? 거기로 가면 있는 거니?”
“음? 몰라요.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건데.”
이렇게 찾는 게 맞아요? 아나스타샤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세르게이도 침묵했다. 아닐지도 모른다. 추억에 젖어 엉뚱한 곳을 향하는 걸 수도 있다. 그렇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별장에서 모든 단서가 끊겼다. 미하일이 세먀를 물려준 당사자가 아니면 세먀를 찾지 못하도록 설계했을지도 모른다.
머릿속에 단서를 심는 일은 미하일의 연구 분야였기 때문이다.
“조금…… 더 생각해보고요. 만약, 미샤가 제 머릿속에 지도를 넣어둔 거라면…… 기억을 따라가야겠죠.”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요. 자신 없어 하는 웅얼거림을 끝으로 아나스타샤는 입을 다물었다.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또 사탕을 꺼내먹었다. 세 개가 들어있지 않았나? 유리가 아나스타샤의 턱을 붙잡았다.
“먹지 마. 뱉어! 배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
유리가 볼을 눌렀다. 아나스타샤는 입을 벌리지 않으려고 버텼다. 사탕이 뭐라고 싸워야 되는 건지. 어이가 없었다. 유리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아나스타샤는 냉큼 사탕을 깨트려 안에 든 시럽을 빨아 먹었다. 상큼한 레몬 맛이었다.
“하…….”
짜증 나게 하네. 유리는 오독오독 설탕 결정이 깨지는 소리에 아나스타샤의 얼굴을 놔줬다. 먹었으니 별수 없다. 명치를 때려, 다 게워내게 하는 방법뿐이었다. 고작 사탕에 과민 반응하는 인간으로 보이기도 싫었다.
“배탈 나든 말든 알아서 해.”
“유리, 날 지켜주기로 했잖아.”
“어디 한 번 더 해봐.”
유리가 경고를 남기고는 방을 나섰다. 휴대전화를 드는 걸 보니 오시프에게 연락하는 듯했다. 아나스타샤는 침대에 앉아 유리의 경고를 곱씹었다. 어째 뒤에 “그땐 내 손에 죽어.”라는 말이 뒤따라오는 것 같은데. 공주는 유리가 먹지 말라는 건 다시는 먹지 않기로 했다.
* * *
이바노비치가 벨로모르스크에 소유한 부동산 목록을 가져왔다. 아나스타샤는 그들이 보여주는 건물과 장소를 보며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눈에 가는 곳은 없었다.
“없어?”
지켜보던 유리가 물었다. 아나스타샤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벨로모르스크로 직접 가는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한시라도 빨리 도착해 단서를 찾아야만 했다. 유리가 일어났다. 오시프도 오는 중이었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라포포르트의 안뜰에서 상황이 돌아간다는 점이다.
“일단 비행장으로 가자. 헬기든 비행기든 하늘을 가로지르는 게 제일 빠르니까.”
문제는 헬기도 비행기도 오시프의 소유여서 빌려야 했다. 그 인간이 빌려줄까? 베이징에서 빌렸을 때는 5년을 걸었는데 공짜로 내줄 리가 없다. 유리는 이바노비치가 준 사진과 자료를 챙겼다. 요양원에서 얻을 정보는 더 없어 보였다.
“미샤랑 벨로모르스크에 갔을 때는, 유람선을 타고 갔어.”
“…….”
유리는 아나스타샤에게 할 말을 고심했다. 한가롭게 유람선이나 탈 때가 아니었다. 문득, 다음 목적지를 기억해 낼 때 필요한 조건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꼭 유람선이어야 해? 다른 배도 괜찮은가?”
유리가 물었다. 이번에는 아나스타샤의 표정이 묘해졌다. 배면 다 유람선이 아닌가. 아니면 화물선일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좋았다. 당장 운하를 건너 벨로모르스크로 가고 싶었다. 그곳에 너무 가고 싶었다. 아나스타샤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아나스타샤는 유리에게 물으며 자신의 기억에 의문을 품었다. 내가 벨로모르스크에 간 적이 있던가. 어릴 때 기억이라 흐릿했다. 미샤와 놀러 다니던 기억이 뜨문뜨문 떠오르는데, 위치까지는 알 수 없었다.
유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방법은 넘쳐난다. 대가를 치를 수 있다면 말이다. 때마침 오시프에게서 전화가 왔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오는구나.
“어.”
[거기서 나와.]
“뭐? 무슨 소리야.”
[나오래도? 당장!]
유리는 휴대전화를 든 채로 아나스타샤를 쳐다봤다. 그도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곧 나갈 거야. 그나저나, 배 한 척 빌릴 수 있겠어?”
“음……? 가스 냄새가 나는데?”
아나스타샤가 중얼거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1층에서 굉음이 들렸다. 2층에 머무르던 이바노비치와 유리, 아나스타샤는 상체를 숙이며 상황을 파악했다. 오시프가 자지러지게 웃었다. 웃음에 심기가 거슬린 유리가 벌컥 화를 냈다.
“형이 그랬지! 젠장, 나까지 날려버릴 생각이야?”
[유라, 내가 널 다치게 할 것 같니? 웃긴 노인네야. 죽어서도……. 일단 나와. 타죽기 싫으면!]
전화가 끊겼다. 유리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욕을 지껄였다. 이바노비치의 늙은 후계자들이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유리는 늙은 오리와 공주를 내버려 두고 창가를 살폈다. 1층이 터져버렸으니 내려가는 건 미련한 짓이다. 지붕으로 도망간다 해도 목조 건물이니 꼭대기까지 금방 불이 옮겨붙으리라. 그렇다면. 어떻게서든 밖으로 빠져나가야 하는데…….
유리는 창밖을 살폈다. 정원 눈을 한곳으로 모아둔 눈 언덕이 몇 개 보였다. 거기다 바닥도 잔디라 머리가 터질 걱정은 덜었다. 가장 폭신폭신한 곳을 골라야 했다.
“번지점프 해본 적 있어?”
유리가 그들에게 다가와 물었다. 늙은 이바노비치는 유리의 말뜻을 금방 이해했다. 아나스타샤와 이바노비치의 증손은 눈알을 굴리다가 울상을 지었다.
“유리! 2층이라지만 떨어지면 다리가 부러질 거야! 세먀를 찾아야지. 다리가 부러진 채로 어떻게 돌아다녀! 그, 그리고 이바노비치 나이를 생각해줘.”
“방법이 없어.”
유리가 부탁을 잘라냈다.
“2층에도 금방 불이 붙을 거야. 창문에 천으로 밧줄을 내리면 조금 낫겠지만, 1층은 이미 불바다야. 마루 사이로 연기가 올라오잖아.”
밧줄로 내려가다가는 화마에 휩쓸려 다칠 수도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다치는 건 같았다.
“화상, 골절 중에 고르라면 골절이지.”
유리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방금 눈여겨봤던 눈더미까지 거리가 좀 돼 보였다. 재수 없으면 뼈가 부러지겠다. 물론 늙은 이바노비치만 해당하는 얘기였다. 이바노비치가 죽든지 말든지 유리가 알 바는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만 무사하면 됐다.
안절부절못하던 아나스타샤가 침대 시트를 벗겨 창가 쪽으로 가져왔다. 그는 이불 끝을 붙잡고 반대편을 창밖으로 던졌다. 유리는 멍청하게 서서 아나스타샤의 꼴을 지켜봤다.
“세르게이! 뭐해요! 얼른 이쪽으로 와요!”
“무슨 짓이야.”
“살 궁리지. 저 노인들을 2층에서 던져버릴 생각이야?”
그는 외벽을 확인하며 이불이 1층 창문에 닿지 않도록 짧게 빼냈다. 미하일의 늙은 자식들은 방문을 쳐다보다 창가 쪽으로 달려와 이불을 타고 내려갔다. 얼어붙은 눈에 떨어진 그들은 엉덩이와 허리를 붙들고 어기적거리며 건물에서 멀어졌다.
잘도 걸어간다. 유리는 눈밭에 서서 불구경하는 이바노비치를 노려봤다. 그들의 아들이 내려가려고 창가로 몸을 뺐다. 아나스타샤는 어찌어찌 그가 내려가는 걸 도와줬다. 유리는 당장이라도 이불을 잘라내고 싶었다. 대가리가 깨져야 아나스타샤를 두고 먼저 내려간 자신을 탓할 텐데!
유리의 분노를 들었는지 폭파음이 다시 들렸다. 충격의 여파로 1층 창문이 모조리 깨졌다. 세르게이의 아들이 폭발에 휘말려 그만 몸에 불이 붙고 말았다. 그는 불이 붙은 채로 눈밭을 굴렀다. 유리는 미소 지었다.
“이런, 이불이…….”
아나스타샤가 중얼거리며 이불을 털어냈다. 아래를 보니 불이 옮겨붙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유리는 이불을 뺏어 밖으로 던졌다. 한가로이 이불에 붙은 불을 끄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아나스타샤가 허망한 얼굴로 떨어진 이불을 보다가, 유리를 쳐다봤다.
“뛰어내릴 생각이야?”
“눈더미 쪽으로 뛰어내려.”
그게 마음대로 되냐고! 아나스타샤는 눈더미를 응시했다.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내던지면 아슬아슬하게 착지할 거리였다. 그렇지만 무서웠다. 힘이 모자라서 착지하지 못하면? 암만 눈이 쌓였다지만, 뼈에 금이 갈 것이 분명했다.
아나스타샤의 겁을 달래줄 화마가 성급하게 터져 나왔다. 그들이 있는 방의 배관을 타고 올라온 불길이 혀를 날름거렸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창틀에 올렸다. 그는 비명을 지르면서 침착하게 섰다.
“괜찮아. 안 죽어.”
“안 죽는다고 전부 괜찮은 건 아니잖아! 부러지면 어떡해!”
“내가 업고 다니면 되잖아! 잔말 말고 뛰어!”
유리가 고함을 치며 엉덩이를 호되게 때렸다. 엉덩이를 얻어맞자 아나스타샤는 경주마처럼 풀쩍 뛰쳐나갔다. 꾸궁……. 건물이 비명을 질렀다. 아나스타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이 눈에 팍, 박혔다. 통증이 없다. 아나스타샤는 안도감을 느끼며 뒤를 돌아봤다. 눈밭을 구른 유리가 슈트에 묻은 눈과 흙을 털어내고 있었다.
“유리!”
아나스타샤가 그를 불러 안전을 확인했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폭발음이 귀청을 때렸다. 유리가 몸을 낮췄다. 거센 바람이 불었다. 불길은 더 거세졌다. 건물 모퉁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나스타샤는 눈더미에 꽂힌 채 바보처럼 무너지는 건물을 바라봤다.
* * *
유리는 담배를 물었다. 아나스타샤는 오시프가 가져온 소풍 가방에 들어있던 청바지와 두툼한 양모 스웨터를 입고 막 진정하던 차였다. 그들은 요양원 로비에 앉아 전소된 별채를 바라봤다. 소방차가 마지막까지 물을 뿌려댔다. 무너진 잔해 사이로 새카만 연기가 피어올랐다.
“다 타버렸군.”
오시프가 중얼거렸다. 아나스타샤는 무릎을 쓸며 심호흡했다.
“갑자기 왜 불이 났을까.”
내뱉는 숨에 궁금증을 풀었다. 운 좋게도 그 자리에 아나스타샤의 의문을 풀어줄 사람이 있었다. 따뜻한 차를 즐기던 오시프가 밖을 구경하며 대답했다.
“누가 조작했겠지. 건물 설계도를 보니 그렇더군. 이바노비치가 이곳에 오기 전에 아주 이상하게 리모델링을 했어. 가스관을 사방에 깔았어.”
“설계도는 왜 보는데?”
“직업병이지.”
유리가 묻자 별것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주방이나 보일러실이 아닌 이상 가스관이 필요하지 않단 말이지. 건물 전체를 날려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야.”
“확실해?”
“내 생각은 그래. 자세한 건 조사해봐야 알겠지만, 조사를 기다려줄 만큼 시간이 많지 않아서.”
그렇다면, 누군가 아나스타샤가 오기 전에 가스 밸브를 열었다는 것인가? 아니면, 가스에 가득 찬 집에 들어왔었나? 아나스타샤는 오시프의 말을 되뇌었다. 죽을 고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 그것의 목적은 세먀가 아니라는 예감이 들었다.
“증거를 없애는 걸지도 몰라.”
생각이 입으로 튀어나왔다. 아나스타샤의 말에 유리는 인상을 찡그렸고 오시프는 이를 보이며 웃었다.
“미하일이 살아서 널 지켜보는 걸지도 모르지.”
아나스타샤는 말이 없었다. 피곤에 절은 침묵이 찾아왔다. 검은 잿더미 위로 뿌려지던 물줄기가 멈췄다. 오시프가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놨다. 유리는 팔짱을 낀 채로 오시프에게 말했다.
“배는 어떻게 됐어?”
“아, 그래. 보물찾기 얘기를 해야지. 배라니. 발트해로 나가나?”
“아니. 운하를 탈 거야.”
유리의 말을 들은 오시프는 아나스타샤를 바라봤다. 무너진 왕국을 바라보는 공주의 표정은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운하로 가야 하니 배가 필요하단 말로는 오시프를 설득하기 어려웠다. 아니, 오시프는 아나스타샤가 절절하게 자신에게 매달리기를 바랐다.
시선을 느낀 아나스타샤가 유리와 오시프를 번갈아 쳐다봤다. 배가 필요하다. 운하를 건너야 한다. 그 이유는 공주께서 말씀해줄 차례다.
“벨로모르스크로 가야 해요. 운하를 타고요.”
“한가하게 유람선 타고 다닐 시간은 없을 텐데.”
“운하가 중요해요. 운하를 지나야…… 뭔가 떠오를 것 같아요.”
“흠.”
추상적이고 재미없는 대답이다. 배를 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니 되려 들어주기가 싫었다. 유리는 오시프의 악마 같은 속내를 잘 아는 형제였다. 즉, 오시프를 움직일 방도를 아는 셈이었다.
“콜랴한테 부탁하는 게 빠르겠어. 형이 그렇게 무능할 줄은 몰랐는데.”
유리가 구시렁거리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오시프가 전화기를 뺏었다.
“내가 옆에 있는데, 니콜라이에게 도움받을 생각을 해?”
“배 못 빌리는 거 아니었어?”
유리가 뚱한 얼굴로 되묻자, 오시프는 아나스타샤를 노려봤다. 저 빌어먹을 놈. 외동아들만 아니었어도 포도밭에 거름으로 줬을 텐데. 공주는 표독스럽게 자신을 노려보는 오시프의 시선을 받아주며 힘겹게 웃을 뿐이었다. 공주의 눈에도 라포포르트에게는 지금 상황이 그저 오락, 보물찾기와 다름없어 보였다.
아나스타샤도 세먀는 세상에 없으리라 생각했다. 미샤의 집착과 늙은 정신이 만든 착각일지도 모른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괴상한 약 때문에 하루에만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겨야 한다니. 참으로 어울려주기 어려운 연극이었다.
“날 돕기로 했잖아요.”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따지는 말투였다. 아무리 미워도 거래는 확실해야 한다. 오시프는 고개를 돌렸다.
“대령하면 되잖아. 대령하면. 겨울 궁전 앞에서 얌전히 기다려.”
오시프가 툴툴거리며 나가버렸다. 아나스타샤는 어딘가 심통 난 듯한 걸음을 눈여겨봤다. 어지간히 막냇동생을 예뻐하는 형이었다. 오시프가 사라지자, 유리가 아나스타샤 옆자리에 앉았다. 그슬린 냄새 뒤로 유리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아나스타샤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지쳤어?”
“응. 긴장이 풀리니까 피곤해.”
“안 되는데.”
유리가 기댄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턱을 내밀었다. 입술이 맞닿을 거리였다.
“갈 길이 멀잖아.”
“유리가 키스해주면 힘이 날 것 같은데.”
유리는 웃었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따라 아나스타샤도 밝아졌다. 해줘. 아나스타샤가 조르자 별수 없다는 듯 유리가 입을 맞췄다. 생각해보니 이 입술을 탐한 지 무척 오래됐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목에 팔을 둘렀다.
익숙한 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충격받은 뇌를 부드럽게 마사지해주는 기분이었다. 혀까지 얽히며 미처 끝내지 못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상대를 탐했다. 아나스타샤가 등을 쓸었다. 키스에 열중하던 유리가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과일처럼 뚝, 떨어졌다.
그는 어깨에 걸친 팔을 치워내고는 일어났다.
“일단 겨울 궁전으로 가자. 여기서 시작하면 끝도 없어.”
“……그래. 알았어.”
아나스타샤는 활짝 핀 미소로 화답했다. 이미 유리가 만족스럽게 받아줬기 때문에 속상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끝나지 않을 인사는 안 하는 편이 좋다. 아나스타샤도 유리를 따라 일어섰다. 요양원 건물 밖으로 나오자 현관 앞에 유리와 아나스타샤를 위한 고물 세단이 한 대 주차되어있었다.
“소련 때 굴러다니던 거 아니야?”
유리는 벗겨진 페인트와 녹이 흐른 자리를 보며 말했다. 그가 운전석 문을 열었다. 삐거덕거리기는 해도 문짝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보닛을 빙 돌아 조수석 문을 열었다. 내부는 깨끗해 보였다.
“오시프가 이런 깜찍한 선물을 주고 갈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아나스타샤가 중얼거렸다. 유리는 ‘깜찍한’ 형의 선물을 비웃었다. 겨울 궁전에 오다가 사고로 죽어버리라는 메시지로 읽혔기 때문이다. 시동을 걸었다. 말처럼 푸르륵 거릴 줄 알았는데 엔진은 은은한 진동을 내며 출발을 기다렸다. 아나스타샤도 놀랐는지 오오, 하고 감탄했다. 그의 손이 자연스레 안전띠로 향했다.
“데이트 같은데.”
“으응? 유리, 맞아. 데이트지. 데이트야. 얼마만의 데이트야? 유람선이라도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돌아보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건 세먀를 찾은 다음에 해도 돼.”
오랜만에 만났는데 와이어에 몸을 맡긴 채 베이징 도심을 날고 불타는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묘기까지 부렸다. 이 차를 타고 네바강을 건너는 일은 없겠지. 아나스타샤는 창문을 쓸었다. 유리가 핸들을 붙잡았다. 고물 세단은 아주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 * *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네바강을 끼고 발전한 러시아의 심장이었다. 도심 곳곳에 혈관처럼 운하가 이어져 얼핏 보면 베네치아와 외관이 무척 닮아있었다. 아나스타샤는 햇살을 받아 빛나는 겨울 궁전을 뒤로하고 러시아의 대동맥과 다름없는 네바강을 바라봤다. 파랗다 못해 까만 물길은 아나스타샤가 품은 두려움과 공포를 전부 씹어 먹어줄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겨울 궁전 앞, 유람선 선착장에 와 있었다. 약속한 오시프는 보이지 않았다. 유람선에 올라타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들뜬 얼굴이었다. 목에 사진기를 건 사람들이 겨울 궁전을 배경으로, 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아나스타샤는 저들이 부러웠다.
죽을 걱정 없이 편한 마음으로 관광하고 싶었다. 유리가 은근슬쩍 손을 붙잡았다. 아나스타샤가 그를 돌아봤다. 무표정했지만, 조금 쑥스러워하고 있었다. 그가 길 건너를 가리켰다. 아무도 없었다.
“누굴 숨겨둔 거야?”
“뭐, 기왕 왔으니까.”
아나스타샤는 유리가 가리킨 방향을 보며 웃었다. 파파라치를 숨겼는지는 모르겠으나, 기념사진은 찍은 것이다.
“유리는 이게 재미있어?”
순수한 질문이었다. 내가 죽을까 봐 무섭지 않은 거야? 보물찾기, 소풍이라고 생각하나? 그저 의문이었던 물음이 꼬리를 물자 감정이 격해졌다. 아나스타샤는 울음을 참으려 입을 꾹 다물었다. 잘생긴 얼굴이 울분으로 일그러지자 유리는 강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무서워. 뉴욕 때처럼, 네 형이 설계한 것도 아니잖아.”
“이번에는 미하일이 설계했지. 내가 널 몇 번이고 구할 거야.”
“유리, 네가 날 구할 위기에 처하고 싶지 않다는 거야. 네가 날 구하러 오겠지만, 목숨을 위협받기 싫다고!”
화풀이였다. 폭풍같이 몰아쳤던 감정이 고함 한 번으로 사그라들었고, 민망함이 치고 들어왔다. 유리는 짜증을 내기는커녕 아나스타샤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그가 사과하기를 기다렸다. 공주는 눈도 못 마주쳤다.
“미안해. 네가 이렇게 만든 것도 아닌데. 화를 냈네.”
“조금 나아졌어?”
유리가 머리칼을 부드럽게 만져줬다. 아나스타샤는 힐끔,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됐어.”
아나스타샤는 협박은 익숙해도 죽음에는 도통 익숙하지 못했다. 겪을 때마다 혼란스러운 것이 당연했다. 괜찮다고 얼버무리던 그가 유리에게는 솔직하게 감정을 털어놓는다. 유리는 그럴 때마다 포만감을 느꼈다.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이 출발했다. 선착장이 비었다. 오시프는 언제 올까.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오시프, 정확히는 배를 기다렸다. 곧 요트 한 척이 선착장에 들어왔다. 말이 요트지 돛도 내실도 없는 모터보트였다. 알려주지 않아도 그 보트가 오시프가 부른 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보트를 몰고 온 사람은 오시프가 데리고 다니는 표트르였다.
“타시죠.”
그가 말했다. 유리는 망설임 없이 보트에 올라탔다. 배라더니 이것도 ‘배’는 맞지만, 이걸 타고 운하를 건넌다고? 바다처럼 넓은 호수를 건너야 하는데 고작, 요트로. 아나스타샤는 속으로 불평했다.
먼저 올라탄 유리가 손을 내밀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손을 잡고 보트에 올라탔다. 맡은 짐이 탄 것을 확인한 표트르가 보트를 움직였다.
“배를 구하는 데에 차질이 생겨서 보스는 호수로 오실 겁니다.”
“뭘 구했는데?”
유리가 물었다. 표트르는 그를 힐끔 돌아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반응을 보니 어떤 ‘배’가 올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유리는 의자에 등을 붙이고 상체를 비스듬히 눕혔다. 보트는 물결을 타고 상류로 향했다. 무서운 속력으로 달리는 탓에 작은 파도에도 배가 들썩였다. 반쯤 누워있던 유리가 공중에 뜨다시피 했다.
“페탸!”
“죄송합니다. 도련님. 시간이 없어서요.”
따지듯이 이름을 부르자 표트르가 사과했다. 속도는 여전했다. 눈앞에 다리가 있는데도 표트르는 달렸다. 아나스타샤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고 몸을 웅크렸다. 머리 위로 새카만 다리가 훅, 지나갔다. 아나스타샤는 성큼 다가온 만큼 빠르게 멀어지는 다리를 응시하며 심장이 제대로 뛰고 있는지 확인했다.
유리는 의자를 붙든 채로 반동을 견뎠다. 아나스타샤도 뒤늦게 유리를 붙잡았다.
“튕겨 나갈 것 같아.”
“얌전히 헬기 타고 갔으면 좋았잖아!”
“안돼. 배여야 한다고!”
제길! 이상한 데에서 고집부리기는! 유리가 소리쳤다.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허리를 안전대처럼 끌어안으며 반박했다. 배여야 한다고!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왜 배야, 하는 물음에 아무튼 배여야 해, 하는 대답만 나왔다.
* * *
네바강과 이어진 라도가호는 그 끝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하늘과 맞닿은 호수는 긴 수평선을 만들어냈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전경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부두에 멍하니 서서 호수를 바라봤다.
자연의 장엄함을 넋 놓고 구경하는 아나스타샤를 접전지까지 데리고 오는 건 유리의 몫이었다. 표트르가 안내한 곳으로 오자, 고속정 한 대가 정박해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 이러니 제시간에 도착을 못 하지. 유리는 언짢은 얼굴로 고속정을 노려봤다.
“여긴 정말 아름다운 곳이야. 그렇지 않아, 유리? 유럽에서 가장 큰 호수라고.”
“감탄은 나중에 하고 일단 배에 타. 이걸 타고 운하를 건널 거니까.”
라도가호는 아름다웠다. 유리도 안다. 맡은 임무가 있기에 한가롭게 감탄을 늘어놓을 시간이 없었다. 배에 가려 호수가 보이지 않게 되자, 아나스타샤가 유리 옆에 붙어 걸었다. 그제야 고속정이 눈에 들어오는지 둘러보며 놀라워했다.
“능력이 대단해. 해군 고속정을 빌리다니.”
오시프의 찬양을 무시하며 유리는 고속정에 올랐다. 선상에는 구명조끼를 입은 해군이 서 있었다. 어선만 한 크긴데 뭐가 대단하다는 건지. 유리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호수에서 만나자던 오시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데리고 선내로 자리를 옮겼다. 기름 냄새가 울렁울렁 올라왔다. 조타실에 들어가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머그잔을 들고 있었다.
익숙한 모습은 지금 유리 옆에 있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쳐다봤다. 아나스타샤가 친숙한 그를 쳐다봤다. 커피인지 술인지 한 모금 마신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돌아섰다. 아나스타샤였다.
“어……!”
아나스타샤가 손가락으로 아나스타샤를 가리켰다. 아나스타샤인 남자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마치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바닥까지 펼쳤다. 어……! 아나스타샤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어.”하는 소리만 이어졌다. 해군 한 명이 들어오더니 아나스타샤와 아나스타샤를 번갈아 쳐다보다 둘 사이에 서서 어중간하게 얘기했다.
“오시프 씨, 이제 출항해도 되겠습니까?”
“아아, 예. 부탁드립니다.”
머그잔을 든 아나스타샤가 요염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아직도 “어어.”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오시프처럼 웃는다. 오시프니 당연하지만…… 아니, 어떻게. 유리는 눈을 감았다.
출항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울렁이던 기름 냄새가 물결을 탔다. 고속정이 항구를 빠져나와 수평선이 보이는 라도가호수로 나아갔다. 그때까지 아나스타샤는 오시프를 구경했고 유리는 심호흡했다. 둘의 반응을 즐길 만큼 즐긴 오시프가 잔을 두드렸다. 가지런한 손톱까지 아나스타샤를 빼닮았다.
“감쪽같지?”
“어떻게 한 거예요?”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오시프는 검지를 세워 입에 댔다.
“국가 기밀이지, 전기 충격에만 벗겨지는 특수 표피야.”
“유리, 밀랍 인형은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아나스타샤가 감탄하며 유리에게 답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노려봤다. 살벌한 눈빛에 아나스타샤가 딴청을 부리며 “아, 국가 기밀이라 마음대로 사용하면 안 되려나…….”하고 말을 흐렸다. 이건 또 무슨 장난인가. 유리가 눈짓했다.
“감수해야 할 일이야. 누가 배 타고 갈 줄 알았나. 그랬으면 잠수정을 빼놨겠지.”
“해군 고속정이 최선인 거랑 형이 아나스타샤 분장을 한 게 무슨 상관이야?”
“왜 상관이 없니. 유라, 내가 배를 빌린다고 말한 순간부터 목적지가 공유된 거야.”
배를 빌리느라 시간이 지체되고, 목적지가 입 밖으로 나온 순간, 세먀를 노리는 자들도 아나스타샤가 보는 곳을 보고 있으리라. 벨로모르스크. 운하 끝자락에 붙은 도시인만큼 그 근처에 세먀를 숨겼을 가능성이 컸다.
오시프는 새끼손가락을 든 채로 머그잔을 기울였다. 초승달 모양으로 접히는 눈매가 오늘따라 얄미웠다.
“분명 납치하려 들 거야.”
“오, 오시프 씨가 동행하는데 납치를 할까요?”
네가 레오파드인데, 누가 건드냐는 말이었다. 보복이 무섭다면 오시프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오시프는 아나스타샤의 얼굴을 하고 아나스타샤를 경멸했다.
“나도 사람이야. 오시프라고 총알을 튕겨내는 건 아니거든.”
“여차하면 형을 미끼로 던지고 도망가면 돼.”
유리가 말했다. 오시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자신도 그걸 원했지만, 아나스타샤 앞에서 미끼로 던져버리겠다는 말을 들으니…… 속이 쓰렸다. 그는 아나스타샤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아나스타샤를 유리 곁에서 떼어냈다.
“아나스타샤가 둘이니, 시간도 벌겠지. 아무리 혼자라 해도 오시프를 고르고 싶은 놈은 없을 테니까.”
어색함에 뻣뻣해진 아나스타샤와 부드럽다 못해 흘러내리는 아나스타샤가 바짝 붙었다. 이건 인지오 씨가 봐도 못 맞춘다. 유리는 생각했다. 오시프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아나스타샤 행세를 할 수 있었다.
“어때, 유리. 누가 아나스타샤인지 알아보겠어?”
“하하, 그럼요. 유리는 알아볼걸요.”
오시프의 도발에 아나스타샤가 맑게 웃으며 답했다. 눈치 빠른 인간이 이럴 때면 눈치를 바다에 던진 사람처럼 굴었다. 아나스타샤가 오시프를 보다, 유리를 응시했다. 파란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신뢰와 애정으로 갈고 닦은 눈빛이다.
“그렇지?”
“……급할 때는 조금 헷갈리겠는데.”
“뭐어?”
유리는 대답을 흘렸다. 아나스타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썹을 늘어뜨리며 되물었다. 내가 더 빛나고 아름답잖아. 억울함이 가득한 눈망울이 말했다. 유리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아나스타샤의 빛나는 아름다운 얼굴은 눈물을 머금을 때가 가장 아름다웠다. 의기소침해진 눈가를 유리는 만족스럽게 쳐다봤다.
“벨로모르스크에 도착하면 해가 지겠군.”
승리를 쟁취한 오시프가 노래를 부르듯 중얼거렸다. 조타실 창밖으로 수평선과 서쪽으로 기우는 해가 보였다. 고속정이 속력을 냈다. 유럽에서 가장 큰 호수를 건넌다. 마치, 육지로 둘러싸인 바다를 가로지르는 기분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구명조끼를 입은 채로 갑판에 서서 바람을 맞았다. 물의 향긋한 냄새가 마음을 안정시켜줬다. 유리는 난간에 등을 기댄 채 아나스타샤와 정 반대쪽을 응시했다. 둘의 팔과 어깨는 온기가 느껴질 정도로 붙어있었다.
“좋네.”
한가롭게 감탄한다. 유리는 침묵으로 동의했다. 라도가호는 광활해서 고속정이 최고 속도로 달려도 그 끝에 닿으려면 며칠은 걸릴 듯했다. 헬기와 드론도 보이지 않으니 숨 돌릴 틈이 생겼다.
“경치를 봐. 지중해보다 넓어 보여.”
유리는 그를 힐끔 쳐다봤다. 자연에 압도된 공주의 푸른 눈에는 호수가 가득했다. 다시 라도가호를 바라봤다. 사방이 물이다. 크고 깊다. 여기서만큼은 아나스타샤를 쫓는 놈들이 없었다. 겨울 칼바람이 둘을 찢어놨다. 유리는 몸을 움츠렸다. 추웠다.
“언제까지 서 있을 거야?”
“도착할 때까지…… 유리, 춥구나?”
“그래.”
러시아인이면서 추위를 탄다니, 아나스타샤는 웃었다. 지중해에서 나고 자란 아나스타샤도 참을만한 추위였다.―구경하느라 감각이 어떻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유리는 목이 안 보이게 움츠린 채로 아나스타샤를 주시했다. 들어갈지 말지 고민이라도 하면 곧장 끌고 들어갈 기세였다.
슬프게도 아나스타샤는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입은 겉옷을 벗어 유리의 가슴에 둘러줬다. 아나스타샤가 입고 있던 겉옷은 따뜻했다. 유리는 팔 부분에 손을 반만 끼고 겉옷을 담요처럼 끌어안았다. 아나스타샤의 맑은 눈이 유리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유리는 눈빛에 담긴 뜻을 알 수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 쪽으로 붙었다. 아나스타샤가 귀를 손으로 덮어줬다. 따뜻했다.
“내 절반은 미국인이야.”
“알아. 에드워드 씨가 미국인이지.”
아나스타샤는 웃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모르는 척 어깨에 기대면 안아줄 것 같은데. 유리는 아나스타샤와 주위를 훑으며 생각했다. 보는 눈도 없으니…….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아나스타샤는 기꺼이 품을 열었다. 호수 바람에 차게 식은 스웨터를 끌어안았다. 아나스타샤의 손이 유리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데이트하는 기분이야, 안 그래?”
유리가 물었다. 선상에 서서 로맨틱하게 서로를 바라보다 끌어안는다. 아름다운 전경까지 있으니 데이트와 다를 것이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웃었다.
“빌딩 번지와 건물 폭발도 데이트 이벤트로 치는 거야?”
“뭐, 비슷하지.”
“난 네 가족을 만날 때 그런 일을 마주할 줄 알았어.”
십 남매 중 막내. 그것도 에드워드 디어본 라포포르트를 쏙 빼닮은, 오메가가 될 줄 알았던 사랑스러운 막둥이. 아나스타샤는 상견례 할 때가 되면 건물 밖으로 던져지거나 타던 차가 폭발하는 경악스러운 일을 겪을 줄 알았다.
유리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가 이내 이를 보이며 웃었다. 오늘따라 드러난 송곳니가 칼처럼 보였다.
“오시프만 누르면 돼. 오시프를 누르려면, 부모님을 설득하면 되지. 볼쟈와 에디는 내가 돼지랑 결혼한다고 해도 허락할 거야.”
아나스타샤는 연미복을 입은 유리 옆에 드레스를 입은 돼지가 선 식장을 상상했다. 그 돼지가 선 자리에 자신이 들어가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꺼림직한 그림이었다. 아나스타샤의 미소가 어색해졌다.
“그렇다고 당신이 돼지라는 건 아니야. 그만큼 내 의견을 잘 들어주신다는 얘기지.”
유리가 덧붙였다. 아나스타샤는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살갗이 차가웠다.
“그래서 널 싸고도는 형제가 있어도 마이애미에 나왔구나?”
“러시아보다 따뜻하니까.”
“지중해는 어때. 포도밭이 아주 많아. 와인이 물처럼 나오지.”
정말 물처럼 마셨다가는 두 달을 못 버티겠지만. 아나스타샤가 농담하며 차가운 볼에 코를 비볐다. 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시사철 뜨거운 태양이 얼굴을 내미는 지중해도 나쁘지 않겠다. 머릿속 자신은 아나스타샤와 함께 요트를 타고 지중해를 떠돌며 와인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집이랑 가까워.”
망상은 망상일 뿐이다. 이탈리아는 마이애미에 비해 러시아와 가까웠다. 마음만 먹으면 매일 드나들 거리였다. 바다 건너에 있어도 부득불 간섭하는 인간이다.
아나스타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피식피식 웃었다. 그는 대답 대신 입을 맞췄다. 유리는 눈을 감았다. 배가 고팠다. 아나스타샤를 한 입 씹어먹으면 좋으련만. 입을 벌려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이럴 때가 아니라고 안 해?”
“호수 한가운데에서 무슨 일이 있겠어.”
유리가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호수를 바라봤다. 아름다운 얼굴은 혹독한 겨울바람에 빨갛게 얼어있었다. 유리의 눈에는 부끄러워서 볼을 붉힌 것처럼 보였다.
“맞아. 누가 러시아 해군을 공격하겠어. 그럼…… 전쟁이지!”
“3차 대전이 당신 때문에 일어날 줄은 몰랐는데.”
하하. 아나스타샤가 웃었다. 안전이 확인되니 농담을 할 만큼 진정됐다. 물결을 만난 배가 높이 뛰었다. 아나스타샤는 난간 대신 유리를 꽉 붙잡았다. 선두가 먼저 바닥에 꽂히며 물보라가 일었다.
옷에 물방울이 튀었다. 아나스타샤는 재미난 공연이라도 본 것처럼 좋아했다. 푸른 하늘과 푸른 호수를 응시하던 아나스타샤가 중얼거렸다.
“벨로모르스크역 앞에 오래된 건물이 있는데, 거기에 인형 가게가 있거든. 비스크 인형을 파는 골동품 가게였어.”
웃음기가 걷혔다. 아나스타샤는 멍한 표정으로 유리를 돌아봤다. 벨로모르스크역 앞 골동품 가게.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기억이 다음 목적지를 가리켰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말을 오시프에게 알리고 배 안에 들어가 몸을 녹이고 싶었다. 유리가 손을 잡았는데도 아나스타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니까, 나는 크루즈를 타고 운하를 여행해본 적이 없어.”
“…….”
“벨로모르스크도 가 봤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나스타샤는 시선을 떨궜다. 피곤했다. 새콤하고 달콤한 것이 먹고 싶었다. 요양원에서 찾은 사탕을 조금 아낄 걸 그랬어. 다 먹어버렸으니 입을 달랠 간식이 없다. 가게에 있지 않을까? 아나스타샤는 가본 적도 없는 비스크 인형 가게를 떠올렸다.
“그 노친네가 당신 머리에 장난을 친 게 분명해.”
유리가 아나스타샤를 깨웠다.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뭐라 하기도 전에 그를 데리고 선실로 들어갔다. 미샤가 그랬을까? 그는 내 친구야. 친구한테 그럴 리 없는데. 아나스타샤는 처음으로 주머니에서 손을 빼냈다. 꼭 쥔 주먹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주먹을 쳐다봤다. 손가락을 펴면 안에 사탕이 들어있을 것만 같았다. 네 이름은 아나스타샤지. 미하일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나는 아나스타샤지. 이전에 썼던 이름은 잊어버렸다. 나는 아나스타샤다.
배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철로 된 의자는 담요를 깔아놨는데도 냉기를 막지 못했다. 몸이 위로 들떴다. 또 물결을 만난 듯했다. 선내에 있으니 바깥이 보이지 않아 유추할 뿐이다.
“도착해서 말하기로 했어.”
유리가 머그잔을 내밀었다. 아나스타샤는 따뜻한 코코아를 받았다. 유리는 위스키 잔을 들고 있었다. 안에는 투명한 액체가 가득 담겨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물 같은 액체가 맛보지 않아도 보드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코코아 위에 둥둥 떠다니는 마시멜로 개수를 세며 추궁했다.
“근무 중이잖아.”
“안 마시면 속부터 얼어붙어.”
유리는 차디찬 바닥에 철퍽 앉으며 술을 들이켰다. 아나스타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유리를 내려다봤다. 그는 술을 물처럼 마셨다. 표정 변화도 없었다. 빈 잔을 든 채로 입가에 묻은 술을 핥았다.
“추우면 옷을 입어야지. 술을 마실 게 아니라.”
그는 아나스타샤의 잔소리를 뱃고동 정도로 여겼다. 귀 뒤를 문지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황소 귀에 노래 부르기지. 아나스타샤는 핫초코를 마셨다. 엉덩이 밑으로 배의 엔진이 느껴졌다. 오로지 물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은 잠잠했다.
“한숨 자둬. 오네가호에 도착하면 쉬지도 못할 거야.”
“왜?”
“운하에 볼일도 없으니 헬기로 이동해야지.”
더 할 일이 있나? 유리가 물었다. 아나스타샤는 입만 벙긋거렸다. 헬기? 와이어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탔던 그것 말인가? 피가 식었다. 또 모빌처럼 매달리지 않으리란 법이 없지 않은가.
“저, 저녁이면 도착할 텐데. 배를 타고 가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
“네 말도 옳아. 호수 운치도 구경하고 말이야. 벨로모르스크에 도착하자마자 웬 놈한테 붙잡혀서 세먀를 못 찾고 죽든지, 찾게 도와준 뒤에 죽든지. 괜찮은 개죽음이겠네.”
아나스타샤는 머그잔을 내려놓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눈앞의 평화를 쫓을 것인가, 혹시 모를 사태를 위해 위험하더라도 서두를 것인가. 당연히 눈앞의 평화였다. 나중에 닥칠 위험은 나중에 견디고 싶었다. 아나스타샤가 죽어도 헬기는 타기 싫다는 얼굴을 하니, 유리가 검지로 공주를 가리켰다.
“한시라도 빨리 세먀인지 스페르마인지 찾아서 이바노비치에게 넘기고 너랑 마이애미든 지중해든 어디든 가서 떡 치고 싶다고. 알겠어?”
걱정 가득한 아나스타샤의 얼굴이 단숨에 펴졌다. 얼른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유리와 한 침대에 누워서 코를 비비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
눈빛에서 마음이 읽혔다. 유리는 부담스럽게 빛나는 시선을 피하려고 부러 고개를 숙여 몸을 일으켰다.
“그러니 간다고 해. 보물찾기한다고 오시프가 많이 들떠있으니까.”
“응, 그럴게.”
헬기 백 번이고 더 탈 수 있어. 아나스타샤가 중얼거렸다. 정말 백 번 태우면 울 거면서. 유리는 그의 앞에 바짝 섰다. 아나스타샤가 그를 올려다본다. 머리카락을 만지고 볼을 쓰다듬어도 겁먹거나 피하지 않았다. 입술에 손가락을 대자 입꼬리가 광대까지 올라간다.
이렇게 아름다운 내 아나스타샤에게 손대다니. 그것도 내가 아나스타샤의 존재를 몰랐을 때 말이다. 미하일을 향한 질투가 들끓었다. 유리는 그의 턱을 아프게 붙잡았다.
“당신은 내 손에 죽어야 해.”
“그래. 내 심장도 고환도 다 네 것이야, 유리.”
죽여도 내가 죽인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과 비슷했다. 아나스타샤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위협적인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면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지중해가 아니어도 떡은 칠 수 있을 것 같은데.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도 말이다. 손이 유리의 허벅지를 붙잡았다. 뻣뻣한 바지 아래로 단단한 육체가 느껴졌다.
손은 가랑이 사이로 들어와 유리의 엉덩이 아래를 주물렀다. 허벅지와 엉덩이가 만나는 부분은 유난히 부드러웠다. 유리가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아야야. 아나스타샤가 신음했다. 둔부를 더듬던 손은 달팽이 눈처럼 다시 가랑이 사이로 쏙 들어갔다.
“헛짓거리 말고 자라.”
“알겠어. 알겠어.”
아나스타샤가 양손을 어깨높이로 올려 항복했다. 유리도 손을 풀었다. 이제 조금 적응했다고 한눈팔면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든다. 짐승인지 몽마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팠는지 아나스타샤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는 손바닥으로 머리를 마구 비볐다. 보기 좋은 얼굴이다. 유리는 흉하게 찌그러진 얼굴을 한참 구경했다.
“뇌까지 뽑히는 줄 알았잖아. 내가 대머리라도 되면 어쩌려고 그래?”
“네 가족은 머리털이 벗겨질 걱정은 없잖아.”
“방금 내가 시모나로티 최초의 대머리가 될뻔했어!”
유리는 인상을 썼다. 투덜거리던 아나스타샤가 눈을 꿈뻑였다.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는 눈치다. 귀엽게 굴면 더 놀리고 싶지 않은가. 유리는 뒷걸음질 쳤다.
“대머리인 아나스타샤는 싫어.”
“유리! 어떻게 나를 싫다고 할 수 있어!”
“그럼 대머리가 되질 말아야지.”
네가…… 하고 아나스타샤가 반박하려 했다. 유리는 손을 허공에 휘젓고는 휙 돌아섰다. 어디가?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유리는 물음을 못 들은 척했다.
“자둬.”
이번에는 아나스타샤가 침묵했다. 잠시 후면 사라질 이슬 같은 평화다. 유리는 조타실로 가, 오시프가 무슨 짓을 꾸미는지 감시했다.
* * *
같은 옷, 같은 머리 스타일, 같은 목소리. 같은…… 눈빛. 쌍둥이로 보이는 두 사내가 각각 다른 자세로 서 있었다. 유리는 둘을 구분할 수 있었다. 팔짱 낀 쪽이 아나스타샤였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쪽이 오시프였다. 기분 나쁠 만큼 똑같다.
헬기 안에서 겁먹지 말라며 아나스타샤를 붙들고 다독인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나스타샤는 덤덤한 얼굴로 멀어지는 헬기를 응시했다. 그것도 잠시, 아나스타샤는 문제의 역을 바라봤다.
그들은 벨로모르스크 기차역 앞에 있었다. 해가 저물어서 밝은 하늘색이던 기차역은 청록색으로 보였다. 역은 찾았다. 그러니 이제 가게만 찾으면 되는데…… 가게가 어디 있을까. 아나스타샤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가로등이 켜졌어도 어두침침했다. 주차장과 건물 몇 개가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러시아라면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만 몇 번 오갔다. 그것도 대부분 모스크바에 있는 이바노비치의 저택에서 미하일과 시간을 보냈었다. 벨로모르스크는 아마도 처음이다. 호수에서 느꼈던 이질감이 거스름처럼 일어났다. 쨍한 색상의 기차역은 생소한 장소이지만, 익숙했다. 왤까.
사탕이 필요하다.
팔짱을 끼고 고민하던 아나스타샤가 멋대로 튀어 나갔다. 사탕은 인형 가게에 있을 거야. 비스크 인형 안에 말이야. 뛰다시피 걷는 아나스타샤의 뒤를 라포포르트가 여유롭게 쫓아왔다.
백해에 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올 일이 없는 도시를 아나스타샤는 베네치아 앞뜰을 거닐 듯 걸었다. 그의 걸음은 막힘 없었다.
“미샤가 바그노프를 생산하면서 대학원을 다녔었지. 대단하지 않아? 그때 전공이 뭐였더라. 심리학이었나.”
오시프가 말했다. 아나스타샤의 껍데기를 쓴 그는 목소리와 말투까지 똑같이 냈다.
“최면 심리학을 연구했어.”
아나스타샤가 답했다. 그는 외벽이 반듯한 건물 앞에 섰다. 낡은 인형 가게라더니, 칠을 끝낸 지 얼마 안 된 건물이었다. 주인이 있는 건물이다. 주인이 이바노비치인가? 아니, 이바노비치는 기차역 근처에는 건물을 사지 않았다. 땅도 없었다. 그렇다면 주인은 누구지? 둘은 아나스타샤를 응시했다.
그는 쇠사슬이 감긴 현관문을 흔들고 있었다.
“잠겼어. 창문으로 들어가야 하나?”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1층 창문은 넘으라면 넘을 수 있는 높이였으나 열렸는지 알 수 없었다. 애먼 창문을 깨트려 이목을 끌 바에야 자물쇠를 따는 쪽이 나았다. 이런 짓은 오시프가 전문이었다.
아나스타샤로 분장한 열쇠공은 유리를 보고 있기만 했다.
“왜. 내가 하라고?”
“공주는 문 딸 줄 몰라.”
공주도 아니면서! 유리는 불쑥 올라오는 화를 참았다. 화내면 자물쇠 따는 이유가 없어. 창문 깨는 짓 하지 말자. 하지 말아……. 가방에서 핀을 꺼내 자물쇠를 풀었다. 쇠사슬이 바닥에 떨어졌다. 유리의 솜씨도 훌륭했다. 아나스타샤가 감탄했다.
“고마워, 유리. 못 하는 게 없구나.”
칭찬에 콧대가 높아진 유리는 어깨에 힘을 주고 현관문을 열었다. 오래 묵은 곰팡이가 겨울 습기를 먹은 퀴퀴한 냄새를 풍겼다. 깔끔한 외관과는 정반대였다. 속은 오랫동안 방치된 폐허였다. 앞장서서 가게를 찾았던 아나스타샤는 을씨년스러운 건물 내부에 겁을 먹었는지 현관 앞에서 알짱거리기만 했다.
“손전등은 뒀다 뭐해. 응? 공주.”
오시프가 아나스타샤의 허리춤에 걸린 손전등을 뺏어 들었다. 내부를 밝히자 바닥에 나뒹구는 낙엽과 쓰레기, 황급히 사라지는 쥐가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오시프의 옷깃을 붙들며 작게 속삭였다. 저, 저기 쥐가 있어요. 오시프도 똑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집사가 마중이라도 나올 줄 알았어?
유리는 외벽을 한 바퀴 돌았다. 비스크 인형이나 마트료시카는 찾을 수 없었다.
“여기 맞아? 아무것도…….”
현관으로 돌아온 유리가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아나스타샤가 둘이었다. 손전등을 든 사내와 그의 뒤에 꼭 붙어있는 사내. 어둠에 묻혀 짙어진 푸른 눈동자가 유리를 응시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어깨를 밀치고 오시프와 아나스타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공주가 둘이니까 흥분되는구나? 나는 괜찮은데.”
“시끄러워. 1층은 아무것도 안 보여. 입구는 내가 지킬 테니까 둘이 찾아.”
“유리, 같이 가야지.”
아나스타샤는 다급했다. 쥐가 나오는 건물을 유리 없이 돌아다니라니! 오시프는 분명 꺼지라고 쫓아낼 게 분명했다. 시체라도 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유리는 자신의 손전등을 쥐여줬다.
“안 돼. 냄새 맡고 쫓아온 놈들이 포위할지도 몰라.”
“무서워서 집중이 안 돼.”
“집중해.”
무서워서 못하겠다니까! 아나스타샤가 작게 소리쳤다. 유리가 이탈리아어로 단호하게 말했다.
“떡 치려면 집중해야지. 여기서 살 거야?”
“알았어…… 해볼게…….”
아나스타샤는 손전등을 켜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오시프가 그를 불러세웠다.
“아니, 너는 1층이랑 지하를 봐.”
“지, 지하요?”
“그래. 지하.”
오시프가 웃었다. 분명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도 오시프의 미소는 살벌했다. 아나스타샤가 지하에서 죽길 바라는 웃음이었다. 그 얼굴에 대고 싫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아서 아나스타샤는 1층의 가장 가까운 방에 들어갔다.
유리와 단둘이 남은 오시프가 속삭였다.
“그렇게 붙어있고 싶으면 같이 묻어줄까?”
“죽어서도 아나스타샤랑 같이 할 수 있으면 뭐든 좋지.”
유리의 대꾸에 오시프는 바닥에 침을 뱉고는 쿵쾅거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중간에 낡은 계단에 구멍이 났는지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와 오시프의 욕설이 들렸다. 꼴 좋다. 유리는 콧방귀를 뀌며 현관문을 닫았다.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내 양손으로 쥐었다.
가로등 빛 밑으로는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 * *
퉁탕탕, 계단 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현관문에 작게 난 유리창으로 바깥 동태를 살피던 유리가 계단 쪽을 쳐다봤다. 아나스타샤가 내려왔다. 그러니까, 아나스타샤의 탈을 쓴 오시프가. 어두우니 분간이 안 된다. 유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위에는 없어.”
오시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유리 주변을 훑었다. 진짜 아나스타샤에게선 볼 수 없는 소름 끼치는 안광이 그가 아나스타샤가 아니라고 말해줬다.
“아나스타샤는?”
“지하에서 아직 안 올라왔어.”
“흐음. 놀라서 기절했나? 너무 놀라서 비명도 못 지르고 뒤로 넘어갔나 보지.”
비아냥이었다. 아나스타샤의 목소리를 흉내 냈어도 오시프의 느낌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그 나이 먹고 귀신이나 괴물을 믿는 건 아니겠고. 키득거리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유리가 오시프의 손전등을 뺏어 들었다. 동그란 불빛이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비췄다.
라포포르트는 서로를 바라봤다. 아나스타샤라면 가능하다. 밑에 시체 비슷한 걸 보고 놀라 기절했다면……. 숨죽이고 아나스타샤의 기척을 느꼈다. 휘이이, 바람만 매섭게 몰아쳤다.
“가지가지 하네.”
오시프가 중얼거렸다. 유리는 서둘러 지하로 내려갔다. 경계가 풀어진 사이 불청객이 들이닥칠 수도 있었으나 아나스타샤가 우선이었다. 뇌진탕으로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길잡이를 잃으면 오도 가도 못하니까.
지하 계단은 철로 되어있었다. 낡은 나무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복도는 조용했다. 아나스타샤의 숨소리, 발소리는 없었다.
“아나스타샤!”
유리가 소리쳤다. 묵묵부답이다. 유리는 바닥을 비췄다. 자욱하게 깔린 먼지 위로 아나스타샤의 발자국이 보였다. 발자국은 지하실 이곳저곳을 헤맸다. 뒤꿈치 쪽을 길게 끈 걸음이었다. 그러다 복도 끝에서 걸음을 멈춘다. 체중을 실은 자국이었다.
유리는 벽을 확인했다. 지하실과 어울리지 않는 고풍스러운 벽지가 발라져 있었다. 이 벽지를 어디서 봤더라. 최근에 봤는데. ……아. 기억났다.
“요양원 벽지잖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요양원. 미하일 이바노비치가 죽기 전까지 지냈던 방의 벽지와 같았다. 숙원을 향한 집착이 느껴졌다. 세먀는 실존하는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투명한 욕망에 동화되는 것 같았다.
“유리, 저기.”
망자의 광기를 느끼지 못한 오시프가 손전등이 비추는 바닥을 가리켰다. 아나스타샤의 발자국이다. 발자국은 우측 방으로 이어졌다. 아나스타샤의 행적은 방에서 끊겼다. 원맨쇼라도 한 건지 발자국이 방 전체에 어지럽게 찍혔다.
“어디로 숨었지?”
오시프는 벽면을 손으로 쓸며 방을 한 바퀴 돌았다. 유리가 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벽을 두드렸다. 우측 벽이 울렸다. 안이 비었다. 그는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 상대적으로 얇은 벽이 움푹 파였다.
“아나스타샤!”
유리가 그를 불렀다. 공주가 단독 행동을 벌였다니 믿기지 않았다. 무섭다며 같이 가면 안 되냐고 징징대던 인간이! 아나스타샤! 유리는 그의 이름을 다시 외치며 벽을 두드렸다. 움푹 들어간 부분에 구멍이 뚫렸다. 노란빛이 구멍에서 뿜어져 나왔다. 폐가에 빛이라니. 아나스타샤가 이 안에 있다. 유리는 이를 갈았다.
“가만 안 두겠어.”
질투와 분노에 눈이 먼 유리는 정신 나간 인간처럼 중얼거리며 벽을 깨부쉈다. 오시프는 뒷짐을 쥐고 동생을 지켜봤다.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
분노에 찬 주먹질에 비밀의 문은 맥을 못 추고 산산이 조각났다. 유리가 비밀의 방으로 들어섰다. 안락한 노란 조명과 앤티크 선반에 진열된 수많은 비스크 인형들. 그리고 흔들의자 중앙에 앉아서 사탕을 먹는 아나스타샤가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불청객을 맞이하는 집주인처럼 당황해하며 유리를 쳐다봤다. 양 볼은 사탕 모양으로 불룩 솟았다. 걱정과 달리 멀쩡한 모습이다. 안도와 함께 짜증이 치솟았다.
“너.”
“유리!”
아나스타샤가 끌어안고 있던 인형을 바닥에 팽개치며 유리에게 달려왔다. 유리를 힘차게 끌어안은 아나스타샤는 그의 볼과 입에 번갈아 입을 맞췄다. 아나스타샤의 입에서 인위적인 딸기향이 났다. 사탕 안에 들어있는 시럽 맛인가. 발길이 끊긴 곳, 더군다나 벽 뒤에 숨겨진 곳에 진열된 사탕을 먹었나 보다.
얼마나 방치됐는지 모를 음식은 먹는 게 아니라고 말했음에도 또 처먹고 있다. 당장 목구멍에 손을 집어넣어 먹었던 사탕을 전부 뱉어내게 하고 싶었다.
다행히도 아나스타샤의 처신이 빨랐기 때문에 유리의 손이 목구멍을 여는 일은 없었다.
“혼자 앉아서 뭐 하는 거야?”
“미안해. 나도 모르게 앉아서 이걸 먹고 있었네. 먹지 말랬는데. 이미 늦어버렸어. 그, 그래도 봐. 가게를 찾았어.”
그는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주변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비밀의 방은 인형 가게처럼 꾸며져 있다. 하늘색 벽지로 창문을 만들어놨다. 언뜻 보면 아늑한 가게였다. 아나스타샤의 돌발 행동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런 장소를 만든 미하일 이바노비치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미하일이 죽은 지 몇 해가 지났는데, 누가 이것을 관리했을지 의문이다. 뒤따라 들어온 오시프가 중얼거렸다.
“미샤가 귀신이 돼서 쫓아다니나 봐. 그게 아니면 안 죽었거나.”
“미샤는 확실히 죽었어요. 장례식 때 봤으니까.”
“그럼 귀신이겠네.”
오시프의 말에 아나스타샤는 입을 다물었다. 귀신이 아니고서야 폐가에 숨겨진 비밀의 방을 어떻게 관리한단 말인가? 더군다나 전기까지 들어왔다. 누가…… 정말 미샤가 귀신이 돼서 날 쫓아다니는 걸까? 아나스타샤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걱정하지 마. 귀신도 죽이면 그만이니까.”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또 죽여?”
“그건 내가 알아서 해. 세먀로 가는 단서는 찾았어?”
유리가 말을 잘라내고 물었다. 아나스타샤는 허공을 쳐다보며 느리게 대답했다.
“응…… 아마, 아마도…… 기차를 타야 할 것 같아.”
“기차? 장난해? 운하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기차야?”
시베리아 횡단 열차라도 타겠다는 거냐고. 유리는 미하일의 묘지를 찾아가 파헤칠 것처럼 사납게 굴었다. 느릴수록 뒤쫓는 승냥이에게 잡힐 확률이 높다. 아나스타샤도 알았다. 하지만, 기차를 타야 했다. 기차를 타고…… 간다.
어딜? 아나스타샤는 생각했다. 눈앞에 선 유리가 매서운 눈으로 자신을 쳐다봤다. 회색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목적지가 있었다. 공주와 기사만의 비밀. 사탕, 관람차…… 바다.
아나스타샤가 외쳤다.
“무르만스크!”
뜬금없는 도시가 튀어나왔다. 유리가 고개를 기울였다. 무르만스크라면 바렌츠해 인근의 도시다. 여기서 더 가야 한단 말인가? 요양원 때도, 운하에서도, 그랬다. 아무 연관 없는 장소를 툭툭 뱉지 않았던가. 유리의 호흡이 차분해졌다. 오시프가 반색하며 끼어들었다.
“거기에 세먀가 있나?”
“그, 그건 모르겠지만…… 무르만스크로 가야 할 것 같아요.”
“공주 머리에 무슨 장난을 쳤는지는 몰라도 미샤가 안전한 곳에 지도를 숨겨놨어.”
오시프는 콧노래를 부르며 아나스타샤의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아나스타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지도를 받았다. 비밀리에 전달한 지도는 그의 무의식에 잠들어있다가 미하일이 열쇠로 지정한 기억의 단편을 순차적으로 떠올리면 열릴 수 있게 조작된 걸지도 모른다.
“어떻게 넣었을까? 논문에 나와 있으려나?”
“그런 내용은 들은 적이 없어요.”
아나스타샤가 답했다. 논문을 뒤져도 무의식에 명령어를 숨기는 법은 찾지 못했다는 뜻이다. 흥미가 식은 오시프가 등을 돌렸다. 목적인 세먀를 얼른 찾아준 뒤 유리를 데리고 러시아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무르만스크의 ‘어디’로 갈지는 모르잖아. 그건 기차를 타야 기억나나?”
“……그렇다면 되는 대로 열차 편을 알아봐야겠군.”
유리가 중얼거렸다. 오시프와 아나스타샤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구하는 열차 편이 여객 열차여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화물 열차라도 좋으니 가장 빠른 편으로 준비해야 한다. 헬기도 대기시켜 공주가 세부 목적지를 기억해냈을 때 곧장 떠나도록 조치해야 한다. 그러면 쫓아오던 들개들을 따돌리고 세먀를 찾을 수 있겠지.
“열차는 느려. 말을 타고 가는 것보다 느리다고.”
오시프는 미하일의 조심스러운 방법이 불만스러웠다. 사람 머릿속에 지도를 넣은 미하일 때문에 한가롭게 배를 타고 기차를 타는 여행을 강제로 즐겨야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무르만스크까지. 그들은 북쪽으로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그게 정말 있을까?”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오시프는 방을 빠져나가고 없었기에 유리만 그 물음을 들었다. 보물을 찾아서 북쪽으로 향하는 꼴이 동화책의 주인공 같았다. 동화 속 주인공 모두가 원하는 보물을 찾아 집으로 돌아오던가? 유리는 질문을 흘려보냈다.
우리는 동화 속 주인공이 아니다.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날 마지막 장이 기다린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와 함께 방을 나오면서 마지막으로 인형 가게를 눈에 담았다. 알록달록 예쁜 인형들은 하나같이 아나스타샤가 앉아있었던 흔들의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건물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오시프가 아나스타샤의 껍데기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궂은일은 전부 유리의 몫이었다. 유리는 길가에 주차된 차 문을 따고 억지로 시동을 걸었다. 아나스타샤와 아나스타샤가 뒷좌석에 탔다. 백미러로 확인한 그들은 누가 오시프고 공주인지 주변이 어두워 분간이 안 됐다.
“아나스타샤.”
유리가 부르자 두 사내가 백미러에 비친 유리의 눈을 응시한다. 지친 건지, 심드렁한 건지 맞추기가 어려웠다. 그는 일단 차를 몰았다.
“누가 아나스타샤야.”
“유리. 둘 다 아나스타샤지. 아나스타샤의 모습인데 아나스타샤가 아니겠어?”
“맞아, 유리. ……아나스타샤는 아나스타샤야.”
목소리도 억양도 비슷하다. 유리는 그제야 둘을 구분할 수 있었다. 운전석 뒤에 탄 자가 아나스타샤다. 유리는 평온과 멀어진 아나스타샤의 음울한 목소리를 느꼈다. 오직 유리만이 둘을 구분할 수 있다.
오시프가 얘기했다.
“피곤하니까…… 내일 출발하는 건 어때? 아침 일찍 말이야. 새벽 4시에 첫 차가 있어.”
“아침에 출발하면 늦지 않겠어?”
“오늘 하루 피곤했잖아.”
유리는 수긍했다. 아나스타샤는 마른 풀처럼 버석버석했다. 오시프도 그에 맞춰 힘없는 모습을 보였다. 마음만 앞서서는 안 된다. 아나스타샤에게 걸음을 맞춰야 헤매지 않고 세먀를 찾을 수 있었다. 유리는 오시프가 알려준 모텔로 차를 몰았다. 그곳은 오시프가 사람을 심어둔 곳이라 모텔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원하는 물건을 구할 수 있었다.
옷과 무기까지 준비된 그들은 작은 모텔 방에서 숨을 돌렸다. 아나스타샤는 소파에 앉아 몸을 길게 뉘었다. 얼굴이 닿은 시트에서 쿰쿰한 냄새가 났지만 개의치 않았다. 유리가 그의 머리맡에 앉았다.
“편히 쉬어.”
“지금도 편한걸.”
아나스타샤가 힘없이 웃었다. 유리 눈에는 하나도 괜찮아 보이지 않았지만, 내버려 뒀다. 공주는 유리의 허벅지에 정수리를 댄 채 잠이 들었다. 침대로 옮겨줄지 말지 수십 번도 더 고민했다. 씻고 나온 오시프가 둘의 꼴을 보더니 미소 지었다.
“방을 따로 달라고 할 걸 그랬나. 이 공주가 눈치가 없었네.”
“시끄러워. 잠이나 자.”
“불침번이 있어야지.”
오시프는 말을 하면서 침대에 누웠다. 베개에 머리를 비스듬히 기대고는 유리를 바라봤다. 헐벗은 아나스타샤, 막 씻은 아나스타샤가 베개를 벤 채로 야한 웃음을 짓는다. 아나스타샤라면 하지 않을 행동이다.
“그럼 부탁해. 유리.”
오시프가 눈을 감았다. 아나스타샤가 둘이니 아나스타샤가 아닌 자가 불침번을 서야 했다. 공주는 불침번을 서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 유리는 팔짱을 낀 채 시계를 노려봤다. 시곗바늘은 오후 11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