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Truth Or Dare (6/10)

6. Truth Or Dare


아나스타샤는 새로 그은 선을 잘 지켰다. 유리가 봤을 때는 선을 한참 넘은 행위였지만 어째 지내다 보니 아나스타샤의 기준에 맞춰져 있었다. 연인도 아닌데 한 침대 누워―이건 이전부터 했다.― 어깨에 입을 맞추고 간지럽게 굴어야 한다니. 심장이 허공이 붕 뜨는 것처럼 간질거리면서도 한참 작은 옷을 입고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외출이 있는 날에는 무조건 밖에서 자고 들어왔다. 아나스타샤는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유리는 공주의 집요한 애정 공세에 다리를 벌려주고는 했다. 치욕스러운 행위에 익숙해진 건지 유리는 곧잘 아나스타샤의 농간에 어울려줬다.

유리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비가 올 건지 공기가 무거웠다. 오래된 식탁보 냄새를 맡은 기분이었다. 그는 고개만 돌려 열어놓은 창을 확인했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보였다. 비가 오나 보다. 소나기였으면 좋겠는데. 유리는 눈을 느리게 꿈뻑였다.

평소 같았으면 눈 뜨자마자 일어나 씻었겠지만, 요 며칠간 아나스타샤에게 휘둘려 몸과 마음이 엉망이었다. 알파는 페로몬으로 꾄다고 꾀어지는 게 아닌데도 아나스타샤는 골을 울리는 독한 페로몬을 풍겼다. 오메가 페로몬도 이 정도로 들이키면 녹진해진다고. 유리는 입이 찢어지라 하품했다.

비도 오니 온실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브런치를 먹으면 딱 맞겠군. 유리는 게으르게 누워 생각했다. 가끔 이런 여유도 필요하지, 하는 변명도 잊지 않았다. 창문을 구경하는 것이 지루해진 유리는 옆자리를 돌아봤다. 아나스타샤가 세상 모르게 잠자고 있었다. 장난치느라 새벽에 잠들었으니 일어나려면 멀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다면 해가 저물 때까지 침실에 박혀 빈둥대고 싶었다. 슬프게도 세상은 항상 반대로 돌아갔다. 밖이 소란스럽더니 곧 누군가가 침실 문을 두드렸다. 유리는 계단을 부술 듯이 밟고 올라오는 소리에 옷을 입고 불청객을 기다렸다.

노크 소리에 아나스타샤가 몸을 웅크렸다. 똑똑, 방문객은 다시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이내 손바닥으로 문을 쳐대기 시작했다. 요란한 알람에 아나스타샤가 몸을 세워 앉았다. 부스스한 머리에 전라였다.

아나스타샤는 바닥에 떨어진 바지를 주워입고 문이 부서지기 전에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출근 준비를 끝낸 다비드가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있었다. 잠이 덜 깨 흐리멍덩하던 아나스타샤의 눈이 또렷해졌다. 페로몬이 밖으로 새어 나갔구나! 아나스타샤는 떨어질 불호령을 대비했다.

다비드가 아나스타샤를 세게 끌어안았다.

“아냐! 내 공주, 이리 와.”

“으응? 왜 그래, 형…… 갑자기.”

그는 신나게 아나스타샤를 끌어안고 볼에 입을 맞춘 뒤 신문을 내밀었다. 아나스타샤는 헤드라인부터 읽었다.

「알파 연쇄살인마의 최후…… 범인, 자살.」

기사에는 범인 사진이 붙어있었다. 턱살이 잔뜩 나온 40대 백인 남성이었다. 좁혀오는 수사망에 조급해진 범인이 결국 자살로 법의 철퇴를 피했다는 내용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다시, 헤드라인을 훑었다. 알파, 연쇄, 살인마…….

범인의 자살 기사 밑에는 여섯 번째 표적이었던 아나스타샤에 관한 이야기도 짧게 적혀있었다.

「여섯 번째 표적이었던 아나스타샤 시모나로티는 협박받는 상황에서도 장학 재단 설립을 위한 자선 파티를 개최했다…….」

글자를 심각하게 쳐다보던 아나스타샤의 얼굴에 가면을 바꿔 낀 것처럼 환한 미소가 번졌다.

“죽었다고?”

“그래, 아냐. 이제 무서워할 것 없어.”

“……죽었다니!”

아나스타샤는 기뻐하며 다비드를 끌어안았다. 다비드가 그랬던 것처럼 아나스타샤도 그의 볼과 입, 코에 키스를 퍼부었다. 해방을 만끽한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돌아봤다. 살인마가 잡혔다. 아니, 죽었다. 순간 일이 마무리됐다던 오시프의 말이 떠올랐다.

“유리, 이것 봐. 범인이 자살했대. 법정에 못 세운 게 아쉽지만 다행이야, 그렇지?”

아나스타샤가 신문을 건넸다. 유리는 범인이라고 실린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이 남자가 오시프의 마지막 표적이었나. ‘홍밍’을 만들었다던 그 갱단의 보스?

“다행입니다.”

유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찜찜함이 가시질 않았다. 마약을 훔쳐 위조품을 만든 조직을 응징할 겸, 아나스타샤와 동생을 이어줄 겸 이 거창한 판을 만들었다는 것이 여전히 의문이었다. 벌어진 판을 덮는 비용이 이익보다 컸다. 유리가 아는 오시프는 손해 보는 장사는 일절 하지 않는 남자였다.

그러나 유리가 골몰한다고 실마리가 풀릴 일도 아니었다. 그는 오시프가 죽을 때가 됐다고 결론지었다. 사람은 죽기 전에 변한다고 하지 않던가.

아나스타샤는 다비드를 돌아봤다. 시모나로티 형제가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쯤은 유리도 눈치챘다. 기쁨을 나누고 시모나로티가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겠지. 체면이 목숨만큼 중요한 시모나로티였다.

“집은 애가 있어서 안 되겠고. 호텔을 빌려야겠어.”

아나스타샤는 계획을 세웠다. 얘기를 듣던 다비드가 하하, 낮게 웃었다.

“따로 파티를 열 필요가 있니, 아냐. 선상 파티를 더 화려하게 꾸미면 되지.”

“아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뉴욕에 있는 크루즈 중에서 가장 큰 배로 바꾸는 거야. 방주를 만들어서 뉴욕 시민을 다 태우는 건 어때?”

“포도주가 비처럼 내리고 라구가 땅에서 솟아나겠어.”

덤덤하고 냉랭하던 다비드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만연했다. 말도 안 되는 계획에도 사람 좋게 웃으며 맞장구쳤다. 포도주가 쏟아지고 라구가 솟아나는 파티라니 말만 들어도 정신없었다.

“아침 먹으면서 더 생각해보자.”

“좋아. 고마워, 형.”

다비드가 아나스타샤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아나스타샤는 그의 품에 폭 안겨서는 볼에 입을 맞췄다. 협박으로부터 해방된 시모나로티는 홀가분한 걸음으로 사라졌다. 아나스타샤가 양손을 허리에 올리며 유리를 보고 얘기했다.

“들었지? 유리, 다 네 덕이야.”

“…….”

내 덕인가? 유리는 뚱한 얼굴로 고개만 까딱였다. 오시프가 원하는 대로 행동한 것밖에 없는데. 아나스타샤는, 시모나로티는 오시프의 농간에 놀아난 피해자였다. 사실대로 얘기할까? 그럼 이 껄끄러운 죄책감은 가라앉겠지. 그렇다면, 그다음은? 시모나로티의 일원인 라이엇이, 다비드가 이 사실을 알아차린 후에도 라포트에 남을까?

“유리.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원하는 술이라도 있는 거야?”

아나스타샤가 웃으며 유리 곁으로 다가왔다. 그때, 유리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휴대전화에 닿았다. 유리는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문자가 와있었다.

[우리 이제 볼 때 되지 않았나? T.]

모르는 번호였다. T라니. 아나스타샤를 납치했을 때 들었던 그 인물이지 않은가. 블랙베리에 아나스타샤와 자신의 정보를 넘긴 그 인물. 유리는 서둘러 옷을 걸쳤다. 아나스타샤는 느긋하게 나갈 준비하는 유리를 지켜봤다.

그가 구두를 신고 홀스터를 차는 것까지 보고서야 물었다.

“어디 가게?”

“어. 약속이 생겨서.”

“형이야?”

아마도 형이겠지. 형이거나, 형 측근이거나. 일리야일 수도 있다. 유리는 대답 대신 아나스타샤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아나스타샤가 웃었다. 비밀이라니 캐낼 수도 없겠구나. 그는 너그러이 넘겨주기로 했다.

“안 늦게 올 거야.”

유리는 비장하게 인사하고는 미련 없이 저택을 떠났다. 홀로 남은 아나스타샤는 얼굴을 붉히며 유리가 먼저 입을 맞춰준 입술을 매만졌다.

* * *

유리는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빈 벤치에 앉아 비릿한 물 냄새를 맡으며 브루클린 다리를 노려봤다. 사람들이 무심하게 유리의 뒤를 스쳐 지나갔다. 바로 뒤가 도로라 매섭게 질주하는 차량 소음에 주변 말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일찍 왔군.”

유리의 오른편에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오시프가 풀썩 앉으며 말을 걸었다. 웬일인지 왼팔을 드러낸 차림이었으나 까만 토시를 하고 있어서 화상 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유리는 그를 힐끔거렸다. 선글라스까지 낀 꼴이 관광객 같았다.

“역시 형이 블랙베리에 아나스타샤를 팔았구나.”

오시프는 부정하지 않았다. 웃기지도 않는 코웃음을 치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느긋한 자태는 자신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도 깨닫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유리는 욕 대신 허드슨강을 응시했다.

“궁금한 게 있어.”

“물어봐.”

“사람은 왜 죽였어? 그것도 다섯이나.”

“으음. 나는 둘만 처리했는데. 최근에 죽은 둘 말이야. 본보기였지.”

그 친구들이 홍밍을 유통했다더군. 선생님과 변호사가 말이야. 그래도 되나? 오시프는 혀까지 차며 자신이 죽인 두 희생자를 나무랐다. 유리는 개의치 않았다. 오시프야…… 그런 인간이니까.

“그럼 남은 셋은 뭐야?”

“그러게? 나도 모르겠네. 비슷하게 죽은 사람 셋을 엮어서 만든 거였거든.”

오시프는 처음 듣는 얘기라는 듯 손바닥까지 앞으로 내밀며 어깨를 으쓱였다. 유리가 되물었다.

“연쇄살인 사건이 아니다?”

“그런가?”

유리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맞았다는 거야, 틀렸다는 거야.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 자신을 놀리는 형의 태도에 화가 나려 했다. 오시프가 킥킥 웃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가 허공에 번졌다. 유리는 담배 끝을 문 오시프의 입술을 응시했다.

“올해 생일에는 얼굴을 봤으면 좋겠는데.”

살인 사건 얘기하다 갑자기 뚱딴지같이 생일로 이야기가 튀었다. 유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오시프를 보다 얼굴을 쓸어내렸다. 라포포르트가 미국 본토에서 마약을 유통했었다는 사실이 발각될지도 모르는데도 이런 판을 꾸린 것은 그저 본인 만족 때문이었다고?

이해할 수가 없어. 아마 그가 관에 들어갈 때까지 이해하지 못하리라.

“……그러니까, 연쇄살인이야, 아니야? 내 마음이 편해야 형 생일에 즐겁게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냐고.”

오시프가 제대로 대답만 해주면 오시프 역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유리는 오시프가 가장 아끼는 동생이며 후계자였다. 유리의 물음에 오시프가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리며 파란 눈을 내보였다. 담배를 손에 걸치고 씨익 웃는 모습이 제대로 된 먹이를 문 듯했다.

“맞아, 연쇄살인 사건이지.”

“…….”

“먼저 죽은 세 명은 알파선 적출 수술을 하기는 했지만, 다 뜯어내지는 않았어. 대상도 노숙자여서 큰 화젯거리도 안 됐지. 그걸 내가 끄집어낸 거야. 아나스타샤를 여섯 번째 표적으로 삼은 것도 나지. 이번 자살했다는 범인은 너도 아는 사람이고 말이야.”

오시프는 자랑스럽게 자신의 범죄를 인정했다. 블랙베리 갱단 보스는 조여 오는 수사망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범죄자가 된 것이다. 유리는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그럼…… 누가 노숙자 셋을 잔인하게 해부해서 죽였는데?”

“글쎄. 그건 모르겠는데.”

부드러운 미소는 유리를 불안하게 했다.

“진범이 아나스타샤를 찾아올지도 모르잖아.”

“세상에 젊고 싱싱한 알파가 아나스타샤 한 놈뿐이겠어?”

너는 아나스타샤를 너무 특별히 여겨. 오시프가 꾸짖었다. 유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시프는 고개를 들었다.

“형 때문에 아나스타샤가 표적이 됐을지도 모르잖아. 만약 진범이 아나스타샤를 노린다면 그건 형 탓이야.”

무시무시한 유리의 으름장에 오시프는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유리는 오시프를 두고 장소를 떠났다. 우르릉……. 하늘이 울었다. 유리가 도로를 달리고 있을 즘에는 굵직한 빗줄기가 쏟아졌다.

* * *

저택은 파티 준비로 분주했다. 큰 파티야 앞으로 치를 테니 간단히 집안의 사람끼리 축하연을 연 것이다. 유리는 억수로 쏟아지는 비를 맞아 축축해진 재킷을 벗어 현관 앞에서 털었다. 음식을 온실로 나르던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유리, 쫄딱 젖었네. 위층에 가면 내 옷이 있으니까 갈아입고 와.”

“……누가 오는 거야?”

유리는 아나스타샤 뒤로 술과 과일을 옮기는 고용인을 힐끔대며 물었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들고 있는 카르파초 접시를 자랑스럽게 앞으로 내밀었다.

“응. 위크하버에서 올 거야. 오늘은 간단히 식사만 할 거고…… 조만간 위크하버에서 초대하겠지. 아, 이반 씨도 부르는 게 어떻겠어?”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배려했다. 위크하버는 라이엇이 라포트로 옮기기 전까지 있었던 회사였다. 위크하버는 라이엇에게 회사 이상의 의미였다. 가족이기도 했고, 동료이며 친구였다. 이반은 라이엇이 떠나지 않을 걸 알면서도 항상 그가 위크하버와 만날 때마다 걱정했다.

“이반만 오지는 않을 텐데.”

“오시프 씨도 오라고 해. 기쁜 자리에는 사람이 많으면 좋지.”

“…….”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좀 전까지 오시프를 만나 나눈 얘기가 생생해서 차마 알았다고 얘기할 수가 없었다. 아나스타샤 당신을 죽이라고 사주하고 사지에 몰아넣은 사람이 바로 오시프란 말이다. 아나스타샤에게 말해줘야 하는데,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진실을 말하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와버렸다. 최소한 납치 사건 이후에는 말해줬어야 했다.

지금 말하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어. 겨우 만든 연도 끊어질 것이고, 앞으로 아나스타샤를 구경해도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그러면…… 비밀로 하는 게 최선인가. 조용히 묻으면 아나스타샤의 옆자리에서, 그의 입술이며 몸이며 탐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아나스타샤는 고민하는 유리를 내버려 두고 온실로 사라졌다. 온실 수영장에는 멋진 파티가 준비되고 있었다. 간단한 음식과 술뿐이었지만 시모나로티의 화려한 손놀림을 받아 세련된 식사 자리로 변신했다.

온실 지붕에 비가 튀었다. 다닥다닥……. 빗소리와 산뜻한 재즈 선율이 어우러져 온실을 메웠다. 유리는 이반에게 연락한 뒤에 온실에 들어섰다. 아이들은 수영장에 앉아 물장구를 쳤고 시모나로티와 고용인들은 초를 켜고 식기를 정렬했다. 하얀 철제 테이블에 검소한 만찬이 펼쳐졌다.

“유리! 연락했어?”

포크에 냅킨을 감던 아나스타샤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와인잔을 닦던 라이엇이 아나스타샤와 유리를 힐끔거렸다. 보나 마나 라포포르트 형제를 불렀겠지, 하는 눈빛이었다.

유리는 건성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라포포르트와 위크하버가 만나는 사사로운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나스타샤에게 사실을 알리느냐 마느냐, 유리는 고민에 빠져있었다. 그 속을 알 리 없는 아나스타샤는 유리에게 만든 음식을 입에 넣어주며 맛이 어떠냐 물었다.

곧 위크하버에서 도착했다. 비를 뚫고 와준 고마운 인연들을 라이엇과 다비드가 반겼다. 키가 큰 남자와 아담한 키에 긴 웨이브 머리를 한 여자가 나란히 들어왔다. 둘은 베이지색 정장을 입고 왔는데 부부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미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뮬리, 설리번. 오랜만이야.”

라이엇이 여자를 뮬리, 남자를 설리번이라 부르며 곧장 볼에 입을 맞췄다. 둘은 라이엇의 애정 표현을 덤덤히 받아주었다. 그들은 아나스타샤에게 안부를 전했다. 형식적인 인사였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아나스타샤.”

“뉴욕에 왔단 소식을 듣고 환영 파티를 열고 싶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뮬리와 설리번은 마치 한 몸처럼 말했다. 한 명이 운을 떼면, 다른 이가 마무리해주었다. 아나스타샤는 가볍게 웃으며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래도 잘 마무리됐으니 된 거 아니겠습니까. 이런 날씨에 와주셔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뭘요, 라이엇의 가족은 제 가족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설리번이 상냥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유리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찔리는 속을 달래느라 바빴다. 아나스타샤의 계획을 풍비박산 낸 작자의 혈육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래놓고 팔자 좋게 다 널 위해서 한 일이었다니. 범죄에 어찌 이유가 있겠는가. 유리는 영원히 함묵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위크하버의 남매와 시모나로티의 두 형제가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였다. 라포포르트의 형제들은 아직이었다. 아나스타샤가 잔을 기울이는 척 유리 쪽으로 몸을 붙이며 작게 속삭였다.

“이반 씨는 대체 언제 온대?”

“때가 되면 오겠지.”

“저러다 라이엇이 위크하버로 넘어가겠다 하면 어떡해?”

아나스타샤는 인상까지 찡그리며 라포트의 안위를 걱정했다. 유리는 와인을 물처럼 마셔댔다. 유리가 와인 한 병을 비웠을 무렵, 라포포르트의 형제가 도착했다. 오시프는 낮에 봤던 관광객 차림은 벗어던지고 넥타이까지 반듯하게 맨 모습이었다. 이반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라이엇을 찾았다.

라이엇은 이반을 보며 환히 웃었다.

“이반! 어서 와요.”

“오, 라이엇. 이런 귀여운 짓을 꾸미다니.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이반은 러시아어로 라이엇을 나무랐다. 목소리 끝이 파르르 떨려서 러시아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위크하버 남매도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오시프는 다비드와 라이엇, 위크하버 남매와 아나스타샤에게 간단히 인사하고는 아나스타샤 옆자리에 앉았다.

비에 젖은 페로몬이 독특하게 풍겼다. 싸한 냄새였다. 아나스타샤는 오시프를 힐끔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다리에 냅킨을 깐 오시프는 왼손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손등에 화상 흉터가 있었다. 못 보던 건데? 아나스타샤의 호기심이 흉터로 향했다.

“축하해요, 아나스타샤 씨. 죽음으로부터 해방됐군요.”

오시프가 축하했다. 이반은 라이엇의 옆자리, 그러니까 위크하버와 라이엇 사이에 앉았다. 일부러 그 자리를 비워뒀는데 자리 주인이 알맞게 찾아간 것이었다. 그들은 다 같이 잔을 들었다. 막 도착한 오시프가 건배사를 읊었다.

“아나스타샤 시모나로티의 영생을 위해.”

거창한 건배사에 여기저기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다비드가 가장 크게 웃었다. 유리는 속이 울렁거려 와인은 입에도 대지 못했다. 아나스타샤는 오시프의 건배사에 맞춰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유리를 살폈다. 막내 도련님은 무식하게 와인 한 병을 먹은 게 탈이 난 건지 안색이 파리했다.

“오, 유리. 술을 급히 마시니까 속이 안 좋지. 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와.”

아나스타샤가 다정하게 얘기하자 시선이 유리에게 쏠렸다. 라이엇과 위크하버 사이를 막은 이반도 불안한 눈으로 둘을 지켜봤다. 유리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중간에 휘청거려 아나스타샤의 부축을 받았고, 혼자 나가려던 유리는 아나스타샤와 함께 온실을 나와야 했다.

젠장!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는데. 유리는 벽을 짚으며 아나스타샤와 최대한 거리를 뒀다. 공주는 애쓰는 유리를 애잔하게 쳐다봤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유리가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 왤까. 내가 무슨 잘못을 했더라. 다른 알파를 만났나? 다른 알파와 유리를 비교했나? 아닌데. 대체 무슨 이유로 유리가 날 피하는 걸까?

순간 유리가 거짓말을 운운하며 물어봤던 때가 생각났다. 우르릉……. 천둥이 쳤다. 대낮인데도 한밤처럼 어두웠다. 복도는 작은 벽 등만 켜둬서 발아래만 겨우 구분할 수 있었다. 유리는 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더 걸을 수가 없었다.

“무슨 걱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리. 내게 죄를 지었다고 너무 자책하지 마.”

“…….”

“사람이라면 한 번쯤 실수할 수 있는 거지. 안 그래? 각자…… 사정이 있으니까.”

아나스타샤는 그때와 비슷한 말을 되풀이했다. 불행히도 유리에게는 큰 위로가 되지 않았다. 사정이라. 자신의 목숨을 갖고 놀았다는 것을 알아도 같은 말을 할까? 아니다. 유리는 피식 웃었다. 차가워진 손끝으로 술기운이 올라 뜨뜻해진 눈가를 문질렀다.

“……내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궁금해?”

“물론 궁금하지. 그렇지만 잘못을 고백할 때는 용기가 필요하잖아.”

“………”

“네가 뭘 잘못했는지 듣고 용서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지.”

유리는 창밖을 응시했다. 아나스타샤의 말에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자, 이제 괜찮아졌지? 가자. 오래 자리를 비우면 형이 걱정할 거야. 내 형이나, 네 형 모두.”

술은 천천히 마셔. 알았지? 아나스타샤가 타일렀다.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번쩍, 번개가 쳤다. 어두운 집안에 순간 빛이 가득 퍼졌다, 사라졌다. 곧이어 천둥이 몰아쳤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보며 고민했다.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했다. 열렬한 눈빛의 뜻을 알아차린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입술에 손가락을 올렸다.

“네가 뭘 고백하든 그걸 용서하는 건 내 몫이잖아. 유리, 나는 그렇게 용감한 사람이 아니야.”

평생 숨겨야 할까? 유리는 고개를 숙였다. 아직은 때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직은……. 유리는 때가 되면 공주에게 실토하고 싶었다. 아나스타샤의 미움을 받아도 된다. 거짓으로 그의 입술을 탐할 바에야 씁쓸한 심정으로 그를 멀리서 지켜보는 편이 낫다.

그들은 온실로 돌아왔다. 폭풍우가 내리는 날에도 온실은 해가 떠 있는 것처럼 환했다. 와인을 마시던 오시프가 유리를 보며 물었다.

“술은 깼어?”

유리는 무시하고 자리에 앉았다. 백귀 같은 시선이 유리를 따라왔다. 귀신과 기사 사이에 앉은 아나스타샤는 눈치 없이 오시프를 향해 웃으며 선상 파티에 오지 않겠냐고 물었다. 오시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까지 미국에 있을 것 같지 않아서 말이야.”

“아쉽네요. 이반 씨는요?”

“음? 나는 자주 오가니까. 아나스타샤 씨가 초대해준다면 가야죠. 좋은 일에 불러주는 것 아닙니까?”

이반이 호쾌하게 웃었다. 위크하버 남매도 아나스타샤의 선상 파티에 가겠다고 약속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에게는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그들에게 더 큰 크루즈를 쓸 빌릴 거라고 얘기했다. 고작 몇 주 뒤니까, 그때까지는 유리가 뉴욕에 있으리라 믿었다.

음식을 먹던 뮬리가 입을 닦고는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선상 파티 전에, 저택에서 환영회를 열까 싶은데 오시겠어요? 불꽃놀이도 할 생각이랍니다.”

“네, 폭약에 4만 달러나 썼지요.”

설리번이 거들었다. 개인이 주최하면서 폭약만 4만 달러가 쓰이는 여름 파티라니. 아나스타샤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불꽃놀이라니! 그런 성대한 환영회에 빠질 수 없죠.”

뮬리와 설리번이 웃었다. 뮬리는 라이엇을 보고 속삭였다.

“너도 너의 천사들을 데리고 와. 저택은 깨끗하게 치웠으니까. 바닥이며 벽지며 다 뜯어냈지. 외벽도 마찬가지야. 옛 풍경은 상상도 못 할걸.”

“……말은 고맙지만.”

라이엇은 주저했다. 다비드가 라이엇의 손을 꼭 잡아줬다.

“같이 가면 되지, 라이언.”

“……다비, 저는…….”

라이엇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귀가 덴 것처럼 붉어졌다. 아나스타샤는 술을 홀짝이며 다비드와 라이엇을 응시했다. 저 둘을 이어준 것이 아나스타샤가 이룬 최고의 업적이었다. 아나스타샤가 둘을 바라본 채로 볼만 유리 쪽에 붙였다.

“위크하버가 포레스트 저택까지 사들였거든. 포레스트와 관여된 곳이라면 다 파고들어서 찾아오더라고. 무슨 원한이 있는지…….”

“불꽃놀이를 보러 갈 거야?”

유리가 아나스타샤의 말을 잘랐다. 그제야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쳐다봤다. 근심 걱정이 사라진 미남의 얼굴은 한낮의 바다처럼 푸르렀다. 그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줬다.

“그럼, 가야지. 올해 여름은 정신없었는걸.”

“파트너가 필요할 텐데.”

“나랑 같이 가지 않을 거야?”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들의 밀회를 엿듣던 오시프는 고개를 반대로 돌리며 웃었다. 둘 사이가 어떻게 끝날지 너무나 기대되는 눈치였다.

유리는 “알았어.” 하고 작게 대답했다. 마음이 심란해도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장단에 맞춰 춤을 췄다.

시간은 유리가 생각을 정리할 틈도 주지 않고 무자비하게 흘렀다. 이제 말해도 되겠다 싶었을 때는 위크하버가 초대한 불꽃놀이 파티에 나가야 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와 같은 넥타이를 매고 다비드와 라이엇을 대신해 미카엘과 라파엘을 한 명씩 품에 안았다.

미카엘은 아나스타샤의 어깨에 턱을 대고 가브리엘을 안고 나오는 다비드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라파엘은 유리의 얼굴을 힐끔힐끔 올려보다 눈이 마주치면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셔츠가 아닌 하얀 티셔츠에 검은 슬랙스를 입은 다비드가 아나스타샤와 유리를 바라봤다. 아이를 한 명씩 안고 있는 모습이 한 가족 같았다.

“네 아이 같네.”

“형, 나는 애를 보살피고 싶은 거지, 키우고 싶지는 않아.”

아나스타샤가 꿈 깨라는 듯 대답했다. 안겨있던 미카엘이 고개를 바짝 들며 물었다.

“공주 삼촌은 나 싫어?”

“미카엘, 널 싫어하는 것과 키우는 건 별개야. 나는 네가 좋아하는 젤라토가 무슨 맛인지도 모른다고.”

아이와 아옹다옹하는 모습을 유리가 지켜봤다. 애랑 뭔 얘기를 하는 건지, 뇌 구조가 궁금한 남자였다. 유리는 그를 내버려 두고 먼저 리무진에 올라탔다. 유리가 자리에 앉자 라파엘이 일어나 다비드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곧이어 라이엇, 아나스타샤까지 차에 올랐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다리를 꼬고 앉으며 유리의 허벅지를 손으로 짚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손과 발, 사랑해 마다하지 않는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는 창밖을 응시했다.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위크하버의 저택은 예전 포레스트 가문이 100년 넘게 써오던 고성이었다. 도착했을 때는 해가 져서 고귀한 자태를 세세히 볼 수는 없었으나 성체 쪽으로 켜둔 조명 덕에 새로 칠한 벽과 지붕을 구경할 수 있었다. 나무에도 조명을 감고 신나는 노래가 흘러나와 파티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라이엇은 다비드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미카엘과 라파엘은 여전히 아나스타샤와 유리의 몫이었다. 현관 앞에는 설리번이 서 있었다. 그는 시모나로티 방문객을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다비드는 가브리엘을 품에 안은 채 라이엇을 달랬다. 쉬이, 괜찮아. 라이언.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긴장한 라이엇은 다비드의 보살핌 덕에 저택을 둘러볼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아이들을 데리고 정원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뮬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파티에 초대된 사람은 시모나로티, 위크하버와 긴밀한 사이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아나스타샤를 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아나스타샤가 미국에 있는 동안 공들인 양의 귀에 확인표를 걸어주길 바라는 마음인지 공주에게 지인을 추천했다.

이 정도면 재단이 아니라 학교를 세워도 되겠는데. 유리는 정원에 모인 사람의 인상만 보고 어느 곳에 종사하는지 예측했다. 웨이터가 그들에게 술을 권했다. 둘은 아이들을 내려놓고 술잔을 들었다. 곧 저택을 둘러본 라이엇이 다비드와 함께 돌아왔다. 아빠! 하고 외치는 두 천사가 다비드에게 달려갔다.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어깨를 툭, 쳤다. 술잔을 든 채 사람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있어서 유리를 쳐다보지는 않았어도 유리는 공주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았다. 여기서 벗어나자는 뜻이었다.

“이만, 실례.”

아나스타샤야 혼자 잘 빠져나오겠지. 유리는 먼저 모인 사람들을 뚫고 어둑어둑한 정원 한 곳으로 몸을 숨겼다.

“그냥 뒤로 물러나자고 한 건데, 이런 곳으로 도망치면 어떡해?”

뒤늦게 쫓아온 아나스타샤가 나무에 하늘이 가려지는 범위를 가늠하며 투덜거렸다. 나무에 감긴 조명이 주변을 은은히 밝혔다. 주변보다 어두워서 사람들에게 들킬 염려는 없었다. 도둑고양이처럼 숨어서 파티를 즐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리는 자신에게 물었다. 대답은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터져 나왔다. 몰라서 물어? 교제는 아니지만, 온기를 나누는 사이인데 폭죽이 터지는 순간에 뭘 하고 싶겠어. 유리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아나스타샤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유리는 피하지 않았다. 입술이 닿았다. 샴페인 향이 났다.

“네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좋아.”

본격적이었다. 내가 어디에 가 있을 줄 알고 좋다는 거야. 교제 빼고 다 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와 입을 맞추며 쓸데없는 걱정에 빠졌다. 번듯한 오메가랑 결혼해야 마음이 편하겠는데…… 누가 이 탕아를 평생 감당하고 살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입술을 잘게 쪼던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유리는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밖으로 틀었다.

“……나랑 밖에서 할 생각인가, 싶어서.”

“유리만 괜찮다면야 나는 상관없는데.”

상관없을 리가 없잖아. 유리는 놀라 아나스타샤를 밀쳤다.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준 건지, 진담인지 알 수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뒷걸음을 치며 웃었다. 농담이었는데 유리의 행동에 지난날을 되돌아봤다. 내가 그렇게 문란…… 했구나. 아나스타샤는 남은 샴페인을 마셨다.

“오, 유리.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싫으면 안 할 거야. 나 알잖아.”

“내가 좋다고 하면, 할 거고?”

아나스타샤는 빈 샴페인 잔을 들고 찡긋, 윙크했다. 맙소사. 유리는 얼굴을 문질렀다. 문란한 아나스타샤의 성생활은 알고 싶지 않았는데. 유리의 질색하는 모습에 아나스타샤는 키득키득 웃었다. 유리를 놀리는 게 최고의 유흥이었다.

나무에 가린 파티장이 소란스러웠다. 아이들의 기대에 찬 고함이 들렸다. 불꽃놀이가 시작되나 보다. 유리는 팔짱을 낀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팔뚝을 잡아당겼다.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끌어당기는 대로 몸을 틀었다. 아나스타샤와 시선이 마주쳤다.

퍼엉……. 폭죽이 터졌다. 하늘을 수 놓는 불꽃이 별처럼 아름다웠다. 아나스타샤는 불꽃이 아닌 유리의 눈동자를 보며 물었다. 아나스타샤의 커다란 눈망울에 번쩍이는 불꽃이 반사되어 보였다.

“아름답지 않아?”

“어.”

아름답네. 유리도 아나스타샤를 보고 대답했다. 그들은 서로의 눈에 비친 불꽃놀이를 감상했다. 현란한 빛을 내며 사라지는 불꽃이 꼭 사랑에 빠진 사람의 마음 같았다.

아나스타샤가 먼저 입술을 훔쳐봤다. 유리는 고개를 틀어 허락했다. 입술이 맞닿았다. 기다렸다는 듯 폭죽이 터졌다. 환호성과 폭죽 소리가 귀를 어지럽히고 밝은 불빛이 어둡던 정원을 낮처럼 밝혔다.

혀를 엮던 유리가 먼저 고개를 뺐다. 아나스타샤의 고개가 유리 쪽으로 가볍게 들어왔다. 눈을 감고 있던 아폴론이 태양 마차의 빛을 받으며 눈을 떴다. 푸른 눈동자 안에 지중해가 펼쳐졌다.

“할 말이 있어.”

유리는 지금이 적기임을 깨달았다. 사실, 조금 늦은 감이었지만, 늦을 때 중에서 가장 빠른 때였다. 아나스타샤의 기분도 좋아 보이고, 키스도 했고 폭죽도 터지지 않던가. 유리의 뜬금없는 고백에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기울였다.

“……범인은, 사실 나야.”

“응?”

“연쇄살인에 아나스타샤 당신을 연루시킨 거. 내가 한 짓이야.”

따지고 들면 오시프가 제멋대로 꾸민 일이었으나 이러나저러나 결국은 유리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귀찮게 형까지 끌어들여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유리의 경위를 잘라먹은 고백에 아나스타샤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유리,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말해야지.”

“말 그대로…….”

“대충 설명해서 네 탓이니 이제 안 보겠다는 건가?”

지중해의 푸른 빛이 까맣게 죽어버렸다. 아나스타샤는 인상을 찡그렸다. 퍼펑……. 폭죽이 또 터졌다. 붉은빛의 화약이 하늘을 수놓았다. 아나스타샤의 얼굴도 붉게 물들었다. 교제하는 건 어떻겠냐고 새침하게 물어볼 줄 알았는데. 기대가 컸다. 내 악당께서는 폭죽이 아니라 폭탄을 숨기고 있었다.

“……내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늦었어. 일이 이렇게 된 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나는 아나스타샤 당신과 다비드 시모나로티의 건강이 걱정돼서…… 아무튼, 내 탓이야.”

“네 탓이라고 묻고 끝낼 일이 아니야. 유리, 나는 몇 번이나 죽을뻔했어. 그 빌어먹을 소포를 받고 침대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갔다고. 하하! 이렇게 웃길 수가. 날 위험에 빠트린 것도 너고, 날 구해준 것도 너라니.”

아나스타샤가 숨을 내쉬었다. 끝이 파르르 떨렸다. 응어리진 분노와 경멸, 수치심이 앙다문 이 사이를 빠져나왔다. 겨우 진정한 아나스타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대로 설명해.”

유리는 뜸을 들였다.

“오시프는 내가 아나스타샤 당신을 좋아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어. 이 나이를 먹고도 네 꽁무니만 쫓아다니니 이참에 마음 접게 하고 싶었던 거지. 자기가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을 끝내면서.”

아나스타샤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기에 유리가 자백해도 괜찮다며 달래주지 못했다. 라포포르트가 자신을 우롱했다는 사실보다는 유리가 자신을 속였다는 것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다. 잘못을 고할 때도 용기가 필요했고, 잘못을 용서할 때도 용기가 필요했다.

불행히도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강한 사내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 해프닝으로 기억될 일이었으나 지금 같은 마음으로는 평생 유리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랬구나. 뭐, 그래. 지금이라도 얘기해줘서 고마워, 유리. 결론적으로 나도 형도 무사하니까, 된 거겠지.”

“미안해.”

유리는 덤덤히 받아들였다. 목숨이 걸린 일을 속였으니 분노는 당연했다. 애초에 사이좋게 교류할 생각을 한 것 자체가 잘못됐다. 나는 아나스타샤와 어울리지 않아. 유리의 시선이 발치로 떨어졌다.

“어쨌든 범인도 잡혔으니 더는 경호해줄 필요 없어. 지금이라도 좋으니 언제든 돌아가도 좋아.”

아나스타샤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상냥했다. 유리는 차마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다정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도 목소리에 담긴 말뜻은 살벌했다. 이제 필요 없으니까,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꺼져버려. 차라리 욕을 하고 멱살을 잡거나 오시프를 부르라며 패악질을 부렸더라면 조금 더 마음이 후련했을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이제 다시는 날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다.

“밀랍 인형은 백 개를 만들든 천 개를 만들든 알아서 해. 주기로 했으니 줘야지. 그건 변하지 않아.”

유리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아나스타샤를 바라봤다. 차디찬 눈빛이 유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떤 말도 아나스타샤의 분노를 풀어주지 못했다. 유리는 도로 고개를 떨구며 작게 주억거렸다. 앞으로 아나스타샤가 귀찮게 구는 일은 없으리라.

영원히.

“수고했어, 유리.”

“……잘 지내십시오.”

정산을 끝낸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두고 파티장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유리는 나무 그림자 뒤에 숨어 아나스타샤가 섰던 자리를 한참 쳐다봤다. 슈우웅……. 전과 다른, 거대한 폭죽이 하늘 위로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는 하늘을 쳐다봤다. 폭죽이 터지며 오색 빛이 하늘을 수 놓았다.

아나스타샤의 해방을 축하하는 멋진 축포였다.

* * *

마이애미는 후덥지근했다. 숨 막히는 폭염이 도착한 내내 계속됐다. 더위에도 약한 유리는 에어컨을 틀어놓고 몇 날 며칠을 집에 박혀있었다. 꼭 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집에 아무도 들이지 않았다. 식자재가 떨어질 즘에 마야가 음식을 문고리에 걸어줬다.

뉴욕에서 돌아온 유리 라포포르트는 사람을 만나지 않으며 상처받은 속을 돌봤다.

원래 아나스타샤와 아는 사이도 아니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훔쳐보는 입장이었고 아나스타샤는 유리 라포포르트의 존재도 알지 못했다. 이전 관계로 돌아가는 것뿐인데 무척 우울했다. 시모나로티의 의뢰를 받느라 밀린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도 꼼짝하기가 싫었다.

마이애미행 비행기에 올라탔을 때부터 유리의 상태를 어느 정도 파악한 마야가 일도 끝났으니 쉬라며 며칠 일정을 비워주지 않았더라면 일하다 분명 사고를 냈으리라. 에어컨이 종일 돌아가는 유리의 방은 선선하다 못해 추웠다. 유리는 두툼한 이불속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간간이 마야와 일리야에게서 오는 보고 문자를 확인하고 전화 받을 때를 제외하면 곰처럼 누워있었다.

미국에 와도 오시프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면, 그냥 러시아에서 지내는 게 낫지 않나. 유리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가족의 간섭이 싫어서 선택한 미국행이었다. 간섭 못 한 만큼 광적인 관심과 원치 않은 호의를 받아야 한다면 돌아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었다.

빌어먹을 오시프. 내가 자유롭게 사는 꼴을 눈 뜨고 못 보는 건가? 유리는 오시프를 욕하다가도 제 풀에 지쳐 한숨을 쉬었다. 형을 욕한다고 오시프의 만행을 묵인한 자기 선택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리는 이불을 박차고 나왔다. 쓸데없는 생각을 멈출 때가 됐다. 자책 다 했으면 할 일을 해야지. 유리는 5일 만에 기운을 차리고 회사에 출근했다.

막냇동생의 출근 소식을 들은 이반이 오시프보다 먼저 마이애미를 방문했다. 라포트 마이애미 지사에 들를 겸 왔다고 했지만 두 손 가득 유리가 좋아하는 과자와 음료를 들고 나타난 걸 봐선 유리를 만나려고 둘러댄 변명 같았다.

유리는 이반이 사 온 과자 봉지를 뒤적였다. 찬물을 벌컥벌컥 마신 이반이 동생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 보였다. 세상에 겉만 멀쩡한 괴짜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 이반은 동생에게 안부를 물었다.

“어때, 유리. 마이애미가 뉴욕보다 더 더운 것 같아.”

“어.”

이반의 나긋나긋한 말투에도 유리는 냉랭했다. 이반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았다. 더운 것도 질색인데 동생까지 피를 말리게 하니 땀이 수도꼭지 틀어놓은 것처럼 줄줄 흘렀다.

“이제, 좀 괜찮아?”

“안 괜찮을 게 뭐 있어. 휴가 끝났으니까 일해야지.”

과자를 뒤적이다 감자칩을 집은 유리는 소파에 풀썩 앉으며 봉지를 뜯었다. 짜고 고소한 냄새가 확 풍겼다. 유리는 감자칩을 와작와작 씹으며 이반을 응시했다. 뭐가 문젠데, 하는 눈빛에 이반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나스타샤한테 얘기했다며.”

“응. 했지.”

“대체 그런 미련한 짓은 왜 한 거야? 아나스타샤가 시모나로티한테 얘기할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다고.”

‘시모나로티’라고 한 걸 보니, 다비드뿐만 아니라 아버지인 인지오까지 염두에 둔 듯했다. 유리는 코웃음 쳤다.

“알면 뭐 어떻게 되나? 시모나로티가 라포포르트를 무너트릴 만큼 강한 집안도 아니잖아.”

“유라, 자칫 잘못했으면 국제 문제로 넘어갔을 거야. 러시아 조직이 미국에 들어와서 마약을 판 것도 모자라서 살인까지 저질렀다는 게 들통나면, 오시프는 국제 수배가 내려졌을 거라고.”

이반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어깨를 떨었다. 유리는 감자칩만 먹었다. 생각처럼 동생의 반응이 나오지 않자, 이반은 유리? 하고 그를 불렀다. 유리는 과자부스러기가 묻은 손가락을 털었다.

“고작 이 일로 오시프가 수배범이 된다면 라포포르트는 진작 망했겠지. 살인 사건은 경찰이랑도 한통속이었잖아.”

누가 그걸 모를 줄 알고. 유리가 쏘아붙이자 이반은 허허, 웃으며 널브러진 과자 봉지 중 아무거나 뜯어 먹었다. 와작와작, 과자 먹는 소리만 민망하게 들렸다.

“대체 얼마를 퍼부은 거야?”

“그걸 알면…… 내가 오시프였지.”

독백에 가까운 유리의 물음에 이반이 한탄했다. 이해할 수가 없어. 유리가 중얼거리자 이반이 화답했다. 이해할 수 있었으면 네가 미국까지 오는 일도 없었지. 감자칩을 다 먹은 유리는 봉지를 대충 구겨 테이블에 던졌다.

“나 괜찮나 보려고 온 건 아닐 테고.”

“어어, 맞아. 아나스타샤 때문에 왔지. 네가 궁금해할 것 같아서 말이야. 이번 일은 없던 일로 할 건가 봐. 라이엇한테도 별말 없던데. ……그런데 파티를 마구잡이로 다니더라고.”

“마약 하는 거 아니면 됐어.”

“대마초는 피우던데. 아무나 만나고…….”

이반의 말을 듣던 유리가 소파 테이블을 발로 찼다. 심통 난 얼굴로 이반에게 따졌다.

“그래서 어쩌라고! 원래 그런 인간이야! 아무 데나 가서 싸지르는 놈인데 왜 나한테 얘길 해? 내가 주인도 아닌데!”

“위험해 보여서 너한테 말하는 거야. 아나스타샤가 죽으면 너도 화날 거 아니야. 페레그린도 다시 불러내서 만났다고.”

유리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결국 아랫도리에 휘둘려 인생을 망치는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구나! 그 분노가 아나스타샤를 향한 분노인지, 라포포르트의 경고에도 아나스타샤를 만나는 페레그린을 향한 분노인지, 혹은 그의 곁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향한 분노인지는 알지 못했다.

“유라, 힘들면 형한테 얘기해도 돼.”

“고대로 오시프한테 전달할 거 아니야?”

유리는 재킷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배를 안 피우면 진정할 수가 없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빌어먹을. 범인만 잡히면 파티고 클럽이고 집에만 얌전히 박혀있겠다면서. 거짓말하다니!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가 앞을 가리자 화가 차츰 가라앉았다.

“예전이랑 같아. 아나스타샤를 해하려 하면, 손보는 거야. 그 이상으로 나서지 않아.”

이반은 허허, 웃었다. 이 대화는 희망이 없다고 느꼈는지 주제를 바꿨다. 그래봤자 아나스타샤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며칠 후면 선상 파티야. 나도 라이엇이 초대해줘서 초대장을 받았어. 오시프도 받았지. 아마, 너도 받았을 텐데.”

“몰라.”

“오시프가…… 곧 널 찾아올 거야.”

대화는 마른 빵처럼 뚝뚝 끊겼다. 유리는 이반의 발언에 이를 드러냈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분노에 찬 동생의 표정을 본 이반은 침을 삼켰다. 자신이 잘 설득해야 사랑스러운 동생이 오시프 앞에서 지랄발광하는 꼴을 막을 수 있었다.

“유라, 진정해. 형 앞에서 그러면 도와줄 것도 안 도와줄 거라고.”

“뭘 도와줘? 뉴욕에서 벌어진 일은 다 오시프 책임인데! 당연히 해결해야지!”

가족인데도, 가족인데도! 오시프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닿는 족족 혼돈으로 밀어 넣는데, 훼방만 안 놓으면 다행이다. 유리는 화를 참지 못하고 피우던 담배를 움켜쥐었다. 빨갛게 타던 담배는 유리의 손안에서 넝마가 되어버렸다.

“나도 자세한 건 몰라. 그냥, 일이 꼬였다고 해서 너한테 귀띔해주러 온 거야.”

“…….”

유리는 숨을 골랐다. 아나스타샤에게 화풀이 당한 것도 억울한데 가족까지 상대해야 하니 분노가 울컥울컥 솟았다. 유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반은 소파에 몸을 깊게 기댔다. 자기 일은 여기까지였다는 것마냥 이를 보이며 히죽, 웃었다. 거기다 유리가 캐묻기 전에 먼저 선을 그었다.

“나는, 오시프가 일을 꾸몄다는 것까지만 알아. 자세한 사정은 오시프만 안다고.”

오시프가 어떤 연쇄살인 사건을 훔쳐, 본인 좋을 대로 조작하고 이용한 사실은 가족 중에서도 유리만 알고 있는 듯했다. 괜히 눈덩이를 더 굴릴 필요는 없지. 사건의 전말은 최소한의 사람이 알아야 했다.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마야가 들어왔다. 그녀는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등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시프가 선착장에 와있습니다.”

“알았어.”

유리가 대답했다. 이반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위아래로 끄덕였다. 제발, 형 앞에서 성질 죽이고 뜯어낼 수 있는 건 뜯어내라는 뜻이었다.

이 순간까지 오시프에게 비위를 맞춰야 한다는 사실이 짜증 났다. 아마존에 숨어버리든가 해야지. 유리는 성큼성큼 사무실을 나서며 이반과 오시프, 모스크바에서 한가히 차를 마실 형제들을 욕했다.

한여름의 마이애미는 러시아와 견줄 바가 못 됐다. 선착장에 도착한 유리는 오시프를 금방 찾았다. 그는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왼팔에 난 흉터를 가리지 않아서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도 구분하기가 쉬웠다. 유리는 곧장 그에게 다가갔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왜 아직도 안 돌아갔냐고 물어볼 것을, 이반의 충고를 생각해 최대한 참았다. 오시프는 유리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아, 유리. 일이 생겨서 말이야.”

네가 일의 근원이잖아. 유리는 눈으로 질타했다. 오시프는 유리의 비난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음, 날도 좋은데 요트 타는 건 어때?”

급한 일일 텐데 말을 왜 돌리는 거야. 요건만 빨리 말하지. 유리는 팔짱을 끼며 불만을 표출했다. 오시프와 한가롭게 요트 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거기다 이반이 오시프가 온다고 경고하기 전에 아나스타샤 얘기를 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유리가 온몸으로 거절하자, 오시프는 별수 있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좋아. 여기도 충분히 경치가 좋으니 상관없겠어.”

“무슨 일인데.”

“진범 말이야. 누군지 찾았어.”

유리는 눈썹을 치켜떴다.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오시프는 선글라스를 벗어 주머니에 넣었다. 파란 눈은 쨍한 여름 볕을 받아 시퍼렇게 번쩍였다. 동그란 동공 안에 심연이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게 왜?”

“표적이 아나스타샤야.”

“…….”

유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근거로 또 아나스타샤를 들먹이는가, 믿어도 되는가? 아니, 진범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해? 그것까지 오시프가 꾸민 일일지 어떻게 알아? 의심은 끝이 없었다. 오시프는 태평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판을 어지럽혀서 화가 났나 봐. 원래 표적은 웰리번의 막내였는데. 왜, 최근에 발현한 열여섯 살 아이 말이야. 걔 말고도 둘 더 있었지. 쉬어 빠진 아나스타샤는 계획에 포함되지도 않았었는데…… 내 불찰이야.”

“그래서?”

“내 선에서 끝내려다 너희 둘이 마무리가 영 찜찜해서 말이야. 기회를 한 번 더 주려고.”

“또 아나스타샤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는 거야?”

유리가 화냈다. 오시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거절하면 내 선에서 처리한다. 아나스타샤가 아무리 미워도, ……시모나로티의 장자고 독자인데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잖아.”

그 정도 했으면 체념하고 본인 일에 전념할 줄 알았더니 일주일 넘게―5일이다.― 집에 처박혀 나오지 않았다니 마음이 미어졌다. 오시프는 느긋하게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동생을 바라봤다. 부들부들 떨더니 이내 홱 돌아섰다.

“어디 가려고?”

오시프가 물었다. 유리는 걸어가며 말했다.

“뉴욕.”

유리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았다. 아나스타샤와 어울리지 못할 거란 사실도. 그러나 마지막을 오시프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라면 자신을 거쳐야 한다. 죽음도 구원도 모두 내 손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아나스타샤를 만나야 해. 유리는 무작정 뉴욕행에 올랐다.

* * *

아나스타샤는 다비드와 통화하며 커튼을 들췄다. 뉴욕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위험도 사라졌으니 출국할 때까지 다비드의 저택에 머물러도 됐으나 아나스타샤는 형의 신혼을 더 망칠 수 없다며 호텔로 거처를 옮겼다.

다비드에게는 이름이 있는 아이가 셋, 태명만 있는 아이가 하나 있어 신혼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유리와 아옹다옹했던 다비드의 저택에서 마음 편히 지낼 자신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제집처럼 드나들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유리는 여태 만난 스토커 중에 가장 질 나쁜 상대였다. 전부 연극이었다니. 내 환심을 사려고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것도 모자라 끝날 때까지 비밀에 부치지 않았던가. 유리와 함께 지냈던 공간에 계속 머문다면 분노와 배신감이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언제든지 집으로 돌아와도 돼, 아냐. 무리할 필요 없어.]

“신경 써줘서 고마워, 형. 형은 내일 못 오지?”

[그래. 미안하게 됐다. 내가 네 곁에 있어 줘야 하는데.]

아나스타샤와 함께 선상 파티를 주최한 다비드는 LA에 계신 부모님의 호출로 어쩔 수 없이 출장길에 올랐다. 아나스타샤는 소파에 풀썩 앉았다. 마치 앞에 다비드가 있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며 얘기했다.

“괜찮아. 라이엇이 옆에 있을 텐데, 뭐. 천사들은?”

[이든이 돌보기로 했어. 차질이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해. 알았지?]

“알았어, 알았어. 무슨 일 생기면 꼭 연락할게. 믿을 사람은 형밖에 없다고.”

대륙 반대편으로 가버린 다비드에게 연락하는 것보다 라이엇이나 이든에게 부탁하는 편이 빠르고 간단한 걸 알면서도, 아나스타샤는 다비드의 당부와 걱정을 적절히 달랠 대답을 했다. 날 아직도 열네 살 어린애로 안다니까. 모자란 동생 취급에도 아나스타샤는 히죽 웃었다.

[이만 끊어야겠다. 잘 자렴, 공주.]

“응, 형도 조심히 가.”

할리우드 가서 사진 찍어오는 거 잊지 말고. 아나스타샤가 덧붙이자 다비드가 낮게 웃었다. 그는 작별 인사 없이 전화를 끊었다. 아나스타샤는 통화가 끊김과 동시에 소파에 널브러졌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도 아니고. 형한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아아! 이 사건의 전말을 털어놓을 수만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아나스타샤는 발까지 소파 위에 올린 채 한숨을 쉬었다. 정말 편할까. 다시 생각해봤다. 러시아인이 미국에서 살인을 저질렀다. 일반인도 아닌 러시아의 대들보를 자처하는 라포포르트의 차남이, 사람을 무려 다섯이나 죽이고 사람을 사주해 뉴욕 한복판에서 추격전을 벌였다. 가십거리로 소비될 사건이 아니다.

라포포르트는 일을 덮으려고 할 테고, 진실을 떠벌린 나를 제일 먼저 찾아오겠지. 그러면…… 그때는 유리가 날 죽이러 올지도 모른다. 납치범 얼굴을 주먹으로 으깬 것처럼, 이번에는 내 얼굴을……. 아나스타샤는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캄캄한 눈앞에 유리의 모습이 그려졌다.

바보 같으니……. 범인이 잡힐 때까지 모르는 척할 거였으면, 끝나고서도 모르는 척했어야지. 사람이 왜 그렇게 미련할까. 아나스타샤는 이제 진실을 말해준 유리를 탓했다. 말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반신욕을 하고 안 씻냐며 말을 걸었을 텐데.

“하긴, 그랬으면 평생 날 속여야 했겠지.”

아나스타샤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있으니 사념이 많아졌다. 선상 파티에서 내가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고 가빈 은행의 중국 진출은 차질 없이 진행될 것이며 아나스타샤 시모나로티가 계획한 사업이 투자 가치가 있음을 증명해야 했다.

“할 일이 많아, 아냐. 누워서 옛 남자 생각할 때가 아니라고.”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창가에 섰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내일 비 소식은 없다만 밤새 비가 내리니 내일 얼마나 더울지 가늠도 안 됐다. 내일은 아침 일찍 나가야겠군. 자유를 찾고 처음 여는 파티니 자꾸만 실수가 없나 확인하게 된다.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야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나스타샤의 고개가 빳빳하게 돌아갔다. 누구지? 누가 찾아왔지? 찾아올 사람이 있던가? 그는 문을 열러 나갈 생각보다는 밖의 인기척이 사라지길 기다렸다.

띵동. 불청객은 떠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나스타샤는 천천히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인내심이 없는지, 다시 한번 띵동, 하고 벨이 울렸다. 누가 찾아왔지? 아나스타샤는 주머니에 넣어둔 호신용 스프레이를 꺼내 들어 조심스레, 다가갔다.

띵. 동. 얼른 열라는 독촉이었다. 네 번이나! 애인한테 차였는지는 몰라도 방을 잘못 찾아온 게 분명하다. 이 방이 아니라고 얘기를 해줘야겠어. 아나스타샤는 도어체인이 걸린 것을 확인하고는 조심히 문을 열었다.

문틈 사이로 보석이 반짝였다. 아나스타샤는 눈을 꿈뻑였다. 투명한 다이아몬드 한 쌍이 아나스타샤를 노려봤다. 눈앞의 사내가 유리라고 인지하기도 전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무시무시한 조건 반사였다. 아나스타샤는 환한 웃음이 터지기 직전에 인상을 구겼다.

“…….”

네 번이나 초인종을 누르며 독촉했던 사람치고는 아무 말도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찬찬히 훑었다. 머리와 어깨는 비를 맞았는지 물방울이 맺혀있었고, 숨도 거칠었다. 시선은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아나스타샤와 아나스타샤 뒤로 보이는 호텔 방을 전전했다.

얼굴을 보니 화가 치밀었다. 분명 볼 일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좋게 말하면 알아듣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무력을 행사하겠다는 경고인가? 아나스타샤는 턱을 꼿꼿이 들었다.

“방을 잘못 찾은 것 같은데.”

네가 오늘 밤 볼 사람이 나는 아닐 테니까. 아나스타샤가 냉랭하게 말했다. 차가운 말투에 노려보기만 하던 유리가 문을 덥썩 붙잡았다.

“아니야. 당신을 찾아왔어.”

“난 볼일 없어.”

“안, 안돼. 할 말이 있어. 당신, ……내일, 나가지 마.”

다짜고짜 찾아온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나가지 말라니. 라포포르트도 선상 파티에 초대받았으니 내일 무슨 일이 있는지 유리도 잘 알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침묵했다. 양치기 소년이 할 조언치고는 주제넘었다. 유리는 두서없는 말을 정리하려는 듯 입술을 벙긋거렸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아나스타샤가 따라줄지 골똘히 생각했으나, 답을 찾지 못했다.

아나스타샤가 문을 잡아당겼다. 유리는 버텼다. 닫히면 아나스타샤를 말로 꼬드길 방법이 사라진다. 그렇다면 무력을 써야 하는데, 그랬다가는 멀어진 사이가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질 것이다.

“……내일은 안돼. 선상 파티에 나가는 건 자살 행위야.”

유리는 조급하게 속삭이며 복도를 돌아봤다. 어딘가에 도청 장치가 숨겨져 있으리라. 유리가 문을 잡아당겼다. 도어체인이 걸려 문이 덜컹거렸다.

“난 누굴 초대한 적이 없어. 라포포르트 씨. 당신 형과 라이엇을 생각해서 오늘 못 본 거로 할 테니까 그만 돌아가.”

“아나스타샤.”

“우리가 이름 부를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잖아.”

아나스타샤는 문을 붙잡고 놓지 않는 유리의 손가락을 검지로 꾹 눌러 밀어냈다. 억척같던 손가락이 스륵, 미끄러졌다. 유리의 눈빛이 떨렸다. 버림받은 개처럼 처량했다. 단단히 화가 난 아나스타샤는 애잔한 모습을 보고도 흔들리지 않았다.

“……다 설명할 테니까, 들어가서 얘기해.”

초조해진 유리는 다시 문을 잡았다. 아나스타샤는 내버려 뒀다. 어이가 없어 화도 나지 않았다. 양심고백 할 때도 얼버무리더니, 버릇인가? 들어오고 싶으면 날 설득시켜야지. 설득도 없이 대뜸 위험하니 안 된다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그것도 양치기 소년의 말을.

“라포포르트 씨. 장난은 일전에 끝낸 거 아니었나? 인형을 만들 자료가 부족해? 아직도 나한테 미련이 남은 건가?”

“……아나스타샤.”

“내일 봅시다. 라포포르트에겐 전부 초대장을 보냈으니까. 뭐, 볼 수 있으면 말이야.”

비웃음이었다. 아나스타샤의 말에 유리가 고개를 저었다.

“파티에서 당신을 보고 싶어서 찾아온 게 아니야. 급한 일이야.”

“뭐든 급하겠지. 그렇지만 내가 어떻게 널 안에 들이겠어. 혹시 모르잖아. 말 안 듣는다고 주먹으로 얼굴을 내리칠 수도 있는데. 할 말이 있으면 거기서 해.”

“여기는 위험해.”

방 안은 무조건 안전하다는 믿음이, 아나스타샤를 기분 나쁘게 했다. 그러나 이내 받아들였다. 살인 사건도 조작하는데 호텔 방 하나 감시하는 게 뭐 어려울까 싶었다. 괘씸했다. 여태 날 위험에 빠트려놓고 위험하다며 날 구하려 들어? 또 라포포르트가 꾸민 재미난 연극이겠지. 한 번은 속아주지만, 두 번은 아니었다.

“난 널 못 믿어. 널 들이느니 창부를 부르는 게 나아.”

유리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창부와 날 비교하며 비꼰다. 그가 뭘 요구하든, 뭐라 하든 받아들일 각오를 하고 찾아온 것이다. 아나스타샤의 방에 들어가야 했다. 알고 있는 정보를 차근차근 설명하려면 그뿐이었다.

“……내가 되어주지. 그…… 말이야.”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발끝을 보며 말했다. 그가 피식, 웃었다.

“하하, 내 하룻밤 상대가 되어줄 거야? 유리, 넌 알파와 제대로 해본 적도 없잖아.”

내가 왜 초짜와 놀아줘야 하는데? 비아냥대는 말과 달리, 아나스타샤는 도어체인을 풀었다. 문이 스르륵 열렸고, 문에 가려졌던 아나스타샤의 어깨가 보였다. 그는 눈웃음을 지었다. 라포포르트가 밉지만, 라포포르트의 알파가 스스로 들어오겠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유리가 발을 들였다. 아나스타샤가 두 걸음 물러나며 유리를 훑었다.

“처음이라고 다정하게 해주리란 기대는 하지 마. 나는 네가 미워.”

“…….”

“화풀이할 거야. 그런 건 매너가 아니지만, 어쩌겠어. 넌 내가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겪어도 모르는 척했잖아.”

“강간해도 좋아.”

유리는 방 안에 들어와 문고리를 잡았다.

“그래서 당신의 화가 풀린다면야.”

“하. 유리.”

아나스타샤는 턱을 문질렀다. 겁먹고 도망갈 줄 알았더니 태평하게 들어와서는 강간해도 좋다니. 비장한 모습이 더해지니 맥 빠졌다. 유리가 문을 닫았다. 둘이 된 방 안은 아나스타샤 혼자 머물렀을 때보다 고요했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정적 위를 뛰어다녔다.

유리는 손목을 주무르며 긴장을 풀려고 노력했다. 아나스타샤는 표적이 됐을 때보다 피곤해 보였다. 매 맞기 전에 경고하는 게 나으리라 생각한 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진범을 찾았어. 며칠 추적해 봤는데, 표적은 당신이야.”

“그만.”

아나스타샤가 검지를 세워 입에 붙였다.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에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한참 구부정하게 서 있던 아나스타샤가 팔을 풀어 유리의 볼을 쓸었다. 반달 웃음을 짓는 얼굴은 생기가 없었다.

“그건 화풀이하고 들을게.”

그는 유리의 어깨에 팔을 두르더니 곧장 침대로 이끌었다. 머리채를 잡거나 발길질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얌전했다. 유리는 침대에 던져졌다. 순간 그를 처음 본 시절부터 꿈꿨던 모든 것들이 영화 필름처럼 펼쳐졌다.

아나스타샤와 섹스를 하긴 하는군. 헛된 꿈은 아니었어. 유리는 천장을 쳐다봤다. 누운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체념한 유리의 눈이 커졌다.

빌어먹을! 누가 천장을 거울로 만들어!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나 아나스타샤가 명치를 손바닥으로 눌러 눕혔다.

유리는 도로 자신을 마주 보게 됐다. 아나스타샤 말고 눈 둘 곳이 있어서 다행인가. 유리는 거울에 비치는 아나스타샤의 뒤태를 보며 생각했다. 아나스타샤는 매끄러운 손놀림으로 유리의 옷을 벗겨냈다. 닳고 닳은 그에게 셔츠 단추나 벨트는 장애물도 아니었다. 알파도 아나스타샤도 처음인 유리만 시트를 꽉 붙잡고 닥칠 고통을 가늠할 뿐이었다.

아나스타샤가 셔츠를 젖혔다. 운동과 훈련으로 다져진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몸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손톱을 세워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아귀에 부드러운 살덩이가 가득 잡혔다.

“윽.”

유리가 신음했다. 아나스타샤는 불편한 얼굴로 천장만 쳐다보는 유리를 바라봤다. 목적이야 뻔했다. 적당한 변명을 대며 날 위하는 척, 자길 희생하는 척. 아쉬운 곳까지 긁어댈 생각이겠지. 자존심도 버리고 누울 정도면 섹스를 못 하고 헤어진 게 무척 아쉬웠나 보지. 아나스타샤는 자기를 좋다고 덤비는 사람을 피하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게, 자신을 죽음으로 밀어놓고도 시치미 뗀 사람이라 해도 말이다.

“상냥하게 해주리란 생각은 접어. 유리. 나는 무척 화가 났거든.”

바지와 속옷까지 벗겨낸 아나스타샤가 경고했다. 유리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단단해진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머리 색과 같은 체모와 늘어진 성기를 보니 삐뚤게 자랐던 분노가 꺾였다. 뒤만 만져줘도 질질 쌌었지. 지금이라도 유리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용서의 키스를 퍼부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엎드려.”

그러나 유리는 벌을 잘 받는 아이였다. 아나스타샤의 기분을 헤아릴 겨를이 없었다. 귀여운 도련님은 머뭇거리면서도 뒤를 돌아 무릎을 세우고 엎드렸다. 하얀 궁둥이가 눈앞에 나타났다. 상냥한 아나스타샤였으면 오럴부터 해서 뒤까지 녹진하게 풀어줬을 테지만, 화가 난 아나스타샤는 그만큼 너그럽지 못했다.

아나스타샤는 젤을 꺼내 유리의 엉덩이에 대고 쥐어짰다. 투명한 분홍빛의 젤이 엉덩이골을 타고 흘렀다. 허벅지와 시트까지 젤로 엉망이 됐다. 귀여운 꼴을 보여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그는 볼기를 벌려 주름을 확인했다. 앙다문 주름은 아나스타샤가 뿌린 젤로 축축하게 젖었다. 이대로 처박으면 잘리겠지. 그는 자신의 안위를 생각해 뒤를 늘려주기로 했다. 이래서는 화풀이도 아니고 강간도 아니지 않은가. 아나스타샤는 픽, 실소를 터트리며 중지를 무자비하게 쑤셔 넣었다.

“헉…….”

아나스타샤에게 롤 플레이 이상 이하도 아닌 ‘강간’은 유리에게 충격을 가져다줬다. 거울을 마주 보지 않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개처럼 엎드려서 당하는 것으로 이어질 줄은……. 거울을 피하려면 이 자세뿐이라는 건 알았으나, 막상 닥치니 눈가가 시큰거릴 정도로 충격이었다. 아랫구멍 찢어지는 거야 어찌 됐든 좋으니 빨리 끝냈으면 좋겠다. 유리는 이물감을 참으며 시트를 움켜쥐었다.

“알파에게 안기려면 뒤는 알아서 풀었어야지.”

응응, 하고 울기를 기대했는데 유리는 끙끙 앓는 소리도 내지 않았다. 심술이 난 아나스타샤는 검지를 넣어 두 손가락 끝으로 전립선을 찔렀다.

“읏!”

긴장한 허리가 펄쩍 튀었다. 시트를 붙잡고 버티던 유리는 황급히 입을 가렸다. 아나스타샤의 눈이 가늘어졌다. 억지로 당하니까, 느끼는 모습은 보여주기 싫다는 거야? 그렇게 둘 리가 있나. 아나스타샤가 연거푸 유리의 약점을 압박했다.

“아윽. 윽…… 흐윽. 아앗…….”

테이블처럼 꼿꼿했던 허리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쪽 팔로 몸을 지탱하기 힘들었는지 어깨가 시트에 닿았고 양손은 입가에 가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손가락 개수를 늘리면서 손가락 마디를 확실하게 구부렸다.

“윽…… 아읏, 읍… 흑, 아! 으윽!”

엉덩이가 경련했다. 딱딱하게 발기한 성기에서 정액이 뚝뚝 흘렀다. 아나스타샤가 쉬는 손으로 유리의 엉덩이를 호되게 쳤다. 몸이 움츠러들었고 주름은 손가락을 아프게 조였다.

“이거 봐. 변태 같으니. 나한테 강간당하는 게 좋아?”

아나스타샤가 즐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유리의 발기한 성기를 가볍게 만져줬다. 긴장해서 찔끔찔끔 지리는 모습이 안타까워 거들어줄 생각이었다. 유리의 고개가 아주 살짝 뒤로 돌았다. 돌아간 각도만큼 소심한 항의였다.

“입이 달렸으면 말을 해.”

“……아니야.”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유리, 너만 그런 건 아니거든.”

아나스타샤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유리가 신음을 내지를 때부터 아랫도리가 터지기 직전이었으니까. 성기를 쥔 손이 귀두 부분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으아……. 유리의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아나스타샤는 삽입하듯 손가락에 힘을 줘 내부를 압박했다. 유리는 얼마 못 버티고 아나스타샤의 손에 사정했다.

“유리는 날 너무 좋아하는구나. 강간당해도 이렇게…… 쌀만큼.”

“아니야, 그건 그냥…….”

생리현상이야. 유리가 변명했다. 아나스타샤는 설전을 펼치는 것보다 그의 뒷구멍에 심혈을 기울였다. 금지옥엽 자란 막내 도련님은 뒤로 알파를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고, 아나스타샤는 헐거운 쪽을 좋아했다. 뒤를 넓히는 아나스타샤의 손길에서 조바심이 느껴졌다. 한 번의 사정으로 보가 터진 유리는 쉽게 활기를 찾았다.

진짜 변태가 된 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나스타샤한테 물든 거야……! 유리는 다시 뻣뻣해진 성기를 죽일 생각도 못 하고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기에 바빴다.

“읏…… 으읏. 응…….”

“젠장, 유리. 보채지 말란 말이야.”

말과 달리 아나스타샤는 내벽을 풀어주던 손가락을 빼냈다. 뒤를 풀어주다 바지에 쌀 지경이었다. 촉박한 심정을 대변하듯, 아나스타샤의 숨이 가빠졌다. 그는 긴박한 와중에도 차분히 바지를 내려 성기를 꺼냈다. 튀어나온 성기는 들어갈 자리를 찾듯 묽은 애액을 흘렸다,

이대로 삽입하면 어떤 참사가 벌어질지 아나스타샤의 눈에 명화처럼 선명히 그려졌다. 그런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엉덩이를 벌리고 그사이에 성기를 문질렀다. 허벅지 사이에, 사타구니에 문댔던 것이 뒷구멍을 벌리고 들어올 것처럼 껄떡였다.

“아파도 참아, 알겠지?”

아나스타샤가 부드럽게 달랬다. 뭘 참아? 유리는 묻고 싶었으나 좁은 입구를 파고드는 성기에 숨을 삼켰다. 성기는 이물감에 비해 강렬한 쾌감을 줬던 손가락에 비교할 것이 못 됐다. 밑이 둘로 갈라지는 것 같았다. 이걸 왜 좋다고 하는데? 완벽한 벌이었다. 유리는 이마를 시트에 기대며 긴장을 최대한 풀었다. 코가 찌그러져 호흡이 어려웠다.

아나스타샤도 밑이 끊기는 고통을 인내해야 했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는 성기를 빼내지 않고 유리의 등을 쓸어주며 긴장을 풀어줬다. 파들파들 떨리던 허리는 완전히 무너져, 유리는 엉덩이만 들어 올린 채로 아나스타샤를 받아냈다.

“아파라……. 처음부터 솔직하게 굴었으면 좋았잖아. 그랬으면, 이런 고통은 몰랐을 텐데.”

아나스타샤의 속삭임에 유리는 눈을 감았다. 고였던 눈물이 눈꺼풀을 타고 흘러 곧장 시트에 흡수됐다. 아나스타샤는 성기를 절반 정도 밀어 넣은 뒤에 유리의 위로 몸을 수그렸다. 코앞에 살짝 부푼 유리의 알파선이 보였다. 아나스타샤가 그 위에 키스했다. 묵직한 그의 페로몬 향이 강렬하게 풍겼다.

“으읏…….”

“인정하기 싫어도 우리는 짐승이지. 서로의 체취에 흥분하잖아. 유리. 너도 이젠 알겠지.”

흥분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속삭이며,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기다려줬다. 얼마를 기다려줘도 유리가 익숙해질 크기는 아니었기에, 자신의 페로몬에 반응하길 바랐다.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성기를 문질렀다. 아나스타샤의 복부에 유리의 등이 닿았다.

공기 중에 퍼졌던 아나스타샤의 페로몬이 바로 뒤에서 풍겼다. 향수를 카펫에 쏟은 것만큼 맹렬한 향이었다. 이게 벌이야? 유리는 생각했다. 알파가 페로몬으로 알파를 유혹할 수 있다고 생각해?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의도를 비웃었으나, 의도대로 흘러갔다.

어지럽던 향은 이제 달콤한 과실처럼 느껴졌다. 성기를 애무하는 손과 안을 채우는 존재감과 아나스타샤임을 알려주는 페로몬이 어울려 유리를 흥분케 했다. 안을 채운 성기가 움직였다. 아나스타샤의 골반이 아주 조금 흔들린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직장이 빠질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윽…… 아, 아파.”

유리는 자신을 위해 말했다. 고작 들썩거린 것뿐인데도 꼬리를 붙잡힌 것처럼 몸이 펄쩍거렸다. 저런 게 작정하고 움직이면 뒤를 영영 못 쓸 것이다. 더는 고통을 감당하기 싫었다.

“알았어. 알았어, 아프게 안 할게.”

강간이라던, 벌이라 하던 그는 억지로 몸을 열고 들어온 것을 끝으로 화가 풀린 건지 어깨와 목덜미를 애무하며 유리의 흥을 돋우는 데에 집중했다. 부푼 알파선을 혀로 자극할 때마다 유리는 신음했다. 알파선은 급소이자 성감대였다.

유리의 몸이 이완됐다. 중력을 거스르지 못하고 안으로 서서히 밀려 들어오던 성기는 어느새 뿌리까지 담겼다. 유리. 아나스타샤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정신없이 페로몬과 성기를 받아내던 유리가 뒤를 돌아봤다.

푸른 눈과 눈이 마주쳤다. 아나스타샤는 키스하려는 듯 몸을 앞으로 수그렸다. 동시에 안을 채운 성기가 움직였다.

“으윽. 으악. 아. 앗……!”

유리는 아나스타샤와 키스했다. 했는데, 입술을 대는 것도 버거웠다. 눈물이 고였다. 벌어진 입에서는 유리 자신도 생전 처음 듣는 높낮이의 목소리가…… 신음이 튀어나왔다. 아나스타샤는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유리를 괴롭혔다. 성기가 배 안에 푹푹, 꽂혔다.

“아파, 아냐, 아냐……! 그, 그만. 안 돼!”

“알았어, 유리. 이것만, 이것만 끝내고. 뒤는 괜찮아. 피 안 났어.”

피가 문제가 아니잖아! 앞으로 도망가던 유리가 매섭게 공주를 노려봤다. 아나스타샤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고는 혀로 핥아댔다. 아프다니까. 싫다니까. 이상하다고! 유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아나스타샤가 웃으며 눈물을 핥아먹었다.

“왜 울어. 아주 잘하고 있는데. 우리 합이 괜찮은 것 같지 않아?”

아나스타샤는 들뜬 목소리로 유리를 달랬다. 유리의 귀에는 음담패설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기에 공주는 자신이 짓누른 악당의 서슬 퍼런 눈빛을 받아야 했다. 안에다 싸면 죽일 눈이잖아. 아나스타샤는 활기 넘치는 눈빛에 흥분했다. 날 죽음으로 몰아넣은 집안의 사람이지만, 용서해줄 만큼 좋았다.

맡으면 맡을수록 묵직해지는 페로몬도, 더 하면 죽여버리겠다는 듯이 노려보는 눈빛도, 유연하게 날 받아먹는 아랫구멍까지. 어디 하나 빼놓을 수가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끌어안고 허리 짓에 집중했다. 악……! 유리가 울었다. 뭐가 좋은 건지, 아픈지도 모르고 목 놓아 울었다. 아나스타샤의 강렬한 페로몬만 느껴졌다.

“유리, 정말 최고야.”

“흑, 흐윽. 싫, 싫어……!”

유리는 마지막까지 발악했다. 아나스타샤에게 잠식당한다. 유리는 그의 입술을 피하며 몸을 틀었다. 그럴수록 안을 휘젓는 성기는 매섭게 직장을 찔러댔다. 거북한 압박감은 쾌감과 공포를 동시에 몰고 왔다. 유리, 유리, 하고 유리를 부르는 목소리 사이사이로 빠르게 살끼리 치대는 소리가 들렸다. 하반신이 뜨거웠다. 유리는 자신을 붙잡은 아나스타샤의 팔뚝을 쥐어뜯었다.

“하아…….”

아나스타샤가 긴 숨을 뱉으며 사정했다. 둘을 옥죄던 긴장감이 칼로 잘라낸 듯 끊겼다. 아나스타샤는 허리를 세우고 앉았다. 유리는 페로몬에 절여져 몸을 가누지 못했다.

“유리.”

“…….”

“유리이?”

몇 번을 불러도 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힘겹게 침만 삼켰다. 이게, 이게…… 뭐야. 눈만 꿈뻑거리며 폭풍 같던 행위의 여운을 흘려보냈다. 아나스타샤는 여전히 성기를 꽂은 채였다. 살덩이가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유리가 뒤를 힐끔 쳐다봤다. 침대를 짚은 아나스타샤가 귀엽게 웃었다.

“……했잖아.”

“한 번으로 될 리가.”

화풀이는 한참 전에 끝났다. 유리는 느낄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입을 맞췄고, 유리는 눈을 감았다. 숨에서 아나스타샤 냄새가 났다. 침 삼키는 일도 곤욕이었다. 조금 더 쉬고 싶은데 빌어먹을 생리현상 때문에 잠이 깨버린 참이었다. 잠이 깬 것과 일어나는 건 별개였다. 자가 진단을 내려보면, 오늘 하루는 꼬박 아나스타샤의 페로몬을 빼내는 일에 집중해야 했다.

옆자리는 한참 전에 비었다. 씻는 소리와 옷 고르는 소리가 유리 귓가에 들렸다. 이제 일어나서 성가신 공주님이 못 나가게 말려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몸이 천근만근이다. 오메가와 하던 것에서 알파와 하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인데 몸에 무리가 갔다. 이런 폭풍에 길이 들면 오메가의 페로몬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겠군. 왜 알파만 찾게 되는지 티끌만큼 이해가 갔다.

시계 차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는 힘겹게 눈을 떴다. 깔끔하게 정장을 입은 아나스타샤가 침대를 등지고 서 있었다. 이러다가는 가지 말라는 말도 못 하고 보내주게 생겼잖아. 유리는 미적댄 시간을 대변하듯 벌떡 일어났다. 밤샌 노동으로 생긴 근육통에 인상이 절로 찡그려졌다.

인기척을 느낀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돌아봤다. 머리는 정돈하기 전인지 앞머리가 눈썹을 가렸다. 어제 화풀이를 해댄 사내가 오늘은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에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줬다. 유리는 바닥에 떨어진 재킷을 주워 주머니를 뒤졌다. 안에는 휴대전화와 사탕이 하나 있었다.

“가면 안 돼. 놈들은 조직이야. 알파가 미워서 죽이는 게 아니라고. 아나스타샤 당신의 정자며 페로몬이며 다 뜯어내서 팔 거란 말이야.”

유리는 사탕을 까며 경고했다. 아나스타샤는 허리에 손을 올리더니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또 그 소리야? 유리, 너도 알 텐데. 네가 제일 위험한 거.”

“우리가 또 그런 짓을 꾸몄다면 당신을 찾아왔겠어? 파티가 걱정이라면 라이엇한테 부탁해도 되잖아.”

“아니지. 유리, 파티에는 내가 있어야 해. 아나스타샤 시모나로티가 또 겁먹고 도망쳤다는 말이 돌아선 안 된다고.”

“지금 소문이 문제야? 당신 목숨이 걸린 일이야.”

유리가 따졌다. 그는 나체로 성큼성큼 다가와 아나스타샤 앞에 섰다. 밤새 괴롭힌 당한 하얗고 탄탄한 몸에 손자국이나 울혈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깨끗한 몸을 훑었다.

“이건 신뢰와 자존심의 문제지. 유리 라포포르트. 내가 널 얼마나 믿었는데. 날 처음부터 속여놓고 다시 찾아와서 자길 믿으라니. 어느 마을 사람이 양치기 소년을 믿겠어?”

다정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유리를 나무랐다. 그는 양손으로 유리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사탕을 우물거리던 유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 일은 어제…… 하기야 하룻밤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을 리가 없었다. 이자가 원금을 넘었을 것이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당신을 여기서 기절시킬 수도 있어.”

유리가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눈이 마주친 아나스타샤는 웃을 뿐이었다. 그의 시선이 눈에 닿았다, 입술에 닿기를 반복했다. 유리는 한 걸음 내디뎌 거리를 좁혔다. 입술을 바라보던 아나스타샤의 시선이 완전히 밑으로 떨어졌다.

“그러면 평생 용서 안 할 거지?”

입 안에서 사탕을 굴렸다. 이로 부수면 안에 든 시럽이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유리는 고개를 틀었다. 아나스타샤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맞춰왔다. 자신이 밤새 입혀둔 페로몬과 유리의 냄새, 입안에 풍기는 딸기 맛 사탕의 향기에 저절로 기분이 들떴다. 나가기 전에 한두 번 정도 더 해도 될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진득하게 입을 맞췄다. 혀로 입안을 헤집고 입술을 빨아당겼다. 맨 등과 허리를 팔과 손으로 쓰다듬었다. 유리도 아나스타샤의 머리를 양손으로 붙잡고 다시는 키스 못 할 사이처럼 그의 타액과 숨을 모조리 삼켰다.

유리 입에 있던 사탕은 어느새 아나스타샤의 입으로 옮겨갔다. 사탕을 받아먹은 아나스타샤는 웃음을 터트렸다. 얇은 설탕 막이 안에 든 시럽을 겨우 막고 있었다. 수면제가 아닐까. 아나스타샤는 어금니 사이에 사탕을 놓고 잠시 고민했다. 와작, 하고 사탕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유리는 다문 아나스타샤의 입술에 물방울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춘 뒤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수면제든 최음제든 될 대로 되라지. 아나스타샤는 사탕을 씹어 먹은 뒤 유리의 어깨와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그의 체취를 깊게 들이마셨다. 묵직한 유리의 향 위로 톡 쏘는 자신의 냄새가 났다.

“……절대 당신 경호원에게서 떨어지지 마.”

유리가 고개를 들어 충고했다. 아나스타샤는 그의 코와 입술에 차례대로 입을 맞췄다.

“그 정도는 들어줄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가지 마. 희생자 다섯 중에 셋은 다른 놈이 한 짓이야.”

“유리. 조른다고 다 이뤄지는 건 아니야.”

아나스타샤는 끝까지 잡고 늘어지는 유리의 눈가를 손으로 덮어버렸다. 그렇지만, 하고 입을 떼던 유리가 조용해졌다.

“그럴싸한 거짓말을 준비했네. 나를 노리는 거래소가 있나? 서른이 되기 전에 씨를 구하고 날 죽여서 희소가치로 포장할 건가 보지?”

“맞아.”

유리가 대답했다. 아나스타샤는 눈썹을 찡그리고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걸 농담으로 받아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웃거나 화내지 않고 유리의 볼에 입을 맞추고는 얼굴을 덮었던 손을 치웠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날 막을 게 아니라 날 노리는 사람을 처리했어야지. 너는 라포포르트잖아.”

사랑을 속삭이는 듯한 간지럽고 보드라운 목소리였다. 유리는 칼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벌써 급습을 계획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나는 아나스타샤를 살리고 싶어서 찾아온 게 맞나? 회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나스타샤가 눈꺼풀 위에 키스했다.

“그래도 걱정된다면, 내 애인이 되는 거야. 널 파티에 데려가면 날 노리는 작자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겠지.”

교활한 악마가 속삭였다. 아나스타샤는 황금 물방울이라도 삼킨 건지 헛소리를 그럴듯하게 뱉는 기술이 있었다. 유리는 구슬림에 쉽게 넘어갈 만큼 줏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난 당신을 장난으로 대할 생각 없어.”

“장난이라니, 유리. 네가 여태 날 속인 건 장난이 아니었어?”

아나스타샤가 멀어졌다. 유리와 화해하고 위험도 피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소지품을 챙겼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유리가 나체로 그 뒤를 새끼 오리처럼 쫓아다녔다. 현관에 선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돌아봤다. 부리부리한 회색 눈이 가지 말라 애원하고 있었다.

“안 보이는 곳에서 날 지켜. 인형이 완성될 즘에 다시 찾아와.”

하룻밤을 같이 지냈다고 배신감과 분노가 사라지는 것이 가능한가. 적어도 아나스타샤는 가능했다. 그는 유리에게 손 키스를 날리며 문을 열고 나갔다. 호텔 방에 홀로 남은 유리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귀가 붉었다.

* * *

아나스타샤의 선상 파티는 예정대로 진행됐다. 뉴욕에서 가장 큰 크루즈에서 라이엇과 아나스타샤가 손님을 맞이했다. 초대받은 라포포르트 중 얼굴을 비친 것은 이반뿐이었다.

유리는 육지에 남아 아나스타샤의 위치를 모니터로 감시했다. 드론을 띄우는 건 케이크를 먹는 것만큼 쉬웠다. 도청기는 기절해버려서 달지 못했으나 위치추적기는 잊지 않고 먹였다. 진범은 오시프가 맡는다고 했지만, 걱정됐다. 긴장감에 애먼 입술을 뜯고 있자, 마야가 탄산음료를 내밀었다. 유리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보스, 뭐라도 드셔야죠. 힘에 부치잖아요?”

“오시프는?”

유리가 물었다. 마야는 탄산음료를 흔들 뿐이었다. 유리는 음료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 그제야 마야가 말했다.

“아래층에 계십니다.”

“벌써 끝내고 온 거야?”

아무리 오시프라 한들 금방 끝날 일은 아닐 텐데. 유리는 음료를 마시다 말고 일어나 1층으로 내려갔다. 오시프는 소파에 앉아 혼자 장기를 두고 있었다. 납작한 말을 손에 쥐고 놓을 자리를 고민하던 오시프가 유리를 힐끔 쳐다보더니 웃어줬다.

“왜 벌써 왔어?”

유리는 미소에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정오가 넘어서 잔당을 처리하라고 말을 꺼냈는데, 벌써 피라미까지 제거하고 돌아왔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유리의 타박에 오시프는 장기짝을 내려놓고 어깨를 으쓱였다.

“끝났으니까 왔지.”

“확실히 정리한 거 맞아?”

“아마도 그럴걸.”

“……아마도?”

애매한 대답은 ‘아니’와 같았다. 유리는 오시프 옆에 서서 그를 내려다봤다. 앉은 채 동생을 올려다보는 오시프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기만 했다. 본인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아나스타샤를 죽일 생각이야?”

“그럴 리가. 내가 뿌린 씨니까 내가 거둬야지. 네가 말한 일은 깨끗하게 정리했어. 아마도.”

“제대로 얘기해. 처리했다는 거야, 안 했다는 거야?”

“날 의심하는 거야?”

오시프가 물었다. 유리는 대답을 망설였다. 동생의 의심에 마음이 상한 오시프는 소파를 벗어나 창가 앞에 섰다. 유리가 뒤를 쫓았다.

“애매하게 얘기하잖아. 아마도가 왜 붙는 거야. 나는 간절해. 아나스타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내…… 자존심이 상하니까.”

한층 화가 사그라든 어투로 유리가 변명했다. 오시프는 가만히 동생의 변명을 들어줬다. 노을이 져버리자 까맣게 죽은 바다가 창가를 채웠다. 어두운 바깥만큼 어두운 눈 색을 빛내는 오시프는 창에 비친 유리의 모습을 보며 얘기했다.

“네가 말한 대로 했어. 아나스타샤를 납치하려는 진범을 잡으랬잖아.”

유리는 오시프의 말을 곱씹었다. 정말 뜻대로 해줬을 리가 없다. 오시프는 아나스타샤를 내가 죽일 리 없다고 말하면서도 죽기를 바랐다.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아나스타샤는 죽음의 문턱을 여러 번 다녀와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설마. 유리는 오시프를 바라봤다. 그의 형이 뒤를 돌아봤다. 아나스타샤와 같은 까만 머리에 파란 눈인데도 북해의 시린 바닷물처럼 차갑기만 했다.

“납치 조는 처리했어.”

다른 놈들은 살아있다는 뜻이다. 유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오시프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사건을 덮어줬으면 조용히 물밑에서 움직이면 될 텐데. 보란 듯이 아나스타샤를 노리다니. 바보들이 따로 없어.”

“다른 놈들은 살아있어?”

“네가 거기까지는 부탁 안 했잖아.”

유리가 묻자, 오시프가 대답했다. 유리는 주먹을 쥐었다.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나스타샤를 납치하려는 진범이 어떻게 하면 납치 조로 국한된단 말인가? 유리가 말한 ‘진범’은 관련자들 전부였다.

“나한테 부탁할 때는 원하는 걸 정확히 얘기해야 한다고 말했잖니.”

오시프는 불을 키우는 훌륭한 기름이었다. 유리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2층에서 유리 대신 모니터를 보던 레이즈빗이 우당탕, 소란스럽게 내려오더니 유리를 불렀다. 유리의 고개가 돌아갔다. 설마, 불안감이 급습했다.

“보스. 아, 아나스타샤가 바다 위에 있어요. 아, 아니지. 지금도 바다 위지. 크루즈를 떠났어요!”

횡설수설한 보고에도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진범 손에 넘어갔다고 이해했다. 오시프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 숨을 들이켜며 놀랐다. 유리는 오시프의 멱살을 쥐었다. 창가로 밀린 오시프는 동생에게 멱살을 내주고는 눈을 꿈뻑대며 쳐다보기만 했다.

“아나스타샤가 잘못되면 가만 안 두겠어!”

내지른 뒤에야, 이성이 돌아왔다. 유리는 잡은 멱살을 풀었다. 오시프는 별말 없이 구겨진 재킷을 폈다. 명령을 기다리는 레이즈빗은 마야 뒤로 숨을지, 말을 걸지 갈팡질팡했다. 유리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디로 가는지 추적해. 도착지가 어디인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해.”

“바, 바로 구출하는 게 아닌가요?”

레이즈빗이 물었다. 유리는 오시프를 힐끔거렸다. 온화하고 느긋한 표정은 그대로였으나, 말을 걸 분위기는 아니었다. 잘못을 아는 유리는 별말 없이 턱짓했다. 레이즈빗과 마야가 아나스타샤를 추적하러 올라갔다. 1층에 적막이 돌았다. 유리는 오시프를 등진 채로 말했다.

“도와달라고 안 해.”

혼자 처리할 거야. 알량한 자존심과 사랑에 눈이 먼 막내가 선언했다. 오시프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사과하기 싫어서 도움을 마다하다니. 미련한 동생을 어찌하나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네 뜻이 그렇다면야.”

오시프의 대답을 받은 유리는 곧장 건물을 나섰다. 밖에서 대기하던 일리야가 유리의 뒤를 따랐다.

* * *

습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의자에 앉아있는데, 사지가 묶여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퀴퀴한 냄새와 얼굴에 뒤집어씌운 포대 자루에 안도했다. 아직, 아직 안 죽었다! 살았다는 기쁨에 몸이 움찔, 떨렸다. 아직 안 깨어났어? 아니, 일어난 것 같은데. 바로 앞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자루가 벗겨졌다. 오래된 전등이 깜빡거렸다. 아나스타샤의 앞에는 수술복을 입은 사람 세 명이 있었다. 그들은 초록색 복면을 목에 건 채로 아나스타샤를 구경했다. 그중 한 명이 장갑 낀 손으로 아나스타샤의 볼을 툭툭 쳤다.

“이야, 잘생겼네. 한 다섯 살만 어렸어도 죽는 일은 없을 텐데. 아쉬워라.”

너무 슬퍼하지 마. 그는 기분 나쁘게 이죽거리며 입술까지 건드렸다. 날 죽인다고? 정말 나이 먹었다고 죽일 생각이야? 살았다는 안도감도 잠시였다. 닥쳐온 공포에 파랗게 질린 아나스타샤는 손길을 피했다. 그러나 남자는 끈덕지게 손을 뻗어 아나스타샤의 얼굴을 주물러댔다.

“쉬이, 걱정할 것 없어. 잠들면 다 끝나있을 거라고.”

“괜히 말 시키지 마.”

뒤에서 랩톱을 노려보던 사내가 말했다. 아나스타샤를 만지던 남자가 그를 보며 물었다.

“몇이나 있어?”

“최소 50이야.”

“오우. 그러면 몇 발 더 빼야 하는 거 아냐?”

남자가 일어나 랩톱 앞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무언가 열심히 대화를 주고받았다. 아나스타샤가 알 바는 아니었다. 어떻게든 여기서 살아남는 게 중요했다. 조용히 서 있던 다른 사람이 아나스타샤 앞에 앉았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숙인 채로 눈만 들어 앞에 앉은 사람을 관찰했다.

작은 체구에 풍기는 향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얇은 주사기가 들려있었다. 입은 수술복에는 애액이 튄 자국이 보였다. 뺄 생각이다. 정자를 뽑을 생각이야! 이걸 뽑아가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나스타샤의 숨이 거칠어졌다.

“나 작업한다?”

그는 주사기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아나스타샤에게 다가왔다. 아나스타샤는 눈과 입을 꾹 다물었다. 최대한 말을 아꼈다. 어차피 죽일 생각이라면 화술은 통하지 않았다. 랩톱을 보던 남자가 손바닥을 보이며 그를 말렸다.

“아, 잠깐만. 이거…… 인기가 대단한데. 기다려. 데려가야겠어.”

“안 돼. 아나스타샤는 죽어야 해. 우리 계획을 가로챘다고.”

랩톱 주인이 항의했다. 그러자 사내가 걱정 말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조금 미루는 거야. 응? 돈도 챙기고, 복수도 하고. 아나스타샤 페로몬으로 향수를 만들면 억만장자가 될 거라고!”

주먹을 불끈 쥔 남자는 꿈에 푹 빠진 얼굴을 했다. 랩톱 앞에 앉은 남자는 알아서 하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주사를 든 사내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지금 빼, 말아.”

“약은 넣지 말고 빼. 촬영 잊지 말고.”

사내가 방을 나섰다. 다른 남자도 랩톱을 정리해 지하실을 나갔다. 주사기를 들고 있던 남자는 주사기 대신 캠코더를 들었다. 그러더니 아나스타샤의 머리채를 잡아 얼굴을 들게 했다. 녹화 중인지 캠코더 앞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렌즈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자, 일해 보자고요.”

사무적인 어투로 사내가 아나스타샤의 바지를 벗겨냈다. 아나스타샤는 카메라를 응시했다. 저항하면 멍이나 늘 거야. 어차피 찍힐 거, 그냥 찍히겠어. 날 금방 죽일 생각은 없는 거야. 아나스타샤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눈물이 흘렀다.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지? 왜 속았지? 분노와 후회가 뒤섞였다.

나는 여기서 나간다. 살아서 나간다. 아나스타샤는 다짐했다. 내가 사라졌다는 걸 아무도 모르지는 않으니까, 희망은 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유리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아나스타샤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침대 헤드에 양손이 묶여있었다. 수갑을 헤드 프레임에 건 모양인지 손을 들썩일 때마다 쇳소리가 났다. 그는 침착하게 발가락에 힘을 줘 보고 무릎을 접었다, 폈다. 전부 움직이는 데에 불편함이 없었다. 숨 쉬는 것도 편했다. 아나스타샤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터트렸다. 몸은 멀쩡했다.

여전히 지하실이었다. 불이 꺼져있었지만, 어둠에 눈이 익숙해져서 주변이 얼추 눈에 익었다. 문밖에 누가 있나 싶어 귀를 기울였다. 인기척은 없었다. 지금이야말로 빠져나갈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아나스타샤는 팔을 흔들었다. 수갑이 침대 프레임을 시끄럽게 긁었다.

“젠장, 젠장……! 이, 이건 어떻게 풀어야 하는 거야……!”

수갑이 손목을 옥죄였다. 피가 안 통하자 저려오기 시작했다. 아나스타샤는 울먹였다. 수갑에 묶였을 때, 어떻게 풀라고 했던 유리의 말이 떠올랐다.

엄지를 부러뜨려.

덤덤하게 조언하던 얼굴까지 생각나서 아나스타샤는 힝, 하고 우는 소리를 냈다. 말이 쉽지. 어떻게 멀쩡한 뼈를 내 손을 부러뜨려? 어딘가, 어딘가에 열쇠 구멍을 쑤실만한 게 있을 거야…… 그런데 양손이 다 묶여있으면서 어떻게 주울 건데?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누가 날 구하러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누가 오는데? 유리? 이것도 전부…… 라포포르트에서 꾸민 게 아닌가? 도시 한복판에서 총질도 하는데 사람 하나 납치해서 협박하는 게 뭐 어려울까 싶었지만, 정말 라포포르트에서 사주했다면 영상을 찍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때, 문이 열리고 불이 켜졌다. 갑작스러운 빛에 아나스타샤는 눈을 찡그렸다. 들어온 사내는 아까 랩톱 앞에 앉았던 사람이었다.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수술복 차림이 아니라 청바지에 티셔츠, 거기에 소총을 메고 있었다. 총구는 바닥을 향해있었지만, 사내의 손이 손잡이를 붙들고 있어서 마음만 내키면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다.

그는 아나스타샤 위에 걸친 이불을 치우더니 성기를 손가락으로 퉁겼다. 통증에 아나스타샤는 이를 악물었다.

“다 늙어서도 찾는 사람이 있다니. 신기하지. 누가 우리 계획을 들쑤셔놔서 더는 진행할 수가 없게 됐거든…… 그래서 너한테 화풀이하는 거야. 널 여섯 번째 표적으로 지목했으니, 들어줘야지.”

아나스타샤는 사내의 눈을 봤다. 까맣게 죽은 눈은 말라비틀어진 시체 같았다. 입을 열 때마다 썩은 내가 풍겼다. 계획? 표적? 다 유리가 말한 대로였다. 그렇다면…… 나를 구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나스타샤는 남자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주받은 게, 아닌가 봐?”

“우린 청부업자가 아니야. 사업가지.”

남자의 말에 아나스타샤는 입술을 떨었다. 겁먹은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다. 사람을 납치하고 죽이는데 사업가라니. 비웃음을 참는데 문득, 유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와 그의 형제들까지…… 사람으로 사업하는 건 아나스타샤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아나스타샤를 훑어보고 조금 쓰다듬더니 지하실을 나가버렸다. 다행히 불은 켜고 나가서 아나스타샤가 수갑을 풀기 전, 어떤 것을 무기로 써야 할지 확인할 수 있었다. 문 쪽 바닥에는 버려진 자재와 공구가 있었다. 낡은 의자도 있었다.

반대를 확인했다. 그곳에는 비닐로 사방을 막아놓은 공간이 있었다. 불투명하게 보이는 안쪽은 수술실처럼 보였다. 그래서 수술복을 입었구나. 날 저기서 죽일 생각이었구나. 수술대에 도살된 소처럼 누웠을 자신을 생각하니 몸이 떨렸다.

수술실을 안 치웠다면 메스가 있겠지. 있으려나? 그 작은 칼로 될까? 아나스타샤는 문과 수술실을 번갈아 쳐다보며 고민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고민할 게 뭐 있어? 둘 다 챙기면 되잖아.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야. 저걸 주우러 어떻게 갈지 생각해야 한다.

아나스타샤는 왼손을 올려다봤다. 부러뜨려. 머릿속에 사는 유리가 말했다. 부러뜨려! 목소리는 아나스타샤 자신이었다. 죽을 바에야, 손가락 하나 없는 게 낫지! 아나스타샤는 있는 힘껏 오른손으로 왼손 엄지 뼈를 밀었다. 고통이 아나스타샤의 결박을 천천히 풀어주었다.

* * *

주요 인물은 다섯. 그중 셋이 미국에 있고 둘은 행방이 묘연하다. 아지트에 아나스타샤와 주요 인물 셋이 있는 건 확실하나 병력이 얼마나 될지는 미지수였다. 유리는 총탄을 챙겼다. 방탄조끼에 섬광탄과 연막탄을 한 개씩 달았다.

무장한 일리야가 문 앞에 서서 유리를 기다렸다. 그의 손에는 손도끼가 들려있었다. 유리는 도끼를 무시하고 문을 나섰다.

“안 챙기십니까?”

일리야가 쫓아오며 물었다. 물음을 무시한 유리가 이어폰을 끼고 무전을 테스트했다. 이어폰에서 레이즈빗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시프가 심은 심복은 오시프만큼 끈질겼다. 일리야는 한 번 더 유리를 불렀다. 그제야 유리가 대답해줬다.

“필요 없어.”

의도가 뻔히 보였다. 유리는 손도끼를 노려봤다. 유라, 화난 거 알아. 달래는 오시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꼴도 보기 싫었다. 유리는 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마야와, 오시프의 수발이 있었다. 유리는 샤샤와 페탸를 노려봤다. 샤샤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인원이 더 필요하다고 해서 왔습니다.”

“왜 너네야. 여긴 형 무기고도 아닌데.”

유리는 당당하게 소유권을 주장했다. 유리가 틈틈이 채워둔 곳이었다. 오시프가 멋대로 사람을 보낼 명분이 없었다. 샤샤가 뜸을 들였다. 과묵한 페탸가 입을 열었다.

“저희는 그저 막내 도련님이 걱정돼서 온 것뿐입니다.”

샤샤가 저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말은 잘하지. 유리는 차에 올라탔다. 오시프 부하와 실랑이하다 아나스타샤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샤샤와 페탸, 마야가 따라 탔다. 일리야가 문을 닫아주고 운전석에 탔다. 레이즈빗이 무전 했다.

[경비 인원은 여섯 명 안팎입니다. 공주는 안 보여요. 지하에 있는 것 같습니다.]

“알았어.”

목적지는 항구였다. 거기서 아나스타샤를 구금한 뒤, 배편으로 빼돌릴 생각이다. 유리는 초조하게 창밖을 쳐다봤다. 야경이 시시각각 변했다. 화려한 뉴욕 시내를 벗어나 불빛이 뜨문뜨문 보이는 항구로 달렸다.

작업이 끝난 항구는 관처럼 고요했다. 아나스타샤의 위치 추적기 위치를 따라 도착한 곳은 3층짜리 관리동이었다. 건물 노후로 관리동을 새로 짓고 버려진 곳이었다.

그들은 눈에 띄지 않게 창고 뒤에 차를 주차했다.

“레이즈빗, 잘 봐.”

레이즈빗이 못 미더운지 마야가 덧붙였다.

[예에. 당연하죠. 여러분 모습도 잘 보입니다.]

정작 레이즈빗은 의기양양해 보였다. 유리가 선두에 섰다. 건물 측면으로 다가가 눈을 피했다. 외부 경비는 없었다. 아무래도 계획 실행 직전에 라포포르트의 경호가 사라졌으니 아나스타샤를 자신들이 떠나기 전에 찾으리라고는 생각도 안 한 듯했다.

“마야는 나랑 지하로 가고 둘은 옥상으로 가. 한 놈도 살려두면 안 돼.”

“같이 가시죠? 둘로 괜찮겠습니까?”

유리와 떨어지게 생긴 샤샤가 물었다. 유리는 소총을 쥔 채 그를 노려봤다. 과잉보호가 따로 없다. 페탸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좀도둑을 상대하는데 함께 움직이는 건 인력 낭비였다. 몰려다니다가 지하에 갇힌 아나스타샤가 죽을 수도 있었다.

“간다.”

유리가 현관문을 천천히 밀고 들어갔다. 그림자는 조용히 건물 안에 녹아들었다.

“으흑…….”

아나스타샤는 참고 참던 신음을 흘렸다. 겨우 ‘흑’ 한 자를 뱉는 데도 입이 벌어질까 봐, 이를 악물었다. 자유로워진 팔을 천천히 내렸다. 헤드에 걸린 수갑이 철그렁 소리를 냈다. 아나스타샤는 왼손을 확인했다.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천천히 손을 구부렸다. 엄지와 손바닥뼈가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은 잘 움직였다.

괜찮아. 괜찮아. 살았어. 열 손가락 중에 아홉 개가 멀쩡하잖아. 살아남아서 치료하면 돼. 그러면 돼. 아나스타샤는 자신을 타이르며 침대 밑으로 내려왔다. 다리가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릎이 깨졌는지 욱신거렸다. 아나스타샤는 입술을 꽉 깨물어 고통을 참았다. 피 맛이 났다.

살아야지. 형이 얼마나 걱정하겠어. 그리고 유리한테…… 젠장, 그냥 파티에 데려갈걸! 그 사람들 앞에서 유리가 애인이라고 말했더라면 좋든 싫든 샴페인을 마시며 내 키스를 받아줬을 텐데. 아나스타샤는 침대를 짚고 일어서며 후회했다.

이리도 허무하게 납치될 줄 알았더라면 밀어붙였을 거야. 라포포르트가 꾸민 일이라 해도 기꺼이 장기짝이 되어 움직였으리라. 고개를 들었다. 다리에 힘을 쥐고 섰다. 후회할 시간 없어. 유리가 제시간에 못 올 수도 있다고. 아나스타샤는 침착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떼어 수술실로 걸어갔다.

다행히 안에는 사용 전인 수술 도구가 정리되어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날이 가장 길고 큰 메스를 들었다. 그래봤자 날은 손 한 마디를 넘지 않았다. 이런 작은 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무서웠다. 공포에 압도되어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메스를 움켜쥐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다.

“젠장, 유리. 이제 됐으니까 나타나 봐!”

두려움을 떨쳐내고 싶어서 유리를 찾았다. 범인이 있다는 걸 경고해줬으니 내가 어디에 갇혔는지도 알았겠지. 공주는 유리가 자신을 구해주리라 믿었다. 아나스타샤는 수술실을 나와 떨어진 각목을 주웠다. 끝에 못이 하나 박혀있어서 못 있는 쪽을 손잡이로 쓸지 말지 고민했다.

못이 있는 부분을 휘두르면 죽을 텐데. 머리든 피부든 못이 뚫어버릴 것이다. 그, 그럼 기절만 시켜? 근데 너, 기절만 시킬 수 있어? 누굴 기절시켜 본 적도 없잖아. 아나스타샤는 자신에게 물었다. 고민 끝에 못 있는 부분을 위로해 잡았다. 성치 않은 왼손은 각목을, 오른손에는 메스를 들었다.

이제 어떡해. 나가? 나, 나가면 뭐가 있을 줄 알고. 아나스타샤는 문 앞에서 망설였다. 갑자기 웃음소리가 들렸다. “짭짤한데. 공장에 보내버릴까?” 하는 말소리가 멀찍이서 들렸다. 아나스타샤는 급히 문 옆에 달린 전등 스위치를 내리고 각목 끝으로 스위치를 부쉈다. 불이 꺼졌다. 창문도 없는 지하실, 어둠 속에 아나스타샤는 때를 기다렸다. 어둠에 익숙해져 주변이 어렴풋이 보였다.

말소리가 가까워졌다. 하나? 둘?

“아, 있어 봐. 나는 위에 다녀올게. 먼저 하고 있어.”

“알겠어.”

둘이었다, 이제는 하나다. 바로 문 앞에 있다. 아나스타샤는 각목을 있는 힘껏 그러쥐었다. 망가진 엄지 때문에 힘이 말처럼 들어가지 않아서 메스와 손을 바꿨다. 발소리 하나가 멀어졌고, 문고리가 돌아갔다. 문이 열렸다. 바깥 불빛이 문틈으로 들어왔다.

아나스타샤는 때를 기다렸다. 틈으로 들어온 손이 스위치를 더듬었다. 그러나 불은 켜지지 않았다. 어, 뭐야. 범인이 당황하며 지하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아나스타샤를 찾으려 해도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다.

아나스타샤가 각목을 들었다. 때를 기다렸다. 남자가 허리춤에 걸린 손전등을 찾으려고 손을 옮기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지하실 안으로 발 하나와 어깨, 머리가 들어왔다. 그는 손전등을 켜면서 양발을 지하실에 디뎠다. 원형 불빛이 침대를 비췄다.

흐트러진 침구만 있었다.

“이게 무슨…….”

때가 왔다. 아나스타샤가 각목을 휘둘렀다. 뻑, 각목은 정확히 남자의 머리에 꽂혔다. 아나스타샤는 각목을 놓았다. 각목은 떨어지지 않고 남자의 머리에 붙었다. 각목 대신, 사내가 비틀거리더니 앞으로 고꾸라졌다.

얕은 석고에 구멍을 낸 기분이었다. 널브러진 남자는 미동도 없었다. 죽었다. 어둠 속에서 시체를 내려다봤다. 아나스타샤는 지하실 문을 닫았다. 나는 산 것이다. 안도감이 찾아왔다. 사람을 죽여놓고 안도하다니. 그, 그렇지만 죽이지 않았다면 내가 죽었을 거야. 소용돌이치는 죄책감에 대고 변명했다. 몸이 떨렸다.

이럴 시간 없어. 한 명이 더 온 댔어. 그러니까 그 전에 도망쳐야 해! 아나스타샤는 약쟁이처럼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소지품을 뒤졌다. 자동권총 한 자루와 휴대전화를 건졌다. 다비드가 아닌 라이엇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만 갔다. 끝내 전화가 연결되지 않아서 아나스타샤는 코를 훌쩍이며 문자를 보냈다. [나야 공주. 살아있어.] 손끝이 말을 안 들어서 오타투성이였지만 뜻은 그랬다. 연락이 오겠지. 이제 나가야 했다. 알몸으로 나가도 되나. 아나스타샤의 눈이 시체로 향했다.

“…….”

그는 오른손에 총, 왼손에는 휴대전화를 들었다. 총과 전화는 훔쳤어도 죽은 사람의 옷을 뺏어 입을 정도로 대담하지 못했다. 밖으로 나가면 걸칠만한 옷이 있을 거야. 아나스타샤는 문을 열고 나왔다. 일단 지하실은 조용했다. 주변을 경계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서 발에 치이는 장애물은 못 본 아나스타샤는 깨진 거울을 밟고 말았다.

쩌적……. 발바닥만 한 거울이 한 번 더 깨지며 아나스타샤의 발을 긁었다.

“흑……!”

아나스타샤가 놀라 발을 들었다. 새빨간 피가 발바닥 사이를 가르고 나왔다. 이런 발로 바닥을 어떻게 디뎌. 아나스타샤는 울고 싶었다. 도망가지 말고 여기 숨어있을까. 그럼 누가 찾으러 올 거야. 라이엇한테 연락하면 되잖아. 911에 연락해줄 거라고.

유리. 속으로 유리를 불렀다. 곧 그가 자신을 구하러 올 것만 같았다. 유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음울한 생각과 무기력감이 사라지고 욕구가 솟았다. 지금은 부딪쳐야 할 때였다. 사람을 내리쳤을 때, 이미 시작된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뼈마디가 드러날 정도로 총을 세게 움켜쥐고 지하실 계단을 찾았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지하실 복도는 T자 구조였다. 아나스타샤는 가장 긴 복도 끝방에 잡혀있었다. 왼쪽을 먼저 둘러봤다. 방이 세 개가 있었는데 전부 문이 열려있었고 안이 비었다. 계단도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뒤를 돌아봤다. 저쪽도 계단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어, 어디로 가야 하지. 이쪽이 아닌가?

아나스타샤가 고뇌하는 사이 오른쪽 복도의 왼쪽 벽면에 달린 문이 열렸다. 아나스타샤는 급히 왼쪽으로 붙어 문에 가려져, 나오는 사람이 자신을 볼 수 없게 숨었다. 심장이 요동쳤다. 문이 닫히고 가려졌던 사람이 보였다. 등에 소총을 멘 남자였다. 그는 아나스타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떡하지? 표적을 제대로 맞힌 적도 없는데, 저 남자를 맞힐 수 있을까? 걱정할 틈도 없었다. 남자가 아나스타샤를 발견했다. 어, 하고 입이 동그랗게 펴졌다. 아나스타샤는 팔을 앞으로 뻗었다. 신이 계신다면, 이번 한 번쯤은 절 도와주셔야지 않겠습니까? 어린양을 불쌍히 여기소서.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튀어 나갔다. 타앙. 요란한 총성과 함께 아나스타샤의 팔도 제멋대로 휘었다.

* * *

1층을 지르밟던 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마야도 유리를 응시했다. 둘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스타샤가 분명했다. 총성은 더 울리지 않았다. 침입을 눈치채고 아나스타샤를 죽였나? 샤샤에게서 무전이 왔다.

[2층 클리어. 3층으로 갑니다.]

“어. ……우리도 지하로 가자.”

유리는 침착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실 계단을 찾아 내려갔다. 안쪽에서 다투는 소음이 들렸다. 으악! 하는 비명이나 와장창 무너지는 소리. 유리가 문손잡이를 돌렸다. 잠겨있지 않아서 스르륵 열렸다. 마야가 문틈 안으로 총구를 겨냥했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란은 왼쪽 방에서 들려왔다.

“기껏 살려놨더니 죽여달라고 발악하네! 그래, 죽여주마!”

성난 목소리였다. 문도 제대로 닫히지 않아서 열기 쉬웠다. 한 남자가 침대에 올라가 누군가에게 주먹질을 해댔다. 일단 주먹을 내지르는 놈은 유리가 모르는 사람이었다. 맞는 쪽은 필사적으로 손을 뻗으며 저항했다.

“어이.”

유리가 사내를 불렀다. 제삼자의 목소리에 놀란 남자가 뒤를 돌아봤다. 무장한 유리를 본 그는 무기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유리는 그 틈에 남자의 어깨를 쐈다. 으악!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떨어졌다.

“엄살은.”

유리는 침대 쪽으로 걸어오며 남자의 머리에 한 방을 더 쐈다. 꿈틀거리던 몸이 축 늘어졌다. 침대에 남은 놈도 처리할지 말지 정해야 했다. 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유리.”

동시에 아나스타샤가 입을 열었다. 유리. 울음을 참느라 떨리는 목소리. 헐떡이는 숨이 물에 젖은 것처럼 축축했다. 유리는 총구를 아래로 내렸다. 나체로 만날 줄은 몰랐기에 인사를 나누기 전에 이불로 아나스타샤를 감쌌다.

“유리이.”

아나스타샤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다시 그를 불렀다. 꿈이 아니라고 말해달라는 눈치였다. 유리는 장갑을 벗고 아나스타샤의 얼굴을 문질렀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주먹에 맞은 곳을 살폈다.

“잘도 그러고 돌아다녔어.”

“유리. 유리. 왜, 왜 이제 왔어.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유리…….”

“이제 괜찮아.”

“네가 오기만을 기다렸어.”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끌어안았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어깨에 턱을 올린 채 한참을 울었다. 하여간, 성가시다니까. 유리는 한숨을 푹 쉬며 아나스타샤를 달랬다. 진정됐는지 아나스타샤는 히끅히끅 숨을 삼켰다. 유리가 미련 없이 일어났다. 아나스타샤가 빨개진 얼굴로 유리를 올려다봤다.

“일어나. 나가게.”

“……나, 못 움직이겠어.”

말을 겨우 마친 아나스타샤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수도꼭지가 다시 열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유리는 울 틈도 주지 않고 아나스타샤를 어깨에 들쳐멨다. 아나스타샤의 시야에 유리의 등만 가득했다. 사람을 짊어진 게 한두 번이 아닌 듯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허벅지와 허리를 받쳐 들고 건물을 나왔다.

대롱대롱, 유리가 움직일 때마다 아나스타샤의 머리가 흔들렸다. 성큼성큼 뻗는 뒤꿈치만 보였다. 밖에는 경찰차와 구급차가 대기 중이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구급차에 앉혔다. 겨우 세상에 제대로 안착한 아나스타샤가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경찰차와 구급차의 빨간 불빛이 아나스타샤가 있었던 건물 외벽을 물들였다. 숨을 들이켰다. 후덥지근하고 짜고 비린 여름 바닷가 냄새가 났다.

“유리.”

“내 불찰이야. 또 나 때문에 이런 일 겪게 해서 ……유감이야.”

유리가 선수 쳤다. 아나스타샤는 그를 올려다봤다. 붉은 조명 때문인지, 유리는 곧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보였다. 응급구조대가 아나스타샤의 상태를 살폈다. 그는 구조대에게 자신을 맡기고 유리를 향해 말했다.

“그러면 내 옆에서 속죄해.”

현재 상황에서 연애는 꿈도 못 꾸지. 묶어둘 족쇄가 필요했다. 유리는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사선으로 기울였다. 그러곤 천천히 끄덕였다.

“얼마나?”

“죗값을 다 치를 때까지.”

찰나 혹은 평생을 잡아둘 주문이었다. 유리는 입꼬리 한쪽을 올려 웃었다. 알았다는 대답은 없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몇 번 훑어보며 상태를 확인하고는 자신이 끌고 온 무리가 있는 쪽으로 가버렸다.

‘싫어’가 없었으니 그러겠단 뜻이다. 아나스타샤는 멀어지는 유리를 보며 웃었다. 영화를 보면 이런 상황에서 보통 키스하던데. 현실은 좀 다르구나, 생각하면서.

크루즈 납치 사건은 오시프 라포포르트가 적극적으로 도왔다. 경찰과 구급차를 부른 것도 그였다. 라이엇은 아나스타샤가 보낸 문자를 보고 곧장 이반을 불렀다고 했으나 이미 오시프가 출발한 후였다.

사건은 조용히 묻혔다. 갑자기 사라진 파티 주최자의 행방을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침묵이 길어지니 흥을 잃고 떠났다.

“징글징글한 인간 같으니.”

유리는 맞은편 소파에 앉은 오시프가 들으라는 듯 크게 중얼거리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오시프는 멀뚱멀뚱 동생을 쳐다봤다. 유리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나한테 하는 소리니?”

아이를 다루는 말투에 유리는 눈썹을 치켜떴다. 담배 연기를 자욱하게 흩뿌린 유리는 그제야 오시프를 노려봤다.

“이 방에 사람이 나랑 형 둘밖에 더 있어?”

“유라, 나도 상처라는 걸 받아. 나도 살을 째면 붉은 피가 흐른단다.”

“어련하시겠어.”

“수습했으면 됐잖아.”

“아나스타샤가 죽을 뻔했어.”

이렇게 말해봤자 “안 죽었으니 됐잖아?”라고 할 사람이다. 상식이 통하는 인간이었으면 독립도 안 했겠지. 유리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담배 필터를 잘근잘근 씹었다. 오시프는 유리를 쳐다보기만 했다. 짤막한 정적이 흘렀다. 괜히 찔린 유리가 먼저 불만 있느냐고 되묻기 직전이었다.

“그건 미안하게 됐어.”

“…….”

유리는 담배를 비벼 끄고 오시프 쪽으로 넘어가 그의 목에 손을 댔다. 맥박도 정상이고 체온도 정상이었다. 오시프는 옆에 앉은 동생을 반갑게 쳐다봤다. 웃으니 에드워드를 쏙 빼닮은 미인이었다.

“죽을 때 죽어도 형들한테 기밀문서 위치는 알려주고 죽어.”

“유라, 가족끼리 비밀이 어디 있어? 내가 그런 걸 만들 사람 같아?”

결백하다는 듯, 오시프가 눈썹을 축 내리며 물었다. 당연한 걸 묻고 있어. 유리는 무표정으로 응대했다. 라포포르트의 두 형제가 아옹다옹하는 사이, 아나스타샤가 커피를 담은 트레이를 들고 나타났다. 발바닥 상처 때문에 한쪽 발에 깁스를 했는데 목발 없이도 절뚝절뚝 잘 걸었다. 그는 트레이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소파에 풀썩 앉았다.

“미안해요. 걷는 게 너무 힘드네.”

“뭘, 잘 걷던데. 잘 마시지.”

오시프가 트레이를 테이블 중앙으로 끌어와 잔을 각자 앞에 내줬다. 석 잔 다 에스프레소였다. 아나스타샤가 설탕을 두 스푼 넣었다. 오시프는 한 스푼만 넣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둘은 에스프레소를 저으며 유리를 쳐다봤다. 누굴 따라 얼마나 넣을지 기대하는 눈치였다.

유리는 세 스푼을 넣었다. 오시프는 아나스타샤를 선택하지 않았으면 됐다는 듯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아나스타샤만 입을 삐죽 내밀며 실망한 티를 냈다. 설탕을 세 스푼이나 넣은 커피는 설탕물과 별다를 것이 없었다. 설탕이 녹은 윗부분만 마시고 내려놨다. 커피는 입맛에 안 맞았다.

“그래서. 할 말이?”

오시프가 잔에서 입을 떼며 물었다. 평화로운 다과회 같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아나스타샤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유리가 다리를 꼬고 앉아 소파 시트를 두드렸다. 아나스타샤가 운을 떼야 했다. 공주는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고 오시프를 응시했다.

라포포르트의 실권자는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듯이 아나스타샤를 쳐다보고 있었다.

“라포포르트가 꾸민 일에 관한 얘기예요.”

으흠. 오시프가 고개를 주억이며 에스프레소를 홀짝였다. 더 해보란 뜻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힐끔거리며 신호를 확인했다. 유리는 미동도 없었다. 아직 나설 때가 아니었다.

“큰 피해 없이 수습됐지만, 피해가 상당하거든요. 다비드 가족까지 끌어들이고 유산 위험을 겪게 했어요. 거기에 나는, 정말 죽을 뻔했고.”

“사과하지.”

오시프가 말했다. 끼어들 틈을 보던 유리가 놀라 오시프를 쳐다봤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사과한다니. 오시프가? 아까도 그렇고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누가 오시프로 분장해서 들어온 게 분명했다. 아나스타샤는 미소 지었다. 사과받았으니 다음은 물 흐르듯이 이뤄지리라. 오시프가 말했다.

“말로만 사과할 수는 없지. 원하는 걸 얘기해. 하나 줄 테니까.”

레오파드에게 소원을 빌 수 있다. 아나스타샤의 소원은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유리와 살겠어요.”

“……”

설마 그런 걸 요구할지 예상 못 한 건지 혹은 그의 말이 사실이 아니길 바라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오시프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확인하듯 유리를 봤다. 차례가 돌아온 유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기로 했어. 형이 집에 잘 얘기해줘.”

막둥이가 연애와 동시에 동거한다는 얘기를 부모님이 들으면 곧장 미국으로 들이닥칠 게 분명했다. 부모님을 돕는다며, 막내를 홀린 면상을 구경하려 다른 형제들도 건너올 것이다. 거기다 알파와 알파 아니던가. 오시프는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왜, 어려워? 형밖에 할 사람이 없는데.”

유리가 침묵을 깼다. 그것도 모자라 오시프의 자존심을 긁었다. 오시프는 씨익 웃었다.

“귀찮은 걸 부탁하는군. 어려울 건 없지. 그래서…… 얼마나?”

불장난은 언제 끝내고 집으로 돌아올 거냐는 물음이었다. 유리는 턱을 문질렀다. 아나스타샤는 조용히 선고를 기다렸다. 유리를 붙잡은 건 아나스타샤였으나, 곁에 머물 기간을 정하는 건 유리였다. 그가 정한 기간까지 유효한 관계다.

“몰라. 일단 베이징 전출 전까지.”

“흠. 그래.”

베이징 전출 전까지? 아나스타샤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렇다면 반년도 안 남았다. 이럴 수가, 못해도 2년은 같이 지낼 줄 알았는데. 아나스타샤가 큰 상심에 빠진 반면 오시프는 승리를 만끽했다. 내년이 오기 전에 아나스타샤와 정리한다는 뜻이니까. 그 정도는 얼마든지 눈감아줄 수 있었다.

유리는 둘을 애매하게 속여놓고 잔에 가라앉은 설탕을 떠먹었다. 커피 사탕을 먹는 기분이었다. 오시프도 ‘몰라’와 ‘일단’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눈앞에 아나스타샤가 비 맞은 개처럼 쭈그러들었는데 말뜻을 제대로 파악했겠는가. 아나스타샤를 싫어하는 형이 놓치기 아까운 광경이리라.

“뉴욕에서 지내나?”

오시프가 물었다. 유리는 고민했다. 그건 생각 안 해봤다. 유리의 회사는 마이애미에 있었고, 사장이 자리를 오래 비울 수도 없었다. 물론, 비운다고 큰일이 나는 건 아니지만. 유리는 라포포르트의 막둥이라는 이유로 가족에게서 바다 건너 땅에 있는 회사를 받은 건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도 유리가 얼마나 성실한 사장인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내쫓자마자 마이애미로 가버리지 않았던가. 나무를 옮겨심는 것보다 새가 가지에 올라가는 편이 훨씬 쉽고 마찰도 적었다. 아나스타샤가 끼어들었다.

“제가 마이애미에서 지내야죠.”

두 라포포르트는 무슨 말이냐는 듯 아나스타샤를 쳐다봤다. 뉴욕과 마이애미는 북부와 남부에 있어 동떨어진 도시였다. 거기다 아나스타샤의 인맥은 다비드가 중심이었다. 재단인지 뭔지를 설립해서 명성을 쌓고 싶다던 인간이 연고를 다 버리고 마이애미로 오겠다니. 유리가 먼저 반대했다.

“나는 당신 형 같지 않아. 독서 클럽이고 사교 파티에 당신을 데려갈 일은 없을 거야.”

“형 도움을 많이 받은 건 사실이지만, 도움이 없어도 할 수 있어. 소문은 빠르잖아.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은 많거든. 좋은 일을 하면서 명성을 쌓고, 돈도 벌고 싶은 사람들.”

아나스타샤가 웃었다. 유리는 못마땅했다. 그건 아나스타샤의 추측일 뿐 만약 마이애미에서 계획이 틀어진다면, 마이애미에서 뉴욕까지 제트기를 타고 움직여야 할 것이다. 탐탁지 않았지만 따질 수도 없었다. 아나스타샤라면 왜 안 될 거라 생각하냐며 자신 있다고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호텔을 봐둬야겠군.”

오시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말은 즉, “아나스타샤, 너는 호텔에서 따로 지내.”라고 하는 압박이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가 순진한 얼굴로 유리에게 물었다.

“유리, 집이 있지 않아?”

“……어? 어, 있지. 아파트지만.”

당황한 유리는 고분고분 대답해주고 말았다. 오시프가 먹잇감을 빼앗긴 승냥이처럼 사납게 눈을 떴다. 시건방진 시모나로티가 뭐라고 지껄였는지 곱씹었다.

“집이 있는데 뭐하러 호텔에서 지내. 그것도 다 돈이야.”

아낄 수 있으면 아껴야지. 아나스타샤가 주절거렸다. 며칠 전에 크루즈에서 파티를 연 사람이 고작 호텔 값을 아끼겠다고 얹혀살겠다니.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경제 관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응? 유리.”

“어? 어……. 그래.”

“뭐?”

오시프의 “뭐?”는 “정신 안 차릴래?”와 같은 말이었다. 누구 앞에서 누구랑 같이 산다고 허락해달래? 베이징으로 떠날 때까지 둘이 붙어먹겠다고 선전포고라도 하는 거야? 유리와 관여된 일이라면, 특히 아나스타샤와 얽힌 일에는 예민하게 반응하는 오시프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마이애미는 안 가봤는데. 이탈리아와 비슷한가? 시칠리아? 로마? 어디 느낌일까.”

로마도 시칠리아도 아니겠지만 아나스타샤는 눈까지 감은 채로 마이애미에서의 삶을 상상했다. 그 꼴이, 오시프 눈에는 몹시 거슬렸다.

“너 지금 사는 아파트 말하는 거냐? 방 두 개에 거실이 화장실만 한 그 아파트?”

“혼자 살기는 좋아.”

“이젠 아니잖아.”

오시프가 알기로는 두 개뿐인 방중에 하나는 게임을 한다며 컴퓨터에 게임기만 갖다둔 거로 안다. 아나스타샤가 멀쩡한 침실을 두고 에어매트나 소파에서 잘 리도 만무하고, 유리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침대 위로 올라오는 아나스타샤를 밀어낼 것 같지 않았다. 적당한 변명거리가 좁은 아파트에는 넘쳐났다.

“사둔 주택이 있으니 거기서 지내.”

“애들이랑 떨어지면 일하기 번거로워. 됐어.”

“가까운 곳에 하나 더 있으니 거기로 옮기라 해.”

“어떻게 여자랑 남자랑 집을 같이 써? 마야는 여자야.”

눈치 빠른 유리는 이상하게 형의 마음은 읽지 못했다. 형제라서 그런가. 아나스타샤는 따갑게 자신을 노려보는 오시프의 시선을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쳐내며 생각했다. 아파트에 짐을 풀면 레오파드의 응징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주택이요? 어떤 주택인가요. 해변가에 있나요? 풀이 있으면 좋을 텐데. 마이애미는 서핑을 할 수 있겠지? 제가 서핑을 좋아하거든요.”

“울타리를 넘으면 바로 다이빙할 수 있는 곳이지. 베네치아보다는 못 하겠지만 아름다운 곳이야.”

“마이애미에 그런 집이 어디 있어. 거짓말하지 마.”

허튼수작을 부리면 바다에 던져버리겠다는 경고에 가까웠지만, 유리가 거짓말하지 말라며 끼어든 덕에 아나스타샤는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었다. 소문만 무성한 레오파드는 가족을 끔찍이도 아끼는 사내였다.

“기대되네요. 라포포르트 씨가 괜찮으시면 거기서 지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진심이야?”

유리가 물었다. 유리는 기름 한 방울, 동전 한 닢이라 해도 형에게 도움받고 싶지 않았다. 집을 빌려준 대가로 사사건건 간섭할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입술을 매만지며 “그럼 내가 하나 사면 돼.” 했다. 아나스타샤가 손사래를 쳤다.

“유리, 형이 내주는 집이면 비었을 텐데 뭐 하러 또 집을 사?”

유리와 잘 지내려면 그의 가족을 등져서는 안 된다. 유리에게는 미안하지만, 라포포르트―특히 오시프―에게는 잘 보여야 했다. 나의 악당은 마이애미에 가서 실컷 예뻐해 줘도 늦지 않으니까. 아나스타샤는 웃었다. 지중해 바다처럼 찬란한 미소를 지어도 오시프의 차가운 시선은 녹지 않았다.

“그럼, 나는 먼저 돌아갈게.”

“같이 안 갈 거야?”

유리는 당장 마이애미로 떠날 사람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나스타샤가 놀라 따라 일어났다.

“할 일도 없는데 있어서 뭐 해. 바로 떠날 것도 아니잖아? 나도 짐을 옮겨야 해.”

할 일도 있고. 유리가 중얼거렸다. 아나스타샤는 그를 잡지도 못하고 같이 가지도 못해서 발만 동동 굴렀다. 그 꼴을 오시프가 구경했다.

“도착하면 연락해.”

유리는 아나스타샤 볼에 키스해주고는 저택을 떠났다. 동생 내외의 애정 행각에 오시프의 심기가 틀어져, 남겨진 아나스타샤는 그의 눈치를 봐야 했다. 다행히 오시프도 금방 가버렸다. 양가 허락하에 만나는 애인은 처음인데 말이야. 아나스타샤는 뉴욕 생활을 정리하며 마이애미로 떠날 채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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