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5. 시범 사냥 (5/10)

5. 시범 사냥


열어둔 창으로 녹음 냄새가 가득 들어왔다.

달고 시큼한 풀 냄새와 함께 헤지커터 엔진음이 우렁차게 들렸다. 소란 아닌 소란에 유리는 창밖을 바라봤다. 정원사와 추리닝을 입은 고용인 둘이 정원수를 손보고 있었다. 여름이라 그런지 매주 관리해주는 듯했다. 유리는 휴대전화 문자를 확인하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맸다. 비가 와서 습한 것도 이유였지만, 문자 때문에 속이 답답했다.

[내일은 어때?]

평범한 내용이었으나 보낸 사람, 시간, 날짜가 문제였다. 오시프가 보낸 문자는 내일 일을 치르겠다고 예고했다. 문자 몇 번으로 아나스타샤의 생사를 결정한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인간……. 언젠가는 큰코다칠 거야. 유리는 친형을 저주했다.

정확한 시각까지 알려줬으면 좋겠지만 문자는 더 오지 않았다. 유리는 불만스럽게 액정을 노려봤다. 내일은 아나스타샤도 일정이 있었다.

“좋아요. 앰버린에서 하나 씨를 섭외해준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어요.”

아나스타샤는 서재를 돌아다니며 통화 중이었다. 재단을 만들겠단 뜬구름을 차근차근 땅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재단 설립과 관련된 통화와 베이징 지사와 관련된 통화를 번갈아 했다. 유리는 휴대전화를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베이징 지사로 파견이 언제던가. 겨울에는 베이징으로 떠나야 할 텐데. 그때까지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인가?

아하하, 아나스타샤가 웃으며 이마를 문질렀다.

“아, 그럼요. 시간은 언제가 좋겠어요? 아, 이번 주. 좋아요. 금요일 저녁은 어떤가요?”

금요일 저녁. 유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금요일 저녁 약속이 뜻하는 건 하나다.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술을 곁들이며 기분 좋게 취한 상태로 호텔에 들어가 뜨거운 밤을 보내는 것이다. 살인마에게 쫓기는 상황에도 상대는 끊이질 않는군. 유리는 혀를 찼다.

“그때 봐요.”

아나스타샤가 통화를 끊고 유리를 쳐다봤다. 눈이 딱 마주쳤다. 아나스타샤가 눈썹을 치켜떴다. 원래도 큰 눈이 동그래졌다. 본인이 여자 만나는데 날 쳐다보면…… 뭘 어쩌란 말인가? 설마 섹스하는데 같은 방에 있으라는 건 아니겠지. 불길함이 엄습했다. 유리의 입술이 삐뚜름해졌다.

아나스타샤가 주머니에 휴대전화를 넣으며 얘기했다.

“금요일 저녁에 앰버린을 만나야 해. 미안하지만, 이때 근처에서 기다려주겠어?”

“밤새 기다릴 생각은 없는데.”

“무슨 소리야. 저녁만 먹고 헤어져야지! 날 뭐로 보는 거야?”

대답하면 상처받을 사람으로 보지.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죽 훑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나스타샤가 주먹을 쥐며 발끈했다.

“아니야! 내가 오는 사람 안 가리고 가는 사람 안 막기는 해도,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잖아. 나는 살인마한테 쫓기면서 베이징 갈 준비도 해야 하고 재단 운영을 도와줄 사람도 찾아야 한다고. 그런데 여자랑 침대에서 뒹굴 생각이 들겠어?”

뒹굴 생각이 없는 인간이 왜 경호원한테는 찝쩍거린단 말인가. 유리는 어깨만 으쓱였다. 뒤늦게 언행의 모순을 깨달은 아나스타샤가 헛기침했다.

“아무튼…… 집으로 돌아올 거니까.”

“알았어. 알았어. 기다리면 되잖아.”

건성으로 한 대답에도 아나스타샤는 활짝 웃어줬다.

“고마워, 유리.”

그놈의 고마워. 고마운 일도 많다. 뭐가 고맙단 말인가? 변태처럼 뒤에서 지켜보고 밀랍 인형이나 만들겠다고 요구하는 놈인데. 거기에 제대로 만들라고 온몸을 만지게 한 아나스타샤도 제정신은 아니다. 둘 다 미쳤군. 각인 상대가 없어서 그런가? 아나스타샤가 결혼해야 나도 하지. 아나스타샤가 결혼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으나 그냥 그러고 싶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 옆에 서서 창밖을 쳐다봤다. 헤지커터 돌아가는 소리가 아직도 들렸다.

“날도 좋은데 장미 정원에 가서 점심 먹을까? 장미는 다 졌겠지만.”

풀밖에 없을 거야. 등나무라도 심어놨으면 몰라. 하하. 아나스타샤가 농담을 흘리며 휴대전화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아, 반가워요. 연락 기다렸죠? 다시 업무가 시작된 것이다. 유리는 아예 발코니로 나가 난간을 붙잡고 여름을 만끽했다.

덥다. 밖으로 드러낸 피부에 수분이 닿았다. 추운 것보다 덥고 습한 게 낫지. 추운 건 질색이야. 정원사는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나 정원수를 다듬는 기계 소리는 여전했다.

오전 내내 전화를 돌리던 아나스타샤는 점심 먹을 시간이 돼서야 겨우 숨을 돌렸다. 다비드와 라이엇은 출근했고 천사들도 유치원에 가서 저택에는 아직 이유식을 먹는 가브리엘과 고용인들, 아나스타샤와 유리가 전부였다. 큰 주인이 없는 지금은 아나스타샤가 주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나스타샤는 고용인이 식당에 식사를 차리기 직전에 그들을 불러 정원에 가서 밥을 먹겠다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고용인들은 순순히 아나스타샤의 요구를 들어줬다.

장미 정원은 저택 측면, 작은 호수로 이어지는 길 가운데에 있었다. 장미가 만개할 때는 1층 퇴창에서 알록달록 핀 장미와 그 뒤로 잔잔히 물결치는 호수를 볼 수 있었다. 장미가 필 시기는 지났기에 지금 장미 정원에는 푸른 이파리뿐이었다. 고용인들이 음식을 준비하고 아나스타샤는 직접 테이블과 의자를 세팅했다.

오늘은 일이 바빠 밖에 나갈 틈이 없었다. 여유로웠다면 허드슨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나가 점심을 먹고 다비드를 만나 같이 돌아왔을 텐데. 아나스타샤는 아쉬운 눈으로 여름 바람에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호수를 바라봤다. 장미 정원과 호수가 만나는 곳에는 조각배 하나가 묶여있었고 그 옆에 유리가 서 있었다. 언제 저기까지 갔을까? 정원을 둘러보던 아나스타샤의 시선이 유리에게 떨어질 줄 몰랐다.

하얀 테이블에 음식이 올라왔다. 마르게리타와 와인, 샐러드였다. 마르게리타라니! 음식을 둘러보던 아나스타샤의 눈이 반짝였다. 괴상한 미국식인 것도 모자라 위에 파인애플을 올린 피자를 보다가 완벽한 이탈리안 피자를 보니 입에 군침이 돌았다.

식기 전에 먹어야 해. 유리가 저걸 먹어봐야 전에 먹었던 피자는 지옥에서 올라온 밀가루 덩어리란 걸 깨닫겠지! 아나스타샤는 호수 쪽을 보며 소리쳤다.

“유리! 얼른 와! 준비됐어.”

아나스타샤의 외침에 유리가 뒤를 돌아봤다. 담배라도 피우나 했는데 아니었다. 붉은 입술과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밀 빛 금발을 가진 태양신이 있었다. 걸어오는 모습도 한 폭의 명화 같았다. 장미가 피었다면 더 아름다웠을 텐데……. 외모가 화려하니 장미가 있어도 전혀 과하지 않으리라.

장미가 만개했을 때 또 왔으면 좋겠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을 지나치는 유리를 따라 몸을 돌렸다. 이든이 잔에 와인을 따랐다. 둘은 마주 보고 앉았다. 별말 없이 일단 와인을 마셨다. 색과 향이 훌륭했고 맛도 흠잡을 곳이 없었다. 아나스타샤와 유리는 동시에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잔을 내려놨다.

“왜 갑자기 미식축구를 보러 가겠다는 거야?”

유리는 포크를 들며 이유를 물었다. 파티나 미팅도 아니다. 더군다나 정규 리그도 아닌 친선 경기를 보러 가겠다니. 경기장에 사람이 얼마나 몰릴지 알고 하는 소릴까? 인파에 오시프의 끄나풀이 섞여 저격이라도 한다면 아무리 유리라 한들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불행히도 아나스타샤는 마르게리타를 앞접시로 옮기는 데에 정신이 팔려 대답해주지 못했다. 유리가 포크로 샐러드를 콱 찍어 앞접시로 가져왔다. 그제야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보며 대답했다.

“내가 후원하던 애가 자이언츠에 입단했거든. 리그 전에 연습할 겸, 내일 제츠와 친선 경기를 한다더군. 리그가 시작됐을 때는 미국에 없을 수도 있으니까 가서 응원하는 거지.”

“과학자만 양성하는 줄 알았는데.”

유리가 풀을 씹으며 말했다. 아나스타샤가 미소를 지었다.

“영재에 우선이 어디 있겠어? 명성, 기술, 돈. 전부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잖아.”

그렇다면 스포츠 선수는 세 개 중에 어디로 분류될까? 명성? 돈? 유리는 속으로 생각하며 마르게리타 한 조각을 먹었다. 레이즈빗이 시킨 피자와는 비교도 안 되는 신선한 맛이었다. 그러나 맛에 크게 연연하는 사람이 아닌지라 고개를 한 번 주억거릴 뿐이었다.

“어때?”

“음.”

아나스타샤가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저 부담스러운 시선이 원하는 말은 하나였다. 유리는 눈을 데룩데룩 굴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어.”

“그래?”

“어.”

“다행이야.”

무성의한 대답에도 아나스타샤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말과 행동이 “진심으로 다행이야.”라고 얘기해줬다. 겨우 한 마디 감탄이라 해도 아나스타샤는 좋았다. 유리가 나중에 하마 엉덩이만 한 피자를 먹게 된다면 오늘 맛봤던 마르게리타가 생각날 테니까. 그런다면 찬사는 바라지도 않는다.

구구절절 이탈리아식 피자에 관한 얘기를 해줄 법도 한데 아나스타샤는 뜻을 이룬 사람처럼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왜 만족스러워하는지 눈치채지 못하고 와인을 마셨다. 그를 한참 바라보던 아나스타샤가 샐러드를 앞접시로 옮기며 중얼거렸다.

“다비드랑 천사들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라이엇 시간이 될지 모르겠어.”

“물어보면 되지.”

“문제는 형이 구장을 안 좋아한다는 거야.”

“그럼 어쩔 수 없군.”

“그래. 어쩔 수 없이 우리 둘이 봐야 해.”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은 바삐 마르게리타로 향했다. 보기 드물게 집중해서 먹는 유리를 감상하던 아나스타샤가 말을 흘렸다.

“데이트지.”

떠보기인가. 유리는 마르게리타를 반으로 접어 잡으며 아나스타샤를 응시했다. 데이트도 하고 키스도 하면, 말만 안 했지…… 연인과 비슷한 관계 아닌가? 놀리려고 데이트라 명명한 걸 수도 있겠지…… 아나스타샤는 말장난을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시끄러운 건 질색이야.”

데이트는 무슨. 맡은 의뢰의 일부분일 뿐이다. 데이트는 둘 다 좋아하는 걸 해야 하지 않나? 거기다 오시프가 차려놓은 식탁에 올라가는 짓일지도 모른다.

아나스타샤가 아쉽다는 듯 포크로 접시를 긁었다.

“그렇지만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것도 재미있잖아?”

“당신을 칼로 찌르고 도망가도 범인을 잡을 수 없으니 재미있긴 하겠군.”

잊고 있던 현실을 직시하게 도와주니 아나스타샤의 손이 멈췄다. 유리는 몸을 앞으로 구부리며 속삭였다.

“구급차에 경찰차도 출동하겠지. 재미있겠어.”

“뭐……. 유, 유리.”

“물론 구급차에 실려 가는 건 아나스타샤 당신이겠지만.”

“유리.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

아나스타샤가 막아섰다. 그러나 팔만 명을 거뜬히 수용하는 구장에서 정말 누군가가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못 할 것도 없어 보였다. 날 찌른다고? 경기장에서 죽는 건가? 일전 백화점에서도 납치당하지 않았던가.

어디든 위험했다. 성벽도 개구멍이 있기 마련인데 사람으로 만든 벽이 안전할 리 없다. 유리가 백 명보다 나은 한 명이지만, 벽돌 하나로는 집도 지을 수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런 일을 방지하려고 경호원을 쓴 거야.”

“위험한데 굳이 가려는 이유가 뭐야? 백화점 앞에서 납치당한 걸 잊은 건 아니겠지.”

이미 한 번 아나스타샤 경호에 실패했다. 적어도 지금은 살인범이 누구고 왜 아나스타샤를 노리는지 오리무중인 상태로 보여야 했기 때문에 유리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냐고 눈치를 줬다. 물론 아나스타샤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게 내 일이니까. 내가 후원한 친구가 뛰는 첫 경기야. 대륙 반대편도 아니고 바로 뉴욕 스타디움에서 경기하는데 못 갈 이유가 뭐겠어?”

아나스타샤가 어깨를 으쓱인다. 이해는 간다마는, 지금 처한 상황이 어떤지 여전히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만 명도 머리가 아픈데 무려 팔만 명 이상을 수용하는 스타디움이었다. 오시프가 경기장에 사람을 푼다면 소리 없이 관중석에서 시체가 될 수도 있었다. 유리는 적당히 겁을 주기로 했다.

“나도 얘기할 게 있어.”

아나스타샤는 말하라는 듯 고개를 옆으로 까딱였다. 유리는 팔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고백했다.

“사실 경호가 이번이 처음이야.”

“그런 말은 임무 맡기 전에 해줬어야 하는 거 아니야?”

“경호를 맡은 적이 없어서 그렇지 실력은 있어. 그때 봤잖아? 내 전문은 아니라는 거지.”

아나스타샤의 표정이 볼만해졌다. 유리는 의자에 등을 붙이고 앉으며 다리를 꽜다. 아나스타샤는 불안한지 손톱을 잘근 깨물었다.

“친선 경기에 팔만 명이 몰릴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 하는 얘기야.”

“칼 맞아도 원망하지 말라는 거야?”

“맞기 싫으면 잘 붙어 다니라는 소리지.”

원하는 건 다 줬는데 왜 경호원을 쫓아다녀야 해? 프로답지 않아. 적어도 라포포르트의 이름을 걸고 맡았다면 의뢰인이 경호원을 붕어 똥처럼 붙어 다니는 일은 없어야 했다. 아나스타샤가 입을 삐죽 내밀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마음은 백번 이해하지만, 유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충고가 전부였다. 그는 별수 있냐는 듯 손바닥을 위로한 채 까딱였다.

“물론 주의할 거야. 아나스타샤, 당신도 조심해달라고 부탁하는 거지. 말했다시피 나는…… 이쪽 전문이 아니거든.”

그럼 대체 뭐의 전문인데? 아나스타샤는 물으려다가 오토바이를 탄 채 사람을 쏴 죽였던 유리를 떠올렸다. 아나스타샤는 서둘러 와인을 벌컥벌컥 마셨다. 떠올리기도 싫었다. 빈 와인잔을 테이블 끝에 두자 뒤에 있던 이든이 다가와 잔을 채워줬다.

아나스타샤는 잔잔하게 찬 와인을 보며 투덜댔다.

“가격에 거품이 있어.”

“명품은 다 그래.”

유리가 대꾸하자 아나스타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거기에 못 하는 말도 없어, 하고 핀잔을 줬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반응을 즐겼다. 즐거움 뒤에는 찝찝한 죄책감이 뒤따랐다. 유리가 멍하니 정원을 쳐다보자 아나스타샤가 시야 안으로 들어오며 주의를 끌었다.

“난 여기 있는데.”

“알아.”

“한눈팔지 마.”

아나스타샤의 괴상한 명령에 유리는 질색하며 와인을 들이켰다. 신맛이 거의 없고 단 와인이었다. 거기에 끝맛이 묵직해서 자꾸만 손이 갔다. 유리는 다 마신 잔을 내려놓고 입맛을 다셨다. 이든이 잔을 채워줬다.

심각한 얘기를 나눴어도 점심 식사는 느긋하고 평화로웠다. 아나스타샤가 식사를 마치고 조각배를 타겠냐고 유리에게 물었으나 유리는 담배를 꺼내 물고 의자에 기대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도 유리 곁에 머물렀다.

* * *

아나스타샤는 분명 친선 경기라고 했다. 유리도 사전 조사를 해뒀다. 친선 경기이니 이만 명쯤 몰릴 거라 예상했는데 어째서인지 오만 명 넘게 스타디움을 찾았다. 이 나라는 친선 경기가 무슨 뜻인지 모르나? 리그 성적에도 안 들어가고 평일 낮에 열리는 경기를 오만 명이나 보러 온단 말인가. 유리는 북적북적한 관중석에 서서 짜증스러운 숨을 뱉었다. 이래서야 오시프가 꿍꿍이를 꾸미고 있어도 찾을 수가 없잖아. 월리를 찾기는 글렀다.

“상대도 신예가 잔뜩 출전하거든! 어떤 선수들인지 궁금한가 봐!”

아나스타샤가 큰소리로 설명했지만,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유리는 아나스타샤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뭐? 하고 물었고 아나스타샤는 친절히 귀에 대고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상대도 신예가 잔뜩 나온다고! 오만 명이라니. 긴장 좀 되겠는데. 하하.”

아나스타샤는 굳이 유리의 팔뚝을 붙잡고 얘기하는 것도 모자라 소리 내어 웃기까지 했다. 나른한 웃음에 유리는 짙은 욕정을 느꼈다. 도청 중이었다면 벌써 2발은 빼고 남을 목소리였다. 사람을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유리는 고개를 들었다. 귀에 속삭이던 아나스타샤가 입을 다물고 유리를 쳐다봤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시선을 오래 버티지 못했다. 열다섯이나, 스물넷이나 여전히 유연하게 대처하는 법을 모르겠다. 갑갑함을 느끼며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수들이 보였다.

“유리.”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부름에 인상을 썼다. 집요한 인간은 허락 없이 시선도 못 피하게 한다. 눈이 마주치자 아나스타샤가 웃었다. 아름다운 얼굴을 보니 불쾌감이 사그라들었다. 문란하고 성격도 안 맞는 공주를 여태껏 사랑하는 이유기도 했다.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고개를 들이밀었다. 여기서 뭘 하려고? 유리는 몸에 힘을 주며 눈을 감았다.

“자리로 갈까? 곧 경기 시작할 것 같아.”

귓가에 감미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유리는 퍼뜩 눈을 떴다. 긴장했던 몸도 자연스럽게 뒤로 빠졌다. 아나스타샤가 허리에 팔을 둘렀다. 반사적으로 이어지던 동작이 틀어졌다. 유리는 그제야 자신이 아나스타샤에게서 도망가려 했음을 깨달았다.

뭘 기대했어? 뭘 할 줄 알고 긴장했냐고. 유리는 질문의 답을 알았다. 먼저 나쁜 생각을 해서 그런 거 아니야. 눈치챈 게 분명해. 그러지 않고서야 이 여우 같은 인간이 겁도 없이 치댈 리가 있나. 귀가 뜨끈했다. 필시 새빨갛게 익었으리라. 유리가 살벌하게 쏘아봐도 아나스타샤는 능청을 부렸다.

“붙어있으라면서 네가 떨어지면 어떡해? 나 칼 맞으면 어쩌려고.”

“…….”

언제부터 눈치챘지?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능글맞은 말투와 놀림이 부끄럽다 못해 화가 났다. 아나스타샤는 유리가 들끓는 분노를 눌러 담고 있는 걸 알면서도 그가 좋아하는 맑고 투명한 미소를 지어줬다.

놀림당한 유리는 눈썹을 찌푸리며 딱딱한 표정을 굳혔지만, 입꼬리만큼은 아나스타샤의 미소에 반응해줬다. 공주는 씰룩대는 입꼬리를 보며 더 진한 웃음을 지었다. 아아, 이렇게 귀여워서야!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을 좋아했으면 어떡할뻔했어. 나니까 이 정도로 놀리고 말지. 다른 나쁜 남자를 만났더라면 고생했을걸. 아나스타샤는 작살 맞은 물고기처럼 퍼드득대는 유리를 느긋하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가시죠.”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손을 붙잡고 관중을 헤쳐나갔다. 손이 잡힌 아나스타샤는 입술을 입안으로 밀어 넣어야 했다. 어찌나 손을 세게 붙잡았는지 손바닥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라포포르트를 놀리는 대가는 이렇게 아프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다.

“유리. 아야, 나 아픈데.”

놔주면 안 될까. 아나스타샤가 끌려가는 중에 말했다. 그러나 유리는 화 다스리는 데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말소리도 제대로 안 들리는 경기장에서 작은 아나스타샤의 외침이 닿을 리 만무했다.

아나스타샤는 몇 번 더 유리를 부르고 등을 두드렸다. 무용지물이었다. 얌전히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괜히 놀렸어. 아나스타샤는 그제야 자신이 유희를 위해 얼마나 큰 희생―손바닥뼈 골절―을 치루는 지 뼈저리게 느꼈다. 이것도 운명이라면 받아들이자.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부르는 걸 포기하고 잡힌 손을 붙잡았다. 워낙 세게 쥐고 있어서 손가락도 잘 구부러지지 않았다.

앞만 보고 가던 유리가 뒤를 돌아봤다. 아나스타샤는 잡힌 손을 보고 걷느라 유리가 자신을 본 걸 보지 못했다. 유리는 걸음 폭을 좁히며 속도를 줄였다. 손을 쥔 힘이 느슨해졌다.

경기는 자이언츠의 승리로 끝났다. 경기 도중 총알이 날아오거나 괴한이 들이닥치는 일은 없었다. 유리는 인파가 쏠리기 전에 아나스타샤를 데리고 선수 대기실에 내려왔다. 신예들의 데뷔 무대여서 그런지 친선 경기였음에도 대기실 앞에 기자가 드문드문 있었다. 저들 중에서 아나스타샤를 알아보는 놈이 있으면 어쩌지? 유리는 재킷이라도 벗어 아나스타샤의 얼굴을 가려야 하나 고민했다.

“어? 아나스타샤 씨?”

“아나스타샤라고?”

일간지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렸으니 못 알아보기도 어렵다. 어디 아나스타샤의 외모가 신문지에 인쇄됐다고 사그라들 빛인가. 유리는 기자들의 반응에 기뻐하면서도 이걸 어떻게 무마할지 고민했다. 유리의 걱정과 달리 기자들은 아나스타샤를 찍어대긴커녕 조용히 대기실을 보고 섰다.

뭐야. 아나스타샤가 맞는데 반응이 왜 이리 미적지근해? 의아한 마음에 아나스타샤를 쳐다본 유리는 그대로 할 말을 잃었다. 햇빛이 비치는 것처럼 맑게 빛나던 낯이 남색을 띠었다. 아나스타샤를 매체에서 비치는 이미지로만 알았던 사람들에겐 당황스러울 분위기였다. 불쾌감을 내뿜던 아나스타샤가 시선을 느꼈는지 유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들어갈까?”

말 한마디와 함께 아나스타샤의 얼굴빛이 돌아왔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유리를 대기실로 안내했다.

“오늘은 상대해줄 기분이 아니야. 데이트를 방해받고 싶지 않다고.”

그는 선수를 만나기 전, 유리에게 변명했다. 이해하지? 아나스타샤가 뒤를 돌아봤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 스케줄을 데이트라고 명명하는 것은 동의하지 못했다. 미안하지만 데이트가 아니라 사냥이다. 사냥감은 바로 아나스타샤였다.

아나스타샤는 감독과 인사를 나눈 뒤 자신이 후원한 아이를 찾았다. 감독과 공주의 사이가 어찌나 좋은지 감독이 후원자를 대신 불러줬다. 아직도 젖은 티셔츠를 입고 있는 앳된 아이 한 명이 다가왔다. 그는 아나스타샤를 반갑게 맞이했다.

“아나스타샤 씨!”

“미키! 경기 잘 봤어. 대단하던걸.”

“별말씀을요.”

둘만의 세상에 빠진 미키와 아나스타샤는 손을 꼭 잡은 채 얘기를 나눴다. 구단 관계자가 그 모습을 찍기도 했다. 유리는 멀찍이 물러서서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목 뒤가 서늘해지는 감각에 드문드문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불길하단 말이지. 오시프가 오늘이라 했으니 틀림없을 텐데…… 왜 움직임이 없을까. 뭘 기다리는 거야? 유리는 텅 빈 복도를 노려봤다. 예고된 폭풍우는 아무리 기다려도 들이닥치지 않았다.

* * *

주차장으로 가 차에 탈 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유리의 속을 알 리 없는 아나스타샤는 조수석에 앉으며 개운한 숨을 내쉬었다. 시트에 푹 기댄 채 안전띠도 매지 않은 공주는 사이드미러를 확인하는 유리를 빤히 쳐다봤다.

신경이 바깥 어딘가에 잠복해있을 오시프에게 쏠린 터라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유리가 자신을 봐주길 기다리던 아나스타샤는 별수 없이 안전띠를 매고 얘기를 시작했다.

“정신없었어, 그렇지?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니까. 누가 날 툭툭 건드릴 때마다 납치되나 긴장됐는데…… 유리가 옆에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

시동을 걸던 유리가 핸들에 손을 올리며 아나스타샤를 쳐다봤다. 내 덕이라니. 경기 내내 허벅지며 팔뚝을 문대다가 노려보면 키스할 것처럼 대가리를 들이밀면서 반응을 즐기던 사람이 누군데. 남을 괴롭혀서 위안 삼는 변태 새끼 같으니……. 유리는 경멸 어린 시선으로 아나스타샤를 노려봤다. 누가 누굴 나무랄 입장은 아니지만 말이다.

차 안에서도 유리를 잔뜩 골린 아나스타샤는 이제 됐다는 듯 고개를 틀었다.

“집에 가자. 일이 밀렸겠어. 앰버린을 만나려면 요 며칠 힘내야 하거든.”

살인범을 꽁지에 단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돌발 상황이 오면 지나치게 반응하지만 그래도 사건이 끝나면 평범한 일상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그렇게 일이 중요한가. 아니면 올해가 지나기 전에 미국을 떠날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아나스타샤의 출국은 오시프의 마음에 달렸다.

“금방 떠날 생각인가 보지? 일이 바쁘군.”

유리가 물었다. 지쳤는지 창밖만 멍하니 바라보던 아나스타샤가 침음했다.

“당장 내일 범인이 잡힐 수도 있잖아. 경찰이 수사하고 있으니까.”

금방 잡힐 거야. 아나스타샤가 중얼거렸다. 경찰이라……. 뉴욕 한복판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는데도 신문에 한 줄도 올라가지 않았다. 아마 오시프가 끝내기 전에는 범인은 안 잡힐지도 모른다. 뭘 하자는 거야? 유리는 오시프의 속내가 궁금했다. 궁금하다 못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차는 운전자의 마음과 달리 아주 조용히 앞으로 나아갔다.

다비드 시모나로티의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해컨색강을 건너는 도로는 원래 정체가 심한 곳이 아닌데 경기가 끝나 귀가하는 차량이 대거 유입되니 주차장이 따로 없었다. 유리는 핸들에 손을 올린 채 손가락을 튕겼다. 멍하니 창밖을 보던 아나스타샤도 지루했는지 말을 걸었다.

“모리슨을 후원한 지는 5년이 조금 넘었어. 뉴욕에만 후원하는 아이들이 열 명 정도 돼. 마이애미나 LA에도 몇 명 더 있지.”

후원 얘기에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슬쩍 쳐다봤다. 그는 심드렁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얘기를 계속했다.

“나 혼자 관리하기가 힘들어서 말이야, 그래서 재단을 세우는 거야. 가빈 은행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아이들의 재능을 꽃피워주고 싶어.”

아프리카에는 학교와 병원도 지을 거라고.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병원과 학교를 짓고 형편 어려운 영재를 후원해 성대하게 키워 나중에 ‘시모나로티 덕’을 받았다며 감사 인사를 받겠다는 게 목표라면, 참으로 어려운 길을 택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계획이 좋게 들리지 않았다. 재단은 탈세를 반듯하게 만든 말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가업은 어쩌고 재단을 만들어?”

유리가 추궁했다. 처음으로 유리가 재단에 관심을 보이자 아나스타샤가 반가운 기색을 뿜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내 꿈이니까. 아버지도 정정하시니까 30년은 더 하실 텐데? 어차피 가업을 물려받는다면 그 전에 이런저런 일을 해봐도 나쁘지 않잖아? 유리는 그런 꿈 없어?”

“있어. 그래서 했지.”

막혔던 도로가 서서히 뚫렸다. 유리는 대로를 벗어나 시내로 빠져나갔다. 돌아가는 길이지만 대로에 멈춰있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다. 2차선 도로로 들어서자 아나스타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인도가 바로 옆에 있었다. 그는 다시 유리를 응시했다.

“뭔데?”

라포포르트 막내가 꾼 꿈은 뭘까. 파란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힐끔대다 사이드미러를 살폈다. 바로 뒤를 따라와야 할 경호 차량 대신 낡은 승용차가 있었다. 승용차 뒤에 경호 차량이 보였다. 고작 승용차 한 대로 무슨 짓을 꾸미겠냐마는…… 유리는 인상을 구겼다. 뒤도 제대로 못 쫓아오면서 어찌 경호한단 말인가. 다행히 앞차는 붙어있었다.

“독립.”

“아하, 그래서 마이애미에 사는구나?”

독립이 꿈이라니. 달고 있는 성에 비하면 너무 작고 소소한 꿈이었다. 형, 누나들이 못한 무언가를 이루고 싶어서 러시아를 떠나 미국으로 왔거나, 가족이 싫어서 도망쳤다거나. 어느 쪽이든 아나스타샤에겐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뒤를 바짝 붙어 오는 차를 경계하던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부담스러운 시선 때문에 공주 쪽 사이드미러를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독립한 다음은? 이제 뭘 할 생각이야? 회사를 키울 건가?”

아나스타샤는 몸을 운전석 쪽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물론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궁금증을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유리는 높낮이가 달라지는 목소리와 드문드문 튀어나오는 이탈리아 악센트를 감상하며 아나스타샤가 영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얘기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삼거리를 지나는 길이었다. 벤틀리 앞에 까만 SUV가 무자비하게 끼어들었다. 사고가 날뻔했다. 유리는 브레이크를 급히 밟아 속도를 줄이며 차와 간격을 뒀다. 아나스타샤도 갑작스러운 소란에 입을 다물었다. 유리는 사이드미러를 확인했다. 낡은 승용차는 아직도 뒤에 있었다. 앞뒤로 있어야 할 경호 차량을 잃어버렸다.

직감이 경고한다. 오시프가 근처에 있다. 유리는 핸들을 바짝 움켜쥐었다.

그때였다. 재킷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일리야의 휴대전화는 바지 주머니에 넣어놨는데. 유리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내 발신인을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였으나, 저장 안 된 번호로 연락할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유리는 곧장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대뜸 위치부터 물었다. 아나스타샤가 의아한 눈으로 유리를 쳐다봤다. 방금까지 마이애미를 얘기하던 입도 조용해졌다.

[내가 누군 줄 알고, 어디냐고 물어.]

잔잔하고 달콤한 목소리가 격 없는 물음에도 부드럽게 답했다. 고요한 차 안에 상대의 목소리가 잔잔히 울렸다.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대화 내용을 들을세라 라디오를 켜고 덤덤하게 얘기했다.

“나한테 전화할 인간이 형밖에 더 있어?”

[하하, 하아. 유리. 오랜만에 목소리 들으니 좋네. 내가 일이 있어서 입국하고도 보러 못 갔는데, 오늘 볼까? 저녁은 어떠니.]

“시끄럽고. 지금 어디야?”

[어디긴. 뉴욕이지.]

앞으로 벌어질 일을 기대하는 듯한 목소리에 유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미친 인간 장단에 다신 놀아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오시프가 나른하게 웃었다. 그 웃음 뒤로 물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옆에서 오시프에게 말을 건넸다. 소음 때문에 다 듣지 못했지만 “아, 벌써?” 하는 오시프의 반응을 듣고 유추했다.

사냥인지 뭔지 지금 시작하려는 게 분명하다. 유리는 빠져나갈 길을 모색했다. 2차선 도로라 경호 차량이 바로 뒤에 붙기가 애매했다. 일단 큰길로 빠져나가 정비해야 했다. 다음 블록에서 빠져나갈까. 유리는 일단 깜빡이를 켜 경호 차량에 신호를 줬다.

[아, 유리. 준비가 다 됐다는군. 이따 보자고. 내 생각이 절실하면 서랍을 확인해.]

“뭐?”

통화가 끊겼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밑도 끝도 없이, 뭐가 준비되고 이따 보자는 거야? 무슨 일을 준비했는데! 알려줘야 할 거 아냐! 그 ‘사냥’을 말하는 거야? 이 도로 한복판에서 무슨 사냥을……! 끊긴 전화가 다시 울렸다. 경호 팀장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자 그가 가장 가까운 대로를 알려주며 우회 방법을 설명해줬다.

일단 앞뒤로 낀 차부터 치우는 게 급선무였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경호팀은?”

“별거 아냐.”

유리는 통화를 끊지 않고 스피커로 돌려 둔 뒤 아나스타샤에게 건넸다. 경호팀 무전까지 다 들렸다. 두 블록을 더 가서 대로로 빠지면 돼. 유리는 침착하게 사냥꾼을 기다렸다. 오시프의 속셈이 뭐가 됐든 아나스타샤를 데리고 돌아간다.

[뭐야? 제길! 팀장님, 타이어가 터졌습니다!]

후미에 붙은 경호 차량 무전이었다. 앞차에서 스파이크 트랩을- 하는 말이 들렸다. 뒤에서 차가 미끄러지는 소리와 클랙슨 소리가 요란했다. 휴대전화를 들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상황을 살핀 뒤, 불안한 눈으로 유리를 바라봤다.

“별거 아닌 거 맞아?”

“어.”

괜찮고말고. 안 괜찮다고 뾰족한 수가 나는 것도 아니고, 아나스타샤에게 진실을 말했다가 귀찮아지는 건 유리였다. 그는 사이드미러로 멀어지는 경호 차량과 공주가 탄 차 뒤에 바짝 붙은 승용차를 응시했다. 운전석에 앉은 사람의 실루엣이 언뜻 보였다. 오시프가 끌고 다니는 수하는 아니었다. 핸들을 잡은 손이 거칠고 투박했다.

앞 차량도 소란스러웠다. SUV에서 앞 경호 차량에 대고 총을 쏘기 시작했다. 총소리에 놀란 아나스타샤가 흐악! 고함을 지르며 휴대전화를 놓치고 말았다. 아나스타샤는 머리를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그때였다. 뒤에서 총알이 날아와 백미러를 박살 냈다. 거울 파편이 사방으로 퍼졌다.

“하나도 안 괜찮잖아!”

아나스타샤가 소리쳤다.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긴!”

“내가 있잖아.”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쳤다. 백화점 앞에서 차로 납치돼간 것도 쫓아가 지켰는데 바로 옆에서 못 지킬까. 유리는 갈림길이 나오자마자 차를 돌렸다. 앞서가던 경호 차량과 함께 SUV는 떨궜지만, 승용차는 뒤를 쫓아왔다. 백화점에서 아나스타샤를 잡아갔던 블랙베리가 분명하다. 마지막 발악인가? 사이드미러를 응시했다. 총성과 함께 달렸던 사이드미러가 날아갔다. 잘못하면 대가리에 구멍 나게 생겼다.

속력을 높였다. 끊어지지 않은 휴대전화로 경호 팀장 목소리와 총성이 들렸다. 아나스타샤는 으아, 으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최대한 몸을 숙였다. 한산한 대로가 눈에 들어왔다. 대로에 들어선 유리는 차 사이사이로 끼어들며 승용차를 따돌렸다.

타앙! 총성이 울렸다. 순행하던 차들이 총성에 놀라 비틀거렸다. 저들은 오늘을 마지막 기회로 삼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나스타샤를 잡을 것이다. 목적지였던 시모나로티 저택으로 돌아가봤자 경호원들이 모두 아나스타샤를 따라 나왔기에 위험했다. 어린아이와 민간인이 있으니 피해야 한다. 사무실이 있는 브루클린으로 가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벤틀리를 놓친 블랙베리 승용차는 아무 차에 총을 갈기기 시작했다. 우레 같은 총성이 계속되자 차들이 멈춰 서기 시작했다. 유리는 급정거하는 차를 따라 브레이크를 밟았다.

“제길!”

서둘러 핸들을 돌렸다. 멈춘 차 사이로 오토바이 여러 대가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었다. 뒤에 총을 든 사람까지 태운 오토바이는 벤틀리를 포위하려 들었다. 유리는 장애물이 많은 차도를 벗어나 인도로 올라섰다.

정면에 사람이 그득했다. 인도니 당연히 사람이 많았다. 유리는 클랙슨을 누르며 액셀을 밟았다. 사람들이 놀라 비켜섰다. 인도를 벤틀리가 질주했다. 그 뒤를 오토바이가 쫓아왔다. 빌어먹을. 유리는 핸들을 한 손으로 잡고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냈다. 양쪽 창문을 내리고 오토바이가 다가올 때를 대비했다.

차도였으면 먼저 쏴서 따돌렸겠지만 언제 사람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인도를 달리는 터라 운전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두 명씩 탄 오토바이는 도망치기만 하는 벤틀리를 쉽게 조준했다. 총을 갈겨대면 차체에 구멍이 났다.

“흐아악! 유리이!”

“시끄러워! 도망가고 있잖아!”

“어, 어디로 가는데?”

그러게. 어디로 가야 하나. 바닥에 떨어진 유리의 휴대전화는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 유리는 인도를 벗어나 좁은 길로 숨었다. 쫓아오는 오토바이 뒤로 검은색 SUV가 등장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죽일 듯이 쫓아와?”

소란이 잠잠해지자 아나스타샤가 억울해했다. 정말 날 죽일 생각이야? 왜! 아나스타샤의 눈가가 눈물로 축축했다. 그야, 진짜 죽일 각오를 해야 머리채라도 붙잡을 테니까. 블랙베리에겐 아나스타샤는 덤이었다. 목표는 오시프에게 통할 유일한 협상 카드인 유리였다.

멍청한 새끼들. 오시프의 물건에 총구를 겨누기만 해도 보복당할 텐데 그 자식이 애지중지 키웠던 막냇동생도 똑같다는 걸 왜 모르지? 갱단이 보스와 이리도 끈끈할 줄 누가 알았단 말인가.

어디로 가야 하지. 유리는 강을 향해 달렸다. 오시프와 통화할 때 들렸던 물소리를 무의식적으로 쫓고 있었다. 언제 형의 그늘에 벗어날 수 있을까. 오시프가 원망스러웠다. 문득, 자기 생각이 간절하면 서랍을 열어보라는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아냐. 서랍 열어봐.”

유리가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겨우 조수석 서랍을 열었다. 산소캔 두 개가 들어있었다.

“이게 뭐야?”

산소캔 폭탄이야? 아나스타샤가 산소캔을 양손에 들고 물었다. 평범한 산소캔일 것이다. 설마 저걸 입에 물고 강을 헤엄쳐 오라는 건 아니겠지. ‘설마’가 붙는 일은 대부분 맞았다. 내가 사고 친 것도 아닌데 그냥 도와주면 덧나? 어디 처박혀있다가 나타나서 사람 속을 뒤집어 놔?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브루클린은 멀었고, 시모나로티의 저택은 위험했다.

“아나스타샤.”

“응?”

“수영 좀 하나?”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유리를 보던 아나스타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물론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수영 대회에서 딴 메달 개수까지 알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 아니야! 난 수영장에서, 바다에서나 수영했다고!”

“강도 똑같아.”

안 똑같아! 아나스타샤가 울부짖었다. 유리는 경쾌하게 차를 몰았다. 눈앞에 허드슨강 공원이 보였다.

공원에서 한가로이 강아지를 산책시키던 사람들은 갑작스레 튀어나온 하얀 자동차의 등장에 놀라 도망쳤다. 잔디밭에 누워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개척자 유리는 인도를 넘어 나무가 우거진 숲까지 치고 들어가 리버 로드 위로 올라왔다.

차가 쉴 틈 없이 덜컹거렸고 오토바이가 총을 갈겨댔다. 아나스타샤는 문손잡이를 꽉 잡은 채 몸을 수그리고 이 지옥 같은 드라이브가 끝나길 기도할 뿐이었다. 총알에 창문이 깨져 아나스타샤 위로 유리가 쏟아졌다.

“흐악!”

“거의 다 왔어.”

아나스타샤의 비명에 유리는 반사적으로 그를 달랬다. 거의 다 왔으니까 조금만 참자, 같은 네 살짜리를 달랠 때 쓰는 말이 튀어나왔다. 뭐, 네 살이든 마흔 살이든 총을 든 괴한한테 쫓기면 누구든 똑같은 반응이겠지만. 유리는 전면 유리창에 총알이 박히는 상황인데도 보호가 과했나 싶어 머쓱해했다.

오토바이 하나가 겁도 없이 운전석으로 돌진했다. 유리는 기다릴 것도 없이 총을 겨눠 운전자의 몸통에 총알을 박아넣었다. 총상을 입은 오토바이 운전자는 비틀거리며 멀어졌다. 뒤를 쫓던 SUV가 기세등등하게 옆으로 붙어 섰다. 유리는 남은 총알을 모두 쐈으나 방탄 차량인지 총알이 유리에 맞아도 뚫지 못했다.

“제길.”

“왜, 왜! 무슨 일이야. 유리!”

“산소캔이나 잘 챙겨!”

유리는 피크닉장으로 들어가는 도로를 탔다. 쭉 뻗은 도로와 우거진 녹음이 아름다운 길이 데이트 코스로 손색없어 보였으나 오토바이 두 대와 SUV에 쫓기는 신세였다. 도로가 끝나자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뜨거운 여름 볕에도 아이를 데리고 나온 가족들이 있었다. 유리는 클랙슨을 울리며 잔디 위를 달렸다.

“유리!”

“나도 알아!”

아나스타샤가 고함을 내질렀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오토바이와 SUV도 끈질기게 유리를 추격했다. 아나스타샤는 차가 향하는 곳을 똑바로 쳐다봤다. 눈앞에는 허드슨강이, 옆으로는 조지워싱턴교가 보였다. 유리. 아나스타샤가 다급하게 유리를 부르며 산소캔을 양손에 꽉 쥐었다.

“진심이야? 미쳤어? 강은 수영장이랑 달라!”

“그럼 뒤로 돌아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총성이 들렸다. 흐악!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숙였다. 강에 빠져 죽느냐 벌집이 돼서 죽느냐……. 아나스타샤는 1분이라도 더 살고 싶었다.

“여기서 죽으면 다 네 탓이야!”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저주에 웃기 바빴다. 아나스타샤가 죽으면 날 원망하겠군! 살아서는 내가 갖지 못했지만, 죽어서는 나만 쫓아다닌다는 소리 아닌가. 그러면 내가 감시당하는 신세가 되겠어. 보이지 않는 아나스타샤와 같이 살아가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러든지.”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만의 아나스타샤라니.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고백에―저주에 가까웠지만― 탄력을 받아 액셀을 힘껏 밟았다. 강이 코앞에 있었다. 돌로 쌓은 담을 손쉽게 넘어섰다. 차가 허공에 떴다. 아나스타샤는 창밖으로 펼쳐지는 강물을 응시했다. 차가 강에 처박혔다. 차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와, 물 위를 달리네. 아나스타샤는 실없는 생각을 하다, 문득 이 차의 주인이 떠올랐다. 그는 핸들로 손을 뻗으며 유리의 독주를 막았다.

“유리이! 차를 수장시킬 생각이야?”

“차까지 못 끌고 가.”

“안 돼. 안 돼! 형이 빌려준 거라고!”

“똑같은 거로 사주면 되잖아.”

보닛 위로 물이 넘실거렸다. 강물이 가까이 보였다. 다비드의 자동차는 앞으로 나아간 만큼 강바닥으로 끌려들어 갔다. 부서진 창문으로 물이 들어왔다. 아나스타샤는 주님께 굽어살펴달라며 간절히 기도했다.

유리는 뒤를 쳐다봤다. SUV가 따라오고 있었다. 끈질기네. 유리는 권총의 탄창을 갈아 끼우고는 아나스타샤를 응시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벌써 허리까지 물이 차올랐다. 엔진에도 물이 찼는지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물에 잠긴 유리창 밖으로 시커먼 강물 속이 보였다. 그는 아나스타샤 손에서 산소캔을 뺏었다. 정신을 차린 아나스타샤가 급히 안전띠를 풀었다.

“헤엄치다가 총에 맞으면 어떡해?”

“충분히 멀어질 때까지 수면 밖으로 나오지 마.”

“이거로 버티라는 건 아니지. 응? 이, 이거로 되겠어?”

아나스타샤가 산소캔을 흔들었다. 이럴 때 쓰라고 만든 것도 아니잖아! 때마침 뒤에서 총알이 날아와 정면 유리창에 박혔다. 안 그래도 너덜너덜해진 유리창에 총알이 또 박히자 대각선으로 긴 금이 갔다. 쩌적, 하고 유리가 속부터 깨지는 소리에 아나스타샤의 칭얼거림이 멈췄다.

공원 쪽에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왜 이제 와! 늦었어! 벌써 허드슨강에 처박혔다고! 아나스타샤는 강물에 젖은 손으로 젖은 눈가를 닦았다. 물이 어깨까지 차올랐다. 둘은 천장 쪽으로 목을 내밀며 마지막 숨을 들이쉬었다.

“곧장 앞으로 가.”

“넌, 넌 할 수 있어?”

허드슨강의 폭은 1km가 넘는다. 아나스타샤는 강을 맨몸으로 산소통도 아니고 산소캔 하나를 가지고 건너는 것은 자신 없었지만, 시체로 떠오르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어릴 때부터 물은 공주의 친구였다. 그에 비해 유리 실력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훈련받은 용병이라 해도 해도 1km를 헤엄치기는 버거울 것이다. 그러나 유리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물귀신 돼서 쫓아갈까 봐?”

“아니야!”

물귀신이라니! 아나스타샤가 버럭 화를 냈다. 그들은 더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허드슨강이 차를 집어삼켰다. 차는 강바닥에 가라앉는 중이었다. 유리가 먼저 차에서 내려 조수석 쪽으로 이동했다. SUV에서 내린 괴한 둘이 헤엄을 쳐 다가오고 있었다. 물속이라 총도 무용지물이었으나 마구잡이로 총을 갈긴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꺼내 도망쳤다.

산소캔은 있으나 마나 한 준비물이었지만 둘은 필사적으로 캔 주둥이에 입을 대고 산소를 마셨다. 저들이 못 쫓아올 만큼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유리는 뒤를 돌아봤다. 하얀 차체가 뿌옇게 보였고, 그 앞으로 열심히 헤엄쳐 오는 놈들이 보였다.

진짜 끈질기네. 성질대로였으면 돌아가 죽였겠지만, 앞만 보고 헤엄치는 아나스타샤가 있었기에 서둘렀다. 강을 건너고도 쫓아온다면 그때 처리하면 된다. 유리가 돌아설 때였다. 뒤쪽에서 굉음이 들렸다. 아나스타샤와 유리는 놀라 뒤를 돌아봤다. 차가 폭발해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말았다. 운 좋게도 아나스타샤와 유리는 폭발 범위를 벗어나서 잔해물을 피할 수 있었다.

그들을 쫓아오던 괴한은 폭발에 휩쓸려 사라지고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차에 물이 들어가서 폭발한 건지, 총을 너무 많이 맞아서 과부하가 온 차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터진 건지 여러 가설을 세우면서도 팔다리를 휘젓는 걸 잊지 않았다.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조지워싱턴교는 피크닉장에서 본 것보다 더 멀어져 있었고, 하늘엔 노을이 져가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물을 닦아내며 건너온 곳과 앞으로 건너갈 곳을 두리번거렸다. 어째 건너왔던 쪽이 더 가까운 것 같았다.

“유리. 해지기 전에 건널 수 있겠어?”

아나스타샤가 숨을 몰아쉬는 유리에게 물었다. 유리는 말없이 앞을 응시했다. 허드슨강에 빠진 둘은 이곳이 강이 아니라 바다처럼 느껴졌다. 그것도 앞뒤로 신기루가 일렁이는 망망대해 말이다.

“죽기 싫으면 건너야지. 등대가 있으니 상관없잖아.”

“뉴욕 도심에 등대가 어디 있어.”

아나스타샤가 따졌다. 아나스타샤도 해가 지면 빌딩 불빛을 좇아 헤엄치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의뢰인을 위험천만한 상황에 빠트린 것에 대한 화풀이였다. 유리는 젖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아나스타샤의 투정을 듣는 척도 안 했다.

“가자.”

아나스타샤는 등 뒤를 마지막으로 돌아봤다. 사이렌 소리는 들었는데 허드슨강을 탐색하는 보트는 없었다. 그만한 소동이 났으면 경찰을 보낼 법도 한데…….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그사이 유리가 먼저 물살을 가르고 앞으로 나아갔다. 아나스타샤가 뒤늦게 뒤를 쫓았다.

살았으면 됐지. 경찰이 꼭 강을 수색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여태 물속에서 헤엄쳐서 보트가 못 찾고 돌아간 걸 수도 있다. 아나스타샤는 나름대로 상황을 만들어 경찰을 이해하려 했다. 잠수부도 데려오지 않았단 말이야? 강 속에서 차가 터졌다고! 납득하고 싶어도 무능한 공권력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나스타샤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멀리서 보트 엔진 소리가 들렸다. 유리는 헤엄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쪽을 응시했다. 수색 보트가 아닌 요트 한 대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 뒤에 바짝 붙어 반가워했다.

“다행이야, 뭍까지 태워달라고 하자. 정말 허드슨강을 헤엄쳐서 건널뻔했어.”

“누군 줄 알고 태워달라고 하재? 저게 살인범 요트면 어쩌려고?”

유리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여도 아나스타샤는 태평하게 웃었다.

“음, 유리가 지켜주지 않을까?”

“……흥. 입에 발린 말은 잘도 하는군.”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대책 없는 계획에도 무한한 신뢰를 받았다는 생각에 공주가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돌리고 불쑥 솟으려는 웃음을 참았다.

아나스타샤와 유리를 발견한 요트가 그들 앞에서 시동을 껐다. 요트는 물살에 의지해 아주 느리게 흘렀다.

“오우! 여보! 여기 봐요. 사람이 강에 빠졌어요!”

요트에서 높고 날카로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하고 외치는 목소리는 요란했는데 받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남자 한 명이 여보, 여보. 하며 요트 위를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침을 삼키며 유리의 등에 손을 댔다. 유리가 말한 대로 정말 사람이 탄 요트거나 살인범의 요트일까 봐 두려웠다.

누군가 머리를 내밀었다. 짙은 노을에 얼굴의 절반은 붉고 절반은 그늘져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선이 얇고 비율이 좋은 남자였다. 모델이나 연예인을 하면 좋을 법한 실루엣에 아나스타샤는 호감을 느꼈다.

“이런, 정말 사람이 빠졌네. 페탸, 요트를 앞으로 조금만 더 빼.”

목소리는 어찌나 아름답고 고운지 긴장과 걱정이 씻겨나갔다. 아나스타샤는 요트 위의 남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살았다. 집에 갈 수 있음에 안도했다. 요트에서 튜브를 던져줬다. 아나스타샤와 유리는 요트가 멈출 때까지 튜브를 붙들고 기다렸다.

요트가 닻을 내렸고, 아나스타샤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얼마 만에 밟는 땅인지! 그는 엉금엉금 기어 올라와 바닥에 널브러졌다.

“괜찮나요? 어쩌다가 강에 빠졌어요?”

잔잔하고 감미로운 목소리의 남자가 아나스타샤에게 모포를 건네며 물었다. 아나스타샤는 모포를 몸에 두르고 겨우 등을 기대고 앉았다.

“하하, 말하자면 길죠…….”

말할 기운도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눈을 감았다. 물을 잔뜩 먹어서 배는 불렀고 옷도 젖어서 무거웠다. 아직도 물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남자는 아나스타샤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유리도 요트 위로 올라왔다. 남자의 동행이 유리에게 모포를 건넸으나 유리는 본체도 않고 아나스타샤 쪽으로 걸어와 남자가 공주를 보지 못하게 앞을 가로막았다.

“유리?”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올려다봤다. 유리의 덩치가 시야를 가려서 남자의 자세한 모습까진 볼 순 없었지만, 발은 그대로 있었기에 남자가 겁먹지 않고 유리 앞에 서 있음을 유추할 수는 있었다.

“유리, 도와주신 분한테…….”

“수영 잘하던데, 유라. 그냥 강 건널 때까지 지켜볼 걸 그랬나 봐.”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무례를 지적하기 전에 남자가 말했다. ‘유라’는 유리의 애칭인 듯했다. 유리는 남자가 친근하게 말을 붙여도 묵묵부답이었다. 하하……. 남자가 웃으며 유리의 볼을 손으로 다독였다. 기이한 안부가 이어졌다. 아나스타샤는 서둘러 요트를 둘러봤다. 요트에는 그 남자 말고도 남자 둘이 더 있었다. 둘 다 남자보다 키가 한 뼘은 큰 장정들이었다.

그들은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유리와 오시프를 주시하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야?”

살벌한 분위기에 압도된 아나스타샤는 모포를 꽉 쥔 채 물었다.

“그럼.”

유리가 아닌, 남자가 옆으로 고개를 내밀며 대답했다. 하늘이 어두워지자 요트에 불이 커졌다. 어스름하게 보이던 남자의 얼굴이 조명을 받으며 빛났다. 유리가 천천히 몸을 돌려 아나스타샤를 마주 봤다.

“내 친형이야.”

피를 나눈 사이라고는 생각이 안 드는 미인을 ‘친형’이라고 소개한 유리의 표정은 아나스타샤가 보수를 운운하며 아랫도리를 만졌을 때처럼 일그러졌다.

저 남자가 정말 친형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유리는 밀 빛 금발에 회색 눈을 가졌고 키도 190cm쯤 되는 건장한 청년인 것에 비해 친형은 180cm도 안 되어 보이는 작은 키에―상대적으로 작다― 검은 머리카락과 파란 눈을 가졌다. 거기다가 인상도 확연히 차이가 났다. 유리가 겨울잠에서 막 깬 곰 같다면 그의 형은 식사를 배부르게 한 맹수처럼 보였다.

아나스타샤가 눈만 꿈뻑이며 유리와 오시프를 번갈아 쳐다보기만 하자, 유리가 한숨을 푹 쉬었다.

“오시프야.”

“오시프? 아, 오시프 라포포르트 씨군요?”

사실 아나스타샤는 라포포르트와 교류하는 편도 아니었으며 라포포르트의 형제들 이름을 다 외우지도 못했기에 유리가 소개한 이름에 성을 붙여 말하며 아는 척하는 게 전부였다. 공주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오시프에게 악수를 청했다. 오시프는 아나스타샤의 내민 손에 눈길도 주지 않고 아나스타샤를 노려봤다.

인사도 안 받아줄 만큼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나? 아하, 혹시 유리가 날 좋아해서? 아나스타샤는 바보가 아니었기에 오시프가 자신을 적대시하는 이유를 금세 파악했다. 알파끼리 교제를 허락하지 않는 집안에서 막냇동생이 알파를 좋아하니 싫을 법도 하다. 아나스타샤는 능청스럽게 손을 내리며 말을 돌렸다.

“어떻게 여기서 만났는지, 신께서 도우셨네요.”

기도가 통했나 봅니다. 아나스타샤가 친근하게 웃으며 오시프에게 호감을 사려 했다. 아나스타샤의 노력을 가엽게 여긴 오시프는 사교적인 미소로 화답했다. 나쁘지 않은 시작이다. 아나스타샤는 오시프와 친분을 쌓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옆에서 지켜보던 유리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오시프의 미소가 몹시 불안했다.

“어쩌다가 강에 빠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와요.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내오죠.”

오시프가 아나스타샤를 요트 내부로 안내했다. 아나스타샤는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고 오시프를 따라 들어갔다. 유일하게 오시프를 경계하던 유리가 깜짝 놀라 아나스타샤를 붙잡으려고 손을 뻗으려다 말았다. 오시프가 아나스타샤를 기다리는 척 돌아선 채로 유리를 빤히 쳐다봤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새파란 눈이 징그러웠다. 아나스타샤랑 비슷한 색이면서 분위기는 딴판이었다. 나는 파란 눈이 싫어. 유리는 오시프를 노려보며 속으로 흉봤다.

내부는 에어컨을 켜서 가을 날씨처럼 선선했다. 아나스타샤는 물에 푹 젖은 재킷과 셔츠를 벗었다. 유리는 못마땅하게 아나스타샤를 쳐다봤다. 오시프가 자리를 비우면 조심하라고 경고라도 했을 텐데. 허드슨강 위에서 조우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연히 강 건너에서 만날 줄 알았는데…… 거기다 뉴욕에 있었으면서 퀘벡이니 보스턴이니 거짓말을 했겠다. 유리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유리, 안 벗고 뭐 해? 젖은 채로 있으면 감기 걸린다.”

여벌 옷을 꺼낸 오시프가 팔짱을 끼고 자신을 무섭게 노려보는 막냇동생을 보며 다정하게 얘기했다. 유리는 다정이 강요임을 잘 알았다. 더 버텼다가는 아나스타샤의 살가죽을 벗겨 덮어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짜증 나는 인간. 유리는 욕하면서도 순순히 옷을 벗었다.

무슨 생각으로 준비했는지 모를 새하얀 반바지와 반팔을 입은 아나스타샤와 유리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맞은 편에 앉은 오시프를 힐끔댔다. 그들 앞에는 김이 올라오는 차가 한 잔씩 놓여있었다. 호의를 거절하는 법을 모르는 아나스타샤가 가장 먼저 찻잔에 입을 댔다.

“야, 그게 뭔 줄 알고 막 마셔?”

놀란 유리가 아나스타샤의 손목을 붙잡으며 물었다. 벌써 한 모금 마신 아나스타샤가 입맛을 다셨다. 동그랗게 뜬 눈은 ‘무슨 소리’냐고 반문했다. 일반인이 들으면 이상한 질문이겠으나 오시프와 한평생을 같이 살아온 유리에겐 당연했다. 가족이라 할지라도 상대가 마시기 전까진 마시면 안 된다.

“하하하, 내가 설마 아나스타샤 씨 잔에 독을 탔을까 봐?”

“아니야? 형은 왜 안 마시는데.”

형제 싸움에 낀 아나스타샤는 팔이 잡힌 채로 두 사람의 눈치를 봐야 했다. 유리는 왜 날이 섰을까. 친형제라면서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닌가. 오시프를 단순히 싫어해서 불쾌해한다고 하기엔, 몸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흡사 천적을 만난 짐승 같았다.

“아, 뜨거워서 식히는 중이었지. 샤샤가 펄펄 끓는 물을 부었지 뭐니.”

오시프가 변명하며 찻잔을 들었다. 여전히 김이 올라왔지만, 확인시켜주듯 차를 홀짝였다. 몇 모금을 마신 오시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이제 됐냐는 듯 웃었다. 그제야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손목을 놔줬다. 차가 안전하다고 판단한 유리도 따뜻한 차를 단숨에 마셨다.

어수선한 티타임에도 아나스타샤는 살았다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려 소파에 등을 편히 기댔다. 괴한한테 쫓기고 수영까지 해서 그런지 잠이 쏟아졌다. 아나스타샤가 팔을 힘없이 떨구고 늘어진 걸 확인한 오시프가 다리를 꼬고 앉으며 유리에게 물었다.

“그래서 데이트는 즐거웠니?”

“무슨 데이트야. 그냥 경기 관람…….”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혹시나 이번 일에 라포포르트가 관여했다는 걸 눈치챌까 봐 다급하게 아나스타샤를 힐끔댔다. 공주는 잠들어있었다. 편하게 풀어진 얼굴을 목격한 유리가 오시프를 매섭게 노려봤다.

“뭘 탄 거야? 개수작 부리지 마!”

“개수작이라니, 섭섭하네. 너도 한숨 자. 오늘 피곤했잖아?”

“싫어. 네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순간 눈앞이 핑글 돌았다. 유리는 말을 멈추고 고개를 떨궜다. 피로가 급습했다. 머리를 기대면 그대로 기절할 것 같았다. 잠들면 안 돼. 내가 아니면 누가 아나스타샤를 지키는데? 잠든 사람을 강에 던져버릴 사람이라고. 유리는 잠들지 않으려 애썼다.

오시프가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라, 내가 무슨 짓을 한다고 그러니. 정말 죽길 바랐으면 너만 건졌겠지. 아나스타샤는 물고기 떡밥으로 주면 나나 너나 편하잖아. 안 그래?”

오시프는 목도 제대로 못 가누는 유리를 소파에 기대게 자세를 잡아주고 아나스타샤 손 위에 손을 겹쳐줬다.

“자, 형이 눈 감아 줄 테니까 아나스타샤랑 단란하게 자란 말이야. 한숨 자고 일어나서 늦은 저녁을 먹든지.”

“…….”

다정하게 웃는 형제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었지만, 눈을 뜨고 있는 것도 힘겨웠다. 뇌가 쇳덩이가 된 것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유리는 아나스타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든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오시프가 유리의 머리를 아나스타샤 쪽으로 밀어줬다. 이 인간이 대체 왜 이래……? 의문이 가득했으나 머리가 어깨에 닿자마자 잠들고 말았다.

아나스타샤의 존재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 * *

하하하…….

……했다고요? ……라니. 유리가?

달그락거리며 부딪히는 식기.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잠든 유리를 깨웠다. 익숙한 톤으로 ‘유리’를 말하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아나스타샤 목소리가 왜 밖에서 들리지? 유리는 눈을 뜸과 동시에 밖으로 뛰쳐나왔다.

선상 위 테이블에 앉아 느지막한 저녁을 즐기던 오시프와 아나스타샤는 성난 얼굴을 하고 등장한 유리를 한참 쳐다봤다. 잔잔한 파도를 노래 삼아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데 불청객이 끼어든 꼴이 됐다.

오시프 옆에 앉은 아나스타샤를 발견한 유리가 삿대질하며 화를 냈다.

“너는 왜 거기 있어?”

“아, 일어났는데 너는 자고 있고 오시프 씨가 저녁 먹지 않겠냐고 해서.”

먹고 있었는데. 기다릴 걸 그랬나. 아나스타샤는 말끝을 흐리며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놨다. 정말 식사 중이었는지 따뜻한 음식이 테이블에 가득했다.

“유라, 너도 이리 와서 앉아. 강 건너느라 힘 뺐을 텐데.”

누구 때문에 강을 건넜는데! 오시프의 태평스러운 권유에 유리는 인상을 구겼다. 아나스타샤가 빈 의자를 밖으로 빼주며 배고프잖아, 유리. 하고 거드는 탓에 버티고 서있을 수도 없었다. 불만 가득한 얼굴로 아나스타샤와 오시프 사이에 앉은 유리는 빵을 집으며 오시프를 노려봤다.

무슨 꿍꿍인지는 몰라도 아나스타샤를 건들면 가만 안 두겠다는 경고였으나, 오시프에게는 겨우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막냇동생의 귀여운 패기로만 보였다. 오시프가 술을 권하면, 아나스타샤는 의심치 않고 술을 마셨다. 가운데 앉은 유리만 낯을 굳히며 오가는 술잔을 쳐다봤다.

“무슨 얘기 중이었어?”

오시프가 어떤 헛소리를 했는지 알고 싶어서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술을 먹던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질문에 아, 무슨 얘기를 했냐면…. 하고 운을 뗐다.

“네가 어렸을 때 사슴 사냥을 나갔다가 비 맞고 감기에 걸린 얘기를 하는 중이었어. 사슴을 잡고 네가 끌고 가겠다고 우겼다며?”

“……그랬나 보지.”

“그리고 또 네 사격 실력이 대단하다고 들었지. 올림픽에 나갔으면 메달을 쓸었을 실력이라고 말이야. 그건 나도 봐서 알지만…….”

낯간지러운 칭찬에 유리는 오시프를 힐끔 쳐다봤다. 그런 말 할 인간이 아닌데. 아나스타샤 앞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오시프가 아나스타샤에게 자신을 흉보거나 자신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면 불구로 만들어버리겠다고 협박하는 대신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니. 유리는 믿을 수가 없었다.

“여기가 미국이라 참 아쉬워. 러시아였으면 유리의 옛날 사진까지 보여줬을 텐데.”

오시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뒤에서 대기하던 남자가 담뱃불을 켜줬다. 오시프는 익숙하게 남자가 켠 불로 불을 붙이고는 연기를 내뿜었다. 오시프의 시선은 유리에게 가 있었다. “나 정말 아무 짓도 안 했다.”라고 말하는 눈빛이 짜증 났다.

“어릴 때 사진이라니. 그때 유리는 참 예쁘다고 들었는데 말이에요.”

“그럼, 예쁘지. 얼마나 예뻤는지 몰라. 지금도 예쁘지만.”

당사자를 가운데 놓고 예쁘네, 어쩌네 하는 대화가 껄끄러웠다. 유리는 일부러 동작을 크게 하며 포크로 고기를 찔러 먹었다. 부담스러운 시선 두 개가 유리를 빤히 쳐다봤다. 익숙한 불쾌감을 주는 눈빛 하나, 낯선 간지러움을 주는 눈빛 하나…….

“이반은 형이 보스턴에 갔다고 했는데 언제 돌아온 거야? 연락이라도 하지 그랬어. 이반은 형이 언제 오나 좌불안석이던데.”

“으흠? 여행 좀 다녔지. 언제 또 미국에 오겠어. 이반이 출장 간다기에 따라온 것뿐이야.”

“그래서 보스턴에서 무슨 구경을 했어?”

“보스턴?”

장난 가득한 고양이 같은 얼굴을 하던 오시프가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무슨 소릴까. 나는 계속 뉴욕에 있었는데.”

그는 도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까지 옆으로 기울였다. 능구렁이 새끼. 속에 1000년 묵은 뱀이 들어있는 게 분명하다.

“뉴욕에서 뭐 하고 있었길래 꽁무니도 안 보여?”

“보면 모르겠어? 요트 탔지.”

“계속?”

“그래. 계속.”

믿으라고 하는 소리야? 낯빛 하나 안 바뀌고 거짓말을 해대는 오시프에게 화가 났지만,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었기에 유리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신경전에 안절부절못하던 아나스타샤가 술병을 들어 오시프에게 내밀었다. 오시프의 시선이 아나스타샤를 향하며 기묘하게 끓던 분위기가 풀어졌다.

“뉴욕 바다도 볼만하죠. 롱아일랜드 해협도 가보셨나요?”

“그럼요. 바다를 둘러보고 허드슨강을 따라 올라가는 참이었죠. 그러는 중에 물에 빠진 내 동생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야.”

술을 받은 오시프가 유리를 힐끔대며 얘기했다. 우연히 만난 것처럼 간사하게 구는 모습이 얄미웠다. 웃기고 있네. 여태 기다리다가 시체 건지러 왔는데 둘 다 살아있어서 아쉽다고 하는 편이 오시프다웠다.

“잠깐 나 좀 봐.”

오시프의 거짓말을 들어줄 수 없던 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시프는 아나스타샤가 따라준 술을 들이켠 뒤 유리를 따라 일어났다. 라포포르트 형제가 자리를 비운 곳에 덩그러니 남은 아나스타샤는 올리브를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찰랑이는 물결과 멀리 보이는 뉴욕 야경이 수면에 비쳐 반짝이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요트 뒤편으로 자리를 옮긴 유리는 드디어 오시프에게 따질 기회를 얻었다. 그는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오시프를 내려다봤다. 오시프는 담배를 물고 어리고 사랑스러운 자신의 막냇동생을 올려다봤다.

“대체 뭐하러 왔어? 아나스타샤랑 나를 왜 갑자기 못 엮어서 안달이냐고.”

“아나스타샤 좋아하잖아. 엮이면 좋은 거 아닌가?”

“지금 아나스타샤가 어떤 상황인지 알아?”

“모르지. 나는 오늘 아나스타샤 시모나로티를 처음 봤거든.”

실물을 보고 직접 말한 게 처음이겠지. 오시프도 유리 못지않게 아나스타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아나스타샤의 성생활까지 꿰뚫고 있으니 어찌 보면 오시프가 유리보다 많이 알고 있겠다.

대체 어느 부분에서 심기가 틀어져 살인 사건을 조작하고 경찰에게 뇌물까지 먹이며 아나스타샤를 괴롭힌단 말인가. 유리는 자신의 행적을 곱씹었다. 아나스타샤를 구경하기만 했지, 그의 앞에 나타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좋지 않았어? 아나스타샤랑 키스도 하고 ……뭐, 별짓을 다 하던데. 그게 네가 원하던 거였잖아.”

“그런 적 없어.”

유리가 부정하자 오시프는 말없이 담배 연기를 빨아 마셨다. 요트가 출렁였다. 침묵을 못 견디는 쪽은 유리였다. 그는 먼바다를 응시하며 말을 돌렸다.

“홍밍 때문에 아나스타샤를 이용한 거야?”

“뭐, 겸사겸사. 너도 좋았지?”

“안 좋았…….”

오시프가 유리의 입에, 피우던 담배를 물렸다. 축축한 필터가 입술에 걸렸다. 또 거짓말했다가는 혼날 거야. 무언의 경고였다. 혼날 사람은 선상에 나와 있는 아나스타샤겠지. 순간 몸에 힘이 들어갔다. 왕래가 뜸해서 잊고 지냈다. 오시프는…… 미친놈이다.

“무슨 꿍꿍인지 네가 궁금해하니 말해줘야지. 나는 여전히 네가 아나스타샤 뒤나 쫓아다니는 게 싫어. 마음 같아서는 아나스타샤를 갈아서 바다에 뿌리고 싶지만……. 그러면 네가 날 안 볼 테니까.”

오시프는 아나스타샤를 갈아버리지 못해서 유감이라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 갈아보라고 도발했다가는 손수 한 포 한 포 떠서 던져버릴 기세였다. 그는 동생의 볼을 다독이며 상냥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못 갖게 하니까, 포기를 못 하나 싶어서.”

“…….”

“신경 안 쓸 테니 네가 하고 싶었던 짓 다 하고 오도록 해.”

공원에, 키우는 개를 풀어주듯 오시프는 자비로운 눈빛으로 유리를 응시했다. 사람을 거북하게 만드는 데에 특출난 재능을 가졌다. 유리는 고개를 뒤로 빼며 오시프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형이 허락할 테니 아나스타샤와 섹스를 하든 연애를 하든 마음대로 하란 얘기다.

이제 와서? 꼭 본인 때문에 내가 여태 아나스타샤를 넘보지 못하고 뒤에서 음침하게 조사하며 마음을 달랜 것처럼 얘기했다. 어느 정도 오시프의 입김이 작용한 건 사실이지만, 유리가 정말 아나스타샤를 원했다면 억지로라도 데려왔을 것이다.

거만하기 짝이 없는 배려다. 그럼에도 유리는 기회를 흘리지 않았다.

“아나스타샤가 나한테 박아도 상관없다, 이거지?”

“……유라, 넌 알파야.”

느긋하던 오시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유리는 모르는 척 바다를 보고 섰다. 새카만 바다가 명계로 들어가는 강처럼 보였다. 오시프가 꽂아둔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형이 날 이렇게 생각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고마워, 형. 마음껏 할게.”

달빛에 비친 오시프의 파란 눈은 살기로 번들거렸다. 유리는 막내답게 철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말을 할 땐 제대로 해야지. 아나스타샤와 교제를 허락할 위치도 아니거니와 유리 또한 말을 잘 듣겠다고 울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몇 년을 안 보고 살다 오랜만에 만난 건데도 화가 나는 걸 보면 나는 오시프를 정말 싫어 하나 봐. 오시프에게는 유리의 성장이 눈에 차지 않는지도 모른다.

어이없다는 듯 한참 유리를 바라보던 오시프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 말한 건 지켜야지.”

“…….”

“아나스타샤가 기다리겠어. 자리를 오래 비우면 실례란다, 유라.”

오시프는 테이블로 돌아갔다. 승부를 가리지 못했지만, 유리는 오시프의 썩어들어 가는 낯짝을 봤으니 내 승리라며 자신을 위로했다. 오시프가 테이블에 앉았는지 아나스타샤의 말소리가 들렸다.

유리가 테이블로 돌아오자 아나스타샤가 반갑게 맞이해줬다. 그는 무슨 이야기를 했냐는 형식적인 질문도 하지 않고 아, 왔어? 하며 유리가 앉았던 의자를 빼줄 뿐이었다. 유리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오시프를 내려다봤다. 형이 그렇게 섹스하길 원하는데 해야지. 하고말고. 도발적인 눈빛에도 오시프는 덤덤했다.

무반응에 유리의 미간만 좁아졌다. 여기서 빨리 내려야지. 이러다가는 마이애미에 가서 아침을 먹을 것 같았다.

“어디까지 갈 생각이야? 아나스타샤는 돌아가야 해. 시모나로티 씨가 걱정한다고.”

“이반에게 얘기해뒀어. 걱정할 것 없다.”

“이반이 전서구라도 돼? 전화기나 내놔.”

쓸데없는 신경전이 계속되자 오시프는 무시를 택했다. 지켜보던 아나스타샤는 웃음을 참느라 술을 연거푸 마셨다. 여태 뭘 해도 심드렁하던 유리가 한마디 한마디에 열렬히 반응하며 비꼬는 모습이 생소하고 재미있었다.

막무가내에 질린 오시프가 부하를 시켜 휴대전화를 가져오게 했다. 여보, 여보. 기괴한 비명을 질렀던―샤샤다.―사내가 휴대전화를 아나스타샤에게 건넸다. 투박한 휴대전화는 유리가 들고 다니는 것과 똑같았다. 이 집안은 같은 휴대전화만 쓰는 걸까. 아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다비드에게 전화해 안부를 전했다. 전화를 받은 다비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잘 놀다 오라고 인사까지 해줬다.

전화를 끊은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보며 웃었다.

“잘 놀다 오라는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리는 오시프를 노려봤다. 이반이 다비드를 어떻게 구슬렸기에, 추격을 피해 허드슨강에 뛰어든 사촌 동생한테 잘 놀다 오란 말을 전하는 걸 끝으로 통화를 마치게 한단 말인가. 시선을 느낀 오시프가 눈웃음 지었다. 그가 어떤 인간인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볼을 붉힐 아름다운 미소였으나, 유리는 그가 어떤 작자인지 뼈저리게 알고 있기에 속만 역했다.

오시프의 이름과 그가 라포포르트 형제라는 것만 아는 아나스타샤만이 아름다운 미소를 보며 황홀함에 빠졌다. 유리가 공주의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감상할 얼굴이 따로 있지. 오시프는 먹으라고 내줘도 절대 먹어서는 안 되는 독사과였다.

“왜 그래. 내가 마음에 들었나 본데. 내버려 둬.”

오시프가 느긋하게 아나스타샤를 허락했다. 이 인간은 또 왜 이래? 오시프가 너그러운 척, 인자한 척 굴 때마다 좋은 일이 생긴 적이 없었기에 유리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둘의 시선을 차단했다. 흐음. 오시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동생이 하는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

“그래, 좋은 건 너만 봐. 너만 봐야지.”

그가 러시아어로 중얼거렸다. 유리는 흠칫 놀라 아나스타샤를 쳐다봤다. 유리가 알기로는 아나스타샤는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았다. 어릴 적, 미하일 이바노비치와 시간 날 때마다 붙어 다니지 않았던가. 다행히 아나스타샤는 무슨 얘기냐는 듯 눈망울을 꿈뻑이기만 했다. ……못 알아들었으면 됐다. 유리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렸다.

“동이 트면 알파인 근처에 내려줄게.”

“지금이라도 아무 선착장에나 내려줘. 요트에서 몇 명이 잘 수 있다고 생각해?”

“으음, 아무 데나? 어떻게 가려고, 차도 없으면서.”

“……그건 마야가.”

그러고 보니 다비드 시모나로티가 빌려준 벤틀리가 좀 전 허드슨강에 처박혔었지. 유리는 대꾸하며 주머니를 더듬었다. 그제야 휴대전화는 벤틀리와 함께 강에 잠겼단 걸 깨달았다. 일리야의 휴대전화가 든 바지도 갈아입느라 어디에 있는지……. 더듬던 손이 느려졌다. 유리는 형을 쳐다봤다. 턱을 괴고 동생을 구경하던 그가 아나스타샤 쪽을 턱짓했다.

아나스타샤는 눈치껏 샤샤가 줬던 휴대전화를 유리에게 내밀었다. 익숙한 모델이다. 일리야의 휴대전화였다.

“조금 더 빌려줄게.”

“…….”

레이즈빗이 슬쩍했다던 휴대전화도 오시프가 먹여준 사탕이었다. 위치 추적기를 안 붙여놨을 리가 없다. 그걸 무슨 꿍꿍이인지 훔쳐보겠다고 들고 다녔다니. 그러니 강 한가운데에 떨어졌어도 잘 찾아냈군. 오시프가 꾸며둔 장난질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유리는 아직 공주를 속여야 했다.

그는 마야에게 전화를 걸어 허드슨강에 빠진 벤틀리와 똑같은 모델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아나스타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다비드가 빌려준 차를 강에 빠트린 것도 모자라 터트려버렸으니……. 차야 다시 구할 수 있지만, 목숨은 아니지. 아나스타샤는 금방 기운을 차렸다.

“실례가 안 된다면 내일 저녁에 오시프 씨를 초대하고 싶은데 괜찮나요?”

“흐음? 글쎄요. 나는 바빠서.”

바쁘긴 뭐가 바빠. 오시프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뿔이 난 건 공주가 아닌 그의 성격 나쁜 기사였다. 심통 난 얼굴이 오시프에게도 들어왔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많은 걸 가르쳤는데도 표정 숨기는 건 왜 이렇게 서툰지. 그는 마시던 술잔을 내려놨다.

“시간 내보도록 하죠.”

어떻게 뱉는 말마다 짜증이 솟는지. 유리는 잔에 가득 채워진 보드카를 물처럼 마셨다. 온몸으로 네놈이 너무 싫다고 표현해도 오시프는 개의치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웃기만 했다. 이 형제를 괜히 초대한 거 아닐까. 사람을 만나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아나스타샤가 처음으로 후회한 관계였다.

* * *

동이 트며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요트는 허드슨강 선착장에 정박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먼저 내리게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요트를 떠났다. 아나스타샤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오시프에게 손을 흔들었다. 목숨을 구해줬어도 동생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듣지 못한 오시프는 난간에 붙어서 멀어지는 유리를 바라볼 뿐이다.

아나스타샤는 상쾌한 도시 냄새를 양껏 들이켰다. 유리는 담배부터 꺼내 입에 물고 주차장을 둘러봤다. 하얀 벤틀리 한 대만 주차되어있었다. 아나스타샤가 타고 다니던 것과 똑같았다. 보닛에 앉아있던 마야가 다가왔다. 그녀는 아나스타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유리에게 러시아어로 얘기했다.

“구하느라 애먹었어요. 웃돈 주고 사 왔다고요.”

“잘했어.”

“보스, 이번 달은 물만 마셔야겠는데요. 지출이 커요.”

마야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탈탈 터는 시늉을 했다. 유리는 피식 웃으며 연기를 뱉었다. 오시프 때문에 가라앉았던 기분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경호팀은 어떻게 됐어?”

“1팀은 전멸이에요. 팀장이 죽고 팀원도 중상을 입었어요. 2팀은 양호하지만, 아예 경호팀을 바꾼다고 하는 것 같더군요.”

“오늘 저녁에 오시프가 시모나로티 저택에 올 거야. 너희도 와야겠어.”

“저희가 아나스타샤 씨를 경호하나요?”

“죽었어?”

옆에서 얘기를 듣던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마야와 유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입을 다물고 아나스타샤를 쳐다봤다. 공주의 반응이 어떨지 짐작됐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얘기해도 문제, 아니어도 문제다.

침묵은 긍정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쩌겠어. 그게 그 사람들 일이었잖아. 죽은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유리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아, 그래. 아나스타샤는 이미 익숙해져 있다.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는 공주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대답이었다. 유리는 눈썹을 긁었다.

“그래. 그럼……. 일단 집으로 가지.”

아나스타샤는 별말 없이 차에 탔다. 유리는 입에 담배를 물고 있으면서 무의식적으로 담뱃갑을 찾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마야의 웃음소리를 못 들었으면 담배를 새로 뽑아 물뻔했다. 유리는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고는 아나스타샤의 옆자리에 앉았다.

운전석에 앉은 마야가 시동을 걸었다. 급하게 구했네, 웃돈을 주고 구했네, 하며 엄살을 부렸어도 유리가 원하는 대로 잘 구해왔다. 차량 내부도 다비드 시모나로티가 타던 벤틀리와 크게 다를 것 없었다.

“다비드 씨는 오늘 일을 몰라요. 라포포르트 형제와 저녁을 먹다가 술까지 먹게 돼서 자고 오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보고했다. 그러나 유리에겐 대수로운 일이었다. 이따 밤에 오시프가 시모나로티 저택에 오기로 했다. 다비드와 몇 마디 주고받으면 금방 들통날 거짓 알리바이였다. 유리는 마야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기 전에 아나스타샤를 힐끔거렸다. 그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거로 다비드를 속일 순 없을 것 같은데. 그가 믿던가?”

“예. 라이엇도 같이 있다고 했거든요. 실제로 이반은 라이엇과 함께 있었죠.”

그렇다면 이반이 말을 전한 것이 아니라 라이엇이 전했겠군. 유리는 어제저녁 상황을 머릿속에 그렸다. 라이엇이 오늘 늦을 것 같다며 안부를 전하면서 자연스럽게 아나스타샤 이야기를 흘리면 다비드도 별다른 의심하지 않겠지. 라이엇도 다비드가 놀라 쓰러지는 상황을 만들 바에야 라포포르트의 배에 타 거짓말에 동참했겠고.

문제 될 것 없었다. 걱정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술술 풀려나가서 되려 기분이 이상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힐끔거렸다. 차에 타서부터 말을 안 했다. 보통 같았으면 라이엇이 거짓말을 하느냐며 맞장구를 쳤을 텐데……. 밖만 보던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쳐다봤다. 유리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내가 허드슨강에 빠지고 빌려준 차는 폭발했다고 말하면 형은 쓰러질걸. 나 때문에 형이 위험해서는 안 돼.”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유리는 겨우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볼 수 있었다. 활기찼던 얼굴에 우울이 가득했다. 다비드 시모나로티가 위험해질 일이라면 배 속 아이에게도 위험을 줄 일이리라.

“라이엇 씨는?”

유리가 마야에게 물었다.

“집에 안 들르고 출근하셨어요.”

“그거 다행이네. 혹시 모르니까 말을 맞춰놔야겠지.”

막 유리가 오시프의 간계에 어떻게 어울릴지 고민하던 참이었다. 마야가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상대에게 응, 응, 하고 답하다 당황했는지 응? 하는 소리를 냈다. 상대가 무어라 말하는지 뒷좌석까지 들리지 않아, 유리는 백미러에 비치는 마야의 얼굴을 매섭게 노려봤다. 마야가 휴대전화를 조수석에 내던지며 유리에게 말했다.

“오시프가 시간을 내보려고 했는데 저녁은 도저히 안 되겠다면서, 점심에 가도 되냐고 하는데요.”

유리는 반사적으로 아나스타샤를 돌아봤다.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전화 좀 빌려줄래요? 형도 알고 있어야 하니까.”

아나스타샤는 알아서 조수석에 나뒹구는 휴대전화를 짚어 다비드에게 연락했다. 형, 나야. 으응. 어젯밤은 쓸쓸하지 않았어? 하하……. 그나저나 오늘 오시프가 오기로 했는데……. 공주의 말투는 평소처럼 밝고 가벼웠다. 식사 약속이 없으면 할 일이 사라지는 한량처럼 들렸다.

그러나 표정은 한없이 무거웠다. 전화를 끊은 아나스타샤가 눈썹을 이마로 당기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아, 형은 괜찮대. 형도 라포포르트의 형제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가 봐.”

아나스타샤가 히죽 웃었다. 유리는 그가 레오파드이기 때문에 다비드가 궁금해하는 거라고 말을 달지 않았다. 괜한 호기심이 사람을 죽인다. 고양이는 높은 곳에 떨어져도 살지만, 사람은 아니니까. 유리는 오시프가 아닌 다른 주제를 찾았다.

“어디 아파? 독이라도 마셨나? 전부터 표정이 안 좋은데.”

“오, 유리. 어떻게 표정이 좋을 수가 있겠어. 나 때문에 경호팀 하나가 세상에서 사라졌는데. 몇이나 죽었어? ……아니, 얘기하지 마.”

아나스타샤는 이내 손을 내저었다. 유리도 말해줄 생각이 없었기에 침묵을 지켰다. 아나스타샤는 턱과 입술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짓눌러오는 죄책감과 불안감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유리도 그 불안감을 덜어내 주려고 위로를 건넸다.

“걱정한다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네 말이 맞아. 그냥, 음……. 기분이 이상해. 날 죽이려던 놈들은 죽어도 징그럽기만 했거든. 근데……. 날 지키던 사람이 떠나는 건 생각이 많아지네.”

위로라기에는 비아냥에 가까웠지만, 아나스타샤는 서툰 말솜씨에도 충분히 위로받으며 고초를 털어놨다. 나 때문에 안 죽어도 될 사람이 죽었다는 죄책감과 몇이나 더 죽어야 안전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아나스타샤는 창문을 바라보는 것으로 대화를 마쳤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손을 잡아줬다. 말로 하는 위로는 더 잘해줄 자신이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엄지를 검지와 엄지 사이에 놓고 매만졌다. 손끝에 박인 굳은살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던 그는 이내 손톱에 살을 눌러댔다. 아릿한 고통으로 사념을 잊어보려는 듯한 작은 발길질이었다.

* * *

변덕스러운 오시프 라포포르트는 저녁 약속을 점심으로 옮겼으면서, 유리가 저택에 도착했을 때 점심에도 시간이 안 될 것 같으니 지금 가겠노라고 통보했다. 유리는 양 주먹을 꽉 쥔 채 화를 참으며 차에서 내렸다. 정작 우스운 꼴이 된 당사자는 태평하게 웃기만 했다.

“아하하, 라포트 사업이 바쁘구나. 라이엇도 밤낮없이 일하는데. 꾀병이 아니었어.”

“꾀병은 무슨! 그 인간은 날 약 올릴 생각인 거야.”

끝내 말을 듣지 않고 반항한 것에 대한 보복이다. 오시프는 찬장에 숨겨둔 치즈를 훔쳐먹고 이죽거리는 더러운 도둑 고양이었다. 다비드가 나와 그들을 반겼다. 아나스타샤가 얼른 계단을 올라가 다비드의 볼에 입을 맞췄다.

“형, 출근은 어쩌고?”

“하하, 레오파드 얼굴은 봐야지. 어디 흔하게 구경할 사내는 아니잖아.”

다비드가 비웃듯이 오시프의 별칭을 입에 담았다. 현관 계단을 오르던 유리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남의 입에서 듣는 ‘레오파드’는 레오파드가 다정하게 내뱉는 ‘유리’보다 날카로웠다.

“레오파드?”

아나스타샤가 반문했다. 다비드는 설명 없이 아나스타샤를 쳐다봤다. 사교계의 공주도 레오파드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레오파드라는 남자의 무성한 소문만 들었을 뿐, 그의 본명이 무엇이고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했다.

형의 행동을 보면, 레오파드가 오늘 우리 집에 오는 것 같은데. 오늘 올 사람은 유리의 친형뿐이었다. 헉! 아나스타샤가 놀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세상에, 왜 몰랐지? 정말 몰랐어. 소문만 들었거든. 자길 ‘레오파드’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살을 지져서 표범 무늬를 만들어줬다는 얘기.”

“…….”

시모나로티 형제의 시선이 유리에게 닿았다. 사실이냐고 묻는 눈치였다. 유리는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딴청을 부렸다. 오시프를 변호할 생각은 티끌도 없었다. 거짓말도 아니었다. 가리고 다니지 못하게 머리털을 죄다 뽑아버리고 얼굴에 인두질했다는 건 모르는 눈치니 그나마 다행일까.

“전혀…… 그럴 사람처럼 안 보였는데.”

한마디 더 하자면, 아나스타샤는 사람 보는 눈이 없다. 유괴와 스토킹에 시달린 피해자의 능력 같은 건지, 호감을 보이면 백이면 백 범죄와 연루됐다. 오시프도 그런 사소한 범죄를 저지르는 망나니였으면 좋았을 텐데. 유리는 어깨만 으쓱였다. 친형제에게서 어떤 정보도 얻어내지 못한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기울였다.

“형이랑 안 친하구나?”

유리는 대꾸도 하지 않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다비드와 아나스타샤의 시선이 따라왔으나 무시했다. 안 친한 정도가 아니다. 마주치기도 싫다. 그림자만 봐도 이가 갈리는 사이다. 물론 유리만 그랬다. 오시프가 유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행히 라이엇이 집에 들르지 않고 출근해서 말을 맞출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오시프와 눈치껏 대화하면 무난하게 다비드를 속일 수 있었다. 그 인간이 과연 협력할까? 저녁 약속을 점심으로 미루더니, 당장 만나자며 아침으로 옮긴 인간이다.

오시프는 정장을 넥타이도 없이 걸친 채 이반과 함께 등장했다. 집사가 둘을 안으로 안내했다. 유리는 그들을 보자마자 욕을 중얼거렸다. 누가 아침 티타임에 한량처럼 입고 온단 말인가! 유리의 삐뚠 시선에도 오시프는 싱긋싱긋 웃으며 고궁을 구경하듯, 시모나로티 저택을 둘러봤다.

“시모나로티 씨, 미안합니다. 저녁에 온다고 했다가, 점심이라고 했다가 갑작스럽게 쳐들어왔군요.”

그는 반갑게 다비드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다비드가 일어나 오시프와 인사했다.

“괜찮습니다. 회의가 있다지요.”

“예에. 갈 생각이 없었는데 꼭 참석해야 한다더군요.”

오시프가 대답하자, 뒤에 서 있던 이반의 낯이 칙칙해졌다. 라포트의 경영자는 공식적으로 이반이나, 이런저런 사정을 고려하다 보면 최고 경영자는 오시프였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든 일을 하는 남자였다. 유리는 오시프의 속내를 금방 유추했다.

시모나로티와 척질 생각은 추호도 없으나 아나스타샤와 사랑하는 막내가 붙어먹는 건 꼴 보기 싫다- 였다. 정말 자신이 저지른 일을 시모나로티에서 모르리라 생각하나? 유리는 커피잔을 매만졌다. 아나스타샤가 만들어준 카푸치노가 차게 식었다.

“다시 만들어줄까?”

이미 에스프레소를 한 잔 마신 아나스타샤가 한 입도 마시지 않은 유리의, 잔과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유리는 거절하려다가 식은 잔을 아나스타샤에게 내밀었다. 아나스타샤가 잔을 건네받으며 유리의 귓가에 이탈리아어로 속삭였다.

“조금만 기다려.”

듣기 좋은 목소리와 억양이다. 개살구를 입에 문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이 순식간에 펴졌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주방으로 사라진 아나스타샤를 쫓듯, 고개를 쭉 내뺐다.

“여유가 될 때 오셔도 됐을 텐데요.”

다비드가 도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오시프와 이반도 유리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나스타샤 씨가 꼭 오늘 들러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지 뭡니까.”

오시프는 셔츠 단추를 한 개 더 풀었다. 다비드는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 무슨 수작인지 가늠하는 듯했다. 오시프도 다비드를 응시했다. 탐색전이었다. 둘 다 이 바닥에서는 유명했다. 알파를 잡아먹는 오메가와 사람을 잡아먹는 레오파드로 말이다.

“유리, 티라미수 좋아해? 급조해서 물렁물렁하지만, 그래도 맛은 좋을 거야.”

영원할 것 같은 탐색전이 아나스타샤의 등장으로 풀어졌다. 다비드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아나스타샤는 한 손에는 티라미수 접시를, 다른 손에는 에스프레소 잔을 들었다. 티라미수? 유리는 웃으며 다가오는 아나스타샤와 그가 들고 있는 접시를 번갈아 쳐다봤다.

“싫어해?”

얌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아나스타샤가 유리 앞에 접시를 놓았다. 코코아 가루를 잔뜩 뿌린 티라미수 한 덩어리와 새카만…… 커피였다. 유리는 인상을 쓰고 아나스타샤를 노려봤다. 카푸치노가 아니잖아. 아나스타샤는 눈치 없는 사람인 척 웃으며 스푼으로 티라미수를 떠 유리에게 내밀었다.

“먹어봐. 먹으면 기분 좋아질 거야.”

아나스타샤는 안에 마스카르포네 치즈가 들어가고, 자발리오네를 넣어서 더 맛있다고 하며 유리의 정신을 홀랑 빼놨다. 스푼이 유리 입으로 들어갔다. 유리는 티라미수를 우물댔다. 오시프의 시선도 유리에게 박혔다.

“어때?”

“맛있네.”

“그렇지? 이것도 마셔봐.”

아나스타샤가 기다렸다는 듯이 에스프레소 잔을 내밀었다. 이게 목적이구나. 유리는 얕은 술수에 넘어가 주며 순순히 커피를 마셨다. 미간이 찌푸려졌다. 여전히 썼지만, 티라미수의 단맛 때문인지 그럭저럭 넘길 만했다.

“괜찮아?”

“그래.”

호평에 아나스타샤는 활짝 웃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다정한 시선으로 응시하다, 오시프를 쳐다봤다. 새파란 눈동자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다. 유리는 본능적으로 아나스타샤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오시프의 눈이 가늘어졌다.

“별관으로 짐을 옮겨야겠어.”

“응?”

아나스타샤가 되물었다. 다비드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린 채 동생 내외가 하는 짓을 지켜봤다. ‘별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오시프의 낯이 점점 굳어갔다. 유리는 웃었다. 급조한 폭탄치고는 괜찮은 화력이었다.

“유리. 장난치지 마. 나는 찬물로 목욕하기 싫어.”

아나스타샤는 매운 치약이 싫다고 투정하는 아이처럼 고개를 내저었다. 마음의 거리가 필요하다며 방까지 나눈 주제에 별관으로 가겠다니. 누가 그 말을 믿겠는가? 오시프와 유리의 관계를 어렴풋이 아는 아나스타샤는 유리가 자신을 이용해 형의 기분을 거스르려 한다는 걸 금방 눈치챘다.

“아니. 생각해보면 별관에서 지내는 게 아나스타샤 당신한테도 좋아. 별관에서 지내면 별관만 지키면 되잖아. 안 그래? 본관은 지킬 문이 너무…… 많다고.”

유리는 궤변을 늘어놨다. 그래. 듣고 보면 그럴듯했다. 다비드도 혹했는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아나스타샤는 다비드와 유리, 오시프, 이반까지 죽 훑어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들 유리 의견에 동의하는 것 같았다. 경호가 집중되면 좋기는 한데, 별관은 전기 공사만 겨우 끝내놓고 방치됐단 말이야. 본관과 별관을 오가며 생활하기 싫었다. 아나스타샤가 뜸 들이자 유리가 허벅지를 가볍게 쥐었다가 풀었다.

오시프를 골탕 먹이려고 벌이는 일이라면 그만 물러나면 될 텐데. 아나스타샤는 집요하게 별관으로 옮기자고 조잘대는 유리가 의아했다. 유리도 자신이 왜 별관을 고집하는지 이유를 분명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분명 오시프 때문이었는데, 그랬는데…….

“듣고 보니 그러네. 조용히 그림을 그릴 수도 있겠어.”

“그렇지.”

유리가 대답했다. 그러나 곧 말속에 숨은 뜻을 알아차렸다. 유리의 입꼬리가 뻣뻣해졌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부드러운 밀 빛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형, 자꾸 일 시켜서 미안해. 별관으로 옮길게.”

다비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경호보다 급한 용무가 둘 사이에 있는 걸 모를 리가 없다. 아니라고 하더니 결국은 별관행이군. 뭐, 여태 참은 것도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그래, 알았다.”

아나스타샤가 별관에서 지내기만 한다면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페로몬 때문에 고용인들이 불안에 떨 일이 줄어 다행이었다. 집주인도 관계를 허락했다. 유리와 아나스타샤는 다음 허락을 받듯, 오시프를 쳐다봤다. 그는 조용히 커피를 마셨다. 잔을 비운 그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그 생각과 말에 책임을 지란 소리였다. 유리는 허벅지를 누르던 손을 소파 등받이로 넘겨 아나스타샤를 품에 더 가까이 기대게 했다. 아나스타샤의 허벅지가 유리의 허벅지에 닿았다. 오시프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다비드를 바라봤다.

“이런, 이제 가봐야겠군요.”

“예. 다음에는 오래 머물렀으면 좋겠군요.”

오시프가 먼저 일어났다. 병풍처럼 앉아있던 이반도 벌떡 일어섰다. 얼른 가시방석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눈치였다. 오시프는 다비드와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며, 약속을 번복하고 커피 한 잔 마실 시간밖에 못 내는 빠듯한 일정을 가진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릿느릿 움직였다.

이반은 벌써 현관문 앞에서 오시프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반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물었다.

“오시프는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야?”

“몰라. 퀘벡에 있다고만 들었는데 아니었나? 갑자기 요트라니. 요셉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주님만 알고 계시나 봐.”

이반이 속 편한 소리를 아무렇게나 해댔다. 주님이 아니라 지옥에서 사탄이 지켜보고 있겠지. 다음 후계자로 삼고 싶어서 언제 지옥에 떨어지나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걸. 유리는 다비드에게 명함을 건네는 오시프를 노려봤다. 다비드의 뒤를 아나스타샤가 보조했다. 대체 왜 와서 아나스타샤도 아니고 다비드한테 친한 척인가. 유리는 자신을 지나쳐가는 오시프에게 격렬한 눈빛을 보냈으나 어떠한 대답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저 세단이 출발하기 전에 차체를 붙잡고 협박하듯 “내 일에 신경 꺼.”라고 한마디 한 것이 전부였다. 오시프는 막냇동생의 귀여운 반항에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 네 건 네가 지켜야지.”

이제 그럴 나이가 됐지. 아, 벌써 이렇게 크다니. 이반, 나도 늙었나 봐. 오시프가 농담을 하듯 차 안팎을 넘나드는 대화를 했다. 옆자리에 앉은 이반은 손수건으로 이마를 촘촘히 닦아냈다. 유리가 장난이 아니라며 다시 경고하려는데, 차가 앞으로 움직였다.

“넌 네가 맡은 일에 집중해. 어려운 일 아니잖아. 유라.”

차가 현관을 떠나버렸다. 유리는 반박도 못 하고 창밖으로 하늘거리는 오시프의 손을 보며 주먹을 쥐어야 했다.

* * *

별관은 아나스타샤가 미국에 온다는 소식과 함께 매주 청소, 관리했기 때문에 기다림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저택 고용인들이 두 사람의 짐을 2층으로 옮겨줬다. 남향인 아나스타샤의 방과 달리 별관은 창이 북쪽으로 나서 환한 낮인데도 바닥에 햇빛이 한 줌도 들어오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울적한 얼굴로 소박한 방을 둘러보고는 침대에 풀썩 앉았다. 누수를 제때 보수하지 않아서 뜬 벽지가 보였다. 2층 끝방이 제일 깨끗하다고 들었는데, 여기가 제일 깨끗하면 대체 다른 방은 어떻게 관리했다는 거야? 전기가 들어오는 건 맞겠지. 걱정에 사로잡힌 아나스타샤는 공손히 손을 앞으로 모았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옷이 든 가방을 모조리 소파에 올려놓고 자신의 짐은 장식장 옆에 뒀다.

“여기 쥐 있을 텐데.”

“그래? 옷만 들었는데 쥐가 들어가겠어?”

“그건 모르지.”

아나스타샤는 다리를 떨었다. 유리는 전등 스위치를 켰다. 깜빡, 깜빡. 오랜만에 켠 전등은 깜빡거리기만 할 뿐, 방을 훤히 비추지는 못했다. 아나스타샤가 침대 스탠드를 켰다. 주홍색 빛이 침대 주위를 은은하게 밝혔다.

“불도 제대로 안 들어오잖아. 고쳤다면서…… 형은 거짓말쟁이야.”

“나는 분위기 있어서 좋은데.”

유리가 옆자리에 풀썩 앉았다. 매트리스가 출렁였다. 같이 누우면 옆에서 뭘 하는지 느끼겠다. 유리는 매트리스를 눌러봤다. 아나스타샤는 음울한 얼굴로 옆에 앉은 유리를 위아래로 훑었다. 정말 경호를 위해서 모든 편의를 포기하고 별관에 와야 했나? 눈빛에 후회가 묻어났다. 유리는 그가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너는…… 대체 왜 별관이 좋겠다고 생각한 거야? 여길 봐. 불을 끄면, 쥐가 왔다 갔다 할 거라고. 아침저녁으로는 본관에 가서 먹고 씻어야 해. 비라도 내리면 어떻고? 그걸 다 감수할 만큼 별관에 있고 싶어? 설마, 나한테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겠지.”

아나스타샤는 대본이라도 읊듯이 궁금한 부분을 모두 물었다. 불행히도 유리가 전부 대답해주기에는 질문이 많았다.

“관심은 늘 있지.”

하.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말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야 어릴 때부터 자길 스토킹했으니 관심은 늘 있었겠지. 맞는 말인데 왜 이렇게 간지럽게 들리는 걸까. 지금, 날 꼬시는 건가? 아나스타샤는 입가를 문질렀다.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유리는 아나스타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냥…… 교제는 아니고. 즐겨볼 생각으로.”

유리는 팔을 뻗어 침대를 짚었다.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품에 갇혔다. 공주는 유리의 눈을 바보처럼 쳐다보기만 했다. 섹스라면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초 단위로 예지할 인간이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유리가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엉덩이가 뜨며 유리의 중심이 아나스타샤 쪽으로 쏠렸다. 유리는 자연스럽게 아나스타샤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대고 위에 올라탔다. 유리가 우위를 잡는 동안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가벼운 키스를 받아줬다.

혀 한 번 섞지 않고 아이들 장난처럼 맞닿았던 키스가 끝나자 아나스타샤는 눈을 떴다. 아나스타샤는 자기 위에 올라탄 유리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유리.”

“여기는 방해할 사람도 없잖아.”

오시프가 생각났다. 과연 별관에도 도청기나 카메라를 숨겨놨을까. 해놨겠지. 유리는 오시프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아나스타샤와의 관계를 멈출 수가 없었다. 오시프를 엿 먹이기 위해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이었는데도 후회는커녕 정말 일을 치르기 일보 직전이었다. 오시프의 계략도 이곳까지 닿지는 못한다.

우리 둘뿐이야. 유리는 맛을 음미하듯 아나스타샤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눈썹과 눈두덩이, 코, 입술을 훑고 목덜미를 손톱으로 긁었다.

“읏…… 하하, 유리. 왜 이렇게 적극적이야.”

손톱에 긁힌 목덜미에 붉은 자국이 생겼다. 아나스타샤가 정말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듯 물었다. 유리도 자신이 왜 아나스타샤를 먼저 덮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키스하고 장난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방해꾼도 감시자도 없으니 욕구를 풀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숨통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아나스타샤의 맥박이 느껴졌다. 유리가 입을 벌리자 아나스타샤도 따라 입을 벌렸다. 지금 유리의 고민은 하나였다. 어떻게 해야 상대를 즐겁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나와 할 마음이 들게 할 것인가?

“흥분되는데.”

아나스타샤가 속삭였다. 흥분했다니 절반은 성공이다. 유리는 남은 절반을 위해 아나스타샤와 혀를 섞었다. 축축한 혀가 얽혔다. 키스는 신호탄 되었다.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허벅지와 허리를 능숙하게 주물렀다. 커다란 손이 허벅지를 훑고 종아리를 주무르더니 엉덩이 아랫부분과 그 사이를 교묘하게 만져댔다.

손길은 다정했으나 입을 통해 오가는 숨은 짐승처럼 거칠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혀와 입술을 뽑아먹을 것처럼 거칠게 빨아들여 제 입속에 담았다. 깨물어도 울지 않는 대신 페로몬을 풍겼다. 하아. 아나스타샤가 먼저 물러섰다. 숨을 고르는 공주의 목덜미에 유리는 흔적을 남겼다. 이를 세워 깨물어대자 아나스타샤가 신음하며 몸을 비틀었다.

“아파아……. 유리. 그렇게 씹어대지 않아도 지금은 네 거야.”

유리의 눈썹이 삐뚤어졌다. 아나스타샤는 흥미진진한 눈으로 유리의 토라진 얼굴을 감상했다. 영원히 날 소유하고 싶은 남자에게 아나스타샤를 아주 잠시만 갖게 하는 것만큼 잔인하고 재미있는 장난은 없으리라.

“……그래 ‘지금은’ 내 거지.”

책임은 뒤로 미루고 쾌락만 즐기기로 했으니까. 아는데도 심술이 났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허벅지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딱딱해진 성기가 허벅지살에 짓눌렸다. 으음. 아나스타샤가 신음했다. 그의 몸이 눈에 띄게 긴장했다. 유리는 엉덩이를 뒤로 쭉 뺐다가 당겨 앉기를 반복했다.

“하아, 유리.”

아나스타샤가 다급하게 유리를 불렀다. 유리가 허벅지를 훑는 탓에 성기가 쓸렸다. 그는 유리가 앉은 허벅지에 힘을 줘 사타구니를 자극했다. 성행위를 하듯, 유리가 앞뒤로 움직이면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옷깃을 쥐어뜯었다.

켜둔 스탠드 불빛에 아나스타샤의 얼굴이 비쳤다. 빨개진 귀와 쾌감으로 촉촉해진 눈동자가 유리를 올려다봤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손을 끌어와 셔츠 깃을 잡게 했다.

“뭐 하고 있어. 벗겨.”

아나스타샤는 황홀감에 젖었다. 거부하는 알파를 억지로 여는 것도 좋지만, 더 강한 알파에게 굴복하고 짐승처럼 다뤄지는 것도 좋았다. 가만, 유리는 어느 쪽이지? 유리는 정말 내 취향을 채워줄 천사가 아닐까.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셔츠를 순식간에 벗겨냈다. 유리를 쳐다보자, 그가 잘했다는 듯이 이를 보이며 웃었다. 웃음의 의미는 승리였다. 널 내가 정복했다는 알파의 거만함이 느껴졌다.

오만하기 짝이 없다. 아나스타샤는 오만방자한 알파를 탐하고 싶었다. 아무도 들어서지 않았을 곳에 성기를 밀어 넣고 알파도 오메가처럼 뒤로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상상에 젖자, 아나스타샤의 성기가 바지를 찢고 나올 것처럼 부풀었다. 그 위에 앉아있던 유리가 놀라 무릎을 세웠다.

“……세운다고 나랑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나는 삽입은…….”

“알았어. 유리. 거기까진 바라지도 않아. 다시 움직여줘. 어서.”

아나스타샤가 간절하게 부탁했다. 그는 벌어진 셔츠를 옆으로 젖혀 하얀 속살을 감상했다. 티끌 없이 하얀 피부에 옥에 티라도 되듯 선명하게 새겨진 문신까지……. 아나스타샤는 유리에게 자신을 만져보라고 권유했던 때처럼 그의 상체를 더듬었다. 근육과 피부를 손바닥에 새겼다.

손길은 부드럽고 신중했다. 유륜 돌기 개수와 솜털 길이나 희미하게 남은 점 같은 것을 보여주는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던 내 모습을 보여준다는 건 희롱당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웠다.

“그만 더듬어.”

“유리. 네가 더 마음에 드는데 어떡하지?”

“생각날 때마다 자위하는 수밖에.”

결혼을 허락할 리가 없잖아. 시모나로티의 후계자가 자식도 못 낳는 알파와 결혼이라니. 유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비관적인 대답에 심술이 난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허리를 세게 끌어안았다. 정신 사나운 아나스타샤의 페로몬이 유리를 휘감았다. 아아……. 유리는 눈을 감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자위로도 안 달래지면? 네가 생각나서 미국에 돌아올지도 몰라.”

“……오든지.”

유리가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품에 안긴 유리의 볼과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더 관여하고 싶었다. 가볍게 즐기는 사이가 아니라 적당히 서로를 소유하고 감시하는 사이.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경고를 기억하기 때문에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대신 입보다 가벼운 아랫도리를 꺼냈다.

아나스타샤가 버클을 풀자 유리도 바지를 벗으려고 허리띠에 손을 댔지만, 페로몬 때문인지 바로 풀지 못했다. 먼저 성기를 꺼낸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도와 바지를 벗겼다. 성기 두 개가 배를 사이에 두고 덜렁였다. 큼지막한 성기가 눈앞에 들어오자 유리는 뒤로 몸을 뺐다. 저걸 입에 넣는 것도 무리고 뒤로 넣는 것도 무리다. 손장난으로 끝내자니 아나스타샤가 비웃을 것만 같았다.

“유리, 누워.”

“난 안 넣을 거야.”

아나스타샤의 권유에 유리는 본능적으로 방어했다. 무슨 상상을 했는지 눈에 훤했지만 지금 놀릴 틈이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허리를 잡아 침대 쪽으로 쓰러트렸다. 유리가 몸에 힘을 줬다.

“내가 그렇게 무지막지한 사람으로 보여? 설마 막내 도련님을 아프게 하려고. 다 좋은 거야. 나만 믿어. 누워 봐, 유리. 나랑…… 즐기자고.”

아나스타샤가 웃었다. 아니라는 말을 여러 번 듣고서야, 유리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아나스타샤가 위로 올라타더니 유리의 무릎을 잡아 붙였다. 그는 다리를 끌어안은 채로 유리의 뒤에 성기를 문댔다.

안 넣는다고 했잖아! 유리는 놀라 무릎을 접었다. 아나스타샤가 발목을 잡아끌었다. 유리는 쉽게 자신의 뒤를 허락하지 않았다. 조바심에 눈앞이 새빨개진 아나스타샤는 증발 직전의 인내심을 끌어모았다.

“괜찮아. 허벅지에 낄 거야. 풀지도 않았는데 뒤에 어떻게 넣겠어. 유리…… 나는 너랑 오래 즐기고 싶거든.”

“뭘…… 어디에 넣고 비빈다고?”

“그래, 허벅지에 말이야. 네 허벅지 사이에 내 성기를 넣고 비빌 거야. 씹질하는 것처럼…… 오메가랑 해봤어? 남자랑은? 알파는 내가 처음이랬지. 걔네랑은 이런 장난할 필요가 없었겠구나.”

그럼, 이것도 내가 처음인가? 아나스타샤가 환자를 안심시키듯 속삭이더니 기대에 찬 눈으로 유리를 바라봤다. 유리는 인상을 썼다.

“몰라! 내가 어디에 뭘 비볐는지 기억하는 한가한 인간으로 보여?”

“아니, 그렇게 안 보여. 그래. 그래. 해봤겠구나.”

아나스타샤가 적당히 대꾸하자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해본 적 없었다. 적당히 젖은 곳에 넣어 움직이는 것 외에는 즐기지 않았다. 섹스를 유흥이 아닌 본능의 한 부분으로 여기니 재미없는 건 당연했다.

아나스타샤가 무릎을 붙잡고 허벅지가 겹친 부분에 성기 끝을 문질렀다. 몸에 들어갈 준비를 끝낸 성기는 묽은 애액을 흘리고 있었다. 애액이 윤활제 역할을 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발을 자신의 어깨에 걸치게 하고 허벅지 사이로 성기를 들이밀었다.

건조한 살을 가르고 들어오는 단단하고 뜨거운 살덩이를 받아내는 기분은 단연 좆 같았다. 좀 전까지 아나스타샤를 함락해 느꼈던 정복감이 썰물같이 빠지고 치욕과 복수심이 쓰나미처럼 들이닥쳤다. 대체 알파끼리 왜 이런단 말이야. 근본은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도 유리는 왜 계속 아나스타샤와 관계를 맺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아……. 유리. 단단하고 부드러워서 좋아.”

아나스타샤가 허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유리의 살결을 만끽했다. 이제는 속살이 궁금했다. 유리의 안은 어떨까. 잘 풀어줘도 삼키기 힘들어할까, 아니면 잘 받아먹을까.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종아리에 입을 맞췄다. 경직된 근육이 파르르 떠는 것이 눈에 보였다.

“더 힘을 줘 봐. 날 조여줘.”

아나스타샤는 몸을 움직였다. 성기가 허벅지를 드나들었다. 유리는 독사에게 물린 사람처럼 뻣뻣하게 누워선 허벅지를 드나드는 좆대가리를 노려봤다. 빈틈없이 붙은 허벅지 사이로 동그란 귀두가 들썩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요도에 고인 물이 허벅지 살을 적셨다.

축축해. 도저히 좋다는 기분이 안 드는 모습과 촉감이었다. 아나스타샤의 움직임에 속도가 붙었다. 마찰이 커지자 유리는 읍, 읏, 하는 신음을 흘렸다. 아나스타샤를 견디려고 몸에 힘을 주면 긴장으로 근육이 단단해졌다. 아나스타샤는 성기를 조이는 다리 힘에 감탄했다.

“유리, 네 뒷구멍도 날 이렇게 조일까?”

“시끄러워, 개소리할 거야?”

“좋은 걸 어떡해. 나도 너처럼, 타고난 사람은 처음이라고.”

처음? 유리는 못 믿겠다는 눈으로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봤다. 아나스타샤가 웃었다.

“왜. 내가 처음이라니까 우스워? 나도 많이 경험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 유리, 이런 감각은 처음이야.”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는다. 유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안다고 심장이 날뛰는 것까지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무릎을 한쪽으로 넘겼다. 성기가 빠져나갔다. 다리 사이에 박혔던 살덩이가 사라졌다. 허전하다.

아나스타샤는 회음부에 귀두를 문댔다.

“더 좋아질 수 있는지 해보자고. 유리. 나는…… 둘이 같이 느꼈으면 좋겠거든.”

아나스타샤가 몸을 수그렸다. 둘 사이를 막았던 다리가 사라졌다. 아나스타샤가 다가올수록 페로몬이 짙게 풍겼다. 아, 안 돼. 유리는 입으로 숨을 들이켰다. 아나스타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입을 맞췄다. 뇌가 다시 페로몬에 젖었다.

그 순간, 회음부를 문지르던 성기가 고환을 밀어붙이고 가랑이 사이로 쳐들어왔다.

“음, 읏……!”

감각이 처음이라 했지, 행위가 처음이라고는 안 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페로몬에 휩싸인 채 성기와 고환까지 내줘야 했다. 허벅지가 붙어있어서 움직임에 제약이 있었다. 성기는 손이 되어 유리의 성기까지 훑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 밑에 깔려 엉덩이에 닿는 살갗과 꺼슬꺼슬한 음모와 허벅지가 벌어지는 걸 막으려고 무릎 관절을 아프게 짓누르는 손길을 느꼈다.

피할 곳이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놔주지 않는다. 유리는 입술을 빨아대며 숨까지 먹어 치우는 그가 무서웠다. 퍽, 퍽……. 이게 과연 살과 살이 부딪혀서 나는 소리인지 의구심이 생겼다. 유리는 벗어나고 싶었으나, 벗어나지 못했다. 시트를 쥐고 버텨도 사타구니를 괴롭히는 탓에 편한 자세가 나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양팔을 아나스타샤의 목에 걸었다. 그제야 몸이 유연하게 아나스타샤의 리듬에 맞춰 흔들렸다.

아나스타샤는 입술을 맞댄 채로 웃었다.

“유리, 힘들어? 응? 아무것도 안 했는데 힘들면 어떡해. 그냥, 비비는 거잖아.”

놀림이었다. 그러나 유리는 이 짧은 휴식이 고팠기에 헐떡거리기만 했다. 행위가 힘에 부치지는 않았다. 아나스타샤의 페로몬이 뇌를 녹여버리는 것 같아서 문제였다. 헤로인이나 코카인을 하면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눈앞이 핑글핑글 돌아서, 유리는 눈을 감았다.

“다리 꽉 붙여. 알았지? 벌어지면 네 뒤에 넣어버릴 거야.”

농담이겠지. 유리는 생각했다. 그러나 정말 헐거워지면 손가락도 먹어 본 적 없는 뒤에 성기를 처박을 것만 같았다. 아나스타샤가 무릎에서 손을 뗐다. 유리는 있는 힘을 다해 허벅지를 조였다.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입술을 탐하며 허리를 흔들었다.

“아윽……. 으음…….”

유리가 눈물에 젖은 신음을 흘렸다. 성기가 자극돼서 기분은 좋았는데 그뿐이었다. 발기만 지속되고 사정이 안 되니 아래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거친 숨을 뱉으며 절정에 다다랐다. 그는 허벅지에 아랫배를 최대한 밀착시킨 채로 사정했다.

허벅지 사이로 고개를 내민 성기에서 정액이 울컥울컥 튀어나왔다. 정액은 시트와 유리의 배, 작은 방울은 얼굴까지 튀었다. 아나스타샤의 몸이 느슨해졌다. 유리는 허벅지를 모은 자세로 웅크렸다. 손으로 성기를 잡았다. 손길이 닿자 등줄기를 타고 쾌감이 번졌다.

“하……. 으읏.”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지켜보는 걸 알면서도 성기를 훑었다. 눈을 질끈 감고 배설욕에 집중했다. 아나스타샤의 페로몬과 그가 오갔던 흔적이 많은 도움이 됐다. 턱턱, 살을 훑으며 손날이 연신 배를 쳤다. 아나스타샤는 수그러든 성기를 주무르며 유리의 자위를 구경했다.

“흣……!”

신음과 함께 유리가 사정했다. 웅크린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나스타샤는 그의 엉덩이에 주목했다. 탄탄한 엉덩이도 골이 파일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구멍은 언제 만져볼 수 있을까. 아나스타샤는 입맛을 다셨다. 그는 다음을 준비했으나, 유리는 아니었다.

거부감이 심한 알파의 페로몬을 직통으로 맞았으니 겨우 1발뿐인데도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유리의 사지가 축 늘어지자 아나스타샤는 옆에 누웠다.

“유리, 끝이야?”

“그래……. 힘들어. 어지럽다고.”

“아니면, 나한테 다 맡기고 쉬는 건 어때.”

허락만 한다면 네 뒤까지 내가 개발해줄 수 있는데. 당당한 아나스타샤의 요구에 유리는 그를 노려봤다. 헛소리하면 좆이 아니라 총알을 목에 박아줄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아나스타샤는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어지러워. 더는 못 해.”

“내게 익숙해지면 괜찮아.”

“…….”

거절하기도 전에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끌어안았다. 페로몬 잔향이 짙게 남아있었다. ……됐다. 자자. 피곤하다. 여기서 말싸움을 한다면 말로 끝나지 않으리라. 유리가 힘을 빼자 아나스타샤는 적극적으로 몸을 붙였다. 유리는 허벅지에 닿는 성기를 애써 무시했다.

정말 이 공주님은 귀찮아 죽을 만큼 손이 너무 많이 간다.

* * *

아나스타샤는 잠결에 옆자리를 더듬었다. 시트만 손에 잡혔다. 감겼던 눈이 번쩍 떠졌다. 유리가 없다. 분명 같이 잤는데? 그는 보호자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당황했다.

“깼으면 일어나.”

무심한 목소리가 아나스타샤 뒤에서 들렸다. 아나스타샤는 냉큼 고개를 돌렸다. 허리에 수건을 두른 유리가 있었다. 씻으러 나갔다 온 걸까. 가만, 알몸으로 본관에서 별관까지 왔단 말이야? 아나스타샤의 시선에 생각이 고스란히 담겼다.

“여기서 씻었어.”

“찬물만 나올 텐데?”

아나스타샤가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니까, 별관에서 씻었단 소리군……. 찬물로 못 씻을 건 없겠다 싶어 입맛만 다셨다. 그는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옷을 갈아입은 유리를 감상했다. 널찍한 등은 조각가가 심혈을 기울여 깎은 것처럼 매끈했다. 유리 같은 몸이면 시간을 내서라도 조각하겠다. 아나스타샤는 셔츠에 가려진 등을 아쉬운 듯 바라봤다.

옷을 걸친 유리가 아나스타샤를 확인했다. 아직도 침대에 누워있는 자태에 유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네 형이랑 인사 안 할 거야?”

“글쎄.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은데.”

아나스타샤는 도로 베개를 베고 누웠다. 어제도 본관에서 형과 아침, 저녁을 함께했는데 반기는 눈치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오메가 고용인들 때문이겠지. 각인도 안 된 알파가 둘이나 페로몬을 잔뜩 묻히고 돌아다니니 걱정될 만도 했다.

아하하……. 그렇게 아니라고 잡아뗐는데, 아니긴. 별관으로 옮기자마자 잘하는 짓이다. 아나스타샤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셔츠 단추를 잠근 유리가 빈둥거리는 아나스타샤를 쏘아붙였다.

“안 가면 안 간다고 얘길 해야지. 그냥 누워있을 생각이야?”

“으음, 그건 아닌데.”

말과 달리 아나스타샤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린 채 유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성격 급한 유리가 다가갔다. 아나스타샤의 시선이 점점 위로 올라가서 종국에는 턱을 쭉 빼야 했다.

“일어나.”

“공주는 왕자의 키스가 필요한데.”

“나는 왕자가 아닌데.”

“왕자가 아니면 뭐야?”

그들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아나스타샤의 물음에 유리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가 고개를 숙여 아나스타샤의 볼에 입을 맞춘 뒤 말했다.

“악당이지.”

“아하하. 그럼 날 납치할 생각이야?”

“안 일어나면 그럴지도 모르겠군.”

유리의 협박에 아나스타샤는 봄을 타는 소녀처럼 꺄르르 웃었다. 유리가 잡아먹을 듯이 굴어도 아나스타샤에게는 위협적이지 않았나 보다. 되려 유리의 팔뚝을 쓸었다.

“그럼 악당께서 키스해줄래? 나는 왕자든 악당이든 상관없거든.”

“공주가 돼서 입술이 너무 가벼운데.”

입술이 깃털보다 가벼운 남자가 뭐가 좋다고 쫓아다니는지. 유리는 자신을 흉보며 아나스타샤에게 키스했다. 입이 자연스레 벌어지고 혀가 엉켰다. 은은한 페로몬이 간헐적으로 들이쉬는 숨에 담겼다. 미량의 페로몬은 이제 무난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아나스타샤는 아쉽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유리와 눈이 마주친 공주가 눈웃음 지었다. 분홍빛 얼굴과 잘 어울리는 미소였다. 깨끗한 물로 씻은 복숭아 같았다.

“됐지.”

다비드 시모나로티가 떠나기 전에 얼굴을 비춰야 했다. 동생이 별관에서 별문제 없이 잘 지내는지 아침저녁으로 확인시켜주고 싶었다. 그저 유리의 개인적인 욕구였다. 나 유리 라포포르트만이 아나스타샤를 안전히 경호할 수 있다는 걸 가족인 다비드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유리는 거울 앞에 서서 넥타이를 맸다. 그가 넥타이핀을 고를 때까지 아나스타샤는 침대에 멀뚱히 앉아 입을 옷을 고민했다. 옷장에서 아무 옷이나 꺼내 입으면 되는데 거울 앞에서 셔츠 깃을 매만지는 유리가 신경 쓰여서 앉아있기만 했다.

완벽한 몸은 뭘 걸쳐도 완벽했다. 유리가 왜 자신에게 빠졌는지 조금은 이해가 됐다. 아나스타샤는 입으라는 옷은 안 입고 입을 놀렸다.

“날 좋아하면서 교제는 정말 싫은 거야?”

“가볍게 즐기는 게 당신한테도 좋을 텐데. 여러 번 얘기하게 만들지 마.”

유리가 아나스타샤를 돌아봤다. 보석처럼 번쩍이는 회색 눈은 온갖 범죄를 예고했다. 교제가 시작되면 유리가 질리기 전까지는 영원히 끝나지 않으리라. 아니, 유리가 질린다고 할지라도 계속되겠다. 수집가는 한 번 손에 넣은 보물을 쉽게 버리지 않으니까.

“내가 또 실수했네.”

아나스타샤도 애들처럼 사귀자고 조르기 싫었다. 탕아 아나스타샤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눈에 들면 몸을 맞춰보고 그래도 좋으면 걸음까지 맞춰보는 것이다. 걸음은 꼬이기 마련이고, 틀어지면 가볍게 인사하고 다른 상대를 찾으면 그만이었다.

처음 약속대로 가볍게 즐기기만 하다 끝내면 좋겠는데, 슬프게도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몸이 마음에 들었다. 아직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아나스타샤는 알 수 있었다. 껍질 상태만 보고 단 과일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

몇 걸음이라도 같이 맞춰봤으면 좋겠는데, 유리가 요구하는 건 원나잇 상대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입맛을 다셨다. 아무리 탐이 나는 보석이라 한들 햇빛만큼은 아니었다. 보석을 가지면 뭐 하나. 비출 빛이 없을 텐데. 잘못된 선택인 걸 알면서, 상대가 기회를 줬는데도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건 미련한 짓이다.

아나스타샤는 유리가 구두를 찾아 신을 즈음에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꺼내입었다. 본관으로 넘어가 씻기에는 아침 식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슬리퍼를 신고 유리와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다비드가 떠나기 전에 본관 식당에 모습을 드러낸 아나스타샤는 다비드와 라이엇, 그의 아이들에게 인사하고는 앞으로 식사는 별관에서 따로 먹겠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다비드는 거절했다. 알파가 페로몬을 풍기며 들락날락하는 것이 신경 쓰일 줄 알았는데, 아닌가? 거절당한 아나스타샤는 왜냐고는 묻지 못하고 눈만 꿈뻑였다.

그러나 다비드는 사소한 것까지 이유를 설명해주는 다정한 형은 못 됐다. 그는 시간 맞춰 나가버렸고 남겨진 아나스타샤는 다비드를 마중하는 이든과 고용인을 힐끔거렸다.

“도련님, 2층 욕실을 쓰실 거죠?”

“음, 응. 그렇지. 오늘은…… 약속이 있어.”

이든의 물음에 대답한 아나스타샤가 이번에는 유리의 눈치를 봤다. 그는 무심하게 떠나는 벤츠를 바라보기만 했다. 금요일 저녁에 앰버린과 한 약속이 있었다. 벌써 금요일이라니. 아직 유리와 실컷 즐기지도 못했는데. 앰버린과 룸까지 잡아버리면 겨우 좁힌 거리가 도로 넓어질 것이다.

“갈까?”

그렇게는 안 되지. 아나스타샤가 밝고 힘찬 목소리로 유리를 불렀다. 유리는 과하게 반짝이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생각했다. 아주 신이 났군, 하고.

아나스타샤는 가진 옷 중에서 가장 칙칙한 색을 골랐다. 재킷 색과 맞지도 않는 넥타이를 매고 핀도 제대로 꽂지 않았다. 광이 죽은 구두를 신고 시계는 가장 큰 것을 찼다. 거기에 잘 끼지도 않는 반지를 오른손 약지와 왼손 약지에 꼈다.

아나스타샤의 행색은 무척 우스웠다. 똑같은 옷을 유리 자신이 입었더라면 분명 우스웠으리라. 그러나 아나스타샤였고, 칙칙한 시금치 색 재킷에 노란 타이도 잘 어울렸다. 온몸으로 당신과 있기 싫다고 얘기하는 차림이었다. 아나스타샤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다면 자신이 헝겊을 입혀도 빛나는 인물임을 망각한 것이다.

“어때?”

“멋지네.”

“멋지다고? 이런, 유리. 이걸 멋지다고 하면 어떡해. 여기서 뭘 더 빼지? 머리라도 헝클일까? 아니면, 그래. 가기 전에 납치되는 거야.”

턱을 쓸며 고민하던 아나스타샤가 검지를 세우며 얘기했다.

“납치는 누가 해주는데?”

“그야 날 사랑하는 악당께서.”

아나스타샤가 상체를 비틀며 아양을 떨었다. 하,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재롱에 소리 내서 웃어버렸다. 웃음이 동의라고 생각했는지, 아나스타샤가 기대에 찬 눈으로 유리를 바라봤다. 유리는 허리에 손을 올렸다.

“아나스타샤 당신 눈에는 내가…… 납치했다가 돌려보내 줄 것처럼 보여?”

“아니야?”

“어.”

명료한 대답에 아나스타샤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앰버린과 만나기 싫어.”

그 시간에 유리랑 있으면 좋을 텐데.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어투와 시선에 담긴 뜻을 눈치챘다. 진심이 느껴져서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유리는 귀를 문지르며 딴청을 피웠다.

“저녁 약속이잖아. 약속이 끝나면…… 만나주지.”

“약속이야.”

기회를 잡은 아나스타샤는 냉큼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내뺄 틈도 주지 않았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손을 맞잡았다. 범인이 잡힐 때까지 같이 있을 텐데 약속은 무슨……. 그러면서도 아나스타샤의 손을 한참 붙잡았다. 아나스타샤는 유리가 놓을 때까지 손을 내줬다.

* * *

약속 장소에는 앰버린이 먼저 나와 있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보내고 그들의 얼굴이 간신히 보이는 구석에 앉아 가볍게 저녁을 들었다. 이 자리는 아나스타샤가 어렵게 마련해준 곳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앰버린과 마주 보고 앉아 연신 미소를 지었다. 앰버린은 유리를 등지고 앉아서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아나스타샤의 몰골을 본 앰버린을 못 보다니. 아쉽군. 유리는 히죽 웃으며 물을 마셨다. 웨이터가 샐러드를 가져다줬다. 유리는 안에 든 고기 몇 점을 먹고 말았다.

“이런, 손님. 편식하면 쓰나.”

다음 음식을 가져다준 웨이터가 말을 걸었다. 유리는 그를 올려다봤다. 웨이터 유니폼에 머리까지 멀끔히 넘긴 오시프가 웃고 있었다. 밝은 형의 얼굴을 보자마자 유리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여기서 뭐 해?”

“돈이 떨어져서 말이야. 일하고 있지.”

“뭐가 떨어졌다고?”

저번 달에는 진이 산다고 벼루던 제트기를 중간에 가로챘으면서 돈이 없다고? 오시프의 성의 없는 변명에 유리의 미간 주름은 더 짙어졌다. 오시프는 일도 잊고 유리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는 앰버린과 함께 있는 아나스타샤를 응시했다.

“내 동생을 두고 다른 여자를 만나다니.”

유리는 침묵으로 대응했다. 오시프의 말마다 반박해봤자 질 게 뻔했다. 승패가 뻔한 싸움을 할 정도로 마음이 여유롭지 못했다. 앰버린이 아나스타샤를 데리고 나가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다. 사랑스러운 동생의 반응이 뜻처럼 나오지 않자, 오시프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거울 파편이 흩뿌려진 눈밭 같은 눈동자가 유리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유리는 오시프를 곁눈질했다. 투명한 푸른 눈은 사람 속을 꿰뚫어 보는 미지의 거울이었다. 마주치면 들킨다. 그러나 오시프는 감춘 속내까지도 들춰보는 광인이었다.

“유라, 유라, 유라. 왜 이렇게 물렀을까. 날 못 믿는 거니? 왜 할 일을 제대로 못 하지?”

“…….”

“일은 끝났어. 곧 마무리될 테니까 긴장 풀어.”

오시프는 할 말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퍼런 시선이 멀어지고 나서야 유리는 그를 올려다볼 수 있었다. 그는 허리를 반듯하게 세운 채로 유리를 내려다봤다. 여우처럼 웃는 눈에서 묘한 기대감이 느껴졌다. 뭘 원하는 거지? 유리가 오시프의 저의를 알아채기도 전에, 그는 웨이터가 되어 테이블 사이사이를 지나갔다.

일이 끝났다. 일이라면 몇 년 전 치우다 흘린 ‘타이거아이’로 만든 ‘홍밍’을 추적하고 회수하고 제거하는 일이겠다. 요 며칠 귀찮게 굴던 블랙베리를 청소했다는 뜻인데…… 그러면, 살인마는?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앉은 테이블을 확인했다. 다행히 그는 그곳에 있었다.

목이 타서 물을 마셨다. 막이 내리기 직전에 제 역할을 깨달았다. 빈 잔을 내려놨다. 아나스타샤가 유리 쪽을 곁눈질했다. 마음이 무겁다…….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냐, 꿈꾸던 조각을 완성하느냐. 유리는 일생일대의 기로에 놓였다.

* * *

유리는 아나스타샤와 앰버린의 식사가 마무리되는 걸 눈으로 확인하고 먼저 건물 밖으로 나와 기다렸다. 해가 저물었는데도 여름의 열기는 가시질 않았다. 유리는 차게 식은 손끝에 입술을 문질러 몸을 녹였다.

초조하게 입구를 바라봤다. 앰버린이 아나스타샤를 꼬드겨 호텔로 올라갔는지 의심됐다. 지금은 안 봤으면 싶은데. 유리는 무심코 품은 생각을 떨쳐냈다. 젠장! 빌어먹을 인간 같으니. 오시프만 안 나타났어도 적당한 선에서 일을 끝내고 돌아갔으리라.

내 역할은……. 유리는 담배를 물었다. 불을 붙이려다 앰버린과 팔짱을 끼고 나오는 아나스타샤가 보여서 황급히 담배를 손바닥 밑으로 숨겼다.

그는 앰버린의 양 볼에 다정하게 키스해주고는 짙은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무어라 말을 건넸다. 아마 밤을 같이 못 지내서 미안하다, 같은 말이겠지. 아나스타샤는 작별 인사를 나누고는 미련 없이 그녀를 지나쳐 벤틀리로 걸어왔다.

정확히는 유리 쪽이겠지만,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자신 쪽으로 몸을 트는 순간 운전석에 들어가 숨어버렸다. 안 들키면 그만이다. 여태 오시프의 장난이란 걸 눈치챘으면서도 아나스타샤를 경호하는 척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경호원은 오시프가 준 역할이 아니었다.

유리는 손안에서 담배를 굴렸다. 아나스타샤가 상쾌한 걸음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청량한 미남은 점점 가까워졌고 종국에는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유리의 심장이 문 열리는 순간에 맞춰 쿵쾅댔다. 거짓말은 여태 해왔잖아. 한 번 더 한다고 문제 될 것 없다.

“많이 기다렸지? 금방 돌려보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앰버린이 날 엄청 마음에 들어 하나 봐.”

아나스타샤는 밝게 웃으며 얘기했다. 그는 조수석 앞쪽 서랍과 좌석 아래, 뒷좌석까지 훑어본 뒤에 안전띠를 맸다. 유리는 착잡한 마음을 억누르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공포에서 비롯된 버릇은 보석에 생긴 흠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시프의 장난질인 걸 알았을 때 시모나로티에 알렸어야 했다. 유리가 걱정한 ‘큰일’은 유리 기준이었다. 사지와 목숨만 잘 붙어있으면 그만이라 생각했던 유리와 달리 아나스타샤에겐 차와 함께 침몰 될 뻔한 사고도 큰일이었다.

누굴 어떻게 보호하겠다는 건지……. 결국 유리가 보호한 건 아나스타샤를 이용해 막냇동생 마음을 돌려보려는 오시프였다.

“담배는 안 피우는 거야?”

“……냄새 배니까.”

“하하, 잘 생각했어.”

아나스타샤가 재떨이를 내밀었다. 유리는 새 담배를 재떨이에 넣었다. 뚜껑이 닫히자 매끈한 스틸에 유리의 모습이 기괴하게 늘려져 비쳤다. 아나스타샤의 다른 스토커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유리는 겨우 핸들을 돌려 도로를 달렸다. 가슴에 말뚝이라도 박힌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말뚝은 죄책감으로 갈아 끝이 날카로웠고 무기력감이 거세게 망치질해 몸통을 관통했다. 오시프에게 휘둘리기 싫어 미국에 온 건데, 실정은 러시아에 있을 때와 같았다.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심란한 속내까지 맞추진 못했으나 기분은 헤아릴 줄 알았다. 앰버린과 오래 있어서 기분이 안 좋구나. 아하하, 꼭 질투하는 연인처럼 구는 유리 때문에 아나스타샤는 무릎을 움켜쥐었다. 재미만 보는 사이치고는 꽤 진짜 같지 않은가.

“날 이렇게 불러내는 사람은 쉽게 물러서지 않아. 그래도 이따 와인 한 잔 마실 시간은 되잖아?”

“아니. 괜찮아.”

유리는 아나스타샤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눈만 꿈뻑였다. 이만하면 귀엽게 군다며 킥킥 웃을 법도 한데. 분노의 대상이 앰버린이 아닌가? 그럼 우리 막내 도련님은 무엇에 화가 났을까.

“유리, 무슨 일 있어?”

‘일’ 소리에 유리는 핸들을 꽉 쥐었다. 아나스타샤는 힘이 들어가는 유리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정신을 어디에 두고 운전하는 건지, 유리는 신호가 바뀌는 것도 못 보고 달리다 횡단보도에 사람이 쏟아지는 걸 보고 급정거했다. 아나스타샤의 몸이 앞으로 푹 꺾였다. 횡단보도를 침범해서 멈춰서 사람을 칠뻔했다. 보행자가 욕을 하며 지나갔다.

신호등의 빨간 불빛이 차 내부로 번졌다. 서로를 바라보는 얼굴이 피 칠갑을 한 것처럼 빨갰다.

“내가 거짓말을 했다면 어쩔 거지?”

잘못 만든 독립 영화의 대사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진지한 얼굴로 물어보는 유리를 한참 응시했다. 말의 저의가 뭘까. 아나스타샤는 고민하면서 물 흐르듯이 대꾸했다.

“나한테? 음, 뭐. 피치 못할 사정이 있겠지. 사람마다 사정은 다 있잖아? 나도 청렴하진 않아. 왜? 유리, 나한테 거짓말했어?”

아나스타샤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숨이 막히게 조여들던 긴장감은 신호등 불이 바뀌면서 풀어졌다. 차는 막힘 없이 도로를 달렸다. 유리는 블록 두 개를 지날 때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기다렸다. 안달 난 쪽은 그가 아닌, 유리니까.

“……의뢰인이랑 섹스했잖아.”

“……그냥 가볍게 만진 거지.”

그들은 다시 시선을 마주쳤다. 둘은 서로를 “무슨 소리야.” 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하, 좆 비빈 거는 섹스 축에도 못 낀다 이거지? 허벅지 살을 벗겨낼 것처럼 문질러대더니, 섹스는 아니다? 유리의 입술이 옹골지게 다물어졌다.

닳는 것도 아닌데 그냥…… 해봐? 유리는 유혹에 침을 삼켰다. 오시프도 허락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자신을 위한 만찬 앞에 앉아 이제 막 포크를 들어 육즙이 흐르는 고기를 입에 넣으려던 찰나였다. 유리는 식탁을 엎어버렸다. 제길! 오시프가 뭐라고 허락했다고 냉큼 받아먹어? 내가 그 자식 애완견도 아니고.

유리의 생각은 운전에 고스란히 담겼다. 아나스타샤는 안전띠를 양손에 꼭 쥐고 천당이 아닌 다비드의 저택에 무사히 도착하길 빌었다. 유리는 신호를 아슬아슬하게 지켰다. 노란 불이 들어와도 속도를 줄이는 법이 없었다. 목숨을 건 꼬리 물기로 아나스타샤에게 지옥을 보여줬다. 이러다가 내가 죽겠어! 공주는 유리를 불렀다.

“유리, 나 집에 데려다주는 거 맞지? 주님 곁은 아직 이른데.”

“아…….”

탄식과 함께 속도가 줄었다. 아나스타샤는 생명줄로 붙잡았던 안전띠를 놓았다. 분노의 질주는 사고 없이 막을 내렸다. 그는 유리가 다른 생각을 못 하도록 계속 말을 걸었다. 그러나 유리는 어, 응, 하는 반응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앰버린을 질투하는 것도 아니면서 왜 나사 빠진 것처럼 굴지? 뭐가 문젤까. 아나스타샤도 유리를 따라 입을 다물고 사색에 빠졌다. 그러다가 지금 차가 뉴욕을 빠져나가지 않고 안을 빙글빙글 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나스타샤의 눈이 뱀처럼 가늘어졌다.

“알파랑…… 그러면 기분이 좋나?”

의심에 확신을 주는 질문이었다. 아나스타샤가 대답했다.

“유리도 해봤으니 알잖아.”

“가볍게 만진 거지.”

아나스타샤는 하하, 웃고 말았다. 먹잇감이 제 발로 찾아오는데 마다할 짐승은 없다. 아나스타샤는 입을 크게 벌려 유리가 이 동굴이 아귀가 아니라고 착각하게 했다. 한입에 삼켜서 음미하리라. 깊은 사이는 그 후에 가져도 되니까. 공주는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다. 그래도 역시 귀여운 도련님보다는 바다와 바람과 태양이 좋았다.

유리는 입술을 훑었다. 섹스하자고 어떻게 얘기하지? 무슨 말부터 꺼내야 아나스타샤가 승낙할까? 여태 지켜본 아나스타샤를 봤을 때 바지만 벗어도 달려들 것 같은데, 차 안에선 그러기가 어려웠다. 말로 아나스타샤를 꼬드겨야 한다니. 차를 골목에 세워야 하나. 머리가 복잡했다.

오시프 때문이 아니다. 진득하게 만지는 건 어떤지 궁금해서다. 오시프의 허락은 상관없어. 의뢰를 받을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잖아. 유리는 목을 가다듬었다. 헛기침 소리에 아나스타샤는 조용히 침을 삼켰다.

“나도 느껴보고 싶어.”

오만하면서 귀여운 명령에 아나스타샤는 모르는 척 고개를 기울였다.

“음?”

“모르는 척하지 마라.”

라포포르트의 막내 도련님은 장난을 모른다니까. 아나스타샤는 화난 얼굴로 정면을 노려보는 유리를 귀엽게 여겼다. 노력이 가상하니 넘어가 줘야지. 다른 사람도 아닌 라포포르트의 귀한 보석 아니던가.

“두 블록 더 가면 호텔이 있어. 전에 형이 가라고 했던 곳. 기억하지?”

“…….”

“막내 도련님의 처음을 다 가져가니 네 형제들이 분통하겠어.”

아나스타샤가 농담을 던졌다. 농담인지 정말 라포포르트의 심기를 건드리려고 하는 소리인지는 모르겠으나, 뒤에 이어지는 웃음소리가 꼭 바람에 흔들려 떨어지는 꽃잎 같아서 유리에게는 듣기 좋은 사랑 속삭임으로 들렸다.

* * *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씻는 소리를 들으며 선택을 후회했다. 알파끼리 하면 어떻게 좋은지 그걸 직접 해 봐야 아는 멍청이도 아니고! 강렬한 쾌감을 주는 행위가 싫을 리가 없다. 아니, 상대가 알파라면 싫을 수도 있겠구나. 유리는 팔짱을 끼고 아나스타샤와 처음 키스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본능이 거부하는 키스였다.

겨우 키스할 때 헛구역질을 안 하는 정도면서 잘도 ‘기분 좋은 짓’을 요구하다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유리는 손을 풀었다. 아나스타샤가 방심하는 틈을 타 기절시키면 아무 일 없이 밤을 보낼 수 있다.

주먹은 너무 위험한가. 유리는 주위를 둘러보다 협탁에 놓인 크리스털 재떨이를 발견하고는 움켜쥐었다. 이거면 머리가 찢어지긴 해도 죽지는 않겠지. 아니, 아니지. 찢어지기만 하고 안 쓰러지면 어떡해? 유리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쉬었다. 완급 조절을 해본 적이 없으니 휘두르기가 두려웠다.

영원히 이어졌으면 하는 물소리가 끊겼다. 공주의 발걸음에 맞춰 심장이 쿵쾅거렸다. 곧 가운을 걸친 아나스타샤가 개운한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그는 재떨이를 들고 흉흉하게 서 있는 유리의 눈치를 살폈다.

“왜? 뭐…… 있었어?”

아나스타샤는 그가 들고 있는 재떨이가 본인의 뒤통수를 노리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걱정스럽게 물었다. 유리는 재떨이를 내려놨다. 싫으면 싫다고 말하면 되지, 멀쩡한 인간 대가리는 왜 깨려고 들어? 방금 막 씻어서 뽀얀 아나스타샤를 보며 유리는 자신의 극단적인 선택을 구겨버렸다.

“운동 좀 하려고.”

“하하, 운동은 좀 이따 양껏 할 텐데. 들어가서 씻어.”

욕실이 두 개 있는 룸인데도 불구하고 안 씻고 멀뚱히 선 유리를 재촉했다. 그는 꼭 병원 입구에서 주사 맞기 싫다며 투정 부리는 아이처럼 버텼다.

“이런, 나랑 같이 씻을 걸 그랬나?”

그럼 구석구석 씻겨줬을 텐데. 아나스타샤가 웃었다. 유리의 뚱한 표정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아나스타샤는 정말 옷을 벗겨줄 듯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유리는 손이 닿기도 전에 멀찍이 도망쳤다. 허공을 쥔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보고 웃었다.

“…….”

유리는 할 말이 있는지, 한참 입을 벙긋거리다 포기하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아나스타샤는 유리가 하고픈 말을 마음으로 들을 수 있었다. 처음이니까, 적당히 해달라거나 부드럽고 상냥하게 해달라거나. 아나스타샤는 잔에 술을 따르고 한 모금 마셨다.

아하. 당연히 다정하고 상냥하게, 적당히 해야지. 섹스하다가 목이 졸려 죽거나 머리가 터지기 싫으면 말이다. 아나스타샤는 협탁에 놓인 크리스털 재떨이를 소파 밑으로 치워버렸다.

씻으러 들어간 유리는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마른 수건을 들고 유리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도 별수 있나. 도련님께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는데 기다려야지. 이렇게 미적대는 주제에 무슨 용기가 생겨서 해보자는 소리가 나온 걸까. 공주님은 악당의 속내가 무척 궁금했다. 어서 한 겹도 남기지 않고 벗겨 먹은 뒤 진실을 알고 싶었다.

드디어 맨몸의 유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딘가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는데 입을 꾹 다문 모습이 “사실은…….”하고 듣기 싫은 말을 주절거릴 것처럼 보였다. 유리가 싫다면 여기서 끝이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도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유리, 깨끗하게 씻었어?”

아나스타샤는 유리가 입을 열 틈도 주지 않고 수건으로 유리의 머리를 감쌌다. 시야가 가린 유리는 하려던 말을 잊고 아나스타샤의 팔뚝을 잡았다. 아나스타샤가 물기를 닦아주자 팔을 잡았던 손이 자연스레 떨어졌다.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등을 밀어 침대 쪽으로 걷게 했다.

“감기 걸리겠어. 어서 들어가.”

“잠깐만. 난…….”

아직인 것 같아. 실수였어. 유리가 준비했던 거절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유리의 위장에 떨어졌다. 입과 몸으로 하는 일 중 무술, 사격을 뺀 모든 분야에서 아나스타샤가 유리보다 한 수 위였다. 아나스타샤는 알파를 안다. 알파에게 준비된 때는 없다.

아나스타샤는 유리가 들이민 방패를 손쉽게 뒤집은 뒤, 그를 침대로 밀어 던졌다. 오토바이를 타고 날아오르고 사람 얼굴을 주먹으로 으깨버리는 사내가 아이스크림 막대처럼 힘없이 침대에 쓰러졌다.

침대에 누운 유리는 수건을 걷어내고 허리를 세워 앉았다. 한마디도 못 했는데 침대라니. 아나스타샤가 순순히 따라준다고 얕봤다. 멍청한 놈 같으니.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하지는 않겠지. 유리는 홧김에 아나스타샤와 밤을 약속한 과거의 자신을 질책했다.

“할 말이라도?”

“역시 의뢰인과 이러는 건 맞지 않아.”

정중한 거절이었으나 아나스타샤는 꿈쩍도 안 했다. 도리어 침대에 무릎을 대고 몸을 기울였다. 유리가 손을 짚은 곳 바로 옆을 손으로 짚으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내 말 들었어?”

조바심을 느낀 유리가 물었다. 아나스타샤는 생글생글 웃는 낯을 유리에게 보여줄 뿐이었다.

“유리, 솔직하게 말해도 좋아.”

공주의 말이 사실이었기에 유리는 반박하지 못했다. 사실이었다. 스스로가 인정하지 않을 뿐. 유리가 이를 드러내며 노려봐도 아나스타샤는 사탕을 훔친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고 인자한 목소리로 유리를 달랬다.

“무서워서 못 하겠다 해도 널 비웃지 않아.”

유리의 얼굴이 분노로 붉어졌다. 비웃지 않는다는 말로 비웃고 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아니. 라포포르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고작 섹스가 무서워서 변명하는 라포포르트라니. 이런 곳에서 자존심을 세우는 건 미련한 짓이었지만, 유리는 참을 수 없었다.

자존심은 간혹 생리현상보다 우선시 되기도 한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뒷목을 잡아당겼다. 공주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긴장했던 유리의 눈빛이 빛났다. 알파를 경험할 생각에 잔뜩 겁먹은 들짐승이 아닌, 맞붙어 승리를 쟁취하려고 이를 드러낸 금수의 눈이었다. 번뜩이는 투명한 회색 눈동자는 오래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아나스타샤는 시선을 입술에 뒀다.

기 싸움에서 이긴 유리는 대담하게 아나스타샤의 입술을 한입에 삼켰다. 입을 벌려 내부를 탐했다. 치아끼리 부딪치고 살이 집혔으나 아야야, 하는 엄살은 없었다. 유리는 양팔을 아나스타샤의 목에 걸어 붙잡았다. 매달리는 무게를 못 이긴 아나스타샤는 점점 밑으로 내려앉았다. 결국에는 유리의 머리가 시트에 닿았다. 입술을 사납게 빨던 유리가 아나스타샤를 떨어트렸다.

“누가 무섭다는 거야.”

“아아, 유리. 반하겠는걸.”

아나스타샤는 괴롭힘에 빨개진 입술로 유리의 비위를 맞췄다. 아름다운 눈웃음과 황홀감에 젖은 눈빛까지……. 모든 것이 유리를 위한 만찬이었다. 첫눈에 반한 사람이 유리, 자신이 아닌 아나스타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꿈 깨.”

아나스타샤를 저격하며 스스로를 질타하는 말이었다. 유리가 냉랭하게 답하자 아나스타샤는 연인에게 하듯 가는 웃음을 흘렸다.

“반하면 곤란하나?”

“둘 다 반하면 꼴이 우스운데.”

덤덤한 목소리와 달리 담긴 내용은 아나스타샤를 들뜨게 했다. 둘 다라니. 이미 한 명은 반했다는 거잖아.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목덜미에 입을 댔다. 타액으로 축축해진 입술이 입이 아닌 다른 곳을 탐닉했다. 애무를 처음 받는 것도 아닌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덩달아 젖꼭지가 바짝 섰다. 가슴을 훑던 아나스타샤가 뾰족하게 선 젖꼭지를 꼬집었다.

“귀엽기는. 여기는 벌써 섰잖아.”

“그건…….”

“쉬이. 유리.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아도 돼. 이유야 하나지. 안 그래?”

대답도 못 하게 할 거면 왜 물어봤어? 사람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게 목적이구나. 유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나스타샤가 가슴을 애무해도 유리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냥, 빠는구나. 만지는구나, 하는 원초적인 감각만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아무리 쓸고 문질러도 긴장이 풀리지 않는 유리의 육체를 훑어보곤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한숨이 꼭 “못 써먹겠군.”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아서 유리는 얼굴을 붉혔다. 아나스타샤는 그저 방법을 바꾼 것뿐이었다. 사람마다 느끼는 부분도 강도도 다르니 천천히 찾는 게 우선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여유롭지 못했다.

그는 서랍 안에 들어있는 젤을 꺼내 손에 듬뿍 짜냈다. 유리의 시선이 아나스타샤의 손을 쫓아다녔다. 손에 잔뜩 떨어지는 젤을 본 유리는 본인도 모르게 무릎을 붙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나스타샤가 손을 뻗은 곳은 안쪽이 아니라 성기였다.

젤에 젖은 차가운 손이 성기를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어찌나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는지 젤의 물컹한 감촉만 느껴졌다. 가슴이 안 되니 밑인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나스타샤가 무릎을 벌려 사타구니 쪽에 얼굴을 들이밀기 전까지는, 그랬다.

만질 거면 얘기라도 하던가! 놀랐잖아!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머리를 때리는 대신 시트를 꽉 쥐었다.

“뭐, 뭐 하려고.”

유리는 차근차근 아나스타샤의 꿍꿍이를 파내기로 했다. 아나스타샤는 말보다는 고환을 입에 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유리의 입과 눈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이 무슨 경악스러운 일인가. 충격적인 가운데 아나스타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성기는 눈치 없이 힘을 받아 뻣뻣해졌다.

남자라면 어쩔 수 없는 생리현상이라고 다독이고 싶어도 아나스타샤가 고환을 물고 핥는 순간 아랫배에 볼링공이 쿵, 떨어지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유리는 남의 환부에 얼굴을 처박고 애무하는 아나스타샤를 언짢게 바라보면서도 침을 삼켰다. 누가 변태 새끼인지……. 시트를 쥔 손에 핏줄이 튀어나왔다.

아나스타샤의 봉사는 훌륭했다. 트림을 시키는 손길같이 군더더기 없었다. 유리는 인상을 찡그리며 서서히 지펴 올라오는 쾌감을 음미했다. 아나스타샤가 성기를 입에 물어줬으면 하는 상상을 할 즈음이었다. 고환과 회음부를 애무하던 아나스타샤가 더 안으로 고개를 밀어 넣었다.

닿으면 안 될 것이 밑에 닿았다. 유리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뒤로 뺐다.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들었다. 침과 젤로 젖은 얼굴을 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파란 눈을 깜빡였다.

“무슨…….”

“괜찮아, 유리.”

“이상한 짓 하지 마.”

“이상하다니. 겪어보고 싶다는 건 너였잖아.”

아나스타샤는 물러서지 않고 유리의 골반을 끌어왔다. 입술이, 혀가 주름진 부분에 닿았다. 물컹하고 따뜻한데 살아 움직였다. 엉덩이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발기했던 성기도 구멍 뚫린 풍선처럼 부피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시트를 붙잡았던 손이 들썩거렸다.

“……경고했어.”

경고는 살인 예고나 다름없었다. 아나스타샤가 상체를 세우고 앉아 억울한 눈초리를 보냈다.

“다 싫다 하면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무서워서 서지도 않는다고. 무려 공주께서 하사하는 애무인데 거절하다니! 유리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칭얼거리던 아나스타샤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웃으며 던져둔 젤을 집었다.

“그래, 알았어.”

알았다면서 다음을 준비하는 아나스타샤를 유리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쳐다봤다. 싫다는 건 비키라는 뜻이었는데 공주님은 다른 뜻인 줄 아나 보다. 아나스타샤는 널브러진 유리의 다리를 들어 제 허벅지 위에 걸치고는 젤이 뚝뚝 흐르는 손을 회음부에 대고 문질렀다.

유리의 몸이 마취 주사를 맞은 짐승처럼 들썩였다.

“내가 싫다고 했잖아!”

“알았다니까. 입이 싫으면 손으로 해줄게.”

그것도 싫어! 유리는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가 입을 맞추는 바람에 주름을 더듬는 손가락은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어딜 핥고 지금 주둥이를……! 입술을 뜯어먹으려던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아나스타샤는 거리낌 없이 입술을 빨아당기고 치열을 핥았다.

그 사이 주름 위로 원을 그리던 손가락이 안으로 들어왔다.

“헉…….”

생전 처음 느껴보는 이물감에 유리는 침묵했다. 나오기만 하는 곳에 뭔가 들어왔다는 것도 충격인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손가락을 손톱만큼 집어넣었다가 기어코 마디 전부를 쑤셔 넣었다. 코앞에 아른거리는 아나스타샤의 얼굴을 바라봤다. 침대에 누울 때부터 꿈을 꾸는 게 아닐까, 유리는 생각했다.

“이건 괜찮지?”

죽고 싶나? 진짜 죽고 싶어서 물어보나? 유리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나머지 입만 벙긋거렸다. 아나스타샤는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처음이 힘들지 익숙해지면 재미있다니까. 유리도 푹 빠지리라 장담했다.

넣는 것으로 끝이길 바랐던 손가락이 움직였다. 아나스타샤는 단번에 전립선을 찾아 짓눌렀다. 상상하던 대로 유리의 내부는 황홀했다. 이 안까지 모습을 기록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나스타샤는 고급 융단을 만지듯 부드러운 손길로 유리를 유린했다.

분노로 일그러졌던 유리의 얼굴이 단숨에 풀렸다.

“읏……?”

부정할 수 없는 쾌락이었다. 어쩌면, 앞을 만지면서 느꼈던 쾌락보다 묵직했다. 유리는 항의라도 하듯 아나스타샤를 쳐다봤다. 공주는 유리가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푸른 눈은 금방이라도 폭언을 퍼부을 것처럼 살벌한데 입꼬리는 귀엽게 올라간 기괴한 미소였다.

눈빛을 교환했다. 행위를 끝내기에 충분한 의사소통이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내부를 짓누르는 쪽을 택했다. 겨우 손끝이 꼼질대는 움직임에 유리의 육체가 제멋대로 뒤틀렸다. 벌어진 입에서는 생전 처음 내보는 교성이 흘렀다.

“윽……? 읏, 아앗, 아…….”

“걱정 마, 유리. 끝까지 안 할 테니까.”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뭐라 지껄이는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사정감이 소용돌이쳤다. 유리의 성기는 꼿꼿하게 서서 묽은 애액을 흘려댔다. 얼른 가고 싶다. 유리의 손이 자연스레 성기로 향했다. 그러나 꺼떡이는 살덩이를 잡기도 전에 아나스타샤가 손을 쳐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전립선을 짓눌렀다.

“……으응.”

아나스타샤는 눈빛으로 안 된다고 말했다. 유리는 인상을 찡그린 채 아나스타샤를 노려보며 욕과 협박을 생각했다. 라포포르트를 노리개 다루듯이 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줘야 했다. 그는 유리의 서슬 퍼런 눈빛을 받아줬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협박해도 아나스타샤가 순순히 물러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제발, 제발…….”

아나스타샤 시모나로티는 타고난 조련사였다. 욕과 협박을 애원으로 바꾸는 마법사이기도 했다. 아나스타샤가 입을 맞췄다. 뒤를 핥은 더러운 주둥이였으나 유리는 반갑게 그의 입술을 빨아당겼다. 안을 문지르는 손가락이 거칠게 움직였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끌어안았다.

사정이 눈앞이었다. 아아……! 신음을 조절할 수 없었다. 벌어진 입으로 비명 같은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에게 안긴 유리의 귓가에 속삭였다. 최고야, 유리. 잘하는 걸, 유리…….

“으흑. 읏…….”

유리는 무기력하게 아나스타샤의 품에 안겨 가버리고 말았다. 앞을 만지지 않고 어떻게……. 전립선 마사지는 처음이었던 유리는 사정과 함께 찾아온 상실감에 눈가가 화끈거렸다. 아나스타샤가 웃었다. 그는 젤 범벅이 되어 찐득해진 손으로 유리의 다리를 벌렸다.

“……너.”

“같이 즐겨야지.”

넣기만 해봐, 콱 잘라버릴 테다! 수치와 분노로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마주 보고도 아나스타샤는 뻣뻣하게 발기한 성기를 유리의 회음부에 문질렀다. 넣으면 죽이겠지. 분명 죽일 거야. 아니, 아랫도리만 도려내서 상어 밥으로 줄지도 모르겠군. 아나스타샤는 비비는 것으로 만족했다.

시간이야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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