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Vals
유치원 가방까지 멘 미카엘과 라파엘은 시합이라도 하듯 현관 밖으로 뛰어가더니 알아서 뒷좌석 베이비 시트에 앉았다. 이든이 가방을 벗겨 시트 밑에 놔주고 벨트를 채워줬다. 아나스타샤와 라이엇은 현관에서 다비드를 기다렸다. 아나스타샤와 묶여 다니는 유리 또한 그 곁에 있었다.
“형은 괜찮아?”
“응. 어제 잠도 잘 잤어. 생각보다 충격이 크진 않은가 봐.”
다행이지. 라이엇이 아나스타샤의 물음에 대답했다. 아나스타샤는 어깨를 으쓱였다. 라이엇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다. 협박 편지를 받은 후부터 내색은 안 했겠지만, 다비드도 스트레스받았을 것이다. 임신까지 했는데 이러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아나스타샤의 입가가 굳어졌다. 라이엇이 아나스타샤의 허리에 팔을 감고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걱정할 필요 없어. 이 집에서 머물러. 그편이 나아. 다른 곳에 있다가 잘못되는 쪽이 더 스트레스받을 거야. 그리고 너한테는 라포포르트 씨가 있잖아?”
“네가 집에 있으면 형도 걱정이 덜겠지. 일이 그렇게 바빠?”
“응…. 날 이렇게 굴리겠다는 계약은 없었는데 말이야. 확, 그만둘까?”
“하하, 그만두고 뭐 할 건데? 집에서 애들 보려고?”
“그것도 좋지…. 다비드 씨 출퇴근할 때마다 키스하고 인사하고……. 그런 삶도 나는 좋아.”
상상에 빠진 라이엇이 헤, 하고 웃었다. 생각만 해도 좋은가 보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에게 기댄 라이엇을 다독이며 유리를 힐끔댔다. 라이엇은 라포포르트가 소유한 군수회사인 라포트의 무기 개발자였다. 등 뒤에 라포포르트를 두고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얘기를 꺼냈으니, 그의 반응이 궁금한 건 당연지사였다. 그러나 유리는 라포트의 지분도 없었고, 형들이 뭘 하든 관심도 없었기에 라이엇의 칭얼거림은 들리지도 않았다. 그저 오늘도 일정을 무사히 마감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뭐, 네가 다섯째를 낳을 생각이 아니면 열심히 일하는 게 좋을걸. 형은 연구원 가운 입은 널 좋아하니까.”
“네가 거기까지 어떻게 알아? 난 가운 입고 다비드 씨 만난 적 없어!”
복장을 트집 잡힌 라이엇이 고개를 들어 반박했다. 아나스타샤는 픽, 웃었다.
“왜 몰라? 척 보면 척이지. 정장도 안 입고 출퇴근하는 널 형이 왜 견딘다고 생각해? 두 살만 더 먹어봐. 네 물 빠진 맨투맨이랑 웃기게 생긴 체크 남방은 다 불태워버릴걸?”
라이엇이 자신의 옷을 훑었다. 색이 빠져 칙칙한 파란색이 된 맨투맨에 검은 면바지, 코가 닳은 운동화가 보였다. 일이 바쁘고 편하게 입는 게 아직은 잘 어울리는 나이라 다비드 씨가 봐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엇은 눈을 가늘게 떴다. 다비드 씨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난데, 여우 같은 아나스타샤가 속을 긁어댔다.
“아냐. 너도 조심해야지. 이 집에서 알파와 뒹굴었다고 선전하고 다니면 다비드 씨가 별관으로 쫓아낼걸? 거기 이제 겨우 전기만 연결해둔 거 알지? 보일러는 설치도 안 해서 찬물로 씻어야 한다고.”
“……냄새나? 아침에 세 번이나 씻었는데.”
“본인 체취니까 본인은 모르지. 아까 오로라가 커피 내올 때 못 봤어? 오늘 다비드 씨 기분이 좋은 걸 다행으로 여겨. 아니었으면 쫓겨났을 테니까.”
서로 한 방씩 먹인 아나스타샤와 라이엇은 서로를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노려봤다. 주인을 믿고 왕왕 짖어대는 치와와처럼 보였다. 유리는 웃기지도 않은 주제로 싸우는 두 치와와를 바라보며, 사랑은 힘들구나, 생각했다.
“내가 늦었지. 라이엇, 가자.”
넷째를 임신한 다비드는 목까지 셔츠 단추를 채우고 넥타이를 반듯하게 맨 채 내려왔다. 흐트러짐 없는 스리피스에 서류 가방까지 챙긴 모습은 임신했다고는 믿기지 않았다. 아르릉 짖던 라이엇이 다비드를 보자마자 귀엽게 웃으며 다가갔다.
“아니에요. 다비드 씨. 답답하지는 않아요?”
“그럼, 괜찮지.”
다비드가 대답하며 라이엇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아나스타샤는 눈을 세모로 뜨고 둘을 바라봤다. 내가 이어줬지만, 눈꼴 셨다. 세상에 라이엇만 있는 것처럼 바라보던 다비드가 아나스타샤 쪽으로 몸을 돌렸다. 키스라도 하면 내가 밤에 무슨 짓을 했는지 형이 눈치챌 텐데! 아나스타샤는 식은땀을 흘렸다.
“아빠, 언제 가요. 얼른 가요.”
차에 앉아있는 게 지루했는지, 미카엘이 큰소리로 물었다. 다비드는 현관 밖을 바라보고는 아나스타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나스타샤가 방긋 웃으며 같이 손을 들어 인사했다.
“다녀와, 형.”
“그래. 조심하렴.”
다비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며 차에 올라탔다. 뒤따라 나가는 라이엇이 등 뒤로 손을 빼며 엄지를 추켜올렸다. Good job은 무슨! 걸릴 뻔했구만! 아나스타샤는 운전석으로 사라지는 금발을 끝까지 노려봤다. 곧 시모나로티 내외를 태운 차가 출발했고, 아나스타샤는 그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아, 이래서 내가 안 된다고 한 거야.”
환기하고 열심히 씻었는데도 눈치채네. 아나스타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유리를 나무랐다. 유리는 코웃음도 치지 않고 대꾸했다.
“좋다고 입에 물린 게 누군데.”
“유리! 말, 말조심해. 우리 둘만 있는 거 아니야!”
“먼저 얘기 꺼낸 건 아나스타샤 씨입니다.”
라이엇한테 깨지고 유리에게도 깨진 아나스타샤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빈 현관에 아나스타샤가 타고 다니던 하얀 벤틀리가 들어왔다.
“우리도 가자…. 미팅 끝나고 총이라도 사갈까? 내가 쓰기에는 어떤 총이 좋겠어?”
“쏠 줄도 모르면서 총은 왜 사?”
“유리가 알려주면 되잖아. 나 배우는 건 빨라.”
아나스타샤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글쎄…. 시모나로티 씨가 사격을 가르치지 않은 이유가 있지 않을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는 브로커라도 있나 보지? 유리는 입 아프게 떠들지 않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아나스타샤는 침묵을 긍정으로 알아들은 채 조수석에 올랐다. 오늘도 무사히 귀가할 수 있기를! 아나스타샤는 안전띠를 매며 신께 기도했다.
뉴욕의 아침은 교통 체증으로 시작됐다. 유리는 차로 꽉 막힌 도로를 보며 핸들에 팔을 올렸다. 이래서 약속 장소에 시간 맞춰 가기는 글렀다. 지각이 분명한데 아나스타샤는 손짓까지 해가며 즐겁게 대화하느라 정신없었다. 청자는 유리였으나, 유리는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아나스타샤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다비드와 라이엇이 결혼할 수 있게 다리를 놔주고 도와줬는데 금술이 너무 좋아서 문제라는 것이다. 서로 좋아해서 결혼했으면 됐지, 뭐가 문제란 말인가. 유리가 봤을 때는 다비드와 라이엇의 금술을 걱정할 게 아니라 본인 혼사를 하루라도 빨리 알아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 눈빛은 뭐야? 꼭… 너는 결혼 언제 하냐고 묻는 것 같은데?”
눈치 빠른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유리 쪽으로 내빼며 물었다. 유리는 심드렁한 얼굴로 공주를 바라봤다. 어제 납치됐다 돌아온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청량한 기운이 넘쳤다. 혹시 내가…… 아니다. 됐다. 유리는 정면을 바라봤다.
“응? 말로 해야지. 눈빛으로 얘기하면 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래. 제대로 짚었어.”
“하하! 내가 결혼? 위자료나 잔뜩 안 뜯기면 다행이지. 유리, 나는 한 명에게 정착할 용기가 없어. 사랑은 횃불이야. 탈 때는 따뜻하고 밝겠지만, 꺼져버리면 다시 붙이기 힘들지. 이미 타버린 나무에 불이 옮겨붙겠어?”
“……당신은 인지오 시모나로티 씨의 외동아들이야. 거기에 알파잖아. 대를 이어야 할 의무가 있어.”
정 필요하면 정략결혼이라도 하든지. 유리가 건조하게 대꾸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외동아들이니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 그래서 아나스타샤가 선택한 방법이 다비드의 혼사였다. 라이엇도 친가와 약속한 햇수가 지나면 시모나로티의 일원이 될 터였다. 그때가 되면 다비드가 낳은 아이들이 시모나로티의 후계자가 될 것이다.
“대는 형이 이을 거야.”
“그래봤자 오메가야.”
“오메가여도 시모나로티의 장자지.”
오메가가 어떻게 한 가문의 계보를 잇는단 말인가. 유리는 침묵했다. 대화를 이어봤자 결론 나지 않는 논쟁일 뿐이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찝찝한 기분을 이어갈 생각이 없었다.
“나는 오메가랑 못 자. 안 선다고. 알겠어? 알파가 좋단 말이야.”
“알았어.”
유리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파가 좋다는 말까지 모자라 오메가랑은 관계를 못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으니 피가 식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멀쩡히 가정을 꾸리고 시모나로티의 뿌리를 이어가기를 원했다. 아나스타샤는 착잡해진 유리의 얼굴을 지켜봤다. 또 알파랑만 잘 거라고 했다가는 핸들을 꺾어버릴지도 모를 얼굴이었기에, 애써 둘러댔다.
“알파와 결혼할 수야 있겠지. 임신을 못 하는 건 아니잖아.”
“하. 차라리 파워볼에 당첨되길 바라지 그래?”
“파워볼보다 알파를 임신시키는 게 더 확률이 높을걸? 생각보다 임신한 알파들은 많아.”
유리는 다시 침묵을 선택했다. 그러니까 어떻게 평생을 구역질 나는 알파 페로몬을 맡으면서 함께 산단 말인가. 이해를 못 하니 납득시킬 수도 없다. 이 논쟁의 끝은 침묵이리라. 아나스타샤도 그렇게 생각했다. 알파와 교제하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결혼을 납득시키겠는가.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통할 때까지 밀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 이유는.
“유리는 참 이상해. 날 좋아한다면서 여태 나랑 사귈 생각은 안 해봤어?”
“그래.”
“왜? 날 앞에 두고도 키스하고 싶다거나 사귀고 싶은 생각이 안 들어?”
날 좋아한다면서. 거짓말이구나. 아나스타샤가 빈말을 흘리며 자극하자 유리는 인상을 구겼다. 좋아하면 꼭 관계를 맺고 사귀어야 하는가?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자꾸만 자신의 호감을 검증하려고 드는 것이 짜증 났다. 바보 같으니. 사귈 수 있어도 안 사귀는 게 본인한테 이로운 건 줄 모르고 입은 잘 놀린다.
“알파끼리 어떻게 사귀어? 말이 되는 소릴 해.”
“왜 못해. 내 자지까지 빨아놓고. 키스도 했잖아.”
서행으로 차를 몰던 유리가 브레이크를 세게 밟았다. 차가 갑작스럽게 서자 뒤에서 연달아 경적이 울렸다. 아나스타샤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도로 시트에 붙었다. 몸이 한 번 퉁겨진 아나스타샤는 황당한 얼굴로 유리 쪽을 바라봤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운전했다. 차가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아나스타샤는 억울했다. 없던 일을, 있다고 한 것도 아닌데 왜, 왜 죽이려 들어? 못 할 말인가? 싫은 건 안 한다고 했으면 결국 좋았다는 얘기잖아. 불만을 가득 담은 눈초리로 노려봐도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쳐다보지 않았다. 명백한 무시. 경멸이었다.
* * *
앰버린은 직원 삼십 명을 둔 출판사였다. 앰버린 사장의 아버지와 다비드가 아는 사이라 어렵지 않게 소개받은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출판사를 통해 저명한 작가를 목장에 부를 생각이었다. 뉴욕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8층짜리 건물에 앰버린 본사가 있었다.
앰버린 본사에 도착할 때까지 둘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도 조용했다. 미팅도 아나스타샤 혼자 들어갔다. 공주는 유리에게 갔다 오겠다는 둥 금방 돌아오겠다는 둥 입바른 말도 없었다. 브레이크를 세게 밟아 놀라게 한 것에 화가 풀리지 않았다고 온몸으로 표출하는 중이었지만, 유리는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유리에겐 아나스타샤의 무시가 반가웠다. 일이 끝날 때까지 거리를 두고 지내는 게 낫겠다.
유리는 응접실 소파에 늘어지게 앉아 창밖을 보며 숨을 돌렸다. 담배를 피울까 싶어 재킷 안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재떨이도 없는, 누가 봐도 금연 구역이었으나 유리는 개의치 않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깔끔한 건물 안에 꿉꿉한 담배 냄새가 풍겼다. 데스크에 앉아있던 직원이 냄새를 따라 응접실까지 오더니, 유리를 보고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며 다시 로비로 사라졌다.
왜 사람을 귀신 보듯이 하고 도망가? 유리는 언짢은 표정으로 입구를 노려보며 담배를 마저 피웠다. 도망간 줄 알았던 직원이 깨끗이 닦은 유리 접시를 가지고 들어와 테이블 모서리에 두고 나갔다. 재떨이로 쓰라고 가져온 것 같은데 누가 봐도 과자를 플레이팅 할 때 쓰는 접시였다. 여기 일하는 사람들은 전부 담배를 안 피우나 보지. 유리는 가져다준 접시에 재를 털며 생각했다.
아나스타샤는 2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기다리면서 세 개비를 피운 유리는 한 개를 더 피우려다 폐가 망가진다고 한 소리 한 아나스타샤가 떠올라서 담뱃갑을 주머니에 넣고 일어나 창밖을 구경했다. 얘기가 얼마나 길어지면 2시간이나 됐는데 안 나오는 거야? 또 납치된 건 아니겠지.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으나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찾으러 들어가지 않았다.
기우였다. 이 건물을 빠져나가려면 로비를 가로질러야 했다. 유리가 응접실에서 로비를 주시하고 있었고, 건물 밖에는 일리야와 마야, 다비드가 고용한 경호원도 대기 중이었다. 10분만 더 기다리자. 그래도 안 나오면 들어가야겠어. 시모나로티 정도나 되는 집안이라면 개인적으로 작가를 모아도 충분할 텐데 굳이 여기저기 거미줄을 쳐가며 덩치를 키우는지 이해가 안 됐다.
“얘기 즐거웠습니다, 아나스타샤 씨.”
회의실 문이 열리고 앰버린의 사장인 앰버린 클린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아나스타샤를 향해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본인을 어필하고 있었다. 유리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회의실 문 근처에 섰다. 뒤따라 나온 아나스타샤가 앰버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야말로 갑작스러우셨을 텐데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아버지 친구분 일이면 제 일이나 마찬가지죠.”
앰버린이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나스타샤가 따라 웃었다. 대단히 만족스러워 보였다. 둘은 다음 약속 날짜를 잡으려는 듯 손을 맞잡은 채 대화를 주고받았다. 2시간이나 안에서 떠들어놓고 더 할 말이 있단 말인가. 유리는 질린 얼굴로 두 남녀를 응시했다.
아나스타샤야 앰버린을 사업 파트너로 삼고 싶어 하기 때문에 상대해준다고 쳐도, 저 여자 표정은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앰버린의 눈빛은 유리가 잘 아는 부류였다. 사업은 뒷전이고 아나스타샤가 목적인 모양이다. 웃음도 안 나와서 유리는 눈가를 문질렀다.
“제대로 대접하지 못한 것 같아 마음에 걸리네요. 다음번에는 식사라도 하면서 느긋하게 얘기를 나누죠.”
아나스타샤가 아닌 앰버린이 다음을 약속했다. 아나스타샤는 깜짝 선물을 받은 사람처럼 기뻐하며 맞잡은 앰버린의 손을 힘 있게 쥐었다.
“좋습니다.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사업 미팅이 아니라 선 자리였나.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배알이 꼴린 유리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나스타샤는 유리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앰버린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줬다. 사업이고 나발이고 딴마음 품은 게 눈에 보이는데 못 본 척 손까지 잡아주고 잘하는 짓이다. 나중에 저 여자가 아나스타샤를 갖기 위해 심부름꾼을 고용해도 나는 몰라. 유리는 정말 그런 상황이 닥치면 제일 먼저 뛰쳐나갈 거면서 괜히 관심 밖으로 내놨다.
앰버린을 보고 싱그럽게 웃던 아나스타샤는 그의 손을 놓고 유리를 지나쳐 로비를 가로질렀다. 눈길 한번 안 준다. 신경 안 쓰려고 했는데 없는 사람 취급하니 바람에 휘날려 나풀거리는 재킷도 거슬렸다. 먼저 헛소리한 건 본인이면서 화는 왜 내는 거야? 이해할 수 없다니까. 얼굴은 멀쩡히 생겨선…….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등 뒤에 바짝 붙어 걸으며 공주를 흉봤다.
엘리베이터에 타서도 아나스타샤는 조용했다. 어울리지 않게 휴대전화를 꺼내 어딘가로 메시지를 보냈다. 아까는 몰랐는데 좁은 곳에 있으니 아나스타샤에게서 음식 냄새가 났다. 그제야 2시간 동안 뭘 했는지 실마리가 풀렸다. 사이 좋게 브런치를 먹으며 하하 호호 담소를 나눴단 말이지.
1층에 도착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아나스타샤가 먼저 나갔다.
“집으로 돌아갑니까.”
목적지를 정해야 했기에 유리가 먼저 물었다. 아나스타샤가 뒤를 쳐다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은행으로 갈 거야.”
뉴욕 시내에 은행이 1~2개가 아니지만, 아나스타샤가 말하는 은행은 다비드 시모나로티가 점장으로 있는 가빈 은행 뉴욕지점이리라. 은행이 망해도, 문명의 숨이 다할 때까지 써도 모자를 돈이 세상 어딘가에 잠들어있는 집안인데 대출을 알아보려고 발품 팔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은행으로 가자니까 가줘야지. 차에 올라탄 유리는 시동을 걸었다. 아나스타샤가 조수석에 앉으며 벨트를 맸다. 핸들을 왼쪽으로 틀어 도로변으로 나왔다. 전화벨이 울리자 아나스타샤가 전화를 받았다. 응, 형. 아나스타샤가 밝은 목소리로 상대에게 인사했다. 다비드인듯했다.
차 내부가 조용해서 다비드의 목소리가 유리에게까지 들렸으나 이탈리아어로 말하고 있었다. 다행인 건, 유리는 이탈리아어를 할 줄 알았다.
[점심 먹기에는 시간이 이르지 않니?]
“아니야, 차 막힐 수도 있으니까. 12시쯤에 도착할걸. 일찍 가면 기다리지 뭐.”
[하하, 아냐. 네 왕자님도 데려와야지.]
“내 기사(騎士)지.”
[기사(技士)가 아니라?]
“아니야!”
아나스타샤가 킥킥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목소리만 들어도 아나스타샤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유리는 자신을 운전기사로 부려 먹는 것 아니냐는 다비드의 말에 백 번 동의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어를 왜 배웠지? 그야, 아나스타샤와 만나게 된다면 환심을 사보고 싶어서 배운 것 아닌가. 한참 웃던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슬쩍 보며 얘기했다.
“그리고 옆에 다 들려.”
[설마 기사님이 말까지 알아들으려고.]
“왜 아니겠어. 내 마음에 들려고 ‘오 솔레미오’까지 불러줬다니까.”
오 솔레미오에 다비드가 껄껄 웃었다. 베네치아가 고향인 남자에게 나폴리 노래를 불러줘서―안 불렀지만― 그런 걸 수도 있겠다. 다비드는 한참을 웃으며 “오 솔레미오를 불러줬다고?”하고 여러 번 물었다. 그럴 때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보며 “응, 정말이야.”하고 답했다. 내가 언제 불러줬다는 거야? 아까 브레이크를 밟았다고 복수하나? 이런 유치한…. 유리는 대꾸하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핸들을 부서지라 움켜쥔 손에서 티가 났다.
“오늘 일찍 퇴근할 거지?”
[그래야지. 일이 남아서 점심 먹고 바로는 못 갈 것 같다.]
“알았어. 우리 천사님이 뭐 먹고 싶대?”
[흠…. 오늘은 조용하네.]
유리는 꿈도 못 꿀 대화였다. 있는 형제들이 알파이니 피붙이에게 전화해서 아가가 뭘 먹고 싶어 하냐며 물어볼 일도 없었고, 사적으로 전화할 정도로 살가운 성격도 아니었다. 물론 결혼도 오시프가 먼저 해야 다른 형제에게 기회가 가겠지만 말이다.
“이따 봐. 도착하면 전화할게.”
아나스타샤가 전화를 끊고 유리를 부담스럽게 쳐다봤다. 어땠냐고 물어보는 것 같았는데, 유리는 도대체 어느 부분을 ‘어땠냐고’ 물어보는지 파악을 못 했다. 차가 신호에 걸렸다. 횡단보도로 사람이 쏟아져나왔다.
“또 브레이크 밟을 줄 알았는데. 안 밟았네?”
오 솔레미오가 반응해야 할 부분이었나 보다. 직접 들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유리는 그제야 아나스타샤의 눈을 응시했다. 싸움을 거는 줄 알았는데 마주한 아나스타샤는 그저 관심을 끌려고 했던 것뿐인지 눈이 마주치자 싱글생글 웃었다. 할 말이 있으면 하면 되는데 아나스타샤는 웃기만 했다. 왜 저래? 유리의 눈썹이 삐뚜름해졌다.
신호가 바뀌어서 유리는 앞을 돌아봤다. 옆에서 느껴지는 아나스타샤의 뜨거운 시선 때문에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대화하고 싶은 쪽이 얘기하면 되지, 왜 얘기하라고 압박하는 거야. 무슨 얘기를 하라고? 할 얘기도 없는데, 유리는 필사적으로 얘깃거리를 생각했다. 부담스러운 시선을 은행에 도착할 때까지 받을 바에야 영양가 없는 말 몇 마디 해주는 게 나았다.
“앰버린은 마음 있어 보이는 것 같던데.”
가장 신경 쓰고 있던 인간을 화두에 올렸다. 아나스타샤가 응? 하고 되물었다.
“저녁 약속까지 잡았잖아.”
식사라고 했지, 저녁이라고 한 적은 없지만, 느긋하게 식사하며 얘기 나눌 시간대는 저녁뿐이었다. 와인을 곁들여 먹다가 알코올에 알딸딸하게 취하면 방을 잡고 또 느긋한 시간을 보내겠지. 아나스타샤와 앰버린의 저녁 약속을 머릿속으로 그려본 유리는 목 뒤를 문질렀다.
“형 친구가 소개해줬는데 그 정도 대꾸는 해줘야지. 내가 다른 여자랑 밤을 보낼까 봐 걱정하는 거야?”
아나스타샤는 하나뿐인 목숨을 레어에 있는 금은보화보다 소중히 여기는 남자였다. 처음 본 여자가 관심을 보인다고 저녁 약속을 잡는 머저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걱정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아나스타샤의 부인이 되기에는 너무 평범했다.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나긴 했지만, 한 번에 여러 명을 만나지는 않아.”
“하, 지금도 만나는 인간이 있나 보지?”
유리가 속도를 높이며 아나스타샤를 힐끔댔다. 말을 잘못 했다가는 앞 유리에 이마를 박게 되리라. 아나스타샤가 음흉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그럼, 있지. 지금은 운전하고 있을걸. 밤에도 서툴지만 그만하면 훌륭하지.”
“미리 경고하는데.”
커브를 돌자 목적지인 가빈 은행이 보였다. 유리는 속도를 줄이며 은행 앞에 차를 세웠다. 시동을 끄지 않은 채 핸들을 잡고 숨을 돌렸다. 지금 아나스타샤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 유리 라포포르트 자신이란 말인가? 난 만나주겠다고 한 적도 없으며 상황이 어쩔 수 없어 몸에 손을 댄 것뿐이었다.
“트렁크에 타고 싶지 않으면 입조심 해.”
안전띠를 풀고 내릴 준비를 하던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무시무시한 경고에 놀라는가 싶더니 이내 입술을 모아 ‘쪽’하고 허공에 키스를 보냈다.
“명심할게.”
명심은 무슨! 대답은 잘한다. 언제든 처넣어 버리게 트렁크를 치워놔야겠다.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조용해지겠지.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경험이 더 와닿는 것이다. 유리는 앉은 자리에서 화를 다스렸다. 아나스타샤는 내린 지 오래였다. 갑자기 운전석 문이 열리며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코를 찌르는 새콤한 단내에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차 안쪽으로 몸을 피했다.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 없는 존재감이다.
“얼른 가자, 형이 기다리겠어.”
형만 찾을 거면 결혼도 형이랑 하지 그랬어. 다비드가 시키면 죽는 척도 하겠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말을 속으로 빈정대며 차에서 내렸다. 가빈 은행 뉴욕지점의 입구가 앞에 보였다. 입구 양옆 기둥에는 성조기와 이탈리아 삼색기가 함께 걸려있었다. 시모나로티가 운영하는 회사…. 건물 앞에 서니 감회가 새롭다. 본국의 본점은 어떤 느낌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아나스타샤가 먼저 은행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밀어놓은 회전문을 손대지 않고 통과했다. 넓은 로비에서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울리는 뉴욕지점은 거대한 대리석 창고처럼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데리고 3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금방이겠지만, 아나스타샤는 그 잠깐을 못 기다리고 비상구로 올라갔다.
경쾌하게 계단을 올라가는 발소리가 ‘형, 형, 형’하고 들릴 지경이었다. 친형도 아니고 사촌 형인데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둘 사이가 의심됐다. 그러나 의심뿐이었다. 유리는 둘의 사이를 확인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3층은 회의실과 지점장실, 비서실만 있었다. 비서실을 지나야 지점장실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아나스타샤는 앉아있는 두 비서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아나스타샤를 영접한 비서는 신의 계시라도 받은 사람처럼 황홀감에 빠진 채 아나스타샤를 응시했다.
“다비! 나 왔어!”
아나스타샤는 노크도 없이 지점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선 자세로 몸을 풀고 있던 다비드가 웃으며 동생을 반겼다.
“챠오, 챠오! 너무 오랜만이다.”
몇 시간 전에 봐 놓고 오랜만이라며 다비드의 양 볼과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다비드는 피하기는커녕 등을 두들겨줬다. 유리는 거리낌 없이 서로 껴안고 애정 행각을 해대는 사촌지간을 이해 안 된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속을 달랬다. 자라온 환경이 달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엔젤, 삼촌 왔어. 맘마 먹을 건데 엔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이야기해 봐.”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숙여 다비드의 배를 보고 얘기했다. 다비드가 껄껄 웃으며 배 위에 손을 올렸다.
“라이엇이나 봤으면 좋겠는데.”
“보면 되지. 형 남편이잖아.”
“일이 바빠.”
다비드의 덤덤한 대답에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저었다.
“바쁘면 얼마나 바쁘다고! 다리 하나만 건너면 되는데 그걸 못해? 차가 막히면 헬기라도 타고 와야지. 매일 밤은 형이랑 있어야 할 거 아냐! 결혼만 하면 거머리처럼 철썩 붙어있을 거라더니! 순 거짓말이잖아!”
“어제 봤으니까 됐어. 배고프겠다. 나가자.”
자칫 길어질 실랑이를 단번에 쳐낸 다비드는 아나스타샤를 내버려 두고 유리에게 눈인사하며 점장실을 나왔다. 라이엇 흉을 보던 아나스타샤가 조용히 다비드를 따랐다. 유리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나스타샤의 입은 저런 식으로 닫게 하는구나……. 슬프게도 한번 봤다고 따라 할 기술은 아니었다.
아나스타샤와 유리는 다비드가 고른 식당에서 점심을 먹게 됐다. 은행 건물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는데 입구 앞까지 대기가 생길 정도로 장사가 잘되는 곳이었다. 다비드를 발견한 레스토랑 웨이터가 반듯하게 인사를 하며 다비드를 안으로 안내했다. 인파로 부산스러운 홀을 지나 프라이빗 룸에 들어왔다. 문 앞에 ‘다비드’라고 적혀있는 걸 보니 프라이빗 룸이 아니라 개인실인 것 같지만 말이다.
공식 직책은 뉴욕지점 지점장이지만, 다비드는 장차 가빈 은행 미국 지사의 지사장이 될 위인이었다. 곧 미국 전역에서 거둔 돈을 움켜쥘 텐데 개인실 하나쯤이야 우스웠다. 의자에 착석하자마자 아나스타샤가 친절히 설명해줬다.
“여기 셰프가 사기당해서 빈털터리가 된 적이 있는데 형이 해결해줬어. 그래서 은행 가까운 곳에 식당을 내고 형 개인실까지 만들어줬어. 형이… 이 식당 음식을 좋아하거든.”
“조반니가 해주는 맛이야.”
“둘 다 나폴리 출신이거든.”
아나스타샤와 다비드가 번갈아 가며 얘기했다. 유리는 그렇군요, 하고 대꾸했다. 출신이 같은 게 음식 맛 같은 것과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유리는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먹을 수 있는 건가 없는 건가를 따지는 편이라 둘의 예민한 혀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유리의 애매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본 아나스타샤가 웃었다.
“너도 먹어보면 알걸. 카프레세도 예술이라고.”
“으음. 카프레세. 그걸 먹어야겠네.”
“임신한 사람이 그거 가지고 되겠어? 빵을 먹어, 형. 파스타는 어때?”
“오늘은 일도 일찍 끝나니까, 저녁을 일찍 먹지 뭐. 포카치아에….”
와인 한 잔만 마시면 딱 좋겠어. 다비드가 입맛을 다셨다. 아나스타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입에서 임신한 사람이 술을 마시냐는 잔소리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다비드는 아나스타샤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그냥 파스타 먹을까? 하고 물었다. 물어볼 것도 없이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물 주전자를 든 웨이터가 들어왔다.
“죄송해요, 다비드 씨. 셰프님이 나오셔야 하는데 주문이 밀렸네요.”
“아아, 괜찮아요. 바쁘면 나야 좋지. 셰프가 추천하는 대로 먹지.”
다비드는 웨이터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입 아프게 메뉴를 고를 필요가 없었다. 웨이터가 잔에 물을 따르며 고개를 까딱였다. 아나스타샤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투정 부리기 대신 친히 유리의 점심 메뉴를 골랐다.
“이 사람은 뇨키로 부탁해요. 그리고 카르파초도.”
문제는 아나스타샤 독단으로 주문했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의견을 묻지 않고 멋대로 군 아나스타샤를 유리는 물어뜯을 듯이 노려봤다. 왜 내 점심을 자기가 시켜? 심기가 틀어진 유리는 따뜻한 배려에도 짜증이 솟구쳤다.
“그러고 보니 어제 와인 창고를 채웠군. 솔레토 10년산이 세 병 들어왔을 거야.”
“솔레토 10년산이면 형이 인수하고 처음 만든 거잖아?”
아나스타샤가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솔레토는 다비드 시모나로티가 오래전 추가로 인수한 포도 농장과 양조장이었다. 혈관에 피 대신 포도주가 흐르는 자들은 돈이 조금 있으면 너도 나도 이탈리아 본토에 개인 포도 농장과 양조장을 가지려고 들었다. 아나스타샤도 물론 본인 취향의 와인을 만드는 양조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보드카가 좋다고 술 회사를 인수할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본 유리는 전혀 공감 안 되는 눈으로 둘을 훑었다.
“그래, 그때도 맛이 좋았으니 지금은 더 좋겠지. 한 병 줄 테니까 맛보렴.”
“정말이야? 형, 안 그래도 되는데….”
아나스타샤가 볼을 붉히며 대꾸했다. 누가 보면 금괴라도 선물한 줄 알겠다.
“일 끝나는 대로 돌아가야지. 치즈와 함께 마실 거야.”
이번에도 아나스타샤는 유리에게 의사를 묻지 않았다. 그러나 유리도 와인 마실 생각에 빠져있었다. 아나스타샤를 들뜨게 만드는 술맛이 궁금했다. 다비드는 편안한 마음으로 음식을 기다렸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익숙한 냄새가 구미를 당기게 했다.
오늘 셰프의 추천 음식은 사프란 리소토였다. 다비드가 먹음직스러운 리소토를 포크로 떠먹었다. 밥알이 부드럽게 혀에 감겼다. 라이엇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다비드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라이엇으로 끝났다.
유리는 자신의 앞에 놓인 도마뱀알처럼 생긴 ‘뇨키’를 노려봤다. 아나스타샤가 멋대로 주문했으니 맛은 있겠지. 아나스타샤는 유리가 포크를 들길 기다렸다. 웨이터가 카르파초를 아나스타샤 앞에 놔줬다. 아나스타샤가 접시를 도로 다비드 앞으로 옮겼다.
“아냐, 안 먹을 거니?”
“난 먹었어. 미팅할 때 브런치를 어찌나 잘 챙겨주던지.”
“앰버린 양이 신경 써줬구나.”
응. 그렇지. 아나스타샤가 형식적으로 대꾸하며 유리를 바라봤다. 드디어 유리가 뇨키를 한 입 먹었다. 아나스타샤의 얼굴에 기대감이 번졌다. 유리는 별말 없이 식사를 계속했다. 맛있다는 감탄사를 바란 건 아니었으나 적어도 눈썹을 꿈틀거린다거나 자신을 쳐다볼 줄 알았는데 여물 먹는 소처럼 배만 채웠다. 참다못한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어때?”
“맛있네요.”
“그렇지? 플레이팅이 투박해도 맛이 좋아. 뉴욕에 이만한 맛을 내는 이태리 식당은 여기가 유일할 거야.”
아나스타샤는 기다렸다는 듯 식당을 자랑했다. 다비드가 끼어들지 않을까 싶어 그를 힐끔거렸으나 다비드는 아나스타샤의 말에 간간이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그러다 유리와 몇 번 눈이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피가 반이나 섞였다고 웃는 모습도 비슷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자기 사촌 동생이랑 붙어먹는 놈인 걸 알면서도 웃을 수가 있나? 오시프였다면, ……유리는 신경질적으로 뇨키를 푹 찍어 입에 처넣었다. 망할 인간을 피해서 미국에 왔더니 쫓아와서 훼방이다. 밥을 먹으면서도 그 인간을 생각하니 속이 들끓었다.
“억지로 안 먹어도 돼, 유리.”
유리를 걱정스레 지켜보던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유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포크를 내려놨다. 마음 같아서는 깨끗이 먹고 싶었지만, 오시프가 꾸민 일을 생각하니 제대로 넘어가질 않았다. 다행히 식사는 막바지였다. 다비드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아나스타샤가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같이 갈까? 오래 안 걸리면 기다릴 수 있는데.”
“됐다. 손님을 기사로 부릴 수야 없지.”
다비드가 유리 쪽을 은근히 쳐다보며 얘기했다. 아나스타샤만 옮길 때는 경호하며 덤으로 운전까지 하는 기분인데, 뒷좌석에 남을 태우게 되면 운전이 주가 되는 기분이었다. 아나스타샤가 팔목을 문지르며 유리를 바라봤다. 눈빛으로 ‘미안’이라는 말을 건넸으나 유리는 보지 못했다.
“내가 그 생각을 못 했네. 아, 나 말이야 사격을 배워보려는데 정원에서 해도 돼?”
“음?”
“총 말이야!”
“총을 쏘겠다고?”
유리는 다비드의 표정을 관찰했다. 아나스타샤의 입에서 나온 말을 믿을 수가 없는지 눈을 느리게 꿈뻑이며 진심이야? 하고 몇 번이나 물었다. 아나스타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비드는 아나스타샤의 눈을 부담스럽게 바라봤다. 재미 삼아 꺼낸 얘기라면 지금쯤 농담이라며 깔깔 웃어야 정상이다. 아나스타샤는 다비드의 허락을 기다렸다. 납치 사건이 큰 충격이었구나. 여태 경호원이 있으니 사격은 배우지 않아도 된다며 팽개쳤는데 말이야. 가르칠 선생님은 안 봐도 뻔하겠군. 다비드는 시선은 유리에게 둔 채 마지못해 허락했다.
“정원은 위험하고……. 지하실을 쓰렴. 술병만 치우면 쓸 만할 거다.”
“고마워, 형.”
“근데 무슨 총을 산다는 거냐?”
“당연히 내가 쓸 총이지. 총도 없이 어떻게 연습하겠어?”
아나스타샤의 맹랑한 대답에 다비드는 눈을 굴렸다. 얼굴을 보니 사격을 배우겠다는 마음은 진심인 것 같은데 여태껏 아나스타샤에게 사격을 강요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표적을 맞히지도 못하는 실력을 갈고닦아주는 것보다 경호원을 붙이는 게 비용이 적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배우겠다고 들뜬 동생에게 쓴소리만 하기 미안한 다비드는 돌려 말했다.
“아냐, 일단 여긴 이탈리아가 아니란다. 넌 외국인이잖니. 총은 내가 몇 자루 있으니 그거로 연습하렴. 네가 가지고 다닐 건 내가 알아보마.”
“그러네. 내가 마음만 급했어.”
아나스타샤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듯 탄식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더니 유리를 보며 히죽 웃었다. 외국인이라 총기 구매가 어렵다는 걸 왜 생각 못 했지? 유리도 미국인데 총을 어떻게 사냐고 했을 법도 한데 왜 안 했을까. 몰랐나? 아니면 내 기분을 맞춰주느라?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던 아나스타샤의 눈빛이 순식간에 부담스러운 빛을 냈다. 고작 눈빛에서 오묘한 차이를 읽어낸 유리는 일부러 담뱃갑을 꺼내면서 룸을 나왔다. 아나스타샤는 매정하게 떠나버린 유리의 잔향을 맡듯, 고개를 기웃거리며 닫힌 문을 바라봤다.
“알고 있겠지만, 할 생각이면 별관으로 짐 옮겨.”
다비드가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 아나스타샤는 벌써 침실에서 몰래 유리와 가벼운 관계를 맺었지만 모르는 척, 그런 마음은 품지 않은 척 무심히 다비드를 응시했다.
“형, 나는 섹스보다 따뜻한 침실이 더 좋아.”
“전기 공사는 끝내놨어.”
“보일러는 안 되잖아.”
“여름인데 찬물로 씻으면 되지, 뭐가 걱정이니?”
정 싫으면 본관에 와서 씻으면 되지. 다비드가 말을 덧붙이자 아나스타샤가 퉁명스럽게 노려봤다. 다비드는 유리와 아나스타샤가 침실에서 어떤 짓을 했는지 알지는 못했으나 조만간 대가를 주고받으리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사적인 보수’가 섹스 말고 뭐가 있겠어.
“유리가 싫댔거든.”
다비드의 생각을 모를 리 없는 아나스타샤가 싹을 잘라냈다. 물론 다비드는 믿지 않았다. 먹지도 못하는데 먹음직스럽다는 듯이 쳐다볼 리가 없지. 그럼에도 다비드는 속아줬다. 위험 속에서 피어난 꽃이 정원을 이룰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한참 앞서간 기대감을 받은 아나스타샤는 난감한 듯 웃었다. 아니라고 얘기하면 뭐 해. 믿질 않는데.
“이만 들어가야겠다.”
“데려다줄게.”
대로를 하나 건너기만 하면 되는 거리였다. 둘은 계산을 하고 건물을 나왔다. 유리는 건물 앞 가로수 그늘에 서 있었다. 시모나로티 형제는 웃으며 유리에게 다가갔다. 다비드가 아나스타샤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너, 쓸데없이 라이언한테 연락하지 마.”
“라이엇은 내 형부이기도 하지만, 그전에 내 친구거든?”
아나스타샤의 대꾸에 다비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얼른 알았다고 얘기하지 않으면 한 대 얻어맞는다! 아나스타샤는 잽싸게 팔로 가슴을 보호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안 해. 안 하면 되잖아!”
물리적 보복에 백기를 들었어도 아나스타샤는 여전히 라이엇의 일을 방해 말라는 다비드의 요구가 마음에 안 들었다. 다비드가 뱃속에 귀여운 천사를 데리고 있는데 일이 머리에 들어온단 말인가? 아나스타샤는 유리 옆에 서며 다비드와 거리를 벌렸다.
“오래 기다렸지? 형 데려다주고 돌아가자.”
졸지에 시모나로티 형제 사이에 껴서 걷게 된 유리는 둘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음을 감지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경계를 늦출 수 있는 저택으로 얼른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 *
저택에 돌아온 아나스타샤는 고용인과 함께 지하실을 치웠다. 라파엘을 낳은 뒤에는 당구대 외에는 잘 사용하지 않아서 풀에는 덮개가 쳐졌고 다비드가 자랑하던 바의 술병도 빈 병만 남아있었다. 병과 깨질 염려가 있는 장식품을 창고로 옮기고 표적지로 쓸 종이를 걸어두니 그럴듯한 사격장이 되었다. 지하를 급조한 터라 거리가 15m도 되지 않았으나 연습 삼아 방아쇠를 당겨보기에는 충분했다.
셔츠를 걷어 올리고 짐을 치운 아나스타샤는 1층 거실로 올라와 소파에 앉아 숨을 골랐다. 유리가 물잔을 내밀었다.
“아, 고마워. 유리.”
아나스타샤가 생긋 웃으며 잔을 받았다. 유리도 지하실 정리를 도우려 했지만, 아나스타샤가 손님에게 일을 시킬 수 없다며 거절했기에 일이 끝날 때까지 물을 떠 놓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가르쳐도 제대로 못 쓸 사격보다는 간단한 호신술을 알려주는 게 나을 것 같았지만, 아나스타샤 성격에 마음먹은 일은 일단 해봐야 했기에 내버려 뒀다.
그는 물을 마시면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하는 앳된 목소리가 유리의 귀에 미약하게 들렸다.
“라이엇, 오늘 집에 올 거지?”
아나스타샤는 상대가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용건을 꺼냈다. 차처럼 좁은 곳이 아닌지라 라이엇의 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아나스타샤의 미간이 좁아지는 걸 보니 원하는 대답은 아닌듯했다.
“라이엇, 지금이 기회야. 언제 또 아끼던 동생이 살인마의 표적이 되고 납치당하는 일을 한 번에 겪겠어? 심란할 때 요구하지 않아도 옆을 지켜주면 얼마나 마음이 놓이겠냐고. 응?”
그러니까, 집에 들어와. 내가 오라고 해서 왔다고 하지 말고. 형도 좋아할 거라니까? 아나스타샤가 혀를 놀리자 스피커로 가끔 들리던 라이엇의 목소리가 동조하는 느낌으로 변했다. 일이 바빠도 사랑은 해야지. 사랑이 식었는데 일하면 무슨 소용이야. 아나스타샤가 핵심을 찌르자 라이엇이 “갈게!”하고 소리쳤다. 유리는 신기한 눈으로 형제이자 친구의 부부 관계까지 신경 써주는 아나스타샤를 응시했다. 시모나로티의 대를 잇지 않으려는 발악으로 보였다. 파워볼 확률에 거는 것보다 안전한 방법이었다.
“그래, 잘 선택했어. 으응, 이따 저녁에 봐.”
성공적으로 통화를 마친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보며 씨익 웃었다. 칭찬해달라는 눈치였으나 유리는 무표정으로 응대했다. 유리의 무시에도 아나스타샤는 머쓱해하지 않았다. 그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천사들이 돌아오기 전에 사격 연습을 끝내고 싶었다.
“유리, 부탁할게.”
역시나 가르치는 건 내 몫이다. 하기야 다른 놈한테 맡긴다고 했으면 내가 하겠다고 나섰을 것이다. 유리는 불평 없이 지하실로 내려갔다. 아나스타샤가 콧노래를 부르며 유리를 따랐다. 진열장에 손으로 그린 표적지를 그려둔 게 전부인 간이 사격장에 선 유리는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내 탄창을 분리했다. 아나스타샤가 옆에 서서 구경했다.
“탄창은 밀어 넣어서 끼면 돼. 안전핀을 풀고 표적을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기면 끝이야.”
유리는 말과 함께 탄창을 끼고 안전핀을 푼 뒤 장전 후 표적지를 겨눴다. 총알이 나가지는 않았으나 거침없이 표적지를 향해 뻗어나간 팔과 표적을 노려보는 시선이 물 흐르듯이 이어져 발사했다는 착각이 들었다. 아나스타샤는 표적지를 바라봤다. 구멍 하나 없이 깨끗했다.
“자.”
간단한 설명을 끝내고 유리가 총을 거꾸로 잡아 손잡이 부분을 아나스타샤에게 내밀었다. 세세한 설명을 기대했던 아나스타샤는 어리둥절하면서도 총을 건네받았다. 유리가 옆으로 비켜서 자리를 내줬다. 아나스타샤는 유리가 섰던 자리에 서며 오른손에 총을 들었다.
“끝이야? 더, 뭐 없어?”
“없어. 안에 14발 들었어. 그거 다 쏘면 끝이야.”
“14발 쏘면 더 안 가르쳐줄 거야?”
“그래.”
1발도 못 맞추면 14발을 쏘든 140발을 쏘든 결과는 똑같으리라. 아나스타샤에게 필요한 건 내일 당장 써먹을 수 있는 호신술이지 대단한 사격술이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엉성하게 양손으로 총을 쥐고 표적지를 겨냥했다. 유리는 팔짱을 끼고 뒤로 물러섰다.
“이렇게 하는 거 맞아?”
아나스타샤가 뒤를 돌아봤다. 유리는 어깨만 으쓱였다. 가르쳐준다면서 팔짱 끼고 지켜보는 건 뭐람. 사격을 한 번도 안 해본 건 아닌지라 아나스타샤는 유리가 말한 대로 편히 자세를 잡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울리며 화약 냄새가 풍겼다. 유리가 앞으로 나가 표적지를 확인했다. 분명 총알이 나갔는데 표적지는 깨끗했다. 벽에 맞았나 싶어 벽과 바닥, 천장까지 확인했으나 총알이 박힌 곳을 찾지 못했다.
유리는 돌아와 아나스타샤의 자세를 봐줬다. 양손으로 손잡이를 제대로 쥐게 하고 팔에 힘이 빠지지 않게 팔뚝을 세게 올려 쳤다. 아나스타샤가 처음 취한 자세와 다를 건 없어 보였다. 유리가 옆에 서서 총구를 표적지 쪽으로 조정했다.
“다시.”
아나스타샤가 방아쇠를 당겼다. 이번에도 표적지는 깨끗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응시했다. 조준을 도와줬는데도 표적지 근처도 스치지 못했다. 이것도 능력이면 능력이지…. 술잔을 애먼 곳에 던진 것도 우연은 아니구나 싶었다. 아나스타샤도 표적지 상태를 보더니, 유리를 힐끗댔다. 유리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물었다.
“더 할 거야?”
“아직 12발 남았어.”
총알 낭비일 것 같은데. 유리는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스타샤는 6발을 더 쐈다. 우레 같은 총성에도 표적지는 건재했다. 1발도 못 맞춘 아나스타샤가 권총을 유리에게 내밀었다.
“고장 난 것 같아. 어떻게 1발도 안 맞을 수가 있어?”
유리도 의문이었다. 아나스타샤가 납치됐을 때도 잘 썼던 총이다. 어째서 멀쩡한 총으로 1발도 못 맞추는 거지? 자세가 불량인 것도 아니다. 조준도 옆에서 도와줬는데 마술처럼 총알이 증발해버렸다. 여러 번을 쏘니 총알이 바닥이나 벽에 박힌 게 보였다. 관리가 소홀해서 고장 났나. 유리가 표적지에 대고 1발을 쐈다.
타앙, 경쾌한 소음과 함께 표적지에 구멍이 뚫렸다. 유리는 화약 연기가 흩어지는 권총을 들고 아나스타샤를 쳐다봤다. 아나스타샤가 총과 유리, 구멍이 난 표적지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총은 멀쩡하다. 그러면 문제는 나……? 아나스타샤는 민망한지 웃음을 흘렸다. 설익은 자두처럼 볼과 귀 끝이 붉어진 모습에 유리는 눈을 떼지 못했다.
“내가… 소질이 없나 봐.”
어렸을 적 배웠을 때는 흥미가 없어서 못 하는 줄 알았는데. 그냥 소질이 없는 거였구나. 적성을 깨달은 아나스타샤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의기소침한 모습이 유리 앞에 있었다. 유리의 이성이 조금만 더 가늘었더라면 키스로 달랬으리라.
“사람이, 어떻게 다 잘하겠어? 다른 호신술을 배우면 되니까….”
괜찮아. 유리는 마지막 말은 하지 않고 고개만 주억거렸다.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들었다. 그 자태가 구름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렇지? 유리가 섹스에 소질이 없는 것처럼 나는….”
신을 영접한 황홀함은 아나스타샤의 주둥이 때문에 산산조각이 났다. 유리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표적지에 대고 남은 총알을 전부 갈겼다. 흐악! 아나스타샤는 놀라 뒷걸음질 쳤다. 표적지에는 유리가 쏜 총알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총성이 울리자마자 전신을 훑고 지나간 공포가 휘발하며 은은한 쾌감이 번졌다.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기는 남자가 침대 위에서는 서툴다는 사실이 아나스타샤를 즐겁게 했다.
“농담이야.”
농담이 아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유리는 눈치가 빠르니까 이렇게 쳐다보기만 해도 농담이 아님을 알 것이다. 유리의 미간이 단번에 좁아졌다. 아나스타샤는 모르는 척 미소를 지어줬다. 그러자 불만으로 가득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었다.
당신을 좋아하니까요.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고백을 이젠 믿었다.
당돌하고 잔인하며 오만하고 순진하다. 한 박자 늦게 뚫고 들어오는 묵직한 페로몬도 좋았다. 사귀면 좋겠다. 섹스야 천천히 영역을 넓히면 된다. 지금도 성기는 덥석덥석 잘 잡지 않던가. 범인이 잡히고 나면 얘기해 볼까? 아님, 몸부터 맞춰도 되고…. 음흉한 속내를 모를 리 없는 유리는 잽싸게 시선을 피했다.
“당신한테 맞는 호신술을 알려줄게.”
유리가 홀스터에 총을 넣고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업이 끝났으니 고용인을 부르러 1층으로 올라가야 했다. 아나스타샤가 뒤쫓으며 물었다.
“어떤 거? 테이저건인가?”
“비슷해. 여러 개 알려줄 테니 골라 써.”
쓸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괜히 범인을 자극하는 일을 만드는 거 아닐까. 유리는 계단을 오르며 아나스타샤를 돌아봤다. 아나스타샤와 눈이 마주쳤다.
“왜?”
피하면 될 일인데 아나스타샤가 말을 붙였다. 걸음이 자연스레 멈췄다. 아나스타샤는 두 계단 밑에 서서 유리를 올려다봤다. 뭐라도 얘기해야 할 것 같았다.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괜히 호신술 가르쳤다가 범인만 자극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유리의 솔직한 대답에 아나스타샤가 난간을 붙잡고 웃었다. 눈물까지 찔끔 흘려가며 흐느끼던 아나스타샤가 답했다.
“유리! 내가 총을 못 다루는 거지, 싸움도 못 하는 건 아니야. 일단 나는 알파잖아. 페로몬으로 시간을 벌 수도 있어.”
“그럼 다행이고.”
페로몬이 통하려면 상대가 알파나 오메가여야 했다. 뭐, 아나스타샤를 덮칠 인간들이 알파나 오메가이길 바라야지. 애초에 위험한 상황에 놓이지 않게 뒤를 잘 쫓아다니면 그만이다. 유리는 황급히 대화를 마무리 짓고 계단을 올랐다.
아나스타샤가 도망가는 유리의 손을 붙잡았다. 당황해 움츠러든 손가락 사이로 아나스타샤가 손가락을 넣었다. 흡사 깍지를 낀 것 같았다. 뿌리칠 수도 없어서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돌아봤다. 두 계단 밑에 선 공주가 물었다.
“걱정돼?”
“그래. 걱정돼. …가만히 있으면 내가 올 때까지 목숨은 붙어있을 거 아냐.”
“그럼 꼭 필요할 때만 쓸게. 마지막까지 유리, 네가 오길 기다리면 될까?”
“…….”
아나스타샤는 붙든 손등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며 야살스럽게 웃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무슨 짓을 하는지 파악했다. 지금 나를 꼬시는 거야. 내가 좋아한다니까 이용해 먹을 생각이지. 섹스는 서툴어도 이만하면 쓸만하다는 판단을 내린 거다. 머리로는 아는데 몸은 따라주지 않았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매정하게 뿌리칠 정도로 유리는 견고하지 못했다. 최후의 보루만 넘지 않는다면 괜찮을 거라며 유리는 또 그어둔 선을 넘었다.
“그래. 기다려.”
“알았어. 기다릴게. 기다릴 테니까 유리는 꼭 날 구하러 와야 해.”
아나스타샤가 한 계단을 올라왔다. 아나스타샤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새콤달콤한 페로몬이 유리의 코끝에 알랑거렸다. 아나스타샤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유리의 기분을 살피려고 눈치 보는 것도 아니었다. 결투장이었다. 페로몬을 풍기며 들이미는데도 유리는 눈만 꿈뻑였다. 거절해야 하는데 그러기 싫었다.
“알았지?”
아나스타샤의 윗입술이 아랫입술에 닿았다. 아나스타샤의 입술 움직임이 턱에 느껴졌다. 유리는 턱을 당겨 숙였다. 입술 사이에 손가락 두 개가 들어갈 공간이 생겼다. 아나스타샤가 눈을 감았다. 키스하고 싶으면 해도 된다는 무언의 허락이었다. 키스하겠다고 들이댄 건 자기면서 왜 아닌 척 굴어?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내숭을 귀엽게 여기며 호를 그리는 입술을 입술로 덮어버렸다.
입술이 맞닿자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허리를 양손으로 감쌌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어깨를 짚었다. 혀가 얽혔고 서로 입술을 정신없이 핥고 빨았다. 톡 쏘는 상큼한 페로몬 향에 코와 뇌가 마비되는 것 같았다. 오메가와 한 관계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 내리쳤다. 정복감? 배덕감? 유리는 지금 느끼는 감각에 이름을 찾고 싶었다.
먼발치서 발소리가 들렸다. 아나스타샤가 먼저 입을 뗐다. 유리의 고개가 아나스타샤 쪽으로 기울었다. 시선이 얽혔다. 조금만 더 하면 뭔지 알 것 같은데…. 유리가 다시 입을 맞출 것처럼 몸을 내밀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정신을 차린 유리가 황급히 입을 닦고 계단을 마저 올랐다. 아나스타샤는 느긋하게 그 뒤를 쫓았다.
발소리의 주인은 이든이었다. 그는 만족스럽게 웃는 작은 도련님과 손바닥을 바지춤에 닦아대는 손님을 보며 상황을 유추했다.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이든의 눈에는 다 보였다. 다비드의 눈에도 똑같으리라 생각하며 그는 작은 도련님의 연애사는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했다.
“벌써 수업이 끝났습니까?”
“아, 으응. 역시 사격은 나랑 안 맞는 것 같아.”
아나스타샤가 웃으며 대답했다. 작은 도련님이 늘 웃으며 과장된 어투를 쓰긴 하나 이렇게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어투는 처음이었다. 거기다 오묘하게 섞인 페로몬까지…. 청춘이니 그럴 수 있다지만, 짝이 없는 오메가가 일하는 저택에 짝이 없는 알파의 페로몬은 치명적이다. 별관에 가서도 따뜻한 물에 씻을 수 있게 물을 끓여야겠구나. 이든은 창고에 넣어둔 양동이를 꺼내야겠다 생각했다.
“다른 약속이 있으신가요?”
“아니, 오늘은 없어. 솔레토 있다며? 마시고 싶은데 준비해줄래?”
아나스타샤는 도망치듯 유리의 팔을 잡아끌어 2층으로 사라졌다. 이든은 도망가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다비드 도련님도 그렇고 아나스타샤 도련님도, 결혼은커녕 진지하게 만날 사람도 못 찾을 줄 알았는데……. 어디서 찾았는지 어울리는 짝을 데리고 왔다. 둘을 어릴 때부터 봐온 이든에게는 기쁜 일이었다.
헐레벌떡 방으로 피신한 아나스타샤는 방문을 꽉 닫고 나서야 숨을 골랐다. 아나스타샤에게 이끌려온 유리도 이 일로 쫓겨나지 않을까 걱정했다. 아나스타샤가 침착하게 유리를 돌아봤다.
“들켰겠지?”
“안 들키고 배겨?”
“왜 그랬지? 이든이 형한테 말은 안 하겠지만…. 이러다 들키는 건 순식간이야. 왜 안 피한 거야?”
적반하장에 유리는 할 말을 잃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왜 거기서……. 얼굴에 열이 올라 유리는 창밖을 내다봤다.
“나랑 통한 거야? 너도 나랑 키스하고 싶었구나?”
“아니야.”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다른 괴상한 얘길 할까 봐 단칼에 잘라냈다. 유리가 뭐라 대답하든 중요하지 않았기에 아나스타샤는 웃음으로 가볍게 넘기며 소파에 풀썩 누웠다.
긴장이 풀어지자 손목이 얼얼하게 달아올랐다. 아나스타샤는 팔을 가볍게 흔들어 상태를 확인했다. 몇 발 쏘지도 않았는데 아프다니! 그는 통증은 무시하고 손을 이마에 올린 채 눈을 감았다. 몸은 또 왜 이리 늘어지는지 모르겠다. 사격 때문이야. 역시 무기는 나랑 안 맞아…. 사람을 말로 상대하는 일이라면 종일 해도 괜찮은데 말이지. 역시 경호원을 고용하는 수밖에 없나. 아나스타샤는 인지오가 20년 전에 끝낸 고민을 곱씹었다.
아나스타샤가 지쳐 쓰러진 뒤 방에 덩그러니 남은 유리는 이질감에 숨이 막혔다. 서 있자니 정말 아나스타샤의 고용인이 된 것 같았고, 소파는 이미 아나스타샤가 차지해 앉을 수도 없었다. 침대에 앉을까 싶어 시선을 뒀지만, 그 위에서 아나스타샤와 뒹굴었던 기억이 포르말린 냄새를 풍겼다. 어쩔 수 없이 유리는 방을 둘러봤다.
앤티크 가구가 멋스럽게 배치된 방이었다. 장식장에는 각종 보석으로 치장된 황금 코끼리와 상아로 만든 새 조각상 같은 값비싼 장식품이 들어있었다. 아나스타샤와 잘 어울렸다. 다비드가 저택을 물려받고 공사에 들어갔을 때 어린 아나스타샤가 자기 방은 자기가 고르겠다며 졸랐다던 얘기가 생각났다. 유리는 1인용 소파 뒤를 짚었다. 옆쪽 긴 소파에 누워있던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틀어 유리를 응시했다.
“누가 들어왔어?”
“아니.”
“구경하는 거야?”
아나스타샤가 허리를 세우고 앉았다. 라포포르트 저택이 더 크고 웅장할 텐데 박물관 견학이라도 하듯 천천히 둘러보는 유리의 모습이 신기했다. 유리가 바닥 러그를 구둣발로 짓누르며 물었다.
“당신이 꾸몄어?”
“방? 아, 그럼. 공사할 때 내방은 내가 꾸미겠다고 형을 귀찮게 했었지. 나는 마음에 들어.”
아는 내용도 본인에게 들으면 느낌이 달랐다. 저 황금 코끼리는 가진 모든 보석을 털어서 만들었어. 순금이라서 저것만 팔아도 이 저택에 반만 한 집은 살 수 있을걸. 아나스타샤가 신나게 장식장에 든 도자기 인형, 상아 조각, 은잔에 관한 사연을 풀어줬다. 즐거워하는 목소리에 유리는 안심했다. 조금 전 키스는 본인이 하고 싶어서 했나 보지. 아나스타샤는 그런 남자 아니던가.
유리는 등 뒤에 놓인 이젤에 눈길을 줬다. 보여주기 전까지 안 보려고 했는데, 캔버스가 보란 듯이 올려져 있으니 시력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한 번쯤 쳐다보리라. 자신이 모델로 섰던 그림이었다. 나체에 천을 두른 남자가 구름인지 바위인지 모를 곳에 기대 누운 밑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림을 훔쳐보는 유리를 지켜봤다.
형태만 잡아둔 밑그림이라 칭찬을 기대하긴 어려웠으나 유리라면 무슨 말이라도 해줄 것 같았다. 가령, 칠은 언제 하냐고 주제넘게 물어본다거나….
이젤 주변을 기웃거리던 유리가 아나스타샤를 보며 물었다.
“완성은 언제 할 거야?”
유리의 속마음을 읽은 아나스타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알기 쉬운 남자다. 알기 쉬운 만큼 다루기도 쉬웠으면 좋겠는데 핏줄은 못 속이는 건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읽을 수 있는 만큼 보인다. 거울 앞에 선 거나 마찬가지였다. 본인은 아는지 모르겠지만 직감이 뛰어난 남자니까.
엉큼한 시선에 유리가 미간을 좁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자신에게 좋은 얘기는 아닌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유리가 심문하기 전에 소파 등에 머리를 기대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모르겠네. 일단 오늘은 아니야.”
기분이 아니라서 완성 안 하겠다는 건가? 그럼 오늘 뭐 할 건데? 한량처럼 소파에 앉아서 술을 마실 생각인가? 그럼 또…… 일을 치를 게 분명했다. 거기다 다비드 시모나로티도 일찍 퇴근하는 날 아니던가? 유리는 침착하게 아나스타샤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을 때 벌어질 일을 생각했다.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은 눈만 마주치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무려 제정신이 박힌 채로 아나스타샤의 성기를 물었으니, 입에 좆 들이밀기는 잔을 권하는 것만큼 쉬우리라.
아나스타샤가 다른 곳에 집중해주길 바랐다. 밑그림만 그린 캔버스만큼 완벽한 딴짓은 없었다. 잠들 때까지는 조용하겠지. 유리는 자신이 상대하는 인물이 아나스타샤임을 간과하고 머릿속에 반쯤 고장 난 계산기를 두드렸다.
아나스타샤가 그림을 완성할 동안 그에게 어울릴 만한 칼을 구하면 되겠다. 마야에게 연락도 해놓고. 유리는 그에게 절대 실패하지 않을 호신술을 알려줄 생각이었다. 유리가 계획을 세우느라 침묵하는 찰나도 기다리지 못한 아나스타샤는 다시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애도 없는데 왜 말 안 듣는 아들 새끼 어르고 달래는 짓을 해야 하는지. 유리는 오르락내리락하는 아나스타샤의 흉부를 노려보며 화를 참았다.
“싫어, 지금 손대면 밤늦게 끝난단 말이야. 난 작업 나눠서 안 하거든.”
“할 일도 없는데 누워있을 생각이야?”
“총 쏴서 손목 아프다고?”
고작 열 몇 발-전부 쏜 것도 아니다-쏴 놓고 손목이 아파? 유리는 강제로 훈련받던 옛날이 떠올라 순간 눈으로 욕을 했다. 다행히 아나스타샤는 누워있어서 유리의 살벌한 눈빛을 보지 못했다.
아니. 아나스타샤라면 말이 돼. 말도 안 되는 조준 능력을 갖고도 열 몇 발이나 쐈으니 재능이 있는지도 몰라. 꾸준히 연습한다면 훌륭한 사격수가 될지도 모른다. 엄살쟁이를 어떻게 구워삶아 이젤 앞에 앉히나. 유리는 이젤을 만지작거렸다. 방법이야 있다. 아나스타샤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방법이지만… 좆도 물렸는데 호감이 없진 않겠다 싶었다.
“안 돼?”
이질적인 목소리에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들었다. 앞에는 이젤과 유리뿐이었다. 누가 방금 애절하게 안 되냐고 물어본 것 같은데. 오로라가 들어왔나? 아나스타샤가 도로 소파에 앉아 문 쪽을 바라봤다. 닫혀있었고 사람도 없었다.
“응?”
같은 목소리가 방 안쪽, 아나스타샤의 앞에서 들렸다.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응시했다. 유리가 낸 소리였다. 유리라고? 말끝이 올라가는 말투는 비아냥거릴 때만 쓸 줄 아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사람 안면을 주먹으로 으깨버리는 남자가 지금 조르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눈이 마주치자 유리는 이젤을 손으로 쓸었다. 커다랗고 날렵해 보이는 손이 이젤을 훑자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어깨와 허벅지를 유리가 더듬는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무심한 눈빛이 관능적이었다.
“나는 당신 그림 그리는 걸 보고 싶어.”
목소리만 들었을 때는 애절함이 느껴졌는데, 막상 눈을 보며 들으니 오만방자한 막내 도련님의 명령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꿈쩍하기도 싫었다. 손목도 아프고 화약 냄새를 맡아서인지 피곤해서 형이 올 때까지 술이나 마시며 빈둥대고 싶었다.
그런데 유리의 맑고 투명한 회색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술에 취한 것처럼 기분이 상기됐다. 이 몸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야 못 보여줄 것도 없지. 아나스타샤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좋아. 그릴게. 대신 내가 끝내기 전까지 내게서 눈 떼지마.”
그림을 그리는 동안 딴짓하려는 술수인 걸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아나스타샤는 하기 싫은 짓도 부탁하면 해주지만 그 대가는 아주 비쌌다. 아나스타샤의 요구에 거만하게 풀어진 유리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뭘 새삼스럽게 기분 나빠해. 공주는 원래 저런 남자다. 보고 싶어 해서 해주는 거니 봐줘야지.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스타샤는 소파 테이블을 옆으로 밀어놓고 3인용 소파가 있는 곳에 이젤을 가져왔다. 그런 뒤 붓과 물통을 가져오고 아크릴 팔레트에 물감을 짰다. 유리는 그가 원하는 대로 옆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아 밑그림과 아나스타샤를 구경했다. 아나스타샤의 그림은 몇 번 봤어도 그림 그리는 공주는 본 적이 없기에 유리는 어서 그가 붓을 들길 기다렸다.
아나스타샤가 붓을 들고 유리를 힐끔 쳐다봤다. 손으로 턱을 받치고 아나스타샤를 노려보던 유리가 눈썹을 당겨 올렸다. 공주는 칭찬하듯 샐쭉 웃더니 물감을 섞어 캔버스에 칠하기 시작했다. 다시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그림을 그린다……. 잘 보고 있나 감시하는 건가? 그냥 해본 말인 줄 알았는데 진심이었군. 엉뚱한 곳에서 유치한 아나스타샤 때문에 웃음이 났다. 장난 같은 진심에 몸이 간지러워 유리는 다리를 바꿔 꼬았다.
붓이 밑그림 위를 오갔다. 얼굴 부분이 옅은 살구색으로 덮였다. 그는 밝은 부분부터 색을 채워나갔다. 붓을 헹굴 때는 유리를 꼭 쳐다봤다. 시작한 지 10분도 안 됐는데 눈만 벌써 서른 번도 더 마주쳤다. 유리는 재킷 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며 무심하게 얘기했다.
“쳐다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림 그리시지.”
숙제 검사하듯이 쳐다보지 않아도 어련히 보고 있으니 그림이나 얼른 완성하란 뜻이었다. 아나스타샤가 짙은 파랑에 검정을 섞으며 작게 웃었다.
“유리가 날 뚫어지게 보는 건 흔치 않으니 즐기려고.”
즐겨? 마야에게 문자를 보내던 유리는 액정을 보던 시선을 들어 아나스타샤를 쳐다봤다. 물감을 잔뜩 먹인 붓을 든 아나스타샤가 유리와 눈이 마주치니 기다렸다는 듯이 윙크를 날렸다.
“날 봐야지.”
푸른 눈동자가 붓이 먹은 물감처럼 짙게 보였다. 청량하고 눈부시던 새파란 빛은 어디 가고 칙칙한 빛이 유리를 응시했다. 잠깐 한눈판 것이었는데 큰 잘못을 한 기분에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변명을 늘어놨다.
“내일 갈 곳이 있어.”
“어디로 데이트 갈 생각인데?”
아나스타샤가 호기심을 보였다. 해일이라도 칠 것처럼 스산했던 눈빛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해졌다. 아나스타샤를 휘감던 무게감이 증발해버렸다. 데이트는 무슨 데이트야. 유리는 눈썹을 삐뚜름하게 치켜떴다. 그래도, 공주님이 관심을 보이니 기분은 썩 괜찮았다.
“호신술 가르쳐 달라며?”
“그랬지.”
정확히는 호신술이 아니라 총 쏘는 법이었지만. 아나스타샤도 나름 익힌 호신술이 몇 가지 있기에 흥미가 가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을 노리는 인간들이 뭘 원하는지 알고 있다. 준수한 집안에 준수한 외모와 정력을 가졌으니 탐낼 만한 종마였다. ‘씨’를 원하는 자들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일은 쉬웠다. 아나스타샤는 살 수만 있다면 자기 씨를 통해 어떤 아이들이 태어나든 알 바 아니었기 때문이다.
“뭘 알려줄 거야?”
아나스타샤가 묻자, 유리는 발끝만 까딱였다. 아하……. 일반적인 호신술이 아니구나. 유리의 어중간한 태도로 알 수 있었다. 상대에게 치명상을 남기고 빠져나갈 수 있는 일격을 알려주려는 듯했다. 그것이야말로 정말 내 몸을 지키는 수단 아니던가!
유리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는데 아나스타샤는 스스로 유추해내더니 호신술에 흥미를 보였다. 아나스타샤가 팔레트에 붓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언제 나갈 건데?”
“아침 일찍.”
“모닝커피는 마시고 가는 거지?”
“아니. 일어나자마자.”
“아침도 안 먹고?”
시선이 오랫동안 엉켰다. 아나스타샤는 아침도 안 먹고 집을 나서는 건 생각도 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에 비해 걸어 다니면서도 끼니를 때우던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표정을 굳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배고프면 가는 길에 샌드위치나 두유를 먹으면 된다. 그러나 이건 유리의 생각이었다. 샐러드를 곁들인 아침을 먹고 에스프레소 한 잔을 꼭 마셔야 하는 아나스타샤는 차 안에서의 식사를 용납할 수 없었다.
회유가 필요했다. 유리는 말을 늘어뜨리며 아나스타샤를 어르고 달랠 단어를 고르고 골랐다.
“당신 실력에 반나절 배운다고 완벽하게 습득할 것 같아?”
유리는 아나스타샤에게 일격을 가르칠 생각이었다. 급소를 노리는 만큼 대충 알아서는 안 됐다. 엉성하게 흉내만 내려고 했다가 도리어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말속에서 내일의 ‘데이트’를 짐작했다.
“종일…… 굴리겠다는 얘기로 들리는데.”
수업도 아니고 훈련이잖아……. 아나스타샤의 엄살에도 유리는 매정했다. 배우고 싶다 했으니 아나스타샤의 개인 경호를 맡은 라포포로트로서 책임을 다하여 비장의 무기를 만들어주기로 이미 마음먹은 터였다. 타협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눈빛에 아나스타샤는 도로 붓을 들었다. 그래……. 데이트라고 생각하지, 뭐……. 종일 필요 이상으로 붙어 엎치락뒤치락하는 데이트 말이야…….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아나스타샤의 얼굴을 본 유리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울화를 치밀게 하는 남자라도 귀엽게 굴 때가 있다.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쳐다봤다. 시들시들해 보이던 공주의 기분이 새벽이슬을 맞은 꽃처럼 파릇파릇해졌다.
“네가 그렇게 웃으니까 기분이 좋은걸.”
좋다는 말이 좋게 들리는 이유는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일까? 유리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좋으면 가까이서 보라는 객기였다.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피하지 않고 시선을 마주했다. 한쪽이 조금만 더 내밀면 입술이 닿을 거리였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오로라가 와인과 가벼운 안주를 들고 들어왔다. 아나스타샤가 먼저 고개를 돌려 거리를 벌렸다. 오로라는 유리의 옆자리에 와인과 치즈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으면서 유리와 아나스타샤를 힐끔거리지 않고 고개만 가볍게 숙인 채 방을 나갔다.
과하게 관심 없어 하는 모습이 유리는 부담스러웠다. 무심을 가장한 관심은 눈치채기 쉬웠다. 집 안에 머무는 사람 모두가 자신과 아나스타샤의 교제를 고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고대는 무슨. 의뢰받은 일을 하는 것뿐인데. 유리는 와인을 잔에 따라 아나스타샤에게 건넸다.
“아, 고마워. 유리. 형 입맛대로 만든 와인인데 네 입에도 맞았으면 좋겠네.”
아나스타샤는 잔을 건네받으면서 유리의 손가락을 은근히 훑었다. 잘 마실게. 아나스타샤가 눈웃음 지었다. 만인을 유혹하려 들던 끈적한 시선이 건전한 호감을 던졌다. 순진한 척하기는. 유리는 와인을 따라 마시며 아나스타샤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묘한 신경전, 탐색전이었다. 공격 전, 이루어지는 기 싸움이 아닌 호기심이 묻어났다. 작업을 빙자한 탐색전은 다비드가 저녁을 먹으러 나오라고 방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 이어졌다.
* * *
새벽 5시. 통이 서서히 터 오르는 시간이었다. 평소라면 베개에 볼을 대고 얕은 잠에 빠져있을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나갈 준비를 마치고 빈속에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짤막한 티타임을 기다려줬다. 작은 에스프레소 잔에 담긴 커피는 세 입에 동이 나버렸고, 아나스타샤는 쩝, 입맛을 다시며 빈 잔을 소파 테이블에 올려놨다.
“가자.”
아나스타샤가 정장 재킷을 걸치고 유리에게 말했다. 유리는 나갈 준비가 한참 전부터 되어있었기에 곧장 문으로 걸어갔다. 유리가 문고리를 잡기 전, 문이 스스로 열렸다. 유리의 손이 빠르게 홀스터 위에 앉았다.
문틈 사이로 밝은 금발이 보였다. 막 일어났는지 뒷머리가 엉망으로 뻗친 금발이었다. 거기에 퉁퉁 부은 눈을 최대한 크게 뜬 남자는 다름 아닌 라이엇이었다. 유리는 홀스터에서 손을 내리고 문을 활짝 열어줬다. 아나스타샤보다 유리와 먼저 마주친 라이엇은 뒤로 주춤 물러서며 인사를 건넸다.
“아, 좋은 아침이에요. 라포포르트 씨.”
“예. 좋은 아침입니다. 시모나로티 씨.”
유리가 라이엇을 ‘시모나로티’라 부르며 인사를 받아줬다. 라이엇은 큰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맑게 웃었다. 라이엇을 발견한 아나스타샤가 성큼성큼 걸어와 문가를 팔로 짚으며 몸을 비스듬히 세웠다.
“꼭두새벽부터 무슨 일이야? 지금 나가?”
“아니. 너한테 줄 게 있어서.”
라이엇은 등 뒤에 숨겼던 손을 앞으로 가져오며 깜짝 선물을 보여줬다. 포장지도 없이 꺼낸 그것은 투박한 고철 총으로 보였다. 끝부분에 전류가 흐를 수 있는 단자가 달린 걸 보아하니 테이저건인 듯했다. 아나스타샤는 생각도 못 한 선물을 받아들었다. 손잡이 부분에는 라포트의 타원형 로고가 박혀있었다. 머리를 후려치면 치명상을 입을 법한 무게였다.
“테러 진압용으로 쓰는 거야. 무게도 무게지만, 이왕 쓸 거 제대로 된 거 가지고 다니면 좋을 것 같아서. 벨트에 걸고 쓰면 돼.”
“오, 라이언. 내가 테러 진압용 무기를 갖고 다닌다고 괴한들이 날 포기하지는 않아.”
“알아. 그렇지만…… 넌 총 못 쏘잖아. 그리고 위치 추적기도 달아놨어.”
라이엇이 확인해 보라는 듯 손가락으로 테이저건을 가리켰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위치 추적기를 찾지 못했다. 아나스타샤의 눈에는 들고 다니기 무겁고 위치 추적이 되는, 철로 만든 벽돌이었다. 라이엇의 성의를 봐서라도 들고 다니는 게 좋겠지만…….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힐끔댔다. 유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테이저건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건 너무 무거운걸.”
“총 대신 가지고 다녀. 이건 빗맞기 어려우니까. 호신용으로도 좋을 거야.”
맞는 말이었다. 1발도 못 맞추는 총을 갖고 다니는 것보다야 테이저건을 소지하는 편이 나았다. 아나스타샤가 라이엇을 끌어안았다. 라이엇은 기다렸다는 듯 아나스타샤의 등을 양손으로 쓸며 좌우로 가볍게 움직였다.
아기 사자가 단잠을 자야 할 시간에 부랴부랴 일어나 깜찍한 선물을 준 이유가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는 것처럼 훤히 그려졌다. 귀여운 라이언. 형이랑 끝내주는 저녁을 보냈구나. 들어오라고 닦달한 게 큰 도움이 되어 기뻤다.
“그러니 매일 집에 들어와. 일 핑계 대지 말고. 네 아이를 가진 사랑을 보필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어?”
“네 말이 맞아. 내 생각이 짧았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집에 들어올 거야. 다비드 씨랑 내 천사들과 아침은 꼭 먹겠어.”
아나스타샤의 교만에도 라이엇은 맑게 웃으며 대꾸했다. 라이엇은 공주의 턱에 입을 맞추고선 본인 침실로 들어갔다. 아나스타샤는 라이엇의 키스를 받은 턱을 문지르며 유리를 응시했다. 유리의 눈썹이 묘하게 삐뚤어졌다. 질투하나? 아나스타샤가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어줬다.
유리는 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먼저 방을 나섰다. 아나스타샤는 방문을 닫고 느긋하게 그 뒤를 쫓았다. 정원수에 새가 앉았는지 피로로, 피로로, 하고 우는 새소리가 잔잔히 저택에 울렸다.
* * *
아나스타샤가 아침부터 찾아간 곳은 브루클린에 있는 유리의 회사 사무실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사무실이라고 해서 책상과 컴퓨터가 있는 곳을 상상했다. 그러고 보니 유리는 무슨 일을 하지? 라포포르트 집안사람은 대체로 국가 안보에 관련된 일을 한다고 들었는데. 이반 씨가 군수업을 운영하니, 유리는 담배나 술을 판매할지도 모르겠다. 술과 담배와 어울리는 남자 아닌가. 아니지. 내 경호를 맡았으니 용역 쪽일지도…….
아나스타샤는 노르스름하게 떠오르는 아침 해를 응시하다 유리를 힐끔댔다. 라포포르트의 막내로서의 존재감이 큰 탓에 직업도 물어보지 않은 것이다. 그는 신호가 걸린 틈을 타 휴대전화 메시지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휴대전화 기종이 달라진 것 같은데. 원래 저런…… 구닥다리 휴대전화를 갖고 다녔던가? 아나스타샤는 벽돌처럼 생긴 휴대전화를 계속 확인하는 유리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애인한테 연락이라도 왔나 봐?”
“차라리 애인이면 좋겠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얘기한 농담에 유리가 비소를 날렸다. 차라리 애인이었으면 좋겠다니. 그럼 애인이 아닌, 더 중요한 사람? 약혼자? 약혼자 눈을 피하려고 휴대전화를 하나 더 갖고 다니는 건가? 시트에 편안히 등을 기대고 앉았던 아나스타샤가 허리를 반듯하게 세웠다. 호기심이 공주를 자극했다.
“누군데?”
“……내가 왜 그걸 알려줘야 하지?”
아나스타샤는 휴대전화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유리는 진실을 함구했을 뿐, 휴대전화를 숨기거나 딴청 피우지 않았다. 숨기고 얼버무리면 의심만 산다. 거기다 대담하게 나오면 아나스타샤의 호기심도 금방 꺾인다는 것을 알았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신경을 빼앗는 연락이 뭔지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선을 넘지는 않았다. 유리와 잘 지내고 싶은 거지, 유리가 관련된 일이라면 사사건건 관여하고 싶은 게 아니니 말이다.
“실망이야, 나를 두고 다른 사람과 연락하다니.”
가벼운 장난으로 마무리 지으면 그만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상처받았다는 듯 유리를 빤히 쳐다봤다.
“내가 누구와 연락하든 왜 당신이 실망해?”
유리는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날 꼬셨으면서 다른 사람이랑 연락하잖아. 내가 좋다며? 내 밀랍 인형을 만들고 싶을 만큼 좋아하면서 애인은 따로 두는 거야?”
유리는 할 말을 잃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엄두도 안 났다. 인형은 경호원이 되어주는 보수로 약속한 것이다. 그러니 사적인 대화에 끌고 올 먹잇감이 아니었다. 그리고 좋아하면 다 사귀어야 하나? 유리는 제발 아나스타샤가 입을 다물게 해달라고 신께 빌었다.
신은 유리의 뜻을 바로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유리가 처리해야 할 산이었다.
“신경 꺼.”
“사귀는 사람 없으면, 나랑 사귀면 되지 않겠어? 나도 없고, 너도 없으니까. 너는 날 좋아하고 나도 네가 마음에 들어. 사귀면 네가 누구랑 연락하는지 궁금해하고 실망해도 되잖아. 이런 실랑이도 안 해도 되겠지.”
아나스타샤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유리를 바라봤다. 회색 눈은 “장난하냐.”고 물어보고 있었다. 장난스럽게 실망이 커, 하고 말랬는데 어쩌다 사귀자는 얘기까지 나왔는지 모르겠다. 잘 생각해보니, 나쁜 제안도 아니다. 사실 나는 유리랑 사귀고 싶었는지도 몰라. 아나스타샤는 그 사실을 깨달았지만 슬프게도 유리는 그와 사귈 생각이 없었다. 그는 아나스타샤를 죽일 듯 노려보며 속도를 높였다.
아아, 비운의 아나스타샤! 그제야 ‘사귀자’와 ‘섹스’ 같은 단어가 금기어였음을 깨달았다.
알파끼리는 잘 수도 없고 결혼할 수도 없다는 분위기에서 컸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거기다 그런 가풍에서 자란 알파이면서 알파를 좋아하니 유리가 느끼는 자괴감과 모멸감은 아나스타샤의 생각보다 짙고 거대할지도 모른다. 유리는 여태 만나오던 알파와 달랐다. 그는 마음만 먹는다면 좋아하는 사람을 죽여버릴 수 있는 사내다.
아나스타샤는 계기판을 쳐다봤다. 100km를 가리키고 있었다. 새벽이라 도로는 한적했고 액셀을 밟는 대로 차가 앞으로 튕겨 나갔다.
“유리.”
한적하다고 제한 속도를 안 지켜도 되는 건 아니다. 유리처럼 범퍼카 몰 듯이 차를 모는 인간이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른다. 설상가상으로 유리는 전방이 아닌 아나스타샤를 보고 있었다. 옆좌석을 말이다!
“유리!”
“나는 경고했어.”
차가 중앙선을 넘었다. 맞은 편에서 달려오던 승용차가 클랙슨을 울렸다. 허억……! 아나스타샤는 옆으로 비켜 가는 차를 눈으로 좇았다. 클랙슨 소리가 메아리처럼 멀어졌다. 정말 날 죽일 생각이야?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노려봤다. 유리의 회색 눈동자는 여전히, 앞이 아닌 아나스타샤를 응시했다.
“입조심 하라고 말이야.”
“유리. 유리! 앞에!”
“어제 얘기하지 않았나?”
이번에는 트럭이었다. 그런데도 유리는 핸들을 꺾지 않았다. 트럭이 클랙슨을 거칠게 눌렀다. 짐승 울음 같은 소리가 찢어지듯 울렸다. 아나스타샤는 안전띠를 움켜쥔 채 눈을 꽉 감고 소리쳤다.
“알았어! 입조심 할게!”
그러니까 운전에 집중해! 아나스타샤의 뒷말은 비명처럼 갈라졌다. 원하는 대답을 들은 유리는 그제야 정면을 보고 속도를 줄였다. 휘청휘청 비틀대던 차가 똑바로 앞을 보고 달렸다.
정신 나간 유리의 운전 때문인지 사무실에 금방 도착했다. 멈출 때도 브레이크를 급히 밟아 아나스타샤를 놀라게 한 유리는 사과하지도 않았으며 아나스타샤를 에스코트하지도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다리가 풀려서 차체를 붙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야 했다. 유리는 벌써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현관에는 일전에 집까지 찾아왔던 회백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가 아나스타샤를 부축해줬다.
“오시는 길이 험했나 보군요.”
남자는 꼭 설산에 사는 매 같았다. 이름도 기억했다. 일리야였지? 아나스타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단정히 웃어줬다.
“네. 어찌나…… 차를 험하게 모는지.”
네 상관 운전 실력을 알면 나한테 묻질 말아야지. 난폭한 운전에 예민해져서 그런지 나오는 말도 날카로웠다. 일리야는 의외라는 얼굴을 하며 아나스타샤가 들으라는 듯 또박또박 영어로 중얼거렸다.
“이상하네요. 보스의 운전 실력은 각하도 감탄하셨는데…….”
운전이 거친 건 네 잘못 아니냐고 비꼬는 독백이었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팔은 안으로 굽는데 내가 말실수를 했어. 아나스타샤는 조용히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꿉꿉한 고무바닥 냄새와 화약 냄새가 풍겼다. 어이! 기합이 울려 퍼지는 희한한 사무실이었다.
사무실의 정체는 체육관, 훈련소였다. 구석에 놓인 샌드백을 치는 남자들과 벽에 달린 줄을 팔 힘으로만 오르내리는 사람, 레슬링을 하는 사람……. 각양각색이었다. 지하로 연결된 계단 앞에 서 있으니 작은 총성이 들렸다. 1, 2층은 천장을 터 체육관을 만들었고 지하는 사격장이구나. 아나스타샤는 하나같이 험악하게 인상을 찡그린 남자들 사이에서 유리를 찾았다.
“아나스타샤 씨, 어서 오세요!”
아는 얼굴이 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항구에서 사람을 처리해준 마야였다. 아나스타샤는 그녀를 향해 형식적으로 웃어줬다. 아아! 보스가 한눈팔지 않고 쫓아다니는 값을 하는 남자다. 정말 잘 생겼다. 마야는 감탄을 금치 못했으나 악수를 청하진 않았다.
“레이즈빗 벤츠! 준비가 하나도 안 됐잖아!”
마야는 뒤를 돌아보며 고함을 쳤다. 성인 몸통만 한 박스 두 개를 겹쳐 들고 오던 남자가 화들짝 놀라더니 부랴부랴 달려왔다. 키는 마야보다 작았다. 170cm가 넘나? 아나스타샤는 박스에 가려 정수리만 보이는 레이즈빗의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헉…… 헉, 다 가져왔어요.”
“뭘 했다고 헉헉대? 차 사달라며? 삼천 개는 더 옮겨야 해.”
“전…… 전 해커예요!”
앉아서 컴퓨터 두들기는 게 제 일이라고요! 레이즈빗이 박스를 내려놓더니 얼굴을 붉히며 투덜거렸다. 마야는 팔짱을 낀 채 작은 레이즈빗을 노려봤다. 레이즈빗은 우물쭈물하다가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뛰어갔다.
“보스!”
아나스타샤는 레이즈빗을 따라 눈을 돌렸다. 작은 체구 앞에 커다랗고 거만한 밀 빛 털을 가진 곰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오고 있었다. 손에는 깨진 병, 유리 파편 같은 걸 들고 있었는데 흉기처럼 보였다. 유리의 사무실과 수행원 그리고 병. 대체 어떤 수업을 하려는 걸까?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줬다.
“뭘 알려줄 건지 나한테 설명해줬으면 좋겠는데.”
아나스타샤의 질문에도 유리는 대꾸도 하지 않고 일리야에게 눈짓했다. 일리야가 휴대전화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휴대전화는 유리가 차 안에서 붙잡고 있던 것과 똑같이 생겼다. 회사용 휴대전화였구나. 아나스타샤는 귀를 문질렀다.
“별거 아니야. 빠져나오기만 하면 돼. 일단 빠져나오면 안전한 곳에 숨어.”
그러면서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손에 칼도 테이저건도 아닌 가져온 유리 파편을 쥐여줬다. 이거로…… 뭘 어떡하라고? 아나스타샤는 설명을 기다렸다. 유리는 엄지를 빳빳하게 세운 채로 손을 앞으로 뻗었다. 흡사 흉기를 쥐고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봐.”
일리야가 다짜고짜 유리에게 달려들었다. 유리는 일리야의 품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뻗은 엄지를 그대로 일리야의 턱 아래에 꽂아 넣듯이 찍어 눌렀다. 으윽. 일리야가 신음하며 나뒹굴었다. 시범을 끝낸 유리가 아나스타샤를 쳐다봤다.
“잠깐만. 거기에 이걸…… 찔러 넣으라는 거야?”
아나스타샤는 유리가 준 유리 파편을 흔들었다.
“어. 간단하지?”
“아니! 호신술이 아니잖아. 거길 찌르면 사람은 죽어.”
“죽어도 싸.”
“유리. 세상에 죽어 마땅한 사람은 없어.”
아나스타샤는 유리 파편을 든 채 양 손바닥을 펴 보이며 반박했다. 유리는 단정하고 무심한, 감정이 사라진 얼굴로 아나스타샤를 응시했다.
“죽이지 않으면 네가 죽어.”
“날 죽이려고 하는 사람은 없어. 다들 원하는 게 씨지, 내 목숨이 아니니까.”
“그건 네가 젊었을 때 얘기고.”
유리가 받아쳤다. 아직도 자신이 한창이라 생각하는 아나스타샤는 ‘젊었을 때’라는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창창한 20대와 함께 젊음도 다 갔다는 듯한 어투가 거슬린 것이다.
“네가 얼마나 건강한지, 검진 결과 따윈 사람들한테 중요하지 않아. 앞자리가 2냐 3이냐가 중요한 거야. 늙은 소를 안 먹는 것처럼 늙은 알파의 씨도 안 받는 법이거든. 그래도 희소성이 있으면…… 찾는 사람이 좀 있겠지.”
유리는 말을 마치며 아나스타샤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곤 사타구니를 불쾌할 정도로 뚫어지게 쳐다봤다. 희소성이 붙으려면 씨를 만드는 공장이 문을 닫던가, 원재료가 사라져야 한다. 아나스타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타구니로 향했다.
앞으로 만날 범죄자들은 회유가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도 왜 표적이 됐는지 모르지 않던가……. 살인범 마음을 어떻게 알아. 나는 그냥 살았을 뿐이야! 근원 모를 억울함이 살을 찌웠다.
“다시 봐.”
유리가 아나스타샤의 이목을 끌었다. 일리야가 다시 덤벼들었다. 유리는 턱 아래에 엄지를 찔러 넣었다. 호신술이 아닌 살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다치지 말고 사람을 죽이라니…… 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파편을 쥐었다. 유리가 다가와 최대한 다치지 않게 잡는 법을 알려줬다.
왜 칼이 아닌 유리 파편을 줬는지는 한참 더 연습하고 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유리는 셔츠 단추를 풀어 소매를 걷어 올리며 얘기했다.
“납치되면 칼 잡을 틈이 어디 있겠어. 유리가 가장 흔할 텐데… 상처 남으니까 연습한 거야. 유리가 없으면 다른 것도 좋아. 쇠붙이든 뭐든, 딱딱하고 뾰족한 걸 찾아서 턱 밑을 노려.”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조심히 잡는다고 잡았으나 유리였기에 손바닥에 길쭉한 생채기가 나버렸다. 피가 심하게 난 건 아니라 며칠 두면 사라질 상처였다. 레이즈빗이 구급상자를 들고 왔다. 유리가 직접 붕대를 감아줬다.
“안 쓰면 죽겠다 싶을 때 써. 다른 걸 더 가르쳐줄 테니까.”
투박한 손은 붕대를 말끔히 감았다. 많이 해본 솜씨였다. 아나스타샤는 손등과 바닥을 살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편한 옷을 입을 걸 그랬나. 괜히 정장을 입어서…. 유리도 정장 차림이었다. 땀에 젖어 살에 달라붙은 셔츠에 자꾸만 눈이 갔다.
유리는 낭심 걷어차는 법, 명치를 때리거나 버티는 법 등 각양각색의 호신술을 강의했다. 아나스타샤는 정말,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힘들어 죽을 것만 같았다. 유리가 호신술 하나를 알려주면 그의 수행원인 일리야, 마야, 레이즈빗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개인 훈련 중이던 직원들도 아나스타샤의 연습을 도와야 했다.
다양한 체구의 사람들과 얽히면서 아나스타샤는 괴한을 마주했을 때 어떤 사람부터 공략해야 하는지 몸으로 깨달았다. 마지막에는 수행원 셋과 유리까지 네 명이 아나스타샤에게 달라붙었다. 다들 팔다리를 하나씩 붙잡고 끌어가려고 했다.
아나스타샤는 혼신의 힘을 다해 발버둥 치고, 마야의 손을 깨물고, 레이즈빗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일리야의 배를 팔꿈치로 찍어 눌렀다. 순식간에 세 명의 포박을 풀어낸 아나스타샤는 유리가 잡은 팔을 힘차게 흔들며 도망치려고 안간힘을 썼다.
“놔!”
“어딜 가려고!”
짐승 같은 포효에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땀에 젖어 이마와 눈가를 가린 밀 빛 머리카락 사이로 회색 눈동자가 흉흉하게 빛났다. 연습인데도 정말 어디론가 잡혀가 영영 햇빛을 못 볼 것만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앞으로 빠져나가려던 움직임을 멈추고 곧장 유리를 어깨로 들이받았다.
“헉!”
유리가 신음하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영원히 감겨있을 것만 같던 포박이 풀렸다. 아나스타샤는 옆으로 기어 나와 유리의 사정거리를 벗어났다. 유리는 한참을 바닥에 누워있었다. 아나스타샤도 힘없이 쓰러졌다.
지켜보던 마야가 가볍게 박수 쳤다.
“와! 훌륭하세요. 이제 그만하나요? 벌써 저녁 6시예요.”
“벌써 10시간이나 했어요.”
마야가 운을 떼자 레이즈빗이 거들었다. 일리야가 유리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그는 스스로 일어났다. 구겨진 셔츠와 바지를 털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머리 뒤로 쓸어넘겼다.
“그래. 이만하면 됐다. 어때. 좀 알겠어?”
유리는 나자빠진 아나스타샤에게 손을 내밀며 물었다. 천장을 보며 헐떡이던 공주는 크게 팽창하는 유리의 흉부와 덤덤한 그의 얼굴을 훑었다. 와선 안 될 상황이 닥치게 된다면 몸이 기억할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힘없이 웃으며 유리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래……. 알겠어. 납치됐을 때 생각나길 빌어야겠지.”
“쓸 일은 없을 거다.”
살인범이 잡힐 때까지 유리 라포포르트가 아나스타샤 곁에 있을 테니까. 유리는 호언장담했다. 아나스타샤도 유리를 믿었다. 레이즈빗이 제일 먼저 기지개를 켜며 저녁 메뉴를 골랐다. 피자 어때요? 하고 묻는 레이즈빗의 엉덩이를 마야가 주물럭거리더니 그런 거 먹으면 엉덩이가 처진다며 놀려댔다. 이익. 보스! 마야 좀 보세요! 레이즈빗이 유리에게 마야의 추행을 일러바쳤다. 유리는 깔깔대며 웃는 마야와 그 앞에서 부들부들 떠는 레이즈빗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근데.”
아나스타샤는 숨을 몰아쉬며 유리를 불렀다.
“수갑에 묶이면 어떡해?”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나. 유리는 뚱한 얼굴로 아나스타샤를 노려봤다. 질문한 아나스타샤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본 듯했다. 하기야, 총도 제대로 쏠 줄 모르는데 수갑 푸는 법을 알까 싶다.
“케이블 타이나 테이프면 힘을 줘서 끊어내면 돼. 수갑은 작은 쇠붙이만 있어도 쉽게 풀 수 있어. 만약…… 없다면 엄지를 부러뜨려.”
최후의 수단까지 전부 알려줬다. 자신이 옆에 있을 때는 걱정 없겠지만, 떠난 뒤에 덜떨어진 경호원이 아나스타샤를 지킬 때는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희소성을 위해 정액을 채취한 뒤 아나스타샤를 죽이리라. 유리는 생각했다.
유리의 단호하고 잔인한 방법에 방금까지 땀과 열로 붉게 달아오른 아나스타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엄지를 부러뜨리면 무기를 못 잡잖아?”
이어지는 질문은 제발 거짓말이라고 해 달라는 뜻으로 들렸다. 그러나 유리는 냉담했다. 일말의 희망도 주지 않았다.
“가만히 있다가 죽는 것보다 뼈 부러지는 쪽이 낫지 않겠어? 뼈야 다시 붙지만, 목숨은 잃으면 끝이야.”
“그건 그렇지만, 나는 아픈 게 싫어서 귀도 안 뚫은 사람이야. 그런데 맨정신으로 스스로 뼈를 어떻게 부러뜨려!”
아나스타샤가 따지듯 물었다. 유리는 공주의 투정은 신경도 쓰지 않고 걷어 올린 셔츠 소매를 내리고 단추를 닫았다. 씩씩대는 아나스타샤의 숨소리가 들렸다. 뼈를 분지르라는 얘기를 놀림거리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러나 유리는 진심이었다. 그는 아나스타샤의 눈을 보며 얘기했다.
“간절하면 다 하게 되어있어. 살고 싶으면 부러뜨려야지.”
목숨을 위해서라면 작은 고통쯤은 감안해라. 당연한 말이었다. 살 수만 있다면 아나스타샤는 전부를 포기할 수 있었다. 다만 아픈 거 빼고. 아직 엄지 뼈는 부러지지 않고 잘 붙어있었다. 유리는 겁에 질린 공주를 향해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부러져도 움직일 수 있어. 아프겠지만.”
그냥 아픈 것도 아니고 오줌을 지릴 만큼 아프겠지만. 유리는 굳이 강도까지 설명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썼다.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냥 유리 네가 내 옆에 계속 있었으면 좋겠어.”
“계속 날 쓴다면…… 시모나로티는 파산하게 될걸.”
“아, 이건 밀랍으로 어떻게 안 되는 거야?”
“그건 이미 받았잖아.”
앞에서 레이즈빗이 손을 흔들며 유리의 시선을 끌었다. 유리가 고개를 들자 레이즈빗은 “보스! 피자 시켰어요! 먹을 거죠?”하고 소리쳤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힐끔 쳐다보곤 수행원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내게서 더 원하는 건 없어?”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쫓기 전, 자리에 서서 물었다. 유리가 걸음을 늦추며 그를 돌아봤다. 날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좋아한다면 인형이 아닌 더 크고 긴밀한 뭔가를 원하기 마련이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훑었다. 물건을 고르는 듯한 시선에 아나스타샤는 긴장했다.
“딱히 없는데.”
대답 안에서 미련이나 술수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았다. 할 말을 끝낸 유리는 피자를 먹으러 걸음을 옮겼다. 아나스타샤는 그 자리에 서서 말을 곱씹었다. 여태 들어본 욕 중에서 당연 최고였다. 이 아나스타샤에게서 원하는 게 더는 없다고? 내가, 날 본뜬 밀랍 인형보다 못하다는 거야? 날 좋아한다고 했잖아?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거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눈만 굴렸다.
얼굴 빼고 봐줄 게 없다는 말이 진심인 건 알았지만, 덤으로 줘도 안 받겠다는 소린 줄은 몰랐다. 덤이라니! 내가 덤이야? 천하의 아나스타샤가 커피를 마실 때 주는 각설탕이냐고! 자존심이 상했다. 속까지 쓰렸다. 혼자 훌렁훌렁 걷던 유리가 뒤를 돌아봤다. 재촉하는 눈빛에 아나스타샤는 그제야 걸음을 옮겼다.
유리는 마이애미에만 있는 터라 다른 지부 사무실에 따로 방이 마련되어있지 않았다. 지부장실을 뺏은 유리와 수행원은 소파에 둘러앉아 배달 온 피자를 먹었다. 아나스타샤는 피자를 보고는 이마를 짚었다. 메뉴를 고른 레이즈빗이 인상을 찡그린 아나스타샤를 힐끔대며 히죽였다.
“누가 과일을 피자에 넣어서 먹어?”
마야가 투덜거리며 피자에 박힌 파인애플을 털어냈다. 일리야와 유리는 별 불만 없이 피자를 반으로 접어 입에 넣었다. 파인애플이 들어간 피자도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았다. 상한 것도 아니고 탄 것도 아니니 그 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한 끼 식사였다.
“에이, 맛있단 말이에요.”
“어쭈. 그럼 남은 거 네가 다 먹어라.”
“네? 이거 한 조각만 먹어도 배불러요!”
레이즈빗은 자기 얼굴만 한 피자 조각을 들고 마야를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흘겼다. 그녀는 피자 위에 핫소스를 뿌린 뒤 레이즈빗에게 무언의 경고를 보냈다. 아나스타샤를 골리려고 시킨 거였지만, 마야는 생각도 못 한 레이즈빗은 바로 꼬리를 말며 네, 제가 다 먹겠습니다! 하고 답했다.
아나스타샤는 찬물만 벌컥벌컥 마셨다. 미국식 피자는 입에도 안 대는데 하물며 파인애플이 들어간 미국식 피자가 음식으로 보일 리가 없었다. 집에 돌아가서 음식다운 음식을 먹고 싶었다. 종일 땀 흘리며 냄새나는 매트에서 굴렀는데 식사도 먼지 날리는 사무실에 앉아 대충 밀가루로 때우다니. 아나스타샤의 안색이 캄캄하게 죽어버렸다.
“……뭐야. 어디 잘못 맞았어?”
설마 피자가 마음에 안 들어서 낯빛이 어두워졌다고는 생각도 못 한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훈련 중에 다쳐서 속이 안 좋다고 착각했다. 유리가 걱정하니, 아나스타샤는 예의상 한 조각을 들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도우와 그 위에 얹은 치즈가 묵직한 철근처럼 느껴졌다.
아나스타샤는 피자를 입에 넣기 전, 유리를 쳐다봤다. 그는 벌써 피자 밑부분을 우적우적 먹고 있었다. 정말 뭐든 잘 먹는구나. 뭐든 잘 먹으면서 왜 에스프레소는 못 마시는지. 아나스타샤는 애먼 유리의 입맛에 화풀이하곤 피자 끝을 아주 살짝 맛봤다.
생각하던 맛이었다. 파인애플은 차마 입댈 수가 없었다. 그는 피자를 내려놓고 물을 마셨다. 치즈 비린내가 확, 풍겼다. 최악의 선택이었다. 비린내에 속이 울렁거렸다. 유리가 레이즈빗이 따라놓은 콜라를 뺏어 그에게 내밀었다.
레이즈빗이 뺏긴 콜라를 눈으로 좇았다. 아나스타샤는 감사히 콜라를 마셨다. 탄산이 느글거리는 속을 잠재워줬다.
* * *
[황소가 방문합니다.]
[황소가 돌아갔습니다.]
오시프는 차에 올라타기 전 휴대전화 문자를 확인했다. 일리야가 오시프에게 보고하는 문자였다. 형한테 일거수일투족 다 일러바치는군. 유리는 일리야가 못마땅했다. 오시프는 다음 사냥에 나서겠다는 문자 이후로 대답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백화점 때처럼 한 번 더 난리 치겠다는 건가? 유리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아나스타샤는 이미 안전띠를 매고 앉아있었다. 어쩐지, 저녁부터 말수가 준 것 같은데. 유리는 기어를 풀며 아나스타샤를 힐끔거렸다. 파인애플 피자가 충격이었나. 조금 먹다 말고 물만 마셔댔다. 거기다 말을 걸어도 형식적인 대꾸만 했다.
레이즈빗 녀석, 벤츠는 무슨 벤츠야 택시나 타고 다니라지. 마야한테 일러둬야겠어. 유리는 애먼 사람을 잡으며 액셀을 밟았다. 아나스타샤는 허드슨강을 건너설 때까지 아무 말도 없었다. 다행히 틀어놓은 라디오가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적당히 가려줬다.
알파인으로 들어서자 주변 풍경이 빌딩에서 주택으로 바뀌었다. 다비드 시모나로티의 저택은 숲과 가까이 붙어있어서 더 들어가야 했다. 차창 밖을 응시하던 아나스타샤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아까 얘기한 거, 진지하게 생각해봐.”
대뜸 잘려 나온 말에 유리는 눈썹을 치켜떴다. 아까가 대체 언제란 말인가? 사귀자는 말? 더 필요한 게 없냐는 말? 내가 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지? 둘 다 싫었다. 사귈 마음도 없었고, 필요한 것도 없었다. 아, 하나 있다. ‘레어’의 위치. 그러나 그건 아버지가 원하는 물건이었다. 아버지께 드릴 선물을 위해 아나스타샤와 사귄다? 어림도 없다. 시간과 실력을 팔았다고 몸과 마음까지 상품인 건 아니었다.
‘예’나 ‘아니오’가 돌아와야 하는데 조용했다. 조바심을 느낀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돌아봤다. 그는 험악하게 인상을 구긴 채 운전에 집중하고 있었다.
“생각하기도 싫은 거야?”
다시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곁눈질하지도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내저었다.
“날 좋아하면서 왜 나랑 사귀는 건 생각도 안 해? 난 괜찮아. 날 똑 닮은 밀랍 인형을 만들기 전에 진짜 아나스타샤를 느낄 수 있잖아. 네가 원하는 거면 뭐든지 줄 수 있어. 레어를 원한다면 열쇠 정도는 줄 수 있다고.”
시모나로티 입에서 시모나로티가 은밀하게 지킨 보물창고가 나오자, 유리가 아나스타샤를 쳐다봐줬다. 공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상냥하게 웃었다.
“시모나로티의 보물을 남한테 막 내줘도 되나?”
“하하, 그래서 열쇠라고 했잖아. 찾는 건 알아서 해야지.”
아나스타샤는 유리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그리고 왜 남이야. 내 연인에게 주는 선물인데.”
“내가 보물고를 노리고 사귀어도?”
고작 열쇠다. 열쇠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중요한 건 위치였다. 듣자 하니 레어의 위치도 주기적으로 바뀐다고 들었다. 그런 레어의 위치도 아닌 열쇠를 받으려고 아나스타샤와 사귄다? 바보 같은 결정이다. 라포포르트의 그 누구도 그렇게까지 해서 레어의 열쇠를 받아내길 원하지 않으리라.
“응. 나는 그만큼 유리한테 관심이 있거든.”
“몇 번 구해줬다고 착각하지 마. 나는 받은 만큼 일하는 것뿐이니까.”
“착각할 정도로 네가 마음에 들었어.”
승낙하지 않으면 받아줄 때까지 귀찮게 굴 작정이다.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끈질기게 구는 이유를 알았다. 그는 한 번도 거절당해본 적이 없는 알파였다. 손을 내밀면 개처럼 달려들어 입을 맞출 사람이 태양계를 두르고도 남았다. 오기일 뿐이다. 세상에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리란 사실을 확인받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다.
“열다섯에 당신 생일 파티에 초대받은 뒤로 아나스타샤 당신을 잊은 적이 없어.”
유리는 솔직해지기로 했다. 아나스타샤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무려 9년이나 자신을 잊지 않았다니. 그때 스치듯이 본 게 전부인데 말이다. 이런 걸 두고 운명이라고 하나?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알짱거리던 스토커도 내가 다 치웠고 당신 결혼시키려고 오메가도 보냈었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나는 당신이랑 연애하고 싶은 게 아니야. 자식을 두고 멀쩡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거야.”
아나스타샤는 눈만 꿈뻑였다. 요 몇 년간 줄어든 스토커와 알파만 골라 잔다는 소문이 났는데도 작업을 걸던 오메가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우연이 아니었다. 내 경호를 맡은 자가 오래전부터 뒤에서 내 인생을 조종하려 들었던 사람이었다.
“아직도 나랑 사귀고 싶어?”
차가 멈춰 섰다. 시모나로티 저택 대문에 도착했다. 눈이 마주쳤다. 유리가 숨겼던 비장의 무기였다. 솔직히 소름이 안 끼쳤다면 거짓말이다.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시하고 있었다는 소리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성인이 되어 가족들의 품을 벗어나기 시작했을 때부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 삶을 관여하고 구경하는 것이 낙이었을 지도 모른다. 유리관에 사는 개미를 보듯이…….
“다 지난 일이잖아? 난 괜찮아. 앞으로 안 그러면…….”
대문이 열리고 차가 움직였다. 유리는 정면을 응시한 채로 경고했다.
“나랑 가볍게 즐길 생각으로 사귀자고 떠보지 말라는 거야. 헤어질 때 내가 곱게 보내줄 것 같아?”
좀 전에 진지하게 생각해보라는 아나스타샤의 말은 가벼운 홀씨가 되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생각하는 것보다 깊고 무거운 감정을 갖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감당할 무게가 아니었다. 즐거움만 훑어갈 관계를 원했지 슬픔과 고통까지 다 끄집어내 전시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눈앞에 보랏빛 하늘을 바탕으로 불이 켜진 저택이 보였다. 유리는 현관 앞에 차를 세웠다. 저택에서 사람이 나왔다. 유리가 안전띠를 풀며 다시 물었다.
“아직도 나랑 사귀고 싶어?”
둘은 서로를 보지 않았다. 유리는 대화의 끝을 기다렸다. 아나스타샤는 안전띠를 풀고 먼저 차에서 내렸다.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저택에 돌아온 아나스타샤는 거실에서 아이와 놀던 다비드와 라이엇에게 인사를 한 뒤, 방을 하나 더 내달라고 얘기했다. 라파엘의 하모니카 연주를 듣던 다비드는 의아한 얼굴로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봤다.
아직 라포포르트에게 보수를 다 주지 않았을 것이다. 줬다 해도 한 번으로 끝날 리가 없다. 적당히 분위기를 잡은 뒤에 별관으로 옮길 줄 알았는데. 아나스타샤를 응시하던 다비드의 시선이 유리에게로 옮겨갔다. 형인 이반과는 분위기도, 인상도 딴판인 라포포르트의 막내아들이 돌처럼 아나스타샤 뒤에 서 있었다.
다비드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대답했다.
“그래. 알았다. 이든은 저녁 약속이 있어서 나갔어. 네가 도와야 할 거다.”
“응. 오로라한테 얘기하면 되지?”
아나스타샤가 물으며 다비드의 볼에 입을 맞췄다. 그래. 그렇게 해. 다비드가 답했다. 아나스타샤는 라이엇에게 눈인사를 하고 거실을 나섰다. 유리가 그림자처럼 뒤를 따랐다. 후우, 후. 라파엘이 하모니카를 마저 불었다. 다비드는 라파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라이엇을 바라봤다. 둘은 눈빛으로 얘기했다.
이상하네.
그러게요. 이상해.
* * *
아나스타샤는 오로라와 함께 유리가 지낼 방을 치웠다. 매일 쓸고 닦기 때문에 침대 시트만 새로 깔면 됐다. 침대 시트는 오로라가 교체했고, 아나스타샤는 환기를 시키고 테이블이나 선반을 손으로 쓸어 먼지를 확인했다. 손에 묻어나는 건 없었다.
유리는 그동안 문가에 서서 오로라와 아나스타샤가 자신의 방을 준비해주는 걸 지켜봤다. 손님을 끔찍하게 배려해주는 것 같으면서도 자신의 성의를 무시했다고 시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나스타샤의 행동이 짜증 났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이젠 질렸다며 헤어지자는 아나스타샤를 순순히 보내줄 만큼 자신이 착한 인간도 아니었다. 한 번 내 손에 들어왔으면 영원히 내 것이어야 해. 그게 안 된다면 탐내선 안 된다. 어쭙잖게 탐냈다가는 가족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아나스타샤를 지하실에 가둬두게 되리라.
막 이불 정리를 끝낸 오로라가 아나스타샤와 유리에게 인사한 뒤 방을 나갔다.
“진작 이렇게 해야 했는데. 미안해, 유리.”
방을 둘러본 아나스타샤가 유리에게 다가와 얘기했다. 아나스타샤 방이 바로 옆방이었고 문도 가깝기에 혹여나 불상사가 생기면 빠르게 진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경호팀 두 개가 진을 친 저택을 어느 누가 침입하겠는가. 안전하다. 아나스타샤 말대로 진작 이렇게 지냈어야 했다.
“이젠 괜찮은가 보지?”
이제야 보통의 경호원과 의뢰인 사이로 돌아간 것인데 거슬렸다. 가져 본 걸 놔줘야 하니 언짢은 것이다. 애초에 어떤 느낌인지도 몰랐어야 했어. 유리는 시선을 땅에 뒀다. 아나스타샤의 구둣발이 보였다.
“응?”
“아닙니다. 쉬십쇼.”
아쉬워한다고 아나스타샤가 다시 침대로 부르진 않는다. 그렇게 탐났다면 거짓말을 해서라도 아나스타샤와 사귀어야 했다. 그건, 싫다. 그러니……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지나쳐 방으로 들어섰다.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돌아봤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벙긋거리다 이내 문고리를 잡았다.
“내일 봐, 유리.”
아나스타샤는 작별 인사를 건네며 문을 닫았다. 유리가 재킷을 벗고 뒤를 돌아봤을 때는 닫힌 문만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문을 닫고 어둑어둑해진 복도를 둘러봤다. 아래층에 형과 아이들이 있는데도 그 소리가 위층까지 올라오지는 못했다. 2층은 고요와 적막만 느껴졌다. 얇은 나무판자를 사이에 두고 유리가 있었으나 아나스타샤가 밀고 들어가기엔 너무 무거운 무게였다. 아나스타샤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괜찮다. 나는 괜찮아. 언제까지 유리에게 기댈 순 없지 않은가. 일이 끝나면 유리는 떠난다. 아나스타샤는 차에서 나눈 대화를 상기했다. 아직도 나랑 사귀고 싶어? 그 물음에 대답은 못 했지만, 한 것과 다름없었다. 헤어질 때 이대로는 못 보낸다며 행패 부리는 사람은 있었어도 사귀자고 말을 꺼내자마자 내가 곱게 보내줄 것 같냐며 협박하는 경우는 처음이다.
문제는 협박이 그저 젊은 알파의 객기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라포포르트는 러시아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유리는 그 집안의 막내아들이며 유일하게 금발에 회색 눈을 가졌다. 사랑스러운 막둥이를 위해서라면 그의 아홉 형제와 블라드미르 라포포르트는 지원을 아끼지 않으리라.
아아, 그렇게 되면 시모나로티의 계보는 끊기고 나는 평생 어딘가에 갇혀 유리만 보고 살겠구나. 딱히 나쁜 제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려고 해서, 아나스타샤는 머리를 저었다. 양가의 평화를 위해 교제는 재고해봐도 좋을 법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방 바로 옆인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널 곱게 보내주겠냐는 말은 유리 본인이 나를 평생 포기하지 않겠다는 호언장담이다. 9년을 잊지 못하고 짝사랑했으니 사랑이 영원하리라 믿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유리 라포포르트의 순진한 소망일 뿐이다.
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신만이 알고 계신다. 9년이나 마음에 품었다고 앞으로 9년을 더…… 혹은 평생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사람 마음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생각도 못 한 변수가 작용할지 누가 알겠는가?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협박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둘이 쓰던 방이 휑하게 비었다. 종일 땀을 흘렸으니 씻고 가볍게 와인을 한 잔 곁들이면 침대에 눕자마자 잠들 것 같았다. 얼른 씻어야지. 아나스타샤는 대수롭지 않게 욕실 문을 응시했다. 닫힌 문을 보니 잊고 지내던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무것도 없을 거야. 이 저택 안은 안전하다. 머리로는 아는데 몸은 아니었다. 몸이 뻣뻣하게 굳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욕실 대신 소파로 다가가 등받이에 손을 올렸다. 눈앞에 미완성인 그림이 보였다.
“……그래, 아나스타샤. 저것만 완성하고 씻는 거야. 마무리만 하면 되잖아.”
물감이 묻으면 씻는 걸 더는 미룰 수 없으니까. 아나스타샤는 소파에 앉기 전, 방문을 힐끗 쳐다봤다. 문은 닫혀있었다. 아, 역시나. 아나스타샤는 아쉬운 숨을 뱉었다.
미련한 아나스타샤! 쫓아냈으면서 그가 알아서 들어오길 바라는 거야? 이젠 혼자 지낼 만하다고 선전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유리는 오지 않아.
“바보 같은….”
아나스타샤는 자신을 질책하며 소파에 앉았다. 물을 가지러 가기도 무서워 화병에 꽂힌 꽃을 빼내고 그 안에 붓을 넣었다. 캔버스를 바라봤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을 가진 남자는 언뜻 보면 유리와 비슷하게 보였다. 그는 월계관을 쓰고 있었고 하얀 천을 바람 같이 두른 모습이었다. 한 손에는 하프를 들고 다른 손은 허공을 향해 뻗었다. 뒤에는 구름과 태양이 빛났고 남자가 딛고 선 땅에는 꽃이 피어나고 나비가 날아다녔다.
흠잡을 곳 없는 태양신이었다. 쏙 닮은 부분은 외형뿐이었다. 유리는 평생을―9년이지만―한 남자만 바라봤다. 바로, 나……. 아나스타샤는 붓에 물기를 털어 말라붙은 물감을 문질렀다. 눈 색은 보석처럼 하얗고 반짝이게 칠해야지. 유리를 아는 사람은 이 신이 유리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말이다. 아나스타샤는 흰 물감에 검은 물감을 조금씩 풀어가며 색을 맞췄다.
회색은 참 오묘한 색이다. 가까이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알아차리기 어렵다. 조명까지 더한다면 더욱더 힘들었다. 초록색인 것 같기도 하고, 푸른색을 띠기도 하는데 막상 보면 어느 쪽도 아닌 맑은 색일 때가 있다. 유리는 여태 만나본 회색 눈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오묘한 빛을 가지고 있었다.
눈에 색을 입히던 붓을 헹구고 그림을 확인했다. 투명한 회색 눈을 가진 태양신이 아나스타샤를 꿰뚫어 봤다. 캔버스 속에 유리가, 문신도 없고 머리도 긴 유리가 아나스타샤를 향해 손짓했다. 아나스타샤는 다시 붓을 들어 입가를 조금 손봤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자 사랑을 찾으러 온 태양신이 되었다. 누가 그렸는지 정말 생생하구나. 아나스타샤는 넋을 놓고 그림을 쳐다봤다.
아나스타샤는 아쉬운 마음에 손 볼 곳을 찾았으나 없었다. 너무 완벽해도 문제라니까. 그는 자찬하며 배경과 음영을 살짝 덧칠했다. 적당히 밝으며 수수한 느낌을 내던 그림이 점점 진해졌다.
“음…… 과했나.”
평소 칠하던 느낌이 아니라 어색했지만 봐줄 만했다. 아나스타샤는 흠, 하고 숨을 삼키며 붓을 내려놨다. 이제는 꼼짝없이 씻어야 했다. 씻기 싫다. 욕실 들어가기가, 그래. 무섭다! 아직도 무섭단 말이야! 아나스타샤는 화병에 붓을 담근 뒤 휘적였다. 하아……. 짧게 떨어지던 숨이 늘어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아나스타샤 씨.”
“헉!”
긴장을 놓고 있던 아나스타샤는 앉은 자세로 펄쩍 뛰었다. 혼자 있는 방에 목소리라니. 심장이 목에 있는 것처럼 격렬하게 뛰었다. 아나스타샤가 뒤를 돌아봤다. 씻었는지 젖은 머리카락에 편한 옷을 입은 유리가 있었다.
뭐야, 유리였네……. 아나스타샤는 안도했다. 문 여는 소리도 못 들었나? 아나스타샤는 문을 쳐다봤다. 닫혀있었다. 설마 벽을 통과한 건 아닐 테고……. 놀란 다람쥐처럼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
유리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집중하시는 것 같아서요.”
집중한 것과 눈치도 못 채게 조용히 들어온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변명에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변명이 뭐든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유리가 발소리를 내며 걸어왔다. 아나스타샤는 붓에 물기를 털어 테이블에 내려놨다.
“어제 다 완성하신 줄 알았는데요.”
“덜 칠한 부분이 있어서 말이야.”
유리는 그림을 감상하는지 조용해졌다. 아나스타샤는 그 잠깐을 못 참고 유리를 힐끔거렸다. 그림을 보고 있었다. 자신을 모델로 한 그림을! 입안이 타들어 갔다. 아나스타샤는 입에 발린 감탄이라도 듣고 싶었다.
“아름답군요. 뭐랄까…… 음, 진짜 같습니다.”
예술품 감상과는 거리가 먼 유리는 본인이 생각한 최고의 찬사를 아나스타샤에게 보냈다. 유리에겐 칭찬이었지만, 아나스타샤는 아니었다. 아름답고 진짜 같은 이유는 다 모델을 보고 그렸기 때문이다. 그 모델은 바로 유리 본인 아니던가?
대단한 집안에서 태어나 온갖 사랑을 받고 자란 유리가 할 줄 아는 최선의 감상이 ‘아름답다’와 ‘진짜 같다’가 끝일 거라고는 믿을 수 없어 아나스타샤는 낯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방에 들어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 다른 꿍꿍이라면…….
“칭찬 고마워, 그런데…… 혹시 내가 거리를 뒀다고 그런 식으로 보복하는 거야?”
“예? 보복이라뇨.”
뚱딴지같은 물음에 유리가 되물었다. 아나스타샤는 다시 설명해줄 생각이 없었기에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유리는 입술을 혀로 훑은 뒤에 말을 붙였다.
“거리를 두고 싶어 한 건 아나스타샤 씨였는데요.”
“아니야! 나는, 그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야.”
먼저 쫓아내 놓고 거리를 둔다고 투정 부릴 줄이야. 이 인간 왜 이래? 유리는 오는 사람 안 가리고 가는 사람 안 막는 아나스타샤가 술독에 빠진 사람처럼 질척거리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삭막한 사이로 돌아가자는 얘기가 아니었어.”
아나스타샤는 시선을 떨궜다.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유리는 솟아오르려는 입꼬리를 애써 정돈하며 팔짱을 끼고 숨을 내쉬었다.
“아하. 그렇습니까. 그래서 어쩌자고? 격 없이 대하라는 말인가?”
“그래.”
적당한 선을 지켜야 했다. 얼마 남지 않은 예의라도 차려야 불상사를 막는다. 그런데 방만 따로 쓰고 관계는 유지하자니. 홍수를 막으려고 둑을 세워놓고 꼬챙이로 구멍을 뚫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유리는 굳이 아나스타샤가 파둔 구멍까지 막을 생각은 없었다. 눈도 못 마주치고 우물쭈물하는 아나스타샤는 처음 봤기 때문이다.
“아나스타샤. 좀 전에도 얘기했지만, 나는 당신을 곱게 보내줄 생각 없어.”
“알아. 네가 얘기해줬잖아.”
소파 무늬를 응시하던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바라봤다. 바다를 품은 눈동자가 잔잔하게 빛났다. 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진지한 모습에 유리는 전율했다. 이런 모습을 한 아나스타샤를 마주 보고 선 것 자체가 기쁨이었다.
아나스타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유리에게 다가왔다. 유리는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지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면, 교제는 빼고…….”
그는 소파 등받이에 엉덩이를 기대고 서서는 유리를 힐끔거렸다. 교제는 빼고 가볍게 즐기자는 건가? 유리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아나스타샤는 매섭게 노려보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뻗어 얼굴을 살포시 붙잡았다. 엄지로 볼을 쓰다듬고 귓불과 귓바퀴를 간지럽게 매만졌다.
“조금 즐기는 건 어때? 싫으면 얼마든지 관둬도 돼. 넌 싫은 거 안 하잖아. 그렇지?”
유리의 생각이 맞았다. 유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초지일관하자면 재 볼 것도 없이 거절해야 하는데 단칼에 잘라내자니 그건 그거대로 아쉬웠다. 무려 아나스타샤를 멋대로 만질 기회가 생기지 않는가. 인형 만들 때 쓰라며 억지로 몸을 만지게 했을 때는 죽을 만큼 싫었는데…….
망설임이 잇는 침묵이 길어졌다. 아나스타샤의 눈을 보던 유리의 시선이 자꾸만 그의 입술로 떨어졌다. 아나스타샤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헤어질 때까지 저 입술을 독점할 수 있었다. 깊게 파인 미간만큼 고민도 깊어졌다.
볼을 어루만지던 아나스타샤가 기대앉았던 몸을 일으키며 천천히 얼굴을 들이밀었다. 웃는 눈매가 가까워진다. 유리는 자신을 바라보다 어느 순간 감기는 아나스타샤의 눈을 넋을 놓고 감상했다. 아나스타샤가 할 말을 맞추는 것만큼 이어질 행동도 알기 쉬웠다. 유리는 다가오는 온기를 받아들였다.
입술이 살포시 겹쳤다. 닿는 숨도 가벼웠다. 먼바다에서 뭍으로 불어오는 바닷바람같이 얕고 은은한 페로몬이 느껴졌다. 아나스타샤가 입술을 떼며 물었다.
“싫었어?”
“아니.”
“더 해도 될까?”
아나스타샤가 눈웃음을 지었다. 어찌나 야살스럽게 눈웃음을 치는지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유리는 침을 삼키고 말았다. 더 해도 된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유리의 대답을 잘 들은 아나스타샤가 다시 입을 맞췄다. 유리는 눈을 감고 그의 체온과 숨을 만끽했다.
보드라운 입술이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인두로 지지듯이 눌렀다. 아나스타샤의 손이 허리에 올라왔다. 두 개였던 무게중심이 하나가 되려 했다. 쪽 소리도 나지 않는 입맞춤을 이어가던 아나스타샤가 불쑥 혀를 내밀었다.
아나스타샤와 가벼운 관계를 고찰하던 유리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둘은 서로를 쳐다봤다. 결정권은 유리에게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차분히 유리의 선고를 기다렸다. 맨정신으로 처음 한 것도 아니야. 제정신이 아닐 때는 이보다 더한 것도 했지. 거절하기엔 아쉽다.
무척 아쉬웠다. 곱씹으며 아쉬워할 바에야 후회하더라도 즐기고 싶었다. 아나스타샤와…… 알파와!
유리가 벌어진 거리만큼 도로 다가왔다. 턱을 앞으로 내밀며 양손으로 아나스타샤의 얼굴을 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애인도 약혼자도 아니야. 그냥 가볍게 호기심에 유희로 닿는 것뿐이다. 언제 아나스타샤를 만져보겠어? 유년 시절 억눌렸던 욕구가 만개했다.
알파와 사귀는 건 이해할 수 없어. 하지만 상대가 아나스타샤라면 한 번쯤은 번복할 수 있어. 아나스타샤잖아. 유리는 단어 하나로 모든 모순과 의문을 덮어버렸다. 입을 벌려 혀를 내밀었다.
혀가 얽혔다. 숨이 섞이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어렴풋이 인지했던 아나스타샤의 존재감이 눈을 감아도 뚜렷하게 느껴졌다. 새콤하고 달달한, 아나스타샤와 닮은 화려하고 정신없는 페로몬이 파도처럼 몰아쳤다.
“음…….”
페로몬에 질식할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의 머리를 움켜잡은 손이 그의 억센 머리칼을 휘어잡았다. 하얀 손등 사이사이로 검은 머리카락이 삐져나왔다. 아나스타샤는 능숙하게 고개를 움직이며 유리를 정복해 갔다.
하, 읍. 가쁜 숨에 유리가 고개를 틀면 따라가 도로 틀어막으며 문제가 안 될 정도의 페로몬을 쏟아냈다. 본능이 끌어내는 거부감에 유리가 뒷걸음질 쳤다. 그럼에도 움켜쥔 머리는 놓지 않았다.
아나스타샤가 걸음을 옮기려는 듯 체중을 앞으로 실었다. 유리는 속절없이 아나스타샤가 원하는 대로 걸어야 했다. 종아리에 푹신한 이불이 닿았다. 숨을 쉬며 뒤를 돌아보니 침대가 있었다. 뭘 하자는 거야? 끝까지 다 하겠다는 건가? 유리가 물어보려고 입을 열려는 순간,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위로 쓰러졌다.
“읏.”
거구가 쏟아지는 탓에 유리는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워버리고 말았다. 천장을 뒤덮은 화려한 장식과 벽지를 배경으로 아나스타샤가 날개를 펼치려 들었다.
“싫으면, 얘기해.”
허벅지 위에 올라탄 아나스타샤가 유리가 입은 티셔츠를 위로 끌어올리며 얘기했다. 말과 행동이 같이 들어오면 방어가 어렵잖아. 싫으면 말해? 이미 벗기고 있으면서?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모순적인 배려가 불만이었지만 순순히 팔과 등을 들어 티셔츠를 벗기는 데에 일조했다.
아나스타샤는 반라를 내려다봤다. 입술 색과 같은 유두와 상처 하나 없는 하얀 몸이 얌전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왼쪽 외복사근에 새긴 문신을 손으로 짚었다. 짚은 곳부터 근육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아나스타샤가 몸을 틀어 무릎을 허벅다리 밑으로 밀어 넣으며 몸을 겹쳤다.
시선이 마주쳤다. 눈빛으로 주고받은 대화는 허락을 구하고 허락하는 내용이었다. 아나스타샤가 몸을 굽히며 유리에게 입을 맞추려 했다. 둘은 맞닿은 상대 입술을 과육을 잘라먹듯 입술로 빨아 당겼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아나스타샤는 천적을 만난 미어캣처럼 숙였던 몸을 벌떡 세워 문을 쳐다봤다. 유리도 고개만 돌려 문을 바라봤다. 정적을 깨고 다비드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아냐, 들어가도 될까?”
“형? 무슨 일이야?”
아나스타샤가 황급히 침대에서 내려가 문 앞에 섰다. 때를 맞춰 다비드가 문을 열었다. 아나스타샤는 온몸으로 다비드가 들어오지 못하게 최선을 다해 막아섰다. 다비드 눈에는 문틈에 바짝 붙어 수상하게 웃는 아나스타샤만 보였다. 다비드는 비정상적인 동생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내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괜찮은 거냐?”
“음? 응. 괜찮지. 다 좋아. 호신술도 배웠고, 집에도 안전히 돌아왔고. 유리 씨도 있잖아.”
주절거리던 아나스타샤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무엇보다 유리와도 잘 풀리지 않았는가. 아나스타샤는 다비드를 향해 환히 웃었다.
“안 괜찮은 일이 뭐 있겠어.”
다비드는 아나스타샤를 죽 훑었다. 방에 올라간 지 30분도 더 됐는데 땀에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거기다 소매에 물감도 묻었다. 깔끔하기로는 고양이 못지않은 녀석이 여태 옷도 안 갈아입었다. 다비드는 입맛을 다셨다. 해줄 말도 당부할 것도 많은데 아나스타샤의 상태가 마음에 걸렸다.
“그래. 괜찮으면 됐다. 유리 씨와 따로 지낸다길래 무슨 일이 있나 했지.”
“이젠 혼자 지낼 수 있으니까, 유리 씨와 한 공간을 쓸 이유가 없지. 다비, 너무 걱정하지 마. 아기 천사한테 안 좋다고.”
아나스타샤가 겨우 얼굴만 내뺀 수준으로 열었던 문을 더 열고 나가 다비드를 가볍게 끌어안으며 입을 맞췄다. 가족끼리 의례 나누는 입맞춤이라 다비드도 거리낌 없었다. 당연히 마르고 보드라워야 할 입술은 술이라도 진탕 퍼마신 것처럼 촉촉했다. 다비드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당찬 표정을 지은 아나스타샤를 빤히 쳐다봤다.
누군가 안에 있다. 다비드는 아나스타샤 어깨너머로 보이는 전경에 집중하지 않으려 애썼다. 확인하기 전까지는 추측에 불과하니까.
“……너, 누구랑 있었니?”
“응?”
“혼자 있는데 입술이 왜 촉촉할까.”
다비드가 건조하게 지적하자 아나스타샤가 헉, 숨을 삼키며 입술을 손으로 가렸다. 아차…….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다비드 눈치를 살폈다. 호수처럼 잔잔한 눈동자가 아나스타샤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 번이 아니다, 아나스타샤 누누이 얘기했어. 할 거면 별관으로 옮기라고 말이야.”
“아니야. 형, 무슨 소리야? 아무 짓도 안 했어. 앞으로도 안 할 거야! 맹세해!”
아나스타샤는 가슴에 손을 올리며 호언장담했다.
“됐다. 내일 별관으로 옮겨라.”
“형, 진짜라니까?”
“내 집에서 각인도 안 한 알파가 날뛰는 꼴은 두고 볼 수 없어. 알겠니?”
다비드가 눈썹을 찌푸리며 경고했다. 아나스타샤는 문이 더는 열리지 못하게 손으로 짚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유리가 누워있는 걸 들키면 그대로 짐을 갖고 별관으로 쫓겨나게 된다. 아나스타샤는 따뜻한 물도 나오지 않고 오가는 데 5분은 더 걸리는 곳에 가서 지내고 싶지 않았다.
“명심할게. 형이 걱정하는 일은 안 생길 거야.”
다비드는 머리를 쓸어넘겼다. 다비드가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부분이었다. 아나스타샤도 알기에 그가 적당히 화를 풀고 돌아가길 바랐다. 다비드는 차마 방 안쪽으로 시선을 두지 못하고 애꿎은 문짝만 노려보다 다시 아나스타샤를 타일렀다.
“아냐, 흘려듣지 마. 여긴 나만 사는 집이 아니야. 각인 안 된 오메가가 일하는 곳이라고. 손님인 너는 예의를 갖춰야 해.”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걱정돼서 올라와 봤는데 애먼 놈이랑 침대에서 뒹굴고 있으니 화가 날 법도 하지. 다비드의 저택에 지내려면 꼭 지켜야 할 규율이었다. 살인마가 노리고 있어서 다행히 경고로 끝났다. 평소였으면 당장 쫓아내고도 남았다.
아나스타샤의 어색할 만큼 활짝 핀 미소에도 다비드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아나스타샤에게 무언의 경고를 보내며 방안을 노려보고는 몸을 돌렸다. 눈 한 번 깜빡거릴 찰나였고 문을 막고 있어서 다비드에게 보일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들킨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나스타샤는 문을 소리 없이 닫고도 한참을 숨죽이고 있었다. 유리는 팔꿈치를 세워 상체를 일으킨 자세로 아나스타샤를 구경했다. 그는 뒤를 돌아보며 한숨을 늘어지게 쉬었다. 동시에 꼿꼿했던 허리가 열 받은 고무줄처럼 늘어졌다.
“하아…….”
다비드가 집에 있는데도 유리를 꼬드기려는 내 잘못이다. 언제든지 다비드가 들이닥칠 수 있으며 그의 말대로 각인이 안 된 오메가가 일하는 곳에서 짐승처럼 껄떡인 내 죄가 크다. 아니지! 아나스타샤. 짐승은 적어도 때를 가리고 발정한단다! 아나스타샤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어찌나 세게 짚었는지 딱 하고 맞붙는 소리가 났다.
아나스타샤의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본 유리는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아나스타샤는 땅을 보고 걷느라 유리가 웃는지도 몰랐다. 그는 침대에 풀썩 앉으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늘 꼿꼿하고 반듯하던 등을 움츠리자 혼이 잔뜩 난 개처럼 보였다.
유리는 초라하게 구부려도 듬직한 등을 구경했다. 여자 두 명이 업히고도 남을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가 숨을 쉴 때마다 땀에 엉망이 된 셔츠가 주름졌다, 팽팽하게 펴지길 반복했다. 만지고 싶다. 유리는 더는 욕구를 부정하려 들지 않았다. 참을 뿐이다.
그는 아나스타샤의 등을 멋대로 더듬는 대신 몸을 일으켰다. 별관으로 쫓겨나면 어쩌나 걱정하던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힐끔댔다. 유리는 벗어 던진 티셔츠를 다시 입고 일어났다.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올려다봤다.
“씻으러 가. 봐줄 테니까.”
유리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툭 던지듯 얘기했다. 좀 전과 달리 가벼운 말투에 목소리도 어딘가 친근함이 느껴졌다. 침울했던 아나스타샤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두고 먼저 욕실로 들어가 안을 확인했다.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며 세면대를 확인했다. 유리는 빼낸 손으로 세면대 밑부분을 짚었다. 손끝에 들고 있던 소형 도청기가 세면대 밑에 붙었다. 침실 협탁에도 하나 붙였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다비드의 저택이 아나스타샤가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는 것을 아는데도 아나스타샤를 혼자 두자니 불안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젠장, 애당초 방을 따로 썼으면 이런 걱정까진 안 했을 텐데. 유리는 애꿎은 세면대를 손으로 쓸었다.
“고마워, 유리.”
따라 들어온 아나스타샤는 셔츠를 벗은 채로 바지 버클을 풀고 있었다. 희고 투명한 몸에 오늘 연습으로 팔뚝 곳곳에 멍이 될 상처들이 보였다. 여태 제대로 된 호신술도 모르고 살다니. 멍청하긴.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유리의 한심한 시선에도 아나스타샤는 개의치 않고 속옷까지 벗어냈다. 뱀 대가리가…… 늘어진 성기가 이목을 끌었다.
“말은 안 해도 이게 탐나는 거지?”
아나스타샤는 능청스레 팔을 벌렸다. 완벽한 육체가 유리를 향해 섰다. 지겹도록 만지고 더듬었던 몸은 제법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유리는 대답 대신 눈썹만 찡그렸다. 아나스타샤가 하하, 짧게 웃으며 벌렸던 팔을 내렸다.
“언제든지 필요하면 말만 해. 너라면 내 밑 주름까지 본떠도 좋으니까.”
“…….”
뭐라는 거야? 감상하려고 했더니 초를 친다. 유리의 콧잔등이 찌푸려졌다. 아나스타샤는 그 모습이 만족스러웠는지 고개를 끄떡이며 샤워 부스로 들어갔다. 귀엽긴. 저래놓고 알파끼리 섹스를 어떻게 하고 연애는 어떻게 하냐며 파워볼을 운운했단 말인가. 자신에게 향한 따가운 시선을 즐겼다.
아나스타샤가 힐끔거릴 때마다 유리는 그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조금의 음담패설도 용납 못 한다는 엄한 얼굴이었다. 물론 아나스타샤에게 타격이 되진 못했다. 그는 머리를 감다 말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쳐다보면 아무리 나라도 어쩔 도리가 없다고.”
“껄떡거리지 말고 씻기나 해.”
“유리가 열정적으로 봐주는데 내가 어떻게…….”
“미리 얘기하는데.”
아나스타샤가 장난치려던 참이었다. 유리가 팔짱을 낀 채 말을 끊었다. 그제야 아나스타샤는 입을 다물었다. 유리가 ‘미리’ 주의할 때는 귀를 기울여야 했다. 다음에도 똑같은 상황이 닥쳤을 때 경고한 내용을 행하겠단 뜻이니 말이다.
“세우면 분질러버리겠어.”
힉. 아나스타샤는 기겁하며 거품이 묻은 손으로 사타구니를 가렸다. 농담이 아니다. 총을 들이민 적도 있고 역주행을 하는 바람에 트럭에 치일 뻔한 적도 있지 않은가. 에이,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성기를 분질러버리겠는가? 이번은 농담이지 않을까 싶어 아나스타샤는 비식비식 웃으며 긴장을 풀었다.
“유리가 그런 말 하면 진짜 분질러버릴 것 같으니까 농담이라도 하지 말아줄래?”
악취미야. 아나스타샤가 입을 삐죽이며 덧붙였다. 유리는 눈만 꿈뻑였다. 진짜 분질러버릴 생각이었는데. 뭐……. 믿고 싶은 대로 믿으라지. 침묵은 긍정이었다. 농담으로 생각하고 웃어댔던 아나스타샤가 입을 다물었구나. 정말…… 분질러버릴 생각이었구나.
흘러내린 샴푸가 눈에 들어가서 아나스타샤는 눈을 꾹 감고 몸을 씻었다. 물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다.
<2권 끝. 다음 권에 계속>
* * *
아나스타샤를 너무 얕봤다. 기껏해야 백화점 전 층을 돌겠거니 안일하게 생각하다니. 여기는 뉴욕이고 아나스타샤는 아나스타샤였다. 뉴욕 5번가에 있는 가게 전부에 다 들어갔다 나올 생각인지 차 시동이 꺼지기도 전에 나가서 쇼핑백을 잔뜩 들고나왔다.
트렁크가 가득 차서 뒷좌석에도 쇼핑백을 쌓아 올렸다. 아나스타샤가 조수석에 앉은 채 뒤를 돌아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이만하면 되겠어.”
“돌아갈까요.”
쇼핑을 쫓아간 것도 아니고 아나스타샤가 나올 때까지 가게 안에서 기다리기만 했는데도 기진맥진한 유리가 물었다. 저기서 더 산다면 차 지붕 위에다 올려야 할지도 모른다. 슬프게도 아나스타샤는 들으면 안 될 말을 들은 사람처럼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섭섭한 소리를 하는 거야? 이젠 백화점에 가야지.”
“…어디로 갈까요.”
유리는 핸들을 부서트릴 것처럼 움켜쥐며 물었다. 실랑이할 바에야 하자는 대로 따르고 일찍 돌아가는 게 편하다. 나사가 하나도 제대로 맞물리지 않는 아나스타샤와 다툼 없이 지내는 법을 유리는 진즉 터득했다.
“삭스 피프스 에비뉴로 가자. 가 봤어?”
“아뇨. 뉴욕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처음이야? 내비게이션도 없이 어떻게 길을 찾아?”
“여기서 알려줍니다.”
유리는 이어폰을 낀 귀를 가리켰다. 네 부하가 길도 알려줘? 아나스타샤가 물었고, 유리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이어폰에서 들리는 소리는 아나스타샤를 뒤쫓으며 경호하는 경호팀의 무전기 소리였다. 초행길인 유리가 길을 잘 찾는 것은 지도를 외우고 있기에 가능했다.
아나스타샤가 미국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뉴욕과 뉴저지 일대의 지도를 보던 게 도움이 됐다.
“하하, 터미네이터 같아.”
어디가 터미네이터 같다는 건지 알 수는 없었으나, 유리는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쳤다. 백화점만 들르면 집에 돌아갈 수 있다. 공식 일정 외에는 아나스타샤를 집에 가둬버리고 싶은 걸 오늘도 꾹 참으며 유리는 차를 몰았다.
백화점에 들어와서야,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아침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네 옷도 사면 좋지……. 5번가를 정신없이 돌아다닌 이유는 내 옷을 사 입히기 위해서인가. 출발 전의 유리였으면 필요 없다고 거절했겠지만, 지금은 그저 사주는 대로 받은 뒤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여태 훈련받으며 힘들었던 적은 손에 꼽는데 아나스타샤와 함께하는 활동은 가면 갈수록 매번 난이도가 가파르게 올라갔다. 아나스타샤의 열정과 욕구가 유리의 영혼을 뺏어갔다. 영혼이 줄어들었으니 쉽게 지치고 피곤해진다.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사람이 아닌 악마나 흡혈귀가 아닐까, 생각하며 어깨에 옷을 대보는 아나스타샤를 내버려 뒀다.
아나스타샤도 매장을 드나들며 고민 없이 옷을 샀다. 지금이야 어쩔 수 없이 참아주지만, 집에 돌아가면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리라. 집에 가면 잘 맞는지 옷을 한 번씩 입혀봐야 했기에 그의 인내심을 남겨둬야 했다.
눈치 빠른 유리도 아나스타샤의 손에 가방이 들리는 걸 보며 의아해했다. 입는 건 난데 치수는 물어보지도 않고 막 사들인다. 이거, 설마…. 집 가서 입어봐야 하는 거 아냐?
“제 치수는 알고 삽니까.”
“눈대중으로 쟀는데, 으음. 안 맞으려나?”
말이라고 물어? 피로로 찌그러진 얼굴이 한층 더 우울해졌다. 집에 들어가서도 아나스타샤 앞에서 패션쇼를 해야 한다면 여기서 한 벌 입고 끝내고 싶었다. 유리는 슈트케이스 하나를 뺏어 들고 탈의실에 들어갔다. 이래서 경호는 싫은 거야. 시종인지 경호원인지 구분이 안 되잖아. 유리는 구시렁거리며 재킷과 바지를 갈아입고 나왔다.
기다리던 아나스타샤가 꽃이 만개한 미소를 보이며 손뼉을 쳤다.
“어쩜 이렇게 딱 맞을 수가! 흐음, 셔츠는 한 치수 적은 걸 사야겠는데. 그래야 잘 어울리겠어.”
상상한 대로 잘 어울렸다. 기장도 딱 떨어졌다. 잿빛 원단과 유리의 분위기가 어우러져 차분한 느낌이 들었다. 여기에 베스트도 입으면 좋겠는데. 스리피스를 입기에는 유리가 어리지만, 잘 어울리면 그만 아닌가. 베스트까지 입으면 정말 좋겠는데…. 어깨와 팔 기장을 봐주는 척하는 눈빛에 욕망이 반짝거렸다.
“됐죠.”
“응. 잘 어울려. 아주 잘.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이야. …아니, 유리. 구두는 왜 이렇게 낡은 거야?”
“예? 아뇨. 그냥 안 닦은 건데요.”
유리는 한 쪽 발을 뒤로 숨기며 변명했다. 옷만 해결되면 돌아갈 줄 알았는데 구두까지 책잡혔다. 구두까지 산다며 돌아다닐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유리는 집에 돌아갈 계획을 세우다 이내 포기하고 아나스타샤에게 일정을 맡기기로 했다. 유리에게는 아나스타샤를 꺾을 만한 말주변이 없었다.
“매일 갈아입을 옷도 있는데 구두는 한 켤레면 이상하잖아.”
“예에.”
어차피 살 거라면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 유리는 생각을 고쳐먹고 아나스타샤가 선물로 준 정장을 들었다. 양손이 묵직하다. 남성복 매장에 있는 브랜드에서 적어도 세 벌씩은 산 듯했다. 구두도 세 켤레씩 살 건 아니겠지. 쫓아다니기만 하는데 왜 이렇게 피곤한 걸까. 유리는 부러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잡으라는 듯이 뒤로 손을 뻗은 채 걷는 아나스타샤를 쫓았다.
“발은 사이즈 몇이야?”
매장에 들어가기 전,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짐꾼 노릇까지 하느라 짜증 나는데 태평하게 발 사이즈가 몇이냐고 물어보니, 살해 협박에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행동하는 공주가 마음에 들 리 없었다.
“그건 눈대중으로 못 맞추나 보죠.”
“아하, 맞춰볼까? 흐음…. 잡아봐야 알겠는데.”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발치를 지그시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발목을 잡으려 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리는 뒤로 물러섰다. 비아냥대 봤자 되레 당하는 쪽은 나라는 걸 까먹지 말자,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대답하지 말자…. 젠장! 아나스타샤의 경호라고 냉큼 받은 게 잘못인가. 아니, 내 아나스타샤를 남의 손에 맡길 수는 없지.
번뇌를 끝낸 유리가 대답했다.
“44입니다.”
“그래? 나랑 같네.”
유리가 유일하게 아나스타샤와 사이즈가 겹치는 신체 부위가 발이었다. 상의도 하의도 아나스타샤가 한두 치수 크게 입는 반면 발 사이즈는 같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나스타샤는 눈에 들어온 구두 하나를 골라 요리조리 훑어본 뒤 직접 유리에게 신겼다.
“줘. 내가 신을 테니까.”
당황한 유리가 본인이 신겠다고 발을 내뺐으나 아나스타샤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발등에 손을 올리고 유리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싫다는 말도, 안 되냐는 말도 없이 유리가 허락할 때까지 침묵으로 압박할 생각인지 눈만 깜빡였다. 옆에서 직원의 시선이 느껴졌다. 유리는 다리에 힘을 뺐다. 그러자 아나스타샤가 물살에 휘말려 사라지는 물거품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신발을 신기고 구두코를 손으로 눌러보며 크기를 가늠했다.
“한국인 친구가 있는데, 한국은 신발을 선물하면 연인끼리 헤어진대.”
갑작스러운 옛 애인 얘기에 유리는 눈썹을 치켜떴다. 아나스타샤는 깔끔한 새 구두를 응시하고 있었다.
“새로 사준 신발을 신고 도망간다나? 내가 신발을 선물해주니까 그런 소릴 하더라고.”
“그래서 그 사람은 도망갔습니까?”
“하하, 글쎄 그건 생각이 안 나는데.”
아나스타샤가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유리는 나랑 할 일이 있으니까 다 끝나기 전까지는 도망가면 안 돼. 알았지?”
지나가듯이 들은 미신이 신경 쓰여서 말했나 보다. 유리는 픽 웃고 말았다. 처음 듣는 말이다. 생소한 나라의 생소한 미신을 믿는 아나스타샤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선물한 구두를 신었으니 어딜 가도 쫓겠단 뜻이겠죠.”
“하하, 유리. 나는 네가 도망가면 쫓아갈 배짱도, 힘도 없는걸.”
네가 날 쫓아오는 거면 모를까. 아나스타샤는 소년처럼 웃으며 농담했다. 유리에게는 웃기지 않는 농담이었다. 아나스타샤가 경호원이 귀찮다고 도망갈 이유는 없다. 유리가 아나스타샤를 쫓아야 할 때는 그가 납치당할 때뿐이다.
“당신을 쫓는 게 내 일인데요.”
“뭐, 지금은 그렇지.”
지금이야 경호를 운운하며 옆을 지키겠지만, 범인이 잡히고 의뢰가 끝나면? 아나스타샤는 유리와의 마지막을 생각했다. 과연, 저 신사적이고 무심한 알파가 순순히 마이애미로 돌아갈까? 어떻게든 내 옆에 남으려고 눈치 볼까. 여태 겪어본 스토커로 유리의 경우를 헤아리자면 마이애미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유리는 공주가 생각하는 평범한 스토커가 아니었다. 아나스타샤의 허락도 없이 몰래 인생을 관찰하는 불청객이었다. 아나스타샤 곁에 없어도 그가 어디서 뭘 하는지 알 수 있는데 번잡스럽게 옆에 남아 시종을 자처할 생각은 없었다.
“그만 돌아갈까요.”
유리가 낡은 구두―안 닦은 구두―를 신으며 얘기했다. 아나스타샤는 입술을 비틀어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발 사이즈는 똑같으니 내 신발을 같이 신으면 되지. 집에서는 도망갈 곳도 없으니 내킬 때까지 신길 수 있잖아? 조금 크겠지만, 내 옷도 입혀봐도 좋겠다.
“그래, 가자.”
유리를 앉혀놓고 신데렐라처럼 구두를 신겼다 벗겼다, 옷을 입혔다 벗겼다 할 생각에 신이 난 아나스타샤가 계산을 끝내고 유리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공주가 순순히 돌아가는 것도 모자라 먼저 잡아끄는 모습이 어딘가 미심쩍었지만, 유리는 그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삭스에 들어오기 전부터 아나스타샤의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피곤했고, 시원한 보드카가 마시고 싶었다.
“오랜만에 나오니까 너무 좋네.”
여태 다닌 파티와 미팅은 외출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 어투에 유리는 살인마가 미팅이라고 봐주고 백화점 쇼핑이라고 봐줄 것 같냐고 대꾸하기보다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둘은 로비를 가로질렀다. 행사가 있는지 사람이 붐벼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뒤에 서서 걸어야 했다.
[알파, 여긴 브라보. 삭스 앞에 지나가는 저 모자 쓴 남자, 아까도 있지 않았어?]
[어, 그러네. 나도 아까 본 것 같은데.]
아나스타샤가 밖으로 나갈 때가 되자 조용하던 이어폰에서 무전이 들렸다. 잡음이 들린다는 건, 경호에 차질이 생긴다는 소리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사람 세 명이 끼어들어 아나스타샤 뒤에 붙어 걷는 바람에 거리가 벌어졌다. 거기다가 유리 바로 앞에 선 남자는 덩치가 유리보다 커서 아나스타샤의 모습이 가려졌다. 유리는 좌우로 몸을 움직여 공주의 동태를 확인했다.
“아나스타샤 씨.”
“응? 아, 맞아. 유리, 더운데 젤라토라도 먹으면서 갈까? 맛있게 하는 곳을 알거든. 이탈리아에서 먹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불행히도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보지 않고 대답했다. 아나스타샤 뒤에 있던 낡은 페도라를 쓴 남자는 거리를 좁히더니 아나스타샤의 등을 어깨로 툭, 쳤다. 낌새가 수상하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데 아나스타샤만 평화로워 보였다. 낡은 페도라를 쓴 남자가 아나스타샤의 허리를 건드렸다. 그제야 아나스타샤가 뒤를 돌아본다.
[알파, 브라보. 정문에서 대기한다.]
“아나스타샤 씨. 같이 가요.”
“이리 와, 유리.”
아나스타샤가 뒷사람에게 먼저 지나가라는 듯 옆으로 비켜서며 유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리는 짐을 쥔 손을 앞으로 뻗었다. 손가락이라도 좋으니 아나스타샤와 닿아야 했다. 아나스타샤가 길을 비켜줬음에도 페도라를 쓴 남자는 아나스타샤 쪽으로 몸을 기울여 진로를 방해했다. 거기다가 유리 앞에서 걷던 덩치 큰 남자가 갑자기 멈추더니 유리를 등으로 들이받았다.
생각도 못 한 장애물에 유리는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쇼핑백이 날개처럼 바닥에 펼쳐졌다. 인파가 순식간에 흩어져 유리 주변으로 빈틈이 생겼다.
“유리!”
[총을 가지고 있다.]
아나스타샤의 목소리와 무전이 조화롭게 뒤섞여 귓가에 맴돌았다. 바닥을 손으로 짚고 일어나는 그 짧은 순간에 유리는 직감했다.
내 아나스타샤를 눈앞에서 뺏기겠구나.
“어머, 괜찮으세요?”
지켜보던 사람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들은 유리 대신 짐을 주웠다. 유리는 밑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나스타샤를 찾았다. 그는 페도라를 쓴 남자와 유리를 밀친 덩치 큰 남자 사이에 낀 채로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이리도 쉽게 아나스타샤를 놓친단 말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까만 뒤통수에 총알을 박아버리고 싶은 걸 꾹 참고 그를 불렀다.
“아나스타샤!”
기다렸다는 듯이 아나스타샤가 뒤를 돌아봤다. 멀리서도 보이는 겁에 질린 얼굴……. 누군가의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유리는 곧장 아나스타샤에게 달려갔다. 사람이 많아서 뚫고 지나가기가 어려웠다. 거기다 누군가 자꾸 손이며 옷깃을 잡으며 짐을 가져가라고 떼쓰는 바람에 두 발짝 나가고 멈추길 반복했다.
이렇게 해서는 못 잡는다. 유리는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냈다. 계획대로 흘러간다고 생각하겠지. 아나스타샤 옆에 붙어있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곧 실패할 테지만 말이다. 유리는 망설임 없이 천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넓은 실내에 총성이 울리자 비명과 함께 수많은 인파가 일제히 몸을 웅크리거나 진열대 뒤로 몸을 숨겼다.
시야가 넓어졌다. 아나스타샤와 납치범은 돌기처럼 우뚝 튀어나와서 찾기 쉬웠다. 덩치 큰 남자가 뒤를 돌아봤다. 총성에 당황해야 할 얼굴은 긴장감으로 굳어있었다. 유리는 그 남자를 겨냥했다. 이 새끼들은 내가 누군지까지 안다. 그렇다면 건물을 벗어나게 둘 수 없다.
[뭐야? 제길!]
무전이 시끄럽다. 건물 밖에 대기하던 경호팀도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시끄러워. 유리는 이어폰을 빼내고 양손으로 권총을 쥐어 남자를 다시 조준했다. “얼른! 움직여!” 남자의 입 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움직이게 둘까 보냐. 탕! 다시 한번 총성이 울렸고 거구의 남자가 어깨를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빌어먹을!”
총상을 입은 남자가 욕을 지껄이며 총을 유리에게 겨눴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에게 위험하다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입에 떨어지지 않았다. 옆구리에 닿았던 총이 사라지니 이번에는 더 날카로운 게 닿았다. ……칼이다.
첫발은 남자가 빨랐다. 그러나 맞추지 못했다. 세 번의 총성에 백화점 로비는 아수라장이 됐다. 혼돈 속에서 유리는 표적을 노려봤다. 남자가 다시 한번 총을 쐈다. 위협용으로 발포하는 듯했으나,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유리가 발포를 미루는 건 바로 뒤에 아나스타샤가 있기 때문이다. 유리를 돌아본 채 멀어지는 그를 배경으로 두고 남자의 머리를 노렸다. 사람 내장을 만졌다며 몇 날 며칠을 훌쩍였는데 눈앞에서 사람이 죽으면 얼마나 충격이 클까. 공주에게는 미안하지만 여기서 놓치면 다음번에는 시체로 만날 수도 있다.
내 아나스타샤를 죽일 수 있는 건 나뿐이야. 내 허락 없이 함부로 죽어선 안 돼. 유리가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울려 퍼지며 남자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아나스타샤는 머리에 총알을 맞고 쓰러진 남자가 시체가 되는 모습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눈에 담았다.
“이런 씨발! 아나스타샤 뒈지는 꼴 보고 싶어?”
페도라를 쓴 남자는 아나스타샤의 옆구리를 짓누르던 칼을 빼내 그의 목에 칼을 대고 뒤에서 끌어안았다. 목에 차가운 칼날이 닿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멱이 따일 것 같았다. 유리, 유리! 아나스타샤는 눈빛으로 유리를 불렀다.
“오지 마!”
괴한이 소리치며 문 쪽으로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나가기 전에 잡아야 했다. 그런데 놈과 아나스타샤가 너무 가깝다. 잘못했다간 소중한 그의 몸에 구멍이 날지도 모른다. 유리는 팔을 내리고 남자에게 걸어갔다. 저 새끼들은 아나스타샤를 못 죽여. 아나스타샤는 살아있을 때 가치가 있다. 그들이 원하는 건 몸에서 갓 나온 정자지, 시간 할 시체가 아니니까.
그때였다. 정문에서 뭔가 안으로 굴러들어왔다. 유리는 반사적으로 팔뚝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웅크렸다. 희뿌연 연기가 넓은 홀을 가득 채웠다. 연막탄이었다. 유리는 서둘러 아나스타샤를 찾았다. 좀 전까지 눈에 잡혔던 공주는 연기 속에 사라지고 없었다.
“아나스타샤! 공주! 이런, 씨….”
놓쳤다. 유리는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나스타샤의 경호팀과 납치범 일행으로 보이는 괴한이 대치하고 있었다. 뉴욕 한복판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경찰차는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아나스타샤가 아수라장 속에 있었다. 수가 더 많은 납치범 쪽은 여유롭게 경호팀을 막았고 아나스타샤는 검은 승용차에 밀어 넣어졌다.
“아냐!”
부른다고 차 안에 탄 사람이 대답해주진 않겠지만, 반사적으로 이름이 튀어나왔다. 아나스타샤를 태운 승용차가 홀연히 떠나버렸다. 승용차를 엄호하던 오토바이 두 대가 따라가려 했다. 유리는 그 두 대중 한 대의 운전자를 총으로 쐈다. 올라탔던 사람이 맥없이 오토바이와 함께 쓰러졌다. 남은 한 대와 승용차는 이미 떠나버려서 후미등만 보였다.
유리가 쓰러진 오토바이 쪽으로 다가갔다. 숨이 붙어있는 남자가 헐떡이며 총을 꺼냈다. 그러나 유리가 더 빨랐다. 유리는 망설임 없이 남자의 가슴에 두 방을 더 쐈다. 헬멧을 쓴 남자의 몸이 축 늘어졌다. 유리는 시체를 발로 밀어 치워버리고 오토바이를 바로 세웠다.
내 걸 뺏으려 들어? 내가 있는데 그걸 채가? 내가…… 두고 볼 것 같아? 아나스타샤를 쫓는 건 당연했다. 그를 안전하게 데려오는 일까지 유리 몫이었다. 그러니 납치범들도 유리 몫이었다. 내 걸 뺏으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마. 유리는 분노를 태우며 오토바이 액셀을 돌렸다.
오토바이가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납치범은 육지 쪽으로 향했다. 항구로 가든 육지로 가든 상관없었다. 그곳이 지옥이라도 쫓아가 데려오리라! 눈앞에 아나스타샤를 태운 승용차가 아른거렸다. 그 뒤를 쫓는 오토바이 한 대가 유리를 발견하고는 총을 쏴대기 시작했다.
운 좋게도 총알은 오토바이 차체를 빗겨 갔다. 연속으로 울리는 총성에도 유리는 멀쩡했다. 이 새끼들은 어디를 조준하고 쏘는 거야? 실력도 개차반인 새끼들한테 아나스타샤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다. 유리는 핸들을 한 손으로 붙잡은 채 총을 겨눴다. 탕, 타앙! 2발이 더 빗겨나갔다.
유리는 가슴을 노렸다. 방아쇠를 당기자 총알에 맞은 남자가 비틀거리더니 오토바이와 함께 바닥에 널브러졌다. 장애물은 전부 치웠다. 이제 저 차에서 빌어먹을 아나스타샤만 꺼내오면 된다. 유리는 속력을 높였다. 클랙슨 소리와 사이렌 소리가 빌딩 숲에 어지러이 메아리쳤다.
차가 속력을 냈다. 유리도 지지 않았다. 뒷유리로 아나스타샤의 겁에 질린 얼굴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유리는 또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냐!”
목소리는 바람에 묻혀 아주 작게 들렸다. 아나스타샤의 애처로운 눈빛이 유리를 불렀다. 살려줘, 유리. 유리! 하고 외치는 눈동자를 보니 애가 탔다. 유리는 차 뒤로 바짝 붙었다. 손을 뻗으면 손잡이를 잡을 수 있을 거리였다. 뒷좌석 창문이 내려가더니 산탄총 머리가 튀어나왔다. 유리는 곧장 차 뒤쪽으로 숨었다.
유리다. 유리가 왔다! 아나스타샤는 유리 너머로 무섭게 쫓아오는 유리를 보며 안도했다. 퍼엉…. 그 순간 폭음이 울렸다.
“흐악!”
아나스타샤는 무릎 사이에 머리를 처박았다. 차가 터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미쳤어? 라포포르트 대가리를 날려버릴 생각이야?”
운전하던 남자가 총을 쏜 남자를 나무랐다. 라포포르트를 알고 있다…. 아나스타샤는 이들이 자신을 잡기 위해 여태 잠복했음을 깨달았다. 그냥 집에 가만히 있을걸! 후회했으나, 이미 늦었다. 유리잔도 제대로 못 던지는 아나스타샤가 달리는 차 안에서 탈출할 리는 만무했다. 뒤쫓아오는 유리가 유일한 탈출구이자 생명줄이었다.
“그럼 어쩌자고! 방금 안 쐈으면 우리가 죽었어!”
“목적지까지만 도착하면 돼. 거기서…. T가 도와준다고 했으니까.”
아나스타샤는 그들의 대화를 기억했다. T가 누구고 왜 이 남자들을 도와주는지 알아야 위험을 벗어날 수 있으니 말이다. 혹시, T가 날 죽이려는 살인마가 아닐까? 날 데려오라고 의뢰한 게 분명해! 아나스타샤는 상상력으로 퍼즐을 맞췄다.
이렇게 죽는구나. 아아! 앞서 죽은 다섯 명처럼 고환이 도려내진 채로 버려질 운명이다! 양옆에 사람이 타고, 조수석과 운전석에도 사람이 있다. 좁디좁은 승용차가 더 비좁게 느껴졌다. 다리를 움찔댈 때마다 양옆에 앉은 남자의 허벅지가 닿았다. 아나스타샤는 눈물 대신 침을 삼켰다. 말도 안 되는 현실을 맞닥뜨리니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차창 밖을 곁눈질했다. 금발을 휘날리며 질주하는 유리가 보였다.
남자가 다시 유리에게 산탄총을 겨눴다. 유리도 들고 있던 권총을 핸들을 붙잡은 팔 위에 지지한 채 총구를 들이밀었다. 유리의 눈에는 산탄총의 총구만 보였다.
“쏘지 말라니까!”
운전석의 남자가 고함쳤다. 산탄총을 든 남자는 말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펑…. 고막이 아릴 정도로 큰 폭발음이었다. 남자의 몸도 반동으로 들썩였다. 아나스타샤는 황급히 유리의 머리를 확인했다. 머리는 멀쩡히 몸뚱이 위에 붙어있었다. 운전자가 핸들을 유리 쪽으로 잡아 틀며 위협했다. 더 가까이 붙으면 오토바이가 쓰러질 것 같았다.
“아, 안 돼.”
아나스타샤는 가까워졌다 멀어지는 유리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뭐가 안 돼? 하하, 아나스타샤! 넌 우리가 가졌어!”
우유 짜듯이 네 씨를 짜주마! 산탄총을 든 남자가 비아냥거렸다. 그 혓바닥이 목숨을 앗아가는 줄도 모르고 겁먹은 아나스타샤를 보며 즐거웠다. 아나스타샤는 남자의 얼굴을 똑똑히 봤다. 그는 다시 유리를 조준했으나, 다음번 총성은 차 밖에서 들렸다. 산탄총이 아닌 권총이었다.
산탄총을 든 남자는 신음도 흘리지 못했다. 그는 가쁜 숨을 쉬며 그대로 아나스타샤 쪽으로 무너졌다. 가운데 앉아있던 아나스타샤는 쓰러지는 남자를 품에 안아야 했다. 남자는 얼마 가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힘이 빠진 사람의 몸은 소름 끼치게 무거웠다. 아나스타샤는 늘어진 남자를 볼 수가 없었다.
“제길! 해리를 죽였어!”
아나스타샤의 뒤에 앉아있던 남자가 비명 같은 고함을 질렀다. 아나스타샤는 안은 시체를 옆으로 밀 용기도, 밀어놓고 늘어진 걸 볼 용기도 없었다. 그렇다고 안고 있기도 싫었다. 어, 어떻게 해야 해? 해답은 창밖에 보이는, 오토바이를 탄 채 여전히 총구를 겨눈 유리에게 있었다.
“유, 유리이!”
이름을 부른다고 시체가 사라지고 차가 멈추는 건 아니지만, 제일 먼저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제야 눈물이 찔끔 흘렀다. 조수석에 앉은 남자가 권총을 꺼내 2발을 연속으로 쐈다. 거기다가 차량이 유리를 덮칠 듯 가까이 붙었다.
“유리!”
이러다 유리가 바퀴에 깔려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시체를 팽개치고 창에 붙었다. 태풍처럼 거센 바람에서 화약 냄새가 났다. 손을 뻗으면 어찌어찌 유리가 탄 오토바이에 같이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딜 가려고! 가만히 못 있어?”
아나스타샤의 뒤에 앉아있던 남자가 그의 목덜미를 붙잡아 당겼다. 세상은 생각대로 돌아가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끌려가면서도 유리를 바라봤다. 믿을 건, 유리뿐이었다.
“유리!”
구해달란 말도, 살려달란 말도 머리가 굳었는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서 유리의 이름만을 애타게 불렀다.
간절한 바람과 달리 차는 유리를 들이받았다. 오토바이가 휘청거렸다. 넘어지면 안 돼, 안 돼! 아나스타샤는 유리가 무사히 자신을 구하러 오길 기도했다. 이대로 가다간 오토바이가 쓰러질 것 같아 유리는 교차로에서 핸들을 꺾었다. 멀어지는 유리를 보며, 아나스타샤는 코를 훌쩍였다. 시체와 납치범 사이에 낀 아나스타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다.
차는 페리 선착장으로 향했다. 겁에 질린 아나스타샤도 이들이 어떻게 뉴욕을 벗어날지 눈치챘다. 터널도 다리도 지나쳤으니 남은 경로는 바다뿐이었다. 바다에는 카메라도 없는데 누가 날 찾을 수 있을까? 해상에서 배라도 바꿔 타면 영영 못 찾을 텐데!
“걱정 말라고 아나스타샤, 말만 잘 들으면 집에 돌려보내 줄 테니까.”
조수석에 앉은 남자가 이죽댔다. 아나스타샤의 씨는 얼마나 하지? 여태 풀린 적이 한 번도 없잖아. 그들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도 손에 넣은 것처럼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아나스타샤의 정자를 팔아치울 궁리를 해댔다.
“정자가 필요하면 짜가도 좋아. 그러니까, 난, 난 돌려보내 줘.”
그깟 정자가 뭐라고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아니, 그깟 정자를 원해서 다행인가. 아나스타샤는 와들와들 떨면서도 협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살아남은 그들은 킬킬 웃기만 했다. 비웃음이다. 이들은 날 살려줄 생각이 없다. 살려준다 한들 팔려 가겠지.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미래를 직감했다.
“네가 잘한다면 말이야.”
유리. 유리! 살려줘! 어디 있어! 제길! 그 악명 높은 라포포르트면 뭐해! 내가 납치됐는데! 위험할 것 같으니까 도망쳤잖아! 미워, 유리. 유리…… 날 두고 가면 어떡해…. 억울함과 공포에 눈물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꼬리를 타고 흘렀다.
“해리는 어쩌지?”
“강에 던져버려야지.”
걸리지 않겠어? 남은 세 명이 죽은 남자를 두고 속닥거렸다.
“일단 배에 태운 다음에… 이런 씨발!”
운전하던 남자가 느긋하게 말하다 말고 욕을 뱉었다. 아나스타샤의 시선이 저절로 앞을 향했다. 눈앞에 차로를 역주행하는 오토바이 한 대가 보였다. 정장을 입고 헬멧도 없이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은 다름 아닌 유리 라포포르트였다. 유리! 아나스타샤는 속으로 그의 이름을 외쳤다.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찔끔찔끔 흐르던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승용차는 전력 질주를 택했다. 유리를 그대로 밀어버릴 작정인 듯했다. 안 돼! 아나스타샤는 열심히 유리를 걱정했다. 괜히 유리를 돕겠다고 운전하는 괴한을 방해했다간 옆에 누운 시체의 친구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유리도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차와 오토바이가 부딪치면 죽는 쪽은 오토바이였다. 보닛과 오토바이의 앞바퀴가 만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곧 닥칠 끔찍한 상황을 눈 뜨고 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오토바이가 짓뭉개지는 소리 대신 납치범의 탄식만 들렸다. 아나스타샤는 실눈을 떠 앞을 바라봤다. 다행히 박살 난 오토바이의 잔해는 보이지 않았다. 유리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다. 도로뿐이었다. 곧이어 차체 위가 찌그러지며 둔탁한 소리가 냈다. 차량 뒤편으로 오토바이가 우당탕, 하고 떨어졌다.
어, 어떻게… 한 거야? 유리는 어디 갔지?
“쏴!”
운전석의 남자가 소리쳤고 아나스타샤의 옆자리에 있던 남자가 차량 지붕을 향해 총을 갈겼다. 바로 옆에서 총성과 화약 냄새가 퍼졌다. 아나스타샤는 시체가 있는 쪽으로 피하지도 못하고 가슴을 양팔로 끌어안은 채 몸을 떨었다. 방금 지붕 위에 떨어진 게 설마, 유리였나?
아나스타샤는 구멍이 나고 찌그러진 천장을 올려다봤다. 천장에 난 구멍은 너무 작아서 그 위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었다. 옆에 앉은 남자가 천장을 향해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새로운 구멍이, 울리는 총성만큼 더 생겼다. 이, 이 남자를 밀치면 유리가 무사하지 않을까? 밀, 밀어도 되나? 아나스타샤는 천장과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생각만 할 뿐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빌어먹을!”
운전대를 잡은 남자가 욕을 지껄이며 핸들을 거칠게 꺾었다. 아나스타샤의 시선이 자연스레 창문으로 향했다. 유리는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차 위에 있나 보다. 다행이다…. 그런데 어떻게 들어올 생각이지? 아나스타샤는 납치범의 동태를 살폈다. 운전자는 유리를 떨어트리려는 데에 혈안이 되어 거칠게 차를 몰았고 남은 둘도 천장을 향해 총을 겨눴다.
기회다. 날 신경 쓰는 이가 한 명도 없다. 바닥이 난 용기를 쥐어 짜낸 아나스타샤는 차가 오른쪽으로 급하게 꺾일 때 일부러 시체 쪽으로 몸을 붙였다. 고깃덩어리가 된 남자 위에 드러누운 아나스타샤는 역겨운 촉감을 참으며 손을 뻗어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차 문이 덜컹, 소리를 내며 열렸다. 빠르게 지나가는 도로가 눈앞에 보였다. 여기서 떨어지면 얼굴이 다 갈리고 말 거야. 겁에 질린 아나스타샤는 안쪽으로 엉덩이를 붙였다.
“아나스타샤! 이 새끼! 무슨 짓을 한 거야!”
놀란 남자가 아나스타샤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차가 왼쪽으로 돌자 문이 닫히려 했다. 아! 이럴 수가, 어떻게 열어둔 문인데! 갑자기 문이 열린다고 유리가 냉큼 들어오진 않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다른 방법보다는 안전하지 않은가! 아나스타샤는 멱을 잡히면서도 닫히는 문에 눈을 떼지 못했다.
하늘에서 발이 내려왔다. 깔끔한 구둣발이 닫히는 문틈을 벌렸다. 긴 다리가 내려와 차 안으로 들어왔다. 아나스타샤의 눈에는 그 장면이 느리게 보였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천사가 자신을 구해주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유리의 얼굴이 보였다. 바람을 맞아 산발이 된 밀 빛에 가까운 금발과 날이 선 회색 눈동자는 틀림없이 유리였다. 무심하고 뚱한 표정은 경직되어 살벌하게 보였다. 차 안으로 들어온 거대한 곰이 벌집을 뺏어간 죄를 물었다.
유리…! 아나스타샤가 그의 이름을 반갑게 외치기 직전이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힐끔 쳐다볼 뿐 눈인사나 웃음도 흘리지 않고 그대로 주먹을 뻗어 아나스타샤의 뒤를 노렸다.
“커헉!”
반가운 인사보다 신음이 먼저 터져 나왔다. 붙잡혔던 목덜미가 풀어지자 숨쉬기가 편해졌다. 아나스타샤는 뒤를 돌아봤다. 고작 주먹 한 방에 남자는 눈을 까뒤집고 축 늘어졌다. 맨손으로, 그것도 한 방에 사람을 눕히다니! 놀랍고 공포스러운 힘이었다.
“이런 제길!”
조수석에 앉은 남자가 황급히 총구를 아래로 내려 유리를 조준했다. 그는 총구가 자신을 향하고 있는데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발목에 차고 있던 작은 칼을 잽싸게 빼내 조수석 남자에게 휘둘렀다.
“읏!”
남자가 놀라 몸을 뒤로 뺐다. 총구는 자연스럽게 바닥을 향했다. 그대로 목을 노려 찌르면 좋겠지만, 아나스타샤를 생각해 눈을 노렸다. 유리가 몸을 앞으로 내던지며 남자의 눈에 칼을 꽂았다. 과일을 찍어 먹으면 좋을 법하게 생긴 작은 칼이 눈알에 박혔다.
“크아악!”
총은 시트에 떨어졌다. 운전대를 잡은 남자가 품에서 칼을 빼 들어 유리를 위협했다. 유리는 조수석 남자가 버둥거리는 사이 운전석으로 몸을 돌렸다. 먹잇감을 노려보는 듯한 눈빛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씨발!”
겁에 질린 사내의 목소리와, 그런 사내의 얼굴로 곧장 주먹을 내뻗는 유리와, 흔들리는 차체가 아나스타샤를 위협했다. 그는 눈을 감고 몸을 수그렸다. 그저 살고 싶었다. 사지가 멀쩡한 채로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뼈마디가 굵은 고기를 패는 소리가 연거푸 들렸다. 아나스타샤는 애써 ‘고기’라 생각했다. 고깃덩어리가 창문에 부딪혔는지 유리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곧 잠잠해졌다. 놀이기구처럼 빙글빙글 돌던 차도 부드럽게 달렸다. 다 끝났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무사히 살아남았음을 깨달았음에도 차마 눈을 떠 아수라장을 마주 볼 용기가 없었다.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는 반사적으로 눈을 뜨고 운전석을 바라봤다. 유리가 앉아있었다. 그, 그럼 원래 앉아있던 사람은…. 생각과 동시에 조수석으로 눈길이 갔다. 시체인지, 널브러진 건지. 좀 전까지만 해도 총을 쏘던 사람 둘이 짐처럼 처박혀있었다.
유리는 백미러로 아나스타샤의 상태를 살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은 곧 눈사태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살아있으니 됐다. 그는 아나스타샤의 칭얼거림을 들을 각오를 하고 물었다.
“괜찮습니까.”
“아, 어…. 사, 산 것 같지? 너는? 괜찮아?”
“……예, 뭐.”
납치된 것도 모자라 뉴욕 한복판에서 추격전을 벌였는데 괜찮겠냐고 따질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차분한 태도에 유리는 한참 눈을 굴리다 대답했다. 당황할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그는 의외의 모습에 놀라며 백미러로 아나스타샤를 살폈다. 겁은 먹었어도 적응한 눈치였다. 유리는 허벅지에 힘을 줬다.
적응한 아나스타샤는 더 이상 겁쟁이가 아니다. 그렇다고 갑자기 무서워하지 않거나 눈물이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었다. 남 뒤에 숨지 않고 닥친 일을 마주 보고 설 자세가 된 것이다. 입에도 침이 고였다. 유리는 이 미세한 변화가 마음에 들었다. 사슴이 호숫가에 나와 물을 마시는 것만큼 무해한 파동이었으나 보기는 좋았다.
“……너는, 네가 무슨 영화 주인공이라도 되는 줄 알아? 오토바이를 타고 위험하게 운전하면 어떡해. 죽고 싶어서 그래?”
겨우 진정한 아나스타샤가 따지듯이 얘기했다. 유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쫓은 건 할 말이 없었기에 대꾸하지 않았다. 거기서 아나스타샤를 놓쳤더라도 경찰이 쫓을 것이고 경찰이 쫓지 못했다면 개를 풀어 찾으면 됐다. 방법이야 많았지만, 그 순간에는 공주를 쫓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건 <다이하드>나 <미션 임파서블>이 아니야, 유리. 현실이라고.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란 말이야! 네가 날 쫓다가 죽으면 라포포르트 씨를 볼 면목이 없잖아.”
유리는 침묵했다. 일방적인 대화를 끊어낼 방법이 있겠지만 유리는 알지 못했다. 아나스타샤가 제풀에 지쳐 입을 다물길 기다릴 수밖에. 시체를 옆에 두고 조잘조잘 떠들 사람은 드물었다. 아나스타샤도 마찬가지였다. 양옆과 조수석에 쌓인 사람이 신경 쓰여 미칠 노릇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고 싶은 마음에 운전석 시트를 손으로 붙잡고 몸을 앞으로 빼 앉았다.
“제대로 앉으세요.”
“싫어. 죽, 죽은 사람이랑 어떻게 엉덩이를 맞대? 싫어!”
“이상하네. 한 놈은 안 죽었을 텐데.”
“안 죽었어? 일어나서 날 협박하면 어떡해?”
아나스타샤가 기함하며 코가 내려앉은 남자를 돌아봤다. 죽은 줄 알았던 남자의 가슴이 미약하게 들썩였다. 다행히 죽지 않았다. 아무리 범죄자라 한들 죽어 마땅한 사람은 없다. 아나스타샤는 운전석을 쳐다봤다. 유리의 양손은 핸들 위에 있었다. 만약, 이 남자가 깨어나서 날 덮치면… 유리가 날 도울 수 있을까? 유리도 다치는 거 아니야?
불길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나스타샤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시체 꼴을 한 남자를 더듬는 건 죽을 만큼 싫지만, 죽는 것보다 나았다. 아나스타샤는 남자의 재킷 안과 주머니를 뒤졌다.
“윽…… 흑…….”
체온에 데워진 옷은 따뜻했고 손에 밀리는 살덩이는 말랑했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짐승을 만지는 기분이었다. 내장을 만졌을 때처럼 끔찍한 감촉에 아나스타샤는 이를 앙다물었으나 이사이로 나오는 소리까지 참지는 못했다.
“뭐합니까.”
“일어나서 위협하면 어떡해. 총, 칼이 있으면 미리 뺏어야지.”
유리는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백미러에 비친 유리의 눈은 반달 모양으로 아름답게 휘었다. 겁쟁이 아나스타샤가 현실을 받아들인 순간을 목격하는 순간이다. 영상이나 오디오로 남기질 못해 아쉬울 따름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대변 속에서 보석을 찾는 졸부처럼 헛구역질해대며 기절한 남자의 몸에서 권총과 잭나이프를 뺏었다. 오른손에 칼을, 왼손에 총을 쥔 아나스타샤는 왼손을 유리에게 내밀었다. 권총 손잡이가 유리의 어깨에 닿았다.
총만 넘어와서 의아했으나, 유리는 권총을 건네받은 뒤 안전핀을 풀고 핸들을 잡았다. 뭔가를 발견한 아나스타샤가 머리를 어깨 위로 내밀었다. 핸들 위에 올린 손의 마디가 빨갛게 달아오르고 까져 피가 배어 나온 부분도 있었다.
“손이 다 까졌잖아.”
안타까운 목소리에 유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맨손으로 싸웠으니 당연했다. 아나스타샤가 지적하니 손가락 마디가 쑤시는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괜찮긴! 돌아가서 치료하자. 알았지?”
“예.”
“알았지?”하고 물어보는 아나스타샤는 곧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아슬아슬해서, 유리는 고개까지 주억이며 대답했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시체도 같이 흔들렸다. 아나스타샤는 아까부터 허벅지를 툭툭 쳐대는 다리를 견디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건지, 유리는 다리를 건너 내륙으로 들어온 후에도 차를 멈추지 않았다. 시체와 함께하는 드라이브는 사람 내장이 담긴 소포를 받는 일만큼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조급한 마음에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이거 처리하러.”
‘이거’라 하면 널브러진 시체와 시체 꼴인 남자들을 말하는 거겠지. 공주는 차 안을 힐끔거렸다. 경찰서에 가는 건 아니겠고……. 아나스타샤는 애처로운 눈으로 유리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어, 어디 묻어버리게?”
“예에, 뭐. 비슷하네요.”
“……괜찮은 곳 있어?”
유리는 차 속도를 늦추며 아나스타샤를 돌아봤다. 하얗게 질린 얼굴과 눈물에 젖어 촉촉한 눈동자가 최후통첩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땅한 자리가 없으면 대신 알아봐 줄 기세였다. 유리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생각 중입니다. 적당한 곳 압니까?”
“……미시간에 사둔 땅이 있어.”
비장한 목소리였다. 유리는 입술을 꾹 다물어 웃음을 참았다. 원한다면 사유지에 시체를 숨겨주겠다는 소리다. 유리는 달콤한 제안에 핸들을 움켜쥐었다. 아나스타샤를 공범으로 만들 수 있다는 유혹이 솟구쳤다. 이대로 미시간까지 멈추지 않고 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거기도 나쁘지 않겠군요.”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기상천외한 제안에 흥미를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침을 삼켰다. 여기서 미시간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가는 도중에 들키진 않는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니 걱정이 어깨를 묵직하게 짓눌렀다. 그렇지만 유리가 경찰에 잡히면 내 경호를 못 하게 돼. 다비드가 붙여준 경호팀도 유리처럼 쫓아오지는 못했다. 만약 유리가 없을 때 이런 일이 또 생기면… 그때는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유리가 휴대전화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보스. 여자가 답하자 유리는 인사도 않고 물었다.
“오고 있어?”
[그럼요. 어디로 갈까요?]
“뉴욕항으로 가는 중이야. GCT로 와.”
[예, 보스.]
여자가 답했다. 용건을 끝낸 유리는 휴대전화를 주머니 안에 넣었다. 아나스타샤는 여전히 숨을 죽인 채 유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미시간은 나중에 가도 되겠네요.”
“……방법이 생겼어?”
“예.”
유리가 턱을 추켜들며 대답했다. 아나스타샤도 되찾았고, 그에게 공범이 돼주겠다는 고백도 받고, 유능한 부하도 뽐내니 기분이 좋았다. 아나스타샤는 운전석 시트에 이마를 박은 채 한숨을 쉬었다. 비정상적인 상황이 연이어 닥치니 혼란스러웠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그러기로 약속한 것처럼 경찰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차는 순조롭게 항구로 향했다.
* * *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아나스타샤가 차 밖으로 뛰쳐나왔다. 시체를 넘어 나오는 도중에 무릎에 남자 다리가 걸려 시체가 밖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흐악!”
아나스타샤가 놀라 소리를 지르며 펄쩍펄쩍 뛰었다. 유리는 담배에 불을 붙이다 말고 뒷좌석으로 걸어갔다. 가슴에 총상을 입은 시체가 고꾸라져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멀찍이 서서 유리와 시체를 쳐다보고 있었다. 호감이 1시간을 못 간다. 유리는 담배를 문 채 떨어진 시체를 한 손으로 잡아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손길이 어찌나 무심하고 단순한지 커다란 솜 인형을 주워 담는 것처럼 보였다. 도망갔던 아나스타샤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유리는 뒷문을 닫고 아나스타샤를 응시했다. 비릿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역한 피 냄새와 화약 냄새를 갖고 달아났다.
유리는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제야 숨 좀 돌리겠네. 연기를 깊게 빨아 마시고 뱉었다. 공주를 뺏겼다는 짜증이 연기와 함께 흩어졌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옆에 서서 담배 피우는 모습을 지켜봤다. 필터담배는 입도 안 댔는데 오늘따라 매캐한 연기가 목구멍을 따갑게 긁어댔다.
눈치 빠른 유리가 담뱃갑을 꺼내 아나스타샤에게 내밀었다. 아나스타샤는 갑 밖으로 튀어나온 담배를 떨리는 손으로 집었다. 입에 필터를 물자 유리가 불을 대줬다. 아나스타샤는 마약쟁이처럼 손을 떨면서 떨림 없는 불에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고마워, 유리.”
아나스타샤는 담배를 빨기 전 빠트리지 않고 인사했다. 유리는 고개를 돌리며 주머니에 라이터를 집어넣었다. 둘은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연기가 내뱉은 한숨을 따라 뿜어졌다. 담배 연기 사이로 바다 냄새가 났다. 아나스타샤는 차체에 기대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살았다. 긴장이 풀렸는지 손에도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서 손가락 사이에 끼워뒀던 담배가 바닥에 떨어졌다.
“앗.”
아나스타샤가 탄식을 흘렸다. 휑한 도로를 응시하던 유리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떨어진 담배를 들고 우물쭈물하는 공주가 있었다. 유리는 그를 따라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아나스타샤는 담배 끝을 손가락으로 튕겨 불씨를 꺼트렸다.
“미안, 떨어트렸네.”
미안할 일은 아닌지라 유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무릎에 손을 올린 채 떨었다. 담배를 하나 더 줘야 할까. 아니면, 손을 잡아야 할까. 유리의 시선은 매끈한 조약돌을 달아놓은 것처럼 가지런한 손끝에 가 있었다.
“내 씨를 노렸어. 날 정자 거래소로 보내려고 했다고.”
아나스타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널 알고 있었어. ‘T’라는 사람이 자기를 도와준다고도 했어.”
라포포르트라고 소문이 났으니 안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T는 누구인가? 오시프? 오시프가 아니면, 그의 부하?
“저 중에 누가?”
“우, 운전하던 사람이… T가 연쇄살인 범인이 아닐까?”
“그건 확인해 봐야죠. 마야가 오면 일단 집으로 돌아갑시다.”
추리는 유리의 영역이 아니었다. 범인을 찾으면 좋겠지만, 아나스타샤를 달고 추적하기는 쉽지 않았다. 유능한 부하에게 맡기는 수밖에. 유리가 연기를 내뿜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까 전화한 여자?”
“예.”
여자 얘기에 아나스타샤가 호기심을 보였다. 알파의 수하는 알파나 베타가 대부분이었다. 설마, 그걸 눈치채고? 유리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나스타샤가 유혹하면 마야는 거리낌 없이 받아줄 여자였다.
“같이 일한 지는 얼마나 됐어?”
“5년밖에 안 됐습니다.”
“알파야?”
“……예.”
유리는 눈썹을 치켜뜨며 불쾌감을 드러내면서도 질문에 착실히 대답했다. 으음. 그렇구나. 아나스타샤가 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결혼했습니다. 애는 없지만. ……각인한 사람이 있죠.”
“그래?”
아나스타샤는 좋은 정보를 얻었다는 듯이 치아를 보이며 웃었다. 아차. 아차…. 유리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예에. 하고 대꾸했다. 조바심에 안 해도 될 말까지 해버렸다. 결혼했으니 건들지 말라고 경고하고 싶었나? 담배를 너무 피웠는지 속이 갑갑했다.
“뭘 걱정하는 거야. 설마, 내가 네 부하를 넘볼까 봐?”
“…….”
침묵은 긍정이었다. 아나스타샤가 킥킥대며 웃었다.
“유리. 나는 부하 직원을 건드리는 못된 짓은 안 해. 하물며 날 구해준 네 부하에게 흑심을 품을 리가 있나.”
믿기 어려웠지만, 믿을 수밖에. 유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나스타샤는 뚱한 유리의 얼굴을 응시하며 이탈리아어로 중얼거렸다.
“흑심이라면 너한테 품었지. 다른 게 눈에 들어오겠어?”
영어와 다른 악센트와 톤이, 눈물 많은 겁쟁이를 카사노바로 탈바꿈시켰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말을 곱씹었다. 눈앞에 대고 뻔뻔스럽게 얘기하는 걸 보면 이탈리아어를 못 알아들으리라 생각하는 것 같은데……. 카푸치노를 마실 때도 알아들었는데, 그 부분만 기억이 증발했나. 본인이 이탈리아어를 했고 상대가 알아들었다는 자각을 못 한 걸지도.
“알아들으니까 수작 부릴 거면 토끼 같은 연인에게 하시죠.”
“으응? 알아들었어?”
“예. 따먹을 테니까 각오하라고 했잖아.”
“아니야! 누구한테 배운 거야? 다 틀렸어!”
“비슷한 말 아닌가?”
“틀렸어. 엉터리야. 엉터리.”
아나스타샤가 허공에 손을 휘젓고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유리는 픽, 웃었다. 여전히 손이 떨리고 시체처럼 낯짝이 칙칙했지만, 입 놀리는 걸 보니 어르고 달래며 집에 데려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유리는 일부러 물고 늘어지며 아나스타샤를 놀렸다. 시체가 든 차에 기대고 앉아 애들처럼 투덕거리는 꼴이 기괴했지만 말다툼하는 당사자는 문 뒤에 뭐가 들었는지 까맣게 잊은 듯했다.
창고와 컨테이너가 늘어선 항구에서 유리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고 왔는지 하얀 벤틀리가 위풍당당하게 들어왔다. 차를 발견한 유리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검은 승용차 뒤에 선 벤틀리에서 청바지를 입은 여자가 내렸다.
“보스! 차 가지고 왔어요.”
여자가 쾌활하게 웃으며 유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나스타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야는 추레한 몰골을 해도 청초하게 빛나는 아나스타샤를 힐끔거렸다. 사진은 아나스타샤의 미모를 절반도 담지 못했다.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낫잖아. 왜 보스가 목매는지 알겠다, 알겠어. 마야가 할 일을 까맣게 잊고 아나스타샤만 쳐다보자, 유리가 그사이에 끼어들었다.
심통 난 얼굴을 한 유리가 권총을 건넸다. 마야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총을 받았다. 차에 든 짐과 함께 처리할 물건이었다.
“뒤에 한 놈 살아있으니까 심문해. T라는 놈도 조사해보고.”
“네. 맡겨주세요.”
믿음직스럽다. 마야에게 맡겼으니 1~2시간 내로 배후를 찾아낼 것이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에게 손을 내밀었다. 트렁크 근처에 서 있던 공주는 내민 손을 붙잡았다. 잡으라고 내민 건 아니었으나, 빼진 않았다. 그저 마야를 한 번 쳐다볼 뿐이었다. 마야는 아나스타샤의 얼굴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진으로 다 담을 수 없는 미모가 눈앞에 있으니 당연했다.
견뎌야 할 시선이었다. 아나스타샤가 잘난 걸 어쩌겠는가. 유리는 우쭐거리며 벤틀리로 걸음을 옮겼다. 아나스타샤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마야가 대뜸 유리에게 물었다.
“아, 어떻게 처리할까요?”
아나스타샤 때문에 정신만 놓은 게 아니라 지능도 떨어졌나 보다. 유리는 한심한 눈으로 마야를 응시했다. 눈으로 욕을 먹는데도 그녀의 얼굴은 뜻을 이룬 성군처럼 빛났다. 여우 같으니. 아나스타샤 곁에 가까이 두면 안 되겠어. 유리는 생각했다.
“알아서 해.”
신경질적인 대답에도 마야는 웃으며 네에, 하고 대답했다. 다신 아나스타샤를 보여주지 않겠어. 그림자도 말이다! 유리는 심통을 부리며 차에 올라탔다. 뒷좌석에는 쇼핑백이 가득했다. 백화점에서 산 옷과 신발만 빼고는 무사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차를 몰았다.
아나스타샤의 시선은 자신을 납치한 승용차에 가 있었다. 유리의 부하라던 여자는 벤틀리를향해 손을 가볍게 흔들어주고는 시체가 든 차에 올라탔다. 후미등에 빨간 불이 들어오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알아서 어떻게 처리할까? 산 남자는 한 명뿐인가. 정말 살인마가 날 납치하라고 시켰을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밀린 미팅도 나가야 하고 파티도 참석해 인맥을 꾸려야 하는데 목숨이 위험하니 사업 계획을 제대로 굴릴 수가 없었다. 누가 날 이렇게 미워하는 걸까. 내가 하는 짓이 꼴 보기 싫으면 면전에 대고 욕하면 될 것을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사람을 시켜 납치하다니. 아나스타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항구를 빠져나올 때까지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수다스러운 사람이 조용하니 적응이 안 된다. 보다 못한 유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까.”
정면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돌려 유리를 응시했다. 풀이 죽은 모습에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맛있는 젤라토 가게는 어디냐고 묻는 허술한 화술에 풀릴 감정이 아닌 것 같았다. 집으로 가는 게 낫겠다. 다비드 시모나로티라면 아나스타샤의 기분을 풀어줄 수 있겠지. 화술은 부족해도 감은 좋은 유리가 라디오를 틀었다.
DJ가 오늘 날씨를 전했다. 오늘도 화창한 날씨가 되겠습니다. 평화로운 평일 오후네요. 이번에 들을 곡은 King Harvest의 입니다……. DJ의 목소리 뒤로 통통 튀는 멜로디가 입혀졌다. 평화로운 오후에 잘 어울리는 노래였다.
* * *
아나스타샤의 납치 소식에 발칵 뒤집힌 시모나로티 저택은 아나스타샤를 무사히 구출했다는 소식에도 안심하지 못했는지 집안 식구들 모두가 현관 밖에 나와 있었다. 고용인들도 손을 가슴께에 모은 채였다. 다비드 대신 라이엇이 마중 나와 있었다. 차가 멈추자 라이엇이 계단을 내려와 조수석 문을 열어줬다.
“아냐! 괜찮은 거야?”
“라이엇! 라이엇……! 아니, 안 괜찮아. 죽다 살아났어. 응?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삭스에서 나오려는데 웬 남자가 옆구리에 총을 대고, 유리가 총을 쏘니까 총을 쏘고 또 칼을 옆구리에 대고 연기가 나고, 납치되고…….”
아나스타샤가 두서없이 상황을 설명했다. 주절대던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 축축해졌고, 아나스타샤는 울음을 터트렸다. 얼마나 무서웠는데! 칭얼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라이엇이 아나스타샤를 끌어안고 등을 다독였다.
“집에 왔어. 이제 괜찮아. 경호팀을 더 늘려야겠어.”
“응……. 흑. 형은? 괜찮아?”
“그럼. 천사들과 같이 있어.”
라이엇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스타샤는 양손으로 눈가와 볼을 벅벅 문질러 닦았다. 유리는 기어를 느슨하게 붙잡은 채 아나스타샤와 라이엇의 눈물겨운 상봉을 지켜봤다. 아나스타샤는 라이엇이 제 사촌 형과 결혼할 수 있도록 도울 만큼 그와 막역한 사이였고 결국 그 사촌 형과 결혼을 했으니 둘은 한 가족이라는 사실에 반박할 거리도 없었으나, 꼴 보기 싫은 건 싫은 거였다.
“일단 씻고 형한테 갈게.”
“알았어.”
라이엇이 아나스타샤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뽀뽀까지 해? 유리는 눈을 가늘게 떠 들어가는 라이엇을 노려봤다. 불행히도 아나스타샤는 질투 어린 유리의 눈빛을 보지 못하고 차에서 내렸다. 유리도 그를 따라 내렸다. 현관에 기다리던 고용인들이 작은 도련님이 무사히 돌아온 것에 기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들은 작은 도련님을 붙잡고 걱정했다며 안부를 전하고, 유리를 붙잡고 고맙다며 인사했다. 돌발 상황이 벌어지면 아나스타샤를 사수하라고 고용됐는데 감사 인사를 받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유리는 그들의 발치를 보며 인사를 받았다.
아나스타샤는 눈물을 닦으며 계단을 올랐다. 유리는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오늘은 아무래도 욕실 입구를 지키고 있어야 아나스타샤가 안심하고 씻을 것 같았다. 2층에 올라와 한없이 긴 복도를 걸을 때였다. 재킷 주머니에 넣어뒀던 휴대전화가 울렸다. 유리는 엉망으로 뻗친 아나스타샤의 머리카락을 힐끔거리며 휴대전화를 꺼냈다. 레이즈빗의 전화였다. 마이애미에 있을 녀석이 전화를 왜 했지? 일리야가 아닌 내게 보고할 만큼 일인가.
“아나스타샤 씨.”
유리가 부르자, 아나스타샤가 돌아봤다. 울어서 붉어진 눈매와 초췌해진 몰골이 놀랍도록 어울렸다. 좀 더 엉망이어도 좋았을 법했다. 흠 하나 없는 보석이나 풍파를 겪은 돌이나 유리에게는 똑같은 보물이니 말이다.
“혼자 씻을 수 있겠죠.”
유리는 전화가 걸려 온 액정을 보여줬다. 아나스타샤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괜찮아. 천장에서 사람이 떨어져도 샤워기 헤드로 때릴 수 있을 것 같아.”
샤워기 헤드로 괴한을 제압하는 아나스타샤를 상상했다. 메두사의 머리를 잘라낸 헤라클레스가 생각나는 건 착각인가. 유리는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아나스타샤가 가볍게 손을 휘저으며 얼른 전화를 받으라는 듯 신호했다.
“대신 얼른 돌아와야 해.”
“예.”
유리는 가볍게 묵례한 뒤 전화를 받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레이즈빗은 유리가 무슨 일이냐고 입을 떼기도 전에 다급하게 “보스!”하고 유리를 불렀다.
“뭐야?”
[시모나로티 씨께 대문 좀 열어달라고 말씀해줄 수 있을까요?]
“그게 뭔…… 너 여기 왔어?”
[예! 당연하죠. 저 뉴욕 가본 적 한 번도 없단 말이에요. 저만 두고 갈 생각이었어요?]
“시끄러워.”
[저, 대문 앞이에요. 택시 타고 왔어요. 마야가 보냈습니다. 주동자가 누군지도 다 찾았는데…….]
“……알았어.”
택시를 타고 여길 와? 아나스타샤가 있는 곳에 택시를? 택시가 시모나로티의 저택에 들어오는 건 끔찍했지만, 그렇다고 대문까지 마중 갈 수도 없는 일이다. 유리는 전화를 끊고 대문을 열어줄 고용인을 찾았다. 때마침 메이드가 복도를 지나갔고, 유리는 그를 붙잡아 문을 열어달라 했다.
손 많이 가는 놈 같으니. 다른 곳으로 보내버리든가 해야지. 유리는 실행에 옮기지 않을 욕을 하며 현관에 나와 레이즈빗을 기다렸다. 저택을 향해 서행으로 다가오는 택시 한 대가 보였다. 노란 칠이 다 벗겨진 낡아빠진 택시였다.
택시가 현관 앞에 멈췄다. 레이즈빗이 허둥지둥 돈을 내고 내렸다. 마이애미에서 뉴욕으로 이사할 생각인지 등에는 지퍼가 찢어질 정도로 짐을 채운 등산 가방을 멨고 손에는 노트북을 들고 있었다. 테가 두꺼운 안경에 넥타이는커녕 셔츠는 단추도 다 잠그지 않았고 재킷은 팔뚝에 걸친 몰골이었다. 저런 꼴로 찾아올 생각이 들었군. 유리는 레이즈빗이 올라오면 한 소리 할 생각을 하며 그를 내려다봤다.
“보스!”
눈치 없는 레이즈빗은 유리를 보며 활짝 웃었다. 생전 처음 뉴욕에 왔으며 궁전 같은 저택에 들어오는 것도 처음이었다. 부자들은 이런 곳에 사는구나. 레이즈빗은 웅장한 시모나로티의 저택 외관을 바삐 훑어보곤 유리에게 다가갔다. 그가 계단을 올라올 때마다 거북이 등껍질 같은 가방이 달랑거렸다.
레이즈빗이 유리 앞에 섰다. 키가 유리의 가슴까지 밖에 오지 않아 유리는 그가 현관 계단 아래에 있을 때와 같은 높이의 시선으로 응시했다.
“집도 정말 좋네요. 여기서 사는 거죠? 이야……. 궁전 같아요. 저희도 이런 곳에서 살아요.”
“레이즈빗.”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족에 유리가 이름을 불렀다. 레이즈빗이 다급하게 노트북을 펼치며 본론을 꺼냈다.
“아, 그럼요! 다 찾았죠. 누가 아나스타샤를 노렸는지 말이에요. 운전면허가 있어서 쉽게 조회했어요. 위조도 아니더라고요? 운전석에 있던 사람이 주동자였어요. 이름은 케빈 스웬터. 블랙베리의 행동대장입니다.”
‘블랙베리’라니. 그게 혹시 갱단 이름인가. 유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블랙베리란 갱단을 만난 적이 있는지 생각했지만, ‘스트로베리’만 떠올랐다. 신생이거나 규모가 작은 갱단 같은데, 아나스타샤를 왜 노렸을까. 연결이 되지 않았다.
“명단에 이름이 올라간 갱단이에요. 갱단 전원이요. 인원은 몇 안 됩니다. 정식 소속된 인원은 스물세 명이었어요.”
명단은 빚진 사람을 적어두는 곳이다. 라포포르트라면 누구나 다 쓸 수 있고 서로에게 복수를 의뢰할 수도 있었다. 개인적인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보다는 가문과 국가에 큰 손실을 안겨줄 사람을 적어두는 편인데, 겨우 스물세 명이 속한 갱단이 명단에 올랐다니. 유리는 팔짱을 꼈다.
“몇 명이 살아있지?”
“음, 어제까지는 스물한 명이었는데, 지금은 열한 명 남았어요.”
“오늘 절반이 죽었군.”
유리는 백화점에서부터 마주친 방해꾼의 숫자를 세어봤다. 얼추 열 명쯤 되는 것 같았다. 남은 인력과 물자의 절반을 쏟아부어 준비한 계획이었는데 제대로 흘러가지 못하고 실패했고 전부 죽어버렸다.
“T는 누구야?”
“그건 못 알아냈습니다만, T가 뭐 하는 역할인지는 알았어요. 붙잡힌 보스를 꺼낼 방법을 알려준 구세주였죠.”
“방법이…… 아나스타샤인가?”
“아뇨. 원래는 보스까지 납치할 계획이었어요. 아나스타샤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갈 테니까, 아나스타샤를 숨기고 덫으로 유인할 생각이었죠. 보스를 너무 얕잡아봐서 숨기기 전에 잡혔지만 말이에요.”
휴. 레이즈빗이 숨을 고르고는 다시 얘기를 시작했다.
“T의 조언대로 놈들은 보스를 인질로 삼아 자기네 두목을 돌려받고 아나스타샤는 덤으로 데려가 정자를 팔아서 자금을 확보하려 했어요. 제대로 실행된 건 하나도 없지만요. 고맙게도 녹취가 남아있더군요. T는 AI 음성이라 신원 확인을 할 수 없었습니다.”
“흐음.”
유리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레이즈빗이 불을 앞으로 내밀었다. 유리는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인질로 잡힌 보스를 구하기 위해 나를 납치할 겸 아나스타샤까지 손댔다. 애초에 아나스타샤가 목적이 아니었다. 유리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여태 ‘홍밍’을 제조, 유통하던 유일한 갱단이었어요.”
레이즈빗이 왜 그들이 명단에 올라갔는지 이유를 얘기했다. 그렇다면 홍밍을 제조하던 다른 갱단은 전부 없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고작 23명으로 굴러가는 갱단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도 모자라 신문 1면에 나오게 했는가? 아무래도 미국에 와있는 사람 중 하나겠지. 이반이거나, 오시프다.
이미 유리의 마음속에는 범인의 얼굴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그가 왜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지 아직까지도 알 수 없었다. 조용히 처리하면 기사 한 줄 나가지 않을 일이었다. 홍밍은 타이거아이의 모조품이다. 타이거아이는 내가 미국에 넘어오기 전…… 유통되다 사라진 마약이고. 유리는 코로 연기를 뿜어냈다. 가슴 속에 불덩이를 품은 용의 콧김이었다. 단단히 묶여있던 매듭이 하나둘 풀어졌다.
“타이거아이를 미국에 풀어놓은 게 오시프군.”
“와, 보스. 탐정해도 되겠어요.”
레이즈빗이 노트북 바닥을 두드리는 거로 박수를 대신했다. 그래도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잘 나가던 마약을 불현듯 수거한 이유가 뭘까. 유리는 담배를 한 모금 피우며 생각했다. 답은 쉽게 떠올랐다. 바로 ‘유리’ 자신 때문이었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혹여나 사랑하는 막냇동생이 엄한 약에 중독돼서 사람 구실을 못 하면 어쩌나 싶은 노파심에 수거한 것이다.
깨끗이 사라졌어야 할 마약의 모조품이 보란 듯이 미국에 돌아다니니 자다가도 일어날 만큼 거슬렸으리라. 그래도 상자를 묶은 매듭은 아직도 남아있었다. 대서특필될 정도로 유별나게 구는 건 오시프답지 않았다. 유리는 휴대전화를 꺼내 오시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뭘 원하는지 모르니,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그러나 신호음만 계속됐고 듣고 싶은 형의 목소리는 끝내 듣지 못했다. 유리는 욕을 읊조리며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레이즈빗이 애처럼 히죽히죽 웃으며 유리의 눈치를 봤다. 눈치 없이 어깨까지 살랑이며 아부를 떠는 꼴에 유리는 비위가 상했다.
“뭐. 할 말 있으면 해.”
“으음, 별건 아닌데……. 제가 큰 걸 하나 물어왔거든요. 보실래요?”
“뭔데?”
“맨입으로는 안 되고.”
흥흥, 레이즈빗이 콧노래를 부르며 노트북을 바닥에 내려놓고 가방을 앞으로 멨다. 유리는 레이즈빗의 양 볼을 한 손으로 꽉 붙잡아 친히 입을 벌려줬다. 레이즈빗의 입술이 앞으로 툭 튀어나왔다.
“그래, 뭘 넣어줄까. 있는 게 꽁초밖에 없는데. 이거라도 받을래?”
“아뇨. 아뇨. 보스으. 그거 말고요! 쉐보레요! 쉐보레!”
유리가 피우던 담배를 레이즈빗의 입 가까이 대자, 레이즈빗이 기겁하며 유리의 팔뚝을 붙잡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붙잡힌 볼은 빠지지 않았다. 허엉, 보스으. 레이즈빗은 반항을 포기하고 유리의 팔뚝에 매달려 애원했다.
“면허 따면 사준다고 했잖아.”
“딸 시간을 안 주시잖아요! 먼저 사주시면 안 돼요? 택시 타고 다니는 제가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난 네가 택시나 버스 타고 다니는 게 좋아. 웃기거든.”
“보스으으.”
“뭘 물어왔는지 보고 정할까. 마음에 안 들면 혀에 지져버릴 거고. 마음에 들면…… 뽀뽀라도 해주지.”
“싫어요! 보스랑 뽀뽀해서 오시프한테 찍히면 누가 보스 뒤를 봐줍니까?”
예? 저 아니면 누가 10분 만에 조사를 끝내냐고요! 레이즈빗이 칭얼거리며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유리는 그를 놔주고 휴대전화를 가로챘다. 통신 기록을 보니 온통 오시프뿐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주고받은 메시지가 있었다. 일방적으로 보고하는 메시지고 중요한 단어는 암호로 되어있어 해독이 안 됐지만, 유리는 어렴풋이 암호를 읽어냈다.
오늘 오후 2시에 보낸 문자였다.
[-여우 사냥 시작. 종료 후 보고하겠음.]
그리고 10분 전에 보낸 문자도 있었다.
[사냥 끝. 장신구는 흠집 하나 없음. 아가씨도 무사함. 모피는 시장에 팔기로 하였음.]
누구의 휴대전화를 복제한 것인지 뻔했다. 유리는 레이즈빗을 노려봤다. 그는 양손을 포갠 채 유리를 올려다봤다.
“뽀뽀 말고 쉐보레요. 보스. 저도 차 사줘요.”
“이거 어떻게 얻었어?”
“일리야가 식탁에 올려뒀길래 안 보는 사이에 슬- 쩍, 했죠.”
유리는 도로 액정을 노려봤다. 레이즈빗이 앵무새처럼 쉐보레, 쉐보레 노래를 불렀지만 무시했다. 그때, 상대에게서 문자가 왔다.
[다음 사냥은 내가 시범을 보이겠다.]
러시아어로 보낸 문자였다. 다음 사냥은 내가 시범을 보이겠다. 이해하고 싶지 않은 문장이었다. 오시프가 어떤 지령을 내리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어서 다행인가. 유리는 복제된 일리야의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레이즈빗을 쳐다봤다. 기대에 찬 눈빛과 공손히 모은 손이 물리적 칭찬을 바라고 있었다.
“그래, 수고했다. 차는 돌아가서 골라. 뉴욕에 있으면서 면허도 따놓고.”
“헉, 진짜요? 저, 그럼 벤츠 골라도 돼요?”
“마야한테 얘기해.”
“…….”
벤츠 살 생각에 들떴던 얼굴이 순식간에 우중충해졌다. 사수가 가장 무서운 법이다. 마야가 안다면 중고차매장에서 가장 낡은 차를 골라줄 것이다. 우울하게 녹이 슨 차 키를 들고나올 레이즈빗을 생각하니 어깨가 가벼웠다. 차 사러 갈 때 옆에 있으면 참 재미있을 텐데 말이야. 유리는 레이즈빗의 어깨를 두들겨주고, 가지 않고 기다리던 택시 쪽으로 밀었다.
“가. 바쁘잖아.”
“네에…….”
레이즈빗이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갔다. 유리는 그가 택시에 타기도 전에 저택 현관 안으로 몸을 돌렸다. 안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긴박하게 흘러가는 곡조가 건반을 두드리는 자가 누구인지 알려줬다. 유리는 홀린 듯이 피아노 선율을 따라갔다.
* * *
홀로 방에 들어온 아나스타샤는 불을 켠 채 굳게 닫힌 욕실 문만 노려봤다. 욕실 문을 열면 안에서 뭔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늘 혼자 씻었고 일이 생긴 후에도 혼자 씻을 수 있었으니 오늘도 괜찮으리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유리가 올 때까지 기다릴까? 아나스타샤는 열어둔 방문을 응시했다. 틈으로 보이는 복도에는 그림자 하나 비치지 않았다.
처량하게 욕실과 방문을 번갈아 보며 갈팡질팡하던 아나스타샤는 발만 동동 굴렀다.
“내 경호가 맡은 일이면서 필요할 때 왜 옆에 없는 거야!”
보내주지 말 걸 그랬어. 옆에서 통화하라고 할걸! 겁쟁이 아나스타샤는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했다. 내려가자니 집안사람과 마주칠까 봐 걱정이었고, 씻자니 무서웠다. 그래! 무서워! 안에서 사람이든 귀신이든 튀어나올까 봐 무섭다고! 아나스타샤는 순순히 자신의 감정을 인정했다.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니야, 괜찮아. 납치범도 잡았잖아? 뭐가 튀어나오든 내리쳐서 시간을 벌자. 아나스타샤는 소파 테이블에 놓인 위스키병 아랫부분을 단단히 쥔 채 욕실로 향했다. 씻으러 가는 길이 이리도 길고 음침하다니! 그는 욕실 문손잡이를 붙잡은 채 심호흡했다. 누가 튀어나오면 병으로 머리를 쳐버리자. 아나스타샤는 멋진 계획을 세운 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흐읍!”
욕실에 난 창으로 오후 햇살이 은은하게 들어왔다. 아나스타샤는 위스키병을 높이 치켜든 상태로 눈을 도록도록 굴려 안을 살폈다. 천장 위도 고요했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숨을 몰아 내쉬며 팔을 내렸다. 전부 아나스타샤의 상상이 만들어낸 괜한 걱정이었다.
“하아…….”
집은 안전해. 경호팀이 지키지 않던가. 아나스타샤는 세면대에 위스키병을 내려놓고 침착하게 손을 씻었다. 피는 한 방울도 안 묻었는데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손가락 사이사이를 닦고 손목을 문질렀다. 온몸에 묻은 화약을 지우려면 몸을 닦아야 했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만큼 강하지 못했다.
그는 샤워 대신 세수를 택했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는데 뒤에 누군가 있는 착각이 들었다. 착각이야, 아나스타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타일렀다. 고개를 수그려 이마와 볼에 물을 묻혔다. 고개를 들면 거울에 나 말고 다른 이가 서 있을 것 같은 끈적하고 부담스러운 기운이 느껴졌다.
목까지 닦은 아나스타샤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거울을 똑바로 응시했다. 비치는 사람은 아나스타샤 한 명뿐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눈 밑이 푹 파여 새카만 웅덩이가 생겼고 호를 그리던 입매는 턱 밑까지 축 처졌다. 미간 사이에는 짙은 주름까지 생겼다.
“오, 아나스타샤. 이게 뭐야. 거지가 따로 없네.”
아나스타샤는 입을 비죽이며 볼과 눈가를 꾹꾹 눌렀다. 몇 번 주무르자 칙칙한 낯에 혈색이 돌았다. 입꼬리를 당겨 올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웃는 얼굴로 보였다.
“음, 좋아. 이만하면 됐어.”
그는 삐뚤어진 넥타이를 다시 맨 뒤에 쏜살같이 욕실을 뛰쳐나왔다. 등 뒤에서 손이 튀어나와 목을 조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기 때문이다.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와 다비드가 있을 서재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다…….”
형의 이름을 부르며 요란스럽게 소파 자리를 차지하려 했던 아나스타샤는 서재를 가득 채운 부부의 체향에 다비드를 부르지 못하고 문고리를 잡은 채 형과 그의 동반자를 바라봐야 했다. 다비드는 미카엘과 라파엘을 양옆에 끼고 앉아 소설을 읽어주고 있었고, 라이엇은 블록 놀이를 하는 가브리엘의 옆에 앉아있었다.
형과 라이엇, 그리고 내 귀엽고 사랑스러운 조카들을 위험에 빠트린 건 아닐까? 아나스타샤는 서재 문을 조심스럽게 닫으며 생각했다. 다비드가 책을 내려놓고 아나스타샤에게 다가왔다.
“아냐! 괜찮니? 얘기는 들었는데.”
다비드는 양손을 앞으로 내밀며 아나스타샤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근차근 훑었다. 걸음걸이는 멀쩡했고 옷에도 피는 묻지 않았다. 멍든 곳도 없었다. 그는 조심스레 아나스타샤의 어깨를 감쌌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걱정스러운 눈빛에, 아나스타샤는 입술을 달싹였다. 괜찮지도 않고 별일을 겪었지만, 투정을 늘어놓을 상대는 다비드가 아니었다. 그는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 모양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가볍고 산뜻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괜찮고말고. 봐! 다친 곳도 없어. 유리가 목숨 걸고 지켜줬는걸. 소개해 준 라이엇과 이반 씨께 감사할 따름이야.”
아나스타샤는 보란 듯이 다비드 앞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다비드의 손이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입은 산 걸 보니 괜찮은 게 맞는 모양이구나.”
“안 괜찮을 게 뭐가 있겠어. 형도 너무 걱정하지 마. 응?”
아나스타샤의 시선이 잠깐이지만 다비드의 배로 향했다. 다비드도 고개를 숙여 아직 부풀지 않은 배를 응시했다. 태어날 조카가 걱정돼서 애쓰는 것이라면 괜한 짓이었다. 다비드는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봤다. 웃는 얼굴은 손바닥에 올라온 비눗방울처럼 아슬아슬했다. 공주 삼촌을 울보 공주 삼촌으로 부르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 알았다.”
마냥 어리던 아이가 아니다. 아이라면 자신의 등 뒤와 배 속에 있다. 혼란스러운 감정은 알아서 추스르겠지. 다비드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럼, 나는 가볼게. 천사들도 안녕.”
아나스타샤가 소파에 앉은 천사들에게 손 인사를 했다. 라파엘과 미카엘이 동시에 손을 흔들며 “잘 가, 공주 삼촌.”하고 인사했다. 아나스타샤는 서재 문을 열면서 라이엇을 힐끔 쳐다봤다. 걱정이 가득한 눈과 마주치자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별다른 인사 없이 서재를 나왔다.
아나스타샤는 눈을 꾹 감았다. 눈꺼풀이 각막을 덮으면서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형과 천사들 앞에서 추하게 울지 않아 다행이다. 만약 울었더라면, 귀여운 천사들이 울보 공주나, 울보 삼촌이라고 부르며 무릎에 앉았으리라. 그래, 다행이지. 아나스타샤는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손을 닦을 때 비누가 묻었는지 옅은 복숭아 냄새가 났다.
이제 어디로 가지? 뭐가 튀어나올지 모를 방으로? 유리를 찾아 밖으로? 아나스타샤는 1층을 서성였다. 방도 싫고 유리를 찾아 나서기도 싫었다. 어딜 가도 혼자 있는 건 마찬가지지만, 일이 벌어지면 누군가 금방 달려올 곳에 머물고 싶었다. 걸음이 거실로 향했다.
거실은 하얀 커튼이 쳐져 있어 내부가 어두웠다. 아나스타샤는 불을 켜지 않고 소파 등받이를 손으로 쓸며 안을 둘러봤다. 꺼진 벽난로 옆에 피아노가 있었다. 아, 피아노. 아나스타샤는 피아노 앞에 섰다. 반질반질한 건반 뚜껑에 비친 자신을 응시하던 아나스타샤는 뚜껑을 열고 의자에 앉았다.
아무 건반이나 눌렀다. 울림이 좋았다. 연주하는 이가 없어도 관리가 잘 되어있었다. 아나스타샤는 건반 위에 양손을 올렸다. 집안에 울릴 걸 생각하면, 적당히 힘차면서 긴장감이 흐르는 곡을 쳐야 한다. 밝고 건강한 곡은 칠 수가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가볍게 건반을 눌러 선율을 만들었다.
고양이가 걸어가는 듯한 선율이 흘렀다. 가볍고 즐거운 발걸음이 웅덩이에 빠진 듯 낮아졌다가 빨라진다. 아나스타샤는 눈을 감은 채 연주했다. 악보는 머릿속에 있었다. 손가락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제23번 57 바단조, 열정 1악장이었다.
피아노 소리를 따라 거실에 들어온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뒷모습을 보고는 아차 싶어 소리를 죽였다. 피리 부는 사나이의 연주에 홀린 마을 아이도 아니고…. 아나스타샤에게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막상 그의 연주를 따라 거실까지 온 자신을 돌아보니 반푼이가 따로 없다.
덕분에 아나스타샤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귀한 장면을 보니 횡재했다. 작은 의자에 앉아 어깨와 팔, 손을 일정하게 움직이며 노래를 만드는 아나스타샤를 어떻게 놓치겠는가. 멀찍이 서서 등을 쳐다보는 게 전부였지만 유리는 무척 만족스러웠다. 그가 만들어내는 곡조도 듣기 좋았다. 강렬하면서 희미한 선율은 꺼질 듯 말 듯 타오르는 화염 같았다. 유리는 피리 부는 사나이도 잊은 채 연주를 감상했다.
아나스타샤는 피아노를 치다 말고 손을 들어 눈가를 닦았다. 선율이 멎은 그 순간, 아나스타샤의 젖은 숨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유리는 일부러 큰 보폭으로 다가갔다. 인기척이 들리자, 눈물을 닦던 아나스타샤가 뒤를 돌아봤다. 눈물로 젖은 눈가는 물론이고 코와 입술까지 빨갛게 익었다.
막상 얼굴을 보니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유리는 주먹을 쥔 채 그를 내려다봤다. 아나스타샤가 손바닥으로 젖은 볼을 닦으며 물었다.
“……통화는 다 했어?”
“예. 기다리셨습니까.”
“그래. 기다렸어. 씻으려고 했는데, 무서워서 못 씻었어.”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수그리며 피아노 건반을 눌렀다, 둥……. 낮은음이 울렸다. 유리는 엉덩이를 다 걸치기도 좁아 보이는 피아노 의자를 힐끔거리다 빈자리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아나스타샤는 코를 훌쩍이며 쳐다보면서도 유리가 앉을 수 있게 옆으로 자리를 옮겨줬다.
“범인을 찾았습니다.”
“벌써? 집에 온 지 30분도 안 됐는데. 경찰보다 빠르잖아.”
놀란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힐끔거렸다. 라포포르트가 러시아를 떠받드는 집안이라지만, 여기는 미국이다. 바다 건너 땅에서 이리도 쉽게 위력을 보이다니. 라포포르트의 입김이 생각 이상으로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들으시겠습니까?”
“……아니. 됐어.”
아나스타샤는 도로 건반을 응시하며 얘기했다. 고개를 푹 떨군 모습이 무척 피곤해 보였다. 유리는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
“오늘 많은 일이 있었잖아. 사람…… 이 쓰러지는 것도 보고 말이야. 이런 건 익숙하지 않아. 시간이 필요해. 범인이 의뢰한 짓이라 해도, 지금은 아니야. 쉰 다음에 듣고 싶어.”
“예.”
유리는 아랫입술만 살짝 끌어 올려 웃었다. 오시프에 관한 얘기는 빼고 적당히 둘러대서 안심시킬 생각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럼 이제 아나스타샤를 뭐로 달랜단 말인가? 희미하게 웃던 얼굴이 단숨에 구겨졌다. 아나스타샤는 피아노 앞에 계속 앉아있을 생각인지 건반을 손가락으로 쓸어댔다.
다른 곡을 쳐달라 할까? 어떤 곡을 쳐달라고 하지? 유리는 발레는 조금 알아도 피아노 소나타는 잘 몰랐다. 유명한 소나타 중 아무 제목이나 얘기해도 아나스타샤는 연주할 수 있을 것이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빤히 쳐다봤다. 아나스타샤는 부담스러운 시선에도 고개를 들거나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
이 상태를 보니 연주로 달래긴 글렀다. 유리는 기억력을 쥐어짜 계이름을 생각해냈다. 간단하고 경쾌한 짧은 곡조였다.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같은 클래식은 아니었지만, 아나스타샤의 기분이 나아질 수 있다면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했다.
유리가 높은음 건반을 정직하게 눌러가며 음을 만들었다. 새소리처럼 작고 높은 선율에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들어 유리와 그의 오른손을 번갈아 가며 봤다. 오른손으로만 건반을 누르던 유리가 왼손까지 합세해 같은 구간을 반복해서 연주했다. 아나스타샤는 단조로우면서도 발랄한 곡의 제목을 알고 있었다. 이었다.
얼굴을 항상 찡그리고 다니면서 이런 귀여운 곡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아나스타샤는 건반에 양손을 올린 채 유리가 연주하는 계이름이 한 바퀴 돌아오길 기다렸다. 구간이 다시 돌아왔을 때, 단조로운 유리의 멜로디에 아나스타샤의 반주가 어우러졌다.
아나스타샤와 유리는 한참 동안 같은 곡을 연주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연주가 점차 느려졌다. 유리가 먼저 건반에서 손을 뗐다. 아나스타샤의 반주가 곡을 마무리했다. 유리는 손을 내린 채 아나스타샤를 응시했다. 구름이 잔뜩 꼈던 바다에 여름 햇살이 내리쬐었다. 아나스타샤가 수면에 부서지는 햇살처럼 빛나는 미소를 지었다. 유리도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다른 곡도 칠 수 있나?”
“아뇨.”
“다룰 줄 아는 악기는?”
“바이올린은 배웠는데…….”
아나스타샤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거실에는 피아노뿐이었다. 바이올린이 있었으면 합주했을 텐데. 실망감에 아나스타샤의 어깨가 살짝, 수그러졌다. 유리는 다급한 마음에 아나스타샤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음?”
“좀 전에 연주한 곡, 제목이 뭡니까.”
“좀 전? 아, 나 혼자 연주한 거? 열정 1악장.”
“그럼…… 다음 악장도 연주해주세요.”
“듣고 싶어?”
“……예.”
“좋아. 유리가 듣고 싶다니까.”
특별히 연주해줄게. 아나스타샤는 뒷말을 마저 얘기하는 대신 부드럽게 건반을 눌렀다. 처음 연주한 1악장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느긋하고 부드러운 음색에 약간의 긴장감이 서렸다. 그런데도 경쾌하게 들리는 이유는……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힐끔거렸다. 그는 건반을 내려다보며 연주에 집중하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아나스타샤가 눈매를 살짝 접어 웃었다. 붉은빛이 남은 눈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미소를 한참 동안 구경했다. 무례할 정도로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에도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바라보며 연주를 계속했다.
넋 놓고 쳐다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었다. 얼굴 빼고 봐줄 만한 곳이 없다더니 정말이구나. 사람을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면서, 입은 또 살짝 벌어진 게 귀여웠다. 2악장도 막바지였다. 끝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심드렁하고 뾰로통한 얼굴을 하겠지.
아나스타샤가 건반을 부드럽게 훑었다. 바람같이 흐르던 곡이 멎고 거실에 적막이 찾아왔다. 곡이 끝났는데도 유리의 얼굴은 그대로였다. 겨우 미간에 주름만 사라진 것인데도 인상이 부드러워졌다. 온순한 눈빛은 지금이라면 무슨 짓을 해도 용인해줄 것 같았다.
“유리.”
아나스타샤가 이름을 부르자 유리는 미간을 좁히며 왜 부르냐는 듯 귀찮은 티를 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퉁명스러운 반응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귀여운 알파에게 입 맞추고 싶었다.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눈과 입술을 번갈아 쳐다봤다. 코 아래에 아나스타샤의 더운 숨이 닿았다. 고개를 조금만 내밀면 입술끼리 맞닿을 거리였다. 마운팅을 즐기는 것도 아니면서 왜 알파를 탐닉하려 드는 걸까?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욕망과 취향을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순순히 눈을 감았다.
곧바로 입술에 입술이 닿았다. 아나스타샤가 입술에 도장을 찍듯 쪽쪽, 입을 맞추다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번갈아 가며 핥았다. 유리는 입을 벌리고 고개를 틀었다. 혀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동시에 꼼꼼히 숨기고 있던 두 알파의 페로몬이 흐트러지며 존재를 과시했다.
“음…….”
아나스타샤가 신음했다. 입을 벌리고 혀를 움직일 때마다 코와 입으로 쳐들어오는 페로몬 때문에 아랫배가 저렸다. 더 맛보고 싶다. 의자를 짚고 있던 아나스타샤의 손이 유리의 등을 훑고 올라와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읏.”
놀란 유리가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떨어지고 거친 숨만 서로의 얼굴에 닿았다. 아쉽다.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찾았다. 타액으로 젖은 입술에 입술을 포개자 유리의 몸이 뻣뻣해졌다. 그런데도 그는 아나스타샤를 내치지 않고 입을 벌려줬다.
키스는 싫지 않은가 보지. 알파와 섹스는 어떻게 하냐면서 총구를 들이밀던 사람이 아닌 척 입도 벌리고 말이야……. 키스를 피하지 않는 모습에 안달이 난 아나스타샤는 왼손으로 유리의 배와 가슴을 쓰다듬었다. 복근이 긴장하며 단단해지는 게 느껴졌다. 유리가 고개를 뒤로 빼며 거부했다.
“……그, 만.”
아나스타샤는 순순히 손과 입술을 떼고 어깨에 머리를 올렸다. 평소 같았으면 아래가 빳빳해질 때까지 희롱했겠지만, 유리는 두 번 경고하지는 않으니까.
유리의 몸이 느슨해졌다. 하나를 허락하면 허락한 적 없는 것까지 따라온다. 이걸 하나하나 정할 수도 없고…… 유리는 한숨을 내쉬고 어깨에 머리를 기댄 아나스타샤를 응시했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어깨에 이마를 문지르며 아쉬워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납치당했다가 돌아왔으니 응석 부릴 곳이 필요한 거겠지. 유리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오시프가 친 그물에 죄 없는 아나스타샤가 걸려 곤욕을 치르는 걸 보니 양심이 아팠다. 필요한 게 응석받이라면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었다.
……키스 정도는.
“……씻으시죠.”
“응……. 그래야지. 옆에 있어 줄 거야?”
유리 쪽으로 기대고 앉은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들었다. 좀 전까지 씹어댔던 입술은 피가 몰려 평소보다 붉었다. 유리는 눈을 꿈뻑대다가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예. 얼마든지.”
“고마워, 유리.”
시키지 않았는데도 대뜸 부딪히는 귀여운 대꾸에 아나스타샤는 환하게 웃었다. 라포포르트의 막내 도련님이 자신의 외모를 얼마나 아끼는지 느꼈기 때문이다. 얼굴 빼고 봐줄 곳이 하나 없다는 말은, 진심이구나. 그렇다면 나를 더 오래 좋아할 수 있게 보답해야지. 아나스타샤는 몸을 일으키며 유리의 볼에 쪽, 키스를 남기고는 방으로 향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입술이 닿았던 볼을 손등으로 닦으며 아나스타샤를 쫓아갔다.
아나스타샤는 금방 씻었다. 평소처럼 말이 많지도 않아서 유리는 반쯤 뒤를 돌아 아나스타샤를 확인했다. 왜 저러나 싶었는데 궁금증은 금세 해결됐다. 사람이 죽는 걸 지켜봤는데 평소처럼 조잘거리면 아나스타샤가 아니지. 아나스타샤가 물을 뚝뚝 흘리며 유리에게 다가왔다. 수건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는 아나스타샤에게 가운을 건넸다.
“시중까지 들 필요 없는데. 고마워, 유리.”
필요 없다는 사람치고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유리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고 자시고 옷부터 걸쳤으면 싶어서 드레스룸에 먼저 들어가 안을 살폈다. 고용인이 옮겨놨는지 좀 전에 사 온 옷들이 쇼핑백에 담긴 채로 바닥에 놓여있었다. 정리하려면 한참 걸릴 듯했다. 아나스타샤가 하진 않겠지.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억지로 선물해준 정장 케이스를 매만지며 생각했다.
가운을 걸친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뒤따라왔다.
“봐줘서 고맙지만, 옷은 됐어. 술 마시고 잘래. 어디 나갈 것도 아니고…… 피곤해.”
앰버린과 미팅, 후원 중인 아이의 경기 일정도 있었다. 납치당하고 사람 죽는 걸 눈앞에서 봤어도 시간은 계속 흐른다. 연쇄살인범의 표적이 돼도 마찬가지였다. 베이징 파견이 가까워지는데 오들오들 떨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이건.”
유리는 바닥에 잔뜩 쌓인 쇼핑백을 가리켰다. 아나스타샤는 고민하는 듯 턱과 볼을 문지르다 어깨를 으쓱였다.
“정리해달라고 부탁해야겠네. 그것보다…… 이리 와, 유리. 너도 치료해야지.”
아나스타샤가 손짓하며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치료? 무슨 치료? 유리는 팔다리를 훑었다. 다친 곳은 없었다. 손등에 난 생채기는 치료할 정도로 심각하지 않았다. 아까 차에서도 손을 치료해야겠다고 하지 않았나. 이걸……. 유리는 씰룩이는 입가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풀고는 드레스룸을 나왔다.
아나스타샤는 소파에 앉아 구급상자를 뒤적이고 있었다. 소독약에 연고, 붕대까지 꺼내놨다. 까진 상처를 치료하는 데에 붕대까지 필요할까. 다친 지도 시간이 좀 돼서 딱지가 앉은 곳도 있었다.
“이리 와서 앉아.”
아나스타샤가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렸다. 이렇게 해서 아나스타샤가 안심할 수 있다면야……. 유리는 시키는 대로 옆에 앉았다. 아나스타샤가 몸을 유리 쪽으로 돌려 앉았다. 그의 무릎이 유리의 허벅지에 닿았다.
“어디 보자…… 아프진 않아? 손등이 다 까졌어.”
“괜찮습니다. 연고만 바르면…… 될 겁니다.”
사실 연고도 필요 없었다. 붕대까지 꺼내놓고 앉은 아나스타샤에게 매몰차게 얘기하기가 어려웠다. 연쇄살인범부터 납치까지 친형인 오시프 라포포르트가 꾸민 일이라고 말할 생각이 없다면, 아나스타샤의 기분을 최대한 맞춰줘야 솜털처럼 난 양심이 덜 아팠다.
“약이 스며들 때까지만 하고 있어.”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손을 소독하고 연고를 바른 뒤에 양손에 붕대를 감아줬다. 핸드 랩을 감은 것처럼 양손이 하얀 붕대로 칭칭 동여졌다. 유리는 손을 노려봤다. 한두 번 감으면 될 걸 거추장스럽게 꾸몄다. 외모도 행동도 과한 남자는 처치도 과하다. 아나스타샤가 잠들면 풀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형도 봤고, 나도 씻었고, 너도 치료했으니까. 우리 한잔할까?”
만족스럽게 일을 끝낸 아나스타샤가 생긋 웃으며 물었다. 술이라니. 커피면 몰라도 술은 싫다. 약에 취해 사지를 못 가누는 아나스타샤를 봐서 그런지는 몰라도 거북했다.
“근무 중에 술은 안 되는데요.”
“여기 술은 안전해. 약 타는 사람이 없으니까. 한두 잔 정도는 괜찮지?”
유리의 거절을 거절한 아나스타샤는 술과 잔 두 개를 챙겨왔다. 안 마신다니까 끈질기게 구네. 유리는 싫은 티를 내며 잔을 채우는 아나스타샤를 노려봤다. 아나스타샤는 개의치 않고 술을 따른 크리스털 잔을 유리에게 내밀었다.
“에스프레소는 못 마셔도 위스키는 마실 줄 알지? 아니면 보드카를 가져올까?”
“안 마십니다.”
“안 마시는 거야, 못 마시는 거야? 너도 오늘 힘들었을 텐데 한 잔 정도는 괜찮아. 내가 허락할게.”
유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분명 아나스타샤가 고용했으니―친구끼리 돕는 게 맞는 말이지만― 허락한다 해도 이상할 건 없다. 그러나 기분은 별개였다. 오시프도 입 밖으로 허락을 뱉지 않았다. 오시프가 벌인 판이 아니었다면 진작 팽개치고 마이애미로 돌아갔으리라 생각하며, 유리는 잔을 받았다.
아나스타샤가 크게 안도했다. 어깨를 늘어트리며 숨을 깊게 내쉬었다. 유리는 잔을 앞으로 살짝 내밀었다. 아나스타샤가 기다렸다는 듯이 잔을 부딪쳤다. 챙, 투명한 울림이 들렸다.
“멀쩡히 돌아온 걸 축하하며.”
경쾌한 목소리로 오늘을 축하한다. 오시프의 입김으로 일어난 납치다. 오시프가 직접 뛰어들면 어떤 일을 겪게 될까. 그때도 공주가 나와 함께 나란히 앉아 무사 귀환을 축하할까? 아나스타샤가 내막을 눈치챌지도 모른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건배사에 가볍게 고개를 주억이고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겁쟁이 아나스타샤는 찬물을 들이키듯 위스키를 마셨다. 저러다 취하지. 유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흐아.”
술을 단숨에 비운 아나스타샤는 한숨 같은 신음을 흘렸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빈 잔에 다시 술을 따르더니, 이번에는 바로 마시지 않고 잔을 손안에서 굴리며 멍하니 테이블을 응시했다. 깜빡깜빡 감았다 뜨는 눈꺼풀 때문에 눈을 깜빡이는 인형 같았다. 유리는 술을 한 모금 한 모금 나눠 마시며 아나스타샤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 사람들, 다 죽었어?”
한참 만에 아나스타샤가 입을 뗐다. 뭘 생각하고 있나 했더니, 납치범이 법정에 서지 못한 걸 걱정했나. 유리는 남은 술을 마저 마시고 답했다.
“예.”
“……라포포르트는 살인도 저지르는 거야?”
아나스타샤의 조심스러운 시선이 유리에게 닿았다. 유리는 심드렁한 얼굴로 겁에 질린 아나스타샤를 바라봤다. 내가 백마 탄 왕자가 아니라 실망한 눈치다.
“필요하면.”
“필요해도 사람은 죽이면 안 돼.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할 때도 있겠지만, 오늘처럼…… 네 명이나.”
“여섯이죠.”
“그래. 여섯이나 죽이면…… 그것도 번화가에서 말이야, 그러면 잡혀가.”
“제가 잡혀갈까 봐 걱정입니까?”
“그럼. 넌 내 경호원이잖아. 날 지켜주기로 했으면 끝까지 지켜줘야지. 중간에 체포되면, 누가 나를 지켜?”
“다비드 씨가 고용한 경호팀이 지키겠죠.”
“나는 유리, 네가 지켜줬으면 좋겠어.”
아나스타샤의 크고 맑은 눈이 유리에게 향했다. 유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고백처럼 들리는 요구였다. 아나스타샤가 날 원한다.
“네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아나스타샤의 입에서 나 유리 라포포르트가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말을 듣는 날이 올 줄이야. 희열과 동시에 의구심이 들었다. 궁금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이 라포포르트라는 성을 가진 사내를 옆에 두고 싶어서 하는 사탕발림인지, 정말 진심에서 나오는 얘기인지 말이다.
유리가 묻자 아나스타샤는 입술을 혀로 훑으며 뜸을 들였다.
“그야…… 네가 있으면 안심되니까.”
사랑을 고백하듯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수그리며 대답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수줍은 고백에도 묵묵히 잔에 술을 따랐다. 아나스타샤가 가장 피해야 할 사람은 바로 유리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나스타샤를 위협하는 것도 유리였고, 그를 지키는 것도 유리였다.
순진한 사람을 속이는 기분이다. 들키지 않고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까? 오시프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미국에 온 거지? 유리는 술로 바싹 마른 입을 축였다. 아나스타샤는 유리가 침묵하는 것이, 자신이 댄 이유의 부족함 때문이라 생각했는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넌 날 좋아하잖아.”
갑작스러운 확인 사살에 유리가 눈썹을 치켜떴다. 아나스타샤는 하얀 치아를 보이며 생긋, 웃었다.
“날 좋아하는 사람이 곤란해지는 건 싫어.”
경찰의 추격을 받지 않아도 이미 유리는 곤란했다. 빌어먹을. 무슨 바람이 들어서 일을 벌인 거야? 유리는 오시프가 한시라도 빨리 눈앞에 나타나길 바라며 아나스타샤에게 잔을 내밀었다.
“아나스타샤, 당신의 안전을 위하여.”
유리의 건배사에 아나스타샤가 잔을 부딪쳤다. 둘은 한 모금씩 술을 마시고는 서로를 바라봤다. 추한 밑바닥을 보여준 사이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몽우리를 터트리기 시작한 목화솜처럼 시선 끝에 피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와 한 병을 나눠 마시고, 또 다른 위스키를 가져와 혼자 마신 후에도 멀쩡하게 웃으며 유리와 대화―일방적인 독백에 가까웠다.―를 나눴다.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말을 쉴 때마다 그렇군요, 예, 같은 말로 대꾸해줄 뿐이었다.
“형이 홑몸도 아닌데 걱정시키면 안 되잖아. 뭐, 워낙 자기 관리 잘하는 사람이니까 큰일은 안 생기겠지만….”
아나스타샤가 중얼거리며 빈 잔에 술을 채웠다. 주량을 아는 인간이 왜 자꾸 마시는 거야? 파티에 나가 분위기에 취해도 위스키를 한 병씩이나 마시는 일은 없었다. 유리는 술이 그득한 아나스타샤의 잔을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만족스럽게 잔을 채운 아나스타샤가 유리에게 권하듯이 술병을 기울이려다 잔에 남은 술을 보고는 테이블에 세워뒀다.
“공주님인지 왕자님인지 확인 안 하겠대. 나는 너무 궁금한데.”
“그렇습니까.”
“응. 조카가 또 생겨서 너무 좋아. 예정일 전에는 잡히겠지?”
글쎄. 오시프 성질머리를 봐서는 그 전에 끝날 것 같은데. 이참에 아나스타샤를 사고사로 위장해 죽여버릴지도 모르겠다. 유리는 남은 술을 급하게 들이켰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오시프가 마약 유통을 정리하면서 아나스타샤도 지워버릴 계획이라면……. 목이 탔다. 유리는 잔에 술을 따랐다. 지켜보던 아나스타샤가 아이처럼 좋아했다.
“여태 내 몸은 내가 지켜야겠다고 생각만 했어. 너무 바빠서… 바쁘다는 건 변명이지. 사실 귀찮았어. 위협이 사라지면 무뎌지잖아. 늘 옆에 사람이 있었으니까…. 납치도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당했으니 기억도 잘 안 나고. 그 이후로 처음이네.”
오시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나스타샤의 말은 거의 맞았다. 틀린 곳을 정정하자면, 그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가 아니라 열 살 때 벌어진 일이었다. 베네치아 본가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아나스타샤를 기적처럼 시칠리아섬에서 되찾은 납치 사건이었다. 범인은 아나스타샤를 산에 유기하고 자살했다. 베네치아 납치 사건은 아나스타샤가 겪은 최악의 범죄였다.
그것 외에도 아나스타샤는 끊임없이 범죄에 노출됐다.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한들 완벽한 알파의 아이를 낳으려는 오메가들은 끊이지 않았다. 아나스타샤의 형제가 더 태어나지 않고 다비드 시모나로티가 오메가로 발현한 뒤로는 유일한 시모나로티의 씨주머니인 아나스타샤를 차지하려는 움직임이 거셌다. 결국 인지오 시모나로티는 마피아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인지오는 아나스타샤를 가둬 기르기보다는 원하는 만큼 뛰어놀 수 있도록 하고 싶어 경비견을 길렀다. 아버지의 배려 덕분에 아나스타샤는 훌륭한 경호원을 데리고 사교계를 자유롭게 거닐며 시모나로티의 권력과 부를 뽐냈다.
경각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이다. 주변에서 지켜줘도 자기 몸은 지킬 줄 알아야지. 꼭, 위험한 상대만 골라서 일을 만드니…. 어쩌면, 일부러 위험한 상황을 만들어서 자신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고, 스토커에게 쉽게 동화되는 걸지도 모르지. 어디까지나 유리의 추측이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유리를 두고 아나스타샤는 얘기를 계속했다.
“이 나이를 먹어서도 납치당할 줄은 몰랐는데. 정말 무서웠어. 유리가 날 구해주지 않으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호신술이라도 배워둘 걸 후회되는 거 있지.”
너무 늦었나? 아나스타샤가 입술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할 줄 아는 무술이 없어. 수영만 하지 말고 유도라도 배울 걸 그랬나 봐. 하다못해 사격이라도 말이야. 나는 총 쥘 줄도 모르거든.”
“그렇군요.”
아나스타샤가 하는 얘기는 유리도 알던 내용이었다. 총뿐인가 테이저건도 제대로 만져본 적 없을 것이다. 정장 재킷 안에 후추 스프레이를 넣고 다니는 간단한 준비도 하지 않으니 말 다 했다. 유리가 무심하게 대답하자 아나스타샤는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 누우며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놀리는 듯한 웃음소리에 유리가 그를 쳐다봤다. 거기다 아나스타샤가 유리 쪽으로 몸을 돌려 앉은 탓에 벌어진 가운 사이로 술기운에 벌겋게 달아오른 쇄골과 가슴이 보였다. 목 위로는 취기가 하나도 올라오지 않았다. 가슴에 떨어졌던 시선이 자연스럽게 목과 턱을 훑고 눈가로 향했다. 반쯤 감긴 아나스타샤의 눈과 마주쳤다. 술을 마셨어도 흔들리지 않는 푸른 눈동자가 유리를 기분 나쁘게 꿰뚫어 봤다.
“몰랐구나?”
다 안다더니, 아는 게 하나도 없네. 유리는 짧은 물음에서 긴 뜻을 파악했다. 유리의 눈썹이 찌푸려지며 눈매까지 가늘어졌다. 아나스타샤를 모아온 지난날을 통째로 놀림 받는 기분이었다. 거기다 필요 이상으로 풀어진 아나스타샤의 자세도 거슬렸다. 다리를 편하게 벌리고 있는 탓에 그의 허벅지 안쪽까지 보기 싫어도 눈에 들어왔다.
가벼운 웃음이 아나스타샤의 입가에 흘렀다. 소리에 반응한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응시했다. 상대를 가소롭게 아는 눈빛에 유리는 욱하고 말았다.
“알고 있습니다. 총뿐인가요. 스프레이도 쓸 줄 모르잖습니까.”
“뭐야, 알고 있었네? 그런데 왜 ‘알고 있었는데요.’라고 안 했어?”
아나스타샤가 목소리를 깔고 유리의 말투를 따라 하며 “알고 있었는데요.”를 뱉어냈다. 유리는 웃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여기서 박차고 나가면 이반이 먼저 찾아올지 오시프가 먼저 찾아올지 가늠할 뿐이었다. 아나스타샤가 소파에 팔뚝을 걸쳤다. 가운이 더 벌어졌다. 유리의 눈은 자연스럽게 그림자가 진 아나스타샤의 사타구니로 향했다. 조금만 더 움직이면 아래가 다 보일 자세다. 마음 같아서는 가운을 올려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아나스타샤가 놀릴 게 뻔해서 내버려 뒀다.
“응?”
아나스타샤가 대답을 재촉했다. 알면서도 왜 대답하지 않았는지가 중요한 의문이었나 보다. 유리는 술을 따르는 척 고개를 돌리며 얘기했다.
“보통은 그런 것까지 알면 기분 나빠하니까요.”
“으응? 아하하, 유리. 넌 네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구나? 내가 알파랑 자는 것도 그렇고. 스토커한테 왜 너그러운지도 모르고…. 난 유리처럼 날 잘 아는 사람이 좋아. 내가 모르는 부분까지 다 알고 있는 사람 말이야.”
보통 그걸 스토커라고 부르지. 아나스타샤가 뒷말을 붙였다. 유리는 못 들은 척 술을 마셨다. 아나스타샤 앞에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입안이 바싹 말라 들어갔다. 애초에 아나스타샤의 옆에 앉아 술을 마시며 얘기할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 내가 아는 아나스타샤는 문란하고 화려하며 스토커를 꼬리로 달고 다니면서도 호신술은 하나도 배우지 않은 천방지축 도련님이었다.
“아직도 날 만날 생각이 없어?”
“…….”
유리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당황한 나머지 잡아뗄 생각도 못 했다. ‘만남’이 연애를 뜻한다면 추호도 없었다. 침묵은 긍정이었다. 아하. 아나스타샤가 짧고 가벼운 감탄사를 흘렸다. 당했다. 참패였다. 살려놓고 깔끔히 사라지고 싶었는데, 들켜버렸다. 어떻게 안 거야? 유리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자신을 짓밟은 아나스타샤를 노려봤다. 엮이고 싶지 않은 남자다.
“어떻게 알았냐니. 날 싫어하는 눈친데 날 좋아한다고 밀랍 인형을 만들겠다며. 거기다 얼굴 빼고 봐줄 게 없잖아. 조금만 고민해도 알 수 있지.”
묻지 않아도 아나스타샤는 알아서 궁금증을 해결해줬다. 간단한 수수께끼였던 것이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아차렸으리라. 그렇게 자위한다고 욕망의 대상에게 욕망을 들킨 순간을 웃어넘길 수 있는 건 아니다. 유리의 얼굴에 기분이 그대로 드러났다. 음흉하게 웃던 아나스타샤도 허리를 반듯하게 세워 앉으며 유리에게 사과했다.
“미안, 유리.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없었어.”
내가 취했나 봐. 그는 목덜미를 문지르며 변명을 덧붙였다. 아나스타샤는 주량을 넘겨도 한참 넘겼다. 뇌가 술에 절여졌으니 실수는 당연했다. 유리는 공주를 뚫어지게 쳐다보기만 했다. 침묵에 초조해진 아나스타샤가 무릎을 모으고 상체를 유리 쪽으로 가볍게 숙이며 주의를 기울였다. 가운은 제 역할을 못 하고 커튼처럼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유리, 미안해.”
유리의 신경은 아나스타샤의 속살에 쏠려있었다. 저러다 다 보겠네. 어쩌지? 올려줘야 하나? 저기서 더 움직이면 정말 다 보게 될 거야. 유리는 자신의 눈을 지키고 싶었다. 놀림 받는 것보다 좆 대가리 한번 덜 보는 게 정신에 이로우리라 판단했다. 저울질을 끝낸 유리는 흘러내린 가운을 잡아 다리를 덮어줬다.
아나스타샤가 스스로 가운을 정리했다. 유리는 한시름 놓으며 술을 들이켰다. 이게 뭐라고 입이 바싹 마른단 말인가. 유리를 끝까지 지켜본 아나스타샤는 소파 등에 팔을 올리고 그 위에 머리를 기댔다. 손이 유리의 어깨가 있는 곳까지 뻗쳤다. 기분이 상한 것 같았으나 걱정할 정도는 아닌 듯했다. 말로 받은 상처는 말로 푸는 법이다. 아나스타샤가 운을 뗐다.
“내 경호는 어떻게 맡게 된 거야?”
술이 얼마 안 남은 잔을 어루만지던 유리가 아나스타샤를 돌아봤다. 한쪽 눈썹만 삐딱하게 올린 모습이었으나 아나스타샤는 그 얼굴이 무척 흥미로워하는 표정임을 알았다. 응? 아나스타샤가 되물으며 어깨를 은근슬쩍 붙잡았다. 유리는 손을 쳐내지 않았다. 허락하지 않은 접촉을 나무라는 것보다 중요한 대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에 찬 눈빛으로 아나스타샤를 바라봤다.
“지금 당장 아나스타샤 씨를 완벽하게 경호할 사람은 나뿐이니까요.”
“아하.”
간단명료한 답변이었다. 맞다. 그간 들은 라포포르트의 명성을 생각해보면 라포포르트에서 왜 경호를 도와주는지 이해가 안 됐다. 하지만 엮인 사람을 들여다보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이반은 라이엇이 필요하고. 유리는 날 좋아하니까. 훌륭한 공생관계였다.
아나스타샤의 침묵을 정말 다른 인물이 있나 고민하는 것으로 착각한 유리가 소파를 짚으며 몸을 앞으로 수그렸다.
“나 유리 라포포르트보다 실력 있는 사람을 아나 보죠?”
“그럴 리가. 네 말이 맞아. 유리만큼 대단한 실력자는 또 없지. 널 소개해 준 이반 씨와 라이엇한테 고마울 따름이야. 물론… 가장 고마운 사람은 오늘 날 구해준 유리 너지만.”
유리는 입술을 입 안쪽으로 말아 넣으며 웃음을 참았으나 입꼬리는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뒤였다. 제길. 언제부터 이렇게 웃음이 헤퍼졌어? 유리는 뒤늦게 얼굴을 문질러 닦으며 표정을 관리했으나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의기양양한 미소를 보고 난 후였다. 아나스타샤도 흡족하게 웃었다. 구슬리는 재미가 쏠쏠한 남자다. 조금 전 저지른 말실수는 까맣게 잊은 아나스타샤가 입가를 꾸물거리는 유리를 응시하며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내가 어떻게 보답하면 좋겠어?”
준다는데 안 받는 바보는 없다. 아나스타샤는 다리를 꼬고 앉았다. 유리가 정돈해준 가운이 도로 벌어졌다. 유리는 하얀 허벅지를 응시하다 아나스타샤의 눈을 바라봤다. 둘 중 하나가 오메가였다면 벌써 침대로 뛰어들었을 멘트였다.
아쉽게도 둘 다 알파였고,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약에 취해 껄떡거리는 경우가 아닌 이상 아나스타샤의 중요 부위를 만지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가 ‘보답’이라니. 유리는 눈을 내리깔았다. 이건 오시프가 판에 깔아놓은 지뢰가 터지기 전에 도망가는 광대놀음이었다. 미처 회수하지 못한 약을 정리하면서 아나스타샤까지 치워버리려는 악마의 계략이다.
아나스타샤가 오시프의 표적이 된 이유는 다 유리 자신 때문이었다. 보답을 요구할 게 아니라 용서를 구해야 했다. 간섭이 싫어서 바다 건너까지 왔는데 여전히 그늘 아래였다. 거기다 가장 아끼는 아나스타샤의 목숨까지 쥐고 흔들었다. 어디로 가야 그림자를 피할 수 있지? 아마존이라도 들어가 살아야 하나?
“응? 사적인 보수랑 별개로 들어줄게. 뭐든 말해봐.”
눈을 피하고 인상을 쓰는 유리를 지켜보던 아나스타샤가 주름진 미간을 손가락으로 눌러 펴주며 재촉했다.
“제가 뭘 요구할 줄 알고 그럽니까.”
“글쎄. 뭘 요구할 건데?”
묻는 그대로 돌아온다. 유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나스타샤는 꼰 다리를 까딱이며 대답을 기다렸다. 다리가 흔들릴수록 가운이 밑으로 내려갔다. 나랑 자려고 꼬시는 건지, 술 마시고 맛이 가버린 건지 알 수가 없다.
“나중에 쓰겠습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뭐든 말해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중에 쓰겠습니다.”
“언제 쓸 건데?”
“내킬 때.”
“그게 무슨…….”
아나스타샤는 말을 하다 말았다.
이런, 당했다. 뭘 믿고 뭐든 들어준다고 했을까. 얘가 뭘 해달라고 할 줄 알고. 나랑 닿는 것도 싫어하는데 데이트를 해달라고 할 줄 알았어? 아니면, 섹스? 이런…. 아나스타샤는 다리를 반대쪽으로 꼬며 유리와 거리를 벌렸다. 아무래도 술을 많이 마셔서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하다. 자지도 못할 상대를 꼬시려고 백지 수표를 뿌리다니. 샘도 제대로 못 하는데 가업을 물려받아도 되는 걸까? 재단이고 베이징이고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우는 게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어깨를 매만졌던 손을 물렸다.
아나스타샤의 걱정을 알 리 없는 유리는 도리어 조용해진 아나스타샤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게 닥쳐주길 바랐는데 막상 잠잠해지니 침묵에 숨이 막혔다.
“안 주무십니까.”
오시프의 음모가 마음에 걸렸던 유리는 애써 걱정된다는 어투로 물었다. 평소와 차이가 느껴질 만큼 다정한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작은 변화를 알아챈 아나스타샤는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으음, 자야지. 그런데…. 유리, 계속 그렇게 얘기할 거야?”
“뭘요.”
“격식 차린 말투 말이야.”
조우할 때부터 격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퉁명스러운 말투를 ‘격식’이라 격을 차려 불러주는 아나스타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나스타샤가 말하는 ‘격식’을 한참 생각하던 유리의 얼굴이 단번에 찌푸려졌다. ‘사적인 보수’를 알기 전에 부딪혔을 때와 페레그린의 파티 때를 말하는 것이다. 집안끼리의 부탁이니만큼 나름 예의를 차렸는데, 그것도 예의라고 차렸냐고 비웃는 것 아닌가? 매서운 살기가 아나스타샤를 향했다. 좋아하는 상대에게 아무렇지 않게 살기를 뿜어내다니. 아나스타샤는 등골부터 타고 올라오는 전율에 입술 안쪽 살을 깨물었다. 공포심은 쾌감과 비슷했다. 어쩌면 아나스타샤에게는 같을지도 모른다.
“그건 왜 묻습니까?”
유리가 언짢은 티를 내며 또박또박 되묻자 아나스타샤는 봄 처녀처럼 수줍어하며 얘기했다.
“난…. 유리가 함부로 얘기하는 게 좋거든. 편히 말하면 안 돼?”
“…….”
유리는 백 마디 욕보다 구겨질 대로 구겨진 얼굴로 대답을 대신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당장이라도 욕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유리의 경멸하는 시선 뒤로 당혹감에 눈물짓는 모습이 아른거려서 아나스타샤는 어쩔 수 없이 다리를 꼬고 그 무릎을 꽉 끌어안았다. 제어 불가능한 생리적인 현상 때문이었다.
안 되는 걸 아는데도 망상을 그만둘 수 없었다. 경호원을 상대로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나스타샤? 아무래도…… 정신적으로 힘든가 봐. 페로몬에 절여지면 잡생각이 안 들 텐데. 지금은 누굴 만나도 불안했다. 아마, 범인이 잡혀도 한동안은 사람을 만날 수 없으리라.
방금까지 활기찼던 아나스타샤가 말라비틀어진 화초처럼 시들었다. 매끈하던 이마와 미간에 잔주름이 잡히고 늘상 여우 입매처럼 뾰족하게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밑으로 내려왔다. 문제는 눈빛이었다. 한여름의 지중해처럼 반짝여야 할 눈에 구름이 잔뜩 낀 채 먼 곳을 바라봤다.
설마, 원하는 대로 말하지 않았다고 의기소침해진 건가? 아나스타샤가 침울해진 이유가 겨우 자신이 편히 대하지 않아서라고 착각한 유리는 진땀을 흘렸다. 아나스타샤와 허물없이 지내기 싫었다. 일이 마무리되면 미련 없이 마이애미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아나스타샤에게 바라는 친목 도모는 생일 파티나 신년 행사 때 예의상 보내는 초대장 정도였다.
허물없이 지내면 스트레스받는 쪽은 나야. 아나스타샤야 내키는 곳으로 흐르면 그만인 풀잎이라지만 유리는 아니었다. 괜히 물살에 휩쓸려, 멀쩡히 달려있던 나무에서 떨어진 원숭이 꼴이 될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우울해해도 방도가 없다. 나 때문에 오시프가 쳐둔 덫에 보기 좋게 걸린 것도 어찌 보면 뿌린 대로 거두는 일 아니던가. 오시프가 아니어도 누군가가 아나스타샤를 노렸으리라. 유리는 애써 거절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유리는 라포포르트가 되기에는 물렀고, 아나스타샤 앞에서는 더했다. 음울한 얼굴은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견디기가 어려웠다.
“……하면 되잖아. 하면. 됐지?”
아나스타샤는 태도를 바꾼 유리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가만히 있기만 했는데 도련님께서 알아서 말을 편하게 해주다니! 그뿐만이 아니다. 아픈 개라도 봤는지 눈빛이 흔들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나스타샤의 얼굴에 껴 있던 구름이 사라지며 밝은 빛이 내리쬐었다. 그는 가랑이 사정도 잊고 양팔을 벌려 유리를 껴안으려 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유리가 빈 술병을 들고 일어났다. 아나스타샤는 온기가 남은 소파를 짚은 채 유리를 올려다봤다. 그가 머물렀던 자리에서 한 박자 늦게 페로몬이 풍겼다. 상대를 유혹하기 위한 향이 아닌, 선을 긋는 경고였다. 알파는 다른 알파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그게 매너였다. 그러나 아나스타샤에게 예의범절이란 인파가 모인 곳에서나 적용되는 입마개였다.
공중에 남은 페로몬은 음미하기엔 너무 옅었다. 더 가까이 맡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키스라도 하면 어떨까. 입을 맞추면서……. 욕망을 품은 시선이 유리의 입술에 닿았다. 한 번 탐하고 끝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맛이었다.
“피곤하다면서. 이만 눕지?”
아나스타샤가 손바닥으로 소파를 짚은 채 올려다보는 자세로 가만히 있으니, 유리는 그가 자신에게 또 바라는 게 있나 싶었다. 망상에서 빠져나온 아나스타샤는 눈만 깜빡였다. 침묵이 길어지자 유리가 고개를 돌렸다. 라포포르트의 명성과 비교해, 유리 라포포르트는 순진하고 여린 알파다…. 아나스타샤의 눈이 가늘어졌다.
“가서 누우면 원하는 만큼 얘기해줄 테니까.”
“그래, 그러자. 이젠 잘 수 있겠어.”
아나스타샤는 가운을 여미는 척하면서 아랫도리를 요령껏 가리고 침대로 향했다. 이불을 들치고 들어가 눕기 전, 유리를 바라봤다. 그는 소파 앞에 선 채 셔츠 단추를 풀고 있었다. 벗고 들어오나? 아나스타샤의 입꼬리가 여우 주둥이처럼 뾰족하게 올라갔다.
시선을 느낀 유리는 옷을 벗다 말고 아나스타샤를 노려봤다. 벗기를 기대하는 눈빛이 불쾌했으나, 안 벗기도 뭣했다. 유리는 셔츠를 벗어 소파에 걸쳐놓고 아나스타샤에게, 정확히는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술도 진탕 마셨으니 금방 잠들리라는 유리의 생각과 달리 아나스타샤는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올린 채 뭔가를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뭘 원하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유리가 이불을 들치고 들어올 때도 아나스타샤의 노골적인 시선이 따라왔다. 유리는 베고 누우며 말했다.
“자라.”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 매서운 경고였다. 허튼수작을 부리면 이번에야말로 배에 구멍이 생길지도 모른다…. 아나스타샤는 일부러 베개 바깥쪽을 베며 유리와 거리를 벌렸다.
“응, 잘자.”
기댄 베개와 덮은 이불이 부드럽게 몸을 감쌌다. 눈을 감자, 구름 위에 누워 거위의 깃털을 덮은 기분이었다. 곧 천사들이 하프를 튕기며 자장가를 불러줄 것만 같은데, 아나스타샤의 귓가에는 맥박만 요동쳤다. 피가 울컥울컥 지나다니는 소리가 자동차 엔진만큼 시끄러웠다. 아나스타샤는 눈을 떠 방을 확인했다.
초여름이라 그런지 저녁인데도 해가 떠 있어서 바깥이 훤했다. 스탠드를 켜지 않았지만, 방 구석구석이 눈에 들어왔다. 차가 아니라 방이었다. 덮은 이불은 햇볕에 바싹 말린 투명한 냄새가 났다. 차가 아니다. 날 포박하던 괴한들도 화약도 없다.
분명 아래층에서 아이들이 뛰어놀 텐데도 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는 커튼을 뚫고 들어오는 붉은 태양 빛을 바라봤다. 늑골을 부수고 나올 것처럼 팽창한 심장이 폐까지 압박하는지 숨쉬기가 어려웠다. 유리가 총으로 쏴 죽인 남자가 내 옆에 있었고. 반대편에 앉은 남자는 맨주먹으로 얼굴을 으깼지….
아나스타샤의 머릿속에서 낮에 있던 일이 영화 필름처럼 지나갔다. 코가 주저앉았던가.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았던 남자들은 어떻게 됐지? 뭉개진 얼굴은 모자이크가 된 뉴스 속보처럼 흐릿하게 기억났으나 냄새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했다. 화약 냄새도 덮어버렸던 짙은 혈향…….
살고 싶다는 욕망에 가려졌던 공포와 두려움이 이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아나스타샤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뭘 무서워하는 거야. 다 끝났잖아. 집에 무사히 돌아왔고, 옆에는 사람 얼굴을 주먹으로 깨버리는 러시아 불곰이 자고 있는데. 속으로 자신을 어르고 달래봐도 한번 지핀 공포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시트를 꽉 쥔 아나스타샤의 손 위로 유리가 손을 덮었다. 움츠러든 손을 단단하게 감싸 쥐면서도 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을 보던 아나스타샤는 침대 안쪽으로 고개를 돌려 누운 유리를 바라봤다. 그는 숲속의 공주처럼 미동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은은한 노을빛 덕에 아나스타샤는 불그스름하게 번진 유리의 잘생긴 얼굴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인상 쓴 얼굴만 봤을 때는 긴가민가했는데, 역시 잘생겼구나. 어릴 적 봤었던 섬세한 세공 위를 두꺼운 석고로 덮은 듯했다. 왜 라포포르트 씨는―부모, 형제 그 누구든― 세공을 멈춘 걸까? 끝까지 갈고 닦았더라면 성인이 된 이후로도 유리 수잔 라포포르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아나스타샤는 아예 몸을 유리 쪽으로 돌려 누워 인기척을 냈다. 눈을 뜨면 아나스타샤가 원하는 대로 흘러갈 것을 알기에 유리는 끝까지 눈을 뜨지 않았다. 시도는 좋았으나, 그렇다고 아나스타샤의 욕구에서 해방되는 건 아니었다.
“유리.”
가장 좋아하는 목소리가, 가장 마주하기 싫을 때 자신을 불렀다. 유리는 눈을 감은 채 대꾸했다.
“예.”
“유리.”
“왜.”
대답으로 무마할 일이 아니다. 유리는 눈을 떠 아나스타샤를 쳐다봤다. 그의 뒤로 일렁이는 붉은 빛 때문인지, 태양 마차와 함께 떨어진 파에톤처럼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손등을 덮어준 유리의 손을 맞잡으며 얘기했다.
“못 자겠어.”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데.”
유리가 아는 편한 방법은 아나스타샤를 무력으로 제압해 잠들게 하는 것뿐이었다. 조심은 하겠지만 예민할 대로 예민한 아나스타샤가 충격을 못 이기고 영원히 잠들 수도 있었다. 티끌만 한 부작용이 있다면 행동으로 옮기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런 유리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아나스타샤는 손깍지를 끼며 유리의 눈치를 살폈다. 유리 도련님은 싫은 건 안 한다. 날 좋아한다는 말보다 신뢰가 가는 사실이다. 그가 거절한다면 취할 때까지 술을 들이붓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었다.
손이나 주물럭거리며 뜸 들이는 꼴이 답답했지만, 유리는 재촉하지 않았다. 나란히 누운 상태에서 나올 부탁은 흔쾌히 들어 줄만 한 요구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예상했다.
“…키스해주면 안 돼?”
반사적으로 맞잡은 손을 빼냈다. 아나스타샤는 순순히 손을 놔줬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전에 한 번 만져줬으니 키스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알파를 만나야 하는데 상황이 상황이니 가장 가까이 있는 날 선택했다거나…. 유리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의 주변으로 페로몬이 일렁였다.
내가 성욕이나 풀어주려고 뉴욕에 있는 줄 알아? 나는 살인범 손에서 지켜주려고 여기에……. 아나스타샤의 취급에 들끓던 화는 바다에 빠진 쇠 구슬처럼 힘도 못 쓰고 꺼져버렸다. 아나스타샤를 노리는 살인범이 바로 오시프 아니던가. 아나스타샤가 표적이 된 이유도 다 자신이 오시프의 말을 어기고 그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오시프가 바다 건너 대륙에 연쇄살인 사건을 조작하고 뉴욕 한복판에서 추격전을 벌이도록 내버려 뒀을 리 없다. 식어버린 분노 위에 죄책감이 두껍게 쌓였다. 아나스타샤를 지키러 왔으나, 아나스타샤를 가장 위험하게 만드는 인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다.
“이리 와.”
유리가 고개를 내밀며 명령했다. 눈치를 보던 아나스타샤는 활짝 웃으며 유리에게 다가왔다. 순식간에 입술이 닿았다.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덮치듯이 위에 올라타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밀 빛에 가까운 금발은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입술을 씹어먹을 것처럼 난폭하던 입맞춤도 얌전해졌다. 입술을 훑고 볼과 턱에 입을 맞추면 유리는 어깨를 움츠렸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기분을 살폈다. 그가 좋아서 하는 건지, 싫은데 참는 건지 확인하고 싶었다. 표정을 봐서는 도통 모르겠다. 그래도 총을 들이밀지 않으니 좋은 거겠지….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기호를 멋대로 정하고는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유리는 순순히 입을 벌려줬다.
“으음….”
위스키 맛이 났다.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목덜미와 뒤통수를 붙잡았다. 고개를 비틀어 입안 깊숙한 곳을 파고들었다. 시트 위에서 꼼짝하지 않던 유리의 손이 아나스타샤를 붙들었다. 물컹한 혀가 치열을 훑었다. 잇몸에 닿는 혀의 돌기에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가운을 움켜쥐었다. 옆구리에 소름이 돋았다.
당혹감에 유리가 고개를 틀었다. 더 내줬다가는 어떻게 될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본능적으로 알파를 거부하는 유리를 억지로 취하지 않았다. 그는 유리의 볼과 귓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때를 기다렸다.
“…싫어? 그만할까?”
배려심 가득한 다정한 말이 유리의 자존심을 긁었다. 알파를 상대할 때마다 하나하나 물어보면서 했을까? 아니겠지. 유리는 자신을 첫 경험하는 풋내기처럼 다루는 데에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알파는 아나스타샤가 처음인 주제에 말이다.
“……아니.”
알파와 키스하는 것보다 고작 알파와 키스한 것 가지고 위협을 느낀 몸뚱이가 더 불쾌했다. 좆도 만져 주고 밑도 문댔는데 미칠 거였다면 벌써 미치고도 남았다. …나도 정상은 아니지.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보는 유리의 시선이 살기등등했다.
“나 계속해도 되지?”
“…….”
아나스타샤가 웃으며 물었다. 유리는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곧, 아나스타샤가 입술을 덮어왔다. 아나스타샤의 화려하고 강렬한 페로몬이 코를 찔렀다. 눈꺼풀이 뻐근해지고 관자놀이가 당겼다. 아무리 상대를 유혹하려 해도 알파에겐 통하지 않는다. 알파에게 알파의 페로몬이란 경계가 목적이니까. 두어 번 입을 맞댄 것으로 적응될 리가 없다.
유리는 숨을 꾹 참으며 아나스타샤의 입술을 소심하게 빨았다. 제정신으로 알파와 키스하다니.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저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코로 숨을 쉬니 페로몬이 뇌로 들어가는 기분이었고, 입으로 숨을 쉬니 아나스타샤가 벌어진 틈으로 혀를 밀어 넣고 빈틈없이 막아서며 타액을 넘겨줬다.
숨쉬기도 힘든데 페로몬을 맡고 침까지 물고 있으려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입 안쪽에 흥건하게 고인 타액을 어쩔 수 없이 삼켜야 했다.
“음, 읍…. 잠, 잠깐….”
호기롭게 덤볐던 유리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백기를 들었다. 아나스타샤가 웃음을 흘리더니 유리 옆에 모로 기대 누웠다. 유리는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아나스타샤가 멀찍이 떨어졌음에도 그의 독특한 페로몬 향은 여전했다.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유리의 코를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하하, 숨은 쉬면서 해야지. 키스할 때 어떻게 숨 쉬어야 하는지 알려줘야 했나?”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볼까지 흥건하게 젖은 타액을 닦으며 유리가 상체를 일으켰다. 아나스타샤 밑에 있는 것보다 그의 위에 있는 것이 마음은 편했다. 적어도……. 유리는 그가 했던 것처럼 아나스타샤의 뒷목을 붙잡고 천천히 고개를 들이밀었다.
더는 못 하겠다고 항복하는 줄 알았는데 기세등등하게 올라타다니. 자세가 마음에 안 들었나?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빤히 쳐다봤다. 여유가 느껴지는 회색 눈동자가 나를 덮치려 했다. 정말 그런 깜찍한 이유로 숨도 제대로 못 쉬었어? 귀엽게 굴면 자꾸 맞춰주고 싶잖아. 아나스타샤는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순순히 유리에게 몸을 맡겼다.
유리는 정직하게 입을 맞췄다. 맞닿는 소리도 나지 않는 스침이었다. 입술에 닿은 것이 입술인지, 나뭇잎인지 눈을 감고 있었더라면 확인할 방법이 없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도 유리는 볼과 입술, 턱에 가벼운 입술 도장을 찍었다. 형편없는 애무를 귀여워하는 것도 잠시, 그와 있었던 일을 생각해보면 굿나잇 키스로도 못 쓸 것 같은 자잘한 입맞춤이 도발로 느껴졌다. 아나스타샤는 하얀 치아를 보이며 유리의 장난에 장단을 맞췄다.
“유리, 입안에도 키스해주면 안 돼? 내 혀 위에도 입 맞춰줘.”
“시끄러워. 말 안 해도 할 거야.”
아나스타샤가 도발하자 유리는 인상을 구기며 매섭게 받아쳤다. 아나스타샤는 혀를 내밀어 한 번 더 유리를 부추겼다. 또 애처럼 볼에 뽀뽀할 것인지. 아니면 혀 위에 입을 댈 것인지……. 유리는 눈을 꽉 감고 혀에 입술을 댔다. 축축하고 차가우면서 물컹거리는 혀가 닿은 불쾌감에 고개를 떼기 전에 아나스타샤가 입을 벌려 유리의 입술을 삼켰다.
피부 주변에만 은은히 풍기던 유리의 페로몬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아나스타샤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유리의 존재를 삼켰다. 폐 속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는 알파의 존재감이 쾌감을 불러일으켜 불안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윽…….”
자기주장이 강한 아나스타샤의 페로몬을 맡아도 유리는 버텼다. 배후가 밝혀지고 나서도 뻔뻔하게 마주 볼 정도는 내줘야 하니까. 열렬히 입술을 핥고 혀를 빨았다. 흥분을 주체 못 한 아나스타샤와 치아가 간간이 부딪혔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배 위에 올라탔다. 아나스타샤가 기다렸다는 듯이 유리의 문신 위를 더듬는 척하다가 옆구리를 쓸었다. 페로몬 때문에 예민해진 탓에 가벼운 접촉에도 유리의 몸이 펄쩍 뛰었다.
“흐읏…….”
“무리할 필요는 없는데. 유리. 키스만 더 해줘도 돼.”
“키스만?”
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회색 홍채는 거짓말을 가려내는 힘이라도 있는지 고요하게 아나스타샤를 꿰뚫었다. 유리는 아랫배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그의 궁둥이와 허벅지 안쪽에 발기한 성기가 짓눌렸다.
“읏……. 하하, 거기까지 신경 써주려고? 그럴 필요 없어. 그냥, 생리현상이잖아.”
“알파 경험이 없어서 상대하기 번거로운가?”
“아니. 여긴 우리 형 집이니까.”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허벅지를 쓸며 대답했다. 그래, 집안에서 했다가는 별관으로 쫓겨난다고 했었나. 유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쓰지도 못하면서 키스는 왜 하자고 한 거야? 설마, 정말 키스만 하려고 했나? 아나스타샤가? 유리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아나스타샤를 내려다봤다.
“유리. 나는 정말 키스만 할 생각이었어. 더 했다면 네 가슴을 주무르는 정도였겠지. 네가 올라타서 먼저 유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유혹’이라는 단어에 유리의 입매가 삐뚤어졌다. 아나스타샤는 말없이 외복사근에 그려진 문신을 매만졌다. 과연 유리 도련님의 첫 상대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세 송이의 장미를 하나하나 어루만졌다.
“그래서 이대로 자겠다?”
“음? 하하, 안 자면 빨아주기라도 하려고?”
아나스타샤는 이 정도로 얘기하면 유리가 알아듣고 내려올 줄 알았다. 오메가와 섹스할 때도 펠라를 받아보는 쪽일 것 같은데 하물며 한 번도 상대해보지 않은 알파의 성기를 어떻게 입에 물겠는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유리를 떼어내려고 했으나, 아나스타샤의 비아냥은 이미 불이 붙은 유리의 자존심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왜? 내가 못 할 것 같아? 여태 만난 알파 중에서 최악이라 좆이 서도 쓸 기분이 안 난다 이거지? 유리는 물러서지 않고 아나스타샤가 입은 가운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가운이 구겨지며 가슴과 배가 드러났다. 나는 라포포르트야. 러시아의 기둥이 되는 가문의 남자라고. 사교계의 별이라 불리는 아나스타샤가 만난 최악의 상대로 낙인찍히는 일은 살을 도려내는 것만큼 싫었다. 아나스타샤에게서 “아, 라포포르트? 별거 없던데.” 같은 말을 듣느니 좆을 입에 물겠다!
유리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아나스타샤를 내려다봤다.
“내가 못 할 것 같아?”
“응? 아니, 그건 아닌데. ……유리. 잠, 잠시만.”
아나스타샤가 말리기도 전에 유리가 가운을 잡아당겼다. 허술하게 묶여있던 허리끈이 풀리며 아나스타샤는 나체를 유리 앞에 보여야 했다. 왜, 왜 내려가지 않고 위에서 버티는 거야. 할, 할 줄은 알고 객기 부리는 거야? 경험도 없으면서 어떻게든 리드하려는 게 귀여웠는데, 이제는 난처했다. 바깥에 노출된 아나스타샤의 성기는 눈치 없이 꺼떡이며 유리의 허벅지를 툭툭 쳐댔다.
야차 같은 얼굴을 한 유리가 가랑이 사이에서 들썩이는 성기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아흑. 아나스타샤, 이 버릇없는 몸뚱이 같으니! 말이랑 행동이 다르면 어쩌자는 거야! 아나스타샤는 황급히 손으로 성기를 가리고 변명을 덧붙였다.
“유리, 무리하지 않아도 돼. 응? 내가 무리한 부탁을 한 건 맞지만…. 전에도 얘기했지, 나는 쫓겨나기 싫…….”
“닥치고 다리나 벌려.”
유리가 무릎 쪽까지 내려가 앉으며 얘기했다. 아나스타샤는 입을 다물고 유리가 명령한 대로 무릎을 굽혀 다리를 세웠다. 유리가 한쪽 무릎에 입술을 댔다. 더운 숨과 함께 말랑한 감촉이 다리의 긴장을 풀어줬다. 아나스타샤는 더 말릴 수가 없었다. 인상을 쓰고 무릎부터 천천히 애무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밑그림부터 다시 그려야겠어. 아나스타샤는 그 순간, 유리를 모델로 했던 캔버스를 생각했다.
유리는 무릎뼈를 아프지 않게 이로 깨물고는 안쪽 허벅지로 천천히 내려와 근육 결을 따라 갈라진 피부를 혀로 핥았다. 혀가 훑고 지나간 부분이 차갑게 식었다. 아나스타샤는 마른침을 삼키며 유리를 내려다봤다. 입술 사이로 내민 혀와 공작새의 꽁지깃처럼 풍성한 속눈썹이 아나스타샤를 사로잡았다.
키스할 때는 오래된 트럭처럼 덜덜 떨더니 아래쪽 애무는 왜 능숙한 거야? 생각 외로 매끄러운 유리의 애무에 아나스타샤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마음 한편에 자신의 집에서 알파와 뒹굴었다는 사실을 안 다비드의 격노한 얼굴이 아른거렸다. 끝까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별관으로 쫓겨나고 싶지 않았다.
“읏…. 유, 유리. 그렇게 안 해도 되는데…. 응? 꼭 입에 넣지 않아도 돼. 저번처럼 손으로….”
아나스타샤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유리의 머리를 밀어냈다. 유리는 밀리는가 싶더니 고개를 쳐들어 아나스타샤를 노려봤다. 날카로운 시선에 아나스타샤는 헛숨을 삼켰다. 마음 같아서는 바짝 열이 오른 얼굴에 정액을 싸지르고 싶지만, 다비드가 있는 저택에서는 안 될 일이었다.
“형한테 들키면 쫓겨나, 유리!”
“안 쫓겨나게 참아.”
“유, 유리…… 으읏.”
거절을 가볍게 무시한 유리가 대담하게 성기를 입에 물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머리칼을 그러쥐며 신음했다. 아나스타샤가 짧게 흘린 신음에 유리는 겨우 입에 담은 성기를 조금 더 삼키려고 고개를 수그렸다. 삼키지 못할 이물질이 입에 가득 차자 침이 흥건하게 나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유리는 펠라를 해준 적이 없다. 받았으면 받았지 남의 좆을 입에 넣을 정도로 색을 밝히는 인물도 아니었다. 아나스타샤의 도발에 보기 좋게 걸려들어 성기를 물게 된 것이다. 일단 물기는 했는데, 여기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 내 걸 빨아줬던 놈들이 어떻게 했더라? 유리는 과거 속 자신의 성기를 애무했던 오메가들을 생각하며 고개를 작게 움직여댔다.
“하…. 유리. 으음…. 못 하겠으면….”
선단만 물고 우물거리는 걸 지켜보던 아나스타샤가 말문을 열었다. 음모를 노려보던 유리가 아나스타샤를 쳐다봤다. 시선이 마주쳤다. 흥분으로 달뜬 아나스타샤의 얼굴을 목격한 유리는 성기를 뱉어내고 말았다. 타액이 실처럼 늘어나 입술과 귀두를 이었다. 생글생글 웃던 아나스타샤의 눈이 눈에 띄게 커졌다. 벙찐 유리의 얼굴과 침으로 젖은 성기가 너무나 가까웠다.
“못, 하겠으면…. 천천히 음경부터 훑어봐. 다 못 삼켜도 되니까, 손으로 만지면서….”
못 하겠으면 그만하라고 해야지,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는 본능에 충실한 자신의 주둥이를 원망하며 순순히 고개를 틀어 음경을 훑는 유리를 감상했다. 키스할 때보다 움직임이 부드러웠다. 인상을 쓰고 혀를 내밀어 팽창한 핏줄을 핥는 모습도 장관이었다. 페로몬이 방 밖으로 나가지 않게 조절만 하면 형한테 걸릴 일도 없을 거야. 아나스타샤는 결국, 눈앞에 놓인 욕망에 지켜야 할 규율을 저버리고 말았다.
“그래…. 그렇게. 뿌리 쪽을 빨아봐. 응…. 펠라 해본 적 있어?”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귀를 매만지며 물었다. 음모에 코를 박고 사타구니와 음경이 이어진 부분을 키스 마크 만들듯이 빨던 유리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네가 처음으로 맛보는 자지구나?”
저급한 용어에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봤다. 따가운 시선에도 아나스타샤는 능청맞게 웃었다. 아나스타샤에 관한 일이라면 성생활을 제외하고는 전부 알고 있는 유리였으나, 지금은 성생활 부분을 아는 것이 간절했다. 아나스타샤의 눈에는 험악하게 일그러진 얼굴보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귓바퀴만 보였다. 빨갛고 뜨거웠다.
“원하던 맛이 아니야?”
입을 벙긋거리던 유리는 닥치라는 말 대신 성기를 삼켰다. 선단을 겨우 삼키던 입은 이번에도 선단만 겨우 삼켰다. 반만 삼켜도 황홀할 텐데. 아니, 뿌리까지 처박으면 볼만할 거다. 아나스타샤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유리의 뒤통수를 살짝 짓눌렀다.
“컥.”
성기가 목젖을 쳐서 유리는 더 삼키지 못하고 고개를 물렸다. 목구멍이 찢어질 뻔했다. 이걸 삼키라고 지금 머리를 눌렀어? 그는 꼿꼿하게 선 성기를 노려봤다. 무식하게 큰 좆대가리를 마주하니 객기를 부리고 싶어도 부릴 수가 없었다. 여기서 포기하면…. 체면이 까이는데. 성기를 앞에 두고 한 고뇌가 아나스타샤에게도 들렸는지, 그가 성기 뿌리를 붙잡아 유리의 입에 귀두를 문댔다.
“절반은 삼켜야지. 아니면 입술을 오므리고 힘껏 빨아봐. 젖 먹을 때처럼.”
젖과 닮은 부분이라고는 자음뿐인 좆을 앞에 두고 머뭇거리던 유리는 결심한 듯 성기를 입에 물었다. 귀두를 머금은 것뿐인데도 입이 가득 찼다. 하아…. 아나스타샤가 탄식을 흘리며 뒷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래…. 이는 세우지 말고, 입을 더 크게 벌려서 더 물어봐.”
아나스타샤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을 뿐 전처럼 힘을 줘서 누르지 않았다. 유리는 본인의 힘으로 고개를 내리며 성기를 조금씩 조금씩 삼켰다. 음경을 절반도 못 미치게 물었는데 귀두가 목젖을 쳤다. 여기서 더 했다가는 마셨던 위스키를 다 토해낼 것 같았다.
“으응… 잘했어, 유리. 정말…. 소질이 있는걸. 반이나 삼키다니.”
유리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형편없는 펠라였는데, 아나스타샤는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뿌리까지 삼키는 놈들이랑 질펀하게 놀았을 인간이 해주는 칭찬은 전혀 반갑지 않았다.
“이는 세우면 안 돼. 내 자지에 상처가 나면 아물 때까지 핥게 시킬 거야. 알았지? 자아, 천천히 움직여 봐. 막대 사탕을 먹는다고 생각해.”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서툰 애무가 마음에 들었다. 능숙해질 때까지 지도해주면 좋겠지만, 약속한 일이 있으니 불가능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말대로 볼이 홀쭉하게 들어갈 만큼 강하게 성기를 빨았다. 귀두가 뽑혀 나갈 것 같은 흡입력에 아나스타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힘도 좋구나. 목구멍까지 삼킬 줄 안다면 누구보다 오래 성기를 받아낼 텐데. 명기로 개발시키지 못하는 게 한이었다.
“아아…. 유리, 너무 좋아. 으응….”
“흡…. 음….”
칭찬이 빈말인 걸 아는데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상대한 알파 중에서 최악은 아니겠다는 안도감이 들자 겨우 선단을 삼켰던 입이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목구멍을 불쾌하게 치고 들어오는 성기에도 유리는 숨을 참아가며 견뎠다.
밀 빛 머리카락이 밑으로 쏟아졌다. 유리의 정수리가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에 껴 위로 올렸다. 찌푸린 미간과 끝이 빨간 콧방울, 성기를 힘있게 조인 입술이 아나스타샤의 눈을 즐겁게 했다. 성기를 녹여 먹을 것처럼 빨아대던 유리가 입을 떼고 혀를 내밀어 음경을 핥았다. 툭 튀어나온 혈관을 따라 혀를 세워 굴리기도 하고 음낭을 빨기도 했다.
“유리.”
음모에 코를 박고 뿌리를 애무하던 유리가 눈동자만 굴려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봤다. 세상에. 이 남자가 나를 좋아한다니. 여태 왜 나서지 않은 거야? 아나스타샤는 은둔했던 유리를 탓하며 성기를 잡고 흔들었다. 유리에게 끝까지 맡기고 싶었지만, 아나스타샤는 사정이 급했다.
유리는 대범하게 귀두 끝에 얼굴을 붙이며 입을 벌렸다. 벌어진 입안에는 모이를 기다리는 듯 작게 꿈틀대는 혀가 보였다. 저 위에 사정하면 기분 좋겠지. 성기를 훑는 아나스타샤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아랫배에 피가 몰려 화끈거렸다.
“받아마실 수 있겠어?”
놀리는 어투로 묻자, 유리는 보란 듯이 귀두 끝을 물었다. 시선은 아나스타샤를 향했다. 해볼 테면 해보라는 도발적인 눈빛이 아나스타샤의 버튼을 눌렀다. 아나스타샤는 사정 직전에 성기를 빼냈다. 유리의 얼굴에 정액이 튀었다. 눈을 뜨고 있던 유리는 얼굴에 점액질 애액이 묻자 인상을 쓰며 눈을 감았다. 아나스타샤는 천천히 성기를 훑었다. 여러 번에 걸쳐 쏟아진 정액을 얼굴로 고스란히 받아낸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손을 떼고 헐떡일 때까지 그의 가랑이 사이에 웅크리고 있었다.
“하하……. 유리, 엉망이 됐네.”
홀가분한 목소리가 유리를 놀렸다. 유리는 그제야 눈을 떴다. 눈꺼풀 위로 떨어진 정액이 길고 풍성한 속눈썹 끝에 맺혔다. 그대로 눈을 감았다가는 정액이 눈 안에 들어가리라. 아나스타샤는 정액이 묻은 눈가를 손으로 닦아주고는 손가락을 빨았다. 비리고 텁텁하면서 식감까지 물컹한 정액을 먹는 건 별로였다. 건강한 알파의 맛은 언제 맛봐도 별로다. 아나스타샤는 콧등을 찡그렸다.
“그걸 왜 먹어?”
유리도 마찬가지였는지 이해 안 된다는 얼굴로 아나스타샤를 노려봤다. 펠라를 하면 정액을 입에 담기는 하지만, 그걸 삼키지는 않는다. 유리에게 입으로 봉사했던 사람 중 정액을 삼켰던 이는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히죽 웃었다.
“내 몸에 있던 건데 뭐 어때?”
“하. 오줌도 받아 마시지 그래?”
“그건 좀…… 자세가 흉하잖아. 남한테 먹이는 건 짜릿하겠지만.”
비아냥을 진지하게 받아친 아나스타샤 때문에 유리는 말없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끝나고 나니 피곤했다. 페로몬을 닦아내고 자고 싶었다. 다비드 시모나로티가 저택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아채면 안 되니 환기부터 시켜야지. 유리는 슬리퍼도 신지 않고 어슬렁어슬렁 창가로 향했다.
“유리는 안 해도 돼?”
테라스 창문을 여는데,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유리는 정액을 뒤집어쓴 채로 아나스타샤를 돌아봤다. 그는 유리가 벗겨놓은 대로 나체를 드러낸 채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유리의 시선이 부푼 자신의 사타구니에 닿았다. 뭐, 해야 되면 빨아주기라도 하려고? 기브 앤 테이크도 아니고…. 유리가 아나스타샤의 요구를 들어준 건 순전히 오시프가 벌인 일에 공주가 휩쓸린 것이 미안해서였다.―성기까지 빨아줄 생각은 없었지만.―
“됐어. 잠이나 자.”
“씻게?”
유리는 물음을 무시하고 욕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아나스타샤는 그제야 바람처럼 웃으며 이불을 덮었다. 맨살에 닿는 포근한 이불의 감촉이 좋았다. 고개를 베개에 문지르며 편한 자리를 찾았다. 숨을 쉴 때마다 유리의 페로몬이 풍겼다. 계속 맡으니 중독되는 향이다. 꼭 오래된 궁전에 놀러 온 기분이었다. 가을 궁전……. 나뭇잎도 지고 열매가 익는 계절, 따사로운 가을볕에 달궈진 패브릭 소파에서 날법한 향이었다.
코를 박고 맡아보면 더 정확히 알 수 있을 텐데…. 아나스타샤는 잠들기 전까지 유리의 페로몬, 그의 존재를 되뇌다 잠들었다.
유리는 샤워를 끝내고 나왔다. 페로몬을 지우려고 세 번이나 씻었더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수건을 허리에 걸치고 방으로 나온 유리는 혹시 씻는 사이에 아나스타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싶어 창문부터 닫았다. 다행히 아나스타샤는 침대에 파묻혀 자고 있었다.
조용했으면 좋겠는데 조용하면 불안해지는 사람이다. 이래서 내가…….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흉보며 침대맡에 앉아 잠든 모습을 구경했다. 턱 아래까지 이불을 덮은 아나스타샤는 평온해 보였다. 그래, 아나스타샤는 여유롭고 능숙한 모습이 어울린다.
잠이든 프시케를 훔쳐보는 큐피드처럼 유리는 한참을 노을빛에 아롱거리는 아나스타샤를 감상했다. 유리의 얼굴에 풋풋한 미소가 걸렸다. 아름다운 내 아나스타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광대에 입을 맞추고는 그의 옆에 누워 잠을 청했다.
오랜만에 라이엇과 함께하는 아침 식사였다. 오랜만에 아침까지 집에 머문 라이언 아빠를 본 두 천사는 눈을 뜨고서부터 여태 라이엇의 뒤를 쫓아다니며 아빠, 아빠, 하고 조잘거렸다. 라이엇은 최선을 다해 주의를 끄는 두 천사를 씻기고 옷까지 입힌 뒤 식당에 데려와 의자에 앉혔다.
라이엇이 홀로 두 아이를 챙긴 덕에 다비드는 편히 출근 준비를 하고 식당에 먼저 내려올 수 있었다. 두 천사는 다비드를 보고는 활기찬 목소리로 “아빠, 안녕!”하고 인사하며 볼에 입을 맞췄다. 라이엇은 다비드와 눈인사만 나눈 뒤 품에 셋째인 가브리엘을 안았다. 가브리엘은 이유식을 먹어야 했다.
“공주 삼촌 안녕. 왕자 삼촌도 안녕.”
“안녕, 공주 삼촌.”
두 천사는 샌드위치를 포크로 찍으며 아나스타샤에게 지나가듯이 인사했다. 미카엘은 유리에게도 인사했는데, 유리는 덤덤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여줬다.
“그래, 엔젤. 좋은 아침이야. 라이언이 오니까 좋아?”
“응! 라이언 아빠가 오늘 씻겨줬어. 치카도 해줬다?”
라파엘답지 않게 큰소리로 대꾸했다. 그러고는 라이엇을 보며 일찍 일찍 다니라며 잔소리까지 했다. 가브리엘에게 이유식을 먹이던 라이엇은 헛웃음을 삼키며 응…. 하고 답했다. 요즘 일이 바빠지는 바람에 밤늦게 들어오고 새벽같이 나가다 보니 아이들은 라이엇이 집에 안 들어오는 줄 알고 있었다.
“마자, 미카엘은 라이언이 잡혀간 줄 알았어.”
“뭐? 아빠가 왜 잡혀가.”
라이엇이 묻자 미카엘은 샌드위치에 삐져나온 오이를 쭉 빼내 오물오물 씹으며 얘기했다.
“늦게 다니면 경찰 아저씨가 잡아가잖아요.”
“하하.”
흐뭇한 얼굴로 라이엇과 천사를 바라보던 다비드가 웃었다. 출근이 이르고 퇴근이 늦어 아이들과 인사를 나눈 지도 오래됐기에 라이엇은 말없이 이유식을 스푼으로 뒤적일 뿐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나이를 합쳐도 10이 넘지 않는 작은 아이들에게 혼나는 라이엇을 재밌다는 듯이 지켜보다 장난쳤다.
“천사들이 아빠 얼굴 잊어버리겠어. 그렇지?”
“아니? 얼굴은 기억하는데.”
그러나 천사들은 공주의 장난에 어울려줄 생각이 없었다. 미카엘이 맹랑하게 대꾸하고는 테이블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다비드가 아이의 손이 닿는 곳까지 우유 잔을 밀어줬다.
“응…. 거실에 아빠 얼굴 있어서 안 잊어버려.”
라파엘도 거들었다. 그래, 그렇구나. 아나스타샤는 입술을 삐죽였다. 아기오리와 어울리려다 결국 떨궈진 거위 신세가 됐다. 가족 식사에 낀 유리는 조용히 식사했다. 혼자 말없이 먹다 보니 제일 먼저 접시를 비웠다. 관리인이 다가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내줬다. 그녀는 유리의 옆에 섰다가 이질감을 느꼈는지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나 가족에게 눈이 팔린 다비드는 보지 못했고, 맞은 편에 앉아있던 라이엇만 알아봤다.
“음, 아냐. 오늘은 약속이 없니?”
식사도 잊고 라이엇을 바라보던 다비드가 불현듯 고개를 돌려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방울토마토를 먹던 아나스타샤가 눈을 꿈뻑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제 못한 미팅 가야 해. 오전에 보기로 했어. 천사들 등원은 내가 못 할 것 같아.”
“그래. 알았다.”
“그럼 등원은 제가 할게요.”
라이엇이 끼어들었다. 단정한 다비드의 낯에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회사에 늦을 텐데.”
“괜찮아요. 오전에 테스트만 하면 돼서 일찍 갈 필요는 없거든요. 아, 다비드 씨도 데려다줄까요?”
“나까지?”
“네.”
두 사람의 시선에 꽃이 피어났다. 아나스타샤는 질린다는 눈을 하고는 유리를 힐끔 쳐다봤다. 유리는 인상을 쓴 채 아메리카노에 설탕을 넣고 있었다. 저건 원두에 대한 모욕이다. 아메리카노를 설탕물로 만들다니. 앞에서는 형 내외가 사랑을 나누고 있었고 옆에서는 유리가 이탈리아를 모욕하고 있었다. 괴롭다! 아나스타샤는 딸기를 꼭지 채로 입에 넣으며 눈을 감았다.
“그래, 안 바쁘면 부탁하지.”
“응. 좋아요.”
다비드가 허락하자 라이엇은 태양을 향해 핀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었다. 잠깐이지만 다비드 씨랑 드라이브하는 기분을 낼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이반이 미국을 찾는 바람에 무기 개발 현황을 보여주려고 회사가 바빠져서 도통 데이트를 즐길 수가 없었는데…. 아이들부터 데려다줘야지. 손도 잡고 키스도 해야지! 라이엇은 들뜬 마음으로 가브리엘에게 남은 이유식을 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