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3. 드라이브 데이트 (3/10)

3. 드라이브 데이트


유리는 한동안 아나스타샤가 또 계약 조건을 바꿀까 봐 좌불안석이었다. 다행히 인간은 입이 하나인 족속이라 아나스타샤가 다시 번복하는 일은 아직 없었다. 그는 아침, 저녁으로 씻을 때마다 바로 옷을 걸치지 않고 젖은 몸을 유리에게 보이며 구경하라고 내줬다. 유리는 어쩔 수 없이 아나스타샤의 벗은 몸을 구경하고 만져야 했다.

공주가 유리에게 몸을 보여주는 이유는 밀랍 인형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 제작할 밀랍 인형이고 거기에 허락만 해주면 되는데, 저 인간은 왜 저렇게 열정을 보인단 말인가?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과한 배려와 관심이 달갑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일이 끝난 뒤에도 인형이 잘 만들어졌냐면서 연락할지도 몰라. 아나스타샤랑 연락이라니. 꼭 보고 있던 영화 속 주인공이 튀어나와 말을 거는 것 같다.

“오른쪽 날갯죽지 밑에 점이 있어.”

아나스타샤가 손을 뒤로 해, 등을 열심히 더듬었다. 이쯤인가? 하면서 만지는 곳이 손가락에 쓸려 발갛게 변했다. 그가 짚은 곳엔 점은커녕 털도 없었다. 유리는 점은 못 찾았지만 대충 아무 곳이나 손가락으로 찍었다.

“예, 여기 있네요.”

“그렇지? 점 하나도 똑같이 만들어야 해.”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날 온전하게 만들기로 했잖아.”

그걸 어떻게 확인할 건데? 인형을 완성해도 알리지 않으면 아나스타샤는 평생 자신의 밀랍 인형을 보지 못할 것이다. 아나스타샤의 요구에 불만이 많았으나, 유리는 참았다. 괜히 따져서 새 조건이 달릴 바에야 침묵하는 편이 이로웠다.

“가죽은 어느 정도 알겠지?”

“예.”

벌써 며칠째 알몸을 구경하는지 모르겠다. 죽을 맛이다. 가슴과 배, 다리를 만졌을 때는 정말 콱 죽고 싶었다. 고개를 들어도 자꾸만 중심으로 시선이 쏠리는 바람에 아나스타샤가 웃으며 “그렇게 쳐다보면 아무리 나라도 선다고.” 하는 웃음도 안 나오는 경고를 하는 바람에 신경이 쓰여 자신도 모르게 아래를 내려다봤고, 안부라도 묻듯 고개를 치켜든 좆 대가리와 눈이 마주친 것이 나흘 전이었다.

앞, 뒤로 다 봤으니 이제 끝났나? 유리의 칙칙한 얼굴에 일말의 기대감이 스쳤다.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뒤를 돌아서더니 유리를 향해 팔을 벌렸다. 유리의 시선은 당연히 아나스타샤의 사타구니로 향했다.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렸다.

“왜 그렇게 쳐다봐? 발기한 것도 필요해?”

“아니! 아니야. 그건 됐어.”

“그래, 그래. 그럼 이번엔 내 품을 느껴보자고.”

그는 당장이라도 유리를 안을 것처럼 팔을 벌린 채 다가왔다. 다가온 만큼, 유리는 질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아니…. 이젠 된 것 같은데요. 품 같은 건 왜 느낍니까?”

“안았을 때도 나 같으면 좋잖아.”

이 두께, 이 촉감. 아나스타샤가 스스로 자신을 껴안으며 속삭였다. 유리의 미간이 점점 좁아지고 입꼬리가 밑으로 내려갔다.

“내가 왜 당신 인형을 껴안으리라 생각하는데?”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얼굴이 더 험악하게 찌그러졌다. 아나스타샤는 입을 다물고 웃었다. 유리는 “혹시 모르잖아.” 뒤에 올 말이 뭔지 잘 알았다. 날 그런 수준으로 본다니. 사람을 욕보이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됐어. 이 이상으로는 필요 없어. 어차피 당신 얼굴만 정교하게 만들 거야.”

“이젠 필요 없어?”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유리는 마른 수건을 아나스타샤의 허리에 둘러주며 답했다.

“그래. 이제 됐어.”

됐다고, 필요 없다고 몇 번을 얘기했는가. 유리가 한숨 쉬듯이 대꾸하고 나서야 아나스타샤는 유리가 둘러준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아침, 저녁으로 치루던 전쟁도 이제 끝이다. 유리는 해방감과 함께 급습하는 피로에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아나스타샤가 장학 재단을 세우고 재능 기부를 받아 가난한 청소년들의 꿈을 이뤄주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들고 미국행에 올랐다는 사실은 유리도 알고 있었다. 재단을 세우는데 마약과 술이 오가는 파티에 왜 참석하는지는 이해 못 했지만 말이다.

페레그린의 파티가 있은 후에 두 번 더 파티에 참석했고, 그곳에서도 마약과 마주해야 했다. 다행히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옆구리에 끼우다시피 데리고 다녔고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유리에 관한 소문도 퍼져서 아나스타샤를 귀찮게 하는 무리도 없었다.

유리는 편해서 좋았지만, 아나스타샤는 아니었는지 집으로 돌아갈 때 어깨가 축 처져선 창밖만 바라봤다. 어쩌면 재단 설립은 허울뿐인 목적이고 사실 마약, 난교 파티가 목적인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문란한 남자가 갑자기 무슨 변덕이 들어서 기부를 자처한단 말인가. 탈세라면 모를까.

뭐가 됐든 내 알 바는 아니지. 그가 유령회사를 세우든 정말 장학 재단을 세우든 관심 없었다. 중요한 건 그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다.

유리는 카푸치노를 마시며 생각했다. 안에 넣은 시럽의 단맛이 에스프레소의 쓴맛을 잡아줬고 우유가 남은 쓴맛을 부드럽게 덮어줬다. 온실 안으로 들어오는 햇볕과 따스한 공기 때문에 맛이 더 좋았다. 물이 채워진 풀은 얕은 연못처럼 보였다. 온실에 심어진 식물 덕에 실내에 있으면서도 실외에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앞에는 문란한 남자가 턱을 괸 채 커피 마시는 유리를 지켜봤다. 유리가 잔을 내려놓고 입술에 묻은 거품을 혀로 훑자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어때? 입에 맞아?”

“예.”

“다행이야. 유리가 아메리카노도 안 좋아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아메리카노가 맛이 없긴 하지. 내가 만들어 봤는데 입에 맞다니, 기분 좋네. 그래도 원두의 진가를 느낄 수 있는 건 에스프레소지. 아, 유리가 커피를 마실 줄 몰라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야.”

아니긴, 맞으면서. 유리는 속으로 빈정대며 마저 잔을 비웠다. 아나스타샤가 직접 만든 카푸치노였고 맛도 좋았다. 시럽을 줄여도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술과 카푸치노 중에 고르라면 술이다.

“오늘 앰버린과 할 미팅이 미뤄졌어.”

아나스타샤가 테이블에 팔을 걸치며 얘기했다. 유리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오늘은 나갈 일이 없겠네요.”

“아니, 나가야지! 천사 옷을 사러 갈 거야.”

“……예.”

다비드는 좋겠구나. 조카를 친자식처럼 챙기는 동생이 있어서. 유리는 순순히 응했다. 아나스타샤의 계획을 반대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네 옷도 사면 좋지.”

“됐습니다.”

“새 옷 말이야. 파티에 입고 갈 거. 앞으로 몇 번이나 더 가야 할지 모르는데. 갈 때마다 똑같은 걸 입을 생각은 아니겠지?”

“안 됩니까?”

“안 되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파트너면서 어떻게 같은 옷을 입어? 유리는 신경 쓰지 않겠지만, 뭘 입고 오는지 유심히 보는 사람도 있다고.”

아나스타샤의 이해할 수 없는 논리에 유리는 빈 잔을 입에 대며 카푸치노를 마시는 척했다. 옷이고 뭐고 카푸치노나 한 잔 더 마시고 싶다. 아니면 보드카도 좋았다. 남의 시선을 일일이 신경 쓰다간 머리털이 다 빠질 텐데.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앞에 두고 탈모가 온 그를 상상했다.

안 돼…. 절대 그런 일은 만들 수 없어. 끔찍한 몰골을 상상한 뒤―물론 그래도 봐줄 만했다.―그의 부모와 다비드를 생각했다. 쉰이 넘어도 새카만 머리가 나는 인지오 시모나로티와 조반니 시모나로티, 오늘 아침에도 머리를 정갈하게 넘기고 출근한 다비드 시모나로티까지……. 아나스타샤의 머리가 벗어질 확률은 가족력을 봤을 때 불가능한 일이었다.

“할 말 있어?”

심각하게 인상을 구긴 채 잔을 입에 대고 있는 유리를 이상하게 본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그는 빈 잔을 내려놓고 얘기했다.

“한 잔 더 마시고 싶네요.”

“카푸치노?”

아나스타샤의 입꼬리가 광대까지 올라갔다. 주변 공기까지 상기되는 높고 맑은 목소리에 유리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만 기다려. 한 잔 내올게. 마시고 나가자.”

“예.”

“똑같은 걸 줄까? 아니면 라테는 어때?”

“음….”

“라테 맛도 괜찮을 거야. 나를 한번 믿어 봐, 유리.”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의자 뒤를 손으로 짚으며 귀에 대고 이탈리아어로 속삭였다. 영어를 쓸 때와 또 다른 억양에 유리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유리는 일부러 그를 올려다봤다. 코앞에 부담스러운 얼굴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당신을 믿어 보죠.”

“좋아, 기다려.”

아나스타샤가 서둘러 온실을 빠져나갔다. 그의 수작이 눈에 보였다. 입에 맞는 커피를 내주며 에스프레소까지 이끌 생각이다. 속이 뻔히 보이는데도 속아주는 건, 정말 그 맛이 괜찮았고 또 먹이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눈빛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와 대화를 못 하는 것보다, 그가 내려주는 커피를 못 마시는 것이 더 아쉬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리는 풀잎이 떨어진 수영장을 응시하며 아나스타샤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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