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공주와 악당
사건의 진실이 어찌 됐든 아나스타샤가 위험하다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정말 오시프가 관여된 일이라면 살인마를 대하는 것보다 더 골치 아팠다. 유리는 오시프가 적극적으로 이 일을 꾸몄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시모나로티에게는 비밀로 했다. 어디까지나 유리의 추측일 뿐이다. 아닐 수도 있어. 오시프가 판만 깔아준 걸 수도 있고. 항상 뒤에서 교묘하게 사람을 휘두르던 작자가 아니던가. 오시프가 직접 손 쓴 단서를 못 찾았다면 적당히 덮어버리면 된다. 유리는 지나가던 개도 웃을 확률에 희망을 걸었다.
일정 때문에 바쁠 거라던 아나스타샤의 말과 달리, 그의 일과는 단조로웠다. 아침에 두 천사를 유치원에 등원시키고 하원 시간이 될 때까지 저택이나 카페에서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렸다. 전화가 걸려 올 때는 온종일 통화만 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돌아오면 저녁 시간까지 놀아주기 바빴다.
정확히 하자면, 유리 때문에 어딜 갈 수 없던 것이다. 파티장 안까지 경호원을 데려가려면 적당히 파트너처럼 보이게 꾸며야 했는데 유리가 가지고 온 옷은 기성복뿐이었다. 파트너가 될 사람에게 기성복을 입히는 일은 아나스타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날도 다른 때처럼 천사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느긋하게 시내를 구경했다. 아나스타샤는 시내 구석진 곳에 있는 테일러샵에 유리를 데리고 가서는 자신이 입으려고 주문한 정장을 수선해 유리에게 선물했다. 선물보다는 본인이 입으려고 원단부터 실까지 모두 공수해 의뢰한 옷이라고 했는데, 아나스타샤가 주문한 옷 중에서 유일하게 완성된 정장이라 어쩔 수 없이 유리에게 넘겨주게 됐다.
그는 무척 아쉽다는 얼굴을 하고는 유리에게 맞춰 줄인 정장을 손으로 쓸었다. 유리는 그가 쓴 원단과 실이 뭔지도 모르고 단추가 순금인지 도금인지도 알아보지 못했지만, 군소리 없이 받았다.
아나스타샤가 이렇게 유리의 복장까지 신경 쓰는 이유는 이번 파티가 협박 편지를 받은 뒤에 처음으로 나가는 파티이며 아나스타샤가 포섭하려는 사람들이 대거 참석하는 파티이기 때문이다. 다른 모임은 전화 한 통으로 어물쩍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꼭 가야 했다.
해가 지고 나서야 아나스타샤는 옷을 차려입고 거울 앞에 섰다. 긴장되는지 한숨을 쉬었다. 유리는 그가 선물한 검은 원단에 금색 단추가 달린 은은하게 화려한 정장을 걸쳤다. 그는 낮에 다비드가 준 호텔 키를 정장 재킷 주머니 안에 넣었다. 다비드는 키를 주며 유리에게 “아냐가 취해서 인사불성이 되거든 저택으로 오지 말고 호텔로 가줬으면 합니다.”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호텔은 파티가 열리는 곳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이었다.
“페레그린은 나랑 취향이 비슷하거든. 간결하면서 화려한 걸 좋아하지. 문체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말이야.”
그는 소매에 커프스를 달며 중얼거렸다. 유리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헬렌 페레그린은 아나스타샤와 이상할 만큼 취향이 비슷한 여자였다. 유리는 그 이유를 안다. 페레그린은 스물세 살에 아나스타샤와 하룻밤을 보낸 뒤부터 병적으로 아나스타샤를 따라 했다. 어떻게든 그 접점을 만들어 다시 그 육체를 맛보기 위해서. 그녀의 이런 낚시는 몇 번이나 통했다. 비록 상대를 가리지 않는 아나스타샤는 그녀와 몇 번을 잤는지 기억도 못 하지만.
“나는 그 파티에서 내가 건재하다는 걸 보여줘야 해. 그리고, 양을 모아야 하지.”
혼잣말이었다. 유리는 호박이 붙은 넥타이핀을 끼우며 아나스타샤의 독백을 들었다. 유럽은 아나스타샤의 무대이니 걱정이 없을 테고 아시아는 이제 사장으로 파견 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터가 넓어질 것이다. 미국은 지금이 아니면 시간을 내기 힘들었다.
“그래야 뜻을 이룰 수 있어, 아냐.”
키다리 아저씨가 되고 싶은 그 마음을, 유리는 이해 못 했다. 가진 게 많으면 잃지 않으려고 웅크리거나 숨기는 법인데, 아나스타샤는 있으면 있는 대로 화려함을 감추지 않으니 시기 질투며 동경이며 모든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유리는 동경과 질투 그 어느 쪽도 속하지 않은 채 그저 아나스타샤가 하는 일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자, 갈까요. 유리? 오늘 밤을 잘 부탁해요.”
“예.”
응원이 끝났는지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향해 웃어주며 먼저 방을 나섰다. 유리가 그 뒤를 따랐다. 해가 지고 깊은 밤이 찾아온 뉴욕에서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목장을 채울 양을 찾으러 나섰다.
헬렌 페레그린은 뉴욕 중심가의 한 클럽에서 파티를 열었다. 지하를 전부 빌려 요사스럽게 꾸며놓고 시끄러운 음악을 틀고 헐벗은 댄서들을 불러 눈과 귀를 즐겁게 했다. 아나스타샤는 사이키 조명이 어지러운 곳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다. 그 뒤를 경호하는 유리는 컴컴한 어둠에 흡수된 것처럼 희미하게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바로 헬렌 페레그린을 찾았다. 그녀 또한 아나스타샤를 보자마자 반갑게 팔을 벌렸다.
“아나스타샤, 이게 누구야! 살인마의 사랑을 받는 비운의 공주가 여기까지 오다니!”
“헬렌, 오랜만이야. 도박을 끊었으면 얌전히 살 것이지, 파티는 이게 다 뭐야.”
둘은 살벌하게 서로의 안부를 묻더니 입을 맞췄다. 주변에 일행이 있었는데도 거침없었다. 지켜보던 인파가 휘파람을 불며 둘을 부추겼다. 더 해, 더 해! 짐승들의 절규에 유리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 파티가 순수한 파티라고 생각한 내 불찰이다.
헬렌은 아나스타샤의 다리 사이로 다리를 밀어 넣어 그의 사타구니를 허벅지로 노골적으로 짓눌렀다. 유리의 눈에는 가랑이 사이에 흔들리는 여자의 무릎이 보였다. 움켜쥐면 으스러질 작고 연약한 무릎이었다.
“하아, 그래. 인사는 이쯤 하자고.”
아나스타샤가 헬렌 페레그린을 떼어내며 얘기했다. 우우, 주변에서 야유를 보냈다. 아냐, 오랜만이야! 야유 속에서 누군가 아나스타샤에게 인사했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을 부른 사람을 보더니 이름을 부르며 인사해줬다. 아아, 얼마나 짜릿할까. 겨우 하룻밤 보낸 것뿐인데도 이름을 기억해주며 사랑스럽게 웃어주는 알파라니. 질투가 날 만큼 달콤했다.
“아하하! 아나스타샤. 살인마의 사랑이 무섭긴 하구나? 여기서 끝이라니. 아쉬워라. 널 위한 어린 양이 여기 가득한데!”
헬렌이 팔을 벌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다들 헬렌을 따라 환호성을 질렀다. 아나스타샤가 눈독 들였던 사람들이 술잔을 들고 공주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렇게 골라 먹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준 페레그린에게 감사 인사라도 해주고 싶었으나 아나스타샤는 적당히 흘려보냈다. 파티 초대와 현란한 환대는 난교로 가기 위한 전주에 불과했다. 섹스 파티는 범인을 잡은 뒤에 해도 늦지 않는다. 그는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유리 쪽으로 팔을 뻗었다.
“무섭기는. 오늘 파트너가 있어서 말이야. 유리, 인사해요. 이쪽은 헬렌 페레그린이야.”
약에 취한 것처럼 실실거리던 헬렌의 표정이 단숨에 굳어졌다. 아나스타샤가 파트너를 데려왔다고? 그녀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다른 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유리는 시기 어린 눈초리를 받으며 아나스타샤가 내민 손을 잡았다.
“어머, 너무 어려 보이는데. 이제 어른이 된 것 같아. 아냐, 넌 좆물에도 풋내가 날 애들은 취향이 아니지 않아?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내 경호원이야.”
그럼 그렇지. 아나스타샤의 한 마디에 칼로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이 삽시간에 흩어졌다. 유리는 호의적인 관심을 받으며 생각했다. 이 중에 그 살인마가 있을지도 모른다. 살인마가 아니라 해도 아나스타샤를 노릴 사냥꾼은 얼마든지 있다. 코앞에도 한 명 있지 않은가. 유리는 조용히 어둠과 빛에 얼룩진 인간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대부분 모르는 얼굴이었다. 묘사라도 정확하게 할 수 있게 기억하려고 애썼다.
헬렌이 유리에게 잔을 내밀었다. 유리잔 주둥이에 립스틱 자국이 선명했다.
“반가워요. 난 헬렌 페레그린이야.”
유리는 잔을 뚫어지게 쳐다보다 뭐 어쩌라는 듯이 헬렌 페레그린을 바라봤다.
“마셔, 신고식은 해야지.”
“뭘 탔는지 알고?”
“아하, 안 마시겠다?”
용병이 되게 건방지네. 헬렌이 한 소리 하자 그를 따라 사람들이 웃기 시작했다. 아나스타샤는 자연스럽게 유리의 허리에 팔을 감고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시선이 또다시 날카로워졌다. 여기에 모인 사람의 절반 이상이 아나스타샤와 자보려고 모인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의 행동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안 돼. 내 경호원은 근무 중이라. 그렇지, 유리?”
“어디서 이런 문짝을 데리고 왔어?”
“라포포르트 씨가 주선해줬지.”
도도하던 헬렌 페레그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순한 양으로 변했다. 지위와 명예가 있다면 라포포르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헬렌도 그랬고,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유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주제도 모르고 나서는 아나스타샤의 경호원’에서 ‘라포포르트의 연줄’로 변했다.
“조명이 어두워서 못 알아봤네요. 유리 씨. 파티를 모쪼록 즐겨주셨으면 해요.”
“…….”
파티라면 쥐약이다. 유리는 취한 아나스타샤를 끌고 나갈 걱정뿐이었다. 헬렌의 인사를 받은 뒤에 도로 아나스타샤의 뒤로 가서 섰다. 아나스타샤는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안면을 텄다. 그의 목적은 자신의 사업에 필요한 동업자를 찾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아나스타샤에게 술잔을 건넸다. 그는 별 의심 없이 술잔에 입을 댔다. 유리가 술잔을 든 손목을 붙잡았다.
“응? 왜?”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는데 그걸 마십니까?”
“괜찮아, 유리. 여기는…….”
아나스타샤가 방긋 웃으며 잔을 기울여 술을 흔들어 보였다. 조명이 어두워서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저걸 마시겠다니. 내가 아나스타샤라면 아무것도 마시지 않겠어. 손가락이 들어갔을지 침이 들어갔을지 모를 술이었다.
유리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여기에 범인이 있으면 어쩌려고.”
아나스타샤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일을 대비해서 네가 있는 거잖아.”
집과 밖에서의 태도가 달랐다. 아나스타샤의 대범함은 지켜보는 인파가 많을수록 비대해진다. 아나스타샤는 시선을 먹고 사는 짐승이었다. 유리는 질린다는 듯 인상을 구기며 술잔을 뺏어 바닥에 술을 버렸다. 근처에 있던 여자의 다리에 술이 튀었는지,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아아. 유리가 버렸네. 괜찮아. 술은 많으니까.”
“아나스타샤 씨.”
“괜찮아, 유리. 여기서 날 죽이겠어?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이런 곳이야말로 아무도 모르게 칼로 찌르고 도망가면 못 찾는다는 걸 정말 모른단 말인가? 유리는 휘적휘적 떠나는 아나스타샤를 바삐 쫓으며 생각했다. 빌어먹을. 번잡스러워서 감시가 힘들었다.
파티는 아나스타샤의 문란한 성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유리는 굳이, 사교 파티까지 관찰하지 않았다. 이런 데서 어울리니 스토커가 늘지. 이런……. 대체……. 유리는 북적이는 인파를 헤치고 나가면서 부딪히는 헐벗은 사람들의 교성과 비명 흥분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고함에 귀가 먹먹했다. 누군가 유리 앞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가슴을 간신히 가리는 짧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였다.
“안녕! 네가 아나스타샤의 경호원이야?”
그녀는 유리의 대답은 들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유리의 허리를 와락 껴안더니 사타구니에 허벅지를 비볐다. 유리는 여자의 맨팔을 붙잡아 밀었다. 뒤로 휘청거리며 밀려난 여자가 다시 달라붙었다. 이런 씨…. 유리는 앞을 바라봤다. 한 무리에 아나스타샤가 섞여서 떠드는 모습이 보였다.
“비켜.”
“라포포르트와 아는 사이라며? 내게 레오파드를 소개해 줘. 응? 레오파드를……. 얼마나 대단한 남자이기에 세상이 벌벌 떠는지 내가 봐야겠어.”
누가 누굴 보겠다고. 형제의 멸칭은 시끄러운 곳에서도 귀에 콕콕 박혔다. 유리는 여자를 떼어놓고 싶었다. 그러나 여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레오파드를 소개해달라니까? 그랑 자 봤어? 어? 어때? 어떤 남자야? 어떤 알파냐고! 여자는 끈질기게 들러붙으며 오시프에 관해 물었다.
“안 꺼져?”
“너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러는 거야?”
여자가 유리를 노려봤다. 꺼지라는 말에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그걸 내가 알면 이런 실랑이도 안 했겠지. 하나 확실한 건 이 여자도 유리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이다. 본인도 상대가 누군지 모르면서 그 상대에게 자기가 누군지 모르냐고 물어보면 무슨 말이 나오리라 생각하는 거지? 유리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여자를 무시하고 아나스타샤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그의 손에 못 보던 술잔이 들려있었다. 그가 술을, 마신다.
마시지 말라니까 말은 귓등으로 안 듣고! 저 지금 무슨…! 유리는 여자를 제치고 지나가려 했다. 그러나 여자가 손톱을 세워 유리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야, 건방지게. 내가 누군지 아냐니까!”
“몰라, 씨발. 안 꺼지면 그의 앞에 사지를 부러뜨려서 갖다 놓겠어.”
“푸하하! 하하! 사지를 부러뜨려? 네가 뭔데.”
여자가 웃자 음악과 술에 취해 흔들거리던 시선이 모이기 시작했다. 유리는 여자의 드레스를 밑으로 잡아당겼다. 겨우 중요 부위만 가리던 천 쪼가리가 밑으로 내려가자 그녀의 가슴이 드러났다. 당돌하게 웃던 여자가 꺅, 소리를 지르며 웅크리고 앉았다.
내가 누군지 알면 골치 아프지. 소문이 퍼지는 순간 오시프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다. 유리가 클럽에서 여자와 실랑이를 벌였다는 이야기가 가족 귀에 들어가면 가문의 수치라며 당장 집으로 들어오라고 협박할지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벗어났는데 다시 거길 들어가! 여자를 겨우 떼어놓은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있던 곳으로 몸을 돌렸다.
아나스타샤가 어울리던 무리는 와해되고 없었다.
당연히 아나스타샤도 사라진 뒤였다. 유리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좌우를 돌아보면서 뻗친 화를 천천히 다스렸다. 유리는 가슴을 가리고 훌쩍이며 우는 여자를 내려다봤다. 저… 아니다. 됐다. 귀찮은 일 늘리는 것보다 아나스타샤 찾는 게 우선이다. 유리는 되는 대로 홀을 누볐다.
테이블과 룸까지 돌았으나 아나스타샤는 없었다. 유리가 누구의 연줄인지 아는 사람들이 그에게 레오파드나 라포포르트에 관해 물었다. 누구 하나 아나스타샤의 행방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양 모으러 간다던 인간이 어디 숨은 거야? 유리는 바 테이블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상의를 탈의한 남자 바텐더가 유리의 앞에 술을 놨다. 유리는 잔에 손도 대지 않았다.
가만 보니, 페레그린도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무리도 없었다. 유리가 예상한 상황 중에서 가장 좆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머릿속에 적신호가 번쩍 켜졌다.
“이봐. VIP룸은 어디지?”
바텐더에게 물었지만, 바텐더는 어깨를 으쓱이며 “오늘은 페레그린이 전부 빌렸으니, 클럽 전체가 VIP룸이지.”같은 씨알도 안 먹힐 개소리를 해대는 탓에 유리는 분을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테이블에 있던 잔이 흔들릴 정도로 진동이 거셌으나 노래에 가려져 바텐더 말고는 알지 못했다. 그는 살기등등한 유리의 눈을 마주하고는 침을 삼켰다. 헛소리를 더 했다가는 그가 쥐고 있는 잔이 얼굴에 박힐 기세였다.
“지하에 방이 더 있기는 한데….”
겁에 질린 바텐더가 순순히 비밀 장소를 알려줬다. 지하로 가는 계단은 보지 못했다. 여기 일하는 놈만 아는 비밀통로가 있군…. 유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살기를 감추고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바텐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곳으로 안내해.”
유리는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 바텐더 쪽으로 밀었다. 시계를 본 바텐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유리의 행색을 노골적으로 훑었다. 이게 가짜면 좆 되는 거고. 진짜면 횡재하는 거고. 비싼 옷에 꼿꼿한 눈빛을 보아하니 이건… 진품일 확률이 높았다. 바텐더는 시계를 바지 앞주머니에 넣고 바에서 나왔다. 유리는 그 뒤를 따랐다.
비밀의 방으로 가는 길은 화장실 앞에 있었다. 여자 화장실 앞에 신문을 보는 노인네가 앉아있었는데, 바텐더는 남자 화장실 앞에 서서는 노인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 노인이 문지기인 거다. 유리는 노인에게 다가가 그가 보던 신문을 뺏었다. 저절로 신문에 눈에 갔다.
「여섯 번째 표적, 아나스타샤 시모나로티.」
기사 헤드라인을 읽었다. 유리는 다시 노인을 응시했다. 노인은 유리가 든 신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 열어.”
“무슨… 문을 말하는 건지. 여기 앞은 여자 화장실인데요.”
노인이 고개를 푹 숙이며 대꾸했다. 유리는 신문을 접고 또 접어 손바닥만 하게 만들었다. 그리곤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그 위에 지폐를 두둑이 겹쳐 내밀었다. 노인이 고개를 들어 지폐와 유리를 번갈아 쳐다봤다. 입꼬리가 쭉 찢어졌다. 노인은 지폐와 신문을 받아들고는 옷깃에 달린 무전기에 대고 명령했다.
막힌 벽면에서 딸깍, 소리가 나더니 틈이 생겼다. 유리는 문을 확 열어젖혔다.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내려가기 싫다. 내려가면 못 볼 꼴 볼 텐데. 유리는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계단을 노려보다 겨우 한 계단을 내려갔다.
“부디 몸조심하시길.”
노인의 안부와 동시에 문이 닫혔다. 유리는 어두침침한 계단을 내려갔다. 앞에 철문이 있었다. 손잡이를 돌리니 손쉽게 열렸다. 그 안에서는 또 다른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위에서 벌어지던 추한 춤사위는 견줄 게 못 됐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봉을 타는 스트리퍼와 무대 위에서 교미하는 무리도 있었다. 오메가, 알파, 할 것 없이 페로몬이 난잡하게 섞여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여기서 맨정신으로 아나스타샤를 찾을 수 있나? 유리는 일단 벽을 찾았다. 아나스타샤 같은 최상급 알파를 이렇게 많은 인원이 나눠 먹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어디 방 같은 데에 숨겨놓고 자기네 끼리 야금야금 나눠 먹겠지.
유리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처마시지 말라니까 처마시고 경호원이 있는지 없는지 보지도 않고 칠렐레팔렐레 다니니 이 사달이 나지. 유리는 속으로 할 수 있는 욕을 모두 퍼부으며 지하를 탐색했다. 거대한 홀인 것처럼 보였다. 방이라곤 찾을 수 없었다. 씨발. 유리는 욕을 지껄이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페로몬 때문에 정신이 몽롱하다.
“아앙! 아아!”
지나치게 큰 교성 소리에 유리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벽면이 삐거덕거리며 돌아가더니 그곳에서 여자와 남자가 교접하며 걸어 나왔다. 유방이 출렁이고 붙어먹은 사타구니에서는 뭔지 알고 싶지 않은 물이 뚝뚝 떨어졌다. 유리는 닫히는 문틈으로 잽싸게 숨어들었다. 비밀의 방 안에 또 비밀의 방이 있다니. 여기에 또 비밀의 방이 있진 않겠지. 유리는 생각보다 고요한 내부를 훑어보며 생각했다.
좁은 복도에 사람들이 교접하며 성교를 즐겼다. 남자에게 박히던 남자가 지나가던 유리의 허리를 붙잡고 가르릉대는 소리를 냈다. 유리는 들러붙는 걸 떼어내고 방문을 하나씩 열어봤다. 밀폐된 공간에 가득한 페로몬에 눈꺼풀이 뻐근하게 당겼다. 설상가상으로 사타구니까지 묵직해졌다. 빌어먹을 짐승 새끼들. 아무 데서나 붙어먹고 지랄이야. 유리는 욕을 곱씹으며 아나스타샤를 찾는 데에 열중했다.
가장 안쪽, 복도 끝에 붙은 방까지 왔다. 다른 곳보다 화려한 문을 벌컥 열었다. 그 안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립스틱 자국으로 얼굴이 엉망인 아나스타샤가 소파에 아무렇게나 늘어졌고 그 주변을 헐벗은 남녀가 둘러싸 구경하는 중이었다. 페레그린이 아나스타샤의 바지 위로 잔뜩 부푼 성기를 문지르다 말고 불청객을 돌아봤다.
“어머머, 경호원이 여기까지 어떻게 왔지?”
“아나스타샤 씨.”
유리는 페레그린을 무시하고 아나스타샤를 불렀다. 약에 취해 히죽거리던 그가 유리를 응시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아! 유리. 유리이……. 오랜만이야. 이렇게, 이렇게… 반가울 수가. 어디 있다가 이제 와. 찾았는데…….”
여기 유리 있잖아. 그는 유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페레그린에게 얘기했다. 그러게, 왔네. 그녀는 가볍게 대꾸하며 아나스타샤의 입술을 핥았다.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누구 앞에서 아나스타샤를 윤간하려 들어? 유리가 성큼 다가서자 소파 주위를 에워싼 무리가 그를 경계했다. 독하게 뿜어져 나오는 페로몬에 유리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으응….”
그 사이 페레그린이 아나스타샤의 바지 지퍼를 열어 그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아나스타샤의 무릎이 벌어졌다. 색스러운 신음에 유리를 노려보던 시선들이 황급히 아나스타샤를 담았다.
유리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소파 앞을 가리는 사람의 머리채를 잡아 던지고 그 사이에서 아나스타샤의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힘에 이끌려 나왔다. 힘이 풀린 공주는 그대로 소파 밑에 널브러졌다.
“방해하지 마.”
허무하게 아나스타샤를 빼앗긴 페레그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페레그린의 페로몬이 방을 채웠다. 독하고 숨만 막히는 알파의 향이었다. 고작 이런 협박으로 유리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아나스타샤를 내놔. 주제넘게 끼어들지 말라고!”
페레그린의 고함에 옆에서 맞아, 죽이려는 것도 아닌데. 그냥, 즐긴 다음에 보내줄 거였어. 하며 맞장구치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내려다봤다. 그는 유리의 다리를 짚고 일어나려고 움직였으나 사지가 말을 안 듣는지 일어나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막 태어난 순록을 보는 듯했다.
천하의 아나스타샤가 제 몸 하나 건사 못하고 흐느적거리다니. ‘내’ 아나스타샤가!
“주제넘었다?”
경호를 맡으면 이런 꼴을 언젠간 보겠거니 싶었다. 외부 일정을 시작하자마자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 유리는 차분하게 화를 표출했다. 교미에 돌아버린 인간들 속에서도 한 줌의 흔적도 흘리지 않던 유리가 페로몬을 발산하며 페레그린의 도발을 받아쳤다. 방을 어지럽게 채우던 여러 사람의 향이 유리의 것에 짓눌려 힘도 쓰지 못하고 사라졌다.
페레그린도 마찬가지였다. 강력하다고 여겼던 자신의 페로몬이 눈앞의 거대한 곰에 가려졌다. 아무리 숨을 들이쉬어 봐도 유리가 내뿜는 페로몬만 느껴졌다. 가슴을 짓누르는 중압감에 페레그린은 그대로 미끄러져 소파에 주저앉았다.
“주제넘은 건 너지. 내 아나스타샤를 갖고 노는 것도 여기까지야.”
“허…… 헉.”
숨쉬기도 어렵다. 페레그린은 가슴에 손을 올리고 헐떡였다. 다른 알파도 마찬가지였다. 그사이에 섞여든 오메가들은 기절해 바닥에 널브러졌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일으켜 세웠다. 어깨에 팔을 걸쳐 부축하자 아나스타샤가 미안해,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한 걸 알면 혼자 가질 말았어야지. 주변에 내가 있나 살폈어야지! 화장실에 괴한이 들어오면 어쩌냐고 징징대던 인간이 대체 왜 바보 같이 굴었냔 말이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에게 해줄 욕이 많았지만 참았다. 나가는 게 우선이었다. 그 뒤에 그가 먹은 약이 뭐고 어디서 얻은 거며, 얼마나 많은 인간이 아나스타샤를 가로채려는지 찾아도 늦지 않았다.
“거기 너.”
유리는 그나마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 사람을 불렀다. 그는 화들짝 놀라며 자신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저, 저요?”하고 물었다.
“그래. 너. 출구까지 안내해.”
다시 계단을 오르고 클럽을 가로질러 나갈 만큼 사정이 여유롭지 못했다. 더군다나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아나스타샤를 데리고는 절대 불가능했다. 전라의 남자가 헐레벌떡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등에 둘러업다시피 하며 안내를 따라 광란의 소굴을 빠져나왔다.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는데도 누구 것인지 모를 페로몬의 잔향이 남아있었다. 유리는 욕을 지껄이며 조수석에 아나스타샤를 태웠다. 그는 속이 텅 빈 포대 자루처럼 힘없이 시트에 널브러졌다. 유리는 조수석 문을 닫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자신의 아랫도리를 응시했다. 발기한 성기의 모양이 바지 위로 뚜렷하게 보였다.
“씨발. 가만 안 두겠어.”
가만두지 않을 상대는 당연 페레그린이었다. 일만 잠잠해져 봐라. 다시는 아나스타샤를 넘볼 수 없게 만들어주마…. 유리는 복수를 다짐하며 보닛을 돌아 운전석 문을 열었다. 시트에 앉기도 전에 아나스타샤의 페로몬이 훅, 퍼지며 유리를 덮쳤다.
유리는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아 숨을 참았다. 젠장, 페로몬 조절도 못 하는 사람을 데리고 운전까지 해야 한다니. 사고나 안 나면 다행이다. 그는 창문을 열어 냄새가 빠지길 기다렸으나, 턱도 없었다. 핸들에 손을 올린 채 천천히 숨을 쉬었다. 익숙해지기 싫지만 익숙해져야 운전대를 잡을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를 무사히 호텔 방에 처박기로 다비드 시모나로티와 약속하지 않았던가.
“어, 이제 가? 왜 안 가? 유리…. 차가 움직이질 않아.”
시트에 몸을 비비던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쭉 내밀며 물었다. 유리는 필사적으로 반대편으로 몸을 붙였다. 짙은 아나스타샤의 페로몬 때문에 몸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닥치고 안전띠나 매. 빌어먹을…. 매번 이런 식이면 발목을 잘라 놓겠어.”
“싫어. 아프잖아. 아픈 건 싫어.”
아나스타샤가 안전띠를 잡아당기며 대꾸했다. 발목을 자를 거란 협박에 큰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지 않았다.
“얼른 집에 가자. 졸려. 피곤해. 사실, 졸린 건지 피곤한 건지 잘 모르겠는데. 집에 가고 싶어. 푹신한 침대에 눕고 싶어. 나……. 앉아있기가 힘들어.”
안전띠는 제대로 잡아당기지 못하고 여러 번 놓치는 주제에 입은 살아서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보다 못한 유리가 대신 안전띠를 잡아당겨 채워줬다.
어쩔 수 없이 몸이 겹칠 만큼 가까워졌다. 존재를 알리는 알파의 페로몬에 아나스타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유리의 향은 공기 같았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다가 페로몬이라고 자각하자마자 묵직하게 몸을 짓누른다. 튀지 않으면서 튀는 이상한 향이었다.
그에 비하면 아나스타샤의 페로몬은 본인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현란하고 정신없는 향이었다. 꽃향기인 것 같다가도 과일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한데 깊이 들이마시면 텁텁하게 목구멍을 감싸는 단내가 났다. 알파가 다른 알파의 페로몬을 자각하는 건 싸움의 전조였다. 유리는 알고 싶지 않던 아나스타샤의 존재를 뚜렷이 느꼈다.
“집에 가자.”
아나스타샤는 유리에게 향이 좋다고 얘기하고 싶었다. 근데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 향 좋다고 얘기하려 했는데 집이 튀어나왔다. 어어. 이게 아닌데. 아나스타샤는 다시 입을 열었지만, 또 나오는 얘기는 ‘집’이었다.
“집에 못 가. 당신 형이 몸도 못 가누면 집에 오지 말고 호텔로 가라고 키도 줬어. 대체 얼마나 난잡하게 굴면 형이 미리 키까지 챙겨줘?”
“아니…. 난……. 졸린데.”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떨궜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불편하지만 숨 쉬는 데에 문제가 되진 않아서, 창문을 닫고 시동을 걸었다. 아나스타샤가 기다렸다는 듯이 유리창에 머리를 기댔다.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라고 집에서 안 가르쳤어? 그런 데서 술이 들어가냐고.”
“응…….”
유리는 차를 몰며 욕을 해댔다. 유리도 페로몬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건물을 뚫고 갈 것 같았다. 유리의 폭언에도 아나스타샤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흐느적거리는 몸이 안전띠에 걸려 더 드러눕지 못하는 게 거슬릴 뿐이었다.
알파와 놀아나는 아나스타샤를 인정하기 싫어서 알아보지 않은 내 탓이지. 유리는 핸들을 내려치며 정신을 다잡았다. 늘어졌던 아나스타샤가 꾸물거리며 일어나 시트에 등을 푹 기댔다. 가슴이 가쁘게 들썩였다. 약효가 아직 남았나 보다. 유리는 아나스타샤 쪽으로 돌아가려는 시선을 억지로 정면에 뒀다.
“유리는… 내 어디가 좋아?”
기껏 하는 소리가……. 유리는 반응도 대꾸도 하지 않았다. 호기심의 포로인 아나스타샤는 그새를 못 참고 응? 응? 하고 물어대며 유리를 귀찮게 했다. 호텔이 코앞이다. 유리는 액셀을 밟았다.
“응? 대답, 안 해줄 거야?”
“안 해.”
“해줘. 유리. 궁금한데….”
궁금한 것도 많다. 유리는 호텔 앞에 차를 세웠다. 이대로 끌고 가서 약효가 풀릴 때까지 욕실에 처박아두면 되겠다. 고지가 눈앞이다. 유리는 서둘러 조수석 문을 열었다. 아나스타샤가 안전띠를 두 손으로 꽉 쥔 채로 유리를 올려다봤다.
“내려.”
“얘기해줘.”
“안 내려? 그럼 차에서 자던가.”
“너어…. 하루에 50만 달러를 받는 경호원인 거 잊었어?”
준대도 안 받은 건 너야. 아나스타샤가 립스틱이 묻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얘기했다. 유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이 껴서 회색으로 보이는 밤하늘이 빌딩 틈을 채웠다. 아나스타샤와의 상성은 상상 이상으로 최악이다. 담배가 절실했다.
“내 어디가 좋아?”
아나스타샤가 되물었다. 이번엔 얼굴을 차체 밖으로 빼꼼 내밀었다. 대답해주면 순순히 일어날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말로 구슬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다비드나 이반에게 맡겼더라면 제 발로 걷게 했을지도 모른다.
슬프게도 유리에게 그만한 말주변이 없었다.
“얼굴. 됐어? 이제 내려. 제발…. 가자고.”
말씨름할 바에야 져주고 말지. 자포자기한 유리는 공주의 눈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얼굴? 아나스타샤가 반색했고, 유리는 묵묵히 안전띠를 풀어내고 아나스타샤의 옆구리에 팔을 끼워 밖으로 끄집어냈다.
“내 얼굴이 좋아?”
“그래. 그거 아니면 뭐겠어? 얼굴 빼고는 최악이야.”
유리는 짜증스럽게 대꾸하며 아나스타샤를 짐짝처럼 들고 호텔로 들어갔다. 아나스타샤는 제 발로 걷지를 못해 질질 끌려가는 주제에 히죽히죽 기분 나쁘게 웃었다.
“다 싫은데 다 참아줄 만큼, 내 얼굴을 좋아한단 말이지.”
“아니. 내가 하루에 50만 달러를 받는 경호 의뢰를 받았으니까 참는 거야.”
“내 얼굴이 그렇게, 좋구나?”
말이 통하지 않았다. 유리는 입을 다물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내가 그렇게 좋냐고 반복해서 물어봤다. 괜히 대답해줬어. 괜히 알려줘서…. 이를 뽑는 것 외에는 저 주둥이를 닥치게 할 방법이 뾰족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취한 동생을 집에 데려오지 말라고 호텔 키를 쥐여주는 매몰찬 형은 그렇게 무심한 사람은 아닌지, 펜트하우스를 빌려줬다. 엘리베이터는 멈추지 않고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펜트하우스라고 해봤자 조금 넓은 호텔 방이었다. 유리는 침대에 아나스타샤를 팽개쳐놓고 창문을 모조리 열었다. 들숨 날숨에 화려하고 정신 사나운 아나스타샤의 존재가 느껴졌다. 이 달달한 꽃향기를 맡고 벌과 나비가 몰려들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유리는 알파였고 꽃향기가 꽃향기로 느껴지지 않았다. 유리 라포포르트를 지워버릴 진득하고 역겨운 타인의 체취에 불과했다. 열린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한숨을 쉬었다. 초여름이라 해도 저녁 공기는 쌀쌀했다. 아니, 열이 올라서 차갑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유리이.”
한때는 저 목소리가 자신을 저렇게 불러주길 바란 적도 있었다. 지금은… 조용히 잠이나 잤으면 좋겠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무시했다. 저러다 제풀에 지쳐 잠들길 바랐다. 파티에서 술잔을 사수하는 건 기본 중 기본이다. 애초에 그런 곳으로 아나스타샤를 불러낸 페레그린을……. 아나스타샤의 언행을 파고드니 저절로 페레그린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유리는 심호흡하며 화를 가라앉혔다. 아무 일 없으니 됐다. 이제부터 그러지 못하도록 지켜보면 그만이었다.
“유리이. 유리.”
유리가 침대에 제대로 올려뒀던 아나스타샤가 낑낑대며 몸을 일으켰다. 분명 눈앞에 등을 돌리고 선 유리가 보이는데 목소리가 작아서 그런가, 돌아보질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소리치기보다는 자신이 유리에게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좋아하는 얼굴을 들이대고 부탁하면 뭐든 들어줄 것 같았다.
공주는 막 태어난 망아지처럼 네발로 기어 침대를 빠져나왔다. 손부터 바닥을 짚으려 했으나 생각보다 침대가 높았고 아나스타샤는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그는 조용히 내려오긴커녕 그대로 구르고 말았다. 우악, 하는 신음과 포대가 떨어지는 소리에 창밖을 내다보던 유리가 아나스타샤에게 시선을 옮겼다.
“미쳤어? 취했으면 얌전히 잠이나 자지. 왜 지랄이야?”
가까이 가기도 싫은데 바닥에 널브러져서 유리이, 유리. 하고 우는 아나스타샤를 보니 몸이 먼저 움직였다. 유리는 입으로 욕을 읊으면서도 아나스타샤의 어깨를 붙잡아 도로 침대에 올려놨다. 침대에 엉덩이가 닿자 아나스타샤는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누웠다. 푹신한 이불에 차 있던 공기가 아나스타샤의 무게만큼 빠져나오며 그의 페로몬을 허공에 옮겼다. 유리의 눈썹이 찌그러졌다.
“눈 감고 자.”
“나, 답답해.”
아나스타샤는 웅얼거리며 바지 버클을 매만졌다. 가지가지 하네, 진짜……. 찬 시선이 공주의 사타구니를 훑었다. 바지 벗겨주면 다음은? 만져달라고 하면? 유리는 두 주먹을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페레그린… 기필코 죽일 테다. 사지를 뜯어버리고 다리는 개 먹이로, 팔은 매 먹이로 던져주고 뜯어 먹히는 제 팔다리를 구경하게 만든 다음에 살가죽을 벗겨내겠어. 유리는 페레그린의 최후를 곱씹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이겠다는 분노가 아름다운 회색 눈동자에 일렁였다.
유리는 숨을 크게 들이쉰 뒤 내뱉지 않고 빠르게 아나스타샤의 셔츠 단추와 바지 버클을 풀어줬다. 빌어먹을, 내가 들어갈 구멍도 분간 못 하는 알파의 옷을 벗겨야 한다니. 단추를 풀면서 스치는 온기에 손이 인두질을 당한 것처럼 쓰라렸다. 욕실로 가 손을 씻고 싶었다.
“됐지? 이제 자. 제발. 또 떠들면 욕실에 가둬버릴 거야.”
“나…. 부탁이 있어.”
제발 자라는 애원이 애원으로 들리지도 않았나 보다. 유리는 이를 악문 채 그를 내려다봤다. 아나스타샤가 겨우 어깨를 세워 비스듬한 자세로 누웠다. 앉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유리는 지켜보기만 했다. 지금의 아나스타샤는 유리가 지켜보던 아나스타샤가 아니다. 평범한 ‘알파’였다.
제대로 앉지 못한 아나스타샤는 침대 시트에 이마를 콕 박은 채 부탁이 있어…. 하고 웅얼거렸다. 뭔지 물어보지 않으면 계속 같은 말만 할 것이라 유리는 직감했다. 그의 직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뭐. 뭔데. 뭘 해주면 얌전히 잘 건데.”
“사람을…… 불러줘. 누구든 좋아. 알파를, 말이야.”
감도 직감도 무서울 정도로 좋은 유리가 그가 말하는 ‘사람’이 의사나 가족, 친구가 아닌 창부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거기다 뒤에 덧붙인 ‘알파’ 때문에 참고 있던 화가 정수리를 뚫고 나왔다.
아나스타샤가 알파와만 잔다니. 불구가 아닌가? 왜? 남녀 성별은 가리지 않으면서 알파만 고집하냔 말이야! 다 완벽한데 성 기능만 이상해졌냐고! 눈앞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렇다. 유리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정신이 깜빡, 나가버리고 말았다. 눈을 뜬 채로 기절한 것이다.
“유리……. 나 정말 필요한데…. 불러줄래? 페레그린도 괜찮아.”
페레그린? 다행히도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한 마디에 정신 차렸다. 지금, 저 빌어먹을 주둥이에서 누구 이름이 나왔지?
유리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경고했다.
“아나스타샤…. 널 누구한테서 구해줬는지 잊었어?”
“그렇지만. 너는 알파랑 안 되잖아. 페레그린은 되는데…. 네가 옆에 있으면…. 걔도 험한, 짓은 못 할걸…….”
“싫어.”
“어, 어려운… 어려운 부탁 아니잖아. 그냥, 그냥. 나랑 섹스하고 싶어 하는 알파를 데려와 줘. 나, 급한데.”
밑이 터져버릴지도 몰라. 아나스타샤가 울먹였다. 유리는 애원에 젖은 목소리에도 일말의 동정도 느끼지 못했다.
“고작 그렇게 터져버릴 고환이면 터져버리라고 해. 자손 번창에는 영 소질이 없으니 이참에 없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싫어어. 아나스타샤가 길게 울며 시트에 얼굴을 비비적댔다. 정말 성기가 터져버릴 걸 걱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다리를 오므리고 사타구니 안쪽으로 손을 넣어 아래를 보호했다. 꼴사나운 광경이었다. 이제 겨우 경호라는 걸 해보나 싶었는데 첫 단추부터 추태란 추태는 전부 본 것 같다. 아나스타샤를 몰래 관찰하던 때와 비교도 안 되게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나스타샤를 찌른 스토커를 고기 반죽으로 만들었던 때가 마음은 더 편했다. 이 인간과 가까이 지내는 건 독이다. 유리는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침대 앞을 정신 사납게 돌았다. 끙끙 앓던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뒷모습을 보며 유언을 남겼다.
“페레그린이라도 불러줘……. 얼른.”
“제길! 그 이름 한 번만 더 불러 봐! 널 윤간하려던 인간을 왜 찾아!”
섹스에 미치지 않고서야 그녀를 찾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 그렇게 색이 좋은가? 유리는 씩씩거리며 아나스타샤에게 화풀이했다. 그는 뭍에 나온 지 오래된 물고기처럼 꾸물거리며 미안하다고 웅얼댔다. 사실은 페레그린의 이름을 중얼거린 것에 미안하지 않았다. 유리의 심기를 거스르면 알파를 불러주지 않을 것 같아 방어적으로 뱉은 말이었다.
“미안할 일을 만들지 말라고. 미안하면!”
유리가 고함치자 아나스타샤는 몸을 최대한 웅크리며 다시 “미안….”하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듣는 유리는 속이 타들어 갔다. 그래서, 나는 알파를 데려와야 하는가? 아나스타샤와 하룻밤을 보낼 그런 인간을 찾아다 대령해야 하냔 말이다. 내 아나스타샤가 알파랑 씹질을 하는 걸 눈뜨고 지켜보라고?
유리는 이름 모를 알파가 아나스타샤의 위에 앉아 움직이는 걸 상상했다. 달뜬 신음과 구역질 나는 페로몬 두 개가 어우러지는 상상도 하기 싫은 상황을 떠올린 것이다.
아니……. 아나스타샤는 내 옆에 있는 한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만날 수 없어. 나 이외의 알파와 뒹구는 걸 허락할 것 같아? 결심이 서자, 관자놀이를 아프게 찌르던 두통이 사라졌다. 그가 알파라는 사실도 소유욕 앞에서는 한낱 단어에 불과했다. 유리는 웅크린 아나스타샤의 어깨를 잡아 바르게 눕혔다. 맥없이 천장을 응시하던 아나스타샤가 눈동자만 굴려 유리를 바라봤다.
공주가 입꼬리를 뾰족하게 올려 웃었다.
“알파랑 할 줄 모르잖아…?”
“만지는 것 정도는 할 줄 알아.”
정확히 하자면, 만지는 것 정도만 할 수 있다지만…. 페레그린을 데려올 바에는 제 손으로 만져 주는 쪽이 낫다고 판단했다. 유리는 사슴 가죽을 벗기듯 아나스타샤의 바지를 잡아 내렸다. 앞이 축축하게 젖은 속옷과 그 안에 터질 것처럼 부푼 성기가 보였다. 하느님 아버지. 그는 성탄절에나 교회에 가서 기도했던 신을 찾았다. 제가, 부디…… 아나스타샤의 좆을 부러트리지 않게 도와주소서.
……아멘. 기도를 끝내며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속옷까지 벗겨냈다. 선악과를 먹으라 종용하던 뱀의 대가리가 아나스타샤의 사타구니 속에 숨어있었다. 잡으면 천벌 받게 될 위용이었다. 유리의 얼굴은 혐오감에 건포도처럼 찌그러졌지만, 손은 대담하게 뱀 대가리를 붙잡아 세웠다.
“으읏… 아, 아….”
아나스타샤가 소금 세례를 맞은 물고기처럼 펄쩍 뛰었다. 그저 감싸 쥔 것뿐인데도 공주는 머리를 뒤로 젖히며 허리를 떨었다. 그 상태로 사정하고 말았다. 첫 사정은 너무나 허무했다. 겨우 성기 중간쯤을 붙잡고 있던 유리의 손목과 손과 팔뚝에 희뿌연 정액이 후두둑 떨어졌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아멘, 아멘! 유리는 좆을 비틀어 꺾어버리지 않기 위해 신앙심을 쥐어짰다. 천박한 알파 같으니……. 고작 움켜잡은 것으로도 질질 싸? 이참에 정액을 원 없이 받아내고 고환을 떼어버리든가 해야지.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들으면 기겁할 얘기를 덤덤히 생각하며 여전히 뻣뻣하게 대가리를 세운 성기를 무성의하게 훑었다.
“으읏, 하아…. 유, 유리.”
애무로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상하 운동이었다. 그런데도 아나스타샤는 악마의 수발을 받는 쉬어 빠진 남색가처럼 떨었다. 유리의 움직임은 종마 씨를 받아내려는 사육사 같았다. 아아, 내가 종마라니. 아나스타샤는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자신의 처지에 개탄하면서 동시에 희열을 느꼈다. 저열한 쾌감이 배 속을 휘감았다. 아나스타샤는 두 번째 사정을 맞이했다. 첫발과 비슷한 색의 점액질이 유리가 피할 새도 없이 이리저리 튀었다.
유리의 오른손은 정액으로 엉망이었다. 손과 성기가 맞닿은 곳은 정액이 고여 윤활제가 되었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틈으로 스며든 정액이 하얗게 뭉치는 걸 보며 유리는 꼭 음부 안에 싸지른 것 같다 생각했다. 유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를 넘은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유리가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아나스타샤를 다른 알파와 재우지 않겠다는 질투심과 알파랑 어떻게 그런 짓을 하냐고 선을 긋는 이성이 어찌어찌 어우러져 오른손을 타인의 성기로 떼어놓고 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무려 유리의 명령을 듣는 타인의 생식기가 된 오른손은 착실히 아나스타샤의 성기를 훑었다.
“으응……. 하아, 흣…….”
알파랑 안 해봤다고 동정이라 생각한 내가 아둔했다. 아나스타샤는 약 때문이라 여기고 싶어도 유리의 집요하고 힘 있는 손놀림에 침까지 흘리며 허리를 허공에 띄웠다. 귀두를 손가락으로 인정사정없이 짓누르는 힘에 아나스타샤는 허무하게 사정하고 말았다.
“싸는 게 왜 이렇게 빨라? 조루야? 약 때문인가? 응?”
엄지로 요도 구멍을 틀어막자 그 아래로 정액이 왈칵왈칵 토해지는 게 느껴졌다. 유리는 마른 입술을 혀로 훑으며 경련하는 아나스타샤의 아랫배와 세 번이나 사정했음에도 여전히 줄어들지 않고 꾸물대는 성기를 노려봤다.
“유리, 유리….”
아나스타샤가 늘어진 목소리로 유리를 찾았다.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 같은 유약한 목소리에 유리의 시선이 자연스레 아나스타샤의 얼굴로 옮겨졌다. 최음제 때문에 강제로 연거푸 이뤄진 사정으로 풀어진 눈매와 상기된 얼굴이 장관이었다.
그간 그와 섹스하던 알파들은 전부 아나스타샤의 이런, 이런 표정을 봤단 말인가? 유리는 넋을 놓고 아나스타샤를 응시했다. 아나스타샤의 손을 지나갔던 수많은 알파를 시샘할 틈도 없었다. 애절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나스타샤의 표정을 기억하기도 바빴다.
유리가 넋을 놓고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는 사이, 아나스타샤는 손을 뻗어 성기를 붙잡은 유리의 팔뚝을 턱, 붙잡았다. 가볍게 성기를 그러쥐고 있던 유리의 팔뚝이 힘없이 구부러졌다. 아나스타샤는 팔뚝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유리는 자신을 이끄는 힘에 저항할 생각도 못 하고 끌려갔다. 유리벽 없이 전시된 조각상이 삽시간에 가까워졌다. 고개를 살짝만 숙이면 입술이 볼에 닿을 것 같았다.
유리가 위로 엎어지자, 아나스타샤는 그의 멱살을 붙잡아 끌어 입을 맞췄다. 바싹 마른 입술이 건조하게 맞닿았다. 유리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아나스타샤의 뜨거운 혀가 들어와 버석버석한 안쪽을 핥았다.
“윽, 으음…….”
코 밑에 인중이 닿았다. 놀라 들이쉰 숨에 아나스타샤의 상큼한 페로몬이 느껴졌다. 차에서부터 호텔까지 데려온다고 페로몬을 참아서 익숙해졌는지, 유리는 헛구역질이나 발작 없이 아나스타샤와 혀를 섞을 수 있었다. 몸은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혀는 손가락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호흡할 때마다 아나스타샤가 가득 들어온다. 눈을 감아도 아나스타샤가 느껴졌다. 폐 속 가득 타인으로 가득 찬 기분. 상극인 알파의 존재라는 걸 아는데도 몸이 달아올랐다.
“으읏, 으응….”
알파와 맞댄 상태에서 흥분하다니. 알파로서 수치인가. 나도 불구가 되는 것인가. 유리는 쾌감과 함께 올라오는 불쾌감을 풀고자 아나스타샤의 혀를 꽉 깨물었다. 상처는 없었지만, 아팠는지 아나스타샤가 신음을 흘렸다. 노랫소리와 비슷했다. 유리는 서툴게 입을 벌리고 그의 입술과 혀를 이로 잘근잘근 씹어댔다. 유리. 아파. 아나스타샤가 입술을 맞댄 채로 핀잔줬지만, 아나스타샤의 관심을 독차지한 유리의 귀에 제대로 닿지 않았다.
알파면 뭐 어때. 기분 좋으면 됐지. 제 밑에 깔려 헐떡이는 아나스타샤를 언제 또 보겠는가. 아나스타샤를 독점했다는 포만감이 기분 좋게 몸을 감쌌다. 알파를 경계하던 본능이 누그러지고 오로지 아나스타샤에게 집중하게 됐다.
페로몬이 손에 묻을 건 생각도 않고 아나스타샤의 목덜미와 얼굴을 부여잡은 뒤 입안을 헤집었다. 숨을 쉬려고 벌어진 틈으로 서로의 존재가 위험하게 들어섰다. 유리는 코앞에서 향수병을 댄 듯한 아찔한 향에 헛기침했다.
“흑. 허억.”
명백한 실수였다. 물론, 유리는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닫지 못했지만 말이다. 악재는 한 가지만 오지 않았다. 유리는 깨닫지 못한 실수를, 아나스타샤는 눈치챘다. 묘하게 들러붙는 사타구니와 짙은 페로몬을 맡으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다시 입을 맞추는 모습이 공주가 잘 알던 인간들과 비슷했다.
기회가 왔으니 잡아야 한다. 아나스타샤가 몸을 일으켜 유리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나스타샤에게 집중하느라 무방비했던 유리는 그대로 침대에 등을 대고 눕게 됐다. 순식간에 위치가 뒤바뀌었다. 유리가 겨우 주도하던 흐름이 아나스타샤 쪽으로 흘렀다.
아나스타샤가 올라탔는데도 유리는 정신 못 차리고 풀어진 셔츠 사이로 보이는 가슴과 복근을 훑기 바빴다. 가쁜 숨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흉부는 미각을 자극했고 푸른 홍채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오금이 저렸다. 미켈란젤로가 아나스타샤를 보지 못하고 죽은 것이 통탄할 만큼 대단한 육체였다. 신이 이 자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이유는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어서겠지. 유리의 찬송은 얼마 가지 못했다. 아나스타샤가 바지 속에 정리해 넣은 셔츠를 빼내 그 안으로 손을 넣었다.
아차. 유리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누구 앞이라고 마음 편히 속을 보여줬단 말인가. 아나스타샤는 유리보다 노련한 알파였다. 이대로 있다가는 꼼짝없이… 그가 찾는 ‘알파’ 행세를 해 줘야 할 판이었다.
“비켜. 이 이상은….”
정신 차린 유리가 상체를 일으키며 위에 올라탄 아나스타샤를 밀치려 했지만, 공주는 순순히 따라주지 않았다. 그는 가볍게 유리의 가슴을 눌러 도로 눕히고 바지 버클을 풀어냈다. 약에 마비된 손이 좀처럼 말을 듣지 않으니, 재료 수급부터 본인이 손수 알아보고 일류 재봉사에게 의뢰해 완성한 수작의 정장 바지 버클을 포도송이를 따듯 뚝 뜯어내고 말았다.
“야!”
“괜찮아. 그런 거 아니야.”
버클이 뜯어지는 소리에 유리가 소리치자 아나스타샤가 안심시켰다. ‘그런 거’라면 뭘 생각하고 있는데? 결국 ‘그 짓’ 아니야? 어떻게든 벗겨보려고 수작질이잖아! 머리로는 잘 알고 있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유리는 호랑이에게 목덜미가 물린 사슴처럼 굳어선 아나스타샤를 올려보기만 했다.
“쉬이. 괜찮다니까. 내가, 그렇게 무자비한 인간으로 보여?”
유리의 딱딱해진 몸을 보고 겁먹었다고 생각했는지 아나스타샤가 속삭이며 입을 맞췄다. 불쌍한 유리는 의지와 상관없이 아나스타샤의 입맞춤에 긴장이 풀렸다. 아니야, 안 돼. 안 되는데 입술에 사랑스럽게 닿았다 떨어지는 부드럽고 말랑한 입술의 촉감이 평생 붙들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아나스타샤가 바지를 내렸다. 버클도 혼자 못 푸는 인간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건지 유리가 몸을 비틀어 거부해도 어느새 무릎 위까지 내려가 버렸다. 너 지금 안 일어나면 좆 될걸. 짐승 같은 직감이 친절히 경고했으나,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짓누르는 대로 짓눌리며 입을 벌리고 그와 입을 맞췄다. 맞아. 좆 될 거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좆 될지도 모른다. 드러난 허벅지에 아나스타샤의 발기한 성기가 닿았다. 뜨겁고 단단한, 전혀 반갑지 않은 촉감의 그것은 속옷을 뚫고 안으로 들어올 기세였다.
“치워! 씨발, 그거 문지르지 말란 말이야!”
“너도 섰으면서 왜, 왜 싫다는데?”
유리의 역정에 아나스타샤는 성기가 내뿜는 열기에 눅눅해진 속옷을 손으로 문지르며 억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새끼 약 다 깬 거 아냐?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화려한 미소를 보며 생각했다. 그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웃긴 일이다. 알파의 페로몬을 맡고 알파와 키스하고 알파의 좆이 허벅지에 닿는데 성기가 죽기는커녕 힘줄까지 서버렸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급하거든. 아나스타샤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귓바퀴를 타고 내려온 소름이 전신으로 번졌다. 상기됐던 낯빛이 삽시간에 시체처럼 파랗게 질렸다.
“싫다고, 새끼야! 더 문대면 진짜 좆 대가리를 꺾어버리겠어!”
“유리. 제발, 제발…….”
섹스가 뭐라고. 사람 온기가 뭐라고 이렇게 목숨을 거는지 유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아나스타샤가 속옷을 벗기려 든다면 그의 것을 소시지를 비틀어버리듯 터트릴 생각이었다. 무력을 쓰고 싶지 않았다. 유리는 마지막까지 참으며 경고했다.
아나스타샤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만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제어가 안 됐다. 밑에 누운 유리와 몸을 맞추고 싶다는 욕구가 이성을 잠식했다. 약 때문이겠지. 꺼지라고 할 때 안 꺼졌다고 총구를 들이미는 남자 위에 앉아 허벅지에 좆을 문댈 정도로 아나스타샤는 대범하지 못했다.
유리는 사람을 물어뜯기 직전의 짐승처럼 눈에 불을 켜며 마지막 경고를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나스타샤가 키스로 입을 막아버리며 잔뜩 긴장한 허벅지에 성기를 문댔다. 입 맞춘다고 풀어질 푼수는 아닌 것 같았지만, 아나스타샤가 할 수 있는 저항은 몇 가지 없었다.
다행히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절절한 키스에 정신을 뺏기고 말았다. 성기가 닿자마자 돌처럼 단단해졌던 허벅지가 적당히 탄력 있는 상태로 돌아왔다. 두 번째 가설이 맞다. 유리 라포포르트는 나를 좋아한다.
그러니까 ‘아나스타샤 시모나로티’는 좋아하는데 알파인 건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방금까지 사지를 물어뜯어 버리겠다던 맹렬한 살기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고개를 쫓아다니며 입술과 혀를 애무하자 유리의 허리가 들썩였다.
섹스가 처음일지도 몰라. 이렇게 귀여운 반응은 또 처음이다. 애무하며 전희를 나누는 것보다는 곧 도륙당할 짐승을 어르고 달래는 기분이었다.
“안 넣을게. 문지르기만 하게 해줘. 응? 너도 섰잖아. 내가 풀어줄게. 약속해. 그냥, 그냥…문지르기만 할게.”
아나스타샤가 입꼬리 근처에 입술을 묻은 채 애원했다. 그러면서 손은 속옷 밴드를 잡아 유리가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순간 내려버릴 준비를 했다. 이 정도면 넘어올 것 같던 유리는 도리어 아나스타샤의 손목을 붙잡고 얼굴을 틀어 눈을 마주쳤다.
알파랑 어떻게 하냐고, 말도 안 되다고 무시하던 눈빛이 아나스타샤의 페로몬에 취해 풀어졌다. 커진 동공과 그 주변을 감싼 다이아몬드 빛의 회색 홍채, 그곳에 비치는 아나스타샤의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으로 치장한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벗기지 말고 해.”
왜 라포포르트 씨가 유럽을 돌아다니며 막내아들을 자랑했는지 십분 이해했다. 지금도 이렇게 예쁜데 한 주먹만 했을 땐 얼마나 예뻤을까. 어릴 적 작고 귀여운 모습을 더 봤으면 좋았을 텐데. 뭐, 지금도 지금대로 아름다웠다.
아나스타샤는 너그럽게 굴기로 했다. 원석을 어떤 모습으로 세공할지 정하는 건 세공사 마음이 아니겠는가. 그는 감사 인사로 유리의 코끝에 입을 맞췄다.
“그럴게. 내 좆 대가리랑 손목은 안 부러트릴 거지?”
“……하는 거 봐서.”
허튼수작 부리면 바로 부러트리겠다고 경고해야 했으나, 유리는 무른 대답을 하고 말았다. 모르겠다. 알파의 페로몬을 맡아도 발기하는지, 왜 아나스타샤와 입을 맞추고 기분 나쁜 좆 대가리를 허벅지에 비비고 있는데도 열기가 식지를 않는지. 거기다 날 자위기구로 쓰게 해달라고 비는 그에게 몸을 허락한 것까지. 유리는 어느 하나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분위기에 휘말렸다.
아나스타샤가 웃었다.
“고마워.”
수치스러운 인사였다. 뭐가 고마워? 성욕을 풀게 해줘서? 유리의 얼굴이 분노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나스타샤가 쪼듯 입을 맞추며 기뻐했다.
“네 첫 남자가 되는 걸 허락해 줘서.”
“넌, 내 첫… 남자가 아니야!”
“알파는 처음일 거 아니야.”
그러니 첫 남자지. 아나스타샤가 덧붙이며 좆물을 줄줄 흘릴 것처럼 단단해진 성기를 잡아 속옷 안쪽으로 앞부분을 밀어 넣었다. 유리의 허벅지가 긴장했다. 다리를 끼워 넣은 속옷 구멍 틈을 타고 들어온 좆 대가리가 유리의 성기를 찾아 스멀스멀 위로 올라왔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가슴과 어깨를 밀어내 밑을 확인했다. 불룩하게 튀어나온 속옷이 보였다. 하나는 내 것이고, 하나는 아나스타샤의……. 속이 메슥거렸다. 발기한 성기 두 개가 좁은 천 안에서 만나, 교미하려는 뱀처럼 꿈틀거렸다. 정확히 하자면 유리는 가만히 있었고 아나스타샤 쪽에서 구애의 춤을 추는 것이지만 말이다.
“이, 이게 무슨……. 야, 이 씨….”
“쉬이, 유리. 안 벗겼잖아. 보지 말고 느끼기만 해.”
아나스타샤가 다정하게 유리를 달래며 입을 맞췄다. 입안에 혀가 아닌 손가락을 넣어둔 건지, 아나스타샤는 혀 하나로 유리의 경계를 풀었다. 긴장으로 뻣뻣하던 두 다리가 느슨해지며 인형처럼 아나스타샤의 허벅지 위에 올려졌다. 알파라는 사실 말고 그가 아나스타샤라는 것에 집중하자 페로몬은 아무것도 아니게 됐다. 그저 ‘여태 만난 놈들은 아나스타샤에게 이렇게 안겼단 말이지?’ 같은 질투만 들끓었다.
아나스타샤는 천천히 허리를 움직여 속옷 안에 밀어 넣었던 성기를 유리의 것에 문질렀다. 후장도 아니고 그저 속옷 안에 들어온 것뿐인데도 괴상한 기분이 들었다. 쾌감이라고 하기에는 수치스러운데 쾌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나스타샤의 좆 대가리는 숫처녀의 뒤를 헤집는 것마냥 느리고 조심스러웠다. 유리는 처녀도 아니고 뒤가 뚫리는 것도 아니지만 그런 기분을 떨칠 수가 없어서 입술을 굳게 닫은 채 아나스타샤의 애무를 완강하게 거절했다. 적당히 하다 가라. 이 이상으로 괴상한 느낌을 깨닫는 건 사양이다. 목에 힘줄이 뻣뻣하게 섰다.
“유리. 나랑 키스하기 싫어?”
그는 돌아간 유리의 얼굴과 목덜미, 힘줄에 집요하게 입을 맞추며 키스를 졸랐다. 유리……. 애잔하게 이름을 부르면서도 허리 짓은 멈추지 않았다. 느리게 흘러가던 움직임이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빨라지고 묵직해졌다. 음모에 귀두가 닿았다. 아나스타샤는 음모 위에 성기를 문지르며 유리의 귓가에 입을 대고 신음했다.
“하으….”
한숨 같은 신음에 유리의 솜털이 곤두섰다. 양다리는 아나스타샤의 허리를 감싸듯이 벌어졌고, 아나스타샤는 속옷 안을 질 내부라도 헤집는 것처럼 파고들었다. 아나스타샤가 허리 짓을 이기지 못하고 옆으로 치우치는 성기를 손으로 고정하며 표피를 문질러댔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에게 온몸이 짓눌린 채로 헐떡이는 아나스타샤의 숨을 귀 바로 아래에서 들으며, 맹렬한 움직임으로 교미하는 좆 대가리도 느껴야 했다. 아나스타샤의 호흡이 빨라질수록 유리도 단단하게 경직됐다. 그는 무릎을 세우고 아나스타샤의 허벅지를 발꿈치로 누른 자세로 욕정을 받아주고 있었다.
“읏, 응…. 아아, 흐읍….”
얼마 못 가 아나스타샤가 신음하며 몸을 떨었다. 속옷 안으로 처박는 힘이 넘쳐나 속옷 안에서만 움찔거리던 성기가 밴드를 들어 올리고 배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나스타샤는 그대로 사정했다. 성기가 살갗 위로 꺼떡이며 정액을 토해냈다. 네 번째 사정이었다. 배 위로 미적지근한 정액이 튀어 올랐다. 유리는 시선을 내려 하얀 정액을 토하는 좆 대가리와 희뿌옇게 뿌려진 정액을 바라봤다. 온몸의 털이 거꾸로 서며 치아가 덜렁이는 기분이었다.
“유리….”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부르며 입술을 겹쳤다. 그가 혀를 내밀어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유리는 거절할 힘이 없어 순순히 입을 벌렸다. 사정은 아나스타샤가 했는데 왜 나까지 늘어지는 거야. 아나스타샤는 연인을 대하듯 부드럽고 다정하게 혀 옆구리와 치열을 훑고 입술 위를 핥으며 쪽쪽 입을 맞췄다. 좆 같은데, 정말 좆 같지 않다는 게 문제다.
“했으면….”
비켜. 끈질기게 따라오는 입술을 겨우 뿌리치고 유리가 말했다. 아나스타샤가 아쉽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물러설 것처럼 상체를 드나 싶더니 다시 몸을 밀착시켰다. 밴드에 걸린 성기가 길게 빠져나왔다. 움푹 들어간 배꼽에 귀두가 걸쳐졌다.
“나, 아직도 섰어.”
그랬다. 아나스타샤의 좆은 네 번이나 싸 놓고 지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술이 가득 든 잔을 엎은 것만큼 싸놓고도 줄어들긴커녕 더 커져서 유리의 성기에 길쭉한 음경을 붙인 채 맥박쳤다. 유리가 그래서 어쩌라는 눈으로 매섭게 노려보자 아나스타샤가 허리를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아나스타샤가 흥분으로 열이 발갛게 오른 얼굴을 하고 유리를 응시했다. 부시게 반짝이는 푸른 홍채를 보니 말문이 막혔다. 꺼지라고 욕할 단계는 한참 전에 부서졌다. 유리는 그를 다른 알파와 붙어먹게 만들 바에야. 몇 번이든 속아 넘어가 줄 것이다. 유리가 무조건 지게 설계된 불공평한 게임이었다. 아나스타샤가 알파와 자야 한다면 그건 나여야 한다는 집착은 줄곧 이어진 광기 어린 소유욕에서 비롯됐다.
유리는 스스로 아나스타샤의 목에 팔을 둘렀다. 아나스타샤는 기뻐하며 단숨에 유리의 입술을 머금었다. 겨우 속옷 속에 성기를 밀어 넣고 문대는 것뿐인데도 유리의 몸은 남자를 받아내듯 거칠게 흔들렸다.
* * *
유라, 내 키사. 결혼은 어떤 사람이랑 하고 싶어? 아버지처럼 듬직한 사람?
유리가 다섯 살 때부터 가족들은 어떤 사람과 결혼하고 싶냐 물었다. 결혼 상대의 예시로 나오는 사람은 아버지인 블라디미르 라포포르트였고, 유리는 무의식중에 ‘아버지랑 닮은 사람이랑 결혼해야지.’라 생각했다. 유리가 알파나 오메가로 발현되거나 혹은 발현하지 않을 수 있지만, 가족들은 유리가 평균보다 큰 포궁을 가졌기에 오메가로 발현하리라 믿었다.
이유야 하나였다. 열 명이나 되는 형제 중 유일하게 에드워드를 닮은 밀 빛에 가까운 금발과 투명한 다이아몬드를 박은 듯한 회색 눈동자를 물려받았으니까.
믿음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입 밖으로 뱉지 않아도 전염됐다. 기대에 찬 기쁨과 애정은 유리까지 예측 불가한 미래에 막연하고 헛된 희망을 품게 했다. 아버지 같은 사람이랑 결혼해야지. 그 앞에 ‘오메가가 된다면’과 아버지 같은 ‘알파’가 자연스럽게 따라와 붙었다.
유라, 내 키사. 넌 이런 거 배울 필요 없어. 발레를 더 하는 건 어때? 승마를 배우는 것도 좋겠어.
무술을 알려달라고 부탁했을 때 큰형인 발렌틴에게 들은 말이었다. 유리가 알파로 발현한다고 생각하는 형제가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못 할 말이었으나, 아홉이나 되는 남매는 유리가 오메가로 발현하리라 믿었다. 거기다 큰형이 배울 필요가 없다고 못 박았는데 거기에 반박할 만큼 간이 큰 형제는 없었다.
유리는 열다섯 살, 알파로 발현하기 전까지 주먹 휘두르는 법도 몰랐다. 하고 싶은데 왜 안 되냐고 물어보지도 못했다. 어차피 ‘오메가’가 되면 필요 없을 테니까. 유리는 에디를 보며 자신의 미래를 예상해봤다. 항상 경호원이 따라다니며, 일을 하지 않아도 여행을 다니거나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었다. 에드워드의 화려한 여가생활을 볼쟈의 부와 명예가 단단히 받쳐줬다. 라포포르트만큼 대단한 가문의 사람과 결혼해야 해. 그래야 아버지처럼…….
유라, 내 키사. 네가 얼른 커서 가정을 꾸렸으면 좋겠어.
고작 열두 살 때 에드워드가 한 말이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유리가 임신한 상황을 상상하고는 했다. 에드워드와 똑 닮은 유리가 아이를 낳는다면, 분명 유리를 똑 닮은 아이가 나오겠지.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모아두면 마트료시카를 열어 진열해두는 기분이리라.
어른들의 뜬구름은 몸집을 키우더니 결국 비를 불렀다. 기대와 희망은 모두 타인이 만들어냈지만, 자연의 섭리를 따른 유리만 비를 맞았다. 축축하게 젖은 몸은 썩은 열매를 거름 삼아 싹을 틔우는 씨처럼 점점 비대해졌다.
알파로 발현한 뒤에도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좋았다. 파티 때 제대로 보지 못해서 부모님을 졸라 사진을 얻어냈는데 시원하게 웃는 잘생긴 얼굴을 매일 쳐다보며 다시 만날 날을 기다렸다. 보답으로 생일에 초대하자고 아버지를 졸라 허락까지 받아냈는데,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알파가 된다는 건, 여태 받았던 사랑을 뺏기는 일이었다. 제외됐던 모든 의무가 지어지는 일이기도 했다. 하던 발레나 열심히 하라던 큰형이 작은형에게 자신을 넘겨버렸다. 15년 짧은 인생에서 겪은 혹독한 시련이었다. 상냥하게 웃어주고 늘 무릎에 자신을 앉혀주던 작은형 오시프의 서늘한 시선을 받고 나서야 유리는 자신이 알파가 되었음을 실감했다.
오시프는 유리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가르쳤다. 다른 형제보다 한참 부족한 체력을 기르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운동하고 식사량도 2배씩 늘었다. 오시프는 일이 바빠도 유리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감시했다. 식사 후에는 무술과 사격을 배웠다. 반동 때문에 손목이 아프고 바닥에 내쳐질 때마다 관절이 비명을 질렀다.
알파가 돼가는 시간은 고통 그 자체였다. 어쩌면 오시프가 있었기에 고통스러웠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갑작스럽게 바뀐 대우에 유리는 제대로 적응을 못 했다. 정말 큰형 말대로 발레와 승마만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오시프에게 맡긴 것은 큰형이고. 큰형과 오시프의 명령을 어기고 유리를 예전 생활로 돌려놔 줄 만큼 힘이 센 형제는 없었다.
유리는 부모님을 찾았다. 두 형에게서 자신을 지켜줄 사람은 부모님이 유일했다. 두 분 모두 밀 빛 금발에 회색 눈을 갖고 태어난 막내가 기대와 달리 알파로 커버렸어도 힘들다고 칭얼대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숨통은 트이게 해주시리라 믿었다.
에디와 볼쟈는 유리의 눈물 어린 호소에 편을 들어줬다. 볼쟈는 오시프에게 일주일에 이틀은 점심 이후에 일정을 잡지 말라고 일렀다. 고작 일주일 중 하루를 얻은 것이지만, 유리는 희망을 봤다. 아버지가 쉬라고 한 날이 아니어도 아버지 곁에 있으면 오시프는 어찌하지 못하겠구나! 천하의 오시프도 아버지 밑에서는 한낱 아들에 불과했다. 사막의 오아시스요 망망대해에서 만난 섬이었다.
그 뒤로도 유리는 에디와 볼쟈의 방을 찾았다. 볼쟈는 30분이 지나면 유리를 내보냈지만, 에디는 유리가 있고 싶을 때까지 머물게 했다. 두 분이 같이 있으면 대부분 에디가 못 가게 막아줬다. 두 달 사이에 키가 9cm나 큰 막내아들은 에디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한숨을 푹 쉬었다.
수업이고 훈련이고 하기 싫다. 매일 뼈를 깎는 고통을 견디며 단련해도 형들만큼 많은 파이를 갖지 못할 텐데 왜 열심히 해야 하지? 여태 누구와 결혼하고 싶냐고 물어본 사람은 있어도 무슨 일을 하고 싶냐고 물어본 사람은 없었다. 아, 오메가가 돼야 했는데 알파가 되어버렸으니 무슨 일을 하고 싶냐 물어보기 전에 힘을 만들어주는 걸까?
“유리, 그 소식 들었니? 얼마 전에 아나스타샤가 덴마크에 왔다 갔단다.”
심통 난 막내아들의 어깨와 머리를 다독여주던 에디가 얘기했다. 아나스타샤가? 유리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맞은 편에 앉아 신문을 읽던 볼쟈가 유리를 바라봤다. 오랜만에 아들의 눈이 반짝였다.
“덴마크? 덴마크는 왜?”
“리브 공주가 파티를 여는데 아나스타샤를 초대했다던데? 왕실이 여는 파티에 초대받았으니 당연히 가야지.”
공주우? 맑은 빛을 내뿜던 얼굴이 질투로 일그러졌다. 볼쟈는 보던 신문을 반으로 접어 내리고 둘의 대화에 집중했다. 에디는 험악해진 유리의 얼굴을 보고도 생글생글 웃으며 테이블로 손을 뻗었다. 차곡차곡 정리된 잡지 사이에서 갈색 서류 봉투를 집었다.
“네 생각이 나서 아빠가 사진도 찍어왔어.”
“아빠도 파티에 갔었어요?”
“아니, 부탁했지. 볼래?”
부탁이 아니라 파파라치에게서 사진을 돈 주고 산 거였지만. 에디는 봉투 입구를 벌리며 유리에게 물었다. 유리는 자리에 앉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알파로 발현되고서 항상 우울하던 얼굴에 오랜만에 활기가 돌았다.
목표가 있어야 고난을 견딜 수 있지. 유리에게 훈련의 목표는 ‘아나스타샤’가 될 것이다. 아나스타샤를 두고 뭘 상상하던 유리 마음이다. 나중에 아나스타샤와 연애하든, 결혼하든, 납치하든 그건 유리가 크고 난 뒤의 일이다. 에디는 유리에게 봉투를 넘겼다.
지켜보는 볼쟈는 웃기만 했다. 그가 오시프에게 아이들을 맡겨 ‘가족’에 묶어놨듯이 유리도 사랑, 동경, 호기심으로 묶어놨다. 집안사람 다루는 건 나보다 낫다니까. 빙하처럼 새파란 볼쟈의 눈동자에 애정이 은은하게 녹아들었다.
몇 달 만에 보는 아나스타샤인가! 유리는 급히 사진을 꺼내 봤다. 연미복을 입은 아나스타샤가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상대하는 사진이 여러 장 들어있었다. 무표정한 아나스타샤. 술기운에 환히 웃는 아나스타샤. 여자와 함께 있는 아나스타샤……. 옆에 자신이 아닌 공주가 있다는 게 흠이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아나스타샤의 최근 행적을 봤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사진을 얻은 뒤로 유리의 투정은 눈에 띄게 줄었다. 오시프가 훈련 강도를 높이면 높이는 대로 쫓아왔다. 아나스타샤가 있는 유리는 천하무적이었다. 사격 실력이 일취월장해 장교로 있는 니콜라이보다 나은 지경까지 왔다. 무술도 곧잘 배웠으며 외국어도 빠르게 흡수했다. 유리는 살인적인 수업 일정에 힘이 들 때마다, 전장에서 가족사진을 꺼내 보듯 에디가 준 아나스타샤의 사진을 꺼내 봤다.
오시프는 유리가 아나스타샤의 낯짝을 보며 훈련을 견디는 꼴이 무척 거슬렸다. 아나스타샤는 인지오 시모나로티의 외동아들이자 사촌인 다비드 시모나로티가 진득하게 키워낸 알파였다. 이제 스무 살밖에 안 됐는데 알파와만 자는 호색한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가문이나 외모, 어디 하나 빠지지 않지만, 알파만 골라 자는 성벽이 문제였다. 분명한 하자가 있는데도 최고라 찬송하다니. 다비드 시모나로티가 알파였다면 아나스타샤 시모나로티의 명성이 지금처럼 과장되지는 않았으리라.
“유리.”
쉬는 시간을 틈타 아나스타샤의 사진을 꺼내든 유리는 오시프가 부르는 소리에 사진을 다리 사이로 숨기며 시치미 뗐다. 오시프가 보면 분명 찢어버릴 거야. 사진을 잘 숨겼는데도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한 장 한 장 줄어들더니 결국 다리 사이에 숨긴 한 장만 남게 됐다. 오시프 형 짓이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형은 내가 아나스타샤를 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이리 내.”
주면 다신 못 볼 텐데. 한 장밖에 안 남았는데. 유리는 싫다고는 말 못하고 괜히 도장 바닥을 봤다. 유리 옆까지 와 쭈그리고 앉은 오시프가 마지막 경고라도 하듯 손을 내밀었다. 지금 주면 최소한 사진이 찢기거나 훼손되진 않을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그의 마지막 사진까지 떠나보낸다는 건 마찬가지지만.
“얼른.”
“아빠가 주신 거야.”
유리의 완곡한 거부는 오시프 앞에서 한낱 웅얼거림에 불과했다. 오시프는 다리 사이에 손을 넣어 사진을 뺏었다. 유리는 뺏기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사진은 이미 오시프의 손에 들어간 후였다.
아, 안 돼. 유리가 소리치기도 전에 오시프가 사진을 크게 네 등분으로 찢어 바닥에 뿌렸다. 웃는 아나스타샤를 기준으로 정확히 네 등분이 났다. 유리는 찢어진 사진을 허망하게 바라보다 오시프를 노려봤다. 감정이라고는 오만밖에 느껴지지 않는 새파란 눈동자가 유리를 꿰뚫었다.
“알파는 알파와 사귈 수 없어.”
“아니야. 사귀고 싶어서 보는 거 아니란 말이야.”
“그럼 왜 아나스타샤 사진을 품고 다니는 거지? 유리. 내게 거짓말을 하는 거니?”
오시프가 인상을 구겼다. 그를 불쾌하게 만드는 요소는 전부 제거된다. 그건 라포포르트 형제의 법이었다. 유리는 변명을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시프는 무릎에 팔뚝을 올린 채 유리를 올려다봤다.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오만방자한 눈빛. 이제 유리는 오시프의 시퍼런 안광을 무시하고 나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다.
“왜 형은 나를 믿어주지 않아?”
다행히 아직 집안 분위기가 유리를 ‘알파이긴 해도 하나뿐인 보석’쯤으로 여기는지라 오시프도 유리에게 물렀다. 유리가 입술을 삐죽이며 속상한 티를 내자 오시프가 무릎을 세워 몸을 일으켰다.
“키사, 믿지 않는 게 아니라….”
유리는 오시프가 어깨를 붙잡기 전에 잽싸게 도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뒤에서 유라! 하고 유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유리는 무시했다. 그대로 정원을 가로질러 에디가 있을 본관으로 향했다. 들판처럼 넓은 정원을 뛰어 에디에게 도착했다. 에디는 볼쟈와 함께 서재에 앉아 발장난을 치고 있었다. 유리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전에 에디의 목을 끌어안고 서럽게 울었다.
“유라, 내 키사. 무슨 일이야? 왜 울어?”
“아빠…. 형이, 형이…….”
운이 좋았다. 유리는 훌쩍거리며 오시프의 만행을 일러바쳤다. 에디는 눈물로 젖은 유리의 얼굴을 닦아주며 달랬다. 겨우 목줄을 채워둔 둘째보다 이제 막 기둥이 되려는 막둥이에게 눈길이 더 가는 건 사실이었다. 울지 말렴, 키사. 에디가 이마와 볼에 입을 맞춰줬다.
“괜찮아. 사진이야 또 찍으면 그만이잖니. 아나스타샤는 살아있으니까. 으음, 그래. 원할 때마다 부탁하렴. 누굴 만나서 뭘 했는지, 뭘 먹었는지 뭘 입었는지까지 알려줄게.”
옆에 앉은 볼자갸 울어서 뜨끈뜨끈하게 열이 오르는 유리의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얘기했다. 유리는 볼쟈의 품에 파고들며 힝, 아빠, 하고 어리광을 피웠다.
“그래, 유라. 내 키사. 네가 원한다면 아나스타샤를 데려올 수도 있어.”
“그건 싫어요. 가둬두면 안 웃잖아.”
코 맹맹한 목소리로 볼쟈가 내민 선의를 내쳤다. 에디와 볼쟈는 유리의 맹랑한 대답에 껄껄 웃고 말았다.
“그래, 안 웃겠구나. 집에 보내 달라고 울지도 모르지. 우는 아나스타샤는 싫으냐?”
볼쟈가 묻자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나스타샤라면 우는 얼굴도 화려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우는 이유가 자신이 멋대로 데려왔기 때문이라면, 싫었다. 그리고 집에는 오시프가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집 안에 있는 걸 알면 당장 죽이려 들 것이다. 그러니 아나스타샤는 먼 곳에 있어야 했다. 유리는 마른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볼쟈가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내일 저녁에 찾아오렴. 다시 아나스타샤를 주마.”
아나스타샤의 사진을 준다는 소리였으나, 볼쟈는 사진 대신 아나스타샤라고 얘기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유리가 아나스타샤를 원하게 된다면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뜻하지 않게 알파로 발현했으나 유리는 여전히 부부의 소중한 보석이었다.
유리는 아버지께 몸을 기대며 어리광을 부렸다. 오시프는 찾아오지 않았다. 흥, 혼나는 꼴을 봐야 분이 풀리는데! 혼날 줄 알고 안 찾아온 게 분명해. 약았어! 다시는 오시프 앞에서 아나스타샤 생각도 하지 않을 거야. 아니! 그 앞에서라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겠어! 내 아나스타샤를 갈기갈기 찢다니! 분노에 타오르던 유리는 등을 일정하게 다독이는 볼쟈의 손길에 얼마 못 가 잠들었다.
* * *
짙은 화약 냄새가 풍겼다. 사격을 끝낸 유리는 산탄총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상체가 반동의 여파로 저렸다. 유리는 이제 됐냐는 듯 사격장 뒤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신문을 보는 오시프를 째릿, 노려봤다. 쉴새 없이 울리던 총성이 멎자, 오시프가 시선을 들어 유리를 응시했다. 살쾡이 같은 얼굴에 요염한 미소가 번졌다.
“벌써 다 쐈어?”
“그래.”
유리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렇단 말이지. 오시프가 중얼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대답이 너무 불량했나 싶어, 유리는 애꿎은 산탄총을 만지작거렸다. 눈 위를 걷는 고양이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유리 곁에 다가온 오시프가 총이 뿜어낸 열기로 뜨거워진 유리의 손을 잡았다.
“더 하고 싶으면 더 챙겨줄게.”
동생을 챙기는 형의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나 유리는 거북했다.
오시프는 동생이 하루라도 빨리 라포포르트의 명성에 걸맞은 사내가 되길 원했지만, 오시프의 마음일 뿐이었다. 유리는 얼른 방에 들어가서 아나스타샤 얼굴을 보고 싶었다.
“아니. 됐어. 오늘 수업은 끝난 거지?”
손을 빼낸 유리가 물었다. 오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수고했다. 내일은 쉬어. 모레, 밖에 나갈 거니까.”
밖에 나간다고? 유리는 불안한 눈으로 형을 올려다봤다. 오시프는 넝마 조각이 된 표적지를 감상하며 대답했다.
“사냥하는 법을 배웠으니 사냥하러 가야지. 아직 뭘 잡을지 정하진 않았다만…….”
그가 유리를 내려다봤다.
“뭘 잡아보고 싶어?”
가늘어진 눈은 사냥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유리는 살기등등한 형의 눈빛에 질려 고개를 틀었다. 형이 얘기하는데 눈을 피하다니. 볼에 닿는 시선에서 오시프의 불편한 심기가 느껴졌다.
“나는… 뭐든 상관없는데. 조준력이 떨어지니까, 사슴이나 곰 같은 거…….”
“곰은 집에도 있잖아. 멀리 갈 것도 없이 꼬리에 불을 붙이면 되겠어.”
오랜만에 막내와 먼 곳까지 나가 바람을 쐬고 오려던 계획이 무산된 터라, 오시프는 상심한 듯 중얼거렸다. 사랑스러운 털 뭉치를 쏴 죽이겠다는 둘째 형의 미친 소리에 유리는 버럭, 소리치고 말았다.
“쏘냐랑 빅토르는 집에서 기르잖아!”
“곰이야 또 사면 되지.”
“내가 죽어도 한 명 더 들일 거야?”
“곰이 죽는데, 네 목숨이 왜 나오지?”
좀 전까지 다정다감하던 분위기가 서늘하게 식었다. 유리는 오시프의 시선을 겨우 받아냈다. 고작 곰과 자신을 비교한 말이 신경에 거슬린 것이다. 오시프는 유리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유라, 내 키사. 널 대체할 수 있는 생명체는 세상에 없어.”
말은 봄바람처럼 부드러웠으나 말을 전하는 목소리는 영구동토에 불어오는 칼바람이었다. 수그려야 한다. 유리는 지금은 숙이고 들어갈 때라는 걸 느꼈다. 여기서 더 버텼다가는 정말 꼬리에 불을 붙일지도 모른다.
“쏘냐도 빅토르도, 가족이야.”
“걔는 곰이야, 유리.”
“…….”
곰이기는 하지만, 유리의 기억이 시작되는 부분에 쏘냐가 있었다. 지금보다 더 작았을 때는 쏘냐 위에 올라타고 정원을 노닌 적도 많았다. 빅토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가족과 다를 바 없다. 짐승이라 해서 가족이 못 될 이유는 없다…….
마음으로는 쏘냐와 빅토르가 어떤 존재인지 알지만, 이걸 입으로 설명하자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오시프는 “그래봤자 곰.”이라며 무시하리라. 호소가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무기력해졌다. 곰은 꺼내지도 말 걸 왜 얘기해서 애들을 위태롭게 만들었을까! 무능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유리는 결국, 눈물을 보였다.
오시프는 잡은 어깨를 세게 움켜쥐었다. 뼈가 으스러질 듯한 고통에 유리는 목을 옴츠렸다.
“알파치고 눈물이 많구나.”
유리는 황급히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화약 냄새가 났다. 유리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 고개를 드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어깨를 놔줬다. 이 집안에는 오메가가 될 씨가 없다. 모든 형제가 라포포르트의 대표할 후계자들이다. 그러니 고작 곰을 곰이라 했다고 우는 짓은 용납할 수 없었다.
“곰은 됐어. ……사슴 잡을래.”
유리는 눈물을 그쳤다. 스스로 어른이 되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쓰디쓴 상처를 품어야 할 것이다. 오시프를 쳐다봤다. 고귀한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알았다.”
오시프는 사슴 사냥을 위해 눈가가 시뻘겋게 부은 동생을 두고 사격장을 나섰다. 걸음 소리가 멀어져도 유리는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라포포르트가 아닌가? 태어나서 받은 성이었다. 멋대로 오메가로 발현하리라 생각한 것도 어른들이었다.
라포포르트의 어엿한 일원이 되면 또 얼마나 견뎌야 할 일이 많아질까. 한 번도 집안의 대단한 주춧돌이 되기를 바란 적도 없는데. 어른이 되면 집을 떠나겠다. 가족의 손이 미치지 않는 먼 곳으로…….
사슴 사냥은 모스크바에서 2시간을 꼬박 달려야 나오는 사유지 숲에서 벌어졌다. 참가 인원은 오시프와 유리, 숲을 구경하고 싶다며 온 에디와 그를 따라온 볼쟈였다. 큰형은 일이 바빠 같이 오지는 못하고 유리에게 본인이 애용하는 라이플을 빌려줬다.
도착한 숲에선 비가 내렸다. 에디는 유리와 오시프에게 잘 다녀오라며 인사한 뒤 볼쟈를 데리고 숲 입구에 만들어놓은 오두막에 들어갔다. 유리는 우비를 쓰고 큰형이 빌려준 라이플을 어깨에 멨다. 오시프는 벌써 숲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처음 오는 숲인지라 싫든 좋든 오시프를 쫓아가야 했다. 오시프는 유리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 비구름으로 우중충하던 하늘이 높게 솟은 나무에 가려져서 대낮인데도 곧 초저녁처럼 느껴졌다.
유리는 필사적으로 오시프를 쫓았다. 오시프가 숲과 비슷한 색의 우비를 입고 있어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쏟아지는 비가 벌어진 우비 사이로 들어와 땀과 섞였다. 옷과 우비의 비닐이 살갗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유리는 젖은 낙엽을 밟고 휘청였다. 다행히 나무를 붙잡아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미끄러진 발목이 시큰댔다.
“……형! 같이 가!”
숲에서 길을 잃을 것 같아서 유리가 소리쳤다. 그제야 오시프가 멈췄다.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원래 이 숲에 살던 사람 같았다.
“얼른 와.”
“조금만 천천히 가면 안 돼?”
유리는 형이 떠날까 다급하게 쫓아가면서도 투덜거렸다. 오시프가 가볍게 웃었다.
“안되지. 비가 오니까 사슴이 숨기 전에 잡아야지 않겠어?”
비가 오는 날의 사냥이 동생에게 좋은 경험이 되리라 생각했다. 오시프는 유리의 뚱한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자마자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형, 형! 유리가 뒤에서 불렀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이래서 형, 누나들이 같이 가자고 해도 안 갔구나! 혼자 다닐 거면 나는 왜 데리고 온 거야? 유리는 안간힘을 다해 오시프를 쫓았다. 지난 석 달 동안 오시프 밑에서 훈련받았다지만 아직 키가 170cm도 안 되는 애송이었다.
거기다 비까지 내리는 숲에서 사슴을 찾는 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보다 어려웠다. 유리가 생전 처음 나갔다 온 사냥은 비를 맞으며 오시프를 놓치지 않으려고 악쓰듯 뛰었던 것밖에 없었다.
사냥은 무슨 사냥이야. 우연히 발견한 사슴은 맞추지도 못했다. 오시프가 대신 잡아주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유리는 100kg가 넘는 사슴을 끌고 오두막이 있는 숲 입구까지 걸어야만 했다. 오시프는 도와주지 않았다. 유리도 도움받을 생각이 없었다.
사슴을 해체해 차에 싣고 꼬박 2시간을 달려 집에 도착했다. 비를 맞아 몸이 눅눅했고 열이 식자 오한이 들었다. 유리는 마중 나온 가족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방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에 들어가 앉자 딱딱하게 얼었던 손발이 녹으며 아려왔다. 으슬으슬 떨리던 몸도 풀어졌다. 새벽에 나갔는데 벌써 저녁이었다. 저녁은 됐고 잠부터 잘까……. 오늘 같은 날까지 오시프가 밥 먹으라며 으름장을 놓지는 않겠지. 유리는 뜨거워진 손으로 덜 녹은 코를 문지르며 생각했다.
물이 미지근해질 즈음 밖으로 나와 씻은 유리는 물기를 꼼꼼히 닦은 뒤에 잠옷을 걸쳤다. 고용인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저녁을 먹으라 일렀지만, 유리는 감기 기운을 핑계로 침대에 들어갔다. 다행히도 오시프나 부모님, 형제가 찾아오지 않았다.
무관심이 조금 익숙해진 유리는 편하게 눈을 감았다. 푹신한 침구가 몸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문밖에서 나는 소리가 거슬렸다. 누가 지나가는 건가? 저녁 시간이면 다들 1층에 있을 텐데. 그나저나 오늘 시트를 바꿨나. 섬유유연제 냄새가 너무 독하잖아……. 유리는 몸을 뒤척이며 사색을 떨치려 했다.
잡은 사슴은 그냥 먹는 거야? 야생 동물인데. 오시프는 고기도 잘 안 먹으면서 왜 사냥을 즐기는 걸까?
사색을 그만두려고 할수록 구렁텅이에 빠져버렸다. 유리는 눈을 감고 있는 짓을 관두고 침대 옆 서랍을 열어 아나스타샤의 사진을 꺼냈다. 스탠드를 켜 사진을 훑었다. 손바닥만 한 수영복을 걸치고 선베드에 느긋하게 누운 아나스타샤가 찍혀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포세이돈이 인간 세상이 그리워 환생한 게 분명해. 유리는 입술을 꾹 깨물며 아나스타샤의 나체와 다름없는 몸을 감상했다.
내가 오메가로 발현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나스타샤와 결혼하지 못하더라도 연애는 해볼 수 있겠지. 아니면 다시 만나든가. 아나스타샤의 연인이 된다……. 유리는 풀피리 소리처럼 얇은 웃음을 흘리며 사진을 도로 서랍에 넣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아나스타샤와 연인이라. 그렇지만 나는 알파인데. 알파끼리도 결혼은 할 수 있다. 임신 확률은 극악이지만, 그래도 임신하는 알파 부부도 세상에 존재했다. 그러니까 괜찮지 않을까. 형제가 위로 아홉이나 있는데 나까지 직계 후손을 만들면 골이 아플 텐데.
유리는 가문을 걱정하며 바지 안으로, 속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이제 음모가 까슬까슬할 만큼 자란 윗부분을 지나 음경을 붙잡았다. 생각해보니 알파로 발현한 뒤로 처음 하는 자위였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생각하며 손을 움직였다. 벌어진 어깨와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 완벽한 역삼각형 몸매에 햇살이 너울거리는 푸른 바다 같은 미소까지.
상상 속 아나스타샤는 오로지 유리를 위해 웃고 울었다. 붉어진 얼굴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아, 아아.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 그때 이름을 부를걸, 도망가지 말걸…….
“아나스타샤…….”
한껏 고조된 기분이 사정과 함께 터져버렸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졌다. 속옷 안에서 손을 뺄 생각도 못 한 유리는 그대로 베개에 코를 박았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던 두꺼운 심줄이 끊길 것처럼 얇아졌다.
유리가 꿈속에서 마저 아나스타샤를 만나러 떠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무의식을 헤매던 유리는 본능적으로 손을 빼 등 뒤로 숨기며 문을 쳐다봤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오시프가 푸른 저녁 빛을 등진 채 서 있었다.
죄인을 데리러 온 야차가 성큼성큼 침대로 걸어오더니 이불을 걷어냈다. 유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을 움츠렸다.
“일어나.”
“싫…….”
오시프가 손목을 낚아챘다. 등 뒤로 숨겼지만, 오시프의 악력을 이길 수 없었다. 손바닥에 말라붙은 자국을 본 오시프는 눈을 가늘게 떠 유리를 응시했다. 유리는 손목을 비틀어 빼려 했으나 빠지지 않았다.
“누굴 생각했지?”
“내가 왜 형한테…….”
“유라, 내 키사. 그렇게나 아나스타샤의 고기가 먹고 싶다면 형이 도와주지.”
아나스타샤! 그걸 형이 어떻게 알지? 유리는 오시프를 올려다봤다. 푸르스름한 안광이 유리를 꿰뚫었다.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임시방편으로 막아봤자 오시프란 물살을 막을 만큼 단단하지 않았다.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었다.
그러니까, 아나스타샤가 살아남는 길이다. 이실직고하지 않는다면 내 존재도 잊어버렸을 남자가 고깃덩어리가 되어 식탁 위에 오를지도 몰랐다. 유리는 시선을 내리깔며 고백했다.
“아나스타샤를 생각했어.”
“뭘 하는데?”
“…….”
유리는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오시프는 답을 기다리며 손바닥에 말라붙은 정액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닦아줬다.
“유라.”
날 예뻐하던 목소리가 경고한다. 오시프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이었다.
“자, 자위하는데……”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고백했다. 죽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사람 목숨이란 수치심보다 무거웠다. 이것으로 아나스타샤가 목숨을 부지했다면야 유리는 가족들 앞에서 아나스타샤를 상대로 자위했다는 사실이 까발려져도 괜찮았다.
오시프가 혀를 찼다. 그러고는 침대에 주저앉은 유리의 허리를 안아 들었다. 순식간에 오시프에게 안긴 유리는 놀라 버둥거렸다.
“내, 내려줘!”
“알파가 알파를 상대로 자위하다니! 가문의 수치구나, 유라. 아버지도 이 사실을 알아야지.”
“싫어! 말하지 마. 하지 마, 형. 싫어.”
그렇다고 정말 까발려지는 게 괜찮은 건 아니었다. 유리는 필사적으로 오시프의 등을 주먹으로 때리며 저항했다. 저녁 시간이다. 식당에 모두가 모여 있을 텐데 거기서 뭘 알린단 말이야! 오시프는 계단을 내려가 식당으로 향했다. 유리는 오시프의 얼굴을 끌어안아 시야를 가렸지만, 속도는 여전했다.
“형, 제발 비밀로 해줘. 다시는 안 그럴게. 아버지께 말하지 마. 형 말 잘 들을 테니까…….”
곧장 식당으로 박차고 들어갈 것 같던 걸음이 멈췄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오시프는 유리를 바닥에 내려주고 유리의 눈가를 닦아줬다.
“알파치고 눈물이 많아.”
언제 흘렸는지 모를 눈물 때문에 얼굴이 축축했다. 유리는 손등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오시프가 하얀 이를 보이며 웃었다. 자신을 예뻐하던 다정한 둘째 형이었다.
“이반이 사슴 고기를 요리했는데 먹을래?”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시프가 등을 감싸며 길을 안내했다. 태도가 바뀐 사람 중에서 최악을 하나 고르라면, 고민도 없이 오시프를 고르겠다. 무섭고 싫다. 수치스럽고 화가 났다.
유리는 먼저 식사하던 가족들의 애정 가득한 눈빛에 질렸다. 날 사랑하는 게 아니잖아. 내 머리카락과 눈 색을 사랑하는 거겠지! 그러면서 가문에 충성하고 알파의 의무까지 져야 했다. 러시아와 최대한 먼 곳에 가서 살 거야.
다 싫다. 아무것도 아니고 싶다. 알파가 된 유리는 극심한 염증을 느꼈다.
* * *
아나스타샤는 소파에 앉아 허공으로 흩어지는 담배 연기를 눈으로 좇았다. 연기는 천장 근처도 가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나, 그 매캐한 냄새는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시간은 어느덧 정오를 넘겼고, 수선과 세탁을 맡긴 옷은 아직 오지 않았다. 집에 사람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으면 벌써 집에 갔겠지만, 여태 한마디도 않고 담배만 주야장천 피워대는 유리의 눈치를 보느라 서비스를 이용한 뒤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후우. 유리가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연기가 흩어졌다. 소파 테이블 위의 재떨이에는 유리가 피우고 버린 꽁초가 가득했다. 담배 한 개비를 세 모금에 나눠 피워서 꽁초를 놓고 새 담배를 입에 무는 간격이 무척 짧았다. 용이 불을 뿜으려고 준비하는 것처럼 매섭게 연기를 뿜어대니 아나스타샤는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경호원과 불순한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됐는데 말이야. 이게 다 그 ‘사적인 보수’를 제때 말해주지 않아서 이런 것 아닌가. 그때 키스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까? 아나스타샤는 다시 생각했다.
아니…. 유리가 밀랍 인형 대신 50만 달러를 받겠다고 한들, 아나스타샤는 페레그린의 파티에서 약이 든 술을 마셨을 것이고 유리가 일이 벌어지기 전에 구해줬을 것이며 호텔로 돌아와서……. 술에 약이 들어있는 한, 바뀌지 않았겠구나. 아나스타샤는 열어둔 창문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필터 끝까지 남김없이 담배를 태운 유리가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라이터 켜는 소리에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바라봤다. 둘 다 옷이 엉망이어서 수선을 맡긴 터라 목욕 가운을 입고 있었다. 유리는 담배 끝에 불을 붙이고 볼이 움푹 들어가게 담배를 빨아들였다. 담배 끝이 빨갛게 타들어 가며 회색 재를 만들었다.
“하아….”
한숨과 함께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가 뿜은 연기는 아나스타샤의 양심을 옥죄였다. 미쳤지. 경호원과 키스하고 전희를 즐기면 어쩌자고! 죗값을 받으려면 대화를 해야 했다. 아나스타샤는 맞은 편에 앉은 유리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나스타샤가 다가오자 유리가 눈을 부릅뜨며 노려봤다.
아나스타샤가 손가락에 걸치고 있는 담배를 뺏었다.
“네가 어젯밤 일을 후회하는 건 알겠어. 그렇지만 담배를 이렇게 피워대면 마흔도 못 채우고 폐암으로 죽을 거야.”
“뭘 후회해? 네 좆을 내 속옷 안에 처넣고 흔들게 한 거?”
먼저 어젯밤 일을 꺼내면 유리가 불같이 화내며 또 그러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아나스타샤가 당황할 정도로 덤덤하게 어젯밤을 요약했다. 그래, 그… 속옷에 좆을 처넣고 흔들었던…. 아나스타샤는 상스러운 묘사에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아니야? 알파랑 해본 적 없댔으니까, 난 또 내가 부탁해서 억지로….”
“난 싫은 거 안 해.”
죄책감으로 축축했던 얼굴에 은은한 빛이 돌았다. 싫은 건 안 한다면. 좋았다는 건가? 아나스타샤가 묻기도 전에 유리가 덧붙였다.
“알파랑 하면서 느끼다니. 나도 정신이 어떻게 된 건가?”
아나스타샤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중얼거리는 유리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여기서 입 놀리면 화내겠군. 말로 하는 위로보다 더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알파와 살을 맞대는 짓이 납득되지 않는데도 즐길 수 있다면, ‘왜 알파와’같은 의문에 답을 떠올릴 틈을 주지 않고 쾌감으로 몰아붙이면 원하는 대로 휘두르기가 좋다.
그는 훔친 담배를 입에 물고 한 모금 빨았다. 유리의 시선이 아나스타샤의 입술에 닿았다. 연기를 뱉어내자 유리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확실해. 더 담배를 피우면 폐가 엉망이 되겠지. 한두 개비는 괜찮지만, 벌써 반 갑 넘게 피웠잖아.”
아나스타샤가 주제를 담배로 돌렸다. 유리는 의심 없이 시선을 테이블에 던져둔 담뱃갑으로 옮겼다. 곧 재떨이도 쳐다봤다. 평소보다 많이 피우기는 했다. 한 갑을 보름 내내 가지고 다니는데 벌써 반 넘게 피웠다. 유리는 입맛을 다셨다. 아나스타샤의 의견에 동의했다.
“맛이 나쁜 건 아닌데. 뭐든 과하면 독이 되잖아.”
아나스타샤는 소파에 무릎을 올려 몸을 세운 자세로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유리는 꿍꿍이가 가득한 아나스타샤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가 얼굴을 살짝 틀며 눈꺼풀을 살포시 내리감는다. 키스다.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원하는 게 뭔지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눈을 부릅뜬 채로 입술을 받아들였다.
아나스타샤가 입 안에 머금고 있던 연기가 흘러나왔다. 아나스타샤의 혀가 앙다문 입술을 벌리고 들어와 입천장과 입술 뒤의 여린 살을 혀끝으로 애무했다. 담배 연기 뒤로 아나스타샤의 페로몬이 존재를 드러냈다. 강렬한 향에 유리는 숨을 급하게 들이마셨다. 페로몬과 연기가 동시에 유리의 기도로 넘어왔다.
“켁, 켈록.”
유리가 헛기침했다. 너무 놀라 걸린 사레 때문인지, 연기 때문인지, 페로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침이 나왔다. 아나스타샤가 볼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유리도 기침하는 상황이 웃겨서 기침이 나오는 와중에도 아나스타샤를 따라 킥킥댔다.
“거봐. 벌써 폐가 상한 거야. 이제 그만 피우는 게 어떻겠어? 그리고 미리 얘기하는데 다비드 집에서는 담배 피우면 안 돼. 다비드도 애 낳고 끊었거든. 굳이 피우고 싶다면야…. 정원에서 피워줘. 꽁초도 땅에 버리면 안 돼. 가지고 들어와서 버려줘. 알았지?”
그는 아직 반도 안 태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이야기했다. 유리는 잔기침을 흘리며 소파에 똑바로 앉았다.
“큽…. 흠, 흠. 별걸 다 알려주네.”
“그럼. 알아야지. 이반 씨가 라이엇의 친구고, 라이엇은 내 형의 남편이니까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은 없어야 할 것 아니야.”
유리는 말없이 아나스타샤를 쳐다봤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옆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집에 가서 씻고 싶어. 방금도 씻었지만… 또 씻고 싶어.”
“흠.”
“지금 들어가면 형도 없으니까 혼날 일 없을 텐데.”
다 큰 사촌 동생을 혼내는 사촌 형이라. 그보다 왜 혼나는데? 밖에서 자고 오라고 호텔 키까지 준 인간이다. 유리의 눈썹이 삐뚤어졌다. 아나스타샤는 천장을 보며 노래를 흥얼거리다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어줬다. 3시간 만에 받은 옷은 독한 페로몬 냄새가 배어있었으나 버클과 단추가 제대로 달려있었다. 유리는 옷을 받고 소매를 확인했다. 어제 정액이 잔뜩 튀었었는데 말끔했다. 둘은 조용히 옷을 갈아입은 뒤 키를 챙겨 방을 나왔다.
아나스타샤를 태운 하얀 벤틀리가 시모나로티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현관에 다다랐을 때는 검은 벤츠가 앞을 지키고 있어서 유리는 그 뒤에 차를 세워야 했다. 아나스타샤는 안전띠를 붙잡은 채 내리지 않고 벤츠를 쳐다봤다.
“형 출근 안 했나 봐.”
“그럼 뭐, 나갈 때까지 드라이브라도 할까요.”
정말 드라이브를 할 생각도 없으면서 유리가 얘기했다. 들어오는 걸 봤을 텐데 어떻게 모르는 척 나가? 아나스타샤가 억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렇다고 다비드가 나갈 때까지 차에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그가 밖으로 나오면 들킨다. 머리만 숨기는 새대가리도 아니고 차에 앉아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한심한 행색에 유리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그는 보닛을 돌아 조수석으로 향했다. 안전띠를 구명줄이라도 되듯이 꼭 붙잡고 있는 아나스타샤의 시선이 다가오는 유리를 따라 움직였다. 유리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
“내려.”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늦게 어디서 뭐 했냐고 물으면 뭐라고 해? 약 먹은 걸 알면 형이….”
“약이랑 난교는 익숙하잖아.”
“어제는 통제 가능한 상황이 아니었어.”
아나스타샤가 정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제어 가능한 난교와 마약 파티가 있단 말인가. 유리는 난교나 약을 가까이하는 사람이 아닌지라 통제 가능한 아수라장이 있는지 없는지 몰랐다. 자주 즐기는 사람이 있다는데, 있나 보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납득했다.
“달리 방도가 있나. 거짓말은 한 번 하면 계속하기 마련이고. 꼬리가 잡히니 솔직하게 얘기해야지.”
“혼나기 싫어!”
“그럼 혼나지 않게 처신을 잘하던가! 누가 주는 대로 덥석덥석 주둥이에 처넣으래?”
“그, 그건….”
“내려!”
유리가 버럭 화를 냈다. 변명도 듣기 싫었다. 아나스타샤는 그제야 안전띠를 풀고 내렸다. 현관으로 올라가는 공주의 걸음은 단두대 위에 서는 귀족처럼 느렸다. 먼저 올라온 유리가 아나스타샤를 기다렸다.
아나스타샤가 겨우겨우 올라와 현관문에 손을 올렸다. 그가 손잡이를 잡자마자 문이 스르륵 밀리며 열렸다. 어. 아나스타샤가 멋대로 열리는 문을 훑고 정면을 바라봤다. 문 반대편에 다비드가 서 있었다.
“혀, 혀엉. 아직 출근 안 한 거야?”
아나스타샤는 활짝 웃으며 다비드에게 안부를 물었다. 다비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분하다 못해 차가워 보이는 푸른 눈이 아나스타샤와 유리를 훑었다. 어제 키를 준 걸 잘 썼나 보군. 거기다 코끝에 스치는 익숙한 향과 낯선 향에 아나스타샤의 상대도 누군지까지 알 수 있었다.
“그래, 일이 있어서. 이제 갈 거다.”
다비드가 출근까지 늦춰가며 아나스타샤를 기다린 이유는 오랜 습관 때문이었다. 아나스타샤에게 유능한 사람이 붙어있으니 잘 못 될 일은 없다지만, 제 눈으로 직접 봐야 마음이 놓였다. 그나저나 ‘사적인 보수’를 운운하더니 받았구나. 경호원이 돼서 의뢰인과 사사로운 정을 나누는 행동은 안 좋지만, 어쩌겠는가. 상대가 원하면 줘야지. 다비드는 착잡한 마음으로 재킷을 털어주는 척 아나스타샤의 어깨를 묵직하게 두드렸다.
“씻어야겠구나. 냄새가.”
그는 문장을 마무리하지 않고 유리를 힐끔 쳐다봤다. 둘에게서 같은 향이 풍겼다. 고용인 중에 오메가가 있기에 손님인 알파들은 체취에 신경 써야 했다. 아나스타샤가 인형처럼 고개를 잽싸게 끄덕였다.
“아, 응. 그러려고. 안 그래도 또 씻을 생각이었어.”
아나스타샤는 어깨를 들썩이며 귀여운 척을 해댔다. 높은 톤의 목소리로 형, 잘 다녀와. 하고 인사하며 다비드의 볼에 입을 맞추려 했으나, 다비드가 아나스타샤의 턱을 손가락으로 밀어내서 껴안지도, 입 맞추지도 못했다.
“그래. …유리 씨.”
다비드가 유리를 응시했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눈빛이었다. 아나스타샤와 피를 나눈 가족인데도 그는 바닷속 깊은 곳에 잠긴 빙하처럼 고요하고 차가웠다. 자기 동생이랑 잤다고 나까지 혼낼 생각인가…? 묘하게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아나스타샤를 잘 부탁해요.”
그는 양손으로 유리의 손을 부드럽게 움켜잡고 손등을 두 번 두드렸다. 경호를 잘 부탁한다는 얘기겠지. 잠자리까지 잘 부탁한다고 격려해주는 친척이 몇이나 될까? 손등을 덮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유리는 착잡한 표정을 한 다비드를 응시하며 답했다.
“예.”
아나스타샤가 살아있는 게 먼저다. 살아있어야 혼도 내고 벌도 주고 연말도 같이 보내고 크리스마스 때 선물도 보내지. 죽으면 무용지물인 꿈이었다. 할 말을 다 한 다비드는 둘을 지나쳐 벤츠에 몸을 실었다. 아나스타샤와 유리는 정원을 가로질러 저만치 멀어지는 벤츠를 바라봤다.
폭풍 전 잔잔한 바다에 버려진다면 이런 기분이리라.
“흐아아.”
아나스타샤가 먼저 긴장을 풀었다. 그는 로마까지 닿을 만큼 긴 한숨을 내쉬며 2층으로 올라갔다. 유리는 자기 어깨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호텔에서 씻고 나왔는데도 페로몬 냄새가 나나.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유리. 안 올라올 거야?”
계단을 오르던 아나스타샤가 뒤를 돌아봤다. 유리는 자연스럽게 안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보여줬다. 아나스타샤가 웃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또 피우려고? 그렇게 피우면 폐가 망가진다니까.”
“혼자 씻을 수 있겠죠?”
유리가 물었다. 아나스타샤는 얼굴을 찌푸렸다. 밑으로 축 처진 입꼬리가 조각 같은 얼굴과 잘 어울려 웃겼다.
“좋아. 해볼게. 대신 얼른 와야 해?”
비밀의 방까지 찾아와 구해준 사람이었다. 사고가 나기 전에 날 구해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신뢰가 잔잔히 흘렀다. 유리는 무심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지만, 대단히 믿음직스러웠기에 아나스타샤는 뒤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나스타샤가 벽 뒤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본 유리는 도로 현관을 나갔다.
시모나로티가 공들여 가꾼 정원을 쓰는 사람은 정원사와 수호천사뿐인지라 다 출근, 등원하고 없는 낮에는 풀벌레만 날아다녔다. 보초가 없는 정원 구석에서 유리는 마음 놓고 휴대전화를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했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고 나서,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예, 보스.]
중성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상대방 주변은 고요했다. 유리는 휴대전화를 턱과 어깨에 끼고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정원을 설렁설렁 걸었다. 호텔에서 아나스타샤가 씻을 동안 부하에게 페레그린이 쓴 약을 알아보라고 명령한 참이었다.
“알아냈어?”
[당연하죠! ‘홍밍’이라는 약입니다.]
상대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중국산이야?”
[아뇨. 이름만 중국식이에요. 미국에서 제조됐습니다. 지금은 동부에서 유행이고 서부로도 유통되는 것 같아요. ‘타이거아이’의 모조품입니다.]
“타이거아이?”
처음 듣는 약이었다. 모조품이 돌아다닐 정도면 진품은 비교도 안 되게 효과가 좋다는 건데…. 수억 달러짜리 그림도 덜컥 사들여 수집하는 페레그린이 모조품을 들고 다니는 게 웃겼다. 그녀가 평생 쓸 약값보다 그녀가 경매장에서 한 번 사들이는 그림의 금액이 더 클 테니까.
“그게 뭐야. 처음 듣는데.”
[미국에서만 유통됐던 약입니다. 몇 년 전에 꽤 유명했어요. 보스가 미국으로 오기 전에 제조, 유통이 끊겨서 모르실 수도 있겠네요. 대마처럼 심신을 늘어지게 하면서 코카인의 5배가 넘는 각성효과를 경험할 수 있다나요. 무색무취에 액체 상태로 유통되고 음료수병에 담아 판매도 했답니다.]
“자세히 아네.”
[보스가 물어볼 것 같아서, 요것도 조사해봤죠?]
으쓱이는 목소리에 유리는 소리 내어 웃었다. 일리야가 속을 박박 긁어대는 새, 혹은 쥐라면 전화의 주인공인 마야는 일리야가 긁어놓은 곳에 귀엽게 턱을 비비는 고양이였다. 그녀는 유리가 미국에 올 때 직접 고른 수하였다. 유능하기로는 일리야를 능가했고 재미는 레이즈빗보다 떨어지지만, 괜찮은 여자였다.
“잘했어.”
[그리고 호프먼 페레그린에게도 메일을 보내뒀습니다.]
“그래.”
어떤 내용을 보냈는지 유리는 묻지 않았다. 헬렌 페레그린이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죽을 때까지 철저히 관리해야 할 것이다. 물론, 유리가 그녀를 죽여버리겠다고 결심했기에 관리가 길진 않겠지만…. 무엇보다 지금은 초여름 햇살에 몸이 따뜻하게 녹아 기분이 좋은 터라 복수를 조금 미뤄도 될 것 같았다.
[또 오시프가 어디 있는지 알아냈습니다.]
눈을 감고 햇살을 느끼던 유리는 눈을 떴다. 세상이 푸르스름한 빛에 감싸여 칙칙하게 보였다. 유리가 어디냐고 물어보지 않아도 마야는 금방 말을 덧붙였다.
[퀘벡에 있답니다.]
“뭐 볼 게 있다고 거길 가? 누가 얘기했어. 일리야야?”
[예. 저한테 얘기한 거면, 보스께 얘기하라고 은연중에 흘린 거나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아직도 거기 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경유한 건 맞나봐요.]
유리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 휴대전화를 받았다. 아나스타샤도 골치가 아팠지만, 오시프 쪽도 만만치 않다. 이 인간은 보여도 불안하고 안 보여도 불안하다. 보스턴에 있다더니 갑자기 퀘벡……. 그럼 지금은 어디 있는데?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대체 뭐하러 들어온 거야? 목적이 뭐래? 뉴스에 나오게 사람까지 죽여놓고….”
오시프의 발장구는 쓰나미가 되어 아나스타샤를 찾아왔고 그걸 막는 건 유리였다. 마야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이번 살인 사건! …오시프가 한 건가요?]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일리야가 그건 안 가르쳐줘? 내가 아나스타샤 경호원으로 왔는데 코빼기 하나 안 보이는 거 보면 오시프가 맞아.”
반신반의하던 유리는 아예 오시프가 범인이라 단언했다. 오시프는 아나스타샤를 싫어한다. 아니, 증오했다. 기회가 된다면 아나스타샤를 죽여버릴지도 모른다. 혼기가 찬 사랑스러운 막냇동생이 닳고 닳은 알파를 좋아한다고 약혼도 안 하고 종일 행적을 좇고 그를 상대로 자위까지 했으니 말 다 했다.
마야가 아아, 하고 동조했다. 오시프가 저질렀다고 믿으면 그럴듯한데, 그가 어떤 인간인지 아는 사람들이 들으면 의아해할 일이었다. 그러나 의아함은 얼마 가지 못했다. 오시프 속을 들여다볼 바에야 시커먼 물속에 머리를 집어넣는 쪽이 낫다. 차라리 태평양 한가운데에 떨어져 헤엄으로 육지까지 오는 게 더 편할 것이다.
[그럼, 보스. 휴가 재미있게 보내세요. 아나스타샤 씨는 사진보다 잘 생겼나요?]
파파라치에게서 아나스타샤 사진을 사 오던 마야였기에, 유리의 수하 중에서 누구보다 아나스타샤의 외모를 자세히 알았다. 마야의 입에서 아나스타샤가 언급되자 유리의 입이 히죽, 벌어졌다.
“사진은 아나스타샤의 외모를 반도 못 담아냈어.”
[아, 저도 보고 싶어라. 저도 저택으로 불러주세요. 일리야가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보스가 더 잘 생겼다잖아요.]
물론, 보스도 잘생겼지만요. 마야가 덧붙였다. 유리는 도 넘은 농담에도 웃기 바빴다. 지금은 기분이 좋았다. 햇살 때문인지, 몸이 지나치게 나른했다.
“나중에 부르면 네가 와.”
[알겠습니다, 보스.]
마야가 전화를 끊었다. 유리는 휴대전화를 뒷주머니에 넣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태양이 머리 위에 있었다. 따사롭다. 잔디밭에 누워서 낮잠이라도 자고 싶었으나 건물 안으로 털래털래 걸음을 옮겼다. 공주께서 찾기 전에 들어가 봐야 했다.
* * *
방에 돌아온 유리는 공포와 맞서 겨우 몸을 씻은 아나스타샤의 질책을 샀지만, 그 사이 괴한이 드는 소동은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수건을 구명조끼라도 되는 것처럼 허리에 두른 채 꽉 쥐고 있었다. 다 큰 남자가, 그것도 어릴 때부터 납치, 협박을 늘 곁에 달고 살던 이가 고작 살인범의 협박 편지에 비 맞은 개처럼 떠니 우습기 그지없었다.
물론 유리는 웃지 않았다. 담배 피운다고 자리를 비운 것도 모자라 비웃기까지 하면 미움을 살 게 분명했다. 반나절이면 풀리겠지만, 유리는 그 반나절도 미움받기 싫었다. 유리가 드레스룸과 욕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아나스타샤는 안심하고 옷을 찾아 입었다.
그런 뒤,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호텔에서 씻고 왔는데 또 씻어야 하나 싶어 버텼으나,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욕실 밖으로 보내주지 않았다.
“안 돼. 또 씻어. 한 번으로 페로몬이 지워질 것 같아? 두 번은 더 씻어야지. 이 집에는 오메가가 일한다고. 그러니 손님인 우리가 조심해야지.”
그런 수고를 덜 바에야 베타를 고용인으로 뽑으면 될 일 아닌가. 유리도 오메가를 수하로 두지 않았다. 다른 형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 귀찮게 하네. 유리는 투덜거리며 옷을 벗었다. 속옷까지 벗은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쳐다봤다. 그는 화장대 의자를 욕실 가운데에 놓고 등을 돌리고 앉았다.
“안 봐도 되겠습니까?”
“응. 넌 괴한이 쳐들어와도 맨손으로 때려눕힐 것 같거든.”
드디어 아나스타샤가 내 실력을 알아주는군. 유리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무심한 얼굴이 헤벌쭉 벌어지자 기괴한 미소가 됐다. 그럼 조용히 씻을 수도 있겠구나. 유리는 샤워 부스에 들어갔다. 조금 전까지 아나스타샤가 썼던 곳인데 복숭아향 보디샴푸 향만 풍겼다.
물을 틀었다.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씻었는데 또 씻고, 졸린데 물세례를 받으니 눈꺼풀이 묵직하게 감겼다. 직무 태만으로 보수가 까일지도 모르겠는데. 그럼, 아나스타샤의 눈 한쪽을 못 만들게 되려나. 유리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괜한 걱정을 했다.
“본가에도 오메가 고용인이 있어. 루치오 씨라고…. 정원사도 하면서 아버지 비서도 하는 유능한 사람이야. 지금도 일하셔. 본가에 일하는 사람과 눈이 맞아서 결혼하셨지. 아이가 생겨서 분가했는데, 근처라서 시간 날 때마다 자전거를 타고 놀러 갔거든.”
아나스타샤는 본인이 아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루치오 씨의 딸이 오메가로 발현되고 나서는 찾아가지 못했어. 나나 그 애나 발현 전에는 친하게 지냈는데 말이야. 수영도 같이했고 시칠리아에 갔을 때도 내 말동무가 되어줬거든.”
아나스타샤와 여행도 같이 간 오메가. 유리는 머리를 주무르던 손을 멈추고 아나스타샤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유리도 그 여자가 누군지 안다. 아나스타샤의 과거와 현재를 가장 잘 알고 그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도 연대기처럼 기억하는 사람은 세상에 자신과 아나스타샤 둘뿐이라 자신할 수 있었다.
“난 그 애가 참 좋았는데. 오메가와 알파는 한 짝이라서 그런가? 가까이 지내려면 그사이에 자꾸 뭔가 낀단 말이지.”
아나스타샤는 무척 애석하다는 듯 탄식했다. 그래서 알파와만 교제하나? 아니, 교제라고 하기에는 얕고 짧은 만남만 있었다. 그저 하룻밤 침대에서 재워주는 것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그러니까, 잘 씻어야 해. 괜히 페로몬 풍기다가 누구 하나, 발정 나기라도 하면 형이 우리 둘을 묶어다가 허드슨강에 던져버릴지도 모르니까. 난 이 집이 좋아. 나갈 생각 없다고.”
“별관도 있잖아요?”
드물게 유리가 대꾸하자 아나스타샤가 질색하며 뒤를 돌아본다.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일그러진 표정이 희뿌연 유리 때문에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로 그의 표정을 예상할 수 있었다.
“싫어! 거긴 동떨어져서 음식이 가져오는 도중에 식고 세탁물도 먼지 묻는단 말이야. 원래 이어졌었는데 형이 막아버렸어. 관리하기 힘들다고 벽을 허무는 게 말이 돼?”
그러면서 지하에는 수영장에 바까지 만들었다니까. 아나스타샤는 투덜거리며 별관이 사실은 별관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치지 않는 호기심과 수다스러움에 익숙해진 유리는 묵묵히 몸을 닦았다. 얼른 씻고 나가자. 나가서…. 아나스타샤의 입을 다물게 할 만한 짓이 뭐가 있나 찾아보자…….
아나스타샤가 코앞에서 개처럼 냄새를 맡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는 한숨을 푹 쉬며 옷을 입었다. 드디어 쉴 수 있다. 새 셔츠를 꺼내 입은 유리는 권총이 든 홀스터를 허리에 찼다. 아나스타샤는 그 모습을 구경했다.
“오늘 일정은 없는데 뭘 할 생각입니까.”
“그림을 그릴 거야.”
“예.”
그럼 방에서 나갈 일은 없겠네. 유리는 소파에 풀썩, 앉았다. 아나스타샤가 팔짱을 낀 채 유리를 내려다봤다. 유리는 소파 등에 머리를 기댄 채 낮잠이라도 잘 것처럼 늘어졌다. 아나스타샤는 예의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태도에 눈만 꿈뻑였다. 경호원이라는 자가! 라포포르트의 귀염둥이가! 알파는 처음이라던 자존심 덩어리가!
불손한 눈빛을 느낀 유리는 고개만 들어 아나스타샤를 힐끔거렸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게슴츠레한 회색 눈동자는 “뭐, 왜.”라고 물었고, 파란 눈동자는 “진심이니?”하고 묻고 있었다. 둘은 서로의 눈빛이 보내는 뜻을 읽었으면서도 모르는 척 노려볼 뿐이었다.
누구 하나가 져주면 끝날 기 싸움이었으나, 둘 중 누구도 져줄 생각이 없었다. 둘 다 어디 가서 아무에게나 굽히지 않는 귀한 핏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유리는 시모나로티의 요청으로 온 경호원이었다. 의뢰인과 기 싸움하는 경호원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잘 생각은 없습니다. 그냥, 쉬는 거지.”
그리고 유리는 아나스타샤와 다투기 싫었다. 결국, 굽히고 들어가는 건 유리였다. 유리가 꼬리를 말자 아나스타샤가 투덜거렸다.
“아니긴. 이불이라도 덮어줘야 하나 고민했잖아. 약은 내가 맞았는데, 왜 네가 피곤…… 아하, 아니야. 자도록 해. 내가 깨울게.”
또 일당 50만 달러를 거들먹이며 쪼잔하게 굴 줄 알았는데 아나스타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량을 베풀었다. 갑자기 왜 저래? 유리는 의아했으나 말이 바뀌기 전에 도로 소파에 기댔다.
“내가 네 안에 제대로 들어갔나 본데. 아니면, 네가 페로몬을 잘 타는 체질일지도 모르지.”
의미심장한 말에 유리는 도로 고개를 들었다. 아나스타샤는 여우처럼 얄밉게 웃기만 했다. 뭐가 어디에 들어가고 체질이 뭐가 어쨌다는 건지는 잘 몰라도 성희롱인 건 잘 알겠다. 유리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무슨 뜻입니까.”
확인해 봤자, 좋은 것 없는 말임을 알면서도 유리가 물었다. 아나스타샤는 이젤 앞이 아닌 유리 옆에 앉으며 판도라의 상자 뚜껑을 살짝 밀어줬다.
“네가 어제 들이마신 내 페로몬을 중화하느라 힘든 거야. 밥 먹고 나서 졸린 것처럼 말이야.”
“무슨……. 오메가와 잘 때는 한 번도…….”
유리는 가까이 다가온 아나스타샤를 경계하며 반박했다. 아나스타샤만큼은 아니지만, 유리도 나름 성생활을 해왔다. 오메가와 잘 때는 상대 페로몬 때문에 다음 날까지 후유증이 남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웃었다. 눈앞에 하얀 치아와 초승달처럼 휜 눈이 보였다.
“그야, 나는 알파니까.”
“왜 나만….”
“나는 익숙하니까. 유리, 나는 알파로 발현됐을 때부터 여태까지 알파만 상대했어. 처음인 너와 똑같이 반응하면 우습지 않겠어?”
뚫린 주둥이라고 멋대로 떠드네. 유리의 미간 골이 깊어졌다. 아나스타샤가 아니었다면 벌써 이마로 턱을 들이박았을 것이다. 공주는 유리의 속도 모르고 일그러진 표정을 보며 킥킥댔다.
“귀여워라.”
“그림이나 그리시죠.”
“그런데 왜 정중하게 얘기해? 어제처럼 말해도 돼. 욕도 괜찮아. 나름…… 좋았거든.”
“아니면 정장 수선을 맡기러 나갈까요? 저도 잠이 다 깬 것 같은데.”
둘은 서로를 코앞에 두고 아귀가 맞지도 않는 대화를 이어갔다. 아나스타샤가 입을 다물었다. 재미난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푸른 눈에 장난이 가득하다. 기묘한 신경전이 다시 이어졌다.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한마디라도 더 하면 터질 시한폭탄이기도 했다. 폭탄을 터트릴지 해체할지는 아나스타샤가 뱉을 말에 달렸다.
“날 만든다면서, 어떻게 만들 생각이야? 시간이 날 때 날 관찰해야지 않겠어?”
“예.”
“음? 날 안 보고 만드는데 어떻게 나일 수가 있어?”
아나스타샤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으며 고개를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유리는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대답했다.
“당신을 잘 아니까요.”
“나 좋아해?”
“전에 말했을 텐데요.”
“그래. 했었지. 날 좋아해서 내 밀랍 인형을 만들고 싶다 했잖아.”
믿기지 않을 뿐이지…. 아나스타샤는 숨을 골랐다. 날 좋아하는 건 알겠다. 그런데 날 ‘잘 아니까’는 뭐지? 굉장히 익숙하고 편한 관심이었다. 좋지 않은 쪽으로…….
“내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그건 어제 답했는데요.”
“그래, 그랬구나. 얼굴 말고는 봐줄 데가 없다고 했지.”
아나스타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유리가 자신에게 쏟는 애정은 가족에게서 느끼는 친근함도, 본가 침대 같은 편안함도 아니었다. 날이 서고 비이성적인 관심. 아나스타샤에게 떼어놓을 수 없던 수많은 스토커와 비슷한 냄새가 났다.
“날 얼마나 잘 아는데?”
스토커냐 아니냐 물어본 것과 다름없었다. 미동도 없는 회색 눈동자에 아나스타샤의 모습이 비쳤다. 사실, 유리가 범인인 게 아닐까. 나와 가까워지고 싶어서 사기극을 펼친 걸지도 모르지. 그라면 할 수 있다. 러시아의 지붕을 받치는 라포포르트가 사람 다섯 정도 같은 방법으로 죽여 연쇄살인으로 꾸미는 건 일도 아닐 테니까.
내 관심을 끌기 위해 남을 죽이는 스토커. 여태 겪었던 잔챙이들과 차원이 다른 집착이었다. 공포가 허리를 움켜잡았다. 알싸한 열기가 배꼽 주위를 맴돌다 흩어졌다.
유리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진실을 마주할 때 큰 용기가 필요하기도 하는데, 아나스타샤 씨는 그만한 용기가 있습니까?”
“아니. 나를 잘 안다면서… 내가 얼마나 겁쟁이인지 모르는 거야?”
“알면서 왜 물어?”
“궁금하니까.”
무서운데 궁금한 건 못 참겠거든. 아나스타샤가 웅얼거렸다. 호기심은 고양이만 죽일 게 아니라 아나스타샤도 죽이는군. 유리는 작게 웃었다.
“당신이 누구와 자고 난교를 벌이는지는 몰라도, 누가 사체가 든 소포를 보내고 당신을 칼로 찔렀는지는 알지.”
“……내 주위에 관심이 많구나?”
“그래. 나도 함부로 못 하는 아나스타샤가 사고라도 당하면 기분이 좋지 않거든.”
거만한 말투에 아나스타샤는 뼛속이 간질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유리는 날 보호하는 데에 큰 의미를 둔다. 섹스나 교제를 원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아님, 알파는 죽어도 알파와 못 잔다는 잘못된 가정교육을 받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아무튼, 다른 알파를 부르지 않고 자신의 살갗을 내준 것도 이제야 이해됐다.
남에게 줄 바에야 내가 먹는다.
내가 먹는다… 라 생각해보니 요 몇 년은 큰 사고가 없었네. 시체가 든 소포나 칼날이 붙은 편지를 받은 횟수도 줄어들었다.
아나스타샤가 하하…. 하고 힘없이 웃었다.
“그랬구나, 내가 무슨 생각까지 했는지 알아? 라포포르트라면 이 정도 살인 사건은 눈 깜빡 안 하고 만들 수 있겠다 싶어서. 그리고 넌 날 좋아하지. 그러면 말이 되잖아. 갑자기 결정된 미국행에 내가…. 표적이 될 이유가 있겠어?”
“상상력이 대단하네. 우리 집은 국가와 가문을 위해 일해. 심심풀이로 사람 죽이는 사이코패스는 아니거든.”
유리는 덤덤하게 대꾸하며 몸을 돌려 천장을 쳐다봤다. 유리의 능청에 아나스타샤가 소녀처럼 웃었다. 역시, 내가 상상했지만 터무니없는 계획이었다.
“만일 네가 꾸민 일이라면, 평생 진실을 숨겨야 할 거야.”
농담이겠지. 여태 그가 한 농담 중에서 가장 소름 돋는 농담이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고. 아니, 아니지. 사실이라니. 확인된 건 하나도 없다. 심증만 있을 뿐이다…. 오시프는 살인범이 첫 살인을 벌일 때 러시아에 있었다. 사람을 시켜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지만, 오시프는 이런 식으로 지저분하게 일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좀 전까지 마야에게 오시프가 확실하다고 단정했던 사람은 동전처럼 쉽게 생각을 뒤집었다.
확실한 건 오시프가 뭔가 꾸미고 있다는 건데. 뭘 꾸미고 있는지 감도 못 잡았다는 게 문제다. 유리는 착잡한 심정으로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의 크리스털 개수를 세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다. 들키지 않으면 된다. 시모나로티가 눈치채기 전에 상황을 종결하면 그만이다. 내 임무는 아나스타샤 시모나로티의 경호다. 다른 건, 그 인간이 알아서 하겠지.
아무렴.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 아니겠는가. 만에 하나 오시프가 벌인 일이라 해도 무덤까지 비밀로 한다면 문제없다.
“유리가 경호를 맡아서 다행이라 생각해.”
“어… 예.”
“그러니 제대로 된 날 만들도록 해. 네가 알던 것과 다를 수도 있잖아?”
아나스타샤가 별안간 유리의 손을 덥석 잡아 자신의 가슴을 만지게 했다. 아니, 이런 건 필요 없는데. 유리가 버티는 것도 모자라 몸을 뒤로 젖히며 거부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거절을 사양했다. 손바닥에 닿는 근육은 생각보다 말랑말랑하고 따뜻했다. 알파의 가슴이다. 깊은 곳에서 거부감이 일렁였다.
“어디든 만져도 좋아. 이왕이면 촉감까지 비슷하게 만드는 건 어때?”
“안 그래도 될 것 같은데.”
“아니야. 해봐. 재미있을 거야.”
재미는 지금 네가 보잖아! 유리는 소리치고 싶었다. 아나스타샤는 막무가내였다. 저택에 오메가가 있으니 연거푸 샤워하라고 시켰으면서 어디든 만져도 좋다 얘기하는 건 무슨 심보란 말인가. 그럼에도 유리는 얌전히 아나스타샤에게 손목이 잡힌 채 이끄는 대로 가슴과 배, 목과 턱선, 목을 만졌다.
“제대로 만져야지.”
아나스타샤가 추궁하며 손가락을 잡아 입술을 더듬게 했다. 부드럽고 여린 살이다. 유리는 넋을 놓고 아나스타샤를 응시하다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내가… 인형으로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허락한 거야?”
“자위할 거 아니야?”
“아니야!”
너무나 평범한 목소리로 평범하게 되묻는 아나스타샤 때문에 유리는 얼굴을 붉히며 버럭, 소리쳤다.
“내가 왜 당신 인형으로 자위한다 생각해? 나, 그런 사람 아니야.”
“그래? 알았어.”
“자위 안 해.”
“알았다니까. 자, 더 만져. 시간 될 때 기억해야지 않겠어?”
아나스타샤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러곤 유리의 손을 도로 잡아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렸다. 수영으로 단련된 허벅지가 얇은 바지 밑으로 느껴졌다. 유리는 기겁하며 손을 빼냈다.
“왜 자꾸 만지래? 싫어! 몸까지 만들 생각 없어!”
“왜? 이왕 만들 거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만들어야지. 성기도 본 떠갈래? 길이라도 재줄까? 아, 이미 알고 있나?”
“필요 없어!”
잔뜩 흥분한 유리는 소파 밖으로 벗어나며 거절했다. 왜 저래? 이유가 뭐야? 갑자기, 스토커냐고 은근슬쩍 물어보더니 무슨 바람이 들어서 손까지 잡아 만지라고 난리야. 저의를 찾고 싶어도 순수하게 빛나는 눈동자에는 정말 순수함만 느껴졌다. 공주는 양손으로 소파를 짚은 채 얌전히 유리를 기다렸다. 유리가 두 걸음만 가까이 다가가도 손을 잡아 다시 만지라며 이곳저곳 짚어줄 것 같았다.
길어지는 대치에 아나스타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돈은 필요 없고, 갖고 싶은 게 내 인형인데, 만들 거 똑같이 만들면 좋잖아?”
“그 이상은 필요 없어.”
“그건 모르지. 필요할지도. 줄 때 받는 게 좋지 않겠어?”
“안 좋아. 안 좋다고. 내가 왜 남의 몸을 더듬고 그걸 기억해서 인형을…….”
아니, 인형을 만들고 싶다 얘기한 것부터가 이상하구나. 이상한 요구가 맞다. 형 말대로 깨끗하게 50만 달러씩 받을 걸 그랬어. 유리는 입술을 말고 고개를 사선으로 숙였다.
“그럼 조건을 달지. 날 온전하게 만들어.”
“얘긴 끝났잖아. 받아들이지 않겠어.”
“좋아. 그럼 어쩔 수 없지. 계약은 없던 거로 해.”
“뭐?”
“나도 네가 내 인형을 온전하게 만들지 않겠다고 해서 더는 옆에 둘 수 없다고 형한테 말하기 창피하지만, 어쩌겠어? 나는 온전한 나를 원해. 머리만 만들어서 표본처럼 방에 갖다둘 생각이야? 그건 너무 가엽잖아!”
머리만 있는 건 징그럽고, 좆까지 달린 건 괜찮나? 유리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나스타샤를 노려봤다. 아나스타샤야 창피하고 말 문제지만, 유리는 많은 게 걸렸다. 사랑스러운 막내가 어쩌다가 변태 취향을 가졌는지 개탄할 형제 사이에 죄인처럼 서 있을 것인가, 아나스타샤를 개똥처럼 주무를 것인가.
“좆까지는 필요 없어.”
답은 핏자국만큼 선명했다. 유리가 두 걸음 다가왔다. 아나스타샤가 기다렸다는 듯이 유리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래, 그건 차차 상의해 보자고.”
죽어도 “알았다.”라고는 안 하네. 나중에 또 말 바꾸는 거 아니야?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손길에 이끌려 소파에 도로 앉으며 불안한 미래를 점쳤다. 짐승 같은 감은 틀리는 적이 없었다. 순진한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이끄는 대로 가슴과 허리, 등,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종아리와 엉덩이까지 만져야 했다.
<1권 끝.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