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 여섯 번째 표적 (1/10)

1. 여섯 번째 표적


야심한 밤, 뉴저지 알파인.

시모나로티 저택의 대문이 열리며 하얀 벤틀리가 들어왔다. 차는 현관 앞에서 멈췄고 뒷좌석에서 남자 둘이 내렸다. 오른쪽 문을 열고 내리는 사내는 이 저택의 주인인 다비드 시모나로티, 왼쪽 문을 열고 뒤늦게 내린 남자는 그의 사촌이자 얼마 뒤 가빈 은행 베이징 지사로 발령 나갈 아나스타샤 시모나로티였다.

두 사내의 외모는 어두운 현관에서도 화려하게 빛났다. 무표정한 얼굴로 내린 다비드 시모나로티가 고요한 호수라면 싱글벙글 웃는 얼굴인 아나스타샤 시모나로티는 청량한 지중해였다.

아나스타샤는 콧노래를 부르며 벌써 현관 계단을 올라가는 다비드를 쫓아 올랐다.

“오늘 같이 가줘서 정말 고마워. 형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오늘도 혼자 갔으면 엘랑 쇼이 투정 들어주느라 고막에서 피가 났을 거야.”

“안 가도 될 파티에 나까지 부르지 마. 예술가면 엘랑 쇼이 말고도 많잖아?”

“그림이 마음에 드는걸.”

아나스타샤의 시무룩한 목소리에 다비드는 픽, 웃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평소 같았으면 무시했겠지만, 발령을 앞두고 꿈을 이루고자 먼 미국까지 온 동생을 못 본 척할 수가 없었다. 베이징으로 떠나기 전에 원 없이 놀고 싶어서 미국에 온 줄 알았는데 나름 야망을 품고 온 것이다.

꿈 많은 아나스타샤는 가정환경과 재정 등의 문제로 꿈을 포기하는 청소년들을 후원할 재단을 만들고 싶어 했다. 다비드가 알기로는 아나스타샤가 지금도 개인적으로 그들을 후원하고 있었다. 그들이 성공해서 ‘아나스타샤 시모나로티’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면 선량한 부르주아로 이름을 떨치겠지. 선량한 부르주아라… 다비드는 아나스타샤의 활짝 핀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이미지를 만들지 않아도 공주는 늘 선량했다. 저 정도면 착한 아이지.

장기 계획이 성공하려면 수많은 관심이 필요했고, 믿을만한 파트너를 곁에 둬야 했다. 아나스타샤가 미국행을 강행해 사교 파티에 나가는 이유도 조만간 지을 목장에 들어올 양떼를 위해서였다.

다비드는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황금 양이었다. 미국에 둥지를 튼 다비드의 도움을 받아 인맥을 넓힌다면 순조롭게 계획을 진행할 수 있으니 말이다. 오늘도 엘랑 쇼이의 까탈스러운 요구를 다비드로 잘 막아냈다. 형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아나스타샤는 예수를 바라보듯, 다비드를 응시하다 현관 모퉁이에 시선을 뒀다.

“소포가 왔는데?”

아나스타샤가 구석에 놓인 작은 소포 박스를 주웠다. 노란 박스는 수취인도 발신인도 적혀있지 않았다.

“버려.”

다비드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며 무심하게 말했다. 박스는 깨끗했다. 보나 마나 스토커 짓이리라. 아나스타샤는 듣는 둥 마는 둥, 다비드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서며 소포를 귓가에 대보기도 하고 흔들어보기도 했다. 안에서 비닐에 싸인 뭔가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아냐, 버려. 열다가 손 다치지 말고.”

스토커가 보낸 우편물에는 면도날이 달려있다던가 동물 사체가 들어있는 일이 다반사였다. 아나스타샤의 외모만큼 화려한 전적 때문인지, 항상 피라미가 꼬였다.

“그렇지만, 궁금하잖아. 내 생각에는 강아지 사체가 들었을 것 같아. 냄새가…… 나.”

아나스타샤는 박스 틈에 코를 박아 킁킁 냄새를 맡고는 이내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안에서 썩은 내가 진동한다. 그러나 이런 스토킹 협박은 늘 있는 이벤트였기에 아나스타샤는 별걱정 없이 박스를 뜯었다. 죽은 개를 보는 건 슬프지만, 어쩌겠는가. 억울하게 죽은 걸 쓰레기통에 버릴 수도 없고. 묻어줘야지. 테이프를 뜯고 박스 날개를 펼쳤다. 박스가 젖지 않게 비닐로 감싼 그것은, 아나스타샤가 생각하는 ‘시체’가 맞았다.

덮인 비닐 위에 까만 표범이 걸어 나오는 엽서 한 장이 있었다.

“으, 이게 뭐람.”

아나스타샤는 풍기는 악취에 헛구역질하면서 엽서를 손가락 끝으로 뒤집었다. 핏물에 물들어 검붉어진 흰 엽서에 글이 적혀있었다.

「다음은 너야, 아나스타샤 시모나로티.」

좋지 않은 단어들의 연속이다. 여기서 「다음」이라는 것은 내 차례가 오기 전에 누군가 있다는 것이며 「너」는 그 차례를 지나 내 차례가 왔다는 것이고, 「아나스타샤 시모나로티」는 아나스타샤 시모나로티의 이름이었다. 그러니까 셋을 조합하면 다음 표적은 아나스타샤 시모나로티, 바로 자신이란 뜻이다.

보통은 날 왜 봐주지 않아? 사랑해요. 이런 말을 쓴 편지를 넣어주는데 「다음은 너야」라니. 내 앞에 누가 있었을까? 아나스타샤는 편지 내용을 생각했다. 호기심 왕성한 본능이 겉을 감싸고 있던 비닐을 벗겨내고 안에 들어있는 ‘내장’ 하나를 엄지와 검지로 집어 올렸다. 아냐. 다비드가 걱정스럽게 아나스타샤를 불렀다.

얇은 실 팔찌에 동그란 보석을 단 듯한 모습은 익히 보던, 신체 기관이었다.

“……이거. 나, 성교육 시간에 많이 보던 건데.”

아나스타샤는 천천히 말을 이으며 다비드를 바라봤다. 그의 표정도 아나스타샤와 비슷했다. 알파, 오메가라면 모를 수 없는 생식기였다. 아나스타샤에게 배달 온 내장은 ‘알파선’이었다.

알파선은 오메가와 알파로 성별이 한 번 더 나뉜 짐승이라면 목 뒤에 가지고 있는 급소다. 포유류 중에서 알파, 오메가로 나뉜 종이 인간 말고도 더 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가 들고 있는 크기가 나오는 짐승은 이 땅에 딱 한 종뿐이었다.

“아냐, 이리 내.”

다비드가 굳은 아나스타샤에게서 박스를 뺏으려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아나스타샤의 무릎이 꺾이며 머리가 뒤로 넘어갔다. 다비드는 상자 대신 동생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신보다 큰 아나스타샤가 힘없이 쓰러지니 다비드 혼자 그 무게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아나스타샤를 끌어안은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상자가 바닥에 떨어졌다. 비닐 안에 담겨있던 핏덩이가 대리석 바닥에 나뒹굴었다. 하얀 바닥이 순식간에 피로 흥건해졌다. 한두 개가 아니다. 다비드는 침착하게 그 개수를 셌다. 핏기가 남은 것, 마른 것. 네 개의 알파선이 더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들고 있던 것까지 합하면 총 다섯 개의 급소가…… 사람의 급소가 들어있었다.

다비드는 기절한 아나스타샤를 끌어안은 채, 점점 영역을 넓히는 핏물을 응시했다. 심장 박동이 귓가에 울렸다.

누군가가 사람을 다섯 명이나 죽였다. 그리고 여섯 번째 희생자는.

* * *

철썩……. 파도가 쳤다. 요트에 부딪힌 파도는 산산이 부서져 물방울이 되었다. 공중에 흩어지는 물방울은 햇빛을 받아 작은 보석처럼 빛났다. 이반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슬쩍 올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햇볕이 따가웠다. 구름 한 점도 없는 쾌청한 날씨라 뒤를 돌면 마이애미가 보였고, 앞을 보면 바하마 섬의 꼭지가 보였다. 그는 선글라스를 도로 쓰며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좋은 날씨에 피가 낭자한 요트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한탄스러웠다. 혈 향보다 더 지독한 담배 냄새가 풍겼다. 담배 연기는 파라솔 옆에 놓인 테이블 재떨이에서 올라왔다. 한여름의 악몽을 만든 주범이 선베드에 앉아있었다. 얼굴은 파라솔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반이 사랑하는 막냇동생이었는데, 형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느긋하게 드러누운 채 발을 까딱이고 있었다.

사랑스럽고 어여쁜 동생이었는데. 스무 살이 되자마자 도망치듯이 미국으로 간 뒤로 못 봤는데, 그간 많이 변했다. 이반은 선글라스를 써서 눈이 안 보이는 지금, 착잡하게 동생의 매끈한 다리를 응시하며 아쉬워했다.

“살, 살려주세요.”

바닥을 짚은 남자의 손과 팔뚝은 험한 일을 겪었는지 피멍이 군데군데 보였다. 요트 운전석에는 여자 한 명이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져있었다. 머리통에서 흐르는 피가 선체를 타고 흘러 선베드 근처에 피 웅덩이가 생겼다.

하얀 갑판에 수영복만 입고 쭈그리고 앉은 남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목숨을 구걸한다. 이반은 쯧, 하고 혀를 찼다. 일이 바쁜데 저놈 때문에 순서가 밀린 참이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게, 빌 짓을 왜 하는지. 눈감아줬을 정도만 떼어먹었으면 이런 일도 없지 않은가.

“목숨 귀한 줄 알면서 왜 그랬어?”

파라솔이 설치된 선베드에 앉아있던 이반의 동생이 몸을 일으키며 느긋한 말투로 물었다. 그제야 파라솔 밑에 가렸던 얼굴이 드러났다. 밀 빛에 가까운 금발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남자가 잘못했다며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이, 이러려던 게 아니었습니다. 제, 제가 어떻게 오시프 씨의 자산을 빼돌리겠습니까!”

“믿었는데 말이야.”

믿기는. 이반은 웃는 것 대신 동생의 발밑에서 굽신대는 남자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파라솔 안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미인은 재떨이에 올려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반의 시선이 담배를 따라 흘러갔다.

붉은 입술과 공작의 꽁지깃처럼 아름다운 속눈썹, 그리고 그 안에 박혀있는 어떤 보석보다 아름다운 회색빛 홍채까지…… 존재 자체가 신이 내린 선물이었다. 이반은 황홀한 얼굴로 사랑스러운 동생을 감상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보석이었다.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애정에 겨운 시선은 살의만큼 거슬렸다. 입이 헤벌쭉, 벌어진 형의 얼굴을 언짢게 쳐다보던 미인이 물었다.

“입국은 둘이 했는데 왜 혼자야?”

“아, 오시프는 얼마 전에 볼일이 있다면서 보스턴에 갔어. 이제 내 차례야? 나 말해도 돼?”

이반이 반색하며 물었다. 상대는 떫은 얼굴로 손을 휘저었다. 하지 말라는 것처럼 보였지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오시프가 시키는 일이라면 싫어도 해야 했고, 이반이 시키는 일이라면 보수를 두둑하게 받은 뒤 할 생각이었다. 입에 물고 있는 담배 끝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차례가 된 이반이 말했다.

“아나스타샤 시모나로티가 경호원을 찾고 있어.”

“뭐?”

그는 이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는 피 웅덩이에 빠졌다. 그늘에 앉아있던 미인의 얼굴이 햇빛을 받으며 수면에 반짝이는 물비늘처럼 아롱거렸다.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긴 머리카락마저 여신의 사랑을 듬뿍 받은 밀밭처럼 흔들렸다.

“아나스타샤가?”

“그래, 라이엇한테 부탁받았어. 이쪽은 네 전문이잖아?”

“일은 직원이 하지. 나는 의뢰 안 받아.”

“너무 그러지 말고. 할 거지, 유리?”

이반이 애처롭게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아름다운 이반의 동생 유리는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얼굴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머리 위로 쓸어올렸다. 밀 빛에 가까운 금발이 손길에 사라졌다가 다시 이마 밑으로 내려왔다. 도저히 이반의 부탁을 들어줄 얼굴이 아니었다. 내가 왜 귀찮은 짓을 맡아야 하냐며 쫓아낼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반은 유리가 거절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받는다. 받고말고. 봐라, 심드렁한 척해도 발은 가만히 있지를 못하잖아. 싫으면 벌써 거절하고도 남았다. 남의 손에 아나스타샤를 넘길 바에야 내가 하겠다고 쥐고 나설 것이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좋아하니까. 그냥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그에게 꼬이는 스토커들을 모조리 찾아내 불구로 만들어놓고도 분이 안 풀린다며 스토커의 가족, 친구까지 불행에 빠트리고도 분이 안 풀린다며 씩씩대는 녀석이 아니던가.

아나스타샤를 스토킹하는 스토커 중에서 유리를 따라올 범죄자는 없으리라고 이반은 자부하면서도 동생이 아나스타샤와 잘 지내리라 믿었다. 사랑스러운 동생은 아나스타샤와 섹스하고, 그를 소유하길 원하는 기존 스토커들과 달랐다.

아나스타샤를 관찰하고 그의 인생을 멀찍이서 구경하는 것. 그러면서 그 누구도 아나스타샤를 해하지 못하게 통제하는 것이야말로 유리의 즐거움이었다. 그런 유리가 바로 옆에서 아나스타샤를 관찰하며 그를 큰 위험으로부터 지킬 절호의 기회를 거절할 수 있겠는가!

확신에 찬 이반은 어깨를 반듯이 폈다. 고심하던 유리가 입을 뗐다.

“얼마 주는데?”

“응?”

생각도 못 한 질문에 이반이 물었다. 아나스타샤를 경호할 상상에 밝아졌던 얼굴이―이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다시 건조해졌다.

“설마, 시모나로티에서 대가도 없이 날 부려 먹으려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나! 한, 음. 50만 달러 얘기하던데.”

이반은 되는 대로 지껄였다. 한 100만 달러까지는 본인 선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의뢰인이 아나스타샤고 위급한 사건이기에 조건도 물어보지 않고 무작정 유리를 찾아온 참이었다.

“그렇게 많이?”

“얼른 구하고 싶은가 보지. 할 거지?”

“맨날 쫓아다니던 경호원들은 어디 가고?”

“아시아로 발령 나면 경호원들도 집에 못 들어가니까 휴가 갔대. 여태 그 사촌 형이 붙여준 사람들이 아나스타샤를 경호했지.”

그렇다면 경호원을 또 뽑을 이유는 없는데……. 유리는 조용히 형을 노려봤다. 고요한 압박에 이반은 하는 수 없이 실토했다.

“알파 연쇄살인 사건 알지? 다섯이나 죽었는데 아직 용의자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건 있잖아. 어젯밤에 아나스타샤가 협박 편지를 받았대. 여섯 번째 표적이 아나스타샤라는 거지.”

살해 협박이라면 수도 없이 당한 아나스타샤다. 고작 개, 고양이 사체를 담아 보내며 널 죽이겠다는 협박은 두려움도 주지 못했다. 아나스타샤에겐 유능한 경호원과 범죄를 응징해줄 이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그건 스토커나 정자 거래소와 관련될 때 일이다. 연쇄살인 사건의 다음 희생자로 지목이 됐다면, 시모나로티 측에서 뭔가 더 조처하고 싶겠지. 공권력보다 더 확실하게…….

유리는 이반을 응시했다. 시모나로티가 취한 확실한 조치는 유리 자신을 고용하는 것이었다. 시모나로티와 연줄이 있는 이반을 이용해, 신용이 확실한 경호원을 고용한다. 그리고 범인을 잡을 때까지 보호한다. 아나스타샤는 죽지 않고 라포포르트는 시모나로티, 데르베이탄 두 가문과 신뢰를 쌓을 좋은 기회였다.

안타깝게도 유리는 아나스타샤와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았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모든 것을 좋아하지만, 그건 한 발자국 뒤에서 봤을 때 이야기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와 상성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 지내보지 않아도 안다. 자신과 아나스타샤의 궁합은 최악이었다.

그는 화려하고 말이 많으며 또 알파만 골라 잔다는 소문이 도는 호색한이었다. 반대로 유리는 성인이 된 이후엔 파티나 연례 행사에 참여해본 적도 없고 발정기가 오면 꼬박꼬박 약을 챙겨 먹으며 시베리아 별장으로 휴가를 나가는 은둔자였다.

아나스타샤와 조우하는 순간 마이애미로 돌아오고 싶어서 미칠 것이 분명했다. 그럼, 의뢰를 안 받을 거냐? 아나스타샤를 남의 손에 맡길 거냐? 맡겨서 잘 못 되면…… 그렇게 둘 수 없다. 내가 아니면 누가 아나스타샤를 경호한단 말이지?

고민하는 유리의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해. 무슨 일이 있어도 아나스타샤를 구할 사람이.”

이반이 유리가 원하는 말을 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나스타샤를 목숨 걸고 지킬 사람은 세상에 유리 한 명뿐이었다. 상성이 좋든 안 좋든 변치 않는 사실이었다. 연쇄살인 사건의 피해자로 지목된 것치고 받는 보수는 적었으나 아나스타샤를 지킬 기회를 차지하는데 돈이야 어떻든 좋았다.

아나스타샤의 은인이 된다. 유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무심하고 심드렁하던 얼굴이 한 폭의 명화처럼 수수하게 빛났다. 이반은 넋을 놓고 그 얼굴을 쳐다봤다. 지금도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내 동생이지만, 오메가로 발현됐다면 참 좋았을 텐데…… 같은 아쉬움이 남았다.

“시모나로티에서 그만한 성의밖에 못 보이다니 실망인데.”

실망한 사람의 얼굴은 봄을 몰고 오는 순풍이었다. 겨우내 잔 잠에서 깨어난 곰이 몸을 풀었다. 이반은 들뜬 동생의 마음을 헤아려주기로 했다. 그의 얼굴은 여덟 살 때 크리스마스 선물로 불곰을 받았을 때보다 더 밝아 보였다.

훌쩍. 화기애애한 형제의 대화에 애처로운 숨이 끼어들었다. 유리와 이반은 바들바들 떨고 있는 남자를 내려다봤다. 흐음. 이반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듣는 귀가 있었다.

철…… 썩……. 파도가 요트에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만 들렸다.

“저, 저는 아무것도.”

불안한 침묵이 이어지자,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유리가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내 남자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이반은 남자가 머리 반쪽이 날아가고 없는 시체가 되기 전에 고개를 돌렸다. 어우! 어쩌다 내 사랑스러운 막냇동생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사람을 죽이는 살인귀가 되었는지!

미국까지 같은 비행기를 탔던 형제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아아, 누굴 원망하랴. 살인귀 손에서 컸는데 뭐가 되길 바란단 말인가…. 이반은 널브러진 시신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쓰며 먼저 요트에서 내려와 타고 왔던 고무보트에 올랐다.

“공항에서 보자, 유리.”

이반은 난간에 비스듬하게 기댄 채로 서 있는 유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유리가 손을 휘젓기도 전에 이반을 태운 고무보트가 출발했다. 유리는 멀어지는 보트를 보며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고무보트는 점이 되어 사라졌고, 푸른 바다에 햇빛이 보석처럼 쏟아졌다.

* * *

열다섯 살의 유리는 아버지인 블라디미르의 다리에 무릎을 대고 앉은 채 차창을 구경했다. 온통 풀과 밭뿐이었다. 포도인지 올리브인지 키 낮은 나무에 뭔가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저기에 달린 열매를 먹으면 집에 못 돌아갈지도 몰라. 유리는 으스스한 상상을 하며 부러 아버지의 허벅지를 무릎으로 짓눌렀다.

아버지 위에 굳이 앉을 나이도 아니었으나 귀찮게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는 것에 대한 소소한 복수였다. 슬프게도 유리의 복수는 블라디미르에겐 솜털도 안 빠진 조그만 아들의 재롱인지라 아픈 기색 없이 사랑스러운 막내아들을 바라봤다.

저번 주와 이번 주 내내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파티에 참석했다. 학교도 빠지면서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는 이유는 유리 자신의 짝을 찾기 위해서였다. 유리는 왜 내 신랑감을 아버지가 찾아주는 건지 의아했으나, 그뿐이었다. 아버지가 택한 사람이라면 믿을만한 사람이지 않겠는가. 아직 오메가로 발현되지는 않았지만, 남들보다 포궁 크기가 커서 오메가라고 집안 어른 모두가 입 모아 얘기했다.

알파로 발현된다면 포궁이 더 작아야만 발현 후, 흔적기관으로 남는다. 그러니 으레 자신이 오메가로 발현될 것이라 여겼다. 어른들 말로는 그랬다. 유리는 관심 없었다. 오메가고 알파고 집에 가고 싶었다. 형이랑 소총 조립 내기하기로 했는데. 빅토르에게 줄 연어도 보러 가기로 했는데. 형, 누나랑 해야 할 일도 태산인데 아버지한테 붙잡혀서 지중해나 둘러보고 있으니 지루했다.

푸우……. 유리가 한숨을 쉬자 블라디미르가 유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귓바퀴와 볼에 입술을 문댔다.

“유라, 내 작은 키사. 여기까지 오느라 지쳤구나. 그렇지?”

“네. 멀어요. 저는 비행기 타기 싫단 말이에요. 차도 1시간은 탔는데 도착도 못 했잖아요.”

유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투정 부리자 블라디미르는 낮게 웃으며 볼에 코를 비볐다. 가까이 닿은 아버지에게서 싸한 시가 향이 났다. 익숙한 향에 유리는 얼굴을 아버지 쪽으로 돌려 입을 맞췄다. 그러자 블라디미르는 광대가 튀어나올 정도로 환히 웃으며 유리를 쓰다듬었다.

“오늘 이반 형이 연어 사러 노르웨이 양식장 보러 가자고 했는데.”

“아아, 미안하다. 유라, 네 계획이 있는지 물어보지 않았네. 이반에겐 나중에 가라고 얘기해두마, 응?”

“여기만 보고 집 갈 거죠?”

집에 돌아가겠다고 약속을 받아낸다면야 연어야 어찌 되든 좋았다. 계곡에 서서 연어를 잡아먹는 곰을 못 보는 건 아주 조금, 정말 조금 아쉽지만 말이다. 유리가 보석같이 아름다운 눈망울을 깜빡이며 귀엽게 묻자, 블라디미르는 고개를 연거푸 주억거렸다.

“그래, 그러자. 집에 가자. 에디도 널 그리워하겠어.”

블라디미르는 유리의 볼에 뽀뽀를 더 해주고는 옆자리에 앉혔다. 겨우 아버지한테서 집에 돌아가자는 약속을 받아낸 유리는 양다리를 흔들며 창밖을 바라봤다. 온통 풀과 밭이었다. 오른쪽에 즐비한 포도나무에는 포도송이가 송이송이 열려있었다. 얼마나 맛있을까.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을 받고 자란 포도로 만든 와인은 얼마나 맛있을까! 유리는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하늘을 응시했다. 눈 부신 태양 마차가 보였다.

누구 생일 파티랬는데 이름이 너무 길어서 듣자마자 잊어버렸다. 아나스타샤 뭐라고 했는데…. 왜 이탈리아인 이름이 ‘아나스타샤’야? 러시아 혼혈인가? 유리는 아버지를 따라 차에서 내리며 생각했다. 누가 됐든 아버지 마음에 들면 다시 만날 테고, 아니면 이번이 끝이겠지. 오메가가 될 아이는 심드렁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이곳은 시모나로티가 연회를 위해 지은 호텔이었다. 규모는 3층밖에 안 되는 작은 호텔이었으나 시모나로티의 안목으로 꾸민 덕에 용의 둥지처럼 보였다. 정원수와 꽃, 틈틈이 놓인 조각상이 전부인 정원은 한정된 자원으로도 화려함을 뽐냈다.

유리도 뻗친 잔가지가 하나 없는 정원수를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블라디미르가 유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리는 정원 분수에 눈을 둔 채 손만 휘저어 아버지의 손을 찾아 잡았다. 단단하고 따뜻한 손이 작고 여린 유리의 손을 감싸 쥐었다.

“아나스타샤 시모나로티야. 이름은 기억하고 있지?”

블라디미르가 물어도 유리는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아나스타샤 시모…… 뭐시기. 또 잊어버렸다.

“다비드 시모나로티도 알파였으면 둘을 두고 고민했을 텐데 말이야. 유라, 아나스타샤는 꽤 괜찮은 알파란다. 문란하긴 하다만…… 알파들 노는 게 다 그렇지.”

“아버지는 마음에 들었어요?”

“마음에 들다마다.”

“그럼 약혼하면 되죠.”

유리의 당돌한 대답에 블라디미르가 입을 주먹으로 가리고 한참을 웃었다. 그는 빨개진 얼굴로 유리를 내려다보며 어리고 심드렁한 막둥이를 타일렀다. 여태 인자하게 빛나던 푸른 눈이 짐승처럼 서늘해졌다.

“유라, 네가 마음에 들어야 약혼할 수 있는 거야. 너뿐만 아니라 상대도 널 마음에 들어 해야지. 뭐……. 이 볼쟈는 내 키사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상대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으니 편하게 얘기하렴.”

블라디미르가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얘기했다. 나의 소중한 보석이 원한다면 시모나로티 집안을 무너트려서라도 아나스타샤를 대령할 수 있다. 러시아의 기둥이나 마찬가지인 라포포르트에게 은행과 크고 작은 사업을 벌이는 시모나로티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유리는 아버지의 말뜻을 이번 알파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음번이 있을 거란 협박으로 들렸다. 작고 고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말 잘 듣고 재미있는 사람이랑 결혼할 거예요.”

“그래, 그래. 아나스타샤도 재미있는 사람이지.”

“그리고 씨가 튼튼한 알파여야 해요. 나랑 나이 차도 많이 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유리는 아버지 에드워드가 해준 말을 떠올리며 블라디미르에게 전했다. 블라디미르가 눈썹을 당겨 웃었다.

“하하, 씨가 튼튼한 것까지는 내가 확인할 수가 없는데.”

“그건 어떻게 확인해요? 맛보면 알아요?”

“글쎄……. 모르겠구나. 에디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다.”

“아빠 씨는 어떻…….”

“키사, 그만 떠들고 들어가자. 우릴 초대해준 아나스타샤 얼굴은 봐야지 않겠니?”

블라디미르는 엉뚱하게 빠지는 이야기를 끊어내고 유리를 회장 안으로 이끌었다. 생일 파티라더니 신년 파티처럼 화려하게 꾸몄다. 회장 문 앞에는 얼음을 깎아 만든 다비드상이 있었다. 회장 구석에는 재즈를 연주하는 밴드도 있었다. 연미복과 드레스를 입은 사람이 와인이나 위스키 잔을 든 채로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거나 춤을 췄다.

규모는 보통인데 장식이며 고용인이며 왕족 행사 못지않았다. 유리가 주변에 흥미를 보이자 블라디미르가 시모나로티 이야기를 더 해줬다.

“시모나로티는 ‘레어’를 가지고 있어. 간혹 레어에 있는 물건을 경매로 올리는데 시모나로티와 연줄이 없으면 초대받을 수가 없거든.”

“레어는 드래곤 둥지잖아요.”

“맞아. 드래곤이 아끼는 보물이라고 생각하면, 한번 보고 싶어지지 않겠어?”

“안 팔면 뺏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레어가 어디 있는지 모르니 뺏을 수가 없구나.”

“모르는 게 어디 있어요?”

하하, 블라디미르가 웃었다. 지상에 있다면 뭐든지 찾아내는 라포포르트조차 시모나로티의 ‘레어’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낼 수 없었다. 보석뿐만 아니라 첨단 기술까지 숨겨놨다는 소문이 있던데. 유리가 아나스타샤와 약혼한다면 레어의 정체도 알아내지 않을까. 블라디미르는 작은 꿈을 그렸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정체가 궁금했다. 마피아인 것 같지는 않고 사업만 하는 집안도 아닌가 싶고, 왕족처럼 꾸며둔 걸 보니 가문의 자부심이 대단한 것 같았다. 아버지도 약혼을 은근히 바라는 눈치던데 집안이며 혈통은 물론이고 성격까지 만족한 걸까, 아니면 레어를 찾기 위해 날 팔려는 모략일까.

“아! 오셨군요, 라포포르트 씨.”

멀리서 밝고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유리는 그 외침이 아나스타샤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아들을 향해 인자하게 웃던 블라디미르는 다가오는 경쾌한 발걸음에 표정을 굳히며 아나스타샤를 맞이했다. 그의 눈이 빠르게 아나스타샤를 훑었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청년은 물가에 나온 공작새처럼 화려함을 뽐냈다. 웃음 짓는 두 눈은 바위에 몸을 부딪치는 파도처럼 반짝였다. 흠잡을 곳이 없다. 아나스타샤 정도면 건실한 알파였다.

블라디미르 앞까지 걸어온 아나스타샤가 악수를 청했다. 블라디미르가 손을 맞잡았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모나로티 씨.”

“무리한 부탁이었는데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포포르트 씨. 아드님 소문이 어찌나 자자하던지요.”

시선이 작은 유리에게 쏠렸다. 유리는 아버지의 재킷을 꽉 쥔 채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봤다. 아아, 아나스타샤 시모나로티. 그래, 그의 이름은 아나스타샤 시모나로티였다. 이제야 ‘시모나로티’가 머리에 박혔다.

아버지도 형제들도 다 파란 눈에 검은 머리카락인데, 맨날 보던 색인데도 아나스타샤는 꼭 포세이돈의 현신을 보는 것 같았다. 지중해 물거품에서 태어난 게 분명해. 파란 눈이며 멀끔하게 넘긴 결 좋아 보이는 머리카락이며……. 청량한 지중해를 사람으로 빚어놓은 모습이었다.

사람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유리가 넋을 놓고 쳐다보기만 하자 아나스타샤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유리의 시선이 손에 닿았다. 피아노를 치기 좋아 보였다. 조약돌 같은 손톱이 달려있었다. 잡아보고 싶다. 만져보고 싶다. 유리는 침을 삼켰다.

“안녕? 네가 유리 라포포르트구나. 나는 아나스타샤 시모나로티라고 해. 아냐라고 부르면 돼.”

청아한 목소리에 유리는 다시 고개를 들어 아나스타샤를 응시했다. 파란 눈과 마주치자 아나스타샤가 눈이 휘게 웃으며 호감을 보였다. 손가락만큼 눈도 예뻤다. 저 눈은 어떤 보석을 썼기에 샹들리에보다 빛이 날까?

“유라.”

아버지의 부름에 유리는 정신을 차렸다. 내민 손을 잡아야 할 때를 놓쳤다는 걸 깨달았다. 유리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이렇게 창피할 수가! 첫인상을 바보처럼 남겼으니 앞으로 아나스타샤와 얘기할 일은 없겠구나! 유리는 수치심을 참지 못하고 회장을 뛰쳐나왔다.

블라디미르는 감쪽같이 사라진 아들을 찾느라 아나스타샤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으나 성과는 있었다. 유리가 인사도 못 하고 도망갈 정도로 부끄러워하다니. 아이가 확실히 오메가로 발현되면 아나스타샤를 러시아로 초대해야겠군. 그는 이탈리아 남자와 결혼하는 사랑스러운 막내아들을 상상했다. 둘 사이에 태어난 어여쁜 손주에 레어까지 차지할 수 있다면 남은 자식들이 누구와 결혼하든 개의치 않으리라.

그러나 블라디미르의 계획은 유리가 오메가가 아닌 알파로 발현하면서 물거품이 되었다. 아버지인 에드워드는 말도 안 된다며 유리의 성질 테스트를 여섯 번이나 더 했으나 여섯 번 다 알파로 판정됐다. 포궁은 여전히 평균보다 컸다.

가족들은 실망했지만, 티 내지 않았다. 슬프게도 유리는 실망한 기색을 읽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낳은 자식이 전부 알파이니 한 명 정도는 오메가였으면 좋겠다는 부모의 바람이 가족의 염원이 되었고 유리를 언짢게 했다. 바란다고 되는 일이라면 라포포르트의 자식이 열 명이나 되진 않았겠지.

성질이 어떻게 발현하든, 무관심했던 유리도 처음으로 자신이 오메가가 아닌 것에 크게 상심했다. 아나스타샤와 약혼을 못 하겠구나. 그의 아이도 가질 수 없으며 연애는커녕 하룻밤을 즐기는 일도 못 하리라. 아나스타샤가 알파도 만나주면 좋겠는데. 어린 유리는 편견 없이 소망했다.

* * *

담장 너머로 보이는 시모나로티의 저택은 궁전이라 부르면 좋을 법했다. 대문의 양 끝에 세워진 사자 조각상이 방문자를 매섭게 노려봤다. 대문이 열릴 때까지, 유리는 사자와 눈싸움을 했다. 어찌나 실감 나게 조각했는지 갈기나 코 부분이 마모됐음에도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보였다. 정문 앞에 멈췄던 차가 천천히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잘 가꿔진 정원수와 조경물이 눈에 들어왔다.

계절마다 꼼꼼히 관리된 티가 났다. 집주인의 성격이 어떤지 겪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유리는 이 집의 주인이 누군지 조금 안다. 아나스타샤 시모나로티의 사촌 형인 다비드 시모나로티. 아나스타샤와 비슷하지만 다른 사내. 아나스타샤보다 몇 살이 많았더라? 유리는 날개를 땅 쪽으로 기울여 몸을 비튼 천사 조각상을 노려보며 다비드 시모나로티의 얼굴을 기억하려 노력했으나 아나스타샤의 웃는 얼굴만 떠올랐다.

“드디어 도착했네. 운전이 이렇게 얌전해서야 밤일은 어떻게 하나 몰라. 시동은 걸리나?”

솜털 나르듯 조심스러운 운전에 좀이 쑤셨는지 이반이 러시아어로 투덜거리며 기지개를 피었다. 유리는 웃음으로 대꾸했다. 운전기사는 뒤에 앉은 귀빈이 웃으며 떠들어도 백미러도 힐끔거리지 않았다.

“듣기로는 용병도 고용했다던데, 몇이나 고용했습니까?”

이반이 기사에게 영어로 정중하게 묻자, 기사가 답했다.

“저택에는 추가로 고용한 두 팀이 상주하고 있습니다.”

“두 팀? 열 명? 스무 명?”

“스무 명입니다.”

“많이도 심어놨네.”

쓰읍, 이반은 침을 삼키며 팔짱을 꼈다. 경호원 수를 늘리는 것도 모자라 개인 경호원까지 추가했다. 아나스타샤 상태가 좋지 못한가 보다. 이반은 유리를 쳐다봤다. 자신의 동생은 정보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당연히 유리는 다비드 시모나로티의 얼굴을 기억하는 데에 온 정신이 팔렸다.

듣고 있냐고 물어볼 찰나, 차가 멈췄다. 드디어 구름처럼 움직이던 벤츠에서 내릴 수 있게 됐다. 유리와 이반은 기사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차에서 내렸다. 현관 앞에는 다비드 시모나로티가 나와 있었다.

아아, 기억났다. 다비드 시모나로티. 유리는 흐릿하게 기억나던 다비드의 얼굴을, 마주하고서야 개운하게 떠올렸다. 아나스타샤보다 차분하고 날카로우며 차가워 보이는 인상의 남자. 나이는 아나스타샤 보다 열 살인가 많은데 그를 아이나 애인 다루듯이 하는 사촌 형이었다. 지금은 넷째를 임신했다고 들었는데. 유리의 시선이 정장 조끼 단추에 머물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라포포르트 씨.”

다정함이라고는 일말도 느껴지지 않는 무정한 목소리였다. 유리는 가만히 서서 다비드를 훑었다. 이반이 다비드를 안았다. 곰만 한 이반의 덩치에 가려진 다비드는 다정하게 웃으며 이반의 양 볼에 차례대로 입을 맞췄다.

“오랜만이네요. 다비드 씨! 아이들도 잘 지내나요?”

“그럼요. 잘 지내지요. 라이엇은 일이 있어서 나갔어요. 인사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군요.”

다비드는 이반이 묻기 전에 라이엇의 소식을 전했다. 이반은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엇이야 보나 마나 본사 연구실에서 틀어박혀 오시프의 기습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이번 일이 해결되면 가족끼리 식사라도 하면서 연을 다져야겠다고 이반은 생각했다.

“바쁘니 어쩔 수 없죠. 라이엇이 오면 안부 전해주세요. 유리, 이쪽은 다비드 시모나로티 씨다.”

안부를 주고받은 이반이 옆으로 비켜서며 다비드를 소개했다. 계단 위에 선 다비드가 유리를 내려다봤다. 내리깔리는 시선이 꼭 자신을 아랫사람으로 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유리가 계단을 마저 올라가자 그를 내려다보던 다비드는 끝내 유리를 올려다봤다. 올려다보는 시선도 거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유리는 정중히 오른손을 내밀었다.

“유리 라포포르트입니다.”

이름을 들은 다비드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그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유리는 그의 표정 변화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아주 살짝, 쌀 한 톨 정도 아나스타샤와 닮아 보였다. 다비드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맞잡았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원했는데 라포포르트에서 직접 경호하실 줄은 미처 몰랐네요.”

표정과 마찬가지로 목소리도 희미한 변화가 있었다. 미묘하게 거슬리던 이질감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어쩌다 맡았는지, 어떻게 아나스타샤를 경호할지, 인사말로 전하기 좋은 내용은 많았으나 유리는 가볍게 손을 흔들기만 했다. 이반이 대신 대화를 이어줬다.

“그럼요. 가족만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못 알아봐서 미안합니다, 유리.”

“아닙니다.”

다비드의 정중한 사과에 유리는 손을 놓고 살짝 웃어줬다. 파티에 참석하지를 않으니 웃는 법도 까먹어 버렸다. 유리의 어색한 미소에도 다비드는 내색하지 않았다. 동생을 믿고 맡길 수 있게 된 것에 시름을 덜었다. 다비드는 둘을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그래봤자 현관 밖에서 현관 안으로 고작 다섯 걸음 들어온 것이다.

두 장정과 집주인이 안으로 들어오자 로비에 내내 숨은 채로 방문자를 염탐하던 수호천사가 행동을 개시했다. 금발에 초록색 눈을 가진 아이가 토끼처럼 폴짝 튀어나오더니 다비드가 아닌 유리 앞을 막아섰다. 유리의 옆에 서 있던 이반은 아이의 얼굴을 보고는 소리 없는 괴성을 내질렀다. 누가 봐도 라이엇을 쏙 빼닮은 아이였다.

“엔젤. 손님이 오니 안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잖아.”

다비드가 아이를 안으려고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아이는 아버지가 아닌 유리에게 팔을 벌렸다. 아이의 초록색 눈동자가 유리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다비드와 이반의 시선도 유리에게 향했다. 유리는 부담스러운 시선을 둘러보다 눈치껏 아이를 안아 들었다. 큰 덩치에 웃는 상도 아닌 유리에게 스스로 안긴 아이는 어깨와 목에 팔을 둘러 포박했다.

“삼촌 누구예요?”

귀여운 얼굴로 심문을 시작한다. 유리는 인상을 찌푸린 채 아이를 노려봤, 아니. 쳐다봤다.

“엔젤, 너부터 소개해야지.”

“내 이름은요, 미카엘 시묘냐로틴데요. 삼촌은 누구예요?”

다비드의 지적에 금발의 천사 미카엘이 똑똑하게 자신의 이름을 얘기하고는 다시 유리를 심문했다.

“나는… 유리야.”

“유리 삼촌? 우리 집에는 왜 왔어요?”

미카엘은 물어보자마자 안긴 채로 허리를 꼿꼿이 펴더니 며칠간 있었던 일을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공주 삼촌이 쓰러져서 소방차랑 경찰차가 왔는데, 공주 삼촌은 방에서 안 나온다는, 다비드에게 들어야 할 말을 미카엘이 간략히 전해줬다.

“공주 삼촌 지키러 온 삼촌이란다. 공주 삼촌 보러 가야 하니까 이제 그만 아빠한테 오렴.”

“와! 왕자 삼촌이구나!”

다비드가 차분하게 타일렀으나 미카엘은 유리를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이는 유리의 목을 꽉 끌어안으며 다비드를 본체만체했다. 몸에 닿는 작은 생명이 바스러질까 유리는 미카엘이 떨어지지 않게 엉덩이와 허벅지를 단단히 붙들고 있기만 했다.

첫인상이 좋게 박힐 리 없는 무심하고 심드렁한 표정을 제치고 그 외모에 후한 점수를 준 미카엘은 호의를 아끼지 않았다.

“내가 공주 삼촌 어디 있는지 알아요. 내가 데려다줄래. 내가 할래요, 응? 아빠.”

유리의 볼과 턱에 멋대로 머리를 비비던 미카엘이 굴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토끼처럼 머리를 들어 다비드를 간절히 바라봤다. 다비드는 허락하기 전, 유리와 이반을 힐끔거렸다. 지난 10여 년간 아이라고 안아본 건 새끼 곰이 전부였던 둘은 멀뚱히 다비드를 쳐다보기만 했다.

양해를 구하지 않아도 적당히 어울려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다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렴. 부탁한다, 미카엘.”

“응! 저쪽이에요. 계단 올라가야 해요. 2층이에요.”

미카엘이 유리를 올려다보며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유리는 미카엘이 가리킨 곳을 향해 걸었다. 작은 손가락에 이끌려 걸음을 옮기는 꼴이 생쥐가 제 머리채를 잡고 이리저리 흔드는 것 같았다. 몇 살인데 말을 이렇게 잘하는 걸까. 몇 살이냐고 물어볼까? ……아니다. 괜히 말 붙여서 시끄럽게 만들지 말자. 유리는 조잘거리는 미카엘의 말을 흘려들으며 생각했다.

“공주 삼촌 계속 울어요. 방에서도 안 나와요. 내가 놀자고 했는데 문 안 열어줬어요.”

유리는 그 간단한 “그래?”라는 말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런가,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말았다. 미카엘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유리를 못마땅하게 올려다보다 계단을 가리켰다.

“올라가요.”

아이들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계단마다 깔린 색색의 캐릭터 카펫이 눈에 띄었다. 그중에는 유리도 아는 캐릭터가 있었다. 노란색 곰돌이 캐릭터가 보였다. 유리가 좋아했던 파란 하마 인형은 없었다. 유리는 미카엘의 분부대로 계단을 올랐다. 난간에도 철조망이 촘촘히 감겨있었다. 아이를 키우는 건, 집을 작은 놀이동산으로 만드는 일인 듯했다.

2층에 도착하자 미카엘이 내려달라고 몸을 밑으로 뻗었다. 유리는 아이를 내려줬다.

“따라와요.”

앞장선 아이는 공주에게 가는 지름길을 알려주는 사슴처럼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뒤를 돌아보며 유리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했다. 복도 끝방에 다다라서야 미카엘의 걸음이 멈췄다. 유리는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아이를 내려다봤다.

“여기예요.”

“데려다줘서 고맙다, 미카엘.”

“응.”

아이는 유리가 문을 열길 기다렸다. 아무래도 안까지 쫓아 들어가 공주에게 왕자가 왔다고 트럼펫이라도 불 생각인 듯했다. 여태 아나스타샤를 비밀리에 지켜봤으니 그의 성격과 행실, 취향을 알기 위해 말을 걸 필요는 없어 아이 하나가 낀다고 경호에 차질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자그마치 9년 만에 공식적으로 만나는 자리였다.

아나스타샤가 자신을 기억하는 극적인 상황은 기대하지는 않았다. 공주가 과연 유리 라포포르트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다비드처럼 ‘라포포르트’에서 사람을 보냈다고 받아들일지, ‘유리’를 다시 본다고 반색할지 궁금할 뿐이다. 단 한 번뿐인 확률 게임에 불청객은 없는 편이 나았다.

유리는 무릎을 꿇고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현관에서부터 호감을 숨기지 않던 미카엘은 유리가 가까워지자 볼을 붉히며 몸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유리가 아이의 양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추자 천사 같은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내려가서 아버지께 왕자 삼촌을 잘 데려다줬다고 얘기해줄래? 아버지도 미카엘이 일을 잘했는지 궁금하실 거야.”

“응!”

미카엘이 힘차게 대답하며 유리의 목을 답싹, 끌어안았다. 유리는 닿기만 해도 생채기가 날 것 같은 아이의 부드러운 볼에 번갈아 입을 맞췄다. 키스를 받은 미카엘은 위풍당당하게 1층으로 내려갔다.

작은 머리통이 계단 밑으로 사라졌다. 여태 무릎을 꿇고 있던 유리가 일어났다. 그는 매무새를 정돈하고 목을 가다듬은 뒤에야 아나스타샤가 숨어있는 방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문을 두드렸으나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아나스타샤 씨. 실례하겠습니다.”

유리는 더 기다리지 않고 말과 함께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방 안쪽으로 머리를 내미는 순간, 날아온 유리잔이 벽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 짧고 가냘픈 파열음과 함께 술과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리가 있는 문에서 너무 먼 곳을 맞고 깨져서 술이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어디에다가 던지는 거야? 유리는 축축해진 실크 벽지와 마루 틈 사이사이에 박힌 파편을 안타깝게 바라봤다. 침입자를 웃게 해 방심시킬 생각이라면 절반은 성공한 것이고, 방어 목적이었다면 혀 깨물고 죽는 게 나을 만큼 형편없는 실력이었다.

유리는 잔이 날아왔던 쪽을 바라봤다. 며칠 사이에 수척해진 아나스타샤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유리를 경계하고 있었다. 잔뜩 구겨진 이불 위에는 빈 위스키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스토커한테 살해 협박을 당할 때도 이런 모습으로 지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유리는 처음 보는 아나스타샤의 행색에 흥분했으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도리어 차분하고 무심한 목소리로 아나스타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아나스타샤 씨.”

“……누구야?”

“라이엇 씨가 보낸 경호원입니다.”

“경호? 혼자잖아. 혼자서 날 경호하겠다고?”

사진은 아나스타샤의 인물을 다 담지 못하는군. 짜증스럽게 인상을 쓰고 따지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유리는 자신의 축약된 소개에 살을 붙일 생각은 않고 그를 감상하기 바빴다.

“이 저택에 경호팀만 두 팀이 있어. 외출 때도 여섯이 붙는다고. 그런데, 너는 혼자다? 누가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한 거야?”

“다비드 씨와 라이엇 씨가 요청했습니다.”

“형이?”

불신이 가득하던 눈매와 경직된 입가가 순식간에 풀어졌다. 온순해진 눈이 유리를 찬찬히 훑었다. 가족이란 틀 안에서 나오는 신뢰감과 다비드를 향한 병적인 집착이 아나스타샤의 경계심을 허물어줬다.

“미안해요. 요즘 예민해서 ……무례를 범했네요. 잘 부탁드려요.”

아나스타샤가 침대에 앉은 채로 악수를 청했다. 그다음으로는 이름이 나와야 했는데, 아나스타샤는 눈 한쪽을 찡그리며 유리가 자신을 소개하길 기다렸다. 유리는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맞잡고 절도 있게 흔들었다.

“유리 라포포르트입니다.”

“이반 씨가 가족을 데려올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라이엇이 잘 알고 지내는 라포포르트는 이반 라포포르트뿐이었다. 라포포르트라면 믿고 맡길 수 있지. 그들은 대륙의 지붕을 떠받드는 기둥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입술을 얇게 펴며 호감을 보였다. 유리는 부드러운 사교용 미소에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손을 빼내 뒷짐을 쥐었다.

“내가…… 요즘, 정신이 없어요. 얘기 들었다시피 협박을 받고 있거든요.”

냉랭한 반응에 대화와 분위기가 끊겨도 아나스타샤는 끊어진 끝을 들고 내밀었다. 그는 악수한 손으로 침대 시트를 쓸었다. 처음 협박 편지를 받았을 때를 상상하는 듯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말라 갈라진 입술을 혀로 핥는 모습을 조용히 응시했다.

“소포를 받았는데, 안에. 안에… 말이에요. 사람, 사람 장기가 들어있었어요. 유리 씨는 내장 같은 거 자주 보는 편인가요?”

“돼지 내장 요리라면 몇 번 먹어봤습니다만. 사람은, 글쎄요.”

일가족을 요트에서 죽인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으나 유리는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아나스타샤는 젖은 목소리로 그렇군요, 하고 답하며 자신의 오른손을 응시했다. 그때 만졌던 장기의 촉감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이 손으로 그걸 만졌어. 사람 장기를! 내장을…… 알파선을 말이야. 종일 손을 닦고 소독약을 들이부었는데도 그, 그 알고 싶지도 않은 촉감이 남아있다고!”

아나스타샤는 손바닥을 내보이며 울먹였다. 백지 같던 얼굴은 울음을 참느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공포로 젖은 눈과 떨리는 입가가 유리의 눈에는 혼자 보기 아까운 절경이었다.

“그럼 촉감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씻어야죠.”

마음 같아서는 한마디도 안 하고 구경만 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유리는 그의 경호원으로 뉴저지에 와있었다. 유리의 무신경한 대답에 아나스타샤는 손을 내리고 유리를 잠시 응시했다. 유리는 떳떳하게 턱을 들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가 어떤 언행을 보여도 참을 것이다. 무려 형이 자신을 생각해 고용한 경호원이니 말이다.

짧게 위아래로 훑는 시선에는 짜증과 어이없음이 섞였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순순히 침대 위에서 내려왔다.

“유리 씨 말도 맞는 것 같아요. 어쩌면, 손을 덜 씻어서 그런 걸지도 몰라.”

아나스타샤 또한 범인이 잡힐 때까지 침실에 숨어있을 생각은 없었다. 유능한 경호원이 왔으니 이제 일정을 하나씩 해치워 나가야 했다. 고작 살해…… 협박에 위축될 집안 핏줄도 아니지 않은가. 아나스타샤는 주먹을 쥔 채 욕실 문을 응시했다. 마음을 먹어도 무서운 건 변치 않았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범인이 소포를 두고 나가지 않고 집안에 머무를 가능성도 있을 것 같거든요. 옷장에 숨어서 때를 기다린다든가. 다락방이나 지하실에 있다든가. 침대 밑이나 커튼 뒤라든가…….”

아나스타샤의 목소리가 방에 숨어든 범인을 경계하듯 점점 작아졌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경호팀을 추가로 배치하고 집안부터 쥐잡듯이 들쑤셨을 테지만 공주를 안심시킬 수 있다면야 저택 수색을 한 번 더 할 수도 있었다.

도착해서 곧장 아나스타샤를 만나러 왔으니 사건이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는지―미카엘이 간략히 알려줬으나― 알 도리가 없었다. 내려가면 이야기를 들어야겠군. 유리는 아나스타샤에게 사건을 묻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바라봤다. 뭔가 원하는 게 있는 눈치다. 방을 뒤져달라는 건가? 유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사람이 숨을 수 있을 만한 곳을 물색했다. 욕실이나 드레스룸 정도가 보였다.

“욕실까지 같이 가줄 수 있을까?”

대단히 어려운 부탁이었다. 그럼에도 유리는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손으로 앞을 가리켰다. 아나스타샤가 원한다면야 환풍구 안까지 살펴줄 수 있었다. 오늘부터 그의 경호원이니까. 어떻게 해야 아나스타샤가 안심하는지도 잘 알았다. 유리는 깨진 유리잔 파편에 아나스타샤가 다칠세라, 슬리퍼까지 대령했다. 아나스타샤는 숨을 양껏 들이마시며 기뻐했다.

“고마워요, 유리.”

“제가 할 일이죠.”

유리가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몸짓과 정중한 말투를 쓰자 아나스타샤는 손뼉까지 치며 순수하게 즐거워했다. 손가락으로 두드리면 금이 갈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던 얼굴에 여유가 스며들었다. 경련하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위로 올라갔다. 그제야 유리가 지겹게 지켜봤던 아나스타샤로 돌아왔다.

“가시죠.”

풀어졌으면 됐다. 유리는 광대처럼 옆으로 뻗었던 팔을 옆구리에 붙이고 욕실 쪽으로 걸었다. 아나스타샤는 아쉬운 눈으로 유리를 바라봤으나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친절한 것 같기도 하고, 무심한 것 같기도 하고. 유리 라포포르트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가늠하며 그를 쫓아 걸었다.

유리가 먼저 욕실에 들어가 욕조 안과 문 뒤, 사람이 숨어있을 가능성이 보이는 곳을 살폈다. 그것도 모자라 아나스타샤가 선 세면대 옆에 조각상처럼 붙어섰다. 덕분에 아나스타샤는 편안한 마음으로 손을 씻었다.

틀어둔 수도꼭지에서 물이 졸졸 흘렀다. 아나스타샤는 복숭아 향이 나는 비누로 손을 박박 닦았다. 하얀 거품이 손을 덮었다. 손과 거품이 마찰하는 소리만 욕실에 울렸다. 유리의 시선은 아나스타샤의 얼굴과 손에 닿았다. 물고기 비늘처럼 윤이 나는 손톱이 물에 젖어 보석처럼 보였다. 짧은 잠옷 소매 밖으로 나온 손목도 손만큼 아름다웠다. 절경을 보기 위해 먼 곳을 찾아갈 이유가 없다.

손을 씻던 아나스타샤 또한 유리를 힐끔거렸다. 그의 눈은 손에 고정되어있어 유리의 얼굴을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했지만, 뭔가를 참으려는 듯한 호흡과 몸짓을 귀와 몸으로 느꼈다.

라포포르트, 라포포르트. 친밀하게 지내지는 못했어 들은 적은 있다. 이반 라포포르트가 라이엇의 친구였고, 라이엇이 일하는 회사의 사장이기도 했다. 이반이야 라이엇과 아는 사이니까 무리한 부탁을 받아줬다 해도, 그의 동생인 유리 라포포르트는 시모나로티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왜? 아나스타샤는 가설을 세웠다.

하나. 라포포르트는 이 연쇄살인 사건을 큰 문제로 보지 않는다. 겁쟁이 아나스타샤를 쫓아다니는 것으로 시모나로티와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다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명령하기 쉬운 동생을 보냈다.

둘. 사실 유리 라포포르트가 아나스타샤에게 호감이 있어서 일을 흔쾌히 받았다.

셋. 이 모든 일이 라포포르트의 계략이다?

푸하하. 세 번째 가설은 너무 갔다. 설마 그러겠어. 아무리 그들이 러시아를 떠받치는 기둥이라지만, 얻을 게 뭐 있다고 떠들썩하게 사람을 죽여가며 경호원까지 자처하겠어. 그럼…… 뭘까. 아무래도 첫 번째 같지. 으음…… 가만, 유리? 라포포르트?

손등을 문지르던 손길이 느려졌다. 아나스타샤는 거울 속 자신을 응시했다. 이름을 어디서 들어봤는데 말이야. 아니, 들은 게 아니라… 뭔가 떠오를 것 같다. 이름과 이어지는 흐릿한 장면이 머릿속에 들어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응시했다. 유리는 눈썹 한쪽을 치켜뜨며 아나스타샤를 바라봤다.

“혹시, 미들 네임이 수잔인가?”

“예.”

“수잔 디어본의 ‘수잔’?”

이번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스타샤는 비누가 묻은 손을 가볍게 위아래로 흔들며 자신의 기억력에 찬사를 보냈다. 그가 누군지 기억했다. 뿌연 물속에 가라앉았던 장면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이럴 수가. 그 작은 공주님이 이렇게 컸단 말이야? 그때는 내 가슴에도 안 왔는데!”

유리 수잔 라포포르트. 이제야 기억났다. 자신의 스무 번째 생일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나타난 작고 사랑스러운 오메가가 될 예정이던 라포포르트의 막둥이. 그때는 라포포르트 씨 뒤에 숨어있다가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도망간 하얀 예복을 입은 공주님이었는데, 못 본 사이에 장성한 알파가 되어있었다. 벌써 9년 전이구나.

추억에 젖은 아나스타샤의 눈길이 유리를 훑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시선을 즐겼다.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기대를 안 한 것도 아니다. 무려 9년 전에 스치듯이 만났으니 기억하는 쪽이 더 이상했다. 그런데 처음 만났던 날을 아나스타샤도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날 기억하는 걸까. 그 물음은 유리가 말로 뱉지 않아도 아나스타샤가 먼저 얘기했다. 아나스타샤가 거품을 헹궈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땐 라포포르트 씨가 유리 너를 자랑하고 싶어서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셨지. 소문은 말보다 빠르잖아? 나도 네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 라포포르트의 막둥이가 그렇게 예쁘다고. 그래서 내 생일 파티에 초대장을 보냈지.”

“아버지와 알던 사이셨습니까?”

“음, 아버지끼리 알던 사이였던 것 같기도 하고. 뭐, 서로 이름을 알고 있으면 아는 사이 아닌가?”

아나스타샤가 젖은 손을 수건에 닦으며 대꾸했다. 그 시절 블라디미르 라포포르트는 자신의 작고 사랑스러운 ‘오메가’가 될 막내아들 유리를 대륙 곳곳에 데리고 다니며 신랑감을 물색했었다.

“아무튼 라포포르트 씨가 파티에 오셔서 자리를 빛내주셨지. 소문은 사실이었어. 그때 유리는 엄청 예뻤지. 인사도 못 나눴지만…. 왜 도망간 거야? 춤 한 곡 제대로 추지도 못했는데.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안 나나? 내가 싫었어?”

물기가 마른 촉촉한 손이 세면대 끝을 가볍게 짚는다. 유리는 끝이 붉은 손가락을 보다, 아나스타샤의 얼굴을 응시했다. 자신만만한 표정은 자신이 뱉은 질문에 먼저 대답한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나 아나스타샤를 싫어할 수가 있겠어?

유리도 같은 마음이다. 싫어서 도망간 게 아니다. 유리는 아직도 그때를 생생히 기억한다. 아나스타샤 시모나로티라는 이름을 듣고 집안사람보다 더 어려운 이름은 처음 봤기에 외우지도 못했다. 아버지가 어딜 데려가는지 관심도 없었다. 화려한 식장에서 아나스타샤를 보고는 그의 어려운 이름을 단번에 외웠다. 아나스타샤 시모나로티! 지중해 바다처럼 싱그러운 미소와 목소리에 유리는 첫눈에 반했다.

그리고 인형처럼 차려입은 몰골로 넋 놓고 쳐다보다 인사할 때를 놓쳐서 도망쳤었지.

“잘 기억 안 납니다.”

“그렇구나. 하긴, 너무 오래됐지.”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다. 그 이후부터 알파로 발현하기 전까지 아나스타샤와 결혼하고 싶어서 아버지께 아나스타샤가 약혼했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결국은… 생각처럼 되지 않았지만.

아나스타샤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악수라면 좀 전에도 했는데. 삐딱하게 생각하면서도 내민 아나스타샤의 손을 맞잡았다. 막 씻은 손은 촉촉하고 부드럽고 따뜻했다.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손을 꽉 잡으며 위아래로 힘차게 흔들었다.

“저를 잘 부탁해요. 유리.”

“예.”

“흠흠, 씻고 내려가야겠어. 벌써 이틀째 아무것도 못 먹었거든요.”

아나스타샤는 손을 풀고 배를 쓰다듬었다. 배고파 죽겠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기까지 했다. 씻고 내려가서 먹으면 되지 하나하나 다 보고할 생각인가? 유리가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싶은 표정을 하자 아나스타샤가 욕실을 확인해 달라고 했을 때처럼 공손하게 부탁했다.

“씻을 동안 여기 있어 줄래요? 문 닫지 말고. 뒤 돌아 서 있어도 좋고. 혹시 모르잖아. 환풍구에서 범인이 떨어질지도….”

말과 동시에 유리는 환풍구를 찾았다. 천장 위에 달린 환풍구를 통과할 사람이면 열두 살짜리 아이거나 반년간 귀리와 물만 먹어 40kg까지 살을 뺀 성인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유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침실 쪽을 보고 섰다. 아나스타샤가 기쁘게 숨을 들이쉬며 유리의 양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고마워요.”

…걱정도 태산이군. 스토킹이라면 이런 반응은 보이지 않았을 텐데. 아니, 사람 내장이 아니라 개 시체였다면 뉴저지까지 올 일도 없었겠지.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벗은 등을 확인한 뒤 눈을 돌렸다. 스토커를 붕어 똥처럼 달고 다니니까 기생충이 들러붙는 거다. 본보기로 스토커를 고소했어야지. 아나스타샤는 자길 칼로 찌른 놈도 처벌하지 않고 돌려보냈다.

어쩌면 아나스타샤의 선처가 스토커에게는 벌이었을지도 모른다. 독립한 유리는 아나스타샤에게 해를 가한 스토커를 모조리 찾아내, 살아있는 게 죽는 것보다 불행한 삶을 선물했다. 아나스타샤가 누구와 사랑에 빠지는 건 내 알 바가 아니지만, 스토커는 눈 감아 줄 수 없을 만큼 거슬렸다. 나도 마음대로 못 만지는 아나스타샤를 괴롭히다 못해 상처까지 내다니.

연쇄살인 범인도 아나스타샤를 표적으로 삼은 짓을 후회하도록 응징하고 싶었다. 하지만 덕에 아나스타샤와 직접 엮일 수 있으니 넘어가기로 했다. 공주를 잘 지키면 문제없이 끝날 일이다. 유리의 등 뒤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아나스타샤가 몸을 적시는 소리였다.

뒤를 돌아섰다지만 사람을 앞에 세워놓고 씻는 기분은 어떨까. 뒤돌아선 채 씻는 소리를 듣는 기분은? 유리는 고요함 사이로 스며드는 어색함과 모호한 기분에 미간을 좁혔다. 인상 쓰는 것 외에는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아나스타샤와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찰나였다.

다행 중 불행으로 아나스타샤가 먼저 말을 붙였다.

“이반 씨도 그렇고 유리도 그렇고 러시아에 있던 게 아닌가 보네요? 어제 들었어도 내일이나 모레쯤에 올 줄 알았는데.”

“이반은 일 때문에 입국했고 저는… 마이애미에 회사가 있습니다.”

“일? 무슨 일? 아, 이런 건 알려주면 안 되겠지? 라이엇 때문인가?”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 ‘일’은 유리도 모른다. 일이 있으니까 왔겠지. 막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형제가 입국 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건 조금 의아했으나 정말 일이 바쁜가 생각하고 말았다. 받은 관심에 비해 유리가 형제에게 주는 관심은 티끌보다 작았다.

“피를 나눈 형제여도 모르는 게 있는 법이죠. 다 알면 재미없잖아. 나도 다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잘 모르겠어.”

그는 그러면서 넷째를 임신한 다비드를 흉봤다. 유리의 귀에는 그저 부러워서 어쩔 줄 모르는 투정으로 들렸다. 유리도 제발 그가 짝을 만나 아이를 낳았으면 싶었다. 그가 어디서 뭘 하고 사는지 관여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이가 차도 깊은 관계는커녕 겉만 훑는 연애관을 이어갔다. 언제까지 사교 파티와 난교 파티를 들락거리며 카사노바 생활을 계속할 건지 물어보고 싶었다.

성인이 된 유리는 가정을 꾸리고 정착한 아나스타샤가 보고 싶어서, 관찰만 하자고 스스로 한 약속을 딱 한 번 어겼다. 그와 어울릴 오메가들을 매번 물색하고 추려내 보냈지만, 아나스타샤는 오메가엔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질투 유발로 투입했던 알파에게 추파를 던졌다.

결국, 유리가 고른 오메가들은 다른 알파를 만나 결혼했고 야심 차게 준비했던 아나스타샤 쇼는 결국 그대로 종영의 길을 걸었다. 그것도 4년 전이다. 그 뒤로는 그가 난교 파티를 하든 스토커를 달고 다니든 신경 쓰지 않고 지켜봤다.

“분명 정관 수술했다고 들었는데, 설마 그걸 뚫고 태어난 거겠어? 라이엇이 거짓말한 걸지도 몰라.”

아나스타샤는 제 가족의 사적인 얘기를 계속했다. 유리는 가만히 있다가 라이엇 데르베이탄이 정관 수술한 것까지 알게 됐다. 할 수만 있다면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아나스타샤의 요로결석은 들어줄 수 있어도 남의 정관 수술은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유리는 독신인가?”

독백 비슷하게 얘기를 늘어놓던 아나스타샤가 질문했다.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김이 서려 얼룩진 유리 안에 나체의 아나스타샤가 불투명하게 보였다. 그는 뿌연 얼룩을 닦아내 얼굴을 보여줬다.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긴 모습이 해무를 해치고 나타난 인어 같았다.

“응?”

“만나는 사람이 있냐고 묻는 거면, 없습니다.”

“그래? 가볍게 만나는 사람도?”

유리는 침실 쪽을 응시했다. 가족 이야기는 다 끝났나 보다. 그럼 자기 얘기를 할 것이지 왜 남에게 사적인 질문을 던지는가. 유리의 미간이 좁아졌다. 생각대로다. 아나스타샤와 자신의 상성은 최악이다. 지켜보기만 할 때가 가장 아름다운 것도 있다는 사실을 아나스타샤를 보며 뼈저리게 느꼈다.

“아니면, 고약한 취미가 있어서 사람을 못 만나는 건가?”

“아나스타샤 씨는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유리의 물음에 아나스타샤가 잠시 조용해졌다. 정말 잠시였다. 유리가 정확히 한숨을 두 번 쉬었을 때였다.

“그럼, 셀 수도 없지.”

아나스타샤는 짧은 대답을 끝으로 더 입을 열지 않았다. 여태 만난 사람 중에서 최악과 최고를 고르고 미국에서 만난 사람을 줄줄이 나열할 줄 알았는데. 유리는 의외였으나 조용해졌다는 것에 안도했다. 성희롱에 가까운 담소로 이어지는 것보다 어색한 침묵이 나았다.

샤워를 끝낸 아나스타샤가 물을 뚝뚝 흘리며 유리 쪽으로 걸어왔다.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는 등 옆에 수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랑스러운 막내일 텐데, 빳빳하게 언 돼지 뒷다리처럼 굴었다. 가문의 연을 생각해서 왔지만 남자 알몸이나 보고 있어야 하니 기분이 좋지 않구나. 아무래도 첫 번째 가설이 적절한 것 같다.

아나스타샤는 잽싸게 수건을 낚아채 몸을 닦았다. 사람 한 명이 는 것뿐인데 이렇게 안도 될 줄이야. 하기야, 라포포르트의 명성과 가족력을 소문으로라도 들어봤다면 연쇄살인범 같은 건 강 건너에서 짖는 개에 불과했다.

아나스타샤는 상쾌한 얼굴로 물기를 닦아내곤 유리를 바라봤다. 그는 약속대로 침실 쪽을 보고 서 있었다. 꽉 다문 입이 보였다. 공교롭게도 옷을 갈아입어야 했고 갈아입을 옷들은 옆방에 있었다. 혹시 그곳에도 사람이 숨어있지 않을까. 아나스타샤의 걱정은 열어보지 않은 드레스룸으로 옮겨갔다.

“미안한데, 유리….”

동시에 유리가 아나스타샤를 돌아봤다. 회색 눈동자에는 절대 밑을 보지 않겠다는 집념이 담겨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몸을 닦은 수건을 허리에 두르며 웃었다.

“드레스룸도 확인해줄래요?”

칼처럼 날카롭게 섰던 시선이 느슨해졌다. 유리는 군말 없이 드레스룸으로 걸어가 안을 확인했다. 문과 창문을 열어젖히고 옷장과 옷 뒤를 샅샅이 뒤졌다. 사람은커녕 쥐새끼도 보이지 않았다. 수색을 끝낸 유리는 아나스타샤에게 보고하기 위해 등을 돌렸다.

욕실에서 기다리지 않고 쫓아온 나체의 아나스타샤가 문 앞에 당당히 서 있었다. 겨우 수건 한 장으로 중심만 가린 전라를 한눈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유리의 입가가 미세하게 뒤틀렸다.

“이상 없습니다.”

“고마워요, 유리.”

경호를 맡긴다는 말만 듣고 온 사내에게 나체를 보여주고 방 구석구석을 돌아보게 하는 짓은 아나스타샤도 도가 넘는다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건 평소 같은 때에 이야기고. 지금은 정체불명 살인마한테 협박받는 처지가 아닌가.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뒤틀린 입꼬리를 못 본 척하고 옷을 꺼내 입었다.

반팔 티와 면바지를 입은 아나스타샤는 상의 밑단을 잡아당겨 매무새를 정돈하고 유리에게 눈치를 줬다. 유리가 차려입은 아나스타샤를 보더니 말없이 침실로 나갔다. 만난 지 30분도 안 됐는데 이런 생각은 실례지만, 막 겨울잠에서 일어난 곰 같았다. 라포포르트와 디어본의 사랑을 독차지한 유리 수잔 라포포르트가 맞나 싶었다.

“관리인은 어디 있습니까?”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던진 잔의 파편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아, 그거. 치워야겠네. 슬리퍼도 가져다 달라고 해야겠어. 엔젤이 다치면 안 되니까.”

아나스타샤가 침대 협탁 위에 놓인 전화를 들어 사람을 불렀다. 곧 슬리퍼 두 쪽을 든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환히 웃었다.

“작은 도련님! 이제 괜찮으신가요?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오로라, 걱정해줘서 고마워. 유리잔이 깨졌는데 치워주겠어? 파편이 어디까지 튀었는지 모르겠네.”

“그럼요. 염려 마세요. 식사하셔야죠? 식사는 다비드 도련님께서 준비하고 계세요.”

오로라가 문밖에 슬리퍼를 내려놨다. 아나스타샤는 자연스럽게 슬리퍼를 갈아 신으며 반갑게 물었다.

“형도 심란했구나? 요리를 다 하고. 오늘은 출근 안 한대?”

“네. 작은 도련님 두고 어딜 가시겠어요? 도련님이 금방 기운 차려서 다행이에요.”

여자는 아나스타샤를 아이 다루듯이 했다. 많이 줘봐도 서른 후반대로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다비드의 식솔과 불온한 관계를 맺을 정도의 배포 큰 사람이 아니라 유리는 그들의 얼굴과 이름만 간단히 알고 있었다. 하필 오시프의 입국과 아나스타샤의 입국이 겹쳐서 오시프가 시킨 일을 처리하느라 아나스타샤를 감시할 틈이 없었다. 그사이에 이렇게 친해졌을 줄이야.

“유리 도련님도 갈아신어 주세요. 파편이 밑창에 박혔을지도 모르니까요. 구두는 제가 털어서 신발장에 넣어두겠습니다.”

오로라가 환히 웃으며 얘기했다. 둘이 친해진 게 아니라, 비슷한 부류인가. 훈련이 잘된 관리인이다. 유리는 오로라의 말을 따라 신발을 벗었다. 저택의 주인이 다비드 시모나로티일지라도 모시고 사는 건 그의 작은 천사들이었다. 아이가 있는 집은 다 이런가. 조카도 동생도 없는 유리에겐 낯설었다.

“계약 조건은 식사하면서 얘기 나눠요. 친구끼리 돕는 건 돕는 거고, 보수는 보수죠. 안 그래요? 유리.”

배고프다고 배를 문지르는 공주님은 느긋하게 걸었다. 1층 로비와 거실에서 천사들이 뛰어다니는지 소란스러웠다. 유리는 침묵을 고수했다. 보수라면 이미 이반에게 전해 들었다 50만 달러. 범인이 늦게 잡히면 유리에게 불리한 액수였다. 그렇다고 금액이 불만인 건 아니다. 물론 시모나로티의 재력에 비하면 비루해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뭐.

계단을 내려가자 진득하게 볶음 고기 냄새가 났다. 거기에 시큼한 향까지 더해졌다. 아나스타샤가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아아, 그리운 고향의 냄새다. 라구 소스였다. 소스도 다비드가 만들었을까? 아나스타샤는 곧장 주방으로 걸어갔다. 유리는 따라가지 않고 식당 문 앞에 서서 아나스타샤를 기다렸다.

“공주! 어? 왕자님이다.”

거실에서 놀던 금발의 천사가 식당 문 쪽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앞에 보이는 남자가 공주 삼촌이 아닌 왕자 삼촌이라는 걸 깨달은 미카엘이 작게 중얼거렸다. 미카엘의 동생인 라파엘이 그 뒤로 고개를 내밀었다. 다비드를 쏙 빼닮은 아이였다.

“왕자야?”

“응. 공주 삼촌 지키러 왔대.”

미카엘이 또박또박 설명하자, 라파엘은 우물쭈물하며 유리 앞에 섰다. 공주 삼촌 친구면 좋은 삼촌인데. 웃음기 없는 얼굴은 겁먹었으면서도 유리 주변을 기웃거렸다.

공주야? 응, 공주야. 두 천사가 유리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자기들끼리 속닥거렸다.

유리는 아이들을 밟을까 봐 꼿꼿하게 선 채로 아나스타샤가 얼른 나타나길 기다렸다. 유리 앞에 선 미카엘이 보란 듯이 유리에게 팔을 벌렸다. 안아달라는 신호다. 왜 자꾸 안아달라는 거야? 유리는 귀찮았지만 다른 사람의 애도 아니고 아나스타샤가 사랑하는 사촌 형, 다비드의 친아들이라 무시하지 못하고 안아줬다. 그러자 라파엘도 소심하게 손을 뻗었다.

졸지에 애 둘을 안게 된 유리는 아이를 봐야 할지 거실로 가야 할지 식당으로 들어갈지 주방으로 들어갈지 갈팡질팡했다. 몸이 기우뚱 휘자, 라파엘이 유리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흔들림이 재미있는지 천사들이 시시덕거렸다. 작다. 작아……. 유리는 품에 안긴 천사 둘을 구경하기로 했다.

“공주는 어디 갔어?”

아까 봤다고 친해졌다 생각하는지 미카엘이 맹랑하게 물었다.

“주방에.”

“주방에 아빠 있는데. 들어오지 말랬는데. 공주는 들어갔대요.”

미카엘이 아나스타샤를 놀리듯 말꼬리를 늘어트리며 얘기했다. 라파엘은 유리의 목에 매달린 채 유리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투명한 눈망울이 검은 속내를 읽는 기분이었다. 유리는 애먼 복도만 노려봤다. 아나스타샤가 아이들을 데려가길 바랐다. 마침내 식당 옆에 붙은 주방에서 아나스타샤가 파스타가 든 접시를 들고나왔다. 그 뒤로 샐러드 볼을 든 다비드도 보였다.

“아냐, 앉아서 먹어.”

“안 먹었어. 맛만 본 거야.”

포크로 파스타를 뒤적이던 아나스타샤는 다비드의 지적에 둘러대며 소스가 묻은 포크를 입에 넣었다. 기름지고 고소한 라구 소스가 입에 감겼다. 위스키로 혹사한 위장이 파스타를 먹고 싶어 꿀렁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매섭게 노려보는 다비드의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포크를 물고만 있어야 했다. 앞을 보자 곰에게 안긴 천사가 보였다.

“엔젤! 귀여운 수호천사들. 유리 삼촌한테 안겨서 뭐 하는 거야?”

아나스타샤는 낯도 안 가리고 유리에게 찰싹 붙어있는 두 조카에게 물었다. 라파엘은 대답 대신 유리의 목덜미에 얼굴을 푹 묻었다. 아하하, 아나스타샤가 웃으며 다비드를 돌아봤다. 다비드도 의아한 얼굴이었다.

“귀엽다. 천사들은 유리가 아주 마음에 드나 봐.”

“아이들이 유리 씨를 잘 따르는군요.”

다비드가 옅게 웃으며 칭찬했다. 왜 애가 잘 따르는지 의문이다. 아이들은 웃는 얼굴을 좋아하지 않나. 유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애들과 가까이 지낼 기회가 없었기에 본인도 오늘 처음 겪는 일이었다.

“아, 식사 준비가 다 됐나 보죠?”

먼저 간 줄 알았던 이반이 현관문을 열고 나타났다. 가까이 다가온 이반에게서 쓴 담배 냄새가 났다. 그는 동생이 아이를 안고 있는 광경을 말없이 쳐다봤다. 천사가 천사를 안고 있구나. 저절로 벌어지는 입술에 순수한 감탄이 번졌다.

“예, 들어가시죠. 아냐 너는 얼른 앉고.”

다비드가 아나스타샤의 등을 밀었다. 알았어, 알았다니까. 아나스타샤는 투덜거리며 식탁 한자리에 앉아 파스타를 냉큼 입에 넣었다. 면도 생면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어깨를 들썩였다. 이틀 만에 목구멍을 지나 떨어지는 음식은 천상의 맛이었다.

곧 관리인이 손님 몫의 파스타와 빵을 내왔다. 유리도 아이를 내려놓고 식탁에 앉았다. 아이들은 고용인을 따라 따로 마련된 식당으로 가버렸다. 아이들이 사라지자 식당에 적막이 내려왔다.

“형이 다 만든 거야? 너무 맛있다.”

“그래. 면은 내가 아침에 만든 거야. 입에 맞니?”

“응. 아빠가 해주던 맛인데.”

아나스타샤가 그릇 바닥에 나뒹구는 고깃덩어리를 포크에 올려 입에 넣었다. 점심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고 아침이라고 하기엔 늦은 시각이었다. 이미 아침을 먹은 다비드는 다리를 꼰 채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아나스타샤를 지켜봤다. 유리와 이반은 해가 뜨고 처음 먹는 식사였다.

“라이엇은?”

입술에 묻은 소스를 핥은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다비드가 잔을 매만지며 답했다.

“글쎄. 오늘도 바쁘면 내일 오겠지.”

“아아, 얼굴 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어제는 집에 있었는데 네가 안 나왔잖니.”

“나올 수가 있어야지. 무서워서 침대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갔다고.”

아나스타샤가 투덜거렸다. 그는 쫑알거리면서도 입에 면을 넣는 일은 쉬지 않았다. 접시 바닥까지 긁어먹은 아나스타샤가 포크를 내려놨다. 이어 에스프레소가 나왔다. 이반은 설탕을 잔에 넣고 스푼으로 가볍게 휘저었다. 반면 유리는 작은 에스프레소 잔을 떫게 응시하다 혀만 축였다. 코끝이 미간까지 올라가는 쓴맛이었다.

대체 커피를 무슨 맛으로 마시는지 모르겠다. 유리는 잔을 내려놓고 테이블 밑으로 손을 숨겼다.

“원두가 입에 안 맞습니까?”

다비드가 물었다. 대답은 이반이 했다.

“아뇨, 에스프레소는 처음이라 그럴 겁니다.”

놀리는 말투가 다분했다. 자기는 얼마나 잘 마신다고. 유리는 삐뚤어진 얼굴로 이반을 힐끔댔다. 그는 새끼손가락까지 치켜올린 채 에스프레소를 홀짝였다. …콱, 커피 마시다가 사레나 걸려라. 다비드는 에스프레소를 못 마시는 유리를 측은하게 바라보다 뒤에 서 있는 관리인에게 눈짓했다. 관리인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내왔다. 그제야 유리까지 티타임에 낄 수 있게 됐다. 물을 섞으니 참고 먹을 정도는 됐다.

“아메리카노는 마실 수 있지? 유리, 술 말고 커피도 마실 줄 알아야지. 표정이 그게 뭐야.”

“시끄러워.”

이반이 러시아어로 핀잔을 줬으나 유리는 한 마디로 묵살했다. 마셔도 취하지 않는 쓰고 맛없는 걸 왜 물도 안 타고 마신단 말인가. 유리는 그 부분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전부 손바닥보다 작은 잔을 만지작거렸다.

“카페가 별로구나? 나중에 카푸치노나 라테를 만들어줄게요. 그건 마실만 할 거야. ……일단, 귀한 시간을 내주셨으니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아나스타샤가 밝은 목소리로 서장을 열었다. 아나스타샤의 경호 계약에 관한 이야기였다. 다비드와 이반은 둘의 계약을 증언해줄 사람이었다. 구두여도 절대 어길 수 없는, 철근보다 단단한 구속이었다.

“나는 살해 협박 때문에 미국 일정을 중단할 생각 없어. 그러니, 유리 씨. 범인이 잡힐 때까지 날 경호해줘요. 기왕이면 같은 방을 썼으면 해.”

언제 잡힐지도 모를 범인을 경계하며 아나스타샤를 24시간 경호해야 한다. 유리는 커피를 홀짝였다. 물에 희석했는데도 쓰다. 설탕을 넣자니 자존심이 상해서 참고 마셨다. 그들은 유리가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유리가 얼마를 요구하든 시모나로티는 지불할 의사가 있었다. 대대로 내려오던 ‘레어’의 보물을 팔아서라도 유리 라포포르트를 붙잡고 싶었다.

“언제 잡힐지도 모를 범인이 잡힐 때까지, 24시간 경호에 50만 달러는 보수가 약한 것 같은데요.”

만일 범인이 일주일 안에 잡힌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유리는 한 달 이상을 예상했다. 라포포르트가 누군지 모르는 작자여도 경호원이 파티장까지 쫓아다니며 옆을 지키는데 어떤 간 큰 놈이 아나스타샤를 노리겠는가. 협박을 끝으로 흐지부지될지도 모른다.

“그럼, 하루에 50만 달러는 어때요?”

아나스타샤가 제안했다. 하루에 50만……. 다비드는 빈 에스프레소 잔을 입가에 댔다. 얼마가 됐든 아나스타샤의 목숨에 비하면 아깝지 않았다. 그저 유리 라포포르트가 순순히 제안을 받아주길 바랄 뿐이다.

“그렇게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이반의 눈썹 끝이 삐죽 위로 올라갔다. 얘, 지금 뭐라는 거야? 돈이 필요 없다니. 돈이야말로 보수를 객관적으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수단 아닌가. 뭐, 가빈 은행 지점이라도 떼어달라고 할 생각이야? 레어의 열쇠? 아니면 아나스타샤와의 하룻밤을? 잠깐……! 마지막 요구는 아닐 거야. 유리가 그럴 리 없어. 오시프가 세뇌 수준으로 ‘알파는 알파와 잘 수 없다’라고 가르쳤는데 단번에 금기를 깨트릴 리가! 느긋하던 이반의 상태가 눈에 띄게 부산스러워졌다.

“보수가 어찌 됐든 두 집안의 관계를 한층 다지기 위한 일 아니겠습니까.”

시모나로티와 라포포르트는 접점이 없다시피 했다. 겨우 시모나로티와 결혼한 라이엇이 라포포르트의 회사에서 일하는 것 외에는 친밀하다고 할 건더기가 없었다. 그러니 돈보다 더 귀한 걸 얻는 순간이었다. 물론, 유리가 원하고 바라던 걸 받을 기회이기도 했다. 유리는 돈이 궁하지 않았다. 여유롭다 못해 넘쳐났다. 아마, 자산만 두고 봤을 때는 아나스타샤보다 유리가 더 풍족할 것이다.

“그래서, 뭘 받고 싶은데요?”

“그건, 사적인 거라.”

유리가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원하는 게 있는데 말은 하지 않겠다. ‘사적인 보수’라……. 아나스타샤는 가설을 수정했다. 첫 번째가 아닌, 두 번째 가설이었다. 사적인 보수라면 아나스타샤 머릿속엔 하나뿐이었다. 이반과 다비드도 같은 생각을 했다. 이반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나는 죽었다. 오시프가 내가 다리를 놔준 게 자신인 걸 알면… 손이 잘리거나, 혀가 잘리거나 둘 중 하나다. 둘 다 잘릴지도 모르고. 아니면 혀만 남을지도 모르고! 이반의 낯이 하얗게 질렸다.

“유리. 뒤탈 없게 돈으로 받아.”

말뜻은 오시프가 알면 가만둘 것 같냐는 경고였다. 유리는 태평하게 이반을 응시했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얼굴이다. 야, 네가 제일 잘 알면서 왜 멀뚱멀뚱 쳐다봐? 50만 달러씩 받아! 이반이 눈을 부릅떠도 유리는 요지부동이었다.

“뭐, 좋아요. 그걸 원한다면야, 못 줄 것도 없지.”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받아들였다. 다비드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두 알파가 관계를 맺어도 저택에 페로몬이 풍기는 일이 없게 저들을 별관으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사적인 보상이 뭔지 알려주면 안 돼요? 궁금한데.”

“걱정 마십시오. 아나스타샤 씨가 충분히 지불하고도 남을 테니까.”

그래, 섹스야 몇 번이고 할 수 있지. 아나스타샤는 더 묻지 않았다. 욕실과 드레스룸 확인을 부탁할 때는 싫은 티를 내더니, 그건 또 아니었나. 아니지. 누구든지 탐색견 취급을 하면 기분 나쁠 거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아나스타샤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커피를 마시는 유리를 응시했다. 호감을 보이는 자에게는 태평양보다 넓은 아량을 베풀었다.

“그럼, 유리 씨도 왔으니까 오늘은 천사들 데리고 공원에 다녀와야겠네.”

아나스타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리도 따라 일어났다. 이반은 관을 골라야겠다, 생각하며 일어섰다. 계약은 성사됐다. 유리 라포포르트는 아나스타샤 시모나로티를 협박한 범인이 잡힐 때까지 그 곁을 지킬 것이다.

다비드와 아나스타샤는 외출 준비를 위해 방으로 사라졌다. 유리는 현관 밖에서 이반을 배웅했다. 그는 담배를 뻑뻑 피우며 한숨을 쉬었다.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이반은 “유리.”하고 그를 부르기만 하고 말을 잇지 못했다.

“왜 자꾸 부르기만 해. 할 말 있으면 하고 얼른 가.”

유리가 귀찮다는 듯이 대꾸하자 이반은 울먹였다.

“너, 정말…. 그런 걸 보수로 받으면 아무리 너라 해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 나는 진짜 죽는 거고. 응? 나 이제 관 고르러 갈 거야. 내일이면 오시프도 알 거다.”

“뭐가 어쨌다고?”

“아나스타샤랑 섹스할 생각이잖아!”

“알파끼리 섹스를 왜 해.”

뭐, 마음만 맞으면 할 수 있지. 그러나 유리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흥분하면 쏟아지는 알파의 페로몬은 오메가와 달리 위협적이고 역겨웠다. 마운팅이면 모를까. 유리가 인상을 찡그리며 진저리치자 이반의 얼굴이 살짝, 아주 살짝 밝아졌다. 일말의 희망이 내리쬈다.

“뭐? 그럼. …그럼 섹스가 아니면 뭘 받고 싶은 거야.”

“얼른 가. 관 보러 간다며.”

“유리. 말 안 해줄 거야?”

“어. 사적인 거야. 내가 받는 거니까 내가 정해.”

“섹스는 아닌 거지? 응? 아나스타샤랑 잘 생각 없는 거지?”

마음이 급한 이반이 러시아어로 물었다. 말끝이 뭍에 나온 지 오래된 문어처럼 흐물거렸다. 덩치가 곰만 한 이반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함께 입국한 형 때문이었다. 오시프는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어디선가 계략을 꾸미고 있을지 모를 남자였다. 가족인지라, 싫든 좋든 그의 울타리 안에서 큰 탓에 나이를 먹어도 오시프의 그림자를 벗어나기 힘들었다.

가족이니만큼 오시프와 피를 나눈 형제는 그의 심기를 거스르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알고 있다. 유리도 그 공포와 수치심을 잘 안다. 오시프라면 그림자도 마주치기 싫었다.

“어. 아니야. 아니라고.”

“너만 믿는다….”

이반이 힘없이 팔을 떨궜다. 그래. 유리는 알파끼리 하는 섹스에 거부감이 있으니까. 왜 굳이 오메가와 베타를 두고 알파끼리 구역질 나는 페로몬 맡아가며 허덕이는지 모르니까. 그러니 아나스타샤의 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도 없지. 그는 필사적으로 긍정적인 생각했다. 이반은 쓰러질 것처럼 털래털래 계단을 내려가 기다리고 있던 차에 올라타더니 창문을 내리고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널 아나스타샤랑 연결해 준 것도 알면 날 죽일 거야. 근데 네가 아나스타샤랑 잤다는 소문이 나기라도 하면, 나는… 뼈 한 줌도 남지 않을 거야.”

“알면서 왜 날 부른 거야?”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믿을만하고 확실한 사람이니까! 젠장! 왜 그랬을까. 지금이라도 돌아갈래?”

“라이엇이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은데.”

라이엇이 하얗게 질려서 부탁하는 바람에 정신없이 유리를 찾아온 게 잘못이다. 아아. 왜 그랬을까. 왜 그랬어. 그렇지만 이반은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또 유리를 찾아갔을 것이다. 유리만큼 아나스타샤를 잘 알면서 실력 있는 인재는 미국에 없으니까. 러시아를 뒤지면 몇 명 있을지 모르겠지만, 가까운 곳에 딱 맞는 형제가 지내는데 먼 길을 갈 필요가 있겠는가.

이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문을 올렸다. 라포포르트도 라이엇의 덕을 봤으니, 둘이 섹스만 하지 않는다면 오시프도 눈 감아 줄지도 몰라. 이런 부분에는 조금 느슨하니까. 느슨…… 했던가. 이반은 눈을 감았다. 지금 믿을 수 있는 건 자신의 감뿐이었다. 그런데 불안하단 말이야. 병원 신세를 질 것 같은 기분이…….

유리는 아니라고 했지만, 과연 아나스타샤는 사적인 보수가 정말 사적인 부탁이라고 생각할까? 알파라면 70세 노인 가랑이도 파고드는 아나스타샤의 빛나는 얼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반은 다급히 창을 내리고 멀어지는 현관을 보고 러시아어로 외쳤다.

“유리! 절대! 섹스는 안 돼!”

* * *

시모나로티 저택의 수호천사와 공원에 나들이 다녀온 아나스타샤는 현관문을 열어준 이든에게 대뜸 안겼다. 공원에 잠깐 나갔다 온 건데도 불평불만이 어찌나 많은지 아나스타샤의 칭얼거림은 이든이 그를 떼어내고 두 천사의 흙 묻은 신발을 벗기고 슬리퍼를 신길 때까지 이어졌다. 심지어 이든이 아이들에게 정신이 팔렸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내가 롤러코스터를 탔는지 벤틀리를 탔는지 모르겠어. F1이라도 나가고 싶은 걸까? 라포포르트 막내 도련님의 운전 실력은 최악이었어. 파올로한테 시간 있을 때 운전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고 싶을 만큼 말이야. 뉴욕 시내 한복판에서 120km로 달리는 인간이 어디 있어?”

“예에, 도련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든은 장성한 작은 도련님의 투정을 물처럼 흘려들으며 적당히 대꾸했다. 두 천사는 이든에게 “아닌데? 왕자 삼촌 운전 재미있어.”, “응…. 자동차가 날았어.”하고 유리의 편을 들어줬다. 이든은 아이 신발을 갈아 신기고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속도위반, 신호위반. 각양각색이었어. 집이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줄 알았다고.”

“하하하, 도련님. 저보다 오래 사셔야지요.”

“제 운전이 그렇게 별로였습니까?”

차 키를 손에 쥔 채 집 안으로 들어온 유리가 아나스타샤의 고자질을 가만히 듣다가 물었다. 헉! 아나스타샤는 맨발로 벌레를 밟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유리를 돌아봤다.

“언제 왔어?”

“왕자 삼촌 운전 재미있다고 할 때부터.”

아나스타샤는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낭패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라포포르트를 흉봤으니, 라이엇의 얼굴을 어떻게 보나! 아나스타샤는 최선을 다해 머리를 굴렸다. 유리가 상심하지 않도록 둘러대야 했다.

그러나 유리는 변명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가 어, 음. 하고 말을 더듬는 사이 덤덤하게 말했다.

“제가 면허는 있는데 운전할 일이 별로 없어서 말이죠. 앞으로 조심하죠. 핵폭탄을 운반하듯이 살살 운전하겠습니다.”

“마음은 고마워. 경호원이기는 해도 손님인데 운전까지 시키다니, 내가 경솔했어요.”

아나스타샤가 웃었다. 유리는 고개만 끄덕였다. 속으로는 통쾌해했다. 그러게 누가 귀한 라포포르트의 보물을 운전기사로 부려 먹으래? 아나스타샤와 단둘이면 몰라. 애들까지 뒤에 태우고 공원에서 공놀이를 시켜? 내가 경호원이지 보모야? 사경을 오갔던 운전은 유리의 복수였다.―굳이 복수가 아니어도 운전이 거친 편이다.―

유리의 바람대로 아나스타샤는 천사와 나갈 때는 꼭 기사를 불러야겠다고 다짐했다. 나 혼자는 몰라도 애들까지 저승길에 데려갈 수는 없었다. 하여간 러시아인들이란!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운전이 대체 왜 그 모양일까. 아나스타샤는 아주 잠깐, 고민했다.

둘이 아웅다웅하는 사이 이든은 천사를 데리고 들어갔다. 아이의 맹랑한 말소리만 지나가는 바람처럼 복도에 은은하게 울렸다. 현관 앞에 덩그러니 놓인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챙겨 방으로 올라갔다.

외출하고 돌아온 방은 깨끗하게 정돈되어있었다. 침대를 꾸미는 베개도 많아졌고 드레스룸 앞에는 못 보던 파티션도 있었다. 거기다 소파에도 베개와 이불이 준비되어있었다. 아무래도 둘이 어떻게 지낼지 모르니 만반의 준비를 다 해둔 것 같다.

“나 먼저 씻고 올게요. 유리는?”

“식사하고 씻겠습니다. 곧 저녁 시간이니….”

“그래요, 그럼.”

아나스타샤가 외출복을 벗어 바구니에 넣어두고 욕실 문을 열어둔 채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는 아침처럼 문 근처에서 등을 돌리고 섰다. 운전 때문에 마음이 상했는지 아나스타샤는 씻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유리는 무척 편했지만 말이다.

샤워를 끝낸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등을 쓸어내리며 욕실을 나왔다. 아침과 똑같이 허리에 수건을 두른 아나스타샤가 지나갔다. 유리는 그 뒤를 그림자처럼 쫓았다. 아나스타샤가 원하는 경호가 이런 것이라면 해줘야 했다.

“정말, 유리 씨가 있으니 마음이 놓여요. 형의 경호원이 믿음직스럽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내가 고용한 사람이니까…. 무슨 소린지 알죠?”

“예.”

사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그 경호원과 내가 다를 게 없다. 경력이라면 다비드가 고용한 용병들이 더 믿음직스러울 텐데? 이름이 주는 신뢰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옷을 갈아입은 아나스타샤가 자기 허벅지를 가볍게 두드렸다.

“좋아요. 내일부터 바쁠 테니까…. 이번 주에는 파티가 있어요. 헬렌 페레그린이 여는 파티죠. 나랑 취향이 비슷하거든. 사람 고르기 좋을 것 같아서 기대 중이야. 못 가나 했는데…… 다행히 유리가 딱 맞춰서 와서.”

아나스타샤는 유리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유리는 형식적인 대답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침실 문을 두드렸다. 둘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오로라가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도련님, 식사가 준비됐습니다.”

“응, 갈게. 고마워.”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향해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주며 먼저 문을 나섰다. 왜 저렇게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네. 유리는 알다가도 모를 아나스타샤의 기분을 맞추기보다는 지켜보기만 했다.

저녁은 퇴근한 라이엇, 그들의 작은 천사들과 함께했다. 아이와 함께 식사해본 적이 없다시피 한 유리는 근래 들어 가장 정신없는 저녁을 보냈다. 먹긴 먹었는데 뭘 먹었는지 기억이 없다. 아이들이 테이블을 치고 포크를 떨어트리면서 부산스럽게 굴면 라이엇이 타이르고 의자에 앉혔다. 다비드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가볍게 언질만 줬다.

천사들은 라이엇을 조금 더 따랐다. 아빠, 아빠, 하고 부르며 먹여달라고 입을 벌리기도 하고 오늘 있었던 일을 다퉈가며 얘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라이엇은 하나였다. 미카엘이 라이엇을 독차지하자 밀려난 라파엘은 아나스타샤의 무릎에 앉아 저녁을 먹었다. 유리의 무릎에 앉고 싶어 하는 게 눈에 보였지만, 유리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난장판은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 사나웠다.

화목한 저녁 식사를 끝내고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따라 2층 침실로 돌아왔다.

“씻을 건가요?”

아나스타샤가 물어보면서 벽에 기대 세워둔 이젤을 펼쳤다. 씻는 동안 그림이라도 그릴 생각인가. 유리가 말없이 이젤을 노려보고 있으니, 아나스타샤가 말을 덧붙였다.

“유리가 먼저 씻으면 나중에 그리고, 나중에 씻으면 지금 그리려고.”

“제가 씻을 때도 절 지켜보실 겁니까?”

“그럼. 그래야지. 유리가 씻고 있는데 누가 들어오면 어떡해?”

아나스타샤는 진심으로 괴한의 침입을 걱정하고 있었다. 빈말도 장난도 아니었다. 유리는 어슬렁어슬렁 걸어가 소파에 풀썩 앉아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7시가 조금 넘었다.

“9시에 씻겠습니다.”

“고마워요.”

뭐가 고마운지는 모르겠으나, 유리는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받았다. 아나스타샤는 이젤에 빈 캔버스를 올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숨.

“흐음…….”

아나스타샤는 9시가 될 때까지 한숨만 쉬었다. 씻으려고 일어난 유리가 확인했을 때도 빈 캔버스였다. 침대 밑에 누가 숨어있을까 두려워 밖으로 나오지 못한 그가 겨우 경호원 하나가 늘었다고 정상으로 돌아올 리가 없었다.

유리는 씻겠다는 말 대신 그의 뒤를 지나가며 벨트를 풀었다. 아나스타샤가 연필을 내려놓고 유리와 함께 욕실로 들어갔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화장대 의자를 가져와 문 앞에 앉았다.

“진정됐는데, 집중이 안 되네요. 얼른 잡혔으면 좋겠어.”

“동감입니다.”

독백에 대꾸하며 유리는 옷을 벗었다. 종일 입고 있던 정장은 먼지와 땀에 젖어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애들 데리고 공원에 가서 뛸 줄 알았으면 반바지를 입고 왔을 것이다. 잘 보이려고 차려입었다가 먼지랑 땀만 잔뜩 먹였군. 유리는 구겨진 셔츠를 바구니에 넣고 속옷 밴드에 손을 올렸다. 시선을 느낀 유리가 공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화장대에 팔을 올린 채 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는 맑은 얼굴이 놀라더니 부랴부랴 뒤통수를 보여줬다.

“아, 어. 미안해요.”

유리는 그제야 속옷을 벗고 샤워를 할 수 있었다. 따뜻한 물줄기 아래에 서서 종일 부산스러움에 피로해진 머리를 식혔다. 아나스타샤도 아나스타샤지만, 아이들까지 있으니 정신이 없단 말이지. 차라리 별관이나 호텔에서 지내는 게 나을 듯싶었다. 아나스타샤의 경호원이기는 하나 라포포르트의 일원이니 시모나로티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 했다. 그렇기에 아이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귀찮아. 온전히 아나스타샤에게만 집중하고 싶었다.

“유리. 무슨 말이라도 해보지 그래요.”

아나스타샤가 말을 걸어왔다. 유리는 얼굴에 흐르는 물을 닦아내며 유리 벽 너머로 보이는 아나스타샤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무슨 말을 할까요.”

“그냥, 아무거나. 거기 있는 거 맞죠?”

“예. 씻는 소리 들리잖습니까.”

“누가 유리를 때려눕히고 닦는 척하는 거면 어떡해?”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말도 안 되는 걱정인데 웃기기는커녕 자존심만 상했다. 형제들의 그늘에 가려져 힘없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약하다는 건 아니다. 잠입한 피라미 정도는 맨손으로도 거뜬했다. 유리에게 기술을 알려준 스승은 성격이며 행동거지며 닮고 싶지 않은 불쾌한 사람이었지만 실력 하나는 러시아에서 알아줬으니까.

“아니면, 유리가 씻고 있는데 누가 들어와서 날 데려가면…. 거기서 여기까지 얼마나 걸리지? 알몸으로 날 쫓아올 수 있어요?”

“열 걸음 정도 될 것 같은데요. 걱정 마십시오. 누가 스무 명이 보초를 서는 시모나로티 저택에 숨어들어서 아나스타샤 당신을 데리고 나가겠습니까? 바로 옆에… 저도 있는데요.”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의 유리 벽 뒤에 있지만, 시야에 들어오니 옆이나 다름없다. 아나스타샤의 기분을 달래주고자 유리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줬다. 으음.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아나스타샤가 침음했다.

“그렇겠죠? 누가 여기까지 들어오겠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헬기를 타고 천장에 구멍을 뚫으면 어떡하지?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텐데.”

아나스타샤가 중얼거리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유리는 누구보다 아나스타샤를 잘 안다. 그가 겁쟁이에다 생각도 많고 상상력도 풍부하며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하는 사람이란 걸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수도꼭지를 잠갔다. 쏟아지던 물이 그쳤다.

“창문을 깨고 들어올 수도 있잖아? 내일 사람을 불러서 방범창이라도 설치하라고 해야겠어.”

걱정은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았다.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닌가. 설령 누군가 들어온다 해도…. 아나스타샤가 납치되거나 다칠 일은 없었다. 유리는 타월에 보디샴푸를 묻혀 거품을 내 몸을 닦았다. 입을 다물게 할 방법을, 유리는 알고 있다. 내키지 않을 뿐이다.

“고용된 경호팀에 범인이 있을지도 모르지. 자신만만하게 현관 앞에 그런 걸 두고도 방범 카메라에 찍힌 게 아무것도 없으니…. 개인이 아닐지도 몰라.”

“아나스타샤 씨.”

“응?”

“뒤돌아 앉으세요.”

더는 못 들어주겠다. 일일이 아닙니다, 안전합니다. 대꾸해주는 것보다 경호원인 유리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편이 나았다. 물론, 유리는 자신의 씻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야 했지만……. 말주변이 없으니 몸이 고생이다.

아나스타샤가 돌아앉았다. 눈에 씻는 유리가 들어찼다. 유리 벽에 튄 물방울과 수증기 때문에 영물처럼 보였다. 자기가 잡힌 줄도 모르고 느긋하게 몸을 씻는… 기린. 그는 다리를 꼬고 유리의 몸을 관람했다.

기억 속 라포포르트의 보석은 연마가 끝나 정교하게 빛을 내는 보석이었는데, 못 본 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로 원석의 옷을 둘렀다. 왼쪽 외복사근 위에 작은 문신이 있었다. 유리가 얼룩져서 어떤 그림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의례 별이나 해골이라 짐작했다. 몸 전체가 단련된 근육으로 덮였다. 휘두르는 팔에 맞기만 해도 뼈가 부러질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을 했군. 천 마디 말보다 확실한 보증이었다. 만약 괴한이 창문이나 천장을 부수고 나타나도 유리 라포포르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날 구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안심되니 궁금증이 거품을 일으키며 아나스타샤를 감쌌다. 씻는 걸 훔쳐보는―허락은 해줬지만―것보다 대화하면 좋지 않을까 예상하며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은 유리에게 말을 붙였다.

“유리,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아뇨.”

아나스타샤는 별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 아나스타샤의 생각이 맞다면, 유리는 말주변이 없고 말하기도 귀찮아하면서, 아나스타샤 자신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날 안 좋아한다니. 유리는 분명 내게 호감이 있어서 경호를 맡은 거야. 사적인 보수까지 받으면서 내가 싫어? 보기 드물게 아나스타샤의 미간이 좁아졌다.

또 드물게 아나스타샤가 고뇌에 빠진 동안 샤워를 끝낸 유리가 나왔다. 욕실은 왜 이렇게 넓은지. 유리는 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수건장을 찾았다. 아나스타샤가 수건과 가운을 꺼내 유리에게 내밀었다. 가운은 왜? 유리는 의아했으나, 순순히 가운을 걸치고 수건으로 머리를 닦았다. 아나스타샤는 뽀얀 빛을 내는 유리를 보며 웃었다.

웃기는 일도 없는데 갑자기 웃음을 터트린 아나스타샤 때문에 유리는 머리를 말리다 말고 고개를 돌려 아나스타샤를 바라봤다.

“뭐 문제라도 있습니까?”

“응? 아니, 아니…. 우리 같은 향이 나서요.”

유리는 입을 벙긋거리다 이내 꾹 다물고는 침실로 나가버렸다. 아나스타샤도 그를 쫓아왔다. 유리는 가운을 반쯤 벗은 채로 가져온 가방 안에서 옷을 꺼내고 있었다. 둥글게 말린 등이 귀여웠다. 갈아입히기 아까운 광경이다. 아나스타샤는 이젤 앞에 앉았다.

“유리, 그대로 소파에 앉아줄래요?”

경호가 아닌 명령, 부탁에 유리가 고개를 돌렸다. 삐뚤어진 눈썹이 “또 뭔데.”라고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이젤에 눕혀둔 연필을 들고 유리를 향해 웃어줬다. 인물화라면 다비드나 조카들처럼 가족만 그리는 그가 어쩐 일로 남을? 유리는 의아함과 함께 고개를 드는 호기심을 억눌렀다.

“모델은 싫습니다.”

“유리라면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데. 안 되나요?”

그러니까, 무슨 기호로 가족도 아닌 날 그리냔 말이야. 유리는 경계하면서도 그가 이젤 앞에 앉아 한숨만 쉰 시간과 돌려 앉히기 전까지 떠들었던 기억을 상기했다. 잠들 때까지 붙잡혀 운석이 떨어져 저택이 부서지고 그 틈으로 살인마와 손을 잡은 외계인이 들어와 자신을 납치하지 않겠냐는 걱정을 들어줄 것이냐. 아니면, 헐벗은 채로 아나스타샤 앞에… 설 것인가.

“얼굴은 다르게 그려주신다면.”

“어렵지 않죠.”

이럴 줄 알았으면 사교 파티에 꾸준히 나갈 걸 그랬다. 아나스타샤와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기진맥진했다. 몸으로 때우는 게 훨씬 편하게 느껴졌다. 그래, 샤워하는 것도 보라고 내줬는데 누드화가 별거냐. 밀착 경호라 하니 가족처럼 가깝게 느껴졌나 보지. 유리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입가를 손으로 문질렀다.

가운만 걸친 채로 소파에 앉았다. 다리를 얼마나 벌리고 팔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리가 없는 유리는 어색하게 가랑이 사이로 팔을 모으고 아나스타샤를 매섭게 노려봤다. 남이 보면 아나스타샤가 유리의 손을 묶어놓은 줄 착각할 자세였다.

아나스타샤는 말로 자세를 설명하려다 유리에게 다가갔다. 말해도 직각으로밖에 안 꺾이는 목각인형처럼 굴 것 같았다. 무릎을 벌려주고 최대한 편한 자세가 될 수 있게 팔 위치까지 봐줬다.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팔다리, 고개를 멋대로 밀고 끌어당겨도 저항하거나 힘을 주지 않았다.

“편해요?”

“아뇨.”

소파 등받이에 왼쪽 팔을 걸치고 손등에 머리를 기댄 유리가 바로 대답했다. 아나스타샤는 웃으며 가운을 벗겨냈다. 팔다리를 만져도 가만히 있던 유리의 어깨가 긴장으로 빳빳해졌다. 사타구니는 가리고 복사근과 복근이 보이게 풀어헤쳤다. 헐렁해진 가운 아래로 문신이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문신에 집중했다. 장미 넝쿨에 휘감긴 리볼버와 손도끼가 교차 되어 X자를 만들었고, 주변에 장미 세 송이가 아름답게 피어있는 문신이었다. 이건, 무슨 뜻일까? 유리의 숨이 불편하게 들렸다. 짐승이 공격 전 경고하는 소리와 비슷했다. 아나스타샤는 관찰을 멈추고 이젤 앞으로 가 앉았다.

연필을 들고 밑그림을 그렸다. 표정은 험악했지만, 몸매는 아름다웠다. 사각사각, 연필이 닿는 소리만 들렸다.

“그 문신은 무슨 뜻이에요?”

모델이 되어줬다고 대화를 안 하는 건 아니었다. 유리는 캔버스 뒤로 빼꼼, 보이는 아나스타샤의 파란 눈을 응시했다.

“어른이 됐다는 의미죠.”

“아하.”

첫 경험은 셋이서 했다는 걸까. 궁금증만 더 커졌다. 예절을 아는 아나스타샤는 호기심을 흑심 밑으로 숨겼다.

“언제 했어요? 나는 성인식 때 다비드가 차를 사줬어요. 그런데 운전할 줄을 몰라서.”

시트커버도 안 뗐다니까요. 아나스타샤가 웃으라고 꺼낸 얘기였다. 유리는 피식 웃었다. 다비드가 사준 롤스로이스는 이탈리아 본가 주차장에 주차되어있을 것이다. 관리인이 확인차 매주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한 바퀴 도는 것이 그 차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흰색이었지. 생각해보니 공원에 끌고 갔던 차도 흰색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더 떠들지 않고 유리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캔버스에 피사체를 옮기느라 훑는 시선이 아니었다. 유리는 그가 한 질문을 떠올렸다. 문신은 언제 했느냐. 대답하지 않으면 며칠이 됐든 아나스타샤는 말을 걸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온몸으로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겠지. 집을 잃은 개처럼 사방팔방 두리번거릴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열일곱 살 때 했습니다.”

“으음.”

그렇군요. 아나스타샤가 맑은 미소를 보여줬다. 총과 도끼의 의미는 몰라도 저 세 송이의 장미가 사람 머릿수라는 건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런데 보통 첫 경험을 문신으로 새기던가? 셋을 너무 사랑해서? 예절을 아는 아나스타샤는 다발로 머리를 들이미는 궁금증을 밀어내고 스케치에 집중했다.

11시가 지나서야 아나스타샤가 연필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리도 가운을 여미고 똑바로 소파에 앉아 기지개를 피었다. 1시간 넘게 삐딱하게 앉아있었더니 손목이며 무릎이 아팠다. 모델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손을 씻으러 갔는지 보이지 않고 욕실 쪽에서 물소리만 들렸다.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편히 기댄 채로 쩔쩔매던 아나스타샤를 회상했다. 창문을 깨고 누가 들어오면 어쩌려고 혼자 다닌대. 유리의 입가에 한없이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실실 웃던 유리는 눈앞에 세워진 이젤을 바라봤다. 그가 어떻게 날 그렸는지 궁금했으나 일부러 보려고 일어나진 않았다.

“유리, 고마워요. 밑그림은 다 그렸어요.”

물이 묻어 투명해진 손으로 허리를 짚은 아나스타샤가 나타났다. 그럼 이제 자는 일만 남았군. 유리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짐 가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리 와요.”

불행히도 아나스타샤가 막아섰다. 유리는 가방으로 뻗던 손을 천천히 거두며 아나스타샤를 응시했다. 아까부터 옷을 못 입게 하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

“설마, 따로 잘 생각은 아니죠?”

“같이 자야 합니까?”

같은 방을 쓰자고 했지, 같은 침대를 쓰라는 말은 없었다. 이래서 계약서가 중요한 건데. 아나스타샤를 앞에 두고 너무 들떴다. 이제라도 계약서를 써야 하나. 다음번에는 난교 파티에 끌고 가서 어울리자고 회유할지도 모른다. 유리가 대꾸 없이 노려보기만 하자 아나스타샤는 팔뚝을 쓸었다.

“혹시 모르잖아요. 유리 씨가 자는 동안에 누가 절 데려가면 어떡해요?”

“쥐가 들어와도 깰 겁니다. 걱정 마세요.”

“그걸 제가.”

어떻게 믿죠? 마지막 물음은 목소리로 나오지 않았지만, 유리는 들었다. 라포포르트의 명성은 인정하지만, 유리 라포포르트 개인의 능력은 믿지 못하겠다는 거야,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야? 슬프게도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꺾을 말주변이 없었다.

“그럼 옷만 걸치고….”

유리는 말을 흘리며 옷가지를 손에 쥐었다. 죽어도 “같이 자죠.”라는 말은 뱉을 수가 없었다. 뉘앙스가 이상했다.

“그냥 와요.”

아나스타샤는 침대에 누운 채로 유리에게 손짓했다. 평범하게 이불을 덮고 베개를 베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어딘가 거북하게 느껴졌다. 유리의 짐승 같은 촉이 침대에 누우면 좋은 꼴은 못 볼 거라고 경고했으나 유리는 무시했다.

설마. 둘 다 알판데 무슨 일이 있겠는가. 아나스타샤는… 알파와 어울리기도 하지만, 결국은 다 베타와 잤다. 유리가 알기로는―믿고 싶은 대로는―그랬다. 틀린 적이 없는 촉을 외면할 만큼 믿고 싶은 사실이기에 유리는 아나스타샤가 원하는 대로 가운만 걸친 채 침대에 가 누웠다.

같은 이불을 덮고 눕자 맨다리에 아나스타샤의 다리가 닿았다. 넷이 누워도 될 큰 침대에 굳이, 알파 둘이 빠듯하게 붙어서 자야 할 이유가 있다면 뭘까. 답이 눈앞에 보이고 귓전에 왕왕 울리는데도 유리는 모르는 척했다. 그럴 리 없다. 아나스타샤는 그러면 안 된다. 순간 이반이 섹스는 절대 안 된다며 소리치던 게 떠올랐다. 대체 알파끼리 어떻게 한다는 소리야. 비위도 좋지. 페로몬이 얽히면 그건 섹스가 아니라 마운팅이다.

“유리. 문신 말이에요.”

아나스타샤가 몸을 가까이 붙이며 가운을 손으로 매만졌다. 허락만 한다면야 당장 이불 속으로 들어가 문신을 더듬을 기세였다. 은은하게 풍기는 페로몬 때문에 작은 동작도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그런데도 유리는 도망치거나 경계하지 않았다. 알파끼리 우열을 가리고 싶은 걸 수도 있으니까.

“어떤 의미로 어른이 됐다는 건가요?”

가만히 있는 신호를 어떻게 읽었는지, 아나스타샤는 기어코 가운 속으로 손을 넣어 유리의 외복사근을 더듬었다. 유리의 눈이 순간 커졌다. 옆구리를 따라 소름이 쭉 타고 올라와 뒤통수를 깨물었다. 마운팅, 하자는 거야? 경호원이랑 마운팅해서 뭐 하는데? 납득하고 싶어도 납득가지 않는 아나스타샤 때문에 유리의 얼굴이 붉어졌다.

“응? 말해주면 안 돼?”

“…그보다, 손은 왜….”

화가 치밀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러면 안 되지. 왜 알파랑 이런 짓을 하고 싶지? 한 팔에 부드럽게 안기는 오메가를 만나서 자기와 아리따운 오메가를 닮은 새끼를 수도 없이 쳐내서 세상에 후손을 남겨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은가! 그가 정말 유리가 사랑하는 아나스타샤라면 마운팅은 이쯤에서 그만두고 잘 자요, 하고 인사해야 했다.

“손? 아아, 여기 말고…… 여길 만질 걸 그랬나?”

아나스타샤는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가운을 풀어 헤쳐 늘어진 성기 위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밑에 손이 닿았다. 손이 닿았다고. 생각도 못 한 상황에 유리는 당황했다. 아나스타샤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던 유리는 단 한 가지, 인정하지 않고 외면했던 문제와 직면했다.

아나스타샤는 알파와만 섹스한다. 그리고 오늘 밤 상대가 바로 유리 라포포르트 자신이었다. 알파와 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내가 알파와…… 아나스타샤와 뒹굴기까지 해야 한다니!

이마에 핏줄이 섰다. 유리는 팔뚝으로 아나스타샤를 밀쳤다.

“야, 안 비켜?”

“야? 하하, 그래. 반항적인 것도 나쁘진 않지.”

유리의 복잡한 속을 알 리 없는 아나스타샤는 턱에 입까지 맞추며 거래 조건을 지키려 했다. 사적인 보상이야 당연히 섹스지. 사내새끼가 그거 말고 원하는 게 또 있겠어? 나랑 결혼하고 싶다는 건 아닐 테니 말이다. 아나스타샤는 굳어 딱딱하게 느껴지는 피부 위에 입술을 꾹 눌렀다.

“비… 키라고!”

소리쳐도 돌아오는 건 웃음뿐이었다. 몸이 겹치자 은은하게 풍기던 페로몬이 강렬히 느껴졌다. 뭐, 뭔데. 왜? 여태 그림 그리다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유리는 숨을 꾹 참았다. 알파에게 다른 알파 페로몬은 향기롭기는커녕 역겹고 기피하고 싶은 악취였다. 입에 자연스럽게 침이 고였다. 토악질이 나오기 직전이었다.

“응? 왜… 아하, 설마 내 위에 올라타고 싶어서 그래? 미안하지만 난 알파한테 박는 게 좋아서 말이야.”

“손 놓고, 떨어지라고.”

“하하, 유리…….”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놀라 굳은 유리를 그저 귀엽다는 듯이 웃어넘기며 입을 맞췄다.

입을! 유리는 입술과 눈을 꾹 닫았다. 아나스타샤의 혀가, 뒷구멍처럼 다문 입술을 사탕이라도 되는 것처럼 핥았다. 따뜻한 덩어리가 지나간 자리가 차게 식었다. 부드러운 감촉에 몸이 붕 뜨는가 싶을 때 소름이 전신을 덮쳤다. 좋다, 싫다 어느 쪽도 아니었다. 아나스타샤가 쭙쭙거리며 핥아주는 건 좋은데, 알파가 좆을 잡고 마운팅하려는 건 손모가지를 분질러버리고 싶을 만큼 싫었다.

“유리, 입 열어줘.”

“그만…….”

유리의 인내심도 점점 얇아졌다. 이러다가 아나스타샤를 칠 것 같았다. 안 돼. 그랬다간 집에 돌아갈 때까지 오늘을 후회할 거야. 유리는 베개 밑으로 손을 넣었다. 숨겨둔 총기의 딱딱한 몸체가 손에 잡혔다.

“하하, 왜 이렇게 귀엽게 구는 거야. 설마, 아직 처녀야?”

아나스타샤의 도발엔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유리의 미간이 얼마나 찌그러졌는지 그 안에서 눈 하나가 더 튀어나올 것 같았다. 발기도 안 하고. 뭘까. 고잔가? 아니면 알파랑은 해본 적이 없나? 그럼 왜 개인적으로 부탁했지? 아나스타샤는 성기를 쥐었던 손으로 유리의 입가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난 취향이 너그러워서 너처럼 거부감 심한 애들이 밑으로 질질 흘리게 만드는 것도 좋아해. 내가 처음이라니, 잊지 못할 경험을 만들어줘야겠어.”

영광스러운 자리야. 아나스타샤는 장난스럽게 속삭이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청량한 언행과 달리 그가 뿜어내는 알파의 향은 유리에겐 독한 매연과 다를 게 없었다. 진짜 한 대 칠까 보다. 한 대 치면 조용해질 텐데! 안 돼, 유리. 그랬다가는 마이애미로 돌아가야 할 거다. 내면과 싸우던 유리의 입에 아나스타샤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꾹 다문 입술을 파고든 손가락은 금세 이사이를 뚫고 입을 벌리게 했다. 입이 벌어지면서 유리의 눈이 떠졌다. 입안에 지금, 아나스타샤의 손가락이. 아, 아나스타샤의……. 그가 알파라는 사실보다 아나스타샤가 손가락을 넣고 희롱한다는 사실이 유리의 사고를 정지시켰다. 아무리 싫은 행위도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걸 위에 곁들이면 괜찮아지는 것이었다.

아나스타샤가 벌어진 입안으로 혀를 넣으며 입을 맞췄다. 물컹하고 축축한 혀와 숨을 쉴 때마다 느껴지는 페로몬 때문에 속이 메슥거리고 어지러웠지만, 유리는 저항할 수가 없었다. 음, 음, 하는 아나스타샤의 신음이 차이콥스키의 곡보다 감미로운 선율로 들렸다.

“유리, 혀를 움직여야지.”

카사노바에 비하면 유리의 테크닉은 형편없었다. 아니, 형편없다고 얘기하는 것은 형편없다는 단어를 모욕하는 걸지도 모른다. 유리는 그가 뭐라고 자신을 비웃는지 제대로 귀에 담지 못했다. 좀 전까지는 싫다고 가리비처럼 꽉 다물었던 입을 벌린 채 멍한 얼굴로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봤다.

“설마 키스도 처음이야? 이런… 내가 유리의 처음을 다 가져가네.”

너희 형들이 날 질투하겠어. 아나스타샤의 장난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는 턱선에 입을 맞추고 목덜미를 따라 밑으로 내려갔다. 유리는 아직도 키스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쪽쪽 소리를 내며 가슴을 애무하는 아나스타샤를 내버려 뒀다.

페로몬 때문에 코가 찡하다…. 그런데, 나름…. 괜, 찮은 것 같고……. 아닌가? 상대가, 아나스타샤라서…. 사실, 아나스타샤라면……. 유리가 아나스타샤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을 속이고 아나스타샤와 붙어먹으려던 찰나였다. 아나스타샤가 다리 사이를 더듬었다.

아, 아니야. 거기까지는 안 돼. 입, 입은 모르겠는데, 밑은…! 그러나 슬프게도 유리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겨나갔다. 아나스타샤가 음경과 고환을 지나 더 안쪽에 달린 곳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안 된다는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유리는 비가 땅으로 떨어지고 바람이 나무를 흔드는 것만큼 자연스럽게 베개 밑에 숨겨둔 권총을 빼내 아나스타샤의 옆구리를 짓눌렀다.

“헉.”

아나스타샤는 옆구리를 누르는 게 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촉감, 이 묵직함……. 권총이었다. 권총이 옆구리를 아프게 짓눌렀다. 칼이었다면 옆구리가 터져 장기가 쏟아졌을 것이다. 그는 황급히 사타구니에서 손을 떼어내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보석같이 아름다운 눈동자가 살의로 번뜩였다. 아나스타샤는 유리가 사적인 보수를 요구한 것에 감사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쏟아지는 장기를 손으로 주워 담고서 병원에 갔어야 했을 테니까.

“내가, 그만하라고 했잖아.”

이번에도 못 알아먹으면 방아쇠를 당길 것 같은 살벌한 목소리였다. 아나스타샤는 양 손바닥을 유리에게 보이고 머리 높이까지 손을 들었다. 그제야 옆구리를 누르던 쇳덩이가 떨어져 나갔다.

유리는 한숨을 쉬며 베개 위에 총을 던졌다. 힉! 아나스타샤가 기겁하더니 엉덩이 걸음으로 물러섰다.

“뭐야! 왜, 왜 총이 나오는 거야? 어, 언제 숨긴 거야?”

아나스타샤는 유리가 무슨 말만 하면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베고 자야 할 베개 위에 덩그러니 놓인 시커멓고 불길한 쇳덩어리와 기진맥진한 유리를 번갈아 노려봤다. 유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언제 숨겼는지 알면 뭐 어쩌려고? 중요한 건 총이 베개 밑에 있었기에 큰 화를 피했다는 사실이다.

“아니, 됐어. 하, 어이가 없군. 사적인 보수를 원하지 않았나?”

기껏 주려고 했더니 걷어차? 아나스타샤의 목소리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아나스타샤는 스토커가 썩은 달걀을 던져도 웃는 사람인데, 어지간히 놀랐나 보군. 유리는 가운을 여미고 아나스타샤를 따라 허리를 일으켜 세워 앉았다.

“섹스라고 한 적 없습니다.”

“그게 그거지. 다른 걸 원한다는 거야? 뭘? 나와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아나스타샤의 비꼬는 말을 잠자코 듣던 유리가 ‘결혼’이라는 단어에 인상을 팍, 쓰며 그를 노려봤다. 살벌한 눈빛에도 아나스타샤는 전처럼 겁먹지 않고 시선을 받아쳤다. 총을 자각하자마자 토끼처럼 놀란 것이 뒤늦게 창피해졌기 때문이다.

아니지. 어른인 내가 참아야지. 시모나로티인 내가 참아야 하는 일이지. 아나스타샤는 숨을 깊게 내쉰 뒤 물었다.

“원하는 걸 얘기해.”

그러자 유리는 딴청을 부렸다. 자신이 원하는 ‘사적인 보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사춘기 애도 아니고 뾰로통하게 앉아서 노려본다고 내가 원하는 걸 떡하니 갖다줄 수 있냔 말이야? 제아무리 금은보화와 진귀한 보석이 넘쳐나는 ‘레어’를 가지고 있어도 원하는 걸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줄 수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침묵을 깨고 침대 밑으로 내려왔다. 라포포르트의 고집불통에게 답을 들으려면 해가 떠도 시간이 모자랄 것 같다. 날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날 지키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의뢰인한테 총을 겨눌 수가 있지? 대체 왜 베개 밑에 총을 숨겨두냔 말이야. 아나스타샤는 형에게 따질지, 라이엇에게 따져야 할지 생각하다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씻기나 하자……. 슬리퍼를 신고 어기적거리며 욕실로 향하자, 유리가 물었다.

“지렸습니까?”

“그래! 즐기려는데 총을 들이미니 안 지리고 배겨?”

그가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유리는 고개를 숙여 시트를 훑었다. 아나스타샤가 그 동작을 보더니 흘리지 않았다며 버럭 화를 냈다. 후우……. 그가 숨을 고르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돌아와서 그 사적인 보수가 뭔지 들을 거니까 생각이나 해둬요.”

“아나스타샤 당신이 충분히 지불할 수 있는 건데요.”

“그래. 그게 뭔지 들어야겠다고. 말하기 싫으면 돈으로 받아요. 난 안 줄 거니까.”

여유롭던 유리의 얼굴이 구겨졌다. 하하! 예쁘장한 낯짝이 구겨지니 봐줄 만하네. 좀 전까지 어른인 내가 참자며 자신을 다독였던 아나스타샤는 승리감을 양껏 즐기며 욕실로 들어갔다.

아나스타샤가 침실로 나왔을 때는 상의와 하의를 갖춰 입은 유리가 침대맡에 앉아있었다. 베개 위는 깨끗했다. 그는 팔짱을 낀 채로 유리의 앞에 섰다. 거대한 풍채가 드리운 그늘에 유리는 고개를 올려 아나스타샤를 응시했다.

“자, 그래서 원하는 건?”

유리는 고민했다. 이 보수를 밀고 나가느냐, 다른 것을 요구하느냐. 그러나 유리가 원하는 보수는 이것 하나뿐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인내를 가지고 유리의 대답을 기다려줬다. 그가 뭘 달라고 하든 전부 줄 수 있다. 보석이라면 어렵지 않았고, 명성은 조금 힘들겠지만 못 들어줄 건 아니다. 몸이어도 상관없는데 좀 전 일을 생각해보면 절대 아닐 것 같았다. 그러니 보석이냐, 명예냐. 둘 중 하나라는 건데.

“저는.”

드디어 유리가 입을 열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입술과 움찔거리는 목덜미에 집중했다.

“저는… 아나스타샤 당신의.”

나의?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눈을 바라봤다. 회색 눈동자가 간절히 뭔가를 바라고 있었다. 돈도 섹스도 싫은 남자가 이렇게 간절하게 원하는 보석은 대체 뭘까. 아나스타샤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유리가 결심했다는 듯 얘기했다.

“아나스타샤 당신의 밀랍 인형이 갖고 싶습니다.”

응? 아나스타샤의 얼굴에 의문이 툭, 튀어나왔다. 보석도 명예도 아닌 고작 밀랍 인형을 만들고 싶어서 준다고 내민 몸도 마다했단 말인가? 날아갈 것처럼 부풀었던 호기심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쪼그라들었다. 겨우, 그런 걸 받고 싶어서? 겨우 그것 때문에 뜸을 들이고 총까지 들이밀었나?

“굳이… 그걸 받고 싶은 이유가 뭐야? 그런 거라면 나와 섹스하면 되는 거 아냐? 아, 혹시 내게 박고 싶어서 그런 거라면….”

“아나스타샤 씨가 지불 못할 보수였나 보군요.”

“아니. 몇 개를 만들어도 좋아. 다만, 왜 그걸 갖고 싶냐는 거지. 살아 움직이는 내가 네 앞에 있는데 말이야.”

아나스타샤를 본뜬 밀랍 인형을 원한다니. 마치 자신을 박제하고 영원히 옆에 두고 싶단 이야기로 들렸다. 어찌 보면 성관계보다 추하고 결혼보다 짙은 소유욕이 느껴지는 요구였다.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욕망으로 번들거렸던 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심드렁해졌다. 아나스타샤는 턱을 추켜들었다.

“말하지 않으면 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지폐를 받아야겠는데.”

여기까지 와서 의뢰를 무를 수도 없었다. 유리는 그에게 숨기고 싶었던 사실을 이실직고해야만 했다.

“당신이 좋으니까요.”

한 톨의 거짓도 없는 참된 진실이었다. 유리는 아나스타샤를 좋아한다. 이것저것 따지면서 가까이 지내는 것보다 관찰자가 되어 그를 지켜보는 것이 더 행복하고 즐겁다는 걸 깨달았지만, 어쨌든 아나스타샤가 좋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믿지 않았다.

“날 좋아한다고? 하하. 그런 거짓말이 통할 것 같아? 네가 좋아하는 아나스타샤가 조금 더듬었다고 총을 들이밀었잖아.”

“분명히 하지 말라고 여러 번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알파랑… 어떻게 합니까?”

여느 알파가 그러듯, 유리는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그래. 저게 보통 반응이다. 기호를 떠나서 알파는 알파의 페로몬에 거부감이 드는 게 당연하다. 알파의 페로몬은 동류인 알파를 배척하고 오메가를 유혹하는 향이니까. 아나스타샤는 허허, 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여느 알파와 달랐기 때문이다.

아나스타샤로 말할 것 같으면.

“알파랑 해본 적이 없다니. 유리, 아직 어리구나.”

알파랑 할 줄도 모르면서, 그 즐거움을 알지도 못하는 알파가 알파인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하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다. 누군가의 정성 어린 관심을 받는다는 건, 성교보다 더 큰 쾌감을 주니 말이다.

“이 껍데기가 그렇게 탐난다는 말이지?”

알파 페로몬 향이 나지 않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껍데기야말로 유리가 원하는 사적인 보수였다. 현명한 선택이다. 가장 아름다웠던 때를 밀랍으로 꾸며 만들어두면 영원토록 그 미모를 감상할 수 있지 않은가.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들어보고 생각해보니 별것 아닌 요구였다. 사랑해달라며 칼부림이며 시체를 보내는 놈들이 한 트럭인데 인형쯤이야. 그가 그 인형을 두고 자위를 한다 해도 알 바는 아니었다.

“여태 들어본 부탁 중에서 가장 이상해. 그래, 그쯤이야 얼마든지. 몇 개를 만들든 원하는 만큼 만들어.”

난 자야겠어.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지나쳐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총을 보고 놀란 마음이 진정되고 긴장이 풀리니 보송보송한 이불과 옷이 별빛을 묻힌 구름처럼 느껴졌다. 자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무심코 유리가 베고 잘 베개 밑으로 손을 넣었다.

아무것도 없어야 할 베개 밑에 딱딱한 쇳덩이가 잡혔다. 금세 잠들 것처럼 풀어진 아나스타샤가 번쩍 몸을 일으키며 베개를 치워 안에 든 걸 확인했다. 권총이었다! 또 권총이 베개 밑에 있었다!

“악! 왜, 왜 이런 걸 베개 밑에 두고 자는 거야!”

아나스타샤는 총을 만지지는 못하고 유리를 보고 항의했다. 침대에 걸터앉아 아나스타샤를 구경하던 유리는 눈썹 한쪽을 치켜뜨며 뭐가 문제냐는 듯한 얼굴을 했다. 아나스타샤는 기가 차서 씩씩거리다 손가락으로 권총을 가리켰다.

“치워! 이런 걸 베고 자면 귀신이 들어오는 거 몰라?”

“처음 듣는 얘긴데요.”

“아시아에서는 그렇게 해. 칼도 안 돼. 총도 안 돼!”

“제 베갠데 뭐가 문제입니까.”

“자다가 눌려서 내 머리를 날려버리면 어쩔 거야? 협탁에 두던가 해.”

안전장치도 걸려있는데 그럴 리가 있나. 유리는 아나스타샤의 막무가내식 요구를 막무가내로 받아쳤다.

“누가 몰래 들어와서 총을 가져가면 어쩌고요?”

지중해 바다처럼 푸르고 청량한 눈동자가 바삐 흔들렸다. 그러게……. 누가 몰래 집어서 쏘면 어떡하지? 거기까지는 생각 못 한 얼굴이었다. 유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와 대화하는 건 귀찮고 피곤한 일이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절경이 코앞에 펼쳐진다면야 밤을 지새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유리는 권총의 안전장치가 걸린 걸 아나스타샤에게 보여주고는 협탁 위에 올려놨다.

턱. 쇳덩이가 원목 협탁에 올려지는 소리가 “이제 됐냐.”는 유리의 목소리로 들렸다.

“누, 누가 들어오면 어떡해?”

아나스타샤가 걱정스레 총을 보며 물었다.

“제가 대신 맞아드리죠. 이만 주무세요. 내일부터 바쁘지 않습니까?”

유리는 베개를 제자리에 놓고 누웠다. 아나스타샤는 그, 그건 그런데…. 하고 말을 늘이며 우물쭈물했다.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으나 유리는 못 들은 척했다. 얼마 못 가 아나스타샤가 도로 눕는 기척이 들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이불을 바스락거리며 한참 자리를 잡던 아나스타샤가 유리 쪽으로 돌아누워 그의 옆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

옆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데 잠이 들었을 리 없던 유리는 부담스러운 시선에 눈을 뜨고 아나스타샤를 힐긋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아나스타샤가 시트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부탁했다.

“나, 손잡아 주면 안 될까?”

이건 또 무슨 수작인가. 유리는 애처롭게 깜빡이는 눈을 바라보기만 했다. 침묵을 견디지 못한 아나스타샤가 순순히 이유를 불었다.

“또, 그 촉감이 느껴져.”

이불 속에서 시트를 그러쥐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는 시무룩한 아나스타샤를 응시하다 그의 손바닥 밑으로 손등을 밀어 넣었다. 공주가 웃었다. 우중충하던 바다는 금방 구름 한 점 없이 맑아졌다. 아나스타샤는 베개 끄트머리에 머리를 기댄 채 유리의 한 쪽 손을 꼭 쥐였다.

“고마워.”

아나스타샤는 마지막 인사를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유리는 그 모습을 한참 쳐다봤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과 규칙적인 숨이 유리를 들뜨게 했다. 아나스타샤가 내 손을 잡은 채 잠들었다. 밤마다 이 얼굴을 봤으면 좋겠다. 아름다운 얼굴에 푹 빠진 유리는 작은 소망을 품었다.

* * *

날이 밝자 아나스타샤는 바삐 움직였다. 둘은 밤사이에 있었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마치 없었던 일처럼 여겼다. 유리도 그가 그런 부류의 사람인 걸 익히 알고 있기에 문제 삼지 않았다. 좋든 싫든, 계약이 종료될 때까지 붙어 지낼 사이였다.

약간의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뭐. 그래도 잘 해결됐고. 원하는 것도 받기로 약속했으니 잘 된 거지. 유리는 온실 수영장에 걸터앉은 아나스타샤를 쳐다봤다. 그는 다비드가 낳은 천사들과 어울려주며 근래에 불참한 파티 주최자와 전화하느라 바빴다.

오랜만에 만나는데 못 가서 미안하다, 보고 싶다, 다음번에 또 초대해준다면 꼭 가겠다……. 빈말처럼 들리는 말은 진심이었다. 유리는 현악기 선율같이 은은히 울리는 목소리를 즐기며 아나스타샤의 벗은 등을 구경했다. 녹음과 물, 반라의 남자가 어우러지니 한 폭의 명화였다.

온실 안으로 정장을 멀끔하게 차려입은 유리의 부하, 일리야가 들어왔다. 공주는 일리야가 자신의 손님이 아닌 것을 확인하고는 이내 천사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유리는 인사도 없이 일리야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리야가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넘겨줬다. 이번 연쇄살인 사건의 자료였다. 그는 봉투를 열어 서류를 확인했다. 서류 앞에 클립으로 꽂힌 엽서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요트는 쿠바로 보냈습니다. 레이즈빗이 남아서 마무리 지을 겁니다.”

‘요트’라면 이반이 찾아왔을 때 탔던 요트였다. 그 일은 잘 마무리됐군. 레이즈빗이 남았다니 뒤탈 없이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유리는 일리야의 보고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시체 사진을 넘겼다.

1년간 같은 수법으로 죽은 사람이 다섯이다. 처음 세 번은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뉴욕에서 먼 곳. 디트로이트 슬럼가부터 시작해서 차츰차츰 뉴욕 할렘가로 내려왔다. 모든 피해자는 알파 남성으로 고환과 알파선이 적출된 채로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과다출혈이었다. 피해자를 마취시키고 내장을 끄집어낸 것이다.

납치, 수술을 다섯 번이나 했다면 개인이 아닌 단체일 확률이 높았다. 알파를 혐오하는 단체를 들쑤셔 보면 범인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유리는 피해자 다섯의 프로필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이상한 점을 느꼈다.

세 번째 피해자까지는 약쟁이나 노숙자로 사라져도 대수롭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네 번째와 다섯 번째는 변호사와 고등학교 교사였다. 범인은 중부에서 동부로 사냥터를 옮기며 비교적 들킬 위험이 적은 피해자를 골랐다. 그런데 뉴욕으로 와서는 마음이 바뀌었나? 마치 아나스타샤를 노리기 위해 화이트칼라를 노렸다는 느낌이 강했다.

어디까지나 유리의 추측이다. 아나스타샤를 잡아들여 죽이기 위한 거대한 프로젝트로 보였다. 그는 맨 앞에 클립으로 꽂혔던 엽서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수풀 사이를 걸어 나오는 거대한 검은 고양이는 눈만 별처럼 번쩍였다.

“표범이네.”

사실 그게 표범인지 퓨마인지 재규어인지 유리는 구분하지 못했다. 그에게 가장 친숙한 고양잇과 맹수는 표범이었다. 옆에 있던 일리야가 엽서를 보더니, 대답했다.

“재규어 같은데요.”

엽서 한 장 때문에 구린 기분을 떨치지 못하던 유리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일리야를 응시했다. 그는 안 지 오래된 친구처럼 웃을 뿐이다.

“형한테 내가 어디 있다고 보고했어?”

“예.”

유리는 말없이 일리야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오시프가 내가 누구와 어떻게 있는지 아는데 이렇게 조용하다고? 오시프는 아나스타샤라면 당장이라도 나타나 입에 칼을 쑤셔 박을 위인이었다. 일리야는 웃기만 했다. 웃기만. 웃기만……. 오시프가 꾸민 판에 놀아나는 말이 됐다는 소리다.

대체 뭐 때문에 오시프가 이렇게까지 공을 들여가며 아나스타샤까지 끌어들여서 판을 벌인단 말인가? 유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안단 말이지. 내가 누구랑 있는지.”

“예.”

“네가…… 형이 붙여준 사람이니 내가 아닌 오시프한테 충성하는 건 상관 안 해. 그렇지만 네가 모시는 사람은 나잖아.”

오시프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냉큼 말하라는 압박이었으나, 일리야는 웃음으로 대답했다. 오시프가 직접 나서기 전까지는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알지 못하리라. 오시프가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반은 보스턴에 갔다고 하지만, 거짓말일 것이다.

뉴욕 어딘가에 숨어서 내가 아나스타샤를 경호하는 걸 지켜볼지도…. 대체 뭘 원하는 거지?

유리는 봉투 안에 보고서를 넣었다. 이 살인 사건은 살인 사건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디트로이트 약쟁이부터 뉴욕 변호사까지 전부 오시프의 명령 하에 죽어 나간 희생양일지도 모른다.

“살인범이 오시프야?”

유리가 묻자, 일리야는 입을 주먹으로 가리며 헛기침했다. “네.”나 다름없었다. 옆에 전말을 아는 인간이 있는데도 무슨 일인지 듣지도 못한다니. 하기야 호기심과 충성심보다 중요한 건 목숨이지. 유리는 오시프 때문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식히고자 아나스타샤를 찾았다. 그는 여전히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천사들을 돌보고 있었다.

평화로웠다. 공주와 물장구를 치는 아이들이 다비드의 천사들이 아니라 아나스타샤 본인의 천사들이었으면 더 좋았을 그림이다. 대체 저 인간은 언제 결혼할 생각인지. 유리는 오래전에 포기했던 아나스타샤의 혼사를 멋대로 그려봤다.

“보스의 소원이 이뤄졌군요.”

일리야가 뜬금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내 소원이 뭔데? 유리의 의문은 거기서부터 출발했으나 얼마 가지 못했다. 아나스타샤가 유리를 보며 환히 웃어줬기 때문이다. 유리는 질문도 잊고 수면에 반짝이는 햇빛처럼 빛나는 아나스타샤를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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