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픔을 딛고 일어서다...
뭐랄까......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새벽안개가 자욱한 아침이었다...
"엘리엇님..... 죄송해요...흐윽....!!.....
제가 자리를 비우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울먹거리며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루니에게 침대에 멍하니 앉아있던 엘리엇은 힘겹게 웃어주고자 했다.
그런데... 차마 입꼬리가 올라가질 않았다.
눈물을 흘리며 물에 헹군 수건으로 엘리엇의 얼굴을 닦아 내리던 루니가 멈칫했다.
핏자국을 닦고 또 닦아내도 그 비릿한 내음은 전혀 사라질 기미가 안보였다.
"....흑....!!......그래도 다행이에요. 무사하셔서.....
저는 정말......정말 로이떼가...."
루니는 어느덧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녀의 말이 맞아. 처음부터 내것이 아니었으니까..
스윽..!!.....
"엘리엇님!? 어딜 가시려구요?"
루니가 불안한 눈초리로 엘리엇을 향해 물었지만 엘리엇은 간밤에 자신의 치료받은 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손에는 치료받은 새하얀 붕대가 꼼꼼하게 둘러쌓여 있었다.
루니는 엘리엇의 행동에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무엇....때문에 저러시는 걸까?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루니..잠시 산책을 하려는 것일 뿐이야."
"그 몸으로...말씀이세요?"
"아.....이런 차림으로는 역시 조금 곤란할까? 꼴이 말이 아니긴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엘리엇님!!
.....정말 괜찮으시기나 한거에요?
달칵..!!
"..태...태자저하!"
루니가 놀래 재빨리 고개를 숙여 예를 취했다.
"잠시....나가주겠나?"
낮게 울리는 키레이의 말에 루니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곤
엘리엇을 한번 걱정스런 눈빛으로 쳐다본 뒤 방밖으로 빠져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안에는 키레이와 엘리엇이 나란히 공존하게 되었다.
키레이는 싸늘하게 굳어진 얼굴로 엘리엇과 얼마 남지 않은 거리에 마주서서 아무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
자칫 잘못하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게 키레이의 호흡이 불규칙해져 있었다.
항상 깔끔하고 단정하던 그의 고급스런 옷매무새도 꽤나 흩트러진 채였다.
...지끈.....!!....지끈..!!.......
엘리엇은 그자리에서 온몸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뭐라고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키레이는 서서히 엘리엇을 향해 다가갔다.
...뚜벅........뚜벅....
.......!!!!!!!.......
굳은 표정의 키레이가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그 순간에도 엘리엇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턱...!!..
뒷걸음 치다 못해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진 엘리엇은 그대로 체념한 채 고개를 돌려 마주치는 시선을 피했다.
아아..빌어먹을..!!........
...이런 모습 따윈...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
"..............."
역시....더렵혀진 나는 너에게 아무런 존재가치도 없는거겠지...?
더 이상 자신에게로 다가오지 않는 키레이의 모습에 자조적인 미소를 띄우려는 찰나였다.
..와락!!...
"....아!?....."
한순간 엄청난 힘에 이끌려 자신을 이끈 사람의 품으로 고개를 묻은 엘리엇은
놀란 숨을 들이키며 작게 신음성을 내질렀다.
"이런 몸으로... 어딜 가려고 한거지?"
움찔하는 엘리엇의 몸을 키레이의 감싸안은 팔이 더욱 거세게 죄어왔다.
"아하하....하..?..나.....난...아무렇지도 않...."
엘리엇의 작게 떨려오는 목소리에 키레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군..... 그럼 이건 뭐지?"
".....!!!!!!!!......"
스윽...
부드럽게 손등으로 엘리엇의 눈가를 훔쳐내는 키레이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에 방안에는
처음에는 미약했지만 점차로 크게 번져나가는 엘리엇의 흐느낌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난.....정말 아무렇지도 않을 자신이 있었단 말야...!!...
절대로 울지 않을꺼라고.....!!...........
네녀석이 나를 이렇게 뒤흔들어 놓기 전까진.........정말로.........울지 않을꺼라고....
왜냐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뎌내지 못할 거라는걸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우.....우윽....!!!......나는......난....."
....꽈악....!!!
....어떻게 해야 옳은 거였을까?
"끄윽.....흑.......우으..윽...!!!....."
"지금은....울어라.."
나는 스스로의 눈물 이상의 위로 따윈 알지 못한다...
......어설픈 배려만큼이나 치명적인 것은 없는 법이니까...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미안하다.....엘리엇."
.........못말리는 잔소리꾼에 수다쟁이....
또는 내곁에서 힘을 실어준 고마운 존재...
끝내는 나를 배신하고.......가장 잔인하게 내곁을 떠나간........
다시.....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는 달라질 수 있을까?
.........로이떼....
그렇게 안겨서 우는 동안 키레이는 어느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낮고 부드러운 가락으로 괜찮다라고......끊임없이.......
끊임없이... 그렇게 내 귓가로 작게 속삭여 주었다.
...아아...
..괜찮다.....라고.....
.................
............................
"....엘리엇 님!?"
키레이가 방안에서 빠져나가고 루니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며 방안으로 들어왔을 때엔
옷을 갈아입기 위해 혼자서 낑낑거리는 엘리엇이 눈에 보였다.
"아아...루니..이거 어쩌지? 끈이 제멋대로 엉켜서 도무지 풀리지가 않아."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며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엘리엇을 보며 루니는 반가움에
하마터면 크게 웃음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다행이야.......괜찮아 보이셔서....
......정말.... 다행이야.....!!....
"그 옷은 그렇게 벗는게 아니에요. 하지만 그전에 몸부터 씻으셔야죠."
원래는 둘이서 함께 했었을 말들을... 이제는 혼자서 하고 있었다.
스륵..!!
엘리엇이 혼자서 애를 먹던 끈들을 너무도 간단하게 풀러내린 루니는 재빨리
엘리엇을 방안에 따로 마련된 욕실로 밀어넣었다.
"앗..!! 루니!? 나는 그러니까;;;;"
엘리엇이 당황하며 뭐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루니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손을 다치셨잖아요. 물이 닿으면 상처가 덧날테니 제가 씻겨드릴게요!
어차피 엘리엇님이 아프셨을 때 옷을 갈아입힌 것도 저희였다구....아..!....아니..."
루니가 얼른 아차싶어 입을 다물었지만 엘리엇은 그저 히죽하니 웃어보일 뿐이었다.
".....루니..?"
"네.....말씀하세요."
자신의 눈치를 보며 가라앉은 루니의 목소리에 엘리엇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말야.....언제까지 내 옷만 벗기고 있을거야?
사실 나 무지 부끄럽다구..."
.....화들짝...!!!!!!.........
"어머!! 그...그런...!! 죄송해요!!
제가 잠시 한눈을.....!!!....."
어쩔줄 몰라 하는 루니의 당황스런 목소리에 엘리엇이 더이상 참지 못하고 키득거리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키득.....킥.......푸....푸하하...!!! 아하하...!!! 큭...큭...!!! 루니...!! 푸훕..!!"
그제서야 루니는 엘리엇이 자신을 놀렸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아앗! 너무 하세요. 엘리엇님!!
두고보세요! 오늘 최고로 깨끗하게 만들어 드릴테니까요!!"
"...히익...!!"
그제야 엘리엇이 이크하며 웃음을 멈췄지만 이미 루니는 눈을 치켜뜬 샐쭉한 표정으로
엘리엇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아.....아하하....하....루니...진정하는게 어때? 이...이봐 잠깐만...!!! 히엑!!!!!"
"천만에요! 최고로 멋.지.게! 만들어 드릴테니 기대하세요!!"
아아......고마워.....루니............너에게.......감사해........정말로....
....아앗! 가만히 계세요!! 다른 쪽 부분은 못 닦아 드렸단 말이에요!!!
....후에엑!!! 잘못했어 루니!!!
.....어림도 없어욧!!!!!!!!!!!!
한동안 욕실안은 루니와 엘리엇이 투닥거리는 소리로 가득 울려퍼졌다.
........
...잊지는 않았어....
하지만 노력하고 있어.....정말로 내자신 스스로가 나약해 지지 않도록 말야...
...아무일도 없었던건 아니었지만 모두 툭툭 털어버리고
금새라도 또 다시 이렇게 웃을 수 있도록......!!....
괜찮아.......정말이야.....
...나는 괜찮아...
누군가가 나에게 괜찮다고.....말해줬으니까.....
...............
.........................
"아아...결국엔 루니가 다 해줘버렸네...;;;;..!!....."
새로 입혀진 자신의 옷을 돌아보며 엘리엇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엇님! 이건 어떨까요?"
아아.....이젠 루니인건가...?
부산스럽게 자신에게 이것저것을 갖다대며 서두르는 기색의 루니를 보는
엘리엇의 입가로 조금은 씁쓰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 후회는...안해..
이 모든 것들을 결코...!!!....
"나 참!! 정말 태평하시다니까요? 오늘은 무척 중요한 날이잖아요."
흐음.....생각해보면 루니는 이렇게 말이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
"다른 분들은 모두 화려하게 꾸미고 나오실텐데 장신구도 모두 마다하시고... 정말 괜찮을까요?"
곁에서 불안하게 중얼거리는 루니를 향해 엘리엇은 짐짓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불렀다.
"이봐 루니!!"
루니는 엘리엇의 얼굴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는 이내 찔끔해서 주춤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해요. 엘리엇님. 제가 너무.."
그런 그녀의 말에 엘리엇은 고개를 휘저었다.
"아니! 그것말고 말야.....
흠흠!!..... 난 이미 존재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몸이라고!!"
"...네에..!?.."
아앗!!! 루니 너 그 표정은 뭐지?
설마 내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거냐!?
"이것 봐! 잘 보라구!! 나같이 완벽한 녀석이 어디있나!!"
"네...네...인정해요. 확실히 지금의 엘리엇님은 제가 보기에도 무척 아름다우시니까요."
헤.....에!? 물론이지...!!!가 아니라..;;;;;;;
맙소사.....방금 뭐...라고!?
"그....그런..!!....."
핼쓱하게 질린 엘리엇을 보며 루니는 괘념치 않은채 마지막으로 엘리엇에게 카운트어택을 던졌다.
"아마 카이다 제국에서 제일 아.름.다.우.실 꺼에요!!!"
"헉..!!..."
후후.. 저를 놀린 대가에요. 엘리엇님!!
충격을 받아 잠시간 멍해진 엘리엇을 보며 그녀는 작게 혀를 내밀고는 소리죽여 웃었다.
뭐...틀린말도 아니니까 전 아무 잘못도 없다구요.
"앗!! 이제 곧 시작될지도 모르겠어요!! 어서 가세요 엘리엇님!!"
루니는 서둘러서 엘리엇을 문밖으로 밀어넣었다.
"잘다녀오세요. 꼭 태자저하의 반려로 간택되셔야 해요!! 엘리엇님!!"
.....아아.....루니....;;;;;;........
얼떨결에 밀려 앞으로 나아가던 엘리엇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이 머물러 있던 방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에는 루니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엘리엇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웃으며 말했다.
"이만...다녀올께!!"
.....자.....그럼 이제, 어디한번 가보실까..?......
.................
...............................
화려한 샹들리에와 아름다운 음악..
평소보다 배로 들뜬 분위기 속에서 여느때보다 더욱 차려입은 사람들이 연회홀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이번에 거행하는 반려선임식에서 간택될 후보자들을 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카이다의 축연기간 마지막 날에 뽑히게 될 황자의 반려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들의 온갖 상상력과 추측을 자아내게 하는 최고의 관심사였다.
"태자저하께선 평소에도 그다지 감정을 내비취지 않던 분이니..."
"그러게요. 게다가 이번 후보자들은 워낙 뛰어난 가문에서 많이 선발되서... 그분이 누굴 택하실지.."
"다이몬 가문의 소르틴 백작은 어떨까요?"
"어머!! 어림도 없어요.
그보다도 제가 따로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거의 확실한 사람의 말을 빌린거니까 틀림없을 거에요."
평소에도 말이 많았었지만 아주 틀린말을 했던 적도 없던 도체자작부인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소문에 의하면 유토공작님의 영애인 세이린양으로 거의 확정되었다고 하던데요?
말을 들어보니 폐하께서 유토공작님의 영애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내내 마음에 드는 표정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고 하니..."
그녀의 말에 주위에 몰린 사람들의 곳곳에서 짧은 감탄성들이 퍼져나왔다.
은연중에 그들도 나름대로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유토공작가의 영애...세이린!!!
외모가 아름다운 것은 물론이요, 카이다내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는 4대 재력가문들 중 하나인 유토가의 딸이자
성녀라는 별칭이 따라 붙을 만큼 마음씨가 곱기로 소문난 그녀였다.
막말로 다른 반려후보들도 뒤쳐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만큼 완벽한 조건을 갖추긴 힘들었던 것이었다.
"맞는 말이에요. 실은 저도 유토공작님의 영애인 세이린양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두말하면 잔소리죠. 게다가 도체부인의 말에 따르면 폐하의 마음에도 들었다고 하니..
아무리 무심하다는 키레이저하께서도 쉽게 지나칠 순 없으실껄요?"
"앗!! 유토공작님과 세이린양이 들어오고 있어요!!"
"어쩜...저리도 예쁘게 꾸몄을까!?"
막 홀안으로 들어서는 세이린은 자주빛 비단에 곳곳에 붉은 루비가 매달려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들어섰다.
머리에 매달린 갖가지 금빛 장신구들이 그녀를 더욱 화려하게 만들어 주었다.
입가에 살풋이 미소를 띄며 사뿐사뿐 들어서는 그녀를 향해 주위에서 크고 작은 탄성들이 끊이지를 않았다.
그 뒤로 다른 후보들도 서서히 입장하고 있었지만 세이린만큼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지는 못했다.
반려후보자들을 위해 따로 준비된 의석에 세이린이 앉고 그 뒤를 이어 차례차례 다른 후보자들이 들어섰다.
세이린은 평소보다 더욱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하느라 입가에 경련이 일 지경이었지만
앞으로의 보상을 생각한다면 그 정도야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었다.
세이린은 자신과 나란히 앉은 다른 반려후보자들을 보며 속으로 차게 비웃었다.
제깟것들이 아무리 호박에 줄을 그어봐야 수박이 되겠어?
너희들은 그저 내 들러리나 서면 그걸로 족해!!.....후후...!!......
그렇잖아도 그곳에 앉아있던 그들은 세이린의 위세에 기가 눌려 자신들 본래의 매력을
반도 못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겉으로 표현할 순 없었지만 나름대로 세이렌을 향해 간간히 원망스런 눈빛과 함께
언짢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아무리 완벽하다고 소문이 난 그녀라지만 이런 상황에선
서로 황자의 반려자리를 두고 경쟁을 벌이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득될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중에는 세이린과 함께 파로키학원을 다녔던 이들도 여럿 있었다.
-세크레틴 황자에게 갖은 아양을 다 떨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떫은 감을 씹은 마냥 씁쓸함이 그들의 목언저리로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고 홀안으로 울려퍼지던 음악소리들이 멈춤과 동시에 단상위로 황제와
이번 반려선임식의 당사자인 키레이 황자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와 동시에 웅성거렸던 연회홀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황제는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더니 곧 입을 열었다.
"오늘은 그대들에게 이미 통보했듯이 황자의 반려를 간택하는 날이다.
제국의 법에 따라 나는 황자가 택한 반려를 진심으로 축하해줄 생각이니
그대들 또한 기쁜 마음으로 이순간들을 함께 축복해줄 수 있는 자리가 되길 바라겠다."
황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연회홀에 자리하던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숙여 예를 취했다.
세이린 역시 고개를 숙이며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 빈자리!?......
그러던 그녀의 눈에 반려후보석의 한자리가 아직 비워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누구지?......
그러나 이내 세이린의 눈동자에 작게 이채가 띄며 슬그머니 가느다란 미소가 걸쳐졌다.
...그러고 보니 이곳으로 들어왔던 내내 기분이 좋았었지....
후후...그 천한계집이 결국엔 일을 저질른 모양이야?
사실 세이린은 로이떼가 엘리엇의 말고삐에 칼집을 내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끝내 모른척했다.
내가 왜 그 사실을 알려줬어야 하지!?
생각해보면 내가 한짓도 아니고 말야.... 게다가 난 친절하게도 몸소 경고까지 해줬는데
알아채지 못한건 그쪽이니까.....오호호....호.....!!.....
홀안에 음악이 다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식이 시작되기 전의 여유를 만끽하며 즐기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분위기가 무르익고 때가 되자 단상앞에 서 있던 황제의 보자관인 슈벤공작은 악단을 향해 손짓했다.
지휘자가 알아듣고 음악이 멈추자 사람들은 그제야 때가 되었음을 알아챘다.
"그럼 반려후보들은 이 앞으로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말에 따라 반려후보자들이 단상 앞으로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세이린 역시 한껏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걸어 나갔다.
............
"어떻게 된거야!? 엘리엇이 아직까지도 안보이잖아!?"
따로 마련된 귀빈석에서 누군가의 놀란듯한 목소리가 작게 튀어나왔다.
".....일단 기다려보지."
옆에서 어르는 듯이 차분한 목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분명 세이리어가의 후계자도 반려후보들 중 하나라고 하지 않았었나?"
꽤나 흥분했는지 평소와는 다르게 슬쩍 높아지는 그 목소리에 곁에 있던
사내가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글쎄.. 진정해 이안. 네가 아는 사실은 정확하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건 뭔가 사정이 있는거겠지.
아니면... 키레이황자의 '반려'가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걸지도.."
뭔가 의미심장하게 마지막 말을 잇는 세크레틴을 보며 이안은 불안하게 안색을 굳혔다.
도대체 저 단상위에 앉아 있는 키레이녀석이나 이대로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엘리엇녀석이나..
.......무슨 생각들인거야!!?.....
무엇보다 제일 마음에 안드는 것은 자신의 곁에서 느긋게 술잔을 들고
맛을 음미하는 세크레틴 황자였다.
"아아..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아줘. 이안..
그렇잖아도 카이다의 사절단으로 온뒤엔 늘 욕구불만이니까."
...뭐.....뭐야? 이 망할 자식이!!!!!!
그대로 얼굴이 붉어져서는 자신을 노려보는 이안의 모습에 태연히 미소짓고 있는 세크레틴이었지만
내심 그도 궁금하다고 느끼던 차였다.
어쩌면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어 질지도 모르겠군..쿡..!!..
.................
..............................
"미레아황녀님!!! 여기에 이러고 계시면 어떡하셔요. 벌써 태자저하의 반려선임식이 시작되었을 텐데...!!"
"맞습니다. 황녀님...!! 어서 서두르셔야 합니다."
곁에서 안절부절하며 자신에게 사정을 하는 시녀들을 못본척 미레아는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황녀님 제발...!!"
뒤에서 그들이 애원조로 자신을 부름에도 불구하고 미레아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흥!! 아무리 사정하고 애원해보라지!!
털끝하나 까딱하지 않을꺼니까!!
미레아는 자신의 뒤를 쫒아오며 그녀를 설득하려는 무리들을 보고는 더욱 뾰루퉁이 표정을 굳혔다.
웃기지마!! 오라버니의 반려를 뽑는 자리에 내가 갈것 같아!?
어느 멍청한 귀족들 중 한명을 고르려는 거겠지!!
흥!! 나는 오라버니의 반려따윈 절대 인정못하니까 나중에라도 두고두고 괴롭혀 줄테다!!....
....내곁에서 오라버니를 뺏어가려는 골빈 반려후보들 따위!!!!.....
탁탁탁....!!!!!......파삭..!!..
"아앗 황녀님!!!"
"황녀님 어디 계십니까!?"
그들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미레아는 재빨리 그들의 눈을 피해 잘 가꿔진 황궁의 정원안 수풀뒤로 몸을 숨겼다.
메~롱이다!! 누가 순순히 따라갈줄 알아!?
그렇게 한동안 몸을 사리고 있던 미레아는 이내 주변이 잠잠해지자 슬그머니 고개를 빼어
그들이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여기에는 황녀가 없다고 생각한건지 모두 어디로 가고 아무도 없었다.
"흥!! 바보같으니!!"
미레아가 그들을 비웃으며 자신의 성공적인 도피를 축하하려는 순간이었다.
"아.....아..정말 바보같죠?"
......!!!!!!!!!!!!!!..........
미레아는 뒤에서 들려온 맑은 미성에 놀라 하마터면 크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누.....누구냐!?"
미레아가 짐짓 날카로운 눈초리로 돌아서서 혹여라도 시종들에게 들킬까봐
차마 크게는 소리치지 못하고 작게 윽박지른 곳에는 어디서 많이 본듯한 은발의 남자가
난처한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다닌건지 엉클어진 머리칼 위엔 나뭇잎도 하나 붙어 있었고
본래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을 복장들도 꽤나 흩트러져 있었다.
.....이.......이녀석은....!!?
"....넌....그때 그 녀석!? 그러니까.....에.....엘리엇이었던가?..."
미레아가 자신을 지목하며 소리치자 엘리엇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얼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엑!? 어떻게 제 이름을..."
.....빠직....!!!.......
"이 무례한 녀석!! 감히 내얼굴도 못알아보다니!!!!!!!!"
아...아...? 이 답지않게 고압적이고 묘하게 익숙한 호통의 주인공은...
"미레아황...녀님 이십니까?"
"그래!! 이 바보야!!!!"
켁...!!!! 못본새 더욱 많이 터프해져 버렸구나아아.....;;;;;.......
게다가 이렇게나 성장했으니....당연히 몰라볼 수밖에......;;;;;......
리스녀석도......그렇고 이 미레아황녀도 그렇고....요새 애들은 왜이렇게 쑥쑥 크는거지!?
"아......하하.....오랜.....만이지요?"
식은땀을 삐질거리며 작게 손을 흔드는 엘리엇을 본 미레아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품으로 달려들었다.
......와락....!!!!......
"에에에!!? 황녀님?"
"그 동안... 어디에 있었던거야 너!!!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 버려서 정말....재미없었단 말야!!!"
뭐라고 계속 한바탕 큰소리를 들을 줄 알았던 엘리엇은 자신의 품에 달려든 황녀를
놀란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자신의 품에 안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녀석에게 읽어달라고 명령할 책들도 잔뜩 쌓아뒀었단 말야.
그런데 감히 내 허락도 안 받고 제멋대로 사라져!? 얼마나....얼마나 찾았는데...!!..."
...멈칫.....!!!.........
하하....;;;; 설마 또 폭풍기사와 루비공주 같은 것들....말인가?
그래도...찾아줬었구나. 이 꼬마황녀님이 나를...
"그런데 이런 곳에서 무얼하고 계셨나요?"
.....움찔...!!...
엘리엇의 품에 안겨있던 미레아의 몸이 떨어져 나가면서 그녀의 얼굴위로 당황스러움이 스쳤다.
"그...그러는 넌 이런곳에서 무얼하고 있었던거야!!?
넌 분명히 그때 그 녀석의 시종이라고 하지 않았어?"
재빨리 표정을 싹바꾸고 되려 자신에게 소리치는 미레아를 보며 엘리엇은 작게 웃어보였다.
이 꼬마 황녀님께선 나에게 뭔가를 감추려는 모양인가 보군...
아아...그렇다고 여기서 아는체를 했다간 이 꼬마 황녀의 자존심이 상할테니.....
"실은 길을 잃었습니다. 이곳엔 처음인데 황궁이 워낙 넓어서 어디가 어딘지 알수가 없네요.
오늘따라 주위에 시종들도 눈에 띄지 않고...."
민망한 듯 쑥쓰럽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이는 엘리엇을 보던 미레아의 두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곧 입가에 의기양양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래? 하긴! 너같이 처음온 사람들이 금새 원하는 곳을 찾아갈 수 있을 만큼
황궁은 만만한 곳이 아니니까! 마침 나도 적적하던 차였는데 잘됐구나!!
내가 특별히 길안내를 해주도록 하마. 영광으로 알도록!!"
.....후후...!!! 황궁 길안내쯤이야 눈감고도 할 수 있는 일이지.
게다가 어차피 방금 말한것처럼 시간도 남아도니까...
"황녀님께서 직....접이요?"
엘리엇이 꽤나 놀란 표정으로 떫떠름하게 묻자 미레아가 금새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뭐야!? 네깟녀석이 설마 싫다고 거절하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몸소 안내해주겠다는데 말야!!"
"그런건 아니지만..."
한동안 우물거리던 엘리엇의 손을 미레아가 잽싸게 낚아챘다.
"....아윽..!!..."
그러던 그녀는 엘리엇이 갑작스레 신음을 내지르자 놀란 눈으로 자신이 잡은 엘리엇의 손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뭐야! 손을 다친거였어?"
방금 전과는 달리 무척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미레아의 모습에
문득 자신의 귓가에 울리던 나직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떠올라 한순간
엘리엇의 얼굴이 붉어졌다.
왜 하필 지금 그생각이...!!!
"괜찮습니다. 그리 심한건 아니에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손가락들을 움직이며 대수롭지 않은 마냥 미소를 짓는 엘리엇이었지만
사실은 미레아가 짚었던 부분이 쓰라려서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무는 엘리엇이었다.
그에 미레아는 안심한 듯 작게 숨을 내쉬었지만..
"그런데 어딜 찾아가면 되는거냐? 내가 데려다 줄테니까."
"저.....그러니까...."
"그러니까..!?"
으음....;;; 조금 곤란한데;;;
이 꼬마황녀가 내가 귀족이 되었다는 걸 알면 어떻게 될지....;;;;
"빨리 대답해!! 답답하구나!!"
.....하아.....어쩔 수 없나?
"그러니까 연회홀이 어딘지 알고 계십니까?"
"여....연회홀!!?"
다른 곳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이녀석은 연회홀로 가려는거야!?
갑작스레 표정이 굳어진 미레아를 보며 엘리엇 또한 떨떠름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곳엔 어째서 가려는거지?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곳이다. 그곳은..!!"
아아......역시...!!.....
"하지만 저는 꼭 가야합니다."
미레아는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엘리엇이 자신에게 억지를 쓰는 것이라 생각하고
뭐라고 따끔하게 한소리를 하기위해 분기탱전 했지만 그뒤에 이어지는 엘리엇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왜냐면....전 후작이거든요.."
뭐.....뭐야!!!!!??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녀석이 후작이라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을 올려다 보는 미레아를 보며 엘리엇은 뻘쭘하게 시선을 피했다.
아아;;;; 게다가 반려후보자들 중 한명이라는 사실까지 말하면 난리나겠군....
"그럴.....수가...!!...."
엘리엇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곤 비장한 표정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반려후보자이기도 하구요...."
.....!!!!!!!!!!!!!!!!........
"반려후보라니!!!!! 네녀석이!!!!!??"
"어....어쩌다보니까요....;;;"
방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치 배로 충격을 먹은 듯한 미레아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엘리엇은 더욱 난감한 웃음을 흘려야 했다.
"마.....말도안돼!!!!!!!!!!!!"
네....네...아무렴요;; 말도 안되고 말구요.....;;;;;;;;
하하....나도 실은 꽤나 곤욕스럽다구......하필....이면.....;;;;......
"그런.....그....."
"역시...곤란하겠지요? 하하....역시 길은 제스스로 찾아야 할 것 같네요. 그럼..."
엘리엇이 씁쓰름한 표정으로 미레아를 향해 작별인사를 하고 가려던 순간이었다.
"자...잠깐!!!"
"..!?.."
"내가 곤란하다고 했었느냐!?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러면서도 속으론 곤란해~!! 무지무지 곤란하다!!를 몇번이고 외치는 미레아였다.
아아...하지만 자신은 제국의 황녀가 아니었던가?
모름지기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나중에 험한꼴을 당하게 되는 법이라고 이제껏
자신이 읽은 책들에도 적혀있었다.
하지만 게중엔 오라버니의 반려선임식에 참석하지 않으면 큰일난다는 말은 없었는데...
.....어떻게 할까....?.......
"날 따라와라!! 데려다 줄테니까!"
일이야 어찌되었건 이미 엎지러진 물....
".....아..!?......"
의외라는 듯 두눈이 동그래진 엘리엇을 살펴보던 미레아가 이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런데 너 정말 반려후보자가 맞긴 한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무것도 꾸미지않고 그대로 갈생각인거냐!?"
엘리엇은 갑작스레 자신을 향해 미간을 찌뿌리며 소리치는 미레아를 보며 주춤했다.
"...전....그닥.......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뭐얏!!!??? 그렇다면 정말로 그꼴로 반려선임식에 참석하려 했단 말이더냐!!!??"
".....말하자면.....그렇죠...아...하하......하...;;;;......."
미레아의 표정이 점차 심상치 않게 굳어가는 것을 본 엘리엇은 등뒤로 식은땀을 흘렸다.
아아.....;;; 저 무서운 표정이라니...;;.......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루니의 말대로 제대로 꾸미고 올껄 그랬나..;;;;
"너...!!!!!!"
....움찔...!!........
미레아는 엘리엇을 한동안 못마땅하게 쳐다보더니 이내 자신의 머리에 차고 있던
깊고 푸른색의 커다란 사파이어가 세심하게 세공되어 촘촘히 박혀있는 상당히 고급스런 띠모양의 쥬얼리를 떼어냈다.
"휴우....이 바보같으니..!!
얼굴도 못생긴 네녀석이 이런것도 안하면 오라버니가 과연 눈길이나 주실것 같아?
하연간.....진짜로 바보라니까. 너무 높으니까 고개 좀 숙여봐!!!"
.......미레아.....황녀...?
"빨리 숙여!!! 이러고 있으면 늦는단말야!!"
엘리엇이 머뭇거리며 고개를 숙이자 미레아는 한숨을 내쉬며 부드럽게 쓸리는 은발위에 붙어있던
나뭇잎을 떼어내고 자신의 머리에서 떼어낸 장신구로 엘리엇의 머리칼들을 조심스레 정리하여 꾸며주었다.
"아예 너에게 주는건 아니고 잠시 잠깐 빌려주는 거니까 그런줄 알고 있거라!!!
어차피 난 그것말고도 다른걸 잔뜩 차고 있으니까..!!"
퉁명스레 소리친 미레아는 그대로 엘리엇의 손을 낚아채려다 말고 멈칫했다.
그리고는 붕대가 감기지 않은 손가락을 조심스레 자신의 손으로 감싸쥐었다.
원래 이런 상황에선 좀 더 나이가 많고 남자인 엘리엇이 미레아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게
보편적인 거였겠지만 미레아는 그런 것 따윈 전혀 게의치 않았고 엘리엇은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황궁의 지리를 전혀 모른다는 약점으로 인해 어설픈 미소를 띄우며 그대로 끌려갔다.
어쩐지 구도가 바뀌어 버린 두사람이었지만 썩 나쁘지만도 않은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