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략 난감..
"이제 곧 오라버니는 파로키학원을 졸업하게 되시잖아. 휴우...솔직히 조금은 후회가 되는구나.
차라리 황궁에 계속 있었으면 앞으로 오라버니와 좀 더 많이 있을 수 있을텐데! 이미 이곳으로
와버리긴 했지만..! 앞으로 5년이나 더 이 학원에 머무르게 되는거니!!"
키레이가 수업을 받으러 가고 난 후면 어김없이 이 꼬마황녀가 찾아들었다.
너는 수업받으러 안가니?
라고......물어봤자 이미 갈 눈치가 아니다.
아직 철딱서니 없는 어린 황녀니....그저 그러려니 하면서도 황녀를 보면
함께 떠오르는 녀석 생각에 조금 우울해지기도 했다.
"저기...."
"왜 그러느냐? 말해봐라."
내가 잠시 뜸을 들이자 황녀가 궁금하단 표정으로 재촉하기 시작했다.
"뭐하느냐!? 말을 꺼냈으면 빨리 말해봐라."
나는 한숨을 내쉬고 그녀의 눈치를 보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전에 제가 모시고 있던 리스님은....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혹시 알고 계신가 해서..."
리스녀석의 얘기가 나오자 황녀의 안색이 싹 굳었다.
하긴....전에 그렇게 맞닥뜨리고 싸웠으니........하아....!!..........
황녀는 무척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입술을 삐죽이 내밀고 말했다.
"흥! 그런녀석 알게 뭐냐!? 너 없이도 잘 지내고 있어...!!"
잠시 어딘가 석연찮은 표정을 짓던 황녀이긴 했지만 그녀의 말에 나는 천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 없이도 잘 지내고 있는가 보구나.......다행이다. 리스..
한편 엘리엇이 안도하는 모습을 보던 미레아는 조금은 찔리는 구석에 슬쩍 시선을 돌렸다.
..뭐......내가 틀린말 한것도 아니니까....!
안색이 어둡긴 했어도 지내는데 지장만 없으면 되는거 아냐?
어차피 눈앞의 이 엘리엇이란 녀석은 그 녀석의 시종이었다니까..분명 일할 녀석은 따로 구해놨겠지.
어쩌다가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리스의 안색이 무척이나 굳어져 있던게 생각난 미레아는
사실대로 말할까 생각하면서도 재빨리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싫어......!! 나도 이 녀석이......무지 좋으니까.....!!.........
...리스란 녀석에겐......나중에........나중에 가르쳐 줄꺼야.........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황녀저하?"
엘리엇이 의아한 듯 자신을 바라보자 미레아는 움찔하더니 곧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책을 내밀었다.
"오늘은 이걸 가져왔으니 읽어줘!"
"아..? 이거요? 예....물론 그래야지요....."
엘리엇은 그녀가 내밀은 책표지를 보고 튀어 나오려는 신음을 삼켰다.
-불타는 황혼녘의 폭풍기사와 루비공주-
기사와.......공주라...!!
....하긴 뭐.......이나이 때는 한참 이런거 좋아할 때이기도 하지;;;;.....큼...큼..!!
게다가 이 카이다라는 제국이 은근슬쩍 로맨틱한 구석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
어디 한번 볼까....?
간신히 표정을 진정시키고 겉표지를 넘긴뒤 속표지를 들여다 보는 순간
엘리엇의 등뒤로 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이거......어디서 가져오신 겁니까?"
엘리엇의 물음에 미레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왜그러느냐? 나의 전속시녀인 마레뇨가 요새 최신유행 책이라면서 건네준 건데?"
.......도대체가......이게 어딜봐서 이런 꼬마가 읽을만한 책이라는 거냐!!!!!
크아아아아!!! 맙소사;;;;; 그 시녀라는 아이는 도대체;;;;;
"나도 한번 꼭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다!! 우리반 여자애들도 다 한번씩 읽어본 것이라 들었다."
.....요새;; 카이다 제국의 꼬마들은 정신연령이.....가히........상상을 초월하는군.....
"....꼭 보시고 싶으십니까?"
"당연하다! 보고싶으니 가져온게 아니냐!?"
.....으윽.....!!
"이런 책은 호...혼자서 읽으심이......"
최대한 난감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호소하듯 말했지만 그녀는 인정사정없이 매몰차게 대답했다.
"싫다!! 네가 꼭 읽어줬음 좋겠다!! 설마 내 명을 거역하려는건 아니겠지!?"
.........그럴리가요............어흑흑흑..........하지만 황녀저하....이........이건.....!!!!
더 이상 말해봤자 그녀가 양보하지 않을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얄짤없이 책을 들어올렸다.
그리고...........읽기 시작했다.......
........어흑흑.....!!!!
"......오렌지 빛 석양에 흩날리는 꽃잎들이 강물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는 강가에 세워진 어느 성 위에....."
.......이렇게 시작한 이야기는 그럭저럭 잘 진행되고 있었다.
"오오!! 저 아름다운 아가씨는 도대체 누구더냐! 오달!! 저 돼지꼬리같이 곱슬거리는 머리!!
수박씨 처럼 작지만 윤기나는 눈동자!! 내말의 누런이와 같은 피부의 저 아가씨는 누구더냐!!!
이 내 가슴에 불을 싸질러 석유를 붓고 더불어 부채질까지 하게 만드는 저 아가씨는 도대체 누구란 말이냐!!"
"............."
"오랜 방황속에 드디어 그녀를 만났구나! 나의 심장이여!! 나의 심장이여!! 이제는 그녀만을 이 내 품에
고이 간직하고 다시는 사그러들지 않을 정렬속으로 이 내 몸을 다 바쳐 그녀만을 위하리로다!!!"
......크으......내가 읽는 말이지만 정말 민망하군...;;;;;;
아무래도 황녀를 보니 몹시나 집중한 듯 하여 차마 그런 내색을 보일 수 없었지만;;;;;
뭐....수많은 로맨틱 소설들이 그렇고 그렇듯이 이 이야기도 별 다를바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대충 축약하자면 공주가 있었고 그 공주를 사랑한 능력이 뛰어난 평민기사에 관한 이야기였다.
평민기사는 이곳저곳에서 공을 세웠고 곧 공주의 환심을 사게 되어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는....
카이다제국 내에서는 아주 흔하다 못해 진부한 스토리의 이야기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책들이 불티나게 팔리는 것은 아마도 현실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일지도.....
하다못해 이 꼬마황녀조차 이런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지 않았는가?
그.....그런데;;;; 드...드디어 우려하던 그 빌어먹을 대목이 나타났다;;;;;;;;;;
"....하르켄......오....하르켄..........정말 당신인가요?
....그렇다면........정말 제 눈앞에 보이는 자가 바로 당신이라면.........오늘 밤은 다....당신의...!!"
"왜 그러느냐? 이제까지 잘 읽다가! 똑바로 읽지 못하겠느냐!?"
옆에서 미레아가 짜증을 부리며 잘 좀 읽어보라고 했지만.......크....크억!! 이런걸 어떻게 잘 읽어!
게다가;;;; 게다가;;;;;;; 이런걸 보면서 눈하나 깜짝 않하는 꼬마황녀라니!!!
"빨리 읽어라! 꾸물대지 말고"
어흑흑흑.....!!!
"예...예........다...당신의 뜨거운 품에 안겨..서..........에.....그러니까 안겨서........."
부들...부들.......!!!
급기야는 책을 들고 떨던 내 손은 탁! 소리와 함께 책을 덮어버렸다.
"앗!! 갑자기 왜 책을 덮어버린 것이더냐!?"
옆에서 황녀가 항의하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어설프게나마 웃으면서
재빨리 말꼬리를 돌렸다.
......제발...걸려들어라.......!!
"정말 멋진 이야기지요? 황녀님..? 하하....카이다제국은 정말 좋은 곳이에요.
이렇게 아름다운 사랑이 실현 될수도 있는 곳이니까요."
.......물론 가능성은 가지고 있지.....실현될 수 있는.......
....하지만.....그중 얼마나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아니.......과연 하려고 하는 자들이 있을까?
아래층에서야 넘치고 넘치지만......과연 지배층에 있는 그들이 쉽사리 넘어올까?
사랑에 모든 걸 다 바칠 수 있을만큼 정열적으로?
"당연하지! 무엇보다도 카이다제국은 물론이고 모든 대륙의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공통조약에 이렇게 씌여있지 않느냐? 단 혼인은 국적과 성별 신분을 초월하고 원하는 상대와
맺을 수 있다!! 물론.......우리 오라버니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시지!
하지만 아마 정해진 반려후보자들 중 하나를 뽑으실것 같지만..."
........그래......반려는 모든 조건을 뛰어넘어 자신이 원하는 상대와 맺을 수 있다.....
정말 로맨틱하고 환상적인 법이지.........단...현실가능성은 아무래도 무척이나 많.이. 떨어지지만...
그건.....그저 허울좋은 명목상의 법일 뿐....
...초월할 수 있는 사랑을............하기엔 너무나 가식이 가득한 곳이라서......푸후후...!!
".....그래요........정말 멋진 일이지요..."
심장 부근이 싸하니 식어갔다.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나 버렸어.....
아니.......잊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지..........
"갑자기 왜 그러느냐?"
미레아의 물음에 엘리엇의 입가에 서글픈 웃음이 번져 나갔다.
"아.....황녀저하...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는데요?
죄송하지만......괜찮으시다면......좀 쉬고 싶습니다....."
방금전과는 달리 확연히 눈에 띌 정도로 숙연해진 엘리엇을 바라본 황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러도록 해라."
마지막 부분을 마저 읽어달라고 조를 심산이었던 미레아는 천천히 책을 내려다 보았다.
....아무래도 나머지 부분은 마레뇨에게 읽어 달라고 해야겠다.
책을 들고 어딘지 조금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가는
미레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엘리엇은 천천히 주먹을 꽉쥐었다.
.....결국.......피할 수 없는거겠지..
그래......언젠가는 해야 할 말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