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라진 것과 움직이는 것
"으윽......흑...!!! 흐윽..!!"
"저....리스....무슨일이야? 울지만 말고 말 좀 해봐."
벌써 며칠 째 저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리스는 수업에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채 침대 위에만 누워 울고 있었다.
하다못해 리스의 친구들이 찾아가서 무슨일이냐고 묻기도하고 제발 말 좀 해보라고
사정하기 조차 했지만 리스는 울기만 할 뿐 꿈쩍도 안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리스의 친구 중 한명인 앤비가 찾아와서 묻고있는 것이었다.
한참을 서럽게 울기만하고 있는 리스를 보니 앤비의 표정도 그다지 밝지만은 않았다.
리스가 이렇게 울때도 있다니...처음에 나에게 말을 걸어줄 땐 무척이나 발고 명랑한
아이인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리스..."
"사라졌어......"
"........뭐?.."
한참을 울먹이던 리스가 힘겹게 입술을 떼며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태로 말했다.
".......사라져 버렸어...엘리엇이..........엘리엇이 나를 두고 사라져 버렸어."
......엘리엇..?
"전에 봤던 너의 시종을 말하는거야?"
앤비의 물음에 리스는 다시 울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없이 사라졌다구! 난 엘리엇이 처음에 장난치는 줄 알고....그랬는데........!!
아니면 나에게 뭔가 엄청 실망한걸까? 그렇지 않고서는...우흑... 이곳저곳 매일매일 찾아 다녔는데도
엘리엇을 찾을 수 없었어......!!"
그때 보았던 황녀가 엘리엇을 데려간게 아닐까 해서 찾아가 보기까지 했는데!!
...그 이상한 황녀도 모른다고 하고... 되려 따져 묻기까지!!
"....흐윽....흑...!!!....."
다시 고개를 파묻고 울기 시작하는 리스를 보며 앤비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시종일 뿐인데.....그렇게까지 마음 쓸 필요가 있어?"
앤비의 물음에 리스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엘리엇은 나에게 시종따위가 아니란 말이야!! 가끔씩 툴툴거리긴 해도
나에게 무척이나 다정하게 속삭여 주었다구!! 게다가....."
-그러니까.........앞으로도 내옆에만 있어줄꺼지? 엘리엇!?-
-......리스님께서 원하신다면.........그럴게요...-
"원하면 언제든지 내 옆에만 있어주기로 약속까지 했는데........그랬는데....."
앤비는 아무말 없이 한숨을 내쉬며 또 다시 배게에 고개를 파묻고 울고 있는 리스를 보고 방문을 빠져나왔다.
도무지 앤비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종 한명이 사라진게 그렇게 가슴 아픈 일이었을까...?
앤비는 서서히 고개를 저으며 발걸음을 떼었다.
혼자 남겨진 리스의 두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원하면....언제든지 내 옆에 있어준다고 했잖아.......그런데...흑...흐윽.."
....어디로 가버린거야....엘리엇...!!
퍽.....철퍽...!! 퍽..!!
"야! 키릭...왜 그래? 요새 너 은근히 힘이 없다?"
곁에 있던 같은 시종인 노마가 슬쩍 묻자 빨래를 발로 뭉창 밟아 뭉그러 뜨리고 있던 키릭이 덜컥 소리쳤다.
"야!! 거긴 그렇게 밟는게 아니야!! 이렇게!! 이렇게!!"
퍽퍽!!! 철퍽!!...퍽...!!!
"으앗! 물 튀잖아!!"
힘이 없긴 누가 없다는거야.... 이렇게 힘만 넘쳐 나는데.
"몰라....요새 우리 주인님이 엄청 성질부리고 있다고. 같이 대련해주던 상대가 사라졌다나 뭐라나...
아묻튼 덕분에 눈치만 보고 살고있다고. 휴우.....!!"
키릭의 말에 노마는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너희 주인님 정도라면 대련상대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 않아? 그런데 왜...?"
"다른 놈들은 성에 안찬댄다. 이번에 새로온 대련상대가 제일 마음에 들었나보지 뭐!
그 덩치에 그렇게 맨날 성질만 부리면 여자나 꼬일줄 알아? 쳇! 지난번 주말헌팅도 거의
빌다시피해서 이뤄진 거였다구...!! 으이구!! 옆에 있던 내가 다 기가막히더라...!
주제에 또 사내대장부는 자고로 여자가 많아야 한다면서 밝히기는 또 엄청 밝히는 녀석이!"
키릭의 짜증섞인 투덜거림에 노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그래서 요새 너네 주인님의 무용담에 대한 얘기도 뜸해진거구나...."
그것도 기분이 좋아야 말이 나오는 거니까...
"....야..그런데 노마 너 이불빨래 왜 이렇게 못하냐? 좀 더 팍팍 밟으라니까?
아~ 이거 정말 안돼겠구만. 너도 내 빨래에 대한 노하우를 전수 받아야 하겠는데?"
키릭이 공연스레 인상을 찌뿌리며 옆에서 함께 이불을 밟고 있던 노마에게 말하자
노마의 입이 대자로 튀어나왔다.
"빨래 노하우 좋아하시네. 어차피 빨래가 다 거기서 그거지.
이정도면 되지....뭘.."
북북북...!!
갑작스레 양손으로 자신을 머리카락을 잡고 마구 흔드는 키릭을 보자 노마는 투덜거림을 멈추고 찔끔했다.
이 녀석....그러고보니 요새 꽤나 기분이 안좋은 것 같긴 한데.... 괜히 옆에 있다가 불똥 튀는거 아냐?.....
힐끔힐끔 키릭의 눈치를 보던 노마는 멋쩍게 웃으며 후다닥 대야에서 튀어나갔다.
"저기말야....!! 생각해 보니까 나도 할일이 밀렸더라구!! 얼른 가서 그것들 부터 마쳐야겠어.
이봐 키릭!! 이불빨래는 다음에 도와줄께!! 미안해~! 다음엔 꼭 도와줄께!"
키릭이 뭐라고 소리치기도 전에 재빨리 제할말만 해버리고 얍삽하게 사라지는 노마를
보며 키릭은 더욱 불만스럽게 두볼을 부풀렸다.
"으이구....!! 저 자식도 같은 시종이라고.......!! 젠장!
빨래 노하우가 뭐가 어쩌구 저째!? 그거 아무한테나 전수해주는게 아니라는 것도
모르는 자식이!! ........ 엘리엇 그 녀석이라면 분명 군말없이 따라서 배웠을텐데........휴우....!!
..칫!!!...이불빨래야 원래 혼자 하던 일이었지만......그래도 녀석이 있었을 때가 훨씬 재밌었는데...."
씁쓸히 중얼거리며 한숨을 쉬던 키릭은 다시 이불을 퍽퍽 거리며 밟기 시작했다.
"에잇!! 이 녀석 돌아오기만 해봐라!!! 이 이불처럼 만들어 줄테니!! 도대체 말도 없이 어디로 간거야?"
퍽...!! 퍽..!! 철퍽!! 퍽..!!!
창가를 통해 넘어온 바람은 살랑~살랑~
구름은 뭉게뭉게~
그러고 보니 오늘의 날씨는 꽤나 좋구나...
으음....햇빛도 쨍쨍~!! 물론 내가 저 빛을 못 받는게 아쉽긴 하다만.......
그리고.........내옆에는......
"........젠장...!!"
이 빌어먹을 놈!!!!! 당장 저리로 꺼져버려!!!!
옆에는 곤히 잠든 키레이황자가 나와 함께 나란히 누워있었다.
그나저나 잠이 깨다 못해 이미 훨훨 날아가버린 나는 또 왜 이렇게 이 빌어먹을 놈과 함께 누워
있었는고 하니.......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이렇게 되어있었다고 밖에는 할말이 없었다.
게다가.....게다가 정말 빌어먹게도 놈의 품으로 기어들어간건 다름 아닌 바로 나자신이었다.
.....간밤에 뭔가가 따뜻하다고 생각되서 무의식적으로 파고들었던 것이었다..!!
그게 이놈 품이란걸 알았으면 절대 죽어도 그러진 않았을 것을!!
으흑흑...!! 이쯤되면 내 절망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겠지?
그렇다고 이놈의 품에서 벗어나면 꽤나 잠귀가 밝은 놈이 깨어날지도 모를 일이었으므로....
현재 힘겹게 고개를 슬쩍 들어올려 멀리 내다보이는 창밖의 풍경만 감상하는 중이었다.
그래봤자 구름밖에 안보이지만.........
시선을 아래로 내려보니 자는 모습조차 욕이 나올만큼 정갈한 놈의 얼굴이 보였다.
.....그날 이후.........한참이나 앓았더랬지.......
꿈결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고....별로 그다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천천히 머리가 가라앉는다.
.......쳇!! 잘만 자는구나......빌어먹을 황자같으니...!!
이렇게 보고 있으면 정말 잘생겼다라고 밖에는 달리 할말이 없는 것 같은데....성격은 왜 그리
인간말종에 변태이기까지 한거냐......역시 세상은 알다가도 모를 요지경이었던가?
좀 더 가까이 고개를 내려 잠든 황자의 얼굴을 관찰했다.
...오우!! 이자식 재수없게 속눈썹 긴것 좀 봐라?
헤에....짱짱하게 날이선 콧날은 내 주먹으로 깨부셔 줬음 딱 좋겠군.
게다가..........묘하게 깊고 어두운 에메랄드빛 눈동자....어....? 눈동자!?
"히익!!!!"
후다다닥!!!!!
"...뭐하는 짓이지?......"
어.....언제 잠이 깬거야!? 맙소사!!! 하필이면 이런 때에;;;;;;;
조금의 흩트러짐 조차 용납할 수 없는건지 아니면 원래 그런건지....
녀석은 자다 일어난 사람 답지 않은 깔끔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켰다.
나는 이미 침대 구석에 처박혀서 녀석을 곁눈질하며 마음을 졸이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지!!!
"...내가 자는 동안 목숨을 끊어 놓을 생각이라면 관두는게 좋을거다. 난 그리 녹록치 않은 상대이니..."
.....뭐? 지금 저 자식이 무슨 소리를......?
하하....하........설마 내가 자는 동안 자신을 죽이려 했다고 말하려는 건가?
꽈악...!!
.....그.....런 말도 안돼는 생각을!!!!
나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가는 동안에도 황자는 신경쓰지 않는 다는듯이 옷을 갈아입는둥
제 할일만 딱딱하고 있었다.
...........재수없는 놈!!! 정 떨어지게 나쁜놈!!!!!......
..네눈에는 내가 그저 살인자로 밖에는 안보이지?......
.....그러시겠지......이미 유이를 죽였다고 누명을 써버린 뒤니까.....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채 이안의 도움을 받아 감옥을 탈출하게 되었고...
꾸욱...!!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나는 공연히 침대 시트만 쥐어잡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옷을 다 갈아 입은 키레이가 방문을 열었다.
"저 식사...'
.....오랜만에 들어보는 여자아이의 목소리다!!
조....조금만 더 오래...
"이리내라..."
그러나 쌀쌀맞게도 식사를 받아들고 곧바로 문을 닫는 키레이녀석 때문에 안타깝게도
여자아이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젠장!! 조금 더 오래 말하지..!!
아침식사를 들고 오는 키레이를 노려보며 속으로 온갖 욕을 다 퍼부었다.
썩을놈!! 말똥꼬 같은 자식!!! 모기눈알 만큼도 양심없는 놈!!!
그나저나 요새는 저 자식이 식당으로 내려가서 식사를 하고 오는 꼴을 본적이 없단 말씀이야?
뭐......황자니까 어련히 좋은 음식을 갖다 주었으랴 만은..
"먹어라"
녀석이 건네는 식기를 받아들고 손을 놀리려다가 팔을 우뚝 멈춰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번갈아 돌리며 테이블 위에 보이는 녀석의 음식과 나의 음식을 비교해 보기 시작했다.
.....이.........이 치사한 놈!!!!
나의 식기에는 고작 왠 걸쭉해 보이는 스프가 달랑 담겨 있었고 키레이놈의 식판에는
황자의 식사답게 각종 호화찬란의 음식들이 들려 있었다.
.....겨우 이거나 먹으라구!?
"...먹기 싫은건가?"
먹기 싫은게 아니라 기가 막혀서 먹을 수 없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차라리 안먹고 말지!! 내 참 서러워서...!!
그래도 얼마전에는....깽판치긴 했어도 꼬박꼬박 제놈이 먹는것과 똑같은 음식을 갖다주었는데...
"......드럽고 치사해서 안먹겠습니다...!!.."
이미 꼬일대로 꼬여버려서 더 이상 좋게 나올 수가 없던 나의 입은 저놈이 싫어할 만한
....딴에는 저자식 눈에 무척이나 건방지게 보일 그런 말들을 불퉁이 내뱉었다.
"....안 먹겠다고..?"
"안.먹.습.니.다..!!"
키레이의 물음에 다시 한번 나는 강조하듯 일부러 한자 한자 떨어뜨려 말했다.
....픽...!!
녀석이 비웃음을 치는게 보였지만 나는 애써 이를 닥닥갈며 모른척 했다.
그래!! 너 혼자 좋은거 다 먹어치우고 잘먹고 잘살아라!!! 제길!! 빌어먹을놈!!
나중에 콱 망해버리라구!!!!!
왠지 서러워서 눈물이 나올 것도 같았다.
뚜벅....뚜벅.........
그러나 나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오는 키레이를 보고 식은땀을 흘렸다.
.....그렇지!! 저 자식 성질머리가 얼마나 더러운데...!!
..혹시 이번에는 정말로 목졸라 죽이려는거 아냐!?
약간의 두려움+공포가 담긴 눈으로 녀석을 쳐다봤지만 여전히 그 빌어먹을 무표정이다.
아니........무표정을 가장하고 속으로 엄청 분노하고 있을지도......!!!
"......안 먹겠다....라.........."
의외로 긴장하고 있던 내 생각과는 달리 녀석은 조용히 나에게 건냈던 스프가 들린 식기를 들어올릴 뿐이었다.
.....피식...!
"...하는 수 없군."
......어라? 너 내 목 안졸라? 화.....안내는건가?
저놈이 왠일이지!? 분명이 이쯤이면 엄청나게 살벌한 기운을 펄펄 휘날리며
죽이네 살리네 하면서 뭔가 행동을 보여줘야 할텐데?
의외로........그냥 넘어가려는 건가?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의아한 표정으로 키레이를 살펴보는 내 두눈으로 녀석이 나에게 주었던
스프를 스푼으로 떠마시는게 보였다.
..........저 녀석........자기가 먹으려는건가.....?
그 와중에도 스스로 안먹겠다고 했으면서 두번 권하는 일도 없이 냉큼 먹어버리는 키레이황자가
속으로 매우 야속해지려는 찰나였다.
"으...으읍!?"
갑작스레 고개가 이끌려지더니 입사이로 매우 달짝찌근하고 고소한 향을 담은 스프가
키레이녀석의 혀와 함께 얽혀들며 목으로 넘어갔다.
꿀.....꺽..!!
이...이거 놔!!! 이거 놔! 이 빌어먹을 자식아!!!!
꽤나 오랫동안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제멋대로 얽혀 들어오던 녀석의 혀에
정신도 못차리고 숨이 막혀 녀석을 밀쳐낼 힘도 없어질 즈음에 녀석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하악......학...!!! 이게......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야!!!!!"
"왜 그러지? 안먹겠다고 해서 직접 먹여준건데?"
숨을 몰아 쉬면서도 얼굴이 벌개져서 녀석에게 소리친 나는 녀석의 비웃음 섞인
말에 염장이 뒤집어지는 듯 했다.
게다가........게다가...................이제 봤더니 비웃음 조차도 너무 그럴싸 해보여서
더욱 신경이 꼬여버렸다.
....나도 네녀석 만큼만 잘먹었음 너보다 훨씬 잘난인간이야!
무...물론 지금도 내가 더 멋지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먹여주길 바라나? 물론 원한다면 그러도록 하지.....쿡..!!.."
......화아끈...!!!!!!!!!!!
"...미.....미쳤어....!? 이리내!!! 내가 직접 먹고 말테니!!!!"
어느새 경어고 뭐고 다 까먹고 흥분해서는 녀석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그런데.........나즈막히 웃고 있는 저 녀석이....이상할 만큼...........눈에 들어온다.
...잘나게 생긴 면상이란 것 정도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비웃음이 아니라 진짜 웃음인 듯한 녀석의 얼굴이.......훨씬 멋져 보여서...
이크!! 무슨 생각이야!?
그래봤자 저놈은 빌어먹을 변태에 심성이 꼬이다 못해 양심이란게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인간말종 황자란 말이다!
.......게다가............멋대로 나를 강간한.......빌어먹을 놈이기도 하고...
"왜 그러지?"
슬핏 웃고있던 키레이가 다시 예의 그 무표정으로 돌아와 묻고 있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이마와 나의 이마에 손을 대보았다.
"....아직 열이 있는건가?"
....슥..!!
나는 신경질적으로 키레이의 손을 피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집어치워!!! ......그딴 다정함이라니.......하나도 안어울려...
웃기지마!! 저 자식이 저렇게 웃고 있다 한들 날 코딱지 만큼이나 생각해 줄줄이나 알아?
바보같이 멍청이같이 저런 말도 안돼는 상냥함에 넘어갈 정도로 어수룩 하지도 않아!!
녀석도 내가 자신을 노려보는걸 알았는지 미간을 굳히더니 들고있던 식기를 옆에 놓인 테이블에 올려놨다.
"...열은 없는 것 같군. 그나마 다행인가?......여러일로 사람 귀찮게 할 필요는 없을테니...!"
.....싸늘하게 사람 염장을 후벼놓는 못된 말..!
그래......그게 바로 너지.
아까와 같은 모습 따위....하나도 반갑지 않아.
지금의 이 모습이 진정한 네 모습이니!! ....푸후후....후.....!!!
그러니까...........저런 녀석의 모습을 잘 알고 있으니까....기대하지마....바보처럼! 멍청이처럼!!
얼간이 같은 기대따윈 처음부터 버려 버리자구!!
이러다가도 뒷통수 얻어 맞는게 이 빌어먹을 세상이라는게 아니겠어?
수도없이 많이 당해봤지.
믿고....또 믿고........!!
하지만 그와중에도 진심이란 것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가식만이 가득 차 있어서...
결국엔..........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도 수두룩히 봤어 난...
...하물며 나같은 천민에게 조금의.....아니, 눈꼽만큼의 진심이 과연 그 빌어드시고 씹어드시고 말아드실
너같이 위대하고 고귀한 신분을 지닌 황자에게 들어있을까?
.......히죽...!!
그런거........모두 쓸데없는 나의 망상일뿐....
너에게 약간의 따뜻함을 느끼고 조금의 다정함에 기대를 걸지도 모르는 나의 헛된 망상일 뿐.......
.......그러니까......차라리 그렇게 싸늘한 네가 나아.......
...더 이상 아무런 기대도 갖지 않을 수 있도록........
".....그거 영광인데요? 제가 아프면 황자님께서 곤란해지는 겁니까?
키득..!! 몸이 너무 튼튼해서 자주 아플리는 없겠지만 뭐...이왕이면 많이 아프도록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알다시피 저는 황자저하가 곤란하신 모습을 보는게 훨씬 좋거든요."
일부로 밉살스러운 말투로 그에게 쏘아뱉은 후 히죽하니 웃어보였다.
시차막대를 보니 이제 곧 그가 수업을 받으러 떠나야 할 시간이다.
흥! 어쩔테냐? 이 상태에서 그냥 네 본래 성질대로 목을 조르든지 뭐든지 해볼테면 해보라지!
어찌되었든 나에겐 그게 그거니까...!!
....무슨 이유인지.....네가 나를 이곳에서 보내줄 생각이 없다는 걸....알아 버렸으니...
게다가 안티매지션이 걸려 있어서....플라이를 이용해 창가로 날아가려는 생각은 꿈도 꿀 수 없다.!!
후후후........그때 이안이 인상을 무척이나 찌뿌렸는데.....
나도 그 심정을 이제 와서야 이해할 수 있게 되버렸네..
뭐..... 양쪽 다 무척이나 안좋은 상황이지만....
방문은 여럿의 험상궂은 경비들이 지키고 있었다.
어디로도 빠져나갈 길은 없다......라는게 현재의 결론이었다.
탁...!
키레이는 아무말 없이 굳어진 표정으로 어느 두꺼운 하드책자로 뒤덮인 꽤나 고풍스러워 보이는 책 한권을 들어올렸다.
에......에엑!?
설마 이번엔 저걸 나한테 던진다거나 저걸 이용해서 때린다던지;; 뭐 그러는건 아니겠지!?
...아....아니.......저 자식이라면 그럴수도.......아니 틀림없이 그럴거야!!!!
녀석이 내앞으로 다가와서 그 두꺼운 책을 든 팔을 들어 올리는 순간 두눈을 질끈 감았다.
"...읽어라."
........에.....?.........
순간 나는 질끈 감은 눈을 뜨고 멍하니 키레이가 내민 책을 바라보았다.
...카이다의 전래동화.........라고...?
무척이나 딱딱하고 고풍스러워 보이는 겉 표면과는 달리 제목이 영 시원찮은 책이었다.
툭..!!
한동안 내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고 받을 생각을 안하자 키레이가 내 무릎 위로 책을 올려놨다.
.....이거 지금 뭐하자는 거지?
나의 심중을 읽어낸 듯 키레이의 굳어있던 표정이 조금은 풀리면서 그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미레아가 심심해 할때마다 읽어주었던 것이지. 내가 가고 나면 할일이 없어 심심할테니 그거라도
읽고 있으란 소리다. 아무래도 네 수준의 책은 그정도가 좋을 것 같군......쿡..!!..."
........카이다 전래동화가 내 수준의 책........?
..빠직!!!.....
.......진심이야...!?....아니면 약올리려는 거야!!?
정신을 차린 내가 씩씩거리며 뭐라고 한마디 하려 입을 열 쯔음 이미 키레이황자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뒤였다.
"......윽! 누구 멋대로 내 수준이 이렇다는 거야!?....!!"
....쳇!.........쓸데없는 짓을......
코끝이 시큰거리면서 조금씩 눈물이 새어나왔다.
이런거.......이따위 작은 친절에 넘어가면 안되는데..........정말인데....어쩌면 비웃는 걸지도 모르는데..
이런 다정함 따윈...........싫다고 했잖아..............
빌어먹을........아까부터....왜 이렇게........기분이 이상한거야............
자세히 보니 책표지 여기저기에 손때가 묻어있고 모서리 부분이 많이 닳아 있었다.
...그 꼬마황녀한테 꽤나 열심히 읽어줬나 보네....?..
키레이황자가 미레아황녀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모습이라..........
"............"
풉!! 푸흡....!! 하나도 안 어울려!!
그 무뚝뚝한 표정으로 읽어줬을게 분명하다구!! 푸핫!! 푸하하하하!!!!!
머릿속에 떠오른 광경을 생각하다가 한참을 웃어대는 엘리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