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암실수련관에서 만난 키레이황자 (11/67)

# 암실수련관에서 만난 키레이황자

바스락...바삭...

정확히 9시경에 나온 엘리엇은 낮에 약속했던 장소로 나왔다.

역시나 녀석들도 기분나쁜 표정을 지으며 몰려있었다.

"흥! 무서워서 벌벌떨고는 침대 이불에 틀어박혀 안나올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나왔군!"

"제가 할말을 그쪽이 다 해주시니 더이상 해드릴 말이 없군요."

"뭐....뭐라고!?"

케타로가 사납게 금방이라도 엘리엇에게 달려들 것 같은 분위기가 되자 노이드가 이상하게

빙글거리는 미소를 띄고 부드럽게 말했다.

"자자...그만하자고 케타로. 유이도 긴장되니 얼마나 힘들겠어?

마음이 넓은 네가 이해해. 오늘만큼은 좀 더 너그러워 지자구."

.....어차피 오늘밤이 지나면 녀석은 세상구경하기 힘들어 질텐데..!!

뒷말은 꼴딱 삼키고 노이드가 짐짓 여유있는 표정으로 정말로 너그러워 지기라도 하려는 듯이

미소를 짓자 엘리엇은 기가 막혔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지? 내기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심력을 소모시키려는 작전인건가?

어찌되었든 엘리엇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케타로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물러섰다. 

"자...그럼 어서 내기 장소로 가보자구."

"...이번 내기에서 제가 이기면 약속은 지키는 거겠죠?"

엘리엇의 싸늘한 말에 노이드는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손끝하나 대지 않겠어."

...당연하지! 손끝하나 댈 필요도 없이 그 건방진 네놈의 시녀년도 이 학원에 남아있지 못하게 될테니까.

부스럭....부스럭..

정원에 깔린 잔디를 밟고 어디론가 향하던 그들은 왠지 음침해 보이는 어느 건물 앞에 멈춰섰다.

주변에는 줄을 쳐놓은 것이 아무래도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인 것 같았다. 

"여기가 바로 학원의 암실수련장이다. 이안에 들어가서 무사히 입구를 통해 먼저 나오는 사람이 이기는거다."

이상하게도 아까전부터 비식거리는 녀석들을 안좋은 기분으로 쳐다보던 엘리엇은 찜찜한 마음으로 줄을 넘어

암실수련관의 입구에 섰다.

"너 먼저 들어가라. 유이! 나는 네녀석을 뒤따라 가겠다. 혹시라도 네놈이 겁을 먹고 내빼진 않을까 싶어 

그러는 거니 빨리 들어가."

하늘을 들여올려다 보니 달들이 무척이나 밝았다. 

하늘을 밝게 비추는 세개의 달......로하임...의 기간인가?

저녁인데도 이정도나 밝다니....기분이 좋긴 한데.....이런날 이런 쓸데없는 내기를 해야하다니.

"좋습니다. 저 먼저 들어가죠."

엘리엇은 뒷춤에 차고 나온 무한주머니를 만지작 거리며 입구 앞에 섰다. 

키기기기기기깅!!!!

둔탁한 쇠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본 노이드 패거리가 무척 놀란 표정을 짓긴 했지만 엘리엇은 그걸 깨닫지 못했다.

어...어떻게 된일이지? 저문을 저 녀석이 혼자서 열다니?

사실 들여보내기 전에 힘좀 빼놓으려고 일부러 녀석에게 문을 열도록 먼저 들어가라고 한거였는데?

의아한 것은 엘리엇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육중한 철문이 힘들긴 했지만 자신의 힘에 반응해서 열리고 있었다.

밑부분을 보니 암실수련관을 폐쇄한지 오래되어 철문의 아래가 꽤나 녹이 슬어 있어

열려면 한참은 고생해야 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문이 조금씩이지만 열리기 

시작하니 영문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 힘이 잠깐 사이에 무지막지하게 세진건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일단 나는 내 힘이 그렇게 세지 않다는 걸 잘알고 있고....무엇보다

나는 스피드 위주의 수업을 받아왔으니까....

한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틈이 생기자 엘리엇이 먼저 들어갔다. 

콰과과광..!!

순식간에 철문이 닫히자 노이드 패거리들은 깜작 놀랬다.

"..드...들어갔어."

"이젠 어쩌지? 노이드?"

노이드도 무척 놀라긴 했으나 곧 비열한 미소를 입가에 두며 말했다.

"뭘하긴 뭘해? 입구를 막아버려야지. 저 녀석이 다시 이쪽으로는 나오지 못하도록..!!"

그러고 보니 옆에는 전에 암실수련관의 문걸쇠에 쓰이던 커다란 철막대기가 하나 놓여있었다.

"저걸 올려놔. 이제 녀석은 독안의 생쥐야. 죽는일밖에는 안 남았어. 

우린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자. 멍청한 놈! 누가 너따위와 함께 내기를 한다고 했나?

내기는 처음부터 내가 이긴거였어! 녀석이 죽고나면 내기 따윈 아무 소용도 없을테니까!! 킥킥...키키킥!!!"

밖에서 노이드의 신경거슬리는 웃음소리가 음산히 울려퍼졌다.

한편 엘리엇은 자신이 들어오고 난 한참후에도 노이드가 들어오지 않자 의아한 표정으로 입구쪽으로

다가서 다시 문을 열어보았다.

끼긱...!! 끽!!

끼긱...!! 끽!!

그러나 문은 처음에 들어왔을 때와는 달리 끼긱 거리기만 할뿐 도무지 열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순간 엘리엇의 얼굴위로 낭패감이 지나며 자신이 노이드 패거리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비겁한 녀석들!!! 나를 이곳에 가두고 자신들만 도망치다니!

젠장! 처음부터 그녀석들을 믿은 내 잘못이지!!

다행히 밖에는 로하임의 기간이라서 밝은 달빛이 높은 벽의 창으로 쏟아져 내렸기 때문에 그럭저럭

주위를 분간할 정도는 되었다. 

게다가 자칭 미래의 대도인 엘리엇이 예전에 주로 활동하던 시간도 밤이었기 때문에 

시야확보는 엘리엇에게 별다른 장애물이 되지는 못했다.

다만 그 녀석들이 괘씸할 뿐이었다!! 빌어먹을 자식들!! 비겁한 것도 정도가 있지!! 

한숨을 내쉬며 엘리엇은 길게 이어진 통로들을 살펴보았다.

.....뭔가 상당히 위험한게 있는 것 같기는 한데.........혹시...

스칵!!!

타악!! 탁!!!!

빌어먹을..... 어째서 이안녀석이 위험하다고 한건지 대충은 이해가 가겠구만.... 

역시 내부로 들어가자 기관이 장치되어 있었던 모양인지 천장에서 창이 튀어나와 

방금 전 내가 서있던 자리를 꿰뚫고 지나쳐 부르르르 떨리고 있었다. 

"....젠장...!! 예상대로긴 하지만... 상당히 씁쓸한데?"

어쩐지 이 수련관이 폐쇄되었다는 이유도 이런거였나?

이렇게 살벌한 기관들이라니....학생들이 당해낼리 만무하지. 빌어먹을...!!

다행히 평소 매우 재빠르고 민첩한 내몸은 무척이나 기특하게도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기관들을

그럭저럭 잘 넘겨가고 있었다. 

"허억....헉!! 자칫 잘못하면 정말로 비명횡사 하시겠군...!"

그나저나 뭐지...? 

깊숙히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나의 직감은 누군가가 먼저 여기를 지나갔다는걸 말해주고 있었다.

그것도 몹시 최근에!!

촤차차창!!!!

"윽!!"

한발자국을 내밀자 이번에는 벽 옆에서 암기들이 튀어나와 반대쪽 벽에 꽂혔다. 

시험삼아 내밀어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저 잔혹한 암기들에게 옆구리를 뜯겨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정말 이런곳에서... 특기사 수련생들이 수련을 했단 말이야?

나는 다시는 카이다제국의 특기사들을 무시하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발을 내딛었다.

그나저나......용케 살았구나...!! 

정말 여기가 수련용도로 만들어진건지...아니면 애꿎은 사람 조져놓으려고 만들어 놓은건지...

이렇게 무지막지한 기관들을 곳곳에 설치해 놓은 작자들의 속내를 도무지 어찌 알겠는가?

아니..굳이 알지 못해도 상관없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그러나 이정도의 치사한 암기들에 밀려 포기하고 달아날만큼 나는 오기가 없는 녀석도 아니라서 말이지!!

그 대단치도 녀석들과의 내기를 위해 이짓까지 해야하나 회의감이 밀려오기도 했지만....... 

대강은 호기심반 오기반으로 접근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처음에 들어온 입구는 녀석들이 막아 놓았고.......젠장..!

설사 내가 가는 곳이 빠져나가는 입구가 아닌 전혀 엉뚱한 곳이라고 해도 이 걸음을 멈추진 못할 것 같았다. 

난 이미 포기도 못할만큼 독이 오른 상태란 말이야! 이상황에서 그만하라고 제지하는 녀석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나의 투지가 울끈불끈 솟아오르는게 느껴진다. 

내가 이기는지... 이 수련관의 기관들이 나를 꿰뚫는지는....어디 한번 시험해 볼까?

"타핫!!!!"

나는 몸을 뒤로 공중제비 시키고 허리 중간치에서 튀어나오는 정체모를 철사들을 피해 두어번 몸을 날렸다.

치이이이익................

철사들이 스쳐간 곳의 벽이 슬슬 녹기 시작하면서 점차로 부식해 나갔다. 

저것들에게 조금이라도 닿았다간...!!

아마 내 허리는 진작에 부패되어 두동강 나버렸을지도.....?

이럴때는 정말 나를 엄격하게 훈련시킨 후 하늘로 훌쩍 떠나버린 할아버지에게 감사해야할 판이었다.

어렸을 때야 영문도 모르고 죽내사내 받아왔던 훈련들이었지만.....정말 이렇게 쓸모가 있게 될줄은!

도둑은 무조건 훔치는 기술만 좋으면 장땡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틀렸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이렇게 목숨을

건지게 되었지만...... 상당히 악랄하고.....무서운 함정들이로군;;;;;

그만큼 왠지 저 끝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한 흥미가 치솟아 오르는데?

본래는 이 수련관의 기관들을 대충 파해하고 서둘러 입구를 찾아 나가는 것이었지만... 

아무래도 이대로 하고 그냥 가기엔 아직 너무 아쉬운 감이 있지 않은가? 

죽을 뚱 살뚱 들어왔는데 아무것도 건지는 것 없이 나가면 그것 처럼 억울한 일이 또 어딨겠냐고?

피피피피핑!!!!

"하앗!!"

탁!! 탁!! 

"빌어먹을...가면 갈수록 전보다 훨씬 섬세하고 치밀하게 설계된 것 같네..."

옷자락을 아슬아슬하게 스쳐나간 화살들이 벽면에 빼곡히 꽂혀있었다. 

"학원내의 암실수련관을 우습게 보지 말라는건가? 

뭐... 나도 도둑놈 치고는 나름대로 잘 해나가고 있는 것 같지만..."

살벌하다 못해 엽기적이기 까지 한 함정들도 가끔은 튀어나왔다.

예를 들면 벽면에서 갑작스레 벌레들이 들끓어 달려든다던지.......!!

물론 재빨리 무한 주머니를 뒤져 준비해온 질긴망토를 급히 뒤집어써 위기는 모면했지만...

도대체 지나온 길보다 훨씬 더 극악해진 이 함정들을 도대체 어떻게 헤치고 가라는거지?

순간적으로 한치의 의심도 없이 내기에 승낙한 내가 원망스러워 지는군;;

키익....!!

이크! 뭘 또 잘못 밟은건가?

쿠구구구구구구구궁........!!!!!!

우여곡절 끝에 아마 입구로 추측되는 곳에 거의 가까워졌을 무렵 발밑에서 울림이 들리더니 

양쪽의 벽면이 튀어나와 점차 간격을 좁혀나가고 있었다.

"젠장!! 이런 엿같은 상황이!!!"

타타타타타타탁!!!!!

점차 좁아져 오는 벽면을 빠져나가기 위해 최대로 속력을 높여 달려나갔다. 

쉬익!!! 쉬익!!! 쉬익!!! 

"큭!! 뭐.. 이딴 것들이 다 있어;;;"

언제 장치해 둔건지 천장에서 날카로운 금속촉들이 빠른 속도로 바닥에 박히기 시작했다.

이대로 지체하면 나는 분명 저 벽떼기에 짓눌려 압사당할 판이고 그렇다고 무작정 앞으로 달려나가자니

어딘가에 설치된 함정들이 나를 노릴지 모를 일이었다.

"하는 수 없지!!"

차르르르륵!!!

나는 무한주머니에 손을 가져간 뒤 갈고리가 달린 로프를 소환해 내었다.

휘익!!

카가가가가가각!!!!!!

...좋았어...!!!

아무래도 여기에 설치된 기관들은 내가 지면을 밟으면 자극을 받게 되어 발동되는 것 같으니 이대로 공중부양하면 되는거다. 

어차피 입구가 코앞에 보이는 마당에 조금도 주저할 이윤 없었다.

처음부터 이 방법을 쓰지 않은 것은 이 로프를 사용하고 난 후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땅에 발을 붙이게 되는데 그때 어떤 기관들이 제멋대로 발동될 줄 예측할 수 없었으므로 사용하지 않았던 방법이었다.

이제 갈고리에 연결된 이 줄을 타고 입구까지 단숨에 도약만 하게되면 그 후부터는 일사천리다.

하지만......먼저...

"이이잇!!!"

저 거대한 벽들로 부터 탈출하는게 가장 시급하다. 

쿠구구구구궁.....콰앙!!!!!!

굉장한 굉음이 울리면서 튀어나온 벽들끼리 마찰했다. 

탁...!!!!!

다행히도 내가 발을 디딘 곳에는 기관이 설치되지 않았음인지 아무것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따로 예상은 하고 있었어도 혹시라도 모를까 싶어 따로 대비를 해두고 있던 중이었는데...

그러나 실은 그보다도 훨씬 골치아픈 상황이 되어버렸다.

뭐... 확실히 나보다도 누군가가 먼저 지나온 흔적이 있었던 것 같지만........

엘리엇은 목구멍에서 나오려는 신음소릴 집어삼켰다.

여기저기 긁히고 뒹구른 험한 꼴로 착지한 엘리엇의 눈앞에 서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카이다제국의 정식 황위후계자라고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고

엘리엇 역시 얼굴을 잘 알고 있는... 키레이황자였다.

처참히 일그러진 표정을 짓게 만든 장본인인 키레이황자의 얼굴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무심한 표정이었다.

아니, 그는 약간의 흥미롭다는 얼굴을 하고있었다.

뭔가... 기분이 나쁘다. 

저 녀석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거지....!?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길래 혹시나 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전혀 예상치도

못한 인물이 등장하는군. 결코 이런곳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말야......"

"..........."

키레이의 상당히 낮고 깊은 저음이 수련관 안에 울려퍼졌다. 

엘리엇은 인상을 찌뿌리고 말없이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곳에는 어쩐일이지? 여기는 학원에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출입금지 시켜놓은 곳일텐데?"

일단 미래의 황제폐하라는 녀석에게 뭐라고 대답은 해줘야 할것 같아 입을 열긴 하는데 내키지 않는다.

"....내기를 수행하던 중이었습니다."

"....내기..?"

엘리엇은 뭐라고 설명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털어놓기로 했다.

어차피 저 녀석이 신경쓰지도 않을거란건 자명한 일이거니와 이미 다 들킨 마당에 감출 이유도 없었다.

"노이드라는 자와 내기를 했습니다. 별...내용은 없었습니다."

조금은 불손해 보이는 엘리엇의 태도에 키레이는 미간을 잠시 찌뿌리더니 말했다.

"그런데 너와 함께 내기를 하기로 한 상대는 왜 안 보이는거지?"

...젠장! 이 달밤에 여기서 헛짓하다 걸린 내가 죽일놈이다! 으이구!!!

하필이면 저 자식과 마주칠건 또 뭐람? 

하여간 저 녀석은 이상할때만 마주쳐서는 일부러 나를 곤란하게 만드려는 속셈일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그러나 엘리엇은 알지 못했다. 

키레이는 평소 매우 말을 아낀다는 것과 그가 왠만한 일이 아니고는 반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 키레이로써도 상대방에게 이렇게 많은 질문을 하는 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상대는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들어온 것은 저 혼자뿐입니다."

엘리엇의 차분한 대답에 키레이의 아몬드형의 눈매가 슬쩍 가늘어졌다. 

대충은 예상이 가는 듯 싶었다. 어찌된 일인지...

하지만.....이건 무척이나 의외로군..........정말 의외야.....세이리어 듀 유이........

"그러는 저하께서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던 겁니까?"

엘리엇은 자신을 곤란하게 만든 황태자녀석에게 철저하게 반격해 주겠다는 심보를 가지고 

조금은 공격적인 어조로 물었다. 

......피식...!!

순간 믿을 수 없게도 키레이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면서 엘리엇은 그것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보통사람들이 봤더라면 분명 황홀해 마지않아 뒤로 넘어갔을게 분명한 그 아름다운 미소의 의미를 알아챈 엘리엇은 

사정없이 인상을 있는대로 구겼다.

.....이....이자식이 지금 날 비웃었어!?

다른 사람같으면 감히 생각하는 것 조차 죄가되는 무례한 생각을 품으며 엘리엇은 눈앞의 황태자를 노려보았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네가 관여할 바가 아닐텐데?"

시니컬한 음성이 울려퍼지면서 키레이는 자신의 눈앞에 서있는 엘리엇의 표정변화를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네가 이나라의 황태자라는 거지!? 이 빌어먹을 녀석!!

그래 너 잘났다!! 니 똥 굵다!!! 황태자니 뭐니 어디 한번 잘해봐라!! 쳇!!

나한테는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고 정작 자신은 가르쳐주지 않아!? 저런 날강도 같은 놈!!!

"그...그렇습니까?"

아무리 같은 학원내의 학생이라지만 엄연히 신분의 차이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꼿꼿히 고개를

치켜들어 키레이를 응시하는 시선에 그는 조금 호기심이 생겼다.

전에는 얼굴조차 제대로 못들고 다니던 유이였다.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후다닥 고개를 내리는 유이의 소극적인 태도가 못마땅했던 그였지만 

이번에는 반대의 의미로 눈에 거슬렸다. 

"...용기가 가상하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원래 무지해서 이렇게 용감할 수 있는건가?" 

....뭐..? 이녀석이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거지?

엘리엇이 의아한 눈초리로 키레이를 바라보자 그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그때 왜 해명하지 않았던 거지?"

카이다제국의 황위후계자가 뭘 잘못 처먹은걸까? 뜬금없이 이상한 말들만 해대고..

"무엇을 말입니까?"

".......그날 파티에서 있었던 테라스사건.."

.....움찔...!!!

이녀석도 소문을 들은건가? 물론 그렇겠지. 

그 빌어먹을 소문은 온데간데 안퍼진 곳 없이 고루고루 퍼져 나갔을테니..

할일없는 귀족 나부랭이들이 때마침 재밌는 사건이 터져주었으니 얼마나 떠들어 댔겠어?

옛날부터 남의 험담만큼 재밌는건 없다고.......아묻튼 이 녀석도 그 소문을 믿고 있는건가?

"그것에 대해선 따로 드릴 말이 없습니다만?"

엘리엇은 또 다시 그 억울한 누명이 떠오르면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꾹 눌러참으며 대답했다.

이 녀석도 그것에 대해서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건가?

....이놈이나 저놈이나 별다를 바 없군.....심지어 황태자라고 해도 말야...!!

아니..잠깐!! 

그때 제지하고 분명 나를 때리려던 노이드를 제지하고 나선 녀석이 이녀석이었지!?

그제서야 그때 키레이도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으며 엘리엇은 자신의 바보스러움에

속으로 통한의 눈물을 철철 흘렸다.

소문따위가 아니라 그곳에 있었으니 당연히 아는거겠지;;;; 이런 바보같은;;;

"그때 보셨으니 잘 아실것 아닙니까?"

다른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에 엘리엇은 감히 황태자앞에서

빈정거리는 어투로 내뱉듯이 말했다.

"그래. 네가 결백하다는 것 쯤은 잘 알고 있지."

그러나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전혀 뜻밖의 말이 키레이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엘리엇은 놀란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방금....방금 이녀석이...!?

"너는 단지 세일린이라는 소녀가 너를 내리치려 하자 막은 것 밖에는 없었다고 

말하고 싶었던게 아니었나?"

...알고 있었어!?

순간적인 패닉으로 엘리엇의 표정이 급격하게 변화하자 키레이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이지만

즐겁다는 듯이 올라졌다. 

"...그걸 어떻게....?.."

엘리엇의 얼빠진 목소리가 들려오자 키레이가 즉각 대답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나는 네가 너의 그 수다스러운 시녀와 함께 테라스에 오기 이전부터 

먼저 나와 바람을 맞고 있었으니..."

그럼 처음부터 다 보고 있었다는 소리잖아!?

잠깐......!! 처음부터 다 보고 있었다라는 건... 그렇다면.......그그...그....키스장면 까지도!?

"...안색이 안좋군. 내가 보지 말아야 할것을 보기라도 했다는 표정이야?

예를 들면..........세크레틴과의 키스라던지.."

......화아아아끈!!!!!!!!!!!!!

크....크아아아아악!!!!!!!! 빌어먹을 세크레틴자식!!!!!!!!! 

너나 이놈이나 처음 만났을 때부터 도무지 내 인생에 도움이 안되는구나!!!!!

"....오...오해입니다!! 그건 절대 그녀석이 먼저 말도 없이 멋대로 부딪힌 거라구요!!

제 의지가 절대 아니었습니다!!"

두손까지 저어가며 해명을 하는 엘리엇의 모습에 키레이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물론 엘리엇은 현재 무척 당황해서 그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지만...

그나저나 이 자식!! 내가 결백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니!!

"그렇다면 어째서 도와주시지 않으신 겁니까?"

원망섞인 엘리엇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키레이의 입가에 매달린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예의 그 무심한 표정만이 남아 그의 말에 대답했다.

"네가 의지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지..말입니까?"

이상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물어오는 엘리엇을 바라보며 키레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시도하려고 하지 않는 녀석에게 손을 내밀어 줄만큼 나는 그리 동정심이 많지 않다. 

네가 그 자리에서 그일을 해명하려는 의지를 조금이라도 내비췄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테지.."

엘리엇은 자신의 입술을 꾹하니 물었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 그 상황에서 누군들 해명하고 싶지 않았겠냐!?

단지 말해도 아무도 믿어주지도 않을 것 같아서 그랬던 것 뿐이지! 

구차하게 변명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보단 차라리 깔끔하게 걸어나오는게 내 성격에 맞다고!!

하다못해 네가 그일에 대해 조금 아는 티라도 내비췄으면 일이 좀더 쉬워졌을꺼 아냐!?

그런 목석같은 얼굴로 그 자리에 서있는데 내가 너를 염두에나 두었겠냐!?

속으로 갖은 욕을 키레이에게 쏟아붓던 엘리엇은 입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욕지거리를 간신히 눌러 참은 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키레이에게 딱딱히 경직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어찌되었든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요. 그래도 황자님만.이.라.도 저의 결백을 인정해 주시니

정말 황송해서 미치고 팔짝 뛰시겠군요. 그럼 이만 안녕히 계십시오. 다시는 이런곳에서

마주치는 일 따윈 절.대. 없을 겁니다."

.....픽..!!

평소 잘 컨트롤 하고 있던 자신의 원래의 그 천박한 말투가 튀어 나왔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한

엘리엇은 냉큼 몸을 돌려 입구로 향하려고 했다.

"세이리어 듀 유이. 내 반려후보자들 명단에 그 이름이 올려져 있더군..."

.......뭐...!? 

이....이자식 갑자기 그 얘기는 왜 꺼내는 거지?

"너는 내가 싫은 모양이지?"

".........."

당연한거 아니야!? 이녀석! 먼저 시비를 건 사람이 누군데!! 

게다가 너도 나를 싫어하고 있는 것 같은데 피차일반 아닌가? 

아묻튼 나는 이 거래만 끝나면 네 그 잘난 면상 볼일도 없이 영원히 안녕이라고!

"...큭.....쿡쿡....쿡.....!!!"

엘리엇은 갑자기 웃기 시작하는 키레이를 실성한 사람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세이리어 듀 유이..."

그러나 곧 웃음을 멈춘 키레이가 엘리엇에게 다가서면서 무척이나 낮고 음산한 목소리로 

현재 그의 이름을 불렀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두눈을 보며 엘리엇은 뭔가 숨막히는 위압감에 감히 입을 열 수 없었다.

"헉..!!"

순식간에 그의 희고 길다랗지만 강인해 보이는 손이 엘리엇의 목을 휘감았다.

엘리엇은 서서히 자신의 목을 조여오는 키레이의 손을 바라보며 경악스러운 시선을 보내왔다.

".....흐윽..!!!"

점차 숨이 막혀 눈앞이 어질어질할 무렵 그가 목을 조르던 손을 놓으며 뒤로 물러섰다.

털썩..!!!!

순간 엘리엇의 몸이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으며 콜록콜록하는 기침과 함께 급하게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상당히 건방졌지만 이번 한번은 그냥 넘어가겠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좀 더 조심하는게 좋을거야... 다시 한번 내눈에 거슬리는 날엔 나도 널

어떻게 할지 모르니까 말야........되도록 내눈에 띄지마라. 나는 세크레틴과는 달리 조금 포악하거든..."

콜록...!! 콜록...!!!!

키레이는 바닥에 쓰러진 엘리엇을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눈길로 잠시 바라보다가 

곧 그를 뒤로 하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입구를 빠져나갔다.

저 미친자식!! 왜 갑자기 사람 목을 조르고 지랄이야!

지가 황태자면 다야!? 갑자기 거기서 세크레틴은 또 왜 튀어나오냐고!?  

젠장!! 그나저나 진짜 죽을뻔했잖아!! 저 개뼉다귀 같은 자식!!!

누군 너 따위 만나고 싶어서 만났는 줄 알아!? 

네 녀석이 그렇게 친절히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아서 피해다닐 예정이었다구!!

....내참..........뭐 이런 빌어먹을 경우가 다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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