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 - 오로지 당신만 8
“걱정하지 마세요. 물리 치료도 꼬박꼬박 받고, 식사도 거르지 않고 잘하고 있어요.”
벤은 어머니의 전화에 건성으로 답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수많은 사람은 지구 종말이나 전쟁 때문이 아니라, 그저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다. 벤은 그 평범한 사람 중 한 사람이 될 뻔했다. 병원에서 퇴원한 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벤은 수시로 걸려오는 안부 전화에 골머리를 앓았다. 어머니는 운전 중에 휴대폰을 사용하지 말란 상식적인 잔소리부터 시작해 신호등을 잘 보고 다니란 모욕적인 충고까지도 서슴지 않으셨다. 이 도시엔 벤처럼 커다란 남자를 못 알아보고 칠 눈 나쁜 운전자는 없었지만, 벤은 라이언의 유언을 생각하며 부지런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술관 안에 들어가기 전에 다행히 통화가 끝났다. 벤은 팸플릿을 뒤져 자신이 보고 싶었던 그림을 찾아내 곧바로 그림이 전시된 곳으로 갔다.
벽 가운데 검은 머리칼의 여인 그림이 붙어 있었다. 벤은 백사장 위에 쓰인 GOYA라는 이름을 가리키고 있는 공작부인 알바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절로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뭐야, 별로 예쁘지도 않은데. 저딴 여자가 뭐가 좋다고. 내가 훨씬 나은데.”
벤 옆에서 그림을 함께 보던 노신사가 헛기침을 하며 벤 곁을 떠났다. 190cm가 넘는 청년과 공작부인의 미모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얼토당토않은 일인 걸 벤 자신만 몰랐다.
알바 공작부인의 그림을 보고 있는데, 이상스레 벤은 마드리드에서 보았던 그림 <개>가 떠올랐다. 모래 구덩이에 갇혀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검은 개 한 마리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많은 이들이 기념품 가게에서 그 단순한 그림이 박힌 엽서들을 사 들고 갔다. 그땐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그림이 이제 와서야 특별한 무게와 의미로 벤에게 다가왔다.
머릿속에 뱅뱅 도는 생각을 말해보라던 벤의 요구에 마크가 주절대며 말했던 여자와 검정 개는 별다른 게 아니었다. 벤은 검은 개의 눈에서 마크의 눈을 기억해냈다. 검은 모래 늪에 빠져 죽음을 기다리는 개처럼, 누군가를 망연히 바라보다 죽었을 한 남자를 생각하자 가슴이 미어졌다. 남자의 잿빛 고수머리와 시리디시린 푸른 눈을 보고 싶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덤덤했던 감정이 불현듯 요동쳤다. 벤은 마크를 떠올리게 하는 그 모든 것을 대할 때마다 남자가 너무도 그리웠다.
막 깨어나 병원에서 정신없이 치료를 받을 때는 자신의 심장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모든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벤이 만났던 이들은 세상에 없는 유령들이었다. 벤은 제임스가 진즉 죽었단 사실도 뒤늦게 깨달았다. 벤이 로스쿨에 입학할 당시 자전거 사고로 죽은 천재 교수가 한 명 있었는데, 그게 제임스였다. 혼수상태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모든 걸 까맣게 몰랐는지 그게 더 신기했다.
일상으로 돌아온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벤은 힘들었던 사건을 끝내고 오랜만에 긴 휴가를 얻었다. 워낙 피곤했던 탓인지 지친 몸을 침대에 누이고 한참을 기다려도 잠이 오지 않았다. 도시의 밤은 완벽히 어둡지 않아서 불을 껐어도 천장 한쪽이 희미하게 밝았다. 얼룩진 천장을 바라보며 벤은 깨달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는 죽어 그와 같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단 실감이 뒤늦게 찾아들었다. 청년은 누운 채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긴 울음에 베개가 축축하게 젖었다.
불면의 밤이 잦아지며 사람들이 벤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를 물어왔다. 잠을 자고 일어나도 몸이 개운하지 않았다. 부은 얼굴과 핏기 선 눈으로 벤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냈다. 몸이 피곤한 게 당연했다. 벤은 자신이 유령처럼 여겨졌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이승의 삶이 실은 다 꿈이고 자신은 이미 죽어버린 게 아닐지 두려웠다. 영혼 일부를 어딘가에 놓고 왔으며 잃어버린 영혼은 이곳이 아닌 어딘가에서 또 다른 벤으로 살고 있으리란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벤이 잃어버린 조각은 마크, 라이언과 함께 있을 수도 있었다. 자신의 나머지 부분도 그곳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끓을 때면 벤은 더는 ‘이 땅’ 위에 발 딛고 서 있기가 싫어졌다.
멀거니 먼 하늘을 바라보거나 휴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시간은 흘렀고, 마크와 라이언을 만날 수 있으리란 기대는 옅어졌다. 발을 떼고 ‘저곳’으로 가거나, ‘저곳’을 향해 그만 시선을 떼고 이곳으로 돌아와야 했다. 벤은 어머니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그가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다짐을 했다가도 밤의 정적이 찾아오면 혼란스러워하며 잠을 설치곤 했다.
몇 달의 시간 뒤 결론이 났다. 목숨을 끊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벤은 이곳의 삶을 택했다. 벤에게 ‘이곳’은 음식을 취하고 코미디 프로를 보며 깔깔댈 수 있었으나, 대신 자칫 긴장을 풀면 바로 슬픔과 고독에 휩싸이는 곳이었다.
벤을 절망에서 끌어낸 건 라이언이 남긴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말의 행간을 뒤적이며 벤은 삶의 희망을 찾았다.
-세상엔 ‘내’가 한 명만 존재하는 게 아냐. 삶과 죽음은 쌍둥이 형제처럼 닮았어. 내가 저 세상으로 떠나오면, 또 다른 나는 이 세상으로 넘어가지. 그러니까 걱정 마. 너의 마크도, 나도 네 곁을 영영 떠난 적이 없으니까.
자신의 마크가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벤은 그렇게 믿었다. 오랫동안 내려두었던 블라인드를 올리고 벤은 따가울 정도로 환하게 비쳐오는 아침 햇살에 몸이 따뜻해질 때까지 빛 속에 서 있었다.
미술관을 나오던 벤은 길거리 예술가의 기타 소리를 들었다. 낡은 옷차림의 남자가 자신의 보물일 기타를 들고 익숙한 음색의 노래를 불렀다.
「Would you know my name if I saw you in heaven? Would it be the same if I saw you in heaven? (천국에서 너를 만나면 내 이름을 기억할 수 있겠니. 천국에서 너를 만나면 너는 예전과 같을까.)」
가수 에릭 클랩튼이 아들을 잃고 지었다던 노래였다. 벤은 가수의 심정을 이해했다. 천국은 벤이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가장 행복하고 안락한 세계에 처한 사람이 자신을 기억하긴 할까. 죽은 뒤 많은 걸 잊어버렸던 마크였다. 천국으로 가는 길에 마크는 이미 벤을 잊었을지도 모른다.
무엇도 장담할 수 없었다.
벤은 목이 메는 걸 느꼈다.
마크가 나빴다.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그래서 여전히 아파요. 그 짧은 만남으로 내 마음을 가져가 버린 당신이 정말 못된 사람이에요.’
벤은 마크가 듣길 바라며 마음속으로 그리 중얼거렸다.
노래가 이어졌다. ‘넌 더 강해져야 해. 왜냐면 넌 아직 천국에 속해 있지 않으니까.’ 어쩐지 마크의 대답 같이 느껴졌다.
벤은 자신이 잘해나갈 수 있으리라고, 그렇게 중얼거리며 길을 걸었다.
* * *
“난 내 변호사가 오기 전까지는 한마디도 안 해.”
취조실 문을 열었던 벤은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심장이 그대로 멎는 줄만 알았다. 어색한 억양이 섞이기 했지만 허스키한 목소리는 과거 자신에게 연이은 불면의 밤을 선사했던 그 몹쓸 목소리가 분명했다.
벤은 떨어뜨린 서류철을 집어 들고 황급히 취조실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있던 싸늘한 인상의 남자가 벤을 아래위로 쭉 훑더니, 벤의 커다란 몸과 단단한 근육을 보고 미간을 찡그린다. 속꺼풀이 진 커다란 푸른 눈을 보고 벤은 숨을 들이켰다.
“마크?”
벤의 엉뚱한 반응에 남자가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마크? 내가 어딜 봐서 독일계로 보이나.”
이지적으로 솟아오른 이마나 턱을 내밀듯 상대를 바라보는 자세가 마크와 영락없이 닮았다. 벤은 귀신을 본 얼굴로 남자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먼저 취조실을 차지하고 있던 벤의 FBI 동료 해리가 참고인을 가리키며 남자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어이, 베니. 여긴 자네가 만나고 싶어 했던 마피아 양반이야.”
“이 남자가 블란델 마아시야라고요?”
벤은 자신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을 맛봤다. 자신 앞에는 젊은 시절 마크와 똑 닮은 남자가 검은 양복을 걸친 채 삐딱하게 앉아 있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마피아를 마피아라고 부른 게 무슨 죄란 말인가. 남자는 당장 방음총을 꺼내 죽일 기세로 해리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서류 속 자리하고 있는 남자의 사진 옆에는 그의 전적과 현재의 정보가 실려 있었다. ‘이탈리아 마피아계인 마아시야 조직 내에서 일했으며 몇 건의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일련의 계기로 손을 씻고, 7년간의 복역도 마쳤음. 이제는 다운타운에서 사업가로 변신해 자신이 합법적인 수단으로 돈을 벌고 있다고 주장.’ 이런저런 내용까진 괜찮았다. 그러나 ‘현재도 그의 숍이 가짜 비아그라와 환각제 등의 유통 창구로 이용되고 있을 가능성이 큼’ 부분을 읽을 때는 심리적 충격이 상당했다. 벤은 충격에 눈을 깜빡였다. 그는 서류 속 사진과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를 번갈아 바라봤다.
블란델이 미간을 찌푸리며 실소했다.
“내 얼굴이 너무 잘생겼나?”
“당신이 다운타운 노상 살인 사건 참고인 블란델 마아시야 맞습니까?”
벤은 실물과 많이 다른 사진을 노려보며 물었다. 사진 속 남자는 딱 봐도 ‘마피아’ 인상이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립밤을 안 발랐더니 사람이 달라 보인다고 하더군. 립글로스는 꼭 챙겨 바르려고 하는데, 원체 바빠서 말이지.”
남자가 거슬거슬 일어난 입술을 신경질적으로 긁으며 말했다.
“그리고 누굴 마피아 취급해서 이래라저래라, 오라 가라 하는거야. FBI라면 다 그래도 돼? 자네들 법 공부는 제대로 하고 그 짓 하는 거야? 영장은 있어?”
마크가, 아니 블란델 마아시야는 성질이 치받는지 흰 드레스 셔츠의 단추를 세 개까지 풀어헤치고 불량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벤을 올려다봤다. FBI 앞에서도 다짜고짜 영장 타령을 해대는 게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은 건달 꼴이었다.
동료 해리가 벤을 가리키며 능글맞게 응수했다.
“여기 벤 기옌 수사관은 로스쿨 출신이야. 변호사로 있기 아까운 친구라 FBI에서 스카우트했지.”
해리의 말은 허풍에 가까웠다. 벤은 시험을 봐서 FBI에 들어왔다. 로스쿨 졸업 후 어느 기점에서 벤은 자신이 변호사보단 수사관에 어울린단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 그는 법전 속에 숨어 있는 빈틈을 발견해 죄지은 사람을 돕는 것보단 개개의 범죄 속 인과 관계를 밝혀내고 그 이면에 있는 악에 가까운 이를 잡아내는 일에 소질이 있었다. 전직 마피아 남자는 벤의 사정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자기 용건으로 화제를 돌렸다.
“차이나타운의 사냥개가 우리 미용실 앞에서 죽은 건 나랑 관련이 없어. 당신들 전혀 헛짚었어.”
해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사냥개는 흑사회에서 행동 대장 역할을 했던 사내야. 블란델 당신이 지금 흑사회의 라이벌인 두백파 보스와 친분이 있는 건 알려진 일이지. 왜 하필 차이나타운 마피아가 적 조직의 안마당까지 가서 일부러 거기서 나자빠지는지 난 이유를 모르겠군.”
“두백파 보스와의 친분? 보스의 애인이 우리 숍의 단골인 게 다야. 사냥개가 왜 내 가게 앞에서 죽었는지 내가 어찌 알겠어. 당신들도 중국 마피아들이 어떤지 알 것 아냐. 그 친구들은 자존심만 세고, 한번 싸움이 붙으면 한쪽이 죽을 때까지 계속 싸우지. 몽둥이를 든 남자들처럼 서로 머릴 깨 가며 악마같이 싸우는 치들이 그렇게 싸우다 엉뚱한 데서 쓰러진 걸 나더러 어쩌라는 거지?”
블란델은 사냥개가 쓰러진 이유를 다 알고 있단 냄새를 풀풀 풍기며 취조에 응했다. 해리가 건방진 태도에 상대를 노려보고 있을 때, 벤은 옆에서 전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몽둥이를 들고 싸우는 남자들은 고야가 말년에 남긴 그림 중 하나였다. <곤봉 결투>, 전직 마피아 남자가 왜 그 그림을 언급했는지, 벤은 남자를 탐색하듯 훑어보았다.
“당신이 그날, 두백파 보스와 만나는 걸 본 사람이 있어. 게다가 범죄 시각에 당신은 미용실에 나오지 않았고 내놓을 알리바이도 없지.”
“뭐야, 내가 청부 살인이라도 했을 것 같나?”
“증거를 찾기 위해 당신 미용실을 압수 수색하고 스텝들을 소환 조사할 건데, 순순하게 협조하시지.”
“미쳤어? 미용실 앞에 범죄 현장이란 테이프를 붙이기만 해봐. 당장 고발할 거야! 우리 미용실이 그렇게 만만한 데인 줄 알아? 할리우드의 모든 제시카들이 우리 디자이너들 손님이라고. 제시카 알바, 제시카 심슨, 제시카 비엘!”
“정말로 그 여자들이 당신 미용실에서 머릴 해?”
감탄하는 해리를 블란델이 딱하단 표정으로 비웃었다.
“-의 스타일을 원하는 제시카들이 우리 미용실이 없으면 엉망이 된 머리로 거리를 활보하게 된단 말이었어.”
“…….”
해리와 블란델은 으르렁거리며 농담 따먹기를 빙자한 신경전을 계속했다.
그 웃기는 광경을 멀거니 지켜보고 있던 벤이 다짜고짜 블란델에게 달려들어 셔츠의 벌어진 틈에 손을 넣어 넓게 벌렸다. 블란델의 가슴이 훤하게 드러났다.
“벤?!”
“뭐야?!”
벤의 정신 나간 행동에 블란델의 귀에 솜털이 곤두섰다. 벤은 블란델의 가슴, 정확히 말하면 쇄골 아래 가슴 근육이 시작되는 부분에 새긴 문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블란델은 자신의 맨살을 바라보는 청년의 눈빛이 야릇하다고 느꼈다. 청년은 소위 잡아먹을 것 같은 눈으로 블란델을 바라보았다.
“이건 뭐죠?”
영어가 아니어서 벤은 가슴에 새긴 문신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블란델은 기묘한 기운을 품고 달라붙는 청년에게서 떨어져 단추를 끝까지 채우고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라. 내 인생 신조야.”
해리가 뒤에서 픽 웃었다. 조직의 이인자까지 부상할 수 있었던 블란델이 감옥에 간 데는 내연녀의 배신이 결정적 기여를 했다. 블란델 마아시야은 젊었을 때부터 여난에 시달렸던 남자였다. 그중 가장 스펙타클한 사건은 양다리를 걸쳤단 사실을 알아낸 내연녀가 칼로 그를 찌른 일이었다. 생명이 위험해진 남자는 결국 돈 가방을 들고 제 발로 병원에 갈 수밖에 없었다. 그가 혼수상태에 빠진 채로 신을 접하고 앞으로는 착하게 살겠다고 다짐했던 그 순간, 병원 기록을 조회하고 몰려든 연방수사관들은 그를 감방에 처넣을 서류를 넉넉한 시간을 갖고 차분히 작성하고 있었다. 그의 숙적인 사촌 ‘독사’ 밸릭스 마아시야는 블란델의 곤경을 잘 활용했다. 블란델이 출소했을 때 구역은 정리가 다 끝난 상태였다. 소위 개털이 된 블란델은 이길 수 없는 싸움과 갱생의 길 중 후자를 택했다. 모두를 놀라게 한 건 블란델이 보기보다 ‘합법적’ 사업 수완이 좋았던 점이었다. 그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조직에서 나온 뒤 지금은 다운타운에 꽤 유명한 미용실과 몇 개 업소의 주인이 됐다.
어찌 됐든 블란델은 그 이후 여자들을 멀리했고 조심했다. 13살 때 들었던 ‘넌 꼭 여자 때문에 망할 거다.’란 아버지의 저주를 마음에 새기고 가슴에도 경구로 남겨두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에 주먹을 쥐고 떨고 있는 블란델의 손을 거구의 청년이 다소곳하게 쥐어왔다. 청년은 블란델의 검지와 중지에 새겨진 문신을 후벼 파듯 바라보고 있었다. ‘B’와 ‘M’ 블란델 마아시야와 그를 지지하는 이들은 맹약을 맺으며 블란델 마아시야의 이름 머리글자를 문신으로 새겼다. 벤은 그것을 전혀 다르게 해석했다. 문신은 고야의 그림 속 알바가 끼고 있던 반지를 연상시켰다. 고야와 알바의 머리글자를 새긴 반지처럼 블란델의 손가락에는 ‘B’와 ‘M’ 벤과 마크의 머리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럼 남자는 어떤데요?”
“……뭐?”
블란델이 벤에게 손을 붙잡힌 채 그대로 굳었다. 해리가 들고 있던 서류를 떨어뜨렸다.
“여자가 싫다면 남자는 어떠세요?”
벤은 얼굴 가득 홍조를 띠고 전직 마피아를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FBI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벤은 마크를 똑 닮은 남자를-그것도 전과가 있는 남자를-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괴이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벤은 불현듯 정수리에 찬물을 들이붓는 듯한 날카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자신이 진로를 바꿔 FBI 수사관이 된 것은 이 남자를 만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셔츠 안으로 보이는 가슴은 생전 마크의 몸보다 단단했지만, 빗장뼈 쪽으로 내려가는 아래쪽은 떡 벌어진 어깨에 비해 가늘었다. 사내의 맨살에서, 손가락 끝에 스쳤던 찰나의 심장 박동에서 벤은 그가 마크일 거란 확신을 얻었다.
이 세상에 마크가 또 한 명 존재한다면, 눈앞 이 남자가 바로 그일 것이다. 벤은 라이언이 귓전에서 피식거리며 웃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다.
“난 당신에게 첫눈에 반한 것 같은데요.”
“!”
해리의 이죽거리는 말에도 전혀 변화가 없던 사내가 벤의 말 한마디에 지구인이 뱉을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일어섰다. 그는 우당탕 소리를 내며 초속의 스피드로 짐을 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그 시간에 왜 두백파 두목이랑 있었던 줄 아나? 그놈이 나한테 계속 집적거리기 때문이었어. 자기 여자친구를 끼워서 3P를 해달라고 졸라대는 놈이랑 호텔에서 몸싸움을 하느라 미용실 일을 못 봤던 거야. 내 알리바이는 충분하니까 미용실 수사 따윈 꿈도 꾸지 말라고!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족속이 누군 줄 알아? 그건 호모야 호모! 감옥에서 난 느꼈어. 호모들은 없어져야 할 악의 축들이야. 이 암세포 같은 놈들!!”
블란델은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내며 취조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욕을 뱉으며 달려가는 소리가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들려왔다.
“벤…….”
해리가 벤을 불렀다. 벤은 홍조 띤 얼굴로 눈을 반짝이며 블란델이 흘리곤 간 휴대폰을 소중하게 들고 있었다. 소름 끼치는 장면이었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국 벤은 억울하게 누명을 쓸 뻔했던 블란델로부터 자백을 받아냈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지.’
해리는 블란델의 일을 잊어버리기로 했다. 해리의 부름은 전혀 듣지 못한 채 휴대폰 안의 번호만 따내고 있는 벤의 모습을 보고 있기가 두려워 해리는 현실 도피를 했다.
“한 번만 더 잡아넣어 조사하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신이 나간 게 확실했던 벤이 정상적인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아니라고 자백했잖아.”
“거기에 대한 물증을 확보하고, 그가 두백파에 대한 정보 중 아는 게 있다면 얻어내야죠.”
“어떻게?”
벤이 성추행을 하며 쫓아버렸으니 블란델을 다시 데려오긴 매우 어려울 것이었다. 해리는 눈을 흘겨 떴다. 벤이 서류를 정리하며 말을 받았다.
“블란델의 미용실엔 솜씨 좋은 문신사들이 많다고 평이 자자하더군요. 그들 중엔 비용만 내면 미성년자에게도 고급 타투를 새겨주는 장인들도 있답니다. 미성년자 문신 시술은 불법이죠. 몇 명 명단이 있으니까 부모들에게 문신사를 고용한 미용실을 고발할지, 부모들이 고발당하는 쪽을 택할지 찔러보죠.”
“자넨 이쪽이 천직이군.”
해리의 칭찬 아닌 칭찬에 벤은 멋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거리를 벗어나며 전직 마피아 남자는 돋아나는 소름을 억제하지 못하고 온몸을 긁어대고 있었다. 벤은 수사관이었고 사악하게도 블란델 마아시야의 집 주소와 가게 주소를 모두 꿰고 있었다.
벤은 사내가 집에 도착했을 시간을 계산해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통화가 연결된 달칵거리는 소리가 났다.
“여보세요. 거기 블란델 마아시야 씨 댁이죠.”
그렇습니다. 누구시죠? 마크의 목소리로 남자는 전화를 받았다.
벤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미소 지었다. 락온(lock-on). 이제 시작이다. 지난 몇 년, 벤은 마크를 그대로 보내버린 뒤 많은 밤을 후회로 지새우며 얻은 게 있다. 그것은 반한 상대를 빨리 자각하는 감수성과 마음 안에 들인 상대를 어떻게든 놓치지 않는 집요함이다. 과거 벤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놀라 뒤돌아봤을 음험한 표정으로 벤은 자신이 미리 짜놓은 시나리오를 블란델에게 내놓았다. 공권력을 사적으로 활용하는 FBI 청년의 덫에 블란델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침묵을 고수했다.
“제가 내일 오전에 직접 찾아뵙도록 하죠. 아, 거기 남자 손님도 받나요? 컬을 손질할 필요가 있어서요.”
“손님, 죄송하지만 내일 오전엔 이미 예약이 다 찼습니다.”
블란델의 살벌 + 상냥한 목소리는 매우 매력적이었다. 으드득, 이를 갈면서도 결코 무례한 말은 하지 않는다. 벤은 즐거워졌다. 귀를 빨갛게 만들며 화를 뿜어내고 있을 남자가 어렵지 않게 눈앞에 그려졌다.
“그럼 내일은 일로만 만나겠군요. 내일 뵙도록 하죠. Hasta manana, Mi Amore.”
내일 봐요, 내 사랑. 벤은 히죽 웃으며 전화기를 내렸다. 전화기 너머에서 블란델이 내뱉는 욕이 들려왔다. Come mierda!! Mama guevo!!
똥이나 처먹으란 욕은 좀 충격적이었지만, 뒤의 욕은 벤에게 욕이 아니었다. 사내놈 거길 빨라는 말은 상대를 잘 봐가면서 써야 하는 욕이었다. 벤은 욕이 욕이 아니게 될 날을 기대하며 사악하게 웃었다.
벤은 고야의 그림을 바라보며 하릴없이 재능 없는 그림을 그리던 나날이 분홍빛으로 변하리란 예감을 느꼈다. 검은 개의 모습에 자신을 이입하며 시린 가슴을 부여잡고 우는 나날은 오늘로 끝이다.
길길이 날뛰는 블란델이 자신을 돌아봐 줄 가능성은 어쩌면 제로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벤은 절망적이던 사랑을 너무 뒤늦게야 이뤘던 이를 알고 있다. 실패와 성공을 따지며 사랑을 가늠하는 짓은 무의미했다. 혹 그 과정의 끝에 실패의 딱지가 붙더라도 그 여정은 잔인할 정도로 달콤할 것이다.
서랍 속에서 드로잉을 꺼내 보았다. 익숙한 필체를 보는 것만으로 미소가 입가에 머금어졌다.
“마크, 당신이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기뻐요.”
그게 설령 진짜가 아닐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벤은 액자의 유리에 익숙한 동작으로 입을 맞추었다. 마크가 자신에게 건넸던 꽃다발에서 풍겨오던 향기가 유리 너머에서 풍겨오는 듯했다.
길이 끝난 곳에서 다시 길이 이어졌다. 벤은 다시금 사랑에 빠졌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