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 - 오로지 당신만 7
그들은 호숫가에 도착했다. 벤은 기어이 차를 멈춰 세웠다. 마크가 애타는 얼굴로 벤을 바라봤다. 유령은 차라리 차를 몰고 정문을 돌파하는 계획대로 움직여야 했던 게 아닌지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크와 벤이 정문을 통과하기 위해선 호숫가에 점점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잘 걷던 마크는 호수에 언뜻 비친 잔상에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각종 부유물로 검게 물든 호수 한가운데에서 이리저리 뱀처럼 움직이는 긴 물체가 보였다. 물고기치고는 너무 컸다. 마크의 몸이 두려움으로 잔뜩 굳었다. 물러서려는 걸 막고 벤은 마크가 억지로 그것을 보게 만들었다.
“그녀는 알바가 아니에요.”
“그녀에게 내가 잡혀가면 이번에도 날 구해줄 자신은 있나?”
“그녀가 당신을 지옥으로 끌고 갈 일은 없어요. 당신은 자살하지 않았어요. 당신은 커디스를 구하러 물속으로 들어갔고, 살고 싶어 허우적거렸어요.”
벤의 말이 맞을까. 마크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자신이 커디스를 구하려 했던 건 사실이나 더는 고통 받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맘이 있었던 것도 부정하기 어려웠다. 무엇이 옳을까. 후자라면 그는 지옥에 가야 했다. 벤이 마크의 손을 쥐었다.
“난 맥주병이고 물 공포증이 있어요.”
“그래서 못 구해줄 걸 미리 사과하는 건가.”
“벽장 안에 들어가서 당신 꿈을 따라가다 당신이 물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걸 봤어요. 구할 능력도 없으면서 난 당신을 따라 바닷물에 뛰어들었어요.”
“…….”
“당신이니까 그랬어요. 이번에도 구할게요. 걱정 마요.”
멍하니 벤을 올려다보던 마크는 시야의 바깥에서 무언가 불길한 게 어른거리는 걸 느꼈다. 그것은 물에서 빠져나와 땅으로 기어오르는 여자의 끔찍한 형체였다. 파충류처럼 네 다리로 바닥을 기어오는 여자의 나신 위로 검은 머리칼이 어지러이 달라붙어 있다. 진흙 덩어리가 더덕더덕 붙은 그것은 인간의 머리칼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흉측했다. 자신을 지옥으로 잡아가려 다가오는 여자의 모습에 마크는 무릎이 떨렸다. 몸이 무너지려 한다. 여자의 모습이 자신의 미래이기도 하기에 더욱 두려웠다. 벤의 말을 확인해보려던 용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크는 벤에게 붙들린 몸을 빼내려 발버둥쳤다.
“놔, 이거 놔!”
“마크, 정신 차리고 똑바로 봐요!”
뭘 보란 소린가. 여자의 거대한 입안으로 머리를 처넣고 두 줄로 난 작은 톱니 모양 이빨을 감상이라도 하란 소린가. 썩은 입안과 거대한 송곳니에 오금이 저렸다. 시야가 좁아져 이빨 외엔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
“저, 저걸 봐. 나, 날 공격하지 않을 거라고?!”
“저 여잔 알바가 아니에요. 당신도 똑똑히 봐요!”
“웃기지……!”
마크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괴물이 다가와 마크의 몸을 벤에게서 낚아채 호수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벤!!” 마크는 비명을 질렀다.
벤은 마크를 구해주지 않았다. 마크는 그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처음부터 벤이 이러려고 그를 호숫가로 데려왔을 거란 생각이 번쩍 머릿속에 떠올랐다. 괴물에게 줄줄 끌려가면서 마크는 ‘지옥’이 자신을 농락하기 위해 벤에 대한 기억을 이용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마크를 절망하게 만들 장치로 벤 만한 존재도 없었다. 힘이 빠졌다. 몸이 쑥 검은 물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호수의 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질척한 물속에서 여자는 웅크린 채 모비딕처럼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마크는 노랗게 마른 풀을 움켜쥐고 버텼다.
“마크, 그녀에게서 도망치려 하지 말고 그녀의 말을 들어줘요!”
“벤자민-!”
“마크, 정신 차리고 그녀를 봐요!”
“벤, 도와줘! 차라리 네가 내 시신을 태워. 잡혀가고 싶지 않아!”
마크는 호숫가의 괴물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벤만 바라봤다. 푸른 눈에 떠오른 원망을 읽고 벤은 기가 찼다. 벤은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당신을 속이지 않아요. 마크, 내 말을 믿어요. 그녀를 바라봐줘요!”
마크가 전혀 믿지 않는단 얼굴로 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원망과 회한이 가득 찬 마크의 눈빛에 벤은 심장이 쑤셨다. 청년은 신용이라곤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신음했다. 벤은 목청을 높여 외쳤다.
“그녀의 목에 걸린 걸 봐요. 금빛 펜던트! 알바가 언제 그런 걸 한 적이 있나요?”
괴물의 머리칼에서 떨어지는 호숫물과 진흙 때문에 마크는 뒤를 돌아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벤은 제발 그녀를 좀 보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금빛 펜던트가 어쨌다는 건가. 마크는 부들부들 떨다 벤의 닦달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렸다. 역한 비린내가 훅 끼쳤다. 새까만 얼굴과 끔찍한 이빨, 소름이 쫙 끼쳤다. 비명을 지르고 도로 몸을 돌리려던 마크는 벤의 말대로 괴물의 목에 꽤 아름다운 세공의 펜던트 목걸이가 걸려 있는 걸 보았다. 어디서 본 적 있는 목걸이다.
“사진 속, 커디스 르메이의 목걸이와 같잖아요!”
“……어떻게.”
괴물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브라운관 속 간섭 현상처럼, 검은 여자 주변이 일그러지고 흔들렸다. 괴물이 마크를 끌어당기는 힘이 누그러졌다. 그 틈에 벤이 달려와 마크의 몸을 호숫물에서 끌어냈다.
“나를 믿어요. 그녀가 당신을 죽일 맘이었으면 이미 진즉 그렇게 했을 거예요. 그녀는 알바가 아니에요.”
“그녀가…… 커디스라고?”
벤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굳어 있던 마크는 괴물이 멀찍이서 자신을 지켜보기만 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그를 끌어 당기지지도, 이빨을 드러내고 위협하지도 않았다.
“왜 그녀가 여기 있는 거지?”
“난 알 것 같은데요.”
벤이 검지로 한 곳을 가리켰다. 커디스의 한쪽 팔이 구부러져 있었다. 무언가를 꾹 쥐고 있는 모양새였다.
“마크, 손 펴 봐요.”
“?”
마크는 벤이 시키는 대로 손을 폈다. 석상처럼 굳어 이쪽을 바라보기만 하던 괴물이 시익시익 공기가 새는 듯한 신음을 냈다. 그녀가 점점 이곳으로 다가왔다. 물비린내 역한 괴물이 점점 다가온다. 검은 얼굴과 푸르스름한 입술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도, 도망쳐야 해.”
“괜찮을 거예요. 참고 버텨요. 무섭다고 여기서 물러나면 절대 안 돼요.”
벤이 몸부림치는 마크를 끌어안고 말을 이었다. “!” 괴물이 점점 다가왔다. 마크는 목이 바짝 탔다. “으……으…….” 두려움에 마크는 다시 손을 오므려버렸다. 벤이 손가락을 하나하나 폈다. 활짝 펴진 손안에 무언가 묵직한 것이 놓였다. 마크는 눈썹을 찌푸리고 물건을 확인했다.
“아……!”
금속성의 물체였다. 두 개의 유리알을 지탱하고 있는 가느다란 프레임은 마크에게 낯설지 않았다. 그의 안경이었다.
“알바가 이걸 왜?”
“알바가 아니라니까요. 당신은 왜 그렇게 사람 말을 안 듣나요?”
벤이 핀잔을 줬다. 마크는 그토록 간절히 찾았던 그의 안경이 왜 하필 괴물의 손에 들렸는지 의아했다. 마크는 어린 시절 이후 줄곧 안경을 썼다. 그것은 코 옆에 눌린 자국을 남기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이었지만 마크에게선 휴대폰보다 더 중요한 소지품이었다. 마크는 도수가 높아 꽤 묵직한 안경을 귀에 걸쳤다. 고도근시인 그의 눈이 오랜만에 제대로 된 교정시력을 얻었다. 마크는 고개를 들었다. 투명하고 밝은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거짓말처럼 세상이 밝았다. 유달리 하늘이 파란 겨울날이다. 차갑게 얼어붙은 대기 탓에 세상이 또렷하게 보였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그가 죽은 뒤 흐려진 망막과 비틀린 뇌로 비추어보았던 세상과는 많이 달랐다.
눈앞에 서 있는 여자는 알바가 아니었다.
마크는 사진에서 보았던 금빛 펜던트를 재확인했다. 여자의 목걸이는 호수 물에도 썩지 않고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사별한 커디스의 남편이 그녀에게 프러포즈하며 선물했다던 그 펜던트였다. 그녀가 늘 착용하는 물건을 왜 그동안 한 번도 알아보지 못했을까. 마크는 허탈해하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커디스…….”
그녀는 더는 악령이 아니었다. 여자는 벤이 보았던 사진 속 모습처럼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커디스가 환하게 웃었다.
-마크, 고마워요.
“……무슨 말이지?”
마크는 도통 이해 안 가는 소리에 말을 더듬었다. 당황한 그의 기색에 커디스가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풍성한 검은 머리칼이 아름답다. 한때 그녀가 몇 줌 남지 않았던 머리칼 때문에 서럽게 울어댔던 게 믿기지 않는다.
커디스를 구하러 바닷물에 뛰어들었던 그날의 기억을 더듬으며 마크는 당혹감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난 커디스를 돕지 못했어.”
“아뇨, 당신은 그녀를 구했어요.”
“그럴 리가.”
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봤어요. 기억해 봐요. 당신도 알 테니.”
마크는 자신의 심장을 얼어붙게 하던 겨울 바다의 차가움과 그 속에서 살기 위해 애썼던 순간을 떠올렸다. 커디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여인은 마크를 잡기 위해 발버둥치다 마크의 안경만을 쥔 채 깊은 바닷속으로 끌려들어 가고 말았다. 막 되살아난 기억 속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안타까워 마크는 멀거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커디스가 다가와 마크의 뺨에 감사의 입맞춤을 했다. 그건 인사였다. 괜찮아요. 마크, 난 이제 더는 아프지 않아요.
그녀의 키스에선 물 냄새가 났다. 그것은 좀 전의 고이고 썩은 호수가 뿜어내던 악취와는 달랐다. 좀 더 깨끗하고, 매우 포근했다. 어머니의 배 안에서, 양수 안에서 헤엄쳐 다닐 적 접했던 냄새가 이렇지 않았을까 싶다. 향기는 마크가 생전 품었던 비틀린 욕심과 그로 인해 생겨난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주었다. 모든 게 이상스레 편안해졌다. 마크는 그녀의 뺨에 입맞춤을 돌려주면서 자신의 마음이 외로움으로 인해 더는 시리고 아프지 않단 사실을 깨달았다.
벤은 마크의 얼굴에 떠오른 행복한 미소에 괜스레 조바심이 일었다. 알바 외에도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여자가 또 나타났다. 벤은 소리 높여 마크를 불렀다.
“마크!”
벤의 외침에 유령이 뒤를 돌아봤다. 화가 난 벤의 모습에 영문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교수가 이내 멋쩍게 웃었다. ‘이게 자네가 주겠다던 선물인가.’ 벤은 마크에게 정말 특별한 것을 주었다.
안경 너머로 마크는 청년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벤이 어떤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게 되자 마크는 더는 그가 두렵지 않았다. ‘오직 당신만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당신은 왜 그 여자의 곁에 있나요.’ 청년의 심통 난 얼굴이 그리 말해오고 있었다. 실감 나지 않았다. 벤이, 그의 벤자민이 그를 사랑했다. 얼떨떨한데, 절로 미소가 얼굴에 스몄다.
마크의 웃음에 벤은 화를 내던 걸 잊고 툴툴거리며 입만 삐죽였다. 벤의 예측이 옳았다. 커디스는 마크가 풀어야 할 마지막 매듭이었다.
여자는 호숫가로 걸어 들어간 뒤 빛과 함께 영영 사라졌다. 마크가 홀린 듯 그 빛을 바라봤다. 불안해진 벤은 다가가 어깨를 쥐었다. 마크가 놀람과 흥분이 뒤섞인 얼굴로 벤을 올려다보았다.
“벤 네 말이 옳았어. 커디스였어.”
“그러게요. 엄한 여자 앞에서 딴 여자를 부르며 비명을 질러대니, 커디스가 열 받는 게 당연하죠.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일 친했던 여자를 지옥으로 끌고 갈 괴물로 철석같이 믿어요?”
“지은 죄가 많아 그랬지. 난 내가 이렇게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줄 미처 몰랐거든. <매트릭스> 속 네오 같잖아. 내가 괴물이라고 생각하면 괴물로 보이고, 내가 아름다운 여자란 본질을 알아보면 다시 아름다운 여자로 보이다니, 놀랍지 않나.”
유령이 엉뚱한 데서 흥분해 외쳤다. 마크를 놓아주지 않았던 ‘대학’이란 이 공간은 어찌 된 영문인지 마크의 의지대로 공간이 일그러지고 변화되었다. 심지어 벤마저도 그의 꿈에 휩쓸려 이리저리 시공간을 이동하지 않았던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일에 당황하고 기겁해야 마땅한데, 마크는 그저 자신의 힘에 감탄하며 즐거워할 뿐이다. 벤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꿈이라서 그렇죠.”
“그렇지.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게 이루어지는 꿈. 만약 내가 지금 자네를 드레스 입은 여자로 만들고 싶다면…….”
마크가 입술 끝을 말아 올리며 웃었다. 벤은 불길함을 느꼈다.
“마크?”
“자넨 만티야를 써도 꽤 어울릴 것 같아. 어때, 한번 해보려나? 알바 공작부인처럼 포즈를 취해 봐. 난 그녀의 반지부터 금빛 토시, 검은 드레스의 레이스 하나하나까지 모두 상상 가능해. 6피트 반으로 늘려서 자네에게 입혀주지.”
벤은 발밑의 감촉이 묘한 데 기겁했다. 그가 조금 전까지 밟고 있던 잔디밭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서걱거리는 모래사장이 나타났다. 쏴아쏴아- 근처에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날씨마저 따뜻하다. 당연하다. 추억 속 바르셀로나는 1월임에도 따뜻했었다. 잠시 추억에 빠졌던 벤은 발등을 간질이는 레이스의 감촉에 고개를 숙였다. 마크가 만들어낸 스페인 어딘가의 해변 모래밭 위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Solo Mark'
오직 마크만을. 벤은 인상을 썼다. 검은 드레스가 지독히 거추장스럽다. 신경질을 내며 치맛단을 그러쥐자 그 모습을 보고 마크가 껄껄 웃는다. 잇몸을 드러내고 히죽히죽 웃는 모습에 벤은 허, 헛웃음을 지었다. 참으로 얄밉게도 웃는다. 과연 자신이 하려는 일을 알고도 저리 웃을 수 있을까. 벤은 풍성한 치마를 한 손으로 잡아 그러쥐고는 성큼성큼 유령에게 다가섰다.
“당신 취향이 참 고급스러워요.”
“?”
“드레스를 입은 사람에게 안기는 게 당신의 숨겨진 욕망인 줄은 몰랐네요.”
벤이 마크를 밀어 모래사장 위에 눕혔다. 마크의 하반신이 풍성한 드레스 사이에 묻혀버렸다. 벤은 붉은 공단 허리띠를 풀어 마크의 머릿밑에 깔아주었다.
“벤?”
투둑, 벤은 드레스 가슴 부분에 묶인 끈을 거칠게 떼어 냈다. 이제 좀 숨을 쉬겠다. 맨 가슴을 드러낸 벤을 마크가 창백한 얼굴로 올려다본다. 붉은 공단 덕에 마크의 금빛 머리칼과 창백한 피부가 도드라졌다. 그 모습이 마치 벨벳으로 장식된 관 속에 있는 시신처럼 보였다. 벤은 가슴이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한 불길한 예감에 벤은 마크를 끌어안고 뜨겁게 키스하려던 욕망을 잠깐 잊었다.
벤은 대학을 떠나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리란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마크는 이곳을 떠나는 즉시,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천국’이라는 곳으로 떠나버릴지도 모른다. 마크는 유령이고, 죽은 사람이며 이 세상이 아닌 또 다른 먼 곳으로 가야 한다.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가슴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성불? 개나 주라지.
“절대 못 보내요.”
“……자네, 내가 단골 브레첼 가게에 가려 했던 걸 어떻게 알았나.”
마크가 잔뜩 쫀 목소리로 말했다. 초조해하는 벤에게 마크는 성불하기 전에 꼭 브레첼을 먹고 가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벤은 맥이 탁 풀렸다.
“지금 이 상황에 브레첼을 처먹겠단 소리가 나와요?”
“새우 브레첼이야. 신메뉴 소개 광고만 보다 죽었는데, 영영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가만, 안경이 생겼으니 못다 본 DVD도 다 보고 갈 거야.”
“그러니까, 어딜 가겠다는 건데요?!”
마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왜 그런 걸 물어? 당연히 난…… 음, 천국이든 어디든, 죽은 사람들의 세계로 가겠지.”
“날 놔두고요?”
“당연하잖아. 넌 산 사람이야. 네가 어떻게 날 따라와.”
“못 따라가는 건 알아요. 그러니 당신이 안 가면 되잖아요.”
“벤…… 말이 달라. 넌 얼마 전까지 왜 내게 저승에 가지 않느냐고 닦달을 해댔어. 이제 와 가지 말라고 하는군.”
말문이 막혔다. 벤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마크가 다 알면서 일부러 멍청하게 구는지, 아니면 그동안 벤에게 서운했던 게 억울해 괜히 딴소리를 내뱉는지 모르겠다. 당연하게 자신을 두고 떠날 거라 말하는 그가 벤은 야속했다.
“당신이 가버리면 난 아프고, 슬퍼서 매일 엉엉 울 거고, 그러다 바짝바짝 말라 죽을 거예요. 밥을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고, 잠을 자고 난 뒤에도 늘 피곤할 거예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겠죠. 시간이 쏜살같이 날아가 삼십 년, 사십 년, 오십 년이 눈 깜빡할 새 사라졌으면, 그래서 어서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할테죠. 난 당신을, 죽은 사람을 사랑해요. 우리 사이는 대판 싸우고 이별한 뒤, 다음날 전화해서 다시 만날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에요. 당신이 사라져버리면 난 이대로 영영 당신을 못 보게 돼요. 기한도 담보도 없이 혹 내가 죽은 뒤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그깟 기대 하나에 목매고 평생을 살아야 해요. 그게…… 얼마나 대책 없이 잔인한 짓인지 모르지는 않겠죠.”
벤의 아래서 마크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난처한 얼굴로 벤의 부드러운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벤, 네가 울먹이면 난 정말 어쩔 줄 모르겠다.”
“모르겠으면 모르는 대로 그냥 이렇게 있어요. 내 곁에서.”
“어떻게? 넌 네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야 하잖아.”
“마크, 방법이 있을 거예요. 이 공간의 주인은 당신이에요. 이 공간을 연장시키는 걸 시도해 봐요. 긴 길을 만들어서 그 길을 통해 나를 따라와요.
“재미난 얘길 하는구나. 벤, 넌 변호사가 될 게 아니라 월가에 갔어야 해. 공수표 남발하는 실력이 은행가들 못지않아.”
마크가 벤의 뺨을 어루만지며 피식거렸다. 벤이 그 손을 잡아챘다.
“가능해요. 어떤 방법이든 우린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벤은 마크와 손가락을 얽고, 붉은 공단으로 자신의 팔목과 상대의 팔목을 묶었다.
“어처구니없는 고집이야.”
“내가 반한 상대가 어처구니없게도 당신이고, 내가 그로 인해 정신이 나갔다고 해서 그게 뭐 나쁜 일이겠어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과 무슨 수를 쓰든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벤은 자신의 몸을 갖다 붙이며, 자신의 감정도 함께 밀어붙였다. 멍하니 벤을 올려다보던 유령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기쁜 건지, 화난 건지 알기 힘든 미묘한 표정이었다.
“……델 것 같다.”
“네?”
마크가 뜬금없는 소릴 했다. 벤은 자신의 사랑이 뜨거워 델 것 같단 말을 마크가 하는 줄 알았다. 마크가 연이어 실망스러운 말을 이었다.
“모래가 뜨거워.”
“기다려요.”
벤은 치마를 쭉 찢어 나풀거리는 검정 드레스를 마크의 몸 아래 깔아주었다. 검은 비단 드레스에 싸인 마크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빙글빙글 웃었다. 글렀다. 마크는 도통 벤처럼 심각해질 기미를 안 보였다. 벤은 잔뜩 얼굴을 찡그렸다.
“약속해요. 날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해. 약속해.”
“그렇게 웃지만 말고 진지하게 말해줘요. 믿음이 안 가요.”
“정말이야. 어떤 모습이든, 어디에 있든 난 결코 널 버리지 않을 거야.”
“조건은 떼고 다시 약속해줘요. 내 곁에 있으면서, 날 버리지 않겠다고.”
마지막 부탁에 마크는 슬쩍 웃으며 시선을 피해버렸다. 떼를 쓰는 벤에게 대충 고개를 주억거려 주곤 확답은 피한다. 벤은 약이 올랐다. 드레스 사이 파묻힌 다리를 쓰다듬자 마크가 웃음을 터트렸다.
“‘지상에서 영원으로’라도 찍으려고?”
마크와 벤, 둘 다 말로 벌어 먹고사는 직업을 갖고 있건만, 벤은 마크에겐 영 말로 상대가 안 됐다. 벤은 이죽거리는 그 입을 입술로 막았다.
마크가 먼저 일어섰다. 벤은 자신의 품을 벗어나 바다로 향하는 남자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여차하면 그대로 뛰어들어 도로 끌어낼 참이었다. 마크가 만들어낸 건 따뜻한 여름 바다니 어려울 것도 없다.
마크가 안경을 벗고 파도가 찰싹거리는 바닷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닷물이 그의 발목을 적셨다. 벤은 일어서 언제라도 뛰어들 수 있게끔 자세를 잡았다. 이리저리 뒤척이는 통에 벗겨진 안경은 테와 알이 모래로 더러웠다. 벤의 몸을 받아내며 진저리쳤던 마크가 아예 손끝으로 쳐내 모래밭에서 한바탕 크게 뒹군 탓이 컸다. 마크가 몸을 숙여 안경을 물에 담갔다. 파도가 유리에 붙은 모래알을 씻어갔다. 그는 도로 몸을 일으켰다. 등과 팔꿈치, 머리칼에 붙어 있던 모래알이 금빛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벤은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봤다. 태양 아래 마크의 금빛 머리칼이 눈부시게 빛났다. 빛 아래서 남자는 낯설 만큼 아름다웠다.
안경을 씻어낸 마크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자신이 만들어낸 공간을 돌아보았다. 한 폭의 초현실주의 그림이 눈앞에 있었다. 1월의 겨울 풍경 속에 갇힌 대학 내 호수 옆에, 새파란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여름 풍경이 맞닿아 있다.
언덕 위,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심어놓은 나무들은 누군가의 관리를 받은 양 목대가 굵었다. 태풍 뒤 여기저기 부러진 나뭇가지에선 여름 향기가 진하게 흘렀다. 마크는 그 냄새가 젊은 시절, 늦봄 정원에서 맡곤 하던 냄새와 똑같은 데 놀랐다. 저 멀찍한 곳에서 풍겨오는 여름 들꽃의 향기는 휴가가 시작되던 아침, 따가운 햇살에 콧잔등이 벌써 아린 데 놀라워하며 하릴없이 정원을 노닐었던 이십 대 중반의 한 날을 떠올리게 했다. 여름과 겨울, 나이 든 시절의 기억과 젊은 기억이 함께 어깨를 붙인 채 서 있다. 마치, 인생의 인상적인 장면들을 긴 종이 위에 일렬로 늘어뜨려 놓은 것 같았다. 나열된 추억들은 사계에 발을 딛고 고루 흩어져 있었다.
애잔함과 푸근함을 닮은 어떤 감정이 마크의 마음속에 가득 찼다. 그것은 무어라 이름 짓긴 어려웠으나, 굳이 이름을 단다면 ‘행복함’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감정이었다. 벤이 다가와 풍경을 들여다보고 있는 마크의 손을 쥐었다. 따스했다.
“이상하군. 난 내 젊은 날이 춥고 슬프기만 한 줄 알았는데.”
벤이 다가와 어미 새가 새끼 새를 안듯 그 커다란 몸으로 마크를 껴안았다.
“하기야, 슬프기만 한 인생은 없지. 그걸 잊고 있었어. 내 삶 속 행복한 일들이 꽤 많았단 걸 잊고, 비참해하기만 했어. 실은 그렇지 않았는데 말이야.”
벤이 마크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숨이 간지러웠다. 마크가 빙긋 웃었다.
“벤, 널 만나서 괴롭기만 했던 건 아냐. 분명 즐거운 순간이 더 많았어. 이제야…… 기억나는군.”
마크는 손을 내밀어 벤의 손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었다.
마크가 호숫가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겨울이었고 추웠으나 벤과의 추억이 깃든 곳이었다. 유령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브레첼 가게를 찾아요?”
“아냐. 것보다 중요한 게 있어. 그게 뭔지 기억이 안 나는군.”
마크는 이마를 톡톡 두들기며 한참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오래된 나무, 철제 도시락, 흑인, 도시락 안에 편지가 있었지.”
“<쇼생크 탈출>이요?”
“맞아!”
마크가 쏜살같이 어디론가 달려갔다. 마크는 로지폴소나무가 늘어선 곳까지 달려가 그중 가장 큰 나무 아래 멈춰 섰다.
“이 나무는 대학 창립자가 직접 심었대. 오래도록 베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지.”
마크는 나무의 밑동 근처를 팠다. 검은 천 가방 안에 철제 상자가 또 하나 들어 있었다. 유령은 그 안에서 액자 하나를 꺼냈다. 마크가 유언장에 언급했던 드로잉이었다.
“좀 늦었군. 약혼 선물일세.”
“왜 그때 안 주고 지금 주는 건데요.”
“그거야…… 내가 보기보다 소심한 면이 있어서 그렇지.”
마크가 의외로 순순히 인정했다. 벤은 더 묻지 않고 그림을 살폈다.
“제목이 뭐예요?”
“<집>”
벤은 액자를 어루만지던 손을 멈췄다.
“나와 벨라가 살 집을 그린 건가요.”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살기 위해선 집이 필요하니까. 축복의 의미로, 좋은 마음으로 주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더군.”
뒤끝 강한 교수는 벤에게 주려던 드로잉 액자를 고목 아래 묻었다.
“내가 이걸 언젠가 찾아내길 바랐던 거죠.”
“설마, 그저 충동적인 짓이었지. 증거로 난 자네에게 편지를 안 남겼잖아.”
“남겨야 했어요. 그래야 먼 훗날 이걸 우연히 파낸 사람들이 당신과 날 가지고 전설을 만들죠.”
“게이 노교수와 근육질 제자에 관한?”
“아름다운 얘기일 거예요.”
마크가 눈매를 휘며 웃었다. 브레첼 가게로 가겠다고 말은 하면서 마크는 정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둘은 커디스가 사라졌던 호수로 다시 돌아왔다.
“괜히 그녀를 오해해서 겁먹고 도망쳤던 게 문제였군. 이제 우린 여길 나갈 수 있을 거야.”
“천국이 저 바깥에 있나요?”
“그건 몰라. 하지만 저 밖에 나가야 한단 건 확실해.”
“그걸 어떻게 알죠?”
“느낌이야. 널 찾아 헤매다 난 원래 가야 할 길과 꽤 멀리 떨어진 길을 걸었어. 원래의 길이 저 밖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면 참 좋은 일일 테지. 영혼은 천국으로, 살날이 많이 남은 청년은 그의 집으로 돌아가게 될 테니까.”
“지옥이 없다고 말했던 사람이 누구였죠? 상황이 괜찮아 보이니까 이젠 맘이 좀 바뀌나 보죠.”
벤은 구두에 묻은 흙을 떼어내며 낮게 뱉었다. 눈 녹은 물에 대지가 축축했다. 마치 때 이른 봄 같은 날씨였다. 유령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받았다.
“천국이 싫은 사람도 있나?”
“지옥보다야 낫겠죠. 하지만, 그곳에 ‘나’는 없어요.”
“알아.”
마크는 너무 쉽게 인정해버렸다. 벤은 머쓱해졌다. 둘 사이 침묵이 오래도록 흘렀다.
“난 당신이 여기 좀 더 머무는 방안을 강구해봐야겠어요.”
마크가 눈을 껌뻑였다.
“날 엑소시즘 하는 게 자네 최종 목표 아니었나?”
“당신을 내가 어떻게요?”
“내가 괴물로 변하면 도망치겠다고 했잖아.”
“그전에 침대에 묶어두면 돼요. 정신 나간 당신을 제정신으로 돌리는 방법도 아는데, 뭐가 문제예요.”
그 방법이 문제였다. 벤은 꼭 색스러운 방법으로 정신 나간 유령을 현실로 데려오곤 했다. 마크는 말이 나온 김에 불만을 털어놓았다.
“왜 하필 그런 해괴한 방법으로 날 깨우는 거야?”
“난 당신이 그런 방법을 좋아해서 일부러 그러는 줄 알았는데, 아니에요?”
정곡을 찔린 유령이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마크는 벤을 좋아했다. 벤이란 존재도 좋았고, 벤의 몸도 좋아했다. 벤이 유령의 이지를 되돌려 놓기 위해 하는 -주로 성적인- 일들을 싫다고 말하기는 참 어려웠다. 마크는 깨달은 사실에 부끄러워져 이마를 문질렀다. 그동안의 일들로 벤은 이제 마크의 비밀을 다 알아버렸다. 마크가 자기 비하에 시달리며 생전 벤과의 섹스를 얼마나 망상하고 원했는지, 벤이 자신의 겉모습에 신경 쓰지 않고 사랑하는 연인으로서 자신을 동등하게 대해주길 얼마나 바랐는지 벤은 속속들이 다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얼굴이 홧홧하다. 마크는 습관적으로 자신의 거친 손등을 문질렀다.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괜찮나. 내 진짜 모습은 자네가 알다시피 그렇게 괜찮은 모양새가 아니잖아.”
벤은 유령이 자신의 거칠고 메마른 손을 불안하게 쓸어내리는 것을 보았다.
“당신이 어떤 모습이든 사랑해요. 그건 다 당신이니까요.”
벤은 마크의 이마와 콧날, 그의 입술에 입 맞추는 걸로 답했다. 몸을 굳히고 불안해하던 유령이 마지막 입맞춤에는 긴장을 풀고 입술을 맞춰 호응했다.
“내가 몇 번이나 더 드레스를 벗어야 믿을 건가요.”
누더기가 된 드레스를 쳐다보던 마크가 무얼 상상했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벤은 마크가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상상하지 않길 바랐다.
“자네에게 고백할 게 있네.”
“또 무슨 무서운 고백을 하려고 그래요.”
“너무 늦지 않은 것이면 좋겠어. 자네를 불편하게 할지도 모를 말이지만-.”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마크.”
벤이 선수를 쳤다. 어안 벙벙해 입을 벌렸던 마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기쁨과 당혹스러움이 얼룩진 표정을 바라보며 벤은 자신의 마음이 뭉클하게 일렁거리는 걸 느꼈다. 마크에게 바짝 다가갔다. 사랑해요. 당신도 나만 사랑한다 말해요. 널 사랑해. 좀 더, 좀 더 말해요. 벤은 열정적으로 속삭였고, 마크는 벤의 등쌀에 좀 더 느릿하고 구체적으로 자신의 속내를 고백해야 했다. 벤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채 함빡 미소 지었다.
마크의 꿈은 상식을 벗어난 공간이었다. 겨울과 여름 사이, 봄이 존재했다. 마크는 정문으로 걸어가는 길에 펼쳐진 꽃밭에서 시간을 지체했다. 마크가 꽃다발을 만드는 모습을 벤은 넋 놓고 바라보았다.
“왜? 늙은이가 꽃을 꺾으면 이상한가?”
“아뇨, 지나치게 어울려서요. 아름다워요.”
“정신 나간 소릴.”
마크가 귀를 붉게 물들였다. 마크는 여러 종류의 꽃을 꺾기 위해 꽃밭 깊은 곳까지 갔다. 벤은 그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마크가 한참 뒤 그가 만든 꽃다발을 벤에게 주었다. 마크의 뺨과 입술이 해바라기 잎에서 떨어진 물기로 젖어 있었다.
“사랑해, 벤. 당장 줄 것이 이것뿐이지만, 이 외, 내가 가진 게 있다면 다 널 줬을 거야. 항상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 살길 바란다.”
벤은 손을 내밀지 못했다. 모든 게 이리 끝나버릴 거란 생각에 말문이 막혔다.
“마크……누누이 말했지만 제발…….”
“볼 일은 다 끝났나? 마크, 이제 그만 가도 될까.”
낯선 목소리에 대화가 끊겼다. 벤과 마크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갤 돌렸다. 커디스가 떠난 호숫가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제임스?”
마크는 남자의 정체를 확인하고 눈을 깜빡였다. 제임스는 한 손에는 커피잔을 쥐고, 또 다른 손으로는 애완견의 목줄을 쥔 채 느긋하게 서 있었다.
“그래, 이 친구야. 자넨 너무 오래 헤맸어. 날 너무 고생시켰다고. 숨어 있는 자넬 끌어내느라 저 덩치 큰 애송이를 데려왔지. 내가 얼마나 귀찮았는지 아나. 이제 그만 갈 길을 가게나.”
“무슨 소린가?”
“제임스, 무슨 말을 하는 거죠?”
영문을 모르긴 벤도 마찬가지였다. 제임스가 힐끔 벤을 돌아봤다.
“자네도 그만 돌아가지 그러나. 자네 형이 자넬 데려가려고 기다리고 있던데.”
벤은 제임스가 라이언을 어떻게 아는 건지 궁금했다. 자신이 아직도 벽장 안, 마크의 무의식 속에 사로잡혀 있는 건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성미도 급하긴, 입구에서 못 기다리고 직접 왔군.”
제임스가 벤의 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배터리가 방전된 휴대폰이 다시 살아나 벨소리를 냈다. 벤은 전화를 받았다. 라이언이었다.
「벤, 그만 돌아가. 마크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제임스가 그를 잘 데려갈 거야.」
“뭐야,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
제임스가 혀를 찼다.
“끼리끼리 만난다더니, 자네도 마크를 닮아서 어벙하군.”
“무슨 뜻이죠?”
“인간의 영혼은 약해. 충격을 받으면 종종 기억을 잃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 멋대로 기억을 왜곡하기도 하지. 마크처럼 갑작스레 죽은 사람들은 자기가 죽었단 걸 잊어버리기도 해. 하지만 자네는 아니잖나. 벤, 자넨 자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나?”
벤은 인상을 찡그렸다. 갑자기 튀어나온 제임스의 말이 무슨 뜻이고,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라이언이 그답지 않은 진중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벤, 제임스의 말에 집중해.」
라이언의 말에 꼼짝없이 따랐던 어린 날 기억 탓일까. 벤은 제임스에 말에 집중했다. 미간을 모으고 생각하다 눈앞에 어떤 장면들이 어른거리는 걸 느꼈다. 벤은 자세히 보기 위해 눈매를 좁혔다. 익숙한 역이 보였다. 눈 오는 저녁의 러시아워를 피해 전철을 탔던 날, 우연히 만난 마크가 그를 불렀다. 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왜요?”
제임스가 히죽거렸다.
“벤, 그때 마크는 이미 죽은 뒤였어. 자넨 유령인 그를 본 거야.”
“설마요. 그때 난 대학생이었고 마크는 아직 죽기 전이었을 텐데요.”
“그가 환자복을 입고 자넬 찾아왔던 게 이상하지 않았나?”
벤은 전철이 닫히던 순간 보았던 마크의 모습을 회상했다. 체념한 얼굴로 돌아서던 이의 옷은 계절치고 매우 얇았고, 그 모양과 무늬가 희한했다. 딱 환자복이었다. 왜 그걸 미처 몰랐던가.
답은 분명했다.
벤의 뇌는 죽은 자가 자신을 찾아왔단 사실을 미리 차단했다. 벤은 믿기지 않는 사실에 어지럼증을 느꼈다. 벤은 평소 지하철을 타고 다니지 않았고, 마크가 그를 졸졸 미행하지 않는 이상 그 순간 타이밍 좋게 그 자리에 나타날 리가 없다. 이제야 깨닫는다. 눈이 퍼붓던 뉴욕의 지하철에 환자복 차림의 마크가 나타난 것부터가 애초에 아귀가 맞지 않는 일이었다.
모교로 가던 중 벤의 SUV 차량은 눈길에 미끄러진 차량과 부딪혀 뒤집혔다. 벤의 영혼은 부서진 육신을 버려두고, 차량에서 빠져나와 전철역으로 향했다. 그렇게 망자들과 함께 천국으로 가는 플랫폼에 서 있던 그를 이곳으로 끌고 온 건 제임스였고, 마크였다.
벤은 사고가 났던 충격으로 그날의 기억을 잊어버렸다. 그의 뇌는 쓸데없이 기민하게 동작했다. 사고 직후, 전철에서 마크를 만났던 기억은 학창 시절 마크를 만났던 기억으로 조작되어 뇌 속에 심어졌다. 엉클어진 기억으로 벤은 마크를 만났고, 유령인 마크와 교감하며 결국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답은 간단했다. 벤이 마치 산 사람처럼 마크를 대할 수 있었던 것은 벤도 마크와 같았기 때문이다. 벤은 타인처럼 냉정히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다 이 기괴한 상황을 나름 정리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죽었군요.”
마크가 놀란 눈으로 벤을 쳐다봤다.
“나와 마크는 같은 곳으로 가게 되나요?”
제임스는 고개를 저었다.
“성질 급한 친구. 자넨 형을 따라가야 해. 마크는 다른 길을 가야 하고.”
“왜죠? 그나저나 라이언은 대체 어떻게 내게 전화를 한 거죠?”
제임스가 벤을 쳐다보며 잠시 침묵했다. 볼을 긁적이던 제임스는 잠시 후 벤의 첫 번째 질문에 답을 주었다.
“마크는 죄를 지었어.”
제임스의 말에 마크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벤은 제임스가 마크를 지옥으로 데려간다면 그를 때려눕혀서라도 말릴 거라 다짐했다.
“마크는 다른 사람을 구했어요. 그건 천국으로 가야 마땅한 일 아닌가요?”
“알아, 하지만 사신을 고생시켰지. 얌전히 내가 그를 저승으로 데려가길 기다릴 것이지. 괜히 자넬 한 번 더 만나려고 도망쳤어. 커디스의 일이 아니었다면 지옥에 떨어져도 할 말이 없을 죄이지. 용케 모습까지 바꾼 재주가 가상해서 그가 자넬 만나게끔 기다려주긴 했지만 어쨌든 그는 규율을 어겼어. 그를 태우고 떠날 기차는 이미 오래전에 떠나버렸네. 그는 이제 혼자 힘으로 천국으로 돌아가야 해. 쉬운 길은 아니지. 그러려면 안경도 있어야 하고, 좋은 구두도 있어야 해.”
다행히 지옥으로 간단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마크가 홀로 저승까지 가야 한단 소식도 벤을 걱정시키긴 마찬가지였다. 천국으로 가는 길이 어떤 모습일지는 벤도 모른다. 허나 제임스의 말대로라면 그 길은 멀고 험한 길일 가능성이 컸다. 몸도 성치 않을 이를 불안하기 짝이 없는 걸음으로 홀로 그 길을 가게 놔둘 수 없었다.
“내가 따라갈래요.”
“벤, 넌 천국에 갈 수 없어.”
“왜요?”
“넌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뭐요?”
“진짜야. 넌 코마 상태에서 이곳에 와 있지만 오래 있을수록 위험해질 거야. 지체하지 말고 돌아가는 편이 좋아.”
벤은 자신이 죽지 않았단 사실에 놀라움을 느꼈다. 생은 기쁜 것이었다. 가족들과 친구들, 정을 나눈 이들과 이별하지 않아도 됐다.
그러나 그는 마크를 두고 갈 수 없었다. 제임스가 그의 걱정을 읽고 덧붙였다.
“벤, 넌 마크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 그는 천국까지 별 탈 없이 갈 수 있을 거야. 그는 자신 안의 고통을 다 치유했잖아. 천국으로 가는 길 곳곳에 있는 유혹에 현혹되지 않고 쭉 걸어갈 수 있을 거야. 원하던 대로 마크는 자넬 구해냈어. 애초에 목적을 잊어버리고 널 못 떠나게 한 건 잘못이지만 네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냈고, 고백도 받았지. 아름다운 결말이잖나. 미련이 없어진 유령이 천국으로 떠나기만 하면 해피엔딩이지.”
벤은 제임스를 한 대 세게 치고 싶었다. 어떤 기준으로 그게 해피엔딩이 되느냐고 묻고 싶다. 마크가 천국으로 간다는 것은 벤의 세상에서 마크는 사라지게 되는 걸 의미했다.
제임스가 마크의 어깨를 붙잡았다.
“마크, 난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해줬어. 벤의 형에게 허락받고 벤을 잠시 이리로 데려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나.”
“일부러 벤을 다치게 한 건가?”
“설마, 눈길에 운전한 건 순전히 벤, 저 녀석 잘못이야. 혼수상태에 빠진 녀석을 데려올 수 있어 운이 좋았지. 그러니 자넨 이제 그만 고집부리지 말고 갈 길로 가게. 자네가 여기 있으면 벤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지 못해.”
제임스의 말에 벤 쪽을 힐끔거리던 마크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벤은 불안해졌다.
“마크, 이쪽으로 와요.”
벤은 무슨 똑 부러진 방도도 없으면서 무턱대고 손만 내밀었다. 어찌 됐든 마크를 자기 곁에 두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내밀어 진 벤의 손을 보고 눈만 끔뻑이던 교수가 옅게 웃으며 물러섰다. 탈속한 부처님이 지어야 할 미소를 왜 섹스에 굶주려 색귀까지 된 유령이 짓는 건가. 벤은 마크에게 다가가려 했다.
“마크!”
“벤, 내가 좀 바빠서 미처 못 하고 가. 내 컬렉션은 네가 꼭 치워줘. 부탁할게.”
유령은 벤을 좋아한다고 고백하며 지었던 미소와 똑같은 얼굴로 웃음 지었다.
“!?”
유령은 엉뚱한 유언 외 별다른 이별의 말도 없이 빛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제임스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그 역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기가 막혔다. 이게 끝일 리 없었다. 벤은 전력을 다해 빛을 향해 뛰었다. 누군가 그를 붙잡아 뒤로 확 잡아당겼다.
“벤!”
170cm밖에 안 되는 작은 체구의 남자가 벤을 꼼짝 못 하게 눌렀다. 벤은 씩씩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눈물로 시야가 흐렸다. 라이언이 벤을 누르며 서 있었다.
“이거 놔!”
“너라면 놓겠냐? 난 네 목숨을 구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호수에선 실패했지만, 지금은 절대 실패 안 해.”
라이언의 몸이 천근처럼 무겁다. 늘 바보처럼 웃기만 하는 형이 웃음기 하나 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무슨 소리야?”
벤의 물음에 라이언이 씁쓸히 웃었다.
“난 내가 헤엄을 꽤 잘 치는 줄 알았지만, 아니었지. 기억 안 나? 내가 너한테 가려고 필사적으로 얼음 호수를 헤엄쳤던 일.”
“…….”
얼음처럼 차가운 전율이 몸 전체를 수직으로 관통했다. 벤은 몸이 찢어지는 것처럼 차갑던 얼음 호수를 기억했다.
그때 그는 겨우 8살에 지나지 않았다. 그와 열한 살 차이가 나는 큰 형이 저 멀리서 그를 붙잡으러 필사적으로 헤엄쳐 오고 있었다. 조각난 얼음 조각 때문에 접근이 쉽지 않았다. 숨이 턱 막힐 만큼 지독한 추위 속에서 라이언은 처절할 정도로 꿋꿋하게 벤을 향해 헤엄쳐왔다.
-라이언, 라이언!
-벤, 버텨!
호수는 깊고 넓었다. 헤엄쳐 오던 라이언은 앞을 가로막는 얼음 조각에 당황했다. 그는 물에서 빠져나와 얼음 위를 기어 벤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과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는 게 어린 벤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벤, 거의 다 왔어.
라이언이 걱정 말라며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얼음이 갈라졌다. 라이언의 몸이 쭉 미끄러지고 허리가 반동으로 휘었다. 라이언은 물속으로 미끄러져 영영 떠오르지 못했다. 벤의 악몽 속에 종종 등장했던 푸른 얼굴의 익사자는 마크가 아닌, 라이언이었다.
“벤, 난 네가 늙은이 유령에게 홀려서 제 발로 명을 단축하라고 그 애를 쓴 게 아니었어.”
벤은 자신을 누르고 있는 형의 얼굴을 놀랜 눈으로 바라보았다. 형은 자신의 기억 속과 똑같았다. 곱슬한 갈색 머리칼은 겨울바람에 형편없이 헝클어져 있고, 혈색 좋은 뺨은 늘 불그레했다. 물에 빠져 열아홉 짧은 생을 마감한 그는 관 속에서 걸치고 있던 검은 정장 차림이었다.
라이언의 기일에 맞춰 가기 위해 오후 수업을 빼먹고 가던 중 벤은 마크를 만났었다. 마크는 벤의 젖은 얼굴을 보고 바로 이상을 알아차렸다. 벤은 자신 때문에 요절한 형과 형을 그리워하며 시름시름 말라간 어머니 얘기를 하며 울었다. 마크는 오랜 시간 그의 곁을 지켜주었다.
“……그때 날 구하지 말지 그랬어.”
“너라면, 네 동생이 그리 떨고 있는데 가만있겠냐?”
“내가 형을 죽였어.”
“멍청한 소리, 그래서 늘 내 생일이면 호숫가를 서성이면서 우는 거냐. 시끄러워 죽겠어.”
“형의 기일이니까. 나 때문에 형이 죽은 날이니까.”
“네가 바깥으로 나도는 동안 어머니는 집안에서 우시고 말이지. 하나도 안 기뻐.”
“어머니는 형 때문에 많이 아프셨어. 다 나 때문이야.”
라이언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벤의 멱살을 쥐었다.
“똑똑히 들어. 누구 잘못도 아냐. 난 누구도 원망하지 않아. 너도, 어머니도 아무 잘못 없어. 네가 여기 처박혀서 돌아가지 않는다면, 내가 어머니께 죄를 짓는 게 돼. 어머니는 첫 아들을 잃었어. 너까지 잃어선 안 돼.”
“형도 마크도 잃고 싶지 않아. 이건 불공평해. 왜 난 늘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는 거지?”
울먹이는 벤을 바라보며 라이언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넌 누구도 잃은 게 아냐. 벤, 이건 결코 입 밖에 내선 안 되지만 너에게만 알려줄게. 세상엔 ‘내’가 한 명만 존재하는 게 아냐. 삶과 죽음은 쌍둥이 형제처럼 닮았어. 내가 저 세상으로 떠나오면, 또 다른 나는 이 세상으로 넘어가지. 벤, 내가 아는 신은 그리 야박한 분이 아냐. 단 하나뿐이라고 믿었던 인연이 끝났을 때, 또 다른 길이 나타나게끔 세상을 만들었지. 그러니까 걱정 마. 마크도 나도 실은 네 곁을 영영 떠난 적은 없으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네 곁에 있을 테니까. 어머니께 전해 드려. 늘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한다고. 그리고 더는 나 때문에 슬퍼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라이언은 자신의 손을 잡고 놔주지 않는 벤의 손가락을 하나씩 떨어뜨렸다.
“엄마를 잘 부탁해.”
1월 31일. 기이할 정도로 날씨가 포근했던 어느 날, 라이언은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은 라이언의 생일이었다. 그 뒤로 수십 년간 벤은 늘 그날만큼은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와 함께 형이 묻힌 곳을 찾았다. 벤은 라이언과 함께 있고 싶었다. 더는 그 무저갱과 같은 슬픔에 가라앉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라이언은 그것이 삶이고 의무이므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라이언이 완전히 손을 놓았다. 스르르-. 몸이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따뜻한 물은 포근하고 무거웠다.
둥실 떠오른 곳은 조금 전과는 다른 곳이었다. 벤은 사방에서 풍겨오는 알코올 냄새를 맡았다. 삑삑, 생명 유지 장치의 신호음이 들렸다. 벤은 뒷머리에 눌린 베개의 감촉을 느꼈다. 병실 문의 블라인드 틈으로 햇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벤은 점적 주사기에 약물을 넣고 있는 간호사에 손짓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육체에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손은 30센티 정도 올라갔다가 도로 풀썩, 침대로 떨어졌다.
“어머니를…….”
제 어머니를 불러주세요. 벤은 의식에서 깨어나자마자 그의 어머니를 찾았다. 병실 근처에 있던 어머니가 달려와 그를 껴안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