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 - 오로지 당신만 6
잠에서 깨어났을 때 벤은 여전히 벽장 안에 있었다. 오후의 늦은 해가 방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격자무늬 너머로 바깥을 살폈다.
마크가 거기 있었다.
주홍빛 석양을 후광처럼 두르고 마크는 전화를 받고 있었다. 금발과 백발이 섞인 머리칼 아래 돌출된 이지적인 이마와 인상적인 푸른 눈이 생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벤은 좀 더 잘 보기 위해 눈을 깜빡였다. 안경을 벗고 교수가 피곤한 기색으로 눈을 문질렀다.
“31일은…… 그래. 그래. 그런가. 아니 괜찮네. 가족 모임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 아닐세.”
마크는 전화를 끊고 잠시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1월 31일, 작년에는 여자친구와의 기념일이었고 올해는 같은 날이 형의 생일이라. 타이밍 좋은 우연이군.”
낮은 실소가 말끝에 따라붙었다. 벤은 기억 속에서 당시 마크가 했던 전화 내용을 떠올렸다.
마크는 학회 일정에 벤을 동행시키려 했다. 벤은 제안을 거절했다. 그에겐 겨울 휴가를 가족과 함께 보내는 일이 중요했다. 그해 겨울은 눈이 참 많이 내렸다. 며칠 전 내린 눈이 녹기도 전에 도로 눈이 내려 도로가 얼어붙었다. 휴가 내내 거의 집 안에서만 머무르며 벤은 가족과 함께 저녁을 나누고 평화로운 휴일을 즐겼다.
마크는 턱을 괴고 씁쓸한 얼굴로 전화기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잠시 후 얼굴을 쓸어내렸다. 거울을 보며 잇몸을 드러내고 일부러 밝게 웃기도 했다. 그러다 남자는 이내 도로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비서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릭, 프랑크푸르트 행 비행기 표와 호텔 예약은 알아볼 필요 없네.”
“연인분이 약속을 깨버린 건가요?”
“연인은 무슨. 친구야. 바쁘다는군.”
비서는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들고 온 짐들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우편물이 많아요. 생일 카드와 선물인가 본데요.”
카드와 상자를 훑어보던 마크가 상자 하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상자에 쓰인 이름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벨라?”
벽장 안에서 벤은 미간을 찌푸렸다. 벨라가 마크에게 선물을 보냈다는 게 이해가 안 갔다. 마크에게 선물은 왜 보냈으며 그녀는 마크의 생일을 어떻게 알아낸 걸까. 상자를 열려던 교수는 걸려온 전화에 행동을 멈췄다.
전화를 목과 얼굴 사이 낀 채로 마크는 선물 상자를 칼로 뜯었다. 전화의 내용이 꽤나 심각한 것이었는지 교수는 전화를 받자마자 안색을 굳혔다. 원래도 손놀림이 둔한 사람이 집중하지 못하고 허공에 헛칼질을 했다. 보다 못한 비서가 다가와 대신 상자를 열어주었다. 비서가 마크 쪽으로 다가온 덕에 벤은 비서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있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스페인의 낡은 아파트에서 벤을 배신한 벨라가 키스했던 바로 그 남자였다.
벤은 벨라가 당시 어떻게 귀신처럼 마크의 속을 간파했는지 알게 되었다. 벨라는 매력적인 여자였고, 자신의 매력을 잘 이용했다. 마크의 비서는 벤자민과 마크에 대한 정보를 주며 벨라에게 접근해 그녀의 맘을 얻는 데 성공했을 것이다.
세상에 정말 영리한 부류들은 따로 있었다. 마크는 아니었다. 벤에게 접근하는 여자들을 퇴치했다고 의기양양하게 자랑했던 유령은 아둔한 헛똑똑이에 지나지 않았다.
상자를 뜯던 비서가 상자 안의 내용물에 움찔 놀랐다. 마크는 기괴한 걸 봤단 얼굴로 왼 눈썹을 쳐올리곤 그중 하나를 꺼냈다. 거대한 크기의 바이브레이터에 그는 결국 폭소했다. 벨라가 보낸 건 여러 종류의 성인용품이었다.
“대단한 여자야. 그렇지?”
그는 전화기를 입에서 떼고 중얼거리며 비서에게 동의를 구했다.
상자를 멀리 치워버리고 마크는 다시 전화에 집중했다. 전화가 길어지면서 마크의 얼굴은 멀리 벽장 안의 벤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창백해졌다. 두통을 느끼는지 관자놀이를 짓누르던 남자가 손짓으로 비서에게 그만 가보란 신호를 했다. 비서는 서류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재발이 확실한가요? 재검사를 하는 편이……. 확률은 어느 정도 될까요. 아뇨, 박사님 말씀이 맞아요. 하지만……. 네, 그런 면이 있죠. 네, 그렇죠. 일단 백혈구 수치에 이상이 있다면 검사를 해보는 게 우선이겠죠. 네, 최대한 빨리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는 손이 심하게 떨렸다. 제대로 놓이지 못한 전화기 안에서 경고음이 시끄럽게 새어 나왔다.
벽장 안에서 벤은 생전의 마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해 1월, 벤은 집으로 돌아가 겨울 휴가를 즐겼다. 그동안 마크는 자신의 생일 며칠 전에 평생 자신을 괴롭히던 병이 재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생일 선물로 그가 짝사랑하던 제자의 여자친구에게 한 상자 분량의 우스꽝스러운 자위 기구를 받았다. 벤은 가슴이 죄어드는 기분을 느꼈다. 마크는 말라붙은 겨울 갈대처럼 허망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전화기를 내려놓은 자세로 그대로 한참을 꼼짝하지 않았다.
“대단한 여자야.”
마크가 재차 벨라에게 감탄했다. 교수는 맞은편 벽에 있는 거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벤자민, 어떻게 생각하나?”
벤은 움찔 놀랐다. 마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줄 알았다. 혼잣말이었다. 마크는 허공을 향해 말을 이었다.
“자네 여자친구가 내게 이런 걸 줬어. 자기 남자친구에겐 눈길도 주지 말고 혼자 밑이나 쑤시고 잘 놀라는 얘기겠지. 똑똑한 여자야. 벤자민 자네를 독점하려면 그 정도 성격은 돼야겠지. 남자친구에게 집적거리는 늙은이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잖아. 그런데 어쩌나. 난 몸이 부실해서 이런 훌륭한 걸 미처 써보지도 못하고 죽겠군.”
비아냥거리던 마크가 자신의 우스운 꼴을 깨닫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교수가 별안간 책상 위의 물건을 와르르 쓰러뜨렸다. 한참 그리 난장판을 만든 뒤 교수는 이어 탁자 위 선물 상자와 카드마저 거칠게 밀어버렸다. 그는 의자를 발로 걷어차고 꽤 무거울 원목 책상을 거꾸로 뒤집어엎었다. 미친 사람처럼 분을 토해내던 이는 기력이 다해 끈 떨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주저앉았다. 완전히 바닥에 쓰러지지 않기 위해 마크는 책상 의자를 쥐고 몸을 기댔다.
마크가 손등으로 얼굴을 닦았다. 벤은 그가 우는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다. 교수의 얼굴은 젖어 있지 않았다. 그는 올 것이 왔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무 쉽게 체념한다. 벤은 마크가 혹 마음속으로 이런 결말을 항상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의 추측은 틀렸다.
“벤자민…… 나는 죽고 싶지 않아.”
마크가 낮게 중얼거렸다.
“살고 싶은 이유가 없다고 해서, 죽고 싶은 건 아냐.”
벤은 그를 달래야 한다고 여기고 벽장문을 열고 달려갔다. 그 순간 발밑이 출렁거려 벤은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사위가 일렁거렸다. 방 전체의 공기가 물 안에 잠긴 것처럼 무거워졌다. 마크의 꿈이 변하는 것이었다. 그를 따라 벤은 다른 꿈으로 이동했다.
빛은 흐려졌다가 밝아졌다를 반복하다 갑작스레 나타난 안개에 의해 어지러이 산란했다. 압력이 증가했다 도로 감소하고, 소리는 불투명해졌다. 벤은 건물 전체가 깊은 물속으로 빠져드는 건 아닌지 불안해졌다. 습기 찬 꿈의 질감은 벤이 두려워하는 겨울 호수와 닮았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갑자기 투명해졌다. 벤은 선명하게 보이는 눈앞의 격자무늬를 손으로 더듬었다.
“누구 있나?”
벤은 흠칫 놀라 벽장문에서 손을 뗐다. 누군가 벤의 눈앞, 벽장 바깥에 서 있었다. 환자복이 보였다. 환자의 몸이 구부러지고, 상반신이 벽장 가까이 붙었다. 벽장 안을 살피는 푸른 눈과 마주쳤다. 벤은 숨을 들이켰다.
“……마크?!”
벤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멍청히도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누구지? 안에 누구 있는 거 맞지?”
벽장문을 열려고 하는 걸 벤은 안에서 틀어쥐고 열어주지 않았다.
“이보게, 난 별 힘도 없는 노인네야. 그리 필사적으로 굴 필요 없어.”
벽장 안 인기척에 놀랐던 마크는 안에서 들린 다급한 신음성에 빙긋 웃었다. 외딴곳에 위치한 암치료병동에 강도가 들 리 없었고, 기껏해야 게으름을 피우러 벽장 안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가 잠든 간병인일 게 분명했다. 하필 자신의 침실에 숨어든 게 의아하긴 했지만, 위험한 인물일 가능성은 적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인물에게 잔인하게 굴 박정한 인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교수는 어깨에서 힘을 풀었다.
“밖에서는 안 보이는데, 벽장 안에서는 내가 보이나? 벽장 아래쪽이 특이한 구조로 짜였군. 야만인들이 침입해왔을 때 딱이겠어. 이 밤중에 왜 벽장에 숨어 있나. 자네 어머니께서 바이킹이 쳐들어왔으니 거기 숨으라고 하던가?”
싱글거리는 교수의 얼굴엔 병색이 완연했다. 뼈와 거죽만 남은 푸르스름한 안색에 벤은 자신이 본 게 마크가 맞나 자신이 없어졌다. 살점이 모두 빠져버린 탓에 더욱더 커 보이는 푸른 눈을 굴리며 교수가 재차 물었다.
“그래, 자넨 누군가. 정체가 뭔데 나처럼 별 볼 일 없는 사람을 훔쳐보는 거지?”
“난-.”
벤은 꿀꺽 침을 삼켰다. 거짓말을 할 수도, 문을 열어주지 않은 채 버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직하게 사실을 고백해야겠단 맘을 먹은 건 마지막, 마크와 헤어질 때의 상황 때문이다. 벤이 벤자민이란 걸 안 순간 교수는 벽장문을 닫고 숨어 버렸다. 그는 마크 레이트너를 좋아하는 벤자민 기옌이란 존재는 있을 수 없는, 거짓의 존재로 치부해버렸다.
“벤자민이요. 벤자민 기옌이요.”
“……그런가.”
교수가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멀찍이 물러나 침대에 주저앉고는 벽장을 두려운 듯 바라보다 외면하기를 반복했다. 정서불안의 소년처럼 허공에 들린 다리를 대롱대롱 흔들기도 했다.
“마크?”
문을 열고 교수 앞에 나타나려던 벤은 힘없이 열릴 것처럼 보였던 문이 꿈쩍 않는 걸 보고 도움을 청했다.
“열어주세요.”
벤은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니었다. 마크의 허락이 필요했다. 꿈의 주인인 마크가 두려움 섞인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벽장을 바라봤다.
“싫어.”
“왜요?”
“열었다가 뭐가 튀어나올 줄 알고.”
신을 믿지 않는다고 이죽거렸던 사람치고 교수는 겁이 많았다. 벤은 피식 웃었다.
“난 벤자민인데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확인해 봐요.”
“싫어.”
“난 벤자민이 맞아요. 당신이 면접을 봤던 키 크고 어수룩한 벤자민 기옌이요. 당신과 나만 아는 비밀을 알려주면 믿겠어요? 나랑 테니스를 한 날, 당신이 샤워 중 발기했던-.”
“말하지 마!”
달칵, 문이 열렸다.
마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꿀꺽 침을 삼켰다.
“벤자민-.”
벤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정말 벤자민이로군. 이게 어떻게…….”
당황해하던 마크가 바닥의 한 곳에 시선을 멈췄다.
“자네, 떠 있어.”
벤은 자신의 몸을 살폈다. 자신은 허공에 한 치가량 떠 있었고 심지어 그림자도 없었다. 비현실적인 풍경은 벤뿐만이 아니었다. 침대는 한쪽 다리 없이 서 있었고, 벽은 무늬 없이 잿빛으로 대충 발라져 있었다. 마크만을 제외하곤 모든 게 뭉개져 있었다. 꿈의 세계에서 마크가 분명히 기억하는 사물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것들은 그렇게 불투명하고 모호하지만, 정작 꿈을 꾸는 마크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마크가 떨떠름한 얼굴로 웃었다. 창백한 뺨이 경련했다. 벤은 교수가 잔뜩 겁을 먹었다는 걸 눈치챘다.
“내 병이 생각보다 위중한가 보군. 벌써 암세포가 뇌까지 퍼졌을 줄은 몰랐는데.”
“이건 꿈이에요.”
“그런가. 하긴 꿈인 걸 인식하고 꾸는 꿈도 있지. 어쨌든 다행이야. 난 조금 전 겁이 나서 그대로 기절하는 줄 알았네. 내가 이미 죽어서 이런 환상을 보는 건 아닌지 섬뜩했지. 벤자민, 자넨 모르겠지만 난 유령 같은 건 정말 싫어하거든.”
마크는 안도하며 뒤돌아섰다. 머리칼이 많이 빠져 정수리 쪽이 훤히 비어 보이는 모습에 벤은 충격을 받았다. 어기적거리며 걷는 왜소한 몸은 너무 말라서 위에 얹힌 환자복이 공중에 떠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벤자민?”
남자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벤은 눈을 깜빡이고 정신을 차렸다. 벽장부터 책상까지 3m도 되지 않을 거리를 천천히, 힘겹게 걸어간 마크가 의자에 앉아 느릿하게 안경을 썼다.
“뭐예요?”
“유언장. 방금까지 쓰고 있었어. 좀 보려나?”
“유언장을 꼭 써야 하나요.”
벤은 너무 쉽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아니냐는 힐난을 섞어 물었다. 살짝 입을 벌리고 멍하니 벤을 바라보던 마크가 씁쓸히 웃으며 이마를 문질렀다.
“내가 너무 쉽게 포기했다는 말이지? 꿈에서까지 비난을 당하는군. 하지만 벤자민, 난 강한 사람이 아냐. 이미 충분히 고통 받았네. 난 이제 여길 떠날 준비를 하고 마지막 정리를 해야 해. 실은 늦은 감이 있지.”
“너무 빨리 포기했어요. 끝까지 싸웠어야죠.”
“말이 쉽지, 이 친구야. 이게 내 꿈이라니까 자네도 이미 다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말하지. 알다시피 난 운도 없고 체력도 형편없어. 항암치료 부작용만 남들보다 심했지. 아무리 용을 쓰고 여러 방법을 써도 백혈구 수치는 죽어도 올라가지 않고 지난 1년간 몸만 엉망으로 만들었지. 난 이미 충분히 시달렸네. 패색이 짙은 전쟁에 더는 매달리고 싶지 않아. 난 할 만큼하고, 싸울 만큼 싸웠네. 신도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여기진 않을 걸세.”
“살아서 하고 싶은 게 있잖아요.”
“그런 건 내게 없어.”
마크는 너무 쉽게 단정 내렸다.
“벤자민은요.”
마크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나를 좋아하잖아요. 나를 한 번만 더 만나고 싶어서, 치료소에 오기 전 내 집 앞까지 찾아가 몇 번을 망설였잖아요.”
“그건…….”
마크가 눈을 내리깔았다. 벤은 집요히 쳐다보며 답을 요구했다.
“내가 그에게 호감을 가진 건 사실이야. 그는 날 숨 쉬게 했지. 벤을 보면 기분이 좋아져. 벤을 좋아하는 게 좋아서, 벤을 좋아하고 싶어서 좋아했지. 나는 사랑이 필요한 인간이야. 누군가를 좋아할 때만 살아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사랑 비슷한 걸 해 보고 싶었어. 그러나 그건 분명 사랑은 아냐. 사랑을 닮은 무엇이었겠지.”
이건 또 무슨 헛소린가. 벤은 마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와 키스하고, 섹스하고 싶어 했잖아요.”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을 그토록 간절히 원했단 말인가. 솔직하지 못한 이가 답답해서 벤은 언성을 높였다.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아요? 미련이 있었다고 분명히-.”
“좋아하지 않아.”
벤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깨와 목을 뻣뻣이 굳힌 채 고개를 들지 않는 교수가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럼 누굴 좋아했는데요. 커디스 르메이요? 그 여자를 사랑하는 건 아니죠? 당신은 대체 뭐 때문에 그 여자를 위해 물에 뛰어들었나요?”
“그 여자는 날 좋아해. 나도 그녀를 사랑해.”
벤은 배신당한 기분을 느꼈다. ‘당신은 날 사랑했잖아.’ 버럭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 여자가 그렇게 좋아요? 함께 자살할 만큼?”
“그녀는 내 두 번째 알바야. 나보다 강한 여자이지만, 검은 머리칼이 한 움큼씩 빠지는 걸 못 견뎌 해. 나와 그녀는 더는 고통 받지 않기로 약속했어. 죽을 각오가 된다면 함께 가기로 했지. 나는 이번엔 그 약속을 지켜야 해. 알바와 함께 했을 때 난 몇 번이나 알약에서 입을 뗐고 결국 성공하지 못했지. 어리석었어.”
“당신은 그녀를 사랑하는 게 아녜요!”
벤은 마크가 죽은 뒤 한 번도 그녀를 찾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교수가 유령이 되어서 찾아 헤맨 건 자신이었다. 벤자민의 이름을 부르며 대학을 거닐었고, 벤을 발견한 뒤 그의 체취만으로 흥분해 욕정했다. 벤의 미소에 따라 웃고, 그의 동작 하나하나에 쾌감에 젖어 만개한 꽃이 낙화하듯 흐드러졌다.
그는 자신의 것이었다.
“그런 여자 때문에 죽지 마요. 왜 이렇게 멍청하게 굴어요. 당신은 벤자민에게 아프단 것도 알려주지 않았어요! 자살 따위 하지 말고, 내일 당장 전화를 걸어서 벤자민에게 병원에 찾아오라고 말해요. 죽기 전에 당신의 감정을 솔직히 고백해요!”
벤은 거의 성내듯 말을 쏟아냈다.
마크가 엉뚱한 말로 청년의 말을 받아냈다.
“내가 스무 살 때 킹 목사가 멤피스의 로레인 호텔에서 암살당했지. 마침내 자유, 자유다. 마침내 나를 자유롭게 하신 신을 찬미하라. 그가 자주 인용하던 찬송가를 누군가 부르고 있던 게 어제 일처럼 생생한걸. 내 스물일곱 살 생일에 토인비가 죽었어. 그게 1975년 일인가 될 거야. 죠스가 개봉한 해니까 확실해. 사람들은 누군가의 죽은 날만을 기억해. 탄생을 기념하는 건 예수와 석가모니 같은 고대인 정도야. 그 외엔 모두가 죽음만을 의미 있게 여기고 죽음의 날을 기억하지.”
“무슨 헛소리예요?”
마크가 잠시 숨을 들이켰다. 그는 눈을 내리깐 채 허공을 응시했다.
“그는 언제쯤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까.”
‘그’가 누구인지 벤은 너무도 잘 알았다.
“사람들은 죽은 이들에겐 관대해져. 그도 그럴까. 내가 죽었다는 걸 안다면 그도 더는 나를 불쾌하게 여기지만은 않을 거야. 큰 덩치를 움찔거리면서 행여 내가 그를 덮치지 않을까 더는 경계하지 않을 거고, 언젠가는 나를 편안한 추억거리 정도로 생각하게 되겠지.”
벤은 호흡을 골랐다. 교수는 벤자민이 자신의 죽음을 기억해주길 원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말을 뱉는 본인은 모르는 걸까.
“것 봐요. 당신은 벤자민을 사랑하잖아요.”
마크가 입술을 비틀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자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좋겠군. 나를 인정하게 만들어서. 그럼 묻지.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그에게 당신 마음을 알리긴 해야 할 것 아녜요. 그대로 죽어 버리면, 나중에 당신 마음을 안 그는 뭐가 되는데요.”
“녀석의 집 앞에서 돌아온 이유를 자네도 알잖나.”
“왜였죠?”
“왜냐고? 그야 당연히…….”
유령이 불안한 표정으로 눈알을 굴렸다. 진심을 말할까 말까 유령은 한참을 고민했다.
“……두려워서.”
“뭐가 두려운데요.”
성내는 청년을 바라보며 마크가 멋쩍게 웃었다. 주름진 얼굴이 비틀렸다. 무엇하나 남부러운 것 없을 줄 알았던 교수에게 저런 얼굴이 있었다. 벤은 이를 악물었다.
“모든 게, 벤자민과 있을 땐 모든 게 두려워. 그가 곁에 없을 때도 그가 두려워. 그가 내 전화를 받지 않을까 봐. 초인종을 눌러도 나오지 않을까봐. 이미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는데도 내색하지 않고 경멸하고 있을까 봐. 내가 알바처럼 호텔 욕조에서 물을 받아 자살하기 전 그를 불렀는데 그가 나를 찾아오지 않을까 봐. 그런 미련한 상상들로 삶을 낭비했지. 다 옛날 일이지만.”
“마크, 난…….”
문이 열리고 간호사 한 명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마크를 불렀다. 간호사는 마크의 두 번째 알바, 커디스 르메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벤은 오늘이 바로 그날이란 걸 알았다.
“마크, 가지 마요!”
그러나 이건 이미 일어났던 일이다. 마크의 머릿속에서 흘러나온 기억이 보여주는 단상일 뿐이었다. 벤이 미처 수를 쓰기 전에 교수는 해변에 가 있었다.
운명을 바꿀 수는 없는 일일까. 벤은 발을 동동 구르며 마크가 뭐에 홀린 사람처럼 커디스를 구하려 깊은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걸 보았다.
시커먼 물이, 차가움에 벤을 겁에 질리게 만드는 물이 저 앞에 있었다. 온몸이 굳고 손끝이 저려왔다. 마크의 몸이 점점 작아졌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늘. 1월의 마지막 날에 그는 또다시 사라질 것이다. 울컥, 감정이 치받았다.
“……안 돼. 저대로는 못 보내!”
그는 자신의 것이었다. 벤은 얼음처럼 차가운 바닷물로 뛰어들었다.
* * *
마크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1월의 바다는 얼음보다 차가웠다. 추위를 피부보다 뼈가 먼저 느꼈다. 얇은 지방층과 혈관 아래 깊숙한 곳이 쑤시고 아렸다.
“커디스, 커디스!”
약해진 뼈 때문에 평소 절룩거려야 했던 마크는 오히려 바닷물의 부력 덕에 몸이 가벼워진 걸 느꼈다. 이상한 일이었다. 몸이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그는 온몸에 남은 모든 기운을 다해 여자를 불렀다. 둘은 함께 죽기로 하지 않았던가. 먼저 가버리려 하는 그녀가 야속했다. 나도 함께 데려가. 분명 마음속으로 그리 외쳤을 것이다.
얼마나 그녀를 향해 필사적으로 걸어갔을까. 턱에 닿는 바닷물의 차가움에 마크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 심장이 죄어들고, 이렇게 하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실감이 덮쳤다.
죽음이 가까워지자 진짜 마음이 보였다.
하루라도 더 살고 싶었다.
고통이 더는 이어지질 않길 원해 죽음을 기도한 적도 있지만 정작 삶에 대한 미련은 포기하기 어려웠다.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더 살아 삶의 감각을 맛보고 싶었다. 사랑했던 이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슬픔이라도 곱씹는 것도 살아 있어야만 가능했다.
“커디스!”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고 먼저 가버리려는 여자를 애타게 불렀다. 욕실에서 울고 있던 여자를 좀 더 살갑게 위로했어야 했다. 저리 바닷물에 뛰어들게 해서는 안 됐다.
그녀를 죽게 할 수 없다. 그가 이 순간 느끼는 두려움과 생에 대한 갈망을 그녀 역시 느끼고 있으리라.
여자의 이름을 정신없이 부르다 마크는 너무 깊은 곳까지 걸어 들어가고 말았다. 갑작스레 경사가 지며 몸이 푹 빠졌다. 파도가 너무 거칠었다. 마크는 먼 바다로 자신을 끌어가는 파도의 흐름에 저항하지 못했다.
그가 정신을 잃은 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좀 전 비몽사몽 한 와중 만났던 벤자민의 환상이 무어라 했던가.
싸우라고, 살아남으라고, 진심을 고백하라 말했던가.
‘벤자민…….’
그 순간 마크는 청년의 집 앞에서 돌아섰던 그 날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 * *
“쿨럭, 쿨럭!”
마크는 뭍에 기어올라 요란하게 기침했다. 한참 자신이 마신 물을 토해냈다. 어떻게 깊은 물속에서 빠져나왔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으나 어쨌든 그는 무사한 채로 해변으로 돌아왔다. 바닷물에서 완전히 나오자 한겨울의 찬바람이 전신을 때렸다. 젖은 환자복이 피부에 달라붙었다. 체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지독한 추위에 머릿속이 멍했다. 몸이 얼어붙으며 정신까지 함께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마크는 어느덧 자신이 왜 한겨울 바닷물에 뛰어들었는지 기억하지 못하게 됐다.
뼈를 저미는 추위에 떨며 마크는 해변 도로를 걸었다. 병원 쪽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가야 할 곳이 있었다.
“벤자민…….”
청년에게 하고픈 말이 있었다.
얼어붙은 도로를 맨발로 걷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안경은 파도가 쓸어가 버렸고, 그의 수중엔 한 푼의 돈도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분명하게 알지 못했다. 1월이면 벤자민은 항상 그의 가족에게로 돌아갔다. 마크는 허공에 높다랗게 매달려 있는 커다란 이정표를 보며 어디로 가야 할까 고민했다. 한참을 그리 우두커니 서 있었다. 분명 몇 분에 지나지 않을 시간이건만 몇 년은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 의식이 몽롱했다. 넋 놓고 서 있는 그를 누군가 툭 치고 가며 방향을 알려주었다.
“저쪽이에요.”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어딘가 모르게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마크는 목소리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보리밭 사이로 좁고 아름다운 길이 나 있었다. 홀린 사람처럼 걷다 주춤거리며 멈춰 섰다. “……벤자민.” 그의 영혼은 본능적으로 돌아가라고 외쳤지만, 그곳으로 가서는 벤자민을 만날 수 없었다.
어딘가에서 청량한 냄새가 풍겨왔다. 보리 익는 냄새와 빵 굽는 냄새였다. 한 어머니가 오래 보관할 빵을 식히기 위해 부엌 창틀 가까이 빵을 내놓고 돌아올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마크는 그녀가 자신을 낳다가 돌아가셨다던 자신의 어머니일 것만 같았다. 그곳으로 가고 싶었다. 보리밭 사이 난 길과 그 길 끝에 만나게 될 사람들은 그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그러나 그 길에는 벤자민이 없다.
“벤자민…….” 마크는 계속 중얼거렸다. 청년에게 해야 할 말이 있다. 자신이 청년을 위해 해야 할 일이 한 가지는 있을 것이다. 오래 걸은 발바닥이 아팠으나 멈추지 않았다. 그는 벤을 찾아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걷고 걸었다.
마크는 전철을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 섰다.
역 안은 목적지를 향해 가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벤자민을 찾다가 사람들 대부분이 비정상적인 모습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떤 이는 얼굴 전체에서 피를 흘렸고, 그 옆의 여자는 스웨터의 가슴 부분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모두 어느 정도 부서지고 깨진 모습이었다. 다들 표정이 멍했다.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자신도 아는 노래였다. 기타 소리가 흥겨웠다. 마크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When I die and they lay me to rest. Gonna go to the place that's best. When they lay me down to die. Goin on up to the Spirit in the sky. (내가 죽었을 때 그들은 나를 눕혀 쉬게 하였네. 내가 갈 그곳이 바로 낙원이라네. 내가 죽어 그들이 나를 뉘었을 때, 내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네.」
전철이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과 함께 거대한 전동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꾸역꾸역 안으로 들어섰다.
터줏대감처럼 안쪽 자리에 앉아 가만히 이쪽을 쳐다보는 남자가 있었다. 검은 코트와 중절모를 쓴 남자는 드러난 모든 살점이 다 검었다. 마크는 섬뜩한 두려움을 느꼈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가, 마크는 막 전철에 오르는 벤자민의 모습을 발견했다.
“벤자민!”
따라 타려다 마크는 검은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모습에 놀라 전철로부터 멀어졌다. 검은 남자는 전철 안에 선 채 그 이상 나오지 못했다. 멀리서 마크는 목이 터져라 제자의 이름을 불렀다. 전철이 출발할 거란 안내 방송이 나올 때까지도 벤자민은 마크 쪽에 전혀 신경을 두지 않았다.
몇 번을 크게 소리 지르다 목이 아파 잠시 멈췄을 때 그제야 벤자민은 멍한 시선으로 마크를 바라봤다.
“벤자민, 거기서 나와! 그 전철을 타면 안 돼!”
벤자민이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마크를 쳐다보던 청년은 그대로 시선을 내리고 다른 사람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문이 닫혔다. 마크는 전철이 떠나는 걸 멀거니 바라봤다. 플라스틱으로 된 문이 닫히고, 투명한 면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그는 놀라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머리칼이 듬성듬성한 늙은 남자의 모습은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초췌했다. 어린애가 봤더라면 당장 울음을 터트리고도 남을 기괴한 형상이었다. 마크는 더는 청년을 부를 수 없었다.
전철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더니 결국 창에 비치는 자신의 그림자도 눈으로 구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전철이 사라진 뒤 마크는 홀로 역에 남았다. 그는 역을 나와 정처 없이 걸었다. 추웠다. 얼어붙은 환자복은 딱딱해져 소매가 손등을 때렸다.
바닷가를 따라 난 해변 도로를 걸으며 마크는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떴다가 도로 지길 반복하는 걸 보았다. 쏟아지는 빛에 얼굴이 따가워졌다가 몰려든 구름이 드리운 그림자에 다시 시원해졌다. 새까맣게 변한 구름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어깨를 적셨다가 도로 난 해에 옷이 마르기도 했다. 해가 뜨고, 달이 뜨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긴 세월을 걸었는지 마크는 알 수 없었다. 며칠 같기도 하고 몇 년 같기도 했다.
그는 매 순간 벤자민을 생각했다. 깜빡거리며 켜지기 시작하는 가로등 불빛에서, 어머니에게 돌아온 아이를 껴안는 여인의 미소에서, 키가 큰 청년의 뒷모습에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에서도 벤자민을 떠올렸다.
청년을 구해내지 못했다.
자신이 이토록 추한 모습이 아니었다면 청년은 자신의 부름을 듣고 따라왔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가 청년을 사랑한다는 걸 들키지만 않았어도 벤자민은 그를 외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그였기에, 자신이 자신이었기에 벤자민은 마크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그리 생각하자 눈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자신이 욕되고 한심하며 너절한 존재로 여겨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마크는 순탄하지 못한 인생을 살았으나 자신을 저열하다 여긴 적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았고 최대한 자유롭게 살면서도 다른 이를 배려했으며,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방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사실은 그의 견고한 자존감을 순식간에 흐트러뜨렸다. 그 스스로를 가치 없는 인간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그것이 아무 근거 없는 쓸데없는 자학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면서도 찢겨진 마음을 감쪽같이 기워낼 재주가 없었다.
사랑이 잔인하고 아둔한 것이기에 그는 울었다. 자신의 사랑이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교감도 아닌, 그저 욕망을 풀고자 하는 집착에 불과한 가짜란 걸 알면서도 자신은 결코 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란 절망에 울었다.
사랑이 곧 지옥이었다.
어딘가 추위를 피할 곳을 찾다 마크는 자신의 관사에 생각이 미쳤다. 다행히 관사의 열쇠는 높은 창틀 위, 비밀 장소에 얌전히 있었다. 문을 열고 찬바람을 피해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에 비해 훨씬 따뜻했지만, 난방이 들어오지 않는 살풍경한 콘크리트 방도 안온함을 느끼기엔 부족했다. 남아 있는 침구라곤 한 장의 얇은 모포가 다였다. 그걸 둘둘 말고 벽장 안에 들어가 웅크렸다.
무릎을 끌어안고 얼음처럼 차가운 이마를 뼈와 거죽만 남은 손등에 올렸다. 체온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차디찬 몸은 해골처럼 말랐고 그 몸 어디에도 따뜻한 피가 흐르는 생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마크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손목을 쥐고 과거를 추억했다.
바람이 잦았던 리스본의 겨울, 알바는 금빛 노을을 후광처럼 두르고 마크의 귀를 잡아당기며 깔깔거렸다. 그녀는 마크의 금발 고수머리를 쓰다듬고 구불거리는 머리칼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컬을 넣듯 돌돌 말기도 했다.
-넌 아름다워.
감탄하듯 내뱉던 알바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그녀 역시 아름다웠다. 그녀의 얼굴은 비록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시절 자신은 젊고 건강했으며 알바의 곁에서 그녀의 사랑을 독점했다. 그는 사랑받을만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때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다시 젊어진다면, 자신이 자신이 아니게 된다면 벤자민을 속일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청년 앞에 다가가 청년에게 위험을 알린다면 벤자민은 이번에는 자신의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늙음을 젊음으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파우스트가 아니었기에 청년이 눈살을 찌푸렸던 추한 모습을 벗고 새로운 모습으로 청년을 찾아갈 수 없었다.
그러하기에 자신이 청년을 사랑하고, 청년이 자신을 사랑하는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나는 일은 영영 없을 것이다.
“……알바, 날 데려가요.”
마크는 과거의 연인에게 간청했다. 추위와 졸음에 몰려 의식이 혼몽해졌다.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알바와 함께했던 포르투갈에서의 칙칙한 회색 추억의 나날이었단 걸 진즉 알았더라면, 그는 알바를 그리 쉽게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부디 나를 당신 곁에 있게 해줘요.”
그는 눈꺼풀을 무겁게 누르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잠에 취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성급하게 두 번 두들기고 망설이다, 다시 조심스레 세 번을 두드리는 소리를 마크는 알고 있었다. 벽장에서 빠져나와 문을 열자 그가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여자가 성큼 들어서며 그를 끌어안았다.
“알바-.”
청년은 추위에 얼어붙은 연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외풍이 커튼을 흔들어 촤르륵 거리는 소리를 냈다. 마크는 매서운 바닷바람에 뒤엉켜 엉망으로 헝클진 알바의 검은 머리칼에 키스하며 엉킨 머리칼을 풀어냈다. 여인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한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는 거기서 멈출 맘이 없었다.
키 작은 여자를 안아 침대로 데려간 뒤 그는 벗겨 낸 윗옷 사이 드러난 뽀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달큰하고 그리운 향이 났다.
“알바, 알바.”
그는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어머니를 대신해 여인을 불렀다. 눈치 빠른 여자는 마크가 원하는 대로 어머니처럼 굴어주었다. 그에게 그녀의 따스한 가슴을 내놓고, 청년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두 번의 출산으로 짙게 변한 여인의 유두를 핥던 청년이 한참 뒤 얼굴을 들고 행복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내게 천국을 보여주는 여자예요.”
그는 리스본의 겨울로 돌아와 있었다.
* * *
벤은 전철 안에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꽂고 있던 이어폰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현란한 기타 소리에 정신이 번쩍 났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자신은 조금 전, 바다로 뛰어든 마크를 구하러 자신도 차가운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의식을 잃었다. 벤은 어리둥절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하철 안 사람 중 누구도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얼어붙은 날씨에 몸이 꽁꽁 얼었다가, 지하철의 난방에 몸이 녹은 사람들은 다들 졸거나, 무기력하게 쓰러져 있거나 했다.
이 풍경이 지독히도 낯익었다. 벤은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뺐다. Norman Greenbaum의 노래 ‘Spirit In The Sky’가 중간에 멈췄다. 이 노래, 이 풍경, 이 사람들……. 벤은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풍경이 마크의 기억이 아닌, 자신의 과거 기억인데 놀랐다. 눈이 많이 와 어쩔 수 없이 지하철을 탄 날, 벤은 마크와 역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리고 그는 마크의 부름을 무시한 채 계속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버렸다.
……아니, 집으로 간 기억은 없다. 그날의 기억이 기묘하게 희미했다. 벤은 눈을 껌뻑이며 문가로 가 섰다.
“어디 가?”
벤은 고개를 내렸다. 라이언이 출입문 바로 옆자리에 앉아 벤을 쳐다보고 있었다.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는 어린아이처럼 둥근 안경을 썼다. 비죽비죽한 다갈색 머리칼과 갈색 눈동자가 벤을 똑 닮았다. 벤은 왜 라이언이 이곳에 있는지 이해가 안 갔다.
“라이언, 여긴 언제부터 있었어?”
“벤, 이 산만한 녀석아. 묻는 말에나 답해. 어디 가느냐고 물었어. 네가 내려야 할 역은 여기가 아니라 다음 역이야.”
“만날 사람이 있어.”
“누구?”
“내가 사랑하는 사람.”
라이언이 눈을 가늘게 뜨고 벤을 아래위로 훑었다. 벤은 뻣뻣하게 서서 형의 시선을 견뎌냈다.
“얼마나 좋아하는 사람인데? 너, 이 열차를 놓치면 아예 집에 못 들어가고 길바닥을 헤매야 할지도 몰라.”
벤은 지독한 폭설로 엉망일 도로를 생각했다. 과거 벤은 그러한 이유 때문에 마크를 그대로 보내고 말았다. 지금은, 아니다.
“그래도 갈 거야. 그는 좋은 사람이거든.”
좋은 사람? 라이언이 피식 웃었다.
“단지 좋은 사람이라서 사랑하는 거야?”
“그건 아냐. 그런 이유는 아니고…….”
벤은 쩔쩔맸다. 라이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라이언의 눈에 벤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어린 막내와 같았다.
“그는 좋은 사람이긴 하지.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흔한가.”
“어떻게 알았어?”
“내가 모르는 게 어딨냐.”
“?”
“지난번에 네가 나한테 말했어.”
그랬던가. 벤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언이 얼마나 알고 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정말 급한 건 마크가 지금도 어디론가 가버리고 있을 거란 사실이었다. 초조함에 신발 끝으로 절로 바닥을 두들기고 만다.
팔짱을 끼고 불만스러운 얼굴로 있던 라이언이 벤의 꼬락서니에 표정을 풀고 피식거렸다. 라이언은 뒤늦게 불붙은 어리석은 동생을 말리지 않았다.
“그래 좋은 사람이니까, 기회를 한 번쯤 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선한 행동의 개수만큼 천국행 티켓 개수가 늘어난단 말도 있는 마당에, 사랑하는 사람과 작별 인사를 할 기회 정도는 빼앗지 말아야지.”
“?”
“다음 역에서 내려. 네가 너무 늦으면 데리러 갈 테니 걱정 말고.”
라이언이 빙긋 웃었다. 물가에 내놓은 막내를 걱정하는 큰 형의 얼굴이었다.
벤은 다음 역에서 내려 몇 걸음을 더 걸었다. 그는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을 밟다 어느 순간 미끄러운 욕조 위를 걷고 있었다. 정강이가 욕조 끝에 부딪혔다. 벤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
벽장 안이 아니었다. 잠시 후 그는 욕실 바닥에 수챗구멍이 없는 신기한 구조를 보고 이곳이 어딘가 알아차렸다. 벨라와 묵었던 스페인의 호텔이 이처럼 수챗구멍이 없었다. 욕실에 난 작은 창으로 바깥을 살피던 벤은 기가 막힐 정도로 좁은 도로와 낡은 벽을 타일로 장식한 작은 집들이 그 도로에 접해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짙푸른 하늘 아래 저 멀리 바다가 보였다.
리스본. 알바의 도시였다.
알바는 욕실에서 손목을 끊어 자살했다 들었다. 핏물은 욕실에서 흘러넘쳐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욕실 바닥에 흥건히 고여 있었으리라.
벤은 바로 그 욕조에 서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욕조를 벗어나 문 사이 틈새로 바깥을 엿봤다. 앳된 모습의 마크가 한 여인을 반갑게 맞이하는 게 보였다. 마크는 웃고 있었다. 입술이 추위에 갈라져 있긴 했지만 푸른 눈은 기쁨과 행복함으로 반짝이고, 볼은 흥분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마크가 저런 얼굴을 보여주는 여인이라면 알바가 분명했다. 벤은 마크가 알바의 모자를 벗기고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을 쓸어내리는 걸 바라봤다. 마크의 시선은 단 한 번도 알바에게서 벗어나지 않았다. 벤은 심장이 틀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아끼던 물건을 빼앗긴 심정이다.
알바의 뺨과 얼굴, 머리카락 한 올마다 정신없이 키스하던 마크가 그녀를 끌어안고 침실 쪽으로 들어갔다. 여인의 신음과 마크의 웃음소리가 욕실에 숨어 있는 벤에게까지 들려왔다. 마크가 알바에게 속삭였다. “당신은 내게 천국을 보여주는 여자예요.” 벤은 동의할 수 없었다.
기쁘게도,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던 연인이 무슨 이유로 싸우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우아하면서도 강단진 여자의 목소리에 벤은 귀를 기울였다.
넌 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사랑할 것처럼 보여. 그 사실이 날 슬프게 만들어.
“알바, 그렇지 않아요.”
벤은 마크의 목소리에서 알바의 예감이 옳은 것임을 느꼈다. 마크는 젖 떼인 강아지처럼 매달렸다. 정에 굶주린 청년의 불안정한 영혼이 느껴졌다.
마크가 알바에게 일방적으로 매달린 탓에 싸움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옷이 피부 위를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지고, 살이 부대꼈다. 숨이 터져 나오는 농밀한 소음이 방안에 가득 찼다. 벤은 참지 못하고 욕실에서 빠져나왔다.
기괴한 풍경이었다. 칠이 벗겨진 유화처럼 군데군데 공백이 생긴 공간 안에 다리 두 개인 침대가 중앙에 위치해 있고, 뻥 뚫린 창이 허공에 떠 있다. 탈색된 가구들이 사면을 채우고 있는 방안에서 마크는 윤곽이 분명치 않은 여자를 끌어안은 채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벤은 침대의 맞은편에 선 채 마크의 벗은 몸이 침대 위에서 움직이는 걸 멍하니 바라봤다. 그의 탄탄한 엉덩이와 허벅지가 피스톤 운동에 따라 침대 위로 올라갔다 아래로 내려왔다 했다. 선 없이, 덩어리진 윤곽만으로 이루어진 여자가 마크를 끌어안고 있었다. 마크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얼굴로 그녀의 검은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사랑을 속삭였다.
벤은 더는 참고 봐줄 수 없었다.
그는 마크를 알바에게서 떼어내 욕실로 끌고 갔다. 삽시간에 횡액을 당한 마크가 푸른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짓이에요?! 당신 누구야? 놀란 여자가 지르는 비명이 뒤따라왔지만 벤을 막을 수는 없었다. 벤은 버둥거리는 마크를 억지로 등에 둘러맨 채 욕실 안으로 들어와 거칠게 문을 닫았다.
마크, 마크!
문밖에서 알바가 놀란 목소리로 연인을 불렀다. 강도야, 도와주세요! 여자가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지만 아무 소용이 없으리란 걸 벤은 안다. 알바의 리스본은 마크의 꿈속, 떠다니는 섬이었다. 누군가 그들을 돕기 위해 찾아올 리 만무했다.
“놔! 알바!”
벌거벗은 몸으로 마크는 온 힘을 다해 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쳤다. 벤은 마크의 팔을 비틀어 쥔 뒤, 등줄기 중앙부터 허리까지 연이어 눌렀다. 헉 소리를 내며 마크가 주저앉는다. 벤은 마크의 무릎 뒤를 자신의 무릎으로 눌렀다. 고통에 마크는 몸을 비틀었다. 벤은 그의 몸을 타고 올라 두 팔을 구속하고 목덜미를 눌러 상반신을 제압했다.
“뭐, 뭐하는 거야. 누구야? 무슨 짓이야?!”
“내가 누군지 정말 몰라요? 연극하지 마요.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다 알고 있잖아.”
“넌 누구야?”
“내 이름을 그렇게 많이 불러놓고, 이제 와 모른 척하려고요? 왜요? 저 여자가 있으니까 난 이제 필요 없나요. 그럼 저 여자랑 천년만년 살 건가요. 당신이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랑?”
“무슨 미친 소리야?”
“알바, 당신의 알바는 죽었어요. 저 여자와의 추억을 곱씹으면서 영영 여기 갇혀 있는 게 그리도 좋아요?!”
벤은 고집스러운 남자를 향해 소리 질렀다. 금발의 청년이 벤의 기운에 눌려 부르르 몸을 떨었다.
마크는 자신을 덮친 미치광이 괴한에게 고래고래 악을 써서 어떻게든 그의 품을 벗어날 요량이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난 알바가 좋아. 알바는 날 사랑해.”
잔뜩 토라진 목소리가 터져 나와 마크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너는 어차피 날 사랑하지 않잖아.’ 하마터면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처음 보는 청년에게 할 뻔했다. 영문을 모를 일이다. 그는 자신을 누르고 있는 청년의 거대한 몸이 숨 막힐 정도로 두려웠다. 그러나 동시에 마크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청년의 다갈색 눈동자에 흐르는 불꽃이 낯설지 않다 여겼다.
벤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사랑이요? 당신을 사랑했던 여자의 얼굴을 당신은 기억도 못 하잖아요.”
“?”
“알바의 눈이 어떤 빛깔이었는지 기억나나요? 그녀의 입술이 장밋빛만큼 붉었는지, 앵두꽃처럼 여린 분홍빛이었는지 말할 수 있나요?”
마크는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그는 아름다운 알바의 얼굴이 어땠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자신의 기억력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 모사했던 리베라의 그림을 누군가 당장 원본 없이 그려내라고 한다면 그는 어느 정도 윤곽을 그려낼 수 있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침대 위에서 몸을 섞었던 연인의 얼굴은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올릴 수 없었다. 가슴 한구석이 두려움으로 서늘해졌다.
벤이 그럴 줄 알았다며 단호히 선언했다.
“당신이 사랑하는 건 나잖아요.”
청년의 말은 대꾸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마크는 청년이 두려웠다. 같은 남자이면서도 속옷 한 점 없이 완전히 벌거벗은 자신의 맨몸을 자연스레 하반신으로 누르고 있는 것이, 낯선 타인이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며 당장에라도 안고 싶어 안달 난 눈빛으로 쳐다보는 게 겁났다.
“……난 네가 누구인지 몰라.”
“당신이 왜 나를 몰라요!”
모르니까 모른다고 말한 것뿐인데 왜 화를 낼까. 마크는 청년의 거친 반응에 겁이 나는 한편 부아가 치밀었다. 욕실에 숨어든 강도 청년이 자신에게 사랑을 강요하고 있는 게 우스웠다. 넌 날 모르잖아. 넌 내게 네 본명을 가르쳐주지 않았잖아. 네 정체를 숨기고, 날 모른 척했잖아. 가슴 속에서 이상한 말들이 꿈틀거렸다.
“이거 놔!”
벤은 마크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힘으로 누르며 헛소리만 지껄였다.
“말해요. 저 여자가 아니라 날 좋아한다고 말해요. 오로지 나만. 나만 좋아했다고 말해요.”
미친 자식, 마크는 욕하며 청년을 밀어냈다. 그의 팔꿈치가 청년의 얼굴을 스치고, 어깨가 가슴을 밀어냈다. 벤의 상반신이 휘청 뒤로 넘어갔다 도로 돌아와 마크의 몸에 달라붙었다. 벤이 마크의 마른 가슴에 손을 붙이고 돌기를 비틀었다. 목덜미에 와 닿은 뜨거운 감촉에 기겁하며 마크는 몸을 뒤틀었다.
“뭐, 뭐하는 거야?!”
빨판처럼 달라붙은 입술을 떨어뜨리려 버둥거렸지만 벤은 완고히 마크의 몸을 감싼 채 그를 놔주지 않았다. 차오르는 분노와 두려움으로 마크는 숨이 가빠올 지경이었다. 마크의 입술을 억지로 끌어간 뒤 청년은 입안 점막이 헤질 정도로 거칠고 배려 없는 키스를 했다. 타액을 빼앗기고 대가로 고통만을 받았다. 생리적인 눈물로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당신이 나를 기억 못 할 리가 없어요.”
“난 널…….”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청년이 전희 없이 몸을 가르고 들어왔다.
마크는 비명을 질렀다. 자신의 비명이 욕실을 울렸으나 그는 의식하지 못했다. 눈앞이 새하얘졌다. 마크는 청년이 칼로 자신의 배 안을 들쑤시는 것 같다 여겼다.
욕실 바깥에서 알바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해졌다. 마크는 고통에 벗어나기 위해 펄쩍 몸을 튕겼다가 쐐기처럼 박힌 청년의 성기에 걸려 다시 한 번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타인의 몸이, 사내의 성기가 급소를 파고들어 내벽을 짓누르고 찢어발겼다. 쇼크로 하얗게 질렸던 시야가 검게 타들어가며 어지러움이 밀려들었다. 바닥을 긁고, 도망치려 몸부림치던 마크는 자신이 움직일수록 고통이 커진다는 걸 알고 몸을 굳혔다. 그러나 가만있으려 해도 충격에 몸이 절로 경련을 일으키며 움찔거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마크는 힘겹게 고개를 돌려 청년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는 겁간당하고 있었다. 청년의 하체와 자신의 하반신이 손가락 하나 파고들 수 없을 정도로 밀착되어 있는 장면에 숨이 멈췄다. 정신이 흔들리고 구역질이 왈칵 솟았다.
“아……아…….”
입을 벌리고 절망에 찬 신음을 뱉기 무섭게 청년의 기다란 손가락이 입안을 파고들어 가뜩이나 바싹 마른 입안의 타액을 긁어갔다. 젖은 손가락으로 잔뜩 긴장한 입구를 적시고 문질러, 빡빡하게 맞물린 입구를 힘겹게 열었다. 청년이 한 치 더 안으로 들어오자 골반이 억지로 열리는 것 같은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두려움에 마크는 허리를 들고 앞으로 도망쳤다. 내벽이 쓸리며 열과 고통이 작열했다. 눈앞에서 새하얀 빗금들이 쏟아졌다. 소용없는 도망이었다. 성기가 빠져나온 만큼 청년은 도로 파고들어 제자리를 잡았다. 성기에 밀린 압박감에 내장이 입 바깥으로 쏟아질 것 같다. 마크는 식은땀 범벅인 이마를 바닥에 묻고 머리를 흔들었다. 바닥에 마찰된 뺨과 입술 탓에 입가로 타액이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 성교가 어지간한 고문보다 더 잔인하고 아팠다. 미치광이 사내에게 말도 안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고 있단 자각에 서러움과 분노가 왈칵 치밀었다.
“누…….”
난 네가 누구인지도 몰라. 문장의 단 한 단어도 제대로 완성할 수 없었다.
마크는 짐승 같은 청년의 정체를 모른다.
아니다.
마음 한편에서는 청년이 왜 이토록 화를 내는지 알고 있다. 청년의 정체를 자신이 알고 있다는 어렴풋한 자각도 있다. 그러나 마음의 문을 열 수 없는 것은 그가 청년을 사랑한다고 인정한다 해서 바뀌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혼자였고, 청년은 그의 곁에 있어줄 수 없었다. 청년은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야 했다. 마크의 곁에 있어줄 수 있는 건 알바가 유일했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를 사랑해주는 그녀만 곁에 있어주면 됐다.
알바가 다시 한 번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마크는 어깨를 굳혔다. 그녀의 존재를 잠시 잊었다. 목소리를 듣고서야 마크는 욕실의 얇은 나무문 하나 사이를 두고 알바가 서 있단 걸 상기했다.
낯선 사내에게 당하고 있는 모습을 그녀가 눈치챌까 두렵다. 마크는 꺽꺽거리는 신음이 목구멍에서 새어나오려는 걸 참기 위해 주먹을 깨물었다. 한계치 이상의 통증에 수치심이 더해지자 어지러울 정도의 고통이 마음속에서 치받았다. 벤은 몸으로 자신을 기억하게 만들려고 했다. 마크는 그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그만……그만해. 더는…… 하지 마……난 널 몰라. 놔……꺼져……꺼져. 이 미친 자식…….”
마크의 욕설은 벤을 더욱 흥분시켰다. 뻑뻑한 내부를 억지로 밀고 들어와 입구를 헤어지게 만들 기세로 박아대는 청년의 거친 몸짓에 마크의 신음에 울음이 섞였다. 어린 짐승이 힘센 짐승에게 공격당해 내뱉는 신음만큼 가냘프고 처연한 자신의 신음에 스스로 더욱 비참해졌다. 청년의 무도한 행위를 거부할 방법이 없다. 속절없이 몸 안 가장 깊은 곳을 내어주는 자신이 너무도 무력하다. 마음대로 울 수조차 없는 상황이 답답했다. 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밸 만큼 주먹을 세게 쥔 채 바닥과 청년의 몸, 어디든 아랑곳없이 내리치며 몸을 비틀었다.
마크의 몸부림에 자극받은 청년이 더 깊게 들어왔다. 그는 도망치려는 마크의 손목을 그러모아 쥐었다. 몸을 끌어당기는 동시에 허리를 튕기며 벤은 안을 헤집었다. 청년의 몸이 박힐 때마다 퍽퍽 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크의 눈앞에서 불이 튀었다.
날카로운 말뚝으로 몸이 반쪽 나는 것 같다. 마크는 입을 틀어막고 비명을 참았다. 물리적인 소리는 막았으나 마음속 비명이 정신을 점령하는 건 막지 못했다.
도와줘. 알바! 도와줘……!
“그녀는 당신을 도와줄 수 없어요. 이미 죽은 지 오래인 사람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요.”
마크는 바닥에 엎드린 채로 죽어라 팔을 뻗어 문을 열려 했다. 벤은 문고리에 닿은 남자의 손가락을 뜯어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 깨물었다. 마크는 손가락이 잘리나 싶어 퍼뜩 놀라 몸을 떨었다. 단속하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 아파……. 싫……!”
“마크?”
겁에 질린 목소리가 벤을 말렸다. 거칠게 몰아붙이던 벤은 동작을 늦추고 느리게 움직였다. 마크는 고통이 줄어든 데 안도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는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손을 들어 청년을 밀쳐냈다.
벤은 물러나지 않았다. 상반신을 바짝 붙이고 상대의 입을 열었다. 혀와 이가 제멋대로 부딪혀 피 맛이 나는 키스를 나누는 와중에도 하반신을 엮는 일을 계속했다. 마크는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유령의 몸은 벤을 기억할 게 분명했다. 남자의 성기를 자극하며 벤은 자신이 안고 있는 몸이 어떻게 하면 구부러지고, 낭창하게 휘어지며, 여실한 쾌감에 무릎을 꿇었던지, 그 방법을 떠올렸다. 귀와 목덜미, 배꼽, 회음과 허벅지 사이, 마크는 그런 곳이 약했고 그런 곳을 만질 때마다 기분 좋아했다. 물론 마크가 가장 취약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벤은 유령의 몸을 잘 알았다.
어느 순간부터 벤이 뒤에서 거세게 찔러댈 때마다 마크의 성기 역시 꼿꼿해지며 갈 곳을 찾아 흔들렸다. 기겁할 일이었고 도통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마크는 허우적대며 청년의 몸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때마다 벌을 받아야 했다. 벤이 자세를 바꿨다. 청년은 힘이 빠져 저항하지 못하는 상대를 등 뒤에서 끌어안아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청년의 두 손이 허리와 복부 근육을 어루만지며 위아래로 움직였다. 한 손은 마크의 가슴에서, 다른 한 손은 두 다리가 갈라지는 지점에서 너무도 능숙하게 그의 예민한 부분을 자극했다. 청년의 단단한 허벅지 위에 앉은 채 마크는 눈앞의 거울을 응시했다. 거울엔 그 무엇도 비치지 않았다. 술에 잔뜩 취한 사람처럼 발갛게 물든 얼굴을 보지 못해 다행이라고 잠시 딴생각을 했을 때 청년이 엉덩이를 꽉 잡아 벌리며 안을 쳐올렸다. 목이 젖혀졌다. 등에 맞닿은 단단한 청년의 몸, 뜨거운 피부의 감촉이 여실했다. 보이지 않아도 마크는 감각만으로 상대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었다. 밀착된 피부에서 전해져오는 후끈거리는 열기가 거슬린다. 가실 거리는 음모와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고환이 부딪혀 피부를 간질였다. 모든 감촉이 너무도 생생했다. 성기의 기둥 부분, 솟아오른 혈관이 입구에 걸리는 감각마저 구별할 수 있다. 마크는 이대로 자신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말해요.”
청년이 고문처럼 답을 요구했다. 부드러운 목소리와 뜨거운 혀가 마크의 귀 안, 여린 살점을 희롱하고 괴롭혔다. 솜털이 곤두섰다. 마크는 고개를 저었다. 몸 안의 움직임이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주전자 안의 물이 끓듯 사정감이 몰려들었다.
벤은 마크의 성기가 젖어드는 걸 확인하고 그 끝을 콱 틀어쥐었다. 휘청거리며 휘어지는 몸을 놓치지 않고, 벤은 손톱 끝으로 요도 구멍을 문질러댔다. 살살 문지르며 안으로 파고들어 성기 끝 구멍을 조금씩 열었다. 단단해지는 고환을 아플 정도로 주무르자 마크가 허리를 비틀며 아우성쳤다. 조여든 내벽의 압박감에 마크의 안에서 벤의 성기가 단단해지며 팽창했다. 속이 더부룩해지고, 내장이 얼얼해진 기분에 마크는 크게 입을 벌리고 헐떡였다. 벤의 성기 끝이 마크의 성기 바로 뒤쪽, 직장 어딘가를 스칠 때마다 아찔한 감촉에 발끝이 제멋대로 경련하며 곱아들었다. 마크는 절로 앓는 신음을 냈다. 괴롭다. 이건 아니다. 도저히 이치에 맞지 않았다. 여자의 몸속 좁고 뜨거운 곳을 파고들어 피스톤 운동 뒤 본능에 따라 정액을 토해내는 감각이 그는 좋았다. 이건 잘못된 방식이었다. 그런데도 육신은 흥분해 절정을 향해 치달으려 몸부림친다. 그의 성기는 벤의 커다란 손안에서 꿈틀거리다 붙잡혔다. 젖어드는 끝을 벤이 재차 손톱으로 갈랐다. 입이 떡떡 벌어지고, 턱으로 침이 흘렀다. 끔찍한 감촉을 피하기 위해 마크는 허리를 들썩였다. 그의 움직임에 엉덩이골 사이를 파고든 벤의 성기가 위아래로 마찰되었다. “!” 벤의 성기 끝이 안쪽 한 부분을 제대로 스쳤다. 눈앞이 번쩍였다. 절로 흐느낌이 샐 만큼 기묘한 감촉이 내벽 안에 번졌다. 등줄기가 떨렸다. “아, 아으……!!” 허리에서 피어오른 열이 온몸을 갉아먹었다. 허벅지 사이가 떨렸다. 거기……. 거기……. 벤이 바로 옆을 박아 올렸다. 상대의 몸이 안으로 파고든 만큼 몸이 열렸다가, 빠져나간 만큼 도로 닫혔다. 구역질 나는 이물감 속에 정신 나갈 것 같은 강렬한 쾌감이 함께 섞여들었다. 마크는 도리질을 쳤다. 목이 말랐다. 가슴팍이 힘차게 들썩였다. 조금 전 감촉을 다시 얻지 못해 미칠 것 같았다. 제발, 제발…… 안 돼……! 뭐가 안 되는 건지, 무얼 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엉켰다.
“마크.”
청년이 귓가에 대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솜털이 곤두섰다. 참지 못하고 마크는 스스로 허리를 움직였다.
벤이 끙, 신음을 뱉었다. 벤은 어설프게 펄떡이는 몸을 내리누르고 골반을 고정했다. 마크의 허리를 그러잡고 벤은 마크의 골이 흔들릴 정도로 세게 성기를 박았다. 마크가 목을 젖히며 신음했다. 쾌감인지 고통인지 모를 감각이 그의 온몸을 한바탕 훑고 지나갔다. 전기가 관통하는 듯한 충격에 발끝이 비틀렸다. 진땀이 온몸을 적셨다. 신음을 막는 일은 오래전에 불가능해졌다. 알바…… 알바…… 온몸의 감각이 한계를 넘자 습관적으로 여자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잘한 짓은 아니었다. 벤이 마크의 귀에 대고 여자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으르렁댔다. “미……미친 새끼…….” 짐승 같은 청년에게 마크는 욕을 되돌려 주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이상은 하지 못했다. 청년의 목소리에 느껴지는 압도적인 욕망은 그를 겁먹게 하기 충분했다. 이어 청년이 몸 안 어떤 곳을 반복해 긁어 내리자 마크는 정말로 알바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됐다.
“!”
마크의 높고 날카로운 신음이 욕실을 울렸다. 빠르고 깊게 파고든 벤이 잠시 숨을 고르며 동작을 멈춘 틈에 마크는 바닥에 깔린 러그를 부둥켜 쥐고 필사적으로 허리를 빼려 노력했다. 마크가 움찔거리며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그의 목덜미와 가슴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뚝뚝 바닥에 떨어졌다. “하……으……하……으……” 딱 삼십 센티도 도망치지 못하고 그는 도로 벤에게 끌려왔다. “!!” 청년은 허리를 잡아당긴 반동을 이용해 튕기듯 몸을 집어넣었다. 깊은 곳을 때려 박는다. 마크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온몸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사정감에 둔부를 조이며 허리를 휘었다.
왈칵 토해내려는 성기를 청년이 콱 틀어쥐었다. 마크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부들거리는 손으로 벤의 손가락을 뜯어내려 애썼다.
“말해요.”
마크는 청년의 이름을 정말 몰랐다. 모르는 걸 어떻게 말하느냐고 항변하려 했는데 청년이 얄밉게 조금 전 그곳을 찔러 올렸다. 말 대신 신음이 터져 나왔다. 몸 안 가장 깊은 곳이 불에 달군 칼로 저며지는 것 같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지독한 감각에 허벅지 안이 절로 조여들며 떨렸다. 청년이 안을 쳐댈 때마다 박자를 맞추듯 마크의 성기가 우스꽝스럽게 움찔거렸다. 동성의 몸을 받아내다 그대로 토정 해버릴 것 같았다. 안 돼. 아……! 좋은 건지 싫은 건지 마크는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흐느끼며 그만하라고 애걸했다.
“안 들려요. 더 크게 말해 봐요.”
청년의 요구대로 마크는 소리를 높였다. 하지 말라고 소리치다 그 말이 그대로 신음으로 변했다. 정신이 잠깐 나갔다 돌아왔을 때 자신은 청년의 몸에 달라붙어 욕실이 울리도록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한번 시작하자 그다음은 둑이 터진 것처럼 막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신음이 낯 뜨거웠다. 아무리 밝히는 여자라고 해도 이토록 적나라하게 흐느껴대지는 않을 것이다. 타의에 의해 지속적으로 갱신되는 쾌감이 낯설어 거의 미칠 것 같다. 마크는 기분 좋은 고양감 끝에 토정하고, 영혼이 붕 날아가는 부유감에 몇 초간 황홀해하는 섹스로 족했다. 피부 전체에 소름이 돋고, 온몸에 진땀이 배며, 몸 안 깊숙한 곳을 억지로 자극당해 비명을 지르고 싶지 않았다. 가장 민감한 부분을 사내의 손에 저당 잡힌 채 간질 환자처럼 경련하게 되는 섹스는 고역이었지 그가 원하던 것은 아니었다. 정신이 훅 꺼지려는 순간 뱃속이 뜨거워졌다. 타인의 사정이었다. 동성의 정을 받아낸 충격에 그대로 기절할 뻔했다. 휘청거리며 까라지는 몸을 느낀 벤이 손끝을 풀었다. 열이 훅 치받았다. “!!” 마크가 토해낸 액체가 그의 금빛 음모에 달라붙었다. 마크는 사출의 아찔함과 동성의 정액이 직장을 채우는 뜨거운 감촉을 함께 느끼며 사정했다. 아직도 조금씩 정액이 흘러나오는데, 벤이 도로 움직였다. 사정을 위해 꽉꽉 조여드는 근육을 억지로 벌리며 벤이 잔뜩 예민해진 안을 헤집었다. 반 시체상태에서 사정 후 탈력감을 맛보고 있던 마크는 놀라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벤을 밀어냈다. 벤은 고집스러웠다. 지치지도 않는지, 도로 단단해진 하반신을 부어오른 안에 밀어 넣어 잔뜩 예민해진 곳을 파고들었다. 한계치 이상의 쾌감은 고통보다 더 질이 나빴다. 생살이 드러난 신경을 자극하는 날카로운 감각에 마크의 온몸이 경련했다.
“……제발……하지…….”
마크는 울먹였다. 다시금 몸이 흔들렸다.
눈 끝이 번쩍거리는 날카로운 감각에 몇십여 분을 지배당하는 건 감당하기 지나친 일이었다. 죽을 것 같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마크는 손끝에 걸리는 건 그것이 무엇이든 개의치 않고 마구 긁어댔다. 바닥을 긁던 손톱 하나가 부러졌다. 청년은 마크의 몸을 돌리고 정면으로 그를 바라보게 했다. 청년의 등에 팔이 둘러져 더는 바닥을 긁을 수 없었다. 욕실의 조명 아래 흥분한 맨몸을 그대로 드러내게 된 충격으로 마크는 얼굴을 가렸다.
벤은 마크의 성기가 잔뜩 흥분해 복부에 닿아 흔들리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침을 삼켰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두 손을 뜯어내 열에 달뜬 붉은 얼굴과 욕망으로 흐려진 푸른 눈을 들여다보았다. 예뻤다. 마크는 모를 테지만, 절정에 달한 남자의 흥분한 얼굴은 벤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청년은 마크의 두 다리를 어깨에 걸치고, 좀 더 깊게 몸 안으로 들어갔다. 욕조 끝에 부딪히는 머리를 한 손으로 받치고 허리가 반쯤 접히게 움직일 때마다 마크의 허리가 허공에 들렸다 떨어졌다 하며 청년의 움직임을 받아냈다.
알바……. 반쯤 정신 나간 채로 마크가 흐느꼈다. 벤은 그 여자에게만큼은 지고 싶지 않았다. “혀 내밀어요.” 짐짓 화난 목소리로 명령해 마크의 혀를 바깥으로 끌어냈다. 혀가 움찔거리며 도망치려는 걸 벤은 자신의 입안으로 가져가 실컷 빨아들였다. 혀를 마크의 입으로 도로 돌려보내 준 뒤 그의 입 전체를 훑고 미끄덩거리는 살점을 부드럽게 감아올리고 핥았다. 벤의 붉은 혀가 성기를 닮은 동작으로 움직이는 동안 마크는 와들와들 떨며 상대의 절정을 받아냈다. 벤은 마크의 몸 안, 좁은 내부가 자신의 체액으로 가득 차 뜨겁게 달아오르는 감촉을 음미했다. 마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푸른 눈동자가 충격과 고통으로 멍해졌다. 벤은 상대의 모습에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마크가 반 쇼크 상태에서 껌뻑껌뻑 눈을 느리게 떴다 감았다 하는 모습이 벤의 음심을 달궜다.
길었던 토정이 끝나는 순간 벤은 마크의 몸을 끌어안고 숨을 가다듬었다. 마크는 목덜미에 떨어지는 뜨거운 숨에 정신을 차리고 바동거렸다. 벤이 순순히 그의 몸을 놔주었다. 청년의 몸 아래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 것까진 좋았지만, 마크는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벤이 이미 문 앞을 막고 있었다. 마크는 허둥지둥거리다 겨우 욕조 안으로 도망쳤다. 벤이 기다란 다리로 성큼 욕조 안에 들어왔다.
“이 욕조 안에서 알바는 당신을 기다렸어요.”
“네가 알바에 대해 어떻게 알지?”
“당신은 알바의 시신을 두고 도망쳤고, 그 사실이 일평생 괴로웠다고 말했죠.”
마크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당신은 당신이 알바처럼 손목을 끊고 나를 이곳으로 불러내면 어떨까 상상했었죠. 내가 당신을 만나러 오지 않고, 당신의 시신이 낯선 타인에게 발견될까 두려워했어요. 마크, 당신은 내가 그토록 잔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정말로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당신은 나를 알아요.”
벤의 단언에 눌려 마크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됐다고 말한다면, 귀를 막고 끝까지 들어주지 않을 건가요.”
“…….”
“말해요. 당신은 내 이름을 알아요.”
벤이 마크의 뺨을 쥔 채 마크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다갈색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송곳처럼 마크의 몸을 꿰뚫어 그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마크는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속, 기울어진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나가줘…… 당신은…… 미쳤어. 난 네가 누구인지 몰라…….”
“당신이 내 이름을 부를 때까지 여기서 안 나가요. 당신이 날 기억해낼 때까지 당신을 거듭해 안을 거예요.”
“-!”
마크의 푸른 눈동자가 세차게 일렁였다. 얼굴엔 핏기가 가셨다. 벤은 욕조 안에 바싹 달라붙은 남자에게 닿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키스를 위해 얼굴을 내밀었다가 벤은 마크에게 뺨을 얻어맞았다. 두려움에 반사적으로 손을 내민 마크가 오히려 맞은 벤보다 더 놀랐다.
청년에게 얻어맞을 거라 생각하고 마크는 몸을 굳혔다. 벤의 몸은 마크보다 훨씬 크고 늠름했다. 가뜩이나 거대한 몸이 위축된 마크에게는 더욱 커 보였다. 벤이 고장 난 건전지 인형처럼 덜덜 소리를 내며 떠는 마크의 팔목을 쥐자 그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벤은 눈썹을 찌푸렸다.
자의든 고의든, 마크는 벤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 남자를 다짜고짜 안고 울 때까지 괴롭혔다. 벤이 저열한 질투를 품고 저지른 일의 결과가 눈앞에 있었다. 멀쩡한 성인 남자가 욕조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어린아이처럼 무릎을 안고 있었다. 겁에 질린 채 그를 올려다보는 푸른 눈이 벤의 양심을 쿡쿡 찔렀다. 마크에게 ‘어떻게 날 놔두고 딴 여자랑 자요?’ 그딴 낯 뜨거운 말을 안 뱉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벤은 생각했다.
“겁먹게 해서 미안해요. 난 평소대로 당신이 날 기억해낼 줄 알았어요.”
“당신…… 사람을 착각한 것 같은데……. 아무리 그렇다고 이런 짓을 해?”
떨리는 목소리로 마크는 벤에게 성을 냈다.
“착각하지 않았어요. 내가 설마 당신을 착각하겠어요.”
“무슨 뜻이야?”
“내 생애 이토록 강렬히 욕망해본 상대는 당신이 유일해요.”
“?”
벤은 부끄러워져 얼굴을 붉혔다. 마크가 무슨 뜻이냐고 재차 물을까 겁났다. 그전에 먼저 움직였다.
벤은 잔뜩 긴장한 채로 덜덜 떨기만 하는 마크의 마른 몸을 어루만졌다. 바윗덩어리처럼 딱딱해진 몸을 풀어주어야 고통이 덜할 것 같았다. 벤은 뜨거운 물을 틀었다. 마크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올리는 걸 가볍게 막고 뻣뻣하게 굳은 등줄기를 문질러 줬다. 처음 닿을 때는 겁에 질려 펄쩍 뛰었던 몸이 좀 더 부드러운 손길로 승모근과 허리, 긴장한 옆구리를 문질러 주자 어느덧 고요해졌다.
벤은 타액으로 젖은 허벅지가 눈에 거슬렸다. 씻어주려 했던 것뿐인데, 마크는 성적인 기운을 품고 다가오는 벤을 잔뜩 긴장해 바라봤다. 남자의 호흡이 빨라지고 근육에 도로 힘이 들어가는 게 벤의 눈에도 확연히 보였다. 마크는 몸을 움츠리고 코 바로 아래까지 온몸을 물속으로 집어넣었다. 수위가 높아진 더운물이 마크의 벗은 몸을 가려주었다. 벤은 남자의 손목을 아플 정도로 꽉 틀어쥐고 마크가 물 안으로 완전히 도망치지 못하게 막았다.
“정말로 내가 기억나지 않아요? 나는 당신이 기억나는데. 당신이 그리는 그림 속 노인처럼 당신이 늙었을 때 나는 당신을 만났어요.”
“그림 속 노인?”
“쥬세페 드 리베라. 리스본에서 당신은 성 안토니우스의 적나라한 늙은 몸을 모작했죠.”
“……그걸 어떻게 알지?”
“당신이 말해줘서요. 당신이 알바를 사랑해 그녀와 함께 죽으려 맘먹었던 사실도 알고, 당신이 그 시절 얼마나 고독했는가도 알아요.”
벤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 스무 살에 킹 목사가 살해당했단 것도 알죠. 난 이제 당신이 나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도 알아요. 1월 31일이 당신 생일이란 사실도, 당신이 어떤 맘으로 나에게 전화를 걸었는지도 충분히 알아요.”
어느 순간부터 알바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크를 애타게 불러대던 여인의 흔적은 사라지고 없었다. 마크의 신경은 온전히 벤에게로만 향해 있었다. 알바와 자신만 아는 밀회의 장소에 나타난 낯선 청년, 다짜고짜 자신의 몸을 누르고 해괴한 짓을 저지른 괴한. 그가 어떻게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지 두려워졌다.
“넌 누구야?”
벤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누군지는 당신이 말해 봐요. 힌트를 주자면 당신에겐 벤이란 이름이 더 익숙할 거예요.”
벤, 마크는 머릿속이 희게 변하는 걸 느꼈다. 심장이 덜컹거렸다. 마크는 입을 달싹여 ‘벤’이란 이름을 불러보았다. 목구멍과 입안을 통과해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소리와 그에 따른 근육의 움직임이 낯설었다. 그는 ‘벤’보다는 그와 비슷한 다른 이름이 더 익숙했다.
“틀렸어.”
마크의 입에서 툭, 부정의 말이 튀어나왔다.
“뭐가 틀렸는…… 마크?”
마크는 자신의 눈가가 젖어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 이름은 익숙하지 않아.”
“그럴 리 없어요. 당신은 벤을, 나를 잘 알아요.”
“난 그를 알지만…….”
마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가슴 한가운데가 이상스레 답답했다. 오랫동안 내리눌러 다 진정된 줄 알았던 마음이 청년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술렁거렸다. 그는 자신이 누군가를 애타게 원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사람과 제대로 된 관계 맺음 한 번 못 했고, 그저 멍청히 끙끙댔으며, 아팠다고 하소연 한 번 못 했다는 사실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는 청년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벤이라고 부르지 않았어.”
“마크?”
벤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령과 만난 뒤 그가 벤의 이름을 얼마나 많이 불러댔는가. 침대 위에서 발갛게 변한 입술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대던 일은 벌써 잊었을까.
“난 그를…… 아니, 널 벤이라고 부르지 않았어.”
청년이 바로 벤이었다. 마크는 자신이 청년을 이미 알고 있단 것을, 청년의 말처럼 자신이 늙었으며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천천히 기억해냈다.
커디스가 죽던 날 자신도 물에 빠졌다. 맨발로 세상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여겼던 건 실은 환상이었다. 벤을 만나러 전철역까지 갔던 일도, 관사의 벽장에서 잠들었던 것도, 젊은 시절로 돌아와 알바와 사랑을 나눈 것도 모두 가짜였다. 지금 눈앞엔 벤이 있었다. 마크는 망자였다. 차가운 겨울 바다에 수장되었던 사람 앞에 앞날이 창창한 벤이 나타날 가능성은 전무 했다. 넌 가짜야. 마크는 벽장 속에서 했던 말을 반복해 중얼거렸다.
“그랬죠. 당신은 나를 벤자민이라고 불렀죠.”
“왜냐면-.”
마크는 청년의 말을 잘랐다. 환상이라 해도 벤은 벤이었고, 이곳은 마크의 꿈속이었다. 벤에게 하고 팠던 말을 마음대로 한다고 해서 비난할 사람은 없었다. 속내를 풀어내기 적절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벤에게 화를 낼 수도 있었다. 이런 기회가 또 올까 싶어 마크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넌 나를 마크라고 부르지 않았으니까. 넌 예의가 바르거든. 이름을 불러도 된다고 해도 끝내 나를 레이트너라고 불렀으니까. 그래서 나도 너를 벤자민이라고, 기옌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어.”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날 그냥 벤이라고 편하게 부르지 그랬어요.”
“넌 나를 편하게 여기지 않았어. 넌 내게 격식을 차리는데, 나 혼자 너를 벤으로 불렀다면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겼을 거야. 벨라처럼 금세 내 마음을 눈치챘을 테지.”
벤은 이마를 짚었다. 마크는 유들유들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속은 꽤 고지식한 사내였다. 신학 대학을 다녔고 케네디 대통령 때 히피로서 청춘 시절을 보냈으며, 동성애는 질병이라는 학설을 진짜로 믿었다. 쾌활한 미소로 자신의 겉모습을 잘 포장하는 반면 한번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끝끝내 예의를 차리며 레이트너라고 우대했던 벤의 태도에 도리어 주눅 들었을 남자의 모습이 눈앞에 보일 듯 훤했다.
“그래서 그 별것 아닌 게 당신을 아프게 했나요. 내가 당신 이름을 불러주지 않은 게? 당신은 정말 바보 같이 굴었어요.”
“노인이 되면 어린아이가 된다고 하잖나.”
마크는 나이가 드는 것이 지혜를 키우고 마음을 강하게 만든다는 걸 믿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큰일은 대수롭지 않아 하면서도, 오히려 작은 것 하나에 연연하게 된다. 자신의 절반밖에 살지 않은 청년에게,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이에게 상처받았다.
학년이 올라가며 벤자민은 점점 바빠졌다. 아는 사람도, 할 일도 많아진 청년과는 식사 한 끼를 함께 하기가 힘들었다. 마크는 오랜만에 오페라 티켓을 들고 벤자민을 찾아갔다. 옆에서 보기에도 벤의 삶은 물기 하나 없이 퍼석했다. 청년에게 잠깐의 여유라도 주고 싶어 청해보았다. 벤자민은 난처한 얼굴로 거절했다. 청년은 미안해하며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과제가 너무 많았고,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으며, 오랜만에 푹 쉬고 싶어 했다. 마크는 군말 없이 물러났다.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벤자민은 안도하며 웃었다. 벤자민이 보인 그 마지막 표정에 마크는 어안이 벙벙했다. 집에 돌아와 한참을 생각한 끝에 마크는 깨달았다. 그와의 만남이 벤자민에게는 그저 그런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한쪽은 구걸하고, 한쪽은 마지못해 받아주는 관계는 공평한 것이 아니었다. 타인의 자연스러운 거리 두기가 그토록 맘 아픈 일인 줄 미처 몰랐다.
자신이 젊은 시절 그와 같은 일을 겪었다면 마크는 벤자민에 대한 마음을 접어 훌훌 털어냈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죽음 뒤에도 그 감정에 발목 잡혀 있는 것이 답답했다. 미처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채 생을 접었기 때문이라고 마크는 생각했다.
“나도 네 이름을 부르고 싶어. 네 형이나 친구들, 네 연인은 이름을 마음대로 부르는데 나만 혼자 기옌이라고 부르기는 싫어. 벤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래서 나를-.”
이번에도 마크는 벤의 말을 잘랐다. 그는 환상보다 먼저 고백의 기회를 갖고 싶었다.
“벤자민이라고 불렀지.”
마크는 청년을 완전히 기억해 내고 꿈에서 깨어났다. 욕실의 사면이 느리게 무너졌다.
벤과 유령은 약간의 시간 차이를 두고 벽장에서 빠져나왔다. 벤은 먼저 빠져나온 마크가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려다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창백한 뺨이 오렌지빛으로 물들었다. 해가 뜨고 있었다. 미간을 좁힌 마크의 얼굴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1월의 마지막 날, 그를 보는 건 벤의 생애 처음 있는 일이다.
“마크, 생일 축하해요.”
벤의 목소리에 마크가 퍼뜩 놀라 고개를 돌렸다.
“벤자민?”
“벤이요.”
마크는 벽장 바깥에 나왔는데도 환상이 사라지지 않는 데 당혹했다. 벤이 다가가자 쭈뼛거리며 물러섰다. 벤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지자 마크는 그가 베네딕트이고, 벤이며, 벤자민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령은 어두운 표정을 지우고 짐짓 명랑한 표정을 지었다. 허상이든 진짜이든 벤은 벤이었다. 유령은 그와 담소할 수 있는 걸로 족했다.
“형한테 간 거 아니었나?”
“가던 중 돌아왔어요.”
유령이 믿기지 않는단 얼굴로 벤을 응시했다.
“왜?”
“당신한테 선물이 있어서요.”
“형한테 줄 선물을 포장만 바꿔서 날 주는 건 아니지?”
“그보다 특별한 거예요.”
마크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천국행 티켓이라도 구해왔나?”
“비슷해요. 그런데 그건 당신이 이곳을 떠나야 받을 수 있어요. 나와 바깥으로 나가요.”
“알바를 처치하고 나간다는 말이면 거절할게.”
“알바는 당신을 버리고 떠났어요. 그녀는 존재하지 않아요.”
“나도 죽었어. 알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 역시 존재하지 않겠지.”
“설마요. 이렇게 내 눈앞에서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왔다 갔다 하는데.”
유령이 기가 차 헛웃음을 지었다. 벤의 고백을 평소처럼 농담으로 넘겨 버리려 했다. 벤은 유령에게 다가갔다.
“당신을 막은 건 알바가 아니에요. 그녀를 알바라고 믿는 당신 자신이 문제죠. 당신은 자신을 고야라고 여기나요? 젊은 여인을 짝사랑한 늙은 궁정 화가처럼 자신이 비참하다 여기나요. 그래서 당신 앞에 알바가 나타난 거예요. 실은 그녀는 존재하지도 않는데.”
벤은 마크의 푸른 눈을 들여다보았다. 가질 수 없는 여인을 그림으로나마 소유하고자, 그림에 몰래 자신의 이름을 그려 넣었다 물감으로 덮어버린 늙은 화가의 눈빛이 거기 있었다.
“오로지 알바뿐이라고 말했던 당신의 말, 거짓말이란 거 알아요. 당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은 누구든 좋았겠죠. 그러나 나는 예외예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나에 대한 마음을 당신은 포기하지 않았죠. 나만 사랑했죠. 오로지 나만, 오로지 나만 당신의 진심이라고 말해줄 수 없나요.”
마크가 자신의 몸을 만지는 청년의 손을 거칠게 밀쳐냈다.
“넌 오만해.”
“말해줘요. 당신이 사랑한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고. 말해 봐요. 당신의 몸을 아는 게 나뿐이라고.”
“벤, 말이 되는 소릴 해. 난 내 동정을 가져간 여자가 누군지 기억도 안 나.”
벤이 짐짓 삐진 얼굴을 했다.
“당신의 뒤쪽은 내가 처음 아니었어요?”
“날 뭐로 보는 거야. 난 말기 암 환자였다고. 열 치료기를 직장 안에 넣은 횟수가 셀 수도 없어.”
“맙소사, 나랑 열 치료기를 동급으로 치는 거예요?”
마크가 청년의 넉살을 못 견디고 웃는다. 벤은 마크의 웃는 얼굴을 자신이 정말 좋아한다는 걸 재차 깨달았다. 그는 유령의 볼과 턱선을 쓰다듬었다. 특별한 감정이 느껴지는 손길에 마크가 당황한 얼굴로 벤을 응시했다. 커다란 파란 눈에 자신의 얼굴이 비친다. 벤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당신은 정말 웃긴 남자예요. 무드도 없고 솔직하지도 못하고 산 사람도 아니죠. 그래도 당신이 좋다면, 믿어줄래요.”
마크가 잠시 침묵했다. 길게 한숨을 내쉰 뒤 유령은 투덜거렸다.
“넌 어떨 건데. 묻지만 말고 네가 먼저 말해줄 생각은 없는 거야? 네가 사랑했던 사람이 내가 유일하다고, 네 몸을 아는 게 나뿐이라고, 나만 바라보고 있다고 네가 먼저 말해주진 않을 거야?”
마크는 벤의 이기적인 요구를 고스란히 청년에게 돌렸다. 벤은 한 방 맞은 얼굴로 바라보다 이내 환하게 웃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는 당신이 유일해요.”
벤이 성큼 다가와 마크를 끌어안았다. 강한 포옹에 마크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너, 정말 정신 나갔다. 벽장이 네 정신도 빼놓을 줄은 몰랐네.”
떨떠름하게 웃으며 몸을 빼려는 유령을 벤은 오래도록 끌어안아 쓰다듬었다.
벤은 마크를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의 정체를 숨겼던 일에 대해 사과했다. 집착만 남고, 이지는 잃은 유령이 달려들까 봐 본인임을 숨겼단 말에 유령은 벤에 대한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당신을 일부러 상처 주려던 게 아니었어요.”
마크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괜찮은 얼굴이 아니었다. 벤은 마크의 턱을 슬쩍 잡고 그의 시선을 자신 쪽으로 끌어왔다.
“당신이 좋아요.”
여간해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유령에게 벤은 수차례 반복해 자신의 감정을 각인시켰다. 끈질김의 승리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유령의 얼굴에 표정이랄 것이 하나 둘 등장했다. 현실을 부정하던 마크가 어느덧 벤을 의식하고 안절부절못했다. 불안하게 눈알만 굴리더니, 벤이 슬쩍 물러나자 연신 벤의 얼굴을 쳐다봤다 말았다 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쩔쩔매는 유령의 태도가 귀여웠다. 마크와 눈길이 마주칠 때마다 벤은 한층 행복해졌다.
벤은 마크가 필요했다. 마크가 이곳에서 풀려나 자유로워지길 원했다. 또한 마크가 이곳이 아닌 벤의 곁에 있길 바랐다. 유령을 곁에 둘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심하다 벤은 자신이 잊고 있었던 서류를 기억해냈다. 벤은 한 장의 사진이 이 모든 고민을 해결해주길 기대했다.
“그녀는 알바가 아니에요.”
벤은 병원에서 가져온 사진을 내밀었다.
“커디스잖아. 그녀가 왜?”
“가보면 알아요.”
마크와 그녀 사이엔 풀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벤은 이번엔 알바가 그들을 공격하지 않을 거라 장담했다.
벤은 유령을 조수석에 태웠다. 마크는 밖으로 나가는 계획에 여전히 회의적이었지만 벤의 고집을 이기진 못했다.
“내 가족들이 애타게 날 기다릴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여기 남겠다면 나도 여기 남을 수밖에 없어요. 어쩔래요?”
벤의 말에 마크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마크가 긴장한 얼굴로 안전벨트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알바는 분명 날 공격할걸. 사랑한다고 말할 때는 언제고, 죽음 뒤에 몰골이 무서워졌다고 도망치는 걸 봤으니 열이 좀 받았을 거야.”
“나도 당신을 사랑하긴 하지만 당신이 머리는 산발에, 송곳니는 코끼리 상아만큼 긴 채로 시궁창 물을 뚝뚝 흘리며 달려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갈 거예요.”
“냉정하긴.”
마크가 입술을 이죽거렸다.
“알바는 원래 그런 모습이 아니에요. 당신 상상력은 참 기발하다니까요. 어릴 적 봤던 공포 영화는 잊고 그녀 본래 모습을 봐요.”
“자네야말로 공상에 빠져서 날 사지로 데려가는 건 아니지? 무슨 배짱으로 그녀가 알바가 아니라고 자신하는지 모르겠군.”
마크가 연신 투덜거렸다. 잘난 입은 매끄럽게 잘 움직였지만, 벨트를 쥔 손은 긴장으로 마디가 희게 변해 있었다.